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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16-02)


역사 속에서 얻는 교훈(2)

고린도전서 16장 13-24절


영국의 작곡가 엘가(Edward Elgar)는 무명 시절에 자신에게 작곡가로서의 재능에 대해 아내가 용기와 격려를 해 주었습니다. 자신을 격려한 아내를 위해 ‘사랑의 인사’란 곳을 작곡하여 아주 유명해졌습니다. 사보 바울도 자신에게 사랑과 위로를 주었던 성도들에게 인사를 나누고 있습니다.

 

  •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여러 문제에 답하기 위해 쓴 편지로서, 문제가 많았기에 편지도 길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문제의 해결책은 매우 간단합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제 편지의 마지막 부분을 정리하면서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권고합니다.

 

마지막 권면(13-14)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3:1)처럼 연약한 모습에 머물러 서 있으면 안 됩니다. 날마다 영적으로 깨어서 성장해야 합니다. 점점 성장해서 장성한 남자처럼 강인함을 지닌 성숙한 신앙인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단의 공격을 분별해 낼 수 있고, 죄의 유혹을 경계하고 막을 수 있습니다.

 

13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14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13-14)

 

앞서 바울은 분쟁하는 고린도 성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사랑’임을 강조하는 한편(13장), 부활 신앙을 일깨워 주었습니다(15장). 땅에 속한 자처럼 살아가는 성도들이 깨어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늘에서의 삶을 준비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고린도 교회에 있는 많은 문제점들에 대해서 말씀으로 전했고 그의 의견을 제안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세운 간절한 목자의 심정으로 권면을 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한 편지를 마무리 하면서 다시 권면합니다. 그 권면은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⑴ 깨어서 남자답게 강건하라(13)

 

첫째, 깨어있어야 합니다. 믿음 안에서 깨어 있지 않고 덕과 경건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악한 세력과 대항해서 싸울 수 없고, 악한 세력에 물들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둘째, 믿음에 굳게 서는 일입니다. 모든 유혹과 고난에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 위에서 흔들리지 않는 삶을 뜻합니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우리의 믿음’인 것입니다(요일 5:4). 셋째, 남자답게 강건하라고 합니다. 용기 있게 믿음을 유지하고 유혹이나 위협에 굴하지 말 것을 격려하는 것입니다.

 

⑵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14)

 

우리의 열심과 봉사와 단호함은 사랑 안에서 혹은 사랑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이뤄져야 합니다. 사랑의 열매를 더 많이 맺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 성도들에게 교회 안에서 자신의 지분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것을 위해 파당을 지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그리스도인으로 능력을 상실한 모습입니다. 세상을 향해 영향력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의 권고를 통해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길 바랍니다.

 

봉사자의 태도(15-18)

부활 신앙은 영적 잠에 빠진 성도를 깨우는 최고의 자명종입니다. 부활 소망으로 항상 깨어 잘못된 가르침에 흔들리지 말고, 복음에 기초한 굳건한 믿음으로 담대히 세상에 맞서되,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는 것이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15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16이같은 사람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사람에게 순종하라 17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온 것을 기뻐하노니 그들이 너희의 부족한 것을 채웠음이라 18그들이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사람들을 알아 주라(15-18)

 

바울이 아가야에서 첫 열매로 맺은 스데바나의 가정은 성도를 섬기는 일에 집안 사람 모두 헌신했습니다. 일반적인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은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성도들을 섬기기로 작정하고 봉사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자들에게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어떤 특별한 권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가치를 인정하고 격려해주는 일을 합니다. 더욱이 18절에서 “너희는 이런 사람들을 알아 주라”고 권고합니다. 혹시 교회 안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을 헐뜯거나 미워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성경 지식을 배우는 주일학교 수준을 넘어서 거룩한 믿음 안에서 삶을 함께 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체가 든든히 서가는 데는 언제나 공동체의 지체들을 섬기는 일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는 분들의 헌신이 있습니다. 성숙한 공동체는 이러한 사람들의 수고를 존중하며 그 수고에 감사할 뿐만 아니라 함께 수고하기를 기뻐합니다.

 

마지막 인사(19-24)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주를 사랑함’입니다. 주를 사랑한다는 것은 곧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마 22:37~40; 요일 4:20~21 참조). 주를 사랑함을 거부하며 믿음의 형제끼리 분쟁하면, 신앙과 교회를 무너뜨리고 주를 욕되게 하는 것이기에 심판받습니다. 반면 주를 사랑하면,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모하며 간구합니다.

 

19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20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21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22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23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하고 24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19-24)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통해서 아시아 여러 교회들의 문안을 전했습니다. 특히 바울을 도와 고린도 교회를 세웠던 아굴라와 브리스가의 문안 인사를 전했습니다. 여기서 아굴라와 브리스가의 문안은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되었습니다. 그들은 고린도 교회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 가셔도 교회를 위해 변함없이 자기 집을 개방하여 섬긴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로마 제국 전역으로 들불같이 펴져나갈 수 있었던 것은 바울과 같은 탁월한 사도들만이 아니라 이들과 같은 헌신적인 성도들이 있어 가능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있는 에베소 교회의 문안 인사도 전했습니다. 바울 당시 대부분의 편지는 필자가 썼고 마지막으로 원저자가 친필로 서명을 했습니다. 바울의 마지막 인사가 보라 이 친필에 해당합니다. 바울은 경고와 축복, 그리고 사랑의 말로 편지를 맺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했던 사람들과 그렇지 않는 사람들을 분명히 심판하실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했던 사람들과 그렇지 않는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경고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고린도전서 16:22) 이제 우리는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처럼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에만 만족할 것이 아니라 날마다 구원 얻은 자로써의 거룩한 삶을 살아가도록 함께 해야 합니다. 거룩한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하나님 나라 건설에 쓰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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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16-01)


역사 속에서 얻는 교훈

고린도전서 16장 1-12절


 

하나님의 사역에는 세 가지 생각을 하면서 사역하면 실수 없이 해나갈 수 있습니다. 사역을 위해 기도하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으로 정리하면서 일을 해나가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른 방법을 찾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유익이 되는가? 두 번째는 하나님의 공동체에 전체적으로 유익이 되는가? 마지막으로 사역을 하는 자신에게 영적인 유익은 되는가? 라는 생각으로 접근하면, 실수가 없을 것입니다.

 

  •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질의한 문제점들을 답을 하면서, 마지막에 부활의 문제까지 잘 설명했습니다. 이제 마무리하면서 기근에 처한 예루살렘 교회를 도우도록 권고합니다. 각 이방 지역에 있는 교회들이 조금씩 힘을 모아 어머니 같은 예루살렘 교회를 도왔습니다. 다른 교회들처럼 고린도 교회도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를 구제하는 헌금을 모금하는데 참여하도록 독려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1-4)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서로 돕길 원하십니다. 특별히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도와주길 원하십니다. 주위에 어려움을 당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들을 위해 구체적으로 도와야 방법은 무엇입니까? 성도의 필요를 채우는 일은 거룩한 책임이며 영광스러운 특권입니다. 물질의 나눔을 통해 교회는 주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연합을 이룹니다.

 

1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2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3내가 이를 때에 너희가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4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그들이 나와 함께 가리라(1-4)

 

당시 예루살렘 지역은 심각한 기근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 또한 어려움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러한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돕기 위해 이방 교회들에게 이들을 도울 수 있도록 자발적이고 체계적인 헌금을 하라고 명합니다. 그의 권고로 이미 이 일에 로마교회, 마케도니아 교회, 아가야 교회 등과 같은 이방 교회들이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고린도 교회에게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헌금을 요청했습니다.

헌금의 방식은 미리미리 준비한 헌금을 위해서 매주 첫날 자신의 수입에 따라 얼마씩을 저축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당일에 도착해서 강요하는 일이 없도록 해란 것입니다. 어느 정도 헌금이 모아지면 헌금을 예루살렘으로 가져 갈 사람을 보내겠다면서 가능하다면 자신도 함께 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나눔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복음의 구체적 실현이며,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함께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는 종말론적 예언의 성취입니다. 또 유대 그리스도인과 이방 그리스도인의 관계를 돈독하게 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온 교회가 하나 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습니다. 말과 혀만으로는 진정한 감동과 변화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구체적인 실천이 역사를 만듭니다.

 

고린도교회 방문 계획(5-9)

하나님의 일은 모든 것이 좋기 때문에 선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가는 질서가 있습니다. 그 질서를 따라서 순서에 맞도록 사역을 진행해 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질서해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5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가서 6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 겨울을 지낼 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내가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 7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만일 주께서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머물기를 바람이라 8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려 함은 9내게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으나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라(5-9)

 

에베소에 머무는 바울은 극심한 반대와 저항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낙심하거나 좌절하는 대신, 동역자들과 힘을 합해 당면한 위기를 지혜롭게 극복합니다. 아울러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마게도냐와 고린도도 방문해 직접 교제할 계획을 세웁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역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가장 원하시는 부분을 먼저 사역해 나가는 것을 원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뜻을 따라 움직였습니다. 그렇기에 개인적으로 고린도교회로 가고 싶었지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대적자들을 많은 에베소 교회에 머물렀던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움직이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디모데 방문 계획과 영접(10-12)

지도자의 외적인 자격이나 나이를 지나치게 고려하느라 그 지도자의 메시지를 제대로 듣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어느 기준으로 교회의 지도자를 대합니까? 이것은 당신의 신앙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역은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같은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 더불어 협력하고 연대할 때,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습니다.

 

10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그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그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라 11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 나는 그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노라 12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그에게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였으되 지금은 갈 뜻이 전혀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10-12)

 

바울은 고린도가 있는 마게도니아 지역에 가서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젊은 목회자 디모데를 보내게 되니, 그를 젊은 지도자라고 업신여기거나 힘들게 하지 말고 친절하게 잘 대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또한 아볼로가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지 못하는 사정을 이야기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 사도보다 젊은 사역자입니다. 그가 고린도에 도착하면 젊은 사역자이기 때문에 멸시를 당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부탁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해나가는데 두려움이 없이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부탁을 합니다. 바울 자신을 대하듯이 디모데를 잘 섬기고 그의 가르침을 자신의 교훈처럼 여기라고 뜻을 전합니다.

 

바울은 제자 디모데에게 에베소 교회에 머물게 하면서 다음과 같이 권고했습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13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디모데전서 4:12-13)

 

영적인 지도자가 나이나 경륜이 어리다고 쉽게 생각하면 손해를 볼 사람은 누구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주어질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은혜를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고통은 이방 교회들의 아픔입니다.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하면서 주변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주변에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부족한 힘이나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돕는 일은 앞장서고 또 주님을 위해 일하시는 분들에게 기쁘게 협력하도록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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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15-05)

 


부활을 통한 승리의 하나님

고린도전서 15장 50-58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에게 가장 큰 숙제는 죽음을 정복하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이겨보려고 수많은 노력해 왔습니다. 죽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중국의 진시황제입니다. 그는 방방곳곳에서 늙지 않을 불로초를 찾았고, 북쪽 흉노족으로 보호하기 위해 만리장성을 1500리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50세도 못 넘기고 49세 때 죽었습니다. 모든 인류는 어느 누구도 사망 권세를 정복할 수 없습니다.

 

  • 부활 논의에 대한 결론으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새로운 몸으로 변화할 것입니다. 그때 사망의 권세는 완전히 정복할 것이며, 모든 것을 삼켜버리던 죽음이 부활의 승리 속으로 삼켜져 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날을 소망하고 주님께 충성할 것을 권면합니다.

