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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5-01)

 


욕심으로 반란을 일으킨 압살롬

사무엘하 15장 1-12절


 

공동체를 세우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반대로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입니다. 구성원들이 함께 깨어 공동체를 지키지 않으면 거짓과 미혹의 영은 순식간에 모두를 어둠에 빠트립니다. 공동체를 무너지게 하는 요인들에는 어떤 것이 있으며 어떤 점을 주의해야 합니까?

 

압살롬의 반란이 시작되었습니다. 압살롬은 오십 명의 친위부대를 조직한 뒤에 그 사람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특히 압살롬은 다윗 왕에게 재판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을 가로채서 자신이 재판하고, 다윗 왕이 백성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았습니다. 4년 동안 이렇게 하면서 백성들의 지지를 확보한 후에, 다윗의 허락을 받아 헤브론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반란을 일으키니, 많은 사람이 모이는데, 아히도벨도 합류하였습니다.

 

반역을 위한 준비 기간(1-6)

하나님의 공동체인 교회를 통해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인정받으려 하는 자를 경계해야 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심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자아 성취의 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뜻을 이뤄 가는 그분의 몸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 하는 자를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한 자들을 지도자로 세우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1그 후에 압살롬이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고 호위병 오십 명을 그 앞에 세우니라 2압살롬이 일찍이 일어나 성문 길 곁에 서서 어떤 사람이든지 송사가 있어 왕에게 재판을 청하러 올 때에 그 사람을 불러 이르되 너는 어느 성읍 사람이냐 하니 그 사람의 대답이 종은 이스라엘 아무 지파에 속하였나이다 하면 3압살롬이 그에게 이르기를 보라 네 일이 옳고 바르다마는 네 송사를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하셨다 하고 4또 압살롬이 이르기를 내가 이 땅에서 재판관이 되고 누구든지 송사나 재판할 일이 있어 내게로 오는 자에게 내가 정의 베풀기를 원하노라 하고 5사람이 가까이 와서 그에게 절하려 하면 압살롬이 손을 펴서 그 사람을 붙들고 그에게 입을 맞추니 6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마다 압살롬의 행함이 이와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압살롬이 훔치니라(1-6)

 

압살롬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위해 철저한 반역을 준비했습니다. 그는 백성들의 애로사항을 잘 들어 주며, 만일 자기가 왕이 되어 재판장이 되면 이스라엘에게 공의를 베풀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심지어 자신 앞에 엎드려 경의를 표하는 자들의 손을 잡아 주고 입을 맞추기까지 하며 환심을 샀습니다.

 

(1) 친위 부대 조직(1)

압살롬은 다윗과 만나고 나서 왕권을 차지하기 위한 수순을 밟기 시작합니다. 비록 형식적인 만남이었고 자간의 관계를 회복한 것은 아니지만, 대외적으로 왕으로부터 사면을 받고 왕자의 지위를 회복한 것으로 보이게 행동합니다. 장자 암논이 죽었기에 그가 왕위 계승 서열 1위였습니다. 압살롬은 자신에게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것과 왕자로서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병거와 말들과 50명의 호위병을 앞세워 어디를 갈 때든지 대동하고 다녔습니다. 아버지의 지지를 받지 못할 것을 알았기에 백성의 지지를 받아 반역을 도모하려고 마음먹은 것입니다.

 

(2) 다윗에 대한 흑색선전(2-3)

압살롬이 반역을 위해 준비한 또 한 가지 일은 다윗에게 재판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을 가로채는 것이었습니다. 압살롬은 일찍 일어나 성문 길가에서 서성이다가 왕에게 재판을 요청하러 오는 사람이 있으면 불러 어디 출신이냐고 물어본 뒤에 그 사람이 압살롬에게 대답하면 그 사람의 편을 들면서 다윗 왕은 그의 송사를 들을 사람을 세우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왕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전쟁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백성의 송사를 지혜롭게 재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왕위에 오르자 하나님께 백성들을 잘 재판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다윗이 너무 바빠서 직접 재판할 수 없고 대신 재판할 다른 사람도 세우지 않은 상태라고 말함으로써 다윗이 재판관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암시를 주어 간접적으로 비난한 것입니다. 또 왕에게 가더라도 바빠서 제대로 옳고 그름을 판결할 수 없을 것이란 인상도 줍니다.

 

(3) 백성들의 친구가 된 압살롬(4-6)

이렇게 다윗을 험담한 뒤 4절부터는 자신에 대한 자랑을 시작합니다. 자신을 재판관으로 세우면 사람들이 재판을 받기 위해 올 것이고 자신은 그들에게 정의를 베풀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서 아쉽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에게 당신이 옳다고 말해주어 자기편으로 삼은 뒤, 자신이 왕이 되면 당신이 옳다는 정의로운 판결을 내릴 것인데 왕이 아니어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을 왕으로 지지해달라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압살롬이 백성들에게 한 또 다른 행동이 있습니다. 사람이 가까이 와서 왕자인 그에게 절을 하며 예를 표하려고 하면 손을 뻗어 절을 하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절을 하는 것은 군신 간의 예를 표하는 것으로 압살롬은 이런 행동을 사양하고 대신 친구나 친척들 간에 친밀하게 나누는 인사인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행동을 함으로써 친근감을 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행동을 한 번만 한 것이 아니라 왕에게 재판을 받기 위해서 오는 사람들에게 한결같이 하였고,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압살롬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압살롬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훔친 것입니다.

압살롬에게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만한 조건이 충분했습니다. 첫째, 그의 외모는 아름다웠습니다. 아름다운 외모는 사람들에게서 호감을 얻기에 유리한 조건이었다. 둘째,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송사하러 온 백성들의 편을 들어주고 왕자로서 거만하게 행동하지 않고 매우 친근하고 편안하게 다가갔습니다. 이런 행동들은 매우 계산되고 정치적인 것들이지만, 백성들에게 효과적이었고 결국 많은 사람들이 압살롬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압살롬이 백성들과 끌어안고 입을 맞춘 것처럼 다윗이 돌아온 압살롬을 친근하게 대했다면 압살롬이 다윗을 향해 반역을 일으켰을지 의문입니다.

 

헤브론으로 간 압살롬(7-9)

성도는 경건을 의익의 방도로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경건한 척하며 사람을 속이고 무언가를 얻어내려고 하는 것만큼 가증스러운 것도 없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하는 연기는 언젠가 연기처럼 다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 어떤 위선과 가식도 통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정직한 자에 의해서 세워져야 합니다.

 

7사 년 만에 압살롬이 왕께 아뢰되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이 있사오니 청하건대 내가 헤브론에 가서 그 서원을 이루게 하소서 8당신의 종이 아람 그술에 있을 때에 서원하기를 만일 여호와께서 반드시 나를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내가 여호와를 섬기리이다 하였나이다 9왕이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하니 그가 일어나 헤브론으로 가니라(7-9)

 

자신의 힘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싶은 압살롬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스라엘의 왕 다윗을 속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압살롬이 반역하려는 왕 다윗은 자신을 사랑하는 아버지였습니다. 다윗은 사랑하는 아들의 계략을 전혀 눈치재지 못했습니다.

 

(1) 압살롬의 요청(7-8)

이렇게 압살롬이 백성들의 마음을 훔치면서 예루살렘에서 4년을 지냈고 어느 정도 힘을 얻게 되자 압살롬은 반역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에 들어갑니다. 먼저 다윗에게 헤브론에 가서 자신이 여호와께 서원한 것을 갚겠으니 보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술에 있는 동안 여호와께서 자신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서원하였다고 합니다.

이 서원의 내용에는 이중적 의미가 있는데, 첫째는 자신이 무사히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으니 서원을 갚을 의무가 있으며, 그것은 자신이 헤브론으로 가야 하는 강력한 이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요압이나 드고아 여인의 계획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도우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압살롬은 자신이 돌아온 것이 여호와의 뜻이었다고 다윗을 설득하여 압살롬에 대한 부담과 불안한 마음을 내려놓게 한 것입니다. 이런 압살롬의 설득에 다윗은 평안히 가라는 승낙을 해주었으며, 압살롬은 헤브론으로 향합니다.

 

(2) 다윗의 허락(9)

이번에도 다윗은 암논 때와 마찬가지로 압살롬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에는 암이 목숨을 잃었다면 이번에는 다윗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어리석은 결정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다윗은 자식 문제에 있어서는 여전히 지혜로운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며, 이것이 다윗에게 내려진 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벌하실 때는 소극적인 방법과 적극적인 방법을 모두 사용하십니다. 직접 개입하지 않고 악한 본성과 마음의 욕심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실 때도 있고, 적극적으로 재앙을 내려서 벌하실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후자를 더 두려워하고, 어려움을 만나면 하나님의 벌일지 모른다고 여기며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더 무서운 벌은 우리의 어리석음을 따라 살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때는 자신이 벌을 받고 있다는 사실도 모를 수 있으며, 회개할 기회마저 얻지 못하고 죄의 흐름에 따라 흘러가다 멸망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악한 행동을 하는데 아무 제재가 없다면 혹시 나를 내버리신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할 것입니다. 압살롬이 헤브론으로 간 것은 그곳이 유다 지파의 본거지이자 다윗이 처음 왕권을 얻었던 곳으로 다윗의 후계자로서의 모습을 부각시키기 좋은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헤브론에서 반역을 도모하는 압살롬(10-12)

교회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교회는 말씀에 기초해 나가야 합니다. 압살롬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의 나라만을 생각하며 하나님 나라를 외면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열매인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떠나면 더 이상 하나님 나라와 상관이 없이 세상의 공동체가 되어 버립니다.

 

10이에 압살롬이 정탐을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에 두루 보내 이르기를 너희는 나팔 소리를 듣거든 곧 말하기를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 하라 하니라 11그 때 청함을 받은 이백 명이 압살롬과 함께 예루살렘에서부터 헤브론으로 내려갔으니 그들은 압살롬이 꾸민 그 모든 일을 알지 못하고 그저 따라가기만 한 사람들이라 12제사 드릴 때에 압살롬이 사람을 보내 다윗의 모사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그의 성읍 길로에서 청하여 온지라 반역하는 일이 커가매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지니라(10-12)

 

압살롬은 정탐을 보내 각 지파의 동향을 살피고 200명을 헤브론으로 데리고 가서 나라의 근간을 형성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모사인 아히도벨까지 데려왔습니다. 이처럼 압살롬은 사람들을 의지해서 모든 일을 진행했습니다. 압살롬이 세우려는 나라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사람의 나라였습니다.

 

(1) 선동하는 압살롬(10)

다윗의 허락을 얻은 압살롬은 온 이스라엘에 정탐꾼을 보내어 나팔 소리가 나면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고 외치라고 합니다. 미리 사람들을 심어놓고 언론 플레이를 하여 자신이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온 이스라엘에 재빨리 알리려고 준비한 것입니다.

 

(2) 초청받은 사람들(11)

헤브론으로 가면서 200명의 손님을 데리고 갑니다. 이들은 갈 때는 모르고 갔지만 후에 압살롬을 지지하게 되는데 예루살렘이 아닌 헤브론에서 압살롬의 군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상태에서 압살롬에게 대항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은 이들을 볼모이자 지지 세력으로 삼기 위해 헤브론으로 데리고 간 것입니다.

 

(3) 모여드는 사람들(12)

마지막으로 그는 사람을 보내서 다윗의 참모인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데려옵니다. 표면적으로는 제사에 손님으로 초청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모사로 부리려고 초청한 것입니다. 이에 아히도벨은 압살롬의 편에 서게 됩니다. 그런데 아히도벨은 밧세바의 할아버지이며 다윗과 인척 관계에 있는 사람인데, 왜 다윗을 버리고 압살롬의 편에 섰는지는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아히도벨의 등장으로 압살롬의 반란은 다윗이 밧세바와 간통하고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죽인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드러납니다. 아히도벨이 다윗의 반대편에 선 이유가 아히도벨은 다윗이 자신의 손녀 딸과 간통하고 손녀사위인 우리아를 죽인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은 아닌가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모사까지 얻은 압살롬의 반역이 구체화되었고, 그를 지지하는 백성들도 점점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주께서 피 값을 주고 사신 교회가 분란과 혼란에 빠지는 것은 애통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많은 교회들이 사탄에게 속아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리 사탄의 계략을 분별하고, 거짓과 이간, 분열과 다툼으로부터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말씀 안에서 분별력을 길러야 합니다. 삶의 목적뿐 아니라 그것을 성취하는 방법도 하나님의 뜻에 거스르지 않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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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4-02)


다윗에게 화해하려고 시도하는 압살롬

사무엘하 14장 21-33절


 

결속력이 강한 공동체일수록 지도자의 카리스마가 돋보입니다. 공동체의 일치에 지도자의 역량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도자가 원하는 대로만 작동되면 부작용도 생길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한 요소나 대책은 없겟습니까? 있다면 어떤 것이 필요하겠습니까?

 

암논이 죽은 지 3년 정도가 흐르자 다윗이 압살롬을 그리워하는 줄 안 요압은 드고아의 지혜로운 여인을 불러 왕 앞에서 연극을 하게 합니다. 다윗은 드고아의 여인 이야기가 사실인 줄 알고 살인한 아들의 죄를 용서해 주었고, 드고아의 여인은 이를 이용하여 압살롬을 용서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며 용서가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다윗은 이 모든 계획이 요압에게서 나온 것인 줄 알았지만, 압살롬을 보고 싶은 마음에 못이기는 체하며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부릅니다.

 

압살롬의 예루살렘의 귀환(21-24)

사막을 지나던 낙타와 그 주인이 있었습니다. 추운 밤이 되자 텐트 안에 있는 주인에게 낙타가 춥다면서 텐트에 머리만이라도 집어넣으면 안 되겠느냐고 했습니다. 주인이 허락하자 이번에는 앞다리까지 들어가게 해 달라고 했고, 그것도 허락하자 결국은 낙타가 텐트 안으로 들어와 텐트가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정죄 받아야 할 압살롬의 복권을 허락했지만, 결국 이런 결정 때문에 왕국 전체가 위기를 맞고 맙니다.

 

21왕이 요압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을 허락하였으니 가서 청년 압살롬을 데려오라 하니라 22요압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 왕을 위하여 복을 빌고 요압이 이르되 내 주 왕이여 종의 구함을 왕이 허락하시니 종이 왕 앞에서 은혜 입은 줄을 오늘 아나이다 하고 23요압이 일어나 그술로 가서 압살롬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오니 24왕이 이르되 그를 그의 집으로 물러가게 하여 내 얼굴을 볼 수 없게 하라 하매 압살롬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라(21-24)

 

죄에 대해 임시방편으로 해결하려 하거나 모르는 척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다윗은 압살롬의 귀환을 허락했지만 그를 만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공의를 집행하지 않은 책임을 회피하려 했습니다. 지도자가 임시방편으로 일을 처리하다 보면 나중에 더 안 좋은 결과를 맞게 됩니다.

 

(1) 다윗의 명령(21)

다윗은 드고아 여인의 일이 요압의 계획이었다는 사실을 안 후 요압에게 어떤 책망이나 언급도 하지 않고 압살롬을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압살롬을 그만 용서하고 데리고 오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요압의 암묵적인 제안을 못 이기는 척하고 받아준 것입니다. 요압은 다윗의 가장 아쉬운 부분을 가장 효과적으로 챙겨준 셈입니다. 여기서 압살롬을 ‘나의 아들’이라고 부르지 않고 ‘소년’이라고 한 것은 압살롬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기 위한 것입니다.

 

(2) 요압의 감사(22)

다윗의 명을 받은 요압은 다윗에게 엎드려 절하며 감사의 인사를 하는데, 이것은 자신의 계략에 대해 화내지 않고 받아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요압은 압살롬을 매우 그리워하는 다윗의 마음을 알고 있었기에 다윗이 자신의 계획대로 움직일 것이라는 예측을 하고 이런 일을 벌인 것일 뿐 다윗의 미움을 받을 각오를 하고 벌인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요압은 형식적으로 다윗이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 압살롬을 데리고 오는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 자신의 요청을 받아주어서 감사하다고 인사합니다. 여기서 요압은 압살롬의 후견인을 자처하는 모양새를 보이고 있습니다.

