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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박국(03-01)


하나님의 심판

하박국 3장 1-19절


고난 당하는 자는 기도하고, 즐거원하는 자는 찬송하나는 야고보 사도의 말씀이 있습니다(약 5:13). 그러나 하박국 선지자는 고난 중에서 즐거움을 발견하고 찬송합니다. 그난 중에도 즐거움으로 찬송하는 영적인 능력을 배우는 성도가 되기를 원합니다. 

 

  • 하박국의 결론부로서 하나님께 드리는 하박국의 기도입니다. 그동안 하박국은 하나님과의 두 번의 대화를 가졌고, 그 대화 가운데 하나님께 두 번 질문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대답을 들은 하박국은 이제 질문 대신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에 대한 신뢰의 노래를 부릅니다. 전체적으로 전쟁을 수행하시는 용사로 하나님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기도의 시작(1-2)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날 때, 하나님께서 침묵하시거나 무능하신 분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와 현재의 모든 사건이 연결되어 위대하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박국은 모든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1시기오놋에 맞춘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 2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1-2)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놀람, 곧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그 일이 수년 내에 부흥하고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곧 유다를 심판하신다는 말씀이 속히 이뤄지기를 원하다고 기도합니다.

 

(1) 표제(1)

 

3장을 하박국의 기도라고 합니다. 하박국은 1-2장에서는 하나님께 질문을 했었으나, 이제는 기도로 그의 자세가 바뀌었습니다. 이것은 2장에서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반드시 심판하셔서 공의를 세우실 것임을 알게 되었고, 그러한 하나님의 정하신 때를 기다리는 것이 의인의 성실함과 믿음인 것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기도를 드리기 시작합니다.

 

(2) 기도의 시작(2)

 

하박국은 자신이 하나님의 소식을 들었고 그의 행하심으로 인해 놀랐다고 고백합니다. 바벨론을 불러 유다를 치시려는 계획으로 인해 놀랐다는 뜻입니다. 그러나이제 그는 그 일을 ‘부흥케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여기서 ‘부흥케 하다’의 원어는 ‘하야’로서 ‘살다’라는 동사의 피엘 명령형입니다. 그 일에 생명을 부여해 달라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벨론을 들어 유다를 치시는 일을 행해달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게 된 하박국의 믿음을 잘 표현하는 문구입니다. ‘진노 중에도 긍휼을 기억하소서’라는 2절 끝부분의 표현은 바벨론이 유다를 침략할 것을 이제 받아들이지만, 그 과정 중에 유다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하박국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이제 그는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게 되어 2:40이 말하는 ‘의인’다운 모습을 갖게 되었고, 그러한 의인 가운데는 현재의 일을 향한 떨림이 있지만 그 떨림을 넘어서는 믿음이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전쟁의 용사이신 하나님(3-12)

하나님의 통치와 권능은 막연한 미래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충분히 눈으로 보고 안 것이고, 지금 우리 삶에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지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가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엄위하심이 오히려 안전을 보장해 주는 큰 힘이 됩니다. 오직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얻을 수 있습니다.

 

3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 산에서부터 오시는도다 (셀라) 그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그의 찬송이 세계에 가득하도다 4그의 광명이 햇빛 같고 광선이 그의 손에서 나오니 그의 권능이 그 속에 감추어졌도다 5역병이 그 앞에서 행하며 불덩이가 그의 발 밑에서 나오는도다 6그가 서신즉 땅이 진동하며 그가 보신즉 여러 나라가 전율하며 영원한 산이 무너지며 무궁한 작은 산이 엎드러지나니 그의 행하심이 예로부터 그러하시도다 7내가 본즉 구산의 장막이 환난을 당하고 미디안 땅의 휘장이 흔들리는도다 8여호와여 주께서 말을 타시며 구원의 병거를 모시오니 강들을 분히 여기심이니이까 강들을 노여워하심이니이까 바다를 향하여 성내심이니이까 9주께서 활을 꺼내시고 화살을 바로 쏘셨나이다 (셀라) 주께서 강들로 땅을 쪼개셨나이다 10산들이 주를 보고 흔들리며 창수가 넘치고 바다가 소리를 지르며 손을 높이 들었나이다 11날아가는 주의 화살의 빛과 번쩍이는 주의 창의 광채로 말미암아 해와 달이 그 처소에 멈추었나이다 12주께서 노를 발하사 땅을 두르셨으며 분을 내사 여러 나라를 밟으셨나이다(3-12)

 

3절부터는 열방을 향해 전쟁을 선포하시고 그 전쟁을 수행하시는 용사로서의 하나님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데만과 바란 산에서부터 오신다고 묘사합니다. 데만은 요단 동편의 에돔 지역이고, 바란 산은 시내산과 에돔 사이에 있는 지역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 지역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러 임하시는 분입니다. 3절 하반절부터 5절까지는 하나님의 전쟁하시는 모습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인데,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세상에 가득하고, 하나님의 빛은 마치 날카로운 뿔처럼 빛나며, 그가 가시는 길에는 전염병이 앞뒤에 가득합니다. 전염병은 하나님의 전쟁의 결과 많은 원수들이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문구입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이 크시며 원수들을 물리치시는 강한 용사이심을 나타냅니다. 6절은 용사이신 하나님 앞에서는 땅과 열방과 산이 무너지고 엎드러질 것임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7절은 하나님께서 열방을 무너뜨리실 것을 구산과 미디안의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열방 중에 하나님을 대적할 이가 없는 것입니다.

