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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03-03)

아브넬의 죽음을 애도하는 다윗

사무엘하 3장 27-39절

 

오늘날은 계산이 빠른 시대입니다. 느린 것도 못 참고 손해 보는 것은 더 못 참습니다. 하지만 신박한 속도와 정확한 계산만큼 시대는 서늘하고 관계는 삭막해져 가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계산이 빠른 사람과 계산하지 않은 사람이 등장합니다. 세상의 법칙과는 다르게, 전자는 결국 모든 것을 다 잃고 후자는 모든 것을 다 얻습니다.

 

미갈을 다윗에게 돌려보냄으로써 다윗과 아브넬의 밀약은 성사되었습니다. 아브넬은 약속대로 사울 집에 속했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베냐민 사람들을 설득하여 다윗을 왕으로 섬기기로 약속하게 됩니다. 모든 합의가 이루어지자 아브넬은 다윗과 최종 협상을 하기 위해 헤브론으로 왔고, 평화적으로 협상을 완결하고 돌아갑니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들은 요압은 다윗의 결정에 불만을 품고 아브넬을 다시 헤브론으로 불러들여 암살합니다.

 

아브넬을 죽여 동생의 원수를 갚는 요압(27-30)

믿음으로서의 기다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조건적인 소극성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추구하는 능동적인 순종입니다. 믿음은 인간의 생각이 앞서지 않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림으로 하나님의 뜻이 완성됩니다. 자신들의 이익에만 급급한 인물들의 모략과 폭력 속에서 다윗은 묵묵히 환난에서 생명을 건져주신 여호와만 의지하였습니다.

27아브넬이 헤브론으로 돌아오매 요압이 더불어 조용히 말하려는 듯이 그를 데리고 성문 안으로 들어가 거기서 배를 찔러 죽이니 이는 자기의 동생 아사헬의 피로 말미암음이더라 28그 후에 다윗이 듣고 이르되 넬의 아들 아브넬의 피에 대하여 나와 내 나라는 여호와 앞에 영원히 무죄하니 29그 죄가 요압의 머리와 그의 아버지의 온 집으로 돌아갈지어다 또 요압의 집에서 백탁병자나 나병 환자나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나 칼에 죽는 자나 양식이 떨어진 자가 끊어지지 아니할지로다 하니라 30요압과 그의 동생 아비새가 아브넬을 죽인 것은 그가 기브온 전쟁에서 자기 동생 아사헬을 죽인 까닭이었더라(27-30)

본문은 요압이 아브넬을 죽인 내용입니다. 아브넬이 살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목 놓아 울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선언합니다. 요압의 사사로운 복수심으로 상대편의 지도자인 아브넬을 죽임으로써 이스라엘에 더 큰 분열을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통일’이라는 역사적인 과업에 찬물을 끼얹은 것입니다.

(1) 요압의 복수(27)

요압이 전쟁에 승리하고 헤브론에 도착했을 때, 아브넬이 다윗을 만나서 언약을 맺은 후에, 그가 평안히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요압은 화가 났을 것입니다. 그는 사람을 보내어 아브넬을 다시 헤르본으로 돌아오게 합니다. 다윗이 할 말이 있다는 말로 속여서 데려왔을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헤브론에서 요압의 권력이 상당했을 것입니다.

아브넬을 만난 요압은 비밀스럽게 말하기 위해 아브넬을 데리고 성문 안 외진 곳으로 들어갑니다. 아브넬은 요압을 다윗의 심복으로 생각하였기에 다윗의 말을 전달하기 위해 조용하고 외진 곳으로 데리고 간다고 생각하고 방심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넬은 아사헬을 죽인 것이 전쟁 중에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요압이 자신에게 피의 복수를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요압이 자신의 왕인 다윗의 명령을 어길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심하지 않고 따라갔을 것입니다. 그만큼 요압의 행동은 왕의 충성스러운 신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넬과의 부하들에게 이끌려 헤브론으로 돌아왔을 때, 요압은 아브넬을 성문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배를 찔러 죽였습니다. 이는 요압이 자기 동생 아사헬에 대한 복수를 실행한 것입니다(2:18-23). 하지만 아브넬은 전쟁터에서 아사헬을 죽였으므로 요압의 복수는 정당성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한편으로 요압은 아브넬이 다윗의 신하가 되면 자기보다 높은 지위를 차지하게 될 것을 두려워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2) 다윗의 저주(28-29)

다윗은 아브넬이 죽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신속히 자신의 무죄함을 선포하면서 요압에게 살인의 책임을 돌렸습니다(28). 또 다윗은 아브넬을 살해한 일이 요압 개인 차원에서 벌어진 일이므로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왕국도 무죄하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요압이 다윗의 왕국에 속한 자가 아님을 암시합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왕국이란 다윗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앞에 영원히 무죄하니”는 여호와께서 다윗의 증인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무죄를 강조하기 위해 여호와께서 영원히 증인이 되신다고 말했습니다.

아브넬이 다윗을 만난 직후에 헤브론에서 죽었다는 사실은 아브넬을 보낸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윗의 적으로 돌아서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통합을 간절히 바랐고, 미갈을 다시 데려오게 한 것도 통일 왕국에 대한 다윗의 열망을 보여준 것입니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 것입니다. 아브넬과의 협상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서 다윗의 열망이 거의 성취되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요압이 그 모든 노력을 허사로 만들었습니다.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켜 이스라엘과 유다의 갈등이 깊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요압과 그의 가문을 “그 죄가 요압의 머리와 그의 아버지의 온 집으로 돌아갈지어다 또 요압의 집에서 백탁병자나 나병 환자나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나 칼에 죽는 자나 양식이 떨어진 자가 끊어지지 아니할지로다”라고 저주합니다. ‘백탁병(白濁病)’은 성병의 일종입니다.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는 문자적으로 ‘물렛가락을 다루는 남자’를 뜻합니다. 이는 장애나 상처 혹은 질병이 있어서 바깥일을 하지 못하고, 집 안에서 여인들처럼 활동하는 남자를 가리킵니다. 다윗은 요압에 대한 자신의 증오에도 불구하고 이후 계속 요압을 이인자로 삼는데, 이는 어떤 이유에서든 스루야의 아들들의 권력이 대단했음을 보여줍니다.

(3) 요압의 형제들(30)

아브넬은 기브온 연못가 전투에서 자신을 뒤쫓아 오는 아사헬을 창으로 찔러 죽였었습니다. 그래서 요압과 아비새가 아사헬을 복수하기 위해 아브넬을 죽였습니다. 27절에서는 요압이 단독으로 아브넬을 죽인 것으로 기록되었으나, 30절에서는 아비새와 요압이 함께 아브넬을 죽인 것으로 기록됩니다. 요압이 아브넬을 죽일 때 아비새가 동조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도 요압과 아비새를 함께 비난합니다(3:39).

 

아브넬을 장사 지냄(31-35)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적개심과 분노가 가득한 마음에서 독소를 제거해야 합니다. 복수하려는 마음이 싹틀 것입니다. 복수하려 할 때, 복수에는 성공할 수 있겠지만,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길에 서 있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에만 빠져 지내지 말아야 합니다.

31다윗이 요압과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아브넬 앞에서 애도하라 하니라 다윗 왕이 상여를 따라가 32아브넬을 헤브론에 장사하고 아브넬의 무덤에서 왕이 소리를 높여 울고 백성도 다 우니라 33왕이 아브넬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이르되 아브넬의 죽음이 어찌하여 미련한 자의 죽음 같은고 34네 손이 결박되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차꼬에 채이지 아니하였거늘 불의한 자식의 앞에 엎드러짐 같이 네가 엎드러졌도다 하매 온 백성이 다시 그를 슬퍼하여 우니라 35석양에 뭇 백성이 나아와 다윗에게 음식을 권하니 다윗이 맹세하여 이르되 만일 내가 해 지기 전에 떡이나 다른 모든 것을 맛보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 하매(31-35)

다윗은 아브넬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고 매우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브넬을 위한 애가를 지어 부르고 성대하게 장례를 치러줍니다. 백성들은 강권했지만, 음식 먹기조차 거부하였습니다. 그제야 이스라엘은 다윗의 무죄함을 믿게 됩니다.

(1) 헤브론에 묻힌 아브넬(31-32)

다윗은 아브넬이 죽음에 대해 요압을 비롯한 모든 백성들에게 옷을 찢고 긁은 배를 띠고 아브넬을 애도하라고 명령합니다. 왕 다윗이 직접 아브넬의 상여를 따라갔는데, 이것은 다윗이 직접 아브넬의 장례를 주도하고 참여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 애도하는 다윗(33-34)

다윗은 또다시 아브넬의 무덤 앞에서 큰 소리로 백성들과 함께 통곡을 하고 하브넬의 죽음에 대한 애가를 지어 불러줍니다. 아브넬의 죽음이 어리석은 자의 죽음 같다고 탄식했습니다. 어리석은 자의 죽음은 허무한 죽음입니다. 자신의 지위와 명성에 적합한 죽음을 맞이하지 못하고, 어처구니없이 허무하게 죽어버린 것을 슬퍼하며 노래했습니다. 그의 손이 결박되지 않았고 그의 발이 차꼬에 묶이지 않았다는 것은 아브넬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음을 말하며, 아브넬의 죽음이 허무했음을 강조합니다. 불의한 자식 앞에 엎드러지는 것은 불의한 사람이 의로운 아브넬을 죽였다는 뜻이며, 요압에 대한 책망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온 백성’이라는 표현은 아마도 다윗 왕궁에 출입하는 관리들일 것입니다.

(3) 금식하는 다윗(35)

장례가 끝난 후 모든 백성이 저녁에 다윗에게 와서 음식 먹기를 권했습니다. 동사 ‘바라’는 슬픔 속에서 허기를 때우는 것을 의미합니다(12:17). 다윗은 맹세하면서 해 질 때까지 떡이나 아무것도 맛보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고대에는 애도 기간에 금식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는 자기 저주의 형식으로, 맹세를 강조할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참조, 3:9). 그는 해 지기 전까지 떡이나 어떤 것도 맛보지 않겠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합니다.

 

백성들의 반응과 다윗의 한탄(36-39)

세상을 살아가는데, 진실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최선의 해결책입니다. 낙심하지 않고 진심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는 위기마저도 우리를 온전하게 하실 기회로 삼으십니다. 다윗의 아브넬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함으로써 오해를 벗고 백성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진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진실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변 사람들이 신뢰합니다.

36온 백성이 보고 기뻐하며 왕이 무슨 일을 하든지 무리가 다 기뻐하므로 37이 날에야 온 백성과 온 이스라엘이 넬의 아들 아브넬을 죽인 것이 왕이 한 것이 아닌 줄을 아니라 38왕이 그의 신복에게 이르되 오늘 이스라엘의 지도자요 큰 인물이 죽은 것을 알지 못하느냐 39내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 대로 갚으실지로다 하니라(36-39)

요압의 아브넬 암살로 다윗은 궁지에 몰리지만, 다윗은 아브넬의 죽음에 진심 어린 애도에 백성의 의혹은 충성으로 바뀝니다. 다윗은 나약한 자신의 왕권에 대해 탄식하지만, 결국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1) 백성들의 반응(36-37)

백성들은 다윗 왕이 애곡하며 금식하는 일련의 행동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진심으로 애도하는 것을 알고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그들은 다윗이 하는 모든 행동을 좋게 보았습니다. 이에 따라 모든 백성과 온 이스라엘은 아브넬의 죽음이 다윗과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진심 어린 행동이 또 한 번의 위기로부터 다윗을 벗어나게 했습니다.

(2) 아브넬 추모(38)

다윗은 자신에 대한 의심이 사라지고 오히려 백성들이 자기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 것을 알았습니다. 다윗은 이제 자신감을 가지고 아브넬을 위대한 장군이라고 높이면서 대조적으로 스루야의 아들들의 악함을 강조합니다. 한글 성경은 ‘사르 버가돌’을 ‘지도자요 큰 인물’이라 번역하였으나, 위대한 장군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3) 다윗의 한탄과 저주(39)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아 왕이 되었는데도 스루야의 아들들이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음을 지적하면서, 그들의 패역함을 강조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복수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는 문자적으로 ‘나보다 더 강하니’입니다.

