에베소서(04-01)
성령 안에서 하나 됨을 지키라
에베소서 4장 1-6절
미국 줄리아드 음악대학은 음악으로 유명한 대학교입니다. 유학생 중에 지도하기 가장 힘든 학생들은 한국에서 온 학생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개인적인 능력은 뛰어나만, 문제는 협연(協演)하면 제대로 하질 못한다고 합니다. 한국인 유학생들은 자기 소리만 내려고 해서 협연이 안되는 것입니다. 오케스트라는 함께하는 ‘협주(協奏)’입니다. 협주에서 자신의 소리만 내려고 하면, 전체적인 하모니(調和)를 이룰 수 없습니다. 자신의 소리를 줄이고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어야 아름다운 오케스트라 연주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1-3장에서 기독교의 교리를 소개했습니다. 이제부터 마지막까지 대부분 성도로서 그 교리를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지 설명합니다. 복음의 합당한 태도는 공동체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서로 용납하고 하나로 연합하면서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도록 다양하게 세우십니다. 바울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권고하며,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하나인 것처럼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권면합니다.
권고하는 바울(1a)
대부분 자기 허물을 감추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허물을 들어내는 사람에게 화를 내고 적대감을 품기도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허물을 지적해 준 사람에게 감사합니다. 지적해 줌으로써 허물을 볼 수 있고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수치와 같은 감옥생활에서도 담대하게 진리를 권고합니다.
1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1a)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과 에베소 성도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신분에 관해 설명을 마치고, 이제부터 서신의 후반부가 시작되는 본 단락에서 실천적인 권면으로 옮겨 갑니다.
먼저 본문에서 ‘그러므로’라고 시작하는데, 이는 사도 바울이 서신의 전반부에서 서술한 내용을 근거로 에베소 성도들에게 이제 실천적인 권면을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신분인 성도들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권면합니다.
또 한 가지, 바울은 사도로서 선지자적 권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당하게 자신을 다시 ‘주 안에서 갇힌 자’라고 소개합니다.
반복해서 자신이 감옥에 갇힌 이유를 소개한 것은, 자신의 어떤 죄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투옥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교회는 외형적으로 볼 때, 사람들이 모여서 세워진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죽으심으로 죽을 수밖에 없던 죄인들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 자녀들을 통해 영화로운 교회로 세워졌습니다. 그만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목숨과 바꾼 만큼 매우 귀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 또한 그 귀한 교회를 지키기 위해 투옥된 것입니다. 투옥된 사실에 대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영광스런 교회가 나누어진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교회를 위해 예수님처럼 자신이 희생한다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투옥된 사실을 당당하게 말합니다.
지상에 세워진 교회들은 아무리 작은 교회라도 수많은 희생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하나하나가 매우 가치가 있습니다. 이 교회를 위해 고난은, 복음으로 인한 고난은 충분히 받을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사도행전 5:41). 바울은 주 안에 갇혀 있으며 부르심의 목적 아래 갇혀 있습니다. 바울이 투옥된 삶을 불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명, 복음과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된, 가장 행복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환경에서도 사역에만 집중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투옥되는 희생에도 굴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세우는 것에만 집중하였습니다. 감옥에서라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은 매우 값진 일입니다.
성도로 부르신 목적(1b-3)
성도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아직 미완성품입니다. 점점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화 되는 과정에 있습니다. 성화 되어 가는 과정에 필요한 것은 인내(忍耐)입니다. 자신에게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향해서도 인내가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사람은 어떤 고난에도 소망을 잃지 않고 인내하기 때문입니다.
1…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1-3)
하나님께서는 모든 교회를 향해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을 통해 그 소원을 에베소서 교회에도 간곡하게 권고합니다. 그 소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부르셨습니다. 특히 이방인이던 에베소 성도들은 은혜로 구원받아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⑴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함(1)
첫째 권면은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1)라고 권합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에게 대강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윤리적인 기준으로 선포합니다.
바울이 말한 ‘부르심(καλεο)’은 ‘교회’라는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의 어원입니다. 모든 성도는 하나님에 의해서 세상에서 ‘불러내진 사람’, ‘부름 받은 사람’, ‘호출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도를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시는 분’, ‘호출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셨고,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죄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 거룩하게 만드신 후에 하나님의 자녀로 세우셨습니다. 우리가 먼저 시작해서 하나님을 부른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께서 먼저 부르셨습니다. 바울은 먼저 ‘세상 창조 전에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해 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에베소서 1:4)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불러내 새 생명을 주셨고 자신의 자녀로 삼으셨고 거룩한 일군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 은혜를 생각하면서 합당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합당하게 행하기를’ 간청합니다. 이곳에서 ‘합당하게’란 ‘같은 중량’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구원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은혜만큼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람들의 행위는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절대로 예전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어두움의 권세 아래 있는 삶을 버리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의 경륜’을 설명한 후, 곧 바로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⑵ 합당한 방법(2)
성도들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세도 역시 중요합니다. 이제 바울은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교회 공동체가 갖추어야할 다섯 가지 덕목의 디딤돌을 놓습니다. 그는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2)라고 하셨습니다. 이 요소들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평안에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3)이라는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이 요소들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① 겸손(謙遜) : 헬라 문화권에서 겸손은 하나의 악덕으로서 노예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자만과 교만의 반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곧 겸손의 모델이십니다. 빌립보서 2장 3절에서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소개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겸손이란 그리스도를 첫 자리에 모시고, 다른 사람들을 두 번째 자리에 놓고, 자신은 맨 뒷자리로 물러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육신 하셨고, 지상 사역에 정확히 낮은 태도가 수반되었습니다(빌립보서 2:5-8).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마태복음 11:29)하며,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려’ 오셨습니다(마가복음 10:45).
