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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05-02)


인생이 사는 목적(2)

전도서 5장 10-17절


교회 안에서 믿음이 좋기로 소문난 성도가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모든 부분에 솔선수범으로 충성스럽게 봉사합니다. 교회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본받을 만한 믿음이라고 칭찬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분이 세상에서는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교회 안밖에서 생활이 다른 이원론적인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도 아름다운 믿음을 가져야 하지만, 이 세상에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13-15). 초대교회 성도들은 세상에서 칭송이 자자합니다(행 2:47).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이 계명은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 15:12)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게가 형성된 사람들은 자신의 주위 환경과 바르게 형성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과 바르게 선 사람들에게 이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말합니다.

 

물질에 대한 생각(10-13)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돈을 쫓아 살아갑니다. 땅투기, 부동산 투기, 요즘은 가상화폐라는 것에까지 투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투기를 하지 않는 사람을 바보 취급합니다. 

10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11재산이 많아지면 먹는 자들도 많아지나니 그 소유주들은 눈으로 보는 것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 12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그 부요함 때문에 자지 못하느니라 13내가 해 아래에서 큰 폐단 되는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가 되도록 소유하는 것이라(10-13)

솔로몬은 세상만사가 헛되다는 명제를 설명하면서, 전도자는 이미 2장 1-11절에서 소유의 허무함에 대해서 언급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물질을 어떻게 관리하는가를 살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삶의 구체적인 실상들을 살피면서 ‘진정으로 가치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을 구하는 과정에서, 다시 한 번 ‘부와 소유’에 관해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더욱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10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10)

10 돈을 사랑하는 사람마다 돈으로 만족하는 법이 없고 부를 사랑하는 사람마다 재산이 아무리 불어나도 만족하는 법이 없다. 이것 또한 허무한 것이다.(우리말 성경)

세상에서 사람을 평가하는 가치는 외형적으로 보이는 것에 집중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속에 없으므로 당연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보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벌어야 하고, 더 높은 자리에 높아져야 합니다.

힘 있는 사람들은 약자들을 물리치고, 어떻게 해서라도 한 발이라도 높아 보여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깐 자신의 능력만큼이 아닌 무리해서 불법과 무질서로 그것들을 취하려고 합니다. ‘은을 사랑한다’는 돈을 버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자세입니다. 자신의 가족도 건강도 보이지 않고 오직 돈에만 집중합니다. 당시에는 가장 지혜로운 것 같지만, 나중에 그것이 올무가 되어버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몸도 상하고 가족도 다 떠나버린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이 물질을 대하는 모습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는 물질이 있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 사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자신의 분량과 달란트를 따라 주셨음을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에 모든 사람은 하늘 아래서 공평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두 번째, 물질에 대한 가치관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솔로몬은 잠언 30장 7-9절에서 말씀하신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7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8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9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언 30:7-9)

하나님 보다 세상 것을 사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신약 성경에서도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제자 디모데에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라고 권고했습니다. 세상이나 물질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결국에는 믿음으로 떠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난 사람들이 부자를 보면서 ‘부자들은 돈 걱정할 것 없어 좋겠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솔로몬은 “그 소유주가 눈으로 보는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11)라고 반문합니다. 부가 증가하면 할수록 새로운 더 큰 문제들이 발생합니다. 그러므로 더 많은 근심을 가져옵니다.

12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그 부요함 때문에 자지 못하느니라(12)

12일하는 사람은 먹는 것이 적든 많든 단잠을 자나 부자는 그의 풍부함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우리말 성경)

‘노동자’와 ‘부자’의 잠을 비교합니다. 노동자는 잠을 잘 자지만, 부자는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합니다. 부자가 잠을 못 이루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겁니다. 사업에 대한 걱정도 있을 것이고, 다른 부자와의 경쟁도 있을 겁니다. 인생이 삼분의 일이 잠인데 그 잠을 제대로 못 잔다면 인생의 삼분의 일을 망친 것입니다. 노동자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만 받아서 살아가면 됩니다. 하지만, 사용자들은 직원들과 직원의 식구들까지도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만큼 사회적인 책임과 의무가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부자는 그의 풍부함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라고 소개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잠시동안 맡겨주신 것이다.’라는 사실을 확신하면서, 하나님께서 드려야 할 것은 반드시 드려야 합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인 욥의 모습처럼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21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22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기 1:21-22)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가기 때문에, 많으나 적으나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주인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아 살아가면서 평안함으로 누립니다.

 

유산에 대한 생각(13-17)

욥의 고백대로 모든 사람들은 태어날 때 빈손으로 왔다가, 죽을 때 빈손으로 떠나가게 됩니다(시 49:17). 그러므로 재물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그것을 얻고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데서 비롯되는 이러한 폐단들은 결국 부와 소유의 헛됨을 입증해 줍니다.

13내가 해 아래에서 큰 폐단 되는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가 되도록 소유하는 것이라 14 그 재물이 재난을 당할 때 없어지나니 비록 아들은 낳았으나 그 손에 아무것도 없느니라 15그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가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자기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16이것도 큰 불행이라 어떻게 왔든지 그대로 가리니 바람을 잡는 수고가 그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17일평생을 어두운 데에서 먹으며 많은 근심과 질병과 분노가 그에게 있느니라(13-17)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한번은 한 사람이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그는 부모님의 유산문제로 매우 억울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와서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13)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15)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은 부자 비유’(눅 12:13-21)를 통해 물질에 대한 청지기 의식을 소개합니다. 그 내용은 부자가 밭에 소출이 쌓아둘 곳이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그래서 곳간과 창고를 짓는 일에 열심히 합니다. 그러면서 그 부자는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19)라는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20)라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을 영원히 소유하지 못한 물질 지키느라고 인생을 다 보냅니다.

재물은 본질적으로 허무한 것이고 그로 인한 폐해가 있기도 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물질 자체를 죄악 시하거나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질을 얻기 위해 수고해야 하고 그것으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재물로 폐단을 지적하면서 그것의 허무함을 밝혔던 전도자가 이제 부와 소유에 대한 올 바른 태도에 관한 말합니다. 그리고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복’이기도 합니다.

전도자는 사람이 부를 지나치게 사랑하며 해가 되도록 지키는 것이 폐단, 즉 악하고 해로운 일인 반면에 열심히 일하여 얻은 것으로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는 것은 선하고 아름다운 일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삶에 대한 전도자의 기본적인 인식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삶의 허무함을 깊이 탄식하면서 동시에 “먹고 마시며 자기가 하는 일에서 보람을 느끼는 것보다 좋은 것은 없다"고 했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2:24 참조). 삶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처럼 재물 역시 죽음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지만 사는 동안 이것을 통해 필요를 채우고 즐거움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복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알지 못하여 재물을 해될 만큼 추구하거나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처럼 지키려는 것은 삶을 망치는 어리석은 일이지만 그것의 용도를 알아 바르게 사용하는 것은 삶을 풍요롭게 하는 지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생명의 날을 깊이 관념치 아니하리니 이는 하나님이 저의 기뻐하시는 것으로 응하시리라"는 말은 부와 소유에 관한 교훈이자 삶에 대한 결론적인 교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 헛되고 부질 없는 것에 매이지 말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들에 만족하고 감사하면서 기쁘게 사는 것이 지혜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처럼 (고후 12:7-10)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7-10)


물질은 한곳에 머물지 않습니다. 돌고 도는 것이 돈이라고 합니다. 자녀에게 물려준다고 해도 자식의 재산이 되지 못합니다.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맙시다. 자녀들에게 신앙을 남겨 주시길 바랍니다. 부가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것은 신기루 일 뿐입니다. 여러분 주위 사람들을 보십시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도 의로운 모습을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누리게 한 것들에 감사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신앙과 삶이 이원론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부정적인 권력의 유혹, 물질적인 짐은 유혹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자기관리를 잘하는 것입니다. 주시면 주실수록 더 겸손히 섬길 때 하나님께서 더 능력 있는 삶이 되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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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05-01)


고통과 부조리를 극복하기 위한 조건

전도서 5장 1-7절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형성된 사람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바르고, 모든 피조물과도 바르게 형성합니다. 솔로몬은 그 동안 인간 세상을 돌아본 결과는 모든 것을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사용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피조물을 관리하고 통치하기보다는 섬기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행동은 우상숭배의 행위입니다.

솔로몬은 인간의 근본인 삶의 목적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라고 돌아봅습니다. 하나님께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합니다. 하나님께 기쁘게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받으면 드리는 것이 넘칩니다.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면서도 너무 감사해 합니다. 본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방법을 배우겠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1-7)

예배를 많이 참석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것이라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려 나올 때, 하나님께 나가는 자세를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어떤 분은 몇 수십 년 예배당을 다녔지만, 말씀을 한번도 듣질 못한 기적적인 분들이 있습니다.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설교를 들을 수 없습니다.

1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2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3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한 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 4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하지 말라 하나님은 우매한 자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5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더 나으니 6네 입으로 네 육체가 범죄하게 하지 말라 사자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께서 네 목소리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 7꿈이 많으면 헛된 일들이 많아지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1-7)

삶에서 부조리와 고통을 일으키는 사례들을 살펴본 전도자는 이제 이런 것들을 극복하기 위한 조건에 대해 언급합니다. 즉 무익하고 헛된 수고와 고통을 일으키는 것들로부터 벗어나서 보람 있고 진정한 삶을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이라 할 수 있는 본문에서 전도자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두려워함으로써 바르게 행하는 것이 부조리와 고통으로 가득 찬 삶을 참되게 사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두려운 마음으로 행하라는 이 권고는 모든 피조물에게 부여된 의무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예배자의 기본 자세를 일깨우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의 세 가지입니다.

(1) 하나님 앞에 서는 자세(1)

솔로몬은 먼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가져야 할 마땅한 태도에 대해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면 무엇이든 순종할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려 나오는 사람들의 자세에 대해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찌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1)라고 하였습니다. ‘네 발을 삼갈찌어다’에서 ‘삼가다’는 ‘조심하다,’ ‘경계하다’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은 그 모든 행동과 태도에 주의해야 한다는 사실을 권고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이 지녀야 할 마땅한 태도를 말하기에 앞서 전도자는 거짓된 예배, 즉 순종 없는 형식적인 제사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말하기 위한 전제로서 하나님 앞에 거짓된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정직한 마음과 순종으로서 이것이 없이는 그분.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제물을 바치고 제사를 드리면 말씀을 거스르는 악을 자행해도 괜찮을 줄 알지만 이런 사람은 결코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 그분과의 관계를 결정 짓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순종입니다.

준비되고 열려 있는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수많은 메시지가 전달되어도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시편 95편 7절에서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계 2:29 등)라고 간곡히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종교는 그 우상 앞에 서있거나 제물 드리는 것만으로도 만족할지 모릅니다. 그 신들은 죽어 있는 신들이기 때문에 만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신 분입니다. 그런 형식적인 모습을 원치 않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선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4장 23절에서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당신이 되시길 바랍니다.

(2) 하나님 앞에 기도한 자세(2-3)

둘째, 함부로 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일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2-3).

하나님 앞에서 삼가라고 권고했던 전도자는 특별히 그분 앞에서 말하는 것에 대해 경계합니다. 조급한 마음으로 함부로 입을 열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절대자이신 창조주 앞에 인간은 유한하고 연약하며 어리석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 중에 그분을 자신의 필요를 채워주는 존재로 여기고 이것저것 구하며 말을 늘어놓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기도를 들으시는 분에 대해 무지한 탓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말”에 휘둘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말을 한다고 해서, 또는 길게 기도한다고 해서 그것을 들어 주시지 않습니다. 사람 사이에서는 말로써 진실이 가리워지기도 오고간 말이 잊혀지기도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서원을 하고서 그것을 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서원을 행하는 데 따르는 희생과 수고를 피하려고 의도적으로 서원 이행을 미루거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서원을 행할 수 없는 경우가 있는데 모두가 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점에서 죄가 됩니다. 즉 그분 앞에서 진실하고 정직하게 행하지 않은 것입니다.