8-11절은 하나님의 전쟁하시는 모습을 피조 세계의 여러 요소들을 비유적으로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특별히 이 구절들에서 하나님은 피조세계를 향해 전쟁하시는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 물 이미지는 고대 근동에서 죽음과 무질서를 상징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물을 상대로 승리하시고 다스리십니다. 물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 세계들이 하나님 앞에 굴복하며 그분의 통치를 받아들입니다. 하나씩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8절은 하나님께서 말을 타시고 병거를 타신다고 말함으로써 전쟁의 이미지를 더 구체화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전쟁은 강들과 바다를 향해서 노여워하심이라고 표현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물들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물들이 하나님께 복종하고 순종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9절은 하나님께서 화살을 꺼내시고 저주의 말씀으로 땅을 쪼개셔서 그 땅의 쪼개진 부분들이 물로 채워져 강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10절은 산들이 주님 앞에서 흔들리고 바다가 주님께 손을 들고 항복했다고 말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물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피조세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묘사한 것입니다. 11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해와 달과 별들과 같이 빛을 내는 광명체들조차 하나님의 빛 앞에서 멈추었다고 말합니다. 8-11절은 창세기 1장에서 물들을 다스리시고 땅을 드러내시고 광명체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의 권세를 용사의 하나님 이미지로 새롭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12절은 이 문단의 마지막 구절로서, 8-11절에서 하나님께서 창조의 권세로 피조물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시는 용사 이미지를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로 연결 짓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짓밟으시고, 열방을 밟으시고 승리하셨다는 것입니다. 피조세계와의 전쟁 이미지는 결국 바벨론과 같은 열방에게 승리하시는 하나님을 묘사하기 위한 시적 기법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구원의 용사이신 하나님(13-15)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 죄에 대해 징계의 채찍을 드십니다. 때로는 욥의 경우처럼 우리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하시기 위해 환난을 허락하기도 하십니다. 두 경우 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 필요한 구원의 과정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도가 믿음 안에서 당하는 환난은 인내와 연단을 통해 구원의 소망으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13주께서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려고 나오사 악인의 집의 머리를 치시며 그 기초를 바닥까지 드러내셨나이다 (셀라) 14그들이 회오리바람처럼 이르러 나를 흩으려 하며 가만히 가난한 자 삼키기를 즐거워하나 오직 주께서 그들의 전사의 머리를 그들의 창으로 찌르셨나이다 15주께서 말을 타시고 바다 곧 큰 물의 파도를 밟으셨나이다(13-15)

 

13-15절은 앞서 묘사된 전쟁의 용사로서의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목표가 무엇인지를 서술해나갑니다. 13절은 하나님의 전쟁이 바로 주의 백성과 언약백성의 지도자인 기름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기 위함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집 머리를 치시고, 목부터 발끝까지 모두 발가벗기실 것입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는 사실상 다윗 왕조의 후계자인 유다왕국의 왕들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에, 13절은 다윗 언약의 회복에 대한 약속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 언약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전쟁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14절은 하나님께서 기름부음 받은 자와 언약 백성을 대적하는 자들의 머리를 창으로 찌르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창’으로 번역된 ‘마태’는 ‘막대기’,‘지파’를 뜻하는 말인데, 9절에서도 사용되었고 ‘화살’로 번역되었습니다. 14절은 하나님께서 피조세계를 무찔러 승리하신 것처럼 다윗 왕국의 대적들을 무찔러 승리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15절은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말을 타심으로 바다를 밟고 승리하셨다고 선언하면서, 다시금 피조 세계를 다스리시는 이미지를 재활용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승리하시는 최고의 용사이시기에, 유다 왕국의 대적들에게 패배하시지 않는 영원한 승리의 주인공이십니다. 지금 눈앞에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해도, 심지어 바벨론이 유다를 이기는 일이 일어난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패배가 아니며,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이끌어가시는 궁극적인 승리의 일부분인 것이라고 하박국은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고백(16-19)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능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은 곳에 이르게 하시고, 두려워하지 않게 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직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얻을 수 있습니다.

 

16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17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19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16-19)

 

이렇게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를 확신하게 된 하박국은 16-19절에서 자신의 현실로 되돌아와서, 그 승리에 대한 확신을 현재의 삶에 적용합니다. 16절에는 유다를 향해 전쟁하러 올라올 바벨론에 대한 두려움과 그 두려움을 넘어서게 만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함께 어우러져 표현되어 있습니다.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떨리고 썩이는 것이 뼈에 들어온다는 것은 바벨론에게 패배하게 될 전쟁의 처참함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기다린다’는 것은 그 전쟁에서 결국 하나님이 승리하시고 유다를 회복시킬 것에 대한 신뢰의 표현입니다. 이러한 두려움과 신뢰의 이중주는 17절과 18절에서 각각 더 자세히 나타납니다. 17절은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감람나무 이미지를 활용하는데, 이 나무들은 시내산 언약의 축복과 저주를 상징하는 이미지들입니다(참조. 신 28:28-32). 이 나무들에 열매가 없다는 것은 단순한 기근 이상의 것들, 즉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여 전쟁에서 패배하게 됨을 뜻합니다. 그러나 하박국은 18절에서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과 즐거움을 노래합니다. 전쟁의 용사되신 하나님께서 다윗의 나라를 궁극적으로 회복시켜주실 것을 신뢰한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이 구절이 하박국 3장의 마지막에 나타난다는 것은 장차 하나님의 은혜로 다윗 왕국이 다시 회복되어 열방에 대해 승리를 거두게될 것임을 하박국이 믿음으로 선포한다는 뜻이 됩니다. 하박국은 눈 앞에 펼쳐지는 일들 가운데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의심하였으나, 하나님과의 두 번의 대화를 통해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에 복종하는 믿음을 갖게 되었고, 신실함으로 반응하게 되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고통 속에서 오히려 왕 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겠다는 결단을 노래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참 믿음의 사람이 부르는 노래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께 죄에 대한 징계의 채찍을 맞을 수 있다는 것이 은혜입니다. 어떤 일이 있든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잃지 않으리라는 결단을 다시 한 번 확고하게 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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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박국(02-02)


하나님의 응답(3)

하박국 2장 12—20절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것,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려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모든 열방이 주께 돌아와 주를 경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럿이 우리 인생의 목적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갑니까? 아니면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갑니까?

 

  • 이어진 하나님의 두 번째 응답의 하반부입니다. 앞선 두 개의 화(6b-8,9-11)와는 달리 여기에 기록된 세 가지의 화는 모든 여호와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바벨론에게 그 행한 대로 갚으실 것이며, 마침내 그는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13-14,16,20).

 

세 번째 화(12-14)

인간들은 작은 업적이라도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인간의 이름을 남기고 영광을 드러내려고 세우는 모든 바벨론 성과 같은 것들은 반드시 무너뜨리실 것입니다. 그 인간의 영광이 잿더미로 변해갈 때, 하나님의 영광은 온 세상에 편만해질 것입니다.

