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15-04)
부활한 후에 몸의 상태
고린도전서 15장 35-49절
부활이 주님을 믿고 산다고 하면서 여전히 세상의 욕심에 사로잡혀 살고 있지 않습니까? 땅의 것을 집중하느라 주님의 뜻을 잊고 살지 않습니까? 한계가 있는 인간의 관점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이해하려고 하면 믿음의 상상력을 잃어버리고 신앙생활이 지루하게 됩니다. 바울은 창조주의 무관한 가능성 안에서 자연의 이치와 이미지들을 동원하여 몸의 부활에 대해 생생하게 설명합니다.
-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씨가 곡식이 되듯이 우리의 존잰 전체가 완전히 새로워지고 달라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부활 전과 후에 대해서 몸은 씨와 열매가 다른 만큼 다르다고 말합니다. 부활의 몸은 썩고 연약하고 욕된 첫 아담의 몸과 달리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의 몸처럼 될 것이라고 합니다.
부활에 대한 두 가지 질문:부활 과정과 부활의 몸(35)
부활의 과정과 부활의 몸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그중 부활의 몸에 대해 설명합니다. 심는 것과 다시 사는 것의 차이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몸을 주신다는 원리를 따라 설명합니다. 신자는 첫째 아담과 그에 속한 몸으로 시작했지만, 빛의 영역 속에서 그 영역을 시작한 예수의 몸처럼 하늘에 속한 신령하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35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35)
부활과 관련해 또 다른 주제들로 넘어갑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부활 과정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활의 몸에 대한 것입니다. 어떤 이의 질문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서술합니다. 아마도 바울 자신이 스스로 묻고 대답하는 형식인 듯합니다. 독자를 대화 속에 끌어들여 집중하게 하는 형태입니다. 이 두 가지에 대해 부활의 몸은 36-49절에서, 부활 과정은 50-56절에서 다룹니다.
부활의 몸에 대한 바울의 대답(36-49)
우리 육체는 썩을 것이지만, 다시 살아난 몸은 썩지 않을 것입니다. 욕되고 천한 육의 몸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몸으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이생의 육체는 상처나 병에 약한 몸이지만, 부활 후에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한 몸이 될 것입니다. 육의 몸은 현세의 삶을 위한 몸이기에 부활 이후의 삶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36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37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38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39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40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41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42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3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4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45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46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47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48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49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36-49)
거짓 가르침이나 이단 사설을 경계해야 합니다. 고린도 성도는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아 영혼의 부활은 받아들였지만, 몸의 부활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의 진리를 귀담아 듣고 그것을 붙들어야 합니다.
(1) 몸에 대한 두 가지 원리(36-41)
‘어리석은 자여’로 주의를 환기하고 설명을 시작합니다. 몸이 만들어지는 두 원리를 말합니다. 첫째, 모체가 죽어야 합니다(36). 바울은 고린도 성도(‘너’)의 경험에 호소해 강한 참여를 유도합니다. ‘네’가 심은 것이 죽지 않으면 생명을 만들 수 없습니다. 얼핏 보기에 이해되지 않습니다. 씨를 심으면 그것이 살아 있어야 싹을 틔우고 자라서 열매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씨가 자라 열매 맺는 연속성이 초점이 아닙니다. 심은 씨와 이후 과정에 나타난 것과의 불연속적 형태의 차이입니다. 37절은 이 초점을 구체화합니다. ‘네’가 심은 것은 장차 될 몸을 심은 것이 아닙니다. 다른 것으로 덮이지 않은 밀 같은 단순한 씨일 뿐입니다. 씨를 심었기에 그 씨의 형태는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싹이 나고 줄기가 되고 열매 맺을 수 있습니다. 변화를 위해 원래 것이 없어지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주목할 것은 ‘몸’이라는 표현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나 짐승 등에게 쓰는 말입니다. 하지만 부활의 몸과 연결시키기 위해 일부러 사용했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몸을 주시며 또한 각 씨들에게 그들만의 몸을 주셨습니다(38).
이 원리는 세 가지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몸의 다양성입니다. ‘각각’과 ‘자신만의’라는 표현으로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요소는 다양한 몸의 개별성은 다음 세대에도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개의 몸은 다음 세대에도 물고기 몸이 아니라 개의 몸이 된다는 말입니다. 또 다른 요소는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이런 요소들을 담고 있는 둘째 원리를 두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그 한 예는 생명체의 몸에 대한 것입니다(39). 사람과 짐승과 새와 물고기 등 모든 생명체는 저마다 다양한 육체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다음 세대에도 동일한 형태를 갖게 될 것입니다. 또 다른 예는 비생명체에 대한 것입니다(40-41). 하늘에 속한 ‘몸’과 땅에 속한 ‘몸’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해와 달과 별도 서로 다릅니다. 이상의 설명을 정리하면 부활의 몸에 대한 원리는 (1) 원래 몸의 모습은 죽고 새로운 것이 나와야 합니다. (2) 그 몸은 다양합니다. (3) 시작자에 따라 다음 세대 몸의 모습이 결정됩니다. (4) 하나님께서는 모든 과정의 주인입니다.
