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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9-02)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얻는 다윗

사무엘하 19장 16-39절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과 만나는 일은 괴롭습니다. 말의 숨은 의도를 파악해야 하는 관계는 피곤하기 그지없습니다.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맹세하지 않아도 그 말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말의 진실성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윗은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에 슬픔에 잠겨 압살롬의 이름을 부르면 큰 소리로 웁니다. 이런 다윗에 대한 이야기가 알려지게 되면서 다윗의 군대는 조용히 성으로 돌아옵니다. 이에 요압은 다윗에게 화를 내며 당장 일어나 나가서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지 않으면 다윗을 버리겠다고 협박합니다. 이런 요압의 말에 다윗은 왕의 임무를 감당하였고, 백성들은 다윗을 다시 왕으로 모실 계획을 세웁니다.

 

다윗에게 용서를 비는 시므이(16-23)

용서는 다른 사람의 죄를 기억하지 않고 덮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용서했다고 하면서도 똑같은 상황이 생기면 과거의 실수와 죄까지 들취냅니다. 말로는 용서했다고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 사람의 잘못과 실수를 차곡차곡 쌓아 두는 것입니다. 또 용서했다고 하면서도 그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용서와 화해가 이뤄지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죄를 모두 용서해 주셨고, 그것을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16바후림에 있는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급히 유다 사람과 함께 다윗 왕을 맞으러 내려올 때에 17베냐민 사람 천 명이 그와 함께 하고 사울 집안의 종 시바도 그의 아들 열다섯과 종 스무 명과 더불어 그와 함께 하여 요단 강을 밟고 건너 왕 앞으로 나아오니라 18왕의 가족을 건너가게 하며 왕이 좋게 여기는 대로 쓰게 하려 하여 나룻배로 건너가니 왕이 요단을 건너가게 할 때에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왕 앞에 엎드려 19왕께 아뢰되 내 주여 원하건대 내게 죄를 돌리지 마옵소서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오시던 날에 종의 패역한 일을 기억하지 마시오며 왕의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 20왕의 종 내가 범죄한 줄 아옵기에 오늘 요셉의 온 족속 중 내가 먼저 내려와서 내 주 왕을 영접하나이다 하니 21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대답하여 이르되 시므이가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를 저주하였으니 그로 말미암아 죽어야 마땅하지 아니하니이까 하니라 22다윗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너희가 오늘 나의 원수가 되느냐 오늘 어찌하여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사람을 죽이겠느냐 내가 오늘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을 내가 알지 못하리요 하고 23왕이 시므이에게 이르되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고 그에게 맹세하니라(16-23)

 

시므이에 대한 다윗의 용서는 귀했으나 온전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왕 되심이 아니라 자신의 왕 됨으로 인한 용서였고, ‘오늘’이라는 단서가 붙은 용서였습니다. 시므이가 죽지 않으리라는 다윗의 맹세는 그가 사는 날까지만 유효했습니다. 결국 그 맹세는 시켜지지 않습니다.

 

(1) 요단으로 온 시므이(16-17)

다윗이 요단강으로 오자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급하게 다윗을 맞으러 나옵니다. 그는 이전에 다윗이 바후림을 지날 때 나와서 계속 저주하여 다윗 일행이 바후림에서 쉬지 못하게 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제 다윗이 왕으로 되돌아오고 있기에 다윗에게 보복당할 것이 두려워 다윗을 영접하러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베냐민 사람 1,000명도 시므이와 동행하였습니다. 아마도 시므이뿐만 아니라 바후림과 그 부근에 거하던 베냐민 지파 사람들도 다윗을 지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성경은 베냐민 지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시므이의 행동만을 기록했지만, 베냐민 사람들도 시므이와 함께 행동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음식을 제공하며 므비보셋을 모함했던 시바는 이번에도 재빠르게 움직여 자신의 아들들과 종들을 대거 이끌고 나와 다윗을 환영합니다. 본문에서는 시바가 ‘다윗 앞에서 요단강으로 돌진하였다’고 표현하여 열광적으로 다윗을 환영하고 있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온몸으로 다윗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다윗을 위해 많은 식량을 준비한 것처럼 이번에는 배를 준비하여 다윗을 맞이하러 직접 요단을 건너가 다윗이 무사히 요단을 건널 수 있게 세심한 배려를 해줍니다. 이런 시바의 행동은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충성스럽고 믿을 만해 보이지만, 므비보셋의 신하로서는 전혀 신뢰할 수 없습니다. 그의 행동은 철저히 계산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면 므비보셋과 만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이 므비보셋을 모합한 말이 거짓이었다는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이것을 대비하여 다윗이 므비보셋의 말과 자신의 말 중에서 자신의 말을 믿게 하거나 혹시 믿지 않더라도 최소한 자신에게 주는 벌을 줄여보기 위해 다윗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노력은 보답을 받게 됩니다.

 

(2) 왕을 만난 시므이(18-20)

다윗이 요단을 건너오자 시므이는 다윗 앞에 엎드려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면서 자신에게 벌을 내리지 말아 달라고 간청합니다. ‘죄를 돌리지 마옵소서’, ‘기억하지 마옵소서’,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라는 반복적인 말을 통해 매우 간절하게 다윗의 용서를 구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합니다. 하지만 시므이는 말로는 간절하게 용서를 빌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지파인 베냐민 사람 1,000명을 대동하고 와서 다윗이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수 없게 압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1,000명의 베냐민 사람은 단순한 사람들이 아니라 언제든지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로 겉으로 보기에는 다윗을 환영하는 인파 같지만 실제로는 여차하면 시므이의 보호막이 되어줄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런 시므이의 말과 행동의 괴리는 시므이의 사죄가 진심이 아님을 나타냅니다. 정말로 용서를 구하고자 한다면 혼자 와서 용서를 구하고 살리든 죽이든 처분에 맡기겠다고 하는 것이 진정한 사죄일 것입니다.

 

(3) 시므이를 용서한 다윗(21-23)

이런 상황에서 다윗의 충직한 신하인 아비새는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한 것을 언급하며 그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다윗을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표현함으로써 다윗을 저주한 것이 다윗뿐만 아니라 다윗을 선택하신 여호와께 대한 불경죄임을 밝힘으로써 시므이를 죽일 정당한 죄목을 찾은 것입니다. 사람을 저주하거나 비방한 것은 죽을 죄가 아니지만, 여호와를 비방하거나 저주했다면 죽을죄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다윗은 아비새에게 이것은 개인적인 일이니 상관하지 말라고 말리면서, 오히려 아비새를 자신의 대적자(사탄)라고 말합니다. 다시 이스라엘의 왕이 된 이 좋은 날 사람을 죽이는 일을 행하지 않을 것이며 시므이를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시므이의 사죄와 다윗의 용서는 진심 어린 사죄와 용서가 아니라 일종의 정치적인 행동들입니다. 시므이는 1,000명의 사람들을 끌고 와 세를 과시하며 자신을 용서하라고 말하고 있고, 힘에서 열세이며 더 이상 피 흘리는 싸움을 할 수 없는 다윗은 선택의 여지가 없기에 시므이를 용서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렇게 힘으로 사죄와 화해를 하는 것은 진정한 사죄와 화해가 아니며 또 하나의 폭력입니다. 다윗은 이때 당한 모욕을 잊지 못하고 후에 솔로몬에게 시므이를 편히 죽게 하지 말라고 유언합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은 시므이에게 당한 모욕을 용서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다윗의 행동에 대해 옳다 그르다 쉽게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자신의 화해의 손짓에 응해주는 사람에게는 용서와 자비를 보여주지만, 자신을 힘으로 누르며 화해를 강요하는 사람에게는 모욕감을 느끼는 다윗의 모습에서 우리 모습을 발견할 수 있고, 진정한 화해와 용서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합니다.

 

다윗을 마중 나온 므비보셋(24-30)

요즘 감사의 조건이 무엇입니까? 좋은 직장에 입사하고, 원하는 배우자를 만나고, 준비하던 일들이 잘 진행되는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하박국의 말씀처럼(합 3:17) 감사해야 합니다. 사업이 망하고, 직장에서 쫓겨나고, 병들어 다시 회복될 가망이 없다 해도 죄인인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할 수 있습니다. 구원이 가장 큰 감사의 제목입니다.

 

24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이 내려와 왕을 맞으니 그는 왕이 떠난 날부터 평안히 돌아오는 날까지 그의 발을 맵시 내지 아니하며 그의 수염을 깎지 아니하며 옷을 빨지 아니하였더라 25예루살렘에서 와서 왕을 맞을 때에 왕이 그에게 물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네가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더냐 하니 26대답하되 내 주 왕이여 왕의 종인 나는 다리를 절므로 내 나귀에 안장을 지워 그 위에 타고 왕과 함께 가려 하였더니 내 종이 나를 속이고 27종인 나를 내 주 왕께 모함하였나이다 내 주 왕께서는 하나님의 사자와 같으시니 왕의 처분대로 하옵소서 28내 아버지의 온 집이 내 주 왕 앞에서는 다만 죽을 사람이 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나 종을 왕의 상에서 음식 먹는 자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내게 아직 무슨 공의가 있어서 다시 왕께 부르짖을 수 있사오리이까 하니라 29왕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또 네 일을 말하느냐 내가 이르노니 너는 시바와 밭을 나누라 하니 30므비보셋이 왕께 아뢰되 내 주 왕께서 평안히 왕궁에 돌아오시게 되었으니 그로 그 전부를 차지하게 하옵소서 하니라(24-30)

 

므비보셋은 돌아오는 다윗을 맞이하면서 초라한 행색을 유지합니다. 시바의 배반에 절뚝발이 므비보셋이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은 이렇게 해서라도 도주 중인 왕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뿐이었을 것입니다. 이로써 다윗과 오해를 풀고 화해하였다. 다윗은 왕좌만이 아니라 사람도 얻었습니다.

 

(1) 다윗을 만나러 온 므비보셋(24-25)

므비보셋과 다윗이 만난 장소가 어디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24절에서는 므비보셋이 요단으로 내려갔다고 하고, 25절에서는 예루살렘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사무엘하 20:2에서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요단에서 만난 것으로 보입니다. 므비보셋도 다윗을 영접하기 위해 요단으로 나옵니다. 본문은 므비보셋이 다윗이 성을 떠난 날부터 평안히 돌아오는 날까지 발을 피거나 발톱을 깎지 않았으며 수염도 깎지 않고 옷도 빨지 않은 상태로 지냈다고 설명합니다. 우리말에서 ‘발을 맵시 내지 않았다’라고 번역하였는데, 이것은 발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발을 씻거나 발톱을 깎거나 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행동은 애도의 표시로 므비보셋이 다윗이 성을 떠난 것에 대해 매우 슬퍼하며 애도를 표하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므비보셋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뒤에 나오는 므비보셋의 말이 진실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2) 므비보셋의 거짓말(26-28)

다윗은 므비보셋을 보자, 제일 먼저 왜 자신과 함께 가지 않았느냐고 묻습니다. 이미 시바에게서 므비보셋이 다윗이 폐위된 것을 기뻐하며 반역을 일으킬 마음을 품고 있다는 말을 들어서 므비보셋을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분명히 므비보셋의 행색을 보고 시바의 말과 달리 므비보셋이 자신이 없는 동안 자신에 대한 애도의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의심을 거둘 수 없는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이유를 물은 것입니다.

이에 대해 므비보셋은 자신은 분명히 나귀를 타고 왕과 함께 떠나려고 하였지만, 자신의 종이 속이는 바람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고 말하고, 또한 자신의 종이 자신을 모함한 사실도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므비보셋이 말하는 좋은 ‘시바’를 가리킵니다. 이 부분에서 시바의 말과 므비보셋의 말이 달라집니다. 하지만 므비보셋은 더는 변명하지 않고 다윗의 처분에 맡기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미 사울의 왕권이 무너지고 다윗이 왕위에 오르면서 자신과 자신의 집은 죽어 마땅하지만, 왕의 호의를 받아 왕의 상에서 밥을 먹는 은혜까지 누리게 되었는데 어떻게 불공평하다고 말하며 억울하다고 말하겠냐고 합니다. 므비보셋은 다윗의 판단에 맡기면서 다윗이 ‘하나님의 사자’ 즉 천사와 같은 신적 지혜가 있는 사람이니 누가 옳은지 그른지 잘 판단할 것이라고 합니다.

 

(3) 다윗의 결정(29-30)

이런 므비보셋의 말에 다윗은 ‘왜 그렇게 말하느냐?’고 하면서 일단 누그러진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일단 므비보셋의 말을 믿어준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다윗이 므비보셋의 원래 재산을 다 돌려주지 않고 시바와 나누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므비보셋의 말을 완전히 믿은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만일 므비보셋의 말이 다 옳다고 생각했다면 다윗은 자신의 주인을 모함한 시바에게 벌을 주거나 시바에게 준 모든 것을 빼앗아 므비보셋에게 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을 보면 므비보셋의 말을 전적으로 믿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에게 계속해서 지원을 아끼지 않은 시바의 편을 들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의 말에 므비보셋은 다윗이 평안히 왕궁으로 돌아왔으니 재산은 모두 시바에게 주라고 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자신보다 시바를 더 신뢰한다는 것을 눈치 챈 므비보셋이 자신의 진정성을 보이기 위해 한 말입니다. 이 말에 대한 다윗의 반응이나 결국 재산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렇게 다윗과 요나단의 언약으로 베푼 므비보셋에 대한 은혜도 반역이라는 사건을 겪으며 흔들리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르실래와 만난 다윗(31-39)

대가를 기대하면서 인정을 받으려는 헌신은 진정한 헌신이 아닙니다. 이 정도 했으니 그 대가로 어느 정도 대우해 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헌신한다면 어느 순간 교만해져 자신을 높이려 하고 당연하다는 듯이 하나님께 보상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무익한 종이라는 생각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31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왕이 요단을 건너가게 하려고 로글림에서 내려와 함께 요단에 이르니 32바르실래는 매우 늙어 나이가 팔십 세라 그는 큰 부자이므로 왕이 마하나임에 머물 때에 그가 왕을 공궤하였더라 33왕이 바르실래에게 이르되 너는 나와 함께 건너가자 예루살렘에서 내가 너를 공궤하리라 34바르실래가 왕께 아뢰되 내 생명의 날이 얼마나 있사옵겠기에 어찌 왕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리이까 35내 나이가 이제 팔십 세라 어떻게 좋고 흉한 것을 분간할 수 있사오며 음식의 맛을 알 수 있사오리이까 이 종이 어떻게 다시 노래하는 남자나 여인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사오리이까 어찌하여 종이 내 주 왕께 아직도 누를 끼치리이까 36당신의 종은 왕을 모시고 요단을 건너려는 것뿐이거늘 왕께서 어찌하여 이같은 상으로 내게 갚으려 하시나이까 37청하건대 당신의 종을 돌려보내옵소서 내가 내 고향 부모의 묘 곁에서 죽으려 하나이다 그러나 왕의 종 김함이 여기 있사오니 청하건대 그가 내 주 왕과 함께 건너가게 하시옵고 왕의 처분대로 그에게 베푸소서 하니라 38왕이 대답하되 김함이 나와 함께 건너가리니 나는 네가 좋아하는 대로 그에게 베풀겠고 또 네가 내게 구하는 것은 다 너를 위하여 시행하리라 하니라 39백성이 다 요단을 건너매 왕도 건너가서 왕이 바르실래에게 입을 맞추고 그에게 복을 비니 그가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31-39)

 

길르앗의 바르실래는 음모와 모함과 배반으로 점철된 팍팍한 다윗의 일생에서 맘 놓고 편한 숨 내쉴 수 있는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습니다. 변함없는 신뢰와 지원과 충성, 대가를 바라지 않는 헌신에서 다윗은 언약하신 것을 기필코 이뤄주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1) 다윗을 배웅하려 온 바르실래(31-32)

이 단락은 바르실래에 관한 단락으로 시점은 요단을 건너가기 전입니다. 바르실래는 요단 동편에서 매우 부유하고 힘 있는 사람으로 다윗이 마하나임에 거하는 동안 다윗에게 필요한 물품을 제공해준 인물입니다.

 

(2) 다윗의 제안(33)

다윗은 요단으로 마중 나온 바르실래에게 예루살렘으로 같이 가자고 제안합니다. 자신이 그동안 받은 은혜를 예루살렘에서 갚겠다는 것입니다.

 

(3) 바르실래의 부탁(34-37)

하지만 바르실래는 자신의 나이가 80세로 너무 늙어서 왕이 제공하는 맛있는 음식의 맛도 모르고 흥겨운 노래도 잘 들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또한 자신은 자신의 묘실이 있는 이곳에서 죽기를 원한다면서 다윗의 제안을 사양합니다. 자신의 부모가 있는 묘실에 묻히는 것은 평안한 죽음을 의미하며 매우 명예로운 일입니다. 바르실래는 이런 평안함과 명예로움을 택한 것입니다. 대신에 바르실래는 김함을 데리고 가 달라고 부탁합니다. 본문에는 언급되지 않지만 김함은 바르실래의 아들로 추측됩니다.

 

(4) 왕의 허락(38-39)

이런 바르실래의 요청을 받아들여 다윗은 김함을 데리고 가겠다고 하며 또한 바르실래가 나중에라도 요청하는 것이 있으면 들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이 약속은 죽으면서 솔로몬에게 바르실래의 자손들을 후대하라는 유언을 남김으로 대를 이어 지켰습니다.

바르실래에 대한 이야기까지 해서 19:9부터 시작된 압살롬 반란 사건에 대한 논공행상이 어느 정도 마무리됩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투항하는 적에게 대해서는 화친 정책을 사용하였고 자신을 도운 사람에게는 상을 주었습니다. 신뢰하기가 애매한 므비보셋은 애매한 상태로 두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말은 우리 마음에 심긴 말씀에 대한 반영입니다. 우리의 말은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인이 말의 진실성을 잃을 때, 우리 안에 있는 말씀도 힘을 잃습니다. 믿음에 있어 온전한 사람은 곧 말에 있어 온전한 사람입니다(약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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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9-01)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려는 다윗

사무엘하 19장 1-15절


어떤 상황이 좋아도 마냥 좋아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반대로 슬퍼도 한없이 슬퍼만 할 수 없는 상황이 있습니다. 인생은 남아 있고, 우리가 맺는 관계는 숱하게 연결되어 있고, 우리가 할 역할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얼마나 큰 괴로움 속에 있었고 어떤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습니까?
 