 

유업으로 받을 천국(50)

부활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마지막 권면을 합니다. 부활은 주의 재림 때 일어날 것입니다. 변화와 옷 입는 표현을 통해 썩어질 현재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고 새로운 몸을 입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때는 어둠의 통치 세력 중 하나인 사망을 이기고 모든 것이 완성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신자는 그때를 기대하고 지금 더 정성스럽게 주 안에서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50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50)

 

35절에서 제기한 두 가지 질문 중 부활의 과정에 대해 답합니다. ‘형제들아’라는 표현으로 독자의 반응을 유도합니다. 부활의 몸을 설명할 때 ‘어리석은 자들아’로 시작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입니다. 하지만 둘 다 독자들을 비난할 의도는 아닙니다. 그들의 집중을 이끌어내기 위한 수사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부활 과정 설명에 대해 그것이 왜 필요한지를 언급함으로 시작합니다. 살과 피로 구성된 몸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썩는 것은 썩지 않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50). 앞부분에서 설명한 현재의 몸과 부활의 몸의 차이를 전제로 한 표현입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와 그를 대적하는 반역의 나라라는 두 영역 개념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50절 표현은 앞부분 설명에서 언급하지 않았던 또 다른 개념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입니다. ‘유업을 받다’라는 말(클레로노메오)은 언약 관계 용어로 그 관계 안에 있는 자가 상속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 받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통치 영역 안에서 그분과의 언약 관계 결과를 누린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썩지 않음을 상속 받는다는 것도 같은 개념입니다. 결국, 성도에게 부활 과정이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관계를 누리려면 썩어짐의 과정을 경험하는 살과 피로 된 현재 몸이 아니라 불멸의 몸, 곧 영이신 하나님과 온전히 교제할 수 있는 신령한 몸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변화와 새 옷을 입는 부활(51-53)

우리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부활이 이뤄질 것을 믿지만 그 부활에 대해 적잖은 부분을 오해합니다. 그때 우리의 영혼만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도 부활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육체를 더러운 것으로 여기며 육체는 썩고 영혼만 다시 살아난다는 생각은 성경에서 말하지 않는 잘못된 개념입니다. 우리의 몸도 예수님처럼 변화될 것입니다.

 

51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53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51-53)

 

몸의 부활에 대해 설명입니다. 죽음이 모든 성도(‘우리’)의 마지막 상태가 아니라고 합니다. 마지막 나팔에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51). 마지막 나팔은 주의 나타나심과 관련된 표현으로 그분의 재림 때를 의미합니다(15:23). 죽은 자의 부활을 다룬 데살로니가전서 4:14-17은 주의 재림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합니다. 주님이 큰 소리와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하늘에서부터 내려오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때 주 안에서 먼저 죽은 자들이 다시 일어나고 그 다음에 살아있는 자들이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져 공중에서 주를 영접한다고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주의 재림 때 단순히 죽은 자가 다시 일어난다고만 말하지만 고린도전서 15:51-53은 두 가지 표현을 사용하여 부활 과정을 묘사합니다. 하나는 변화, 곧 바뀐다는 말입니다(51-52). 부활과 관련해 처음 사용한 단어입니다. 부활 과정은 죽은 자들이 이전 몸으로 다시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말하려고 합니다. 새로운 몸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것도 순식간에 바뀝니다. 바울은 52절에서 이 변화 과정을 앞서 언급한 부활의 몸의 본질에 대한 것과 연결해 다시 묘사합니다. 주의 강림 때 나팔 소리와 함께 죽은 자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고, 살아 있는 ‘우리’ 몸도 순식간에 신령한 몸으로 바뀔 것입니다. 물론 이 바뀜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수동형 표현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부활 과정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은 옷 입는다는 것입니다(53). 마치 옛 옷을 벗고 새 옷을 입듯, 새로운 몸이라는 옷을 입는 것으로 부활 과정을 묘사합니다. 약하고 영광스럽지 않고 썩어 없어질 것이 강하고 영광스럽고 썩지 않을 것으로 덧입어 새롭게 된다는 말입니다. 부활 과정에 대한 이 두 표현은 새롭게 된다는 것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나’라는 성도는 없어지지 않는다는 공통점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부활은 ‘나’가 없어지고 또 다른 새로운 ‘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몸이 바뀌는 것이지만, ‘나’라는 존재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 지낼 언약 관계의 상대자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이전과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하나님과 관계할 뿐입니다. 그런 면에서 부활 과정은 하나님께 온전히 반응할 수 있고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몸으로 변화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쉽게도 바울의 이런 설명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어떤 과정으로 변화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성경 다른 곳에서는 성령(예. 롬 8:9-10; 고후 3:18)이나 예수님의 일하심(빌 3:21)으로 된다고 말하지만, 구체적 과정은 알 수 없습니다. 구체적 설명 자체가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변화의 과정을 경험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감사할 신비요 비밀입니다(5).

 

사망에 대한 승리(54-57)

우리는 예수님의 승리로 인해 ‘이미’와 ‘아직’ 사이의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승리로 인해 ‘이미’ 죄와 사망의 지배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통치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주어진 예수님의 부활 생명으로 죄를 죽이며 거룩하게 살아갑니다. 반면 ‘아직’의 차원이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병들고 노쇠하며 죽어 갑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완전한 승리를 맛볼 것입니다.

 

54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55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54-57)

 

부활 과정과 관련해 사망에 대한 승리를 다룹니다. 바울은 썩을 것이 썩지 않는 것으로 옷 입고 죽을 것이 죽지 않는 것으로 옷 입을 때는 사망이 승리 안으로 삼켜진다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말합니다(54). 앞에서 말한 부활 과정이 온전히 실현되는 것(51-53)을 구약 이사야 25:8의 성취로 표현합니다. 두 가지 함의가 있습니다. 부활을 통한 죽음에 대한 승리는 하나님의 오래전 계획의 일부라는 것과 그 일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원에 대한 구약 약속을 이루셨기에 부활을 통한 완성의 약속 또한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또 다른 구약 본문인 호세아 13:14을 통해 사망에 대한 승리의 찬가를 외칩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으며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55)” 그러나 이런 외침에도 불구하고 사실 사망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죄와 사망과 율법과의 관계성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관계성을 사망이 쏘는 것은 죄이고 죄의 능력은 율법이라고 말합니다(56).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통로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앎과 지식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를 거절하는 죄를 막지 못합니다. 오히려 사람은 그 뜻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더 거절합니다. 이 과정에서 율법은 죄의 죄됨을 더 심각하게 보여주고, 그 죄로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받게 됨을 더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율법이 죄의 능력이란 말의 의미입니다. 그 심판과 저주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그렇기에 사망이 찌르는 무기는 죄입니다. 마치 사람을 죄로 찔러 사망에 이르게 한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이 죄와 죽음의 카르텔을 이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예수 메시아의 십자가와 부활로 승리의 길을 연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사람들을 향한 자신의 심판을 예수님에게 쏟음으로 죄에서 해방되는 길을 열었고, 부활을 통해 그 심판이 끝났음과 죽음의 통치에서 해방되는 길을 열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믿는 자는 주의 재림 때몸이 부활하는 과정을 통해 그 해방을 실제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전한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내용입니다(15:1-8). 그가 ‘우리 주 예수 메시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고백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57).

 

결론적 권면(58)

부활의 소망 때문에 우리는 믿음 가운데 더 굳게설 수 있고, 복음을 전하고 알리는 데 수고하게 됩니다. 대적이나 전쟁이나 기근이나 죽음의 위협 등 우리의 믿음을 가로막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부활의 소망은 이 모든 것을 넘어서게 만듭니다. 죽어도 다시 영원히 살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소망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귀히 여기고 더 붙들게 만듭니다.

 

58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58)

 

부활에 대한 설명에 근거해 독자들에게 권면합니다. 메시아의 사역으로 인해 죄와 죽음의 통치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영역으로 옮김 받은 신자는 장차 부활을 통해 참 해방의 완성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그 실재를 경험하고 있지 않지만, 예수님을 통해 보여준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함은 미래에 있을 그 완성의 보증입니다. 그러니 흔들리지 말고 굳게 서서 항상 주의 일에 더 힘쓰라고 바울은 권합니다. 주께서 역사를 완성하시는 그 때가 있고, 신자는 부활의 몸으로 그분과 영원한 교제를 하게 될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모두 반드시 죽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이뤄놓으신 죄 용서를 받지 못한 사람은 죽음의 독침을 견디지 못하고 끔찍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죄와 죽음의 사술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결코 정죄를 받지 않게 됩니다(롬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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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15-04)


부활한 후에 몸의 상태

고린도전서 15장 35-49절


부활이 주님을 믿고 산다고 하면서 여전히 세상의 욕심에 사로잡혀 살고 있지 않습니까? 땅의 것을 집중하느라 주님의 뜻을 잊고 살지 않습니까? 한계가 있는 인간의 관점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이해하려고 하면 믿음의 상상력을 잃어버리고 신앙생활이 지루하게 됩니다. 바울은 창조주의 무관한 가능성 안에서 자연의 이치와 이미지들을 동원하여 몸의 부활에 대해 생생하게 설명합니다.

 

  •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씨가 곡식이 되듯이 우리의 존잰 전체가 완전히 새로워지고 달라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부활 전과 후에 대해서 몸은 씨와 열매가 다른 만큼 다르다고 말합니다. 부활의 몸은 썩고 연약하고 욕된 첫 아담의 몸과 달리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의 몸처럼 될 것이라고 합니다.

 

부활에 대한 두 가지 질문:부활 과정과 부활의 몸(35)

부활의 과정과 부활의 몸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그중 부활의 몸에 대해 설명합니다. 심는 것과 다시 사는 것의 차이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몸을 주신다는 원리를 따라 설명합니다. 신자는 첫째 아담과 그에 속한 몸으로 시작했지만, 빛의 영역 속에서 그 영역을 시작한 예수의 몸처럼 하늘에 속한 신령하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35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35)

 

부활과 관련해 또 다른 주제들로 넘어갑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부활 과정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활의 몸에 대한 것입니다. 어떤 이의 질문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서술합니다. 아마도 바울 자신이 스스로 묻고 대답하는 형식인 듯합니다. 독자를 대화 속에 끌어들여 집중하게 하는 형태입니다. 이 두 가지에 대해 부활의 몸은 36-49절에서, 부활 과정은 50-56절에서 다룹니다.

 

부활의 몸에 대한 바울의 대답(36-49)

우리 육체는 썩을 것이지만, 다시 살아난 몸은 썩지 않을 것입니다. 욕되고 천한 육의 몸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몸으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이생의 육체는 상처나 병에 약한 몸이지만, 부활 후에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한 몸이 될 것입니다. 육의 몸은 현세의 삶을 위한 몸이기에 부활 이후의 삶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36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37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38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39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40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41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42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3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4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45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46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47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48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49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36-49)

 

거짓 가르침이나 이단 사설을 경계해야 합니다. 고린도 성도는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아 영혼의 부활은 받아들였지만, 몸의 부활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의 진리를 귀담아 듣고 그것을 붙들어야 합니다.