 

나가는 말

위기나 역경의 때에도 성도들은 어떤 경우에도 진실하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믿음과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사로운 감정을 잘 조절되어야 합니다. 자신을 선한 방법으로 절제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갈 용기도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의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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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03-02)

 

아브넬을 선대한 다윗과 요압의 반발

사무엘하 3장 17-26절

 

골프선수 최경주는 2002년 PGA tour에서 우승한 이후로 꾸준하게 활약해서 세계 랭킹 5위까지 올랐습니다. 그는 전남 완도의 작은 시골 마을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노력으로 세계에서 성공한 그의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일반 직장인들이 하루 8시간 일하듯, 성공한 후에도 하루에 8시간씩 연습하며 노력하였고, 골프를 자신의 천직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의 성실함은 모든 사람에게 선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다윗의 집이 번창하는 동안 사울의 집에서 아브넬과 이스보셋이 사울의 첩과 간통의 일로 분열이 일어납니다. 이에 격분한 아브넬은 다윗에게 사자를 보내 자신의 사울의 집과 이스라엘을 다윗의 손에 붙이겠다고 제안합니다. 다윗은 그 밀약을 받아들인 조건으로 사울의 딸 미가를 보내라고 요구합니다. 다윗과 아브넬의 협상이 성사되면서 아브넬은 이제 이스라엘을 다윗에게로 돌리기 위한 작업들이 시작합니다.

 

아브넬의 설득(17-19)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때, 우리는 때때로 그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과 전혀 다른 세속적인 사람들이 판치도록 내어줄 때가 있습니다. 야망과 복수심에 가득찬 아브넬과 요압과 같은 사람들이 지도자로 나설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의 사역이 잘못될 것 같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를 다양한 방법으로 인도해 나가십니다.

17아브넬이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여러 번 다윗을 너희의 임금으로 세우기를 구하였으니 18이제 그대로 하라 여호와께서 이미 다윗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종 다윗의 손으로 내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과 모든 대적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리라 하셨음이니라 하고 19아브넬이 또 베냐민 사람의 귀에 말하고 아브넬이 이스라엘과 베냐민의 온 집이 선하게 여기는 모든 것을 다윗의 귀에 말하려고 헤브론으로 가니라(17-19)

유다 지파를 제외한 열한 지파들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왕으로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질적인 통치는 군대장관 아브넬이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울 왕의 첩과 동침한 사건에 대해 이스보셋과 다툰 후, 이스보셋에게서 등을 돌립니다. 그리고 교활한 방법으로 자신의 살길을 찾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활한 아브넬을 통해 다윗 왕국을 세우도록 인도하십니다.

(1) 이스라엘 장로들과의 만남(17)

본문에서 아브넬이 다윗에게 약속을 받은 조건이 무엇인지 언급되지는 않습니다. 결국 아브넬의 죽음으로 이루어질 필요가 없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브넬이 매우 적극적으로 이스라엘 장로들을 만나 사울의 집을 다윗의 손에 넘기기 위해 움직인 것을 보면 상당한 권력을 보장받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먼저 아브넬이 이스라엘 장로들을 만난 것은 사울의 딸 미갈을 데리러 가기 전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장로들과 베냐민 지파 백성들을 직접 찾아가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통일 왕국의 왕으로 세우도록 설득하고 동의를 얻습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너희가 여러 번 다윗을 너희의 임금으로 세우기를 구하였으니”(17)라고 말합니다. 그동안 너희들이 다스릴 왕으로 다윗을 계속 요구하였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전에는 그들의 요구가 있었지만, 아브넬이 거부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사울의 집 이스라엘 편에서도 다윗을 왕으로 섬기려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을 묵살해 왔던 것입니다.

아브넬은 사울의 집 이스보셋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윗과의 밀약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계산이 되었습니다. 이제야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자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는 다윗을 왕으로 세우는 것이 여호와의 뜻이며, 블레셋과 모든 대적으로부터 다윗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교묘한 말입니다. 처음부터 여호와의 뜻이 아닌 줄 알았다면,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우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알면서도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운 것은,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권력과 욕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부분을 감추고, 더 이상 이스보셋을 왕으로 섬기지 않으며, 다윗에게 더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을 왕으로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말함으로써, 자신의 반역을 정당화합니다. 사실상, 아브넬에게는 다윗이 왕이 되는 것이 여호와의 뜻인지 아닌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 탐욕을 유지하기 위해 여호와의 이름만을 이용할 뿐입니다.

(2) 여호와의 약속(18)

아브넬은 이제 때가 되었으므로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전에 요구했던 바를 실천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미 다윗에 관하여 ‘내가 내 종 다윗의 손으로 내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과 모든 대적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아브넬이 인용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에 대해 하셨던 말씀이 이와 비슷합니다(삼상 9:16). 아마도 아브넬이나 다른 사람들은, 다윗이 기름 부음 받았던 일을 기억하면서, 이스라엘을 다윗의 손으로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의 종’으로 불립니다. ‘종’이라는 칭호는 주인의 전폭적인 지지와 신뢰를 얻으면서 주인으로부터 중요한 사명을 받아 수행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모든 대적에 대해 말하기 전에 블레셋을 언급한 것은 당시 이스라엘의 가장 큰 대적이 블레셋이었음을 보여줍니다. 한글성경의 ‘벗어나게 하다’는 원문에 ‘구원하다’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블레셋과 다른 모든 대적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3) 베냐민 사람들과의 만남(19)

특별히 베냐민 사람들을 설득하는데 베냐민 지파는 사울의 출신 지파로서 현재 사울 왕권의 최대 지지기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욱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설득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설득이 끝나자 아브넬은 다윗을 만나러 헤브론으로 툴발합니다. 다윗이 요구한 미가를 보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과 베냐민 사람들의 승낙도 자신의 손에 뒤고 있었습니다.

아브넬은 교활하게 양다리를 걸칩니다. 베냐민 사람들을 이스라엘과 구분하여 언급함은 베냐민 지파가 이스보셋 왕국의 중심 세력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지파인 베냐민 족속도 다윗을 왕으로 모실 준비가 되었습니다. 아브넬의 이름이 두 번 언급되는데, 그 이름에는 각각 강조 어구 ‘감’(ם󰕂)이 선행하고 있습니다. 한글 성경은 ‘감’을 한 번만 ‘또’라고 번역합니다. 이는 아브넬에 대한 관심을 집중시키려는 저자의 의도를 반영합니다. 지금 모든 일을 추진하고 있는 사람은 아브넬입니다. 아브넬이 변화를 만들었고, 아브넬이 다윗에게 온 이스라엘을 이끌고 있습니다.

 

아브넬의 헤브론 방문(20-21)

성도들은 인생이 너무 순조롭게 진행될 때, 스스로 제동을 걸어 멈추고 제대로 가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순탄함이 항상 축복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늘이 없고 그림자가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 없는 오만의 내리막길은 가파를 뿐입니다. 아브넬은 헤브론 방문해서 다윗과 협상을 통해 좋은 결과를 받았지만, 피살로 뜻하지 않게 물거품이 됩니다.

20아브넬이 부하 이십 명과 더불어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가니 다윗이 아브넬과 그와 함께 한 사람을 위하여 잔치를 배설하였더라 21아브넬이 다윗에게 말하되 내가 일어나 가서 온 이스라엘 무리를 내 주 왕의 앞에 모아 더불어 언약을 맺게 하고 마음에 원하시는 대로 모든 것을 다스리시게 하리이다 하니 이에 다윗이 아브넬을 보내매 그가 평안히 가니라(20-21)

다윗의 성대한 환대에 아브넬이 충성을 맹세하고, 그의 충성에 대한 화답으로 다윗은 서둘러 안위를 보장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나눈 밀담은 하나님의 뜻을 위한 단합이 아니라 불순한 야합이었습니다.

(1) 아브넬을 위한 잔치(20)

베냐민 지파와 이스라엘 사람들을 설득하였습니다. 이 일이 끝나자 아브넬을 다윗을 만나려 헤브론으로 출발합니다. 아브넬을 다윗과 협상을 마무리하려고 신복 20명을 헤브론의 다윗에게 갑니다. 다윗은 잔치를 베풀어 주는데, 이 잔치는 다윗과 아브넬 간의 협상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조건이 오고 갔는지 언급되지 않지만, 아브넬은 다윗의 조건에 매우 만족한 것으로 보입니다.

19절에 이어 20절에서도 아브넬이라는 이름이 두 번 사용되면서, 아브넬에 대한 관심을 이끌고 있습니다. 다윗은 호의적으로 자신을 찾아온 그를 위해 잔치를 배설합니다. “잔치”는 ‘미쉬테’인데, 보통 술 마시는 잔치를 가리킵니다.

한글 성경은 아브넬과 함께 헤브론으로 왔던 사람들을 ‘부하’라고 칭합니다. 원문은 단순히 아나쉰(사람들)입니다. 이들이 각 지파의 대표거나 장로들이었다면 달리 표현되었을 것입니다. 아직 다윗의 태도를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각 지파가 자신들의 대표를 보내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구약에서 ‘아나쉽’은 흔히 군인들을 가리킵니다(삼상 14:12;17:52). 따라서 이 사람들은 ‘무기 든 사람’이라 불리는 친위부대로서 아브넬을 수행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참조, 18:15). 다윗이 잔치를 베푼 것은 아브넬과 그 사람들에 대한 깊은 호의를 나타냅니다.

(2) 아브넬의 제안(21)

21절에서도 아브넬의 이름은 계속 언급됩니다. 그리고 아브넬은 다윗에게 “내가 일어나 가서 온 이스라엘 무리를 내 주 왕의 앞에 모아 더불어 언약을 맺게 하고 마음에 원하시는 대로 모든 것을 다스리시게 하리이다”라고 제안합니다.

자신이 다윗을 위해 할 수 있는 역할을 세 가지 방식으로 강조하며 설명합니다. 첫째, 1인칭 동사를 세 번 반복하여 사용합니다. ‘내가 일어나서’, ‘내가 가서’, ‘내가 모으겠습니다.’ 1인칭 연장형은 말하는 사람(아브넬)의 의지와 소원을 표현하는 형태입니다. 아브넬은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옹립하려는 자신의 의지가 확고하며, 자신이 이 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려 함을 다윗에게 자랑하듯 말합니다. 둘째, 아브넬은 이미 다윗을 “내 주”(아도니)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셋째, 온 이스라엘 무리를 모으겠다고 말합니다. 이스보셋의 왕국에 참여한 지역과 지파들의 목록을 고려한다면, 아브넬이 이스라엘 전체를 모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아브넬은 온 이스라엘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언약을 맺게 하고”, 즉 이스라엘은 다윗과 언약을 맺을 것입니다. 이 언약은 다윗을 왕으로 모시는 충성의 서약일 것입니다. “마음에 원하시는 대로 모든 것을 다스리시게”는 왕의 권세와 의지를 존중하려 할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나단이 다윗에게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7:3)라고 말한 것도 이와 같습니다.

아브넬은 다윗을 향하여 “내 주 왕”이라고 부릅니다. 이 호칭에서 아브넬이 이미 다윗을 자신의 왕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온 백성이 왕과 더불어 언약을 맺는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모든 백성이 사울을 왕으로 삼은 사무엘상 11장 14-15절에 장면과 같은 행사를 치를 것을 의미합니다. 즉 공식적인 대관식을 통해 다윗은 그들의 왕이 되고 그들은 다윗의 백성이 되겠다는 언약을 맺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브넬은 자신이 다윗을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온 이스라엘 왕으로 선택하시고 왕으로 삼으셨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아브넬은 자신이 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업적을 높인 것입니다. 이 때문에 자신을 섬김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인도하신 부분은 거의 절대적입니다. 사람들은 단지 돕는 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모든 것을 주인으로 삼고 자기 공적을 자랑하며 자랑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일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합당하게 섬기지 아니하는 자입니다.

다윗은 아브넬과 협상을 성공적으로 맺은 후, ‘평안히’ 보내주었습니다. 아브넬은 평안히 돌아갑니다. 다윗은 아브넬을 해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음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요압의 분노(22-26)

원한을 품고 있으면 결코 사물이나 사람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런 원한이 있으면 하나님의 계획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뜻과는 어긋나며 하나님의 평화는 크게 위협을 받을 것입니다. 요압은 아브넬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별것 아닌 것 같았지만, 이 일은 아브넬에게 치명적 비극을 가져왔습니다.

