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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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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용사를 위한 다윗의 ‘슬픈 노래’

사무엘하 1장 17-27절

 

희망이 있는 곳에서는 누구나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희망이 있을 때 부른 노래는 진정한 희망의 노래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모든 희망이 사라지고 절망만 남아 있을 때 만일에 거기에서 희망을 노래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짜 희망의 노래가 아니겠습니까! 쓰레기 더미에서 부르는 노래가 진정한 희망의 노래, 생명의 노래입니다. 우리는 그 노래를 통해, 그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나 만든 사람의 마음을 느끼게 됩니다. 다윗은 활의 노래에 어떤 마음으로 만들었겠습니까?

 

다윗은 자신의 야망에 사로잡힌 지도자가 아니라,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생각한 지도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사울 왕과 요나단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 매우 슬퍼합니다. 그들의 죽음을 위해 슬픈 노래를 짓고 부릅니다.

 

사울과 요나단 죽음을 슬퍼함(17-18)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마음을 맞는 사람만 보내 주신 것이 아니라 때로는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을 보내주시기도 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을 같이 미워하기보다는, 다윗처럼 영적으로 성숙하는 도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더욱 성숙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러면 다윗처럼 자신을 미워한 사람이라고 장점과 업적을 칭찬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합니다.

17다윗이 이 슬픈 노래로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을 조상하고 18명령하여 그것을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 하였으니 곧 활 노래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으되(17-18)

본문은 다윗의 애가(哀歌.슬픈 노래)에 대한 서문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이 패전하고 사울과 요나단이 전쟁터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애가를 부르고 있습니다.

(1) 다윗의 애가(17)

다윗은 아말렉 청년을 통해 사울과 요나단이 전쟁터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 족속에게 패한 것은 매우 가슴 아픈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매우 슬퍼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추모하는 애가를 지었습니다.

이 애가의 제목을 ‘활의 노래’라고 번역하였지만, 원문의 제목은 ‘활’입니다. 이 활은 요나단을 가리킵니다. 이 노래는 ‘활의 노래(lament of the bow)’로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습니다. 이 시의 두 주인공은 사울과 요나단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노래 제목이 ‘활’이라는 것은 사울과 요나단 중에 요나단을 좀 더 중심적인 인물로 본 것입니다. 애가에서 특별히 한 주절을 사용했다는 사실에서 더 잘 들어납니다.

(2) 활의 노래(18)

다윗은 이 애가를 백성들에게 가르쳐 유다 백성들이 모두가 사울과 요나단을 추도하도록 명령합니다. 그들은 수많은 전쟁에서 이스라엘을 구한 용사요, 이스라엘의 영광이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싸우다 죽은 그들의 왕과 왕자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임에 대한 추모 노래를 만들 때, 자신을 사랑한 요나단만을 위해 짓지 않았고, 자신을 죽이려고 그렇게 쫓아다녔던 사울까지도 위해서 지었습니다. 사울을 향해 용사요,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표현합니다. 다윗을 향한 공격은 자신을 절망과 원망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숙하게 만들었습니다.

 

두 영광의 죽음 애도(19-24)

자신을 세우기 위해 다른 사람의 업적을 무너뜨리는 행동은 치졸한 행동입니다. 오늘날은 이러한 일들이 곳곳에서 비일비재합니다. 성도들은 개인적인 원한에 따라 반응하는 치졸하게 행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으로 원수까지 사랑할 줄 알며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판단할 줄 아는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19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20이 일을 가드에도 알리지 말며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지어다 블레셋 사람들의 딸들이 즐거워할까, 할례 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 21길보아 산들아 너희 위에 이슬과 비가 내리지 아니하며 제물 낼 밭도 없을지어다 거기서 두 용사의 방패가 버린 바 됨이니라 곧 사울의 방패가 기름 부음을 받지 아니함 같이 됨이로다 22죽은 자의 피에서, 용사의 기름에서 요나단의 활이 뒤로 물러가지 아니하였으며 사울의 칼이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였도다 23사울과 요나단이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이러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 그들은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하였도다 24이스라엘 딸들아 사울을 슬퍼하여 울지어다 그가 붉은 옷으로 너희에게 화려하게 입혔고 금 노리개를 너희 옷에 채웠도다 25오호라 두 용사가 전쟁 중에 엎드러졌도다 요나단이 네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26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 27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으며 싸우는 무기가 망하였도다 하였더라(19-27)