따라서 전도자는 결론적으로 서원을 하고 지키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서원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말합니다. 좋은 마음으로 서원을 했다고 해도 지키지 못하면 하나님께 거짓을 행한 것이므로 아예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진실하고 정직한 태도가 중요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대화는 일방적일 수 없습니다. 상대방의 의도를 알고 나의 뜻을 전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경솔한 사람은 장소나 때를 가리지 않고 아무 말이나 막 지껄입니다. 사람들 앞에서도 막말하면 복 없는 사람입니다.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에 아무렇게나 경거망동하게 행동하면 안 됩니다. 성급한 사람은 판단력이 흐립니다. 자신의 생각이 마치 하나님의 생각으로 오인(誤認)합니다. 자기에게만 적용하면 좋겠지만, 다른 사람에게도 그 생각이 주입될 때, 잘못된 믿음이 형성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주장이 많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지혜로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끝까지 들어봅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말할 때에 말을 끊어버립니다. 이런 행동은 ‘우매자’라고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시길 원하십니까? 당신의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바르게 따를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길을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7)

기도에 대해서 부정적인 표현은 무슨 생각부터 나십니까? 예수님께서 중언부언(重言復言)하는 기도를 말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7절에서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불교의 염불을 외는 것처럼 계속적으로 지껄여야 하나님께서는 들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당신이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고 있다면, 이 말씀에 귀를 귀 울려 보시길 바랍니다. 이사야서 59장 1-3절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3.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웠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발함이라.” 이 말씀에서 지적한 이유 때문에 당신이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한다면 회개하시길 바랍니다. 회개 없는 기도는 아무리 많은 시간을 시도해도 중언부언한 기도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듣지 않습니다.

(3) 하나님 앞에 서원한 자세(4-7)

셋째, 서원한 것은 반드시 행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진실하고 정직한 태도에 대한 강조입니다. 서원과 관련해서 전도자는 다음 두 가지 잘못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종종 서원에 대해 ‘~해주신다면, ~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서원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식의 서원을 많이 합니다. 이것은 서원이라기보다는 하나님과의 흥정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요구대로 안 해주시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정말 아름다운 서원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난 후에 그의 은혜에 감격하여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것을 자진해서 드리겠다는 다짐이 서원입니다. 한 가지 또 어리석은 사람들 중에는 기분파가 있습니다. 은혜 받았을 때는 아무 것이나 생각나는 대로 서원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육신의 생각이 나기 시작합니다. 서원한 내용을 취소시키려고 합니다. 

하나님께 서원한 사람들에게 솔로몬은 하나님의 약속은 더디 하지 말고 서원한 것을 갚으라고 하였습니다(4). 차라리 서원에 대해서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으니”(5)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잘못 이해해서 서원을 않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서원에 대해서 나중에 실수라고 변명하려는 사람들에게 무엇이라고 합니까? 6절에서 “네 입으로 네 육체를 범죄케 말라 사자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으로 네 말 소리를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고 하셨습니다. 서원을 번복하는 것은 자신의 편의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는 행동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겠습니까! 당신이 하나님께 서원한 것이 있다면, 지금 다 고백하시고 갚으시길 바랍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시편 66편 13-14절에서 “내가 번제를 가지고 주의 집에 들어가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니 14. 이는 내 입술이 발한 것이요 내 환난 때에 내 입이 말한 것이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서원은 나에게 손해가 날지라도 반드시 갚으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대한 바른 신앙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십니까? 헛된 시기심에 의해서 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서원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드리기를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서원 후에 헛되게 번복하는 사람의 사업의 터전은 하나님의 복이 임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당신에게 권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당신의 가장 아름다운 것을 하나님께 드리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믿음을 보시고, 당신의 믿음 위에 믿음을 더하실 것이고, 당신의 복 위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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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04-02)



삶을 위한 경쟁(2)

전도서 4장 7-12절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돕는 배필로 여자를 만드시고 더불어 함께 살아가게 하셨습니다(창 2장). 그러기 때문에 시편에서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133:1)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상에 주심도 신앙고백하는 성도들이 모여 서로 격려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라고 세우셨습니다. 혼자서는 넘어지고 쓰러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합심하고 협력하여 승리의 삶을 살기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길 원하십니다.

  

솔로몬은 4장 1-8절까지를 통해서 3가지 목적을 지적했습니다. 권위를 위한 삶, 경쟁적인 삶, 물질을 위한 삶 등을 지적해 주었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연장선상(延長線上)에서 끝없는 탐욕을 이야기합니다. 다른 사람들에 삶의 목적이 있어 살아가는 것이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끝없는 탐욕(7-8)

사람들은 삶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이 삶에 가치관이 되어 사람의 삶을 이끌고 나갑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삶에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삶의 목적까지도 없으면 정말로 짐승과 같이 살아갑니다. 사람의 욕망은 채워도 채워도 만족하지 않습니다.

7내가 또 다시 해 아래에서 헛된 것을 보았도다 8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이 홀로 있으나 그의 모든 수고에는 끝이 없도다 또 비록 그의 눈은 부요를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위하여는 이같이 수고하고 나를 위하여는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가 하여도 이것도 헛되어 불행한 노고로다(7-8)

본문에서 전도자는 끝없는 인간의 탐욕에 대한 실제적인 예로 죽은 후에 남겨 줄 대상도 없는 사람이 재물 쌓기에 여념이 없는 경우를 들고 있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유산으로 넘겨줄 처자식도 없는데, 물질에 대한 욕망을 가득하여, 계속 수고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의 욕망으로 수고하는 모습은 자신을 위한 삶은 없고, 남을 위해 수고하는 것이었습니다. 본인에게는 얼마나 헛된 일입니까?

이 세상을 욕망에 끌리는 삶을 살아보니깐, 진정한 안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창조를 하실 때, 6일 동안 일하시고 제 7일에 안식하셨습니다. 이 안식은 ‘쉼’의 개념보다는 ‘누림’의 개념입니다. 이곳에서 말하는 ‘안식이 없다.’는 의미는 누림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처자식도 없는데, 일하는 것을 보니깐, 자신을 위하는 일이 아니라 남을 위하는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안식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모든 재주로 말미암아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4)라고 하였습니다. 시기심이 충돌질하여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의 것을 ‘누림’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욕망(欲望)은 그 자체가 소외와 결핍을 느끼는 데서 시작되므로 만족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욕망을 이루기 위한 수고는 헛되고 무익합니다.

  

사람을 의지한 사람(9-12)

사람들은 혼자는 살 수 없습니다. 서로가 도움을 주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나타내는 한자인 ‘사람 인(人)’자도 서로 의지하고 서 있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람은 서로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9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10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11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12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9-12)
 
짧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세상의 것들을 좇아 정신없이 살아가지 말고, 주님께 먼저 나아와 마음의 쉼을 얻고, 성령 안에서 연합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1)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9-10)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고 살아가는 우리는 해 아래에서 어떠한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가?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로서 형제, 자매에게 사랑으로 대하며, 서로 돕는 자가 되어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본문에서 솔로몬은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을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9) 여기서 ‘상’은 어떤 사람의 노동력을 고용하여 지불되는 대가를 가리킵니다. 공동 번역에서는 “혼자서 애를 쓰는 것보다 둘이서 함께 하는 것이 낫다. 그들의 수고가 좋은 보상을 받겠기 때문이다.”(9) 혼자서 애쓰는 것보다 둘이서 함께 할 때 좋은 성과가 있고, 좋은 보상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역도 혼자 못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함께 도우며 출애굽의 과정을 잘 이끌었던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모세와 아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이 우둔하다고 고백하는 모세에게 형 아론이 있음을 언급하시며 마땅히 출애굽의 사명을 감당할 것을 명하십니다(출 4:14-16).

주의 뜻 안에서 서로 협력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일은 멋진 일인데, 자신이 그 일에 동참하고 있다면 그는 복된 사람일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고전 12:18-21)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존귀한 자들이며 서로가 한 몸임을 깨닫고, 서로 하나가 되어 주의 일을 잘 감당하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서로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기를 소망합니다. 본문에서 솔로몬은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10) 혼자가 아니라 함께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했으나 아들이자 다윗의 친구인 요나단은 다윗에게 용기를 줍니다(삼상 23:16). 다윗이 십 광야 수풀에 있을 때 요나단은 다윗에게 두려워 말라 말하고, 친구 다윗이 왕이 되며 자기는 다음이 될 것을 아버지도 안다고 말하며 그에게 용기를 준 것입니다. 우리 또한 서로 좋은 믿음의 친구가 되어 서로에게 힘을 주고,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위해 함께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믿음 안에 있는 한 지체로서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함께 이 길을 걸어가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나’는 무엇을 결단할 수 있겠는가? 믿음 생활을 하면서 어려운 일들을 겪기도 하겠지만 서로의 관계 속에서 잘 연단 받고 성장하여,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잠 27:17) 쇠는 쇠에 대고 갈아야 날이 서고 사람은 이웃과 비비대며 살아야 다듬어짐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공동체, 그리고 형제와 자매가 되어 늘 주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2) 세 겹줄은 끊어지지 않음(11-12)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고 살아가는 우리는 해 아래에서 어떠한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까? 우리는 믿음의 지체들이 연합할 때 승리할 수 있음을 알고,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어 끝까지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혼자가 아무리 강할지라도 약한 자의 연합보다는 약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솔로몬은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11)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추운 방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해진다. 그러나 혼자서 어떻게 따뜻해질 수 있겠는가?”(현대인성경) 난방도 되지 않는 방에 혼자 누워있으면 춥겠지만,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게 잘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닌 함께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연합의 힘이 위대함을 마음 깊이 새겨야 합니다. 본문에서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12) 여기서 ‘끊어지지’는 ‘뽑아내다, 근절하다, 부수다.’는 뜻입니다. 이는 단순히 뽑아내는 것부터 뿌리채 뽑아내는 것까지 두루 사용될 수 있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삼겹으로 묶은 줄의 단단한 결속력을 비유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공동번역은 “혼자서 막지 못할 원수도 둘이서는 막을 수 있다. 삼겹으로 줄을 꼬면 쉽게 끊어지지 않는 법이다.”(12) 영적 전투가 일어나는 상황 가운데서도 한 사람보다는 두 사람이, 두 사람보다는 세 사람이 강한 전투를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삶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어려움이 있다면 그 상황을 함께 나누고 기도하여, 넘을 수 없어 보이는 장애물도 능히 돌파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구약성경에는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등장하는데, 그들은 한 믿음으로 승리를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신상 앞에 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결국 풀무 불 가운데 던져 넣음을 당할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신상 앞에 절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인 세 친구에게 화가 나 있는 느부갓네살 왕에게 그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단 3:16-17). 그들은 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한 다니엘의 세 친구와 같이, 우리 또한 연합하는 믿음으로 영적 전투에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어 끝까지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 성령으로 연합하여 평안함 가운데 거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세 겹줄이 끊어지지 않음을 기억하며 늘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영적 전투에 승리하고, 믿음으로 주의 사역을 잘 감당하는 바랍니다.

  

권력을 의지하려는 사람들(13-16)

미국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퇴임 이후 지금도 계속적으로 영향력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도 국제적으로 분쟁 지역을 다니면 평화의 중재자(Peace Marker)가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도자만 있다면, 평화로운 세상이 될 것입니다.