 

(3) 예루살렘에 귀환(23-24)

다윗의 허락을 받은 요압은 그술로 가서 압살롬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다윗은 압살롬을 왕궁으로 오지 못하게 하고 보지도 않습니다. 암논을 죽인 죄는 용서하였지만, 왕자 지위를 회복시켜줄 생각은 없었던 것입니다.

 

압살롬에 대한 소개(25-27)

교회가 공의가 아닌 자기 이익을 추구할 때 오히려 손해 볼뿐만 아니라 전체에 타격을 줄 수 있습니다. 교회는 공의보다 자기 이익을 추구할 때 오히려 손해를 보게 됩니다. 사소한 이익을 얻으려는 자로 인해 교회의 정체성이 위협받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공의를 추구해야만 진정한 유익을 얻게 됩니다.

 

25온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 받는 자가 없었으니 그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 26그의 머리털이 무거우므로 연말마다 깎았으며 그의 머리 털을 깎을 때에 그것을 달아본즉 그의 머리털이 왕의 저울로 이백 세겔이었더라 27압살롬이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딸의 이름은 다말이라 그는 얼굴이 아름다운 여자더라(25-27)

 

이 단락은 이제부터 사건의 중심이 되는 압살롬에 대해 설명합니다. 압살롬의 특징은 아름다운 외모와 긴 머리카락입니다. 온 이스라엘에서 압살롬과 비교될 자가 없었고, 바바락에서 정수리까지 어떤 흠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의 탁월한 외모는 딸 다말을 통해서도 드러날 정도였습니다.

 

(1) 압살롬의 인기(25)

25절에서 압살롬의 외모에 대해 이스라엘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자라고 소개합니다. 여기서 압살롬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우 칭송을 받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압살롬이 백성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인물로 보였음을 의미합니다.

압살롬은 그의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전혀 흠이 없었습니다. 이 표현은 주로 제사장들이 몸에 아무런 흠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데 쓰이는데, 여기서는 압살롬의 완벽한 외모를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구약에서 특별히 아름다운 외모를 말하는 경우는 본문에서 그 외모가 특별한 역할을 하는 경우입니다.

아비가일의 경우는 다윗의 호의를 얻는 데 유리한 역할을 하였고, 다말의 경우는 암논에게 강간당한 이유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서 압살롬의 아름다운 외모는 그가 백성들의 지지를 얻는 데 매우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합니다.

 

(2) 아름다운 머리카락(26)

압살롬의 외모 중 가장 특별한 것은 그의 머리카락입니다. 압살롬은 유난히 머리숱이 많고 긴 머리카락을 지녔는데 일 년 동안 자란 머리카락의 무게가 1킬로그램이 넘었습니다. 이것은 머리카락이 길고 숱도 많을 뿐 아니라 굵기도 굵고 아름다웠다는 것인데, 검고 숱 많은 머리가 압살롬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압살롬의 머리카락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사무엘하 18:9에서 그가 풍성하고 긴 머리 때문에 죽게 되는데, 그 배경 지식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3) 압살롬이 자녀들(27)

압살롬은 자식도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그 딸의 이름은 다말이고 매우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습니다. 딸이 특별히 소개된 것은 이름과 외모가 암논에게 강간당한 다말과 같기 때문으로, 이것은 그가 불행한 누이를 기억하기 위해 붙인 이름으로 생각됩니다. 후에 사무엘하 18:18에서는 아들이 없다고 언급되고 있는데, 아마도 세 아들은 압살롬이 죽기 전에 죽은 것으로 보이며 딸 다말 만이 살아남아 그의 누이 다말의 불행을 기억하게 하였던 것 같습니다.

 

다윗과 만난 압살롬(28-33)

죄가 공동체에 들어오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죄를 보면서도 문책하지 않으면 결국 큰 혼란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해 임시방편으로 해결하려 하거나 모르는 척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지도자가 임시방편으로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안일하게 일을 처리하면 나중에는 더 안 좋은 결과를 맞이하기 때문입니다.

 

28압살롬이 이태 동안 예루살렘에 있으되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29압살롬이 요압을 왕께 보내려 하여 압살롬이 요압에게 사람을 보내 부르되 그에게 오지 아니하고 또 다시 그에게 보내되 오지 아니하는지라 30압살롬이 자기의 종들에게 이르되 보라 요압의 밭이 내 밭 근처에 있고 거기 보리가 있으니 가서 불을 지르라 하니라 압살롬의 종들이 그 밭에 불을 질렀더니 31요압이 일어나 압살롬의 집으로 가서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 종들이 내 밭에 불을 질렀느냐 하니 32압살롬이 요압에게 대답하되 내가 일찍이 사람을 네게 보내 너를 이리로 오라고 청한 것은 내가 너를 왕께 보내 아뢰게 하기를 어찌하여 내가 그술에서 돌아오게 되었나이까 이 때까지 거기에 있는 것이 내게 나았으리이다 하려 함이로라 이제는 네가 나로 하여금 왕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하라 내가 만일 죄가 있으면 왕이 나를 죽이시는 것이 옳으니라 하는지라 33요압이 왕께 나아가서 그에게 아뢰매 왕이 압살롬을 부르니 그가 왕께 나아가 그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어 그에게 절하매 왕이 압살롬과 입을 맞추니라(28-33)

 

다윗은 압살롬의 귀환을 허락했습니다. 요압에게 기만당한 것을 알고도 그를 엄중히 문책하지 않았습니다. 요압은 다윗이 압살롬의 귀환을 허락하자 그술 땅에 있는 압살롬이 돌아오는 것을 허락했지만 그를 보지 않겠다는 임시방편의 결정을 내렸습니다.

 

(1) 외면당한 압살롬(28)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지 2년이 지나도록 아버지 다윗이 자신을 부르지 않자, 압살롬은 요압을 왕에게 보내어 자신을 만나달라고 요청하려고 하였지만, 압살롬을 만나는 것을 원치 않은 요압은 두 번이나 거절합니다.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한 것으로 자신의 역할은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요압이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부른 것은 압살롬의 지위를 회복시켜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다윗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서였기 때문에, 현재 다윗이 압살롬을 무시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나서서 둘의 만남을 주선하여 왕의 심기를 거스를 필요가 없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윗은 압살롬이 그술에 있을 때는 압살롬을 많이 그리워했지만, 막상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자 압살롬을 만나주지도 않았으며, 암논의 살인에 대해 하나님께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라고 권면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압살롬을 혼내거나 처벌하지도 않고 그냥 내버려 두었습니다. 다말이 강간당했을 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것처럼, 이번에도 다윗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2년 동안 압살롬을 무시합니다. 그런데 이런 무시하는 다윗의 태도는 다윗에 대한 압살롬의 반감을 더욱 키웠고, 결국 2년이 지나면서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한 것으로 보입니다.

 

(2) 요압을 만나는 압살롬(29-32)

압살롬이 요압에게 다윗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할 때는 이미 반란을 결심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을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이 다윗의 재판을 가로채서 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항상 자녀들이 일으킨 문제에 침묵하였고, 그 침묵은 다윗과 자녀들에게 최악의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다윗이 침묵한 이유가 자신도 암논과 같이 성적인 범죄를 저질렀고, 압살롬처럼 살인죄를 저질렀으므로 자식들의 죄를 처벌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 다윗은 자신이 저지른 죄로 인해 자식들을 제대로 훈육하지 못했고, 집안에 비극이 이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내린 형벌이었습니다. 

압살롬은 자신을 만나주지 않는 요압을 강제적으로 만나기 위해 종들을 시켜 요압의 보리밭에 불을 지릅니다. 그러자 요압이 일어나 압살롬의 집으로 가서는 왜 자신의 밭에 불을 질렀느냐고 항의합니다. 요압은 다윗과 압살롬 사이를 더는 중재하고 싶지 않았지만, 압살롬이 계속해서 자기 밭에 불을 지르면 손해가 커질 수 있어서 부득불 압살롬의 집으로 온 것입니다. 압살롬은 자신의 집에 온 요압에게 자신이 이전에 종을 보내 요압을 만나려고 했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그를 부른 목적을 말합니다. 압살롬은 왕에게 자신의 말을 전해달라고 요압에게 부탁합니다. 압살롬이 다윗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입니까? 왜 자신을 그술에서 돌아오게 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현재 처지를 생각하면 차라리 그술에 있는 것이 나았을 것이라는 말을 전해주길 원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으면서 다윗에게 외면당하고 없는 사람 취급당하는 상황이 도망자로 그술에서 살던 때보다 더 치욕적이고 힘들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요압에게 자신이 왕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합니다. 자신이 죄가 있다면 기꺼이 왕의 심판을 받고 죽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무시를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만나서 다윗이 내린 처벌을 받고 죽는 것이 낫겠고, 그러려면 일단 다윗을 만나야 죽임을 당하든 용서를 받든 양단간에 결정이 내려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압살롬은 속으로는 다윗이 자신을 죽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신을 죽일 만큼 미워하거나 심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예루살렘으로 부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3) 다윗을 만나는 압살롬(33)

압살롬의 말을 들은 요압은 다윗에게 나아가 압살롬의 말을 전합니다. 그때서야 다윗은 압살롬을 궁으로 부릅니다. 압살롬은 다윗을 만났을 때 땅에 엎드려 절하였고, 다윗은 압살롬에게 입을 맞춥니다. 이들의 만남은 매우 형식적인 인사일 뿐 화해와 용서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본문에는 서로 간에 나눈 한마디 말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5년 만의 만남이 매우 냉랭하고 형식적이었음을 의미하며, 다윗은 아직도 압살롬을 용서하지도 않고 심판하지도 않는 어정쩡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결국 다윗과 압살롬의 만남은 둘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있다는 것만 확인한 것으로 이 만남 이후 압살롬은 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합니다.

 

 


사적인 관계에서부터 국가 간 공적인 관계에 이르기까지, 깨진 관계를 복원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다시 복원한다는 것은 많은 인내와 시간이 필요하며, 시의적절한 지혜와 노력이 요구됩니다. 힘들다고 포기하거나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 나라의 정신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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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4-01)


드고아의 여인을 통해 중재한 요압

사무엘하 141-20


살면서 다양한 문제들을 만납니다. 자신의 문제뿐 아니라 타인의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조언을 하거나 관여해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문제를 악화시키지 않고, 합당하고 유익한 결과를 얻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와 지혜는 무엇입니까?

 

압살롬은 암논이 자신의 누이 다말을 강간한 후 다윗이 암논에게 아무런 처벌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다가 2년이 지난 후에 양털 깎는 잔치에서 암논이 취한 틈을 이용해 암논을 죽이고 그술로 도망갑니다. 다윗은 암논의 죽음 소식을 듣고 애도합니다. 그리고 3년이 지난 후 다윗은 도망간 압살롬을 그리워하며 가슴 아파하였고 요압은 이런 다윗의 모습을 보고 압살롬이 돌아오게 할 계획을 세웁니다.

 

드고아 여인(1-3)

교회에도 하나님의 통치를 거역하고 악한 일을 도모하는 거짓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계획을 세우고 죄를 죄라고 여기지 않으며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합니다. 오직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과 유익을 추구해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힙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거짓 지도자들과 그들의 악한 계획을 경계해야 합니다.

 

1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향하는 줄 알고 2드고아에 사람을 보내 거기서 지혜로운 여인 하나를 데려다가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상주가 된 것처럼 상복을 입고 기름을 바르지 말고 죽은 사람을 위하여 오래 슬퍼하는 여인 같이 하고 3왕께 들어가서 그에게 이러이러하게 말하라고 요압이 그의 입에 할 말을 넣어 주니라(1-3)

본문은 요압의 의도가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충성에서 나왔다고 평가합니다. 우리도 충성하기로 맘먹는다면 주인이신 예수님의 뜻을 더 잘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1) 요압의 결심(1)

드고아의 지혜 여성 이야기는 다말 이야기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다말을 강간한 암논에게 다윗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것에 대해 원한을 품은 압살롬이 암논을 죽인 후 도망간 사건 이후에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고 도망간 지 3년 정도가 지나면서 암논의 죽음에 대한 슬픔은 많이 흐려지고, 대신 도망간 압살롬에 대한 그리움이 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심복 요압이 이 사실을 알고는 압살롬을 데리고 오기 위한 방책을 생각해냅니다. 그리고 이를 실행에 옮길 사람을 하나 섭외하는데, 바로 드고아의 여인입니다.

 

(2) 요압의 계략(2-3)

사무엘하 14:2에서 이 여인을 지혜로운 여인이라고 부릅니다. 요압은 그녀를 불러 왕 앞에서 할 행동과 말들을 알려줍니다. 요압은 그녀에게 상복을 입고 기름을 바르지 말며 죽은 사람을 위해 오랫동안 애곡한 여인처럼 보이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요압이 지혜로운 여인에게 명령하지 않고 정중하게 요청한 것을 보면 지혜로운 여인은 사회적 지위가 있는 인물로 보입니다.

3절에서 요압이 그의 입에 할 말을 넣어 주니라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요압의 말을 앵무새처럼 옮긴다는 의미가 아니라 요압은 대략적인 상황만 말하고 세부 사항들은 전적으로 드고아의 여성이 행했다는 뜻입니다.

 

드고아 여인의 아들(4-11)

죄의 심각성과 죄인의 비참한 처지를 감추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은 죽을 운명의 자리에 있는 죄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처지를 직시하게 하고 참된 회개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도록 인도합니다. 복음이 가리키는 진실을 덮는 거짓 복음이 무엇인지, 복음을 가감하고 왜곡하는 주장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4드고아 여인이 왕께 아뢸 때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이르되 왕이여 도우소서 하니 5왕이 그에게 이르되 무슨 일이냐 하니라 대답하되 나는 진정으로 과부니이다 남편은 죽고 6이 여종에게 아들 둘이 있더니 그들이 들에서 싸우나 그들을 말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므로 한 아이가 다른 아이를 쳐죽인지라 7온 족속이 일어나서 당신의 여종 나를 핍박하여 말하기를 그의 동생을 쳐죽인 자를 내놓으라 우리가 그의 동생 죽인 죄를 갚아 그를 죽여 상속자 될 것까지 끊겠노라 하오니 그러한즉 그들이 내게 남아 있는 숯불을 꺼서 내 남편의 이름과 씨를 세상에 남겨두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니 8왕이 여인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가라 내가 너를 위하여 명령을 내리리라 하는지라 9드고아 여인이 왕께 아뢰되 내 주 왕이여 그 죄는 나와 내 아버지의 집으로 돌릴 것이니 왕과 왕위는 허물이 없으리이다 10왕이 이르되 누구든지 네게 말하는 자를 내게로 데려오라 그가 다시는 너를 건드리지도 못하리라 하니라 11여인이 이르되 청하건대 왕은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사 원수 갚는 자가 더 죽이지 못하게 하옵소서 내 아들을 죽일까 두렵나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 아들의 머리카락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니라(4-11)

여인은 다윗 왕의 동정심을 자극하며 교묘하게 이야기를 꾸며 냈습니다. 한 아들이 다른 아들을 우발적으로 죽였는데, 남은 아들마저 처형하면 상속자가 끊어진다는 것입니다.

 

(1) 두 아들의 싸움(4-6)

드고아의 여인은 먼저 아들을 잃은 과부로 변장한 후 다윗에게 나아와 연극을 하기 시작합니다. 만약 그녀가 사회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에 경험이 부족했다면, 그런 대담한 연극을 수행할 용기와 태도를 갖기 어려웠을 것입니다그녀는 먼저 다윗 왕 앞에서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리는 가장 겸손한 자세를 취하며 자신을 도와달라고 간청합니다. 이 모습은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자신의 가족을 살려달라고 부탁할 때와 유사합니다. 다윗이 무슨 일인지 묻자 드고아 여인은 자신을 진정한 과부로 소개하고 남편이 죽었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말합니다. 불쌍한 과부의 처지를 강조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두 아들이 들에서 서로 싸우다 말리는 사람이 없어 한 아들이 다른 아들을 쳐 죽였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두 아들이 들에서 싸우고 한 아들을 죽인 사건은 내막을 모르고 들으면 가인과 아벨 사건을 연상시키지만, 여기서 드고아 여인은 다윗의 두 아들 암논과 압살롬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친척들이 남은 아들을 죽여서 상속자를 끊어버리려고 모두 들고 일어나 자신을 핍박하고 있다고 상황을 설명하며 도와달라고 요청합니다.

