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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04-02)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

빌립보서 4장 10-23절


헌금은 항상 민감합니다. 복 받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지거나, 반대로 아예 무시당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복음 사역을 위해 보낸 선교 헌금을 받고 매우 기뻐합니다. 동시에 성도들이 그의 기쁨의 원인에 대해 오해하지 않도록 몇 가지 사실을 분명히 전합니다.

  

교회 내외적 문제들에 대한 마지막 권면을 한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교회가 보내준 선물에 대해 감사합니다. 하지만 감사 표현이 또 다른 선물을 요구하는 것처럼 들릴까봐 조심하면서 교회가 보내준 선물의 의미를 계속 부연합니다. 이후 빌립보 교회가 인사하라는 것과 함께 독자들을 향한 로마에 있는 성도들의 인사를 전달하면서 편지를 마무리합니다.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전달한 선물에 대한 감사(10-20)

성숙함은 절대로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배우고 훈련해서 익혀야 하는 것입니다. 성숙해지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각이 달라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재정적 문제에서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인정함으로 자족함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모습이 구체적 영역에서 성숙해질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강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10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11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14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15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16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17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18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19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20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10-20)

바울은 자기의 괴로움에 동참한 빌립보의 형제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합니다. 바울이 사역 초기에 마게도냐를 떠날 때 주고받는 일에 참여한 교회는 빌립보 교회뿐이었습니다. 빌립보 교회처럼 하나님께서 마음을 주실 때, 손을 펴서 돕기를 주저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1) 선물에 대한 감사(10)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한다고 말함으로 빌립보 교회의 선물에 대해 감사합니다. 바울은 그들의 선물을 ‘나를 생각하던 것’의 표현이라고 말합니다. 단순히 물질 차원이 아니라 관계성을 바탕으로 한 사랑의 주고받음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아마도 한동안 교회는 바울이 필요한 것을 돕지 못했던 듯합니다. 바울을 생각하는 것이 다시 일어났다고 말하고, 생각이 있었지만 기회가 없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0절 표현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크게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선물을 밝히는 속물처럼 비칠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제 다시 싹이 났다’는 표현입니다. 그동안 안 했던 것에 대해 나무라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 자신이 기뻐한 것은 순수하게 독자들의 사랑의 마음 때문이었음을 11-13절에서 부연합니다.

(2) 오해의 여지를 없앰: 선물을 더 요구하는 것이 아님(11-13)

10절 표현에 대해 오해가 없도록 설명을 추가합니다. 자기가 무엇인가 부족해서 독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밝힙니다. 이미 지나온 과정 동안 없어 본적도 있고 풍족하게 누린 적도 많기에 어떤 형편에도 자족하는 것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고 합니다(13). 이 말은 하나님으로 인해 불가능한 일이나 모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발휘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간에 하나님을 의지해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가난한 상황이 해결 안 될지라도 여전히 만족하며 사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렇기에 바울의 기쁨은 단순히 선물이라는 물질을 얻었기 때문이 아니라, 1차적으로 자신을 생각하는 독자들의 사랑의 마음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요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후 14-20절에서 바울은 그 선물의 의미와 그에 대한 반응들을 서술합니다.

(3) 선물의 의미 1: 바울의 사역에 동참한 것(14-16)

11-14절과 연결해 독자들이 전한 선물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비록 선물을 계속 바라고 기뻐한 것은 아니지만, 바울이 어려운 처지에 있던 것은 사실이고 그들의 선물은 큰 도움이었습니다. 그는 이에 대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다’는 표현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바울과의 관계에 근거한 표현입니다. 하지만, 이 선물은 독자들이 바울을 도왔다는 것 외에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그의 복음 사역에 동참한 것입니다. 이미 독자들은 교회가 세워진 이후 바울을 위해 기도하고 후원금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있을 때에는 스스로 일하면서 경비를 충당했지만, 그때에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헌금은 받았습니다(고린도후서 11:9). 아마도 고린도 교회의 것은 교회의 분열과 경쟁에 휘둘릴 수 있는 여지가 있었지만, 빌립보 교회의 것은 순수하게 복음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주도하는 예루살렘 교회를 향한 구제 사역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로마서 15:26). 이런 면에서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보내온 선물은 물질적 필요를 채우는 것이지만, 바울이 복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에 함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1:7의 표현처럼 바울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독자들이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된 것입니다. 보내는 선교사의 일을 잘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4) 선물의 의미 2: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목(17-18)

빌립보 성도들이 보낸 선물의 또 다른 의미를 설명합니다. 14-16절에서 말한 내용이 마치 후원을 요청하는 것 같은 오해를 낳을까 봐 바울은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다’라고 다시 말합니다. 불욕에 어두운 사람으로 보일까 염려하는 것입니다. 독자들이 후원했던 일을 말한 까닭은 그들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하기 때문입니다.