22다윗의 신복들과 요압이 적군을 치고 크게 노략한 물건을 가지고 돌아오니 아브넬은 이미 보냄을 받아 평안히 갔고 다윗과 함께 헤브론에 있지 아니한 때라 23요압 및 요압과 함께 한 모든 군사가 돌아오매 어떤 사람이 요압에게 말하여 이르되 넬의 아들 아브넬이 왕에게 왔더니 왕이 보내매 그가 평안히 갔나이다 하니 24요압이 왕에게 나아가 이르되 어찌 하심이니이까 아브넬이 왕에게 나아왔거늘 어찌하여 그를 보내 잘 가게 하셨나이까 25왕도 아시려니와 넬의 아들 아브넬이 온 것은 왕을 속임이라 그가 왕이 출입하는 것을 알고 왕이 하시는 모든 것을 알려 함이니이다 하고 26이에 요압이 다윗에게서 나와 전령들을 보내 아브넬을 쫓아가게 하였더니 시라 우물 가에서 그를 데리고 돌아왔으나 다윗은 알지 못하였더라(22-26)

본문은 아브넬과 다윗의 협상에 대해 반대를 보여줍니다. 이 단락이 앞부분과 장면이 완전히 바뀝니다. 이 장면은 전쟁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오는 다윗의 신하들과 요압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요압은 헤브론에서 아브넬이 다윗에게 다녀갔다는 소식과, 다윗이 그를 평안히 돌려보냈다는 소식에 매우 마음이 상했습니다. 요압이 보았을 때, 아브넬은 자기 동생 아사헬을 죽인 원수였기 때문입니다.

(1) 아브넬의 방문을 알게 된 요압(22-23)

전쟁에서 돌아온 다윗의 신하들은 다윗과 아브넬이 협상한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아브넬과의 협상은 다윗의 신하들, 특히 요압도 모르게 진행된 것입니다. 다윗은 아브넬이 요압의 동생인 아사헬을 죽인 일로 아브넬에 대한 요압의 감정이 좋지 않을 것을 예상하고, 요압을 배제한 채 협상을 마무리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다윗은 아브넬의 방문을 의도적으로 요압에게 알리지 않았고, 요압이 없을 때 맞춰서 아브넬을 불렀습니다. 이는 다윗이 요답과 아브넬의 적대적 관계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며, 이 기회에 요압을 쫓아내려 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신하들은 전쟁에서 돌아온 후에야 아브넬이 다윗과 협상하려고 막 다녀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압과 다윗의 신하들은 헤브론에 도착한 후, 아브넬이 다윗을 만나려 왔다가 평안히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21절에 사용된 단어 ‘평안히’가 22절과 23절에 각각 다시 사용됩니다. 이는 아브넬의 평안한 귀환이 요압에게 큰 문제가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즉 요압의 입장에서 아브넬은 평안히 돌아갈 수 없는 존재인데, 왕이 그를 평안히 돌아가게 해줬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 다윗 왕을 질책하는 요압(24-25)

이 사실을 알게 된 요압은 화가 나서 다윗에게 나가서 왜 그렇게 했느냐고 이유를 물으면서, 다윗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잘(=확실히) 가게 하셨나이까?”라는 아브넬이 이미 떠나서 헤브론에 없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요압은 아브넬이 다윗에게 온 것은 왕을 속여서 정탐하기 위해 헤브론에 온 것이다고 주장합니다(25). 요압에 따르면, 아브넬은 다윗의 행동을 정탐한 뒤 다윗을 공격하려는 의도에서 헤브론을 방문했으리라는 것입니다. 요압은 아브넬이 다윗을 속인다고 주장합니다.

요압의 주장은 다윗과 아브넬의 밀약을 모르는 상황에서는 바른 주장일 수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다윗과 아브넬은 정적 관계이며, 계속해서 전쟁해오던 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브넬이 다윗을 찾아온 것에 대해 의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더불어 요압의 입장에서 아브넬이 동생 아사헬을 죽인 원수이기 때문에 의심과 적의가 더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3) 아브넬을 데려오는 요압(26)

다윗이 요압을 설득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지만, 요압이 다윗과 아브넬과의 협상 내용을 들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도 요압은 다윗과 아브넬의 협상을 인정하거나 그를 평안히 보낼 생각이 없었습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그는 아브넬처럼 왕을 쉽게 갈아치우는 사람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아브넬이 다윗의 신하가 된다면 자신의 입지가 좁아질 것이라고 계산했을 것입니다. 아브넬은 군대 장관으로서, 다윗 왕국의 군사력을 책임지고 있는 요압과는경쟁 관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전쟁터에서 동생 아사헬을 살해한 것은 정당하고 살인죄로 기소될 수 없지만, 개인적으로 아브넬이 아사헬을 살해한 것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었습니다.

요압은 다윗에게 자신의 말만 외치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결국 요압은 다윗 모르게 사자를 보내어 아브넬을 다시 헤브론으로 돌아오게 만듭니다. 요압은 아브넬을 죽여 원수도 갚고 후한도 없애려는 결심입니다. 여기에서 요압은 다윗의 군사이지만 다윗에게 반발하여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입니다. 그후에도 요압이 다윗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경우가 나타나며 여호와께 대한 신뢰나 은혜 같은 덕목과는 거리가 먼 매우 세속적이고 잔인하며 권력 지향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요압의 관점에서 아브넬과 같은 정치 9단의 말들 듣고 움직이는 다윗이 어수룩해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알고 있던 다윗의 입장에서는 아브넬의 행동은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브넬이 어떤 수술을 하든,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뜻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에 따라 다윗은 아브넬을 신뢰하는 위험한 행동을 택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 바로 그것이 다윗과 요압의 차이입니다.

요압의 신하들은 기분 좋게 돌아가는 아브넬을 시라 우물가에서 만나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다윗은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줄 전혀 몰랐습니다. 그가 아브넬을 위해 잔치를 베푼 사실이나, 아브넬을 죽이려는 요압의 작전을 몰랐다는 사실은, 아브넬의 죽음에 관해 다윗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시라’는 헤브론에서 북쪽으로 약 4km정도 떨어진 곳으로 추정됩니다.

 

나가는 말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헛된 욕심과 복수심과 같은 악한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대로 크게 생각하고 담대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특히 영적인 지도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인간적인 방법으로 행동하지 않도록 더욱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 위해 기도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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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03-01)

 

점점 강성해지는 다윗 왕국

사무엘하 3장 1-16절

 

약해 보이던 것들이 점점 강해지는 것을 보면, 처음에는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만 계속 성장하면 나중에는 커다란 차이를 낳습니다. 성도들은 처음 시작은 매우 미약하게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세상에 속한 사람들보다 능력 있는 모습으로 변해갑니다. 성도들은 마치 천국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태복음 13:32)

 

사무엘하 3-4장은 이스보셋 왕국의 멸망에 관한 기록입니다. 특히 3장은 아브넹의 배반과 죽음에 관 기록인데, 본문(3:1-16)은 그 전반부에 해당합니다. 다윗이 헤브론에서 다스리는 동안 그에게서 여섯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한편 아브넬과 이스보셋은 사울의 첩 리스바의 문제에서 촉발된 심각한 갈등을 겪습니다. 결국 아브넬은 이스보셋을 떠나기로 하였습니다. 그는 전령을 보내 다윗과 은밀하게 접촉하고 언약을 맺었습니다.

 

성장하는 다윗의 왕국(1-5)

하나님께서는 때를 따라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눈에 보이는 큰 은혜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은혜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윗의 집을 점점 부흥시켜 주시는 능력을 보면서, 다윗처럼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하나님께서 계속적으로 점점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1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 2다윗이 헤브론에서 아들들을 낳았으되 맏아들은 암논이라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의 소생이요 3둘째는 길르압이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의 소생이요 셋째는 압살롬이라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의 아들이요 4넷째는 아도니야라 학깃의 아들이요 다섯째는 스바댜라 아비달의 아들이요 5여섯째는 이드르암이라 다윗의 아내 에글라의 소생이니 이들은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자들이더라(1-5)

다윗의 집과 사울의 집인 이스보셋과 전쟁이 오래 계속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도 계속해서 다윗의 집에는 흥왕해 많은 자녀들이 태어난 것은, 다윗 왕조가 점점 성장해 가고, 다윗이 죽은 후까지도 계속 이어질 것을 바라보게 합니다.

(1) 다윗과 사울의 집 비교(1)

기브온 연못가에서의 충돌 이후, 다윗의 집과 사울의 집(이스보셋)은 양립할 수 없었습니다. 그 둘 사이에 항상 계속되는 전쟁 속에 있었습니다. 이스보셋의 통치 기간을 고려할 때, 최대 2년 정도의 내전을 겪었을 것입니다(2:10).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해져 가고 다윗의 집안을 따르는 세력들은 점점 강해졌습니다. 그리고 사울의 집안을 따르는 세력은 점점 약해졌습니다. 다윗의 통치하는 왕국 시대가 점점 힘을 얻어갈 것을 예견합니다.

(2) 다윗의 아들들(2-5)

다윗은 헤브론에서 7년 6개월을 통치하는 동안 2명의 아내 외에 4명의 아내를 더 얻습니다. 각각 다른 6명의 아내에게서 낳은 아들은 모두 다섯 명을 열거합니다. 하나님꼐서 그분의 뜻과 계획 가운데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우신 다윗의 집을 강하고 부유하게 하심으로 든든히 세워가고 계셨습니다.

첫째는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나의 형제는 기쁨을 준다’)의 소생 ‘암논’(‘신실하다’)입니다(삼상 25:43). 이 암논은 후에 압살롬에 의해 살해당합니다(13:28-29).

둘째는 아비가일의 소생 ‘길르압’인데, 역대기에서는 다니엘로 불립니다(대상 3:1). 다윗이 사울을 피해 다니던 중 결혼한 두 사람이 아히노암과 아비가엘입니다(삼상 25:42,43). 이 둘은 유다 산지 갈멜 출신입니다. 아비가엘의 소생 길르압에 관해서는 달리 알려진 바가 없고, 그는 어려서 죽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셋째는 ‘압살롬’(‘아버지는 평화이시다’)이며,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의 소생이었습니다. 그술은 아람에 속한 왕국으로, 갈릴리 호수의 북동쪽, 헬몬과 바산 사이 지역에 해당합니다. 압살롬은 후에 첫째 아들 암논을 죽이며, 반란을 일으켜 잠시 예루살렘을 차지하기도 합니다.

넷째는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입니다. 학깃(‘축제’)에 관해서는 다른 정보가 전해지지 않습니다. ‘아도니야’(‘여호와는 주님이시다’)는 솔로몬의 즉위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이끌었으나, 결국 솔로몬에 의해 숙청당했습니다(왕상 2:25).

다섯째와 여섯째는 아비달(‘아버지는 보호이시다’)의 소생 ‘스바댜’(‘여호와께서 심판하셨다’)와 ‘에글라’(‘젊은 암소’)의 소생 이드르암(‘남은 백성’)입니다. 이들에 관해서는 다른 정보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에글라는 다윗의 아내라고 소개됩니다.

여섯 아내가 각기 한 아들을, 도합 여섯 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 명단 외에 다른 아들들도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렇게 나열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다윗에게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손의 번성과 더불어 다윗 왕국이 견고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망해가는 사울의 집(6-11)

하나님과 함께한 사람들은 점점 강해지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은 점점 약해집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사람의 편에 서는 사람입니까? 어느 편에 서느냐에 따라 당신의 미래가 결정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자를 통하여 당신의 역사를 이끌어 갑니다. 영적으로 교만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날마다 자신의 신앙을 경계하여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6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있는 동안에 아브넬이 사울의 집에서 점점 권세를 잡으니라 7사울에게 첩이 있었으니 이름은 리스바요 아야의 딸이더라 이스보셋이 아브넬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내 아버지의 첩과 통간하였느냐 하니 8아브넬이 이스보셋의 말을 매우 분하게 여겨 이르되 내가 유다의 개 머리냐 내가 오늘 당신의 아버지 사울의 집과 그의 형제와 그의 친구에게 은혜를 베풀어 당신을 다윗의 손에 내주지 아니하였거늘 당신이 오늘 이 여인에게 관한 허물을 내게 돌리는도다 9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신 대로 내가 이루게 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아브넬에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 10그 맹세는 곧 이 나라를 사울의 집에서 다윗에게 옮겨서 그의 왕위를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이스라엘과 유다에 세우리라 하신 것이니라 하매 11이스보셋이 아브넬을 두려워하여 감히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니라(6-11)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중심에 자리에 있을 때, 진정한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번성하는 다윗의 집과는 달리 사울의 집에서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습니다. 사울의 집은 군대장관 아브넬이 사울의 후궁과 잠자리를 한 문제가 일어납니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사울 집안의 실세인 아브넬과 왕인 이스보셋 간에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1) 아브넬의 권세(6)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있었음이 다시 언급됩니다. 전쟁은 군사령관 ‘아브넬’의 권세를 날이 갈수록 더욱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사울 집에서 꼭두각시 이스보셋 왕보다 군대장관 아브넬이 점점 권세를 잡아갔습니다. 이스보셋은 꼭두각시 왕으로서 왕직만 갖고 있을 뿐, 실제적인 통치권은 아브넬이 행하고 있었습니다.