 

(2) 사람들의 요구(7)

드고아 여인은 남은 아들을 남편의 이름과 후손을 이 땅에서 이어줄 유일하게 남은 숯불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숯불은 금방이라도 꺼질 듯 위태한 상황을 상징하며 다윗의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이 말을 들은 다윗은 사람들이 여인을 못 건드리게 할 테니 걱정 말고 가라고 문제를 해결해줍니다. 이런 다윗의 판결에 드고아 여인은 피의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 한다는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것에 대한 벌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담당할 죄이며, 다윗에게는 전혀 죄가 없다고 말합니다.

 

(3) 다윗의 결정(8-11)

일단 첫 번째 문제를 해결 받은 여인은 두 번째 문제를 들고 나오는데, 원수를 갚으려는 피의 보수자가 자신의 아들을 죽이지 못하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다윗은 또다시 그 요청을 들어주어 아들의 머리카락 한 오라기도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여기서도 다윗은 아비가일의 이야기에서처럼 어리석은 맹세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윗은 살인한 아들의 죄를 용서함으로써 피의 복수 문제를 너무도 쉽게 해결해버렸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이렇게 쉽게 드고아 여인의 아들의 죄를 용서한 이유는 그녀를 과부로 생각했고 남은 아들이 유일한 아들로 남편의 이름을 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아들(12-17)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하고 죄악에 대한 심판을 말하지 않는 거짓 복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죄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는 온전한 복음을 배우고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그냥 넘어가지 않는 공의로우신 분입니다.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우리 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형벌을 받으셨음을 말해야 온전한 복음입니다.

 

12여인이 이르되 청하건대 당신의 여종을 용납하여 한 말씀을 내 주 왕께 여쭙게 하옵소서 하니 그가 이르되 말하라 하니라 13여인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왕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대하여 이같은 생각을 하셨나이까 이 말씀을 하심으로 왕께서 죄 있는 사람 같이 되심은 그 내쫓긴 자를 왕께서 집으로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심이니이다 14우리는 필경 죽으리니 땅에 쏟아진 물을 다시 담지 못함 같을 것이오나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지 아니하시고 방책을 베푸사 내쫓긴 자가 하나님께 버린 자가 되지 아니하게 하시나이다 15이제 내가 와서 내 주 왕께 이 말씀을 여쭙는 것은 백성들이 나를 두렵게 하므로 당신의 여종이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왕께 여쭈오면 혹시 종이 청하는 것을 왕께서 시행하실 것이라 16왕께서 들으시고 나와 내 아들을 함께 하나님의 기업에서 끊을 자의 손으로부터 주의 종을 구원하시리라 함이니이다 17당신의 여종이 또 스스로 말하기를 내 주 왕의 말씀이 나의 위로가 되기를 원한다 하였사오니 이는 내 주 왕께서 하나님의 사자 같이 선과 악을 분간하심이니이다 원하건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과 같이 계시옵소서(12-17)

여인은 본론으로 들어가 다윗에게 자신의 의도를 밝히며 왜 압살롬을 용서하지 않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인생은 죽을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이 생명을 빼앗기보다 용서하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 여인은 압살롬이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회개하고, 그에게 공의가 집행되어야 할 상황을 왜곡한 것입니다.

 

(1) 여인의 책망(12-14)

여인은 자신을 당신의 여종이라고 다시 낮추면서 말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기를 부탁했습니다. 다윗이 말하라고 허락하자, 그 여인은 다윗 왕을 은근히 책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왕은 백성들에게는 피의 복수를 하지 말라고 하면서 왕은 왜 내쫓긴 자 압살롬에 대해서는 죄인으로 여기고 그를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느냐고 묻습니다. 이 질문을 통해 드고아의 여인은 다윗을 꼼짝 못하게 만듭니다. 왜 다른 사람들의 죄는 용서하고 피의 복수를 못하게 막으면서 자신의 아들인 압살롬의 죄는 용서하지 않느냐며 다윗의 모순을 지적한 것입니다.

여인은 죽음에 대한 고대의 일반적인 지혜를 언급하며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지 아니하시고 방책을 베푸사 내쫓긴 자가 하나님께 버린 자가 되지 아니하게 하시나이다라는 말로 다윗을 설득합니다. , 모든 인생은 결국 죽을 수밖에 없고, 죽으면 되돌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산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생명을 빼앗는 것 대신에 여러 방법으로 살려주시며, 하나님 백성의 기업에서 쫓겨나지 않게 하십니다.

하지만 드고아의 여인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두 사실을 왜곡하였습니다. 첫째, 드고아 여인이 설정한 상황에서 살인한 아들은 과부의 유일한 아들이기 때문에 다윗이 살려주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압살롬은 다윗의 유일한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죄를 용서할 조건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사랑이 많으셔서 자신의 백성이 사는 것을 원하시지만 정의를 무너뜨리시는 분은 아닙니다. 다윗이 압살롬에 대해서 그리워하면서도 그를 다시 불러들일 수 없었던 이유도 바로 정의 부분에서 걸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다윗의 마음을 알고 있던 드고아의 여인은 이 부분을 고의적으로 누락하고 하나님의 자비만을 강조하면서 다윗의 고민에 면죄부를 준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여성은 다윗이 피의 복수를 금지한 판단이 하나님의 사자가 선과 악을 지혜롭게 분별한 것같이 절대적으로 옳다며 적극적으로 다윗을 두둔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을 통해 다윗이 혹시 잘못 판단한 것은 아닐까 갈등할 여지를 없애줍니다. 드고아의 여인은 철저히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상황을 이끌어가면서 다윗이 압살롬을 불러들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2) 여인의 희망(15-18)

다윗에게 따끔한 충고를 전한 희망을 피력합니다. 여인은 자신이 왕께 와서 이 말을 함은 백성이 그 여인을 두렵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다윗이 자신의 말을 듣고, 여인과 여인의 아들을 함께 죽이려 하는 사람의 손에서 여인을 구원해 주시기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실상 다윗이 자기 아들을 살려야 한다는 말의 우회적인 표현입니다. 여인은 다윗 왕의 말이 자신에게 위로(메누하)가 되기를 기원했습니다. 이러한 기대를 품을 수 있는 이유는 다윗 왕은 하나님의 천사와 같아서 선과 악을 잘 분별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천사는 사람의 행위를 심판한다고 여겨졌습니다. 여인은 하나님께서 왕과 함께 계시기를 기원하는 것으로 자신의 말을 끝냈습니다.

 

사건의 전말(18-20)

거짓을 분별하고 선악을 분명하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도자가 명확하게 판단하지 못하면 거짓이 틈을 타고 들어옵니다. 거짓을 미온적으로 대처하면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거짓을 단호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거짓이 진실로 여겨질 수 있으며 또 다른 악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18왕이 그 여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바라노니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내게 숨기지 말라 여인이 이르되 내 주 왕은 말씀하옵소서 19왕이 이르되 이 모든 일에 요압이 너와 함께 하였느냐 하니 여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 왕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옵나니 내 주 왕의 말씀을 좌로나 우로나 옮길 자가 없으리이다 왕의 종 요압이 내게 명령하였고 그가 이 모든 말을 왕의 여종의 입에 넣어 주었사오니 20이는 왕의 종 요압이 이 일의 형편을 바꾸려 하여 이렇게 함이니이다 내 주 왕의 지혜는 하나님의 사자의 지혜와 같아서 땅에 있는 일을 다 아시나이다 하니라(18-20)

다윗이 이 일이 요압의 손에 의해 꾸며진 것을 다윗이 알아챘을 때, 드고아 여인은 그것을 순순히 인정하고 요압이 현재의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 벌인 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 요압이 다윗의 마음을 살피고 그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한 충정에서 한 일이라고 요압의 편을 들어준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요압이 한 일이라는 것을 안 다윗의 지혜에 대해 하나님의 사자의 지혜로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며 칭송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선과 악을 구별하는 것도, 땅의 모든 것을 다 아는 것도 실패하고, 결국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불러들이는 매우 어리석은 결정을 하였습니다.

여기서 드고아 여인은 다윗에게 다말과 대조되는 역할을 합니다. 다윗은 지혜로운 다말의 부르짖음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침묵하다가 드고아 여인의 속임수에 넘어감으로써 왕국을 위험에 빠뜨립니다. 이런 모습은 다윗이 옳고 그름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이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진 결과입니다.

 


선의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인간적 책략은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습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지 않고 상황을 무마하려 한다면 더 큰 위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형제를 도우려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나라의 원칙에 의거하여 문제에 접근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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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3-03)

 

 

 


암논에게 복수하여 살인한 압살롬

사무엘하 1323-39


사탄은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먹잇감을 찾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무너뜨릴 계교를 짜고, 틈이 보이면 순식간에 악한 마음을 충동질하여 공동체를 찢어 놓습니다. 주께서 피 값을 주고 사신 교회를 악으로부터 보존하고, 든든히 세워가려면 어떻게 행해야 합니까?

 

암논은 다말을 강간한 후 다말을 미워하여 집 밖으로 내쫓아버렸고, 다말은 자신의 채색옷을 찢고 고통과 억울함을 호소하며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하지만 친오빠 압살롬은 다말을 강간한 사람이 암논이라는 것을 안 순간 잠잠하라고 하였고, 다윗도 화낼 뿐 암논과 다말에게 어떠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피해자 다말만 가족과 공동체에서 고립된 채 외롭게 살아야 했고, 압살롬은 아무런 처벌도 없는 상황에 대해 암논과 다윗에게 분을 품으며 복수할 기회만 엿보게 됩니다.

 

암논의 죽음(23-29)

사랑이란 단어는 듣기만 해도 따뜻하고 벅차게 합니다. 하지만 잘못된 사랑도 있습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잘못된 일들이 연일 뉴스를 통해 흘러나옵니다. 또한 정의와 사랑의 균형을 맞추는 일이 어렵습니다. 정의를 강조하면 비정해지고, 사랑을 강조하면 불공정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23만 이 년 후에 에브라임 곁 바알하솔에서 압살롬이 양 털을 깎는 일이 있으매 압살롬이 왕의 모든 아들을 청하고 24압살롬이 왕께 나아가 말하되 이제 종에게 양 털 깎는 일이 있사오니 청하건대 왕은 신하들을 데리시고 당신의 종과 함께 가사이다 하니 25왕이 압살롬에게 이르되 아니라 내 아들아 이제 우리가 다 갈 것 없다 네게 누를 끼칠까 하노라 하니라 압살롬이 그에게 간청하였으나 그가 가지 아니하고 그에게 복을 비는지라 26압살롬이 이르되 그렇게 하지 아니하시려거든 청하건대 내 형 암논이 우리와 함께 가게 하옵소서 왕이 그에게 이르되 그가 너와 함께 갈 것이 무엇이냐 하되 27압살롬이 간청하매 왕이 암논과 왕의 모든 아들을 그와 함께 그에게 보내니라 28압살롬이 이미 그의 종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제 암논의 마음이 술로 즐거워할 때를 자세히 보다가 내가 너희에게 암논을 치라 하거든 그를 죽이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너희는 담대히 용기를 내라 한지라 29압살롬의 종들이 압살롬의 명령대로 암논에게 행하매 왕의 모든 아들들이 일어나 각기 노새를 타고 도망하니라(23-29)

암논의 범죄한 후 2년이 흘렸습니다. 다말에게는 수치의 시간, 다윗에게는 분노의 시간, 압살롬에게는 복수의 날을 벼르는 시간이었습니다. 참담한 일이었지만,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이 일을 해석하거나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1) 다윗을 초대(23-25)

암논이 다말을 강간한 사건이 벌어진 지 2년 후에 에브라임 곁 바알하솔에서 압살롬이 양털을 깎는 잔치를 벌였습니다. 바알하솔은 벧엘 동북쪽으로 8킬로미터 떨어진 중앙 산지의 울퉁불퉁한 지역입니다. 압살롬이 잔치 장소를 이곳으로 택한 이유는 암논을 죽인 후에 그슬로 도망가기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양털을 깎는 날은 일종의 추수를 하는 날로 양 떼의 주인은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벌이는 관습이 있습니다. 압살롬은 이 잔치에 왕의 모든 아들들을 초대합니다. 또한 압살롬은 다윗에게도 신하들을 데리고 자신의 잔치에 와달라고 칭합니다. 여기서 압살롬은 다윗에게 자신을 당신의 종이라고 부르고 다윗을 왕이여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다윗과의 관계를 부자 관계가 아닌 주종 관계로 설정하며, 자신이 왕의 충성스러운 신하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압살롬의 행동은 자신의 의도를 감추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압살롬을 나의 아들이라고 친근하게 부릅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압살롬에게 부담을 주기 싫기 때문에 자신과 자신의 신하는 가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아들이 힘들 것을 염려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압살롬은 다윗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간청하였지만 다윗은 가기를 원치 않았고, 대신 압살롬 등에게 복을 빌어주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여기서 압살롬이 다윗을 초청한 것은 암논을 잔치에 초청하기 위한 포석이었습니다. 암논만 초대하면 다윗이 압살롬의 의도를 오해할 수도 있기에, 왕과 신하들과 함께 암논을 부른 것입니다.

 

(2) 왕자들을 초대(26-27)

다윗이 오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압살롬은 원래 목적대로 암논을 초청합니다. 여기서 압살롬은 암논을 나의 형이라고 친근하게 부르며 암논이 자신에게 오게 해달라고 다윗에게 요청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암논이 압살롬에게 가는 것에 대해서도 일단 거절합니다. 다윗은 다말 강간 사건을 잊지 않았고 압살롬이암논에게 좋지 않은 감정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압살롬이 다윗에게 간청하자 다시 거절하지 못하고, 암논과 왕의 모든아들들을 압살롬의 잔치에 보냅니다. 다윗은 자신의 명령으로 다말을 암논에게 보내어 강간당하게 한 것처럼, 이번에는 다윗 자신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암논을 압살롬에게 보내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는 데 일조하게 됩니다.

 

(3) 암논을 죽인 압살롬(28-29)

28절은 압살롬이 왜 암논을 잔치에 초대했는지 이유를 설명합니다. 시점으로 보면 다윗과 암을 초대하기 위해 왕에게 부탁하기 전으로 압살롬은 이미 암논을 죽이기 위해 모든 준비를 마치고서 왕에게 간 것입니다압살롬은 자신의 종들에게 암논이 포도주에 취해서 즐거워할 때를 보다가 자신이 명령하면 암논을 죽이라고 미리 명령을 내린 상태였습니다. , 잔치가 무르익어 모두가 경계를 늦추고 술에 취하여 상황 파악을 빨리할 수 없는 그 순간에 암논을 급습하여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자신의 종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면서 자신이 내린 명령이니 담대하게 용사처럼 행동하라고 권면하기까지 합니다. 여기서 자신이 명령한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암논의 살인에 대한 모든 책임은 압살롬 자신에게 있으며, 자신이 모두 책임지겠다는 뜻입니다.