 

12피로 성읍을 건설하며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13민족들이 불탈 것으로 수고하는 것과 나라들이 헛된 일로 피곤하게 되는 것이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 아니냐 14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12-14)

 

세 번째 화는 ‘피로 성읍을 건설하고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자’들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노예들의 피와 땀, 가혹한 매질과 눈물로 세워진 것들은 그 야망과 더불어 모든 것이 헛것이 될 것입니다. 이곳에서 ‘피(ימד다임)’는 ‘땅에 흘려진 피’를 의미합니다. 바벨론이 다른 민족들의 피를 흘리고서는 그 피를 가지고 자신의 성읍을 세웠음을 지적하는 표현입니다. 즉, 세 번째 화는 이웃을 멸망시켜 자신을 부요하게 하는 자에 대한 화입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화가 오게 됩니다. 민족들은 피곤하고 지칠 정도로 많이 수고하지만, 결국 모든 것은 불에 타버리게 될 것이고, 힘들게 노력할지라도 결국은 수포로 돌아갈 뿐인데 이런 일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결과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정녕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가득하게 될 것이다’(14)라고 선포합니다. 바벨론에 임하게 될 저주를 설명하다가 갑자기 ‘여호와를 아는 지식’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이곳에서 ‘알다(עדי야다)’는 경험으로부터 근거한 통전적인 지식을 가졌다는 뜻을 지녔으므로, 우리는 ‘모든 열방이 여호와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민족들은 자신들의 수고가 모두 불쏘시개가 되어버리는 상황을 경험하면서 이 모든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이신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 화는 단순히 바벨론을 향한 분노의 심판에 머물지 않고, 모든 열방의 민족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게 되는 궁극적인 회복의 때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런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참된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이 바다를 덮은 것처럼 온전히 모두 다 덮었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물이 바다를 덮지 않은 곳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지식이 열방 가운데 임하게 되는데, 어느 한 민족 빠짐없이 모든 열방에서 임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큰 성 바벨론이라 할지라도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잠시 있다가 불탈 것을 위해 수고하지 말아야 합니다. 영원한 나라를 위해 수고하고 모든 삶을 드립시다.

 

네 번째 화(15-17)

하나님께서는 결코 악인의 행위를 정당화하지 않으시고, 죄에 대해 확실하게 보응 하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재앙을 피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경건한 삶을 통해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악행을 행한 자들에게 반드시 보응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웃과 평화를 누리기를 힘써야 합니다.

 

15이웃에게 술을 마시게 하되 자기의 분노를 더하여 그에게 취하게 하고 그 하체를 드러내려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16네게 영광이 아니요 수치가 가득한즉 너도 마시고 너의 할례 받지 아니한 것을 드러내라 여호와의 오른손의 잔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라 더러운 욕이 네 영광을 가리리라 17이는 네가 레바논에 강포를 행한 것과 짐승을 죽인 것 곧 사람의 피를 흘리며 땅과 성읍과 그 안의 모든 주민에게 강포를 행한 것이 네게로 돌아오리라(15-17)

 

네 번째 화입니다. ‘다른 민족에게 수치를 주는 자’에게 내려지는 화입니다. 15절은 이웃에게 술을 마시게 하는 자에게 저주를 선언합니다. 이웃이란 바벨론의 침공을 받은 열방을 뜻하는데 이웃이라고 표현된 것은 바벨론이 그들을 침략에서는 안되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15-16절의 문맥은 ‘술 취함’이라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바벨론이 행한 그대로 그들에게 되갚으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민족에게 술취하게 하여 그들을 수치스럽게 만든 바벨론이므로 하나님은 그 손의 잔을 바벨론에게 부어 취하게 하고 수치스러운 일을 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벌거벗음’의 이미지 역시 바벨론에게 다시 적용됩니다. 15절에서는 바벨론은 다른 민족의 하체를 드러내어 그들을 수치스럽게 하려 했는데 16절에서 하나님은 바벨론의 할례 받지 아니한 것을 드러내어 수치스럽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오른 속의 잔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라는 것도 여호와의 심판을 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잔을 진노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나 민족에게 부으실 것인데 그러면 그들은 그 포도주에 취하여 비틀거리며 걷게 되고 잘못된 결정과 삶의 행위들을 통해 결국 고난과 수치에 이르게 됩니다. 17절에서는 하나님이 바벨론에게 수치를 더하는 이유는 그들이 강포를 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강포에 대한 책임을 바벨론에게 물으신다는 하나님의 선언은 하나님께서 1장에 나타난 하박국의 요청 즉 공의를 행해달라는 요청을 행하실 것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다섯 번째 화(18-20)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로마 등의 제극들을 통해 모든 우상숭배자들을 멸하시고 결국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참 성전을 세우게 하시고, 그 몸 된 교회가 온 세상에 퍼져나가 결국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 굴복하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악의 세력들은 날뛰고 있지만, 하나님의 권능 앞에 결국은 모두 잠잠해질 것입니다.

 

18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19나무에게 깨라 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에게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것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보라 이는 금과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속에는 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 20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시니라(18-20)

 

다섯 번째 화입니다. 대상은 우상을 숭배하는 자입니다. 18절은 새겨 만든 우상과 부어 만든 우상이라는 두 종류의 우상을 언급합니다. 우상을 만든 자들에게조차 그 우상들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우상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신들의 형상이 아니고 인간이 만들어낸 것일 뿐이며 따라서 그것을 만들어낸 장인들에게조차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말조차 하지 못하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 허무함은 ‘거짓스승’이라는 표현에서 드러납니다. 19절은 금과 은을 말하는 못하는 돌과 나무에 입힌 것일 뿐이어서 그 안에는 영혼이 없는 무생물일 뿐이고 따라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교훈을 베풀지 못한다. 20절은 다섯 번째 화의 결론입니다. 여호와께서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이 그 앞에 잠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벨론뿐만 아니라 온 세계의 민족들은 하나님 앞에 잠잠해야 한다. 잠잠하다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이 섬기던 거짓 스승 우상들을 모두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일어서나 들을 수 없는 목석과 달리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시고 말씀하시고 통치하십니다. 알 수 없는 신비로운 뜻을 성취해 가십니다. 그 앞에 모든 의문을 잠재우고, 불평을 그치고, 그리고 침묵합시다. 잠잠히 믿음으로 맡기고, 그분의 얼굴을 구하시길 바랍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 앞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기다림이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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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박국(02-01)


하나님의 응답(2)

하박국 2장 2-11절


 

힘들고 깜깜할수록 하나님께 많은 말을 쏟아냅니다. 정작 하나님의 대답을 오래 기다리지 않습니다. 기도하여 답답한 것을 시원하게 풀어내는 것만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느낌으로 기도를 생각한다면, 상담사를 찾아가서 넋두리를 늘어놓으시고, 넋두리이나 하소연을 들으시고 정작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 하나님을 만든다면, 이런 태도는 정말로 기도를 한 적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하박국은 기도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하박국의 두 번째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바빌론을 향한 심판을 정당성을 주장하는 선지자에게, 이스라엘의 심판이 끝이 아니며, 최종적인 심판의 때가 곧 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묵시에 대해서 설명하시고(2-3), 의인은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으로 살게 됨을 알려주십니다(4). 또한 악인의 특징을 묘사하신 후(5-6a), 다섯 가지 재앙(6b-20)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응답(2-5)

환경과 상황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묵시를 마음 판에 새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달려가도 볼 수 있을 만큼 선명하게 기록하라고 하십니다. 복잡한 환경 속에서 허우적대지 않고 말씀에 집중할 때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의인으로서 믿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묵시가 없으면 방자해집니다.

