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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24-02)


다윗의 제사와 하나님의 용서

사무엘하 24장 18-25절


요한은 예수님을 타작마당의 주인으로(마 3:12) 소개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죄를 타작하시고 순전하고 고운 믿음을 얻으십니다.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은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이삭을 드린 모리아 산이며, 다윗이 준비한 모든 것으로 성전이 세워집니다(대하 3:1). 주님께서는 그곳에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원래 사무엘 상하는 한 권이었습니다. 사무엘서의 시작은 한나의 기도로 시작해서, 마지막은 다윗의 기도로 마무리합니다.

다윗이 인구조사를 한 죄를 물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3일 동안 전염병이 돌게 하셨고 그로 인해 칠만 명이 죽습니다. 다윗이 계수한 사람에서 대략 20분의 1이 죽는 끔찍한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다윗은 이것을 보고 깊이 뉘우치며 죄 없는 백성들 대신에 자신과 자신의 집을 치시라고 요청합니다. 이 모든 과정을 겪으면서 다윗은 왕의 위치와 결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고 왕은 백성을 지킬 임무가 있는 존재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하였습니다.
 

선지자 갓의 권면(18-19)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 그냥 지나치실 수 없고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이것이 진노의 재앙을 완전히 멈추기 위해 희생 제사를 드려야 하는 이유입니다. 죄인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반드시 치러야 할 우리의 죗값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대신 지불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18이 날에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아뢰되 올라가서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으소서 하매 19다윗이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바 갓의 말대로 올라가니라(18-19)
주님은 다윗이 범죄했을 때 선지자를 통해 소통하십니다. 율례를 사랑하고 누구보다 주의 마음에 합하게 행해온 다윗이지만, 이 상황에서는 선지자를 통해 무언가를 깨달아야 했습니다. 주님은 죄를 범했을지라도 돌이킬 기회를 주시는 분이고, 다윗은 은혜를 알아차리고 즉시 올라갔습니다.
(1) 선지자 갓의 권면(18)
다윗이 자신의 선택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깨닫고 차라리 자신과 자신의 집을 죽여 달라고 기도하자 여호와께서는 갓 선지자를 다시 다윗에게 보내십니다. 갓 선지자는 다윗에게 아라우나 타작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한 제단을 쌓으라고 명령합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다윗의 회개의 기도를 들으시고 용서해주실 것이니 제단을 쌓고 속죄의 제사를 드리라는 말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다윗이 자신은 희생하지 않고 백성들을 희생시킨 것이 왕으로서 올바른 자세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고 차라리 자신과 자신의 집을 죽여 달라고 말하며 회개한 것을 받아주신 것입니다. 여부스 사람들은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할 때 그곳에 거하던 주민들로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후에도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살았습니다. 제단을 쌓을 곳으로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을 지정한 이유는 재앙을 일으키던 여호와의 사자가 여호와의 명령을 받고 재앙을 멈춘 곳이기 때문입니다. 즉, 여호와께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에 가슴 아파하시며 용서와 자비를 베푸신 곳이며 인간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단을 쌓아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빌고 은혜를 받기에 가장 적당한 장소인 것입니다.
(2) 다윗의 순종(19)
이런 하나님의 명령에 다윗은 갓의 말을 따라 아라우나 타작마당으로 올라갑니다. 여기서 ‘말대로’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명령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라우나 타작마당을 매입 다윗(20-24)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 구원을 얻는 유일한 길은 오직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당사자가 치러야 합니다. 이것이 다윗이 한사코 값을 지불해 제사를 드리려 했던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화목제물로 죽으셨으며,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고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됩니다.
20아라우나가 바라보다가 왕과 그의 부하들이 자기를 향하여 건너옴을 보고 나가서 왕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21이르되 어찌하여 내 주 왕께서 종에게 임하시나이까 하니 다윗이 이르되 네게서 타작 마당을 사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아 백성에게 내리는 재앙을 그치게 하려 함이라 하는지라 22아라우나가 다윗에게 아뢰되 원하건대 내 주 왕은 좋게 여기시는 대로 취하여 드리소서 번제에 대하여는 소가 있고 땔 나무에 대하여는 마당질 하는 도구와 소의 멍에가 있나이다 23왕이여 아라우나가 이것을 다 왕께 드리나이다 하고 또 왕께 아뢰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을 기쁘게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24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다윗이 은 오십 세겔로 타작 마당과 소를 사고(20-24)
사랑한다면 줄 수 있어서, 받아주어서 고마울 뿐입니다. 죄로 인해 뵐 수도, 들을 수도 없었던 주님과의 거리가 가장 큰 고통이었습니다. 주님을 뵐 수만 있다면 가진 전부를 다 내어 값을 지불해도 좋았습니다. 주께 드리는 것이 희생으로 여겨진다면 사랑이 동기인지 자문해야 합니다.
(1) 아리우나의 영접(20)
자신의 집에 있던 아라우나는 창문으로 내다보고 있다가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자신의 집으로 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는 밖으로 나가 얼굴을 땅에 대고 왕에게 절합니다. 여부스 사람인 그는 다윗을 왕으로 인정하며 철저히 복종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다윗을 ‘내 주 왕’이라 부르고 자신을 ‘종’이라고 칭하면서 정중하게 왜 자신에게 왔는지 묻습니다. 왕이 자신의 부하를 이끌고 한 개인을 방문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 아니기 때문에 아라우나는 혹시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기 위한 것은 아닐까 생각하고 긴장한 것입니다. 즉, 아라우나의 철저한 복종의 모습은 혹시라도 왕과 왕의 군사들이 해를 가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나온 행동으로 아비가일이 사무엘상 25장에서 다윗을 만났을때와 비슷한 행동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에 대해 다윗은 아라우나에게서 타작마당을 사서 여호와의 제단을 쌓고 백성들에게 내리는 재앙을 그치게 하려고 한다고 말합니다. 1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회개하고 제단을 쌓기 전에 이미 재앙을 멈추셨습니다. 오직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하나님의 심정을 모르는 다윗은 제사를 드리면 재앙이 멈출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서 지금 장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미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이것을 나중에 알게 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 겸손히 나아갈수록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미 베풀어주신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2) 다윗의 목적(21)
하지만 이 사실을 모르는 다윗은 최선을 다해 여호와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는 제단을 쌓기 위해 먼저 아라우나 타작마당을 사려고 합니다. 제단은 한 번 쌓으면 계속해서 그곳에 있으면서 여호와의 이름을 기념하는 장소가 되기 때문에 다윗은 그곳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아예 사서 여호와께 바치려고 한 것입니다.
(3) 아라우나의 헌신(22-23)
이런 다윗의 제안에 아라우나는 다윗이 원하는 대로 취하여 제사를 드리라고 하면서 번제를 드릴 소와 땔 나무를 제공하겠다고 먼저 제안합니다. 이것은 땅과 소와 땔 나무 모두를 제공하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다윗에게 땅을 거저 주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고대 사회에서 땅을 사고팔거나 협상을 할 때 하는 화법입니다. 창세기 23장에서 아브라함이 사라를 장사 지내기 위해 헷 족속에게서 막벨라 굴을 사려고 할 때도 처음에는 그냥 쓰라고 말합니다(11). 이것은 땅을 팔지 않겠다는 완곡한 표현으로 협상을 하기 위해 먼저 거절 의사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아브라함은 몸을 굽히고 정중하게 땅을 팔아달라고 요청하였고, 마침내 그들에게 400세겔을 주고 막베라 굴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라우나가 땅을 편히 쓰라는 말은 거저 주겠다는 말이 아니라 협상을 위한 표현인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아라우나는 여호와께서 다윗을 기뻐하시기를 원한다고 기원하며 여호와의 복을 빌어줍니다. 이것은 왕의 호의를 얻기 위한 일반적인 인사로 왕께서 소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길 원한다는 의미입니다. 아라우나는 최대한 다윗의 호의를 얻은 상태에서 협상하기를 원한 것입니다. 사실 다윗은 왕이고 부하들을 데리고 왔으므로 힘으로 빼앗으려 한다면 얼마든지 빼앗을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아라우나는 최대한 다윗의 호의를 얻어 땅을 일방적으로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애쓴 것입니다.
(4) 다윗의 매입(24)
아라우나의 걱정과 달리 다윗은 거저 쓰라는 말에 절대 그럴 수 없다며 반드시 값을 주고 사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면서 값없이, 즉 공짜로는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일차적으로는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을 반드시 사겠다는 의미이지만, 이차적으로는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는 자신이 큰 희생을 치르면서 드려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제사는 죄를 지은 사람이 소나 양이나 염소나 비둘기를 가져와 여호와께 바치는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지은 것에 대한 대가로소 값이나 염소 값이나 비둘기 값 등 제물의 값을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자신이 값을 치러서 드려야 하는 것이지 남이 대신 드리거나 공짜로 드리면 안 됩니다. 현재 우리가 죄 사함 받는것도 공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의 대가로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 제사의 대가는 구약 시대 제사의 대가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값비싼 대가를 치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을 우리의 눈으로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마치 아무 대가 없이 죄 사함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여 죄와 용서와 회개에 대해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렇게 다윗은 자신의 죗값을 감당하고 계속해서 여호와의 이름을 기념하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 은 50세겔을 주고 타작마당과 소를 삽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여호와의 말씀대로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립니다. 번제와 화목제는 속죄를 하는 기본적인 제사로 번제는 모두 태워서 바치는 제사이고 화목제는 지방과 내장은 여호와께 태워드리고 가슴살과 뒷다리 살은 제사장을 주고 나머지는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나누어 먹는 제사로 감사와 교제를 나누는 제사입니다. 이렇게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자 여호와께서는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상 21:14에서 다윗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처럼 이번에도 기도를 들어주시고 이스라엘 위에 내린 재앙을 멈추어주셨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위에’라는 표현은 1절에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라는 구문과 연결됩니다. 재앙의 원인이 되었던 이스라엘에 대한 진노를 멈추셨다는 것입니다.
 

제사와 응답(25)

우리에게는 오직 믿음이 필요합니다. 성도는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께 대해 살아 있는 자임을 믿어야 합니다. 형식적인 종교 행위, 개인의 부단한 노력을 계산하며 구원에 대해 안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믿음이 참된 믿음인지 점검해야 합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교제를 경험하고 있습니까? 또한 삶의 목적과 태도, 일상속에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합니까?
25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25)
결국 인구조사로 인해 이스라엘에 내린 재앙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죄와 다윗의 죄를 모두 심판하신 것이며 여기서 왕인 다윗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왕정 시대에는 왕이 백성들의 대표가 되기 때문에 왕의 잘못된 선택이 백성들을 모두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고 왕이 잘하면 백성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사무엘서는 전체적으로 왕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입니다. 왕을 세워달라는 요구와 이 요구를 실행한 사무엘과 첫 번째 왕 사울과 두 번째 왕 다윗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런 왕에 대한 이야기의 결론은 결국 이스라엘의 왕들은 여호와의 대리자일 뿐이며,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은 여호와 한 분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왕은 여호와의 명령에 복종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잘 인도해야 하는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전부를 드려 예배했던 사람입니다. 자신보다 주님을 더 사랑한 자로 기록됩니다. 위대한 성취를 이룬 왕의 이름이 아닌, 주님을 사랑하여 전부를 드린 사람으로 기록하면서 사무엘서는 막을 내립니다. 인생이 한 줄의 묘비명으로 기록된다면, 어떻게 기록되길 원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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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24-01)


다윗의 인구조사와 하나님의 재앙

사무엘하 24장 1-17절


별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고개만 끄덕이는 사람을 ‘버블헤드’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위대한 지도자란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인전하고 하나님 앞에 고개를 숙이는 사람입니다. 교만이라는 범죄는 한순간에 파고들지 않습니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교만은 은밀하게 마음에 침투해 들어옵니다. 교만한 마음에 사단은 틈타서 넘어지게 만듭니다.

본문은 결론의 마지막 부분인 인구조사에 대한 이야기로 21장의 기근 이야기와 쌍을 이룹니다. 두 사건 다 여호와의 진노가 임하여 이스라엘에 재앙이 일어나게 되는데, 21장에서는 진노의 대상이 사울이고 24장에서는 다윗입니다. 두 이야기 모두 여호와께 기도하였고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해 기도를 들으시고 재앙을 멈추십니다. 두 이야기 모두 왕이 재앙의 원인으로 나오면서 왕정 시대에 왕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인구조사를 명령하는 다윗(1-4)

사람들은 세상에 속한 것, 즉 재물이나 인맥을 의지하여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에 기대는 것은 영원한 생수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터진 웅덩이에서 물을 찾는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맡은 성도가 자기 자신이나 사람의 힘을 의지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싫어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그 은혜를 부정하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십니다.

1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격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2이에 왕이 그 곁에 있는 군사령관 요압에게 이르되 너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로 다니며 이제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인구를 조사하여 백성의 수를 내게 보고하라 하니 3요압이 왕께 아뢰되 이 백성이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 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하되 4왕의 명령이 요압과 군대 사령관들을 재촉한지라 요압과 사령관들이 이스라엘 인구를 조사하려고 왕 앞에서 물러나(1-4)

이 단락은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시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 구문은 사사기에서 ‘이스라엘이 다시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하여’라는 구문과 유사합니다. 반복적인 행위를 표현하는 것으로 여호와께서 여러 번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사무엘서 이야기에서는 여호와께서 사올이나 다윗에게 진노하신 이야기는 등장하지만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신 경우는 사무엘상 12장 사무엘의 고별 설교에서 이스라엘이 왕을 구한 것에 대해 진노하시고 비와 우레를 보내신 일 이외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다윗 시대에도 사사 때처럼 반복적인 이스라엘의 범죄가 있었고 그때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고 벌을 내리신 일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 다윗 마음의 충동(1)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범죄를 벌하시기 위해 다윗이 인구조사를 하도록 부추기셨습니다. 이것은 다윗의 마음에 원래 품고 있던 것을 행동으로 옮기도록 부추기신 것이지 순수한 마음에 악을 집어넣으신 것이 아닙니다. 다윗의 마음을 부추기시는 모습은 사사기 8:23에서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악한 명을 보내어 서로 싸우도록 하신 모습과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여호와께 범죄하였고 심판의 맥락에서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도구로 다윗을 쓰신 것입니다.

(2) 다윗의 명령(2)

다윗은 요압을 불러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해 인구조사를 하라고 명령합니다. 인구조사를 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군사를 징집하기 위한 것이고 둘째는 백성들에게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행위는 여호와 보시기에 좋지 않은 것으로 세금을 많이 걷는 것은 왕이 은금을 많이 쌓기 위한 것이고, 군사를 징집하는 것은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군사의 숫자에 의지하여 전쟁을 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사기 7:2에서 하나님께서 많은 수의 군인이 필요 없다고 하시면서 그 이유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고 말할 염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수의 군인을 징집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원하는 전쟁 방식이 아닙니다.

(3) 요압의 반대와 다윗의 고집(3-4)

이런 다윗의 명령에 요압이 부정적인 견해를 내놓습니다. ‘이 백성이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 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길 원한다’고 기원합니다. 여기서 백 배는 과장법으로 많은 인구 주시기를 기원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왕은 어찌하여 인구조사 하는 것을 기뻐하냐고 묻습니다. 이것은 수사적 질문을 통해서 인구조사를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간접적으로 설득하는 것으로 요압은 다윗의 인구조사 명령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백 배의 인구 주시길 원한다고 기원한 것은 여호와의 능력이 있으면 사람의 많고 적음이 문제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요압은 다윗보다 더 신앙적인 모습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그다지 신앙적이지 않은 요압이 보아도 다윗의 행동은 여호와 앞에서 옳지 않은 행동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인구조사에 대한 다윗의 주장은 완강했고 결국 요압과 사령관들은 다윗의 명령을 시행하게 됩니다.

 

인구조사의 결과를 보고함(5-9)

하나님의 일을 맡은 우리는 지금 무엇을 의지해 그 일을 수행하고 있습니까? 우리 눈에는 세상에서 통하는 원리가 금세 들어옵니다. 그런 방법을 사용하면 원하는 결과가 쉽게 손에 잡힐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은 하나님의 원리와 은혜로 감당해야 합니다. 현대 교회들이 사람의 힘을 의지하고 세상의 방법을 적용한 결과, 교회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5요단을 건너 갓 골짜기 가운데 성읍 아로엘 오른쪽 곧 야셀 맞은쪽에 이르러 장막을 치고 6길르앗에 이르고 닷딤홋시 땅에 이르고 또 다냐안에 이르러서는 시돈으로 돌아 7두로 견고한 성에 이르고 히위 사람과 가나안 사람의 모든 성읍에 이르고 유다 남쪽으로 나와 브엘세바에 이르니라 8그들 무리가 국내를 두루 돌아 아홉 달 스무 날 만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9요압이 백성의 수를 왕께 보고하니 곧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팔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오십만 명이었더라(5-9)

다윗은 세금을 징수하고 군을 정비하는 국가를 합리적으로 경영하려는 마음과 통치권을 자랑하고 강화하려는 두 마음이 같이 있었습니다. 하늘의 와과 관계없이 행하던 다윗은 죄의 결과가 급습해오기 전에 성찰하고 엎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죄 중에서라도 겸손히 엎드리면 거절하지 않으시고 소통하십니다.