전쟁 이후 다윗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왕위를 회복하는 과정의 첫 단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먼저 자기 병사들의 마음을 위로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압살롬의 죽음을 슬퍼하느라, 자기를 따르는 군사들의 마음을 괴롭게 하였습니다. 요압의 충고를 받아들인 다윗이 마음을 추스르고 군사들의 마음을 얻었습니다.
 

압살롬의 죽음을 슬퍼하는 다윗(1-8a)

 

자식을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처럼, 자녀의 죽음은 부모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슬픔입니다. 아무리 자식이 원수이고 파렴치한 행동을 해도 부모의 사랑을 끊을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죄인을 대신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어찌 측량할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랑의 크기와 넓이를 생각한다면 용서 못할 사람이 없고 용납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1어떤 사람이 요압에게 아뢰되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울며 슬퍼하시나이다 하니 2왕이 그 아들을 위하여 슬퍼한다 함이 그 날에 백성들에게 들리매 그 날의 승리가 모든 백성에게 슬픔이 된지라 3그 날에 백성들이 싸움에 쫓겨 부끄러워 도망함 같이 가만히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4왕이 그의 얼굴을 가리고 큰 소리로 부르되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니 5요압이 집에 들어가서 왕께 말씀 드리되 왕께서 오늘 왕의 생명과 왕의 자녀의 생명과 처첩과 비빈들의 생명을 구원한 모든 부하들의 얼굴을 부끄럽게 하시니 6이는 왕께서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시며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시고 오늘 지휘관들과 부하들을 멸시하심을 나타내심이라 오늘 내가 깨달으니 만일 압살롬이 살고 오늘 우리가 다 죽었더면 왕이 마땅히 여기실 뻔하였나이다 7이제 곧 일어나 나가 왕의 부하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말씀하옵소서 내가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옵나니 왕이 만일 나가지 아니하시면 오늘 밤에 한 사람도 왕과 함께 머물지 아니할지라 그리하면 그 화가 왕이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당하신 모든 화보다 더욱 심하리이다 하니 8왕이 일어나 성문에 앉으매 어떤 사람이 모든 백성에게 말하되 왕이 문에 앉아 계신다 하니 모든 백성이 왕 앞으로 나아오니라(1-8a)
다윗은 아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아들 압살롬을 잃은 슬픔에서 일어나지 못합니다. 당연히 사람으로서 인지상정입니다. 하지만 과한 슬픔은 정당화되지 못합니다. 아들의 죽음은 현실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승리와 다윗 왕조에게 주신 언약도 현실입니다. 감정은 억압의 대상은 아니지만 통제하지 않으면 모든 논리와 명분을 삼키는 괴물이 됩니다.
(1) 다윗에 대해 실망한 백성(1-3)
다윗이 압살롬의 죽음을 애곡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요압의 귀에 들어갑니다. 현재 요압은 아직 왕궁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전쟁터에서 부대를 정비하고 있었습니다. 그 소식이 요압뿐만 아니라 전장에 있던 모든 군사들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압살롬을 죽이고 반란군을 격퇴시켰다는 승리의 기쁨을 미처 맛보기도 전에 모두 슬퍼하고 애도하는 분위기가 되어버립니다. 군인들은 개선하지 못하고 전쟁에 져서 간신히 도망쳐 나온 부끄러운 병사들처럼 그렇게 조용히 성읍으로 돌아왔습니다.
(2) 압살롬을 잃은 다윗의 슬픔(4)
병사들이 성읍으로 돌아왔을 때에도 다윗은 여전히 큰 소리로 울며 계속해서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죽은 아들을 위해 애곡하고 있기 때문에 전쟁에 승리하고 왔는데도 아무도 환영하거나 승리의 기쁨을 나눌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모두 죄인처럼 쥐 죽은 듯 조용하게 성읍으로 귀환하였습니다.
(3) 요압의 충고(5-7)
이런 상황을 가장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은 바로 압살롬을 죽인 요압입니다. 요압은 다윗에게 가서 그의 행동이 전쟁을 마치고 온 군사들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 군사들이 압살롬의 손에서 왕과 왕의 아이들과 처와 비빈들의 생명을 구원하였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이것은 만일 압살롬이 살아서 승리하였다면, 다윗과 그의 자녀들과 아내들을 살려두지 않았을 것임을 의미합니다. 요압의 말은 한편으로는 과장되었지만, 한편으로는 가능성이 높은 이야기입니다. 요압은 다윗이 왕을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시고 왕을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신다고 하는데, 여기서 왕을 사랑하는 자는 요압과 다윗의 군사들이고 미워하는 자는 압살롬입니다. 왕에게 반역한 압살롬의 죽음을 애도하느라 왕을 위해 싸운 군사들을 외면하고 모욕하는 것은 왕을 사랑하는 자를 미워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요압은 사랑과 미움이라는 매우 자극적인 단어를 사용하여 다윗의 행동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현재 다윗의 태도가 다윗의 군사들에게는 매우 불합리하다고 말한 후에 요압은 극단적인 말로 다윗에게 화를 냅니다. 만일 압살롬이 살고 우리가 모두 죽었으면 왕이 좋게 여겼겠다고 말하며 왕을 몰아붙입니다. 그러고는 다윗에게 당장 나가서 왕의 부하들의 마음을 위로하라고 명령합니다. 만일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면서 오늘 밤에 왕 곁에 아무도 없을 것이며, 이제까지 겪었던 것보다 더 끔찍한 재앙을 겪게 될 것이라고 협박합니다. 이 협박은 다윗이 자신의 명령대로 하지 않으면 자신의 손으로 다윗을 왕위에서 끌어내리겠다는 것입니다. 요압은 다윗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습니다. 사실 압살롬은 반드시 살리라는 다윗의 명령을 어기고 압살롬을 죽인 것이 바로 요압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다윗과 이스라엘 군대의 이런 우울한 상황을 만든 장본인이 요압인 것입니다. 그런데 요압은 자신이 압살롬을 죽인 사실은 다윗에게 숨기고 압살롬의 죽음을 슬퍼하는 다윗의 태도에 대해서만 화를 내고 있습니다. 요압의 입장에서 압살롬의 죽음에 다윗이 슬퍼하고 이를 보는 군사들이 죄책감을 느끼게 되면 압살롬을 죽여서 이런 상황을 만든 자신에게 모든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자신의 입장이 난처해져 다윗 왕국에서의 입지도 좁아지게 됩니다. 요압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압살롬을 죽였는데, 그로 인해 자신의 입지가 좁아지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압은 비난의 화살을 다윗에게 돌리고 다윗이 잘못했다고 다그치며 만일 자신의 말을 안 들으면 가만히 안 있겠다고 협박한 것입니다. 현재 요압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군사들과 막 돌아온 상황이라 군인들의 신뢰를 깊이 받고 있기에, 다윗의 행동을 비난하며 군사들을 선동하여 다윗을 떠나게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반면에 다윗은 아들의 반란으로 체면을 잃었고 전쟁터에 나가지도 않았기 때문에 군사들의 신뢰도 요압보다는 약했습니다. 요압의 협박은 단순한 으름장이 아니라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 있었습니다. 명령을 어긴 요압의 기세등등한 모습과 그런 요압에게 왜 압살롬을 죽였느냐고 항의 한마디 못하고 요압의 기세에 눌려 그의 말을 순순히 따르는 다윗의 모습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4) 백성들의 승리를 축하함(8a)
8절에서 다윗은 요압이 시키는 대로 일어나 성문에 앉아 모든 백성들이 자신을 볼 수 있게 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왕의 위치로 돌아와 자신을 위해 싸워준 백성들을 위로하고 승리를 축하하였다는 의미로 다윗은 아버지로서의 슬픔을 가슴에 묻고 다시 이스라엘의 왕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하지만 내면적으로는 완전히 요압에게 눌려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전과 같은 권위 있고 위엄 있는 왕권을 회복한 것은 아닙니다. 압살롬의 반란으로 다윗 왕국에서 요압의 권력이 더욱 강해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후에 다윗이 죽으면서 솔로몬에게 요압이 죗값을 치르게 하라고 유언하는 것을 보면 이후로 요압은 다윗이 손대기 힘든 권력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반란 세력의 지지를 호소함(8b-15)

 

전도와 선교를 하다보면 복음을 가부하고 외면하는 사람들로 인해 낙심하고 좌절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가족들을 위해 기도할 때도 속히 응답되지 않으면 실망감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택한 자를 구원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실 것입니다. 다윗을 반역했던 유다 지파 사람들이 다윗을 맞으려 나온 모습을 통해 인간관계는 인내가 필요함을 볼 수 있습니다.
8… 이스라엘은 이미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더라 9이스라엘 모든 지파 백성들이 변론하여 이르되 왕이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셨고 또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나 이제 압살롬을 피하여 그 땅에서 나가셨고 10우리가 기름을 부어 우리를 다스리게 한 압살롬은 싸움에서 죽었거늘 이제 너희가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 올 일에 잠잠하고 있느냐 하니라 11○다윗 왕이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되 너희는 유다 장로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왕의 말씀이 온 이스라엘이 왕을 왕궁으로 도로 모셔오자 하는 말이 왕께 들렸거늘 너희는 어찌하여 왕을 궁으로 모시는 일에 나중이 되느냐 12너희는 내 형제요 내 골육이거늘 너희는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오는 일에 나중이 되리요 하셨다 하고 13너희는 또 아마사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골육이 아니냐 네가 요압을 이어서 항상 내 앞에서 지휘관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바라노라 하셨다 하라 하여 14모든 유다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 같이 기울게 하매 그들이 왕께 전갈을 보내어 이르되 당신께서는 모든 부하들과 더불어 돌아오소서 한지라 15왕이 돌아와 요단에 이르매 유다 족속이 왕을 맞아 요단을 건너가게 하려고 길갈로 오니라(8b-15)
다윗은 자신의 혈육인 유다 지파를 도전하되 겸손하게 부탁하여 환궁 계획을 추진합니다. 요압을 대신하여 유다지파 출신의 장수 아마사를 군대장관으로 임명하여 유다 백성들에게 더 믿음을 줍니다. 새 시대를 위해서 과감히 자신을 낮추기도 하고 단호하게 끊어내기도 한 것입니다.
(1)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여론(8b-10)
전쟁이 끝난 후 압살롬에게 모였던 이스라엘 군대들은 모두 흩어져서 각기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압살롬의 군대가 완전히 해체된 것으로, 이것은 18:17의 말을 반복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이 문장을 반복하여 기록한 것은 이제 압살롬의 반란이 완전히 정리된 상황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다윗을 왕으로 모실 의논을 하게 됩니다. 10절의 ‘우리가 기름을 부어 우리를 다스리게 한 압살롬’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압살롬도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라는 것이다. 다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왕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이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기에는 압살롬이 자신들의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압살롬은 하나님께서 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기름 부음’이란 왕이 되었다는 상징적인 행동이지만, 기름 부음을 받았다고 전부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름부음의 진정한 의미는 여호와께서 그를 왕으로 선택하셨다는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이 없는 기름부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사실을 망각하고 자신들의 손으로 기름을 부었기 때문에 압살롬을 왕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압살롬이 죽자 다윗이 자신들을 원수들과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다시 다윗을 왕으로 섬기자고 합니다. 여기서 ‘변론하다’는 사람들이 격렬하게 토의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을 다시 왕으로 모시는 데, 이런 저런 의견들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이 살았던 실제 이스라엘 사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좀 더 복잡한 정치적 사회적 상황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의 업적을 다시 기억하여 다윗을 다시 왕으로 모시기로 결정합니다. 사실 이들이 언급한 다윗의 업적은 다윗이 혼자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다윗의 손을 통해 이루어 주신 업적들입니다. 결국 다윗이라는 위대한 왕도 하나님께서 안 계시면 참으로 연약하고 힘없는 존재라는 것을 다윗과 우리 모두에게 깨닫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다양한 도구로 쓰임 받고 있는 우리는 우리를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2) 유다 장로들에게 호소함(11-12)
요압의 협박에 압살롬의 죽음은 마음에 묻고 다시 이스라엘 왕의 모습으로 돌아온 다윗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웁니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을 다시 왕으로 세우려는 것을 알고 자신도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연락하여 유다 장로들에게 왜 너희들은 왕을 왕궁으로 모시는 데 이스라엘보다 늦장을 부리느냐며 자신을 왕으로 다시 모시는 일에 유다 지파가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촉구합니다. 유다는 다윗이 속한 지파이고 처음으로 다윗을 왕으로 섬긴 지파입니다. 하지만 다윗 권력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다윗을 배반하고 압살롬을 왕으로 섬김으로 반란의 진원지이며 핵심 세력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이런 유다 지파를 처벌할 것인지 아니면 용서할 것인지 결정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유다의 장로들에게 유다와 자신은 골육 친척인 것을 강조하며 자신을 다시 왕으로 섬길 것을 촉구합니다. 여기서 다윗이 유다에게 골육 친척이라는 말을 쓴 것은 같은 지파라는 의미도 있지만 한 형제이고 한 핏줄이니 이전 일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이며, 앞으로 같이 잘 지내보자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반역을 일으킨 유다를 다시 자신의 편으로 삼기 위해 유화정책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다윗이 유다에게 압살롬을 지지한 책임을 묻고 피의 복수를 선언하면 유다가 반감을 갖고 다른 왕을 선택할 수도 있고, 그러면 또다시 유다의 굴복을 받아 내기 위해 전쟁을 해야 했습니다.
(3) 아마사의 지지를 호소(13)
다윗은 압살롬의 군대장관이던 아마사를 불러 우리가 친척이 아니냐면서 요압을 대신하여 군대장관이 되어달라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말이 진실하다는 것을 보여주기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주 맹세합니다. 아마사는 윗의 또 다른 누이 아비갈의 아들로서 요압과는 사촌지간입니다. 아마사는 현재 유다 지파와 예루살렘의 군권을 쥐고 있는 인물로 보입니다. 유다를 전쟁이 아닌 유화 정책을 통해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는 다윗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군권을 쥐고 있는 아마사를 용서하고 자신의 군대 통수권을 넘겨준다는 유화 정책을 폄으로써 무력 충돌 없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려는 것입니다.
(4) 유다 지파가 다윗의 귀환을 요청(14)
이렇게 다윗이 먼저 손을 내밀고 지지를 호소하며 반란에 가담한 죄를 묻지 않는 관용 정책을 폄으로써 유다 사람들은 다시 다윗을 지지하게 되었고 왕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와도 좋다는 소식을 보냅니다. 다윗은 큰 어려움 없이 다시 유다 사람들의 영접을 받으며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됩니다.
(5) 요단에 도착한 다윗(15)
15절에서 다윗이 귀환하기 위해 요단을 건널 때 유다 사람들이 길갈에 모여서 다윗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환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윗은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을 용서하고 화해함으로써 이스라엘 내에서 또 다른 피의 숙청을 일으키지 않고 평화롭게 다시 왕으로 복귀하였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이런 결정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요압입니다. 요압은 반란군의 대장이었던 아마사를 자신을 대신해서 군대장관으로 삼은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후에 아마사를 죽입니다.
 


슬픔에 빠지면 모든 것이 그 문제에 전부인 듯 다가옵니다. 아직 우리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많다는 것을 놓치고 그 문제에만 집착한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감정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감정에 삼키어서는 안 된다는 독한 조언이 약이 되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 상황에 지지 않으실 하나님의 역사가 있으니 다 끝난 듯이 여기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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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8-02)


압살롬의 죽음을 슬퍼하는 다윗

사무엘하 18장 19-33절


미국 서부 개척 시대에는 수많은 사람을 살인한 유명한 악당 총잡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포악하기 때문에 그의 목에는 많은 포상금이 걸려 있었습니다. 어느 날인가 그 악당이 잡혔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그 지역 사람들은 모두 기뻐하지만, 한 소녀만은 슬퍼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울고 있었던 이유는 그 악당이 바로 아버지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때로는 좋은 소식이 개인에 따라 슬픈 소식이 되기도 합니다.

 

마하나임에서 모은 군대를 이끌고 압살롬의 군대와 싸우기 위해서 출정하려던 다윗은 신하들의 만류로 전쟁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다윗의 군대는 에브라임 숲의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압살롬의 군대를 이기고 압살롬은 숲속을 헤매다 머리카락이 나무에 걸려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고 맙니다. 이를 안 입은 다윗의 명령을 어기고 압살롬을 죽입니다. 그의 죽음으로 반란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전령의 선발(19-23)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승리의 소식을 듣지 못한 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들이 지금도 우리 주위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어떻습니까? 갖가지 이유를 대며 요압처럼 복음 전파를 막고 있진 않습니까? 복음을 맛본 우리는 아히마아스처럼 지금 당장 복음을 전하려 해야 합니다.

 

19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빨리 왕에게 가서 여호와께서 왕의 원수 갚아 주신 소식을 전하게 하소서 20요압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오늘 소식을 전하는 자가 되지 말고 다른 날에 전할 것이니라 왕의 아들이 죽었나니 네가 오늘 소식을 전하지 못하리라 하고 21요압이 구스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본 것을 왕께 아뢰라 하매 구스 사람이 요압에게 절하고 달음질하여 가니 22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다시 요압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아무쪼록 내가 또한 구스 사람의 뒤를 따라 달려가게 하소서 하니 요압이 이르되 내 아들아 너는 왜 달려가려 하느냐 이 소식으로 말미암아서는 너는 상을 받지 못하리라 하되 23그가 한사코 달려가겠노라 하는지라 요압이 이르되 그리하라 하니 아히마아스가 들길로 달음질하여 구스 사람보다 앞질러가니라(19-23)

 

전쟁에는 승자가 없습니다. 아들과 아비의 전쟁에서 승리가 어디 있으며, 왕의 아들의 부고(訃告)를 전해야 하는 승리가 왕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아들을 죽여야 이기는 전쟁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짓은 역사 내내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긴 자가 독식하는 세상은 정상이 아닙니다.