 

2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3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4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5그는 술을 즐기며 거짓되고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스올처럼 자기의 욕심을 넓히며 또 그는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르고 자기에게로 여러 나라를 모으며 여러 백성을 모으나니(2-5)

 

하나님께서 심판의 때를 정하시고, 그때가 되면 지체하지 않고 반드시 심판을 시행하실 것입니다. 거짓되거나 실망시키는 일 없이 계시하신 대로 성취하실 것입니다. 약속이 얼마나 신실하고 확실한지 보이시기 위해 계시를 기록하라고 하십니다.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도록 선명하게 기록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이 다르기에 더디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그 확실한 실현만은 굳게 믿고 인내를 가지고 말끔의 경주를 해야 합니다.

 

⑴ 묵시에 대한 소개(2-3)

 

먼저 하나님께서는 하박국에게 ‘묵시’를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묵시(ןוזח하쫀)’란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내려주시는 ‘환상’을 뜻합니다. 말씀을 통해 현실을 보라는 것입니다. 어려운 현실을 이기는 방법은 말씀을 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바벨론의 공격이라는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현실을 이기는 길은 오직 말씀뿐이었습니다. 성경은 말씀을 통해 현실을 보는 것을 두 가지로 정리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3). 바로 심판이 임하거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한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임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묵시를 판에 선명하게 기록해서 달려가면서 읽어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환상의 내용은 악한 자에게 하나님의 저주가 임할 것이라는 내용인데, 바벨론을 향한 선포인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오는 것입니다.

선지자 하박국이 바벨론에 대한 심판은 ‘정한 때가 있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바로 심판이 응답이 되지 않게 보일지라도 언젠간 반드시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환상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에 거짓된 것이 결코 아닌데, 다만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바벨론을 데려와 유다를 심판하시는 일이 먼저 이루어지고 그 다음에라야 바벨론을 심판하신다는 의미가 됩니다.

 

(2) 악인과 의인의 비교(4)

 

악인과 의인을 대비합니다. 즉 악인은 교만하며 정직하지 못합니다. 즉 교만하며 속과 겉이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1장에서 말하고 있는 공의롭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에 비하여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자입니다. 여기서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은 신실함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의인의 신실함은 무엇을 말합니까? 바벨론을 심판하는 그 방법과 그 시기를 선택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을 신뢰하는 것, 그것이 신실함입니다. 즉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의인입니다.

 

다섯 가지 ‘화 있을진저’: 첫째와 둘째(6-11)

성도는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한 자가 들끓어도 믿음으로 살아가야합니다. 그것은 역사의 주관자는 항상 눈에 보이는 악한 권력자가 아니라 눈에 뵈지 않는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며 산다는 뜻입니다. 악인에게 집중하면 불만이나 두려움에 사로잡히지만, 믿음은 우리를 견고하게 서게 합니다.

 

6그 무리가 다 속담으로 그를 평론하며 조롱하는 시로 그를 풍자하지 않겠느냐 곧 이르기를 화 있을진저 자기 소유 아닌 것을 모으는 자여 언제까지 이르겠느냐 볼모 잡은 것으로 무겁게 짐진 자여 7너를 억누를 자들이 갑자기 일어나지 않겠느냐 너를 괴롭힐 자들이 깨어나지 않겠느냐 네가 그들에게 노략을 당하지 않겠느냐 8네가 여러 나라를 노략하였으므로 그 모든 민족의 남은 자가 너를 노략하리니 이는 네가 사람의 피를 흘렸음이요 또 땅과 성읍과 그 안의 모든 주민에게 강포를 행하였음이니라 9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높은 데 깃들이려 하며 자기 집을 위하여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10네가 많은 민족을 멸한 것이 네 집에 욕을 부르며 네 영혼에게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6-11)

 

2:6-20에는 ‘화 있을진저’가 다섯 차례 나와 단락을 형성하며, 단락마다 바벨론의 죄악을 고발합니다. 이 단락은 하나님의 둘째 대답(2:2-5)에 대한 부가적인 계시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고발된 바벨론의 죄악은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심판하시는 근거가 됩니다.

 

(1) 첫째 ‘화 있을진저’(6-8)

 

교만하고 거짓된 바벨론을 향한 첫째 ‘화’는 그가 여러 나라를 노략했음을 지적하면서 똑같이 앙갚음당할 것을 예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모습을 ‘자신을 넓혀가며 족한 줄 모르고 열방들을 모으는 자’(5)로 표현합니다. 바벨론은 욕심과 교만으로 인해 스스로는 넓어지고 성장하는 줄 알지만 결국은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먼저, 앙갚음은 열방이 바벨론의 패망을 속담과 수수께끼로 만들어 조롱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열방과 민족들을 쓸어 모으던 자(5,6)는 그 열방을 비웃었지만, 때가 이르면 패망하여 열방의 웃음거리(오바댜 12-13; 나훔 3:18-19; 예레미야애가 1:7)가 될 것입니다.

6절의 ‘언제까지 이르겠느냐?’는 ‘이제 끝났다’는 의미입니다. 열방이 장차 바벨론을 충자하며 조롱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6절 하반절부터 첫 번째 화를 선포합니다. 자기 소유가 아닌 것을 모으는 자를 향한 저주입니다. 다른 나라를 멸망시켜서 자기 것으로 삼았는데 그것은 사실상 빚진 것이나 다름없다는 의미입니다. 바벨론은 자기 소유가 아닌 열방의 땅과 백성과 재산을 모아 늘려가는 자이며, 담보(‘볼모’로 번역됨)를 늘려 빚을 많이 진 자와 같습니다(6). 채무자들이 갑자기 일어날 것이고 그들이 잠에서 깨어나 바벨론을 괴롭힐 것이며 결국 바벨론이 노략을 당하게 될 것임을 선언합니다(7). 그리하여 그동안 바벨론에게 침략 당했던 민족들로부터 남은 자가 나와서 바벨론을 침략하게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바벨론이 그들의 피를 흘리면서 강포를 행했기 때문입니다. 즉 첫 번째 화는 하나님께서 바벨론에게 공의를 행하셔서 그들의 행한 대로 갚으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8).