(1) 인구조사 과정(5-8)

다윗의 강한 주장으로 인구조사를 시행한 요압과 군대장관들의 여정은 먼저 요단 동편 지역에서 시작해서 아르논을 따라 나라의 동남쪽 끝 아로엘로 갔다가 그 다음에 북쪽 제일 끝인 단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북서쪽을 향해 시돈의 페니키아 해안에 이르고 그 다음에 남쪽으로 이동하여 나라의 주요 부분들을 통과하여 두로와 히위 사람들과 가나안 사람들이 사는 지역에 이르렀고 마지막으로 남쪽 끝인 브엘세바로 갑니다.

(2) 인구조사 결과(9)

이렇게 다윗이 당시에 다스리고 있던 지역을 전부 조사한 결과 이스라엘 사람이 팔십만 명이고 유다 사람이 오십만 명이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별도로 기록된 것은 각기 독립된 행정 조직과 군사 조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집니다.

 

다윗을 징계하신 여호와(10-17)

하나님께서 긍휼의 하나님이신 것을 믿는 자는 그 긍휼을 의지해 죄를 범했을 때에 회개합니다. 회개는 자기의 구체적인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회개할 때만 보혈의 은총을 깊이 누릴 수 있다. 우리가 누리는 은혜의 핵심은 회개에 있습니다. 항상 같은 죄에 넘어져 또다시 회개하기 민망하더라도 회개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회개를 다음 기회로 미루지 말라. 회개할 기회를 주셨는데 회개하지 않는 것은 매우 악한 일입니다.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운다는 것은 죄를 짓지 않는 것일 뿐만 아니라 회개하고 다시 일어서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10다윗이 백성을 조사한 후에 그의 마음에 자책하고 다윗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11다윗이 아침에 일어날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윗의 선견자 된 선지자 갓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12가서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게 세 가지를 보이노니 너를 위하여 너는 그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 내가 그것을 네게 행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 13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아뢰어 이르되 왕의 땅에 칠 년 기근이 있을 것이니이까 혹은 왕이 왕의 원수에게 쫓겨 석 달 동안 그들 앞에서 도망하실 것이니이까 혹은 왕의 땅에 사흘 동안 전염병이 있을 것이니이까 왕은 생각하여 보고 나를 보내신 이에게 무엇을 대답하게 하소서 하는지라 14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고통 중에 있도다 청하건대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아니하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15이에 여호와께서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전염병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 명이라 16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의 손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리심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 곁에 있는지라 17다윗이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곧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하건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소서 하니라(10-17)

아무리 용서를 빌고 용서를 받아도, 왕이 행한 죄의 결과는 참담합니다. 가문마다 장자를 잃은 애굽에서의 애곡처럼 전국을 뒤덮었습니다. 죽음의 쓰나미 앞에서 다윗은 깨닫습니다. 제아무리 왕이라 해도 실은 자기 죄의 결과조차 책임질 수 없는 연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1) 다윗의 회개(10)

이렇게 반대를 무릅쓰고 인구조사를 마친 후에 다윗은 이 일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마음에 걸렸다는 표현은 사울의 옷자락을 벤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삼상 24:6). 이때 다윗은 자신이 사울을 죽이려는 마음을 먹은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다윗은 인구조사를 한 것이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는 군사력을 의지하려고 한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을 깨닫고 죄책감을 느낀 것입니다. 그리고 죄라는 것을 깨닫자 바로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고 죄를 사해달라고 요청하며 자기가 어리석었음을 고백합니다. 이 사건이 밧세바와 간통하기 이전인지 이후인지 알 수 없지만, 밧세바 때에는 나단의 지적을 받고서야 비로소 죄를 지었다는 것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했지만, 이때는 스스로 잘못을 바로 깨닫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한 것을 보면 아직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지 그른지 분별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2) 여호와의 명령(11-14)

이렇게 다윗이 회개하는 모습에 하나님께서는 갓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셔서 회개에 합당한 벌 세 가지를 제시하시고 이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하십니다. 회개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벌을 받는 모습은 밧세바 사건에서도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잘못을 용서하셔서 다윗을 버리지 않으시고 계속 그를 하나님의 자녀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두셨습니다. 하지만 그에 합당한 벌은 감당하게 하십니다. 세 가지 벌은 첫째는 이스라엘 땅에 7년 동안 기근이 오는 것이고, 둘째는 석 달 동안 왕위에서 쫓겨나는 것이고, 셋째는 3일 동안 이스라엘에 전염병이 도는 것입니다. 뒤로 갈수록 날수가 줄어드는 것은 재앙의 강도가 점점 약해지는 것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제안에 다윗은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신 분이기 때문에 자신이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사람의 손에 빠지기를 원치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반역자에게 석 달 동안 왕위를 빼앗기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재앙을 받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이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긍휼이 크신 분이지만 권능도 크시다는 것입니다.

(3) 전염병의 창궐(15)

다윗의 선택대로 하나님께서는 다음 날부터 정한 때까지 전염병을 이스라엘에 보내셨는데, 그 때 죽은 자가 칠만 명이었습니다.

(4) 여호와의 천사(16-17)

이 기간은 3일을 다 못 채운 기간으로 16절에서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손드는 것을 여호와께서 막으십니다. 마지막 날 예루살렘에 재앙을 내리려고 계획하셨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마음이 편치 않으셨던 것입니다. 16절에서 ‘뉘우치다’로 번역된 단어는 ‘후회하다’. ‘유감스럽게 생각하다’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는 많은 백성의 죽음이 애석하시고 속상하신 것입니다. 처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에 그들을 말하기 위해서 이런 계획을 하였고, 이스라엘과 다윗에 대한 별을 시행하토지만 막상 배성의 죽음에 마음이 아프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17절은 16절보다 시간적으로 이전으로 하나님 개서 멈추시기 전에 다윗은 전사가 재앙으로 백성들을 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로 인해 다윗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백성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선책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뼈저리게 깨닫습니다. 여기서 다윗과 하나님께서 같은 마음을 품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을 책임지는 지도자가 가져야 할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는 백성을 대신해서 자신과 자신의 집을 발해달라고 요청합니다. 다윗은 왕으로 지낸 시간이 오래되자 왕의 본질이 무엇인지 잊고 권력에 심취해 있었고, 더 큰 권력을 갖고 싶은 욕망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인구조사를 통해 이스라엘의 권력의 핵심은 여호와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의 죽음을 통해 백성이 왕을 위한 존재인 것이 아니라 왕이 백성을 위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왕은 특성의 구원자이며 목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는 안 됩니다. 다윗은 요압의 반대를 물리치고 인구 조사를 강행합니다. 칼을 빼는 자의 숫자를 센 것을 볼 때, 징병과 조세를 위한 조사였습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구원이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려있지 않음을 부정하고 자기 힘을 의지하려는 불신앙이며 열방의 왕과 귀족들이 백성을 억압적으로 통치하는데 사용한 수단이었습니다. 우리도 여호와의 힘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인간적 힘을 모으는데 몰두하고 있는 모습이 없는지 자신을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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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23-02)


다윗의 용사들

사무엘하 23장 18-39절


 

교회 생활하다 보면 다른 사람들 때문에 상처를 받아서 영적인 침체기를 겪고 있는 경우를 간혹 볼 수 있습니다. 열등감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는 말씀이 우리의 열등감을 부추기는 말씀입니까? 열등감을 방지하거나 극복하는 방법을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본문에는 다윗의 왕국 건설에 지대한 영향을 남긴 용사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무엘하 23:8-39은 다윗의 용사들의 명단으로 이들의 이름과 업적을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군대 지휘관인 세 용사는 각자 뛰어난 기량을 가진 전사들로 블레셋 군대를 훌륭하게 막아내는 전공을 세웁니다. 또한 30인 중에 세 용사는 다윗을 위해 블레셋의 잔을 뚫고 물을 길어 오는 충성심을 보여줍니다. 23:18-23에서는 이들 세 명 중 두 명의 이름과 각자의 업적이 소개됩니다. 그리고 24-39절은 30명의 용사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비새의 업적(18-19)

헌신을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비새와 브나야 두 사람의 업적과 처음 세 용사를 비교하고 있기에 이 사람들이 열등한 것처럼 비칩니다. 하지만 그들이 세운 공이 결코 작지 않습니다. 비교하면 열등감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헌신을 비교하시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기억하시고 칭찬하시는 분입니다.

18또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이니 그는 그 세 사람의 우두머리라 그가 그의 창을 들어 삼백 명을 죽이고 세 사람 중에 이름을 얻었으니 19그는 세 사람 중에 가장 존귀한 자가 아니냐 그가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나 그러나 첫 세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더라(18-19)

아비새와 브나야 두 사람의 업적과 처음 세 용사를 비교하고 있기에 이 사람들이 열등한 것처럼 비칩니다. 하지만 그들이 세운 공이 결코 작지 않습니다. 비교하면 열등감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헌신을 비교하시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기억하시고 칭찬하시는 분입니다.

(1) 아비새의 용맹(18)

여기서 또다시 스루야의 아들이며 요압의 동생인 아비새의 업적이 나옵니다. 그는 21:17에서 다윗을 도와 블레셋 사람들을 죽인 용사로 언급되었는데, 여기서는 좀 더 용맹한 인물로 소개됩니다. 그는 13절에서 언급된 세 명의 용사 중 우두머리로 창으로 삼백 명을 죽이는 놀라운 전투력을 보여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번 대세 영웅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고, 그들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인물입니다. 하지만 첫 번째 세 영웅에는 미치지 못하였는데, 첫 번째 영웅들은 혼자서 팔백 명을 죽이거나 다진 전쟁을 역전시키거나 혼자 들에서 블레 첫 군대를 상대하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첫 번째 영웅들은 직급도 높지만 전투에 있어서도 다윗 부대에서 가장 뛰어난 세 사람으로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아비새가 속한 두 번째 세 영 그들은 그 다음으로 전투력이 뛰어난 영웅들입니다.

(2) 아비새의 지위와 명성(19)

이것을 보면 전투력에 있어서는 아비새가 요압보다 뛰어난 사이며 다윗에게 더 충성스러운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요압은 다윗의 용사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는데 그는 다윗에게 충성한 만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브나야의 업적(20-25)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한 자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전투에 혁혁한 공을 세운 부하들의 이름이 계속 이어집니다. 대다수의 이름이 낯섭니다. 하지만 굳이 그들의 이름을 지루하게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그들을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건강한 공동체는 헌신자들을 귀하게 여기고, 그들을 기억해 줌으로 세워집니다.

20또 갑스엘 용사의 손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이니 그는 용맹스런 일을 행한 자라 일찍이 모압 아리엘의 아들 둘을 죽였고 또 눈이 올 때에 구덩이에 내려가서 사자 한 마리를 쳐죽였으며 21또 장대한 애굽 사람을 죽였는데 그의 손에 창이 있어도 그가 막대기를 가지고 내려가 그 애굽 사람의 손에서 창을 빼앗아 그 창으로 그를 죽였더라 22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이런 일을 행하였으므로 세 용사 중에 이름을 얻고 23삼십 명보다 존귀하나 그러나 세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더라 다윗이 그를 세워 시위대 대장을 삼았더라(20-25)

전투에 혁혁한 공을 세운 부하들의 이름이 계속 이어집니다. 대다수의 이름이 낯섭니다. 하지만 굳이 그들의 이름을 지루하게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그들을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건강한 공동체는 헌신자들을 귀하게 여기고, 그들을 기억해 줌으로 세워집니다.

(1) 브나야의 용맹(20-21)

20-25절에서는 브나야의 업적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갑스엘에 거하는 용사의 후손으로 여호야다 아들이며 여러 가지 많은 일들을 한 사람입니다. 우리말에서는 ‘용맹스러운 일’이라고 하여 군사적인 부분만을 강조하여 번역하고 있지만, 직역하면 ‘많은 일’입니다. 이것은 그의 군사적인 일뿐만 아니라 그 외의 다양한 일들을 포함합니다. 다양한 일을 했다고 번역하는 것이 정당한 이유는 다른 용사들은 전쟁 이야기만 언급하고 있는 반면 나는 사자를 사냥한 일도 공적으로 언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브나야의 업적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뛰어난 모압 용사 둘을 죽인 것입니다. 아마도 일대일 대결을 통해 모압에서 아주 유명한 용사를 죽인 것으로 보입니다. 둘째, 눈 오는 날 사자를 죽인 것으로 눈 오는 날은 산이 미끄럽고 움직이기 힘든 데 이런 악천후에도 사자 사냥에 나섰고 사자를 몰아 구덩이에 빠뜨린 뒤에 사자를 직접 죽인 것입니다. 아무리 구덩이에 빠지고 그물에 걸려있다고 하더라도 구덩이에 들어가 화가 나서 으르렁거리며 몸부림치는 사자를 죽이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브나야의 업적에 기록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사자를 염소 새끼 찢듯이 찢은 삼손의 힘과 비교됩니다. 첫 번째 세 용사 중 한 명은 홀로 팔백 명을 죽임으로 삼손과 비슷한 괴력을 보여주었지만, 두 번째 세 용사는 삼손의 힘에 훨씬 못 미친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업적은 용모와 풍채가 매우 좋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입니다. 이 업적은 일대일 결투에서 이룬 성과로 보입니다. 뛰어난 풍채를 가졌다는 것은 골리앗과 같이 큰 덩치를 가진 것을 의미합니다. 애굽인은 골리앗처럼 제대로 무기를 갖춘 반면 나는 막대기를 들고 나갑니다. 이런 모습은 완전 군장을 한 거인 골리앗 앞에 막대기와 물매만을 들고 나간 다윗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그리고 나야도 오히려 애굽인의 창을 빼앗아 그 창으로 애굽인을 죽입니다. 이런 연상은 물매만을 들고 나간 다윗을 도우셨던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나야와도 함께하셨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2) 브나야의 지위와 명성(22-23)

브나야가 이런 세 가지의 놀라운 업적을 이루었기에 세 용사의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고 평가합니다. 23절에서 용사들의 등급을 정하는데, 가장 뛰어난 용사는 첫 번째로 언급된 영웅들이고, 그 다음이 두 번째로 언급된 용사들이고, 그 다음이 30명의 용사들입니다. 이렇게 다윗에게는 많은 영웅들이 있었고 다윗은 이들과 함께 전쟁하고 적들을 물리쳐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평화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신 다윗에게도 많은 능력과 힘을 주셨지만 그를 돕는 많은 용사들과 함께 그 일들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다윗의 옆에 이렇게 훌륭한 용사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늘 도움의 손길이 있으며 함께할 동료들을 보내주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혼자서가 아니라 같이 해나가는 것이며 같이 해나갈 때 그 안에 사랑과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됩니다.

 

다윗의 30인 용사의 이름(24-39)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다윗의 충성스런 부하들 중 맨 마지막에 우리아가 언급됩니다. 우리아는 다윗의 연약한 모습을 상징하는 이름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의 이름을 기록함으로 다윗의 연약함을 인정합니다. 연약함은 감춘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인정할 때 당당해질 수 있습니다.

24요압의 아우 아사헬은 삼십 명 중의 하나요 또 베들레헴 도도의 아들 엘하난과 25하롯 사람 삼훗과 하롯 사람 엘리가와 26발디 사람 헬레스와 드고아 사람 익게스의 아들 이라와 27아나돗 사람 아비에셀과 후사 사람 므분내와 28아호아 사람 살몬과 느도바 사람 마하래와 29느도바 사람 바아나의 아들 헬렙과 베냐민 자손에 속한 기브아 사람 리배의 아들 잇대와 30비라돈 사람 브나야와 가아스 시냇가에 사는 힛대와 31아르바 사람 아비알본과 바르훔 사람 아스마웻과 32사알본 사람 엘리아바와 야센의 아들 요나단과 33하랄 사람 삼마와 아랄 사람 사랄의 아들 아히암과 34마아가 사람의 손자 아하스배의 아들 엘리벨렛과 길로 사람 아히도벨의 아들 엘리암과 35갈멜 사람 헤스래와 아랍 사람 바아래와 36소바 사람 나단의 아들 이갈과 갓 사람 바니와 37암몬 사람 셀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무기를 잡은 자 브에롯 사람 나하래와 38이델 사람 이라와 이델 사람 가렙과 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24-39)

다윗의 충성스런 부하들 중 맨 마지막에 우리아가 언급됩니다. 우리아는 다윗의 연약한 모습을 상징하는 이름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의 이름을 기록함으로 다윗의 연약함을 인정합니다. 연약함은 감춘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인정할 때 당당해질 수 있습니다. 이 단락은 다윗의 30인 용사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용사들1(24-28)

24-29절에 언급된 사람들은 대부분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 근처의 사람들로 다윗을 지지하던 유다 지파 사람들과 베냐민 사람들이 먼저 언급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요압의 아우 아사헬입니다. 아사헬은 어린 나이에 죽은 요압의 아우로 발이 빠른 것이 장점이었지만, 그것을 믿고 백전노장인 아브넬을 죽이겠다고 뒤쫓다가 아브넬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요압은 아브넬을 죽였고 하마터면 유다와 이스라엘의 통일 왕국을 세우는 것이 물거품이 될 뻔하였습니다. 그 다음 사람은 베들레헴 도도의 아들 엘하난인데 그는 골리앗의 아우라흐미를 죽인 인물입니다(삼하 21:19). 발디 사람 헬레스는 갈렙 부족으로 추측하는데, 발디라는 지명은 유다의 최남단에 있는 벨렛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삼훗과 엘리가는 하룻 사람인데 하롯도 베들레헴 근처의 한 장소로 여겨집니다. 26절의 드고아는 베들레헴에서 북쪽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드고아의 지혜로운 여인이 이곳 출신입니다. 27절의 아나돗은 예레미야의 고향으로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약 5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합니다. 28절의 느도바도 베들레헴 인근 지역입니다.