상업적 표현으로 독자들의 계좌에 이익이 쌓인다는 의미입니다. 계속해서 독자들이 했던 과거와 현재의 동참이 왜 그들에게 이익인지 두 가지 이유를 통해 서술합니다. 첫째, 이미 바울은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경험하고 있기에 그의 표현은 욕심이나 아첨의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순수하게 독자들의 행위를 인정하고 칭찬한 것이며 그들을 향한 사랑과 관심의 표현입니다. 둘째,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보내준 선물이 감사한 것은 사실입니다. 바울은 그 선물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고, 그분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묘사합니다. 자신을 신격화하여 자기에게 한 일이 그분께 한 일과 같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를 사랑한 것과 복음에 동참한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1의 표현처럼 하나님을 향해 드리는 살아 있는 제물로서의 삶입니다. 예배 표현을 사용해 하나님께서도 칭찬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5) 선물에 대한 반응: 하나님이 갚아주심을 바람(19-20)

독자들의 선물에 대한 바울의 반응입니다. 18절의 ‘채우다’라는 말과 연결해 이전에 독자들이 바울의 필요를 채웠기에, 이제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모든 풍성한 대로 독자들의 모든 쓸 것을 채우실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독자들에게 물질적으로 줄 것이 없고 그런 상황도 아닙니다. 대신 ‘나의’ 하나님께 요청합니다. 평생 바울과 함께하셔서 그의 필요를 채우신 하나님이 독자들의 모든 필요도 채우시기를 간구합니다. 이 하나님의 채움은 단순히 물질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독자들이 하나님/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그리고 하나 됨으로 복음 사역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그분의 은혜를 얻는 것도 있습니다. 이런 채움의 삶은 하나님, 곧 ‘우리’(바울과 독자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으로 귀결됩니다(20).

1:9-11에서 독자들의 삶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기도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이중 정체성으로 잘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을 원하는 목회자의 마음과 궁극적으로 삶의 시작과 끝을 하나님께로 맞춘 신앙인 바울을 엿볼 수 있습니다.

 

문안 인사와 축도(21-23)

교회 안에는 서로 다른 성격과 성장 배경을 가진 많은 사람이 모여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차이를 넘어 서로에게 문안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서로를 반겨 주고 따뜻하게 인사하는 것에서부터 교회의 연합은 견고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역의 현장에서 상처를 받아 관계가 소원해진 지체에게도 먼저 악수를 청하기 바랍니다.

21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22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이니라 23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21-23) 

바울은 모든 성도들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문안한다고 전하면서, 특히 로마 황제의 집 사람들 중 몇 명이 빌립보의 집 사람들에게 전하는 인사를 언급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을 마치고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1) 문안 인사(21-22)

편지의 마지막 부분인 문안 인사입니다.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고 말합니다. 바울과 함께 있는 형제들, 곧 바울의 동역자들이 문안합니다. 아마도 디모데와 누가가 여기에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또한 특별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몇이 바울의 편지를 통해 빌립보 성도들에게 인사합니다. 이들은 황제에게 속한 노예나 자유민으로서 예수를 믿는 어떤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인사는 빌립보 교회 독자들에게는 상당히 놀랍고 반가운 소식일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처럼 로마가 지배하는 환경 속에서 황제가 아닌 예수를 주님으로 모시고 있는 또 다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2) 축도(23)

빌립보 성도들의 심령에 함께하셨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독자들의 모든 영 안에 가득하기를 원하는 축도로 편지를 마무리합니다. 바울 편지의 전형적인 마무리입니다.


빌립보서의 마지막 부분에는 교회를 향한 바울의 애정이 담겨 있습니다. 교회는 사도 바울의 어려움을 돕고 사도는 감사를 잊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관계 안에 흐르는 서로를 향한 사랑이 오늘날의 교회에 절실합니다. 교회의 지도자와 성도 간에, 그리고 성도들 간의 관계가 사랑으로 연합할수록 교회는 이 어두운 세상을 향해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거룩한 능력을 강력하게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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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04-01)

 


 교회의 건강을 위한 바울의 권면

빌립보서 4장 1-9절


바울은 사랑하는 빌립보 성도들을 향해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고 간곡히 권면합니다. 외부의 공격보다 내부의 분열과 분쟁으로 교회들이 속절없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세상의 핍박과 교회 내부의 갈등으로 그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성도들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편지 마무리 부분을 향해 갑니다. 유오디아와 순도게의 갈등 상황에 대한 구체적 권면(2-3)과 교회 전체를 향한 마지막 명령들이 제시됩니다(4-9). 본문은 이전 부분과 다르게 많은 2인칭 명령형들이 연속으로 등장합니다. 빌립보 교회를 향한 바울의 기대와 소망이 강렬하게 제시됩니다.