이런 사람에게 갑자기 채무자들(‘억누를 자들’)과 압제자들이 들이닥치듯, 바벨론은 약탈당할 것입니다. 바벨론이 위세를 높여가며 열방을 공격할 때, 백성을 죽이고 땅, 성읍, 주민에게 강포(폭력)를 행했으므로, 이제 반대로 열방의 남은 백성이 바벨론을 노략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메대와 바사 연합국을 일으켜 바벨론을 약탈할 계획을 이미 갖고 계셨습니다(예레미야 25:12,14; 50:10).

 

(2) 둘째 ‘화 있을진저’(9-11)

 

둘째 ‘화’는 ‘자기 집을 위해서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자’에 대한 경고입니다. 바벨론 특히, 왕의 이기심과 탐심을 책망합니다. 하지만 악인은 자신의 악으로 인해 내려지는 하나님의 심판의 재앙을 결코 피할 수 없습니다. 바벨론은 제 나라와 왕조만 귀하게 생각해, 재앙이 닥칠 때 피할 있도록 높은 데 둥지를 틉니다. 마치 에돔이 높은 산 바위틈에 자리 잡고 적군이 쳐들어올 수 없다고 자만한 것처럼(오바냐 3), 바벨론 왕 또한 적군이 틈탈 수 없는 곳을 마련하고 부당한 이득을 취해 재산을 증식합니다. 그러나 이기심과 탐욕의 결과는 수치와 범죄일 뿐입니다. 그가 백성들을 가지 치듯 잘라낸 것이 도리어 그의 왕조에 수치를 가져오고, 자신에게 죄를 짓게 만듭니다. 즉, 바벨론에게 심판으로 돌아온다는 의미입니다. 바벨론이 많은 열방을 멸망시킨 것이 사실은 자신에게 수치를 불러오게 만드는 충고였음을 조롱하는 뉘앙스로 알려줍니다. 열방을 취한 것이 잘한 행동인 줄 알았기에 충고가 될 것으로 생각했으나 결국은 자신을 멸망시키는 수치가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10).

11절에서 ‘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나무('집’으로 번역됨)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라는 문장은 담의 돌과 나무로 만든 집의 들보가 빠져 무너지는 모습으로, 바벨론 왕조의 몰락을 비유적으로 표현합니다. 바벨론의 집이 무너지는 모습을 묘사하는데 담에서 돌이 부르짖는다는 것은 성벽의 돌들이 무너진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목재 구조물에서 들보가 응답한다는 것은 목재로 지은 집들로부터 들보가 무너져 내린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화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악한 이득을 취하는 자들 곧 바벨론에게 있게 될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부당한 일들의 연속입니다. 부정적하고 악한 자들이 득세하고 정직한 자들은 손해를 보는 일이 흔합니다. 이것이 성도에게 믿음이 요청되는 상황입니다.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고 악의 최후와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때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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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박국(01-02)


하박국의 질문(2)

하박국 1장 12절-2장 1절


 

우리는 부모님에게서 안정감을 누립니다. 그것은 우리의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 세상에 직위가 어떤 위치든지 이런 것과는 상관없이 부모님에게서 안정감을 찾게 되는 것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부모님에게서 안정감을 누리는 것은 부모님께서 힘이 강하거나 재물이나 능력이 많아서도 아닙니다. 다만 부모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변함없이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믿음과 신뢰가 안정감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안정감을 누리는 것도 비슷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토록 변함없으실 사랑으로 안정감을 누리고 살아갑니다.

 

  • 하나님과 하박국의 두 번째 대화로 하박국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장면입니다. 하박국은 하나님께 자신의 생각을 요청하면서 유다 왕국을 돌보아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성과 정결하심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계획이 공의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시는지 보겠다고 선언합니다.

 

하박국의 질문(2)(1:12-2:1)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이 범죄한 사실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범죄를 징계하시려고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이방 민족을 세우신 것은 더 이해되지 않습니다. 단순한 징계의 도구를 넘어 바벨론은 다른 여러 나라들까지 정복하며 승승장구합니다. 하박국은 화가 날 정도로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입니다. 악을 싫어하시고 패역을 참지 못하시는 하나님께서 왜 이런 상황에서도 잠잠 하시는지, 마치 보지 못하는 것처럼 가만히 계시는지 모든 것이 의문투성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그 모든 것의 대답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12○선지자가 이르되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이시여 주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그들을 두셨나이다 반석이시여 주께서 경계하기 위하여 그들을 세우셨나이다 13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14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을 바다의 고기 같게 하시며 다스리는 자 없는 벌레 같게 하시나이까 15그가 낚시로 모두 낚으며 그물로 잡으며 투망으로 모으고 그리고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16그물에 제사하며 투망 앞에 분향하오니 이는 그것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먹을 것이 풍성하게 됨이니이다 17그가 그물을 떨고는 계속하여 여러 나라를 무자비하게 멸망시키는 것이 옳으니이까 2:1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1:12-2:1)

 

하박국은 하나님의 결정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은 신뢰하였습니다. 바벨론은 자기 힘을 신으로 삼았지만, 오직 한 분 여호와만이 만세 전부터 역사의 주인으로 계셨으며, 죄를 용납하지 않으시는 거룩한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1) 하나님의 영원성에 기초한 질문(12)

 