(2) 용사들2(29-33)

30-39절은 이스라엘 전역에서 온 사람들과 이방인들의 명단으로 이 명단은 다윗이 유다뿐만 아니라 통일 왕국의 왕으로서 이스라엘 사람의 지지와 심지어외국인의 지지도 받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비라돈은 에브라임 지역(삿 12:15)이고, 32절의 사일본은 북쪽으로 이주하기 전 단 지파의 지역입니다.

(3) 용사들3(34-39)

34절에서 엘리암은 길로 사람 아히도벨의 아들인데, 아히도벨은 다윗의 모사로 있다가 압살롬의 반란 때 다윗에게 반역한 인물이며 밧세바의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은 다윗에게 충성을 바쳐 다윗의 용사로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아마도 다윗은 아히도벨의 반역에 대해 아내인 밧세바와 아들인 엘리암에게 연좌를 시키지 않고 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은 반란 뒤에 유다 사람들에 대해서도 화친 정책을 폈습니다. 35절의 갈멜은 북이스라엘의 갈멜인지 헤브론 남쪽에 있는 갈멜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39절에는 다윗의 마지막 용사로 헷 사람 우리아가 언급됩니다. 그는 다윗에게 매우 충성스러운 인물이었지만 다윗에게 아내와 목숨을 빼앗긴 비극의 주인공입니다. 우리아의 이름이 다윗의 용사 명단에 있는 것은 다윗의 범죄를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아의 이름을 보는 순간 우리는 다윗이 밧세바와 간통한 사건과 그 죄를 덮기 위해 우리아를 죽인 사건을 기억하게 됩니다. 이것을 보면 사무엘서는 결코 다윗의 죄를 덮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허물은 허물대로 보여주고 잘한 것은 잘한 대로 보여주면서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살 것인지 묻고 있습니다. 다윗이 우리아를 용사의 명단에 넣은 것은 우리아에 대한 사죄이며 그의 명예를 높이기 위한 것일 것입니다. 비록 자신의 죄로 죽임을 당했지만, 우리아는 다윗 왕국과 하나님의 나라에 충직한 용사였던 것입니다. 용사 명단 맨 앞의 아사헬과 마지막인 우리아는 모두 사무엘서 이야기에 등장하며 모두 죽임을 당한 인물들입니다. 아사헬은 자신의 욕심 때문에 죽은 인물이고 우리아는 무고하게 죽임을 당한 인물입니다. 이렇게 죽임을 당한 인물들을 명단의 앞과 뒤에 놓음으로써 이들의 죽음을 용사로서의 죽음으로 기억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상처를 받는 이유 중 하나는 열등감입니다. 열등감에 빠지지 않으려면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할 때 오히려 그 약점은 강점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헌신을 인정하는 태도 역시 비교에 의한 열등감을 방지하는 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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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23-01)


다윗의 마지막 찬양:영원한 언약

사무엘하 23장 1-17절


사랑하면 서로 닮습니다. 세월을 견디며 나란히 걸어온 부부는 걸음걸이도, 보폭도 맞습니다. 사랑하기에 서로를 알아가고 맞추다 보면 어느새 취향도, 생각도, 결국 외모도 비슷해집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전부를 걸고 주님을 사모하더니 닮아버렸습니다. 다윗의 곁에는 그를 닮은 이들도 있습니다.
 
다윗의 사역에 대해 서서히 마감을 지어 가고 있습니다. 누구나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자신의 자녀나 후세대에게 유언을 남깁니다. 창세기 49장에서 야곱도, 신명기 33장에서 모세도 유언을 남겼습니다. 본문은 이제 다윗의 마지막 유언으로 장차 임할 메시아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찬양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깊은 뜻에 은혜를 받길 바랍니다.
 

다윗의 마지막 말(1-2)

하나님께서는 왕을 세우셔서 그 나라를 영광으로 이끄십니다.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우신 다윗은 참된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으로 모든 죄를 사하시고 그분의 백성을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그분의 통치를 받는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1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세워진 자, 야곱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가 말하노라 2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3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4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5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하게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 6그러나 사악한 자는 다 내버려질 가시나무 같으니 이는 손으로 잡을 수 없음이로다 7그것들을 만지는 자는 철과 창자루를 가져야 하리니 그것들이 당장에 불살리리로다 하니라(1-7)
다윗이 평생 갈망하던 한 가지(시 27:4)는 주의 집에서 주의 아름다움을 보며 주를 사모하는 것이었습니다. 빛 되신 주님을 사랑하더니 다윗도 빛을 발합니다. 다윗의 소원이 주님의 소원이 되고, 주님의 소원이 다윗의 소원이 되었습니다.
(1) 자기소개(1-2)
다윗은 자신을 이새의 아들, 높이 세워진 자, 야곱의 하나님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높이 세워짐은 비천한 신분에서 벗어나 이스라엘의 왕이며, 열방의 으뜸(머리)이 되었음을 뜻합니다(22:44). ‘기름 부음을 받은 자’(메시아)는 하나님의 철저한 보호와 지원 그리고 특별한 관계의 형성을 뜻하는 칭호입니다. 구약성경은 제사장이나 선지자를 향하여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고 불리는 사람은 왕입니다. 개역개정이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라고 번역한 ‘네임 저미로트 이스라엘’은 문자적으로 이스라엘의 노래(저미로트 중 아름다운(네임 ) 것을 )부르는 자'라는 뜻입니다. 1절에서 “말함이여”와 “말하노라”는 모두 ‘네움’의 번역입니다. 이것은 다윗의 마지막 말이 하나님의 계시로 받은 예언적 말씀인 것을 나타냅니다. 또 여호와의 영이 다윗을 통해 말씀하심 역시 다윗이 자신을 선지자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다윗의 혀에 있습니다. 선지자들은 흔히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신다’라고 선언함으로써 자신의 예언을 시작합니다(7:5).
(2) 공의로 다스리는 자(3-4)
다윗은 이와 비슷하게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라는 말로 시작하였습니다. 또 다윗은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반석이라 부릅니다. 반석은 의지하고 피할 수 있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영원히 변화하지 않는 불변성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왕은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고 하나님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야 한다. 공의와 경외함이 통치 원리가 됩니다(렘 23:5). 여기서 다스림은 ‘마샬’ 동사로 표현되었습니다. ‘마샬’은 해가 낮을 다스리고 달이 밤을 다스리듯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따라 지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창 1:16). 그리고 4절은 이상적인 왕이 일어날 때, 하나님의 백성이 누릴 은혜로운 상황에 관해 말합니다.
(3) 다윗의 집(5)
공의로 다스리는 왕이 있을 때, 이스라엘은 구름 없는 아침의 해가 떠오를 때 아침 빛이 비침 같고, 비 온 뒤 광채로 땅에서 나는 풀 같을 것입니다. 아침 빛은 맑고 순수하며 명랑합니다. 비온 뒤 자라난 풀은 윤택하며 상쾌합니다. 다윗은 자기 집이 하나님 앞에서, 즉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속에서, 이와 같다고 확신합니다(5). 다윗의 집에서 의로운 왕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영원한 언약을 세우셨으므로(7장), 다윗의 집이 모든 일에 준비되고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다윗의 모든 구원과 모든 소원을 풍성히 이루실 것입니다. 다윗 언약 속에 나타난 다윗의 소원인 성전 건축과 왕권의 영원한 보존입니다. 이루어질 것입니다.
(4) 악인(6-7)
6-7절은 공의로운 자와 대조되는 사악한 자의 운명에 대해 말합니다. “사악한 자”는 하나님의 질서를 따르지 않는 무도하고 불경한 자입니다. 모든 사악한 자는 내쫓아야 할 가시나무 같으니, 손으로 잡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손으로 잡을 수 없다’는 것은 포용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가시나무 같은 사악한 자와 접촉하는 사람은 철과 나무로 된 창을 많이 가져야 합니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반드시 불태워야 합니다. “당장에”는 문자적으로 ‘그 자리에서’입니다.
 

다윗의 용사들(8-17)

믿음의 용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교회 안에 언약을 믿고 그리스도를 붙잡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들이 바로 하나님이 세우신 믿음의 용사들입니다. 교회는 그런 사람을 알아보고 마땅히 존중해야 합니다. 믿음의 용사들을 분별해 직분자로 잘 세워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쳐서 믿음의 용사를 적극적으로 길러내야 합니다. 다른 것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오로지 복음을 전할 때, 성령님이 그 복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우리의 이름은 믿음의 용사들의 명부에 올라 있습니다.
8다윗의 용사들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다그몬 사람 요셉밧세벳이라고도 하고 에센 사람 아디노라고도 하는 자는 군지휘관의 두목이라 그가 단번에 팔백 명을 쳐죽였더라 9그 다음은 아호아 사람 도대의 아들 엘르아살이니 다윗과 함께 한 세 용사 중의 한 사람이라 블레셋 사람들이 싸우려고 거기에 모이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물러간지라 세 용사가 싸움을 돋우고 10그가 나가서 손이 피곤하여 그의 손이 칼에 붙기까지 블레셋 사람을 치니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크게 이기게 하셨으므로 백성들은 돌아와 그의 뒤를 따라가며 노략할 뿐이었더라 11그 다음은 하랄 사람 아게의 아들 삼마라 블레셋 사람들이 사기가 올라 거기 녹두나무가 가득한 한쪽 밭에 모이매 백성들은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되 12그는 그 밭 가운데 서서 막아 블레셋 사람들을 친지라 여호와께서 큰 구원을 이루시니라 13또 삼십 두목 중 세 사람이 곡식 벨 때에 아둘람 굴에 내려가 다윗에게 나아갔는데 때에 블레셋 사람의 한 무리가 르바임 골짜기에 진 쳤더라 14그 때에 다윗은 산성에 있고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의 요새는 베들레헴에 있는지라 15다윗이 소원하여 이르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까 하매 16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진영을 돌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17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나를 위하여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 하고 마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8-17)
앞에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이들이 다윗의 용사들의 이름입니다. 이 용사들은 다윗이 왕이 되는 과정에서 다윗을 도왔던 사람들입니다(대상 11:10). 주님이 그리워하시는 바를 다윗이 알았다면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할 수만 있다면 자기를 아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태도를 늘 지켜보던 부하들도 다윗의 목마름과 그리움을 채워주려고 자기 전부를 겁니다.
(1) 요셉밧세벳(8)
‘요셉밧세벳’이라는 이름의 뜻은 ‘그 자리에 거주하는 자’입니다. 7절 끝에 있던 밧쉐베트가 용사의 이름에 들어간 것은 사악한 자(벨리야알)를 죽이는 요셉밧세벳의 업적을 강조하려는 의도일 수 있습니다. 요셉밧세벳은 다그몬 사람이며, 에센 사람 아디노라고도 불립니다. 역대기에서처럼 다그몬은 학문으로 수정해야 할 것입니다(대상 11:11). 요셉밧세벳은 야소암이 본래 이름일 것입니다(참조, 대상 11:11 대상 272, 32). 아마도 7절 마지막 단어 밧쉐베트를 고려하여 야소브(요셉)-암을 요셉-밧세벳으로 수정했을 것입니다. 요셉밧세벳은 세용사의 두목이었으며, 한 번에 팔백 명을 죽였습니다.
(2) 엘르아살(9-10)
아호아 사람 도대(=도도)의 아들 엘르아살이 소개됩니다(9). 그는 다윗과 함께한 세 용사 중 하나였습니다. 역대기는 다윗이 용사들과 함께 있던 장소가 바스담밈이라 말합니다. 바스담밈은 골리앗이 등장했던 소고와 아세가 사이의 에베스담밈을 가리킬 가능성이 있습니다(삼상 17:1). 블레셋 사람들이 싸우려고 거기 모였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퇴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세 용사가 남아서 상대를 조롱하면서 싸움을 돋우었습니다. 그리고 엘르아살이 일어나서 블레셋을 치는데, 그의 손이 피곤해서 칼에 들러붙기까지 싸웠습니다. 그날 여호와께서 큰 구원을 베푸셨으므로, 백성들이 돌아와 그의 뒤를 따르며 노략질할 뿐이었습니다.
(3) 삼마(11-12)
하랄 사람 아게의 아들 삼마가 소개된다(11절). 블레셋 사람들이 무리(하야)를 지어 녹두나무가 가득한 한쪽 밭에 모이니, 이스라엘 백성이 도망하였다. 삼마가 그 밭 가운데 서서 그 밭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빼앗고(나찰 빼앗다), 블레셋 사람들을 죽였다. 여호와께서 큰 구원을 베푸셨다.
(4) 세 명의 용사(13-17)
이들은 30명의 용사 중 세 명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30명의 용사는 다윗의 핵심적인 군사들로 그 명단은 24-39절에 나옵니다. 그리고 여기서 세 사람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지만, 이들에 대해서는 18-23절에서 이들의 이름과 업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다윗이 아둘람 굴 혹은 산성에 자리 잡고 있을 때로 다윗이 아직 왕이 되기 전 사울을 피해 아둘람으로 도망하였을 때의 일입니다. 30인의 두목 중 세 사람이 추수 때에 아둘람 굴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갔습니다. 이 세 사람은 앞서 언급한 요셉밧세뱃, 엘르아살, 삼마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때 블레셋 사람의 무리가 르바임 골짜기에 진 쳤습니다. 그때 다윗은 산성에 있었고, 블레셋 사람의 요새는 베들레헴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배치는 이 일이 사무엘하 5장의 전쟁 중에 일어났던 사건으로 생각하게 합니다(5:17-25). 베들레헴은 아둘람에서 동쪽으로 대략 2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고, 그 사이에 베들레헴으로 르바임 골짜기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즉, 아들람에서 베들레헴으로 가려면 르바임 골짜기에 진 치고 있는 블레셋과 마주치게 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다윗이 갈망하면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자기에게 마시게 할 자가 누구냐고 말했습니다. 다윗의 말이 고의성이나 강제성이 없었다는 것은 물을 받았을 때 그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다윗은 자기가 배들레헴에 거주할 때 마시던 물맛을 잊지 못하여 더 목이 말랐을 것입니다. 그러자 세 용사가 블레셋 진영을 뚫고 지나가 베들레헴 성문 겸 우물물을 길어왔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 물 마시기를 거절하고 여호와 앞에 부어드렸습니다. 그 물은 용사들이 목숨을 걸고 가져온 피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도저히 자신이 마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 음료를 바칠 때는 주로 포도주를 부어서 전제로 드리는데, 다윗은 물을 자신의 용사들의 피라고 여기고 그 피를 여호와께 바친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호와 앞에서 자신을 위해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할릴라’, 즉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할릴라’는 불경한 것, 즉 금기를 뜻하는 말이며, 금지 맹세를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다윗은 그 물이 목숨을 도외시하고 갔던 사람들의 피라고 말하면서, 그 물 마시기를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만 남았습니다. 사랑하여 더 사랑하고 싶은 열기가 충만합니다. 자기의 욕구로 가득한 공간을 비워내고, 타자를 위한 공간을 내어주어 소중히 여기는 것, 교회의 존재 이유는 세상에서 목이 타는 이에게 물 한잔 내미는 것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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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22-02)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다윗

사무엘하 22장 26-51절


 

하나님께서 다 하실 것을 믿기 때문에 그저 바라만 보면서 현실을 즐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난이 찾아올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현실을 극복해 나가는 것이 올바른 자세이듯 평탄할 때도 그러해야 합니다. 다윗의 고백을 통해 건강한 신앙의 자세를 알아보시겠습니다.

 

본문은 다윗의 시 후반부이며, 다윗에게 승리를 주시는 여호와의 은혜를 노래합니다. 먼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는 여호와의 성품을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을 전진 속에서 지켜주심을 노래합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으로 모든 원수를 추격하고 공격하고 굴복시키게 하셨음을 말합니다. 끝으로 열방 가운데서 여호와를 찬송하며, 다윗과 그 후손에게 인자를 베푸시기를 확신하며 기도하고 찬양합니다.

 

공평하신 여호와(26-28)

공의를 따라 깨끗한 삶을 살아갑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에게는 성령이 선물로 부어집니다. 성령님은 성도가 하나님의 뜻과 공의를 행하고 깨끗한 삶을 살도록 인도하십니다. 믿음의 고백은 성령이 역사하시는 결과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성령의 내주하심과 역사와는 상관없이 입술의 고백으로 자신의 구원을 확신합니다. 성도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의 고백은 하나님의 공의를 따라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구원의 은혜 안에 날마다 거해야 합니다.