② 온유(溫柔) : 복종된 권력, 현명한 주인의 통제 아래 권력입니다. 어떤 힘이 올바른 일을 위해서 길들여지고 사용될 때 온유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복종함으로 비로소 온유함이라는 인격적인 성도의 자질을 형성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온유한 사람들은 남에게 가혹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고 싸우지 않으며, 매사를 승자독식의 경쟁의식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반대로 그들은 다른 사람의 필요와 감정을 배려합니다. 온유가 있어야 날카로운 성격들이 부드러워져 가까이 오는 사람들이 상처를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한 표현에서 보듯 겸손과 온유는 일심동체입니다. 겸손이 마음의 태도라면 온유는 겸손한 자세가 외모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교회 안에 모든 사람들도 겸손과 온유로 힘의 균형을 이룬다면 사실상 모든 충돌이 사라질 것입니다.
③ 오래참음(忍耐) : 죄인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로마서 2:4,9:22; 베드로전서 3:20; 베드로후서 3:15). 고난 중에서도 끝까지 참기를 포기하지 않는 정신입니다(야고보서 5:10). 어떤 잘못된 것에 앙갚음하지 않는 자제력 입니다. 복수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복수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나온 덕목 중에서 인내가 가장 어렵습니다. 그래서 가장 힘든 방식으로 습득되기 때문입니다. ‘인내’란 겸손과 온유를 구사하되 실망과 좌절과 노골적 반감을 주는 사람들 속에서 참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해 일체의 오래 참음의 모범을 보이셨던 것처럼, 우리도 오래 참음의 덕을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인내가 있어야만 모두가 실수하면서 서로 다른 모습을 용납하고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추슬러 끊임없는 영적 성장의 멀고 험한 과정에 임할 수 있습니다.
④ 용납(容納) : 겸손과 온유가 짝을 이루듯이 인내와 용납도 서로 짝을 이룹니다. 인내는 모든 상황을 받아드릴 수 있게 하지만, 용납은 상대방은 자기에게 맞춰 바꾸려는 의도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인내하는 사람은 용서와 이해와 동정을 베풉니다. 모든 사람들을 은혜로 대하며, 그들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되 다른 방식과 다른 속도로 자라가게 이해줍니다. 물론 바울의 의도는 죄, 악, 부도덕 그리고 악행을 용납하라는 게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풀라는 것이고, 그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우리의 생각과 다르더라도 그것을 허용하라는 것입니다.
⑤ 사랑 : 연합으로 가는 결정적인 단계는 ‘사랑’입니다. 즉, ‘아가페’,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는 ‘무조건적 사랑’입니다. 앞에 네 가지 덕목은 진정한 사랑의 여러 가지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 가운데서’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합니다.
이처럼 다섯 가지 덕목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함께 하나가 되도록 인도합니다. 성도들은 스스로 하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한 새 사람’으로 창조하신 것을 간직하고 지켜야 합니다(에베소서 2:15-16). 그들은 ‘평안’으로 이루어지는 하나 됨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겸손한 자세로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낫게 섬겨야 합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하나를 이루는 방법에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자신의 주장을 할 수 있지만, 너무 강하게 주장하면 조화가 깨진다는 말입니다. 전체의 화합을 위해서 서로 겸손하게 섬겨애 합니다. 반대로 너무 무관심하면 힘을 잃어버립니다.
⑶ 힘써 지켜야할 하나 됨(3)
운동선수가 트랙에서 열심히 달리다보면 목적지가 나오듯이, 지속적으로 다섯 가지 덕목을 실천하게 되면, 최종적인 목적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3)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다섯 가지 덕목으로 부르심의 목적과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면, 성령으로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공동체를 위해 하나가 된 것을 힘써야 합니다. 이곳에서 성 프란체스코의 ‘평화의 기도’라는 시가 생각이 납니다.
평화의 기도
오 주여!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여 주십시요.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십시요.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하나 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에게 하나되게 하신 것을 최선을 다해 하나를 지켜간 것입니다. ‘성도’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이미 하나 되게 하신 만큼 능력도 주셨습니다.
