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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37-01)

 


엘리후의 멀리 계신 하나님

욥기 37장 1-24절


 

사람들은 세상 만물이 변화하는 이치를 통해 무엇인가를 깨닫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며, 진리가 무엇인가를 바르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그다지 큰 효과가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늘 엘리후는 팔레스타인의 겨울 기후에 대해 묘하하며 자기가 하나님을 어떻게 깨닫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과연 그 깨달음이 언 수준인지 의심스럽습니다.

 

  • 37장은 36장의 폭풍우를 일으키시는 하나님께서 란 주제가 계속 연결됩니다. 1-13절까지는 천둥과 번개와 폭우를 통해서 인간이나 땅의 짐승들이 어찌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표현한 뒤에, 14-20절에서는 엘리후가 욥에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함으로 욥이 지혜가 없다는 것을 드러내고, 마지막으로 지혜로운 자는 여호와를 경외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며 그의 연설을 마칩니다.

 

우레와 번개와 폭우를 조종하시는 하나님(1-13)

하나님의 권능이 무한하고 사람이 그것을 다 헤아릴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명확히 알지 못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불분명한 조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으면서, 상대에게는 들으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1이로 말미암아 내 마음이 떨며 그 자리에서 흔들렸도다 2하나님의 음성 곧 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똑똑히 들으라 3그 소리를 천하에 펼치시며 번갯불을 땅 끝까지 이르게 하시고 4그 후에 음성을 발하시며 그의 위엄 찬 소리로 천둥을 치시며 그 음성이 들릴 때에 번개를 멈추게 아니하시느니라 5하나님은 놀라운 음성을 내시며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큰 일을 행하시느니라 6눈을 명하여 땅에 내리라 하시며 적은 비와 큰 비도 내리게 명하시느니라 7그가 모든 사람의 손에 표를 주시어 모든 사람이 그가 지으신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8그러나 짐승들은 땅 속에 들어가 그 처소에 머무느니라 9폭풍우는 그 밀실에서 나오고 추위는 북풍을 타고 오느니라 10하나님의 입김이 얼음을 얼게 하고 물의 너비를 줄어들게 하느니라 11또한 그는 구름에 습기를 실으시고 그의 번개로 구름을 흩어지게 하시느니라 12그는 감싸고 도시며 그들의 할 일을 조종하시느니라 그는 땅과 육지 표면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명령하시느니라 13혹은 징계를 위하여 혹은 땅을 위하여 혹은 긍휼을 위하여 그가 이런 일을 생기게 하시느니라(1-13)

 

엘리후는 천둥과 번개를 하나님의 진노의 음성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천둥과 번개가 온 사방에 울리고 빛을 발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음성도 온 사방에 울리는데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을 멈추거나 지체할 존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비와 눈도 바로 순종을 하며 인간도 천둥과 번개를 멈출 수 없는 무력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천둥과 번개를 통해 하나님께서 는 인간이 할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을 하시는데, 눈과 비를 내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시편 135:7에서도 번개가 비를 만든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눈은 일 년에 3일 정도밖에 오지 않는 드문 일이며, 겨울에는 주로 폭우가 옵니다.

7-8절은 폭우가 내릴 때 인간과 모든 생물들의 무력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손이 묶여 있다는 표현은 홍수와 폭우에 인간 철저히 무력하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으며, 짐승들은 자신의 은신처에 들어가 꼼짝도 못하고 있는 모습을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9절에서 바람에 대한 고대인의 생각을 알 수 있는데, 이들은 바람도 우박이나 눈처럼 하늘의 방에 보관되어 있다가 하나님께서 필요하신 때에 그들을 풀어놓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시 135:7). 이렇게 밀실에서 나온 바람은 추위를 일으키고 얼음을 얼게 합니다. 여기서는 바람을 하나님의 입김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11-12절은 하나님께서 지상에 비를 내리기 위해 구름을 조종하시는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데, 일단 구름에 물기를 싣고 물기를 가득 실은 구름을 번개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흩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구름에게 명령하시면 그곳이 어디든지 구름들은 가서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게 됩니다. 이것이 12절(“그는 감싸고 도시며 그들의 할 일을 조종하시느니라 그는 땅과 육지 표면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명령하시느니라”)의 의미입니다. 엘리후의 비에 대한 설명은 그가 당대 최고의 학식을 가졌다는 것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13절(“혹은 징계를 위하여 혹은 땅을 위하여 혹은 긍휼을 위하여 그가 이런 일을 생기게 하시느니라”)에서 보면 어디에 비를 어떻게 내릴지를 결정하는 기준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 범죄한 자들에게는 심판을 위해서 폭우를 내리시고 일반적으로 땅에 사는 생물을 위해 내려주기도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잘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은혜의 단비로 내려주신다고 말합니다.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실 때도 인과응보의 원칙에 따라 벌 받을 자에게는 심판의 수단으로, 상을 받을 자들에게는 축복의 수단으로 내려주신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엘리후는 철저하게 인과응보 신학 안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엘리후의 질문(14-20)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는 방법은 많습니다. 자신과 자연과 말씀과 세상을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와 뜻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다음입니다. 깨달았다면 행해야 합니다. 그 행함을 지속하고 유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14○욥이여 이것을 듣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오묘한 일을 깨달으라 15하나님이 이런 것들에게 명령하셔서 그 구름의 번개로 번쩍거리게 하시는 것을 그대가 아느냐 16그대는 겹겹이 쌓인 구름과 완전한 지식의 경이로움을 아느냐 17땅이 고요할 때에 남풍으로 말미암아 그대의 의복이 따뜻한 까닭을 그대가 아느냐 18그대는 그를 도와 구름장들을 두들겨 넓게 만들어 녹여 부어 만든 거울 같이 단단하게 할 수 있겠느냐 19우리가 그에게 할 말을 그대는 우리에게 가르치라 우리는 아둔하여 아뢰지 못하겠노라 20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어찌 그에게 고할 수 있으랴 삼켜지기를 바랄 자가 어디 있으랴(14-20)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자랑한 엘리후는 이제 화살을 욥에게 돌립니다. 그는 욥에게 자신의 말을 잘 듣고 가만히 좀 있으라고 요청합니다. 여기서 가만히 있으라는 것은 자신이 무죄하다고 계속해서 주장하지 말고 자신의 말을 듣고 좀 반성하고 회개하라는 의미입니다. 엘리후는 수사학적인 질문을 통해 욥의 무지함을 일깨웁니다. 여기서 엘리후가 묻는 것은 구름 속의 번개가 번쩍거리는 현상에 대해 설명하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것들을 조종하시고 구름을 둥둥 떠다니게 하시는지 그 방법과 지식을 아느냐는 것입니다. 엘리후는 이것을 완전한 지식이라고 표현하는데, 하나님만이 가지신 이런 완전한 지식을 너는 아느냐고 묻습니다. 이에 욥은 당연히 ‘아니오’라고 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18절(“그대는 그를 도와 구름장들을 두들겨 넓게 만들어 녹여 부어 만든 거울 같이 단단하게 할 수 있겠느냐”)에서는 욥에게 구름을 만들 수 있냐고 묻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거울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유리 거울이 아니라 동을 망치로 쳐서 만든 청동 거울을 말합니다. 이것은 고대 히브리의 우주론을 보여주는데, 이들은 하늘을 두들겨서 펴진, 단단하지만 얇은 철판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하늘에 있는 방의 문들이 열려서 비, 우박, 눈, 바람 등이 나오며 이 철판에 해, 달, 별들이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늘을 만드신 분은 바로 하나님으로 여기서 엘리후가 욥에게 묻는 것은 네가 창조주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들은 38장에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하시는 질문을 통해 확장됩니다.