 

(1) 아하마아스의 자원(19-20)

압살롬이 죽음으로써 반란이 진압되자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이 소식을 왕에게 빨리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원래 예루살렘에서 일어나는 정보를 다윗에게 전달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으로 후새가 알려준 정보를 다윗에게 전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전쟁에서 승리하자 바로 다윗에게 알리겠다며 요압에게 허락을 구합니다. 기쁜 소식을 하루라도 빨리 왕에게 알리고 싶어 하였습니다. 하지만 요압은 오늘 소식을 전하지 말고 좀 기다렸다가 다른 날 전하라고 권합니다. 왜냐하면 현재 상황이 다윗에게는 그다지 반갑고 기쁜 소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록 압살롬을 이겨 전쟁이 끝나고 왕좌는 지켜냈지만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요압은 다윗이 압살롬을 사랑하고 그가 살아오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아는 요압은 자신과 한편인 아히마아스가 혹시라도 왕의 아들의 죽음을 알려 왕의 미움을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염려하여 아히마아스를 만류합니다. 요압은 다윗의 이런 간절한 마음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앞길에 방해가 될 압살롬을 가차 없이 죽여버린 것입니다.

 

(2) 구스 사람 전령(21)

대신에 요압은 구스 사람을 하나 뽑아서 다윗에게 소식을 전하라고 보냅니다. 이집트 남쪽 지역에 있는 구스는 현재의 수단으로 구스 사람은 외국인 용병이었습니다. 요압은 다윗이 사울과 이스보셋의 죽음을 알린 사람들을 처벌한 일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부하들이 압살롬을 죽였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다윗이 그 소식을 전한 사람에게 어떤 해를 가하거나 원한을 품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혹시 처벌을 해도 무관한 외국인 용병 구스 인을 보낸 것입니다.

 

(3) 아히마아스의 두 번째 자원(22-23)

하지만 아하마아스는 이런 요압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해서 자신도 보내달라고 요청합니다. 이에 요압은 아히마아스에게 도대체 왜 그렇게 가고 싶어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하고, 이 소식을 전해도 다윗은 상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설득합니다. 하지만 아히마아스는 이런 요압의 설득에도 계속해서 보내달라고 요청하였고 요압은 할 수 없이 허락합니다. 아히마아스는 허락을 받고 바로 달려가는데, 구스 사람이 가는 길과 다른 길로 빠르게 달려가서 구스 사람을 앞지릅니다. 대부분 학자들은 구스 사람은 지름길이지만 달리기 어려운 숲길을 택한 반면, 아히마아스는 좀 돌아가는 길이지만 달리기 쉬운 들길을 선택한 것으로 봅니다. 아히마아스가 이렇게 다윗에게 먼저 소식을 전하려고 애쓴 것은 좋은 소식을 전하여 상을 받고 싶은 마음에 그렇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후에 그가 자신에게 불리한 정보는 알리지 않는 것을 보면 이런 그의 생각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요압은 이런 아히마아스의 생각을 모르고 말린 것입니다.

 

다윗이 전쟁의 소식을 기다림(24-27)

우리가 교회에서 설교를 듣고 매일 성경을 읽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더 분명히 할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영적 곤고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 배고픔과 목마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만 해결됩니다. 한 주간의 삶이 아무리 고단해도 말씀을 통해, 기도를 통해 주님을 만나기만 하면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24때에 다윗이 두 문 사이에 앉아 있더라 파수꾼이 성 문 위층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보니 어떤 사람이 홀로 달려오는지라 25파수꾼이 외쳐 왕께 아뢰매 왕이 이르되 그가 만일 혼자면 그의 입에 소식이 있으리라 할 때에 그가 점점 가까이 오니라 26파수꾼이 본즉 한 사람이 또 달려오는지라 파수꾼이 문지기에게 외쳐 이르되 보라 한 사람이 또 혼자 달려온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도 소식을 가져오느니라 27파수꾼이 이르되 내가 보기에는 앞선 사람의 달음질이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의 달음질과 같으니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는 좋은 사람이니 좋은 소식을 가져오느니라 하니라(24-27)

 

아히마아스는 요압이 만류하는데도 승전보를 속히 전하고 상을 얻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압살롬의 신변에 대한 다윗의 질문은 회피합니다. 좋은 소식은 자기가 전하고 궂은 소식은 떠넘기는 비겁한 태도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이긴 소식이나 생존한 소식이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이유입니다.

 

(1) 먼저 달려오는 사람(24-25)

그때 다윗은 성의 두 문 사이에 앉아 전쟁과 압살롬에 대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아히마아스가 마하나임 성 근처에 나타났고, 성문을 지키는 파수꾼이 그를 발견하게 됩니다. 누군가 혼자 열심히 달려오는 모습을 본 파수꾼은 다윗에게 소식을 전달하기 위해 사람이 오고 있다고 보고합니다. 고대 전쟁에서는 사람이 소식을 전달했기 때문에 먼저 사람을 보내어 승리와 패배의 소식을 알리고, 그 후에 본진이 왕궁으로 귀환하였습니다.

 

(2) 두 번째 달려오는 사람(26)

이렇게 한 사람이 열심히 달려 가까이 왔을 때, 파수꾼은 저 멀리서 또 한 사람이 달려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실도 왕에게 보고하자 다윗은 그 사람도 전령이라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3) 아히마아스(27)

처음 사람이 성에 가까이 왔을 때 파수꾼은 그가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라는 것을 알았고 이 사실을 다윗에게 알리자 다윗은 아히마아스가 좋은 사람이니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좋은 사람이란 다윗에게 충성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충성스러운 사람이 열심히 달려오는 것은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다윗은 아히마아스를 희망적인 마음으로 맞이하게 됩니다.

 

전령의 보고(28-33)

당신은 정말로 항상 기뻐합니까? 이 땅에는 희로애락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기쁘고 즐거울 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속상하고 슬플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속상하고 슬플 때에도 기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복음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생각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를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아는 자는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에게도 그 복음을 알려 줘야합니다.

 

28아히마아스가 외쳐 왕께 아뢰되 평강하옵소서 하고 왕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이르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리로소이다 그의 손을 들어 내 주 왕을 대적하는 자들을 넘겨 주셨나이다 하니 29왕이 이르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하니라 아히마아스가 대답하되 요압이 왕의 종 나를 보낼 때에 크게 소동하는 것을 보았사오나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였나이다 하니 30왕이 이르되 물러나 거기 서 있으라 하매 물러나서 서 있더라 31구스 사람이 이르러 말하되 내 주 왕께 아뢸 소식이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왕을 대적하던 모든 원수를 갚으셨나이다 하니 32왕이 구스 사람에게 묻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구스 사람이 대답하되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청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33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28-33)

 

다윗이 정말 궁금한 것은 승리 소식이 아니라 아들이 무사하다는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압살롬의 전사 소식을 듣지만, 그 소식을 전한 사자를 해할 수 없었습니다. 암논에 이어 사랑한 아들 압살롬까지 잃었습니다. 권력을 남용하고 하나님의 왕 되심을 인정하지 않은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1) 아히마아스의 보고(28-30)

아히마아스는 왕에게 오자 샬롬을 외치고 땅에 엎드려 절합니다. ‘평강 하옵소서!’는 히브리어로 샬롬입니다. 평강을 외친다는 것은 매우 긍정적인 표시로 그는 다윗이 물어보기도 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면서 여호와께서 왕의 원수를 왕의 손에 넘겨주셨다고 말합니다. 압살롬의 부대를 이겼다고 보고하는데, 아히마아스는 제사장으로서 전쟁 승리의 공을 여호와께 돌리며 감사의 찬양을 돌린 것입니다. 이런 승리의 소식에 다윗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대신 압살롬의 안부를 묻습니다. 이것은 다윗에게는 승리 소식보다는 아들 압살몸의 생사여부가 더 중요한 문제였음을 알려줍니다. 이에 대해 아히마아스는 답변을 회피합니다. 자신이 요압의 명령으로 소식을 전하러 떠날 때 어떤 소동과 웅성거림은 있었지만, 그것이 무슨 일인지 확인하지 못하고 요압의 명령을 따라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바로 뛰어왔다는 것입니다. 이런 아히마아스의 대답은 곤란한 답변은 피하려는 술수입니다. 아히마아스는 왕이 아들의 죽음 소식을 좋게 여기지 않을 것이라고 한 요압의 말에 안 좋은 소식은 구스 인이 전하게 하고 자신은 숭리의 좋은 소식만 전하여 왕의 환심을 사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구스인을 앞질러 다윗에게 도착하여 마치 자신은 압살롬의 죽음을 미처 알지 못하고 다음에 도착하는 사람보다 먼저 출발한 것처럼 거짓말한 것입니다. 이런 아히마아스의 모습은 매우 영악하게 보이며 권력과 상에 대한 강한 탐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압살롬의 소식을 모른다는 아히마아스의 말에 다윗은 더 이상 질문하거나 아히마아스를 칭찬하지 않고 바로 구스 사람을 부릅니다. 현재 다윗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압살롬의 생사여부이기 때문입니다.

 

(2) 구스 사람의 보고(31-32)

부름을 받은 구스 인도 동일하게 승리를 전달합니다. 이어서 다윗은 그에게 압살롬의 안부를 물었고 구스인은 압살롬의 죽음을 간접적으로 알립니다. 앞을 대적하이 일어나는 모든 왕의 원수들은 그 청년처럼 되기 위한다는 말은 압살롬이 벌을 받아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스인은 다윗의 심정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용감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슬퍼하는 다윗(33)

압살롬의 죽음 소식을 들은 다윗은 몹시 괴로워하며 성문 위층으로 올라가 압살롬의 죽음을 애곡합니다. 그는 ‘내 아들 압살롬아’를 네 번이나 반복하여 외치고 자신이 대신 죽는 것이 나았을 것이라며 깊은 슬픔에 잠깁니다. 다윗은 압살롬에 대해서는 사울과 요나단처럼 애가를 불러 죽음을 기념할 수도 없었고, 아브넬처럼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줄 수도 없었습니다. 비록 아들이지만 반역죄를 지은 죄인이기 때문에 왕으로서 그의 죽음에 대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다만 아버지로서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슬퍼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이런 다윗의 모습은 이전에 아들을 잃고도 씩씩하게 목욕하고 식사하며 일상으로 바로 돌아온 중년의 자신만만하던 다윗의 모습과 대조됩니다. 현재 다윗의 모습은 가장 유능하고 아름다우며 장성하여 자신의 뒤를 이을 기둥 같은 아들을 잃고 실의에 빠져 슬퍼하는 노년의 다윗의 모습입니다. 그는 비록 하나님의 은혜로 왕좌는 지키게 되었지만,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을 잃음으로 상처뿐인 영광이 된 것입니다. 아마 다윗은 압살롬의 죽음을 애곡하면서 자신의 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가슴을 치고 통곡하였을 것입니다. 만일 내가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가정에 이런 피비린내 나는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하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다윗에 대한 사랑이 깊었던 만큼 그에 대한 벌도 무거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소식마저 더할 나위 없는 소식은 아닙니다. 누군가는 패하고 있는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늘 나에게만 좋은 소식에 대해서 겸손해야 합니다. 미안해해야 합니다. 때로는 부끄러워하기도 해야 합니다. 참 복음은 자기를 버려 우리를 살리신 그리스도의 소식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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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8-01)


아버지 다윗을 반역했던 압살롬의 죽음

사무엘하 18장 1-18절


인간, 즉 우리는 사이의 존재입니다. 그 사이가 관계를 만들어주고 우리를 형성합니다. 그런데 때로 그 둘을 모두 취할 수 없는 사이도 있습니다. 그럴 때 사이는 기회의 다른 표현입니다. 우리의 자리, 우리의 신앙, 우리의 충성의 대상들을 그 사이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걸쳐 있을 곳은 없습니다.

 

압살롬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다윗이 자기 군대를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의 손에 맡겨 내보내면서,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하라고 부탁했습니다. 전쟁이 시작되고, 이스라엘 군대가 패배했습니다. 그리고 압살롬은 노새를 타고 가다가 머리카락이 상수리나무에 걸려 공중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압살롬의 군대와 전쟁하는 다윗(1-5)

수많은 이단적 가르침과 거짓 교사들이 성도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향한 그들의 계략은 날이 갈수록 교묘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세우는 모든 계략을 무너뜨리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편에서 있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 편에 선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안에 확고히 거하는 것입니다. 복음 안에 서서 복음으로 충만해지면 자연스럽게 이단적 가르침과 거짓 교사들을 분별하고 그들을 대적할 수 있습니다.

 

1이에 다윗이 그와 함께 한 백성을 찾아가서 천부장과 백부장을 그들 위에 세우고 2다윗이 그의 백성을 내보낼새 삼분의 일은 요압의 휘하에, 삼분의 일은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동생 아비새의 휘하에 넘기고 삼분의 일은 가드 사람 잇대의 휘하에 넘기고 왕이 백성에게 이르되 나도 반드시 너희와 함께 나가리라 하니 3백성들이 이르되 왕은 나가지 마소서 우리가 도망할지라도 그들은 우리에게 마음을 쓰지 아니할 터이요 우리가 절반이나 죽을지라도 우리에게 마음을 쓰지 아니할 터이라 왕은 우리 만 명보다 중하시오니 왕은 성읍에 계시다가 우리를 도우심이 좋으니이다 하니라 4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는 대로 내가 행하리라 하고 문 곁에 왕이 서매 모든 백성이 백 명씩 천 명씩 대를 지어 나가는지라 5왕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 하니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모든 군지휘관에게 명령할 때에 백성들이 다 들으니라(1-5)

 

다윗을 버리고 변절하는 자들이 득세하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다윗과 다윗의 하나님을 선택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윗이 전쟁에 나서지 말도록 만류하였고, 심지어 이방인 암몬은 전쟁 물자를 공급하여 다윗 군대의 사기를 높여주었습니다. 변절과 충성은 동시에 선택할 수 없습니다.

 

(1) 다윗 군대의 편성(1-2a)

다윗은 마라나임에 모인 군사들을 모두 모아 군대를 조직하고 그들 위에 천부장과 백부장을 세웁니다. 그리고 군대를 세 개의 부대로 나누고 한 부대는 요압에게 한 부대는 아비새에게 한 부대는 가드 사람 잇대에게 맡깁니다. 아비새와 요압은 가장 믿을 만한 사촌들이기 때문에 군대장관으로 삼았고, 잇대는 비록 암몬 사람이지만 다윗에게 온전히 충성을 맹세한 믿을 만한 사람이기에 부대를 맡긴 것입니다. 이렇게 부대를 편성한 후에 다윗은 자신도 같이 출전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이런 다윗의 모습은 밧세바와 간통할 때 전쟁에 출정하지 않고 왕궁에서 낮잠 자던 모습과 대조를 이룹니다. 그는 이제 자신의 왕권을 되찾기 위해 예전과 같이 전쟁에 나서려고 한 것입니다.

 

(2) 다윗의 출전을 마는 백성들(2b-4)

하지만 백성들은 다윗의 출정을 막습니다. 그들은 다윗이 출정하게 되면 자신들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다윗만 죽이려 할 것이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말합니다.

 

(3) 압살롬을 위한 부탁(5)

또한 다윗이 자신들 만 명보다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에 남아있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대신 성에 남아 자신들을 지원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결국 다윗은 의견을 받아들여 성에 남았고 대신 출정하는 그들을 배웅해줍니다. 그러면서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한 가지 명령을 내리는데, 그것은 자신을 위해 압살롬을 살려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압살롬을 살려야 할 이유를 몇 가지 이야기하는데 첫째는 자신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압살롬이 자신의 아들이니 좀 봐달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다윗은 압살롬을 아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압살롬이 아직 천지 분간 못하는 아이라서 이런 일을 벌인 것이니 좀 이해해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군대 장관들이 이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해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군대 장관들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결국 모든 백성들에게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비록 압살롬이 자신의 자릴 탐내는 반역자이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차마 죽일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압살롬이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때 박대하던 모습과 대조를 이룹니다. 이전에 아들에게 이런 애틋한 마음을 가졌더라면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키진 않았을 것인데, 너무 늦은 것입니다.

 

압살롬 군대를 이기는 다윗 군대(6-8)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무너뜨리려 하는 악한 세력을 친히 심판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압살롬의 군대를 심판하듯이 하나니 나라를 대적하는 자들을 친히 심판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그날, 이 땅에서 교회를 위협하던 모든 자들은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6이에 백성이 이스라엘을 치러 들로 나가서 에브라임 수풀에서 싸우더니 7거기서 이스라엘 백성이 다윗의 부하들에게 패하매 그 날 그 곳에서 전사자가 많아 이만 명에 이르렀고 8그 땅에서 사면으로 퍼져 싸웠으므로 그 날에 수풀에서 죽은 자가 칼에 죽은 자보다 많았더라(6-8)

 

다윗은 백성들에게는 왕으로서 변절자 압살롬의 세력을 진압해야 했지만, 동시에 압살롬의 아버지로서 그를 보호해야 하기도 했습니다. 다윗은 부하들에게 간청하듯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해달라고 부탁합니다. 나라와 자식 중 아무도 잃고 싶지 않은 다윗의 한계를 드러내는 명령입니다.

 

(1) 에브라임 수풀(6)

다윗 군대는 압살롬 군대와 에브라임 수풀에서 싸우는데, 이 지역은 나무들이 많고 지형이 복잡한 숲으로 전쟁 경험이 많고 계속 요단 동편에 주둔하고 있던 다윗 군대와 요단 동편 지역에서 모인 군대는 이 지형에 익숙하였습니다.