26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27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이다 28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를 살피사 낮추시리이다(26-28)

21-25절에서는 다윗이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보응해주시는 것에 대해 찬양하였다면, 26-28절에서는 개인의 경험을 확대하여 보편적인 하나님의 보응 원리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21-25절에서는 주어와 목적어로 ‘나’라는 일인칭이 주로 사용되었다면, 26-28절에서는 일반 사람들을 의미하는 3인칭이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26절에서 다윗은 일단 긍정적인 보응부터 시작합니다. 자비한 자에게 주께서 자비를 베풀어주신다는 말은 선을 선으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대표적인 모습으로 율법에서 가난한 자를 돌보는 의무 밑바탕에 깔린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출애굽기 22장에서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지 말고 가난한 자들에게 돈을 꾸어주고 이자를 받지 말며 저당물로 받은 겉옷을 돌려주라고 말씀하시면서 27절에서 나는 자비로운 자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의 자비로운 성품을 닮아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신명기 15장에서 가난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절대 그들의 필요를 외면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10절에서 ‘너희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26절 하반절에서 '완전함'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레위기의 제의 제도에서 제물은 반드시 흠이 없는 완전한 짐승을 드려야 하며 제사장도 흠이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도 완전하여 결함이나 실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불완전하고 결함투성입니다. 이런 인간은 하나님의 완전함과 비교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며 하나님 안에서 완전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부족한 자에게 완전함으로 갚아주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과부의 두 렙돈이 가장 큰 헌금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이 부분과 연결될 것입니다. 27절 상반절은 긍정적인 부분의 보응이고 하반절은 부정적인 보응입니다. 27절 상반절에서 ‘깨끗함’은 죄와 부정을 제거하는 것으로 죄를 완전히 짓지 않으며 완벽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었을 때 그것이 죄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회개함으로 죄 사함을 받아 죄와 부정을 제거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을 때 회개하며 용서를 빌고 죄에 대해 책임을 지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정결하게 하셔서 다시 그 사람과 교제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분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깨끗한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죄를 지어 부정하게 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거룩하신 하나님 곁에 갈 수 없고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게 됩니다. 하지만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받게 되면, 우리는 다시 정결한 상태가 되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게 됩니다. 구약에서는 동물 제사를 통해 죄 사함을 받았고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안 짓는 것도 중요하지만, 죄를 지었을 때 빨리 회개하는 것이 연약한 인간에게는 더욱 중요한 문제입니다. 27절 하반절은 상반절과 반대의 상황으로 ‘사악한 자’는 ‘뒤틀린 자’이며 여호와 앞에 죄를 범한 자들로 이들은 여호와 앞에 회개하지 않고 계속해서 엇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회개하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엇나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도 엇나가게 행동하겠다고 하십니다.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용서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벌을 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27절 상반절과 하반절은 동일하게 죄의 문제를 다루지만, 죄를 깨닫고 회개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에 대한 하나님의 반대되는 반응을 말하고 있습니다. 28절은 27절과 같이 대조적 평행법을 사용하여 가난한 자를 높이시고 교만한 자를 낮추시는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데, 이것은 한나의 노래에서도 언급된 내용입니다. 28절의 핵심은 하나님은 얼마든지 상황을 역전시키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으로 가난하다고 낙심하지 말고 높이 있다고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부르짖는 약자를 위해 악한 상황들을 언제든지 전복하실 수 있는 분인 것입니다. 이것은 한나도 경험했고 다윗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자를 들어 쓰시기를 좋아하시며 교만한 자를 미워하시는 분입니다. 교만은 불신앙으로 교만한 자는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명기 17:19-20에서 율법을 읽어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고 교만을 행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호하시는 여호와(29-37)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과 같은 전쟁터에서 하나님께서는 등불이 되십니다. 앞길을 환히 비추시는 하나님을 의지할 때, 그 어떤 적도 두렵지 않습니다. 적진 가운데로 힘차게 달려 나갈 때 적진의 성벽도 훌쩍 뛰어넘게 됩니다. 완전하고 진실한 약속의 말씀을 따라 굳건한 반석이신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을 가장 안전하게 지키시며 대적을 향해 싸울 수 있도록 모든 것을 가르치시며 적진을 향해 담대히 나아가 싸우게 하십니다.

29여호와여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여호와께서 나의 어둠을 밝히시리이다 30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진으로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넘나이다 31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진실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시로다 32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 33하나님은 나의 견고한 요새시며 나를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시며 34나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35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 활을 당기도다 36주께서 또 주의 구원의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37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내 발이 미끄러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29-37)

흑암의 장막이 다윗을 덮던 날들이 하루 이틀이었습니까? 길도 빛도 없는 광야에서 지새워야 했던 그 암담하고 외로운 밤마다 주님은 따뜻한 등불처럼 위로하시고 주의 자비와 완전함을 보이셨습니다. 어두운 심령에 찾아와 품어주는 그 빛, 그 아름다움을 찬송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1) 등불(29-30)

다윗은 이제 하나님을 의지하며 전쟁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나의 등불로서 어둠을 밝혀주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인생의 캄캄하고 막막한 길을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뜻이고, 또 한편으로는 적들이 어디서 쳐들어올지 그리고 전쟁의 향방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저 하나님만 믿고 뛰어드는 30절의 모습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30절에서 자신의 앞길을 비춰주시는 하나님과 함께 그 빛을 따라 적진을 달리고 성벽을 뛰어넘습니다. 여기서 묘사된 군인은 주변의 모든 상황을 무시하고 오직 빛을 따라 칼 한 자루 손에 쥐고 적진으로 뛰어드는 매우 역동적이고 힘찬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윗의 이 고백을 보며 과연 우리에게도 다윗과 같이 여호와를 위해 힘차게 뛰고 달리고 뛰어넘는 역동적인 모습이 있는지, 아니면 주변 상황만을 보고 두려워서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거나 쭈뼛거리며 간신히 발걸음을 옮기는 것은 아닌지, 혹은 가고 싶지 않은 길을 무거운 발걸음으로 터벅터벅 걷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2) 피난처(31-34)

하나님 말씀의 완전성과 순수성을 고백한 다윗은 여호와께로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가 되어주신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하나님 말씀의 완전성과 순수성은 하나님의 언약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돌보고 지키겠다고 약속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피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32절에서 다윗은 오직 여호와만이 하나님이시라는 신앙고백을 통해 자신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고백합니다. 시내산에서 맺은 이스라엘의 언약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은 오직 여호와만을 하나님으로 섬기겠다는 것으로, 31절은 하나님 편에서의 언약을 32절은 인간 편에서의 언약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33절부터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인도를 묘사합니다. 33절에서는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시는 분으로, 34절에서는 자신의 발이 날렵한 암사슴의 발처럼 빠르게뛸 수 있게 힘을 주시는 분입니다.

(3) 훈련(35-37)

35절에서는 자신의 손에 싸움을 가르치시는 분으로, 36절에서는 방패를 주시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이 전쟁할 수 있게 힘도 주시고 능력도 주시는 것을 마치 스승이 제자를 하나하나 가르치고 무장시키는 모습으로 묘사하였습니다. 이렇게 여호와의 인도를 받은 다윗은 빠른 발로 높은 곳에서의 전투에도 끄떡없는 체력과 민첩함을 얻게 되었고, 싸움을 배운 손은 무거운 무기인 놋활도 쏠 줄 알게 되었으며, 방패로 보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자신을 강하게 만드시고 승리를 주신 것을 하나님의 겸손함으로 보았습니다. 이것은 세상을 다 뒤엎을 힘과 능력을 가지신 분이 직접 싸움에 나서지 않고, 아무런 힘도 없는 자신을 가르치고 용사로 만들어 승리의 기쁨을 맛보고 승리의 영광을 누릴수 있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다윗의 고백 속에는 아무런 능력도 없던 자신이 전쟁터의 용사로서, 왕으로서 힘과 명예를 얻게 된 것에 대한 송구함과 겸손함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약간의 영광과 능력을 자신의 것인 양 착각하고 교만해지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광을 맛보게 하신 것이 겸손함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더욱 겸손해야 할 것입니다. 37절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 발걸음도 힘찬 용감한 군사로 거듭난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이제 전쟁할 준비가 끝난 것입니다.

 

여호와의 다윗(38-46)

승리의 기쁨을 날마다 누리고 있습니까? 초대교회는 핍박과 고난 속에서도 주님이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승리를 날마다 맛보며 누렸습니다. 그들에게 이 십자가만이 유일한 자랑이고 기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 복음을 세상에 전함으로 영적 전쟁에서 날마다 승리했습니다. 교회는 십자가 복음을 알고 누리며 그것을 세상에 자랑함으로 주님의 승리를 날마다 경험하는 공동체입니다.

38내가 내 원수를 뒤쫓아 멸하였사오며 그들을 무찌르기 전에는 돌이키지 아니하였나이다 39내가 그들을 무찔러 전멸시켰더니 그들이 내 발 아래에 엎드러지고 능히 일어나지 못하였나이다 40이는 주께서 내게 전쟁하게 하려고 능력으로 내게 띠 띠우사 일어나 나를 치는 자를 내게 굴복하게 하셨사오며 41주께서 또 내 원수들이 등을 내게로 향하게 하시고 내게 나를 미워하는 자를 끊어 버리게 하셨음이니이다 42그들이 도움을 구해도 구원할 자가 없었고 여호와께 부르짖어도 대답하지 아니하셨나이다 43내가 그들을 땅의 티끌 같이 부스러뜨리고 거리의 진흙 같이 밟아 헤쳤나이다 44주께서 또 나를 내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나를 보전하사 모든 민족의 으뜸으로 삼으셨으니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 45이방인들이 내게 굴복함이여 그들이 내 소문을 귀로 듣고 곧 내게 순복하리로다 46이방인들이 쇠약하여 그들의 견고한 곳에서 떨며 나오리로다(38-46)

전쟁터의 다윗에게 다른 방패가 없었습니다. 사울의 갑옷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주님이 살리시면 살고 죽이시면 죽는다는 각오로 전쟁에 임했습니다. 주님이 지키셨기에 날 선 칼과 창끝도 다윗을 건들 수 없었습니다. 전심으로 주께 피하는 다윗에게 주님은 가장 강력한 방패가 되어주셨습니다.

(1) 원수를 굴복시킴(38-40)

이 단락에서는 하나님께 교육받은 다윗이 전투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윗의 모습은 매우 용감합니다. 적의 뒤를 쫓아가 전투하는데 그들을 무찌르기 전에는 후퇴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임전무퇴의 용감한 돌격 정신을 볼 수 있습니다. 39절은 그 결과로 적들을 완전히 괴멸해 버렸습니다. 39절 하반절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였고, 자신의 발아래 모두 엎드러졌다고 표현함으로써 완전한 승리의 모습을 생생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40절부터 다윗은 다시 자신이 승리하게 된 은공을 여호와께 돌리고 있습니다. 띠를 띠운다는 표현은 33-36절까지의 교육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입니다.

(2) 원수를 진멸함(41-43)

41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적들이 도망가게 하시고 근절할 수있게 해주셨다며 감사합니다. 42절은 여호와께서 자신만을 도와주신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적들에게는 그들을 도울 자가 없었습니다. 이방신들은 여호와의 적수가 되지 못하기에 도울 수 없었고, 혹시라도 여호와를 부르는 자가 있더라도 여호와께서는 도와주지 않으셨다고 고백하며, 하나님과 자신의 특별한 관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43절은 적들이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완전히 이겼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3) 이방 사람들의 복종(44-46)

39-43절이 다윗이 싸운 일반적인 전쟁에서의 승리를 말하고 있다면, 44절은 이스라엘 안에서 사울과 사울 집과의 갈등 속에서 자신을 보호하셔서 자신을 왕으로 세워주신 것에 대한 감사하고 있습니다. 45-46절에서는 이방인들이 자신에게 굴복하고 자신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자발적으로 다윗에게 복종하는 모습을 그립니다. 암몬과 아람을 이긴 뒤 이들이 다윗에게 복종하며 조공을 바치고 두로의 히람이 화친을 청한 이야기를 반영한 부분입니다. 이 부분이 다윗 인생에서 가장 명예롭고 승승장구하던 때입니다.

 

구원의 반석이신 여호와를 찬양(47-51)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날마다 찬양하고 감사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수많은 찬양의 제목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드려야 할 가장 중요한 찬양 제목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신 구원의 큰 능력과 은혜입니다. 오직 교회만이 할 수 있는 이 감사와 찬양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거룩하심과 십자가로 이루신 구원의 은혜를 교회가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47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높일지로다 48이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보복하시고 민족들이 내게 복종하게 하시며 49나를 원수들에게서 이끌어 내시며 나를 대적하는 자 위에 나를 높이시고 나를 강포한 자에게서 건지시는도다 50이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모든 민족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51여호와께서 그의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원하도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하였더라(47-51)

광야의 절벽과 낭떠러지에서 발 디딜 곳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도망자 신세라면 더욱 마음이 급하여 순식간에 미끄러지고 떨어질 수 있습니다. 구원의 반석이신 주님 덕분에 다윗은 걸음을 넓혀 높은 곳으로 달리고 뛰어넘었습니다. 반석이신 주님이 매 순간 그의 발을 붙들어 인도해 주셨습니다.

(1) 구원하시는 여호와(47-49)

다윗은 다시 노래의 처음처럼 여호와를 자신의 반석이라고 부르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높이라고 외칩니다. 2절에서는 찬양하라는 부분이 없었지만, 47-51절의 핵심은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2) 감사와 찬양(50-51)

48-49절에서 다시 한 번 여호와를 찬양하는 이유를 밝힌 후, 50절에서 다시 감사와 찬양을 돌립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그 이름을 찬양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며 여호와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큰 구원 사건이 있을 때 찬양이 등장하는 것입니다(출 15장; 삿 5장; 삼상 2장 등). 그러므로 은혜 받은 자는 감사하는 것과 여호와를 찬양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51절에서 왕에게, 즉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왕에게 그리고 다윗과 그의 후손들에게 영원토록 헤세드, 즉 언약의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기원하며 노래를 마치고 있습니다. 다윗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헤세드를 베풀어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언약을 지켜달라는 기원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이 언약을 신실하게 지켜주셨습니다. 비록 다윗이 범죄하고 하나님과 멀어졌을지라도 이 약속은 끝까지 지켜주셨습니다. 전체적으로 다윗의 찬송시가 지어진 시기는 다윗이 범죄하기 이전으로 보입니다. 이 시에서 다윗은 매우 겸손하며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따랐다고 고백하고 있으며,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함께하시므로 전쟁마다 승리한 것은 다윗이 범죄하기 전의 상황입니다. 하지만 다윗이 범죄한 이후 다윗의 이야기에 하나님은 거의 등장하지 않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모습도, 하나님께 의뢰하는 모습도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찬양시는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다윗 성을 짓고 언약궤를 모셔오고 정치적 군사적으로 안정되었을 때 하나님께 감사하며 바친 노래입니다. 이렇게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감사하는 노래를 했던 다윗도 인간적인 영광에 도취 되면 한순간에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을 보면서 우리 인간이 얼마나 약하고 악한지 다시 한 번 경고를 받게 됩니다.


 

서로 기대어 같은 결의 마음을 빚어온 사이였습니다. 두 마음이 합해졌습니다. 우리에게도 주님은 가까이 오셔서 살피십니다. 겸손히 한계를 인정하고 기대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은 신실하시고 겸손하고 온유하신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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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22-01)

 


신뢰할 수 있는 분을 찬양하는 다윗

사무엘하 22장 1-25절


한나의 노래와 함께 한 시대가 열렸다면 다윗의 노래로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얼핏 한나, 사무엘, 사울, 다윗이 주인공인듯하나, 참된 주인공은 그들의 찬미에 등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의 후예들에게 참 이스라엘의 왕께서 통치와 리더십을 가르치는 책의 마무리에서 다윗은 그 왕이 어떤 분인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용맹스러운 통치자로서의 모습일 뿐만 아니라 수금을 잘 타는 음악가요(삼상 16:18), 시인이기도 합니다. 본문은 모든 대적으로부터 구원받은 후, 다윗은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볼 때, 파란만장한 삶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감사의 노래로 시편 18편과 흡사합니다. 그의 인생을 잘 요약한 시를 통하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묵상하길 바랍니다.

 

고백과 기도(1-7)

하나님만 계시면 세상 아무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아니면 어떤 방법으로든 통장에 잔고를 쌓고, 사람들과 연대를 맺고, 높은 권력과 명예를 얻으려 하면서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자신을 지키며 합니까?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사탄의 공격, 악한 세상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 외에 세상 것은 곧 무너지고 없어집니다. 세상 어디에도 완벽하게 안전한 곳은 없습니다.

1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원수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으로 여호와께 아뢰어 2이르되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위하여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 3내가 피할 나의 반석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그에게 피할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폭력에서 구원하셨도다 4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받으리로다 5사망의 물결이 나를 에우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6스올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7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1-7)

다윗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사망의 물결이 몰려오고 불의의 창수가 두렵게 하는 상황, 스올의 줄이 그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덮치는 상황에 처했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듯한 환난 가운데 하나님께 부르짖자 성전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에 대적과 원수로 인해 고통당하고 사망이 임박한 듯한 상황에서 부르짖을 때 그 모든 외침에 귀를 기울이고 들으십니다.

(1) 배경 설명(1)

다윗 시의 서론으로 다윗이 사울의 손과 모든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신 여호와께 드린 노래라고 합니다. 사무엘상 2장에서도 한나는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친 후에 자신의 서원을 들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찬양을 드렸고, 사사기 5장에서는 가나안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드렸습니다. 또한 출애굽기 15장에서도 홍해를 건넌 후 여호와의 크신 구원을 감사하며 용사이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이렇게 내러티브 중간에 나오는 사들은 대부분 여호와의 크신 구원에 감사하며 부르는 찬양들입니다.