  

결론적 권면:주 안에 서라(1)

우리가 인간적 욕망과 본능대로 산다면 내면에 점점 더 삭막해져 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속한 공동체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평강이 지배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알려줍니다. 우리의 내면과 공동체가 하나님의 충만한 평강으로 지배받으며 살아갈 원합니다.

1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1)

사도 바울은 권고할 사항을 전하기 전에, 먼저 ‘주 안에 서라’라고 권고합니다. 그는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앞부분의 결론을 이끕니다. 참 모본을 따라 바르게 살라는 3:17-21의 결론이고, 유대 할례주의자들에 대한 경고와 그들과 다른 삶의 모습을 소개한 3:1부터의 결론입니다.

하지만 이전 내용에 대한 단순한 정리는 아닙니다. 이후 진행될 교회 내 갈등과 독자를 향한 마지막 권면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앞부분 내용을 통해 새로운 것을 소개하는 형식이 전환입니다. 독자를 향한 호칭을 많이 사용함으로 시작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 ‘사모하는 자들’, ‘나의 기쁨과 면류관’으로 독자들을 부르고 명령을 한 후, ‘사랑하는 자들아’를 추가합니다. 모두 바울의 따뜻한 사랑의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이후 진행될 내용이 사랑의 마음 표현이기에 독자들이 꼭 들었으면 하는 의도도 담겨 있습니다.

그 마음을 담은 명령은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라는 말은 앞부분 내용처럼 세상을 따르는 사람들과 다르게 하늘 시민권자로서 그리스도를 계속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주 안에 서라’는 복음의 신앙을 위해 군사처럼 굳게 서라는 말로 1:27에서 교회 문제에 대한 권면을 시작할 때 말했습니다. 이 표현을 다시 사용한 것은 대외적으로 복음을 위해 굳게 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과 이후 2-3절에서 말할 복음 사역 수행을 위해 내적 화합이 중요함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결국 개인적으로 이중 정체성을 갖고 하늘 시민에 합당하게 살며, 공동체 내적으로 서로 화합하여 외적으로 복음 사역을 잘 수행하라는 것입니다.

 

교회 갈등 문제에 대한 권면:유오디아와 순두게(2-3)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셔야할 공동체를 위해 사도의 복음적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사람의 본성대로 행동한다면 공동체의 화목은 당연히 깨질 것입니다. 공동체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따를 때 공동체에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고, 하나님께서 마음에 평강으로 충만하게 채우실 것입니다.

2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3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2-3)

바울은 먼저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향해 권면합니다. 두 여인은 빌립보 교회 안에서 상당한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은 서로의 의견에 반대했고 그들 사이에 생긴 긴과 불화는 교회의 분열로 이어질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1) 유오디아와 순두게에 대한 권면(2)

교회 내적 문제인 두 여자 지도자들의 갈등을 언급합니다. 에바브로디도를 제외하고 교회 성도의 이름을 언급한 것은 처음입니다. 그 만큼 바울에게 중요한 관심사입니다. 두 여자의 이름과 함께 ‘내가 권한다’는 말을 각각 사용한 것은 둘 중 어느 한편을 들지 않겠다는 것이며, 화합을 위해 두 사람 모두의 노력이 필요함을 말해줍니다. 핵심은 그들 모두가 ‘동일한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 됨을 주문한 2:2의 내용과 같습니다. 경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겸손한 생각을 배우는 것에서 시작해 겸손과 배려와 함께함의 삶을 주문합니다.

(2) 그들을 도우라(3)

2인칭 단수형 ‘너’에게 그 여자들을 도우라고 부탁합니다. 바울과 함께 멍에를 멘 동역자입니다. 당시 독자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았을 테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확실치 않습니다. 두 여자 지도자들 문제에 제3자의 도움을 요청하여 바울이 이 사안을 심각하게 보고 꼭 해결하려는 의지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렇다고 그 둘 자체가 문제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들을 복음 사역에 있어 바울과 함께 힘써 싸웠던 사람들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하늘 시민권자로 등록되어 그에 맞게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면에서 이들은 복음 사역에서 교회의 본이 되는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단지 서로 경쟁의식으로 갈등을 만들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더 도와야 했고, 그들 각자에게뿐 아니라 ‘너’에게도 부탁해 도우라고 한 것입니다. 그들의 회복은 개인뿐 아니라 복음 사역을 위해 교회에게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독자의 삶을 위한 편지의 마무리 권면들(4-9)

하나님의 평강은 연약하고 불완전한 우리의 마음을 지배할 것입니다. 그러면 목자가 온갖 위협으로부터 항상 양을 지키듯,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의지하고 기도하는 자의 마음을 지켜 주십니다. 마음에 염려가 일어날 때 하나님의 보좌를 찾아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우리의 마음을 하늘의 평강으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4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8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9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4-9)

주 안에서 굳게 서길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것입니다. 기쁨은 하나님 자녀들의 특징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한 것처럼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할지라도 오직 하나님 한분만으로 우리의 만족과 기쁨이 됩니다.