 

(1) 몸에 대한 두 가지 원리(36-41)

 

‘어리석은 자여’로 주의를 환기하고 설명을 시작합니다. 몸이 만들어지는 두 원리를 말합니다. 첫째, 모체가 죽어야 합니다(36). 바울은 고린도 성도(‘너’)의 경험에 호소해 강한 참여를 유도합니다. ‘네’가 심은 것이 죽지 않으면 생명을 만들 수 없습니다. 얼핏 보기에 이해되지 않습니다. 씨를 심으면 그것이 살아 있어야 싹을 틔우고 자라서 열매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씨가 자라 열매 맺는 연속성이 초점이 아닙니다. 심은 씨와 이후 과정에 나타난 것과의 불연속적 형태의 차이입니다. 37절은 이 초점을 구체화합니다. ‘네’가 심은 것은 장차 될 몸을 심은 것이 아닙니다. 다른 것으로 덮이지 않은 밀 같은 단순한 씨일 뿐입니다. 씨를 심었기에 그 씨의 형태는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싹이 나고 줄기가 되고 열매 맺을 수 있습니다. 변화를 위해 원래 것이 없어지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주목할 것은 ‘몸’이라는 표현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나 짐승 등에게 쓰는 말입니다. 하지만 부활의 몸과 연결시키기 위해 일부러 사용했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몸을 주시며 또한 각 씨들에게 그들만의 몸을 주셨습니다(38).

이 원리는 세 가지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몸의 다양성입니다. ‘각각’과 ‘자신만의’라는 표현으로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요소는 다양한 몸의 개별성은 다음 세대에도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개의 몸은 다음 세대에도 물고기 몸이 아니라 개의 몸이 된다는 말입니다. 또 다른 요소는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이런 요소들을 담고 있는 둘째 원리를 두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그 한 예는 생명체의 몸에 대한 것입니다(39). 사람과 짐승과 새와 물고기 등 모든 생명체는 저마다 다양한 육체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다음 세대에도 동일한 형태를 갖게 될 것입니다. 또 다른 예는 비생명체에 대한 것입니다(40-41). 하늘에 속한 ‘몸’과 땅에 속한 ‘몸’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해와 달과 별도 서로 다릅니다. 이상의 설명을 정리하면 부활의 몸에 대한 원리는 (1) 원래 몸의 모습은 죽고 새로운 것이 나와야 합니다. (2) 그 몸은 다양합니다. (3) 시작자에 따라 다음 세대 몸의 모습이 결정됩니다. (4) 하나님께서는 모든 과정의 주인입니다.

 

(2) 몸에 대한 원리를 부활의 몸에 적용한 설명(42-44a)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다'는 표현으로 36-41절의 원리를 부활의 몸에 적용한다. 네 가지 대조로 설명합니다. 모두 심긴 것과 부활과의 대조입니다. 썩어질 것으로 심기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부활합니다(42). 부활의 몸은 현재 몸과 달리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또한 욕된 것으로 심기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부활합니다. 연약함으로 심기고 능력으로 부활하며(43), 자연적인 몸이 심기고 신령한 몸으로 부활합니다(44a). 부활의 몸에 대한 이런 설명은 어둠과 빛이라는 두 영역을 배경으로, 한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을 대조한 것입니다. 첫 세 가지 대조는 전치사 ‘엔’을 사용하여 상태를 묘사합니다. 이 단어는 방법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장소나 상태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본문은 후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심긴 것은 한 사람이 어둠의 영역에 있을 때의 모습입니다. 썩고 욕되고 연약한 상태 속에 있습니다. 반면, 다시 살아나는 것은 빛의 영역으로 옮김 받는 자의 결과 상태입니다. 썩지 않고 영광스럽고 능력 안에 있는 상태입니다. 이런 설명의 또 다른 특징은 심는 과정과 다시 일어나는 과정 모두 수동형이란 점입니다. 모든 과정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결과임을 말하는 것으로 앞부분 원리의 적용입니다. 마지막 특징은 어떤 순서를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심긴 과정이 먼저 있고 그것을 통해 다시 살아나는 과정이 있습니다. 역시 원리에 대한 적용입니다.

 

(3) 자연적 몸과 신령한 몸에 대한 부연(44b-49)

 

앞서 언급한 자연적 몸과 신령한 몸에 대한 부연입니다. 37-41절의 원리 요소들을 담고 있고, 21-22절에서 말한 아담과 메시아를 시작점으로 한 두 영역을 전제로 합니다. 역시 대조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설명의 시작은 첫 아담과 마지막 아담 메시아와의 대조입니다. 창세기 2:7을 인용하여 첫 아담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코에 숨을 불어넣어 그 결과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입니다. 44b절에 나온 ‘자연적인’(프쉬키코스)과 ‘신령한’(프뉴마티코스)의 동족어 프쉬케와 프뉴마를 써서 대조했습니다. 그러나 차이점이 있습니다. 44b절은 현재 몸과 부활의 몸을 대조합니다. 동일한 사람에 대해 심긴 모습과 부활의 모습이 다름을 말합니다. 45절은 두 영역과 관련해 각 영역의 시작자 대조입니다. 그 안에는 각 영역에 속한 이후 사람들의 모습 차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 아담은 ‘프쉬케’를 갖고 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의 씨에게 자연적인 몸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시작자에 따라 그 후손의 몸이 결정되는 하나님의 원리 때문입니다(38). 하지만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이 되었습니다. 그의 씨인 성도는 생명의 영을 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46-49절에서 ‘먼저’와 ‘그 후’는 순서를 통해 두 아담과 관련한 차이를 설명합니다. 부활은 순서가 있습니다(46). 영을 통한 신령한 몸이 먼저가 아닙니다. 자연적인 몸이 먼저이고 신령한 몸은 그 다음입니다. 부활은 메시아를 통한 새 창조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옛 창조에 속한 것이 죽어야 새 창조의 부활이 가능합니다. 이뿐 아닙니다. 첫 사람(아담)과 둘째 사람(아담)은 기원이 다르기에 각각에 속한 씨들도 다릅니다(47-49). 첫 아담의 기원은 땅입니다. 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마찬가지로 그의 씨들 역시 땅의 기원을 가진 자들로서 흙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둘째 아담의 기원은 하늘입니다. 그렇기에 그에게 속한 신자들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그 몸이 무엇으로 구성되었는지는 말할 수 없지만, 둘째 아담인 예수의 영광의 ‘몸’처럼 될 것입니다(빌 3:21; 요일 3:2), 바울은 이런 부활의 몸에 대한 설명을 ‘우리’를 통해 독자와 공유하는 것으로 결론짓습니다(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처럼 장차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을 것입니다. 형상이란 본질을 잘 드러내는 외적 표현을 의미합니다. 현재 성도는 땅에 속한 자의 본질을 입고 있지만, 예수 메시아를 통해 하나님 통치 영역으로 옮겨져 하늘에 속한 자의 신분을 갖고 있기에(빌 3:20), 장차 그 신분에 걸맞은 모습으로 변화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 부분에서 부활의 몸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를 속 시원히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아니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신비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몸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몸이며 부활의 주님 같은 영광스러운 몸이라는 점입니다. 보이지 않는 주님을 볼 수 있고 그분과 영원히 온전한 사랑의 교제를 할 수 있는 몸입니다(13:12).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실제로 경험하면 됩니다!


우리가 장차 입을 부활의 몸은 이 세상에서의 몸과 전혀 다릅니다. 살려 주는 영이신 예수님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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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15-03)

 


그리스도의 부활과 신앙적 은택

고린도전서 15장 20-34절


예수님의 부활은 과거의 한 역사적 사건만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가 모범으로 삼아 적용해야 할 일만도 압니다. 그 사건의 영향력이 오늘까지 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해 시대를 열었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촉구하였습니다. 새로운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의 중요성을 변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고 인간의 삶이 현세로 마감된다면, 사람들은 종교적 책무든 사역의 각오든 성화의 삶이든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바울의 논지입니다.

 

 

  • 앞 12-19절이 부활이 없는 부정적 상황에 대한 설명이었다면,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부활로 인한 긍정 상황을 설명함으로써 성도들을 훈계합니다.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20-28절로, 예수님의 부활로 인한 결과들을 설명합니다. 둘째는 29-34절로, 부활로 인한 결과와 그것을 소망하고 사역하는 자신의 예를 들어 독자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칩니다.

 

예수의 부활로 인한 결과(20-28)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사망이 끊어졌습니다. 아담 이후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죽었는데, 이제 그 죽음의 행렬이 끝났습니다.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삶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는 첫 열매입니다. 이제 그에게 붙은 자도 그 부활에 동참할 것입니다. 그분처럼 순종할 때 우리도 죽음에서 살아날 수 있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20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24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25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26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27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에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그의 아래에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28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20-28)

 

예수님의 부활을 시작으로 장차 진행될 구원 과정 완성의 큰 그림 속에서 신자의 부활을 소개합니다. 또 이런 영광스런 미래를 기대하고 부활에 근거한 삶을 살라고 권면합니다.

 

(1) 전제 : 예수가 부활하셨다(20-22)

 

부활을 부인하는 일부 신자의 주장에 대해 그 논리적 결과가 어떤지를 보인(12-19) 바울은 이제 예수의 부활이 가져올 긍정적 결과를 설명합니다.

20절은 그 전제이자 시작입니다. 예수가 부활하셨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기에 예수님의 부활도 없다는 13,16절 내용과 반대입니다. 그러나 13,16절은 가설에 근거한 논리적 추론이지만, 20절은 실제 사건에 대한 선포입니다.

바울은 여기에 두 가지를 추가해 예수님의 부활을 강조합니다. 첫째, 강한 반전 표현인 ‘그러나 이제’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는 주장과 그에 따른 부정적 상태에 대한 강한 반전으로 예수 부활의 사실성을 강조합니다. 둘째,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는 표현입니다. ‘잠자는 자들’이란 죽은 자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첫 열매, 곧 첫 수확입니다. 수확이 시작되었기에 이후에 계속 수확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신자들도 부활할 것임을 말합니다. ‘왜냐하면’이란 접속사를 통해 죽은 자들의 첫 열매에 대해 부연합니다(21-22). 아담과 메시아로 인한 결과 대조를 통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를 설명합니다. 죽음이 한 사람을 통해 존재한 것처럼 죽은 자들의 부활도 한 사람을 통해 존재합니다(21). 많은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죽게 된 것처럼 많은 사람이 메시아 안에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22). 얼핏 같은 이야기의 반복 같지만, 초점이 다릅니다. 21절은 한 사람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아담이든 메시아든 한 사람을 통해 죽음과 생명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반면, 22절은 아담과 메시아로 인한 결과에 초점 맞춥니다. 많은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죽고 메시아 안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바울의 이런 설명은 몇 가지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아담과 메시아는 모두 첫 열매들입니다. 아담은 옛 창조의 시작이고 메시아는 새 창조의 시작입니다. 20절에 대한 설명이자 21절의 초점입니다. 아담을 통해 죽음이 존재했기에 그 이후로 죽음이 지속됩니다. 하지만 메시아를 통해 생명이 시작되었기에 아담과 다르게 메시아 이후로는 생명이 지속될 것입니다. 둘째, 아담과 메시아는 통치 영역의 시작자들입니다. 단순히 조상이나 시작자가 아닙니다. 죄로 인한 죽음의 통치 영역과 하나님의 생명의 통치 영역의 문을 연 자들입니다. 22절의 ‘안에’라는 표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전치사는 도구나 방법의 뜻으로 사용되지만, 여기서는 장소의 의미로 ‘아담 안에’ 혹은 ‘메시아 안에’라는 말입니다. 각각 아담의 반역으로 시작된 죄와 죽음의 통치 영역과 메시아를 통해 회복된 하나님의 통치 영역을 의미합니다. 이런 면에서 22절은 모든 사람이 아담으로 시작된 어둠의 영역, 곧 하나님께 반역하는 통치 영역 속에서 죽음의 지배를 받고 있지만, 모든 사람(많은 신자)이 메시아가 통치하는 영역 속에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임을 말합니다.

