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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41-01)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사

욥기 42장 1-17절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경험하고, 왜 그런 일을 당하는지 알 수 없어 억울한 마음에 가슴을 치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욥이 마지막에 어떤 은혜를 입었는지를 보며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욥은 드디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명령으로 욥은 친구들의 죄를 위해 제사를 지내주며 관계를 회복하였고, 이후에 하나님께서 욥에게서 가져가셨던 모든 것을 넘치도록 회복시켜주십니다.

 

욥의 회개(1-6)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는 말씀은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것이 바른 길임을 교훈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만큼 무지한 자신을 깨닫는 지혜를 소유함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1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2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3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1-6)

 

욥은 하나님의 두 번의 연설 특히 두 번째 연설을 통해서 하나님의 주권성에 대해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2절에서 ‘나는 알았다’라는 형식은 기도나 애가에 대한 응답으로 신탁이 주어졌을 때 전형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으로(시 20:6; 41:11;56:9). 여기서도 이 자신의 모든 질문에 응답을 받았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2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으며,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할 수 없다고 고백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며, 그 모든 것이 선하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전에도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알았던 하나님께서는 친구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질서 정연하며 논리적이고 설명이 가능한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겪게 된 욥은 엄청난 혼란과 고통에 빠지게 되었고, 인과응보 신학에서 벗어나서 활동하시는 하나님께 대해 부당하다는 생각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지혜와 주권성을 알게 된 욥은 더 이상 불평하지 않고 회개합니다. 마치 인과응보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던 시인이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시험에 들었다가 성전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던 시편 73편의 상황과 비슷합니다. 3절에서 욥은 38:3에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처음 연설하시면서 하셨던 말씀을 거의 그대로 인용합니다. 38:3에서는 ‘어둡게 하는 자’라고 표현하였던 것을 ‘가리는 자’로 표현한 것 외에는 동일합니다. 전에는 침묵으로 항의하던 욥이 이제는 온전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수긍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고백하는데, 그것은 그동안 자신이 친구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세상에 관하여. 하나님께 관하여 지혜가 있다고 많은 말을 하였던 것이 결국은 잘 알지 못하고 한 말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진실로 만나게 될 때, 인간은 자신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엎드리게 됩니다.

4절에서 욥은 또다시 40:7의 ‘내가 네게 묻겠으니 내게 대답할지니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여기서 욥은 이제 하나님과 자유롭게 대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5절에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고백하는데, 귀로 듣기만 하였다는 것은 율법적으로 관념적으로 종교적으로 배웠던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도 욥은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 생활에 매우 열성적이었고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욥은 이제 알았습니다. 그는 지금 그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의 앞에 나타나신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만난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은 이렇게 종교 행위와 말씀을 공부하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든 기도를 통해서든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 욥은 6절에서 자기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고 죄를 시인하며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겠다고 철저하게 회개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난 성도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위대함 앞에서 철저히 자신을 부인하고 회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욥의 회개로 욥과 친구들과 하나님과의 기나긴 대화가 막을 내리게 되었으며, 누가 참 지혜자인가에 대한 논쟁은 오직 하나님만이 진정한 지혜자라는 것으로 결론 났습니다.

 

에필로그(7-17)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사장의 직분을 회복했습니다. 이제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산 제사의 삶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기를 바랍니다. 욥이 세 친구를 용서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했을 때 놀라운 회복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7○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8그런즉 너희는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가 우매한 만큼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라 9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10○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11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이전에 알던 이들이 다 와서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음식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케쉬타 하나씩과 금 고리 하나씩을 주었더라 12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 13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 14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니 15모든 땅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그들의 오라비들처럼 기업을 주었더라 16그 후에 욥이 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 17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7-17)

 

욥이 자신의 죄를 회개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욥을 정죄하던 그의 세 친구에게 회개의 제사를 드릴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들의 말이 욥의 말처럼 옳지 못하므로 욥에게 찾아가 잘못을 고백하고, 욥이 그들을 대신해 제사를 드리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1) 친구들을 위한 욥의 제사(7-9)

 

하나님과 욥 사이에서 누가 옳은가의 문제를 정리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친히 욥과 세 친구들 사이의 문제를 정리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통해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욥은 선지자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세 친구 중에서 엘리바스에게 말씀하신 이유는 엘리바스가 가장 연장자로서 세 명의 친구를 대표하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바스에게 너와 너의 두 친구에게 진노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7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욥의 말이 옳고 친구들의 말이 틀렸다고 평가를 내리십니다. 여기서 친구들의 말이 틀린 것은 하나님을 기계적인 인과응보의 수행자로만 보고 욥에게 죄가 없다는 주장을 전혀 받아들여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비록 욥이 무례하기는 했지만, 욥이 자신은 죄가 없다는 것과 죄가 없는 사람도 하나님의 뜻에 의해 고난을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은 옳다고 인정해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친구들의 죄를 씻기 위해 일곱 마리의 수소와 일곱 마리의 숫양을 가지고 욥에게 가서 번제를 드려달라고 부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때 욥이 너희를 위해 기도하면 용서해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8절의 ‘너희가 우매한 만큼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는 하나님께서 처벌을 면해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명령에 세 친구는 짐승을 잡아 번제를 드렸고, 욥이 이들을 위해 기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욥을 기쁘게 받아주셨습니다. 이런 의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세 친구도 받아주셨을 뿐만 아니라 욥과 세 친구들의 관계도 회복시켜주셨습니다.

 

(2) 욥의 회복(10-17)

 

욥을 용서해주시고 받아주신 하나님께서 이제 그동안 욥이 잃었던 모든 것을 회복시켜주시는데 10절에서 갑절로 회복시켜주셨다고 보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원래 욥의 것에다 그동안 고생한 것까지 갚아주신 것이다. 첫째는 그동안 끊겼던 가족과 친구들과의 관계 회복입니다. 이들은 욥이 고난 가운데서 괴로워할 때 욥과 거리를 두었던 사람들로(6:14-23; 19:13-22) 이제 그들이 욥에게 찾아와 식탁교제를 나누고 욥의 어려움에 대해 같이 슬퍼하며 위로하고 또한 물질적인 도움까지 줍니다. 이런 위로는 그동안 욥이 너무도 원하던 것으로 욥은 친구들에게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애원까지 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먼저 그동안 깨어졌던 관계를 회복시켜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욥은 다시 부자가 되었는데 처음보다 하나님께서 더 복을 주셔서 더 많은 소와 양과 낙타와 암나귀를 갖게 되었고 또한 가정도 다시 이루게 되어 아들 일곱과 딸 셋을 얻게 되었습니다. 욥은 사랑하는 아들과 딸들과 또한 4대나 되는 손자를 보며 매우 행복하게 살다가 천수를 누리고 죽었습니다.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다’는 표현은 천수를 누리다 죽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욥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왜 고난을 주셨는지 끝까지 말해주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욥은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현재의 고난이 왜 왔는지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고 또한 그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 앞에 순복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피조물인 사람의 도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우리 인생의 모든 부분에 대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으로 하나님의 때를 따라 우리를 선하게 인도해주시는 것입니다.


성도의 제사장 직분 수행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구속을 통해 보이신 본을 따름으로 성취됩니다. 성도는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주님을 따라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기쁘고 유익하게 하는 삶으로 온전한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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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41-01)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

욥기 41장 1-34절


 

태초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특별히 지음 받은 피조물인 인간은 피조물의 왕으로서의 위상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모습은 너무나 초라할 뿐입니다. 말씀 속에서 처음의 영광스러운 위상을 회복하는 길을 깨닫고 그 길로 나아가는 지혜를 얻기를 바랍니다.

 

  • 본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리워야단을 제어할 수 있는지에 대한 하나님의 질문 부분과 화자가 1인칭으로 바뀌는 하나님의 독백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위대성을 스스로 드러내시는 부분과, 마지막으로 리워야단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나오며 이 리워야단이 모든 창조물들 위에서 왕노릇 하고 있다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리워야단 사냥의 불가능성(1-8)

피조물에 대해서 이렇게 무능한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께 대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자신의 정체를 바로 알게 하심으로 자신이 감히 하나님 앞에서 자기주장을 펼 수 없는 존재임을 바로 인식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는 또한 모든 인류가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주제를 알고 겸손히 엎드리어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해야 함을 교훈합니다.

 

1네가 낚시로 리워야단을 끌어낼 수 있겠느냐 노끈으로 그 혀를 맬 수 있겠느냐 2너는 밧줄로 그 코를 꿸 수 있겠느냐 갈고리로 그 아가미를 꿸 수 있겠느냐 3그것이 어찌 네게 계속하여 간청하겠느냐 부드럽게 네게 말하겠느냐 4어찌 그것이 너와 계약을 맺고 너는 그를 영원히 종으로 삼겠느냐 5네가 어찌 그것을 새를 가지고 놀 듯 하겠으며 네 여종들을 위하여 그것을 매어두겠느냐 6어찌 장사꾼들이 그것을 놓고 거래하겠으며 상인들이 그것을 나누어 가지겠느냐 7네가 능히 많은 창으로 그 가죽을 찌르거나 작살을 그 머리에 꽂을 수 있겠느냐 8네 손을 그것에게 얹어 보라 다시는 싸울 생각을 못하리라(1-8)

 

하나님께서는 육지의 동물인 베헤못에 이어 바다의 동물인 리워야단에 대해서 질문하기 시작하십니다. 리워야단은 구약에서 신화적 존재와 실제적 존재 모두로 등장하고 있는데, 이 본문에서는 이 둘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베헤못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피조물인 바다생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많은 학자들이 베헤못과 마찬가지로 리워야단의 정체를 실제적인 바다 생물과 연결시키기 위해서 노력하였으며, 악어나 고래 혹은 수중 공룡 등으로 해석해왔습니다. 하지만 41장에 나온 리워야단에 대한 묘사와 맞는 동물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욥기에서 나온 리워야단은 기본적으로 실제적인 피조물이긴 하지만, 당시 고대 근동에 알려진 리워야단에 대한 신화적인 요소들을 사용하여 묘사하였습니다. 이렇게 현대의 과학적인 눈에서 보면 실제적인 것과 신화적인 요소들이 섞여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신화적 세계관을 가진 당대의 관점에서 보면 리워야단과 베헤못은 실제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첫 번째 질문은 리워야단을 낚을 수 있나는 것으로 1-2절은 모두 낚시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40:24에서는 베헤못을 사냥하는 모습으로 마무리되었는데, 리워야단에 대한 질문은 리워야단에 대한 낚시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코를 꿰다’는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여 사냥의 이미지를 연결하고 있습니다. 3-5절은 리워야단이 인간에게 잡혀 살려달라고 애원하거나 인간의 손에 길들여져 소녀들 즉, 가장 연약한 인간들의 애완동물이 되게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6-7절은 3-5절보다 좀 더 폭력적인 상황으로 비록 평화적인 협상이 안 된다면 리워야단을 잡아다 팔거나 그것도 안 되면 죽일 수는 있냐는 것입니다. 대답은 “불가능하다”입니다. 7절에서 많은 창을 가지고 그의 가죽을 찌르거나 작살을 그의 머리에 꽂을 수 있느냐는 질문을 통해 인간이 리워야단을 잡는 것도 죽이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6절에서 리워야단을 잡는 모습은 전쟁 시 포로를 다루는 모습과 유사한데, 일단 전쟁에서 이기면 포로를 묶어서 옵니다. 그리고 포로들은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고 협상을 하게 되며, 그들을 노예로 삼거나 혹은 노예상인들에게 팔아넘깁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리워야단과 싸워 이길 수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8절에서 하나님께서 답을 하십니다. 만약 인간이 리워야단을 실제로 접하고 그와의 전쟁이 어떨지를 생각할 줄 안다면, 결코 리워야단과 전쟁할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십니다. 이 결론을 통해 리워야단은 결코 인간이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의 독백(9-12)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무엇인가를 요구할 권리도, 자격도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단지 주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기대하고 간청하는 것일 뿐임을 기억합시다.

 

9참으로 잡으려는 그의 희망은 헛된 것이니라 그것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그는 기가 꺾이리라 10아무도 그것을 격동시킬 만큼 담대하지 못하거든 누가 내게 감히 대항할 수 있겠느냐 11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12○내가 그것의 지체와 그것의 큰 용맹과 늠름한 체구에 대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리라(9-12)

 

이 부분은 하나님의 독백으로 화자가 ‘나’로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리워야단 앞에서 꼼짝도 못하는 인간을 비웃으시면서 하나님의 피조물인 리워야단과 싸울 엄두도 못내는 주제에 감히 세상 만물의 주인이자 창조주이신 하나님 앞에 서서 이 손해를 하나님께서 갚아주셔야 한다고 말할 수 있냐고 물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서서 말하는 인간은 바로 욥입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 앞에 나타나셔서 자신의 결백을 밝혀주셔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피조물인 리워야단에게는 꼼짝도 못하면서 감히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대든 형국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이런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지 알려주시기 위해 리워야단에 대해 좀 더 설명을 하십니다

 

리워야단의 모습(13-32)

주님께 먼저 무언가를 드려서 갚으심을 받을 사람은 없습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롬 11:35~36).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오해하여 율법 지키는 것을 자신들의 공로로 여겼습니다. 즉 하나님께 먼저 드려서 그 대가로 구원을 받는 것처럼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도 율법준수를 강요했습니다. 성도는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속했음을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함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구원의 은혜를 받아 누려야 합니다.