(1) 권면의 시작:기뻐하라(4)

‘항상 기뻐하라’는 말로 편지의 마무리 권면을 시작합니다. 이 표현을 두 번 반복하여 강조한다. 감옥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황과 상관없이 그리스도로 인한 기쁨의 삶을 경험하고 있는 자기처럼 되기를 바랍니다.

(2) 대외적 사람들을 향한 자세(5)

또 다른 마무리 권면은 교회 밖 사람들에게 관용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 반대 모습으로 교회를 대하지만, 그럼에도 교회는 다르게 대하라고 합니다. 주께서 가깝기 때문입니다. 하늘 시민권자로서 종말에 있을 승리를 기대하고 오늘을 견디며 살아가야 합니다.

(3) 기도에 대한 권면(6-7)

성도가 버티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은 기도와 하나님께서 응답 때문입니다. 도시의 적대적 환경이 독자들을 염려하게 하고 바울이나 에바브로디도의 상황도 근심하게 하지만, 모든 것에 기도와 간구로 필요한 것을 하나님이 알도록 해야 합니다. 그분과 함께하는 삶이나 이 땅에서 이중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는 것도 그분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기도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신자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그렇다고 신자가 기대하는 때와 방법과 결과에 하나님이 맞춘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방법으로 당신의 때에 당신이 의도하신 결과로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때로 그것이 사람의 기대와 다를지라도 하나님의 일하심은 언제나 최선입니다. 그분에 대한 신뢰와 확신은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것을 경험하게 합니다. 염려가 나누인 마음이라면, 하나님은 그 마음과 생각을 나누이지 않도록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는 신자가 세상을 이기는 강력한 무기 중 하나입니다.

(4) 마지막 권면들: 사고와 행위 영역에 대한 권면(8-9)

독자를 향한 마지막 명령으로 두 가지 차원에 대한 권면입니다. 하나는 생각 차원의 명령입니다(8). 여덟가지 요소를 나열하고 그것들을 생각하라고 합니다. 참된 것, 경건한 것, 옳은 것, 정결한 것, 사랑받을 만한 것, 칭찬받을 만한 것, 덕이 되고 기림이 되는 것들입니다. 모두 분별의 삶과 관련 있습니다. 또 다른 것은 행위 차원의 명령입니다(9). 바울에게서 배우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하실 것입니다. 이 두 차원은 서로 구분되지만 완전히 분리되지 않습니다. 생각으로 시작해서 행위로 이어지는 순서를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이 부분은 몇 가지 면에서 이전 내용의 정리입니다. 첫째, 생각과 행위 영역을 구분하되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은 독자를 위해 기도하는 1:10-11의 내용입니다. 또한 교회 내적 문제를 다룰 때 생각 차원을 먼저 말하고 행위를 나중에 말한 2:1-18의 내용이며, 그 과정에서 예수의 모본을 다룰 때도 이 두 차원을 함께 말합니다. 회심 이후 생각의 변화와 지속적 추구의 달려감(3:7-14)도 같은 모습입니다. 둘째, 신자 삶의 본이 중요하다는 것도 앞부분 내용과 같습니다. 9절은 바울을 모본으로 말하지만, 최고의 본은 예수입니다(2:6-11). 바울은 그 예수의 종(1:1)으로서 그분을 추구하고 있고, 여러 사람들도 바울의 본을 따릅니다(3:17).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가 여기 속합니다. 이 모든 예들은 독자들이 따라야 할 본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평강입니다. 일차적으로 기도 응답으로 하나님이 주시는데(6-7), 8-9절은 신자의 바른 생각과 행위를 통해 경험된다고 합니다. 이 모든 요소들은 하늘 시민권자로서 복음 안에서의 삶을 꿋꿋하게 살아가게 하는 방법으로 제시됩니다. 당시 독자들뿐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들어야 한다.