13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젊은이가 늙고 둔하여 경고를 더 받을 줄 모르는 왕보다 나으니 14그는 자기의 나라에서 가난하게 태어났을지라도 감옥에서 나와 왕이 되었음이니라 15내가 본즉 해 아래에서 다니는 인생들이 왕의 다음 자리에 있다가 왕을 대신하여 일어난 젊은이와 함께 있고 16그의 치리를 받는 모든 백성들이 무수하였을지라도 후에 오는 자들은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13-16)

삶의 부조리함과 고통의 원인이 되는 사례들 가운데 마지막 문제는 권력과 명예에 대한 추구입니다.

세상의 모든 권력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습니다(롬 13:1). 그런데 사람들은 권력을 주면 권력에 취합니다. 탐욕으로 놓지 않으려고 합니다.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에 우선순위를 둘 때 사람은 자기만을 생각하게 됩니다. 스스로 자신을 우상화시키고 백성들을 무시하게 됩니다. 그렇다 보면, 권력이 취해 진정 돌아봐야 할 백성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계속적으로 권력을 가지고 누리려고 무력을 사용하는 폭군이 되어집니다. 그 마지막이 파멸인 줄 알면서도 탐욕을 제어하지 못하는 인간의 비극을 끊기 위해서는 삶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왕에게 “그는 마병을 많이 두지 말 것이요 …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신 17:16-17)라고 하셨습니다. 왕에게 권력이 있게 되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교만해져 버립니다.

이스라엘의 첫 왕인 사울 왕은 처음에는 매우 겸손했습니다. 사울은 사무엘 선지자가 왕으로 세움을 받으려 할 때, 그는 아버지 암나귀들을 잊어버려 찾으려 다닙니다. 그래서 사무엘을 만사서 당신이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할 때, “저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작은 지파인 베냐민 사람이며, 그 지파 중에서도 가장 보잘것없는 가문 출신입니다. 어찌하여 제게 이렇게 말씀하십니까?”(삼상 9:21)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왕위에 오른 후에 점점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합니다. 그리고 교만해져 하나님께 폐역한 악한 왕이 됩니다. 이렇게 교만하게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 사람이 된다면, 그는 자신에게는 차라리 왕이 되는 것보다 그냥 가난한 채 시골에서 농사 짖는 농부로 있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13).

솔로몬은 요셉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그는 가난하게 시작하였고, 감옥까지 들어갔습니다(14). 그는 한때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박수를 받는 총리의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그는 끝까지 겸손하게 지혜롭게 통치했습니다. 그의 치적(治積)은 이집트 역사에서 토지제도를 바꿀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획을 긋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지만 후대에게 많은 영향력과 기억을 오래도록 했습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새 왕이 나오는 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립니다(출 1:8). 왕에 대한 인기를 그렇게 오래 가지 않습니다. 이러한 결과를 보면, 왕권을 통해서 자신의 만족을 얻으려는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전 세상을 다스릴 왕권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없는 삶은 모든 것이 헛되고 마음을 괴롭게 할 뿐입니다(4,8).

왕권이 무익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물질이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많은 물질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복됩니다. 권력도 없는 것보다도 많은 것을 소유하면서 더 많은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면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통치권에 대해서도 기독교적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나님을 통치권을 관리할 수 있도록 주셨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창세기 1장 26절에 하나님께서 피조물에 대한 통치권을 왕으로서 받아서 관리해야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것들에 집착하는 당신에게 권합니다. 마가복음 8장 36-37절에서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없는 명성은 덧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삶은 절대적으로 무익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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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04-01)


삶을 위한 경쟁(1)

전도서 4장 1-8절


요즘은 책이 잘 팔리지 않습니다. 그중에 조금 팔린 책은 ‘자기관리’, ‘리더십’, ‘시간관리’, ‘성공학’ 등이 있습니다. 사회적 풍토가 그러다 보니깐, 기독교 서적들도 그런 종류의 책들이 잘 팔리고 있습니다. 이 책들은 한결같은 목표를 지니고 있습니다. 책의 방향들은 자신의 목적(비전)을 이루기 위한 지침서들입니다. 이렇게 오늘날 많은 사람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부단한 노력합니다. 이렇게 노력을 해서 꿈을 이룬 사람들은 행복할까요?

 

솔로몬은 꿈을 이룬 사람들의 행동을 살피고 있습니다. 꿈을 이룬 사람들 중에는 행복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들은 아주 극소수일 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행합니다. 이룬 꿈을 지키기 위해 노심초사합니다. 꿈을 이루었지만 자신보다 더 큰 것이 있음을 보고 시기와 질투합니다. 꿈을 다 이루었기 때문에 삶이 공허합니다. 이 말씀은 꿈을 이룬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만족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권위를 위해 산 사람(1-3)

얼마 전까지도 우리나라도 미얀마처럼 권력에 의한 폭력이 난무했습니다. ‘민주’와 ‘자유’를 부르짖는 사람들을 잡아서 투옥시키고 고문하고 심지어는 암암리 사형까지 시켜버렸습니다. 이렇게 포악한 이유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힘을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또 무력입니다. 무력이 있는 권력자들의 포악을 알면서도 아무 말도 못 했습니다. 정의로운 사람들은 아무 말 못 하는 것 자체가 너무 분이 끓어올라서 화병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1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 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2그러므로 나는 아직 살아 있는 산 자들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들을 더 복되다 하였으며 3이 둘보다도 아직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에서 행하는 악한 일을 보지 못한 자가 더 복되다 하였노라(1-3)

죽음으로 끝이 날 유한한 인생의 본질을 살폈던 전도자는 이제 실제적인 삶에서 드러나는 부조리함과 고통에 눈을 돌립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들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삶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실례를 들며 설명합니다.

삶의 실상에서 드러나는 부조리와 고통과 관계해서 전도자가 첫 번째로 지적한 문제는 ‘학대(虐待)’와 ‘압제(壓制)’로 인해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으나 이것이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도서의 사회적 배경은 지금부터 3000년 전입니다. 하지만 저도서 4장의 모습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음을 느껴집니다. 동물에게만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법칙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도 역시 약육강식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하나님을 떠난 타락한 사람들의 타락한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솔로몬 당시에도 많이 보았습니다.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 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1)라고 합니다. 학대 받은 자들은 당연히 그 가혹함으로 인해 고통을 느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고통을 더하는 것은 학대 자체보다 불의가 계속 자행된다는 사실입니다. 학대로 인한 고통은 물론 공의가 행해지지 않는 현실로 인한 절망과 억울함으로 더욱 괴롭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학대를 받으면서도, 힘 있는 자의 권세가 무서워서 아무 말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더 힘든 것은, 억울하게 당하는데도 어느 한 사람 위로해주지 않은 것입니다.

학대와 압제가 자행됨에도 그것이 시정되지 않는 불의한 현실의 심각성에 대해 전도자는 크게 두 가지로 지적합니다. 첫째는 학대받는 자가 무고히 당하는 고통으로 인해 슬퍼하나 이를 관심을 가지고 위로하는 사람이 없을 만큼 각박하고 악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학대하는 자는 권세를 가진 자로서 공의를 시행할 책임과 의무가 그에게 있음에도 오히려 무고한 자들을 압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나라를 통치하는 왕으로서 전도자는 이 같은 부조리한 상황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큰 관심과 책임을 느끼고 이를 바로잡고자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가 어느 한 사람의 의지나 능력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한계와 절망을 느껴 다음과 같은 토로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그러므로 나는 아직 살아 있는 산 자들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들을 더 복되다 하였으며 3이 둘보다도 아직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에서 행하는 악한 일을 보지 못한 자가 더 복되다 하였노라(2-3)

문제는 인식하지만, 그것을 해결할 길이 없다면 남는 것은 절망뿐입니다. 학대와 억압이라는 부조리와 모순을 해결할 수 없기에 고통은 필연적입니다. 따라서 이런 고통을 당하고 사느니 죽는 게 낫고 그보다는 아예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권력을 잡고서 무력을 행하는 사람들은 심리는 무엇일까요? 무엇 때문에 그렇게 폭력을 가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자신의 목적이 권력이었습니다. 이것을 성취했지만, 누가 자신과 같이 폭력적으로 권력을 빼앗아갈 것 같으니까, ‘자기 보호의 본능’에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고생해서 얻은 권력을 누군가가 빼앗아가 가버리면 헛고생이 되기 때문에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행하는 어리석은 행동일 뿐입니다.

이렇게 폭악한 정권을 잡은 지도자 되어서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는 권력을 잡아서 권력의 능력을 누르고 살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의 업적은 역사에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이렇게 얻어서 폭력으로 백성들을 지배하다가 죽어간다면, 그가 잡았던 권력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라의 권력자들을 위해 날마다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도 권력자를 위한 기도를 권합니다(딤전 2:1-6).

 

경쟁심을 위해 산 사람(4-6)

오늘날 우리나라의 경우에 사람들이 불행한다고 하는 이유가 물질이 없어서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아마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은 과거 조선 시대 왕들보다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행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불행을 느끼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을 다른 사람과의 ‘비교(比較)’ 때문입니다.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실상 가운데 전도자가 지적한 두 번째 사례는 이기적인 마음에서 비롯된 경쟁심, 즉 시기심입니다.

4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모든 재주로 말미암아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5우매자는 팔짱을 끼고 있으면서 자기의 몸만 축내는도다 6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더 나으니라(4-6)

많은 사람은 오늘도 새벽부터 돈을 벌기 위해 삶의 현장으로 달려나갑니다. 그렇게 밤낮으로 수고한 만큼 모든 것을 자신이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것들을 많이 가지면 정말 행복합니까? 사람은 만족이 없습니다. 평생 물질을 쫓아가다가 죽습니다. 이러한 삶을 행복이라고 말하진 않습니다.

솔로몬의 말을 들어봅시다.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모든 재주로 말미암아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4)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의 본성은 다른 사람의 성취와 업적에 대해 순전한 마음으로 칭찬하고 박수치기 보다는, 그것을 이루지 못한 자신과 비교하여 부러워하거나 시기합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란 말이 있습니다. 이웃이 잘되는 것을 못 견뎌 경쟁적으로 일을 벌이고 수고합니다. 다시 말해 시기심은 세상의 온갖 노력과 성취의 근거가 되고 이로 인해 괴로움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웃집에 좋은 것을 가지는 것을 못 봅니다. 어렸을 때, 이웃집 사람들이 그런 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시기(猜忌)를 하던지, 밥그릇 하나까지도 좋으면 안 됩니다. 좋은 밥그릇이 있으면 어느 때는 이웃집의 부엌에 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삶은 아무리 좋은 것을 성취해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시기는 좋은 편으로 보면 경쟁심이 발동됩니다. 당사자는 평생 불행합니다. 그들은 계속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에 스스로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우매자는 팔짱을 끼고 있으면서 자기의 몸만 축내는도다”(5)라고 말합니다. 즉, 자신을 파멸시킨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진정한 행복은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더 나으니라”(6)고 권합니다. 이곳에서 “한 손에만 가득하고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란 말씀은 번역을 쉽게 하면, ‘두 손에 가득히 수고를 가지는 것보다, 한 손 가득히 평온을 가지고 있는 것이 더 좋다(Better one handful with tranquillity than two handfuls with toil(NIV))’라고 번역한 것이 좋습니다.