 

13누가 그것의 겉가죽을 벗기겠으며 그것에게 겹재갈을 물릴 수 있겠느냐 14누가 그것의 턱을 벌릴 수 있겠느냐 그의 둥근 이틀은 심히 두렵구나 15그의 즐비한 비늘은 그의 자랑이로다 튼튼하게 봉인하듯이 닫혀 있구나 16그것들이 서로 달라붙어 있어 바람이 그 사이로 지나가지 못하는구나 17서로 이어져 붙었으니 능히 나눌 수도 없구나 18그것이 재채기를 한즉 빛을 발하고 그것의 눈은 새벽의 눈꺼풀 빛 같으며 19그것의 입에서는 횃불이 나오고 불꽃이 튀어 나오며 20그것의 콧구멍에서는 연기가 나오니 마치 갈대를 태울 때에 솥이 끓는 것과 같구나 21그의 입김은 숯불을 지피며 그의 입은 불길을 뿜는구나 22그것의 힘은 그의 목덜미에 있으니 그 앞에서는 절망만 감돌 뿐이구나 23그것의 살껍질은 서로 밀착되어 탄탄하며 움직이지 않는구나 24그것의 가슴은 돌처럼 튼튼하며 맷돌 아래짝 같이 튼튼하구나 25그것이 일어나면 용사라도 두려워하며 달아나리라 26칼이 그에게 꽂혀도 소용이 없고 창이나 투창이나 화살촉도 꽂히지 못하는구나 27그것이 쇠를 지푸라기 같이, 놋을 썩은 나무 같이 여기니 28화살이라도 그것을 물리치지 못하겠고 물맷돌도 그것에게는 겨 같이 되는구나 29그것은 몽둥이도 지푸라기 같이 여기고 창이 날아오는 소리를 우습게 여기며 30그것의 아래쪽에는 날카로운 토기 조각 같은 것이 달려 있고 그것이 지나갈 때는 진흙 바닥에 도리깨로 친 자국을 남기는구나 31깊은 물을 솥의 물이 끓음 같게 하며 바다를 기름병 같이 다루는도다 32그것의 뒤에서 빛나는 물줄기가 나오니 그는 깊은 바다를 백발로 만드는구나(13-32)

 

리워야단에 대한 묘사는 인간이 리워야단을 이길 수 없다는 앞부분의 결론을 반복하는 수사적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15-17절은 단단한 비늘에 대한 묘사로 바람이 통과할 틈도 없이 빽빽하게 붙어 있는 비늘의 모습이 강조되는데, 이것 때문에 인간의 작살이나 창이 결코 리워야단의 피부를 뚫을 수 없습니다. 18-21절에서는 리워야단에 대해 실제적인 모습이 아닌 신화적인 모습이 반영된 시적 표현을 하는데. 입에서는 불이 나오고 콧구멍에서는 연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마치 불을 뿜는 용과 같은 모습입니다. 22절에서는 잠시 강력한 힘을 가진 목덜미에 관심을 가지다가 23절부터는 가죽에 대한 묘사로 주로 가죽이 얼마나 단단한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슴 부분은 돌처럼 단단한데, 그것으로 인해 리워야단이 일어나면 용사들도 두려워서 도망을 가게 됩니다. 그 이유가 26-29절에 나오는데, 칼, 창, 투창, 화살촉, 몽둥이, 물맷돌 등 모든 인간의 무기들이 그에게는 무용지물이기 때문입니다. 칼이나 투창이나 화살이 전혀 꽂히지 않고 쇠나 몽둥이도 지푸라기같이 여긴다는 것은 인간의 어떤 공격으로 리워야단에게 해를 입힐 수 없음을 표현합니다. 우리나라 전래 동화의 불가사리나 서양 중세의 드래곤을 연상시킵니다.

30-32절은 리워야단의 움직임을 표현하는데, 리워야단의 아랫부분은 날카로운 토기 조각처럼 되어 있어서 진흙 위를 지나가면 그 위에 날카로운 자국을 만들어놓으며 물속을 헤엄쳐 다니면서 그가 지나가는 곳마다 엄청나게 많은 기포를 만들어내어 마치 물이 끓는 것처럼 혹은 향수 기름을 만드는 숱이 끓는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이런 끓는 물과 같은 기포는 리워야단의 엄청난 힘과 속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리워야단이 지나간 뒤에 일어나는 하얀 포말이 크고 넓고 깊어 시커멓고 깊은 바다 전체를 백발처럼 하얗게 만든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리워야단의 크기가 어마어마해서 온 바다를 전부 하얗게 만들 정도로 크고 위력적이라는 것입니다.

 

리워야단의 뛰어남(33-34)

인간이 피조물의 왕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했더라면 오늘날과 같이 지구환경의 위기를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위로는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고 이웃과 환경을 돌보고 구원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33세상에는 그것과 비할 것이 없으니 그것은 두려움이 없는 것으로 지음 받았구나 34그것은 모든 높은 자를 내려다보며 모든 교만한 자들에게 군림하는 왕이니라(33-34)

 

33-34절은 리워야단에 대한 결론으로 리워야단은 세상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이 용맹하며 높다고 하는 모든 자들 위에 군림하고 있는 왕으로 그려집니다. 즉,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생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두 번째 연설을 마치셨는데, 이 마지막 부분이 말하는 것은 이런 리워야단을 과연 누가 통제할 수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만이 이 생물을 통제하고 물리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리워야단에 대한 표현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힘과 능력과 크기를 가지고 있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구약에서는 이런 리워야단을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또한 이것을 물리치셨다고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것을 또다시 보여주며 이런 하나님께 항의하며 따지듯 말한 욥에게 그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철저히 깨닫게 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언제나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라는 생각만 할 뿐, 그분이 얼마나 엄위하신 분인지를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기도가 응답되지 않거나 조그마한 어려움이라도 생기면 함부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의심하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이 우리를 위해 스스로 낮아지시고, 우리 가운데 오시는 은혜를 베푸셨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만만히 볼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회복합시다. 일방적인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높아졌던 마음을 버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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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40-01)


하나님에서 겸비해야 할 인간

욥기 40장 1-24절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며 지적, 도덕적 우월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도 하나님 앞에 서면 자신의 무지와 무능을 인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약함을 깨닫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첫 번째 연설을 끝내며 욥에게 대답을 해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욥은 하나님의 질문에 아무 대답도 못하고 침묵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이 자신의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처사가 불공평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악인에 대한 심판과 베헤못이라는 동물을 통해서 인간의 무능과 인간이 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을 설명하고 계십니다.

 

첫 번째 하나님의 연설의 결론(1-2)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시각을 갖기는커녕 자신과 가까운 곳에서 살아가는 이웃의 입장조차 헤아리지 않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자기 눈앞에 있는 것에 매몰되어 하나님께 이것저것을 달라고 요청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기도가 이뤄지지 않았을 때 불평할 수밖에 없고, 신앙은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1여호와께서 또 욥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2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1-2)

 

하나님께서는 첫 번째 연설의 결론으로 욥에게 대답을 하라고 명하십니다. 지금 이 상황은 법정적 상황을 가정하고 있는데, ‘다투다(리브)’라는 단어는 종종 재판의 상황에서 고소하고 변론하는 상황을 표현하는 데 사용됩니다. 또한 ‘하나님을 탓하는 자’라는 표현도 법정에서 ‘고소한 사람’이란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욥이 하나님을 법정으로 불러내기를 원했는데 지금 하나님께서는 욥의 말을 따라 욥을 법정으로 불러내셔서 그에게 대답을 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이 부분은 욥에 대한 비난이나 책망이라기보다는 진정으로 욥의 대답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욥의 첫 번째 대답(3-5)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주관하시고 계십니다. 당신의 뜻대로 세계의 역사를 이끌어 가고 계십니다.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따름으로써 그분의 섭리에 의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진리를 믿는 것외에는 없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를 위해 내주신 분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는 사실을 확신합니다.

 

3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4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5내가 한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 대답하지 아니하겠나이다(3-5)

 

하지만 대답을 하라는 하나님의 요구에 욥은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욥은 하나님의 어마어마한 능력과 지혜를 들으면서 자신의 지혜가 얼마나 보잘것없으며, 자신이 그동안 한 말들이 얼마나 하나님께 무례했는지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손으로 입을 가린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침묵한다는 것을 뜻하는 행동으로, 욥은 21:5-29:9에서 다른 사람에게 손으로 입을 가리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신 스스로 입을 가리고 있습니다. 욥의 연설에서는 욥의 비극의 끔찍함으로 인해 생긴 침묵이라면, 여기서는 하나님 앞에서의 비천함 때문에 생긴 침묵입니다. 5절에서 그는 이미 한 말 외에 한마디도 더하지 않겠다고 하는데, 이것은 그동안 자신이 한 말이 하나님의 지혜에 비해 보잘것없다는 것을 알고 더 이상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욥은 인간과 하나님의 지혜 사이에 상상할 수 없는 격차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를 원하셨던 하나님의 교훈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하나님께 수긍을 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두 번째 연설을 하십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연설(6-24)

사람들은 자기들의 풍요와 발전을 위해서 세상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문제가 발생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러실 수 있는가?’라며 원망합니다. 욥기는 이런 교만함에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존재하시는 것처럼 여기지 말고, 자기들이 가장 보배로운 존재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돕지 않으신다는 이유로 불평하며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도우셔야할 분인 것처럼 여기는 것은 교만일 수밖에 없습니다.

 

6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7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겠으니 내게 대답할지니라 8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 9네가 하나님처럼 능력이 있느냐 하나님처럼 천둥 소리를 내겠느냐 10○너는 위엄과 존귀로 단장하며 영광과 영화를 입을지니라 11너의 넘치는 노를 비우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모두 낮추되 12모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낮아지게 하며 악인을 그들의 처소에서 짓밟을지니라 13그들을 함께 진토에 묻고 그들의 얼굴을 싸서 은밀한 곳에 둘지니라 14그리하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 15○이제 소 같이 풀을 먹는 베헤못을 볼지어다 내가 너를 지은 것 같이 그것도 지었느니라 16그것의 힘은 허리에 있고 그 뚝심은 배의 힘줄에 있고 17그것이 꼬리 치는 것은 백향목이 흔들리는 것 같고 그 넓적다리 힘줄은 서로 얽혀 있으며 18그 뼈는 놋관 같고 그 뼈대는 쇠 막대기 같으니 19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 중에 으뜸이라 그것을 지으신 이가 자기의 칼을 가져 오기를 바라노라 20모든 들 짐승들이 뛰노는 산은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내느니라 21그것이 연 잎 아래에나 갈대 그늘에서나 늪 속에 엎드리니 22연 잎 그늘이 덮으며 시내 버들이 그를 감싸는도다 23강물이 소용돌이칠지라도 그것이 놀라지 않고 요단 강 물이 쏟아져 그 입으로 들어가도 태연하니 24그것이 눈을 뜨고 있을 때 누가 능히 잡을 수 있겠으며 갈고리로 그것의 코를 꿸 수 있겠느냐(6-24)

 

욥이 더 이상 말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과 대조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좀 더 교훈을 주시기 위해 두 번째 연설을 시작하십니다. 두 번째 연설은 크게 욥에게 의에 대해 충고하시는 부분과 하마(베헤못)라는 매우 신비로운 동물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시는 부분으로 이들을 통해 또다시 하나님의 권능이 얼마나 큰지 욥에게 알려주십니다.