 세상에서의 지혜가 하나님 나라에서는 어리석음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옳음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악함일 수 있습니다. 하늘 시민은 복음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세상이 흔들리고 세상이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는 교회는 복음 위에 바르게 서서 하나 된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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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03-02)


할례주의자들에 대한 경고(2)

빌립보서 3장 12-21절


차마 내 말보다 내 행동을 본 받으라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 ‘나처럼 사세요’라고 당당하게 말할 목회자가 과연 존재하겠습니까? ‘나를 본받으라’고 말하는 바울이 부러우면서도 딴죽을 걸고 싶어집니다. 도대체 바울은 어떤 삶의 길을 걸어왔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유대 할례주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경고를 계속 이어갑니다. 이전 문단에서 자신의 회심 이전과 이후 상태를 비교 설명한 바울은 12절부터 부르심의 상을 향한 지속적 추구의 모습을 언급하고 빌립보 성도들을 향한 적용 권면을 이어갑니다. 17절부터는 땅에만 마음 두고 사는 자들과 다르게 하늘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살라고 말합니다. 바울 자신과 그의 모습을 따라 행하는 사람들의 모본을 제시합니다.

 

할례주의자로 인한 위험을 경고(12-14)

 교만한 사람들은 ‘이만하면 됐다.’, ‘더 이상 무엇을 섬기겠는가?’,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교만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태도를 취하지 않고 많은 경험과 경력과 수고와 열매를 가졌지만, 그러한 교만한 태도를 취하지 않고 겸손한 태도를 취했다는 것입니다.

12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12-14)

앞 강에서는 신앙생활을 할 때 주의해야할 것이 무엇인지를 살폈습니다. 본문은 바울을 통해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건강한 신앙을 위한 태도가 무엇인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7-11절에서 언급한 회심 이후 상황과 연결해 계속되는 신앙 여정의 모습을 말합니다. 특별히 이전 부분이 주로 가치 비교라는 사고 영역과 관련 있다면(7-8), 이 부분은 그와 관련한 태도와 행위도 보여줍니다. 비록 현재 모습이 회심 이전과 분명한 차이를 가기고 인지만, 바울은 모든 것을 다 이룬 상태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8)이나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의 권능과 그의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좋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는 것(11)도 아직 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한 추구를 계속합니다. 하지만 단지 부족함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리스도 그분이 다메 섹으로 가는 길에 먼저 바울을 잡으셔서 거룩한 관계를 시작하셨기에 그 관계를 계속 이어가고 싶은 것입니다(12).

바울은 이 추구의 모습을 13-14절에서 다시 설명합니다. ‘형제들아’라는 것으로 먼저 주의를 집중한 후 지금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한 것들을 잊어버리고 오직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 달려간다고 말합니다. 과거 경험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 추구 과정을 강조한 것입니다. 마치 경주자가 종착점을 향해 날리듯 미래에 허락될 온전한 것을 위해 계속 달린다는 말입니다. 경주자가 이기면 월계관을 상으로 받듯, 신앙의 경주 끝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위로부터 하나님이 부르신 것에 대한 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시작된 하나님과의 새 언약 관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의 관계에 끝이나 완성은 없습니다. 서로에 대한 지식으로 관계가 더 깊어갈 뿐입니다. 결혼이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더 깊고 친밀한 관계의 시작인 것처럼 그리스도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원히 그분을 알아가고 그로 인한 사랑이 깊어져 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추구하고 달려갑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가 무엇이고 그 관계 안에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진짜로 알기 때문입니다.

 

참 모본을 따라 바르게 살라(15-16)

우리가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 닮아 가는 것은 일생 동안 추구해야 할 과제입니다.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야 한다는 목표가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성공적인 믿음의 경주자에게 상급을 수여하십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일을 완전히 이루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15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15-16)

바울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는 일생 동안 그리스도를 닮아 가며 장차 그리스도께서 주실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았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이미 얻은 구원에 안주하지 말고, 계속해서 믿음의 경주를 달릴 것을 권면합니다.

(1) 이것들을 생각하라(15)

14절까지의 설명에 근거해 ‘우리’라는 표현으로 독자를 포함한 신자 삶에 대한 적용 권면을 합니다. 크게 두 가지 차원으로 진행됩니다. 하나는 생각의 영역입니다(15). 온전한 자들은 이것을 생각하자고 합니다. 명령형 대신 권면의 가정법을 사용했지만, 단순 명령보다 더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바울과 동일한 생각을 품고 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강요는 아닙니다. 혹시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그것에 대해서도 계시하실 것이라는 말을 추가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각이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리고 믿음이 연약한 자에 대한 배려도 담고 있습니다.

(2) 성숙의 각 단계에 충실하게 살라(16)

권면의 또 다른 차원은 행위 영역입니다(16). ‘우리’가 어디에 이르렀든지 그 단계에 맞게 행하라고 합니다. 지속적 추구 과정을 전제로 매 순간을 그리스도와 함께 정성스럽게 살라는 말입니다. 이런 두 요소를 담고 있는 바울의 권면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한 사고 영역 변화를 통해 믿음의 성장과 추구를 계속해가되 각 단계마다 충실히 살라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참 모본을 따라 바르게 살라(17-21)

최선의 학습 방법은 모방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주님을 닮기 위해 치르는 모든 수고를 주님은 기억하십니다. 우리의 노력에 대해 보상하고 갚아 주기를 기뻐하십니다. 무의미한 세상의 칭찬과 가치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시길 바랍니다. 오직 위에서 우리를 부르신 부름의 상을 향해 끝까지 달라는 자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17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18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17-21)

바울은 그리스도의 온전함을 닮아 가려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그는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았습니다. 세상을 눈질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와 세상에 양다리를 걸칩니다. 그들은 세상 것에 더 마음을 둡니다.