19절(“우리가 그에게 할 말을 그대는 우리에게 가르치라 우리는 아둔하여 아뢰지 못하겠노라”)에서 엘리후는 우리에게 가르치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최고의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가 모르는 것은 다른 인간도 모른다는 자부심에서 나온 말입니다. 즉, 자신들이 모르는 것은 이제 창조주 하나님의 영역으로 그 영역에 대해 인간인 욥은 알고 있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것은 욥이 모른다는 것을 전제하고 묻는 질문으로 일종의 조롱입니다. 20절에서 엘리후는 하나님께 할 말이 많은 욥과는 반대로 자신은 하나님께 할 말이 없다고 합니다. 또한 후반절 해석에서 ‘삼키다’를 ‘전달하다’로 번역하면 자신이 말한들 하나님께 온전히 전달이 되겠느냐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는 먼 데 계시고 인간의 지혜와 말할 수 없이 큰 차이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인간들의 말을 하나님께서 일일이 들으시고 상대하시겠느냐고 말합니다. 이런 엘리후의 사상은 창조주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과 지혜를 경외하고 존경하지만,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처럼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그와 교제를 나누는 관계는 가지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는 엘리후의 하나님께서 되실 수 없을 것입니다.

 

엘리후 연설의 결론(21-24)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신성을 가지신 분임에도 죄인들이 지불해야 할 죄의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이토록 깊은 예수님의 사랑을 닮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자신은 실천하지 못한 조언을 쉽게 건네지 마시기 바랍니다. 상대방의 처지를 조심스럽게 헤아리고,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말씀하고 행동하셨을지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21○그런즉 바람이 불어 하늘이 말끔하게 되었을 때 그 밝은 빛을 아무도 볼 수 없느니라 22북쪽에서는 황금 같은 빛이 나오고 하나님께는 두려운 위엄이 있느니라 23전능자를 우리가 찾을 수 없나니 그는 권능이 지극히 크사 정의나 무한한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심이니라 24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경외하고 그는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모든 자를 무시하시느니라(21-24)

 

21절은 다시 폭우와 번개의 주제로 돌아가서 이렇게 구름과 번개로 인해 비가 내리더라도 바람이 이 비구름을 싹 쓸어 가면 하늘은 청명하게 되고 더 이상 번개를 볼 수 없게 되며 북방에서 금빛으로 태양이 뜬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금빛으로 빛나는 태양은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북방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계신 곳으로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는 나타나지 않고 이렇게 간접적으로 보여주시기 때문에 인간은 결코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고 반복하고 있으며 또한 인간이 절대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을 굽게 하거나 바꿀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욥이 하나님을 만나 자신의 의로움을 밝히겠다는 말에 대한 반대를 하는 것으로 엘리후는 인간은 특히 지혜가 있는 인간의 본분은 어떤 경우라도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그의 연설을 끝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잠언 1:7의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사상과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엘리후의 인과응보 신학은 잠언과 연결되어 있으며 일반적으로는 이런 신학이 올바릅니다. 하지만 욥의 경우에는 의인의 고난이라는 특수한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잠언의 신학이 바로 적용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욥기가 잠언 신학의 기계적 적용에 대한 교정자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하지 않고서는 절대자의 존재를 어렴풋이 느낄 뿐입니다. 자연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섭리와 성품에 대해 정확히 깨달을 수 없습니다. 자연현상을 관찰한 결과나 그것을 통해 얻은 영감으로 하나님의 깊은 속내를 파악한 듯 말하는 태도는 교만의 극치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욥기는 계속 겸손이 참된 지혜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작은 깨달음이나 영감 하나를 가지고 마치 대단한 깨달음을 얻은 양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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