 

(1) 욥에 대한 충고(6-14)

 

6절부터 여호와의 두 번째 연설이 시작되는데, 첫 번째 연설과 동일한 말로 시작하십니다. 욥이 아직 그의 고소를 취하하며 잘못을 인정하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8절에서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는 이런 욥의 태도에 대해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이 문장이 전제하는 것은 욥도 인과응보 신학을 암시적으로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욥은 세 친구들과 지금까지 자신이 죄가 없이 벌을 받고 있다고 말하면서 인과응보 신학에 대해 반박했습니다. 하지만 현재 욥은 자신은 죄가 없는데, 왜 죄인인 것처럼 고통을 주시냐고 하나님께 불만을 드러내고 있었고 이런 욥의 태도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이것은 욥이 하나님을 불의하다고 여기는 것이라고 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9절에서 네가 하나님과 같은 능력과 권위가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9절의 말과 목소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과연 하나님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지혜와 능력이 욥에게 있냐고 질문하십니다. 10-13절은 지도력에 관한 것으로 욥에게 능력이 있으면 한번 해보라고 말씀하시는 목록들이 등장합니다. 10절에 나오는 위엄, 존귀, 영광, 영화라는 단어는 모두 하나님을 높일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13절에서 진토에 묻는다는 것과 무덤에서 얼굴을 싼다는 것은 교만한 자들을 심판하여 죽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과 같은 능력과 위엄을 가지고 교만한 자와 악한 자를 심판해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14절에서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의 오른손이 그를 구원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과 같은 능력이 있다고 인정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아이러니로 만약 욥이 하나님과 같은 능력이 있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면 하나님을 변호인으로 애타게 찾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현재 욥의 잘못이 무엇인지 알려주십니다. 욥도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크신 하나님을 그의 생각으로 판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2) 하마(베헤못)(15-24)

 

욥의 한계와 하나님의 크심을 더 알려주시기 위해 15-24절에서 베헤못에 대한 질문을 하십니다. 베헤못이 어떤 동물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습니다. 코끼리, 악어, 하마. 공룡 혹은 상징적인 동물 등으로 해석합니다. 초식 동물이면서 강하고 물가에 있다는 표현과 고대 이집트에서 갈고리로 코를 꿰어 하마를 잡는 그림을 근거로 많은 해석에서 하마로 보았지만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하마의 꼬리는 팔고 얇아 백향목과 같다는 묘사와는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베헤못의 정체가 무엇인지 분명히 규정할 수는 없지만,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육지에서 가장 뛰어난 동물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베헤못에 대한 말씀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15절은 욥과 베헤모의 비교이고 16-18절은 베헤못의 외모에 대한 설명이며, 19-24절을 베헤못의 뛰어남에 대한 설명입니다. 15절에서 하나님은욥을 지은 것처럼 베헤못을 지었다고 하심으로 욥과 배헤못을 동일한 창조물로 두셨습니다. 16-18절은 베헤모의 외모를 설명하는데, 강력한 힘을 가진 허리와 힘줄을 가지고 있으며, 꼬리는 백향목같이 심하게 흔들린다고 하는데, 백향목은 구약에서 등장하는 굵고 곧은 나무로 가장 좋은 목재입니다. 또한 넓적다리는 힘줄이 꽉 짜여 있고 뼈는 놋관과 쇠막대기 같이 강하다고 묘사합니다. 이런 묘사는 주로 베헤못이 다부진 몸체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19절부터는 베헤못의 뛰어남을 설명하는데, 먼저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 중에 으뜸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말 으뜸이란 표현은 ‘처음’, ‘최고’라는 뜻 모두를 갖는데, 여기서도 두 가지 의미 모두를 갖고 있습니다. 둘째로, 창조주이신 하나님 외에는 베헤못을 해칠 수 없습니다. 셋째로, 모든 야생동물이 뛰노는 산들이 모두 베헤못의 밥상이어서 어느 짐승도 그가 먹이를 먹는 것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 넷째로, 시원한 그늘이나 늪에서 여유롭게 쉬고 있는 모습으로 연잎이나 시내 버들이 감싼다는 것은 아무것도 그들의 쉼을 방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심지어 폭우가 와서 요단강이 범람할지라도 베헤못에게는 전혀 방해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인간의 경우는 가장 강력한 무기인 철병거나 말도 강이 범람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인간은 절대로 베헤못을 잡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베헤못이라는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짐승에 대한 설명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은 욥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을 훨씬 넘어서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인간이 다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조금 어려운 일이 생기면 습관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존재하시는 것처럼, 나는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의무를 다했으니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나를 지키셔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조금 변형되면 하나님이 아니라 교회를 원망하고, “내가 이렇게 힘든데 교회는 아무 일도 안 해 준다”며 원망하기도 합니다. 우리 중에는 이런 악한 마음을 품는 사람이 없어야겠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종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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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39-01)


동물의 세계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욥기 38장 39절-39장 30절


 

옛날 어느 코미디 프로그램에 아주 재미있는 코너가 있었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하기만하면 ‘그건 네 생각이고’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섯 살 먹은 손자가 할아버지가 무슨 말을 해도 ‘그건 네 생각이고’라고 해서 웃긴 적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욥이 하나님 앞에 항의하고 도전한 것은 어디까지나 욥의 개인적인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욥기가 위대한 것은 욥기의 자기중심적인 세계관,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을 하나님의 생각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 이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욥에게 동물의 세계에 대해서 질문하십니다. 여기에 사자, 까마귀, 산염소, 암사슴, 야생 나귀, 들소, 타조, 전투마, 독수리가 등장하는데 말을 제외하고는 전부야생 동물로 인간들이 접하기 어렵고 알기 어려운 동물들입니다. 이런 동물들에 관한 질문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지혜가 얼마나 크며 동물들을 다스린다고 생각하는 인간이 얼마나 그 동물들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는지를 알려주십니다.

 

사자와 까마귀의 생존능력(38:39-41)

하나님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은 없으며, 생명을 공급받지 못한 생물은 없습니다. 하물며 당신의 백성을 돌아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는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고난 속에 있는 당신의 백성을 외면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39○네가 사자를 위하여 먹이를 사냥하겠느냐 젊은 사자의 식욕을 채우겠느냐 40그것들이 굴에 엎드리며 숲에 앉아 숨어 기다리느니라 41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허우적거릴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마련하는 이가 누구냐(39-41)

 

우주에 관한 질문을 하시던 하나님께서 이제는 동물의 세계에 대해서 질문을 하십니다. 동물의 세계에 대한 질문은 욥에게 또 다른 교훈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시 인간에게 동물들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모든 생물들의 왕인 줄 알고 살고 있고 있지만, 야생동물들에게 먹이를 제공하는 분도 그들에게 특별한 재능과 특성을 주신 분도 모두 하나님께서시라는 사실을 많은 질문을 통해 알려주고 계십니다.

먼저 사자와 까마귀 새끼가 등장을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어린 사자와 어린 까마귀에게 누가 먹을 것을 제공하느냐고 물으십니다. 39절은 어미 사자가 배고픈 새끼 사자를 먹이기 위하여 먹잇감을 사냥하는 모습을 묘사하면서, 네가 맹수의 먹이를 제공할 수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물론 답은 ‘아니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사냥 방법을 알려주셔서 맹수들이 먹이를 구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40절은 맹수들의 사냥 습성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1절에서는 까마귀 새끼가 등장하는데, 이것은 맹수와 대조되는 아주 연약한 짐승으로 이들이 먹을 것을 달라고 울고 가냘픈 날개로 날갯짓을 하며 헤맬 때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셔서 키우시는 분도 하나님께서십니다. 맹수로부터 아주 연약한 새 새끼까지 모든 동물을 먹이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께서시라는 것을 욥에게 알려주십니다. 모든 생명에게 먹이를 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출애굽시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40년 동안 일용할 양식을 주시며, 자신의 백성을 먹이신 것과 연결됩니다. 또한 마태복음 6:19-34에서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먹을지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며 공중의 새도 하나님께서 먹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지상의 모든 생명에게 먹을 것을 공급해주시는 분이다. 이것은 고대 근동의 신관과 대조되는 모습으로 고대 근동에서는 인간들이 신에게 먹을 것을 제공해야 합니다. 하지만 여호와는 모든 생명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특히 자신의 백성을 특별한 은혜로 먹이시고 입히십니다.

 

산염소와 암사슴의 번식능력(39:1-4)

누군가에게는 지혜를 주시고, 누군가는 용맹을 주십니다. 누군가에게는 평안과 안락을 주시고, 누군가에게는 거친 고난과 고통을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인정하고, 주어진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1산 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 암사슴이 새끼 낳는 것을 네가 본 적이 있느냐 2그것이 몇 달 만에 만삭되는지 아느냐 그 낳을 때를 아느냐 3그것들은 몸을 구푸리고 새끼를 낳으니 그 괴로움이 지나가고 4그 새끼는 강하여져서 빈 들에서 크다가 나간 후에는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느니라(1-4)

 

두 번째 동물군은 산염소와 암사슴으로 이들은 모두 야생 짐승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산염소와 암사슴을 예로 들어 모든 동물들을 번식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1절은 야생 염소와 암사슴이 새끼를 출산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각 동물들의 생식 방법을 정하셨다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2절에서는 이들의 임신 기간을 통해 모든 동물의 생식 주기를 정하셨다는 것과 3절은 새끼를 낳는 방법을 정하시고 동물에게 알려주셨으며 4절에서 새끼가 장성하여 홀로 야생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면 부모를 떠나는 생의 주기를 정하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짐승마다 생의 주기와 생식 방법들이 다양한데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정하셨으며, 인간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생의 주기와 생식 주기와 방법을 따라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들나귀와 들소의 야생성(39:5-12)

인간은 먼 태양계만 아니라 가까운 동물계도 잘 모릅니다. 등장하는 동물들은 대개 인간에게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동물입니다. 인간이 이것들의 생존이나 번식이나 속성을 통제하지 않아도 멸종되지 않고 잘 삽니다. 예측 불가하고 통제 불가한 인생의 난제들도 하나님 수종에 있습니다.

 

5○누가 들나귀를 놓아 자유롭게 하였느냐 누가 빠른 나귀의 매인 것을 풀었느냐 6내가 들을 그것의 집으로, 소금 땅을 그것이 사는 처소로 삼았느니라 7들나귀는 성읍에서 지껄이는 소리를 비웃나니 나귀 치는 사람이 지르는 소리는 그것에게 들리지 아니하며 8초장 언덕으로 두루 다니며 여러 가지 푸른 풀을 찾느니라 9들소가 어찌 기꺼이 너를 위하여 일하겠으며 네 외양간에 머물겠느냐 10네가 능히 줄로 매어 들소가 이랑을 갈게 하겠느냐 그것이 어찌 골짜기에서 너를 따라 써레를 끌겠느냐 11그것이 힘이 세다고 네가 그것을 의지하겠느냐 네 수고를 그것에게 맡기겠느냐 12그것이 네 곡식을 집으로 실어 오며 네 타작 마당에 곡식 모으기를 그것에게 의탁하겠느냐(5-12)

 

야생의 나귀와 들소를 예로 들어 야생동물의 야생성도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특히 이 본문에서는 동물이 인간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인간이 이 동물들을 우리에 가두어 놓고 길들여 인간을 위해 수레를 끈다거나 농사를 짓는 데 이용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주로 인간의 능력을 묻는 질문으로 물론 답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동물을 다스린다고 하지만, 동물 야생성을 억누르고 굴복시킬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타조의 속성(39:13-18)

해명되지 않은 고난에 대한 명쾌한 답을 들은 후 격론을 끝내고 싶은데,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학도 아니고 동물학만 열강하십니까? 인간 중심적 사고를 타격하기 위해서입니다. 만물의 영장임을 자부하는 인간이 과연 만물의 척도입니까? 이것은 참 신앙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무서운 아집입니다.

 

13○타조는 즐거이 날개를 치나 학의 깃털과 날개 같겠느냐 14그것이 알을 땅에 버려두어 흙에서 더워지게 하고 15발에 깨어질 것이나 들짐승에게 밟힐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16그 새끼에게 모질게 대함이 제 새끼가 아닌 것처럼 하며 그 고생한 것이 헛되게 될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나니 17이는 하나님이 지혜를 베풀지 아니하셨고 총명을 주지 아니함이라 18그러나 그것이 몸을 떨쳐 뛰어갈 때에는 말과 그 위에 탄 자를 우습게 여기느니라(13-18)

 

네 번째는 타조가 등장합니다. 타조에 대한 질문은 앞에 나온 동물들에 대한 것과 좀 다릅니다. 앞에서는 동물들의 부정적인 부분이 아니라, 단순히 그 동물들의 특성을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타조의 경우는 부정적인 어조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타조가 날갯짓을 하지만, 크고 아름다운 날개를 가지고 우아하게 나는 황새(혹은 학)와 비교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큰 날개를 가지고 있지만, 날 수 없는 타조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14절은 다른 조류들과는 달리 둥지를 만들지 않고 흙을 파서 그곳에 알을 낳고 부화가 될 때까지 수컷과 암컷이 번갈아 가며 품는 특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뭇가지나 높은 곳에 둥지를 만들지 않기 때문에 야생동물 특히 하이에나와 같은 포식자의 먹잇감이 되기도 합니다. 또한 포식자가 공격을 할 때 새끼를 감싸기보다는 포식자를 유인하기 위해 새끼와 멀어지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특성을 근거로 17절에서는 타조를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받지 못한 동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신에 18절에서 타조의 달리는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타조의 달리는 최대 속도는 시속 70km 정도로 매우 빠르게 달립니다. 이런 타조의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을 모두 언급함으로써 각 동물의 고유한 특징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물을 다스리라는 명령은, 하나님께서 각 생명체에게 주신 특성들을 잘 관찰하고 그 특성들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그들이 자신들의 특성을 잘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보호하고 지켜주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전투마의 용맹성(39:19-25)