(2) 반석이신 여호와(2-3)

다윗은 제일 먼저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는 여호와를 반석, 요새, 자신을 건져주시는 분, 피할 반석, 방패, 구원의 뿔. 높은 망대, 피난처, 구원자로 묘사합니다. 이것은 모두 전쟁에서 방어를 위해 사용하는 용어들로 다윗은 수많은 전쟁과 사울의 살해 위협 속에서 오직 자신을 지키시고 도우신 분은 여호와이심을 알고 모든 방어의 용어들에 여호와를 붙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보호자이심을 천명하며, 그 보호자께서 자신을 모든 폭력에서 구원하셨다고 고백합니다.

(3)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심(4-7)

4절에서 다윗은 이런 구원을 어떻게 받았는지 설명하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이 지금 찬송을 드리고 있는 여호와께 기도하면 여호와께서 자신을 원수의 손에서 구원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이 여호와를 철저히 신뢰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2절에 나오는 반석과 뿔이라는 단어는 사무엘상 2장의 한나의 노래에서도 동일하게 언급됩니다. 이 단락은 환란에 빠졌을 때의 모습을 노래한 것으로 다윗은 자신이 겪는 환란을 죽음으로 표현합니다. 사망의 급류, 스올의 줄, 사망의 올무는 다윗이 경험했던 수많은 죽음의 위협들을 묘사하는 단어들로 이런 단어를 통해 수많은 전쟁을 겪은 다윗이 전쟁 때마다 자신 앞에 놓인 죽음의 그림자를 느꼈고 두려워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서의 이야기에서는 다윗이 전쟁을 앞두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전쟁을 하면서 두려움을 느꼈는지에 대한 언급 없이 늘 용감하게 전쟁에 앞장서고 늘 승리하는 모습으로만 그려집니다. 이야기만 보면 다윗은 항상 두려움 없이 전쟁에 나가 이기고 돌아온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시를 통해 우리는 다윗도 전쟁에 나갈 때 두려움을 느꼈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원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두려울 때 여호와께 부르짖으면 여호와께서 자신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고 고백합니다.

 

여호와의 진노(8-16)

원수를 향한 심판의 무서움을 아십니까? 지금은 악한 자와 대적이 득세며 그들이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의 삶은 고통 가운데 끝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대적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분의 자녀를 핍박하고 고통으로 몰아넣은 자들은 향해 진노를 쌓고 계십니다. 이러한 심판을 알기에 성도는 원수로 인한 애매한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음의 길을 온전히 걸어가야 합니다.

8이에 땅이 진동하고 떨며 하늘의 기초가 요동하고 흔들렸으니 그의 진노로 말미암음이로다 9그의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 10그가 또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니 그의 발 아래는 어두캄캄하였도다 11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 바람 날개 위에 나타나셨도다 12그가 흑암 곧 모인 물과 공중의 빽빽한 구름으로 둘린 장막을 삼으심이여 13그 앞에 있는 광채로 말미암아 숯불이 피었도다 14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우렛소리를 내시며 지존하신 자가 음성을 내심이여 15화살을 날려 그들을 흩으시며 번개로 무찌르셨도다 16이럴 때에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으로 말미암아 물 밑이 드러나고 세상의 기초가 나타났도다(8-16)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임하실 때 하늘에서 크고 놀라운 우렛소리를 내시며 목소리를 높이십니다. 그 누구도 피할 수 없게 화살을 날려 모든 대적을 흩으시며 번개로 무찌르셨습니다. 하나님의 꾸지람과 콧김으로 말미암아 바다 밑이 드러나고 세상의 기초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위엄하신 모습으로 이 땅에 임하실 때 천지 만물은 진동하며 떨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데적과 원수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1) 여호와의 진노(8-9)

이 단락은 여호와의 신현의 모습을 묘사하였는데, 다윗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돕기 위해 달려오시는 여호와의 모습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오실 때는땅과 하늘의 기초가 모두 흔들리고 진동합니다. 8절에서 ‘진동하다’, ‘떨다’, ‘요동하다’, ‘흔들리다’와 같이 비슷한 단어를 반복하여 여호와께서 오실 때 천지가 진동하는 모습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렇게 천지를 진동시키면서 오시는 이유는 분노하셨기 때문입니다. 분노하신 이유는 자신의 아들인 다윗을 원수들이 죽이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9절은 분노하신 모습을 표현하는데, 진노로 코와 입에서 불과 연기를 내뿜고 계십니다. 이런 신인동형론적인 표현을 통해 여호와의 격렬한 진노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2) 구름을 타시는여호와(10-11)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오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빽빽한 구름을 타고 여호와를 호위하는 그룹을 타고 바람을 타고 장엄하게 내려오시는 여호와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비구름을 몰고 천지를 진동시키며 오시는 모습은 사사기 5:4-5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3) 어둠 속의 숯불(12-13)

12절에서 하나님의 장막이 흑암 즉, 많은 물과 빽빽한 구름으로 둘러싸인 것으로 묘사하는데 이것은 출애굽 시 광야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나타나셔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13절에서 그 앞에 있는 광채로 말미암아 숯불이 타올랐다고 하는데 이것은 벼락 치는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번쩍번쩍 벼락이 내리치고 여기저기 불길이 솟아오르고 이때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천둥소리까지 내십니다. 다윗은 천둥소리를 지존자의 음성으로 묘사합니다. 지진, 천둥 번개, 구름, 연기, 불이 모든 묘사는 모두 시내산에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나타나실 때 보여주셨던 것으로 창조주이시며 용사이신 여호와의 위엄을 나타냅니다.

(4) 여호와의 콧김(14-16)

15-16절에서 여호와의 공격 무기로 화살을 날리는 것은 하반절의 번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분노의 콧김을 날리셔서 물의 바닥을 드러내신다는 것은 강한 폭풍을 일으키시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표현은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번개와 폭풍을 무기로 다윗의 원수들을 공격하시고 물리쳐주십니다. 8절부터 16절에 나타난 여호와의 장엄한 신현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첫째로, 여호와의 장엄한 신현은 인간을 두렵게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여호와를 경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언약을 맺으실 때 두려운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은 인간들이 여호와를 두려워함으로 함부로 여호와의 율법을 어기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호와는 가까이 다가가야 할 분이지만 한편으로 인간이 함부로 대하며 다가가서는 안 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인간이 여호와의 용사로서의 힘과 능력을 알게 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능력을 바로 알 때 우리가 어떤 강한 원수를 만나더라도 그보다 더 강한 용사이신 여호와를 의지하기에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강한 용사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천둥과 번개와 불을 뿜으면서 달려오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을 구원하신 여호와(17-20)

깊은 물 속에 잠긴 것과 같은 상황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생애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극한 고통을 찾아오면 어디에도 빛이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을 맛보게 됩니다. 이 어둠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치고 또 쳐 보지만 몸은 점점 더 깊은 물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모든 힘을 다 쏟고 이제 소망이 없다고 여겨질 때, 오직 죽음밖에 생각할 수 없을 때, 바다 끝에서 우리를 기뻐하시며 기다리고 품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17그가 위에서 손을 내미사 나를 붙드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내셨도다 18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그들은 나보다 강했기 때문이로다 19그들이 나의 재앙의 날에 내게 이르렀으나 여호와께서 나의 의지가 되셨도다 20나를 또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구원하셨도다(17-20)

이 단락은 다윗을 구원하신 여호와를 찬양하는 부분으로 용사로서 오신 여호와께서 손을 내밀어 다윗을 불들어 주셨고 많은 물에서 건지셨습니다. 많은 물은 다윗을 둘러싼 강한 적들을 상징하며 여호와께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적들의 손에서 건져주셨고, 그들이 재앙을 가져와도 자신의 지지자가 되어주셨으며, 결국 자신을 깊고 거센 물에서 건져서 넓고 평탄한 길로 인도하시며 구원해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더 이상 원수들에게 둘러싸이지 않는 안전하고 평화로운 곳으로 인도하셨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자신을 구원해주신 이유를 하나님께서 자신을 기뻐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공평하게 대하시는 여호와(21-25)

공의를 따라 깨끗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에게는 성령이 선물로 부어집니다. 성령님은 성도가 하나님의 뜻과 공의를 행하고 깨끗한 삶을 살도록 인도하십니다. 믿음의 고백은 성령이 역사하는 결과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성령의 내주하심과 역사와는 상관없이 입술의 고백만으로 자신의 구원을 확신합니다. 성도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의 고백은 하나님의 공의를 따라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21여호와께서 내 공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따라 갚으셨으니 22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을 행함으로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23그의 모든 법도를 내 앞에 두고 그의 규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24내가 또 그의 앞에 완전하여 스스로 지켜 죄악을 피하였나니 25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대로, 그의 눈앞에서 내 깨끗한 대로 내게 갚으셨도다(21-25)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공의를 따라 행하며 깨끗한 삶을 살았습니다. 여호와의 도를 따라 지키고 악은 행하지 않았으며 하나님 안에서 그분의 법도를 따라 의롭고 깨끗하게 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다윗에게 주의 자비를 나타내시며 주의 완전하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1) 여호와의 길(21-23)

21절부터는 왜 하나님께서 자신을 기뻐하셨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서에 기록된 전쟁 중에 여호와께서 용사로 나타나신 전쟁은 사무엘상 7:10에서 우레를 발하여 블레셋 군을 몰아내신 미스바 전쟁과 사무엘상 14:15에서 블레셋의 진이 진동하고 땅이 흔들림으로 수많은 블레셋 군을 물리친 요나단의 전쟁이 있습니다. 이렇게 다윗은 자신이 사울의 손에서 살아남고 왕이 되어서도 많은 적들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다윗 왕국을 안정적으로 다스릴 수 있게 된 것을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이런 다윗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과연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얼마나 묘사할 수 있으며,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2) 의를 따라 보상하심(24-25)

다윗은 앞 단락에서 여호와께서 자신을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시고 평안한 곳으로 인도하셨다고 찬양하며 그 이유를 자신을 기뻐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21-28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기뻐하신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21절에서 다윗은 여호와께서 내 공의를 따라 갚아주시고 내 손의 깨끗함을 따라 갚으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특히 손이 깨끗하다는 것은 자신의 손으로 무죄한 피를 흘리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22절은 ‘왜냐하면’으로 시작하며 그 이유를 설명하는데, 여호와의 길을 걸으며 악을 행함으로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다윗은 악을 행하는 것을 여호와를 떠나는 행동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23절은 자신이 이렇게 여호와를 떠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법도를 늘 앞에 두고 하나님의 규례를 멀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선지자의 말씀에 순종하고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살았다는 것이며, 신명기 17:18-19의 말씀처럼 여호와의 율법서를 기록하여 옆에 두고 읽으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신명기에서 명령하신 왕에 대한 규례를 지키며 살아왔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24절에서는 율법을 지키는 것도 대충 지키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지키기 위해 악을 피하였다고 합니다. 악에 물들거나 유혹을 받지 않기 위해 다윗은 아예 악한 상황이나 악한 사람을 피하면서 자신을 지킨 것입니다. 잠언에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악한 음녀에게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네 길을 그에게서 멀리하라 그의 집 문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고 말합니다. 가능하면 악한 집단에는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이 어렵기 때문에 자신도 물들지 않기 위해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행동을 비추어 잘못된 행동이 있는지 분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한 공동체 안에서 자신만 옳은 행동을 하려고 할 때 많은 어려움이 생기게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우리의 선한 행위대로 갚으시는 여호와의 능력을 믿으며 선한 행동을 하기 위해 애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한 행동을 하다가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에게 분노하시고 폭풍을 몰고 구름을 타고 천둥과 번개를 뿌리며 달려오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선을 행하기 위해서 애쓸 때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한 번도 이런 하나님을 온전하게 의지하며 선한 일을 위해 몸을 던져본 일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목숨을 걸고 행동한 적이 있기 때문에, 25절에서처럼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서 내 깨끗함을 따라서 갚아주셨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영원한 생명을 내어주신 구원자이시며, 심판 중에도 사랑과 긍휼을 잊지 않으시며, 다가올 미래에 상급 주시는 왕이심을 믿고, 마음을 다하고 마음을 합하여 신실하게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주님께만 구원과 통치와 상급이 있다는 것을 노래했던 다윗처럼, 우리의 삶에서도 주님은 동일한 찬양을 받으시기 합당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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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21-02)


블레셋의 거인들을 죽인 다윗의 용사들

사무엘하 21장 15-22절


개인주의가 팽배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갈수록 교회조차 공동체 개념이 희박해지는 현실입니다. 주일 예배만 드리거나, 아예 교회에 몸담지않는 일명 ‘가나안 성도’가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과연 건강한 신앙입니까?

 

블레셋과 싸운 네 용사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먼저 아비새가 블레셋 장수 아스비브놉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한 다윗을 구원합니다. 십브개가 곱에서 블레셋과 전쟁할 때에 역시 거인의 후손인 삽을 죽이고, 엘하난이 가드 사람 골리앗의 아우를 죽입니다. 가드에서 전쟁할 때, 손가락과 발가락이 모두 여섯 개씩인 어떤 거대한 블레셋 장소가 이스라엘을 조롱하기에 다윗의 형 삼마의 아들 요나단이 죽입니다.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15-17)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에게 성령을 주셔서 그 기업의 보증이 되게 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은 현재의 삶에서 성령으로 인해 의와 평강과 기쁨으로 하나님 나라를 누릴 뿐만 아니라 장차 완성될 그 영광스러운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성령께서 이를 확증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면서 주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그 영광스러운 나라가 분명히 완성될 것과 주님이 그 나라까지 우리를 안전하게 인도하실 것을 믿음으로 소망하고 있습니까?

15블레셋 사람이 다시 이스라엘을 치거늘 다윗이 그의 부하들과 함께 내려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더니 다윗이 피곤하매 16거인족의 아들 중에 무게가 삼백 세겔 되는 놋 창을 들고 새 칼을 찬 이스비브놉이 다윗을 죽이려 하므로 17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다윗을 도와 그 블레셋 사람들을 쳐죽이니 그 때에 다윗의 추종자들이 그에게 맹세하여 이르되 왕은 다시 우리와 함께 전장에 나가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등불이 꺼지지 말게 하옵소서 하니라(15-17)

이 본문은 블레셋과의 전투들에 대한 모음집으로 다윗과 요압 이외에 다윗의 용사들이 불레셋과 싸운 이야기들을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여기서는 그동안 기록된 다윗과 요압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그동안 언급되지 않은 다윗의 용사들을 소개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다시 쳐들어 왔을 때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다시’라는 표현은 블레셋과 이스라엘 간에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1) 피곤한 다윗(15)

다윗이 사무엘하 5:17-25에서 크게 승리한 뒤 8:12에서 또다시 간략하게 블레셋과의 전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때까지 다윗은 모든 전투에 참전하며 강한 전투력을 보여주었고 모든 전쟁에서 승리하였습니다. 이렇게 블레셋은 다윗이 왕으로 통치하는 기간에도 끊임없이 이스라엘과 전쟁한 것입니다. 블레셋과 전투하던 다윗이 지친 틈을 노리고 거인족인 르바임 사람의 후손인 이스비브놈이 다윗을 죽이겠다고 외쳤습니다.

(2) 무장한 이스비브놉(16)

이스비브놈은 300세겔의 놋 창을 들고 새칼을 들고 있었는데, 300세겔이면 3.5킬로그램 정도되는 큰 것이었고, 새 칼은 철로 만든 칼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블레셋은 이미 철기문명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무기를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거대한 몸집에 위협적인 무기들을 가지고 있고, 그것도 두 개나 들고 있다는 것을 강조함으로 다윗이 매우 큰 위험에 빠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3) 아비새의 승리(17)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에 스루야의 아들이자 요압의 동생인 아비새가 다윗을 도와 그 블레셋 사람을 죽입니다. 그동안 요압이 전쟁하고 공적을 쌓은 것만 기록되었는데, 그의 동생 아비새의 용맹과 업적이 처음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동안 요압의 그늘에 가려 있던 아비새의 업적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 요압에게 집중되었던 군대의 지도력이 아비새에게로 넘어갈 것임을 암시하는 표현입니다. 앞서 거듭 요압의 도에 넘치는 개입과 간섭에 대해 부정적으로 묘사했던 사무엘서 저자의 입장이 여기에도 반영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전쟁 중에 힘이 빠져 위험한 상황에 처한 일이 생기자 다윗의 부하들은 다시는 전쟁터에 나오지 말라고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여기서 맹세를 하며 말했다는 것은 강력하게 요구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다윗을 이스라엘의 등불이라고 표현하는데, 이것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희망이며 생명이라는 뜻으로, 이제 유능한 전사로서의 역할보다는 이스라엘의 통치자로서 그의 존재 자체가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왕정에서는 왕의 생존이 왕국의 운명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이후의 에피소드에서는 다윗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만류하는 모습은 사무엘하 18장에서 압살롬을 치는 전투에 참여하지 말라고 만류한 모습과 유사합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압살롬의 반란이 일어나기 전에 다윗이 나이 들었을 때 일어난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비새가 돕는 것을 통해 다윗 왕국이 이제는 다윗 혼자 구원자로서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부하들이 다윗의 구원자 역할을 함께 담당하고 있으며, 이는 다윗 왕조가 점점 확장되고 정착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다른 용사들(18-22)

우리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죄성과 끊지 못하는 옛 습관을 볼 때 어떤 생각이 듭니까? 또한 자신의 거룩함을 무너뜨리려는 세상의 수많은 유혹을 직면할 때마다 어떤 소망을 품게 됩니까? 우리가 발을 듣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수시로 일어나는 불미스러운 일과 범죄를 목도할 때마다 어떠한 소원을 품게 됩니까? 이와같은 것들로 인해 속으로 탄식하며 장차 주님의 재림으로 이뤄질 우리 몸의 속량과 모든 피조세계의 완전한 회복을 소망하게 되지 않습니까?