(1) 명령: 바울과 그를 따르는 자들을 본 받으라(17)

‘형제들아’라는 표현으로 신앙의 모본을 따르는 주제로 옮겨갑니다. ‘너희’라고 표현한 독자들에게 두 그룹의 모본을 소개하고 그들을 따르라고 합니다. 한 그룹은 ‘나’로 표현된 바울 자신입니다. 그가 완전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전 내용에 의하면 그리스도를 계속 추구해가는 모습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후 18-21절에 의하면 이 땅에 소망 두고 살아가지 않는 모습을 배우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핵심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입니다.

또 다른 모본은 ‘우리’라고 하는 바울의 모습을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삶도 주목해서 보고 배우라고 하는데, 이 사람들 속에 디모데와 에바보라디도가 들어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들의 궁극적 모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2:6-11). 전체적으로 예수→바울→바울의 본을 따르는 사람들→빌림보 교인들이 모습입니다. 이런 면에서 신앙생활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사람들이 필요하고 서로 배워가며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입니다.

(2) 명령의 이유 1: 부정적 예들(18-19)

모본을 따라 살라고 명령한 이유는 그와 반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교회 내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미 여러 번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말했음에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안타깝고 슬픈 일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합니다. 십자가가 그리스도인 되는 핵심인데, 그 반대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마도 빌립보 교회 내의 어떤 성도들을 말하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만일 그랬다면 바울은 더 직접적으로 그런 사람들을 나무랐을 것입니다. 단지 독자들에게 신자의 삶에 대해 주의를 주고 합당한 삶을 권면하고 싶은 것입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모습이 19절에서 설명됩니다. 그들이 섬기는 신은 자신의 배입니다. 이 땅에서의 소유를 마치 신처럼 받들고 사는 자들입니다. 그 핵심은 돈을 향한 추구일 것입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와의 관계나 하늘 하나님의 뜻은 중요치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주는 결과인 영생의 구원을 기대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이 땅에서 누리는 영광은 곧 수치로 여김 받게 될 것이며, 그들의 마지막은 멸망일 것입니다. 1:28에서 언급한 세상 사람들이 당하는 결과와 동일합니다. 현재는 자기들이 잘하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어느 날 자신이 추구하고 누리는 것들이 허상인 것과 하나님의 구원에서 제외되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3) 명령의 이유 2: 긍정적 예들(20-21)

18-19절 모습과 달리 ‘우리’라고 말하는 진짜 신자들은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차적으로 바울과 그의 본을 따르는 사람들일 것입니다(17). 그들은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늘 시민권을 소유한 자로서의 정체성입니다. 원래는 땅에 속한 자들이었지만, 예수로 인해 하늘 시민권을 가진 자가 되었습니다. 또 다른 특징은 하늘 시민권자로서 구원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립니다. 정체성에 맞게 살아갈 뿐 아니라, 지금 여기에만 집중하지 않습니다. 구원의 온전함은 주님의 재림 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특징은 앞서 언급한 회심 이후 바울의 모습과 동일하며(7-14), 땅의 것에만 집중하는 자들(19)과 대조됩니다. 이런 면에서 그리스도인은 땅에 발붙이고 살지만, 하늘에 속한 이중 정체성을 갖고 하늘을 보고 미래를 기대하며 오늘을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이라고 묘사할 수 있습니다.

왜 그리스도를 기다리는지는 21절에서 설명됩니다. 부활의 새로운 몸, 곧 예수의 영광의 몸의 형체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만물을 자신에게 복종시킨 예수 그리스도가(2:10-11) 신자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이 부활이 중요한 것은 새로운 몸을 통해 삼위 하나님과 완전한 사랑의 교제를 영원히 지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천국을 소망하는 핵심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백성 혹은 하나님-자녀라는 새 언약 관계의 궁극적 완성의 모습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한 이들은 ‘나처럼 살면 성공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늘 시민은 ‘이렇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길이다’를 보여줍니다. 성공과 성취로 가득한 인생이라도 자신만 드러내면 본이 아닙니다. 실제로 가득한 인생이라도 그리스도를 드러낸다면 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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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03-01) 