산고 없이 생명도 없습니다. 생일을 저주할 만큼 고통스런 인생이 또 하나의 창조라 불리는 것도 지난한 해체와 재편의 과정을 겪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회심을 통해 새로워지고 고난의 심연을 지나며 깊어집니다. 욥기의 결말이 보상이 아니라 변화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19○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네가 입혔느냐 20네가 그것으로 메뚜기처럼 뛰게 하였느냐 그 위엄스러운 콧소리가 두려우니라 21그것이 골짜기에서 발굽질하고 힘 있음을 기뻐하며 앞으로 나아가서 군사들을 맞되 22두려움을 모르고 겁내지 아니하며 칼을 대할지라도 물러나지 아니하니 23그의 머리 위에서는 화살통과 빛나는 창과 투창이 번쩍이며 24땅을 삼킬 듯이 맹렬히 성내며 나팔 소리에 머물러 서지 아니하고 25나팔 소리가 날 때마다 힝힝 울며 멀리서 싸움 냄새를 맡고 지휘관들의 호령과 외치는 소리를 듣느니라(19-25)

 

19절부터는 다시 앞의 질문과 같이 수사적 질문으로 이루어집니다. 19-25절에서 나타나는 전투마는 여기에 언급되는 동물들 가운데 유일하게 인간에게 길들여진 동물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말의 뛰어난 호건성과 용맹성과 힘입니다. 19절의 말의 갈기는 말의 빠른 속도를 더 도드라지게 보여주는 기능을 합니다. 또한 콧김과 발길질, 말의 점프력 등을 통해 말의 엄청난 힘을 묘사하며, 비록 인간이 전투마를 조종하지만 그런 전투마에게 전투를 할 수 있는 능력과 힘을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0절의 ‘네가 하였느냐’는 질문이 20-25절까지 계속되는데, 이런 형식 또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기능을 합니다. 이렇게 설혹 길들인다고 하여도 그 또한 하나님께서 그 동물에게 주신 특성의 한도 안에서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매와 독수리의 뛰어난 능력(39:26-30)

하나님께서는 모든 생명체에게 열악한 환경을 이기고 살아갈 능력을 주십니다. 위험을 감지할 수 있는 감각과 사냥감을 포착하는 예리한 본능을 허락하십니다. 견디기 어려운 고난을 이기는 능력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26○매가 떠올라서 날개를 펼쳐 남쪽으로 향하는 것이 어찌 네 지혜로 말미암음이냐 27독수리가 공중에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어찌 네 명령을 따름이냐 28그것이 낭떠러지에 집을 지으며 뾰족한 바위 끝이나 험준한 데 살며 29거기서 먹이를 살피나니 그 눈이 멀리 봄이며 30그 새끼들도 피를 빠나니 시체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있느니라(26-30)

 

26-30절에서는 새 중에서 가장 강한 매와 독수리에 대한 질문을 하시는데,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네가 엄청난 속도로 나는 매를 날게 할 수 있으며, 높은 곳에 둥지를 틀게 만들 수 있냐고 물으십니다. 물론 못합니다. 다만 인간은 그런 습성이 있다는 것만 관찰할 수 있을 뿐입니다. 29-30절에서는 먹이와 독수리 새끼가 등장함으로써 38:39의 사자의 먹이와 새끼를 연결시키며 첫 번째 연설을 마무리합니다. 사자와 독수리는 지상과 공중에서 가장 강한 동물들이지만, 이들의 강함과 뛰어난 능력이 새끼를 먹이는 공통적인 목적에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함으로써 다시 한 번 모든 생물을 먹이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동물들에 관한 질문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욥의 지혜가 얼마나 보잘 것 없으며,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의 것 중 무엇 하나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동물의 세계에는 인간의 지혜와 능력을 넘어선 특색에 알맞은 기능이 주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와 사랑, 지혜와 능력으로 지으신 세계를 너끈히 보존하십니다. 인간에게도 그 자비와 사랑 안에서 모든 역경을 이겨갈 수 있도록 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는 은혜로우신 손길과 섭리를 믿으며 위로부터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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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38-02)


자연을 도구로 사용하시는 하나님

욥기 38장 19-38절


 

계몽주의 이래로 인간의 지식은 놀랍도록 발전하였습니다. 특히 과학 기술의 발전은 눈부실 정도입니다. 과학은 이제 종교와 심리적인 문제까지 뇌 공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인간 이성으로 모든 것이 해명되고 해결될 수 있습니까? 고통과 죽음의 문제에 과연 답할 수 있습니까? 인간이 구원에 이르기 위해 무엇이 필요합니까?

 

  • 이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하십니다. 여기서는 높은 곳인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질문하십니다. 빛과 어둠의 문제, 비와 눈과 우박 등 물의 변화를 통한 기후의 문제, 천체의 운행 문제 등에 대한 질문을 통해 하나님만이 이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자 통치하시는 분이며, 인간은 이런 부분을 조금도 알 수 없고 관여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하십니다.

 

빛과 어둠의 관계에 대한 질문(19-21)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욥에게 하늘이 어떤 원리로 유지, 운영되는지 알고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오늘 본문은 인간이 하나님의 지혜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어떤 원리로 운영하고 계시는지를 배울 수도 있습니다.

 

19○어느 것이 광명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이냐 어느 것이 흑암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이냐 20너는 그의 지경으로 그를 데려갈 수 있느냐 그의 집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느냐 21네가 아마도 알리라 네가 그 때에 태어났으리니 너의 햇수가 많음이니라(19-21)

 

세상의 가장 깊은 곳인 스올에 대해 질문하셨던 하나님께서 관심을 돌려 이번에는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질문하십니다. 19절에서는 빛과 어둠의 집이 어디에 있으며,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를 알고 있냐고 물으십니다. 이 당시 세계관에 따르면 땅 끝에는 두 개의 방이 있는데, 동쪽에는 빛을 위한 방이 있고, 서쪽에는 어둠을 위한 방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매일 아침 태양은 자신의 처소를 나와 하늘을 가로지르는 여행을 함으로써(시 19:4-6) 세상을 다스리다 밤이 되면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그의 처소로 돌아가고 그 후에 어둠이 나와 세상을 다스린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물론 인간은 빛과 어둠의 처소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20절에서는 그래도 혹시 어디에 있는지 안다면, 그들의 집으로 그들을 데리고 갈 수 있는지 그들의 집으로 가는 길은 알고 있는지 묻습니다. 태양과 어둠이 정확히 어떤 경로로 움직이는지 아느냐고 물으십니다. 실제로 태양은 날마다 조금씩 다른 경로로 움직이며, 현대 과학은 태양의 경로를 알고 있고 예측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현대 과학으로도 태양(혹은 지구)을 경로대로 움직이게는 할 수 없습니다. 태양을 움직이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러므로 욥의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그런데 21절에서 하나님은 욥에게 ‘너는 창조 당시에 태어났으며 나이가 많으니 알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비아냥거리십니다. 이것은 그동안 욥이 자신에게 지혜가 있다고 친구들에게 끊임없이 항변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입니다. 그동안 있었던 욥의 항변이 하나님 입장에서 볼 때는 너무나 가소로운 것입니다. 물론 욥뿐만 아니라 욥의 친구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심지어 엘리바스는 15:7-9에서 자신이 나이가 많기 때문에 지혜롭다고 말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렇듯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지혜와 연륜은 매우 미약하고 무력하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십니다. 이것은 또한 지혜나 연륜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지혜와 연륜이 있다고 자랑해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모두 ‘도토리 키 재기’라는 것입니다.

 

비와 눈의 근원에 관한 질문(22-30)

우리는 하늘의 기상현상을 비롯한 모든 자연의 재앙과 축복이 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대한 자연의 움직임 앞에 사람은 아주 미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인간은 태풍이나 지진과 같은 재앙 앞에 너무나 취약하기에 하나님이 지켜 주지 않으신다면 그 역사가 끝나 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매일의 일상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드립시다.

 

22네가 눈 곳간에 들어갔었느냐 우박 창고를 보았느냐 23내가 환난 때와 교전과 전쟁의 날을 위하여 이것을 남겨 두었노라 24광명이 어느 길로 뻗치며 동풍이 어느 길로 땅에 흩어지느냐 25○누가 홍수를 위하여 물길을 터 주었으며 우레와 번개 길을 내어 주었느냐 26누가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며 27황무하고 황폐한 토지를 흡족하게 하여 연한 풀이 돋아나게 하였느냐 28비에게 아비가 있느냐 이슬방울은 누가 낳았느냐 29얼음은 누구의 태에서 났느냐 공중의 서리는 누가 낳았느냐 30물은 돌 같이 굳어지고 깊은 바다의 수면은 얼어붙느니라(22-30)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는 기상 변화들에 대해 질문을 하십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당시 세계관에 따르면 하늘에는 눈이나 비 혹은 우박 등을 위한 방들이 있으며, 필요한 때에 이 방의 문을 열어 비나 우박 등을 내리신다고 여겼습니다. 21절은 이런 관점을 아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23절에서 눈과 우박을 방에 보관하시는 이유를 심판과 전쟁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십니다. 구약에서 여호와께서 친히 전사로 싸우시는 여호와 전쟁에서 비와 우박은 종종 하나님의 무기로 등장하는데, 여호수아 10:11의 기브온 전투나 사사기 5:20 므깃도 전투에서 이런 예들을 볼 수 있습니다. 24-25절은 길을 나누는 것이 공통적으로 등장하며, 서로 대구를 이루는데, 광명은 번개로 구체화하면서 번쩍이는 형태를 길을 나누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동풍과 홍수는 모두 심판을 의미하는데 동풍은 뜨겁고 건조한 바람으로 모든 식물을 말려버립니다. 그리고 용수는 이와 반대로 엄청난 물로 생명체에게 치명상을 가하는 것입니다. 26-27절에서는 앞과는 대조적으로 완전히 불모지가 된 곳을 풍성한 비로 회생시키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즉, 누가 세상에 비를 내리고 안 내리는 것으로 장을 심판하거나 축복할 수 있느냐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가뭄과 비와 우박 등 기상을 완전히 통제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8-30절은 물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비, 이슬, 없음, 서리 등을 통해 물을 다양하게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28-29절에서 ‘낳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고대 근동 신화에서 자연물은 모두 신들의 자손들로서 계보가 있다는 사상에 대해 반대하며,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연의 많은 부분들을 극복하고 두려움에서 벗어났지만, 여전히 비와 가뭄, 홍수, 우박 등은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만드시고 조종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란 사실은 우리에게 경외감과 자부심을 줍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 바로 세상의 통치자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당당하게 살아가야 할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홍수나 우박 등 자연 현상을 통해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도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천문에 관한 질문(31-33)

인간이 당연시하는 영역에서 하나님께서는 일일이 역사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최근 과거에 누렸던 일상이 사라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이전에는 당연했던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천체를 운행하시면서도 또한 우리의 일상을 운행하고 보호하십니다. 우리가 대일 식사하기 전에 하나님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것도 바로 그 하나님을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31○네가 묘성을 매어 묶을 수 있으며 삼성의 띠를 풀 수 있겠느냐 32너는 별자리들을 각각 제 때에 이끌어 낼 수 있으며 북두성을 다른 별들에게로 이끌어 갈 수 있겠느냐 33네가 하늘의 궤도를 아느냐 하늘로 하여금 그 법칙을 땅에 베풀게 하겠느냐(31-33)

 

31절부터는 천문에 관한 질문인데 고대 사회에서는 별의 운행이 기상과 인간사에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였기에 천문학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습니다. 별을 보고 예수님을 찾아온 동방박사들도 천문을 연구하는 학자들이었습니다. 인간사에 관한 천문학은 벌어진 현상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에 대해 주로 연구가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하나님의 질문은 좀 더 근원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묘성의 띠를 묶고 삼성의 띠를 묶는다는 것은 별자리를 만들었다는 의미이고, 북두성과 열두 궁성을 이끈다는 것은 이 별자리들이 현재의 궤도를 따라 움직이게 만들었다는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네가 이런 것을 할 수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인간들이 연구하는 그 천문학의 법칙이 땅을 지배하게끔 할 수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결국 이런 질문을 통해 천체를 만드시고, 그 원리들을 세상에 알려주는 것도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는 인간의 모든 학문적 기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학문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께서 만들어내신 원리들을 드러내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계를 좀 더 잘 관리하여 사람들 특히 약자에게 도움이 되도록 하는 것일 것입니다.

 

비를 내리는 것에 대한 질문(34-38)

우리가 지금 누리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기적과도 같은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베풀어 주지 않으셨다면 지금 우리가 먹고 입는 것들과 몸을 누일 수 있는 자리가 주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매순간 하나님께 감사하며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기억하며, 항상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34○네가 목소리를 구름에까지 높여 넘치는 물이 네게 덮이게 하겠느냐 35네가 번개를 보내어 가게 하되 번개가 네게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하게 하겠느냐 36가슴 속의 지혜는 누가 준 것이냐 수탉에게 슬기를 준 자가 누구냐 37누가 지혜로 구름의 수를 세겠느냐 누가 하늘의 물주머니를 기울이겠느냐 38티끌이 덩어리를 이루며 흙덩이가 서로 붙게 하겠느냐(34-38)

 

또다시 비의 주제가 등장하는데, 22-30절에서 나타난 비와 기상에 대한 질문이 관찰과 지식에 대한 질문이라면, 34-38절에서 나오는 것은 능력에 대한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비를 내리라’고 큰 소리로 명령을 하여 큰 비를 내릴 수 있냐고 물으십니다. 또한 35절에서는 번개에게 이리 가라 저리 가라 명령하며 네 부하로 부릴 수있냐고 물으십니다. 이렇게 철저히 인간의 무능함을 지적하신 후에 36-38절에서는 이 모든 것을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음을 네 개의 질문을 통해 밝히고 있습니다.