종들은 압살롬의 명령대로 암논을 죽입니다. 압살롬은 정말 자신이 계획한 대로 암을 죽인 것이다. 압살롬은 다말을 강간한 암을 죽이기 위해 2년 동안 상황을 살피고 준비하면서 아버지 다윗과 암논 앞에서 자신이 암을 죽이고 싶어 할 만큼 미워한다는 사실을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압살롬이 공공연하게 암에 대한 미움과 다윗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면, 다윗이 암논을 압살롬의 잔치에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고, 암논도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압살롬은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본심을 철저히 숨기고 행동하였기에 암을 죽일 기회를 얻었고 마침내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압살롬이 암을 죽인 것은 표면적으로는 다말의 강간 사건에 대한 복수이지만 이면적으로는 자신이 왕이 되는 데 걸림돌이 되는 왕위 계승 서열 1위를 제거한 것입니다. 압살롬은 다윗의 셋째 아들이며 위로는 암논과 길르압이 있지만, 길르압은 사무엘하 3:3에서 언급된 것 이외에는 등장하지 않는 것을 보면 어려서 죽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암논이 죽으면 압살롬이 왕위 계승 서열 1위가 됩니다. 이렇게 압살롬은 누이의 강간 사건을 자신이 왕이 되려는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압살롬이 암을 죽인 것을 본 다른 왕자들은 각각 노새를 타고 그곳에서 도망하였는데, 압살롬이 왕의 다른 아들들은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목표는 오로지 암논을 제거하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노새는 수나귀와 암말 사이에서 이종교배로 태어난 짐승이며 이스라엘에서는 금지되어 있었지만(19:19), 왕가의 운송 수단으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왕자들의 귀환(30-36)

간교한 자에게서 감정, 공감, 동정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랑의 감정은 없고, 팩트만 범람할 때 세상은 정말 비정해집니다. 모든 일을 꾸민 간교한 자가 왕의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다윗의 나라는 위태롭습니다. 능력이 출중할지라도 간교한 자는 멀리해야 합니다.

30그들이 길에 있을 때에 압살롬이 왕의 모든 아들들을 죽이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다는 소문이 다윗에게 이르매 31왕이 곧 일어나서 자기의 옷을 찢고 땅에 드러눕고 그의 신하들도 다 옷을 찢고 모셔 선지라 32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 요나답이 아뢰어 이르되 내 주여 젊은 왕자들이 다 죽임을 당한 줄로 생각하지 마옵소서 오직 암논만 죽었으리이다 그가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욕되게 한 날부터 압살롬이 결심한 것이니이다 33그러하온즉 내 주 왕이여 왕자들이 다 죽은 줄로 생각하여 상심하지 마옵소서 오직 암논만 죽었으리이다 하니라 34○이에 압살롬은 도망하니라 파수하는 청년이 눈을 들어 보니 보아라 뒷산 언덕길로 여러 사람이 오는도다 35요나답이 왕께 아뢰되 보소서 왕자들이 오나이다 당신의 종이 말한 대로 되었나이다 하고 36말을 마치자 왕자들이 이르러 소리를 높여 통곡하니 왕과 그의 모든 신하들도 심히 통곡하니라(30-36)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을 속여 암논을 초대한 후, 다윗이 요압을 통해 우리아를 죽였듯이, 신복들을 통해 암논을 제거합니다. 다윗은 암논에게 속아서 딸이 겁탈당하는 것을 도왔는데, 이번에도 압살롬에게 속아서 암논의 죽음을 본의 아니게 돕고 맙니다.

 

(1) 다윗의 슬픔(30-31)

암논을 제외한 다윗의 아들들이 노새를 타고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즉 각자 자신의 집으로 도망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다윗에게는 압살롬이 모든 아들들을 죽였다는 허위보고가 들어갑니다. 여기에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는 말을 쓴 것은 모두 죽였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아직 아들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있어서 이들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허위 보고를 한 것입니다이 소식을 사실로 믿은 다윗은 옷을 찢고 땅에 누워 아들들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이것은 12:16-23에서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병에 걸렸을 때 했던 것과 동일한 행동입니다. 다윗은 범죄한 이후에 계속해서 아들을 잃는 괴로움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2) 요나답의 분석(32-33)

이번에는 지난번과 다르게 다윗의 신하들도 옷을 찢고 다윗의 곁에 서서 함께 애도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암논에게 간교한 계책을 알려준 요나답이 이 상황에 대해 합리적인 해석을 해줍니다. 그는 왕자들 모두 죽임을 당하지 않고 암만 죽었을 것이라고 예상하면서 암이 다말을 강간한 날부터 압살롬이 걸심하였던 것이라고 말한다. 요나답은 암이 말을강간하면 압살롬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임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요나답은 암논에게 다말을 강간할 방법을 알려준 것이다. 그러므로 이 본문에서 가장 약한 인물은 요나답이라고 볼 수 있다.

 

(3) 왕자들의 귀환(34-36)

요나답이 이야기하고 있는 사이에 파수꾼들이 뒷산 언덕길로 사람들이 오는 것을 발견합니다. 요나답은 그 소식을 듣고 자신의 말대로 왕자들이 살아 왔다고 다윗에게 보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정말 왕자들이 도착하였고, 그들은 안도감과 반가움에 큰 소리로 울었고, 다윗과 모든 신하들도 같이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다윗은 한편으로는 안도감이 들었을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가장 사랑하는 아들 암논을 잃은 것에 대해 크게 상심하였을 것입니다.

 

압살롬의 도피생활(37-39)

사랑의 이름으로 잘못을 눈감아주지만, 깨진 관계가 회복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책임을 안 질 만큼만 참여하고, 이익을 얻을 수 있을 만큼만 참여했습니다. 사람이나 배려가 없는 지혜는 간교한 모략에 불과합니다.

 

37압살롬은 도망하여 그술 왕 암미훌의 아들 달매에게로 갔고 다윗은 날마다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슬퍼하니라 38압살롬이 도망하여 그술로 가서 거기에 산 지 삼 년이라 39다윗 왕의 마음이 압살롬을 향하여 간절하니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음이더라(37-39)

암논을 죽인 압살롬은 그슬로 도망합니다. 그의 외할아버지 달매가 그술의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의 아들로 인해 날마다 슬퍼하였습니다. 여기서 그 아들이 누군지 언급되지 않지만 왜곡하다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을 보면 압논의 죽음에 대해서 상당히 오랫동안 애도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3년이 지나자 암논의 죽음을 애도하는 마음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고 대신에 그술로 도망간 암살롬에 대한 마음이 간절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다윗은 한 아들을 잃고 또한 아들은 크지 못하는 불행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만일 암논이 다말을 강간한 직후 다말의 부르짖음을 듣고 암논에게 적절한 처벌을 내려 다말과 암살롬의 마음을 위로했다면 이런 불행한 사태는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악한 자의 계교로부터 공동체를 지킨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거짓과 미움, 분열의 영이 간계로 끊임없이 흔들어놓기 때문입니다. 구성원 모두가 깨어 이간과 속임을 분별하고, 간교한 자를 멀리하며 사랑의 신뢰와 용서로 결속할 때, 공동체를 지켜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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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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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버림받은 다말

사무엘하 1315-22


교회나 사회가 경건하여 악한 일들이 없으면 좋겠지만, 성폭력의 문제가 심심치 않게 발생합니다. 우리가 속한 곳을 포함하여 세상은 완벽한 안전지대는 없습니다. 만약 주변에 생각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면, 우리는 이 일을 어떤 절차와 과정을 밟아 다루어야 합니까?

 

다윗의 맏아들 암은 압살롬의 아름다운 누이 다말에게 욕정을 품고 괴로워하던 중에 요나답의 간교한 조언을 듣고 다윗에게 요청하여 다말을 곁으로 부릅니다. 다말이 지혜로운 말로 자신을 강간하려는 것이 어리석은 범죄라는 것을 지적하며, 차라리 다윗에게 자신과 결혼시켜 달라고 요청하라고 제안하여 악행을 막아보려고 하였지만, 암논은 이 말을 묵살하고 다말을 강간하고 맙니다. 이로 인해 다윗 가문에 피의 비극이 시작됩니다.

 

다말을 쫓아내는 암논(15-19)

죄는 우리 문 앞에 엎드려 있으며 우리를 삼키길 원합니다(4:7). 사탄은 우리를 유혹해 넘어트리려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사탄의 강력한 속삭임입니다. 죄의 시작은 폭탄에 불을 붙이는 도화선이 되며, 마지막 시도는 죄에서 더욱 벗어나기 힘들도록 조이는 올가미가 됩니다. 딱 한 번만이라는 생각이 들 때, 오히려 그 한 번만 참으면 됩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죄는 죽이는 시작이 됩니다.

 

15그리하고 암논이 그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전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한지라 암논이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 가라 하니 16다말이 그에게 이르되 옳지 아니하다 나를 쫓아보내는 이 큰 악은 아까 내게 행한 그 악보다 더하다 하되 암논이 그를 듣지 아니하고 17그가 부리는 종을 불러 이르되 이 계집을 내게서 이제 내보내고 곧 문빗장을 지르라 하니 18암논의 하인이 그를 끌어내고 곧 문빗장을 지르니라 다말이 채색옷을 입었으니 출가하지 아니한 공주는 이런 옷으로 단장하는 법이라 19다말이 재를 자기의 머리에 덮어쓰고 그의 채색옷을 찢고 손을 머리 위에 얹고 가서 크게 울부짖으니라(15-19)

다말을 성폭행한 암논은 욕심을 채우자 심경이 변하여 극도로 마음을 표출합니다. 다말을 쫓아냄으로써 성폭행보다 더 큰 악행을 저지릅니다. 암논은 반성 대신 회피를 택하고, 과오를 외면한 채 무책임하게 향합니다. 치유와 회복의 시작은 인정과 사과와 작업장에서 시작됩니다.

 

(1) 다말을 쫓아내려는 암논(15)

다말이 간곡하게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암논은 다말을 강제적으로 범하여 자신의 욕망을 채우더니 이제 갑자기 다말에 대한 태도를 바꿉니다. 15절에서 미움과 증오란 단어를 네 번이나 반복하고, 그 미움이 전에 사랑한 것보다 더하다라고 말함으로써 암논이 다말을 끔찍하게 증오하였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암논의 태도를 보면 다말에 대한 그의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 단순한 욕망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차갑게 변한 암은 다말에게 일어나 나가라고 명령합니다.

 

(2) 거부하는 다말(16)

이런 태도에 다말은 또다시 암논의 행동이 옳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이렇게 자신을 쫓아내는 것이 강간한 것보다 더 큰 약이라고 지적합니다. 여기에 나온 다말의 말은 앞에서 그 마음이 전에 사랑한 것보다 더하다고 했던 말과 비슷한 말투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암논이 강간 전보다 강간 후에 더 악하게 행동했음을 강조하기 위한 어법입니다.

이런 다말의 지적에도 암논은 다말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구약 율법에 따르면 강간을 하면 그 처녀와 결혼을 하거나 아니면 그녀가 앞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다말은 이에 근거하여암논에게 항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시종들에 의해 쫓겨나는 다말(17-18a)

하지만 암논은 다말의 지혜로운 말을 또 다시 묵살하고, 오히려 종을 불러 다말을 쫓아내고 문빗장을 지르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암논은 다말을 이것’. ‘이 여자를 뜻하는 조트로 부르면서 거추장스러운 물건처럼 취급하는데, 이런 태도는 강간 직전에 다말을 나의 누이라고 부르던 것과는 완전히 대조적입니다. 이런 암논의 태도는 여성에게 가장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강간당한 젊은 처녀가 앞으로 감당해야 할 비극적인 삶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암논의 관심은 자신의 죄의 증거인 다말을 빨리 자신의 집에서 내쫓아 죄를 은폐하고 싶은 생각뿐이었습니다. 이런 암논의 모습은 자신의 죄를 은폐하기 위해 우리아를 죽인 다윗의 비정한 모습과 무척이나 닮았습니다. 이렇게 다윗과 닮은 암논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다윗의 죄를 기억하게 되고, 암논의 죄가 다윗의 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됩니다.

 

(4) 다말이 크게 부르짖음(18b-19)

여기서 갑자기 다말의 채색옷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채색옷은 결혼하지 않은 공주들이 입는 옷이라고 설명하는데, 이것은 공주들이 아직 처녀라는 표시로 채색옷을 입었다는 의미입니다.

쫓겨난 다말은 머리에 재를 뒤집어쓰고 공주의 옷인 채색옷을 찢고 손을 머리 위에 얹고 크게 부르짖으며 자신의 억울함과 분노와 괴로움을 표현하였습니다. 전체적으로 다말의 행동은 죽음을 애도하는 행동이지만, 큰 재난과 고난을 당했을 때도 이와 같은 행동을 하며 하나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다말을 특히 채색옷을 찢음으로 자신이 강간당하여 처녀로서의 명예를 잃었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부르짖다는 어떤 괴로움과 고난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면서 주로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다말은 사람들과 하나님께 자신의 이런 부당하고 억울하고 비극적인 상황에 대해 공개적으로 부르짖으며 도움을 요청하고 정의를 실행해달라고 외쳤습니다. 그것도 한 번만 그런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외치면서 집으로 간 것입니다. 다말은 자신과 다윗의 집에 일어난 악한 일에 대해 정의로운 판결이 있기를 원해서 자신에게 일어난 수치스럽고 치욕스러운 일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 부르짖은 것입니다.

 

압살롬의 침묵과 다윗의 무대응(20-22)

공동체 내에서 죄를 범한 사람이 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공동체의 이미지가 나빠질 것을 두려워해서 못 본 체하거나 덮어 버린 적이 있습니까? 형제가 죄를 범하면 우선 단 둘이 있을 때 잘못을 지적해야 합니다. 그래도 듣지 않을 경우 두세 증인 앞에서 말하고, 그래도 듣지 않는다면 교회 앞에서 잘못을 지적해 돌이키게 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죄를 감싸거나 묵인한다면 그 죄는 반드시 똬리를 틀고 앉아 더 큰 문제를 만들어 냅니다.

 

20그의 오라버니 압살롬이 그에게 이르되 네 오라버니 암논이 너와 함께 있었느냐 그러나 그는 네 오라버니이니 누이야 지금은 잠잠히 있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라 하니라 이에 다말이 그의 오라버니 압살롬의 집에 있어 처량하게 지내니라 21다윗 왕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하니라 22압살롬은 암논이 그의 누이 다말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그를 미워하여 암논에 대하여 잘잘못을 압살롬이 말하지 아니하니라(20-22)

다윗은 모든 일을 듣고 심적 노하지만 암논을 처벌하지 않습니다. 다윗의 이해할 수 없는 처사가 양상문의 복수심을 키웠습니다. 은혜라는 미명하에 드러난 문제를 덮는 것은 빠른 해결책이 아닙니다. 공의롭고 정당한 계절은 반드시 필요하며 용서는 그 이후의 문제입니다.

 

(1) 다말에게 말하는 압살롬(20)

하지만 아무도 지혜로운 다말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오빠인 압살롬은 이런 다말의 부르짖음에 상대가 다윗이 가장 아끼는 아들 암논이라는 것을 확인한 후에, 암논이 다말의 오빠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지금은 잠잠하라고 말합니다. 압살롬은 혹시라도 암논에 대한 처벌을 주장합니다. 다윗의 눈 밖에 날 것을 염려하여 이 일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고 정당한 처벌을 요청하는 길을 택하지 않고 아버지인 다윗이 어떻게 처리할지 눈치를 보면서 다말에게 잠잠하라고 한 것입니다.

압살롬은 차기 왕권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 눈 밖에 나는 행동을 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다말의 아픔이나 정의 실현보다는 자신의 왕권에 대한 욕망이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이런 압살롬 때문에 다말은 압살롬의 집에서 다른 가족이나 공동체와 단절된 채 침묵을 강요받으며 외롭고 힘들게 지내야 했습니다.