 

(2) 결과: 부활과 구원 과정의 완성(23-28)

 

22b절과 연결해 예수 메시아의 통치 영역 속에 있는 신자들이 어떻게 구원의 완성을 경험하는지를 설명합니다. 두 가지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첫 번째는 구원의 완성 과정을 시간 순으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시간 진행 표현(‘다음에는’[23절], ‘그 후에’[24절])과 접속사(‘때’[24,27,28절])를 통해 읽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부활과 관련한 구원의 완성 과정이 차례대로 된다고 말하고 예수의 부활을 첫 열매, 곧 시작점으로 소개합니다(23). 그 다음은 주의 재림입니다. 이때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는 일으킴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후는 마지막입니다(24).

비록 시간 표현을 썼지만, 물리적 시간이라기보다 논리적 시간, 곧 주의 재림과 함께 이루어지는 과정일 것입니다. 역사의 완성이고 모든 것을 심판할 때입니다. 이때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 곧 하나님을 대적한 모든 인간적 세력과 영적 세력을 멸하고 메시아 통치를 아버지 하나님께 넘깁니다. 그런데 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예수님의 부활과 재림 사이 중간 시점도 있습니다. 원수들을 발아래 두는 완성의 때까지 예수가 통치하고 있는 시점입니다(25).

십자가와 부활로 어둠의 영역을 깨고 하늘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 연결시켰지만(마태복음 28:18), 아직 완성은 아닌 ‘이미’와 ‘아직’의 시점입니다. 이 과정에서 예수님은 여전히 하나님 통치 영역의 주권자로서 어둠의 영역에 대한 회복과 완성을 이루어가는 통로입니다. 정리하면 신자의 부활은 예수의 부활 ‘이미’와 ‘아직’ 사이의 예수 통치-재림과 완성이라는 시간 틀 속에 있다.

 

두 번째 설명 방식은 어둠과 빛이라는 종말적 두 영역 관점입니다. 사람은 절대적으로 독립된 존재가 아닙니다. ‘아담 안’이라는 하나님을 반역하는 통치 영역에 속하거나, ‘예수 안’이라는 하나님의 통치 영역에 속한 존재입니다. 둘 중 하나이고 중간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신자의 부활은 단순히 개인이 변화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죄와 죽음과 사탄이 통치하는 어둠의 영역에 대한 완전한 심판과 함께 얻어집니다. 바울은 어둠의 영역에 대한 심판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를 예수의 발아래 두는 것, 곧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을 멸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이 심판으로 마지막 원수인 죽음도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때 신자는 빛의 영역에서 생명의 부활을 얻습니다. 이 과정이 끝나면 아들 하나님인 예수는 아버지 하나님이 주신 통치 권위를 다시 그분께 드리고, 아버지 하나님은 모든 것 속에 계시며 모든 것의 주인으로서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27-28).

이런 설명에 의하면 신자의 부활은 어둠의 통치 영역을 멸하고 구원을 완성하는 하나님의 커다란 계획 속에 위치한 것으로, 개인 구원의 마지막 과정일 뿐 아니라 만물을 회복하는 마지막 과정에 속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의 부활, 곧 죽은 자의 부활로 이루어질 결과입니다.

 

부활에 근거한 실제적 권면과 경고(29-34)

부활은 무엇이 참된 삶이고 생명다운 생명을 누리며 사는 것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들, 제한된 것들, 소수만 누리는 것들을 위하여 사는 삶을 헛되게 만들었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오늘이 전부인 듯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이 가장 지혜로웠을 것입니다.

 

29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30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31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32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33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34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29-34)

 

부활은 예수님을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되게 했습니다. 사망의 통치자 사탄을 이기고 그 예수님께서 다스리게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오셔서 사탄과 함께 대적하는 세력들을 멸하시고, 이양 받은 왕권을 성부 하나님께 드릴 것입니다.

 

(1) 실제적 권면 1: 부활과 세례(29)

 

구체적 상황을 예로 들어 실제적 권면과 경고를 한의 부활이 없다면 왜 죽은 자들 때문에 세례를 받습니까? 아마도 독자 중 일부가 부활을 부인하면서도 ‘죽은 자’의 부활, 곧 영광스런 미래를 얻고 싶어 세례를 받는 것을 염두에 둔 듯합니다. 인지부조화입니다. 차라리 부활을 인정하는 것이 더 일관성 있지 않겠느냐는 지적입니다.

 

(2) 실제적 권면 2: 부활과 고난을 견딤(30-32)

 

두 번째 예는 고난 상황입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왜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까? 바울은 날마다 죽는 상황 같은 고난을 당하고 에베소에서 맹수로 상징될 수 있는 어려운 상황과 싸웠다고 합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의미 없는 일들입니다. 그러나 부활이 있기에 그런 삶은 유익합니다. 심지어 그런 고난을 자랑스러워합니다. 영광스런 미래 때문입니다.

 

(3) 실제적 권면 3: 부활과 바른 삶(32b-34)

 

마지막 권면은 부활에 근거한 바른 삶입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오늘 이 생이 끝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기 마음대로 즐기며 사는 것이 최고의 선일 것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살고, 교인 중 어떤 이들은 그런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바울은 그들을 책망합니다. 속지 말고 의를 행하며 죄를 짓지 말라고 합니다. 부활이 있고 또 하나님의 미래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성도의 삶은 과거 예수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를 발판으로 미래를 기대하고 오늘을 사는 것이다. 속으면 안 됩니다.


부활은 우리가 죽음이 다스리는 이 세상을 따라 살지 않아도 되고, 살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주었습니다. 옛 시대가 가고 새 시대가 오게 해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왕으로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를 시작하였습니다. 달리 살아야 진정한 삶이 되는 이유와 근거를 만들어준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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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15-02)

 


확신에서 논리로 발전한 부활

고린도전서 15장 12-19절


논리학에서 추리를 할 때, 결론의 기초가 되는 판단을 일컬어 ‘전제(前提)’라고 합니다. 전제를 통해 이론이 진행되고, 그 곳으로부터 유추해서 결과를 유추한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전제가 잘못되면 그 전체 위에서 세운 모든 논리도 잘못될 수밖에 없습니다.

 

 

  • 계속해서 부활에 대한 주제를 다룹니다. 조건문을 통해 예수 부활의 필요성을 논증합니다. 내용은 크게 교회 상황을 말하는 12절과 부활의 필요성을 논증하는 13-19절은 더 구체적으로 두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13-15절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는 것과 바울과 고린도 성도들과 하나님과의 관련성을 다룹니다. 16-19절은 앞부분을 부연하는데, 죽은 자의 부활이 없는 것과 신자의 구원과의 관련성을 다룹니다.

 

교회의 문제 상황 : 죽은 자드르이 부활이 없다고 말함(12)

성도 중 일부가 부활이 없다고 한 것에 대해 부활의 필요성을 논증합니다. 조건문을 통해 부활이 없는 상항에 대한 추론의 꼬리 물기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부활이 없다면 바울이나 독자 모두 비참해집니다. 심지어 하나님도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부활은 있습니다.

 

12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12)

 

1-11절에서 부활이 복음의 핵심 내용임을 설명한 바울은 12절부터 교회의 문제 상황으로 들어갑니다. 조건문을 사용한 논리적 추론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지체를 중시한 고린도 성도로 하여금 스스로 판단하도록 이끕니다.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일부 신자가 믿지 않는 것을 지적하며 시작합니다. 만일 메시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전파되었다면 왜 ‘너희’ 중 어떤 이는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하였습니까? 조건절은 앞부분 내용을 근거로 합니다. 메시아의 부활은 바울을 포함한 여러 증인들이 목격했고(3-8), 그에 대한 선포는 바울과 모든 사도들이 행했습니다(11). 고린도 성도들은 그 선포를 믿음으로 받아 구원 안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교인 중 어떤 이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부인합니다. 주절의 내용입니다. 자기가 전한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말라고 바울이 경고한 이유입니다(2). 아마도 죽은 자의 부활을 황당한 이야기로 여겼고, 특별히 몸의 부활은 더욱 못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스 철학에 의하면 몸은 영에 비해 열등하고 속된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비록 교회 안에 있었지만 여전히 복음의 증거보다 자기 생각과 세상의 사고를 더 우선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첫 번째 논증 :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13-15)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께서 지금도 무덤에 계셔야 하고, 목숨을 걸고 부활과 그 중요성을 전한 사도들은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또 죽고 실패한 구세주를 믿을 필요도 없으니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맙니다. 2000년 동안 부활의 복음을 듣고 변한 사람들의 믿음 역시 다 거짓이 되고 맙니다.

 

13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14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13-15)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부활과 관련하여 품은 의문과 궁금한 부분을 다르기 전에, 복음 진리인 그리스도의 부활부터 언급합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받아들인 복음 진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을 골자로 합니다.

 

(1) 죽은 자의 부활 없는 것에 대한 첫 번째 논증 1(13)

 

일부 교인들 생각이 적절치 않다는 사실을 조건문 형식으로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는 12절 내용을 ‘만일’이란 조건절로 재진술하고, 주절을 통해 그들 생각의 논리적 결론을 보여줍니다. 만일 그렇다면 메시아의 부활은 없게 됩니다. 예수님도 사람 몸으로 존재했고 십자가에서 죽었기에,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예수의 부활 역시 없을 것입니다.

 

(2) 죽은 자의 부활이 없는 것에 대한 첫 번째 논증 2(14-15)

 

13절과 연결한 꼬리 물기입니다. 메시아의 부활이 없는 상황을 전제로 그에 대한 논리적 결론을 보여줍니다. 세 가지 결과적 상황을 언급합니다. 모두 부정적입니다.

첫째, 바울을 포함한 전도자(우리)의 선포는 헛것이 됩니다(14). 메시아가 부활하지 않았는데 부활했다고 전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바울은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둘째, 독자들의 믿음도 헛것이 됩니다(14). 부활이 없는데 있다고 전한 거짓말을 믿은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메시아의 부활도 없다는 말인데, 그러면 예수님이 참 메시아인지 확인할 길이 없게 됩니다. 당시 예수님의 좌우에서 함께 십자가에 죽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두 똑같이 죽었기에 부활이 아니면 예수님의 죽음이 특별하다고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또한 부활이 없는 예수님의 죽음은 그 자체가 실패를 의미할 수 있기에 그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이 진짜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마치 세상의 다른 종교들처럼 그 창시자 혹은 계시자가 죽었기에 그들을 통한 영생의 계시가 사실인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는 이런 상황에서 그를 믿는 것이 죄 사함과 하나님과의 새 언약 관계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구원을 보증할 수 있습니까? 어쩌면 그런 믿음은 착각이거나 자기 확신일 수 있습니다.

셋째, 바울을 포함한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해 거짓말한 것이 됩니다(15). 바울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어 메시아의 부활도 없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다시 살리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하나님께서 하지 않은 것을 했다고 전한 것입니다. 단순한 거짓말을 넘어 하나님을 기만하고 이용한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심각한 죄입니다. 이렇듯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는 것은 단순히 생각이나 신념 차원에 그치는 문제가 아닙니다. 복음과 관련해 바울과 독자에게는 물론이고 심지어 하나님에게까지 부정적 영향이 미칩니다. 모든 것이 거짓말이 됩니다.