(2) 몸에 대한 원리를 부활의 몸에 적용한 설명(42-44a)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다'는 표현으로 36-41절의 원리를 부활의 몸에 적용한다. 네 가지 대조로 설명합니다. 모두 심긴 것과 부활과의 대조입니다. 썩어질 것으로 심기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부활합니다(42). 부활의 몸은 현재 몸과 달리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또한 욕된 것으로 심기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부활합니다. 연약함으로 심기고 능력으로 부활하며(43), 자연적인 몸이 심기고 신령한 몸으로 부활합니다(44a). 부활의 몸에 대한 이런 설명은 어둠과 빛이라는 두 영역을 배경으로, 한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을 대조한 것입니다. 첫 세 가지 대조는 전치사 ‘엔’을 사용하여 상태를 묘사합니다. 이 단어는 방법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장소나 상태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본문은 후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심긴 것은 한 사람이 어둠의 영역에 있을 때의 모습입니다. 썩고 욕되고 연약한 상태 속에 있습니다. 반면, 다시 살아나는 것은 빛의 영역으로 옮김 받는 자의 결과 상태입니다. 썩지 않고 영광스럽고 능력 안에 있는 상태입니다. 이런 설명의 또 다른 특징은 심는 과정과 다시 일어나는 과정 모두 수동형이란 점입니다. 모든 과정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결과임을 말하는 것으로 앞부분 원리의 적용입니다. 마지막 특징은 어떤 순서를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심긴 과정이 먼저 있고 그것을 통해 다시 살아나는 과정이 있습니다. 역시 원리에 대한 적용입니다.
(3) 자연적 몸과 신령한 몸에 대한 부연(44b-49)
앞서 언급한 자연적 몸과 신령한 몸에 대한 부연입니다. 37-41절의 원리 요소들을 담고 있고, 21-22절에서 말한 아담과 메시아를 시작점으로 한 두 영역을 전제로 합니다. 역시 대조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설명의 시작은 첫 아담과 마지막 아담 메시아와의 대조입니다. 창세기 2:7을 인용하여 첫 아담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코에 숨을 불어넣어 그 결과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입니다. 44b절에 나온 ‘자연적인’(프쉬키코스)과 ‘신령한’(프뉴마티코스)의 동족어 프쉬케와 프뉴마를 써서 대조했습니다. 그러나 차이점이 있습니다. 44b절은 현재 몸과 부활의 몸을 대조합니다. 동일한 사람에 대해 심긴 모습과 부활의 모습이 다름을 말합니다. 45절은 두 영역과 관련해 각 영역의 시작자 대조입니다. 그 안에는 각 영역에 속한 이후 사람들의 모습 차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 아담은 ‘프쉬케’를 갖고 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의 씨에게 자연적인 몸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시작자에 따라 그 후손의 몸이 결정되는 하나님의 원리 때문입니다(38). 하지만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이 되었습니다. 그의 씨인 성도는 생명의 영을 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46-49절에서 ‘먼저’와 ‘그 후’는 순서를 통해 두 아담과 관련한 차이를 설명합니다. 부활은 순서가 있습니다(46). 영을 통한 신령한 몸이 먼저가 아닙니다. 자연적인 몸이 먼저이고 신령한 몸은 그 다음입니다. 부활은 메시아를 통한 새 창조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옛 창조에 속한 것이 죽어야 새 창조의 부활이 가능합니다. 이뿐 아닙니다. 첫 사람(아담)과 둘째 사람(아담)은 기원이 다르기에 각각에 속한 씨들도 다릅니다(47-49). 첫 아담의 기원은 땅입니다. 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마찬가지로 그의 씨들 역시 땅의 기원을 가진 자들로서 흙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둘째 아담의 기원은 하늘입니다. 그렇기에 그에게 속한 신자들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그 몸이 무엇으로 구성되었는지는 말할 수 없지만, 둘째 아담인 예수의 영광의 ‘몸’처럼 될 것입니다(빌 3:21; 요일 3:2), 바울은 이런 부활의 몸에 대한 설명을 ‘우리’를 통해 독자와 공유하는 것으로 결론짓습니다(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처럼 장차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을 것입니다. 형상이란 본질을 잘 드러내는 외적 표현을 의미합니다. 현재 성도는 땅에 속한 자의 본질을 입고 있지만, 예수 메시아를 통해 하나님 통치 영역으로 옮겨져 하늘에 속한 자의 신분을 갖고 있기에(빌 3:20), 장차 그 신분에 걸맞은 모습으로 변화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 부분에서 부활의 몸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를 속 시원히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아니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신비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몸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몸이며 부활의 주님 같은 영광스러운 몸이라는 점입니다. 보이지 않는 주님을 볼 수 있고 그분과 영원히 온전한 사랑의 교제를 할 수 있는 몸입니다(13:12).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실제로 경험하면 됩니다!
우리가 장차 입을 부활의 몸은 이 세상에서의 몸과 전혀 다릅니다. 살려 주는 영이신 예수님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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