시기심은 세상의 온갖 노력과 성취의 근거가 되고 경쟁심으로 수많은 것을 얻고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양손에 수고(고생)가 가득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적은 것을 가지고도 행복한 사람은 잘 조절(control)이 잘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정말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시기심은 세상의 일에는 사람들 사이의 경쟁으로 세상에는 많은 일이 시작되고 성취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이런 경쟁심은 그 동기가 선한 것이 아니고 자신과 타인에게 고통을 줍니다. 따라서 그로 인해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그것은 바람을 잡으려는 헛된 수고일 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전도자는 시기 때문에 열심히 수고하며 일하는 사람을 게으른 사람보다 낮다고 말할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손을 거두고 자기 살을 먹느니라”라는 말은 게으른 자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 평가로서 부정적인 말이지만, 전도자는 시기심으로 남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루기 위해 애쓰는 자보다 이들이 못하다고 말할 수 없지 않겠느냐고 방문하고 있습니다. 즉 조금 덜 가지고 덜 이루며 평안하게 사는 것이 고통 속에서 경쟁적으로 일해 많이 가지는 것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시기(猜忌)에 의한 경쟁심으로 일을 시작하지 마십시오! 그에 관한 결과는 불행입니다. 시기를 통해 당신이 아무리 많이 얻었다고 할지라도 불행할 뿐입니다. 이것은 헛되이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똑같습니다.

 

물질을 위해 산 사람(7-8)

모든 사람은 결국 어떤 것엔가 또 누구에겐가 항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니라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돈, 분노, 혹은 두려움, 자만심, 욕망 그리고 자아에 항복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상을 만들어 그것에 항할 것입니다.

7내가 또 다시 해 아래에서 헛된 것을 보았도다 8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이 홀로 있으나 그의 모든 수고에는 끝이 없도다 또 비록 그의 눈은 부요를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위하여는 이같이 수고하고 나를 위하여는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가 하여도 이것도 헛되어 불행한 노고로다(7-8)

솔로몬은 한 가지 헛된 일을 보았습니다. 자녀가 없는 사람이 물질을 악착같이 벌어 들린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사람의 대부분은 노년에 의지할 것이 돈밖에 없다고 하면서 악착같이 돈을 벌어 들립니다. 머리에 바늘도 안 들어갈 정도로 구두쇠로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인생의 종말에는 물질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인생을 물질에 목숨 걸지 마시길 바랍니다. 물질이 나를 따르게 만들어야지, 사람이 물질을 따르면 그처럼 추잡한 것이 없습니다.

물질 또한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은 인간이 다스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피조물에 매이는 것은 그것 또한 우상 숭배입니다. 골로새서 3장 5절에서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물질이 기준이 됩니다. 사람을 판단하는데도 돈입니다. 돈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도둑질도 심지어는 살인까지도 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돈 돈 거립니다.

솔로몬은 이런 사람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무엇이 헛되다는 말을 한 것입니까? 물질입니다. 물질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물질을 관리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악합니다. 물질만을 목적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악한 것입니다. 정말 불쌍한 사람입니다. 당신 인생의 목적은 무엇이 두었습니까? 권력에 목적은 둔 사람은 권력 때문에 초라해집니다. 시기심에 발동하는 사람들은 시기심은 살인까지 불러옵니다. 물질에 목적을 둔 사람들은 물질 때문에 망합니다.


피조물을 따르는 사람은 피조물이 우상의 대상이 됩니다. 비록 그것을 우상처럼 모시지 않아도, 삶 자체가 피조물로서 우상화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당신을 따르게 하십시오! 피조물을 지배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살도록 하나님께 맡기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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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03-02)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삶

전도서 3장 12-15절


사람들이 극한 상황에 있으면 두 가지 행동을 합니다. 그 결과는 서로 양극으로 달립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극단적인 선택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정말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정반대로 하나님의 방법을 찾습니다. 그것은 가장 선한 방법입니다.

 

솔로몬은 지금까지 행복에 대해 인생이 행한 일을 돌아본 결과 ‘헛된 인생’이라는 결론을 맺었습니다. 인생에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그는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은 고뇌에 빠져있습니다. 수많은 것을 성취함으로 행복한 줄 알았습니다. 세상에서 사는 동안 자신의 목적을 잡았습니다. 하지만 어떤 것도 만족을 주지 못했습니다. 정말 당황했습니다. 그러나 염세주의에 빠지지 않고 시야를 사람에게서 하나님께 돌립니다. 하나님 앞에 사람이란 어떤 존재인지 살펴봅니다. 막간을 이용해서 인간의 진정한 목적과 방향을 놓친 몇 가지를 찾고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12)

사람들은 소유에 대한 기쁨을 최고로 생각합니다. 반대로 자신의 것을 나누어 주면서 누리를 기쁨이 있습니다. ‘소유하려는 기쁨은 하나라면, 나누어 주는 기쁨은 두세 배’란 말이 있습니다. 진심으로 나누면서 연약한 자들이 그것을 누리는 기쁨을 보면, 얼마나 감사합니까! 진정한 기쁨은 소유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눔에 있음을 다시 한번 살피게 됩니다.

12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12)

솔로몬은 지금까지 하나님 없는 삶에 대해 어떤 결과를 맺었습니까? 솔로몬이 말하는 ‘해 아래서’란 말은 ‘하나님이 없는 세상’ 또는 ‘하나님이 없는 삶’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것들이 다 헛된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태어나고 성장하고 결혼하고 역사를 만들어가고, 문명의 발전을 가져온 모든 일이 ‘헛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것들은 새로운 맛에 아름다워 보이고,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없는 이루어진 일들은 바벨탑을 쌓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없는 삶은 하나님께서 주신 저주의 삶입니다.

솔로몬은 인생의 가치 있는 일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결과로 ‘소유’에서 ‘만족’으로 전환 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동안 매일의 시간에 기뻐함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행하는 선(善)에는 여호와의 기쁨이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행하는 선행을, 하나님께서는 향기로운 제사처럼 기쁘게 받으시고, 선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16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히 13:16)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는 일’을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급으로 취급하십니다. 그러한 기쁨으로 행하는 선행을 하나님께서는 매우 기쁘게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선을 기뻐함으로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헛됨이 가득한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기쁨으로 살아가기를 부탁드립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른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색다른 축복을 주셨습니다. 백성들에게 주시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많이 소유한 것이 축복이 아니라 작은 것을 가지서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이 축복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떻게 하다가 옛날에 묻어둔 수많은 금은보화 상자를 발견했습니다. 그 가치는 수백억 원이라고 가정합시다. 이것을 발견한 것만이 부자가 아닙니다. 이것을 처분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든 사람이 부자입니다. 묻어두고 그 상태로 두면 있으면 가난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어쩌면 더 불행할 것입니다. 이 상자를 발견하지 않했을 때는 보물에 대한 걱정 없어서 평안히 잤습니다. 하지만, 발견하고 난 후에, 다른 사람이 먼저 가져갈까봐! 또는 도둑질 당할까봐! 얼마나 노심초사하게 되어집니까? 가지고 누릴 줄 알아야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선물(13)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너무 자기 속에만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주변에 행복한 요소들이 많이 있지만, 그것을 찾지 못하고 타인과 비교하면서 스스로 자신을 불행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3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13)

솔로몬이 발견한 ‘하나님의 선물’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의 선물은 ‘기뻐하는 것’입니다(12). 무엇 때문에 기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선물은 “선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삶에 진정한 기쁨이 넘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진짜 ‘하나님의 선물’을 발견했습니다. 그 두 번째 ‘하나님의 선물’은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수고와 땀 흘리지 않고 얻은 것을 복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순간적인 복일뿐이지 화(禍)로 돌아오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다.

예화) 요즘 땅 투기로 벼락부자가 된 사람들은 잠이 안 올 것입니다. 개발 정보를 얻어 투기해서 떼돈 벌었던 사람들은, 그들은 대부분 땀 흘려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을 바보 취급하고 비웃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씩 자신의 잘못이 이제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수치가 드러나자 감당할 수 없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수고하여 먹는 것이 얼마나 복되고 형통한 길이라고 시편 128편에서 말하고 계십니다.

1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2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시 128:1-2)

‘수고할 것’이 있다는 것은 복입니다. 일에 치인 사람들은 불평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일이 없으면 나태해지고, 나태한 마음에는 각종 모양의 죄가 자라는 온상이 됩니다. 수고하면서 중간중간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 지혜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일을 해서 먹을 수 있다는 것처럼 얼마나 큰 기쁨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받는 기쁨보다 주는 기쁨이 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역(14-15)

하나님께서는 항상 쉬지 않고 사역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할 수밖에 없습니다. 종종 평상시 하나님 없다고 큰소리치던 사람들도 큰 어려움을 당하면, 그렇게 강퍅하던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해 달라’고 간청하는 것을 봅니다. 사람의 능력은 한계성이 있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14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그 위에 더 할 수도 없고 그것에서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15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14-15)

사람이 행하는 것은 일시적이어서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에게 잊혀집니다. 새로운 것이 없어서 이전에 하던 일을 할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영원히 있을 것입니다(14). 언제나 새로우며 완전한 것입니다. 영원토록 찬송 받으실 일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행하는 역사를 세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1) 영원히 있을 것(14a) :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일시적인 일들이 아니라 영원한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2) 철저하고 완벽함(14b) : 사람들은 물건을 만들 때 보면, 크기나 분량에서 작거나 크게 만든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만드는 일은 너무나 정확하게 만드시는 분입니다. “더 할 수도 없고 덜 할 수도 없나니” (3) 의도적인 계획(15) :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것을 인류를 위하여 창조하셨습니다. 지금도 주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또 사람들이 피조물들이 사람의 몸에 완전히 습득될 때까지 참으십니다.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라고 소개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사역을 통해 무엇을 봅니까? 하나님의 사역은 무계획성 있게 진행된 것이라, 아니라 불변적이고 이해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러한 사역을 보면, 두려움, 존경 그리고 겸손한 복종을 나타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라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역을 정확하게 목도한 사람은 한 명도 예외 됨이 없이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14b)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본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관 아래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무릎을 꿇어 경배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하는 일을 통해 주안점을 두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시는 일입니다. 연약한 자들을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온전한 자신의 상속자 삼으시는 중심을 두고 계십니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전도서 전체를 통해 인생을 가장 잘 사는 비결은 ‘하나님을 바르게 경외함’입니다. 아무리 선을 행하고, 수고하여 밥을 먹는다 할지라도, 수고 중에 낙을 누린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으면, 우리가 행한 ‘선행’은 스스로 ‘공로’가 될 것이며, 그 ‘교제(交際)’는 ‘집단 이기주의’가 될 것입니다.

전도자 솔로몬은 지금까지 세상 가운데서 의미 있는 일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다시 한번 인생사에 허무에 관해 이야기합니다(15). 사실 세상의 모든 일은 주기적으로 똑같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있던 일을 미래에 다시 일어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직시하게 하는 중요한 이유는 성도들에게 헛된 것에 대해서 헛된 줄 알게 하고, 사람이 근본적으로 허무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의 손길 안에 있게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완전한 구원, 온전한 자녀가 됐고, 온전한 상속자가 되도록, 이 모든 수고를 선용(善用)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가 하는 만사가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무의미하게 보이는 반복된 일상 속에서도 완전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구원 계획을 사모하는 기쁨으로 선을 행하고 먹고 마시며 소중히 교제하고 오늘도 수고 중에 낙을 누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가 될 것입니다.


오늘도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살피시는 능력보시고 은혜를 받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경배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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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03-01)


인생의 목적지

전도서 3장 1-11절


세상에서 모든 사람에게 가장 공평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시간입니다. 사업을 위해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사람도, 공원에서 무료하게 노니는 노인들에게도, 하나님께서는 공평하게 24시간을 주셨습니다. 아마, 이것까지도 불공하다면 살맛이 안 날 것입니다. 이렇게 공평하게 주신 시간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건강이나 물질은 다시 기회가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한번 지나가 버리면, 다시는 주어지지 않는 것이 특징입니다.