18그 후에 다시 블레셋 사람과 곱에서 전쟁할 때에 후사 사람 십브개는 거인족의 아들 중의 삽을 쳐죽였고 19또 다시 블레셋 사람과 곱에서 전쟁할 때에 베들레헴 사람 야레오르김의 아들 엘하난은 가드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죽였는데 그 자의 창 자루는 베틀 채 같았더라 20또 가드에서 전쟁할 때에 그 곳에 키가 큰 자 하나는 손가락과 발가락이 각기 여섯 개씩 모두 스물 네 개가 있는데 그도 거인족의 소생이라 21그가 이스라엘 사람을 능욕하므로 다윗의 형 삼마의 아들 요나단이 그를 죽이니라 22이 네 사람 가드의 거인족의 소생이 다윗의 손과 그의 부하들의 손에 다 넘어졌더라(18-22)

사회는 종종 영웅을 필요로 합니다. 누군가를 영웅으로 만들어서 분위기를 하나로 통합하려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함께 힘을 모아 세워갈 때 공동체는 건강하게 세워집니다. 신앙은 개인주의가 아니라 공동체적 삶 속에서 성숙해짐을 명심해야 합니다.

(1) 후사 사람 십브개의 승리(18)

또 다른 용사 후사 십브개는 곱에서 거인족의 후손인 삽을 죽입니다. 18절과 19절에서 전투 장소가 곱이라고 나오는데 이곳이 어느 곳인지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역대상 20:4에서는 곱을 게셀이라고 말하는데, 게셀은 예루살렘 서쪽에 있는 해안 평야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후사는 베들레헴 남서쪽 약 6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곳입니다.

(2) 엘하난의 승리 이야기(19)

이번에는 엘하난에 대한 소개입니다. 다시 블레셋과 곱에서 전투하게 되었고, 이번에는 베들레헴 사람의 야레오르김의 아들 엘하난이 가드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을 죽였다고 보고합니다.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엘하난이 가드 사람 골리앗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골리앗을 죽인 것은 다윗으로 사무엘상 17:41-54에서 단신으로 나가서 물맷돌로 죽이는 다윗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엘하난이 죽인 사람이 골리앗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대상 20:5에서 ‘야일의 아들 엘하난이 가드 사람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죽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말 번역과 대부분의 영어 번역도 엘하난이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죽였다고 말합니다. 라흐미의 창자루는 베틀 채 같은데 이것은 골리앗이 가지고 있던 창자루의 모양과 동일합니다. 이것은 라흐미의 체격도 골리앗과 비슷하게 엄청난 거구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가장 덩치가 큰 골리앗과 비슷한 체구의 라흐미를 죽인 엘하난은 매우 뛰어난 용사인 것입니다.

(3) 요나단의 승리 이야기(20-21)

마지막 이야기는 요나단이라는 용사의 이야기입니다. 이번에는 블레셋 출신의 거인족 이름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대신 블레셋 사람의 체격이 묘사되는데, 그는 손가락과 발가락이 각각 여섯 개씩 모두 스물네 개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가지고 있으며 키가 큽니다. 고대 사회에서 신체적으로 다른 모습은 강한 호기심과 추측의 대상이 되었는데, 여기서는 손가락과 발가락이 한 개씩 더 있는 것을 용사의 자질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사람도 거인족 출신입니다. 이 가드 사람이 이스라엘을 조롱하였는데, 이것은 골리앗이 전쟁터에서 이스라엘과 여호와를 조롱하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이런 오만한 가드 사람을 죽인 것은 다윗의 형 삼마의 아들 요나단입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 왕조는 다윗 가문의 남자들이 상당한 기여를 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의 누이의 아들들인 요압과 아비새와 비록 죽었지만 아마사와 아사헬도 있습니다.

(4) 네 명의 거인족(22)

이렇게 가드의 거인족 후손들은 다윗과 다윗의 부하들에게 모두 죽었습니다. 이것은 가드의 거인족은 블레셋 부족의 가장 강력한 용사들이었는데, 이들도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다윗과 다윗의 부하들을 이길 수 없었고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이스라엘을 점령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등장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이스라엘을 위해 강력한 블레셋 용사들을 칠 용사들을 세워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도올 용사들을 세워주시고 이스라엘을 지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아론과 미리암을 붙여주시고, 후에 70인 장로를 붙여주시며 이스라엘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도록 돕는 자들을 붙여주신 것처럼, 다윗에게도 이스라엘을 잘 지킬 수 있도록 이들을 붙여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일은 지도자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하는 자들과 힘을 합쳐서 해나가는 것입니다. 만일 다윗 혼자 모든 전쟁을 감당하려고 하였다면, 다윗의 힘이 약해졌을 때 이스라엘은 다시 주변의 적들에게 침략당하고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모든 일을 혼자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주변 사람들과 지혜롭게 협력하며 일을 해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같이 협력하는 사람이 없다면 돕는 자를 보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신앙은 혼자 떠나는 여정이 아닙니다. ‘혼자 가면 빨리 가지만, 같이 가면 멀리 간다’는 말이 있듯이, 신앙생활은 지체들과 함께하는 공동체적 여정입니다. 신앙 공동체 안에서 서로 부대끼면서도, 함께 있을 때에 위로를 주고받을 수 있고, 서로의 좋은 점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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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21-01)


기근을 통해 언약을 확인시키신 하나님

사무엘하 21장 1-14절


기도하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무언가에 쫓기면서 살아갑니다. 기도란 바쁜 일상 중에서, 고난 중에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질문하는 행위입니다. 기도가 없는 신앙은 자신의 중심적인 삶을 살아가므로 자기 편견에 빠지기 쉽습니다. 기도하는 사람과 기도하지 않는 사람을 비교해 보시길 바랍니다.

 

사무엘하 21-24장은 사무엘서의 부록으로 자료들의 시대와 장르가 뒤섞여 있습니다. 본문은 흉년이 3년 동안 지속하였을 때, 다윗이 여호와께 기도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것 때문에 흉년이 발생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이 사올 가문의 사람들을 죽여서 복수하기를 원했으므로, 다윗은 사울의 첩 리스바의 두 아들과 사올의 딸 메랍의 다섯 아들을 붙잡아 기브온 사람들에게 넘겨주어 죽게 했습니다. 그 이후에 비로소 흉년이 그쳤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을 통한 3년 기근(1-3)

우리 모두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무시하고 불순종해 그것을 파기한 당사자였음을 알고 있습니까? 사탄의 권세 아래 종노릇하며 죄의 정욕을 따르던 하나님과 불같은 진노를 피할 수 없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음을 인식하고 있습니까? 만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이와같이 자기 인식하지 못한다면 결코 복음의 참된 의미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이, 즉 자신이 진노하시는 하나님께 심판받아야 할 죄인임을 인식할 때 비로소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의 의미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1다윗의 시대에 해를 거듭하여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2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요 그들은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 이스라엘 족속들이 전에 그들에게 맹세하였거늘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더라 이에 왕이 기브온 사람을 불러 그들에게 물으니라 3다윗이 그들에게 묻되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 하니 4기브온 사람이 그에게 대답하되 사울과 그의 집과 우리 사이의 문제는 은금에 있지 아니하오며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사람을 죽이는 문제도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하니라 왕이 이르되 너희가 말하는 대로 시행하리라 5그들이 왕께 아뢰되 우리를 학살하였고 또 우리를 멸하여 이스라엘 영토 내에 머물지 못하게 하려고 모해한 사람의 6자손 일곱 사람을 우리에게 내주소서 여호와께서 택하신 사울의 고을 기브아에서 우리가 그들을 여호와 앞에서 목 매어 달겠나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내가 내주리라 하니라(1-6)

3년 기근이 덮칩니다. 언약을 깬 기브온 학살 때문임이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 없이는 그 어떤 진멸(헤렘)도 허락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기브온은 학살 책임이 있는 사울 가문에서 일곱 명을 넘겨주는 방안을 제안합니다. 언약준수 의무를 위반할 때는 이스라엘도 예외 없이 심판을 받았습니다.

(1) 흉년과 그 이유(1-2)

다윗 시대에 흉년이 3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형벌입니다(레 26:26). 신명기 19:10에서는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이같이 하면 그의 피가 네게로 돌아가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였고, 신명기 19:13에서는 “무죄한 피를 흘린 죄를 이스라엘에서 제하라 그리하면 네게 복이 있으리라”라고 말한다.사울이 기브온 사람을 죽인 이유는 2절에 나옵니다. 이스라엘 사람과 유다 사람들을 위한 열성 때문에 그들을 죽였다고 말합니다. 기브온 사람은 원래 가나안 종족인 아모리 사람들로 진멸의 대상이었으나 여호수아를 속이고 언약을 맺음으로 이스라엘 안에서 부역하며 지냈습니다. 이런 이유로 기브온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차별을 받아왔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을 좋아하지 않는 것을 알고 사울이 이들을 탄압하고 죽인 것입니다. 이런 설명은 이 문제에 대해 사울이 잘못하였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왕의 결단을 촉구함(3-4)

이유를 안 다윗은 기브온 사람들을 불러 어떻게 하면 사울의 죄에 대한 속죄가 될 수 있을지를 묻습니다. 그리고 원하는 대로 해주면 여호와의 기업을 축복하라고 명합니다. 여기서 다윗이 속죄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신명기 19:13에 언급된 것처럼 죄가 없어야 여호와의 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보상과 피의 복수를 언급하는데, 이들은 사울과 자신들의 문제는 은금으로 보상할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며 자신들이 원하는 것은 피의 복수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자신들에게 아무런 권한이 없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하지 않다면서 자신들의 힘없는 처지를 강조합니다. 이 말을 듣고 다윗은 기브온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피의 복수를 허락해줍니다. 그동안 기브온 사람들은 사회적 약자로서 사울 왕의 기세에 눌려 말도 못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 이들의 억울함을 갚아주시려는 것입니다. 다윗이 피의 복수를 허락하자 이들은 구체적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말합니다.

(3) 일곱 명의 목숨(5-6)

5절에서 사울은 자신들을 학살하고 죽여서 이스라엘 땅에서 살지 못하게 하려고 계획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진멸하려고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울의 모습은 아말렉에 대한 진멸 명령을 어긴 것과 대조를 이룹니다. 그러면서 사울의 아들 일곱 명을 주면 그들을 여호와 앞에서 처형하겠다고 합니다. 여기서 일곱이란 숫자는 사울이 일곱 명을 죽였다는 것이 아니라 살육당한 기브온 사람 전체를 가리키는 상징적인 수입니다. 사울의 고향인 기브아 여호와 앞에서 처형한다는 말은 이 처형이 개인적인 복수가 아니라 공적으로 사울과 사울 집에 대한 종교적이고 제의적인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이런 기브온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줍니다.

 

기브온 사람들의 복수(7-11)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때문에 절망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일만의 선도 없다는 것 때문에 낙망해 본 적이 있습니까? 시편 기자는 “내 영혼아 내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시 42:5, 11; 43:5)라고 고백합니다. 선부 하나님의 품에 있는 독생자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오직 ㄱ분께만 소망이 있습니다. 그분만이 언약의 성취자가 되시며 은혜의 중보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7그러나 다윗과 사울의 아들 요나단 사이에 서로 여호와를 두고 맹세한 것이 있으므로 왕이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아끼고 8왕이 이에 아야의 딸 리스바에게서 난 자 곧 사울의 두 아들 알모니와 므비보셋과 사울의 딸 메랍에게서 난 자 곧 므홀랏 사람 바르실래의 아들 아드리엘의 다섯 아들을 붙잡아 9그들을 기브온 사람의 손에 넘기니 기브온 사람이 그들을 산 위에서 여호와 앞에 목 매어 달매 그들 일곱 사람이 동시에 죽으니 죽은 때는 곡식 베는 첫날 곧 보리를 베기 시작하는 때더라 10아야의 딸 리스바가 굵은 베를 가져다가 자기를 위하여 바위 위에 펴고 곡식 베기 시작할 때부터 하늘에서 비가 시체에 쏟아지기까지 그 시체에 낮에는 공중의 새가 앉지 못하게 하고 밤에는 들짐승이 범하지 못하게 한지라 11이에 아야의 딸 사울의 첩 리스바가 행한 일이 다윗에게 알려지매(7-11)

다윗은 사울가의 일곱 아들을 목매달아 피흘린 땅을 속죄함으로써 요구를 들어줍니다. 사울 가에 남은 자손은 몇몇 아들들밖에는 없습니다. 다윗의 원형이 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와 맺은 언약에 신실하시려고 친히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저주에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1) 일곱 명 선택(7-8)

다윗은 이들에게 내어줄 사울의 후손 일곱 명을 선택해야 하는데, 일단 므비보셋은 제외합니다. 다윗이 요나단과 여호와 앞에서 맺은 언약이 있기 때문에 사울의 손자이며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은 아꼈다고 설명합니다. 사실 사울의 죄를 감당하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므비보셋이지만, 다윗은 이번에도 요나단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므비보셋은 살려준 것입니다.

(2) 복수(9)

대신에 아야의 딸 리스바가 낳은 아들 둘과 사울의 큰딸 메랍이 낳은 아들 다섯을 붙잡아 기브온 사람들에게 넘겨줍니다. 여기서 리스바는 사무엘하 3:7에서 사울의 첩으로 소개됩니다. 그는 아브넬과 통간하였고 그 일로 이스보셋과 아브넬 사이가 벌어지게 된 원인을 제공한 인물입니다. 메랍은 처음에 다윗과 결혼시키려고 했던 사울의 큰딸로 첩의 아들들과 딸의 아들들까지 잡아들인 것은 사울 집 아들들이 다 죽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아들은 역대상 8:33에 따르면 네 명인데 이들 중 세 명은 블레셋 전투에서 사울과 함께 죽었고 이스보셋은 다윗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게 됩니다. 그리고 사울의 딸이며 다윗의 아내 미갈은 자식이 없습니었다. 따라서 기브온 사람의 일로 인해 다윗 왕국에서 살아남은 사울 가문의 남자는 므비보셋과 그의 자식들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분별한 요나단의 선견지명이 자신의 자식을 여러 번 살린 것입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일곱 명의 사울의 자손을 기브아에 있는 산에서 공식적으로 처형합니다. 우리말에서는 ‘목매달았다’고 처형 방식을 말하고 있지만, 동사 ‘야카’는 정확하게 어떤 방식으로 처형하였는지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습니다. 목을 매었다거나 팔다리를 잘랐다거나 던져 떨어뜨렸다거나 하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사울의 잘못을 후손들이 책임지는 것에 대해 현대적인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신명기 24:16에 따르면 아버지의 죄 때문에 아들을 죽이면 안 되고 아들의 죄 때문에 아버지를 죽이면 안 된다고 하여 연좌제를 금지합니다. 하지만 사울의 경우는 왕으로서 보호해야 할 약자를 집단적으로 죽인 것에 대해 공적으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왕이 범죄를 저지를 때 왕과 왕의 가족은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에 비해서 더 엄한 제재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경우도 하나님께서 다윗의 범죄에 대하여 너와 네 집에 재앙을 내릴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화자는 사울의 후손들이 죽은 때가 추수의 시작 즉, 보리 추수를 시작하는 시기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3) 리스바(10-11)

아야의 딸 리스바는 굵은 베를 가져다 바위 위에 펴 놓고 새나 짐승이 시체를 뜯어 먹지 먹지 못하도록 밤낮으로 지켰습니다. 시체가 새와 짐승에게 방치되는 것은 커다란 수치이고 형벌인데. 이들은 심판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처형 장소에 방치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도 처벌의 연장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리스바가 시체 위에 굵은 베로 만든 천을 덮어 새와 짐승의 눈에 보이지 않게 하고 그 곁을 지키며 짐승들의 접근을 막은 것입니다. 보리를 베기 시작한 4월부터 우기가 시작되는 겨울인 11월 정도까지 오랫동안 곁에서 시체들을 보호하였습니다. 이런 리스바의 정성스러운 행동이 다윗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다윗은 그녀의 행동에 감동하여 사울 집안의 장례를 제대로 치러주기로 결정합니다.

 

사울 가문의 장례를 치름(12-14)

하나님의 언약 앞에 믿음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혹시 자신의 삶이 무너져 도저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수치스러운 모습이라고 생각해 절망하고 있습니까? 죄를 지은 아담이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그분의 낯을 피해 동산 나무에 숨은 것처럼 우리도 자신을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름으로 그분을 찾는 자에게 반드시 그리스도로 인한 완전한 의를 선물로 주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속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 의의 성취자이신 예수님을 붙잡으시길 바랍니다.