36절에서 ‘가슴속의 지혜는 누가 주었느냐’는 질문은 욥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지혜도 실상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수탉에게 주어진 슬기는 말하자면 새벽이 오면 어김없이 꼬끼오 하고 우는 것인데, 이렇듯 모든 생명체에게 주신 지혜도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또한 37-38절에서는 누가 구름을 셀 수 있느냐, 누가 하늘의 물주머니를 기울여 따를 수 있느냐는 물음을 통해 오직 하나님만이 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전능하심을 알려주심으로 욥이 인간의 전적인 무능함을 깨달을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십니다.


인간의 노력이 이룰 수 있는 지점이 있습니다. 사람이 가진 능력과 성취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제한된 범위 안에서입니다. 우리는 인간 한계를 넘어서는 영역의 신비와 섭리를 인정해야 합니다. 불가항력의 이들은 자비롭고 선하신 하나님꼐 믿고 맡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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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38-01)


성숙으로 이끄시는 하나님

욥기 38장 1-18절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왜 의인이 악인보다 더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왜 악인들은 불의를 행하면서도 더 잘 살아갑니까?” “왜 불쌍한 어린 것들이 이런 불행을 겪어야 합니까?” 마침내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그 응답은 우리 자신의 자리를 발견하게 하고, 더 깊은 신앙적 성숙으로 이끕니다.

 

  • 38장에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대답하시기 위해 나타나셨습니다. 하지만 대답 대신에 땅의 기초를 어떻게 놓았는지, 지진을 일으켜본 적은 있는지, 바다는 어떻게 생겼는지 바다 밑의 스올은 본 적이 있는지 등, 창조주 하나님만이 알 수 있는 질문들을 욥에게 퍼붓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질문들을 통해서 인간의 지혜가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철저히 알게 하신다.

 

하나님의 현현(1-3)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작은지 밝히시기 위해 창조의 위대함을 제시하십니다. 욥은 하나님께 자기를 공정하고, 정의롭게 다루어 달라고 요구했지만, 정작 하나님의 세계 가운데 인간의 공정과 정의의 가치에 대해서는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1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3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1-3)

 

하나님께서 드디어 하나님을 애타게 찾던 욥 앞에 등장하셨습니다. 본문은 ‘여호와께서 대답하셨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욥의 요청에 응답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엘리후가 말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폭풍우를 일으키시는 분이지만, 그의 말과는 다르게 먼 곳에 계신 분이 아니라 그들 앞에 나타나셔서 그들이 보는 앞에서 욥에게 질문을 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엘리후와 욥의 친구들이 가졌던 하나님에 대한 지혜가 완전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애타게 부르짖고 찾을 때 응답하시는 하나님께서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23-25에서 보면 애굽에서 노예로 일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잠잠히 계시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적극적인 구원의 활동을 시작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셔서 처음 하신 말씀은 욥이 무지하다는 것, 즉 지혜가 없다는 책망입니다. 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욥이 얼마나 지혜가 있는지를 시험하겠다며 이제부터 하는 질문에 각오를 단단히 하고 최선을 다해 대답하라고 명하십니다. 허리를 묶는 행동은 일을 할 때 방해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으로 민첩하게 최선을 다해 일하겠다는 표시입니다. 이것은 욥과 욥의 친구들의 논쟁이 누가 더 지혜로운지를 겨루는 지혜 논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서로 지혜롭다고 주장하는 이들 앞에서 인간의 지혜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를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땅의 기초에 대한 질문(4-7)

세상에서 하나님의 계획이 보이지 않는다고 원망하던 욥에게 피조세계를 펼쳐 보이며 ‘네가 보는 것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가 가진 지식의 한계를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교정해 주십니다. 심판관의 추궁처럼 들리지 않고 아비의 설득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4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5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6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7그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4-7)

 

4절부터 시작되는 하나님의 질문은 창조주만이 알 수 있는 세상 창조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첫 질문은 세상 창조 시 너는 어디에 있었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욥의 존재적 위치가 어디인지 분명히 알려주십니다. 잠언 3:19-20(“여호와께서는 지혜로 땅에 터를 놓으셨으며 명철로 하늘을 견고히 세우셨고 그의 지식으로 깊은 바다를 갈라지게 하셨으며 공중에서 이슬이 내리게 하셨느니라”)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땅의 기초를 놓으실 때 지혜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욥이 참으로 지혜가 있으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창조하셨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욥과 그의 친구들이 말하는 인간의 지혜라는 것이 제한적이며 미미하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4-6절에서 기초, 도량법, 줄로 재는 것, 주춧돌, 모퉁이돌 등의 단어를 통해 세상의 창조를 마치 건물을 건축하는 것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고대 근동에서는 우주를 일종의 성전으로 보았으므로, 세상 창조를 성전을 건축하는 것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7절에서는 세상 창조 시 존재하지도 않았던 욥과는 대조적으로 별들과 하나님의 아들들 즉, 천사들이 하나님의 창조를 보고 기뻐 노래를 부르고 찬양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은 창조에 관한 한 별들과 천사들보다 지식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바다의 탄생에 대한 질문(8-11)

욥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인간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섭리를 이해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철저히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섭리의 비밀을 보여 주신다 해도 인간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8○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 9그 때에 내가 구름으로 그 옷을 만들고 흑암으로 그 강보를 만들고 10한계를 정하여 문빗장을 지르고 11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더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높은 파도가 여기서 그칠지니라 하였노라(8-11)

 

8-11절에서는 바다의 창조에 대해 질문하시는데, 마치 아기를 출산하는 은유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바다는 혼돈의 세력으로, 세상을 파괴하는 강력한 신으로 등장합니다. 그래서 고대 근동 신화에서 마르둑이나 바알은 티아맛이나 얌으로 불리는 바다의 신을 정복하고 세상을 창조하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하지만 여기서 바다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통제하시는 아기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8절의 “가두다”, “옷을 만들고 강보를 만들다”, “한계를 정하고 문과 빗장을 두신다”는 표현은 철저한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들입니다. 고대 근동의 신들은 바다와 싸워야 했지만, 11절(“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더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높은 파도가 여기서 그칠지니라 하였노라”)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바다를 ‘넘어오지 말라’는 말 한마디로 다스리십니다. 즉, 바다는 하나님의 규례에 온전히 순종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악인들의 심판에 대한 질문(12-15)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의 복을 누리는 곳은 더 이상 사망과 음부의 위협이 존재하지 않는 완전히 행복한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사망 권세를 물리치시고 우리에게 완전한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에 감사와 찬송을 돌려 드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12○네가 너의 날에 아침에게 명령하였느냐 새벽에게 그 자리를 일러 주었느냐 13그것으로 땅 끝을 붙잡고 악한 자들을 그 땅에서 떨쳐 버린 일이 있었느냐 14땅이 변하여 진흙에 인친 것 같이 되었고 그들은 옷 같이 나타나되 15악인에게는 그 빛이 차단되고 그들의 높이 든 팔이 꺾이느니라(12-15)

 

이 단락에서는 빛과 어둠을 통해 악인들의 심판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12절에서 아침과 새벽이 오게 해본 적이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날마다 하시는 일이지만, 인간은 결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침과 새벽은 어둠과 악을 드러내는 빛을 상징합니다. 13절 (“그것으로 땅 끝을 붙잡고 악한 자들을 그 땅에서 떨쳐 버린 일이 있었느냐”)에서 ‘그것으로 땅 끝을 붙잡고’라고 히브리어 본문을 직역하였는데, ‘붙잡고’라는 단어는 빛이 땅 끝까지 완전히 비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아침이 와서 빛이 세상을 비추게 되면 어둠 속에서 은밀히 악을 행하던 자들이 전부 드러나게 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먼지를 털듯이 땅에서 털어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빛은 진흙에 인장을 찍으면 아름다운 무늬가 나타나듯이 혹은 아름다운 옷처럼 나타나서, 아침이 오면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세계가 드러나고 세상을 누리며 살아가지만, 악인들에게는 빛이 차단되고 그들의 높이든 팔이 꺾일 것이라고 하십니다. 팔은 힘의 상징으로 하나님께 반역한 자들이 심판을 받을 것을 의미하며, 빛이 차단되는 것도 죽음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통치하시는 것과 인간을 통치하시는 것을 같이 연결하심으로 세상과 인간 모두의 통치자이심을 드러내십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 숨길 수 있는 악은 없으며, 악인은 반드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하며, 죄를 지었을 때는 빨리 죄를 자복하고 용서하심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지하 세계에 대한 질문(16-18)

바닷물이 육지를 침범하여 덮어 버리는 재앙은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해 이러한 두려움이 현실적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바다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향한 믿음 안에서 평안을 누리며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찬송해야 합니다.

 

16○네가 바다의 샘에 들어갔었느냐 깊은 물 밑으로 걸어 다녀 보았느냐 17사망의 문이 네게 나타났느냐 사망의 그늘진 문을 네가 보았느냐 18땅의 너비를 네가 측량할 수 있느냐 네가 그 모든 것들을 다 알거든 말할지니라(16-18)

 

이제 하나님의 질문은 지상에서 지하 세계로 옮겨집니다. ‘바다의 샘’은 바다의 근원을 뜻하는 것으로 스올의 입구에 있으며, 깊은 물인 ‘테홈’은 무저갱으로 스올을 의미합니다. 이 질문은 단순히 바다 밑 세계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죽은 자들이 가는 저승에 대한 질문으로서 그곳을 가본 적이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이 영역은 산자들이 결코 알 수 없는 부분입니다. 17절은 좀 더 구체적으로 사망의 문을 본 적이 있는지, 즉 죽어서 가는 곳에 가본 적이 있는지 묻습니다. 이것은 28:22(“멸망과 사망도 이르기를 우리가 귀로 그 소문은 들었다 하느니라”)에서 멸망과 사망에게 지혜를 들어보았는지 물어보았다고 말한 욥에게 죽음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고 죽음의 세계에 가보지도 못한 그가 마치 사망의 세계까지도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한 것에 대한 질책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세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지혜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며, 우리 인생을 하나님의 손에 온전히 맡기는 겸손한 모습이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인식을 새롭게 하십니다. 더 놀랍고 깊은 지식으로 이끄십니다. 스스로 묻고, 생각하고, 발견하고, 깨닫는 일들을 통해 한층 성장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성숙케 하시는 하나님을 의문의 시간들을 성숙의 시간들로 바꿔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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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37-01)

 


엘리후의 멀리 계신 하나님

욥기 37장 1-24절


 

사람들은 세상 만물이 변화하는 이치를 통해 무엇인가를 깨닫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며, 진리가 무엇인가를 바르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그다지 큰 효과가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늘 엘리후는 팔레스타인의 겨울 기후에 대해 묘하하며 자기가 하나님을 어떻게 깨닫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과연 그 깨달음이 언 수준인지 의심스럽습니다.

 

  • 37장은 36장의 폭풍우를 일으키시는 하나님께서 란 주제가 계속 연결됩니다. 1-13절까지는 천둥과 번개와 폭우를 통해서 인간이나 땅의 짐승들이 어찌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표현한 뒤에, 14-20절에서는 엘리후가 욥에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함으로 욥이 지혜가 없다는 것을 드러내고, 마지막으로 지혜로운 자는 여호와를 경외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며 그의 연설을 마칩니다.