 

두 번째 논증 :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16-19)

그리스도의 부활을 헛것이나 오류라고 주장하는 사상이나 이론, 주장에 휩쓸리지 말고, 부활의 진리를 증거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시 영향을 미치던 그리스도 철학에 따르면, 인간의 몸은 영혼에 비해 열등라고 저속하며 멸절하기 때문에 부활의 생명을 덧입을 수가 없습니다. 바울이 설명하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관련한 성경적 근거와 경험적 근거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16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17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16-19)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우리가 기대를 걸 곳은 이생뿐이고, 그러면 그리스도 때문에 박해를 당하고, 수치와 모욕을 당하고, 추방을 당하고, 가난한 삶을 살아야 했던 그리스도인이 가장 불쌍하고 어리석은 자가 됩니다.

 

 

(1) 죽은 자의 부활이 없는 것에 대한 두 번째 논증 1(16)

 

‘왜냐하면’이란 표현을 통해 13-15절 내용을 부연합니다. 역시 조건절을 통한 꼬리 물기로 진행하며 시작점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는 전제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메시아의 부활도 없습니다. 13절 내용과 동일합니다.

 

(2) 죽은 자의 부활이 없는 것에 대한 두 번째 논증 2(17-19)

 

16절과 연결해 논리적 추론을 계속 진행합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어 메시아의 부활도 없다면’(17a). 16-17a절까지는 13-14a절의 내용과 같습니다.

하지만 이후 논리 연결은 그 방향이 다릅니다. 14b-15절과 달리 철저히 독자 상태에만 집중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그들의 믿음은 쓸모없게 됩니다. 그들은 여전히 죄 안에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부활과 죄 사함과의 관계성 설명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대신 받은 것입니다. 심판 결과인 죽음이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활은 그 십자가의 대속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이 끝났고 더는 심판 받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자동적으로 그것을 경험하지는 않습니다. 오직 회개와 믿음을 통해 얻게 되지만, 부활은 하나님의 심판이 끝났고 예수님으로 인한 죄 사함의 길이 열렸음을 확충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4:25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라고 말합니다. 만일 예수의 부활이 없다면 죄의 대속이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고, 예수 믿는 독자들의 죄가 처리되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부활이 없으면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예수님 안에서 자는 사람, 곧 죽은 사람들은 구원을 알 수 없는 채로 죽은 것입니다(18). 바울은 그 상태를 멸망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이 없으면 이 땅의 삶이 전부라는 말인데, 모든 신자는 이 땅에서 온전한 삶을 누리지 못하고 죽습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예수 믿지 않고 죽기 전에 호의호식하며 사는 것이 더 낫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예수 안에 있으면서도 부활의 소망 없이 이 땅만을 소망한다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우리가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이라고 말합니다(19).

 

지금까지 설명에 의하면 죽은 자의 부활은 몇 가지 면에서 꼭 필요합니다. 첫째, 바울의 증거가 거짓이 되지 않기 위해 필요합니다. 부활이 있다고 이미 말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증거가 거짓이 되지 않기 위해 필요합니다. 그분 역시 부활을 말씀하셨고 이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셋째, 예수의 메시아 됨을 위해 필요합니다. 부활이 없으면 십자가의 죽음은 아무 의미 없습니다. 신자들의 죄를 용서하는 통로인지 알 수 없고, 죄사함이 이루어졌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그가 메시아인지도 확실치 않을 수 있습니다. 설사 메시아가 맞다 해도 부활 없는 그의 사역은 실패입니다. 넷째, 독자들의 구원을 위해 필요합니다. 부활 없는 복음은 죄 사함을 보증할 수 없습니다. 또한 이 땅에서의 삶을 넘어 영원한 생명도 확증할 수 없습니다. 그것 믿고 이 땅에서 다르게 사는 것은 인생 낭비입니다. 부활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 논리적인 귀결이지만, 반대로 부활이 있다면 이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바뀝니다. 감사하게도 부활은 사실입니다. 증인들이 보증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지난 모든 구원의 역사와 예수님의 삶이 완성됩니다. 따라서 부활이 없으면 그간 모든 역사를 설명할 수 없고, 우리가 선 자리를 알 수 없고,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설명할 수 없게 됩니다. 생명도, 소망도, 삶의 의미도 사라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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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15-01)

 

 


복음과 그리스도의 부활

고린도전서 15장 1-11절


생각할 수도 없는 끔찍한 가정(假定)들이 있습니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안 계신다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하지만 복음에 있어서 가장 끔찍한 가정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일 것입니다. 왜 그런 가정은 성립될 수 없습니까? 있어서는 안 됩니까?

 

  • 예배 상황에 대한 것을 끝내고 새로운 주제로 넘어갑니다. 부활에 대한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1-2절로, 바울이 듣고 독자에게 전한 복음에 대해 소개합니다. 둘째는, 3-8절로, 부활과 관련한 복음의 내용을 설명합니다. 셋째는 9-11절로, 바울과 관련한 추가 정보를 제공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1-2)

 

이 부활신앙은 지금도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입을 통해 고백되어지고 기독교의 신앙의 핵심입니다. 부활에 대한 구체적 문제를 상술하기 전에, 과거에 바울이 전하고 고린도 성도들이 들었던 복음의 내용을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바울이 독자적으로 고안한 내용이 아니라는 것과 부활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임과 모든 사도들이 공유하고 있는 복음의 핵심 내용임을 말합니다.

 

1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1-2)

 

바울이 말한 ‘알게 하노니’는 표현과 복음이란 말로 이전 부분과 주제적 단절을 보입니다. 11-14장이 교회 모임에 대한 것이라면, 15장은 부활에 대한 내용입니다.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복음을 알게 하노니’라는 말로 운을 떼고 추가 설명으로 그 복음의 성격을 말합니다. 그 복음은 바울이 독자인 ‘너희’에게 전한 것입니다. ‘너희’가 받아들여 이미 그 안에 서 있고, 바울이 전한 것을 잘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않으면 그것을 통해 구원받는다고 합니다. 그곳에는 몇 가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부활은 복음의 진리와 연결된 핵심 요소 중 하나입니다. 예수의 부활이 없으면 바울의 증거는 복음이 아닙니다. 또한 성도 몸의 부활이 없으면 역시 복음이 아닙니다.

둘째, 부활의 복음은 새로운 내용이 아닙니다. 지혜로운 건축자처럼 예수 메시아로 교회의 터를 잘 닦을 때(3:10) 가르쳤던 것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이미 그것을 받아들였고, 그 진리를 통해 하나님과의 새 언약 관계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셋째, 부활과 관련해 고린도 성도들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복음을 믿음에도 불구하고 부활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은 비상식적인 것이고, 영에 비해 몸을 중시하지 않는 당시 생각 속에서 몸의 부활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넷째, 고린도 성도들은 진리에 계속 서야 합니다. 그는 복음의 내용을 상기시켜 굳게 붙잡으라고 하고, 그들이 가진 믿음을 헛되게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계속 부활 내용을 뺀 채로 복음을 믿으면, 구원에서 제외되는 결말을 맞게 될 것입니다. 구원은 진리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부활 진리는 세상 사고를 따를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일하심의 진리를 따를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다섯째, 구원은 일회적 사건이 아닙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이미 복음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계속 진리 안에 서 있음으로 완성을 경험해야 합니다. 따라서 구원은 완성을 향해 가는 ‘구원 과정’으로 보아야 합니다.

 

 

부활과 관련한 복음의 내용(3-8)

복음은 그리스도인의 정신을 새롭게 함으로써 신비한 것들에 현혹되지 않고 오직 성경대로 사는 것을 열망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죄 가운데서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파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3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3-8)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한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과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은 바울의 인생을 완전히 변화시켜 놓았습니다.

 

(1) 복음의 내용: 메시아의 죽음(3-4)

 

바울은 부활과 관련한 복음 내용을 다시 설명합니다. 바울이 받은 것을 독자들에게 전했다고 말합니다.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접속사로 시작하는 네 가지 일련의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첫째 사건은 메시아의 죽음입니다. 메시아가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었습니다. 구약 약속의 성취로서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바울은 더 구체적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그의 목적은 십자가에 대한 설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고린도 성도들에게 처음 복음을 전했을 때 이미 가르쳤기에 더 설명하지 않은 듯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열쇠는 ‘성경대로’입니다. 메시아 고난에 대한 구약 본문들이 여럿 있지만, 특별히 죄 용서와 관련해 신명기 21:22-23과 이사야 53장이 대표적입니다. 신명기는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 받은 자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무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유대인 입장에서는 그의 십자가 죽음을 하나님의 저주로 인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은 사람들 죄를 대신 지고 고난당한 자의 이야기입니다. 신명기 내용과 연결시키면 메시아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나무에서 죽은 것은 사람들 죄와 그로 인한 심판을 대신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을 ‘우리 죄를 위한 죽음’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둘째 사건은 메시아의 장례입니다. 성경 예언(이사야 53:9)의 성취이지만, 바울은 더 설명하지 않습니다. 셋째 사건은 부활입니다. 성경대로 제 3일에 다시 일으킴을 받았습니다. 죽음과 부활의 모든 과정은 구약의 성취입니다. 하나님의 오랜 계획의 성취이며 요소들 모두가 구원사건의 핵심입니다.

 

(2) 복음의 내용: 메시아의 부활과 증인들(5-8)

 

바울이 독자들에게 전한 네 번째 사건은 예수 부활을 목격한 것입니다. 바울은 상대적으로 이 부분을 길게 언급합니다. 전하고 싶은 주된 초점이라는 말입니다. ‘그후에’를 통해 시간 순서로 목격자들을 소개합니다. 처음은 게바, 곧 베드로이고 그 후는 열두 사도입니다. 그 후는 오백 명 넘는 형제들이고 그 후는 야고보이며 그 후는 많은 사도들이고 마지막으로 바울 자신입니다.

이런 설명에는 몇 가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부활과 관련한 주도권은 주님께 있습니다. 목격자들은 자신들이 주도적으로 예수의 부활을 본 것이 아닙니다. ‘보다’동사의 수동형과 대상을 의미하는 여격(~에게)을 통해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 그들이 보게 되었음을 묘사합니다. 바울은 이 표현을 따라 목격자들을 네 그룹으로 구분합니다. 베드로와 열두 사도, 오백 명 넘는 형제들, 야고보와 많은 사도들, 그리고 바울입니다.

둘째, 부활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여러 목격자를 열거한 것은 이 사실을 확증하기 위함입니다. 더 나아가 부활의 예수를 만난 오백 명 넘는 형제 중 죽은 사람도 있지만 아직 많은 사람들이 살아 있다는 말을 첨가한 것(6)도 그 때문입니다. 셋째, 바울 역시 부활한 예수님을 목격한 자입니다. 비록 만삭되지 못하여 난 사람 같은 자이지만, 그에게도 주님이 나타나셔서 부활하심을 알게 했습니다.