 

(2) 다윗 군대의 승리(7)

반면 압살롬의 군대는 주로 요단 서편 지파들에서 모인 부대로 요단 동편 지형에 익숙하지 않았고, 아마사도 요압만큼 전쟁에 능숙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압살롬의 군대는 다윗의 군대에 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압살롬의 군대에서 이만 명정도가 전사하였는데, 패인은 군대가 사방으로 퍼져서 싸웠기 때문이다. 지형이 복잡하기 때문에 압살롬이 원하는 것처럼 대군을 이끌고 멋지게 정면 승부를 할 수 없었고, 복잡한 숲속에서 결국 군대는 이리저리 흩어졌으며, 이렇게 흩어진 군대를 요압의 군대는 지형지물을 이용한 매복이나 유인 작전 혹은 게릴라전으로 격퇴합니다.

 

(3) 숲에서 죽은 자(8)

8절에서 칼에 죽은 자보다 숲이 죽인 자가 더 많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압살롬은 많은 군사를 데리고 수적 열세에 있는 다윗 군대와 정면으로 붙어 압도적인 힘의 차이로 이기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에 능통한 다윗과 요압은 수적으로 많은 압살롬 군대와 정면으로 붙지 않고 숲으로 유인하여 이겼습니다. 이렇게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계략을 듣지 않음으로 결국 전쟁에서 패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고, 다윗에게 반역한 죄를 심판하시고 다윗을 구원하시기 위해 압살롬의 귀를 막으시고 전쟁에서 패하게 하셨습니다.

 

 

압살롬의 죽음(9-18)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학력이나 재력, 심지어는 외모나 몸매를 자랑하기 위해 부단히 애씁니다. 하지만 성도는 세상 기준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도가 자랑할 것은 오직 예수 십자가 복음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죽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그 은혜를 아는 자는 결코 다른 사람을 우습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남보다 높아지려고 애쓰지 않는다.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자, 교회는 그런 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9압살롬이 다윗의 부하들과 마주치니라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살롬의 머리가 그 상수리나무에 걸리매 그가 공중과 그 땅 사이에 달리고 그가 탔던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나간지라 10한 사람이 보고 요압에게 알려 이르되 내가 보니 압살롬이 상수리나무에 달렸더이다 하니 11요압이 그 알린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보고 어찌하여 당장에 쳐서 땅에 떨어뜨리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네게 은 열 개와 띠 하나를 주었으리라 하는지라 12그 사람이 요압에게 대답하되 내가 내 손에 은 천 개를 받는다 할지라도 나는 왕의 아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우리가 들었거니와 왕이 당신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삼가 누구든지 젊은 압살롬을 해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13아무 일도 왕 앞에는 숨길 수 없나니 내가 만일 거역하여 그의 생명을 해하였더라면 당신도 나를 대적하였으리이다 하니 14요압이 이르되 나는 너와 같이 지체할 수 없다 하고 손에 작은 창 셋을 가지고 가서 상수리나무 가운데서 아직 살아 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찌르니 15요압의 무기를 든 청년 열 명이 압살롬을 에워싸고 쳐죽이니라 16요압이 나팔을 불어 백성들에게 그치게 하니 그들이 이스라엘을 추격하지 아니하고 돌아오니라 17그들이 압살롬을 옮겨다가 수풀 가운데 큰 구멍에 그를 던지고 그 위에 매우 큰 돌무더기를 쌓으니라 온 이스라엘 무리가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니라 18압살롬이 살았을 때에 자기를 위하여 한 비석을 마련하여 세웠으니 이는 그가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내게 없다고 말하였음이더라 그러므로 자기 이름을 기념하여 그 비석에 이름을 붙였으며 그 비석이 왕의 골짜기에 있고 이제까지 그것을 압살롬의 기념비라 일컫더라(9-18)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큰 승리를 주십니다. 이로써 용서와 긍휼의 약속을 지키셨으며 견고한 왕국을 세우시겠다는 언약을 성취하셨습니다. 반면에 압살롬은 ‘우연히’ 만난 상수리나무 하나 피하지 못하고 ‘하늘과 땅 사이에’ 걸리고 맙니다. 그의 자랑이 그에게 수치를 안겨주었습니다.

 

(1) 나무에 매달린 압살롬(9)

압살롬은 깊은 숲속에서 홀로 떨어져 가다가 큰 상수리나무의 우거진 가지에 머리카락이 걸리고 그 사이에 압살롬이 타고 가던 노새는 그 아래로 그냥 빠져 나가는 바람에 압살롬만 공중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압살롬의 머리카락은 사무엘하 14:26에 따르면 매우 길고 풍성하다고 말하고 있어 머리카락이 나뭇가지에 걸리면 충분히 몸이 공중에 매달릴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결국 그의 가장 큰 자랑거리가 그의 생명을 빼앗아가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2) 보고와 책망(10-11)

이렇게 압살롬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모습을 그곳을 지나던 다윗의 부하들이 발견하였고, 한 사람이 요압에게로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려줍니다. 이들은 아마도 요압에게 속한 부대원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압살롬이 하필이면 다른 부대가 아닌 요압의 부대에 걸린 것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합니다.

보고를 들은 요압은 보고한 병사에게 왜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압살롬을 쳐서 땅에 떨어뜨리지 않았느냐고 묻는데, 이것은 왜 그 자리에서 압살롬을 죽이지 않았느냐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치다’라는 단어 ‘나카’는 단순히 치는 것이 아니라 ‘죽이다’라는 의미로 종종 사용되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3) 발견한 자의 자기변호(12-13)

요압은 그 병사에게 만일 압살롬을 죽였다면 은 열 개와 띠 하나를 주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요압의 말에 병사는 은 천 개를 준다 해도 자신은 왕의 아들에게 손을 대지 않을 것인데, 왕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와 모든 사람들에게 요나단의 목숨을 살려주라고 말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병사는 다윗의 명령에 온전히 충성하며 요압에게 다윗이 압살롬을 살려주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줍니다. 그에게는 은 열 개가 아니라 은 천 개보다도 다윗의 명령이 우선인 것입니다. 그리고 설사 돈이 탐나서 압살롬을 죽인다고 하더라도 다윗이 결국은 모든 사실을 알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은 반역자가 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는 절대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요압에게 보고한 다윗의 신하는 정말로 다윗의 명령을 충실하게 지키는 인물이었습니다.

 

(4) 요압이 압살롬을 죽임(14-15)

하지만 요압은 부하의 말에 반대하며 빨리 압살롬을 죽이기 위해 자신의 부하를 데리고 압살롬이 있는 곳으로 갑니다. 손에 세 개의 막대기를 들고 매달려 있는 압살롬의 가슴 부근을 강하게 쳐서 땅에 떨어뜨렸고, 땅에 떨어진 압살롬을 요압의 무기를 든 청년들, 즉 요압의 호위대 열 명이 쳐 죽입니다. 이것은 철저히 요압의 독단적인 결정에 의해서 벌어진 일입니다. 다윗의 입장에서 압살롬은 비록 반역을 저질렀지만 자신의 아들입니다. 다윗은 이미 밧세바에게서 얻은 아들과 암을 잃었기 때문에 압살롬까지 잃는 아픔을 겪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요압의 입장에서 압살롬은 다윗의 왕권과 자신의 군대장관 지위를 위태롭게 하는 인물입니다. 압살롬의 부대에서는 요압 대신에 요압의 사촌인 아마사가 군대장관이었습니다. 이것은 압살롬이 왕이 되면 요압은 압살롬의 왕국에서 실각하거나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압은 자신이 다윗과 화해시키기 위해서 다윗의 미움을 받을 각오를 하면서 데리고 온 압살롬이 자신을 배신하고 자신의 지위를 위태롭게 하는 것에 대해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만일 살려두면 압살롬이 언제 또다시 반역을 일으킬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한번 시도하여 거의 성공할 뻔하였고 시간이 지나 다윗이 점점 늙게 되면 아무래도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 왕이 될 확률이 높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설혹 반역을 일으키지 않더라도 압살롬은 첫째 아들이고 수완이 좋기 때문에 다윗이 죽은 뒤에 왕이 될 확률이 높습니다. 압살롬이 왕이 되면 압살롬의 왕궁에서 요압의 입지는 거의 없게 됩니다. 요압이 압살롬을 다윗에게로 데리고 왔을 때만 해도 자신이 압살롬의 후원자가 되어 다윗이 죽은 후에 압살롬을 자신의 손에 두고 뒤에서 조종하며 이스라엘의 최고 권력을 누리려 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의심이 신빙성 있는 것은 후에 다윗이 죽기도 전에 아도니야를 왕으로 추대하여 권력을 쥐려고 시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재 상황을 보면 이런 애초의 계획은 전혀 실현 가능성이 없고 오히려 압살롬이 자신에게 매우 위협이 되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요압은 기회가 생겼을 때 압살롬을 죽여버린 것입니다. 그는 왕명보다는 자신의 이익이 우선이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선인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도 다윗의 명령을 어기고 개인적으로 원수를 갚기 위해 아브넬을 죽인 적이 있습니다. 요압은 현재 다윗의 군대 장관이기 때문에 다윗도 자신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이렇게 대놓고 다윗의 명령을 어긴 것입니다. 이런 요압의 모습은 다윗의 명령에 순종하던 다윗의 부하와 대조를 이룹니다. 요압은 자신의 이익에 영향을 주지 않는 경우에는 다윗에게 충성을 하지만 자신의 이익과 다윗의 명령이 배치될 때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압은 다윗에게 가장 든든한 신하이자 가장 믿을 수 없는 신하이기도 하였습니다.

 

(5) 압살롬을 숲에 묻음(16-17)

압살롬을 죽인 요압은 숲속에 큰 구덩이를 파고 그곳에 던져 넣은 후 그곳에 거대한 돌무더기를 쌓아 무덤을 만듭니다. 돌무더기는 저주받은 자의 무덤을 의미하는 것으로 요압은 압살롬을 예루살렘에 있는 가족묘에 묻어주지 않고 돌무더기 무덤에 묻음으로 왕자가 아닌 반역자로 취급하였습니다. 여기서 매우 큰 돌무더기 무덤을 만든 이유는 백성들에게 경고를 주기 위한 것으로 누구든지 반역을 일으키면 이렇게 저주받은 자로 죽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대한 돌무더기는 반역자의 최후를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이렇게 반란군의 왕이 죽자 요압은 반란군 쫓는 것을 멈춥니다.

그들의 왕이 사라졌기 때문에 더 이상 서로 전쟁하는 것이 무의미해졌기 때문입니다. 왕을 잃은 반란군은 모두 흩어져 각기 자신의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반란군은 압살롬의 죽음으로 완전히 해체되었고 전쟁은 끝났습니다.

 

(6) 압살롬의 비석(18)

18절은 압살롬의 기념비에 대한 설명으로 압살롬은 아들이 없이 자신의 이름이 땅에서 잊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이름을 기념하는 기념비를 왕의 골짜기에 세워놓았습니다. 이것은 14:27에서 언급된 압살롬의 세 아들이 어린 나이에 죽었음을 의미하며, 압살롬이 자신의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죽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벌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후손이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심판의 일종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이 자신의 형 암논을 죽이고 아버지 다윗에게 반역한 죄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벌을 내리신 것입니다. 이렇게 암논이 다말을 강간한 사건으로 시작된 압살롬의 반란은 지독한 내전을 겪고 결국 압살롬이 죽음으로 끝나게 됩니다. 그리고 다윗은 아들의 반란과 죽음으로 자신의 간음과 살인에 대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고 다윗과 언약하셨기 때문에 결코 다윗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잘못에도 눈감고 무조건 덮어주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반면 하나님의 공의를 두려워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누구와 누구 사이, 무엇과 무엇, 어떤 욕망과 욕망 사이에 서 있습니까? 양쪽 모두를 다 아우를 수 있는 사이도 있지만, 절대 양립하거나 타협할 수 없는 사이도 있습니다. 쓰디쓴 마음을 안고서라도 선택해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충성이 되기도 하고 변절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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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7-02)


목숨을 다해 헌신한 다윗의 사람들

사무엘하 17장 15-23절


 

사람들은 자신이 경배하는 대상을 닮아갑니다. 그 대상의 성품과 가치관과 삶의 목표가 자신의 것이 됩니다. 대상의 실패는 자신의 실패가 되고, 대상의 성공은 자신의 성공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그분의 뜻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에게 다윗을 죽일 매우 효과적이고 지혜로운 방법을 제시하였습니다. 하지만 압살롬은 그의 계획을 바로 받아들이지 않고 후새를 불러 그의 생각도 물어봅니다. 다윗을 구할 기회를 얻은 후새는 아히도벨의 계획이 좋지 못하다고 평가하고 더 좋은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많은 군사를 모은 다음에 압살롬이 앞장서서 다윗을 죽이는 것이다.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좋은 계획 대신에 후새의 어리석은 계획을 선택하는 잘못을 범합니다.

 

추격을 피하는 다윗(15-20)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하게 사용하십니다. 우리에게 큰 지식, 능력, 재산이 없더라도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의 결과는 우리의 조건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도구일 뿐입니다. 우리를 사용하신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일상에서 지극히 평범한 일을 하더라도 성실하게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게 살아가면 됩니다.

 

15이에 후새가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이르되 아히도벨이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이러이러하게 계략을 세웠고 나도 이러이러하게 계략을 세웠으니 16이제 너희는 빨리 사람을 보내 다윗에게 전하기를 오늘밤에 광야 나루터에서 자지 말고 아무쪼록 건너가소서 하라 혹시 왕과 그를 따르는 모든 백성이 몰사할까 하노라 하니라 17그 때에 요나단과 아히마아스가 사람이 볼까 두려워하여 감히 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에느로겔 가에 머물고 어떤 여종은 그들에게 나와서 말하고 그들은 가서 다윗 왕에게 알리더니 18한 청년이 그들을 보고 압살롬에게 알린지라 그 두 사람이 빨리 달려서 바후림 어떤 사람의 집으로 들어가서 그의 뜰에 있는 우물 속으로 내려가니 19그 집 여인이 덮을 것을 가져다가 우물 아귀를 덮고 찧은 곡식을 그 위에 널매 전혀 알지 못하더라 20압살롬의 종들이 그 집에 와서 여인에게 묻되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이 어디 있느냐 하니 여인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들이 시내를 건너가더라 하니 그들이 찾아도 만나지 못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니라(15-20)

 

다윗과 다윗의 나라와 다윗의 하나님께 자기 목숨 아끼지 않고 충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옳다고 믿는 가치를 위해 용감하게 주저 없이 행동합니다. 예루살렘 기득권이 주는 편안함과 그들이 보장하는 안전에 길들어지지 않고 광야의 다윗이 추구하는 대의를 위해 험한 삶을 감수합니다.

 

(1) 후새의 전언(15-16)

아히도벨의 계획을 알게 된 후새는 자신과 같이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아히도벨과 압살롬과 그의 장로들이 논의한 모든 내용을 알려주고 아히도벨의 계획까지 전달합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에 만들어놓은 정보망이 제대로 발휘된 것입니다. 후새는 다윗에게 단순한 정보뿐만 아니라 대처 방안까지 알려줍니다. 그는 사람을 빨리 보내서 다윗에게 광야 나루터에 머물지 말고 오늘 밤 안으로 반드시 건너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몰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후새의 조언은 아히도벨이 계획한 것이 실행될 경우를 대비한 것으로 만일 아히도벨의 계획이 실행되면 현재 다윗과 그와 함께한 사람들은 매우 위험해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좀 과장된 면도 있습니다. 아히도벨은 다윗만을 죽이겠다고 했는데, 후새는 위험성을 강조하기 위해 다윗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한 모든 사람이 몰살될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2) 우물 속 요나단과 아히마아스(17-19)

17절은 당시 예루살렘과 그 근방에 있던 다윗의 정보원들이 어떤 상황에 있었고, 어떤 방식으로 정보를 전달하였는지를 설명합니다. 이때 다윗의 정보 전달원 역할을 한 사람은 사독과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과 아히마아스이며, 이들은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성 밖에 있는 로겔 생가에 머물렀습니다. 이들은 공식적으로는 다윗을 지지하여 예루살렘을 떠난 것으로 되어 있어야 다윗과 예루살렘 사이를 편히 오갈 수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물이 귀한 고대 근동 사회에서 샘가는 여행객들과 지나가는 사람들이 쉬면서 정보를 나누는 장소이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숨기가 예루살렘 성보다는 쉬웠습니다. 이렇게 요나단과 아히마아스가 예루살렘 성 바로 옆에 있는 로겔 샘 곁에 숨어 있으면 성에서 사독과 아비아달이 보낸 여종이 나와서 이들에게 정보를 전달하였고, 이들은 그 정보를 다윗에게 전달하는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여종이 중간 정보전달자의 역할을 한 것은 사람들 눈에 가장 띄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후새와 다윗을 지지하던 제사장들은 다윗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도왔습니다. 정보원들이 한 청년에게 발각되었습니다. 청년은 로겔 샘 곁에 거하고 있던 요나단과 아히마아스를 알아보았고, 이들에 대해 압살롬에게 알립니다. 이 청년의 신분은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압살롬의 부하로 생각됩니다. 이 일로 다윗에게 정보를 전달하기가 곤란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압살롬에게 들켰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들은 재빨리 로겔 샘을 떠나서 바후림의 한 집으로 들어갑니다. 바후림은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거하는 지역으로 사울의 친척인 시므이가 사는 곳입니다. 시므이는 다윗이 바후림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다윗의 정보원들은 바후림에서 은신처를 찾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이들이 들어간 집 뜰에는 우물이 있었고, 이들은 우물로 내려갑니다. 아마도 물이 적어서 잘 사용하지 않는 우물이었던 같습니다. 이들이 우물에 내려가자 그 집 여주인이 우물 덮개를 가져다 우물 입구를 덮고 그 위에 곡식들을 널어놓았습니다.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여주인이 기지를 발휘한 것입니다.