 

우레와 번개와 폭우를 조종하시는 하나님(1-13)

하나님의 권능이 무한하고 사람이 그것을 다 헤아릴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명확히 알지 못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불분명한 조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으면서, 상대에게는 들으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1이로 말미암아 내 마음이 떨며 그 자리에서 흔들렸도다 2하나님의 음성 곧 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똑똑히 들으라 3그 소리를 천하에 펼치시며 번갯불을 땅 끝까지 이르게 하시고 4그 후에 음성을 발하시며 그의 위엄 찬 소리로 천둥을 치시며 그 음성이 들릴 때에 번개를 멈추게 아니하시느니라 5하나님은 놀라운 음성을 내시며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큰 일을 행하시느니라 6눈을 명하여 땅에 내리라 하시며 적은 비와 큰 비도 내리게 명하시느니라 7그가 모든 사람의 손에 표를 주시어 모든 사람이 그가 지으신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8그러나 짐승들은 땅 속에 들어가 그 처소에 머무느니라 9폭풍우는 그 밀실에서 나오고 추위는 북풍을 타고 오느니라 10하나님의 입김이 얼음을 얼게 하고 물의 너비를 줄어들게 하느니라 11또한 그는 구름에 습기를 실으시고 그의 번개로 구름을 흩어지게 하시느니라 12그는 감싸고 도시며 그들의 할 일을 조종하시느니라 그는 땅과 육지 표면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명령하시느니라 13혹은 징계를 위하여 혹은 땅을 위하여 혹은 긍휼을 위하여 그가 이런 일을 생기게 하시느니라(1-13)

 

엘리후는 천둥과 번개를 하나님의 진노의 음성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천둥과 번개가 온 사방에 울리고 빛을 발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음성도 온 사방에 울리는데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을 멈추거나 지체할 존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비와 눈도 바로 순종을 하며 인간도 천둥과 번개를 멈출 수 없는 무력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천둥과 번개를 통해 하나님께서 는 인간이 할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을 하시는데, 눈과 비를 내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시편 135:7에서도 번개가 비를 만든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눈은 일 년에 3일 정도밖에 오지 않는 드문 일이며, 겨울에는 주로 폭우가 옵니다.

7-8절은 폭우가 내릴 때 인간과 모든 생물들의 무력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손이 묶여 있다는 표현은 홍수와 폭우에 인간 철저히 무력하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으며, 짐승들은 자신의 은신처에 들어가 꼼짝도 못하고 있는 모습을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9절에서 바람에 대한 고대인의 생각을 알 수 있는데, 이들은 바람도 우박이나 눈처럼 하늘의 방에 보관되어 있다가 하나님께서 필요하신 때에 그들을 풀어놓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시 135:7). 이렇게 밀실에서 나온 바람은 추위를 일으키고 얼음을 얼게 합니다. 여기서는 바람을 하나님의 입김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11-12절은 하나님께서 지상에 비를 내리기 위해 구름을 조종하시는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데, 일단 구름에 물기를 싣고 물기를 가득 실은 구름을 번개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흩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구름에게 명령하시면 그곳이 어디든지 구름들은 가서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게 됩니다. 이것이 12절(“그는 감싸고 도시며 그들의 할 일을 조종하시느니라 그는 땅과 육지 표면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명령하시느니라”)의 의미입니다. 엘리후의 비에 대한 설명은 그가 당대 최고의 학식을 가졌다는 것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13절(“혹은 징계를 위하여 혹은 땅을 위하여 혹은 긍휼을 위하여 그가 이런 일을 생기게 하시느니라”)에서 보면 어디에 비를 어떻게 내릴지를 결정하는 기준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 범죄한 자들에게는 심판을 위해서 폭우를 내리시고 일반적으로 땅에 사는 생물을 위해 내려주기도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잘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은혜의 단비로 내려주신다고 말합니다.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실 때도 인과응보의 원칙에 따라 벌 받을 자에게는 심판의 수단으로, 상을 받을 자들에게는 축복의 수단으로 내려주신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엘리후는 철저하게 인과응보 신학 안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엘리후의 질문(14-20)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는 방법은 많습니다. 자신과 자연과 말씀과 세상을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와 뜻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다음입니다. 깨달았다면 행해야 합니다. 그 행함을 지속하고 유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14○욥이여 이것을 듣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오묘한 일을 깨달으라 15하나님이 이런 것들에게 명령하셔서 그 구름의 번개로 번쩍거리게 하시는 것을 그대가 아느냐 16그대는 겹겹이 쌓인 구름과 완전한 지식의 경이로움을 아느냐 17땅이 고요할 때에 남풍으로 말미암아 그대의 의복이 따뜻한 까닭을 그대가 아느냐 18그대는 그를 도와 구름장들을 두들겨 넓게 만들어 녹여 부어 만든 거울 같이 단단하게 할 수 있겠느냐 19우리가 그에게 할 말을 그대는 우리에게 가르치라 우리는 아둔하여 아뢰지 못하겠노라 20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어찌 그에게 고할 수 있으랴 삼켜지기를 바랄 자가 어디 있으랴(14-20)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자랑한 엘리후는 이제 화살을 욥에게 돌립니다. 그는 욥에게 자신의 말을 잘 듣고 가만히 좀 있으라고 요청합니다. 여기서 가만히 있으라는 것은 자신이 무죄하다고 계속해서 주장하지 말고 자신의 말을 듣고 좀 반성하고 회개하라는 의미입니다. 엘리후는 수사학적인 질문을 통해 욥의 무지함을 일깨웁니다. 여기서 엘리후가 묻는 것은 구름 속의 번개가 번쩍거리는 현상에 대해 설명하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것들을 조종하시고 구름을 둥둥 떠다니게 하시는지 그 방법과 지식을 아느냐는 것입니다. 엘리후는 이것을 완전한 지식이라고 표현하는데, 하나님만이 가지신 이런 완전한 지식을 너는 아느냐고 묻습니다. 이에 욥은 당연히 ‘아니오’라고 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18절(“그대는 그를 도와 구름장들을 두들겨 넓게 만들어 녹여 부어 만든 거울 같이 단단하게 할 수 있겠느냐”)에서는 욥에게 구름을 만들 수 있냐고 묻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거울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유리 거울이 아니라 동을 망치로 쳐서 만든 청동 거울을 말합니다. 이것은 고대 히브리의 우주론을 보여주는데, 이들은 하늘을 두들겨서 펴진, 단단하지만 얇은 철판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하늘에 있는 방의 문들이 열려서 비, 우박, 눈, 바람 등이 나오며 이 철판에 해, 달, 별들이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늘을 만드신 분은 바로 하나님으로 여기서 엘리후가 욥에게 묻는 것은 네가 창조주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들은 38장에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하시는 질문을 통해 확장됩니다.

19절(“우리가 그에게 할 말을 그대는 우리에게 가르치라 우리는 아둔하여 아뢰지 못하겠노라”)에서 엘리후는 우리에게 가르치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최고의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가 모르는 것은 다른 인간도 모른다는 자부심에서 나온 말입니다. 즉, 자신들이 모르는 것은 이제 창조주 하나님의 영역으로 그 영역에 대해 인간인 욥은 알고 있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것은 욥이 모른다는 것을 전제하고 묻는 질문으로 일종의 조롱입니다. 20절에서 엘리후는 하나님께 할 말이 많은 욥과는 반대로 자신은 하나님께 할 말이 없다고 합니다. 또한 후반절 해석에서 ‘삼키다’를 ‘전달하다’로 번역하면 자신이 말한들 하나님께 온전히 전달이 되겠느냐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는 먼 데 계시고 인간의 지혜와 말할 수 없이 큰 차이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인간들의 말을 하나님께서 일일이 들으시고 상대하시겠느냐고 말합니다. 이런 엘리후의 사상은 창조주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과 지혜를 경외하고 존경하지만,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처럼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그와 교제를 나누는 관계는 가지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는 엘리후의 하나님께서 되실 수 없을 것입니다.

 

엘리후 연설의 결론(21-24)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신성을 가지신 분임에도 죄인들이 지불해야 할 죄의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이토록 깊은 예수님의 사랑을 닮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자신은 실천하지 못한 조언을 쉽게 건네지 마시기 바랍니다. 상대방의 처지를 조심스럽게 헤아리고,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말씀하고 행동하셨을지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21○그런즉 바람이 불어 하늘이 말끔하게 되었을 때 그 밝은 빛을 아무도 볼 수 없느니라 22북쪽에서는 황금 같은 빛이 나오고 하나님께는 두려운 위엄이 있느니라 23전능자를 우리가 찾을 수 없나니 그는 권능이 지극히 크사 정의나 무한한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심이니라 24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경외하고 그는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모든 자를 무시하시느니라(21-24)

 

21절은 다시 폭우와 번개의 주제로 돌아가서 이렇게 구름과 번개로 인해 비가 내리더라도 바람이 이 비구름을 싹 쓸어 가면 하늘은 청명하게 되고 더 이상 번개를 볼 수 없게 되며 북방에서 금빛으로 태양이 뜬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금빛으로 빛나는 태양은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북방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계신 곳으로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는 나타나지 않고 이렇게 간접적으로 보여주시기 때문에 인간은 결코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고 반복하고 있으며 또한 인간이 절대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을 굽게 하거나 바꿀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욥이 하나님을 만나 자신의 의로움을 밝히겠다는 말에 대한 반대를 하는 것으로 엘리후는 인간은 특히 지혜가 있는 인간의 본분은 어떤 경우라도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그의 연설을 끝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잠언 1:7의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사상과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엘리후의 인과응보 신학은 잠언과 연결되어 있으며 일반적으로는 이런 신학이 올바릅니다. 하지만 욥의 경우에는 의인의 고난이라는 특수한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잠언의 신학이 바로 적용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욥기가 잠언 신학의 기계적 적용에 대한 교정자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하지 않고서는 절대자의 존재를 어렴풋이 느낄 뿐입니다. 자연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섭리와 성품에 대해 정확히 깨달을 수 없습니다. 자연현상을 관찰한 결과나 그것을 통해 얻은 영감으로 하나님의 깊은 속내를 파악한 듯 말하는 태도는 교만의 극치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욥기는 계속 겸손이 참된 지혜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작은 깨달음이나 영감 하나를 가지고 마치 대단한 깨달음을 얻은 양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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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36-02)

 


행간에 담긴 엘리후의 진짜 의도

욥기 36장 17-33절


 

성경을 읽을 때, 한 구절만 떼어 내어 읽으면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 말씀을 가지고 말을 늘어놓게 되면, 말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 진실한 의미를 알게 될 때, 그때는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맥락을 파악하고 그의 의도를 살펴보면 그의 발언이 적절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엘리후는 욥에게 그의 능력과 부유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벗어날 수 없다고 경고하며 인간이 높이 계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옳다 그르다 할 수 없다고 충고합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좀 더 구체적으로 욥에게 설명하기 위해 폭풍우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묘사하며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욥에게 임할 심판을 경고(17-21)

누구나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을 아무 때나, 누구에게나 적용하는 태도는 매우 어리석은 것입니다. 참되 지혜는, 듣고 공감해 주며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거만하게 가르치는 모습은 세상의 어리석은 자들이 보여 주는 전형적인 모습니다. 이처럼 행동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17○이제는 악인의 받을 벌이 그대에게 가득하였고 심판과 정의가 그대를 잡았나니 18그대는 분노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많은 뇌물이 그대를 그릇된 길로 가게 할까 조심하라 19그대의 부르짖음이나 그대의 능력이 어찌 능히 그대가 곤고한 가운데에서 그대를 유익하게 하겠느냐 20그대는 밤을 사모하지 말라 인생들이 밤에 그들이 있는 곳에서 끌려 가리라 21삼가 악으로 치우치지 말라 그대가 환난보다 이것을 택하였느니라(17-21)

 

엘리후 욥이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은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회개하지 않는 악인이 받아야 할 벌을 받는 것이며, 그것이 정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욥이 자신이 지금 받는 고난이 정의롭지 못하며, 자신은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한 반론입니다. 18-19절에서 엘리후 욥이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자꾸 하나님의 심판을 빠져나가려는 유혹을 받는 것처럼 묘사하면서 조심하라고 경고합니다. 그는 이 부분에서 세 번이나 부유함이 결코 고난의 상태를 벗어나게 하지 못한다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이런 엘리후의 경고는 매우 부당한 것으로 31:24-28에서 욥은 자신이 결코 금이나 은이나 재물의 풍부함에 소망을 두지 않았으며, 이런 것에 유혹되었다면 이것은 재판에 회부될 죄라고 분명히 언급하였습니다. 하지만 엘리후는 이런 욥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고, 여전히 욥이 자신의 재물과 힘을 의지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또한 20절에서 밤을 사모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24:13-17에 등장하는 밤을 좋아하는 악인이 바로 욥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악인들은 밤을 그들의 활동무대와 안식처로 삼지만, 그곳도 안전하지 못하며 하나님께 심판을 받기 위해 빛으로 끌려나올 것입니다.

21절은 욥에 대한 비난의 결론으로 엘리후는 욥이 악한 쪽을 선택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 길에서 돌이키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엘리후는 자신의 모든 지식을 다해 욥을 설득하고 있지만, 정작 욥이 진정을 다해 하는 말은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욥은 비록 많은 재물을 가졌지만, 그것 때문에 교만한 적도 재물을 의지한 적도 없었는데, 욥이 죄가 없다며 버티는 것을 재물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몰아세웁니다. 마치 사탄이 하나님 앞에서 욥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 하나님께서 재물을 많이 주셨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렇게 사탄과 엘리후는 욥의 진정성보다는 재물이라는 외적 요소에 초점을 맞추어 인물을 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높이 계신 하나님(22-25)

괴로원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다 들어주지 않고 자기 말만 늘어놓으면, 그 사람의 회복과 번영에 대한 책임을 막연하게 하나님께만 떠넘겨서는 안 됩니다. 특히 성도 사이에 이런 소통이 오간다면,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그들의 관계는 친밀해지지 않고, 피상적으로 지속될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명하신 교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당신은 주님이 명하신 교제가 아닙니다.