본문 19-27절은 다윗 애가의 본문으로 화자 시점을 1인칭으로 다윗 자신이며, 따라서 애가에는 다윗의 관점과 다윗의 감정이 잘 나타납니다. 애가의 시작은 이스라엘을 부르면서 시작합니다. 형식면에서 19-27절은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로 시작하고 마침으로써 노래를 통합하고 있고, 25절에서도 애곡의 대상을 사울과 요나단에서 요나단 한 사람으로 바꿀 때에도 이 구문을 후렵구로 사용하여 전체적으로 시에 통일성을 주고 있습니다.

(1) 사울의 죽음을 슬퍼함(19-24)

다윗은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알리면서 너희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했다고 알리면서 애곡을 시작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왕은 흔히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존재로 묘사됩니다(시 45:2; 사 33:17). 그러므로 ‘영광’은 이스라엘의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용사인 사울(과 요나단)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이 용사가 죽은 장소를 ‘산’이라 번역하지만, 원문에는 ‘높은 곳’입니다. “두 용사”로 번역된 깃보림은 문자적으로 ‘(다수의) 용사들’을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이 시에서 모두 다섯 번 사용되는데, 22절을 제외하면 사울과 요나단 두 사람을 가리킵니다(1:19,21,22,25,27). 한글 성경의 ‘오호라’는 ‘예크(איך)’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는 대부분의 영어 번역처럼 ‘어찌하여’(how)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따라서 19절 후반부는 ‘어찌하여 용사들이 엎드러졌는가?’가 됩니다. 이는 전쟁에 패하였음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다윗은 전쟁의 패배를 알리는 이 문장을 세 번 사용하면서 본문의 틀을 만들고, 시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형성합니다(1:19, 25, 27).

20절에서는 온 이스라엘을 불러 두 용사의 죽음을 알리는 19절과 대조적으로 알리지 말라고 합니다. 20절은 4개의 행이 나오는데, 두 행이 서로 평행을 이루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앞의 두 행은 명령이고 뒤의 두 행은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알리지 말라 가드에서 / 전하지 말라 아스글론의 거리에서 / 블레셋의 딸들이 즐거워하지 못하도록 / 무할례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르지 못하도록, 20절 전반부에서 다윗은 사울의 죽음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가드와 아스글론은 블레셋의 모든 지역을 가리키는 일종의 제유법(synecdoche)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후반부는 블레셋 사람의 딸들과 할례받지 못한 자의 딸들에 관해 말합니다(“할례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 후반부는 히브리 시의 전형적인 평행법으로 표현되었는데, 할례받지 못한 자의 딸은 블레셋 사람의 딸을 달리 표현한 것입니다. 아들이 아니라 딸을 언급한 이유는 이들이 대외 활동이 적어 주변 소식에 가장 어두운 집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조차 사울의 죽음을 알고 기뻐한다면, 모든 블레셋 사람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블레셋은 그들의 승전 소식을 모든 블레셋 땅으로 전파했습니다(삼상 31:9). 다윗이 이처럼 불가능한 일을 소원하는 것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그의 마음이 간절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22-24절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블레셋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 것을 명한 다윗은 전쟁의 상황 속에서 들어난 두 사람의 무용(武勇) 칭송합니다. 22절은 그들이 전쟁터에서의 용감함을 보여줍니다. 구문은 20절처럼 두 행씩 평행을 이룹니다. 이런 형태는 사울과 요나단을 동등하게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합니다. “죽은 자”(할랄)와 “용사”(깃보림)는 19절에서 모두 사울을 가리키는 표현이었습니다. 죽은 용사가 된(19) 사울은 과거 자신의 칼을 사용하여 요나단과 함께 수많은 ‘죽은 용사’를 만들었습니다(22). 본문은 이미 죽은 사울의 현재 모습과 무적이었던 과거의 모습을 비교하면서, 사울의 비참한 운명을 더욱 부각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용맹과 위대함은 그가 요나단과 함께 있었기에 더욱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사울과 요나단은 함께 싸울 때 무적이었습니다. 비록 부친의 잘못된 결정 때문이었지만, 부친을 위해 자신이 죽겠다고 말하던 요나단이 실제 부친과 함게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삼상 14:43). 서로를 향한 두 사람의 사랑과 신뢰가 죽음의 순간에 더욱 빛납니다.