 

(2) 다윗의 반응(21)

다윗 왕은 이 일을 듣고 크게 화를 냈지만, 강간을 저지른 암논에 대한 처벌이나 폭행을 당한 다말에 대한 위로나 보상 혹은 결혼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한 가정의 가장이자 한 나라의 왕으로서 법을 집행하고 질서와 도덕을 세울 의무가 있었지만, 어떤 처벌도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간 것입니다. 이렇듯 손 놓고 사태를 방치한 이유는 왕위 계승자로 염두에 두고 있는 장남 암논에 대한 편애 때문이었습니다. 강간에 대한 책임을 공식적으로 묻게 되면 암논은 왕궁에서 쫓겨나거나, 쫓겨나지 않는다고 해도 왕궁에서 그의 입지가 좁아지고, 결국 왕위 계승 경쟁에서 밀려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의를 실현해 달라고 외치는 다말의 부르짖음에 다윗은 침묵하였고, 압살롬도 다윗의 이런 부당한 행동에 대해서 그리고 암논의 잘못에 대해서 계속 침묵하였습니다. 이렇게 다말의 억울함을 풀어주어야 할 보호자인 다윗과 압살롬은 모두 침묵하였고 결국 그녀는 매우 불쌍한 처지로 살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현재 다윗 왕궁의 모습입니다. 아무도 약하고 힘없는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정의를 요구하는 외침에 침묵을 강요하며,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꾸몄습니다. 피해자 다말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무시하는 이 왕궁의 모습은 다윗이 지금 영적으로 얼마나 무기력한 상태인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3) 속내를 감추는 암살롬(22)

22절을 보면, 비록 압살롬이 암논의 행동에 대해 아무 말도 안 했지만, 속으로 암논에 대해 증오하는 마음을 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힘이 없어서 아버지의 눈치와 형의 눈치를 보며 침묵하고 있지만, 그의 마음속에 암논에 대한 미움과 증오조차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인간의 마음에 분노가 생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지도자이자 가장인 다윗의 역할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지혜를 가지고 암논의 죄를 처벌하고 다말과 압살롬을 위로하며 다말에게 적절한 보상과 함께 그녀의 불명예를 씻어주었다면, 다말이 외롭고 억울하게 살지 않았을 것이고, 압살롬이 암논과 아버지 다윗에 대한 증오를 키워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윗이 적절한 처벌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압살롬은 암논 뿐만 아니라 아버지 다윗에 대한 증오심까지 갖게 된 것입니다. 이런 압살롬의 암논과 다윗에 대한 증오심은 압살롬이 살인과 반역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지혜가 없었습니다. 다말의 지혜로운 말조차 무시하고 침묵을 강요하는 이런 모습은 다윗의 집에 내리신 하나님의 심판은 바로 이 지혜의 상실을 통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원리를 따르지 않는 사랑은 욕심에 불과합니다. 암논은 왕과 다말의 순수한 마음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했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욕심의 노예가 됩니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온갖 속임수로 다말에게 다가갔습니다. 이런 욕심은 결국 그의 가정에 불행을 자초하게 됩니다. 우리도 탐욕과 욕심을 이루기 위해 온갖 술수를 다 펼치며 죄를 짓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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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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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말을 유혹하여 범죄한 암논

사무엘하 131-14


교회나 사회가 경건하여 악한 일들이 없으면 좋겠지만, 성폭력의 문제가 심심치 않게 발생합니다. 내가 속한 곳을 포함하여 완벽한 안전지대는 없습니다. 만약 주변에 생각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면, 우리는 이 일을 어떤 절차와 과정을 밟아 다루어야 합니까?

 

압살롬의 반란이 일어나게 되는 첫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첫째 아들 암논이 병든 체하고 셋째 아들 압살롬의 누이인 다말을 자기 집으로 오게 했습니다. 암은 강제로 다말과 동침한 뒤, 곧 싫증을 느끼고 집 밖으로 쫓아냈습니다. 다말은 자기 오빠인 압살롬을 찾아가 그의 집에서 거주했습니다. 압살롬은 다말에게 당분간 조용히 지내라고 충고하면서,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은 채 암을 죽일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암논의 계략(1-6)

하나님의 법을 떠나서 범죄의 길을 가고 세상의 길을 가려면 여러 사람을 속여야 합니다. 은혜의 자리를 떠나려고 하면 거짓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죄악의 수렁에서 자기의 힘으로 헤쳐 나올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능력으로 덧입혀 주셔야만 죄악으로부터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항상 성령께서 은혜 가운데 인도하시길 간절히 구하시길 바랍니다.

 

1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게 아름다운 누이가 있으니 이름은 다말이라 다윗의 다른 아들 암논이 그를 사랑하나 2그는 처녀이므로 어찌할 수 없는 줄을 알고 암논이 그의 누이 다말 때문에 울화로 말미암아 병이 되니라 3암논에게 요나답이라 하는 친구가 있으니 그는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이요 심히 간교한 자라 4그가 암논에게 이르되 왕자여 당신은 어찌하여 나날이 이렇게 파리하여 가느냐 내게 말해 주지 아니하겠느냐 하니 암논이 말하되 내가 아우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사랑함이니라 하니라 5요나답이 그에게 이르되 침상에 누워 병든 체하다가 네 아버지가 너를 보러 오거든 너는 그에게 말하기를 원하건대 내 누이 다말이 와서 내게 떡을 먹이되 내가 보는 데에서 떡을 차려 그의 손으로 먹여 주게 하옵소서 하라 하니 6암논이 곧 누워 병든 체하다가 왕이 와서 그를 볼 때에 암논이 왕께 아뢰되 원하건대 내 누이 다말이 와서 내가 보는 데에서 과자 두어 개를 만들어 그의 손으로 내게 먹여 주게 하옵소서 하니(1-6)

세상은 자신의 기지와 능력을 발휘해 악을 돕고자 하는 자들로 넘쳐납니다. 요나답은 암논의 불의한 욕망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간교한 자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간교한 뱀이 접근을 허용함으로 범죄했듯이, 암논의 욕망은 간교한 자의 접근을 허용하면서 증폭되었습니다.

 

(1) 암논의 상사병(1-2)

암논이 다말을 강간한 사건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 범죄한 뒤에 일어난 첫 사건으로 하나님의 심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1절에서 다말을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아름다운 누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암논이 그녀를 사랑하게 된 이유이며, 전에 다윗이 밧세바와 간통한 이유와 같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이유로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입니다또한 다말을 다윗의 딸이 아닌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누이로 소개하는데, 이것은 다윗이 다말에게는 무관심하다는 것을 보여주며 이와 대조적으로 암논이나 압살롬은 다윗의 아들로 소개함으로써 다윗의 애정이 아들들에게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건은 암논이 배다른 누이 다말을 사랑하면서 시작됩니다. 하지만 이 사랑은 강간한 후에 급속히 식어버리는 육적인 욕망에 불과했습니다. 다말에 대한 암논의 욕망이 너무 강했지만 다말이 처녀라서 만날 방법이 없었습니다. 처녀의 경우 남자 형제가 늘 보호하고 있기 때문에 암논은 자신의 동생이자 경쟁자인 압살롬을 배제한 채 다말을 만날 방법이 없었습니다암논은 다말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욕망으로 심히 괴로워하였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다말을 그의 누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암논의 욕망이 잘못된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2) 요나답의 계교(3-5)

이때 암논의 사촌 요나답이 등장합니다. 개역개정에서는 요나답을 심히 간교한 자로 번역하고 있지만, 원문을 직역하면 매우 지혜로운 남자입니다. 여기서 지혜의 모티프가 등장합니다. 요나답은 암논을 보고 왜 그렇게 날마다 야위어 가느냐고 묻습니다. 암논은 다말에 대한 욕망을 채우지 못하여 괴로워하였고, 그런 모습이 다른 사람 눈에는 병이 난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이런 요나답의 질문에 암논은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솔직히 말합니다. 사실 암논은 욕망은 있었지만, 그것을 채울 지혜와 능력은 없었는데, 요나답이 암논에게 방법을 알려줌으로써 암논이 실제로 범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3) 암논의 요청(6)

요나답은 왕인 다윗의 권위를 이용하여 다말을 그의 보호자인 압살롬에게서 떼어낼 방법을 알려줍니다. 침상에 누워 병든 체하고 있다가 다윗이 병문안을 오면 누이 다말이 만든 떡, 그것도 특별히 자신 앞에서 만든 떡을 먹고 싶다고 요청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암논을 매우 아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요나답이 아픈 암논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할 것임을 염두에 둔 계획입니다요나답은 자신의 지혜를 범죄에 악용하고, 결국은 암논을 죽음으로 내모는 데 일조합니다. 이런 그의 모습은 후에 암논의 잘못된 행동을 막으려고 했던 지혜로운 다말과 대조를 이룹니다. 그 말을 들은 암논은 요나답의 말대로 아픈 체하고 있다가 다윗이 병문안 왔을 때, 요나답이 알려준 대로 다윗에게 요청합니다. 여기서 암은 다말을 나의 누이라고 부르며 자신의 요청이 형제간의 우애인 것처럼 포장하며 자신의 욕망을 숨깁니다. 하지만 그녀의 손으로 자신을 먹여달라는 요청은 단순히 남매간의 우애로 보기에는 지나친 면이 있습니다.

 

다말과 동침한 암논(7-14)

죄란 결국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이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을 알면서도 기어코 그것을 채우고 싶어 하는 그릇된 열망입니다. 성도들은 욕망을 잘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듣기 좋은 간교한 말보다 옳은 말을 따라야 합니다. 자신의 욕망이 다른 성도들에게 끼칠 영향을 생각하며 삶을 살아야 합니다.

 

7다윗이 사람을 그의 집으로 보내 다말에게 이르되 이제 네 오라버니 암논의 집으로 가서 그를 위하여 음식을 차리라 한지라 8다말이 그 오라버니 암논의 집에 이르매 그가 누웠더라 다말이 밀가루를 가지고 반죽하여 그가 보는 데서 과자를 만들고 그 과자를 굽고 9그 냄비를 가져다가 그 앞에 쏟아 놓아도 암논이 먹기를 거절하고 암논이 이르되 모든 사람을 내게서 나가게 하라 하니 다 그를 떠나 나가니라 10암논이 다말에게 이르되 음식물을 가지고 침실로 들어오라 내가 네 손에서 먹으리라 하니 다말이 자기가 만든 과자를 가지고 침실에 들어가 그의 오라버니 암논에게 이르러 11그에게 먹이려고 가까이 가지고 갈 때에 암논이 그를 붙잡고 그에게 이르되 나의 누이야 와서 나와 동침하자 하는지라 12그가 그에게 대답하되 아니라 내 오라버니여 나를 욕되게 하지 말라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마땅히 행하지 못할 것이니 이 어리석은 일을 행하지 말라 13내가 이 수치를 지니고 어디로 가겠느냐 너도 이스라엘에서 어리석은 자 중의 하나가 되리라 이제 청하건대 왕께 말하라 그가 나를 네게 주기를 거절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되 14암논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고 다말보다 힘이 세므로 억지로 그와 동침하니라(7-14)

다윗은 암논의 욕망 성취를 위한 연극에 속아 넘어갔습니다. 누구보다 자기 욕망 실현에 능수능란했던 다윗은 암논의 거짓말을 눈치채지 못한 영적으로 둔감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잘못된 욕망을 품고 있는 자, 그것을 부추기는 자, 모른 채 방임하는 자는 모두가 공범입니다.

 

(1) 과자를 준비한 다말(7-9)

이런 암논의 요구에 다윗은 다말에게 사람을 보내어 암논의 집에 가서 그를 위해 음식을 차리라고 명령합니다. 장자인 암논에게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던 다윗은 경우에 합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뭔가 미심쩍은 부분이 많은 암논의 요청을 받아들여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딸 다말을 암논의 손에 넘겨주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됩니다. 다윗의 이런 어리석은 모습은 밧세바와의 범죄 이후에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면서 주시던 지혜가 사라졌음을 암시합니다왕인 아버지 다윗의 명령에 따라 암논에게 간 다말은 아무것도 모르고 열심히 명령대로 과자를 만들어 암논이 먹게 차려 놓았습니다. 다말이 과자를 만드는 모습을 자세히 설명한 것은 그녀가 아버지의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성실한 다말의 모습은 독자들로 하여금 다가올 다말의 운명에 대해 더욱더 안타까운 마음이 들게 하며 암논과 다윗에 대해 더욱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합니다다말이 다 만든 음식을 암논 앞에 놓았지만 암논은 먹기를 거절하고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냅니다. 그의 원래 목적은 음식이 아니라 다말을 강간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말이 음식을 다 준비하자 자신은 강간할 준비를 한 것입니다.

 

(2) 암논의 유혹(10-11)

암논은 다말에게 음식을 침실로 가져와서 자신에게 먹일 것을 명령합니다. 암논은 다말이 거절할 수 없게 매우 강압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말은 큰 오라버니의 말을 어길 수 없어서 방으로 음식을 들고 들어갑니다. 여기서 그의 오라버니 암논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다말이 암논을 전혀 의심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3) 암논의 다말을 강간함(12-14)

암논은 다말을 침실로 들어오게 하여 강제로 붙잡고 동침하자고 명령합니다. 이때 암논은 다말을 나의 누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한편으로는 다말을 안심시키려고 하는 말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행동이 금지된 행동이라는 것을 표현합니다이런 암논의 말에 다말은 자신의 의사 표현을 확실하게 합니다. 그녀는 암논을 오빠로 부르면서 자신을 욕되게 하지 말라는 것과 어리석은 일을 행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욕되게 한다는 것은 다말에게 수치와 굴욕을 준다는 것으로 다말에게 해를 가하는 행동입니다. 그리고 어리석은 일을 하다라는 구문은 창세기 34:7과 사사기 19:23의 본문에서 공통적으로 강간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암논에게 해당하는 말로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강간은 중범죄로 다루었기 때문에 다말은 암논에게 강간을 하면 죄인이 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 것입니다.

이렇게 다말은 어리석은 행동의 결과로 다말 자신은 수치를 입게 되어 공동체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되고, 암논도 범죄자가 될 것이라고 말한 후 좀 더 지혜로운 조언을 하는데, 강간 대신에 결혼이라는 적법한 절차를 거쳐서 다말과 암논의 명예를 모두 지키자고 제안한 것입니다. 두 제안 다 아버지 다윗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지만, 다말은 간교한 요나답보다 훨씬 지혜로운 제안을 한 것입니다. 여기서 다말이 아버지를 통한 결혼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임기응변으로 보아야 합니다당시 이스라엘 법(18:9)에 따르면 이복 남매간의 결혼은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만일 암논이 다윗에게 다말과 결혼시켜달라고 말하더라도 다윗이 이 결혼을 허락할 가능성은 매우 적습니다. 강간에 대한 수치를 지고 평생을 사는 것보다는 암논과 결혼하는 것이 명예를 지킬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다말은 암에게 이런 제안을 한 것입니다하지만 욕정에 사로잡힌 암논은 다말의 말을 듣지 않고 그녀를 강간합니다. 결국 암논은 자신의 욕망에 이끌려 누이인 다말을 강간하여 다윗 가문에 피바람을 몰고 옵니다. 이는 밧세바와 간통할 때 그 일이 가져올 파장이나 여호와께서 보고 계신다는 생각하지 않았던 다윗과 매우 비슷합니다. 다윗의 악한 행실이 자녀들에게 악한 영향을 주었음을 보여줍니다. 이 상황에서 다윗도 지혜롭지 못하게 행동하여 아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함께하며 그가 지혜롭게 행동하게 하셨으며 어리석은 일을 하려고 하면 다른 사람을 통해서 막으셨지만, 이번에는 전혀 개입하지 않으셨고, 지혜로운 말조차 묵살 되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악한 본성이 하나님의 통제를 받지 않은 채 그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인 것입니다.

 


다말을 행한 암논의 사랑은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상대방을 소유하려는 왜곡된 사랑이었습니다. 이처럼 드러난 사건을 공동체가 해결하거나 치유하지 못하여 피해자의 아픔이 가중되는 경우가 흔합니다. 오히려 가해자를 두둔하고 감쌈으로써 교회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는 예도 있습니다. 교회를 거룩한 기관으로 보존하기 위해 성도는 지혜와 의지와 성찰로 행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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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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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징계를 통해 회복된 다윗

사무엘하 1215-31


사랑의 매란 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훈계하기 위해 매질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잘못했다 하더라도 사랑의 매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징벌하는 사랑의 매는 감정적인 화풀이를 하는 경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매는 영혼을 살리는 축복의 사인입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자신이 저지른 간통죄와 살인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살인죄에 대해서 다윗의 집안에 칼이 영원히 머물 것이라고 선언하시고 다윗의 간통죄에 대해서는 다윗의 아내들이 백주에 강간당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심판 선언에 다윗이 잘못을 회개하였지만, 여호와께서는 그의 목숨은 살려주시고 왕위는 지켜주시지만 태어날 아기가 죽을 것을 선언하십니다.