 

지금까지 전반부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설명했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열정적으로 뛰어다닙니다. 열심히 뛰면 어느 정도 뛴 만큼 얻어질 것입니다. 건강을 얻기 위해 새벽 운동을 나갑니다. 물질을 얻기 위해 새벽시장으로 나갑니다. 학위를 얻기 위해 새벽 도서관으로 나갑니다. 이러한 수고를 하는 사람들에게 솔로몬은 전합니다. 인생에는 종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전도서 3장에서 하나님 앞에서 서서 평가받을 때, 부끄럽지 않으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가르칩니다.

 

삶의 목적을 세움(1)

‘삶의 목적’은 바다에 운항하는 배가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에 배가 출항을 했는데 목적지가 없다면, 그 배는 항해하는 것이 아니라 물결 따라 흘러갈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런 인생을 삽니다. ‘될 대로 되라’라는 식의 삶입니다. 험난한 항해를 자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삶의 목적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1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1)

전도자인 솔로몬은 전도서의 시작을 ‘헛되도다’라는 외침으로 시작했습니다. 2장에서는 솔로몬의 개인적인 경험으로 왜 모든 것이 헛된지 가르쳐 줍니다. 그는 모든 것을 가져보고, 누려보고, 만들어 보았는데, 마치 하나님처럼 천지를 창조하듯이 모든 것을 따라 해 보았는데, 그것 역시 ‘헛되다’라는 결론을 전합니다.

전도자는 본문에서 인생의 일반적인 삶으로 돌아옵니다. 모든 인생에 주어진 시간, ‘때’라는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왜 인간은 열심히 해도 헛된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의지해야 하는가?’에 대해 다시 전합니다. 전도자는 모든 일에는 ‘때’, ‘기한’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 의미는 ‘사람이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다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한여름에 눈이 오게 해달라고 열심히 기도한다고 내릴 리 없습니다. 겨울에 반소매 옷을 입을 정도로 따뜻할 수 없습니다. 종종 어떤 사람을 향해 ‘철부지’, ‘철없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철없다’라는 ‘시기를 모른다.’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의 노력을 초월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계획과 노력으로 다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고 ‘때’라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대로 밀어붙인다고 모든 것이 성취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수고와 계획을 뛰어넘는 것은 “범사에는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에는 때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한은 누가 정했습니까?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사계절이 반복되는데, 사람들이 마음과 뜻을 모아서 투표해서 반대로 돌린다고 할지라도 될 순 없습니다. 이런 법칙은 누군가는 정했는데, 그 기한을 정하신 분에게 순종하는 것이 맞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과학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명도, 모든 질병도, 사람의 운명까지도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처럼 환상에 빠져 있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범사에는 기한이 있고, 천하 만물에는 때가 있어서 거슬릴 수 없습니다.

 

목적을 성취케 하신 분(2-8)

하나님께서는 모든 시대, 모든 사람, 모든 활동을 포괄하는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너무나 광대하고 포괄적이며 선하고 아름답지만 인간은 그저 자기 자신만 알고 이 세상에서의 필요를 채우기에 급급하기에 그 계획을 알 수도 없고 좋아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될 때, 그가 중생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그 계획의 아름다움과 선함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2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3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4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5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6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7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8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2-8)

전도자 솔로몬은 구체적인 예를 들고 있습니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이 인생의 삶을 살핍니다.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일어날 경우를 구체적인 예를 살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거슬릴 수 없는 것들을 나열합니다. 그는 이렇게 14가지의 사람의 때를 기록했습니다. ‘날 때’, ‘심을 때’, ‘죽을 때’, ‘헐 때’, ‘울 때’, ‘슬퍼할 때’, ‘돌을 던질 때’, ‘안을 때’, ‘찾을 때’, ‘지킬 때’, ‘찢을 때’, ‘잠잠할 때’, ‘사랑할 때’, ‘전쟁할 때’가 있습니다. 인생의 주기를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2)라고 합니다. 사람의 출생을 스스로 정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세상에 자신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출생한 것을 자기 의지대로 출생지, 출생 시간, 출생 가문에 출생하지 않았습니다. 출생을 모른 것처럼, 이제 언제 어떻게 죽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누군가가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을 향해 큰 계획을 세우고 출생하게 하셨고, 또 죽게 하실 것입니다. 출생도 자신의 의지가 아닌데, 우리의 삶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는 죽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주장하고, 자기 뜻대로 된다고 믿으면, 그 사람의 인생은 엉망진창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주장하지 않기 때문에 다행인 것입니다. 우리는 잘 태어났고, 잘 살고 있고, 그리고 잘 죽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더 잘 아시는 분, 우리에게 천하만사에 귀함과 때를 주신 분, 바로 그분께서 우리의 모든 때를 주장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파종은 봄에 씨앗을 뿌리고, 여름에는 꽃을 피웁니다. 가을에 추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자연의 순리입니다. 사람에게 자연적인 순리를 주셨는데, 그 순리를 따라 기회를 잘 활용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열매를 맺으란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생각이 중요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사람들의 생각보다 크신 분, 때를 주장하는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40-50세인데 고시(考試) 공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10여 차례 떨어졌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시험을 보는 사람은 헛된 인생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런 사명이 아닌가 보다 하고 돌아서야 합니다. 고시 공부한다고, 주위 사람들만 고달프게 만듭니다. 속단한 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는 지나가지 않았을까요? 가령 고시에 합격해도 고시 합격 동기생들이 20-30대 자식뻘 되는 사람들이라 화합도 잘 안 됩니다. 그럭저럭 세월만 지나가는 것입니다. 인생 고시 공부에 다 받치고, 무엇 하나 얻은 것 없이 폐인(廢人)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시기에 맞게 시간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기회를 활용하시지 못한 것 다시 한번 하나님께 큰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을 허랑방탕하게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은 많은 것을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이것들이 우리를 윤택하게 만듭니다. 이곳에서 소망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세상 것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솔로몬은 다음과 같이 질문입니다.

이렇게 자세하게 나열해 놓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모든 일에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때(始期)”가 있다는 것입니다. 반복적이고 대립적인 사건들을 나열함으로써 도전과 기회를 줍니다. 시간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중요한 기회를 인내와 경성으로 기회를 선용하라는 것입니다. 많은 시간으로서 교훈을 전합니다.

 

인생의 중요한 결론(9-11)

세상의 일은 사람들의 수고로 이룬 것은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때’를 알아야 합니다. 그때를 주장하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9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10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11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9-11)

1-8절까지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노력을 통해 많은 것을 얻습니다. 솔로몬은 그러면 그럴수록 질문이 오릅니다. “일하는 자가 그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9)라고 하였습니다. 대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수고 결과가 무엇입니까? 인생의 마지막 결론은 ‘인생의 노고’뿐입니다. 이것이 솔로몬의 결론입니다. 사람들은 평생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면서 일들을 이룬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이루어 놓은 것 중에 영원한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이룬 것들은 영원한 것 중 하나도 없습니다.

솔로몬은 사람의 끝을 보면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노력을 따라 수고한 인생을 본 결과로 하나님께 연관을 짓고 있습니다. 세상의 일에 대해 주관자는 누구입니까?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11절을 보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라고 합니다.

일에 대한 수고는 헛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헛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의 처음과 끝인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인생은 한계점이 있는 한시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인생을 바라보는 당신의 시각을 교정받도록 인도할 것입니다. 인생이 아무리 능력 있어 보일지라도 피조물입니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주관하신 하나님을 우러러보시길 바랍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을 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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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02-03)


헛된 것들(3)-물질적인 측면

전도서 2장 18-26절


어린 시절 땅따먹기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땅을 큰 네모를 반듯하게 그린 후에 병뚜껑을 손가락으로 튕겨서 노는 놀이입니다. 놀이할 때 보면, 욕심이 많은 사람은 큰소리쳐가면서 땅을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큰소리치고 싸워서 얻은 땅이라도 해가 지고 저녁이 되면 모두 다 제자리에 두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다음 날은 처음부터 또다시 시작합니다. 소유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갈 것으로 생각했다면, 싸움이 없이 양보하며 사이좋게 놀았을 것입니다.

 

솔로몬은 인생의 말년을 맞이했습니다. 모든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최고의 권세, 최상의 물질, 최고의 명예도 누렸습니다. 그렇게 살아온 인생으로 얻어진 결과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마음껏 누렸던 결과는 후회뿐입니다. 인생의 마지막은 죽음이 있다는 것을 좀 더 빨리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아직도 많이 쌓아 두면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많은 사람이 솔로몬이 갔던 헛된 길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진짜로 행복하겠습니까?

 

사후에 남은 업적들(18-23)

부모가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남겨 주고 싶은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진 감정입니다. 부모들이 많은 것을 남겨 주려고 해도, 그것 또한 하나님의 권한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주신이도 여호와이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이시기 때문입니다(욥 1:21-22). 솔로몬이라 하더라도 그가 가지고 있던 탁월한 지혜를 자녀에게 물려줄 수는 없었습니다.

18내가 해 아래에서 내가 한 모든 수고를 미워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이에게 남겨 주게 됨이라 19그 사람이 지혜자일지, 우매자일지야 누가 알랴마는 내가 해 아래에서 내 지혜를 다하여 수고한 모든 결과를 그가 다 관리하리니 이것도 헛되도다 20이러므로 내가 해 아래에서 한 모든 수고에 대하여 내가 내 마음에 실망하였도다 21어떤 사람은 그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다하여 수고하였어도 그가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그의 몫으로 넘겨 주리니 이것도 헛된 것이며 큰 악이로다 22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으랴 23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18-23)

계속해서 전도자는 수고하여 이룬 업적이나 부의 가치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앞에서 죽음 앞에서는 지혜도 그 가치를 상실해서 헛되다고 주장을 했었습니다. 이제 전도자는 평생 수고하여 이룬 업적이나 많은 재물, 또한 죽음 앞에서는 아무런 가치 없는 헛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1) 타인에게 갈 수고의 열매(18-20)

전도자 솔로몬이 궁그적으로 불쾌하게 본 것은 삶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노동 또한 혐오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전도자가 평생 애쓰고 수고하는 결과들을 보고, “내가 해 아래에서 내가 한 모든 수고를 미워하였노니”(18)라고, “미워하였노니”란 ‘싫어졌다’, ‘허무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문자적으로 ‘나는 나의 모든 수고를 미워한다’라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평생 수고하여 어떤 것을 성취하여 놓았지만, 수고한 것들이 영원히 지속하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죽으면 그 수고의 결과를 자신이 다 쓰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허무하다는 것은 두 가지로 요약합니다. 첫째, 평생 수고를 통해 성취된 것이든, 죽은 후에는 그 수고의 결과물이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수고는 자신이 하는데, 그것을 즐기는 것은 다른 사람입니다. 어려운 가정에 태어나서 평생 고생하며 돈을 벌었습니다. 이제 먹고살만하니깐, 큰 병으로 돌아가신 분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불쌍하다고 말합니다. 제대로 누리지도 못하고 돌아가신 모습에 정말 안쓰러워합니다. 인생은 대신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하루 가치 있는 행복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다음으로 수고롭게 이룬 것이 지속한다고 할지라도 그가 죽은 뒤에 그것을 자기 뜻대로 사용할 수 없을 것입니다(19). 자기 뜻에 따라 지속적으로 관리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일평생 수고하여 결과를 얻었다고 해도 죽은 후, 수고의 결과가 다른 사람의 관리하에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될는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부자가 3대를 못 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1대는 열심히 재산을 축적해 놓으면, 2대는 아버지의 수고를 알아서 조금은 전략해서 사용하지만, 3대째는 재산의 의미를 모르고 무조건 있는 줄 알고 함부로 사용하다가 망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사실을 생각할 때 전도자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절망은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없는 것이라는 데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죽음으로 모든 것이 가치 없고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리지만, 이를 도저히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일생에 걸쳐 수고하여 뭔가를 이루고자 하지만 수고하여 얻은 그 결과들을 채 누리지도 못한 채 죽고 맙니다. 더욱이 그가 애써 이루어 놓은 것들을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은 자가 거저 누리게 될 때, 그의 수고는 정말 허무한 것이 됩니다.