12다윗이 가서 사울의 뼈와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를 길르앗 야베스 사람에게서 가져가니 이는 전에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을 길보아에서 죽여 블레셋 사람들이 벧산 거리에 매단 것을 그들이 가만히 가져온 것이라 13다윗이 그 곳에서 사울의 뼈와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를 가지고 올라오매 사람들이 그 달려 죽은 자들의 뼈를 거두어다가 14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서 그의 아버지 기스의 묘에 장사하되 모두 왕의 명령을 따라 행하니라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니라(12-14)

다윗은 리스바가 두 아들의 시신을 지키기 위해 밤낮으로 고생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 아버지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않게”(삼상 24:21-22) 하겠다는 요나단과의 약속을 기억하고, 사울과 요나단의 뼈를 가족묘에 장사해줍니다. 냉정한 심판과 함께 은혜의 약속도 행한 것입니다.

(1) 죽은 자들의 뼈(12-13)

다윗은 우선 길르앗 야베스에 묻혀있던 요나단과 사울의 뼈를 가지고 사울의 고향인 기브아로 온다. 요나단과 사울은 전쟁터에서 죽은 뒤에 불레셋 사람들이 그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 매달아 놓있었는데,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몰래 사울과 요나단의 시체를 가져다 화장한 뒤 길르앗 야베스에 묻어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다윗은 처형당한 일곱 명의 시신도 모두 거두어 사울과 요나단의 뼈와 함께 가족묘인 베냐민 땅 셀라에 있는 기스의 묘에 안장합니다.

(2) 흉년이 그침(14)

이렇게 사울의 가문이 저지른 죄가 이스라엘 가운데 속가 되었고, 그 후에야 하나님께서 땅을 위한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곡식들이 풍성하게 나도록 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사는 땅에서 약자라고 함부로 살육하고 확대하는 것에 대해 죄를 물으시고 그들이 억울함을 부르짖을 때 들으시며 그 억울함을 해결하지 않는 공동체에게 책임을 물으시는 분입니다. 기브온 사람들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 기근을 내리신 것은 기브온 사람을 죽인 사울만 죄인이 아니라 기브온 사람을 혐오하고 죽이도록 부추긴 이스라엘 백성 모두의 죄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사회에 살고 있는 약자들을 혐오하고 함부로 대하는 것에 대해 그렇게 행한 사람뿐만 아니라 그런 행동을 방치하거나 옆에서 동조한 사람에게도 책임을 물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언약 파괴의 결과는 참담합니다. 3년 기근과 일곱 명의 목숨을 사울의 죄를 다윗 시대가 감당했습니다.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자기 죄의 결과는 아닐지라도, 자신이 누린 편안함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혹시 내가 누군가에게 고통을 안겨준 것은 없는지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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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20-02)


위기 때에 있어야 할 지혜

사무엘하 20장 14-26절


세상은 힘을 숭상하는 자들의 놀이터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는 대로 다 되었다면 공멸하였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세상이 유지되어온 것은 힘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가 세상을 살리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주권자이심을 믿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맑은 날에는 우산의 필요성은 잘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평소에는 지혜의 필요성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 지혜는 그 힘을 발휘해서 많은 사람들을 살립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킨 세바를 잡기 위해 아마사에게 유다 사람들을 모아 군대를 소집하라고 명령하지만, 이것이 지체되자 아비새에게 세바를 잡으라고 다시 명령합니다. 아비새와 함께 기브아에서 아마서를 만난 요압은 아마사를 만나자 인사하는 척하며 아마사를 죽입니다. 그리고 군권을 장악한 요압은 세바를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그 사이에 세바는 온 이스라엘을 다니며 군사를 모아서 아벨 성읍에 진을 치게 됩니다.

 

요압이 아벨 성을 파괴하려고 함(14-15)

하나님꼐서는 충성된 일꾼을 세워서 교회를 지키십니다. 참된 성도라면 교회의 어려움을 수수방관해서는 안 됩니다. 그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애끓는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고 애통 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자가 참된 일꾼입니다.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의 고통을 보고 통곡하며 부르짖은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14세바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 두루 다녀서 아벨과 벧마아가와 베림 온 땅에 이르니 그 무리도 다 모여 그를 따르더라 15이에 그들이 벧마아가 아벨로 가서 세바를 에우고 그 성읍을 향한 지역 언덕 위에 토성을 쌓고 요압과 함께 한 모든 백성이 성벽을 쳐서 헐고자 하더니(14-15)

세바가 아벨과 벧마아가에 있는 성읍에 들어가 숨고 성문을 닫자 요압은 토성을 쌓아 성벽을 하려고 합니다. 그 성읍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반란군을 진압하여 다시 옛 세력으로 회복하려는 관심뿐입니다. 주님을 위한 일이라고 다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진화를 물으십니다.

(1) 세바 반란군의 동향(14)

요압이 개인적인 욕망을 위해 아마사를 죽이며 시간을 보내는 사이 세바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 지역 가운데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아벨과 벧마아가와 베림 온 땅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요압은 세바를 쫓아 아벨로 갑니다. 여기부터 세바를 상대하는 인물은 다윗이 임명한 아비새가 아닌 요압으로, 그는 아마사를 죽이고 동생 아비새를 대신하여 다윗 군대의 군권을 손에 쥔 것을 보입니다. 아벨은 홀레 호수에서 북쪽으로 약 20km 떨어진 성읍으로 여겨집니다. 벧마아가는 아람에 속한 마아가 왕국의 도시이면서 아벨과 매우 가까이 있었을 것입니다. 흔히 아벨 벧마아가로 두 성읍을 붙여서 부르기도 헸습니다(20:15; 왕상 15:20; 왕하 15:29). 베림은 한 지역의 이름일 것입니다. 이 지역 역시 아벨 주변일 것으로 추측되나,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2) 요압의 포위(15)

세바가 어떤 의도로 아벨 성으로 들어갔으며 아벨 사람들이 세바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합니다. 여기에 이르렸을 때는 사람들이 이미 상당수 모여서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요압의 군대는 아벨 벧마아가에서 세바르 가두고 성을 행햐 해자를 메우는 토성을 쌓았습니다. 요압과 함께 있는 모든 군사가 토성을 이용해 해자를 넘어가, 성벽을 쳐서 무너뜨리려 했습니다. 그는 세바를 잡기 위해 이스라엘 성 하나를 완전히 파괴하려고 한 것입니다.

 

아벨의 지혜로운 여인의 연설(16-19)

지혜의 말씀으로 세우시고 보호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의 검을 통해 교회를 수호하고 악한 세력을 무너뜨리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회를 세워 나가야 합니다. 교회는 진리의 말씀에서 떠나 세속적 가르침을 따를 때 무너집니다. 각종 이단이 교회 안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피차 치열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며 교회를 세워 나가야 합니다.

16그 성읍에서 지혜로운 여인 한 사람이 외쳐 이르되 들을지어다 들을지어다 청하건대 너희는 요압에게 이르기를 이리로 가까이 오라 내가 네게 말하려 하노라 한다 하라 17요압이 그 여인에게 가까이 가니 여인이 이르되 당신이 요압이니이까 하니 대답하되 그러하다 하니라 여인이 그에게 이르되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하니 대답하되 내가 들으리라 하니라 18여인이 말하여 이르되 옛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아벨에게 가서 물을 것이라 하고 그 일을 끝내었나이다 19나는 이스라엘의 화평하고 충성된 자 중 하나이거늘 당신이 이스라엘 가운데 어머니 같은 성을 멸하고자 하시는도다 어찌하여 당신이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고자 하시나이까 하니(16-19)

요압의 무자비한 계획에 한 지혜로운 여인은 부드럽게 항거합니다. 자기 목적만 보고 밀어붙이는 요압의 혐의 정치가 여호와의 유업을 간직하고 평화를 갈망하는 한 무명 어머니의 목소리 앞에서 꺾입니다. 평화와 하나님의 유업을 짓밟는 세력에게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 것입니다.

(1) 요압과 만난 지혜로운 여인(16-17)

이렇게 아벨 성이 파괴될 위험에 처하게 되자 이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한 인물이 성읍을 대표하는 협상가로 등장합니다. 그 사람은 ‘지혜로운 여인’으로 표현된 한 이름 없는 여성입니다. 이 표현은 드고아의 지혜로운 여인과 동일한 표현입니다. 이 여인은 성읍에서 자신의 말을 들으라고 반복적으로 소리를 치며 요압에게 자신의 말을 듣기 위해 가까이 오라고 요청합니다. 이 모습은 잠언 8:6에서 지혜가 길 가의 높은 곳과 네거리에서 성문 결과 문 어귀와 여러 출입문에서 사람들을 부르며 자신의 말을 ‘들으라’고 외치는 것과 유사합니다. 그리고 요압은 이 지혜로운 여인의 외침을 듣고 그녀의 말을 따라 그녀에게로 다가갑니다. 아마도 지혜로운 여인은 성벽 위에서 외치고 있었고, 요압은 그녀의 말을 듣기 위해 성벽으로 다가간 것입니다.

(2) 지혜로운 여인의 질문(18-19)

이렇게 요압을 가까이 오게 한 지혜로운 여인은 자신을 ‘당신의 여종’으로 매우 겸손하게 표현하며 부드러운 말로 협상을 시작합니다. 이것은 아비가일이 다윗과 협상하기 위해 자신을 ‘여종’이라고 표현한 것과 유사합니다(삼상 25:24). 하지만 부드러운 시작과 달리 그녀의 말은 매우 논쟁적이며 훈계조입니다. 아벨의 여인은 네 가지 이유로 아벨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데, 첫째 아벨이 유서 깊은 지혜의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아벨의 지혜로운 여인은 ‘아벨에게 가서 물을 것이라’라는 속담으로 말을 시작합니다. 아벨이 옛날부터 지혜 전이 있는 도시로 이곳에 지혜로운 조언을 듣기 위해 많이들 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끝내었다는 말은 그곳에서 조언을 구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즉, 아벨이란 도시는 지혜가 매우 깊고 풍부하고 유용하며 이스라엘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여 아벨을 공격하는 것은 잘못임을 일깨웁니다. 둘째로, 자신은 충성되고 평화롭게 이스라엘의 통치를 받는 백성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현재 다윗 왕권을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천명한 것으로 다윗 왕권을 지지하는 자신들을 죽이는 것이 정당한지를 간접적으로 물은 것입니다. 셋째로, 이스라엘 중에 어머니 같은 성음을 파괴하려는지 묻습니다. ‘어머니 같은 성읍’은 ‘성읍, 즉 이스라엘 중에 어머니’라는 뜻으로 이것은 아벨이 이스라엘의 어머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어머니’로 불린 사람은 사사 드보라가 유일한데, 그녀는 선지자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신앙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을 올바로 재판하였으며, 또한 이스라엘을 적의 손에서 구원해낸 사사입니다. 드보라에게 와서 재판을 받았던 것처럼 문제가 생기면 아벨에 와서 물어보아 해결 받고 갔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어머니라는 것은 이스라엘을 지혜로 교육하고 조언하는 역할을 의미합니다. 넷째로, 아벨은 ‘여호와의 기업’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기업이라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에게 그곳에 살도록 주신 곳이므로 함부로 파괴하거나 빼앗거나 팔거나 해서는안 되는 장소다. 아벨의 지혜로운 여인은 아벨을 파괴하는 것은 여호와의 율법을 어기는 행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녀의 말은 여호와의 율법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직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것에만 골몰하는 요압에게 그의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직언한 것입니다.

 

세바의 죽음(20-22)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통해 세상의 핍박과 교회의 타락을 막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핍박과 어려움을 이겨 내야 합니다. 쭉 성경을 품에 안고 순교의 길을 걸었던 신앙의 선배들을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말씀의 능력이 세상을 이깁니다. 지혜로운 여인은 요압과의 담판에서 요압의 행동이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려는 행동이라고 호소함으로써 요압을 물러나게 만듭니다.

20요압이 대답하여 이르되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다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다 삼키거나 멸하거나 하려 함이 아니니 21그 일이 그러한 것이 아니니라 에브라임 산지 사람 비그리의 아들 그의 이름을 세바라 하는 자가 손을 들어 왕 다윗을 대적하였나니 너희가 그만 내주면 내가 이 성벽에서 떠나가리라 하니라 여인이 요압에게 이르되 그의 머리를 성벽에서 당신에게 내어던지리이다 하고 22이에 여인이 그의 지혜를 가지고 모든 백성에게 나아가매 그들이 비그리의 아들 세바의 머리를 베어 요압에게 던진지라 이에 요압이 나팔을 불매 무리가 흩어져 성읍에서 물러나 각기 장막으로 돌아가고 요압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왕에게 나아가니라(20-22)

세바가 여인의 지혜 앞에서 머리가 베입니다. 허망한 인생입니다. 세바는 다윗과 함께할 ‘분깃이 없다’고 한 자신의 말처럼 스스로 하나님 나라 분깃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유업을 기억하고 소중히 여긴 아벨 성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1) 요압의 대답(20)

요압은 이제야 자신의 행동이 매우 심각한 죄라는 것을 인식하고 세 번이나 반복적으로 그런 의도를 가지고 행동한 것이 아니라고 강하게 부인합니다. 이런 반복적인 부인은 요압이 아벨의 여인의 공격에 당황했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아벨의 지혜로운 여인은 요압의 어리석은 생각을 깨닫게 한 것입니다.

(2) 요압의 제안(21)

요압은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후 단지 세바가 다윗에게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그를 잡으려고 하는 것이니 그만 넘겨주면 떠나겠다고 협상합니다. 무조건 공격하여 다 죽이려던 요압이 세바만 넘겨주면 물러가겠다고 한 발 물러선 것입니다. 압살롬과 아마사도 죽이는 등 다윗의 명령도 무시하던 요압이 아벨의 여인의 권위 있는 말에 승복하고 한발 물러선 것입니다.

(3) 지혜로운 여인의 설득(22)

이에 아벨의 여인은 요압의 협상을 받아들여 세바의 머리를 성벽에서 던져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 여인은 지혜로 성읍 사람들을 설득하였고 마침내 세바의 머리를 베어 요압에게 던져주었습니다. 요압은 성읍에서 물러가고 아벨은 무사하게 됩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아벨의 지혜로운 여인의 모습은 그녀가 아벨의 지도자였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녀는 성읍을 대표하는 지도자로서 요압의 공격의 부당성을 폭로하며 협상하였으며, 요압의 말을 듣고 세바의 머리를 넘겨주는 결정을 내립니다. 그리고 자신의 결정을 관철하기 위해 아벨의 시람들을 설득합니다. 결국 모든 일이 그녀의 결정대로 이루어집니다. 아무도 제지하거나 거부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왕의 심복인 군대장관 요압조차도 그녀의 권위를 인정하고 따르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이스라엘 사회에서 여성 지혜자가 한 지역의 지도자 역할을 하는 전통이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아벨의 지혜로운 여인으로 인해 요압은 어리석은 행동을 멈추었고, 아벨은 전쟁과 살육과 파괴를 피할 수 있었으며, 다윗 왕은 자신의 백성을 학살하였다는 악평을 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다윗은 세바를 제거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제압하고 다시 다윗 왕권을 든든히 세우게 됩니다.

 

조직 개편하는 다윗(23-26)

성도는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은사를 사용해서 교회가 온전히 모습을 갖추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가르치는 은사를 가졌다면 다른 사람이 말씀을 깨닫도록 가르치며 은혜를 나눠야 합니다. 다스리는 은사를 가졌다면 교회가 질서 가운데 움질여 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공동체를 위해 쓰도록 주신 은사이므로 자신이 받은 대로 풍성히 나워야 합니다.

23요압은 이스라엘 온 군대의 지휘관이 되고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의 지휘관이 되고 24아도람은 감역관이 되고 아힐룻의 아들 여호사밧은 사관이 되고 25스와는 서기관이 되고 사독과 아비아달은 제사장이 되고 26야일 사람 이라는 다윗의 대신이 되니라(23-26)

이 단락은 다윗의 신하들의 명단으로 두 명의 군대 지휘관인 요압과 브나야, 두 명의 민간 관리인 아도람과 여호사밧, 그리고 두 명의 제사장인 사독과 아비아달이며 스와는 서기관으로, 이라는 대신으로 언급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요압이 군대 최고 책임자로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아마도 요압은 아마사를 죽이고 세바의 반란을 진압한 뒤 다시 다윗 부대의 군대장관로서 권력을 잡은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 신하들의 명단은 압살롬과 세바의 반란으로 어수선했던 정국이 다시 정상화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다윗 신하의 명단을 끝으로 다윗 왕의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21-24장은 부록으로 다윗이 다스리던 시대에 일어난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을 모아놓은 모음집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시작한 다윗 왕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큰 은혜를 입었지만, 그의 말년은 하나님께서 그와 동행하시는 모습이 거의 나타나지 않고 다윗도 하나님께 의지하는 모습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런 다윗의 모습을 보면서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이 끝까지 신실하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은 사울처럼 왕위에서 내쫓지 않으시고 후계자도 준비해주심으로 다윗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셨습니다. 결국 인간이 의지할 것은 인간의 신실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세바와 요압은 힘으로 모든 것을 이루려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힘의 남용으로 시작된 다윗 왕가의 비극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것은 다른 무자비한 힘이 아니었습니다. 피는 피를 부르고 같은 칼을 부르지만,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신뢰하는 한 여인의 지혜로 하나님의 유접은 보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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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20-01)


다시 일어나는 반란

사무엘하 19장 40절-20장 13절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충신입니까? 우상숭배와 참된 하나님 경배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중심이 누구를 향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권력이 있을 때가 아니라 권력이 없을 때, 혜택이 많을 때가 아니라 희생을 요구할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따라 갈립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을 진압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때, 유다 지파를 자신의 측근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들을 이후 왕국 운영의 중심 세력으로 인정하였습니다. 베냐민 지파를 포함하여 다른 지파들이 권력 구도에서 멀어지게 되자, 세바가 그들을 충동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이때 다윗은 아마사를 반란 진압군의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압이 아마사를 죽인 후, 다윗의 모든 군대를 이끌고 세바를 추격하였습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분쟁(40-43)

성도는 세상 사람들처럼 기득권을 지키며 자기를 높이려는 욕망을 가지지 않도록 경계하고 싸워야 합니다. 먼저 교회에 출석했다고, 직분이 있다고, 많은 헌신을 했다고 해서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 생활한 지 얼마 안 되고, 많은 일에 동참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가볍게 생각하고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기득권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분의 자녀요 그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뿐입니다.