(2) 이스보셋의 책망(7)

사울의 아내는 아히마아스의 딸 ‘아히노암’입니다. 아히노암이 사울의 네 아들과 두 딸을 낳았습니다. 한편 본문은 사울의 유일한 첩 ‘리스바’를 소개합니다. 리스바는 알모니와 므비보셋을 낳았습니다(21:8). 다윗이 흉년에 대한 책임을 물어서 사울의 자손을 죽일 때, 이 리스바의 두 아들도 죽임을 당했습니다(21:8-9).

점점 강한 힘을 갖게 된 아브넬은 사울의 첩 리스바와 동참하였습니다. 이는 전 왕의 부인을 자신이 취함으로써 왕권에 대한 욕심을 표현하는 행동일 수 있으나, 확실하진 않습니다. 그가 왕이 되기를 원했다면 더욱 직접적인 방법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스보셋이 아브넬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보셋의 책망은 아브넬이 더 극단적인 행동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브넬은 이스보셋의 말을 듣고, 왕국을 다윗에게 넘겨주겠다고 결심하고 협박하였습니다.

(3) 아브넬의 분노(8-10)

아브넬은 이스보셋의 책망에 “내가 유다의 개 머리냐?”(8)라고 분노합니다. 이스보셋의 적국인 유다와 비천한 동물인 개를 결합하여 멸시의 대상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특히 개는 성적으로 난잡함을 상징하는 동물이기도 합니다. 머리는 동물의 신체 중 먹지도 못할 가장 가치 없는 부분입니다.

아브넬은 “내가 오늘 당신의 아버지 사울의 집과 그의 형제와 그의 친구에게 은혜를 베풀어 당신을 다윗의 손에 내주지 아니하였거늘 당신이 오늘 이 여인에게 관한 허물을 내게 돌리는도다”(8b)라며, 자신이 이스보셋에게 그동안 베푼 도움과 선행을 나열하면서 이스보셋이 은혜도 모르고 행동한다고 분노하였습니다. 아브넬은 사울의 가족과 신하들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며, 이스보셋을 다윗의 손에 넘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넬은 이스보셋이 리스바와 관련된 허물을 자기에게 돌리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자신이 베푼 은혜에 비하여 그 허물은 매우 작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신 것은 다윗을 왕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9). 왕국을 사울의 집에서 빼앗아 다윗에게 주고, 다윗이 보좌에 앉아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리게 하는 것입니다(3:10). “하나님이 아브넬에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3:9b). 이는 자기를 저주함으로써 자신의 말을 보증하는 일종의 맹세 구문입니다(룻 1:17). 단(재판)은 헬몬산의 기슭, 이스라엘 북쪽 경계선에 위치하는 성읍입니다. 브엘세바(‘일곱 개의 우물’ 혹은 ‘맹세의 우물’)는 헤브론 남서쪽 약 37km에 위치한 성읍입니다.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는 표현은 이스라엘 전체 영토를 가리키는 일반적 표현입니다.

(4) 이스보셋의 반응(11)

이스보셋은 아브넬을 두려워하여 그에게 한마디도 대꾸하지도 못했습니다. 이스보셋은 아브넬을 비난받은 후, 분노하는 아브넬을 보면서 그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다윗에게 아브넬의 협상 제안(12-16)

지도자에게는 가장 필요한 것이 많은 사람을 인도하는 지도력입니다. 자신을 지지하고 따르는 사람들을 한마음으로 모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지도자들에게는 지도자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세상의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살아가는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런 지도자는 절대로 실패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다윗은 지도자로 그러한 능력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당신을 바른길로 인도하는 교회의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12아브넬이 자기를 대신하여 전령들을 다윗에게 보내어 이르되 이 땅이 누구의 것이니이까 또 이르되 당신은 나와 더불어 언약을 맺사이다 내 손이 당신을 도와 온 이스라엘이 당신에게 돌아가게 하리이다 하니 13다윗이 이르되 좋다 내가 너와 언약을 맺거니와 내가 네게 한 가지 일을 요구하노니 나를 보러올 때에 우선 사울의 딸 미갈을 데리고 오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고 14다윗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에게 전령들을 보내 이르되 내 처 미갈을 내게로 돌리라 그는 내가 전에 블레셋 사람의 포피 백 개로 나와 정혼한 자니라 하니 15이스보셋이 사람을 보내 그의 남편 라이스의 아들 발디엘에게서 그를 빼앗아 오매 16그의 남편이 그와 함께 오되 울며 바후림까지 따라왔더니 아브넬이 그에게 돌아가라 하매 돌아가니라(12-16)

사울의 왕국에서 맘껏 권좌를 흔들던 아브넬과 그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이스보셋 사이에 권력 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화가 아브넬은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이스보셋을 배반합니다. 이제는 더는 버틸 수 없다고 생각하고 사울의 왕국을 다윗에게 넘겨주기 위한 계획을 비밀리 진행합니다. 이것은 그가 사울의 집안에 충성스러운 일군이 아니었음을 다시 한번 증명합니다.

(1) 아브넬의 협상 제안(12)

아브넬은 자신이 이스보셋 앞에서 맹세한 것을 바로 시행합니다. 다윗과 협상하려고 전령들을 보냅니다. 자신이 이스라엘 땅을 다윗에게로 돌아가게 할 테니 자신과 언약을 체결하자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는 ‘이 땅이 누구의 것이냐?’라는 수사학적 질문을 통해 이스라엘의 진정한 주인이 다윗이라고 돌려 말합니다.

이 언약에 따라 아브넬이 할 일은 왕국을 다윗에게로 돌리는 것이지만, 아브넬을 위해 다음 해야 할 일은 밝혀지지 않습니다. 아마도 아브넬을 이스라엘을 다윗에게 넘기는 대가로 자신의 안전과 권력을 보장하도록 요구했을 것, 즉, 왕국에서 이인자로 높이는 것이 다윗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보상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언약은 요압이 아브넬을 죽여야 했던 이유 중 하나일 것입니다.

(2) 다윗의 조건(13)

아브넬의 제안을 받은 다윗은 그 제안이 진심인지를 보여주려면 먼저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먼저 사울의 딸 미갈을 자기에게 데리고 오면, 그와 더불어 언약을 맺겠다고 말했습니다. 만일 아브넬이 미갈을 데리고 오지 않으면, 자신을 만날 수 없을 것이라고 강경한 어조로 말합니다. 여기서 다윗은 미갈을 ‘자신의 아내’가 아닌 ‘사울의 딸’이라고 표현합니다.

다윗은 사울의 집에 왕권을 주장하려면 사울의 사위라는 명목상의 지위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즉 개인적인 애정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미갈을 통해 사울의 왕국을 이어받을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습니다.

(3) 미갈과 발디엘(14-16)

다윗과 미갈은 이혼하지 않았으며, 다윗이 도망간 사이에 미갈은 아버지에 의해 강제로 결혼한 상태였기에 법적인 상태가 불분명합니다. 사울 왕은 다윗의 아내였던 미갈을 갈림 사람 라이스의 아들 ‘발디’, 즉 ‘발디엘’(‘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다’)에게 주었습니다(삼상 25:44), 갈림은 베냐민 지파의 성들에 속합니다. 다윗은 아브넬의 사신을 떠나보낸 후, 이스보셋에게 직접 사신을 보내 미갈을 돌려보내라고 요구했습니다. 다윗은 블레셋 사람의 포피 일백을 주고 미갈과 결혼했다는 점에서 미갈을 요구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14). 다윗은 실제로 포피 이백을 주었지만, 사울이 요구했던 것은 포피 일백이었습니다.

다윗의 요구를 거부하지 못한 이스보셋은 아브넬을 보내 발디엘에게서 미갈을 데려오게 했습니다(15). 이스보셋이 다윗의 요구를 들어주도록 아브넬이 영향력을 행사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미갈의 남편 발디엘이 미갈과 함께 걸어오는데, 울면서 바후림까지 따라왔습니다(16). 바후림은 감람산의 동북쪽 경사지에 있는 작은 마을로 추정됩니다. 다윗을 저주했던 게라의 아들 시므이의 고향이기도 합니다(왕상 2:8). 이 이별이 얼마나 비극적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무도 미갈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있고 미갈의 심정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남자들의 권력 다툼에 미갈이 희생양이 되었음을 암시합니다. 이스보셋은 밀약이 있는지도 므로는 상태에서, 다잇과 아브넬의 요구대로 미갈을 다윗에게 보내줍니다.

 

나가는 말

하나님의 선한 뜻을 더 잘 분별하고 따르면, 점점 더 강해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다윗은 미갈을 요구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나라는 강해져도 다윗의 영적 감감은 무너져고 있습니다. 우리는 결국에 깨어지고 무너질 세상의 나라를 위해서 헛된 힘을 낭비하지 않고, 영적인 지혜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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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02-02)

 

 

칼의 밭에서 일어난 비극

사무엘하 2장 12-32절

 

낮에 해가 둘일 수 없습니다. 이 말은 한 나라에 두 왕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두 왕을 모시고 있다면, 두 세력은 충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우리 성도들은 믿지 않는 사람과 영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충돌에서 이기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본문은 이스라엘의 내전, 즉 이스보셋의 군대와 다윗의 군대가 싸우는 전쟁을 기록합니다. 아브넬이 이스보셋의 군대를 이끌고 나왔고, 요압이 다윗의 군대를 이끌고 나왔습니다. 먼저 각 군대의 대표 열두 명을 뽑아서 싸우게 하였는데, 모두 죽고 살아남은 자가 없었습니다. 이후 양측 군대 전체가 싸우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아브넬은 뜻하지 않게 요압의 아우 아사헬을 죽이게 됩니다. 해가 졌을 때, 싸움을 그치고 아브넬의 군대는 마하나임으로, 요압의 군대는 헤브론으로 돌아갔습니다.

 

기브온 연못가의 전투(12-16)

 

한 지도자의 개인적인 야망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자신의 야망을 위해 왕으로서 신하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보다 개인의 야망을 위해 살아가면 비참한 희생이 따른 것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일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 기브온 전투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어떤 명분이나 영적인 고민은 없었습니다.

12넬의 아들 아브넬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신복들은 마하나임에서 나와 기브온에 이르고 13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다윗의 신복들도 나와 기브온 못 가에서 그들을 만나 함께 앉으니 이는 못 이쪽이요 그는 못 저쪽이라 14아브넬이 요압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청년들에게 일어나서 우리 앞에서 겨루게 하자 요압이 이르되 일어나게 하자 하매 15그들이 일어나 그 수대로 나아가니 베냐민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편에 열두 명이요 다윗의 신복 중에 열두 명이라 16각기 상대방의 머리를 잡고 칼로 상대방의 옆구리를 찌르매 일제히 쓰러진지라 그러므로 그 곳을 헬갓 핫수림이라 일컬었으며 기브온에 있더라(12-16)

우리들의 삶 속에서도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재미라도 악한 일을 멀리해야 합니다. 장난스럽게 시작한 작은 싸움이 큰 싸움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11지파의 실질적인 통치자 이스보셋의 군대장관 아브넬과 다윗의 부하로서 2인자인 군대장관 요압은 각각 군대를 이끌고 기브온에서 만납니다. 서로 기브온 연못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게 됩니다. 그들은 이상한 게임을 시작합니다. 이 게임은 제안은 아브넬이 합니다.

(1) 기브온으로 온 양측 군대(12-13)

아브넬은 이스보셋의 군대를 이끌고 마하나임에서 기브온으로 왔습니다. 기브온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10km 떨어진 장소이며, 그곳의 산당에 모세의 성막과 번제단이 있었습니다(대하 1:3-6).