 

(3) 압살롬의 추격자들(20)

압살롬의 군사들이 이 여인의 집까지 찾아와서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이 어디 있는지 아느냐고 묻자, 여인은 그들이 시내를 건너갔다면서 이미 이곳을 지나갔다고 거짓말하였습니다. 이 말을 믿은 압살롬의 군사들은 그들을 뒤쫓았지만 찾지 못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을 도운 이 여인의 모습은 여호수아 2장에서 여리고 성에 들어온 두 이스라엘 정탐꾼을 도운 라합과 유사합니다. 둘 다 자신의 집에 숨겨주었고 좀 더 완벽하게 숨기기 위해 숨을 곳을 곡식으로 덮었습니다. 또 자신이 숨긴 사람을 찾는 사람들에게 거짓으로 도망간 방향을 알려주어 자신과 자신이 숨긴 사람들이 좀 더 안전해지게 만들었습니다. 이 여인은 정탐꾼을 도운 이유를 분명히 밝힌 라합과는 달리 베냐민 사람인 자신이 왜 다윗의 편을 들었는지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주목할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돕기 위해 은밀하게 사람들을 준비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름 없는 여인들의 손을 통해 도움을 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 하나님께서 다시 다윗에게 은혜를 베풀고 돌보기 시작하셨다는 징표입니다. 반대로 압살롬의 입장에서는 이번에도 그의 계획이 실패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하나님께서 그를 그냥 두셨을 때는 승승장구하는 것 같았는데, 하나님께서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압살롬의 계획들이 자꾸 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요단을 건너는 다윗(21-23)

세상 사람들은 부와 권력을 가지면 평안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평안함이 임하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세상의 방식을 따르지 않아서 해를 당하게 되더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도는 세상 사람들이 행하는 방식, 유행, 상식에 동조하지 않고 의연하게 하나님의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21그들이 간 후에 두 사람이 우물에서 올라와서 다윗 왕에게 가서 다윗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들은 일어나 빨리 물을 건너가소서 아히도벨이 당신들을 해하려고 이러이러하게 계략을 세웠나이다 22다윗이 일어나 모든 백성과 함께 요단을 건널새 새벽까지 한 사람도 요단을 건너지 못한 자가 없었더라 23아히도벨이 자기 계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일어나 고향으로 돌아가 자기 집에 이르러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으매 그의 조상의 묘에 장사되니라(21-23)

 

여리고의 기생 라합처럼 아비아달의 두 아들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을 숨겨준 여인의 활약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사람이고, 시대의 대세를 따르지 않는 의식 있는 여인이며, 목숨을 걸고 위험을 감수할 줄 아는 여인입니다. 우리는 그 이름을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기억하실 것입니다.

 

(1) 요나단과 아하마아스의 보고(21)

압살롬의 군사들이 지나간 후에 두 사람은 우물에서 올라와서 다윗에게로 갑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무사히 다윗에게 정보를 전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다윗에게 서둘러 요단강 물을 건너라고 말하며 아히도벨의 계략을 알려줍니다. 이미 17:1-3에서 아히도벨의 계획을 언급하였기 때문에, 여기서는 반복하지 않고 단지 ‘이같이’라는 말로 생략하고 있습니다.

 

(2) 요단을 건너는 다윗(22)

예루살렘에서 온 정보를 들은 다윗은 후새의 말을 따라 요단 물을 건넜습니다. 여기서 ‘새벽까지 한 사람도 요단을 건너지 못한 자가 없다’라는 표현을 집어넣은 것은 아히도벨의 계획이 완전히 실패하였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아히도벨의 계획은 요단을 건너기 전에 다윗의 군대를 덮쳐서 군대를 해산시키고 다윗을 죽이는 것이었는데, 다윗의 군대가 모두 안전하게 요단을 건넜으니 더는 이 계획을 실행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3) 아히도벨의 죽음(23)

아히도벨은 자신의 계획이 실행되지 못하고 다윗과 그의 군사들이 무사히 요단강을 건너간 것을 알고는 압살롬의 반역이 실패할 것을 예감하였습니다. 아히도벨이 보기에 압살롬의 반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요압이 없는 틈을 이용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다윗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을 요압의 군대가 오기 전에 단시간 내에 끝내야 하는 작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이 후새의 화려한 말솜씨에 이가 다윗을 죽일 기회를 놓친 것을 보고 압살롬의 반역이 실패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실제로 요단을 건너 마하나임으로 간 다윗은 그곳에서 요압을 만나 압살롬을 칠 부대를 구성하고 전쟁을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아히도벨의 예측은 사무엘하 16:23에서 언급한 것처럼 정확하고 틀림없었습니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의 실패를 예측하고 나귀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을 매 죽습니다. 아히도벨이 자살을 선택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압살롬이 지면 다윗이나 요압이 자신을 살려두지 않을 것이고, 매우 모욕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니 그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장사되어 치욕적인 죽음을 피하려고 한 것입니다. 둘째, 머리 좋은 아히도벨에게 가장 비참한 심판은 머리 좋은 자신이 선택한 왕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음으로 자기 계획이 실패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계획이 실패한 것이 하나님의 개입에 의한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왕을 배반한 자신에게 내려진 심판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자살한 것입니다.

아무리 머리가 좋고 탁월한 전술을 가졌다 할지라도, 인간이 하나님을 능가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인간의 지혜를 이룰 수 있어도, 하나님께서 막기로 작정하시면 인간의 어떤 지략도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히도벨의 천재적 지략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다윗의 투박하고 진솔한 기도에 무너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세상의 모든 지혜를 합친 것보다 더 큰 지혜를 가지고 계신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우리가 기도할 때 악한 자들의 권모술수가 모두 무너질 것임을 신뢰해야 합니다.

 

마하나임(24-29)

우리 힘의 원천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따라서 결과주의, 성공주의에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결과보다 동기를 중요하게 여겨야 하고, 성공을 위해 불의한 방법을 쓰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불의는 결코 용납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힘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공의와 사랑으로부터 나옵니다. 정직, 약속 준수, 순전, 긍휼을 행해야 합니다. 비록 손해를 보더라도 거룩한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불의한 자가 힘을 얻지만, 하나님께서는 불의 한 자를 심판하심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24이에 다윗은 마하나임에 이르고 압살롬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과 함께 요단을 건너니라 25압살롬이 아마사로 요압을 대신하여 군지휘관으로 삼으니라 아마사는 이스라엘 사람 이드라라 하는 자의 아들이라 이드라가 나하스의 딸 아비갈과 동침하여 그를 낳았으며 아비갈은 요압의 어머니 스루야의 동생이더라 26이에 이스라엘 무리와 압살롬이 길르앗 땅에 진 치니라 27다윗이 마하나임에 이르렀을 때에 암몬 족속에게 속한 랍바 사람 나하스의 아들 소비와 로데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과 로글림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28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29꿀과 버터와 양과 치즈를 가져다가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에게 먹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 생각에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 함이더라(24-29)

 

아히도벨은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자신의 전략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다윗이 요단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압살롬의 패배를 직감했고, 자신의 자리가 없을 것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는 자기 전부를 다해 압살롬에게 충성했고, 그의 실패와 죽음이 자기 몫이란 것도 알았습니다.

 

(1) 다윗을 뒤따르는 압살롬(24)

다윗이 마하나임에 도착하였습니다. 마하나임에서 이스보셋이 사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통치했었습니다(2:8-9). 그러므로 왕도(王都)로 가능했던 마하나임은 다윗이 이런 상황에서 사용하기에 적절한 규모와 성채를 갖추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 다윗이 마하나임에 도착한 때와 압살롬이 요단을 건넌 때 사이에는 어느 정도 시간이 소요되었을 수 있습니다. 다윗이나 압살롬이 자기들의 군대를 조직하고 정비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2) 압살롬의 군대(25-26)

압살롬이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한 사람은 ‘아마사’입니다. 아마사는 이스라엘 사람 이드라의 아들인데, 그의 어머니는 나하스의 딸이며, 스루야의 동생인 아비갈입니다. 역대기는 아비갈(=아비가일)을 스루야와 함께 이새의 딸로 언급합니다(대상 2:16-17). 나하스의 아내가 스루야와 아비같을 낳은 뒤 그 딸들을 데리고 이새와 재혼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나하스는 암몬 왕 나하스와 동일 인물일 수 있으나 확인할 수 없습니다.

아비갈의 남편인 이스라엘 사람 ‘이드라’는 역대기에서 이스마엘 사람 예델이라 불립니다(대상 2:17). 본문의 이스라엘은 이스마엘로 고쳐 읽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마사와 요압은 이종사촌이었습니다. 이스라엘과 압살롬이 길르앗에 진영을 설치했습니다. 압살의 이름이 이스라엘 뒤에 기록님은 압살롬이 군대를 이끄는 사람이 아니었음을 암시합니다. 주둔지가 길르앗의 어느 지역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마하나임이 길르앗의 남부 지역이므로, 압살롬의 군대가 마하나임의 북쪽에 진영을 설치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압살롬은 다윗과 싸우러 가는 동안 전체 이스라엘에서 군대를 소집할 수 있도록 군대의 행군 방향을 세겜을 경유하는 방향으로 잡고 북진하다가, 야베스 근처에서 요단을 건넜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3) 다윗을 돕는 사람들(27-29)

마하나임에 있는 다윗을 돕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나하스의 아들 ‘소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나하스 역시 람바에서 왕이었던 나하스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있으나, 왕이라고 언급되지 않은 것을 볼 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만일 암몬 왕 나하스를 가리킨다면, 이 소비는 다윗과 싸운 하늘의 형제이고 하늘이 죽은 뒤 암몬의 왕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소비 역시 왕이라고 불리지 않습니다. 나하스가 많은 사람들이 흔히 쓰는 이름일 수도 있습니다. 어편 경우든 소비는 큰 부자이며, 그 지역의 지도자였을 것입니다.

둘째는 로테발 사람 알미엘의 아들 ‘마길’입니다. 암미엘(-엘리암)은 밧세바의 부친 이름이 기도합니다(대상 3:5; 삼하 11:3). 하지만 이 둘이 동일 인물일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본문의 마길은 므비보셋을 돌봐주었던 사람입니다(9:4). 로데발은 야베스 길르앗과 갈릴리 호수 중간에 있는 성읍으로 여겨지나 확실하지 않습니다.

셋째는 로글림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입니다. 로글임은 야베스 길르앗으로부터 북동쪽으로 20킬로미터 떨어진 곳의 성읍입니다. 이들은 생활필수품인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 그리고 음식을 만들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팔과 볶은 녹두와 꿀과 버터와 양과 소의 치즈를 가져왔습니다.

 


다윗 주변의 사람들은 자기 전부를 건 사람들입니다. 명분을 위해 충성을 위해 자신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압살롬의 사람 아히도벨도 끝까지 충성했습니다. 그 충성을 자진으로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충성이 다 인정받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구를 향한 충성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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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7-01)

 


다윗을 위한 계략을 선택한 압살롬

사무엘하 17장 1-14절


오래전부터 인생이 자신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더 좋은 계획이 항상 더 좋은 결과를 만들 줄 알고 착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의사결정 하나로 승패를 좌우하도록 만드십니다. 후새의 계략보다 아히도벨의 계략이 분명 좋았음에도 좌절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계획을 무위로 돌리는 변수는 무엇입니까?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도망한 뒤에 압살롬이 자신을 지지하는 백성들과 군사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옵니다. 이때 다윗의 친구 후새는 압살롬을 지지하여 압살롬의 신하로 예루살렘에 머물 수 있게 됩니다.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조언을 따라 왕궁에 남아있던 다윗의 첩들을 공개적으로 강간하여 자신이 다윗을 폐위하고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알립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내린 심판을 하나씩 이루어가고 계셨습니다.

 

아히도벨이 다윗을 추적하자고 제안함(1-4)

하나님의 교회가 악인의 간교한 계략으로 공격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계략을 막으시고 교회를 보호해주십니다. 간교한 계략을 세워 교회를 공격하는 것은 악인의 전형적인 방식입니다. 안익의 계략은 교회를 무너뜨릴 만큼 강력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보호 가운데 보존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붙잡고 계시기 때문에 안전합니다. 악인의 지혜는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에 견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1아히도벨이 또 압살롬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사람 만 이천 명을 택하게 하소서 오늘 밤에 내가 일어나서 다윗의 뒤를 추적하여 2그가 곤하고 힘이 빠졌을 때에 기습하여 그를 무섭게 하면 그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이 도망하리니 내가 다윗 왕만 쳐죽이고 3모든 백성이 당신께 돌아오게 하리니 모든 사람이 돌아오기는 왕이 찾는 이 사람에게 달렸음이라 그리하면 모든 백성이 평안하리이다 하니 4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이 다 그 말을 옳게 여기더라(1-4)

 

아이도벨은 피신한 다윗에게 재정비할 틈을 주지 않고 추적해 기습 공격하려는 계략을 세웁니다.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도 이를 다 옳게 여겼습니다. 아히도벨은 이런 계략을 통해 백성을 빼앗아 다윗의 나라를 무너뜨리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계략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하나님께서 택하신 왕 다윗을 해하려는 악한 계략일 뿐입니다.

 

(1) 군사 소집(1)

다윗의 첩들을 강간하라고 제안했던 아히도벨은, 이번에는 압살롬에게 다윗을 죽이자고 제안합니다. 자신이 군사 12,000명을 소집하여 당장 오늘 밤에 다윗의 뒤를 추적하여 그가 피곤하여 대항할 힘이 없을 때 기습하면 다윗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도망갈 것이고, 다윗만 죽이면 모든 백성이 압살롬에게 돌아올 것이며, 왕국도 평안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아히도벨은 현재 다윗 무리의 상태를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2) 야간 기습(2)

오늘 밤에 추적하면 그가 피곤하고 힘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16:14에서 다윗이 매우 피곤하고 지쳤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때는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기 얼마 전이거나 얼마 후일 것이며, 아히도벨이 예측한 그대로였습니다. 아히도벨은 많은 군대를 이끌고 가서 다윗 군대를 위협하면 다윗 옆에 있던 사람들이 무서워 도망갈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현재 다윗의 군대는 압살롬에 대항할 만한 전력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압살롬과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하는 중입니다. 그러므로 12,000명이라는 대군을 끌고 가서 위협하면 수적으로 너무 열세이기 때문에 굳이 싸우지 않고도 다윗만 죽일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다윗의 부대 상태와 규모를 정확하게 예측하고 세운 매우 좋은 전략입니다.

 

(3) 모든 백성의 단합(3-4)

추종하던 지도자가 없어지면 백성들은 자연스럽게 다른 지도자를 찾게 되어 있습니다. 아히도벨의 계획은 많은 희생을 치르지 않고도 효과적으로 정권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이 방법에 대해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도 모두 옳다고 여겼습니다.

 

아히도벨의 계획에 반대하는 후새(5-10)

교회를 보존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변경되거나 취소되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악인에게 공격당할 때 하나님께서는 충성된 일꾼을 세우셔서 악인의 계략을 물리치게 하시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하나님의 교회를 보호하십니다. 교회는 자신의 지혜를 좇는 자들에 의해 세워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기에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자를 통해 세워집니다.

 

5압살롬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도 부르라 우리가 이제 그의 말도 듣자 하니라 6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매 압살롬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아히도벨이 이러이러하게 말하니 우리가 그 말대로 행하랴 그렇지 아니하거든 너는 말하라 하니 7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되 이번에는 아히도벨이 베푼 계략이 좋지 아니하니이다 하고 8또 후새가 말하되 왕도 아시거니와 왕의 아버지와 그의 추종자들은 용사라 그들은 들에 있는 곰이 새끼를 빼앗긴 것 같이 격분하였고 왕의 부친은 전쟁에 익숙한 사람인즉 백성과 함께 자지 아니하고 9지금 그가 어느 굴에나 어느 곳에 숨어 있으리니 혹 무리 중에 몇이 먼저 엎드러지면 그 소문을 듣는 자가 말하기를 압살롬을 따르는 자 가운데에서 패함을 당하였다 할지라 10비록 그가 사자 같은 마음을 가진 용사의 아들일지라도 낙심하리니 이는 이스라엘 무리가 왕의 아버지는 영웅이요 그의 추종자들도 용사인 줄 앎이니이다(5-10)

 

후세는 다윗 왕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아히도벨의 계략이 좋지 않다고 말하고 다른 계략을 제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후새를 사용하시며(15:31) 그를 통해 아히도벨의 계략을 무너뜨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보로하시며 그의 왕위가 지속되도록 하십니다.

 

(1) 압살롬의 질문(5-6)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계획을 이루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겼습니다.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계획을 즉시 실행하는 대신에 후새의 의견도 들어보겠다고 그를 불러들인 것입니다.

이런 암살롬의 결정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16:23에서 언급했듯이 아히도벨의 말은 여호와께 신탁을 받은 것처럼 절대적으로 옳은 견해인데, 자신의 편인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은 후새의 견해를 듣겠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부터 일이 엇나가기 시작합니다. 후에 이렇게 된 이유를 하나님께서 압살롬을 심판하기 위해서 하신 일이라고 설명합니다.

 

(2) 아히도벨 작전에 대한 평가(7)

압살롬은 후새를 불러 아히도벨의 계획을 이야기해주고 그의 생각은 어떤지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 후새는 이 계획은 좋지 않다고 반대합니다. 후새는 현재 다윗 편에 서서 아히도벨의 훌륭한 계획을 반대해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아히도벨의 계획이 좋을수록 그 계획이 실행되지 못하게 필사적으로 막았습니다.