40왕이 길갈로 건너오고 김함도 함께 건너오니 온 유다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의 절반이나 왕과 함께 건너니라 41온 이스라엘 사람이 왕께 나아와 왕께 아뢰되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이 어찌 왕을 도둑하여 왕과 왕의 집안과 왕을 따르는 모든 사람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가게 하였나이까 하매 42모든 유다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대답하되 왕은 우리의 종친인 까닭이라 너희가 어찌 이 일에 대하여 분 내느냐 우리가 왕의 것을 조금이라도 얻어 먹었느냐 왕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이 있느냐 43이스라엘 사람이 유다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는 왕에 대하여 열 몫을 가졌으니 다윗에게 대하여 너희보다 더욱 관계가 있거늘 너희가 어찌 우리를 멸시하여 우리 왕을 모셔 오는 일에 먼저 우리와 의논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나 유다 사람의 말이 이스라엘 사람의 말보다 더 강경하였더라(40-43)

다윗이 전쟁에서 이기자 얼마 전까지 압살롬에게 충성 경쟁하던 자들이 서로 다윗을 왕으로 추대하겠다고 겨룹니다. 유다 지파는 혈육이라고, 열 지파는 수가 많다고 하여 자신들이 자격 있다고 주장합니다. 참 꼴불견입니다. 다윗이나 하나님보다 자기 이익을 더 중시하는 자들입니다.

(1) 다른 지파들의 불만(40-41)

다윗은 이제 무사히 요단강을 건너 백성들이 모여 있는 길갈로 가게 되는데, 이곳에서 갈등이 다시 시작됩니다. 길갈에서 유다 백성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여 다윗을 맞이하였습니다. 하지만 유다 사람들이 다윗을 영접하러 나온 모습을 보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매우 불쾌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다윗에게 유다 지파 사람들이 왕과 왕의 집을 도둑질하여 요단강을 건너도록 했다고 불평합니다. 이것은 유다 사람들이 다윗과 그의 집을 예루살렘으로 모셔오는 데 적극적으로 나선 것에 대해 불만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이 먼저 유다 지파 사람들에게 연락하여 자신을 데리고 가라고 한 것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을 모셔 오기로 의논하는사이에 다윗에게 반역을 일으킨 유다가 다윗을 모셔오는 것을 선전하고, 측근처럼 행동하는 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눈에는 매우 거슬렸던 모양입니다.

(2) 유다 지파의 반박(42)

이에 유다 사람들은 자신들은 왕과 가장 가까운 친족이기 때문에 다윗을 모실 권리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유다 사람들의 말은 19:12에서 다윗이 유다 장로들에게 한 말입니다. 다윗이 유다 사람들을 회유하기 위해 한 말을 유다 사람들은 다윗과의 친밀한 관계를 표시하기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왕에 대한 권한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왕에 대해 열 몫을 가졌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현재 열 지파가 이스라엘로 모였기 때문입니다. 열 지파에는 베냐민 지파가 포함되고 유다 지파에는 시므온 지파가 흡수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3) 유다 지파와 다른 지파들 사이의 갈등(43)

이스라엘 왕국에서 열 지파가 모여 있는 이스라엘의 영향력이 더 강하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유다가 독단적으로 행동한 것을 자신들을 무시하는 행위로 간주하였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자신들의 혈연관계를 더욱 주장하였고, 이런 유다의 주장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배신감을 느끼게 됩니다. 결국 이 논쟁으로 분노를 느낀 이스라엘 사람들이 세바를 중심으로 다시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서로의 권리를 주장하며 싸우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은 원래 하나님과의 언약을 중심으로 열두 지파가 모인 공동체였으며, 하나님의 언약 아래 바로 서 있을 때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서로 한 형제로 여길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무너지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공동체 의식이 사라진 곳에는 서로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적들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세바의 선동으로 사람이 떠나감(1-3)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형제를 비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기 위해 교회의 정당한 권위에 불순종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도는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바른 말씀이 선포되고 행정이 정당하게 운영되기만 한다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다 할지라도 직분 맡은 자를 함부로 비방하지 않아야 합니다.

1마침 거기에 불량배 하나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세바인데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이었더라 그가 나팔을 불며 이르되 우리는 다윗과 나눌 분깃이 없으며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우리에게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매 2이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따르기를 그치고 올라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따르나 유다 사람들은 그들의 왕과 합하여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따르니라 3다윗이 예루살렘 본궁에 이르러 전에 머물러 왕궁을 지키게 한 후궁 열 명을 잡아 별실에 가두고 먹을 것만 주고 그들에게 관계하지 아니하니 그들이 죽는 날까지 갇혀서 생과부로 지내니라(1-3)

세바가 북쪽 지파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킵니다. 유다 지파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듯하니 다시 다윗에게 반기를 든 것입니다. 충성심은 없고, 오직 자신들만의 이익을 대변하는 열방의 왕을 원하는 자들일 뿐이었습니다.

(1) 세바의 선동(1)

이스라엘 사람들과 유다 사람들이 누가 다윗 왕국에서 더 큰 권리를 갖는가 하는 문제로 분쟁이 일어났을 때, 유다 사람들이 주장을 강하게 펼치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상당히 불쾌해 하였습니다. 이때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가 이런 혼란을 이용하여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를 불량배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다윗의 입장에서 다윗을 대적하는 인물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만을 하나님 나라인 이스라엘 왕으로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세바는 나팔을 불어 다윗에게 맞설 군대를 소집합니다. 그리고 연설을 통해 우리가 다윗과 나눌 분짓도 그에게서 받을 유산도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이제 자신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에게 각자의 장막으로 돌아가라고 연설합니다. 여기서 각자의 장막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더 이상 다윗을 따르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런 세바의 선동에 불만에 가득 차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에게서 돌아서서 세바의 반란에 동참하기로 결심합니다.

(2) 분열된 왕국(2)

이런 상황에서 오직 유다 지파만 다윗을 따랐고, 결국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 모습은 다윗이 처음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모습과 대조를 이룹니다. 다윗은 처음에 헤브론에서 유다 사람의 지지를 받아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넬과 이스보셋의 죽음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고, 유다와 이스라엘 사람들의 지지 속에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였습니다. 하지만 압살롬의 반란 이후 상황은 바뀌어 다윗이 처음 왕이 되던 상황으로 돌아가 오직 유다 사람의 지지만을 받으며 예루살렘으로 쓸쓸하게 돌아왔습니다. 다윗이 이런 결과를 얻게 된 이유는 다시 왕으로 복귀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의견을 묻고 도우심을 구하는 과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분명히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반란군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압살롬의 죽음 이후 또다시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수완을 이용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려 하였고, 일부 성공을 거두는 듯하였습니다. 하지만 정치적 수완은 이해관계가 부딪히자 금방 한계를 드러내고 또다시 갈등과 반란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정치적 수완과 인간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이런 한계에 부딪히게 됩니다.

(3) 다윗의 후궁들(3)

다윗이 예루살렘에 들어와 가장 먼저 한 일은 압살롬에게 강간당한 열 명의 첩을 감시가 붙은 집 즉 감옥같은 곳에 감금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녀들을 압살롬의 반란에 동조한 죄인들처럼 다루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녀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서 기본적인 부양은 하였지만 더 이상 아내로 여기지 않았고, 그들과 관계도 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가두어 두었습니다. 이런 모습에 대해 그녀들이 ‘생과부’가 되었다고 표현합니다. 이 표현은 구약에서 여기에 단 한번 나오는데 생과부는 다윗이 그녀들을 가혹하게 대했다는 것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그녀들의 모습은 암논에게 강간당하고 압살롬의 집에서 외롭게 지내던 다말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남성들의 힘과 폭력에 의해 또 죄 없는 여성들이 희생당하게 됩니다. 다윗이 여성에게 매정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이유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압살롬의 군대장관으로 반란에 앞장섰던 아마사까지 군대장관으로 등용한 반면 힘없는 여성들은 죄인 취급하며 가혹하게 대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다윗의 모습을 보면 그가 하나님의 인정받은 인물이라 해도 가부장적인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지는 못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다윗의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은 즐겁고 행복하고 축복이 넘치는 귀환이 아니었습니다.

 

군대를 파견하는 다윗(4-10)

 

교회가 지금 말씀을 올바로 가르치고 있습니까? 깨끗한 삶을 통해 세상의 불의를 드러내고 있습니까? 교회는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등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명백히 선포해서 의와 불의를 드러내야 합니다. 빛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세상에 거룩한 삶이 무엇인지 보여줘야 합니다. 만약 세상이 행하는 죄에 은근슬쩍 동참하며 살아가고 있다면 즉시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그것을 책망해야 합니다(엡 5:11). 모든 것을 아시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하나님을 마땅히 두려워 해야 합니다(딤후 4:1).

4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위하여 삼 일 내로 유다 사람을 큰 소리로 불러 모으고 너도 여기 있으라 하니라 5아마사가 유다 사람을 모으러 가더니 왕이 정한 기일에 지체된지라 6다윗이 이에 아비새에게 이르되 이제 비그리의 아들 세바가 압살롬보다 우리를 더 해하리니 너는 네 주의 부하들을 데리고 그의 뒤를 쫓아가라 그가 견고한 성읍에 들어가 우리들을 피할까 염려하노라 하매 7요압을 따르는 자들과 그렛 사람들과 블렛 사람들과 모든 용사들이 다 아비새를 따라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뒤쫓으려고 예루살렘에서 나와 8기브온 큰 바위 곁에 이르매 아마사가 맞으러 오니 그 때에 요압이 군복을 입고 띠를 띠고 칼집에 꽂은 칼을 허리에 맸는데 그가 나아갈 때에 칼이 빠져 떨어졌더라 9요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내 형은 평안하냐 하며 오른손으로 아마사의 수염을 잡고 그와 입을 맞추려는 체하매 10아마사가 요압의 손에 있는 칼은 주의하지 아니한지라 요압이 칼로 그의 배를 찌르매 그의 창자가 땅에 쏟아지니 그를 다시 치지 아니하여도 죽으니라(4-10a)

아마사에게 군대장관 자리를 빼앗기고 전쟁의 지휘권도 동생에게 빼앗긴 요압은 다윗의 신임을 얻는 아마사를 비겁하게 속여서 죽입니다. 그에게 관심은 왕도 왕의 나라도 아닙니다. 자신의 안위와 권력뿐입니다. 세바가 외부의 떠들썩한 반란자라면, 요압은 내부의 은밀한 반란자였습니다.

(1) 진압군 조직(4-5)

예루살렘에 돌아온 다윗은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합니다. 일단 아마사에게 유다 사람들 중에서 자원자들을 모아 자원군을 만들라고 지시합니다. 다윗은 아마사를 자신의 군대장관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준 것입니다. 하지만 시일이 지체되자 자신의 군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합니다.

(2) 아비새의 지원 부대(6-7)

그는 아비새를 불러 군대를 이끌고 세바를 추적하라고 명령합니다. 출정이 더 늦어지면 세바가 든든한 성읍들을 점령하게 되고, 그러면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반란을 빠른 시간 내에 제압해야 한다는 이런 계획은 아히도벨의 계획을 기억나게 합니다. 다윗이 요압이 아니라 아비새를 부른 것을 보면 요압의 지위가 강등되어 아비새 밑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은 최고 군대장관의 지위는 아마사에게 주었고, 요압의 군대는 아비새의 손에 주었습니다. 아마도 다윗은 후에 요압이 명령에 불복하고 압살롬을 죽인 것을알고 강등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7절에서 아비새는 요압이 이끄는 정규군과 다윗의 친위 용병부대인 그렛 사람들과 블렛 사람들을 이끌고 세바를 쫓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출발합니다.

(3) 아마사를 죽인 요압(8-10a)

아비새가 이끄는 군대가 출발해서 기브온 근처에 있는 큰 바위에 이르자 그곳에서 아마스를 만나게 됩니다. 아마스는 아비새가 군대를 이끌고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에서 자신이 모은 군대와 함께 합류하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사를 본 요압은 허리에 찬 칼을 떨어뜨리고 아마사에게 다가가 인사하기 위해 입을 맞추는 체하면서 손에 들고 있던 칼로 아마사의 배를 찔러 죽입니다. 요압의 칼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본문은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요압이 아마사를 죽인 장면은 사사기 3장에서 에훗이 에글론 왕을 죽인 장면과 유사합니다. 이런 유사성을 통해 아마사가 눈치 채지 못하게 요압이 왼손에 단검을 숨기고 있다가 왼손으로 단번에 아마사의 배를 찔러 죽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요압의 행동은 그가 아마사를 우발적으로 죽인 것이 아니라 죽일 기회를 엿보다 계획적으로 죽인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평화를 말하며 인사하는 척하다가 죽인 것은 아브넬을 죽일 때와 유사합니다. 요압은 자신과 적으로 싸웠던 아마사 때문에 군대장관에서 밀려난 것에 원한을 품고 아마사를 죽인 것이고, 이것은 다윗에 대한 항의의 행동입니다. 이렇게 요압은 점점 더 다윗이 통제하기 어려운 인물이 되어가고 있으며 다윗의 리더십에 치명적인 흠집을 내고 있습니다.

 

선동으로 재기하는 요압(10b-13)

 

성도는 고난을 받는 일이 생길지라도 불의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특히나 교회 안의 범죄라면 죄의 경중에 따라 공정하게 치리하도록 교회에 요구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꿩 잡는게 매’라는 식의 사고방식은, 하나님께서 세운 말씀의 권위를 멸시하는 행동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따라 불의를 책망하고 공의로운 판단을 시행하도록 해야 합니다.

 

10…요압과 그의 동생 아비새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뒤쫓을새 11요압의 청년 중 하나가 아마사 곁에 서서 이르되 요압을 좋아하는 자가 누구이며 요압을 따라 다윗을 위하는 자는 누구냐 하니 12아마사가 길 가운데 피 속에 놓여 있는지라 그 청년이 모든 백성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아마사를 큰길에서부터 밭으로 옮겼으나 거기에 이르는 자도 다 멈추어 서는 것을 보고 옷을 그 위에 덮으니라 13아마사를 큰길에서 옮겨가매 사람들이 다 요압을 따라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뒤쫓아가니라(10b-13)

 

요압의 전형적인 비열한 수법(3:27: 삿 4:19-22)으로 아마사를 제거합니다. 아브넬을 죽이고 압살롬을 죽일 때처럼 자신의 야망을 거스르는 자를 제거하는 데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고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세바가 외부의 반란자라면, 요압은 내부의 은밀한 반란자였습니다.

(1) 병사의 선동(10b-13)

요압은 아마사를 죽인 후 부대를 끌고 자신이 주도하여 세바를 쫓으러 출발합니다. 본문에서 요압과 그의 동생 아비새라고 표현한 것은 이제 부대의 주도권이 요압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압은 자신의 부하 하나를 아마사의 시체 곁에 남겨두고 아마사의 시체를 보고 놀라며 주저하는 유다의 군사들에게 요압 자신을 따르라고 선동합니다. 이미 아마사는 죽었기 때문에 이제는 요압을 따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아마사는 유다 군대의 지휘관이었기 때문에 유다의 군사들은 아마사의 죽음을 보고 두렵고 혼돈에 빠졌을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본 요압의 부하는 아마사의 시체에 옷을 덮고 길에서 옮겨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2) 요압의 재기(12-13)

이렇게 요압은 또다시 다윗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살려준 인물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가차 없이 죽이고 자신의 권력을 다시 회복하였습니다. 한편으로 아마사의 비참한 죽음은 그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다윗 편에 서지 않고 압살롬 편에 서서 다윗을 대적한 하나님의 벌이었습니다.

요압은 다윗 왕국에서 다윗의 반대자를 심판하는 하나님의 칼 역할을 하였지만, 정작 요압 자신은 철저하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였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욕심을 위해 움직이는 요압의 손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자를 심판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심판 도구로 사용된 요압도 후에 다윗의 유언에 의해 솔로몬의 손에 죽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분열과 다툼, 은밀한 죄악의 위험에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지키십니다. 유다 지파와 북쪽 열 지파 모두 다윗이나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보다 그가 차지한 권력을 더 동경했습니다. 결국 충성 경쟁에서 밀리자 북쪽 지파들은 세바와 반란을 일으킵니다. 요압은 어떻습니까? 전쟁 공로를 앞세워 교만해졌고, 그 권한을 사적 복수에 악용한 내부 반란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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