 

22하나님은 그의 권능으로 높이 계시나니 누가 그같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23누가 그를 위하여 그의 길을 정하였느냐 누가 말하기를 주께서 불의를 행하셨나이다 할 수 있으랴 24○그대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하고 높이라 잊지 말지니라 인생이 그의 일을 찬송하였느니라 25그의 일을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나니 먼 데서도 보느니라(22-25)

 

이 부분은 엘리후가 생각하는 하나님으로 여기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높이 혹은 멀리 계신 하나님께서입니다. 22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높이 계시는 분으로 하나님과 같은 선생님은 이 세상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선생님이라고 표현한 것은 9절에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교훈을 베푸시는 분이라는 것과 3절에서 엘리후가 먼 데서 즉, 하나님께 지식을 얻었다고 말한 것과 연관됩니다. 즉, 지혜와 지식의 근원을 하나님으로 여긴 것으로 이것이 히브리 지혜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잠 1:7). 이렇게 하나님께서 가장 큰 선생님이신데 누가 감히 그 앞에서 ‘이 길로 가시면 옳습니다. 이 길로 가시면 틀립니다’하고 말할 수 있으며 심지어 하나님께서 불의한 일을 행하셨다고 판단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옳은지 내가 옳은지 하나님을 법정에 세우겠다고 주장한 욥(9:19-20)에 대한 반박입니다.

그는 욥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하라고 명령합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어떤 능력과 힘을 가지고 계시며 어떤 분이신지를 기억해야만,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미약하고 어리석은 존재이며 오직 하나님을 찬송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지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24-25절에서 계속 언급되는 하나님의 일은 높이 있어 모든 사람이 우러러볼 수 있으며 분명하게 드러나서 모든 사람이 멀리서도 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26절부터 하나님의 일의 한 예로 폭풍우에 대해 언급합니다. 엘리후는 지금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은 분명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다고 말하며 그것도 모르냐고 욥을 질책합니다. 여기서 엘리후가 말하는 하나님의 일은 인과응보의 신학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정작 하나님의 일을 모르는 것은 엘리후입니다. 용도 그도 하나님께서 왜 욥에게 그토록 큰 고난을 주셨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엘리후는 그 사실을 모르면서 아는 척하고 있고, 욥은 왜 이러시느냐고 하나님께 심각하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하나님의 모든 뜻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 알려 주시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단편적이고 피상적으로 안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 고민하지 않거나 숙고하지 않으면 하나님에 대해 알 수가 없습니다. 비록 힘들고 설명이 안 돼서 답답할지라도, 왜 그런지 하나님께 심각하게 질문을 던지고 답을 얻으려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이런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서 우리는 답을 얻건 못 얻건 간에 하나님과 좀더 친밀한 관계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폭풍우를 일으키시는 하나님(26-33)

현대도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는 하나님도, 성경도 잘 알지 못하면서 아는 척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이런 어리석은 태도를 배척해야 합니다. 실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 이방 우상의 모습을 하나님께 대입해 하나님도 비슷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을 지혜나 지식이라고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26하나님은 높으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 그의 햇수를 헤아릴 수 없느니라 27그가 물방울을 가늘게 하시며 빗방울이 증발하여 안개가 되게 하시도다 28그것이 구름에서 내려 많은 사람에게 쏟아지느니라 29겹겹이 쌓인 구름과 그의 장막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깨달으랴 30보라 그가 번갯불을 자기의 사면에 펼치시며 바다 밑까지 비치시고 31이런 것들로 만민을 심판하시며 음식을 풍성하게 주시느니라 32그가 번갯불을 손바닥 안에 넣으시고 그가 번갯불을 명령하사 과녁을 치시도다 33그의 우레가 다가오는 풍우를 알려 주니 가축들도 그 다가옴을 아느니라(26-33)

 

36:26-37:13까지 엘리후는 폭풍 속에서 나타나시는 하나님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으로서의 위엄과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지혜와 능력을 지니신 분이며, 그 큰 권능으로 심판을 하시는 하나님께서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26절부터는 하나님 자체로 관심을 옮깁니다. 하나님의 일은 누구나 알 수 있지만, 하나님 자신은 멀리 계셔서 그 누구도 그에 대해 알 수 없으며, 그가 언제부터 계셨는지 알 수도 없습니다. 지혜 전통에서는 나이가 많을수록 지혜로운 것으로 여겼는데 하나님께서는 나이를 알 수 없을 만큼 무한대의 나이이시기에 지혜도 무한대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27-33절은 폭풍우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물방울이 증발되어 올라가 수증기를 만들어 구름을 형성하고 구름이 비를 내리는 모습은 인간이 관찰하는 비가 내리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고대에서는 이 과정 모두가 하나님께서 비를 만드시는 과정으로 이해하였고, 엘리후는 그런 당대의 관점에서 말함으로써 자신의 유식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비는 엄청난 우레와 번개를 동반하는 폭풍우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31절에서 하나님께서 이 비를 자신의 통치 수단으로 삼는데, 하나는 심판이고 하나는 풍성한 음식을 통해 주는 축복입니다. 심판은 폭우가 와서 홍수가 나는 것이나 혹은 비가 안 와 가뭄이 오는 상황을 말하며, 풍성한 음식을 주신다는 것은때를 따라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셔서 곡식과 모든 생물들이 풍요롭게 먹고 살 수 있게 해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도 인과응보 신학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번개는 여호와의 손에 들린 무기로 표현되는데, 시편 18:14; 144:6에서 번개를 여호와의 화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번개는 전쟁을 하는 신들의 손에 들린 무기로 표현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편과 욥기에서도 고대 근동의 개념을 빌려와 여호와를 표현하는 데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번개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번개가 치고 우레가 울리면 하나님께서 폭풍우를 몰고 심판하기 위해서 오신다는 것을 한낱 짐승들도 모두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한낱 미물들도 알고 있는 이 원리를 모르고 왜 죄를 회개하지 않아 심판을 자초하느냐고 책망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엘리후의 하나님에 대한 표현은 옳습니다. 그는 여기서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지식을 넘어서는 분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자신의 입으로 하나님의 지혜는 무한하다고 말해놓고도 자신은 마치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겸손하지 않을 때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많은 것을 알고 경험한 전문가들은 말을 아까는데, 이제 갓 입문한 사람이 마치 많은 지식을 갖고 있는 양 이러쿵저러쿵 많은 말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 우리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런 분이고, 이렇게 섭리하신다’라는 식의 말을 쉽게 내뱉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어리석음에 빠지지 말고, 겸손히 하나님의 지혜를 얻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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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36-01)


하나님을 빙자한 어리석은 말들

욥기 36장 1-16절


 

성도들 중에는 자신이 아는 성경 구절이나 신학 지식으로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해주는 이들이 많습니다. 모든 경우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종종 때와 상황에 맞지 않는 말로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립니다. 함부로 조언하는 습관은 자신이 남보다 낫다는 우월의식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엘리후의 말을 살펴보며, 우월 의식을 반드시 버려야 하는 이유를 배울 수 있습니다.

 

  • 엘리후는 네 번째 연설을 시작하면서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지혜로 하나님을 변증하겠다고 합니다. 엘리후가 말하는 하나님께서는 결국 의인은 성공하게 하시며, 악인은 심판하셔서 젊어서 죽게 하시지만 그래도 회개하는 자들은 구원하신다는 것으로 이전의 친구들과 동일한 주장을 합니다.

 

하나님을 위한 변증 서론(1-4)

성경은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가르칩니다(빌 2:3). 하늘보다 높으신 예수님도 우리와 같이 낮아져 죄인과 동등한 취급을 받는 길을 묵묵히 걸으셨습니다. 우월감에 젖은 사람은 상대에게 공감하기 이전에 자기 지식을 전달하기 바쁩니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이런저런 일로 아파하는 사람에게 자꾸 방법을 제시하지 말고, 그저 마음을 알아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1엘리후가 말을 이어 이르되 2나를 잠깐 용납하라 내가 그대에게 보이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아직도 할 말이 있음이라 3내가 먼 데서 지식을 얻고 나를 지으신 이에게 의를 돌려보내리라 4진실로 내 말은 거짓이 아니라 온전한 지식을 가진 이가 그대와 함께 있느니라(1-4)

 

엘리후는 세 번이나 연설을 하고도 아직도 할 말이 있으니 시간을 더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에 관해서 아직 할 말이 더 남아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에 대한 것이 엘리후의 네 번째 연설의 주제입니다. 3절에서 엘리후는 자신의 지식이 멀리서 온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그의 지식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으며 이 지식은 하나님의 의로움을 밝히는 데 사용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 말은 욥이 의로운 자신에게 재앙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해 불평함으로 과연 하나님께서 불의하시나는 문제가 도출되었기에, 이에 대해 자신이 하나님의 의로움을 변증하겠다는 것입니다. 4절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은 기만적인 것이나 속임수가 아니라 온전한 지식이라고 변호하며, 본인이 하나님에 대한 변증을 할 충분한 자격이 있음을 나타냅니다. 엘리후는 자신의 지식이 완벽하며 틀림이 없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어느 누구도 완벽하고 확실한 지식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가진 한계이고 이 부분을 인정하고 늘 겸손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과응보에 충실하신 하나님(5-16)

우월의식에 빠진 성도는 이중의 폐해를 끼칩니다. 사람에게 상처 주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단지 그분의 주권을 인정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무궁하고, 그분이 고난 받는 자에게 공의를 베푸십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아무 지혜도 없으면서 스스로 지혜롭게 생각하는 자가 늘어 놓는 진부한 주장이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5하나님은 능하시나 아무도 멸시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사 6악인을 살려두지 아니하시며 고난 받는 자에게 공의를 베푸시며 7그의 눈을 의인에게서 떼지 아니하시고 그를 왕들과 함께 왕좌에 앉히사 영원토록 존귀하게 하시며 8혹시 그들이 족쇄에 매이거나 환난의 줄에 얽혔으면 9그들의 소행과 악행과 자신들의 교만한 행위를 알게 하시고 10그들의 귀를 열어 교훈을 듣게 하시며 명하여 죄악에서 돌이키게 하시나니 11만일 그들이 순종하여 섬기면 형통한 날을 보내며 즐거운 해를 지낼 것이요 12만일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면 칼에 망하며 지식 없이 죽을 것이니라 13마음이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은 분노를 쌓으며 하나님이 속박할지라도 도움을 구하지 아니하나니 14그들의 몸은 젊어서 죽으며 그들의 생명은 남창과 함께 있도다 15하나님은 곤고한 자를 그 곤고에서 구원하시며 학대 당할 즈음에 그의 귀를 여시나니 16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대를 환난에서 이끌어 내사 좁지 않고 넉넉한 곳으로 옮기려 하셨은즉 무릇 그대의 상에는 기름진 것이 놓이리라(5-16)

 

이 부분에서의 주제는 인과응보의 원칙을 충실하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다양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엘리후가 묘사한 하나님께서는 강하고 의로우신 분입니다.

 

(1) 하나님에 대한 기본 전제(5-6)

 

5-6절 “하나님은 능하시나. 아무도 멸시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사 악인을 살려두지 아니하시며 고난받는 자에게 공의를 베푸시며”에서 밝히는 하나님에 대한 기본 전제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며 또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깨끗한 자 곧, 의인을 물리치지는 않으시는 분이지만 악인은 살려두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21:7에서 욥이 “왜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살려두시냐”고 질문한 것에 대한 답입니다. 엘리후는 하나님께서는 결코 악인은 살려두지 않으신다고 전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고통을 받고 있다고 해서 모두 악인인 것은 아니라고 보는데, 그 이유는 그 가운데서 공의를 베풀어 구원해주시는 사람들이 있으며,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지만, 35장에 따르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시기 때문입니다.