서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이 하나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공동체가 하나 됨을 유지하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도들이 자기의 주장을 하는 것은 모두 다 맞고 서로 틀린 것이 하나도 없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서로의 주장에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겸손과 오래 참음으로 서로 용납’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은 ‘평안’으로 이루어지는 ‘매는 줄을 통해’서 하나 됨을 지켜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서로 다른 점이 있더라도 서로를 사랑함으로 깊이 참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평안입니다.
하나 되어 가야할 이유(4-6)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입니다. 몸은 한 부분이 부족하면 전체에 불편한 영향을 줍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 부족한 한 사람이 있으면 모두가 한 마음으로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부족한 형제라도 자기처럼 사랑해서 세워주어야 합니다. 절대로 분열은 하나님의 영이 아닙니다.
4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주도 한 분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6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4-6)
바울은 ‘교회의 하나 됨’은 성도들의 믿음의 행동에서 가장 근본입니다. 교회의 본질을 설명하면서 하나를 의미하는 ‘한’이란 단어를 일곱 가지 반복해서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성도는 한 소망, 즉 장차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소망을 품고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를 유지해야할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은 한 주를 섬기며 하나의 믿음으로 세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바울은 삼위일체의 조화로운 하나 됨을 세 인격을 중심으로 세 가지 요소로 소개하며 권고합니다.
⑴ 성령의 하나(4)
바울은 먼저 성령 하나님을 통해 하나를 지켜갈 것을 설명입니다. 삼위일체 순서로 하면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한데, 이곳에서는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본문에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4)고 하십니다. ‘한 몸’은 보편적인 교회, 곧 모든 믿는 자들을 가리킵니다(1:23;2:16;3:6). 그리고 ‘한 성령’이란 그 교회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입니다(에베소서 2;22).
무엇보다도 성도들은 성령이 한 분인 것처럼 한 소망 안에서 구원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과 함께할 그들의 미래에 대한 공통된 소망(참고 베드로전서 1:3; 3:15)과, 그들이 구원으로 부름을 받은 그때에 시작된 확신(에베소서 1:4,18; 2:7; 4:1)을 가졌음을 나타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가 되어야 할 이유는 ‘한 몸’(4)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몸을 헤치는 일에 각별히 주의하고 보호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공동체를 위한 믿음으로 살아갈 지침입니다.
⑵ 주(성자)도 하나(5)
다음으로 바울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주도 한 분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라고 소개합니다. ‘한 주’는 그리스도, 즉 교회의 머리를 말합니다(에베소서 1:22-23; 골로새서 1:18). 먼저 다른 주인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한 믿음’은 객관적인 믿음, 즉 그리스도로 인해 믿어지는 믿음의 본체가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주관적인 믿음을 말합니다. 또한 ‘한 세례’는 물세례, 곧 내적 실재의 외적 상징을 가리킬 수도 있고, 믿는 자가 그리스도와 그의 죽음과 동일 시 됨을 말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로마서 6:1-11; 갈라디아서 3:27).
모든 성도들이 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었고, 같은 성령을 선물로 받았고, 같은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의 머리로서 교회는 한 몸입니다. 몸은 여러 기관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한 몸인 것입니다. 그래서 몸은 한 부분이 아프면 전체가 아픈 것처럼, 교회 공동체도 그런 모습입니다. 성도들은 교회 안에서 서로 세워주어야 합니다.
⑶ 하나님(성부)도 하나(6)
이제 바울은 성부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라고 가르칩니다. 만유(萬有), 만물의 회복이 하나님의 구속사의 마지막 정점입니다. 특히 ‘만유’를 4중 사용은 평범한 ‘모든 인류’를 의미한 것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모든 믿는 자들과의 관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믿는 자의 아버지이십니다. 믿는 자들은 그분의 자녀들입니다(요한복음 1:12; 갈라디아 3:26).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통치자로 그들 ‘위에’ 계십니다. 특히 이방인에게는 다양한 신들이 많지만, 하나님께서는 오직 한 분이라는 점에서 강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세상 만물 위에 계시면서 만물을 다스려 하나님 안에서 통일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 된 것처럼 모든 성도들도 하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그래서 분열시키는 일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는 일과 같습니다. 만물을 통일시키려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 역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십자가를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 생명의 근원이시오 본질이신 하나님께서는 세 인격을 가지고 있으시면서도 한 분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타락 전에 인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에덴동산으로부터 추방당했으며 인간과 인간, 인간과 피조물 사이가 분열되었습니다. 구원은 개인으로부터 출발하여 깨어지고 분열된 것들을 다시 연합시키고 회복시키며 막힌 담을(에베소서 2:14) 허무는 하나 됨의 작업으로 발전해 나갑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계속적으로 교회의 몸에 이방인들을 접붙임으로써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같이 누리게 해야 하며, 만유까지 이 생명의 물줄기가 흘러가도록 해야 합니다(이사야 11:6-9)
사도 바울은 이방인이 대부분인 에베소 교회에게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부르심을 입은 이방인들은 유대인처럼 손색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고 성장시키기 위해, 각 성도에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은사를 통해 교회가 세워지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당신을 통해 그리스도의 교회가 항상 하나 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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