요압도 다윗의 군대를 이끌고 헤브론에서 기브온으로 왔으므로, 두 군대가 기브온 연못가에서 만났습니다. 당시 기브온은 다윗의 세력과 이스보셋의 세력이 만나는 접경 지대였을 것입니다. 요압의 어머니 스루야는 아비가일과 함께 나하스의 딸로 언급됩니다(17:25: 대상 2:16). 아마도나하스가 죽고 난 뒤, 그들의 어머니가 다윗의 아버지 이새와 결혼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2) 선발된 군사들의 대결(14-15)

아브넬과 요압은 본격적인 전쟁을 앞두고 각각 자기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려는 목적으로 병사 중 열두 명을 선발하여 경기하게 하자고 합의했습니다.

(3) 대결의 결과(16)

장난삼아 계획된 경기가 지나치게 과열되었습니다. 싸웠던 모든 병사가 각기 상대방의 머리를 잡고 그 옆구리를 칼로 찔러 함께 죽었으므로, 살아남은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곳의 이름을 ‘헬갓 핫수림’, 즉 ‘칼의 밭’이라 불렀습니다.

 

아비새의 죽음을 당함(17-23)

자신의 힘만 믿고 상대의 힘을 무시하다가 비참한 종말을 맞은 어리석음을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항상 믿음의 사람들은 자기 능력을 너무 과신하지 말고 다시 한 번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형들이 권했고, 두 번이나 자신을 돌아보고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한 것이 아쉽습니다.

17그 날에 싸움이 심히 맹렬하더니 아브넬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의 신복들 앞에서 패하니라 18그 곳에 스루야의 세 아들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이 있었는데 아사헬의 발은 들노루 같이 빠르더라 19아사헬이 아브넬을 쫓아 달려가되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아브넬의 뒤를 쫓으니 20아브넬이 뒤를 돌아보며 이르되 아사헬아 너냐 대답하되 나로라 21아브넬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왼쪽으로나 오른쪽으로나 가서 청년 하나를 붙잡아 그의 군복을 빼앗으라 하되 아사헬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그의 뒤를 쫓으매 22아브넬이 다시 아사헬에게 이르되 너는 나 쫓기를 그치라 내가 너를 쳐서 땅에 엎드러지게 할 까닭이 무엇이냐 그렇게 하면 내가 어떻게 네 형 요압을 대면하겠느냐 하되 23그가 물러가기를 거절하매 아브넬이 창 뒤 끝으로 그의 배를 찌르니 창이 그의 등을 꿰뚫고 나간지라 곧 그 곳에 엎드러져 죽으매 아사헬이 엎드러져 죽은 곳에 이르는 자마다 머물러 섰더라(17-23)

결국 이 전투는 더 치열해져 전면전으로 펼쳐진 가운데, 이 전투에서 아브넬의 군대가 패배하고, 다윗의 부하들은 승리하게 됩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의 군대장관 아브넬은 기브온에서 퇴각하게 됩니다.

(1) 전쟁의 요약(17)

본문 “그 날에 싸움이 심히 맹렬하더니 아브넬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의 신복들 앞에서 패하니라.”(17)은 그날의 전쟁을 요약하여 설명합니다. ‘맹렬하다’로 번역된 ‘카쉐’는 ‘혹독하다’, ‘힘들다’를 의미하는 단어로, 여기서 전쟁의 양상이 극렬하였음을 표현합니다. ‘패하다’로 번역된 ‘나가프’는 ‘떼리다’, ‘치다’를 의미하는 단어인데, 이 동사의 니팔형은 흔히 전쟁에서의 패배를 가리킵니다(10:15,19; 대하 6:24).

(2) 요압의 형제들(18)

18-23절은 그날 치열하게 벌어진 전쟁 중 발생했던 중요한 사건, 즉 아사헬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18절에서 사건의 중심인물인 아사헬이 소개됩니다. 그는 스루야의 아들이며 요압의 동생이었는데, 노루처럼 빠르게 달릴 수 있었습니다. 히브리어 ‘처비’는 ‘영광’ 혹은 ‘노루’라는 의미를 지니는데, 다윗의 노래에서 사울을 상징하는 ‘영광’의 의미로 번역되었고(1:19) 본문에서는 아사헬의 날쌘 발을 상징하는 ‘노루’로 번역되었습니다. 전쟁 중에 죽은 두 사람, 사울과 아사헬이 ‘처비’라는 단어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3) 아사헬의 죽음(19-23)

이스보셋의 군대가 다윗의 군대에 패하여 도주하는 때에 아사헬은 적군의 대장 아브넬을 추격하였습니다. 한글 성경에서 ‘달려가되’라고 번역된 ‘라다프’는 ‘추격하다’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라는 표현은 아브넬을 반드시 죽이겠다는 아사헬의 집념을 표현합니다. 아브넬은 다윗 군대의 사령관인 요압과 그의 형제들에 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브넬이 자신을 끈질기게 뒤쫓는 자가 아사헬임을 알았을 때, 그는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아사헬에게 ‘좌우로 치우치라’고 충고했습니다. 아브넬은 이러한 표현을 통해 아사헬의 끈질긴 추격이 실제로는 어리석은 행동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브넬은 아사헬에게 병사 중 하나를 잡아 그 군복을 빼앗고 그것을 전공으로 삼는 게 나을 것이라 말해주었습니다. 군복으로 번역된 ‘할리차’는 성경에 단 두 번 사용된 단어이며, 군인들의 복장을 의미한다고 여겨집니다(삿 14:19; 삼하2:21). 명예욕에 붙잡힌 아사헬이 아브넬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아브넬은 자신이 그를 죽일 수도 있다고 경고했습니다(2:22). 아브넬은 아사헬의 형 요압을 생각하여 될 수 있으면 아사헬을 해치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아사헬이 아브넬의 충고를 거절하고 계속 뒤쫓았고, 아브넬이 창으로 그를 찌르니 창끝이 배를 꿰뚫었습니다. 아사헬이 엎어져 죽었는데, 아사헬이 죽어 있는 것을 본 사람들이 그 자리에 멈춰 섰습니다.

 

기브온 전투의 결과(24-32)

하나님께서는 점점 하나님의 세우신 다윗의 나라를 이루어 가심을 보여준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이스보셋의 나라를 인간이 인위적인 방법으로 세운 나라입니다. 그래서 처음 시작은 굉장하게 시작하지만 점점 시들해집니다. 하지만, 다윗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을 따랐기 때문에, 다윗을 따르는 유다 한 지파가 나머지 열한지파를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점점 다윗의 나라를 부흥시켜 주신 것입니다.

24요압과 아비새가 아브넬의 뒤를 쫓아 기브온 거친 땅의 길 가 기아 맞은쪽 암마 산에 이를 때에 해가 졌고 25베냐민 족속은 함께 모여 아브넬을 따라 한 무리를 이루고 작은 산 꼭대기에 섰더라 26아브넬이 요압에게 외쳐 이르되 칼이 영원히 사람을 상하겠느냐 마침내 참혹한 일이 생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언제 무리에게 그의 형제 쫓기를 그치라 명령하겠느냐 27요압이 이르되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무리가 아침에 각각 다 돌아갔을 것이요 그의 형제를 쫓지 아니하였으리라 하고 28요압이 나팔을 불매 온 무리가 머물러 서고 다시는 이스라엘을 쫓아가지 아니하고 다시는 싸우지도 아니하니라 29아브넬과 그의 부하들이 밤새도록 걸어서 아라바를 지나 요단을 건너 비드론 온 땅을 지나 마하나임에 이르니라 30요압이 아브넬 쫓기를 그치고 돌아와 무리를 다 모으니 다윗의 신복 중에 열아홉 명과 아사헬이 없어졌으나 31다윗의 신복들이 베냐민과 아브넬에게 속한 자들을 쳐서 삼백육십 명을 죽였더라 32무리가 아사헬을 들어올려 베들레헴에 있는 그의 조상 묘에 장사하고 요압과 그의 부하들이 밤새도록 걸어서 헤브론에 이른 때에 날이 밝았더라(24-32)

표면적으로는 다윗의 군대가 이겼지만, 아무도 상대방을 압도할 정도의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각 진영으로 돌아갑니다. 360명을 잃은 아브넬의 북쪽 이스라엘과 19명의 정예 군사와 아사헬을 잃은 남쪽 다윗의 군대 모두 손실을 입었습니다.

(1) 전투 중단을 제안하는 아브넬(24-26)

요압과 아비새가 아브넬의 군대를 추격하다가 기브온 광야 길에 있는 ‘기아’ 맞은 편 ‘암마’ 산에 이를 때 해가 졌습니다. ‘기아’와 ‘암마’는 여기서만 나타나는 지명입니다. 해가 졌으므로 전투를 계속하기 힘들었습니다.

추격을 당하여 흩어졌던 베냐민 사람들이 아브넬에게 모여들어 한 무리를 이루었고, 한 언덕의 정상에 섰습니다. 여기서 베냐민 사람이라는 칭호는 아브넬의 병사들이 주로 베냐민 지파 사람으로 구성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아브넬이 요압을 불러 전쟁을 중단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칼이 영원히 사람을 상하겠느냐’(2:26). 여기서 ‘상하다’는 ‘아칼’이며 문자적으로는 ‘먹다’, ‘삼키다’를 뜻합니다. 칼이 삼킨다는 것은 전쟁에서 칼로 사람을 살육함을 가리킵니다. 아브넬은 칼이 사람들을 죽이도록 내버려 둔다면 아사헬이 죽은 것처럼 또 다른 참혹한 일이 생길 수 있으리라고 요압에게 경고했습니다. 이는 비참히 죽은 동생에 대한 복수심에 사로잡혀서 분별력을 상실하지 말라는 아브넬의 충고였습니다. 또 아브넬은 지금은 서로 적군이 되어 싸우지만 실제로는 한 형제이므로 지나치게 싸우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2) 요압의 답변(27-28)

아브넬의 제안에 답하기 전에 요압은 먼저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였습니다. 히브리어 ‘하이’(사시거니와)는 맹세를 나타내는 관용어구입니다. 그리고 요압은 아브넬이 애초에 선발된 병사들의 싸움을 제안하지 않았더라면 서로 싸우지 않고 아침에 이미 돌아갔을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요압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면서, 형제들 사이의 비참한 전쟁에 대한 책임이 아브넬에게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요압이 나팔을 불자, 병사들이 싸움을 멈추고 제자리에 서서 다시 싸우려하지 않았습니다.

(3) 아브넬 군대의 퇴각(29)

아브넬과 그의 군사들은 아라바를 지나 요단을 건넜고, 계속하여 비드론 온 땅을 지나서 마하나임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라바는 사해 위쪽 요단강 서편 계곡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비드론은 요단강 동편의 계곡에 있는 어느 장소일 것입니다. 아브넬과 그 병사들이 전쟁터를 떠나 마하나임에 이르기까지 밤새도록 행진해야 했습니다.

(4) 요압 군대의 퇴각(30-32)

요압이 전쟁을 중단하고 병사들을 모으니, 아사헬과 병사 19명이 비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죽인 베냐민 사람과 아브넬의 부하들은 360명이었습니다. 아사헬은 베들레헴의 가족 묘지에 장사되었고, 요압과 병사들은 밤새 행진하여 해가 뜰 무렵에 헤브론에 도착했습니다.

 

나가는 말

영적 전쟁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죄를 멀리하고, 싸울 때와 멈출 때를 잘 알아야 합니다. 개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맹목적인 싸움을 싸우느라고 힘 빼지 않고,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영적인 싸움에 일을 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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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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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인도하심을 따른 다윗

사무엘하 2장 1-11절

 
인생은 하나님의 시간표가 어떻게 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방법대로 일하지 않습니다. 어떤 자리가 비였다고 곧바로 채우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데 하나님께서 인정하셨다고 사람들도 인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움직일 수 있어야 합니다.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의 장례식이 끝난 뒤에 처음으로 시작한 행보는 하나님께 길을 묻는 것이었습니다. 왕권을 향해 나아가는 첫걸음부터 하나님의 안내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 안에 세워진 다윗 왕권과는 반대되는 인간의 욕망으로 세워진 이스보셋의 정권도 있었습니다.
 