 

바울 자신에 대한 추가 정보와 결론(9-11)

온전한 복음으로만 구원을 얻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 일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구원을 받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온전히 깨닫고 믿을 뿐 아니라, 그 복음을 나타내고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바울은 결코 ‘더 많이 수고하면서’ 부활을 전하는 종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9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10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11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9-11)

 

바울은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다’는 표현에 대한 설명을 이어갑니다. ‘나’라는 1인칭 강조 지시어를 통해 사도 중 가장 작은 자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설명은 바울의 구원 이전 상태와 이후 상태의 대조로 진행됩니다. 먼저 구원 이전 상태입니다(9). 그는 감히 사도라고 불릴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9:1-2 내용을 반영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사도행전에서는 주의 제자들을 핍박했다고 표현하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참조, 갈라디아서 1:13, 23; 빌립보서 3:6)라고 말합니다. 몇 가지 생각거리가 있습니다.

첫째, 바울의 교회관입니다. 그는 교회를 건물이 아닌 사람들, 곧 하나님 백성의 모임으로 이해합니다(1:2). 더 나아가 교회를 메시아의 몸이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다메섹 도상의 경험을 반영한 듯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핍박했는데, 부활한 예수님께서는 ‘왜 자기를 핍박하느냐’고 질문합니다. 제자들을 예수님과 동일시한 표현입니다. 이 경험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서로 뗄 수 없는 한 몸으로 인식하게 한 요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둘째, 바울이 편지를 쓰는 의도입니다. 이전에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던 자였습니다. 지금 교회를 어렵게 하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입니다. 오히려 바울이 그 하나님의 교회를 바로 세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과거 교회를 핍박하던 자가 사도가 되어 교회를 세웠고, 지금 어지러운 교회를 회복시키고 있습니다. 놀라운 반전입니다. 10절은 ‘그러나’를 통해 구원 이후의 반전 상태를 설명합니다. 바울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가 모든 사도들보다 더 수고한다고 말합니다. 그들과 비교하거나 경쟁하고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직 자기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그것에 응답해 충성스럽게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분의 은혜입니다. 구원과 은사와 지식을 도구 삼아 비교와 경쟁으로 교회를 어지럽힌 고린도 성도들과 다릅니다.

 

11절에서 바울은 그간 언급한 복음의 내용과 부활에 대해 결론짓습니다. 바울과 사도들의 복음 전파 내용이 다르지 않다는 것과 그 내용을 독자들이 믿어 구원을 경험한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부활의 내용이 담긴 복음은 바울이 만든 것도 아니고 그만 전한 것도 아닙니다. 목격자가 있는 역사적 사실로, 초대 교회 모든 사도와 전도자들이 공유하고 있고 또 전하고 있습니다. 독자들 역시 경험으로 확증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지난 모든 구원의 역사와 예수님의 삶이 완성됩니다. 따라서 부활이 없으면 그간 모든 역사를 설명할 수 없고, 우리가 선 가리를 알 수 없고,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설명할 수 없게 됩니다. 생명도, 소망도, 삶의 의미도 사라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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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14-02)

 


성숙하게 은사를 사용하는 방법

고린도전서 14장 20-40절


로마인들은 지성에서는 그리스인들보다 못하고, 체력에서는 켈트족이나 게르만 족보다 못하고, 기술력에서는 에투리아인들보다 못하고, 경제력에서는 카르타고인보다 떨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인은 세계의 승자가 되어 천년 로마 제국을 이루었습니다. 로마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나라를 유지했으며, 가장 넓은 영토를 소유했고,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로마인 이야기’를 쓴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그 이유를 제시합니다. 가장 먼저는 법과 제도를 지키는 원칙에 충실했던 로마 시민들의 질서 의식, 준법이라고 합니다.

 

  • 교회 모임에서 은사를 어떻게 사용할 지에 대해 가르칩니다. 내용은 세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첫째는 20-25절로, 믿지 않는 자와 관련해 방언과 예언을 대조합니다. 둘째는 26-35절로, 교회 예배 상황에 대한 실제적 지침을 제공합니다. 여기에는 방언과 통역과 예언과 아내들이 일으키는 무질서한 상황이 포함됩니다. 셋째는 36-40절로, 은사에 대한 설명의 결론입니다. 자신의 은사 때문에 교만해지지 말고 모든 것을 사랑으로 질서 있게 행하라고 권합니다.

 

구도자/불신자와 관련한 방언과 예언의 대조(20-25)

방언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주신 표적이지만(사 28:11-12), 또한 그들을 위해 절제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초신자들이 예배를 드릴 때, 자신들이 알아듣지 못한 말들을 함으로 자칫하면 청신 나간 행동처럼 보여 그들에게 겁과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언을 들은 사람들은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때문에 자기 숨은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전파하는 사람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20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21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22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23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24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25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20-25)

 

방언과 예언을 불신자에 대한 기능 차원에서 비교하고, 은사에 대한 권면을 마무리합니다. 은사 사용을 금하지 않지만, 사랑으로 행하고 교회에서는 질서 있게 사용해야 합니다.

 

(1) 방언과 예언과 관련한 명령(20)

 

방언과 예언에 대한 설명을 이어갑니다. 공적 예배에 참여한 구도자나 불신자와 관련해 두 은사를 비교합니다. 먼저 세 가지 명령으로 바른 생각을 요청합니다. ‘생각에 대해 어린아이가 되지 말라.’ ‘악에 대해 어린 아이가 되라.’ ‘생각에 대해 온전한 자가 되라.’ 생각에 대한 것을 양 끝에 두고 악을 가운데 둔 A-B-A 형태입니다. 주목할 것은 신령한 것들에 대해 잘 생각할 것과 합리적 판단을 요청한 점입니다. 흔히 신령한 것들은 이성적인 것과 상관없는 듯 여깁니다. 아마 고린도 교인들도 그랬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성적 판단을 계속 요구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근거로 합당한 판단과 분별하는 것을 영적이고 성숙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2) 방언과 예언의 대조(21-25)

 

방언과 예언을 대조합니다. 구약의 예를 들고(21) 그에 근거해 방언과 예언을 대조한(22) 후 방언(23)과 예언(24-25)을 하나씩 설명하는 구조입니다. 먼저 구약 성경을 예로 듭니다. 하나님이 다른 방언과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 것이지만 듣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방언으로 전한 것과 사람들이 듣지 않는다는 것을 연결점으로 삼기 위해 인용한 듯합니다. 구약도 방언으로 말하면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러므로’를 통해 구약 인용을 방언과 예언에 대해 적용합니다(22). 방언은 하나님의 표적으로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하지만 예언은 믿는 자를 향합니다. 구약 인용과 23-25절과의 연결에 의하면 방언과 예언이 가져올 결과 차원을 말하는 듯합니다. 다시 말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은 불신자들이 하나님 계시를 이해하지 못하게 함으로 멸망의 결과를 낳게 하지만, 예언은 그분의 계시를 드러내 궁극적으로 불신자들이 하나님을 믿고 인정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말입니다. 방언이 신령하기에 신자에게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뒤집습니다. 방언은 신자가 진리를 증거할 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바울은 ‘만일’이라는 조건절을 통해 이 내용을 부연합니다(23-25).

만일 구도자와 불신자가 교회 모임에 참여했을 때 그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전하면, 그들은 그 모임을 미쳤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예언을 통해 알아들을 수 있는 이성적인 말로 계시를 전하면,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과 구원의 진리를 깨닫고 주님을 인정할 것입니다. 1-19절 설명이 동료 신자를 향한 사랑의 관점에서 방언과 예언을 대조했다면, 이 부분은 불신자에게 하나님을 드러내는 관점에서 대조합니다. 구도자와 불신자에게 진리를 전하는 차원, 곧 사랑으로 전도하는 것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참 신으로 인정하게 하는 차원, 즉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차원도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방언의 문제는 단순히 그것이 신령한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또한 어떤 것이 최고의 비교 문제도 아닙니다. 오직 그 은사가 사랑의 모습으로 사용되는가의 문제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을 사랑해서 그분 이름을 드러내는 수직적 차원과 동료 신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수평적 차원이 다 포함됩니다.

 

교회 예배 상황에 대한 실체적 지침들(26-35)

방언은 하나님께 영으로 말하는 것이기에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영적 유익이 있지만, 공동체적 차원에서 는 그 방언을 통역해 주는 않으면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예배 중 방언은 누군가가 그 방언을 통역해 줄 수 있는 경우에만 사용해야 합니다.

 

26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27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28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29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30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31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32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33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 34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35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26-35)

 

앞서 사랑을 따라 은사를 사용하라는 말을 이제 질서를 따라서 은사를 사용하라는 권면으로 달리 표현합니다. 질서를 따라 찬송시, 가르침, 계시, 방언, 방언 통역, 예언 등 각자가 가진 은사를 발휘하여 하나님을 경배하고 성도의 덕을 세울 수 있습니다.

 

(1) 교회 예배 상황에 대한 실제적 지침들: 원리(26)

 

그간의 논의를 근거로 실제 지침을 제공합니다. 먼저 ‘그러면 어찌할까?’라고 스스로 질문하고 명령으로 답하는 형식으로 원리를 정리합니다. 교회 모임 때 찬송, 가르침, 계시, 방언, 통역 등 여러 은사를 사용해도 됩니다. 하지만 은사를 통한 비교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오직 한 가지 원리, 곧 모든 것을 서로 세워주기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사랑에 근거한 은사 사용입니다.

 

(2) 방언에 대한 실제적 지침(27-28)

 

방언을 사용할 때 반드시 둘 혹은 많아야 셋이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차례대로 질서 있게 하되 통역이 반드시 수반돼야 합니다. 만일 통역자가 없으면 교회 모임에서는 잠잠해야 하고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기도나 찬양할 때 사용해야 합니다.

 

(3) 예언에 대한 실제적 지침(29-33a)

 

예언할 때도 둘이나 셋이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해야 합니다. 만일 예언할 때 다른 이에게 성령의 계시가 임하면 말하는 사람은 잠잠해야 합니다.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예언하면 교회 모임이 무질서해집니다. 성도들이 예언을 통해 하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권면을 받을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 스스로도 그렇게 예언을 주지 않으십니다. 질서의 하나님이기에 교회 모임에 유익이 되도록 질서 있게 예언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예언하는 자들은 다른 예언하는 자들 밑에 있어야 합니다. 자기 외에 또 다른 사람에게 계시를 주실 수 있음을 인정하고 질서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예언을 할 때도 이성적 사고를 사용하여 판단해야 합니다.

 

(4) 문제 일으키는 아내들에 대한 실제적 지침(33b-35)

 

여기서는 질서 없는 상황의 예를 듭니다. 아내들이 교회 모임에서 무질서하게 질문하거나 은사를 사용한 상황인 듯합니다. 그 모습은 예배를 방해할 뿐 아니라 남편의 권위를 무시하는 행동으로 비칠 수 있습니다. 이에 바울은 문제가 되는 아내들에게 잠잠하라고 명합니다. 하지만 모든 여자들이 교회에서 말하지 못하게 금한 것은 아닙니다. 또한 아내들의 은사 사용을 막은 것도 아닙니다. ‘잠잠하라’는 명령은 이미 모든 성도들에게 방언과 예언과 관련해 무질서함을 막는 방법으로 제시했습니다(28,30). 그렇기에 아내들에 대한 명령도 무질서함을 막기 위한 임시적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은사 문제에 대한 결론적 권면(36-40)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것이 성경을 통해 배우는 것보다 더 신령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럴듯하고 영적인 것처럼 들리는 말씀이라도 성경에 어긋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성도는 성경을 기준으로 삼아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한다면 성경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분명 달라질 것입니다.

 

36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37○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38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39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40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36-40)

 

고린도 교회에 자신이 신령하다고 생각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주장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인도라고 주장하면서 바울의 가르침을 거부했습니다.

