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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04-02)



삶을 위한 경쟁(2)

전도서 4장 7-12절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돕는 배필로 여자를 만드시고 더불어 함께 살아가게 하셨습니다(창 2장). 그러기 때문에 시편에서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133:1)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상에 주심도 신앙고백하는 성도들이 모여 서로 격려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라고 세우셨습니다. 혼자서는 넘어지고 쓰러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합심하고 협력하여 승리의 삶을 살기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길 원하십니다.

  

솔로몬은 4장 1-8절까지를 통해서 3가지 목적을 지적했습니다. 권위를 위한 삶, 경쟁적인 삶, 물질을 위한 삶 등을 지적해 주었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연장선상(延長線上)에서 끝없는 탐욕을 이야기합니다. 다른 사람들에 삶의 목적이 있어 살아가는 것이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끝없는 탐욕(7-8)

사람들은 삶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이 삶에 가치관이 되어 사람의 삶을 이끌고 나갑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삶에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삶의 목적까지도 없으면 정말로 짐승과 같이 살아갑니다. 사람의 욕망은 채워도 채워도 만족하지 않습니다.

7내가 또 다시 해 아래에서 헛된 것을 보았도다 8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이 홀로 있으나 그의 모든 수고에는 끝이 없도다 또 비록 그의 눈은 부요를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위하여는 이같이 수고하고 나를 위하여는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가 하여도 이것도 헛되어 불행한 노고로다(7-8)

본문에서 전도자는 끝없는 인간의 탐욕에 대한 실제적인 예로 죽은 후에 남겨 줄 대상도 없는 사람이 재물 쌓기에 여념이 없는 경우를 들고 있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유산으로 넘겨줄 처자식도 없는데, 물질에 대한 욕망을 가득하여, 계속 수고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의 욕망으로 수고하는 모습은 자신을 위한 삶은 없고, 남을 위해 수고하는 것이었습니다. 본인에게는 얼마나 헛된 일입니까?

이 세상을 욕망에 끌리는 삶을 살아보니깐, 진정한 안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창조를 하실 때, 6일 동안 일하시고 제 7일에 안식하셨습니다. 이 안식은 ‘쉼’의 개념보다는 ‘누림’의 개념입니다. 이곳에서 말하는 ‘안식이 없다.’는 의미는 누림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처자식도 없는데, 일하는 것을 보니깐, 자신을 위하는 일이 아니라 남을 위하는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안식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모든 재주로 말미암아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4)라고 하였습니다. 시기심이 충돌질하여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의 것을 ‘누림’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욕망(欲望)은 그 자체가 소외와 결핍을 느끼는 데서 시작되므로 만족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욕망을 이루기 위한 수고는 헛되고 무익합니다.

  

사람을 의지한 사람(9-12)

사람들은 혼자는 살 수 없습니다. 서로가 도움을 주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나타내는 한자인 ‘사람 인(人)’자도 서로 의지하고 서 있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람은 서로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9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10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11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12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9-12)
 
짧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세상의 것들을 좇아 정신없이 살아가지 말고, 주님께 먼저 나아와 마음의 쉼을 얻고, 성령 안에서 연합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1)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9-10)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고 살아가는 우리는 해 아래에서 어떠한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가?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로서 형제, 자매에게 사랑으로 대하며, 서로 돕는 자가 되어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본문에서 솔로몬은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을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9) 여기서 ‘상’은 어떤 사람의 노동력을 고용하여 지불되는 대가를 가리킵니다. 공동 번역에서는 “혼자서 애를 쓰는 것보다 둘이서 함께 하는 것이 낫다. 그들의 수고가 좋은 보상을 받겠기 때문이다.”(9) 혼자서 애쓰는 것보다 둘이서 함께 할 때 좋은 성과가 있고, 좋은 보상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역도 혼자 못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함께 도우며 출애굽의 과정을 잘 이끌었던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모세와 아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이 우둔하다고 고백하는 모세에게 형 아론이 있음을 언급하시며 마땅히 출애굽의 사명을 감당할 것을 명하십니다(출 4:14-16).