헤브론으로 옮긴 다윗(1-4a)

이스라엘의 진정한 통치자는 하나님이시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시행하는 종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아 순종해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따르는 자는 그의 삶이 형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 종을 대우하는 것처럼 막대하지는 않습니다. 다윗은 왕으로 가는 첫 발걸음부터 먼저 왕의 왕이신 하나님께 묻고 떠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1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아뢰되 내가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다윗이 아뢰되 어디로 가리이까 이르시되 헤브론으로 갈지니라 2다윗이 그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을 데리고 그리로 올라갈 때에 3또 자기와 함께 한 추종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다윗이 다 데리고 올라가서 헤브론 각 성읍에 살게 하니라 4유다 사람들이 와서 거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으로 삼았더라(1-4a)

이스라엘의 첫 왕인 사울이 죽었습니다. 사무엘에 의해 기름 부음을 받은 다윗이 왕위에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군사를 모집하여 곧바로 이스라엘의 왕위를 취하기 위한 시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다윗은 한발 물러나서 하나님께 먼저 묻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과정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움직였습니다.

(1) 다윗의 기도(1)
당시 다윗은 블레셋 지역 시글락에 있었지만, 사울 왕이 죽음으로 더 이상 이 시글락에 머무를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유다의 한 성으로 올라가기를 원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다윗을 기름 부으신 뜻이 성취되어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수하가 되기 위해 베냐민, 갓, 유다, 므낫세 지파로부터 많은 용사가 시글락으로 왔다는 점도 다윗이 왕권을 향하여 움직이도록 만들었을 것입니다(대상 12:1-22).
하지만 다윗은 왕이 되는 과정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른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하나님께 여쭈어보고 있습니다. 사울이 실패하였던 이유가 그가 하나님께 묻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결정했던 것과는 대비됩니다(삼상 13:10; 14:19,37; 28:6).
다윗은 하나님께 “내가 … 올라가리이까?”, “어디로 가리이까?”라고 어디로 가야 할지 묻습니다. 이러한 다윗에게 하나님께서는 “헤브론으로 갈찌니라”(1)라고 응답해주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순종하면서 온 가족을 데리고 헤브론으로 올라갔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삶의 기반을 옮긴 것입니다. 헤브론은 유다 지파의 중심 도시며, 족장들의 무덤이 있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도시입니다. 헤브론은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30km 떨어져 있으며, 해발 900m가 넘는 높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분의 지시에 순종하는 다윗의 모습은 사울 왕이 그의 통치 기간에 보여준 모습과 대비됩니다(삼상 13:10; 14:19,37; 28:6).

(2) 헤브론으로 이주(2-3)
다윗은 가족들을 데리고 헤브론으로 이주했습니다. 당시 다윗의 두 아내는 이스르엘 사람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입니다. ‘이스르엘’은 갈릴리 호수 아래의 이스르엘 평원이 아니라 유다 산지의 구릉지대에 속한 땅으로 여겨집니다(수 15:56). ‘갈멜’ 역시 헤브론 남동쪽의 유다 구릉지대에 속한 지역입니다(수 15:55).
사무엘상 25장은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과 다윗의 결혼에 관해 자세히 설명하고 아히노암과의 결혼에 대해서도 짧게 언급합니다(삼상 25:42-43). 다윗이 이주할 때,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으므로, 그들은 헤브론과 그 주변 여러 성읍에 흩어져 거주했습니다.

(3) 유다 지파의 왕으로 즉위(4a)
다윗이 헤브론으로 옮겨온 사실이 유다 사람들에게 알려졌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다윗을 유다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동안 다윗은 유다 지파의 나발에게 무시당하면서 자신이 왕이 되려면 더 적극적으로 유다 지파에게 호감을 사야 한다는 점을 심각하게 인식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글락에 거주하는 동안 헤브론을 포함하여 여러 성읍에 선물을 보냈습니다(삼상 30:26-31). 다윗의 헤브론 이주는 이러한 자신의 노력이 상당한 결실을 보았다는 확신에 근거하였을 것입니다. 한편 사울의 왕국이 아브넬과 이스보셋의 통치 아래 여전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블레셋은 다윗의 즉위를 묵인하거나 허용했을 것입니다.
다윗은 이미 소년 시절 하나님께 선택되어 선지자 사무엘에게 이스라엘 왕으로써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삼상 16:13). 이제 헤브론에서 백성들에 의해 유다 사람의 왕으로 추대를 받았습니다. 기름 부어서 왕으로 세우는 의식은 기름을 붓는 주체인 백성이 기름 부음을 받는 사람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의미입니다. 아직 불안전한 왕이긴 하지만 유다 한 지파의 왕이 된 것입니다.
 

유다 사람들의 왕인 다윗(4b-7)

왕으로 선택받은 다윗이 실제 왕이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은 결과적으로 좋은 왕이 되기 위한 훈련과 준비의 과정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당신에게 주신 꿈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이루어 가는데도 다윗처럼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서두르지 않습니다. 당신이 좋은 믿음의 사람으로 선한 일꾼이 되기까지 인도하실 것입니다.

4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을 장사한 사람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니이다 하매 5다윗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전령들을 보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주 사울에게 이처럼 은혜를 베풀어 그를 장사하였으니 여호와께 복을 받을지어다 6너희가 이 일을 하였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은혜와 진리로 너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고 나도 이 선한 일을 너희에게 갚으리니 7이제 너희는 손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할지어다 너희 주 사울이 죽었고 또 유다 족속이 내게 기름을 부어 그들의 왕으로 삼았음이니라 하니라(4b-7)

다윗은 하나님의 뜻으로 유다 지파의 왕이 되었는데도, 유다 지파를 제외한 나머지 열한 지파에게는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이제 남은 열한 지파를 품는 일의 첫걸음을 내딛습니다. 그가 맨 처음 손을 내민 곳은 사울의 시신을 수습해준 길르앗 야베스였습니다. 그들은 사울의 은혜를 목숨 걸고 깊은 충신들이었습니다.

(1) 야베스 사람들의 선행(4b)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받은 사람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가운데 하나인 유다의 왕 노릇을 한다는 것은 매우 미미한 시작일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런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 전체를 다스리는 진정한 왕으로 더 잘 훈련되고 준비될 수 있었습니다.
왕위가 계승될 때 왕의 죽음을 기록한 후, 새로운 왕의 등극을 기록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왕상 2:10-12; 11:43). 다윗은 사울의 계승자로서 왕위에 오르지 않았으므로, 이와 같은 보통의 상황에 해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다윗의 즉위를 기록하는 본문에 사울의 죽음과 관련된 언급이 나타납니다. 즉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사울을 장사지냈다는 기록입니다. 야베스 사람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사울과 요나단의 시체를 장사하였던 것은 사울이 그들에게 베푼 은혜에 대한 보답이었습니다.
이렇게 유다 지파의 왕이 된 다윗은 사울을 장례를 치러주었던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격려했습니다. 이처럼 다윗의 전 생애를 통해 보면, 다른 사람을 탓하거나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고 세워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2) 다윗의 축복(5-6)
다윗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전령을 보냅니다. 그리고 “너희가 너희 주 사울에게 이처럼 은혜를 베풀어 그를 장사하였으니 여호와께 복을 받을지어다”(5)라고 축복을 전합니다. 비록 전쟁에서 패하여 죽은 사람이지만, 야베스 사람들은 사울에게 은혜(헤세드)를 베풀어 그를 장사하였던 일을 언급하면서, 야베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복 받기를 기원합니다.
히브리어 ‘헤세드’는 언약에 근거한 사랑, 즉 조건 없는 사랑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이제 야베스 사람들의 헤세드에 대한 보답으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은혜(헤세드)와 진리(에메트)를 베푸실 것입니다. ‘헤세드’와 ‘에메트’는 흔히 쌍으로 등장합니다(창 24:49; 47:29: 출 34:6; 수 2:14; 삼하 2:6; 15:20 등).
다윗 자신도 “너희가 이 일을 하였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은혜와 진리로 너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고 나도 이 선한 일을 너희에게 갚으리니”(6)라고, 자신도 야베스 사람들에게 행하겠다고 은혜를 행하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여기서 “이 선한 일”은 야베스 사람들이 베푼 ‘헤세드’를 가리킵니다.

(3) 다윗 왕권의 정당성 주장(7)
다윗은 야베스 사람들에게 “이제 너희는 손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할지어다”(7)라고 권면합니다. ‘손을 강하게 함’은 용기 내는 것을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입니다. 다윗이 이처럼 야베스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우는 이유는 사울의 죽었고 자신이 유다 지파의 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유다 지파가 다윗에게 기름 부은 것은 이스라엘을 분열시키는 행동이었고, 결국 나라는 혼란에 빠질 것이 분명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은 야베스가 이스보셋이 아니라 자신의 편에 서기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11지파의 왕인 이스보셋(8-11)

작은 일에 충성하면 큰일까지 맡아서 일할 수 있습니다. 큰일을 할 수 없다고 원망이나 불평하고 있으면, 작은 일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온 지파의 왕이 아니라 한 지파의 왕으로 세움을 입었지만,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신 만큼 유다 지파부터 잘 다스렸습니다. 그의 충성스러움은 나중에는 이스라엘 온 지파들이 다윗에게 달려와 왕이 되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8사울의 군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이 이미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데리고 마하나임으로 건너가 9길르앗과 아술과 이스르엘과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더라 10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이스라엘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사십 세이며 두 해 동안 왕위에 있으니라 유다 족속은 다윗을 따르니 11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 족속의 왕이 된 날 수는 칠 년 육 개월이더라(8-11)

다윗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여 세우신 유다의 왕이었지만,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은 아브넬이 주도하여 사람들이 세운 왕이었습니다. 이스보셋이 더 많은 지파, 더 넓은 땅을 다스리는 왕으로 세움을 입었지만, 그의 왕위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 시작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1) 아브넬의 역할(8-9)
아브넬은 사이 사촌이며 아비엘이 그들의 할아버지입니다(삼상 9:1, 2; 14:51). 아브넬은 사울의 통치 초기부터 군사령관의 지위에 있었으며, 사울 왕국의 이인자였습니다.
그는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요단 동편 마하나임으로 데려가 왕으로 삼았습니다. 이스보셋(‘수치의 사람’)은 에스바알(‘바알의 사람’)이라고도 불리는 사울의 넷째 아들입니다(대상 8:33). 사무엘상 14장에서 이스보셋의 이름이 소개되지 않은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삼상 14:49). 그의 나이가 아직 어렸기 때문이거나, 그의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그가 인정받지 못하는 아들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여겨집니다.
이스보셋 왕국의 수도가 된 마하나임은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하지만, 얍복강의 북편 둑에 위치한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스보셋은 유다 지파를 제외한 ‘온 이스라엘’을 다스렸는데, 길르앗과 아술과 이스르엘, 에브라임, 베냐민이 그 왕국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아술은 므낫세 땅의 성읍 아셀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수 17:7).

(2) 이스보셋과 다윗의 통치 기간(10-11)
이스보셋이 40세에 왕이 되어 2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다윗이 7년 6개월 동안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를 통치하였음을 생각한다면, 이스보셋이 왕이 되기 전 몇 년 정도 아브넬이 군사령관으로서 사울 왕국을 다스렸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나가는 말

다윗의 형통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형통한 삶을 살길 원한다면, 다윗처럼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해나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주실 때, 순종하며 나가시길 바랍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지금 당신이 순종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시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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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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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용사를 위한 다윗의 ‘슬픈 노래’

사무엘하 1장 17-27절

 

희망이 있는 곳에서는 누구나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희망이 있을 때 부른 노래는 진정한 희망의 노래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모든 희망이 사라지고 절망만 남아 있을 때 만일에 거기에서 희망을 노래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짜 희망의 노래가 아니겠습니까! 쓰레기 더미에서 부르는 노래가 진정한 희망의 노래, 생명의 노래입니다. 우리는 그 노래를 통해, 그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나 만든 사람의 마음을 느끼게 됩니다. 다윗은 활의 노래에 어떤 마음으로 만들었겠습니까?

 

다윗은 자신의 야망에 사로잡힌 지도자가 아니라,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생각한 지도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사울 왕과 요나단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 매우 슬퍼합니다. 그들의 죽음을 위해 슬픈 노래를 짓고 부릅니다.

 

사울과 요나단 죽음을 슬퍼함(17-18)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마음을 맞는 사람만 보내 주신 것이 아니라 때로는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을 보내주시기도 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을 같이 미워하기보다는, 다윗처럼 영적으로 성숙하는 도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더욱 성숙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러면 다윗처럼 자신을 미워한 사람이라고 장점과 업적을 칭찬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합니다.

17다윗이 이 슬픈 노래로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을 조상하고 18명령하여 그것을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 하였으니 곧 활 노래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으되(17-18)

본문은 다윗의 애가(哀歌.슬픈 노래)에 대한 서문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이 패전하고 사울과 요나단이 전쟁터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애가를 부르고 있습니다.