장례식에서 여인들이 애곡하는 관습에 따라 다윗은 여인들에게 사울의 죽음을 슬퍼하여 올라고 합니다. 전쟁은 남자들의 영역이지만 패배를 슬퍼함은 여자들의 영역입니다. 특별히 사울 왕은 이스라엘의 여인들이 풍족하고 화려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든 사람입니다. 여인들은 사울의 치세 동안 화려하고 붉은 옷을 입었고, 금으로 만든 장신구를 옷에 달고 다녔습니다. 그러므로 여인들이 사울을 위해 슬퍼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2) 요나단을 기억함(25-27)

다윗은 이제 요나단에게로 관심을 돌립니다. 19절에서 사용된 단어와 문장이 25절에서 반복됩니다. 전쟁의 패배를 탄식하는 문장(“오호라 용사들이 엎드러졌도다”)이 19절에 이어 다시 사용되면서 새로운 단락이 시작됨을 알립니다.

이스라엘의 영광(=사울)이 산 위에서 죽은 것처럼(19), 요나단 역시 산 위에서 죽었습니다(25). 다윗은 요나단을 “내 형”이라 부릅니다. 이는 다윗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요나단을 따랐음을 보여줍니다. “아름다움이라”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나엠’이며, 이는 23절에 사용된 나임(?)의 동사형입니다. 이 단어는 외모의 아름다움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명랑하고 정이 넘치는 성품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26절에서 다윗은 ‘내가 당신을’ 혹은 ‘당신이 나를’이란 표현을 3번이나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요나단과의 친밀한 관계를 강조합니다. 특히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가슴이 쥐어짜지듯이 괴롭다며 가슴 아파하였습니다. ‘그대는 나의 기쁨입니다’라는 말은 다윗이 요나단을 매우 좋아하였고 소중히 여겼다는 고백입니다. 그뿐 아니라 요나단의 사랑은 ‘기이하다’(팔라)라고 표현하는데, 다윗에 대한 애정이 남녀 간의 사랑보다 더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다윗에게 이유 없이 분에 넘치는 사랑을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용사들의 죽음을 세 번째 언급함으로써 자신의 시를 끝맺습니다. 본문의 ‘망하다’는 히브리어 ‘아바드’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는 흔히 사람의 죽음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됩니다(민 17:12). 그러므로 본문에서 싸우는 무기, 즉 (문자적으로) 전쟁 무기는 앞 문장의 용사들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용사들이 엎드러지는 것과 전쟁 무기가 망한 것은 히브리 시의 평행법에 해당합니다.

 

나가는 말

다윗의 애가는 한 편의 추도사입니다. 진한 안타까움도 아쉬움도 묻어 있습니다. 다윗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고 끝까지 사랑했습니다. 이제 자신의 인생은 어떻게 기억되겠습니까? 기억되고 싶습니까?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기대에 부흥하는 인생, 실추된 주의 명예를 회복하고 수세에 몰린 하나님 나라의 반격을 도모하는 다윗의 인생을 꿈꿔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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