하박국은 첫 번째로 하나님의 영원성에 기초하여 질문합니다. “주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라는 하박국의 질문은 수사학적 질문을 사용하는데, 수사학적 질문이란 긍정과 부정을 뒤바꾸고, 의문문과 평서문을 뒤바꾸어, 문장의 의미를 강조하는 기법입니다. 즉 “주는 만세 전부터 계시나이다”의 의미를 강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계시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하박국은 왜 이러한 하나님의 영원성을 강조하려는 것입니까? 12절 중반부에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라는 구절을 함께 생각하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서기관의 정정”으로 불리는 본문으로, 원래는 “주여 당신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십니다”라는 본문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죽음에 이르실 수 있다는 가능성을 포함한 표현이 아닙니다. 문장 그대로 하나님은 죽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며, 그분의 존재하심은 끝나지 않습니다. 즉 시간이라는 개념이 하나님의 존재를 정의를 내리거나 제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12절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심판하시기 위하여 그들을 두셨고, 경계하기 위하여 그들을 세우셨나이다.’ 여기서 ‘그들’은 5-11절에서 언급된 ‘바벨론 제국’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 제국을 세우신 이유를 ‘심판’과 ‘경계’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심판’으로 번역된 원어가 바로 ‘미쉬파트’인 것을 주목해서 보아야 합니다. 이 ‘미쉬파트’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서 구현된 상태 혹은 그렇게 되게 하기 위한 도구 및 기준을 뜻합니다. 4절에서 ‘정의’로 번역되었고 7절에서 ‘당당함’으로 번역되었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의 ‘미쉬파트’가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잘못된 ‘미쉬파트’의 기준을 가진 바벨론이 유다 땅에 오게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해 12절에서 하박국은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사용하시는 기준은 바로 이 ‘미쉬파트’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기준에 합당하다고 판단되는 범주 안에서만 바벨론을 사용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2절 하반절에 나오는 ‘경계하다’의 원어인 ‘야카흐’는 ‘꾸짖다’, ‘책망하다’라는 의미인데, ‘미쉬파트’와 비슷하게, 바벨론을 사용하려 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의 범주를 제한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하박국은 바벨론을 사용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세상을 꾸짖고 책망하시는 범주, 즉 하나님께서 바른 기준으로 세상을 지도하시는 그러한 범주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신 분이기에, 그래서 변치 않으시는 분이기에, 하나님의 ‘미쉬파트’는 올바르게 실행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7절에 의하면, 그들의 마쉬파트는 자신 스스로가 기준이 되는 미쉬파트이기에 잘못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데려와 이스라엘에 ‘미쉬파트’를 세우신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정결하심에 기초한 질문(13)

 

하박국은 이어서 하나님의 ‘정결하심’에 기초하여 하나님께 계속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의 눈이 ‘정결하시기 때문에’ 바벨론을 도구로 사용하셔서는 안 된다는 논리입니다. 먼저 하박국은 하나님의 ‘눈’에 대해서 말합니다. 상반절을 직역해보면, ‘하나님의 눈은 악을 바라보기에는 너무나도 정결하시다’가 됩니다. 하나님의 눈은 악과는 접촉하실 수도, 악을 바라보실 수도 없다는 개념입니다.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신다’라고 번역된 부분에서 ‘차마 못하신다’라는 부분의 원어는 ‘야칼’의부정어법인데 ‘~할 능력이 없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패역함을 볼 능력이 없으시다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패역과 함께하실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는 시적 표현인비다. 하박국은 이런 두 가지 표현들을 통해 하나님과 악/패역은 공존할 수조차 없음을 강력하게 부각시킵니다. 그런데 하박국은 연이어, 하나님께서 그러한 약하고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고 계신다고 선언합니다. 특별히 악인이 의인을 집어삼켜도 하나님께서 ‘잠잠하시다’라고 말합니다. 아무런 일도 행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신다는 것으로, 정결하신 눈을 가지신 하나님으로서는 하실 수 없는 일이라는 주장입니다.

 

(3) 낚시에 비유한 질문(14-17)

 

이제 하박국은 14-17절을 통해서 바벨론의 행위가 얼마나 악한지를 묘사합니다. 기본적인 이미지는 바벨론을 낚시하는 악한 어부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14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바다의 고기처럼, 다스리는 자 없는 벌레처럼 만드셨다고 말합니다. 모든 책임이 하나님께 있다는 논법입니다. 사람이 ‘바다의 물고기’, 그리고 ‘다스리는 자 없는 기어 다니는 것’이 되었다는 것은 창세기 1장의 문화명령을 뒤집어놓는 개념입니다. 창세기 1:26-28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바다의 물고기와 땅의 기는 것을 다스리게 하셨는데, 하박국은 이제 하나님께서 사람을 바다의 물고기와 땅의 기는 것처럼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고기나 기는 것과 같은 인생이 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15-17절은 바벨론 제국이 그런 물고기와 기는 것들을 낚시한다고 설명합니다. 15절은 여러 종류의 낚시 도구를 언급합니다. 낚시, 그물, 투망으로 모으면서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16절은 바벨론이 이러한 자기의 소득을 기뻐하면서 그물과 투망에게 제사를 드린다고 말합니다. 이런 결과를 주신 분은 분명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데, 바벨론은 투망과 그물이 자신들에게 물고기를 주었다고 여겨 그것들에게 영광을 돌리고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물과 투망으로 인해 살찌게 되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15-16절은 하나님께 대한 하박국의 통렬한 비판입니다. 바벨론에 유다 왕국을 넘겨주면, 바벨론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는커녕, 자신들이 섬기는 우상에게 모든 영광을 돌릴 것이기에, 하나님의 공의와 영광은 송두리째 빼앗겨버리는 비통한 결과를 가져올 뿐이라는 것입니다. 17절은 바벨론이 그렇게 한 나라를 살육한 후에 다른 나라를 계속 살육해나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권세는 없어지고, 온 땅들이 모두 바벨론의 손에 넘어갈 수 있으니, 그런 일은 결코 합당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정리하면 14-17절은바벨론을 악한 낚시꾼으로 묘사하면서, 자신에게 기회를 주신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는지식 없는 나라임을 드러낸다. 이런 바벨론에게 유다를 넘겨준다면, 그것은 온 땅을 창조하시고 이스라엘에게 열방을 회복할 기회를 주신 하나님의 창조 명령과 구속의 뜻을 위반하는 행위가 될 것임을 주장합니다. 하박국의 주장은 매우 논리적이며, 듣기에 상당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4) 하나님의 대답을 기다리겠다는 선언(2:1)

 

하박국은 이런 주장들을 모두 펼친 후,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겠다고 말합니다. 그는 파수하는 곳과 성루에 서서, 과연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불러오실지 지켜보겠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이라 대답하실지를 기다리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에 대하여 자신 역시 다시금 대답하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계속해서 논쟁하겠다는 하박국의 의지를 드러내는 표현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하박국의 불평과 분노가 가득 담긴 표현입니다. 하박국 자신의 판단에는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불러오겠다 하신 1:5-11의 말씀은, 하나님의 공의인 '미쉬파트'에 결코 적합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생각을 바꾸시기 전까지, 하박국은 자신의 생각을 바꿀 생각이 없는 듯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언젠가 우리의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뀌고, 우리는 주를 찬미함으로 구의 구원을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애통하며 기다리고, 기도하며 기다리고, 힘써 일하며 기다리시길 바랍니다. 탄식의 기도에 응답하실 날이 곧 도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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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박국(01-01)


모순과 정의를 공감하는 선지자

하박국 1장 1-11절


이 세상은 정의와 평화가 넘쳐나길 원하시지만, 실질적으로는 강포와 죄악과 패역이 넘쳐납니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곳에는 악한 세력의 공격으로 매우 힘듭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시행되지 못합니다. 선지자는 이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어서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행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갈대아 사람들을 일으켜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박국서는 하나님과 선지자 하박국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박국의 질문과 하나님의 대답으로 하나의 대화가 이루어지며, 그 대회를 기초로 다음 질문과 대답이 이어집니다. 하박국은 하나님께 공의를 실현해 달라고 기도하고(2-4),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제국을 불러오겠다고 대답하십니다.