(1) 다윗의 애가(17)

다윗은 아말렉 청년을 통해 사울과 요나단이 전쟁터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 족속에게 패한 것은 매우 가슴 아픈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매우 슬퍼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추모하는 애가를 지었습니다.

이 애가의 제목을 ‘활의 노래’라고 번역하였지만, 원문의 제목은 ‘활’입니다. 이 활은 요나단을 가리킵니다. 이 노래는 ‘활의 노래(lament of the bow)’로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습니다. 이 시의 두 주인공은 사울과 요나단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노래 제목이 ‘활’이라는 것은 사울과 요나단 중에 요나단을 좀 더 중심적인 인물로 본 것입니다. 애가에서 특별히 한 주절을 사용했다는 사실에서 더 잘 들어납니다.

(2) 활의 노래(18)

다윗은 이 애가를 백성들에게 가르쳐 유다 백성들이 모두가 사울과 요나단을 추도하도록 명령합니다. 그들은 수많은 전쟁에서 이스라엘을 구한 용사요, 이스라엘의 영광이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싸우다 죽은 그들의 왕과 왕자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임에 대한 추모 노래를 만들 때, 자신을 사랑한 요나단만을 위해 짓지 않았고, 자신을 죽이려고 그렇게 쫓아다녔던 사울까지도 위해서 지었습니다. 사울을 향해 용사요,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표현합니다. 다윗을 향한 공격은 자신을 절망과 원망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숙하게 만들었습니다.

 

두 영광의 죽음 애도(19-24)

자신을 세우기 위해 다른 사람의 업적을 무너뜨리는 행동은 치졸한 행동입니다. 오늘날은 이러한 일들이 곳곳에서 비일비재합니다. 성도들은 개인적인 원한에 따라 반응하는 치졸하게 행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으로 원수까지 사랑할 줄 알며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판단할 줄 아는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19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20이 일을 가드에도 알리지 말며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지어다 블레셋 사람들의 딸들이 즐거워할까, 할례 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 21길보아 산들아 너희 위에 이슬과 비가 내리지 아니하며 제물 낼 밭도 없을지어다 거기서 두 용사의 방패가 버린 바 됨이니라 곧 사울의 방패가 기름 부음을 받지 아니함 같이 됨이로다 22죽은 자의 피에서, 용사의 기름에서 요나단의 활이 뒤로 물러가지 아니하였으며 사울의 칼이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였도다 23사울과 요나단이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이러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 그들은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하였도다 24이스라엘 딸들아 사울을 슬퍼하여 울지어다 그가 붉은 옷으로 너희에게 화려하게 입혔고 금 노리개를 너희 옷에 채웠도다 25오호라 두 용사가 전쟁 중에 엎드러졌도다 요나단이 네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26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 27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으며 싸우는 무기가 망하였도다 하였더라(19-27)

본문 19-27절은 다윗 애가의 본문으로 화자 시점을 1인칭으로 다윗 자신이며, 따라서 애가에는 다윗의 관점과 다윗의 감정이 잘 나타납니다. 애가의 시작은 이스라엘을 부르면서 시작합니다. 형식면에서 19-27절은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로 시작하고 마침으로써 노래를 통합하고 있고, 25절에서도 애곡의 대상을 사울과 요나단에서 요나단 한 사람으로 바꿀 때에도 이 구문을 후렵구로 사용하여 전체적으로 시에 통일성을 주고 있습니다.

(1) 사울의 죽음을 슬퍼함(19-24)

다윗은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알리면서 너희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했다고 알리면서 애곡을 시작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왕은 흔히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존재로 묘사됩니다(시 45:2; 사 33:17). 그러므로 ‘영광’은 이스라엘의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용사인 사울(과 요나단)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이 용사가 죽은 장소를 ‘산’이라 번역하지만, 원문에는 ‘높은 곳’입니다. “두 용사”로 번역된 깃보림은 문자적으로 ‘(다수의) 용사들’을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이 시에서 모두 다섯 번 사용되는데, 22절을 제외하면 사울과 요나단 두 사람을 가리킵니다(1:19,21,22,25,27). 한글 성경의 ‘오호라’는 ‘예크(איך)’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는 대부분의 영어 번역처럼 ‘어찌하여’(how)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따라서 19절 후반부는 ‘어찌하여 용사들이 엎드러졌는가?’가 됩니다. 이는 전쟁에 패하였음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다윗은 전쟁의 패배를 알리는 이 문장을 세 번 사용하면서 본문의 틀을 만들고, 시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형성합니다(1:19, 25, 27).

20절에서는 온 이스라엘을 불러 두 용사의 죽음을 알리는 19절과 대조적으로 알리지 말라고 합니다. 20절은 4개의 행이 나오는데, 두 행이 서로 평행을 이루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앞의 두 행은 명령이고 뒤의 두 행은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알리지 말라 가드에서 / 전하지 말라 아스글론의 거리에서 / 블레셋의 딸들이 즐거워하지 못하도록 / 무할례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르지 못하도록, 20절 전반부에서 다윗은 사울의 죽음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가드와 아스글론은 블레셋의 모든 지역을 가리키는 일종의 제유법(synecdoche)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후반부는 블레셋 사람의 딸들과 할례받지 못한 자의 딸들에 관해 말합니다(“할례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 후반부는 히브리 시의 전형적인 평행법으로 표현되었는데, 할례받지 못한 자의 딸은 블레셋 사람의 딸을 달리 표현한 것입니다. 아들이 아니라 딸을 언급한 이유는 이들이 대외 활동이 적어 주변 소식에 가장 어두운 집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조차 사울의 죽음을 알고 기뻐한다면, 모든 블레셋 사람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블레셋은 그들의 승전 소식을 모든 블레셋 땅으로 전파했습니다(삼상 31:9). 다윗이 이처럼 불가능한 일을 소원하는 것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그의 마음이 간절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22-24절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블레셋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 것을 명한 다윗은 전쟁의 상황 속에서 들어난 두 사람의 무용(武勇) 칭송합니다. 22절은 그들이 전쟁터에서의 용감함을 보여줍니다. 구문은 20절처럼 두 행씩 평행을 이룹니다. 이런 형태는 사울과 요나단을 동등하게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합니다. “죽은 자”(할랄)와 “용사”(깃보림)는 19절에서 모두 사울을 가리키는 표현이었습니다. 죽은 용사가 된(19) 사울은 과거 자신의 칼을 사용하여 요나단과 함께 수많은 ‘죽은 용사’를 만들었습니다(22). 본문은 이미 죽은 사울의 현재 모습과 무적이었던 과거의 모습을 비교하면서, 사울의 비참한 운명을 더욱 부각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용맹과 위대함은 그가 요나단과 함께 있었기에 더욱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사울과 요나단은 함께 싸울 때 무적이었습니다. 비록 부친의 잘못된 결정 때문이었지만, 부친을 위해 자신이 죽겠다고 말하던 요나단이 실제 부친과 함게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삼상 14:43). 서로를 향한 두 사람의 사랑과 신뢰가 죽음의 순간에 더욱 빛납니다.

장례식에서 여인들이 애곡하는 관습에 따라 다윗은 여인들에게 사울의 죽음을 슬퍼하여 올라고 합니다. 전쟁은 남자들의 영역이지만 패배를 슬퍼함은 여자들의 영역입니다. 특별히 사울 왕은 이스라엘의 여인들이 풍족하고 화려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든 사람입니다. 여인들은 사울의 치세 동안 화려하고 붉은 옷을 입었고, 금으로 만든 장신구를 옷에 달고 다녔습니다. 그러므로 여인들이 사울을 위해 슬퍼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2) 요나단을 기억함(25-27)

다윗은 이제 요나단에게로 관심을 돌립니다. 19절에서 사용된 단어와 문장이 25절에서 반복됩니다. 전쟁의 패배를 탄식하는 문장(“오호라 용사들이 엎드러졌도다”)이 19절에 이어 다시 사용되면서 새로운 단락이 시작됨을 알립니다.

이스라엘의 영광(=사울)이 산 위에서 죽은 것처럼(19), 요나단 역시 산 위에서 죽었습니다(25). 다윗은 요나단을 “내 형”이라 부릅니다. 이는 다윗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요나단을 따랐음을 보여줍니다. “아름다움이라”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나엠’이며, 이는 23절에 사용된 나임(?)의 동사형입니다. 이 단어는 외모의 아름다움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명랑하고 정이 넘치는 성품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26절에서 다윗은 ‘내가 당신을’ 혹은 ‘당신이 나를’이란 표현을 3번이나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요나단과의 친밀한 관계를 강조합니다. 특히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가슴이 쥐어짜지듯이 괴롭다며 가슴 아파하였습니다. ‘그대는 나의 기쁨입니다’라는 말은 다윗이 요나단을 매우 좋아하였고 소중히 여겼다는 고백입니다. 그뿐 아니라 요나단의 사랑은 ‘기이하다’(팔라)라고 표현하는데, 다윗에 대한 애정이 남녀 간의 사랑보다 더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다윗에게 이유 없이 분에 넘치는 사랑을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용사들의 죽음을 세 번째 언급함으로써 자신의 시를 끝맺습니다. 본문의 ‘망하다’는 히브리어 ‘아바드’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는 흔히 사람의 죽음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됩니다(민 17:12). 그러므로 본문에서 싸우는 무기, 즉 (문자적으로) 전쟁 무기는 앞 문장의 용사들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용사들이 엎드러지는 것과 전쟁 무기가 망한 것은 히브리 시의 평행법에 해당합니다.

 

나가는 말

다윗의 애가는 한 편의 추도사입니다. 진한 안타까움도 아쉬움도 묻어 있습니다. 다윗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고 끝까지 사랑했습니다. 이제 자신의 인생은 어떻게 기억되겠습니까? 기억되고 싶습니까?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기대에 부흥하는 인생, 실추된 주의 명예를 회복하고 수세에 몰린 하나님 나라의 반격을 도모하는 다윗의 인생을 꿈꿔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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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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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다윗 왕국을 위한 서막

사무엘하 1장 1-16절

 

연극이나 뮤지컬을 보면, 1막이 끝나면 막을 내리고, 잠시 무대를 정리할 시간을 가졌다가 다음 막을 위해 다시 막을 올리면서 또 다른 내용의 연극을 시작합니다. 이처럼 ‘사무엘상’ 막을 내리고, 이제 ‘사무엘하’ 막을 올리고 있습니다. 원래 사무엘 상하는 한 권의 책이었습니다. 많은 분량으로 상하로 나눈 것뿐입니다. 사무엘 상하의 분기점은 사울의 죽음입니다. 그래서 사무엘하는 ‘사울이 죽은 후’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사울의 시대가 지나가고 다윗 통치의 새 시대가 왔다는 선언입니다.

 

이 단락은 다윗이 사울의 죽음에 관해 알게 되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다윗이 시글락에 머물고 있을 때, 사울의 병사 중 한 명이었던 아말렉 청년이 다윗을 찾아왔습니다. 아말렉 청년은 전쟁 중 중상을 입은 사울 왕의 부탁을 받아 그를 죽인 뒤, 그의 왕관과 팔찌를 벗겨 다윗에게 가져왔다고 보고했습니다. 다윗은 이 보고를 듣고 크게 슬퍼하며 울고 금식하였습니다. 또 다윗은 자신이 사울을 죽였다고 말하는 그 청년을 수하를 시켜 죽이게 하였습니다.

 

아말렉 청년의 보고(1-5)

우리와 함께하신 하나님께서는 위대하고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라도 큰 일꾼으로 쓰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서 쓰임을 받기 위해서는 자리를 탐내기 전에 자신을 합당한지 먼저 돌아보아야 합니다. 공동체는 지도자를 잘 만나고, 지도자가 누구인가가 중요합니다.

1사울이 죽은 후에 다윗이 아말렉 사람을 쳐죽이고 돌아와 다윗이 시글락에서 이틀을 머물더니 2사흘째 되는 날에 한 사람이 사울의 진영에서 나왔는데 그의 옷은 찢어졌고 머리에는 흙이 있더라 그가 다윗에게 나아와 땅에 엎드려 절하매 3다윗이 그에게 묻되 너는 어디서 왔느냐 하니 대답하되 이스라엘 진영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하니라 4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 너는 내게 말하라 그가 대답하되 군사가 전쟁 중에 도망하기도 하였고 무리 가운데에 엎드러져 죽은 자도 많았고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도 죽었나이다 하는지라(1-4)

성도의 태도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특히 사울의 죽음을 알려온 아말렉 소년을 죽이는 사건을 통해, 다윗 왕국은 이 세상의 욕심과 성공의 방법으로 발붙일 곳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을 따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나라임을 보여줍니다. 사건이 발생한 시간이나 장소를 기록하는 것은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됨을 알리는 표시입니다.