 

(2) 의인을 돌보시는 하나님(7-12)

 

7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의인에게 눈을 거두지 않으시는 분으로 묘사하는데, 언제나 의인을 돌보신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왕들과 왕좌에 앉히시고 영원히 존귀하게 하신다는 의미는 실제적으로 왕이 되게 하신다기보다는 왕처럼 존귀하게 혹은 성공하게 만드신다는 뜻입니다. 이 주장은 창세기의 요셉 이야기가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잠언은 오히려 의인의 성공을 말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잠 4:18; 10:6; 13:21; 15:6). 오히려 어떤 사람이 의인인지에 대해서 더 많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의인과 성공을 기계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옳은 관점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8-12절은 의인에게 환란이 닥치는 이유와 해결책을 제시하는데, 의인에게 환란이 닥치는 이유는 그들이 교만한 행동과 악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한 교육적 목적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환란이 닥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학자와 같이 알아들을 수 있게 귀를 열어주시고 지혜자들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을 듣고 죄악에서 돌이키라고 명령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지혜 선생님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11-12절은 이런 교훈의 결과가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11절은 듣고 순종하면 고통에서 벗어나 좋고 즐거운 생애를 보낼 수 있지만, 만일 순종하지 않으면 멸망 당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멸망 당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듣지 않아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엘리후는 의인의 성공론을 통해서 지금 욥이 고난 중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의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모순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인이라면 욥은 행복한 날을 보내야 하는데, 이렇게 여전히 고난 중에 있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 죄를 지은 죄인임이 틀림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3) 경건치 않은 자를 심판하시는 하나님(13-14)

 

13절 “마음이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은 분노를 쌓으며 하나님이 속박할지라도 도움을 구하지 아니하나니”은 7-12절과 대조적으로 경건치 않은 자 즉,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자들의 운명으로 이들은 하나님 앞에 진노를 계속 쌓아두어 계속해서 고난을 받지만, 결코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부르짖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운명은 결국 죽음입니다. 14절 “그들의 몸은 젊어서 죽으며 그들의 생명은 남창과 함께 있도다”에서 젊어서 죽는다는 것은 천수를 누리지 못한다는 뜻이고, 남창과 함께 죽는다는 것은 가장 수치스럽고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으로 남창은 하나님께서 가장 가증하게 여기는 직업이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23:18 “창기가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어떤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에 따르면 창기와 개같이 돈을 번 자가 나오는데, 여기서 개같이 돈을 번 자가 바로 남창을 의미하며, 이 둘은 하나님께 가증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엘리후는 하나님에 대해 변증을 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욥을 협박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욥이 자신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으면 명대로 못 살 것이고, 죽어도 가장 수치스럽게 죽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4) 곤고한 자를 건지시는 하나님(15-16)

 

15-16절 “하나님은 곤고한 자를 그 곤고에서 구원하시며 학대당할 즈음에 그의 귀를 여시나니”은 결론으로, 귀를 연다는 10절의 말을 반복하여 하나님의 교훈을 들으면 곤고한 중에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욥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즉, 빨리 귀를 열어 자신의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16절 “하나님이 그대를 환난에서 이끌어 내사 좁지 않고 넉넉한 곳으로 옮기려 하셨은 즉 무릇 그대의 상에는 기름진 것이 놓이리라”에서 이 모든 이야기를 욥에게 적용시키기 위해 ‘당신’이라는 이인칭 남성 단수형을 사용합니다. 자신의 말을 듣고 따라오면 기름진 것으로 가득 찬풍성한 식탁을 받을 수 있게 된다고 말하는데, 풍성한 식탁의 이미지는 힘과 번영과 건강을 상징합니다. 즉, 그가 잃었던 모든 것을 되찾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엘리후는 하나님을 변증한다고 하며 말을 시작하였지만, 결국은 욥에 대한 비난과 설득으로 맺고 있습니다.


우월의식에 빠지면 하나님도, 사람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자기를 증명하기에만 급급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리고 이웃을 사랑해야 할 성도라는 정체성이 사소한 인정욕구로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누구도 누구보다 우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하는 지체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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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35-01)


하나님을 아는 지식

욥기 34장 31절-35장 16절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크게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잘못의 대가로 겪게 되는 고난입니다. 다음으로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인해 겪는 고난입니다. 마지막으로 자발적으로 당한 고난인데, 정의와 이 세상의 평화를 위해 당하는 고난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고난 당하신 희생은 순전히 자발적인 고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고난이든지 고난에는 의미가 있고 거기에는 반드시 유익이 있음을 우리는 기억을 해야 할 것입니다.

 

  • 이 본문에서는 엘리후가 두 가지로 욥을 공격하는데, 첫째는 욥이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는 것에 대한 것이고, 둘째는 욥이 의롭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엘리후는 이 두 부분에 대해 공격하면서 결론적으로 욥은 죄인이며 지혜가 없는 어리석은 자라고 합니다.

 

엘리후의 두 번째 연설 마지막 부분(34:31-37)

하나님께서는 심판주십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의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잠자는 자들처럼 죄에 빠져 세월을 낭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세속에 물들어 살아간다면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입은 성도로서 하나님의 의를 따라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31○그대가 하나님께 아뢰기를 내가 죄를 지었사오니 다시는 범죄하지 아니하겠나이다 32내가 깨닫지 못하는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악을 행하였으나 다시는 아니하겠나이다 하였는가 33하나님께서 그대가 거절한다고 하여 그대의 뜻대로 속전을 치르시겠느냐 그러면 그대가 스스로 택할 것이요 내가 할 것이 아니니 그대는 아는 대로 말하라 34슬기로운 자와 내 말을 듣는 지혜 있는 사람은 반드시 내게 말하기를 35욥이 무식하게 말하니 그의 말이 지혜롭지 못하도다 하리라 36나는 욥이 끝까지 시험 받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 대답이 악인과 같음이라 37그가 그의 죄에 반역을 더하며 우리와 어울려 손뼉을 치며 하나님을 거역하는 말을 많이 하는구나(31-37)

 

이 부분은 엘리후의 두 번째 연설 마지막 부분으로 엘리후는 욥이 범죄하지 않았다는 말에 반박하며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하여 욥이 지혜가 없는 무식한 자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1) 욥의 말과 엘리후의 대답(34:31-33)

 

엘리후 욥이 하나님께 범죄했다는 고백을 해야 하며,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맹세했는지를 묻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욥이 이렇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 하는데 그것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한 비난입니다. 32절에서 “깨닫지 못한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라는 구절은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그에게 가르침을 받아 지혜로워져야 한다는 의미이며, 엘리후는 욥의 현재 상태가 지혜가 없는 상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3절(“하나님께서 그대가 거절한다고 하여 그대의 뜻대로 속전을 치르시겠느냐 그러면 그대가 스스로 택할 것이요 내가 할 것이 아니니 그대는 아는 대로 말하라”)은 죄를 심판하고 그에 맞는 처벌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욥이 자신은 죄가 없고 자신에게 내려진 재앙은 부당하다고 말한 들 욥의 마음대로 그 재앙이 처리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엘리후는 자신의 말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죄 용서를 구할지, 아니면 계속해서 자신은 무죄하다고 주장할지 욥이 결정할 문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욥이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결과로 지금 고난을 받고 있으며, 전적으로 욥에게 책임이 있음을 분명히 하는 말입니다.

 

(2) 다른 사람들의 질문(34:34-35)

 

엘리후는 자신의 말의 객관성을 더하기 위해 슬기로운 자들과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들의 말을 인용합니다. 자신의 말을 듣는 사람을 지혜로운 자라고 표현함으로 자신이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고, 또한 이들의 말이 옳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이 말하기를 욥이 무식하며 지혜롭지 못하다고 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엘리후는 이들의 입을 통해서 무죄를 주장하는 욥이 무식하며 지혜가 없다고 대놓고 비판을 한 것입니다.

 

(3) 엘리후의 대답(34:36-37)

 

두 번째 연설 결론으로 엘리후 욥이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무식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시험을 받기 원한다고 말합니다. 현재 받은 벌로 충분하지 않으며, 이것은 욥이 아직 하나님께 죄를 자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7절에서 욥이 죄에다 반역을 더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그는 지금 욥이 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을 반역으로까지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 번째 연설은 욥이 무식해서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계속해서 그가 재앙을 받게 되기를 기원하는 말로 끝을 내고 있다. 참 잔인한 결론입니다. 비록 자신의 생각에 욥이 어리석고 고집스러워 지혜자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심각한 재앙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욥에게 고통이 계속되기를 원한다는 기원을 하는 것이 과연 지혜로운 자의 행동인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엘리후의 세 번째 연설(35:1-16)

고난 당하고 있는 지체를 위로해주고 싶다면 어떤 말을 해 줄지 고민해 보는 것도 좋지만, 어떤 말을 피할지 심사숙고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 모두 사려 깊고 지혜로운 친구가 되어 주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인생을 아끼시는 하나님께서 계시고, 사려 깊은 말로 힘을 북돋워 주는 친구들이 있다면, 사람이 어떤 고난에 빠지든지 회복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입니다.

 

1엘리후가 말을 이어 이르되 2그대는 이것을 합당하게 여기느냐 그대는 그대의 의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말이냐 3그대는 그것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며 범죄하지 않는 것이 내게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묻지마는 4내가 그대와 및 그대와 함께 있는 그대의 친구들에게 대답하리라 5그대는 하늘을 우러러보라 그대보다 높이 뜬 구름을 바라보라 6그대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그대의 악행이 가득한들 하나님께 무슨 상관이 있겠으며 7그대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그대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8그대의 악은 그대와 같은 사람에게나 있는 것이요 그대의 공의는 어떤 인생에게도 있느니라 9○사람은 학대가 많으므로 부르짖으며 군주들의 힘에 눌려 소리치나 10나를 지으신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고 하며 밤에 노래를 주시는 자가 어디 계시냐고 말하는 자가 없구나 11땅의 짐승들보다도 우리를 더욱 가르치시고 하늘의 새들보다도 우리를 더욱 지혜롭게 하시는 이가 어디 계시냐고 말하는 이도 없구나 12그들이 악인의 교만으로 말미암아 거기에서 부르짖으나 대답하는 자가 없음은 13헛된 것은 하나님이 결코 듣지 아니하시며 전능자가 돌아보지 아니하심이라 14하물며 말하기를 하나님은 뵈올 수 없고 일의 판단하심은 그 앞에 있으니 나는 그를 기다릴 뿐이라 말하는 그대일까보냐 15그러나 지금은 그가 진노하심으로 벌을 주지 아니하셨고 악행을 끝까지 살피지 아니하셨으므로 16욥이 헛되이 입을 열어 지식 없는 말을 많이 하는구나(1-16)

 

이 부분은 엘리후의 세 번째 연설로 욥이 제기한 문제들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고 있다. 욥의 말의 인용과엘리후의 반박이라는 형식으로 연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1) 욥의 말을 인용(35:1-3)

 

엘리후는 욥의 주장에 대해서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합니다. 하나는 욥이 정말 정의롭냐는 문제이고 또 하나는 의로운 것이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주장입니다. 첫째 문제는 욥이 죄가 없는 상태에서 재앙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말합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정의인 인과응보대로 행하지 않으셨다는 말이며, 그럼 하나님이 불의하고 욥이 더 정의롭다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둘째 문제는 9:22에서 욥이 제기한 무죄한 자나 악인이 동일하게 멸망 당한다는 문제로, 21:15에서 인용한 악인들의 무례한 말을 근거로 하여 욥이 의로운 것이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주장한 것을 문제 삼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욥의 말에 대한 명백한 과장이며, 엘리후가 욥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거나 혹은 일부러 곡해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엘리후의 반박(35:4-8)

 

4절에서 엘리후는 욥뿐만 아니라 욥과 지금까지 함께하며 토론하였던 세 친구들까지 자신의 연설 대상에 포함시킵니다. 엘리후는 욥의 친구들의 말이 자신보다 덜 지혜로워서 욥을 설득하지 못하였다고 생각하고, 그들에게도 한 수 가르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엘리후는 하늘의 구름을 예로 들며 하나님께서 얼마나 인간 세상에서 멀리 계신지를 표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죄를 짓거나 의로운 행위를 해도 결코 하나님께 영향을 미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짓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해를 당하는 것도 아니고 인간이 의를 행한다고 해서 하나님에서 상을 받거나 이득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엘리후가 말하고 싶은 것은 8절로 인간의 행동은 오직 인간에게만 영향을 미치며, 의로운 행동의 목적은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을 통해 자신의 의로움을 입증하여 자신의 억울함과 고난에서 벗어나려는 것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3) 죄인의 부르짖음의 헛됨(35:9-13)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왜 욥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지 않는지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사람들이 학대가 많고 권력자들의 힘에 눌려 도와달라고 소리를 지르는 상태에 있는데도 구원을 못 받은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10-11절에서 보면, 그들은 시편 기자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하나님을 향하여 외치고 탄원하던 기도를 전혀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12-13절에서 교만한 악인들이 부르짖으면 응답하지 않으신다고 말하는데, 악인들의 부르짖음은 헛된 것이며, 이런 헛된 것에 하나님은 듣지도 관심을 가지시지도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돌아보다’라는 단어는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3) 엘리후의 결론(35:14-16)

 

엘리후는 욥에게 이 두 가지 문제가 모두 있다고 언급합니다. 첫째는 죄를 자복하며 부르짖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의 판단을 기다릴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아직도 욥은 하나님께 벌을 받고 있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엘리후 생각에는 욥은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있으며, 지금 받고 있는 고난만으로도 벌을 다 받은 것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16절에서 이렇게 죄인으로 하나님의 관심도 받기 어려운 욥이 계속해서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것은 지식이 없는 태도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엘리후는 세 번째 연설에서 욥이 스스로 주장한 의로움에 대해 철저하게 비판을 하고, 그가 죄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을 아끼시는 하나님께서 계시고, 사려 깊은 말로 힘을 북돋워 주는 친구들이 있다면, 사람이 어떤 고난에 빠지든지 회복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을 중심으로 관계를 맺어 갈 때, 우리는 함께 고난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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