 

하박국의 표제(1)

하나님의 정의로운 행동을 촉구하는 우리의 기도는 불의에 동조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시오, 불의로 고통 받는 이들의 편에 계신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표시입니다. 당신이 이 부르짖음에 참여할 곳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불의 앞에서 ‘욱’하지 않는다면 선량한 사람이아니라 불량한 사람입니다.

1선지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경고라(1)

하박국은 정의로운 선지자입니다. 주전 7세기 말엽 앗수르가 힘을 잃고 바벨론 제국에 멸망당하던 당시에 활동한 것으로 생각되어집니다.

‘경고’라는 말은 신탁으로 번역할 수도 있고 경고라고도 번역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이루어진다는 종말론적인 성격을 담은 예언에서 많이 발견됩니다.

 

하박국의 첫 질문(2-4)

살아가다 보면, 불의한 사람들이 선한 사람을 핍박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이러한 일들을 보고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촉구하는 기도를 합니다. 그 기도에는 첫째는 자신이 불의에 동조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시이며, 불의에 고통하는 사람들의 편에 서계신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표시입니다. 선지자 하박국은 불의한 일들을 보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2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3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4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2-4)

선지자 하박국이 하나님께 첫 질문을 던지는 내용입니다. 하박국은 ‘부르짖어도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신다’(2)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간곡한 기도를 드리고 있는 선지자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이런 하박국의 핵심적인 단어는 ‘강포’입니다. 이곳에서 ‘강포(סמה)’는 ‘폭력’이나 ‘강탈’을 의미합니다. 힘 있는 자들이 힘없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행동을 대표적인 표현입니다. 유다 왕국 가운데 이러한 강포가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선지자 하박국은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강포한 모습들을 보시고도 구원하지 않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기도만 듣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강포로 인해 억압당하는 자들을 “구원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한 걸음 더 나가, 선지자 하박국은 어찌하여 자신의 눈으로 죄악과 패역을 보게 하시느냐고 질문합니다. 그가 보게 되는 일들은 ‘겁탈’, ‘강포’, ‘변론’, ‘분쟁’들입니다. ‘겁탈’과 ‘강포’는 힘을 가진 사람이 힘없는 자를 억압하고 착취하고 괴롭히는 일을 가리키는 것이며, ‘변론’과 ‘분쟁’이 새롭게 등장합니다. 이곳에서 ‘변론(ביר)’은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해 법정에 소송하는 것과, 그리고 ‘분쟁(ןודמ)’으로 싸움이나 분란을 의미합니다. ‘강포’로 인해 유다 왕국이 소송과 분란에 휩싸이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유다 왕국이 소송과 분란에 올바르게 시행되고 있겠습니까? 유대 왕국 가운데 율법이 해이해지고 공의가 올바로 시행되지 못하고 있다고 선언합니다. ‘율법’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소송’과 ‘분쟁’에서 기준은 ‘율법’인데, 그 ‘율법’이 더 이상 기준이 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즉 공의는 굽게 행해지고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지 못하다고 한탄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정의(טפשמ)’가 올바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선언합니다. 이곳에서 ‘정의’는 ‘하나님의 통치가 올바로 이루어진 상태나 그렇게 되기 위한 과정’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인 유다에서는 이 ‘정의’가 항상 올바로 시행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유다에는 정의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공의는 곱게 행해지고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인 유다에 ‘정의’가 이루어지지 못한 이유를 ‘악인이 의인을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즉 악인들이 득세하여 의인을 둘러싸고 어렵게 만드는 상황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악인과 의인의 관계를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하박국서에서 가장 중요한 삶의 정황은 ‘의인과 악인의 정체성과 그들 간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올바로 이루어지는 상태라면, 악인이 의인을 둘러싸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의인이 잘되고 악인은 벌을 받아야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현재 상황은 악인들이 득세하여 의인을 둘러싸고 어렵게 만드는 상황인 것입니다. 하박국은 여기서 ‘의인’과 ‘악인’ 그리고 ‘공의의 실현’을 말할 때, 구체적인 민족 혹은 지파를 가리키고 있는 것인지 언급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하박국의 문맥을 생각해 볼 때, 하박국은 분명 2-4절에서 유다 왕국 내부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선지자 하박국은 하나님께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성품과 전능한 주권을 행사하시도록 호소하였습니다. 유다 왕국 내에서 의인을 회복하시고 악인을 심판해달라고 기도하던 것입니다.

 

첫째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5-11)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불의한 행동으로 다른 사람들이 매우 힘들어 할 때, 하나님께서 침묵하신 것 같은 시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을 보면서 하나님의 무관심과 무능을 의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침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방법과 시간을 저울질 하고 계십니다.

5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여러 나라를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너희의 생전에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할 것이라 누가 너희에게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 6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이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가 아닌 거처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7그들은 두렵고 무서우며 당당함과 위엄이 자기들에게서 나오며 8그들의 군마는 표범보다 빠르고 저녁 이리보다 사나우며 그들의 마병은 먼 곳에서부터 빨리 달려오는 마병이라 마치 먹이를 움키려 하는 독수리의 날음과 같으니라 9그들은 다 강포를 행하러 오는데 앞을 향하여 나아가며 사람을 사로잡아 모으기를 모래 같이 많이 할 것이요 10왕들을 멸시하며 방백을 조소하며 모든 견고한 성들을 비웃고 흉벽을 쌓아 그것을 점령할 것이라 11그들은 자기들의 힘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는 자들이라 이에 바람 같이 급히 몰아 지나치게 행하여 범죄하리라(5-11)

하박국의 첫 질문에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십니다. 그리고 하박국에게 ‘너희는 열방들을 보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보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실 한 가지 일이고, 그 일을 지금부터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인데, 사람들이 그 말을 들으면 도저히 믿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납고 성급한 민족 곧 갈대아 민족 즉 바벨론 제국을 불러오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갈대아 사람’이란 당시 승승장구하여 앗수르를 꺾고, 고대근동의 패자(牌者)로 부상하고 있던 바벨론 제국을 말합니다.