(2) 수고를 누리지 못하고 죽음(21-23)

여기서 “그가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그의 몫으로 넘겨 주리니”는 것은 수고하여 얻은 것을 전혀 수고하지 않은 자에게 넘겨 준다는 뜻입니다. 부를 쌓기 위해 일생 아끼고 노력하지만, 그는 부를 채 누리지도 못하고 죽고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은 후손이 그것을 물려받게 됩니다. 따라서 전도자는 죽음 앞에서는 인간의 수고도 헛된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믿는 자가 진정으로 후손에게 물려 줄 유산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하나님 없이 수고하여 쌓은 부나 업적이 죽음 앞에서도 가치가 있으리라고 생각합니까? 세상적 업적과 재물을 물려받은 후손들이 그것을 잘 관리되고 지킬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이런 사실들을 생각할 때 믿는 자가 자손에게 물려 주어야 할 유산은 단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르치지 않으면 자신의 수고는 물론 수고로 이룬 어떤 것을 후손의 몫으로 남겨 줄지라도 한순간에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만 인생의 수고가 헛된 것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다음과 같이 권고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이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 15:58)

 

최선의 삶(24-26)

사람이 살아가면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십니다. 주변에 존재하는 사람이나 물건, 동물이 다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인정한다면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대할 때, 하나님 앞에서 행동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이 자신의 욕구와 소원을 만족시키려면 많이 누리여 한다고 생각합니다. 솔로몬은 그러한 세상적인 생각을 차단하고 있습니다.

24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 25아, 먹고 즐기는 일을 누가 나보다 더 해 보았으랴 26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그가 주게 하시지만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24-26)

인간의 노동 열매가 유한하다는 견지에서 솔로몬은 인간이 그 열매를 즐겁고,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2:10) 자기 일에 만족하는 것(참조 3:13; 5:18; 8:15)이 좋다고 말했습니다. 죽음으로 그 삶을 끝내게 될 인간에게는 지혜도, 수고로 이룬 업적이나 부도 모두 헛되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이제 전도자는 그렇다면 이러한 조건 아래서 어떻게 사는 것이 최선의 길인가를 생각합니다.

(1) 물질의 근원이신 하나님(24-25)

이제까지 인생의 허무함을 한탄하던 전도자는 본문에서 물질을 누리는 삶의 즐거움과 보람에 대해 말합니다. 즉 사람이 먹고 마시며 자신이 하는 수고를 통해 보람을 느끼는 것보다 좋은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허락하신 축복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세상 모든 것이 헛되다고 주장했던 전도자가 삶 자체를 긍정하며 거기서 느끼는 기쁨과 보람에 대해 말하게 된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삶의 근거를 하나님께 두는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 삶의 근거를 하나님께 둘 때 헛된 것일 수밖에 없는 인생의 모든 일이 가치와 의미를 지니게 되며, 그러한 인생이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주목할 것은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이 보람과 기쁨이 되는 이러한 축복은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근원이 하나님에게서 왔다면,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겠습니까? 전도자인 솔로몬은 “아, 먹고 즐기는 일을 누가 나보다 더 해 보았으랴”(25)라고 말합니다. 자신은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육신이 원하는 대로 마음껏 다 누려보았습니다. 하나님 밖에서 누려보았지만, 헛된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26)

전도자는 물질을 성취하는 기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혼에 대한 만족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사후의 삶이 아니라 현세에 이루어지며, 영원한 것이 아닌 잠정적인 보상을 포함한다고 진술했습니다.

이에 관해 분명하게 26절에서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26a) 여기서 “기뻐하다”는 단어는 ‘좋은, 선한, 정직한’이라는 뜻으로서, 하나님께 좋은 사람, 정직한 사람, 선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을 가리킵니다.

말하자면 이들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을 기뻐하는 자들입니다(잠 3:5-6). 이런 자들에게 주시는 삶의 축복이 지혜와 지식과 희락입니다. 하나님께 삶의 근거를 둔 이런 자들에게는 삶이 결코 헛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과는 대조적으로 “죄인”에게는 모든 것이 헛되고 그들이 이룬 것은 남의 것이 됩니다(26). 이 같은 사실은 헛된 삶이야말로 하나님 심판의 결과임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을 떠난 삶, 삶의 중심에 하나님을 두지 않고 스스로 주인이 된 인생은 그 삶의 근거가 하나님께 있지 않으므로 헛된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 없는 자들, 즉 죄인들은 삶 자체가 이미 심판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죄인들이 수고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26). 죄인의 관점에서 그들의 수고는 헛된 것이 됩니다.

사람의 행복지수는 많고 적음에 있지 않습니다. 만족이 없습니까? 삶을 즐기시길 바랍니다. 이것은 자신만 위해 사용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과 별만 다를 바 없습니다. 주님의 사역을 위해 쓰시길 바랍니다. 영혼 구원을 위해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바울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라고 부탁했습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물질을 살아계시는 동안 잘 쓰시길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과 같이 허랑방탕하게 사용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일에 최선을 다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 건설하는 데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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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02-02)


죽음 앞에서 가치 없는 지혜

전도서 2장 12-17절


사람들은 무엇인가 한 번 꽂히면, 주변 사람들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경험한 사람들의 권고를 무시하고 끝까지 해보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가령 ‘도박은 패가망신이다.’, ‘마약은 중독되며 파멸이다’라고 하는데, 본인은 그 원칙에서 예외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뛰어듭니다. 선배들의 조언을 따라 멈추면 그만큼 복을 누리지만, 끝까지 가는 사람들은 해를 당하게 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신 것들이 진리라면 믿고 순종하는 것이 복입니다.

 

솔로몬은 계속해서 모든 사람들이 삶의 가치와 의미가 될 것이라고 여기며 추구하는 지혜와 수고로 이룬 성취에 대해 말합니다. 지혜와 무지는 계속 존재해왔고 이후에도 계속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무지한 자보다 나은 점이 있더라도 모두가 이 세상에 잠시 있을 뿐입니다.

 

절제된 생활 방식(12-14)

전도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하신 것은 바삐 달려가고 있는 삶을 잠시 멈추라고 하고 계십니다. 잠시 멈추어서 무엇을 위해 달려가고 있는지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무엇에 만족하고 있습니까? 당신이 이루려고 하는 그것이 자신을 만족시키려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것을 얻어도 만족할 수 없는 인생입니까? 라는 질문을 하십니다.

12내가 돌이켜 지혜와 망령됨과 어리석음을 보았나니 왕 뒤에 오는 자는 무슨 일을 행할까 이미 행한 지 오래 전의 일일 뿐이리라 13내가 보니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남이 빛이 어둠보다 뛰어남 같도다 14지혜자는 그의 눈이 그의 머리 속에 있고 우매자는 어둠 속에 다니지만 그들 모두가 당하는 일이 모두 같으리라는 것을 나도 깨달아 알았도다(12-14)

살아가면서 최선을 다하면 자신의 분야에서 많은 것을 성취하고 업적을 쌓을 수 있습니다. 솔로몬처럼 많은 것을 이룬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솔로몬은 노년에 “내가 돌이켜 지혜와 망령됨과 어리석음을 보았나니”(12a)라고 합니다.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도구입니다. 도구가 아무리 좋아도 어떤 사람의 손에 잡히느냐에 따라서 좋게 사용할 수 있고, 나쁘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지혜와 어리석음이 왕궁에 같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많은 것을 성취했습니다. 때로는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께 죄악된 일들도 망령되게 행하고 어리석은 짓들까지도 행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돌아보니 바람을 잡으려는 것처럼 ‘헛되도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솔로몬은 모든 사람이 죽어야 한다는 슬픈 사실 때문이었습니다(12). 지혜로운 사람들이 만든 업적이나 물건들을 본인이 죽고 나면 연속성이 끊어집니다. 아무도 관심을 같지 않습니다. 누가 만들었는지 조차 생각도 안하고 이용합니다. 차나 비행기는 매우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탈 때마다 그냥 타지 누가 만들었는지 감사하다 하면서 타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솔로몬은 수많은 것들을 창작하고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그 자녀들이 계승하지 못했습니다. 솔로몬이 죽은 후에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으로 등극하게 되었습니다(왕상 11:43).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호보암에게 나와서 “왕의 아버지가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이제 왕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왕을 섬기겠나이다”(왕상 12:4)라고 간청합니다. 르호보함은 “갔다가 삼 일 후에 다시 내게로 오라”(12:5)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그는 솔로몬의 신하들인 노인들에게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묻습니다(12:6). 그들은 솔로몬의 지혜처럼 백성을 섬기는 자가 되어라고 권고합니다(12:7). 그는 또 젊은 신하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그들은 ‘당신은 왕이 왕답게 단호해야 합니다.’(8-9)라고 조언을 듣습니다. 르호보암 왕은 누구의 조언을 들었겠습니까? 노인들의 조언을 버리고, 젊은 사람들의 조언을 취해 버립니다. 그 결과 북쪽 지파들 중심으로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나누어져 버립니다. 르호보암은 자기 아버지가 쌓아놓았던 모든 업적을 한순간에 무너뜨렸습니다.

사람들은 삶의 목적이 있습니다. 많은 것을 계획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아침부터 저녁에까지 수고합니다. 그 일을 이루면 얼마나 뿌듯하고 쾌감이 있겠습니까! 성취하는 순간, 모든 것을 얻은 것처럼 행복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하신 것이 바로 이런 느낌일 것입니다.

일에 대한 성취감의 쾌감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원하시는 일을 뒤로 미루어 놓습니다. 그리고 변명이 ‘이것만 하고 나면, 다음에는 충성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일이란 끝이 없습니다. 일하다보니 젊은 날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립니다.

솔로몬은 지혜가 그로 하여금 쾌락과 노동의 대가를 현명하게 누릴 수 있게 한데 반해(3,9), 방탕한 쾌락주의(12)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는 결론짓기를, 지혜에는 진정으로 유익한 점이 없다고 했습니다(13).

어리석은 자들은 마치 어둠 속에서 넘어지는 것처럼 곤경에 빠지는 반면, 지혜로운 사람은 위험을 피할 수 있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습니다(14).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은 같은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14). 모든 사람들은 죽고, 또 죽으면 사람들이 두 다 잊혀 버린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솔로몬은 어리석게 살지 않고 현명하게 살아간다고 해서 진정한 우얼함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결론지었습니다(15).

솔로몬 역시 어리석은 짓들을 시도했으나 단지 망령됨을 발견하였다고 말합니다. 즉 짐승처럼 오직 본능에 의해 사는 사람은 어리석습니다. 인간이 해야 할 최선은 모든 일을 제대로 판단하여 바른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세상 지혜의 마지막(17)

오늘날 이 시대는 구약의 ‘지혜’를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며, 신약의 지혜 또한 거절합니다. 사람들은 성경에 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가장 어리석고 상투적인 말만 늘어놓게 되었습니다. 현실도피자가 되는 것은 지독히 어리석은 짓입니다. 솔로몬은 현실도피자가 되려고도 하지 않았고, 오늘날 사람들처럼 쉽고 안일한 삶을 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17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미워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에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로다(17)

솔로몬은 올바른 일을 행하는 인생이라도 결국 비참하게 마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성적으로 바르게 판단하여 탁월한 삶을 살더라도 결국 하나님께 반항하는 삶으로 끝마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리석은 자로 사나 지혜로운 자로 사나 참된 기쁨을 발견하는 데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솔로몬은 점점 인생의 마지막이 가까우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사후를 생각해 봤습니다. 그리고 먼저 간 사람들의 사후를 비교해 보았습니다. 지혜로운 사람들과 일반인들이나 둘 다 죽게 되면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영웅호걸이었던 사람도 죽으면 모두 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점 사라져간 것을 본 것입니다.