 

(3) 다윗과 그 군대의 상태 예측(8)

후새는 아히도벨의 계획을 일단 반대한 후에 그 이유를 설명하는데, 다윗과 다윗의 용사들의 상태에 초점을 맞춥니다. 아히도벨의 계획은 압살롬이 가지고 있는 월등한 군사력에 초점을 둔 것이기 때문에, 후새는 시선을 다윗 쪽의 군사력으로 돌립니다. 그는 다윗과 다윗의 군사력이 만만치 않음을 강조합니다. 이들은 모두 전쟁에 능한 용사이며, 현재 새끼를 빼앗긴 암곰처럼 매우 흥분하고 화가 난 상태이기 때문에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4) 소규모 부대의 위험성(9-10)

현재 수적으로는 다윗의 부대가 훨씬 열세지만 매우 흥분한 상태이기 때문에 무척 위험하며, 따라서 압살롬의 군대가 도리어 당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아히도벨은 다윗의 군대를 피곤하고 힘이 없는 상태로 본 것과는 달리 후새는 왕위를 빼앗긴 것에 대해 매우 분노하여 위험천만한 상태라고 설득한 것입니다. 새끼를 빼앗긴 암곰의 비유를 한 것은 자신의 의견을 좀 더 강하게 주장하기 위한 수사적 기술입니다. 다음으로 다윗이 백성들과 같이 있을 것이라는 아히도벨의 주장에 대해, 후새는 다윗은 전쟁에 익숙한 사람이기 때문에 백성들과 같이 머물지 않고 아마도 굴이나 산속에 숨었을 것이며, 숨어 있다가 혹시 다윗이 몇 명이라도 먼저 죽이게 되면 압살롬의 군사들이 패했다는 소문이 돌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압살롬의 군사들은 반드시 낙심하게 될 것인데, 다윗은 영웅이고 그의 군사들도 용사들인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억해낸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는 사람들이 다시 다윗에게로 돌아설 수 있음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후세는 아히도벨의 전쟁 계획에 대해 급하게 전쟁하여 혹시라도 지게 되면 득보다 실이 많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후새는 새끼를 빼앗긴 암곰이라든지 사자의 심장과 같은 비유를 능숙하게 사용하여 효과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능력 있는 인물입니다.

 

후새의 계획을 채택한 압살롬(11-14)

성도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지혜로 살아가야 합니다. 인간의 지혜는 아무리 뛰어나도 하나님의 지혜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은 계획은 우리를 좌절시킬 것입니다. 탁월한 지혜보다 지혜를 탁월하게 사용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아히도벨이 계산에 넣지 않은 가장 치명적인 실수는 다수라는 허수고, 욕망이라는 무리 수도 아닌 하나님이라는 최대 변수였습니다.

 

11나는 이렇게 계략을 세웠나이다 온 이스라엘을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바닷가의 많은 모래 같이 당신께로 모으고 친히 전장에 나가시고 12우리가 그 만날 만한 곳에서 그를 기습하기를 이슬이 땅에 내림 같이 우리가 그의 위에 덮여 그와 그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을 하나도 남겨 두지 아니할 것이요 13또 만일 그가 어느 성에 들었으면 온 이스라엘이 밧줄을 가져다가 그 성을 강으로 끌어들여서 그 곳에 작은 돌 하나도 보이지 아니하게 할 것이니이다 하매 14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계략은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셨음이더라(11-14)

 

다윗을 전면 공격해야 한다는 후새의 계략은 당시 정황으로는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의 사람들은 후새의 계략을 낫게 여깁니다. 압살롬은 반역을 일으키는 과정에서는 대단히 교활한 자였으나, 여기서는 어리석은 자에 불과합니다.

 

(1) 대규모 군대 소집(11)

아히도벨의 계획을 비판한 후새는 자신의 계획을 압살롬에게 이야기합니다.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모든 이스라엘에서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군사들을 모아 이들을 데리고 전쟁터에 나가자고 말합니다.

 

(2) 적군의 진멸(12-13)

이렇게 많은 수로 다윗을 기습하면 그와 함께한 사람을 한 명도 남기지 않을 수 있고, 만일 성으로 도망하면 성을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파괴할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기습을 이슬이 땅에 내리는 것으로 비유하는데, 이는 절대적으로 많은 수를 이용해 다윗의 군대를 제압하지는 것이고, 성을 밧줄로 끌어 강에 집어넣자는 것은 과장법으로 이것도 군사가 많기 때문에 성을 파괴하는 것이 쉽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후새의 계획의 핵심은 많은 수의 군사를 모아 압살롬이 이들을 끌고 위풍당당하게 전쟁터에 나가서 다윗의 군사들을 손쉽게 이기자는 것으로 과장되고 화려하지만, 구체적인 방법은 결여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합리적이고 효율적이지만 멋있거나 화려하지 않은 아히도벨의 계획과 대조됩니다. 또 하나 대조되는 것은 아히도벨의 계획에서는 압살롬이 참여할 부분이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후새의 계획은 압살롬이 직접 수많은 군사를 데리고 나가 다윗을 제압한다면 압살롬의 위상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후새가 수많은 사람을 모으자고 말한 것은 당장 쫓아가려는 아히도벨의 계획을 막아 다윗이 도망가거나 전력을 보충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것입니다.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온 이스라엘에서 군사들을 모으려면 여러 날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후새는 화려한 언변으로 압살롬을 주인공으로 세우는 멋진 계획을 말하고 있습니다.

 

(3) 압살롬의 평가(14)

이런 후새의 계획에 대해 압살롬은 물론이고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후세의 계략이 더 낫다고 평가하였습니다. 효율적이고 소박한 계획보다는 과장되고 화려한 계획이 이들의 눈에는 더 좋아 보인 것입니다. 이런 화려함에 눈이 멀어 아히도벨의 계획은 항상 옳다는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결국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계획 대신 후새의 계획을 따르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압살롬은 자신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를 잃게 되며 그의 반역은 실패하게 됩니다. 이에 대해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좋은 계획을 물리친 이유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재앙을 내리기 위해 아히도벨의 계획을 부수라고 하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압살롬의 행동에 대해 침묵을 깨셨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압살롬의 행동에 개입하지 않으시고 그가 하는 행동을 지켜만 보고 계셨습니다. 압살롬의 행동을 통해 암몬과 다윗의 악함을 벌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압살롬에게 악한 행동을 하라고 일부러 지시하신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의 악한 행동을 막지 않으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기도에 응답하여 압살롬의 악한 행동에 대한 심판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악한 행동하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막지 않으시면 우리 인간은 악한 본성을 따라 살면서 죄 지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악한 본성을 따라 살지 않기 위해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인생에는 변수가 있다는 사실을 두렵지만 가슴 뛰는 일입니다. 더구나 그 변수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라면, 조금 돌아가는 길로 인도하실지도 실망스럽지 않습니다. 인생에 다채로운 변수를 두어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더 큰 신비의 그릇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시길 바랍니다(잠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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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6-02)


악한 계략을 따르는 압살롬

사무엘하 16장 15-23절


 

타락한 지도자들도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몇 번의 소심한 타협과 자기 합리화가 시작이었을 것입니다. 교회를 무너뜨리는 사단의 전략은 노골적인 핍박이나 명백한 거짓으로 찾아오지 않습니다. 사이비보다 유사 복음이 해롭고, 세속적 교훈보다 거짓 영성이 위험합니다. 목숨을 다하기까지 충성한다고 해서 그것을 참된 충성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참된 충성은 항상 선한 목적이 전개되어야 합니다.

 

예루살렘을 떠나 본격적으로 도망가는 다윗은 후새와 사독과 아비아달을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면서 정보를 알려달라고 부탁합니다. 길에서 므비보셋의 종 시바를 만나 양식을 얻지만, 므비보셋을 의심하여 그의 재산은 몰수합니다. 바후림을 지날 때는 베냐민 사람 시므이의 저주를 받으면서 쉬지도 못하고 어렵게 도주합니다. 그동안 압살롬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였고 다윗의 친구 후새를 만나게 됩니다.

 

후새와 압살롬의 만남(15-19)

자신의 삶을 돌아볼 때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 중 어디에 속해 살고 있다고 생각되었습니까? 주님의 뜻에 굴복하는 하나님의 백성이길 원하십니까? 아니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하나님을 기대합니까? 후자의 마음이 강하다면 하나님을 자기 삶의 주인으로 섬기는 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세상 사람들이 그러하듯 자신을 위한 종교가 필요했고 그 가운데 기독교를 택한 것일 뿐입니다.

 

15압살롬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이르고 아히도벨도 그와 함께 이른지라 16다윗의 친구 아렉 사람 후새가 압살롬에게 나갈 때에 그에게 말하기를 왕이여 만세, 왕이여 만세 하니 17압살롬이 후새에게 이르되 이것이 네가 친구를 후대하는 것이냐 네가 어찌하여 네 친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18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여호와와 이 백성 모든 이스라엘의 택한 자에게 속하여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이다 19또 내가 이제 누구를 섬기리이까 그의 아들이 아니니이까 내가 전에 왕의 아버지를 섬긴 것 같이 왕을 섬기리이다 하니라(15-19)

 

아비새는 시므이를 죽이자고 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를 하나님의 저주로 받아들입니다. 다윗은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인지 아닌지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이 순간에 그가 바란 것은 시므이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이 수치를 다 받아들이고 있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였습니다.

 

(1) 후새의 등장(15-16)

다윗이 비참한 모습으로 도망가는 것과 대조적으로 압살롬은 자신을 지지하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당당하게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합니다. 여기서 아히도벨이 압살롬과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부러 언급하는데, 이것은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매우 중요한 인물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때 후새가 압살롬을 크게 환영합니다. 학자가 후새에 대해 다윗의 친구라고 설명한 것은 후새가 압살롬에게 충성을 맹세하지만 여전히 내면적으르는 다윗의 편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그는 압살롬을 마중하고 왕이여 만세 왕이여 만세'를 외치며 환영합니다.

 

(2) 후새의 충성 서약(17-19)

이런 후새의 모습에 후새가 다윗의 친구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압살롬은 이것이 당신의 친구 다윗에 대한 충성심이냐고 비아냥거리면서 왜 친구를 따라가지 않았느냐고 묻습니다. 여기서 압살롬은 의도적으로 ‘당신의 친구’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후새의 배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압살롬의 질문에 자신은 여호와와 이스라엘 백성이 선택한 자에게 속하였으며 그와 함께 있겠다고 하면서. 왕의 아버지를 섬긴 것처럼 왕 압살롬을 섬기겠다고 충성을 맹세합니다. 자신이 여호와께서 선택하신 자에게 속하였다고 한 것은 자신은 여전히 다윗의 사람이라는 것을 암시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은 압살롬이 아니라 다윗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재는 다윗의 부탁을 받았기 때문에 압살롬을 섬기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아버지를 섬긴 것처럼 자신을 섬긴다는 말을 들은 압살롬은 후새가 자신을 여호와께서 선택하신 사람으로 인정하였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후새는 다윗이 부탁한 대로 무사히 예루살렘에서 압살롬의 신하로 있을 수 있었습니다. 압살롬이 배신한 후새를 쉽게 받아들인 것은 자신이 아버지를 배신하였기 때문에 사람을 배신하는 일이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반란을 한 압살롬은 예루살렘에서 한 명이라도 더 지지자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학적으로 볼 때 이것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압살롬이 지혜로운 선택을 하지 못하게 막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은 것으로 만들어달라고 기도했고, 마치 그 기도의 응답처럼 나타난 사람이 후새였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진행되고 있는 상황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기도를 이루어 가시는 과정이며, 압살롬이 의심 없이 후새를 받아들인 것은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히도벨의 모략을 따르는 압살롬(20-23)

세상의 방식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때때로 그 유혹에 넘어갈 때가 있습니까?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혹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지금 당장 불편해지거나 손해를 당하기 때문은 아닙니까? 정직하게 사는 자보다 남을 속이는 자가 흥왕하는 것을 보면서 잠시 일지라도 부러워한 적이 있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분명 근시안적인 삶이요, 영생을 바라보지 못하는 삶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0압살롬이 아히도벨에게 이르되 너는 어떻게 행할 계략을 우리에게 가르치라 하니 21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이르되 왕의 아버지가 남겨 두어 왕궁을 지키게 한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소서 그리하면 왕께서 왕의 아버지가 미워하는 바 됨을 온 이스라엘이 들으리니 왕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의 힘이 더욱 강하여지리이다 하니라 22이에 사람들이 압살롬을 위하여 옥상에 장막을 치니 압살롬이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앞에서 그 아버지의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니라 23그 때에 아히도벨이 베푸는 계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은 것이라 아히도벨의 모든 계략은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그와 같이 여겨졌더라(20-23)

 

후새는 다윗의 조언을 따라 압살롬에게 굴복한 척합니다. 압살롬의 승리를 여호와의 승리로 해석하고, 자신의 충성은 대를 이은 충성으로 포장합니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에게 다윗의 후궁을 공개적으로 겁탈하게 함으로써 다윗 왕권의 종언과 새로운 왕의 등장을 상징적으로 알리라고 압살롬에게 조언합니다.

 

(1) 아히도벨의 첫 번째 계략(20-21)

후새를 신하로 받아들인 압살롬은 아히도벨에게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계획을 말해보라고 합니다. 이 문장에서 히브리어 본문은 ‘너희’란 남성 복수형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비록 압살롬이 아히도벨에게 말하고 있지만, 그 옆에서 후새나 다른 신하들도 듣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압살롬의 물음에 아히도벨은 다윗이 남겨둔 후궁들과 동침하라고 제안합니다. 그러면 압살롬이 다윗의 미움을 받는다는 것을 다들 알게 될 것이고, 그러면 압살롬과 함께 있는 사람들이 더욱 힘을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전왕의 후궁들과 동침하는 것은 고대 근동에서 전왕을 폐위하고 자신이 새로운 왕으로 등극하여 전왕의 권력과 모든 재산을 차지했다는 상징적인 행동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서 아버지의 첩을 취하는 것은 근친상간으로 간주하여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히도벨은 하나님의 율법보다는 고대 근동의 관행을 따라서 압살롬이 백성들에게 자신이 새로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을 조언하였습니다. 아히도벨은 또한 이런 행동을 다윗이 듣게 되면 압살롬을 미워하게 될 것이고, 압살롬과 다윗의 관계는 회복할 수 없는 지경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압살롬을 따르는 사람들은 더욱 긴장하고 힘낼 수밖에 없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 결과 압살롬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제 다시 다윗에게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고, 이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더욱 다윗과 강력하게 싸울 것이라고 계산한 것입니다. 아히도벨은 다윗의 첩을 취하는 행동을 통해 외부적으로는 압살롬이 다윗을 승계했다는 것을 알리고, 내부적으로는 결속을 다지는 기회로 삼으려고 한 것입니다. 아히도벨의 조언을 들은 압살롬은 그대로 시행합니다. 옥상에 천막을 치고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의 후궁들과 동침합니다. 후궁들을 ‘그의 아버지의 후궁들’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압살롬이 근친상간의 죄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압살롬이 천막을 친 옥상은 예전에 다윗이 목욕하고 있던 밧세바를 보고 음욕을 품었던 장소로 이 모든 일의 발단이 된 곳입니다. 옥상이란 장소를 통해 화자는 왜 다윗에게 이런 치욕스러운 일들이 벌어지게 되었는지 독자들로 하여금 떠올리게 합니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다윗의 첩들이 강간을 당하는 사건은 일차적으로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예언한 것이 성취된 것입니다. 나단은 다윗에게 ‘네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기고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라고 말씀을 전한 것이 문자적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온 이스라엘 앞에서’라는 단어가 두 부분에 공통적으로 사용되어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지금 하나님께 받는 벌을 통해 한걸음 한 걸음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죄에 대해 계속 선고대로 시행하고 계시며 사해주지 않고 계신 것입니다.

본문은 언급하지 않지만, 압살롬이 다윗의 첩들을 강간한 것은 암논이 다말을 강간한 것에 대해 다윗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에 대한 보복의 의미도 있습니다. 사실 다말이 암에게 강간당했을 때 다윗이 적절하게 조치를 취했다면, 압살롬이 반역을 하는 일도, 다윗의 첨을 강간하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다윗의 무책임함 때문에 다윗의 딸이 강간당한 일에서 시작된 비극이 다윗의 첩 열 명이 강간당하는 비극으로 확대된 것입니다. 여기서 힘없는 여성들이 강간당하는 모습은 현재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으며, 지도자들이 공의와 지혜로 이스라엘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여성들이 강간당하는 상황은 항상 그 사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불의를 일삼을 때 일어납니다. 사사기 19장의 레위 첩, 다말, 다윗 첩들의 강간이 그렇습니다. 창세기 34장에서 디나의 강간 사건도 야곱 집의 영적 타락과 세겜의 불의함이 결합된 사건이었습니다. 이렇게 사회가 불의할수록 그 사회에서 가장 힘없는 사람들이 이용당하고 폭력의 희생자가 되며 이런 희생자들을 또한 무정하게 대합니다. 사회가 정의로울수록 그리고 정의롭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가장 힘없는 사람도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성들과 힘없는 자들의 희생을 강요하며 희생을 정당화하는 곳은 불의한 곳입니다.

 

(2) 암살롬의 실행(22-23)

23절에서 아히도벨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사실 이것은 사무엘하 15:31에서 아히도벨의 이름이 처음 나올 때 나왔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곳에 나온 이유는 17장에서 나올 아히도벨과 후새의 대결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아히도벨의 계략이 마치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우림이나 둠밈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탁을 받은 것처럼 정확하게 들어맞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아히도벨의 지략은 뛰어났으며, 이런 아히도벨의 능력은 다윗도 압살롬도 전적으로 신뢰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아히도벨이 압살롬 편에 섰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심각한 위기감을 느끼고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자신에게는 이런 아히도벨 같은 뛰어난 지략을 가진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다윗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거짓은 그것이 진리처럼 보이기에 강력합니다. 그 작은 간극을 무시하고 타협하면서 타락이 시작됩니다. 현대 교회를 향한 가장 큰 도전은 명백한 이단 사상이나 노골적인 핍박이 아닙니다. 진리처럼 보이는 거짓에 대한 분별 없는 타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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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6-01)


시바의 거짓말과 시므이의 저주를 듣는 다윗

사무엘하 16장 1-14절


잘못에서 비롯되었든 세상의 악함이 야기한 것이든, 고난은 우리를 지치고 힘들게 합니다. 고난의 상황에 매몰되면, 쉽게 분별력을 상실하고 성정이 날카롭게 변하며 관대함과 여유를 잃게 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닥친 시련을 보며 불평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그 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무엇인지를 겸손히 헤아립니다. 고통이 지속될 때, 성도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행동해야 합니까?