장차 바벨론은 주전 586년 예루살렘을 멸망시킬 때까지 계속하여 유다를 어렵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바벨론을 표현함에 있어서 ‘자기 소유가 아닌 것들을 점령’한다고 했습니다. 더 중요한 표현은 ‘당당함과 위엄’이 그들 스스로에게서 나온다고 합니다. 즉 바벨론 제국은 공의가 스스로에게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바벨론의 공의가 ‘참된 공의’가 아니며 ‘자의적인 공의’라는 의미입니다. 결국 하박국이 하나님께 공의를 행하여 달라고 기도한 요청이 올바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인상을 주게 됩니다. 바벨론 군대의 모습을 묘사하는데, 그들이 표범보다 빠르고 이리보다 사납고 빨리 달려오는 마병이어서 먹이를 빨리 덮치는 독수리와 같다고 서술합니다.

9계속해서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군대가 유다와 전쟁에서 행할 일들에게 대해 예언하십니다. 이러한 바벨론의 행동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9-11).

10절은 또한 그들이 유다의 왕들, 방백들을 멸시하고, 성들을 점령할 것임을 예고합니다. 11절은 매우 강력한 언어를 사용하는데 바벨론은 자신의 힘을 자신의 신으로 삼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 힘에 취하여 결국 범죄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기는커녕 자신의 힘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에 맞게 행동하기는커녕 죄악을 저지르고 마는 자들이 바로 바벨론입니다. 여기서 본문은 바벨론이 유다를 칠 가격이 없음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하필이면 이런 바벨론을 불러 올려 유다를 심판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이것에 대해서 하박국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의로움, 악함, 하나님의 의, 믿음의 문제가 하박국서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주제가 됩니다.


교회와 사회가 심판을 촉발하는 곳이 되지 않도록 속히 돌이키고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패역과 강포 대신 의와 사랑, 긍휼과 자비, 공의아 정직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먼저 공감의 영성을 가진 주님의 제자로서 사회의 아픔에 함께하며 탄식의 기도를 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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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박국 서론 


하박국 서론


소선지서는 오늘날 우리의 신앙을 경종을 일으키는 귀한 말씀입니다. 합법보다 불법이 앞서고, 비진리가 진리보다 더 대우받는 혼돈 시대를 살아갑니다.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지금 무엇하고 계실까?’라며 질문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역시 하나님은 안 계셔!'라는 결정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대답을 이미 하셨습니다. 불법이 횡횡하던 시대에 선지자들을 통해 당신의 뜻을 전하셨던 것처럼, 오늘도 ‘선지서’를 통해 분명한 해답을 주시고 계십니다. 특히 하박국은 하나님의 정의가 어떻게 전달하시는지 답을 주십니다.

 

하박국의 저자

유다의 예언자 하박국입니다. 하박국이라는 이름은 앗수르 사람들이 부르는 원예 식물의 이름인 ‘함바쿠쿠’에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칠십인역(LXX)에서는 암바쿰이라고 합니다. 벌케이트(Vulgate) 역에서는 아바쿠크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뜻은 ‘껴안다’, 혹은 ‘껴 안김을 받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직 이 책에서만 두 번 등장함으로 그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는 주전 612년부터 599년까지 활동합니다. 이 시기에 바벨론은 국제무대를 지배하기 시작했지만, 아지 예루살렘을 공격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박국의 저작 시기

본 서의 기록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하박국 1:6-11에 나타나는 상황을 살펴봄으로써 추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은 갈대아인들이 유다인을 침공할 것이라는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 침공은 주전 605년에 있었던 갈그미스 전쟁을 염두에 두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심증은 앗수르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게 완전히 패하게 된 전쟁을 말합니다. 갈대아인들은 주전 625-530년 사이에 막강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본 서의 주전 625년 이전에 기록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작 시기는 주전 605-508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이때가 바로 유다의 18대 왕인 여호야김(주전 609-598)이 다스리던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저작 시기에 대해 일부 진보적인 학자들은 주전 625년 이전에 그리고 주전 605년 이후에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본 서의 마지막 장인 3장이 시편의 한 부분이라고 주장하면서 본 서의 저작 시기를 주전 539년 이후로 보고 있습니다.

 

하박국의 특징 

본 서의 특징은 삶의 현장 속에서 일어나는 불공평해 보이는 문제들을 실질적이고 생생하게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과 대화로 이루어지는 질문과 답변으로 전개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에 대해 의심하는 하박국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바벨론에게 내려지는 다섯 가지 조롱섞인 죄악이 나열되고 있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께 질문하고 하나님의 답변을 하시고 다시 하박국은 바벨론에게 말을 하는 과정 속에서 하박국이 지혜의 방법을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인 3장은 하나님의 현현하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으며,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리는 찬양시로 끝맺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을 신약에 많이 인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내용의 전개를 통해 하박국 선지자의 심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즉 슬픔과 불평으로 시작한 하박국은 이제 기쁨과 감사로 본 서를 끝맺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인의 위대한 승리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박국의 목적 

하박국이 기록할 당시의 상황은 강대국들끼리의 싸움으로 인해 불안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고통당하는 유대인들이 어떠한 삶(하박국 2:4)을 살아야 될 것인가를 일러주기 위함입니다. 하박국은 지금 당하는 고난을 피하기보다는 믿음으로 극복할 것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공평해 보이는 세상-악인이 잘되고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 현실-에 대해 하나님께 불평을 토로하는 하박국은 결국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현재 당하는 고난을 극복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여호와를 의지하는 삶을 살 때 의인은 구원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악함을 보시고 결코 방관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며 그들에게 심판을 내리시는 하나님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사역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임을 깨닫고 믿음으로 정진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박국의 구조

1:1 표제: 하박국이 받은 묵시

1:2-11 하박국의 첫 번째 질문과 하나님의 대답

(1) 1:2-4 하박국의 첫 번째 질문

(2) 1:5-11 첫 번째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

1:12-2:20 하박국의 두 번째 질문과 하나님의 대답

(1) 1:12-17 하박국의 두 번째 질문

(2) 2:1-20 두 번째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

⒜ 2:1-5 하나님의 대답

⒝ 2:6-20 하나님 대답의 연장: 다섯 가지 “화 있을진저”

① 2:6-8 첫째 “화 있을진저”

② 2:9-11 둘째 “화 있을진저”

③ 2:12-14 셋째 “화 있을진저”

④ 2:15-17 넷째 “화 있을진저”

⑤ 2:18-19 다섯째 “화 있을진저”

⑥ 2:20 “화 있을진저” 단락의 결문

3:1-19 하박국의 기도

(1) 3:1 표제

(2) 3:2 간구

(3) 3:3-15 하나님의 강림

(4) 3:16-19 신뢰와 소망의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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