할례주의자들에 대한 경고

빌립보서 3장 1-11절


데이비드 폴리슨은 사람의 분노에는 심리적인 요인 외에 영적인 면이 있다고 간파합니다. 그것은 바로 교만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가치판단’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섬뜩한 일입니다. 상황을 자신 마음대로 통제하고자 하는 욕구 그 밑뿌리에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신의 자아가 있습니다. 바로 근원적인 죄입니다.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보내겠다고 말할 후 주제를 바꾸어 거짓 가르침을 전하는 자들을 조심하라고 합니다. 그들은 유대 기독교인들로서 할례와 율법 준수를 하나님 백성의 자격으로 가르쳐서 교회들을 어렵게 한 자들입니다. 아직 빌립보 교회로 들어오지 않은 듯 보이지만, 바울은 그들의 영향력을 조심하고 바른 진리로 분별하라고 요청합니다.

    

할례주의자로 인한 위험을 경고(1-11)

배움이 멈춘 사람들은 교만과 자만의 늪에 빠지기 쉽습니다. 가르치는 사람들은 때로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에게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회적으로 높은 위상과 명성을 가진 사람들이나 도덕적으로 흠이 없거나 세상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아 누리는 사람들을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은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교만한 율법주의 선생들에 대해 설명해 나고 있습니다.

1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2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3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4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7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10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1-11) 

바울은 그리스도보다 육체를 자랑하는 할례파들을 강하게 경계합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할례는 몸에 해를 입히는 행위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부끄러움을 자랑과 영광으로 삼는 이들입니다. 복음은 세상의 모든 자랑거리를 부러움이 아니라 부끄러움이 되게 합니다.

(1) 새로운 권면을 시작함(1)

앞 강에서 다른 새로운 주제로 전환했습니다. ‘나의 형제들’이란 말로 빌립보 성도들과의 친밀감을 드러내고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명령합니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기뻐할 지에 대해서는 구체적 언급이 없습니다.

대신 독자들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자신에게는 수고스러움이 아니며, 그들에게 안전하다는 내용을 추가합니다. ‘같은 말’이란 2절부터 말할 할례주의자들에 대한 가르침일 것입니다. 이미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전했던 내용일 것입니다. 주 안에서 진리로 인한 바른 삶을 조심해서 살아갈 것을 권면하고, 그 삶으로 인해 기뻐하라고 말하려는 것입니다.

(2) 할례주의자들을 조심하라(2-3)

바울은 거짓 가르침을 전하는 자들을 조심하라고 합니다. 그들은 유대 기독교인으로서 할례를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할례는 옛 언약 요소로서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드러내는 외적 증거입니다(창세기 17:10-14). 아마도 할례가 영원한 언약이고, 그것을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는 창세기 17:13-14을 근거로 예수로 인한 새 언약 안에서도 할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듯합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먼저 2절에서 몇 가지 방법을 통해 그들의 가르침을 조심하라고 경고 수위를 높입니다. 첫째, ‘삼가라’는 말을 세 번 반복해 강조합니다. 둘째, ‘개’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사용하여 맨 앞에 위치시킵니다. 다짜고짜 ‘개들’이라고 말한 듯한 느낌으로 진행한 것입니다. 이것은 충격요법입니다. 아마도 유대인인 그들은 이방인을 개라고 여겼겠지만, 실제는 거짓 가르침을 전하는 그들이 ‘개’라고 말합니다. 셋째, 그들을 ‘악을 행하는 자’로 말합니다. 단순히 관점이 다른 것이 아니라 진리를 왜곡했기 때문입니다. 넷째, 그들이 주장하는 할례를 거세라는 말로 비하합니다. 이 모든 것은 독자들을 보호하고픈 바울의 마음을 반영합니다. 그들의 주장이 왜 문제인지를 3절에서 설명합니다. 할례를 가진 자기들만 하나님의 참 백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이방인 독자들을 포함한 모든 성도 ‘우리’가 새 언약의 참 백성이라고 말합니다.

세 가지 증거를 제시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성령으로 섬깁니다. 성령은 새 언약 백성의 증거로 약속된 것이기에, 그 성령을 모시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신자가 진짜 하나님 백성입니다. 둘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합니다. 예수는 새 언약에 대한 구약 예언을 성취한 분입니다. 신자는 그 예수와 관계 맺고 있고 그것을 자랑합니다. 셋째, 육체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육체’란 몸이나 신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무관한 삶의 모습을 말합니다.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은 구원 얻은 자로서 복음에 합당치 않은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할례라는 단순한 육체의 표식을 가진 사람이 아닌, 새 언약 안에서 하나님과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 곧 삼위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가장 중요시 여기고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참 백성이라는 설명입니다.