 

다윗은 압살롬의 반란을 막을 군사력이 없기 때문에 급히 예루살렘을 떠납니다. 이때 사독과 아비아달이 언약궤를 가지고 다윗을 따르려 하지만, 다윗은 이들을 돌려보냅니다. 그리고 자신을 따르려는 충성스러운 산하 후새도 돌려보냅니다. 대신에 이들에게 예루살렘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려달라고 부탁합니다. 다윗은 압살롬을 피해 도망하면서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도와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시바와 만나는 다윗(1-4)

성도는 다른 사람의 말에 잘못된 판단과 결정을 내릴 때도 있지만, 그 일을 통해서 그 사람만 탓한 것이 아니라 신중하지 못한 자신과 자신의 죄악에 대해서도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성장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습니다. 깨달음을 얻고 성숙해지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다윗이 시바에게 속아 잘못 판단하고 결정한 일을 나중에 알게 되었을 때, 그를 처벌하지 않습니다.

 

1그 후에 압살롬이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고 호위병 오십 명을 그 앞에 세우니라 2압살롬이 일찍이 일어나 성문 길 곁에 서서 어떤 사람이든지 송사가 있어 왕에게 재판을 청하러 올 때에 그 사람을 불러 이르되 너는 어느 성읍 사람이냐 하니 그 사람의 대답이 종은 이스라엘 아무 지파에 속하였나이다 하면 3압살롬이 그에게 이르기를 보라 네 일이 옳고 바르다마는 네 송사를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하셨다 하고 4또 압살롬이 이르기를 내가 이 땅에서 재판관이 되고 누구든지 송사나 재판할 일이 있어 내게로 오는 자에게 내가 정의 베풀기를 원하노라 하고(1-4)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도망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징계(12:9-12)로 인해서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징계받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제공해 준 시바가 므비보셋에 대해 거짓말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을 때 그를 처벌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시바의 소유를 다시 므비보셋과 나누게만 했을 뿐입니다.

 

(1) 시바가 가져온 음식(1-2)

다윗이 감람산 마루턱을 조금 지났을 때, 므비보셋의 종인 시바를 만나게 됩니다. 시바는 안장을 지운 나귀에 떡 이백 개와 건포도 백 송이와 여름 과일 백 개와 포도주 한 부대를 싣고 다윗을 맞이합니다. 이런 시바의 모습을 본 다윗은 이것이 무엇인지 물었고, 시바는 다윗과 다윗의 가족과 수행원들을 위해 가져온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사무엘상 25:18에서 아비가일이 다윗의 병사들을 위해 준비한 음식과 유사합니다. 시바는 설명을 통해 자신이 매우 꼼꼼하게 다윗을 위해 양식을 준비했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다윗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2) 므비보셋의 말과 다윗의 선언(3-4)

그런데 다윗은 이런 시바의 설명이나 음식보다는 므비보셋의 행방에 더 관심을 갖습니다. ‘네 주인의 아들이 어디 있느냐’고 시바에게 물은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여전히 시바를 사울의 신하로 간주하고 있는데,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시바는 더욱 다윗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한 것입니다.

다윗의 질문에 시바는 므비보셋은 여전히 예루살렘에 있는데, 그 이유는 이스라엘 족속이 자기 아버지의 나라를 자신에게 돌릴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도망간 사이에 다윗의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다윗과 같이 도망하지 않고 예루살렘에 남았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런 시바의 말에 대해 다윗은 더 알아볼 생각을 하거나 의심하지 않고 완전히 믿었고 화가 난 다윗은 므비보셋의 모든 재산을 빼앗아 시바에게 줍니다.

이에 시바는 다윗에게 감사의 절을 하고 왕의 신하가 되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내가 왕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는 이제 더 이상 사울의 신하가 아니라 다윗의 신하로 받아달라는 의미입니다. 시바는 이전부터 자신을 ‘당신의 종’이라고 칭하며 다윗의 신하가 되고 싶어 했지만, 므비보셋이 등장함으로 다윗의 신하가 되지 못하고 계속해서 사울의 집 신하로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 왕국에서 사울 집의 신하로 지내는 것은 더는 출세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출세를 원한 시바의 입장에서는 매우 불만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다 자신이 나설 기회가 생기자 재빨리 므비보셋을 배반하고 다윗에게 온 것입니다. 므비보셋이 정말 반역을 했는지 이 부분에서는 알 수 없지만, 사무엘하19:24-30에 가면 므비보셋은 다윗을 배반하지 않았고, 오히려 시바가 므비보셋을 배반하고 모함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현재 자신의 아들 압살롬에게 배반당한 상태이기 때문에 요나단의 아들이 배반했다는 소리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탐욕스러운 인간의 말을 그대로 믿고 므비보셋에게 주었던 모든 것을 빼앗아 그를 모함한 인간에게 줘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을 때는 요나단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일부러 므비보셋을 찾아 은혜를 베풀고 함께 지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진 지금 그는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 요나단과 맺었던 언약까지 깨려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때 생긴 의심은 나중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시므이의 저주(5-14)

예수님께서는 의인이셨지만 채찍질과 침 뱉음을 당하며 조롱과 멸시 가운데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분의 희생을 생각할 때 우리의 억울함은 너무나 미미한 것입니다. 성도는 억울한 일을 통해서도 깨닫음을 얻고 자신을 훈련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을 허용하실 수 있는지에 주목하기보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것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 아브라함과 이스보셋 등 사울 집안 사람들의 죽음에 책임이 없었습니다.

 

5사람이 가까이 와서 그에게 절하려 하면 압살롬이 손을 펴서 그 사람을 붙들고 그에게 입을 맞추니 6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마다 압살롬의 행함이 이와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압살롬이 훔치니라 7사 년 만에 압살롬이 왕께 아뢰되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이 있사오니 청하건대 내가 헤브론에 가서 그 서원을 이루게 하소서 8당신의 종이 아람 그술에 있을 때에 서원하기를 만일 여호와께서 반드시 나를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내가 여호와를 섬기리이다 하였나이다 9왕이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하니 그가 일어나 헤브론으로 가니라 10이에 압살롬이 정탐을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에 두루 보내 이르기를 너희는 나팔 소리를 듣거든 곧 말하기를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 하라 하니라 11그 때 청함을 받은 이백 명이 압살롬과 함께 예루살렘에서부터 헤브론으로 내려갔으니 그들은 압살롬이 꾸민 그 모든 일을 알지 못하고 그저 따라가기만 한 사람들이라 12제사 드릴 때에 압살롬이 사람을 보내 다윗의 모사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그의 성읍 길로에서 청하여 온지라 반역하는 일이 커가매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지니라 13전령이 다윗에게 와서 말하되 이스라엘의 인심이 다 압살롬에게로 돌아갔나이다 한지라 14다윗이 예루살렘에 함께 있는 그의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일어나 도망하자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 중 한 사람도 압살롬에게서 피하지 못하리라 빨리 가자 두렵건대 그가 우리를 급히 따라와 우리를 해하고 칼날로 성읍을 칠까 하노라(5-14)

 

다윗의 신복 아비새는 시므이를 죽은 재라고 하며 죽이게 해 달라고 다윗에게 청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시므이를 내버려 두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지금 자신이 겪는 고난을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징계로 여겼기 때문에 시므이의 저주를 기꺼이 감내했습니다. 자신의 원통함을 보시고 하나님이 갚아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1) 시므이의 등장(5-6)

다윗이 바후림에 가까이 갔을 그곳에서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나왔는데, 그는 사울의 친척입니다. 바후림은 사울의 지파였던 베냐민 지파가 사는 지역으로 이곳에 사울의 친척들이 살고 있었고 그중 한 명이 시므이인 것입니다.

 

(2) 저주(7-8)

시므이는 압살롬에게 쫓겨 바후림으로 온 다윗을 보고 나가라고 소리칩니다. 그는 다윗을 ‘피의 사람’, ‘불량배’로 부르는데, 이 중에서 불량배는 이전에 나발을 부르던 표현으로 지금 다윗은 자신이 악하게 생각하던 나발과 같은 인간으로 취급받고 있는 것입니다.

시므이가 다윗을 ‘피의 사람’ 즉, 살인자로 표현한 이유는 다윗이 반란을 일으켜 사울 집안 사람들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므이는 여호와께서 사울 집의 모든 피를 다윗에게 돌리셨고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나라를 넘기셨다고 말합니다. 압살롬의 반란으로 다윗이 이렇게 쫓겨나게 된 것은 다윗이 사울 집에 저지른 살인죄 때문에 여호와께 벌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시므이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고 있지만 여호와에 대한 지식이 있거나 신앙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인과응보의 대가를 치르게 하시는 분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울 집을 버리고 다윗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거나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3) 아비새와 다윗의 반응(9-12)

시므이가 저주하는 말을 들은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는 화를 내며 시므이를 죽은 개라고 욕하면서 자신이 그의 머리를 벨 수 있게 해달라고 다윗에게 요청합니다. ‘죽은 개’라는 표현은 사무엘하 9:8에서 므비보셋이 다윗 앞에서 자신을 낮추기 위해 사용한 표현으로 아무쓸모 없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아비새의 말에 다윗은 너희가 상관하지 말라고 합니다. 시므이가 저주하도록 여호와께서 허락하셨는데, 누가 그에게 뭐라 할 수 있겠나는 것입니다. 또한 아들도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데, 시므이가 자신을 저주하는 것이 무슨 대수냐고 하면서 반복하여 여호와께서 저주하게 하신 것이니 내버려 두라고 부하들을 말립니다. 그리고 혹시 여호와께서 저주받은 것 때문에 도리어 자신에게 선을 베풀어주실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이런 다윗의 말은 이전에 자신이 사울을 죽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으면서 원수 갚는 것은 여호와의 손에 있기 때문에 자신의 손으로 원수 갚지 않겠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이때도 다윗은 억울함을 토로하면서 하나님께서 선은 선대로 악은 악대로 갚아 주시길 기원했습니다.

 

(4) 감람산을 내려가 다윗(13-14)

이번에도 시므이가 저주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허락한 일이라고 말하지만, 만일 그렇지 않고 여호와께서 자신이 억울하게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직접 원수갚지 않은 것을 선하게 보시고 선을 베풀어주시길 원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일어난 압살롬의 반란과 모욕들을 통해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서 나단을 통해 주신 심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시므이의 저주도 하나님께서 내리신 벌 중 하나로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만일 시므이의 저주가 부당하다면 그것도 여호와께서 갚아 주실 것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이제 다윗은 점점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합니다. 이것은 그가 점점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다윗 일행은 시므이를 무시하고 자신의 길을 갔고 시므이는 산비탈로 따라오면서 계속해서 저주하고 돌을 던지고 흙을 뿌리며 괴롭혔습니다. 이것은 시므이의 행동이 지나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결국 시므이의 저주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행동임을 암시합니다. 다윗 일행은 시므이의 적대적 행동으로 인해 바후림에서 쉬지 못하고 계속 행군하였고, 결국 목마르고 배고픈 상태가 되었습니다. ‘피곤한’이란 뜻의 단어 ‘아예프’는 배고프고 목말라 지친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윗 일행은 바후림에서 쉬면서 물과 양식을 보급 받아야 했는데, 여기서 배척받았기 때문에 배고프고 목마르고 지친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들은 마침내 한 곳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쉬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에게 쫓겨 길을 헤매면서 그동안 왕궁에서 편안하게 살면서 잊었던 하나님을 찾게 되었고 만나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 하나님을 가장 의지하고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왕조를 하사하신 이후 그는 하나님을 잊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왕궁 밖으로 쫓아내시고 다시 하나님을 찾게 만드신 것입니다.

 


계속되는 시련에 몸도 마음도 지치기 마련입니다. 자존심이 상하고 억울한 상황도 발생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모든 판단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원통함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 시련의 시간이 지나갈 때 얼굴을 들게 하십니다. 시련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그 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찾고 따라야 합니다. 견디기 힘든 상황일수록 더욱 겸손하게 엎드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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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5-03)

 


끝까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다윗

사무엘하 15장 24-37절


시공간 속에 사는 우리에게 상징물이나 예전, 공간은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를 상기시키는 중요한 교보재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항상 내 편이 되어 주셔서 좋은 상황 속에 있길 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상황일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 스스로 그 유용함을 인정하시고 성전과 각종 제사와 절기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 유용한 법궤를 돌려보냅니다. 어떤 마음으로 그런 결단을 내렸습니까?

 

본문에는 다윗의 피난길에서 예루살렘을 떠나 감람산 정상에 이르는 여정을 기록합니다. 다윗은 사독과 아비아달, 레위인을 만나서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가라 했습니다. 감람산을 올라가는 중 아히도벨이 압살롬의 반란에 동참했다는 말을 듣고 하나님께 그의 모략을 어리석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감람산 정상에서 아렉 사람 후새를 만나 아히도벨의 모략을 깨뜨리도록 압살롬에게 가서 거짓으로 그의 신하가 되라 했습니다.

 

언약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돌려보냄(24-29)

성도는 자신의 계획과 노력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갑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습니다. 매사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 나라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세워져 갑니다.

 

24보라 사독과 그와 함께 한 모든 레위 사람도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어다가 하나님의 궤를 내려놓고 아비아달도 올라와서 모든 백성이 성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도다 25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궤를 성읍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26그러나 그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 27왕이 또 제사장 사독에게 이르되 네가 선견자가 아니냐 너는 너희의 두 아들 곧 네 아들 아히마아스와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을 데리고 평안히 성읍으로 돌아가라 28너희에게서 내게 알리는 소식이 올 때까지 내가 광야 나루터에서 기다리리라 하니라 29사독과 아비아달이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도로 메어다 놓고 거기 머물러 있으니라(24-29)

 

이 단락의 시점은 다윗이 성을 떠날 때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므로 23절보다 이전으로 생각됩니다. 아마 다윗이 예루살렘 성을 완전히 빠져나왔을 때로 보입니다. 다윗은 두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이 가져온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냅니다. 이 궤는 와권의 정당성을 상징하는 물건이지만, 그는 법궤를 이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한 길에 자신을 맡기기로 결정합니다.

 

(1) 사독과 아비아달(24)

본 절은 ‘보라’로 시작하는데, 이것은 다윗 일행이 예루살렘 성문을 지나서 나온 다윗이 본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것입니다. ‘보라’로 번역되는 ‘힌네’는 이야기가 진행되다가 화자의 시점에서 등장인물의 시점으로 바뀔 때 종종 사용되는데 여기서는 다윗의 시점으로 전환된 것입니다.

 

(2) 언약궤(25-26)

사독과 언약궤를 멘 레위인들이 언약궤를 내려놓은 상태로 있었고, 아비아달은 다윗을 맞이하기 위해 성문 앞으로 올라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언약궤를 가지고 다윗을 따라가기 위해서 미리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언약궤를 가지고 다윗을 따라가기 위해 미리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언약궤는 여호와의 임재를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종교적 상징으로 왕권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다윗도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유다와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자 제일 먼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고 와서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언약궤가 다윗을 따라간다는 것은 반역을 일으킨 압살롬이 아니라 여호와와 함께 있는 다윗이 진정한 왕이라는 징표가 되며, 이것은 백성들의 마음을 다시 다윗에게로 돌리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하지만 다윗은 언약궤 자체가 자신의 왕권을 보호해준다는 일반적인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다시 예루살렘의 원래 있던 곳으로 가져다 놓으라고 말합니다. 그는 왕권을 지키고 안 지키고는 전적으로 여호와의 손에 달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만일 내가 여호와의 은혜를 입으면 여호와께서 나를 돌아오게 하실 것이고, 그의 법궤와 그가 계신 곳을 보게 해주실 것이지만, 만일 하나님께서 나를 기뻐하지 않으시면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길 원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런 다윗의 모습은 왕이 되기 이전에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울 왕에게 쫓기던 시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3) 아히마아스와 요나단(27-29)

하지만 다윗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사독과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곳 사정을 정탐하고 알려달라고 부탁합니다. 제사장들을 이용해 예루살렘의 정보를 얻기 위한 정보망을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여기서 이름이 거론된 두 아들이 다윗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연락책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이들이 전해준 정보를 듣기 위해 요단강을 건너가는 나루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합니다.