 

밧세바의 첫째 아들(15-23)

징계도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어떤 분은 징계가 무슨 축복이냐?’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는 줄을 마음에 생각하라’(8:5)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기 때문에 바로 되라고 채찍을 때리십니다.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아버지가 당신을 사랑하시니까 이렇게 징계하신 것입니다.

 

15나단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우리아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 16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다윗이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17그 집의 늙은 자들이 그 곁에 서서 다윗을 땅에서 일으키려 하되 왕이 듣지 아니하고 그들과 더불어 먹지도 아니하더라 18이레 만에 그 아이가 죽으니라 그러나 다윗의 신하들이 아이가 죽은 것을 왕에게 아뢰기를 두려워하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아이가 살았을 때에 우리가 그에게 말하여도 왕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셨나니 어떻게 그 아이가 죽은 것을 그에게 아뢸 수 있으랴 왕이 상심하시리로다 함이라 19다윗이 그의 신하들이 서로 수군거리는 것을 보고 그 아이가 죽은 줄을 다윗이 깨닫고 그의 신하들에게 묻되 아이가 죽었느냐 하니 대답하되 죽었나이다 하는지라 20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명령하여 음식을 그 앞에 차리게 하고 먹은지라 21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그를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이 일이 어찌 됨이니이까 하니 22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23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15-23)

다윗은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난 아이가 죽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 아이가 죽기 전까지는 사력을 다해서 기도합니다. 식음을 전폐한 채 아무 말도 듣지 않고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1) 아들을 위한 다윗의 기도(15-17)

나단은 다윗이 밧세바에게서 얻은 아이가 죽을 것이라고 선언하였고(12:14), 그 선고대로 밧세바가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셨고 병에 걸리게 하셨습니다. 밧세바를 우리아의 아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밧세바가 다윗의 아이를 가졌을 때 우리아의 아내였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 아기가 병에 걸리자, 다윗은 하나님의 궤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 금식하며 땅에 엎드려 밤새 살려달라고 간구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할 때 종종 금식기도를 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간절히 기도하면 혹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아기를 살려주시지 않을까 기대한 것입니다. 이때 다윗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시편 32편과 51편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17절은 다윗이 얼마나 간절하고 강경하게 기도하였는지를 설명합니다. 왕궁의 노인들, 즉 중신들이 다윗을 일으키려고 하였지만, 다윗은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고 식사도 하지 않았습니다.

 

(2) 아들의 죽음(18-19)

다윗의 이런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밧세바에게서 난 아이는 병에 걸린 지, 칠 일 만에 죽고 맙니다. 다윗의 신하들은 이 사실을 다윗에게 보고하기를 두려워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금식하며 기도하였을 때, 그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신 경우가 거의 없었습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도 들어주셔서 그의 생명을 연장해주셨고, 심지어 나봇을 죽인 아합도 겸비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의 목숨을 살려주셨습니다. 니느웨도 금식하며 겸비할 때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간절한 기도는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회개에 목숨을 살려주는 것으로 용서하시고, 더 이상의 용서는 허락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죄를 심각하게 보셨고, 그 죄에 대해 책임지도록 심판을 면제해 주지 않으신 것입니다. 다윗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도 없지만, 회개했는데도 다윗처럼 철저하게 하나님께 벌을 다 받은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회개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책임까지 모두 없애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자녀에서 끊어지지 않고 계속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서 우리의 죄에 대한 책임을 감당할 때, 더 성숙하고 성화된 모습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다윗이 간절하게 기도했는데도 아기가 죽자 신하들은 다윗의 상심이 극심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아이의 죽음을 다윗에게 알리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신하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보고 아이가 죽은 것을 알게 되었고, 신하들을 통해 아이가 죽은 것을 확인합니다. 다윗은 아이가 죽은 것을 확인하자 일어나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경배한 후 다시 식사하기 시작합니다. 아이가 죽자 다윗이 금식과 애도의 행동을 멈추고 일상적인 모습으로 돌아온 것에 대해 신하들은 어떻게 된 것인지 궁금해합니다. 이에 대해 다윗은 자신이 금식하고 울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불쌍히 여기시고 마음을 돌려 아이를 살려주지 않으실까 생각했는데, 이제 죽었으니 금식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청하는 것이지만 그 기도를 들어주실지는 하나님만 결정하실 수 있습니다. 다윗이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지 누가 알겠느냐?’라고 말한 것은 모든 결과를 하나님의 손에 맡겼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밧세바와의 간통 이후에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고 말씀에 순종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단을 통해 하나님 심판의 말씀을 들은 후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인정하게 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이를 죽이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솔로몬의 탄생(24-25)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매를 때리실 뿐 아니라 회복의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가장 혹독한 심판 가운데서도 자기 백성을 향한 주의 은총과 평안을 주시려는 자비는 중단하지 않습니다. 어려운 시기에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주십니다. 다윗과 밧세바가 가장 고통스러워했던 시기에 위로의 선물을 주십니다.

 

24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25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24-25)

하나님께 징계를 받았다고 낙심에 빠져 있을 수 없습니다. 아픔을 딛고,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징계는 아프고 쓰라리나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그 손길을 겸허히 수용할 때, 한층 더 성숙함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새로운 선물을 안겨주십니다.

 

(1) 여호와의 사랑을 받은 솔로몬(24)

아이를 잃은 후에 다윗은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였는데, 여기서 밧세바를 다윗의 아내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제 밧세바가 정식으로 다윗의 아내로 인정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정식으로 아내가 된 밧세바와 동침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새로운 아들을 주셨는데 그가 솔로몬’입니. 솔로몬이란 이름은 평화란 뜻의 샬롬에서 유래하였습니다.

 

(2) 여디디야(25)

여호와께서 솔로몬을 사랑하셔서 나단을 보내어 특별히 여디디야라는 이름을 주십니다. 여디디야는 여호와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뜻으로, 이제는 다윗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표시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간통죄와 살인죄라는 끔찍하고 비열한 죄를 지은 다윗은 아이를 잃는 벌을 받았지만 새로운 아이를 하나님께 얻음으로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자로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암몬의 랍바를 점령함(26-31)

징계 가운데 낙담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두려워하고 더 멀리하도록 우리를 징계하신 것입니다. 징계의 아픔을 딛고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다면 반드시 복된 날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결국 하나님은 가장 복된 결과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항상 순종하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6요압이 암몬 자손의 랍바를 쳐서 그 왕성을 점령하매 27요압이 전령을 다윗에게 보내 이르되 내가 랍바 곧 물들의 성읍을 쳐서 점령하였으니 28이제 왕은 그 백성의 남은 군사를 모아 그 성에 맞서 진 치고 이 성읍을 쳐서 점령하소서 내가 이 성읍을 점령하면 이 성읍이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을까 두려워하나이다 하니 29다윗이 모든 군사를 모아 랍바로 가서 그 곳을 쳐서 점령하고 30그 왕의 머리에서 보석 박힌 왕관을 가져오니 그 중량이 금 한 달란트라 다윗이 자기의 머리에 쓰니라 다윗이 또 그 성읍에서 노략한 물건을 무수히 내오고 31그 안에 있는 백성들을 끌어내어 톱질과 써레질과 철도끼질과 벽돌구이를 그들에게 하게 하니라 암몬 자손의 모든 성읍을 이같이 하고 다윗과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니라(26-31)

간음과 살인의 죄는 다윗 생애에서 가장 지우고 싶은 치명적인 불명예스러운 행적입니다. 이는 앞으로 닥칠 연속적인 불행의 싸앗이었지만, 이 넘어짐은 다윗을 교만과 나태의 짐에서 깨워 다시 골리앗을 상대한 당시에 기도의 영성으로 회복시켜주십니다.

 

(1) 요압의 전공(26-28)

이 단락은 암몬과의 전쟁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10장에서 시작된 암몬과의 전쟁은 밧세바와 간통 사건을 일으킨 시기에도 계속되었고,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는 암몬과의 전투 중에 사망하였습니다. 이 부분은 시간적으로 우리아가 죽은 지 얼마 뒤에 일어난 일이지만, 대략 2년 이상 걸린 다윗의 간통 사건에 집중하기 위해 암몬과의 전쟁에 대한 기록을 잠시 미루어 두었다가 다윗의 간통 사건을 끝낸 후에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시간의 흐름으로 볼 때 회상에 해당합니다.

26절은 랍바 점령에 대한 요약 부분으로 요압은 암몬과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암몬의 수도 랍바를 점령합니다. 요압은 랍바를 완전히 점령하기 전에 다윗에게 사람을 보내어 남은 군사를 모아 전쟁터에 나올 것을 요청합니다. 만일 다윗이 오지 않았는데 자신이 성읍을 점령하면 그 도성은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을 취한 모든 공적이 요압에게 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현재 요압은 다윗에게 매우 충성스러운 인물로 우리아를 죽이라는 다윗의 명령에 대해서도 이유를 묻거나 반대하지 않고 그대로 따랐는데, 여기서도 전쟁의 모든 공적을 다윗에게 돌리려 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는 다윗에게 충성하기 위해서라면 하나님 보시기에 의한 행동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2) 다윗의 참전(29)

다윗은 모든 군사를 이끌고 랍바로 갔습니다. 그곳을 쳐서 성공적으로 점령하였습니다. “모든 군사는 요압의 군대를 제외하고 남은 군사들을 가리킵니다. 다윗은 이미 요압에 의해 거의 점령된 랍바 성을 최종적으로 포위하고 공격하였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많은 전리품을 얻었습니다.

 

(3) 전리품과 포로(30-31)

다윗은 왕관을 취하여 자신의 머리에 썼는데, 그 왕관은 금 한 달란트(대략 30kg)와 보석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평소에 쓰는 관이 아니라 왕권을 상징하는 상징물로 사용되는 것이었습니다. 머리에 썼다는 것도 암몬의 왕권을 폐하고 자신이 암몬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음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31절에서 다윗이 암몬 자손의 포로들에게 여러 가지 강제 노역을 시키는 것으로 우리 성경에서는 해석하고 있지만, 히브리어 본문을 직역하면 그들을 톱 아래 두었고 써레질과 철도끼질 아래 두었고 벽돌 가마로 지나가게 하였다로 다윗이 매우 끔찍한 방법으로 암몬 사람들을 죽인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는 이 해석을 많이 지지하였지만, 최근에는 다윗이 강제 노역을 시킨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당하다는 견해가 더 많은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이후로 암몬은 다윗 왕국의 속국이 되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다윗은 모든 군사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사무엘하 8장의 전쟁과는 달리 다윗이 전쟁에서 얻은 노획물들을 여호와의 전에 드렸다는 말이 없습니다. 대신 가장 값진 노획물인 왕관을 다윗이 가졌다는 기록만 있습니다. 이것은 전쟁 당시 다윗의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때 다윗은 승리의 영광을 여호와께 돌리지 않고 자신이 그 영광을 차지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윗처럼 사람은 성공을 하거나 어떤 지위에 오르면, 하나님을 쉽게 잊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모두 자신의 공적으로 돌리며 교만해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오늘 주신 것에 감사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며 기도하고 하나님과 늘 동행하며 살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때로 잘못을 징계하여 바로잡으십니다. 징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들로 대하시는 대표적인 표징입니다(12:8). 어떠한 경우에라도 한결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해주시길 원합니다. 죄를 회개하는 사람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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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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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단 선지자에게 책망 당한 다윗

사무엘하 121-14


 

완벽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완전한 사람이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동시에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실수하고 잘못했을 때 그것을 깨닫고 돌이킬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완전한 사람은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나단 선지자는 다윗의 행동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나단은 한 부자가 자기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가난한 사람의 어린 양을 빼앗았다는 이야기를 다윗에게 전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다윗은 맹세하면서 그 부자를 죽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나단은 바로 그 부자가 다윗이라고 말하면서 여호와의 심판을 전했습니다.

 

나단의 비유(1-6)

죄의 근원은 탐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핵심인 탐심을 드러내시며 성도가 죄를 회개하고 더 이상 탐심을 따라 죄를 짓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죄 가운데 숨어 있는 탐심이 드러나 이를 회개하고 경계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1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그가 다윗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되 한 성읍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부하고 한 사람은 가난하니 2그 부한 사람은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 3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한 마리뿐이라 그 암양 새끼는 그와 그의 자식과 함께 자라며 그가 먹는 것을 먹으며 그의 잔으로 마시며 그의 품에 누우므로 그에게는 딸처럼 되었거늘 4어떤 행인이 그 부자에게 오매 부자가 자기에게 온 행인을 위하여 자기의 양과 소를 아껴 잡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나이다 하니 5다윗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6그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이런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네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한지라(1-6)

다윗은 욕망에 눈먼 순간 우정이나 명예를 헌신짝처럼 내던졌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깨뜨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셨다는 사실만으로 사랑의 손을 내밉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자만이 아니라 잘못을 돌이킬 줄 아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1) 부자와 가난한 자의 비유(1-3)

본문에 나오는 가난한 자와 부자의 이야기는 비유로 다윗과 우리아를 빗대어 만든 이야기이며, 다윗을 옭아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다윗의 행위를 보고 계셨던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십니다.

나단은 다윗에게 한 사건에 대한 판단을 부탁하는 것처럼 하며 가난한 자와 부자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한 성읍에 부자인 사람과 가난한 사람이 있었는데, 부자는 양과 소가 심히 많은 반면 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암양은 숫양보다도 더 값이 싼 가축으로 가난한 사람은 가장 값싼 가축 한 마리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심히 많은 소와 양을 가진 자와 극명한 대조를 보여주기 위한 장치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그 어린 양 한마리를 자기와 자기 자식들과 함께 살게 하면서 자신의 작은 빵 조각을 나누어 주고, 자신의 물그릇에서 물을 먹게 하며 자신의 몸에서 자게 하였습니다. 가난한 자는 어린 암양을 가축으로 대한 것이 아니라 거의 가족치럼 딸처럼 키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여행자가 부자에게 찾아오자 자신에게 온 여행자를 접대해야 하는 부자는 자신의 그 많은 가축 중에서 한 마리를 잡는 것도 아까워하였습니다. 고대 근동의 중요한 관습 중에는 주인이 여행자를 잘 대접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이 여행자를 잘 대접한 좋은 예입니다. 그래서 부자는 가난한 자의 암양 새끼를 빼앗아 자신에게 온 여행자를 대접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책임져야 할 여행자를 가난한 자의 한 마리밖에 없는, 그것도 딸같이 여기며 애지중지하던 새끼 양을 잡아 대접한 것입니다. 이것은 부자가 가난한 자에게서 힘으로 어린 암양을 빼앗아 왔음을 암시합니다. 이런 부자의 모습을 보고 매우 인색하고 자비심이 없으며 비열한 인간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 비유는 나단이 다윗에게 쳐놓은 일종의 덫입니다. 나단은 다윗의 악질적이고 비열한 행동을 부자가 가난한 자를 심하게 착취하며 악하게 행동하는 것에 비유하였습니다.

 

(2) 부자의 횡포(4)

여기서 나단이 부자의 모습을 심히 악질적이고 비열하게 묘사한 이유는 두 가지 때문입니다. 첫째는 다윗의 행위가 이 부자처럼 악질적이고 비열하다는 것을 다윗과 독자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둘째는 다윗의 분노를 일으키기 위한 것으로 다윗이 부자에게 몹시 화를 내고 심한 처벌을 내릴수록 다윗은 자신의 죄의 심각성에서 빠져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부자에게 심하게 화를 낼수록 그리고 심하게 처벌할수록 다윗의 죄는 더욱 심각하고 무겁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드러내게 됩니다.

 

(3) 다윗의 반응(5-6)

나단 선지자의 말을 들은 다윗은 그 부자에 대해 매우 화를 냅니다. 그리고 이 일을 행한 사람에 대해 다윗은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며 죽어 마땅한 자라고 선언합니다.