 

(1) 결론적 권면: 교만한 자들에 대한 경고(36-38)

 

은사 사용에 대한 결론적 권면입니다. 질문(36)과 조건절(37-38)을 통해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에게 경고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서 나온 것이냐? 그것이 ‘너희’에게만 임했느냐? 상당히 비관적인 질문들입니다. 공통점은 ‘너희’라는 표현입니다. 신령한 것들이 ‘자기’에게만 있는 특별한 것으로 여기고, 심지어 그 기원도 자기 것인 양 착각한 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이런 교만은 자연스레 비교 의식으로 이어지고, 교회 모임의 질서를 어지럽게 했습니다. 이어지는 조건문 표현은 이들의 교만을 구체화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한다면’ 그들의 자기 인식을 반영합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 엄히 경고합니다. 만일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해 교만해져 있다면 자기가 편지에 쓴 것들을 주님의 명령으로 알고 조심하라고 합니다. 단순히 사도로서의 권면이 아닌 주님의 명령입니다. 반드시 순종해야 합니다. 만일 그들이 바울 가르침의 성격을 알지 못하면 그들은 스스로의 자부심에도 불구하고 예언자나 신령한 자로 인정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교만을 버리고 바울 가르침을 듣고 겸손해야 합니다.

 

(2) 마지막 명령들(39-40)

 

은사에 대한 마지막이자 실제적 명령입니다. 예언도 하고 방언도 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적절하고 질서 있게 해야 합니다. 구체적 추가 설명은 필요 없습니다. 사랑으로 실제로 그렇게 하면 됩니다.


성숙한 생각과 행동으로 교회 공동체와 믿지 않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덕을 세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작은 은사라도 교회를 세우고 다른 사람들 섬기는 일에 취선을 다해야 합니다. 방언하는 사람은 통역의 은사도 구하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은 감사하고 자기 덕을 세우는 테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방언 경험에 대해서 문외한이거나 신앙의 초신자들은 방언으로 하는 기도나 찬양에 ‘아멘’으로 응답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회중이 함께 모여 예배하는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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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14-01)

 


 

덕을 세우는 은사

고린도전서 14장 1-19절 


 

모든 은사는 선물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선한 뜻대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데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새 창조의 목표를 따라, 성도들이 서로의 은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갑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은사를 사모할 때 가급적이면 어떤 은사를 사모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 최고의 은사가 되게 하는 방법인 사랑을 따라 행하라고 일한 후 예언과 방언에 대해 비교합니다.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 부분은 1-5절입니다. 사랑을 따라 신령한 것을 추구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라고 말하고 예언과 방언을 대조합니다. 둘째 부분은 6-12절입니다. 왜 예언의 은사를 추구해야 하는지를 방언과 대조하여 설명합니다. 셋째 부분은 13-19절입니다. 공적 예배 때 방언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설명하고 결국 예언이 더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예언과 방언(1-5)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첫째가 사랑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큰 은사의 기준은 신령함이 아니라 사랑에서 시작합니다. 사랑은 은사를 은사 되게 하는 필수 요소며, 사랑을 추구하는 은사라야 선한 영향력을 끼칩니다. 모든 성도들이 봉사를 행할 때, 사랑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모든 은사 중에서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은사가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모든 은사를 통한 봉사에 있어서 항상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덕목입니다.

 

1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2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3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4.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5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1-5)

 

고린도 성도들은 다른 영적 은사들보다 방언에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들이 생각할 때, 영적인 존재가 되었음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은사가 방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방언을 함으로 영적 은사를 자랑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랑을 따라 은사를 사용하라고 권하고 특별히 공적 모임에서는 방언보다 예언을 더 추구하라고 합니다. 방언을 하려면 반드시 통역을 세워야 합니다. 사람들과 소통해서 인격적 관계성을 증진하고 교회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 예언을 추구(1)

 

더 큰 은사들을 만드는 길(12:31)인 사람을 설명한 후(13장), 교회 상황에 대해 권면합니다. 사랑을 추구하면 신령한 것들에 열심을 내라고 말합니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에 열심을 내라고 말합니다. 특별히 바울은 예언하기를 권합니다.

 

(2) 예언과 방언(2-5)

 

바울은 방언의 무익성과 예언의 유익성을 대조적으로 설명하면서, 방언보다 예언을 사모하라고 권합니다. 교회를 세우는데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 방언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소개합니다.

예언을 더 추구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방언과 예언의 기능이 다르기 때문이다. 방언은 하나님과의 개인적 소통 방식이지 사람과 소통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2).

성령으로 자신의 비밀을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방언은 성령으로 혀가 움직여 말하는 것이기에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고, 심지어 방언하는 자도 무엇을 말하는지 모를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방언은 사람과의 관계성을 중심으로 한 사랑의 요소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언은 다릅니다(3).

사람들을 세워주고 권면하고 위로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잘 표현하는 방법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방언이 필요 없고 예언만 필요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서로의 기능과 목적이 다를 뿐입니다(4). 방언 말하는 자는 자기를 세웁니다.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성에서 잘 서기 위해 방언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교회를 세웁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어찌 살아야 하는지를 도울 수 있습니다. 사실 예언과 방언은 서로 비교 대상이 아닙니다. 둘 다 필요합니다. 단지 그 기능과 목적이 다르기에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사용할 지를 분별하는 것이 필요할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5절에서 방언과 예언의 상황을 구분해 권면합니다. 기본적으로 그는 독자들이 다 방언하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성령으로 인한 교제와 비밀을 나눌 수 있는 통로이기에 개인적으로 필요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독자들이 예언을 더 하길 원한다고 말합니다. 통역되지 않은 방언보다 교회를 세워가는 데는 예언이 더 낫기 때문입니다. 결국 개인이냐 교회냐 사이의 상황 인식과 어떤 것이 함께하는 사람에 대한 인격적 배려이고 성도를 세우는 데 도움이 되는지를 분별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예언의 은사를 추구해야 하는 이유(6-12)

사랑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은사를 추구할 때, 그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된 세우지만, 사사로운 욕심으로 구한 은사는 시기와 경쟁으로 교회를 위태롭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떠나 은사는 언젠가는 변질됩니다. 은사에 대한 열정이 항상 교회를 건강하게 섬기는 열정과 조화롭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교회의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6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7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8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9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10이같이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11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니 12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6-9)

 

바울은 방언보다 예언을 사모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그것이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방언은 하나님께 영으로 비밀을 말하기에자기 덕을 세우는 데만 유익하지만, 예언은 사람들에게 알아듣게 말하는 것입니다.

 

(1) 예언의 은사를 추구해야 하는 이유 2(6-9)

 

예언이 왜 필요한지를 계속 설명합니다. 일련의 조건절로 ‘나(바울)’의 예를 ‘너희(독자들)’에게 적용하는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두 가지가 언급됩니다.

6-9절은 그중 하나로 공적 모임에서 방언으로 전하는 경우입니다. 먼저 ‘나’의 경우입니다(6-8). 만일 ‘나’가 너희에게 가서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침이 아닌 방언으로 말하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6) 방언이 다른 은사보다 열등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할 수 없기에 소통이 되지 않아서 독자에게 유익을 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계속해서 7-8절에서 악기의 예를 통해 설명을 이어갑니다. 만일 피리나 거문고 등의 생명 없는 악기들이 음의 구분을 전달하지 못하면 어떻게 그 악기들을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전쟁 때 신호를 전달하기 위한 나팔이 구분된 소리를 내지 못하면 어찌 전쟁을 준비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들어도 상식선에서 동의할 수 있는 예들입니다.

이제 바울은 이런 설명을 ‘이와 같이’라는 표현을 통해 ‘너희’ 경우로 적용합니다(9). 만일 너희가 방언을 통해 분명치 않은 말을 전한다면, 그 말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방언으로는 의사소통 할 수 없기에 마치 허공을 향한 소음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공적 모임에는 적절치 않습니다.

 

(2) 예언의 은사를 추구해야 하는 이유 2(10-12)

 

‘나의 상황을’ 너희에게 적용한 두 번째 내용입니다. 언어 소통 과정을 예로 듭니다. 먼저 언어를 표현하는 소리에 대한 일반 원리를 제시합니다(10). 아마도 세상에 많은 종류의 언어가 있지만, 소리 없는(뜻 없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저마다 사람들에게 의미를 전달합니다. 그렇기에 ‘나’가 그 소리의 능력을 알지 못하면 ‘나’는 그 말하는 자에 대해 야만인이 되고, 말한 자 또한 ‘나’에게 야만인이 됩니다(11).

서로 소통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가 신령한 것을 추구하기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예언하는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12). 교회 안 공적 모임에서 방언을 말하면 서로 소통이 안 되고, 결과적으로 교회를 세울 수 없기에 소통할 수 있는 예언을 하라는 것입니다.

 

 공적 예배 때 방언 사용에 대해(13-19)

은사를 추구하는 열망보다 은사 추구의 동기를 항상 살펴야 합니다. 자신이 받은 은사가 무엇입니까? 그 은사는 교회의 덕을 세우고 타인의 유익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이 동기가 되고 사랑을 구연하는 은사가 더 큰 은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의 덕을 세우고 타인의 유익을 생각해야 합니다.

 

13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14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15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16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17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18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9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13-19)

 

바울은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의 무익성에 대해 설명한 후, 교회 것을 세우기 위한 영적인 은사가 더 풍성하기를 구하라고 합니다. 이제는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설명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유익보다 공동체의 유익을 세우기 위해 방언보다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합니다.

 

(1) 방언 사용자는 통역을 위해 기도하라(13)

 

앞부분 설명을 근거로 방언 사용자에게 권면합니다. 방언을 하는 자들은 통역하기를 위해 기도하라고 권합니다. 모든 방언 말하는 자가 반드시 통역의 은사를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통역의 은사가 있으면 공동체적으로 교회를 세우는 데 도움이 됩니다.

 

(2) 바울 경험을 통한 설명(14-15)

 

바울은 1인칭 표현으로 통역의 은사를 구하라는 13절 내용을 부연합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서 생각해 볼 때, 방언 기도를 알아듣지 못한 것은 자신에게도 큰 유익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통역의 은사는 공동체적으로만 유익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경건 생활에도 도움이 됩니다. 이해할 수 없는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은 기도하지만 이성적 이해에는 도움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14)

따라서 기도나 찬송할 때 영으로 하는 방언과 이성으로 이해하고 말하는 것이 함께 가야 합니다(15). 하지만 상황 분별이 필요합니다. 영으로 하는 기도나 찬송은 14절처럼 개인 상황이지만, 이성으로 기도하고 말하는 것은 교회 모임이란 공적 상황입니다. 방언을 공적 모임에서 사용하려면 통역이 필요합니다.

 

(3) 독자들 상황을 통한 설명(16-17)

 

이제 바울은 왜 공적 모임에서 방언으로 기도나 찬양을 하면 안 되는 지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14-15절이 ‘나’를 통해 바울 차원에서 설명했다면, 이번에는 ‘너희’를 통해 독자 차원에서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의사소통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통한 방언을 알아들을 수 없기에 어떤 이가 다른 이를 축복하거나 감사의 말을 해도 그것에 공감해 함께 유익을 얻을 수 없습니다. 공적 예배 유지가 불가능하고 메시아의 한 몸이자 하나님의 한 식구로서의 정체성과 유대감, 인격적 사랑 나눔이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교회를 망칠 수 있습니다.