임무를 받은 사독과 아비아달은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에 도로 가져갔고 자신들도 다윗의 명령대로 예루살렘에 머물렀습니다. 여기서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손에 맡기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사람과 상황을 이용하는 다윗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상반되거나 모순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인간이 노력하더라도 그 일을 성취하는 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자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고 결과는 온전히 여호와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아히도벨(30-31)

하나님 나라는 때로는 이 땅에서 극심한 위협을 당합니다. 사단은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기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위협을 일삼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위협당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간절히 기도합니다. 기도하는 자가 하나님의 백성이고, 기도하는 내용이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이라면 아무것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30다윗이 감람 산 길로 올라갈 때에 그의 머리를 그가 가리고 맨발로 울며 가고 그와 함께 가는 모든 백성들도 각각 자기의 머리를 가리고 울며 올라가니라 31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알리되 압살롬과 함께 모반한 자들 가운데 아히도벨이 있나이다 하니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옵건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하니라(30-31)

 

아히도벨은 다윗에게 충성을 다하였던 모사였습니다(삼하 15:12; 대상 27:33-34). 그가 베푸는 계략은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것으로 여겨졌을 정도니, 다윗이 그를 얼마나 신뢰하였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아히도벨의 배신은 다윗에게 매우 가슴 아팠을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도 다윗은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가 회복되고 다시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1) 감람산 오르막길(30)

다윗 일행은 예루살렘에서 나와 맞은편에 있는 감람산으로 올라가는 동안 머리를 가리고 울며 올라갔고, 특히 다윗은 머리를 가린 채 맨발로 울며 올라갔습니다. 이들은 다윗이 왕위를 빼앗기고 도망가는 수치스러운 상황에 대해 애곡하며 감람산으로 올라간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다말이 암논에게 강간당한 후 옷을 찢고 머리에 재를 쓰고 손으로 머리를 가리고 울부짖으며 집으로 돌아간 모습과 비슷합니다. 다윗은 다말이 당했던 수치를 동일하게 경험하며, 다말과 동일하게 쓰디쓴 아픔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2) 아히도벨(31)

다윗은 압살롬과 함께 반역을 일으킨 사람 중에 아히도벨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은 여호와께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만들어달라고 기도합니다. 이 기도는 다윗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회복하는 결정적인 부분으로 그는 다시 하나님을 의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무엘하 16:23에서 ‘아히도벨이 베푸는 계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런 설명처럼 아히도벨은 당대에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인정하는 모사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아히도벨이 압살롬을 돕는다는 정보를 듣고 상황이 더욱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아히도벨의 모략에서 자신을 구해주실 분은 오직 여호와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전적인 무능을 깨달은 순간 다윗은 다시 여호와께 의지하며 기도한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은 힘이 있고 높은 자리에 있으면 무슨 일이든 자기 생각과 힘으로 하려고 하며 실제로도 힘없고 가난한 사람보다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힘 있고 강한 자들은 점점 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게 되며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가난한 자야말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사는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후새와 아히도벨의 대결(32-37)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모든 위기를 이겨내고 아름답게 완성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세우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세워나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세워나가는 사람의 나라와 달리 하나님께서 세워 가시는 하나님 나라는 그 어떤 위기를 만나도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32다윗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루턱에 이를 때에 아렉 사람 후새가 옷을 찢고 흙을 머리에 덮어쓰고 다윗을 맞으러 온지라 33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만일 나와 함께 나아가면 내게 누를 끼치리라 34그러나 네가 만일 성읍으로 돌아가서 압살롬에게 말하기를 왕이여 내가 왕의 종이니이다 전에는 내가 왕의 아버지의 종이었더니 이제는 내가 왕의 종이니이다 하면 네가 나를 위하여 아히도벨의 모략을 패하게 하리라 35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이 너와 함께 거기 있지 아니하냐 네가 왕의 궁중에서 무엇을 듣든지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알리라 36그들의 두 아들 곧 사독의 아히마아스와 아비아달의 요나단이 그들과 함께 거기 있나니 너희가 듣는 모든 것을 그들 편에 내게 소식을 알릴지니라 하는지라 37다윗의 친구 후새가 곧 성읍으로 들어가고 압살롬도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더라(32-37)

 

다윗은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을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고, 역시 뛰어난 지략가이며 선견자이자 다윗의 친구인 후새 역시 다윗의 피신 행렬에 참여하려고 했지만, 다윗은 그 역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이번에는 그가 압살롬의 충신인 척하면서 사독과 아비아달과 함께 자신을 돕도록 합니다.

 

(1) 후새(32)

 다윗이 기도한 후 하나님을 경배하는 제단이 있는 곳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서 후새를 만납니다. 후새는 옷을 찢고 머리에 흙을 뒤집어썼는데, 이는 다윗과 동일하게 애도하는 모습으로 후새가 다윗 편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후새가 이곳에 있는 것은 다윗과 함께 가기 위한 것이지만 다윗은 그를 보자 자신과 같이 가는 것이 오히려 자신에게 짐이 된다고 말하면서, 다시 돌아가서 압살롬에게 복종하는 것처럼 하면서 자신을 위해 아히도벨의 모략을 깨뜨려달라고 부탁합니다.

 

(2) 아히도벨과 대결(33-34)

다윗은 여호와께 기도한 후 후새를 만나는 순간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후새를 통해 아히도벨의 모략을 깨뜨려주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후에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후세를 통해 아히도벨의 모략을 깨뜨리십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과 후새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다윗은 후대에게 예루살렘에 있는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이 자신의 편이라는 것을 알려주며, 어떤 정보가 생기면 이들을 통해 알려달라고 부탁합니다. 이렇게 다윗은 예루살렘을 떠나면서 믿을 만한 사람들에게 소식통 역할을 부탁하고 촘촘한 연락망을 짜놓습니다.

 

(3) 압살롬 동향 파악(35-37)

37절에서 ‘다윗의 친구’라고 표현하는데, 이것은 이후에 그가 압살롬 편을 드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의 진심은 다윗 편이라는 것을 미리 독자들에게 확실히 알려주기 위한 것입니다. ‘다윗의 친구’인 후새는 다윗의 요청을 받아들여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얼마 후 압살롬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들어왔을 때 후새는 다윗의 부탁을 충실히 이행합니다. 그는 정말로 다윗의 믿음직한 친구였던 것입니다.

결국 다윗은 아들 압살롬에게 예루살렘 성을 빼앗기고 계속해서 도망하는 신세가 됩니다. 하지만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찾고 조금씩 하나님을 의지하며 신앙을 회복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에게 내려진 심판과 비극은 한편으로는 형벌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축복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으로 인해 그의 자식들과 이스라엘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며,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죄를 짓지 않는 것이 나와 가정과 사회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손수 마련하신 언약궤를 성전으로 돌려보낸 다윗에게서 우리는 어떤 신앙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언약궤를 곁에 두고 하나님을 기억하고 의지하는 것보다 그것없이도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이 더 나은 믿음임을 보여줍니다. 그 상징물이 자칫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상황이 앞에 닥쳤을 때에도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을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이 필요하고, 그 뜻을 따라 순종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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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5-02)


압살롬을 피해 도망하는 다윗

사무엘하 15장 13-23절


이겨야 하는 싸움이 있고 피하는 것이 상책인 싸움도 있습니다. 상처만 남고 명분은 없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는 싸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피하는 순간에도 절대로 잃지 말아야 할 품위가 있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을 피해 도망가지만, 왕으로서의 품위를 어떤 식으로 지켜가고 있습니까?
 
압살롬은 다윗과 만난 뒤에 반역을 일으킬 준비를 해나가기 시작합니다. 우선 재판받으러 오는 백성들에게 다윗의 홀을 잡고 자신이 왕이 되면 더 잘할 수 있다고 말하고 백성들을 친근하고 겸손하게 대하여 그들의 마음을 삽니다. 이런 작업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자 압살롬은 신하 100명을 데리고 헤브론으로 가서 그곳을 근거지로 삼고 모사인 아히도벨까지 모셔 와서 점점 더 자신의 세력을 넓히기 시작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도망하는 다윗(13-17)

하나님 나라는 그 어떤 위협에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다윗 왕국이 반역으로 무너질 것입니까? 다윗은 예루살렘을 버리고 떠나야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함께 하시는 한 하나님 나라는 영원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무너뜨리려면 하나님을 대적해서 이겨야 합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감히 하나님을 대적할 수 없습니다.
 
13전령이 다윗에게 와서 말하되 이스라엘의 인심이 다 압살롬에게로 돌아갔나이다 한지라 14다윗이 예루살렘에 함께 있는 그의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일어나 도망하자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 중 한 사람도 압살롬에게서 피하지 못하리라 빨리 가자 두렵건대 그가 우리를 급히 따라와 우리를 해하고 칼날로 성읍을 칠까 하노라 15왕의 신하들이 왕께 이르되 우리 주 왕께서 하고자 하시는 대로 우리가 행하리이다 보소서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하더라 16왕이 나갈 때에 그의 가족을 다 따르게 하고 후궁 열 명을 왕이 남겨 두어 왕궁을 지키게 하니라 17왕이 나가매 모든 백성이 다 따라서 벧메르학에 이르러 멈추어 서니(13-17)
 
압살롬의 반역 소식에 다윗은 예루살렘을 떠나 피난 길로 섭니다. 승산 없어서 도피한 것일 수도 있지만, 아들과의 싸움을 피해야 한다는 판단 때문일 가능성이 더 큽니다. 싸워 이긴들 상처만 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싸움은 피해야 하고, 도피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입니다.
 
(1) 반란의 소식(13)
헤브론에서 압살롬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결국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다윗의 귀에까지 들어갑니다. 전령이 다윗에게 와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압살롬을 지지하고 따른다는 사실을 보고하였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급히 도망하려고 서두릅니다.
 
(2) 왕의 두려움(14)
다윗이 ‘빨리’라는 단어를 반복하고 ‘일어나라’, ‘서둘러라’ 등 명령법을 사용하여 서둘러 도망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됩니다. 또한 다윗은 압살롬이 예루살렘에 들이닥치면 사람들을 죽이고 성읍을 파괴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에 매우 당황하고 허둥대며 두려워하고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다윗이 예루살렘 성을 버리고 이렇게 재빨리 도망하려는 이유는 첫째, 예루살렘 성과 왕궁이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전투가 일어나게 되면 아무래도 성이 파괴될 수밖에 없고 그러면 외부의 색을 방어하기에 불리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다윗이 현재 예루살렘에서 가지고 있는 전력으로는 압살롬의 군대를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요양이 이 장면에 등장하지 않는 것을 볼 때 다윗의 최강 부대인 요압의 부대는 현재 예루살램이 아닌 다른 지역에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은 후에 마하나임에 가서 그곳에 주둔한 부대와 자신이 이끈 부대를 합친 후에 압살롬과 싸울 태세를 갖춥니다.
 
(3) 왕을 따르는 왕궁 사람들(15-16)
다윗이 서둘러 도망하자 신하들도 다윗을 따르겠다고 나섭니다. 왕이 선택하는 대로 자신들도 따르겠다며 충성을 다짐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모든 가족을 데리고 가는데, 다만 후궁 열 명은 남겨두어 왕궁을 지키게 합니다. 다윗은 열 명의 후궁을 남겨둠으로써 자신은 비록 도망가지만 예루살렘이 여전히 자신의 집이라는 사실을 표시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결정은 열 명의 후궁에게는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처사였습니다. 열 명의 후궁은 압살롬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후에, 그가 예루살렘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도구로 사용되었고, 결국 하나님의 심판이 성취됩니다. 후에 다윗은 예루살렘을 탈환한 뒤에 이 힘없는 후궁들을 가두는데, 이들은 압살롬에게 강간당하고 다윗에게 버림받음으로써 다윗의 딸이자 압살롬의 누이인 다말과 같이 비참한 인생을 보내게 됩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과 압살롬은 힘없는 여성들을 권력을 획득하거나 유지하는 수단으로 이용한 점에서 서로 많이 닮았습니다. 다윗은 첫째 부인 미갈과 열 명의 첩을 이용하였고, 압살롬은 자신의 누이인 다말과 열 명의 첩을 이용하였습니다.
 
(4) 벧메르학(17)
다윗 왕이 예루살렘을 떠날 때 그를 따르던 백성들도 함께 따라 나섭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벧메르학에 도착하는데, 이곳은 예루살렘 외곽 끝에 있는 궁전이며, 문자적으로 ‘먼 집’이란 뜻입니다. 개역개정에서는 지명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영어 번역은 예루살렘에서 가장 마지막에 머물 수 있는 집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다윗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광야로 들어가기 전에 남아 있는 사람들과 군사를 점검하였습니다.
 

다윗을 따르는 신하들(18-23)

사람들은 어딘가에 소속되어 안정을 누리고자 합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심지어 종은 국적을 얻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는 이 땅의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어 안달하지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그 나라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도피하는 다윗을 따르는 사람들은 다윗의 인간적인 미를 끌린 것보다 왕이신 하나님께서 계시고 하나님을 따라가려고 한 것입니다.
 
18그의 모든 신하들이 그의 곁으로 지나가고 모든 그렛 사람과 모든 블렛 사람과 및 왕을 따라 가드에서 온 모든 가드 사람 육백 명이 왕 앞으로 행진하니라 19그 때에 왕이 가드 사람 잇대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도 우리와 함께 가느냐 너는 쫓겨난 나그네이니 돌아가서 왕과 함께 네 곳에 있으라 20너는 어제 왔고 나는 정처 없이 가니 오늘 어찌 너를 우리와 함께 떠돌아다니게 하리요 너도 돌아가고 네 동포들도 데려가라 은혜와 진리가 너와 함께 있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21잇대가 왕께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 계심과 내 주 왕의 살아 계심으로 맹세하옵나니 진실로 내 주 왕께서 어느 곳에 계시든지 사나 죽으나 종도 그 곳에 있겠나이다 하니 22다윗이 잇대에게 이르되 앞서 건너가라 하매 가드 사람 잇대와 그의 수행자들과 그와 함께 한 아이들이 다 건너가고 23온 땅 사람이 큰 소리로 울며 모든 백성이 앞서 건너가매 왕도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니 건너간 모든 백성이 광야 길로 향하니라(18-23)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으로 도피의 길을 떠날 때 신하들이 다윗을 따르겠다고 고백합니다. 상황에 따른 선택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약속을 끝까지 지키는 모습입니다. 그들이 다윗을 신뢰하고 따를 수 있ᄋᅠᆻ던 것은 그들 안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해타산을 따라 결정하는 철새 정치가 판을 치는 현실에서 끝까지 자신의 철학과 신념을 고수하는 올곧고 우직해 보이는 모습이 돋보입니다.
 
(1) 블레셋 사람들(18)
다윗 곁에 있는 사람들의 명단입니다. 그렛 사람과 블레렛 사람들은 이스라엘 정규군이라기보다는 다윗을 섬기는 용병 집단입니다. 그렛 사람은 크레테 출신의 이민자들로 에게 해의 같은 지역 출신으로 보이는 블레셋 사람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인 가드에서 온 모든 가드 사람 육백 명은 다윗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조직한 육백 명의 군사와 동일한 숫자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다윗의 군대와는 다른 사람들로 가드에서 온 직업 군인들입니다. 가드는 다윗과 개인적 친분이 있는 곳으로 다윗이 왕이 된 후에도 가드와는 계속해서 친분을 유지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이 이끄는 호위대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으로 이루어진 군대가 아니라 이방 민족으로 이루어진 용병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현재 다윗은 비록 이스라엘의 왕이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호위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이방 민족의 호위를 받고 있는 매우 서글픈 상황에 처한 것입니다.
 
(2) 잇대를 만류하는 다윗(19-20)
이 단락은 18절과 연결되어 가드 사람 잇대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다윗은 자신을 따라온 가드 사람 잇대에게 왜 자신과 같이 가려느냐고 물으면서 이제 쫓겨난 신세가 되었으니 가드 왕에게 돌아가 그를 섬기라고 말합니다. 가드 사람들은 다윗에게 고용된 용병 집단으로 이들은 돈으로 자신들을 고용한 사람을 의해 싸울 뿐이지 누군가에게 충성심을 갖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다윗이 왕위에서 쫓겨나면서 다윗에게 고용된 이들도 이스라엘에서 쫓겨난 신세가 된 것입니다. 돈을 받고 싸우는 이들에게 현재 다윗이 충분한 대가를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들에게 가드로 돌아가 가드 왕을 섬기라고 말한 것입니다. 다윗은 그들이 여기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자신은 이제 정처 없이 돌아다녀야 하니 잇대에게 가드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은혜와 진리가 있기를 기원해주는데, 은혜와 진리, 즉 ‘헤세드’와 ‘에메트’는 여호와께서 언약 백성들을 신실하게 대하실 때 사용하는 용어이며, 다윗은 암시적으로 여호와의 축복을 빌어준 것입니다.
 
(3) 잇대의 충성(21-22)
이런 다윗의 말은 진심이 아니라 가드 사람 잇대를 시험하기 위한 것입니다. 다윗은 현재 아들에게 생각지도 못한 배신을 당한 상황이기 때문에 곁에 있는 자들의 충성심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자기 곁에 있다가 언제든 돌변하여 압살롬의 편을 들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다윗의 말에 잇대는 여호와의 살아계심과 왕의 살아계심을 두고 왕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사나 죽으나 함께하겠다고 맹세합니다. 이런 잇대의 맹세는 마치 룻의 맹세(룻 1:16-17)를 떠오르게 합니다. 모압 여인 룻은 자신의 시어머니와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고 시어머니가 죽어 묻히는 곳에 자신도 같이 묻히겠다고 여호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였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 잇대가 다윗을 위해 맹세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여호와의 이름이 이곳에 등장합니다. 다말의 강간 사건 이후 다윗의 입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여호와께 대한 신앙을 잊고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의 입에서 여호와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으며, 이스라엘 사람과 압살롬이 잊은 왕에 대한 목숨을 건 충성심도 이 블레셋 사람에게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잇대는 다윗에게 반역한 압살롬과 대조되는 인물로 등장하여 이스라엘의 신앙과 충성심이 소위 할례 받지 못한 블레셋 사람만도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블레셋 사람의 호위를 받는 다윗의 모습은 골리앗을 비난하던 사무엘상 17:25-26과 대조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를 잃거나 하나님을 잊게 되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세상 속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잇대의 충성 고백을 들은 다윗은 잇대를 선발대로 보냅니다. 이제 잇대를 완전히 신뢰하고 그에게 자신의 앞길을 맡긴 것입니다. 잇대를 따라 다윗과 함께한 모든 사람들은 기드론 시내를 건너서 광야 길로 향하게 됩니다.
 
(4) 백성의 슬픔(23)
여기서 다윗과 함께한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며 강을 건너는 것은 이들의 기 막히고 억울한 심정을 표현하였습니다. 이렇게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린 것 때문에 자신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 더 나아가 모든 백성들까지 전쟁에 내몰라는 비극적인 상황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드 다윗은 여호와께 도움을 구하는 대신 이 상황에 대해 한탄만 하고 있습니다.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기술이 삼십육계 줄행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피하고 도망하는 것이 항상 비겁한 행동은 아닙니다. 어쩌면 줄행랑이 싸우는 것보다 더 큰 용기일 수 있습니다. 또한 위기의 순간에 같이 울고,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모든 것이 정상으로 회복될 때가 이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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