(1) 시간과 장소(1)

사무엘하의 이야기는 “사울의 죽은 후라”(1)라고 시작합니다. 이 의미는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왕 다윗의 시대가 시작됨을 함축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그 무렵 아말렉과의 전쟁을 마치고 시글락으로 돌아온 지 이틀이 지났습니다.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죽은 후에(삼상 31:1-6), 다윗이 공식적으로 행한 첫 번째 일은 아말렉 사람을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앞으로 펼쳐질 다윗 왕국은 사울의 왕국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울은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였지만, 다윗은 아말렉을 심판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은 아말렉 족속을 에서의 후손으로 소개합니다(창 36:12; 대상 1:36). 이들은 유다 남부 광야지대나 시내 반도에 거주하는 유목민으로 등장합니다. 히브리 민족과 아말렉 사이의 적대 관계는 출애굽 직후에 형성되었으며, 사울 왕이 아말렉을 진멸함으로써 그 적대 관계가 대부분 청산되었습니다(출 17:8-16; 삼상 15장). 그 후에도 아말렉이 여전히 존속하였는데, 다윗이 한동안 머물렀던 성읍 시글락을 약탈했던 무리가 아말렉이었습니다(삼상 30:1-2). 다윗은 아말렉을 추격하여 그들을 살육하고, 사로잡혔던 가족을 되찾고 많은 재물을 빼앗았습니다(삼상 30:16-20). 그후 다윗은 시글락으로 돌아와 머물렀습니다. 시글락은 아마도 브엘세바에서 죽쪽으로 약 30km 떨어진 곳에 해당합니다.

(2) 아말렉 청년의 모습(2)

다윗이 아말렉은 도륙하고 시글락에 돌아와 쉬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 소년이 사울의 진영에서 나왔습니다. 그의 모습은 엉망이었습니다. 옷이 찢어져 있었고, 머리에 흙이 있었습니다(2). 그는 죽은 자를 애도하거나 전쟁에서 패배했음을 슬퍼하는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창 37:34; 수 7:6; 삼상 4:12; 삼하 13:31; 시 35:13). 그가 다윗 앞에 와서 땅에 엎드려 절했습니다.

(3) 아말렉 청년의 보고(3-4)

이 아말렉 청년은 이스라엘 진영에 있다가 도망한 자였습니다. 다윗에게 블레셋과 전투에서 있었던 사울 왕과 요나단의 죽음을 보고 합니다. 다윗은 그에게 전쟁의 결과에 관해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전쟁 도중에 도망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 역시 죽었다는 사실을 보고했습니다.

사울왕의 죽음은 결국 이스라엘의 패배로 끝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패한 것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전전긍긍하다 결국 패하고 전사하게 된 것입니다.

 

다윗의 질문(5-10)

진실을 외면하고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가 공을 세운 것처럼 가장하여 칭찬과 상급을 받으려는 얄팍한 잔꾀는 스스로를 멸망시킵니다. 자신의 이익을 우리가 밝혀야될 진실보다 자신에게 유리한 거짓을 꾸미고 있지는 않습니까? 인간의 얄팍한 꾀는 오히려 자승자박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고 진실을 왜곡하는 거짓된 삶을 격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5다윗이 자기에게 알리는 청년에게 묻되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죽은 줄을 네가 어떻게 아느냐 6그에게 알리는 청년이 이르되 내가 우연히 길보아 산에 올라가 보니 사울이 자기 창에 기대고 병거와 기병은 그를 급히 따르는데 7사울이 뒤로 돌아 나를 보고 부르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한즉 8내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하시기로 내가 그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말렉 사람이니이다 한즉 9또 내게 이르시되 내 목숨이 아직 내게 완전히 있으므로 내가 고통 중에 있나니 청하건대 너는 내 곁에 서서 나를 죽이라 하시기로 10그가 엎드러진 후에는 살 수 없는 줄을 내가 알고 그의 곁에 서서 죽이고 그의 머리에 있는 왕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내 주께로 가져왔나이다 하니라(5-10)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놀라운 소식을 들은 다윗은 소년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합니다.

(1) 다윗의 질문(5)

다윗은 아말렉 소년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려고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느냐고 다시 질문합니다. 본문에서는 ‘어떤 사람’으로 불리던 정보 전달자를 처음으로 ‘청년’(나아르)이라 부릅니다. 히브리어 ‘나아르’는 청년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어린 나이의 소년을 의미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이 단어는 신분이 낮은 사람이나 초보자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여기서 ‘나아르’라는 칭호는 그의 보고가 신뢰하기 힘들다는 다윗의 인식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으로 보이는 어린 나이의 병사, 나아르가 이스라엘 왕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에 관해 정확히 알고 있다는 점이 다윗에게 의구심을 불러일으켰을 것입니다.

(2) 아말렉 청년의 보고(6-9)

아멜렉 청년은 사울을 만난 것은 우연이라고 강조합니다. 자신이 길보아 산에 우연히 올라갔다고 말합니다. 그가 말한

‘길보아 산’은 이스르엘 평원의 동쪽 끝부분에 있으며, 이 산의 높이는 해발 500미터 정도입니다. 그는 자신이 두 눈으로 본 것을 말하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보라’라는 뜻의 ‘힌네’를 사용하여 설명합니다.

청년은 사울이 자기 창에 기대 있었고, 기병과 병기가 사울을 추격하여 매우 가까이 와 있음을 보았습니다(6). 자신이 사울 왕을 볼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사울 왕이 고개를 돌려 아말렉 청년을 보고서 불렀습니다(7). ‘네가 누구냐?’ 하고 묻는 사울의 질문에 그는 자신이 아말렉 사람이라고 답했습니다(8). 그러자 사울은 자신의 목숨이 아직 완전히 있어서 고통스러우니 자신을 죽이라고 그에게 지시했습니다. 목숨이 완전히 있다는 것은 ‘콜-오드 나프쉬’의 번역입니다. 이 번역은 사울이 마치 건강한 상태로 있었음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콜(모든)은 뒤에 나오는 오드(여전히)를 강조하는 역할을 하며, 생명이 완전함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드는 생명이 소멸되지 않고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콜-오드 나프쉬’는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상태를 표현합니다. 고통으로 번역된 ‘샤바츠’는 성경에서 단 한 번 사용되었으며(hapax legomenon), 의미가 불분명합니다. 칠십인역은 이 단어를 ‘스코토스 데이논’, 즉 ‘공포스러운 흑암’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단어는 벗어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을 가리킬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고통 중에 있나니’(9)는 ‘내가 절망적인 상황에 부닥쳤으니’라는 뜻입니다.

사울 왕은 창에 기대고 있었고, 그의 뒤를 병거와 기병이 급하게 쫓아오고 있는 다급한 상황이었는데, 이때 사울이 뒤돌아보고 자신을 불러서 그에게 갔다고 합니다. 소년은 사울과 만난 장면을 매우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3) 아멜렉 청년의 행동(10)

아말렉 청년은 사울이 기력을 소진한 뒤 쓰러지면 생명을 잃을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울의 지시대로 사울을 죽이고, 그의 면류관과 팔찌를 취하여 다윗에게 가져왔습니다. 여기서 ‘면류관’(네제르)은 왕이 야외에서 착용하는 간편한 형식의 왕관을 가리킬 것입니다. 또 ‘팔찌’(에츠아다)는 팔꿈치 위쪽에 착용하는 형태로 여겨집니다. 이 청년은 자신이 칭찬받으리라고 생각하여 이처럼 말했을 것입니다.

다윗은 먼저 사울의 사망에 대한 경위를 살펴보면, 자신이 우연히 길보아 산에 갔었는데 부상당한 사울 왕을 만났고 말했습니다. 부상이 심한 사울 왕은 자신에게 죽여 달라고 원했었고, 그래서 자신은 사울을 죽인 후에, 사울의 징표인 왕관과 팔찌를 증거로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소년의 보고는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점들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3사울이 패전하매 활 쏘는 자가 따라 미치니 사울이 그 활 쏘는 자를 인하여 중상한지라 4그가 병기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나를 찌르라 할례 없는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병기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즐겨 행치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 칼을 취하고 그 위에 엎드러지매 5병기 든 자가 사울의 죽음을 보고 자기도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그와 함께 죽으니라(삼상 31:3-5)

사울은 활 쏘는 자에게 쫓기고 있었지만(삼상 31:3), 여기서는 병거와 기병에게 쫓기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또 사울은 병기 든 자에게 자신을 죽여 달라고 부탁하다가 자신이 자살해 죽지만(삼상 31:4), 여기서는 아말렉 소년은 자신에게 부탁해서 자신이 고통을 덜해 주기 위해 죽였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다윗의 원수 사울 왕을 죽였기 때문에, 다윗을 위한 일등공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윗이 세울 새로운 나라의 공신으로 세워달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 거짓된 공적을 꾸며서 유리하게 거짓 보고한 것입니다.

 

다윗의 반응(11-16)

무엇에 기뻐하고 슬퍼하는지를 보면 무엇을 가장 열망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는 판단이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평생 따라다니면서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원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대부분 사람들은 기뻐할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11이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으매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리하고 12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을 인하여 저녁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니라13다윗이 그 소식을 전한 청년에게 묻되 너는 어디 사람이냐 대답하되 나는 아말렉 사람 곧 외국인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14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하고 15다윗이 청년 중 한 사람을 불러 이르되 가까이 가서 그를 죽이라 하매 그가 치매 곧 죽으니라 16다윗이 그에게 이르기를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갈지어다 네 입이 네게 대하여 증언하기를 내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죽였노라 함이니라 하였더라(11-16)

평생 칼갈이 다윗을 위협하던 사울은 건재했습니다. 기름 부음 받은 자 사울의 생명을 하나님께 맡긴 그의 판단은 옳았습니다. 그리고 이 판단을 거스른 아말렉 소년을 처형합니다.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는 판단이 우리를 지켜줍니다.

(1) 슬퍼하는 다윗(11-12)

다윗은 자신의 목숨을 끈질기게 노리던 사울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기뻐하기보다는 매우 슬퍼하였습니다. 다윗과 부하들은 모두 자기 옷을 찢고 저녁까지 금식하면서 그들의 죽음을 위해 금식하였습니다.

한 번도 사울을 원수로 여긴 적이 없었습니다. 사울 왕의 죽었다는 소식은 다윗은 개인적인 감정과 욕심을 떠나서 하나님이 세운 이스라엘 왕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그의 슬픔은 결코 정치적 위선이 아니라 안타까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의 아픔과 슬픔에는 쉽게 동참할 수 있지만, 자신을 힘들게 하는 사람의 슬픔에 동참하기란 전혀 쉽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모든 일들을 하나님 나라의 거시적인 차원에서 살펴가야 합니다.

(2) 처형당하는 아말렉 청년(13-16)

다윗은 사울을 죽였다고 자랑스럽게 거짓 보고하며, 큰 상을 기대했던 아말렉 소년을 죽이라고 다윗은 명령합니다. 그를 죽이라는 이유를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14)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아말렉 소년을 심판한 것입니다. 아말렉 소년이 생각한 것처럼, 다윗은 결코 사울 왕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다윗은 그를 징계하고 죽임으로써 하나님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에 대한 다윗의 변함없는 태도를 말합니다.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입은 사람을 죽이는 것은 큰 죄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거역을 나타내며,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왕관을 취하려는 삶을 결코 원치 않았습니다. 결국 원수의 죽음을 기뻐하리라는 생각과 그것을 이용해서 성공하려는 아말렉 소년의 꿈은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거짓은 반드시 그 대가를 치룹니다. 아말렉 소년은 뛰어난 연기와 능숙한 말솜씨로 다윗을 속이는데 성공할 수 있었지만, 그의 거짓된 행동은 자신의 죽음을 불러왔습니다. 우리들도 야망을 위해 거짓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버려야 합니다. 진실한 삶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나가는 말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들을 행할 때,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대로 순종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일을 새롭게 시작하는데, 하나님의 중심과 방식대로 순종하면서 시작한 것입니다. 욕심이 아닌 말씀을 따라 반응하게 하시고, 어떤 상황에서도 거짓이 아닌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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