주의 뜻 안에서 서로 협력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일은 멋진 일인데, 자신이 그 일에 동참하고 있다면 그는 복된 사람일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고전 12:18-21)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존귀한 자들이며 서로가 한 몸임을 깨닫고, 서로 하나가 되어 주의 일을 잘 감당하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서로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기를 소망합니다. 본문에서 솔로몬은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10) 혼자가 아니라 함께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했으나 아들이자 다윗의 친구인 요나단은 다윗에게 용기를 줍니다(삼상 23:16). 다윗이 십 광야 수풀에 있을 때 요나단은 다윗에게 두려워 말라 말하고, 친구 다윗이 왕이 되며 자기는 다음이 될 것을 아버지도 안다고 말하며 그에게 용기를 준 것입니다. 우리 또한 서로 좋은 믿음의 친구가 되어 서로에게 힘을 주고,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위해 함께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믿음 안에 있는 한 지체로서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함께 이 길을 걸어가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나’는 무엇을 결단할 수 있겠는가? 믿음 생활을 하면서 어려운 일들을 겪기도 하겠지만 서로의 관계 속에서 잘 연단 받고 성장하여,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잠 27:17) 쇠는 쇠에 대고 갈아야 날이 서고 사람은 이웃과 비비대며 살아야 다듬어짐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공동체, 그리고 형제와 자매가 되어 늘 주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2) 세 겹줄은 끊어지지 않음(11-12)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고 살아가는 우리는 해 아래에서 어떠한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까? 우리는 믿음의 지체들이 연합할 때 승리할 수 있음을 알고,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어 끝까지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혼자가 아무리 강할지라도 약한 자의 연합보다는 약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솔로몬은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11)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추운 방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해진다. 그러나 혼자서 어떻게 따뜻해질 수 있겠는가?”(현대인성경) 난방도 되지 않는 방에 혼자 누워있으면 춥겠지만,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게 잘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닌 함께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연합의 힘이 위대함을 마음 깊이 새겨야 합니다. 본문에서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12) 여기서 ‘끊어지지’는 ‘뽑아내다, 근절하다, 부수다.’는 뜻입니다. 이는 단순히 뽑아내는 것부터 뿌리채 뽑아내는 것까지 두루 사용될 수 있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삼겹으로 묶은 줄의 단단한 결속력을 비유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공동번역은 “혼자서 막지 못할 원수도 둘이서는 막을 수 있다. 삼겹으로 줄을 꼬면 쉽게 끊어지지 않는 법이다.”(12) 영적 전투가 일어나는 상황 가운데서도 한 사람보다는 두 사람이, 두 사람보다는 세 사람이 강한 전투를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삶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어려움이 있다면 그 상황을 함께 나누고 기도하여, 넘을 수 없어 보이는 장애물도 능히 돌파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구약성경에는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등장하는데, 그들은 한 믿음으로 승리를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신상 앞에 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결국 풀무 불 가운데 던져 넣음을 당할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신상 앞에 절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인 세 친구에게 화가 나 있는 느부갓네살 왕에게 그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단 3:16-17). 그들은 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한 다니엘의 세 친구와 같이, 우리 또한 연합하는 믿음으로 영적 전투에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어 끝까지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 성령으로 연합하여 평안함 가운데 거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세 겹줄이 끊어지지 않음을 기억하며 늘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영적 전투에 승리하고, 믿음으로 주의 사역을 잘 감당하는 바랍니다.

  

권력을 의지하려는 사람들(13-16)

미국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퇴임 이후 지금도 계속적으로 영향력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도 국제적으로 분쟁 지역을 다니면 평화의 중재자(Peace Marker)가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도자만 있다면, 평화로운 세상이 될 것입니다.

13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젊은이가 늙고 둔하여 경고를 더 받을 줄 모르는 왕보다 나으니 14그는 자기의 나라에서 가난하게 태어났을지라도 감옥에서 나와 왕이 되었음이니라 15내가 본즉 해 아래에서 다니는 인생들이 왕의 다음 자리에 있다가 왕을 대신하여 일어난 젊은이와 함께 있고 16그의 치리를 받는 모든 백성들이 무수하였을지라도 후에 오는 자들은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13-16)

삶의 부조리함과 고통의 원인이 되는 사례들 가운데 마지막 문제는 권력과 명예에 대한 추구입니다.

세상의 모든 권력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습니다(롬 13:1). 그런데 사람들은 권력을 주면 권력에 취합니다. 탐욕으로 놓지 않으려고 합니다.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에 우선순위를 둘 때 사람은 자기만을 생각하게 됩니다. 스스로 자신을 우상화시키고 백성들을 무시하게 됩니다. 그렇다 보면, 권력이 취해 진정 돌아봐야 할 백성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계속적으로 권력을 가지고 누리려고 무력을 사용하는 폭군이 되어집니다. 그 마지막이 파멸인 줄 알면서도 탐욕을 제어하지 못하는 인간의 비극을 끊기 위해서는 삶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왕에게 “그는 마병을 많이 두지 말 것이요 …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신 17:16-17)라고 하셨습니다. 왕에게 권력이 있게 되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교만해져 버립니다.

이스라엘의 첫 왕인 사울 왕은 처음에는 매우 겸손했습니다. 사울은 사무엘 선지자가 왕으로 세움을 받으려 할 때, 그는 아버지 암나귀들을 잊어버려 찾으려 다닙니다. 그래서 사무엘을 만사서 당신이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할 때, “저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작은 지파인 베냐민 사람이며, 그 지파 중에서도 가장 보잘것없는 가문 출신입니다. 어찌하여 제게 이렇게 말씀하십니까?”(삼상 9:21)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왕위에 오른 후에 점점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합니다. 그리고 교만해져 하나님께 폐역한 악한 왕이 됩니다. 이렇게 교만하게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 사람이 된다면, 그는 자신에게는 차라리 왕이 되는 것보다 그냥 가난한 채 시골에서 농사 짖는 농부로 있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13).

솔로몬은 요셉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그는 가난하게 시작하였고, 감옥까지 들어갔습니다(14). 그는 한때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박수를 받는 총리의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그는 끝까지 겸손하게 지혜롭게 통치했습니다. 그의 치적(治積)은 이집트 역사에서 토지제도를 바꿀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획을 긋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지만 후대에게 많은 영향력과 기억을 오래도록 했습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새 왕이 나오는 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립니다(출 1:8). 왕에 대한 인기를 그렇게 오래 가지 않습니다. 이러한 결과를 보면, 왕권을 통해서 자신의 만족을 얻으려는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전 세상을 다스릴 왕권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없는 삶은 모든 것이 헛되고 마음을 괴롭게 할 뿐입니다(4,8).

왕권이 무익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물질이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많은 물질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복됩니다. 권력도 없는 것보다도 많은 것을 소유하면서 더 많은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면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통치권에 대해서도 기독교적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나님을 통치권을 관리할 수 있도록 주셨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창세기 1장 26절에 하나님께서 피조물에 대한 통치권을 왕으로서 받아서 관리해야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것들에 집착하는 당신에게 권합니다. 마가복음 8장 36-37절에서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없는 명성은 덧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삶은 절대적으로 무익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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