이 사실 때문에 솔로몬은 삶을 불쾌하고 혐오스러운 것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이 스스로에게 괴로움을 주므로 사는 것을 한탄한다고 말했습니다.

솔로몬은 만약 사람이 어떻게 살든 궁극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고, 아무것도 가치 있는 일이 없다면 삶의 모든 것과 삶에서 이룬 모든 성취는 헛되고, 무의미하며,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고 결론지었습니다(참조, 1:14, 17, 2:11, 17, 26, 4:6, 16; 6:9).

솔로몬은 자신이 시도했던 모든 경험을 우리에게 알려주면서 오직 한 가지를 주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참된 만족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자신의 피조된 목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13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3)

예수 그리스도께서 항상 지니셨던 삶의 자세는 현실로부터 동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붙들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주께서 현실로부터 동떨어진 삶을 살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는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마 11:19)라고 빈정거렸습니다.


우리 주님의 모든 생애는 하나님께 뿌리를 내리고 그분 안에 거하는 삶이었습니다. 그 결과 주 예수님께서는 결코 지치신 적도 없었고, 포기하신 적도 없었습니다. 또한 사람들을 향해 냉소적이신 때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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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03)


헛된 것들(2)-쾌락적인 측면

전도서 2장 1-11절


오늘날은 ‘fun시대’라고 합니다. 세상의 프로그램은 재미없으면 떠난 것 버립니다. 대표적인 예로 TV 프로그램은 내용은 상관하지 않고 흥미가 있어야 지속적으로 봅니다. 재미가 없으면 다른 곳으로 틀어버리기 때문에 무조건 억지웃음이라도 만들어 내야 합니다.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은 교회 안에서도 적용됩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교회 프로그램이 싫증 나면 떠나버립니다. 그리고 새로운 성도들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세속적이지 않으면서도 기쁨이 넘치는 교회가 될까?’라는 점에서 교회 지도자들은 고민이 많습니다.

 

본문에는 솔로몬이 만족한 삶을 위해 두 번째로 ‘쾌락’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회의 쾌락에 만연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말하는 쾌락은 육신적인 부분만 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자신만을 위한 육적인 만족을 얻으려는 것을 말합니다. 현대인의 목표는 “먹고, 마시고, 즐기자!”입니다. 타인의 눈치 보지 않습니다. ‘자신이 좋으면 다 좋다!’는 극도로 이기주의적인 쾌락 생활 속에 살아갑니다.

 

유희(개그)를 통한 만족(1-3)

인간이 인간됨에 필요한 것은 밥만 먹는 동물적인 존재가 아니라, ‘의미’와 ‘보람’을 먹고 사는 의식적인 존재입니다. 자신의 삶에 의미와 보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 ‘의미’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합니다. 자신이 누군가에 의미 있는 존재와 보람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보람된 존재가 되었을 때,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1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적으로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본즉 이것도 헛되도다 2내가 웃음을 논하여 이르기를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을 논하여 이르기를 저가 무엇을 하는가 하였노라 3내 마음이 궁구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에 지혜로 다스림을 받으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어떻게 하여야 어리석음을 취하여서 천하 인생의 종신토록 생활함에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 하여(1-3)

솔로몬은 서론에서 ‘이 세상 존재한 모든 것들은 헛된 것이다.’라고 단정했습니다. 인생의 허무함 속에 세상에서 만족을 줄 만한 것들을 찾았습니다. 대표적으로 세 가지로, 첫 번째는 ‘지성’으로 지식을 추구하며(1:12-18). 다음은 ‘쾌락’으로 감성적인 만족을 추구합니다(2:1-11). 그리고 마지막으로 ‘물질’입니다(2:12-28). 이러한 것들로 세상에 존재한 모든 것은 헛된 것이라고 서술해 나갑니다.

본문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내가’입니다. 솔로몬은 자기의 경험을 소개함으로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해보았는데’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이 ‘반성하는 존재’, ‘사유(思惟)하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자의식(自意識)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존재입니다. 전도서에서는 자신을 의식하는 내용입니다.

솔로몬은 세상에 지혜나 지식적인 것들을 쌓으면 쌓을수록 번뇌와 근심을 더 하여 헛된 것이라면(1:18), 이제 그 헛된 인생을 극복하기 위해서 즐기면서 살아보아야지 했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적으로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본즉 이것도 헛되도다”(1)라고 즐거움(enjoy)을 추구한 인생도 헛되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자기의 경험을 소개함으로 효과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헛된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육체적인 즐거움을 만끽해봅니다. 그는 “내가 웃음을 논하여 이르기를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을 논하여 이르기를 저가 무엇을 하는가 하였노라”(2)라고 합니다. 육체적으로 즐거움을 두 가지 영역에서 추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술’과 ‘유흥’입니다. 그는 자신의 몸을 포도주에 맡겨서 즐거움을 얻고자 시도한 행동을 ‘나는 내 몸을 포도주로 이끌어보고자 내 마음에 애썼다’(3)라고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솔로몬이 종종 최고의 파티를 열었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왕상 10:21). 그리고 파티에 최고의 음식을 준비했고(왕상 4:22-23). 최고의 포도주로 만찬에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그 파티에 재담가들을 세워서 흥을 돋구도록 했습니다(2:8). 이렇게 파티를 여는 동안에서 흥겹고 즐겁습니다. 하지만, 파티가 끝나고 모든 사람이 썰물이 빠져 나간 것처럼 빈자리에는 쓸쓸하고 고독했습니다. 그에게는 이러한 파티들도 만족을 주지 못했습니다. 이런 쾌락적인 파티를 통해서 만족을 얻으려는 것은 ‘미친 짓’과 같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솔로몬이 왕으로서 이러한 일들을 주관하고 행하는 것을 보면서 부러웠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항상 마음 중심에서는 공허가 빌려왔고 행복하질 못했습니다. 솔로몬의 속사정에 대해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잠 14:13).

그리고 솔로몬은 “지혜를 갈망해 온 나는,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하고, 낙을 누려 보려고 마음먹은 적도 있다. 참으로 어리석게도, 이렇게 사는 것이 짧은 한평생을 가장 보람 있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3, 새번역성경)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술을 마시며 낙을 누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일이 아닐까?’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쾌락’이라고 합니다. ‘쾌락’이 무엇이 문제입니까? 이 세상의 쾌락은 만족할 수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좀 더 자극적인 쾌락을 맛보아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인성이 파괴되고, 욕망 속에 사로잡혀 버립니다.

이러한 행위들을 통해 쾌락을 추구하지 않고, 그는 “어떤 것이 선한 일인지”(3) 인간 욕구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는지를 진지하게 알고자 했습니다. 단순히 포도주로 즐거움을 얻는 것은 순간적으로 쾌락을 얻을 수 있겠지만, 오랫동안 지속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리석음을 멈추고, 다시 지혜로 인도받고자 노력했습니다.

 

사업을 통한 만족(4-8)

‘돈으로 침대는 살 수 있지만 잠은 살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편안한 침대 위에 평안한 잠을 위해 밤낮으로 뛰고 있습니다. 하지만 편안한 침대를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불편함을 겪어야 합니까! 그리고 편안한 침대 위에 잠을 청해보지만, 그 침대를 얻기 위해 부딪쳐야했던 일 때문에 잠이 오지 않습니다.

4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지으며 포도원을 심으며 5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6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주기 위하여 못을 팠으며 7노비는 사기도 하였고 집에서 나게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도 소와 양 떼의 소유를 많게 하였으며 8은금과 왕들의 보배와 여러 도의 보배를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의 기뻐하는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9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 지나고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여 10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로다(4-10)

솔로몬은 술과 유희의 쾌락은 헛된 것들을 치유하지 못하고 악몽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다음으로 지혜를 얻기 위해 시도한 것은 무엇입니까?

(1) 전도자의 수고(4-6)

솔로몬은 다음으로 추구한 것을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지으며 포도원을 심으며 5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6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주기 위하여 못을 팠으며”(4-6)라고 소개합니다. 그는 집을 짓고, 포도원을 일구었으며, 과수원을 만들어서 열매 수확을 하고, 삼림을 만들어 사업을 일구어 보았습니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 후대 사람들은 이 전도서를 솔로몬이 기록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의 행적은 개인적으로 먼저 그는 자신을 위해 집을 짓고 집 주위에는 만족할만한 정원을 만들고(대하 8장), 또 바알하몬에 포도원을 만들었고(아가 8:11), 연못도 파고 물을 댈 수 있는 관계시설까지 만들고 그것에 관상용 고기도 길렀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부유했던 솔로몬은 자신의 집을 어떻게 꾸몄겠습니까? 자신의 만족을 위해 최대한 아름답고 호화롭게 꾸몄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을 위해 성전까지 건축하였습니다(왕상 5장 이하). 이 성전은 얼마나 아름답던지 역사적으로 위대한 건물로 손꼽힐 정도였습니다.

(2) 수고의 결과로 얻은 부(7-8)

솔로몬은 수고한 결과로 이전의 오느 누구보다 더 많은 재산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의 재산은 금, 은, 소, 양 등을 통해 부를 축적했습니다(7-8). 그는 당시에 전 세계에 최고의 부자이며, 최고의 지혜자이었습니다.

자신의 이러한 사업을 감당하기 위하여 수많은 노비도 거느렸고 솔로몬은 처첩도 후궁이 700명이요 첩이 300명이나 두었었습니다(왕상 11:3). 솔로몬은 이처럼 인생에서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을 다 해보았습니다. 그러한 삶이 자신에게 만족을 줄 수 있었을까요? 이러한 일들은 계속적으로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이것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더 큰 만족을 위한 세상적인 추구가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니 항상 만족할 수 없고, 진정한 행복을 줄 수 없었습니다.

(3) 선한 것을 추구한 결과(9-10)

솔로몬은 위에서 수고한 결과 선한 결과를 맺게 되었습니다. 모든 결과를 통해 세상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이 결과들에 대해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도다”(9)라고 말씀합니다. 한마디로 진정한 만족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렇게 누렸던 것들이 자신의 선조들보다 더 많은 것을 누렸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10)라는 표현은 전도자의 허랑방탕함과 향락의 추구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반절에 “나의 모든 수고”와 연결하여 이해한다면, 4-6절에서 언급된 각종 사업을 최선을 다해 열심히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소유를 통해 부를 축적해 보았지만, 그에게 진정한 만족을 주지 못했습니다.

 

세상 만족을 추구한 결과(11)

오늘날 사람들이 많은 것을 누리면서도 행복할 수 없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자신이 원하는 것들에 대해 잠시 기다림과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나 즉시 이루어지므로, 소유된 것에 대해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그러므로 자신의 소유에 대한 만족을 느낄 시간이 없습니다. 세상의 것에 대한 행복은 유효기간이 매우 짧습니다. 솔로몬도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모두 다 가졌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통한 진정한 만족은 누릴 수 없었습니다.

11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11)

전도서는 뿌린 대로 거두는 인과응보 원리 자체가 잘못 되었다고 공격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규범적 지혜의 원리가 작동하는 수많은 예가 있습니다. 솔로몬 스스로도 좋은 것들을 심어 좋은 열매를 맺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자신이 세상의 것을 통해서 기쁨을 얻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해 보았습니다. 처음부터 다 무익한 것은 아닙니다. 잠깐 기쁨(쾌락)은 줍니다. 그러기 때문에 더 많은 기쁨을 누리고 싶어 합니다. 점점 쾌락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어 갑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인생의 뒤안길에서 그 일들을 돌아보게 되니깐,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11)고 하였습니다. 자기 일을 돌이켜 보니 자신이 행한 모든 일들과 자신이 이루려고 애썼던 모든 수고가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로 결론짓습니다. 전도자가 시험한 그 모든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 복이 과연 만들어질 수 있습니까? 왕으로서 행복을 만들려고 시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가 추구한 복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선물임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누리지 못한 가운데 이런 말을 했다고 부러워서 말한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누려보았습니다. 누려본 결과, 이 세상의 일들은 ‘헛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경험을 통한 말은 정답입니다.