 

(4) 바울의 권면(18-19)

 

바울은 다시 1인칭 ‘나’를 사용해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마무리합니다. 자신이 많은 방언을 하는 것에 감사한다고 말합니다. 방언 자체가 필요 없다는 인식을 주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방언은 분명 성령의 선물입니다. 애써 금지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개인적 교제를 위해서만 사용해야 합니다. 공적 자리에서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을 때는 통역이 없는 한 사용하면 안 됩니다. 자칫하면 자기 자랑이 될 수 있고, 기본적으로 공동체에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이성적인 말로 교제하고 함께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최고의 은사가 되게 하는 사랑 차원에서의 권면입니다.


신령한 것을 깨닫게 하시고 사모하도록 권합니다. 방언의 은사를 자신을 위한 은사이기 때문에 지혜롭게 사용해야 합니다. 은사는 다른 사람을 섬기고 교회를 세우는 데 사용하는 것이 유익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을 말씀으로 세우는 예언의 유익한 은사를 구하길 바랍니다. 당신에게도 성령의 풍성한 은사를 주시되, 다른 사람을 섬기는 데 유익한 예언의 은사를 구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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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13-01)

 


아가페 사랑의 탁월성

고린도전서 13장 1-13절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연약한 여자를 강한 어머니로 만드는 것은 사랑입니다. 위대한 인물들 위에는 하나같이 위대한 어머니가 있습니다. 위대한 인물을 만드는 비결은 바로 사랑입니다. 은사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은사를 소유한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준신 의도 또한 분명합니다. 그 의도를 따라 사용되어야 합니다.

 

  • 최고의 은사들을 만드는 방법(12:31)과 연결한 사랑에 대한 설명입니다. 내용은 설명 방법에 따라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1-3절입니다. ‘만일’과 ‘나’라는 1인칭을 사용한 세 개의 조건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모든 은사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없으면 의미 없음을 말합니다. 둘째는 4-7절입니다. 직설법 표현으로 사랑의 특성을 설명합니다. 셋째는 8-13절입니다. 현재와 미래의 시간 대조를 통해 사랑의 영원성과 온전성을 설명합니다.

 

사랑의 필요성(1-3)

 

하나님의 구원 계획(비밀)에 대한 지식과 산을 옮길만한 대단한 이적을 베풀 수 있는 믿음(마가복음 11:23)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 없는 자신의 재산을 구제나 종교적 열정으로 사용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낭비이고 헛수고일 뿐입니다. 자신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는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행동을, 예언과 지식과 믿음의 선물(은사),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하는 능력이 있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유익도, 아무런 소용도 없습니다.

 

1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1-3)

 

고린도 성도들은 많은 은사(恩賜)들을 체험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은사들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은사들 중에서 방언(方言)을 천사의 언어로 여기면서 최고의 은사로 떠받들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바울은 앞 12장에서 은사들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본 13장은 ‘사랑’장입니다.

더 큰 은사들을 만드는 최선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어떤 은사, 어떤 섬김이든 사랑으로 하는 것이 최고입니다. 바울은 그 이유들을 제시합니다.

먼저 사랑이 왜 필요한지를 설명하면서 시작합니다. ‘만일’과 1인칭 지시어 ‘나’로 구성된 세 개의 조건절로 진행합니다. 첫째는 말과 관련된 영역입니다(1). ‘만일 내가 사람들의 방언들이나 천사들의 방언들로 말할지라도’. 방언을 먼저 언급한 것은 교회에서 우월감과 열등감 문제를 일으키는 요인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쩌면 독자들에게 방언은 최고 은사 후보에 있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의 관점에 일침을 가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방언들은 소리 나는 징이나 울리는 꽹과리가 됩니다. 소통의 통로가 아닌 시끄러운 소음에 불과합니다. 그 귀한 은사를 이렇게 표현한 것은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말은 마치 방언을 통역하듯 사랑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알아듣게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어떤 방언도 함께 살아가는 관계성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둘째는 2절입니다. ‘만일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알고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소유했다 해도.’ 12:8-10에서 언급한 은사들을 예로 듭니다. 예언은 바울이 중요하게 여기고(14장) 지식은 독자들이 좋아합니다(1:5; 6:1). 믿음은 단순한 고백 이상의 것으로 특별한 일을 행하실 하나님에 대한 강한 신뢰를 의미합니다. 이 역시 모든 사람에게 허락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선물입니다(12:10). 주목할 것은 ‘모든’이란 표현으로 이 요소들을 묘사한 점입니다. 과장을 통한 강조입니다. 사랑 없는 상태와 비교하기 위함입니다. 설사 그 모든 것을 다 갖고 있고 알고 있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런 은사들을 통해 자신을 신령한 자로 여기고 우월감을 가진 자들에게 그들 자랑이 헛것임을 말합니다. 1절이 은사 자체에 대한 내용이라면 2절은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에게 집중합니다.

셋째는 3절입니다. ‘만일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자랑하기 위해 내 몸을 내어줄지라도.’ 일과 헌신과 관련된 영역입니다. 다소 과장의 표현으로 ‘모든’ 소유와 자기 자신을 희생한다는 가상의 상황을 전제합니다. 그럴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이런 세 가지 조건절 표현은 은사나 헌신이 필요 없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에 사랑이라는 요소가 없으면 무의미하다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사랑은 꼭 있어야 하는 필수 요건입니다.

 

사랑의 특성(4-7)

천사의 언어로 여기면서 최고의 은사라고 추앙하지만 갈등과 혼란만 일으키고 있는 방언도, 사랑의 마음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이방 종교의 예배와 다를 바 없습니다. 시끄럽기만 하고 아무 의미 없는 소음에 그칩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지식과 대단한 이적을 베풀 수 있는 믿음(마가복음 11:23)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4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4-7)

 

사랑을 주어로 해서 그 특징에 대해 서술합니다. 바울의 서술은 형태적으로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랑은 ~하다’는 긍정 표현입니다. 오래 참음과 친절함의 두 항목이 있습니다(4). 다른 하나는 ‘사랑은~하지 않는다’는 부정 표현입니다. 일곱 개 항목(시기, 자랑, 교만, 무례함, 자기 유익을 구함, 성냄, 불의)이 제시되고, 진리를 불의와 연결해 제시합니다(4-6). 세 번째는 ‘모든 것’을 목적어로 하는 네 동사(참다, 믿다, 바라다, 견디다) 표현입니다(7). 이렇게 열거된 사랑의 모습들은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사랑은 철저히 인격적 관계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사랑을 정의하기 어렵지만, 인격과 인격이 서로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본다면 사랑에는 지정의(知情意) 요소가 담겨 있습니다. 지(知)는 인지 정보에 대한 것으로 상대방에 대한 앎과 관련 있습니다. 정(情)은 정서적으로 느끼는 차원입니다. 의(意)는 판단하고 결정하는 사고 과정입니다. 상대방에게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를 판단하여 외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제시하는 사랑의 특징들은 생각(지)의 요소와 함께 상대방에게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情)의 요소, 곧 상대방을 좋아하거나 싫어한다는 표현은 없습니다. 기뻐함이 이 요소와 가깝지만, 사람이 아니라 불의와 진리에 대한 반응이기에 다른 영역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사랑을 단순히 감정 차원으로만 묘사하고 싶지 않은 듯합니다. 합당한 사고 과정과 판단을 통해 관계를 긍정적으로 잘 세워가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듯합니다.

둘째는 사랑은 진리와 함께 갑니다. 사랑은 단순히 좋아하는 것이나 무조건적 호의가 아닙니다. 철저히 진리 영역과 관련 있습니다. 바울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않고 불의가 아닌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렇기에 사랑은 반드시 바른 앎과 바른 분별과 함께합니다. 우상숭배나 어쭙잖은 진리로 자기 행동을 합리화하는 것은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셋째는 사랑은 쉽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참고 견디고 바라는 것은 현재 상태가 긍정적이지 않음을 전제합니다. 일회적 느낌이나 상태가 아닙니다. 계속해서 인격적 관계로 드러내야 하는 과정입니다.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 아니기에 애써 해야 하는 차원이 있습니다.

넷째는 고린도 교회 문제 상황과 정반대 모습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기와 자랑과 교만과 무례히 행하는 것과 자기유익을 구하는 것 등은 교회 분열과 성적 문제들의 원인입니다. 또한 진리로 분별하는 것은 우상숭배 문제와 관련 있습니다. 바울은 그런 문제들이 ‘사랑’의 요소, 특별히 바른 인격적 관계성을 세워가는 차원이 없기에 나타남으로 설명하려 합니다.

 

사랑의 영원성과 온전성(8-13)

은사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올 때까지 유효합니다. 믿음과 소망도 실제가 오면 의미 없어집니다. 하지만 사랑은 날로 커질 것입니다. 자신이 완전히 사라지고 삼위 하나님만 도드라질 때까지, 내 것은 하나도 주장하지 않고 이웃만 위할 때까지, 사랑은 한없이 컥질 것입니다.

 

8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8-13)

 

사랑에 대한 세 번째 설명으로 영원성과 온전성을 다룹니다. 은사는 현재에만 필요하고 주님이 다시 오시면 쓸모없게 되지만, 사랑은 영원하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먼저 바울은 예언은 폐해지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해지겠지만, 사랑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8). 9절부터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현재와 미래의 대조로 제시하는데, 특별히 지식과 예언과 관련해 서술합니다.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지만,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없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식(知識)’이란 하나님/예수에 대한 것입니다. 뜻과 계획을 포함한 그분의 어떠하심에 대한 정보를 말합니다. 핵심은 그분과의 인격적인 관계성입니다. ‘예언(豫言)’이란 신자나 외인들에게 그분이 말씀하신 것을 따라 현 상황을 해석하고 격려하거나 책망하는 것을 담고 있습니다. 현재 신자와 교회가 갖고 있는 지식과 예언의 은사는 모두 부분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그분의 뜻을 다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다시 오셔서 세상을 완성하실 때는 다릅니다. 마치 어린아이의 생각과 지식이 당시에는 최고로 보여도 장성하면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되듯이(11), 또는 거울로 보는 것은 희미하지만 실제 얼굴을 보면 더 분명히 알게 되듯이 미래는 다를 것입니다. 그때에는 부활의 몸으로(빌립보서 3:21) 주님을 얼굴과 얼굴로 보며 온전한 앎과 사랑의 인격적 교제를 영원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13).

13절을 직역하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지금) 있다’입니다. 현재에는 세 가지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믿음과 소망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면 끝나는 것들입니다. 사랑은 다릅니다. 지금이나 그때나 필요합니다. 지금은 주님께서 보이지 않기에 믿음이 필요하고 온전함이 없기에 그때를 기다리는 소망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사랑은 지금이나 그때나 동일하게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하시고 그분과 인격적 관계를 맺을 신자가 지금부터 영원토록 존재하기 때문에 그 관계를 긍정적으로 표현하는 사랑 역시 지금부터 영원토록 필요합니다. 이런 면에서 사랑이 최고입니다. 성도는 이 요소를 가지고 은사를 사용해야 합니다. 함께 살아가는 성도들과의 관계성을 중심으로 서로에게 인격적으로 긍정적인 표현을 함으로써 서로 세워주는 것입니다. 어떤 은사나 섬김이든 이런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이 최고의 은사요 섬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사랑에 감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항상 사랑의 성품을 닮길 위해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을 충만해져서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고 사랑의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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