다윗은 이 부자가 자신을 가리키는 줄도 모르고 천하에 죽일 놈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한 것입니다. 이 표현은 사무엘상 20:31-32에서 사울이 다윗을 두고 한 말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사형을 선언하는 법정 용어가 아니라, 죽어 마땅할 만큼 악하고 해를 끼치는 인물이라는 뜻의 관용구입니다. 6절에서 다윗은 4절에서 자신의 것을 아끼느라 남의 것을 함부로 빼앗은 것을 지적하며 네 배로 배상해주라고 명령하는데, 이것은 출애굽기 22:1에서 양 한 마리에 양 네 마리로 보상하라고 한 법률을 따른 처결입니다.

다윗은 나단의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자신의 범죄를 밝히기 위한 비유인 줄도 모르고 부자에 대해 분노하며 죽일 놈이라고 선언함으로써 나단이 쳐놓은 덫에 걸려들었습니다. 이렇게 나단이 곧바로 다윗의 죄를 지적하지 않고 부자와 가난한 자의 비유를 들어 다윗에게 덫을 놓은 이유는 다윗이 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직접적으로 간통과 살인죄를 지적하면 다윗이 인정하지 않고 사울처럼 변명하거나 나단을 죽여 입막음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다윗은 사울처럼 회개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고 하나님께 용서를 받을 기회도 얻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이 자신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깨달아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 이런 방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심판(7-12)

죄의 근원은 구원과 모든 은사를 풍족히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얼마나 풍성하게 부족함 없는 은혜를 주셨는지를 기억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넘치게 허락하셨음에도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기억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7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하여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8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9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10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11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12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7-12)

나단은 비유를 통해 다윗이 죄를 깨닫고 회개하도록 유도합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사용하여 들을 귀 있는 자가 듣게 하셨습니다. 비유는 들을 귀하 없는 자는 깨닫지 못하는 반면, 듣고 깨닫는 자에게는 일반적 진술보다 몇 배의 충격을 가합니다.

 

(1) 여호와의 은혜(7-8)

나단은 다윗이 덫에 걸리자 곧바로 다윗을 옭아맵니다. 나단은 다윗에게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선언합니다. 다윗은 자신을 가난한 자와 동일시하고 부자의 죄에 대해 화를 내며 그에게 판결을 내렸을 것입니다. 당신이 죽일 놈이라고 선언한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아마 다윗은 매우 당황스럽고 충격을 받았을 것이며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필사적으로 숨기려 했던 죄를 나단 선지자가 알고 있다는 것에 당황했을 것입니다. 이런 다윗에게 나딘은 여호와의 말씀을 그대로 전합니다. 다윗을 왕으로 선택하고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사울의 모든 집과 아내들과 이스라엘과 유다를 주신 분이 바로 여호와라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 여호와 자신이 이스라엘과 다윗의 왕이심을 밝히십니다. 현재 다윗이 누리는 모든 지위와 힘과 재물은 모두 여호와께로부터 온 것이고 다윗은 여호와께서 세우신 종일 뿐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다윗에게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인식시켜주십니다.

 

(2) 다윗의 죄(9)

본문에서 다윗이 암몬 사람의 칼을 이용해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취하여 자신의 아내로 삼은 사실을 언급하시는데, 이것은 다윗이 필사적으로 숨기고 싶었던 모든 죄악들을 여호와께서 소상히 알고 계시며 다 보고 계셨다는 것을 다윗에게 알려주신 것입니다.

 

(3) 여호와의 심판(10-12)

이렇게 9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살인죄와 간통죄를 고발한 후에 10-12절에서 죄에 대한 심판을 하십니다. 첫째는 살인죄에 대한 심판으로 다윗의 집에서 영원히 칼이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다윗 왕가에 분란과 살인이 끊임없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으로 다윗이 우리아를 살해한 죄의 대가를 다윗의 집이 치르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간통죄에 대한 심판으로 여호와께서 다윗과 다윗의 집에 재앙을 일으키셔서 다윗의 치들을 다윗의 이웃들에게 주실 것이고, 그들은 대낮에 너의 차들과 동참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다윗이 은밀하게 한 일에 대한 심판을 여호와께서는 모든 사람들 앞에 드러내놓고 하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다윗이 숨기려고 살인까지 한 것에 일침을 가하신 것입니다. 둘째 심판에서는 여호와께서 직접 분란을 일으키겠다고 말씀하시므로 이것은 더 심각한 심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살인과 간통에 대해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다윗의 회개(13-14)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오해한 채 즐겁지 않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종종 자신의 죄가 너무 크고 더러워 하나님께서 결코 용서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인하고 간음한 다윗을 용서하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 하나의 오해는 징계를 형벌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형벌하시면 그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13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14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하고(13-14)

다윗은 나단의 비유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내용은 다윗의 범죄에 대한 엄혹한 징벌 예고였지만, 이에 다윗은 부정하지도, 가혹하다고 항의하지도 않았습니다. 다윗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1) 회개와 용서(13)

하나님의 심판을 들은 다윗은 즉시 여호와께 범죄를 시인하며 용서를 구합니다. 이런 빠른 회개는 사울과 대조되는 것으로 사울은 죄를 지적받았을 때, 죄를 인정하지 않고 변명으로 일관하다가 용서의 기회를 놓쳤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즉시 죄를 시인하며 용서를 구하였고 여호와께서는 다윗을 용서하시어 다윗을 버리거나 죽이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다윗의 죄는 죽음으로 갚아야 할 죄인데, 하나님께서 다윗이 회개하므로 목숨은 살려주신 것입니다.

 

(2) 아들의 죽음 예고(14)

14절에서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다는 것은 다윗의 죄로 인해 여호와의 명성이 크게 훼손되었다는 것으로 다윗은 여호와의 종이기 때문에 다윗의 잘못된 행동은 왕이신 여호와의 명예에도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비록 다윗을 용서하셔서 살려주기는 하셨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선언하신 심판들은 하나도 거두지 않으시고 다윗집에 하나하나 실현되기 시작합니다.

 


니체는 규범이나 관습, 책임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을 초인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 죄로부터 돌이키는 인간을 완전한 사람, 성숙한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면에서 다윗은 신앙인의 귀감이 되며,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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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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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아를 죽이고 밧세바를 아내로 삼는 다윗

사무엘하 1114-27


 

죄를 범하면 그 죄를 숨기려고 계속적인 죄가 뒤따라옵니다. 겉으로 죄악을 숨기고 거룩한 것처럼 보이려 노력했겠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매우 악한 모습으로 점점 망가져 갑니다. 다윗은 간음한 이후에 자신의 죄를 감추려고 자신의 충신을 살인까지 죄를 범합니다. 잠언에서는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28: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은 요압과 그의 군사들이 암몬과 전쟁하는 사이 옥상에서 목욕하는 밧세바를 보고 데려다 동침하는 간음죄를 범합니다. 그런데 밧세바가 임신을 함으로써 다윗의 죄가 들통날 위기에 처하자, 그는 남편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불러내어 밧세바와 동침하게 하여 밧세바가 임신한 아이를 우리아의 아기로 만들려는 악한 시도를 합니다. 하지만 우리아의 충직함 때문에 다윗의 이런 시도가 실패하자, 본문에서 다윗은 또 다른 음모를 꾸밉니다.

 

우리아의 죽음(14-17)

죄는 은밀하고 점진적인 과정을 거칩니다. 처음에는 작은 충동으로 시작했던 죄가 점점 눈덩이처럼 무서운 죄로 불어납니다. 나중에는 헤어 나올 수 없을 정도로 커져 버립니다. 죄가 이처럼 죄를 감추려는 사람을 무서운 사람으로 만듭니다. 죄의 잔악함이 우리를 얼마나 비참한 모습으로까지 몰고 가는지 알 수 있습니다.

 

14아침이 되매 다윗이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손에 들려 요압에게 보내니 15그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그로 맞아 죽게 하라 하였더라 16요압이 그 성을 살펴 용사들이 있는 것을 아는 그 곳에 우리아를 두니 17그 성 사람들이 나와서 요압과 더불어 싸울 때에 다윗의 부하 중 몇 사람이 엎드러지고 헷 사람 우리아도 죽으니라(14-17)

다윗은 우리아를 죽여서라도 죄를 은폐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은폐하려고 할수록 더 많은 사람이 알게 됩니다. 요압을 시켜서 우리아를 궁지에 빠뜨려 죽이라고 시킵니다.

 

(1) 다윗의 편지(14-15)

다윗은 우리아를 자기 집으로 보내서 아내와 동침함으로 자신의 간통죄를 숨기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간밤에도 우리아는 자기 집에 가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는데도 멈추지 않습니다.

요압에게 쓴 편지를 우리아의 손에 들려 전쟁터로 다시 보냅니다. 그 편지 내용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그만 남겨 두고 돌아와 적들에게 죽게 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우리아를 전장에서 적과 싸우다 전사한 것처럼 꾸며 죽이라고 한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간통죄를 덮기 위해 살인이라는 더 큰 죄를 계획하였습니다. 그 계획을 우리아 본인의 손에 들려서 요압에게 보내는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행동을 합니다. 구약 전체에서 가장 잔인한 살인 방법입니다.

이 편지를 받은 요압은 다윗의 의도를 분명히 알고, 확실하게 성공하기 위해 일부러 암몬 군사들 중에 가장 용맹한 군사들이 있는 곳을 알아내어 그곳으로 우리아를 보냈습니다.

 

(2) 우리아의 죽음(16-17)

암몬 사람들이 성에서 나와서 요압과 전쟁한 결과 다윗의 부하들 중에 몇 명이 죽었습니다. 그들 중에 우리아가 속해 죽었습니다. 우리아 한 명을 죽이기 위해 그와 같이 있던 다윗의 부하들도 목숨을 잃게 한 것입니다. 결국 신실하고 우직하게 다윗에게 충성하던 우리아는 다윗에게 아내도 빼앗기고 목숨까지 빼앗기는 가장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고, 죄 없는 부하들도 살해당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너무 많은 무죄한 피를 흘리게 하였습니다.

전에 다윗이 자신을 조롱한 나발을 죽이려고 할 때는 지혜로운 아비가일이 다윗을 막아 무죄한 피 흘리는 것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윗을 막는 사람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요압은 오히려 다윗의 계획을 실행해주면서 우리아뿐만 아니라 아무런 관계도 없는 다윗의 부하들까지 죽인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바라볼 때는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다윗이 죄짓는 것을 막아주셨지만, 다윗이 더 이상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채 자신의 욕망대로 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개입하지 않고 내버려 두십니다. 그동안 다윗은 하나님께 은혜를 많이 받았고 이때는 인격적이고 모범적인 모습을 오래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진 지금의 다윗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여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는 잔인무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런 다윗의 모습을 보면서 인간이란 존재가 기본적으로 얼마나 악한 본성을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요압의 보고(18-25)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먹고 숨은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셨습니다. 또한 다윗에게도 찾아오셨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죄악을 해결해주시길 원하십니다. 죄인이 죄를 해결할 순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진리 앞에 섰을 때, 죄의 문제는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마음속에 무거운 짐들이 모두 해결 받고 매우 자유스러울 것입니다.

 

18요압이 사람을 보내 그 전쟁의 모든 일을 다윗에게 보고할새 19그 전령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전쟁의 모든 일을 네가 왕께 보고하기를 마친 후에 20혹시 왕이 노하여 네게 말씀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성에 그처럼 가까이 가서 싸웠느냐 그들이 성 위에서 쏠 줄을 알지 못하였느냐 21여룹베셋의 아들 아비멜렉을 쳐죽인 자가 누구냐 여인 하나가 성에서 맷돌 위짝을 그 위에 던지매 그가 데벳스에서 죽지 아니하였느냐 어찌하여 성에 가까이 갔더냐 하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왕의 종 헷 사람 우리아도 죽었나이다 하라 22전령이 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요압이 그를 보낸 모든 일을 다윗에게 아뢰어 23이르되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우세하여 우리를 향하여 들로 나오므로 우리가 그들을 쳐서 성문 어귀까지 미쳤더니 24활 쏘는 자들이 성 위에서 왕의 부하들을 향하여 쏘매 왕의 부하 중 몇 사람이 죽고 왕의 종 헷 사람 우리아도 죽었나이다 하니 25다윗이 전령에게 이르되 너는 요압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이 일로 걱정하지 말라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삼키느니라 그 성을 향하여 더욱 힘써 싸워 함락시키라 하여 너는 그를 담대하게 하라 하니라(18-25)

요압은 다윗의 명령에 충실히 이행하여 우리아를 죽게 합니다. 그는 다윗의 진정한 충신이었습니다. 왕이라도 잘못된 결정을 하면 목숨을 걸고 반대하고 막을 줄 알아야 충신입니다. 다윗에게 죄는 숨긴다고 감추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라도 남김없이 다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1) 요압의 지시(18-21)

우리아를 죽인 요압은 이 소식을 다윗에게 알립니다. 그 전령에게 전쟁의 모든 상황을 왕에게 보고한 후에 혹시 왕이 요압의 군대가 성에 너무 가까이 가서 전쟁에서 부하들이 죽은 일에 대해 화를 낼 경우 헷 사람 우리아도 죽었다는 말을 하라고 일러줍니다. 이것은 다윗의 목적이 달성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면 모든 잘못을 덮어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요압의 말을 종합해보면, 요압은 성문을 열고 나온 암몬과 전투하다가 우리아 부대에게 가장 위험한 곳인 성 바로 앞까지 쫓아가게 만들어놓고 자신의 부대는 회군해버리고, 결국 우리아와 우리아의 부대는 성에서 날아오는 화살과 창과 돌 등에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요압은 일부러 우리아가 암몬 사람의 화살에 맞아 죽도록 성 바로 앞까지 보낸 것입니다.

21절에서 요압은 성 위에서 여자가 던진 맷돌에 맞아 죽은 여릅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의 예를 들면서 다윗이 화를 낼 것을 예상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여룹바알 대신 여룹베셋이라고 하였는데, 이 단어는 여기에 단 한 번 나오는 것으로 여룹바알에 대한 잘못된 표기인 것 같습니다. 여기서 아비멜렉은 성 가까이 다가갔다가 맷돌에 맞아 죽은 어리석은 인물의 예로 나타납니다.

 

(2) 전령의 보고(22-24)

전령이 다윗에게 와서 요압이 일러준 대로 보고하는데 전쟁의 상황이 세 번 반복되는 이야기 중에서 가장 자세하게 다루어지고 있으며, 우리아가 어떻게 죽었는지 자세하게 알 수 있습니다. 전령은 보고의 맨 마지막에 왕의 부하들의 죽음과 함께 우리아의 죽음을 알립니다. 우리아의 죽음을 들은 다윗은 전쟁에서 피해를 본 것에 대해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걱정하지 말라고 요압을 위로합니다. 그러면서 칼이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삼킨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다윗의 부하들의 죽음은 전쟁에서 항상 일어날 수 있는 병가지상사이니 크게 신경 쓸 필요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요압이 우리아를 죽이기 위해 다윗의 부하들까지 같이 죽인 것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라는 위로의 말이며, 우리아를 죽어준 것에 대해 간접적으로 감사를 표현한 것입니다. 다윗은 전령에게 이제 힘을 다해 성을 함락시키라는 명령을 전달하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를 담대하게 하라고 명령하는데, 이것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전쟁에 온 힘을 다하라는 의미로, 요압이 우리아를 죽인 일에 대해 자신이 매우 만족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 것입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죽음 소식에 매우 만족해하며, 이 일로 목숨을 잃은 자신의 부하들에 대해서는 조금도 미안해하거나 애도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아의 장례(26-27)

우리가 알고도 죄를 짓는 것을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시고 결국 행한 대로 심판하시는 분임을 안 믿어서 그렇습니다. 믿음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믿음을 어디에 쓸 것입니다. 우리아의 전사 소식을 들은 다윗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시길 바랍니다.