이 세상 것을 통해서 진정한 만족과 행복을 느껴보려는 마음이 있다면, 솔로몬의 고백을 들어야 합니다. 일시적인 기쁨은 잠시 동안 만족(쾌락)을 줄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다시 고통으로 다가온다면, 선택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진정한 영원한 기쁨이 무엇인지 살펴야 합니다. 그것을 얻기 노력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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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01-02)


인생에게 헛된 지혜

전도서 1장 12-18절


세상적인 지식을 많이 배우고 실천하는 사람을 ‘엘리트’라고 합니다. 대부분 많이 배우면 사람노릇하고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많이 배웠기 때문에 엘리트가 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바르게 배우지 못하면, 많이 배운 것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아픔을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을 부인하는 적극적으로 반기독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전도해 보면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자신들의 가진 지식 때문에 교만해서 하나님을 영접치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본문은 전도자가 ‘왕’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 단락(1:12-2:26)의 첫 부분입니다. 전도자는 ‘왕으로서’ 시도하고 경험했던 일들을 소개합니다. 그가 탐구하려고 했던 많은 시도들 가운데 특별히 ‘인간의 행위’와 ‘지혜’에 관한 언급이 중심 내용으로 다루어집니다. 전도자는 그러한 탐구적 노력과 시도들에 한계가 있음을 자각합니다.

 

인간 행위의 한계(12-15)

선한 씨를 뿌려도 악한 열매를 거둘 때가 있고, 곡식을 심은 자리에서도 가라지나 엉겅퀴가 날 때도 있습니다. 모든 것에 근원과 뿌리는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야기된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 안에 있는 탐욕이 이 세상을 이렇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기심과 탐욕은 많은 수고를 하도록 만들지만, 그 수고가 영혼의 평안과 만족과 진정한 행복에 이르게 하지 못합니다. 수고에 수고를 더 할수록 인생은 괴로워집니다.

12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13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14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15구부러진 것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도 셀 수 없도다(12-15)

솔로몬은 모든 학식과 지혜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부분에서 능통한 사람으로 수많은 잠언과 글들 그리고 시들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을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그 지혜로운 솔로몬이 사람들의 지혜에 대해 논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고 있는 지혜는 무엇입니까?

(1) 이스라엘 왕이 된 솔로몬(12)

삶의 헛됨을 절감한 전도자는 지혜로서 이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는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라고 소개합니다(12).

전도자는 자신의 주장을 더욱 설득력 있게 전하기 위해 자신을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소개합니다(12).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이자 당시 최고의 번영을 누리던 도시로서 이곳에 왕이었다는 사실은 인생에서 최고의 경험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그는 삶의 가치를 궁구하는 일과 관련해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강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입니다.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는 누구보다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고, 최상의 것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인생의 본질에 관한 문제를 논할 만한 자격과 조건이 충분했고, 이를 위해 그가 기울인 노력은 최선의 것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는 하나님께 특별한 지혜와 총명을 선물로 받기까지 했으므로 인생에 대한 그의 가르침은 신뢰할 만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가 인생을 깊이 궁구한 결과는 한마디로 “헛되다”입니다.

(2) 인간행위의 한계(13-15)

가장 뛰어난 지혜를 가진 솔로몬이 모든 지혜를 다 동원하여 인류의 역사와 인간사를 살펴보면서 얻은 결론은 “13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14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라고 말합니다(13-14). 전반적으로 관찰한 결과가 ‘헛된 것’이며, 그것은 ‘괴로운 것’이라는 것이라고 결론을 맺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헛되고 괴롭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 이유가 창세기 천지창조로 돌아가 봐야 합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사람을 만드실 때, 하나님 보시기에 모든 것이 선하고 아름다웠습니다(창 1장). 그러나 죄가 세상에 들어오자, 사람들의 마음은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인생은 괴롭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아름다운 곡식과 열매를 맺었던 땅에서는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이 죄악과 저주로 뒤엉키게 되었고, 질병과 고통과 죽음이 찾아오면서 세상은 혼란을 통한 불안과 두려움과 저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이 수고하고 애를 써도 수고의 결과를 맺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창 3:15-18).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헛된 일입니다.

사람들이 지식을 얻기 위해 얼마나 뜁니까! 뛰는 것이 마치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지식을 위해 평생 동안 자신의 인생과 물질을 투자합니다. 하지만, 바람은 잡을 수 없습니다.

지식의 결과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15절에서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없고 이지러진 것을 셀 수 없도다”고 합니다. 구부러진 철사는 사람들이 노력하면 반듯하게 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노력하면 구부러진 길을 반듯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쌓은 지식을 통해서 인간의 구부러진 마음은 바르게 잡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노력하고 수고하면 부족한 창고는 채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공허한 빈 마음은 인간의 노력으로 채울 수 없습니다. 만물이 잘못된 결합들을 바르게 만들어 나갈 수 있습니까? 솔로몬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결국 인간이 아무리 지혜를 다하고 수고를 해도 결코 도달을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한계는 본질적인 것입니다. 영혼의 만족과 영혼의 진정한 행복은 수고와 노력과 사람의 지혜로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인 결과입니다. 모든 만족과 평안도 없습니다. 오직 빈 마음을 채우기 위해 세속의 욕심과 정욕과 이기심에 노예가 되어 헛된 수고만 반복할 뿐입니다. 그 수고는 스스로를 착취하고 고통스럽게 만들어서 스스로 자기 욕심의 노예가 될 뿐입니다. 욕심의 노예 된 삶을 끊어버린 것만이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삶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만족, 자신의 수고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된다고 사실을 인정하며,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깊게 고백할 때, 삶에는 진정한 평안이 찾아오고 삶의 만족과 여유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지식이 많아지고 놓아지면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냅니까? 하나님의 섭리를 수정 보완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 조언을 드려서 더 아름답게 만들어 나갈 수 있습니까? 세상의 지식은 시간이 가면 인간에 가장 쾌적한 환경의 유토피아 세계를 만들어 줄 것이라고 합니다. 과학이 에덴동산을 만들 수 있습니까? 과학이 발달하면 하나님의 섭리를 파괴합니다. 세상의 지식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대적하는 바벨탑을 만들어 나갑니다. 하나님께 심판하실 때는 아무런 것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있는 지혜의 한계(16-18)

인간은 일생 동안 온갖 문제에 시달리며 수고합니다. 하지만 인생의 이러한 수고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생의 근본적인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지혜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만 세상적 지혜는 문제를 더욱 부각시킬 뿐 해답을 주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지혜자들이 삶과 존재에 관해 의문을 가지고 이를 해결하고자 애썼지만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16내가 내 마음 속으로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가 크게 되고 지혜를 더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사람들보다 낫다 하였나니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 17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줄을 깨달았도다 18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16-18)

살아가는 일의 헛됨과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 언급했던 전도자는 이런 인생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지혜를 얻고자 하지만 지혜 역시 해답이 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솔로몬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지난날들의 지식을 회상해 봅니다.

(1) 탐구에 대한 이중적인 진술(16)

솔로몬의 지적인 능력은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월등히 풍부한 지혜와 지식의 사람이었습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처음 왕이 되었을 때, 하나님 앞에 일천 번제를 드리면서 자신이 이 백성을 통치하기 위한 지혜를 구하자 하나님께서 선물로 지혜를 주셨습니다(왕상 3:4-12).

그는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가지고 백성들을 바르게 다스리고 인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지혜를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 인생의 중년과 노년을 향해 가면서 잘못된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이러한 지혜도 헛된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16내가 내 마음 속으로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가 크게 되고 지혜를 더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사람들보다 낫다 하였나니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16)

많은 지혜를 얻으려는 것이 어리석고 헛되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잠언에서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네가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도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3:15)라고 했고,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네가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명철을 얻을지니라”(4:7)라고 잠언에서 지혜를 칭송하고 있습니다.

본문 전도서에서는 반대로 ‘지혜를 얻는 것도 헛되도다’고 말하고 있으니 어떻게 된 것입니까? 솔로몬은 처음에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말미암아 나라를 통치할 때, 지혜로운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받은 은사와 은혜를 감사하지 아니하고, 시간이 지나갈수록 그것이 마치 자기 자신에게 나온 냥 우줄거렸습니다.

하나님을 기초로 해서 사람의 지혜에 외교술을 더합니다. 인간의 사특한 방법을 더하여 외교적인 방법으로 이방여인들을 아내로 두면서, 그는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라 사람의 지혜를 택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지혜를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지혜로운 마음에 겸손함이 더하지 않으면 그 지혜는 잔꾀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정한 지혜는 겸손한 삶의 태도와 같이 가야 진정한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혜로 오만하고 교만하게 판단하고, 또 자기보다 못하다고 여기는 사람을 낮추어 보았던 솔로몬은 마침내 중년에 파멸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진짜 지혜는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그래서 언제나 판단할 때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자신의 연약함과 무능력함과 우매함을 고백할 때, 비로서 하나님께서 지혜의 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그의 명성은 솔로몬의 열조보다 지혜가 뛰어난 왕이라는 명성을 얻었습니다. 많은 주변국가의 왕들과 사람들이 솔로몬에게 찾아와 지혜를 찾아와서 문의할 정도였습니다(왕상 4:29-34). 사무엘하 9장에 보면 시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살피기 위해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지식에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당시 근동에 있는 더 지혜와 지식을 구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결과의 결정체가 솔로몬 ‘잠언’이라는 금과 같은 귀한 교훈을 모아놓은 성경을 완성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세상의 지식들이 사람들에 만족과 풍요와 자유를 주는 것입니까? 결론적으로 아니며 ‘헛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지식은 아무런 쓸모없기 때문에 허무하다고 허무주의(nihilism)에 빠지도록 한 것입니까? 그는 사람들의 지식과 지혜의 한계성을 깨닫게 하기 위해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전능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께로 접근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2) 세상 지식의 결과(17-18)

세상의 지식의 한계성을 알아야합니다. 이 세상에서 잠시 동안 지식적인 것을 쌓아 ‘엘리트’라고 자부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에게 진정한 유익을 줄 수 있습니까? 외적인 모습은 엘리트화 되어 갈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지식이 자신의 영혼을 맑게 해줄 정화제는 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영원한 것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이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무지개는 아름다워 보이지만 잡을 수 없습니다. 지식적으로 많은 것을 쌓은 것이 사람들에게 부러워 보일 것입니다.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안습니다.

17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17)

솔로몬이 말하는 하나님을 떠난 지식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밖에 있는 지식을 솔로몬은 아주 심한 표현으로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러한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마음을 밝게 해주고 행복을 주기 보다는 정신적으로 부담을 주고 고통을 준다는 것입니다.

많이 배워야 하면 사람 노릇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무엇을 많이 가지고 있어야만 사람 노릇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야 창조된 인격이 형성되고 사람다운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께만 새롭게 만드는 창조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 곳을 통해 놀라운 만족이 있습니다.

지혜로써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아무런 소득이 없는 헛수고입니다.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많은 지식과 지혜를 구하지만 결국 이로써 얻는 것은 더 많은 문제로 인한 혼란뿐입니다. 즉 지혜와 지식을 쌓을수록 분명해지는 것은 그것으로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뿐입니다.


예배나 성경공부가 성경의 지식을 채우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 학습이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 앞에 자신의 진 모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할 수 밖에 영적 상태로 성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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