 

26우리아의 아내는 그 남편 우리아가 죽었음을 듣고 그의 남편을 위하여 소리내어 우니라 27그 장례를 마치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를 왕궁으로 데려오니 그가 그의 아내가 되어 그에게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26-27)

우리아의 죽음에 대한 한줄평이 세 번 반복되는 동안 다윗은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일으키지 않습니다. 오직 완전범죄라고 여기며 안도할 뿐입니다. 이런 다윗에 대해 성경 저자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라는 한줄평으로 다윗에 대해 평가합니다.

 

(1) 곡하는 밧세바(26)

우리아가 죽었다는 사실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에게 알려졌고, 그녀는 남편을 위해 애곡하며 우리아를 위해 장례를 치러줍니다. 보통 이스라엘에서의 애곡의 기간은 7일이며, 다윗은 이 기간이 끝나자 바로 밧세바를 왕궁으로 데리고 와서 아내로 삼습니다.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서는 시간을 지체하면 안 되기 때문에 여기서도 다윗은 매우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런 다웠의 행동을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죽은 부하의 아내를 자신의 부인으로 삼아서 돌보아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다윗에 대해 좋게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2) 결혼하는 밧세바(27)

마침내 다윗은 간통했다는 명예를 실추당하지 않고 자신의 계획대로 밧세바를 아내로 맞이하고 그녀를 통해 아들도 얻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아마도 자신의 죄를 잘 숨겨 명예를 지켜냈고 예쁜 아내와 아들까지 얻었다고 만족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27절 마지막에 화자는 다윗의 모든 행동을 지켜보고 계셨던 여호와의 평가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다윗이 행한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아무도 모르게 성공적으로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하였지만, 여호와께서는 이런 다윗을 악하게 보시며 다윗이 저지른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실 준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먼저는 죄악을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속일 수 없습니다. 다윗의 행동을 보시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악하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다윗은 지금까지 자신의 권력으로 죄를 가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을 가릴 수 없었습니다. 다윗처럼 계획대로 죄를 감추는 것이 성공했다고 해서 다 되었다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죄를 감추고 은닉하려고 애쓰지 말고 정직하게 회개하는 것이 우리가 살길이라는 것을 잊지 않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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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1-01)

 


방심과 욕심이 불러온 범죄

사무엘하 11장 1-13절


다윗은 하나님께 인정받을 만큼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윗도 한순간의 방심이 죄를 불러오게 하였습니다. 음욕으로 범죄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다윗보다 믿음이 약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금도 사단은 넘어질 자들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베드로전서 5:8)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독점하다시피 한 다윗은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승승장부 하였습니다. 그러나 잠깐의 방심으로 밧세바와 간음의 죄를 범하고, 급기야 밧세바의 남편을 살인하는 범죄까지 이르게 되는 내용입니다. 축복의 자리에 있을 때 죄를 범하지 않도록 더 조심해야 합니다.
 

다윗과 밧세바의 동침(1-5)

성도는 서 있는 곳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의 장소에 서 있어야 합니다. 다른 곳에 있을 때, 우리도 다윗 못지않게 위험한 자리에 서게 됨을 배웁니다. 유혹은 지역과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가장 평온한 시간, 가장 거룩해 보이는 사람에게도 우혹이 닥칩니다. 지금 우리가 서 있어야할 자리가 어디입니까?
 
1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있는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2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3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가 아뢰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 4다윗이 전령을 보내어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고 그 여자가 그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그 여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5그 여인이 임신하매 사람을 보내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임신하였나이다 하니라(1-5)
전쟁의 선두에서 백성을 보호하는 것이 왕의 사명인데(삼상 8:19) 다윗은 요압과 그 신복과 온 이스라엘 군대만 보내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습니다. 사명을 소홀히 하고 지도자 노릇을 중단한 상태에서 유혹이 찾아왔습니다.
 
(1) 배경 설명(1)
본문은 사건의 배경을 설명하는 부분으로 시간적 배경은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입니다. 이것은 전쟁할 때가 되었다는 의미로 우기가 끝나고 추수가 시작되는 봄이 되기 전의 시기를 가리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관습적으로 이 시기에 백성들을 소집하여 전쟁을 하였고 대개 왕들이 군대를 이끌고 나갔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왕이 출전해야 하는 것은 아니고, 왕궁의 정무나 외교적 일이 있으면 출전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다윗도 이번에는 요압과 그의 부하들만 전쟁에 보내어 암몬 자손을 치게 하였습니다. 이 전쟁은 10:14에 언급된 전쟁의 연장으로 요압은 군대를 이끌고 랍바로 도망한 암몬을 치기 위해 출전하였고, 암몬 자손을 친 다음에 랍바를 포위하였습니다. 요양은 암몬과의 두 번째 전쟁에서도 승리를 거두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암몬과의 첫 번째 전쟁(삼하 10:7)에서처럼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고, 화자는 다윗이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다고 보고합니다.
 
(2) 목욕하는 밧세바(2-3)
부하들이 전쟁터에 나가 있는 사이에 다윗은 한가한 저녁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낮잠을 자고 저녁에 일어나 시원해진 왕궁 지붕을 한가롭게 산책하였습니다. 그러다 한 여인이 옥상에서 목욕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 여인은 매우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의 이름은 밧세바였습니다. 그녀는 시원해진 옥상에서 햇빛에 따뜻해진 물로 씻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녀가 옥상에서 목욕한 것을 두고 다윗을 유혹하기 위한 고의적인 행동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본문의 의도와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본문은 밧세바를 철저히 수동적인 인물로 그리고 있으며, 다윗이 모든 일을 주도한 것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목욕을 하고 있는 밧세바를 보았다는 것은 단지 일어난 사실을 언급한 것입니다. 이를 보고 다윗이 그냥 지나칠지 아니면 사람을 보내어 데리고 올지는 철저히 다윗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아름다운 밧세바가 목욕하는 모습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하였고, 사람을 보내어 누구인지 알아보게 하였습니다. 이미 다윗의 마음에는 음욕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녀가 엘리암의 딸이며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밧세바의 아버지 엘리암과 밧세바의 남편 헷 사람 우리아는 모두 다윗의 37명의 용사 중에 들어 있는 다윗 왕국에서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던 인물들입니다(삼하 23:34,39). 우리아는 헷 사람으로 다윗 당시에 히타이트 제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지만, 제국의 남은 자손들이 시리아에서 헷 족속의 형태로 생존하고 있었고 우리아는 여기 출신으로 이스라엘에 이주하여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의 이름 우리아는 ‘여호와는 빛이시다’라는 뜻의 이름으로 추측해 보건데 그는 이스라엘에서 태어났고 여호와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3) 임신한 밧세바(4-5)
다윗은 밧세바가 전쟁터에 나가 있는 부하의 아내라는 사실을 알고도 사자를 보내어 그녀를 데려와 동침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때는 밧세바가 부정함에서 벗어나 정결 의식을 막 치른 때였기에 임신이 가능한 상태였습니다. 여기서 이것을 언급한 것은 밧세바가 임신한 아이가 우리아의 아기가 아니라 다윗의 아기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기 위한 것입니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여기서 다윗은 매우 주도적으로 밧세바에 대해 알아보고 부르고 동침하고 있습니다. 밧세바는 이 장면에서 다윗이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매우 수동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본문이 다윗의 적극적인 모습을 강조한 것은 다윗의 간음 사건이 어쩌다 여자의 꼬임에 넘어가 실수로 벌어진 일이 아니라 다윗이 적극적이고 고의적으로 행한 범죄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다윗은 밧세바와 관계를 가진 후에 아무도 모르게 죄를 덮으려고 했지만. 5절에서 밧세바가 다윗에게 자신이 임신하였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간음죄는 덮기 어려운 심각한 문제가 되어버렸습니다. 여기서 밧세바는 유일하게 말을 하고 있는데, 이 말은 모든 비극의 시작이 되는 매우 결정적인 말이었습니다.
 

우리아의 소환(6-9)

거짓과 속임은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전쟁에 나가 있던 밧세바의 남편을 불러들여, 아내와 동침케 하여 자신의 허물을 덮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사람도 언제든 순식간에 죄악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 줄로 생각하는 사람은 항상 넘어질까 조심하며, 악한 마귀가 틈타지 못하도록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6다윗이 요압에게 기별하여 헷 사람 우리아를 내게 보내라 하매 요압이 우리아를 다윗에게로 보내니 7우리아가 다윗에게 이르매 다윗이 요압의 안부와 군사의 안부와 싸움이 어떠했는지를 묻고 8그가 또 우리아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내려가서 발을 씻으라 하니 우리아가 왕궁에서 나가매 왕의 음식물이 뒤따라 가니라 9그러나 우리아는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고 왕궁 문에서 그의 주의 모든 부하들과 더불어 잔지라(6-9)
무명의 목동 다윗은 블레셋의 위대한 거인 골리앗 장수를 물맷돌 다섯 개로 이겼지만, 통일 왕궁의 목자 다윗은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없는 가련한 한 여인에게 무너졌습니다. 욕정이 이끄는 대로 권력을 남용하여 부하의 아내를 취하고 말았습니다.
 
(1) 우리아 소환(6)
밧세바가 임신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요압에게 사람을 보내어 우리아를 자신에게 보내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요압은 우리아를 다윗에게 보냅니다. 여기서 다른 설명은 일체 없이 사자를 보내고 우리아를 보내라고 명령하고 우리아를 보내는 것을 표현한 단순한 문장을 통해서 다윗이 매우 서둘러 우리아를 불러들였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2) 우리아의 보고(7)
다윗은 우리아가 오자 요압의 안부와 군사들의 안부와 전쟁의 상황을 물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전쟁의 상황을 알기 위해 우리아를 부른 것처럼 보이기 위한 행동입니다.
 
(3) 우리아의 불복종(8-9)
다윗의 진짜 속셈은 8절에 나타납니다. 그는 우리아에게 집으로 가서 ‘발을 씻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발을 씻으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여행자가 집에 왔을 때 발을 씻겨 줌으로써 환영의 표시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발’이란 단어는 남성성을 은유적으로 표현할 때도 사용하는 단어이기 때문에, 다윗은 일부러 ‘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아내와 관계를 가지라는 암시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다윗은 밧세바와의 간음죄를 감추기 위해 우리아를 밧세바와 동침하게 하여 자신의 아기를 우리아의 아기인 것처럼 속이려고 한 것입니다. 또 우리아의 수고를 치하하는 의미로 많은 하사품을 보내어 자신이 매우 좋은 왕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하지만 우리아는 다윗의 생각과 다르게 집으로 가지 않고 왕궁 문에서 왕의 모든 부하들과 같이 잠을 잤습니다. 여기서 ‘그의 주인의 부하’라는 표현을 통해 우리아는 다윗을 자신이 충실하게 섬겨야 할 주인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런 우리아의 충직한 모습은 자신에게 충직한 부하의 아내를 탐내어 간통하고 그 결과를 뒤집어 씌우려는 다윗의 비열한 모습과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이렇게 우리아가 다윗의 계획과 다르게 행동함으로 다윗의 계획은 실패하게 됩니다.
 

우리아의 결심(10-13)

성도들은 항상 방심하거나 욕심을 부리지 않아야 합니다. 대신에 항상 성령으로 충만하게 깨어있어야 합니다. 죄를 감추지 않고 속히 회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죄악을 감춘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은 자신의 범죄를 감추려다가 오히려 더 죄를 키우고 말았습니다.
 
10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아뢰되 우리아가 그의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였나이다 다윗이 우리아에게 이르되 네가 길 갔다가 돌아온 것이 아니냐 어찌하여 네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11우리아가 다윗에게 아뢰되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야영 중에 있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부하30들이 바깥 들에 진 치고 있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하지 아니하기로 왕의 살아 계심과 왕의 혼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나이다 하니라 12다윗이 우리아에게 이르되 오늘도 여기 있으라 내일은 내가 너를 보내리라 우리아가 그 날에 예루살렘에 머무니라 이튿날 13다윗이 그를 불러서 그로 그 앞에서 먹고 마시고 취하게 하니 저녁 때에 그가 나가서 그의 주의 부하들과 더불어 침상에 눕고 그의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니라(10-13)
다윗은 범죄를 은패하기 위해 우리아를 불러 아내와 동침하도록 시도합니다. 자신과 우리아 사이에 깨어진 ‘샬롬’을 감추려고 안달하는 자가 뻔뻔하게 요압과 군사와 싸움의 안무를 묻고 있습니다.
 
(1) 다윗의 질문(10)
다윗은 집으로 가지 않은 우리아를 불러 왜 먼 길에서 돌아왔는데 집에 가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다윗의 입장에서는 이런 우리아의 행동이 매우 마음에 안 들었지만, 우리아를 걱정하는 척하며 집으로 가지 않은 이유를 물은 것입니다.
 
(2) 우리아의 대답(11)
이에 대해 우리아는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야영 중에 있고 자신의 상사인 요임과 왕의 군대가 전쟁터에 있는데 어떻게 자신만 편안하게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아내와 잘 수 있냐고 말하며, 자신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을 왕의 목숨을 걸고 맹세합니다. 왕에게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충성 맹세를 한 것입니다.
우리아가 궤와 전쟁터와 아내와의 잠자리를 언급한 것은 전쟁을 수행할 때 진영에서 정결해야 하는 규범과 연결됩니다. 언약궤가 함께하는 진영은 여호와께서 함께하시는 거룩한 곳이기에, 여자와 자는 것이 금지됩니다. 남성이 설정하면 하루 동안 부정한 상태가 되어 진의 거룩성을 훼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레15:16-18).
물론 우리아는 지금 전쟁터에 있는 것도 아니고 진영으로 돌아가기 하루 전에만 조심하면 상관이 없는 상황이지만, 비록 예루살렘에 와 있어도 여전히 전쟁터에 있는 사람들과 연결된 것으로 생각하였고, 그래서 자신의 정결을 지키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혹시라도 자신이 부정하게 되어 전쟁터에 있는 다윗 진영의 거룩성이 훼손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정결법을 최대한으로 지키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쓰며 이스라엘 군대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노력하는 우리아의 모습은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도 죄로 느끼기는커녕 그 죄를 덮기 위해 노력하는 다윗의 모습과 대조를 이룹니다. 여기서 그동안 하나님 앞에서 가장 충성스럽고 의로웠던 다윗의 모습은 사라지고 자신의 죄를 덮기에 급급한 다윗의 모습만이 나타납니다.
 
(3) 우리아의 변함없는 태도(12-13)
다윗은 우리아가 자신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자, 다시 한 번 우리아를 집으로 보내어 밧세바와 자게 하려고 시도합니다. 다윗은 우리아에게 하루 더 예루살렘에 머물라고 하며 내일은 보내주겠다고 합니다.
본문에서 우리아가 그날과 그 다음 날 예루살렘에 머물렀다는 것은 다윗의 권고로 이틀 동안 예루살렘에 머물렀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왕이 충성스러운 신하를 배려하여 하루 더 쉬게 해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다윗의 진짜 속셈은 13절에 나오는데, 그날 우리아를 불러서 그와 함께 먹고 마시며 일부러 우리아를 취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아가 취하면 술김에 집으로 가서 아내와 동침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생각과는 달리 우리아는 술이 취한 상태에서도 집으로 가지 않고 어제처럼 부하들과 함께 잤습니다. 본문은 우리아가 집에 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언급하여 강조합니다. 우리아는 자신의 맹세를 매우 충실하게 지킨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우직한 충성심의 대가는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왕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욕망을 잡고 성문 앞에서 부하들과 밤을 보낸 우리아의 모습은 자기 욕망을 억제하지 못해 하나님에 대한 충성성을 저켜리고 부하에 대한 신의를 버린 다윗과 대조됩니다.
 


죄는 위장하고 감춘다고 해결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우리아를 불러 밧세바와 동침하도록 하려고 했습니다. 처음 시도가 실패로 끝나자 다시 시도하였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이러한 시도는 죄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이 아니었습니다. 죄는 위장하고 감춘다고 해서 결코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모르게 비밀리에 죄를 지었지만, 죄의 결과는 결코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죄를 짓게 되면 반드시 흔적이 남게 됩니다. 죄의 결과가 금방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죄가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에게도 덮어둔 죄가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는 그 죄를 덮기 위한 헛된 위장술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자복하고 해결 받는 주의 백성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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