(3) 바울의 예 1: 회심 이전 상태(5-6)

할례주의자에 대한 반박으로 바울은 자신의 경우를 예로 듭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 상태에서 시작합니다. 할례를 주장하는 유대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육체, 곧 그리스도와 무관한 세상 것들에 대해 자랑할 것이 있다고 하지만, 바울은 회심 이전의 자기가 휠씬 더 많다고 말하고 그 내용을 열거합니다.

총 일곱 가지인데, 유대인으로서의 자격과 율법과 관련된 모습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으로서의 자격은 8일 만에 할례 받은 것과 이스라엘 족속, 베나냐민 지파 출신,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는 것입니다. 뒤의 두 개는 정말 자랑할 만합니다. 베냐민은 첫 번째 왕을 배출한 지파요 남유다 왕국을 이루었던 지파 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는 것은 팔레스틴 출신 유대인처럼 아람어를 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정통 유대인의 자격이 충분합니다. 이뿐 아닙니다. 바울은 율법에 대한 것에도 자랑할 만합니다. 율법학자 그룹인 바리새파 출신이고, 교회를 박해할 정도로 율법 준수에 열심이었으며, 그 율법의 의로는 홈이 없던 자였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박해했다는 거의 예수 따르는 사람들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로 여겨 그들을 막는 것이 율법을 통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일이라 생각하고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의’란 율법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잘 이행했다는 의미로 언약 관계의 신실함을 유지했다는 것입니다. 회심 이전 바울의 입장에서는 언약 백성의 의무를 자기만큼 충실히 이행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완벽합니다. 할례를 주장하는 유대 기독교인들이 감히 따라올 수 없을 만한 조건들입니다.

(4) 바울의 예 2: 회심 이후 상태 1(7-11)

5-8절에서 말한 놀라운 조건들을 무색하게 하는 반전이 시작됩니다. 현재 입장에서 과거의 그 모습은 전혀 쓸모없는 배설물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을 발견했기에 상대적으로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가치는 하나님과 새로운 언약 관계를 맺게 하신 그리스도(메시아) 예수입니다. 바울은 왜 그분이 더 나은 가치인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비록 2:6-11에서 짧게 언급했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이미 독자들에게 전했었고, 그들 역시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대신 바울은 자신의 변화의 핵심과 이후 모습을 소개합니다.

먼저, 변화의 핵심 모습은 가치 비교를 통한 분별입니다. 행위가 중요하지만 우선적인 것은 아닙니다. 먼저 생각과 사고 영역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끊임없이 분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에게 있어 우선적 가치는 그리스도와의 관계성입니다. 7-11절에 열 번이나 등장하는 그리스도와 관련된 표현(그리스도를 위해,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 그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 그의 부활의 권능, 그의 고난, 그의 죽으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회심 이전의 바울은 율법 지킴을 통해 옛 언약 관계에서의 충실함을 최선으로 표현했고, 나름 자부심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듯, 바울 역시 옛 언약이 약속했던(예레미야 31:31-34; 에스겔 34:23-25) 새로운 언약 관계를 완성해 줄 그리스도가 필요했습니다. 그 그리스도가 이미 와서 공적 사역을 하시고 십자가와 부활로 새 언약의 길을 완성했지만, 바울은 몰랐습니다. 아니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런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부활한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는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고 인정했습니다. 그 결과 새 언약 관계에 들어갈 수 없는 존재였지만,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죄 사함 받고 마치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신실하게 지킨 사람처럼 여김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난 의를 받은 것입니다. 이후 그에게는 옛엣 언약의 요소보다 새 언약을 시작하고 온전케 하실 그리스도 예수가 더 중요했습니다.

그분의 모든 것에 함께하고 싶어졌습니다. 심지어 그의 고난과 죽음도 본받고자 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수치스러운 것이 아닐뿐더러, 그의 부활처럼 장차 신자에게도 부활의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옛 언약의 요소를 강조하는 할례주의자들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새 언약 안에 있는 신자들에게 그들의 영향력이 미치는 것도 허락할 수 없었습니다. 할례주의자들이 빌립보 교회 안에 있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바울은 더 강경한 어조로 그들을 나무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영향력이 독자들 교회에도 미칠 수 있기에 미리 경고했고, 편지로 다시 조심하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로마 제국의 시민이 아니라 하늘 시민으로 사는 일은 가치의 전복(顚覆)을 매일 살아내야 하는 삶입니다. 현실의 통념과 지배 논리를 거절하고 하늘의 질서를 따르는 이들은 세상에서 낯선 자로 여겨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여, 당연한 세계에 당당하게 대항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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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02-03)


 바울의 동역자들

빌립보서 2장 19-30절


한국의 대표적 선교단체 중 하나인 죠이선교회는 예수님을 첫째로(Jesus First), 이웃을 둘째로(Others Second), 나 지신을 마지막에(You Third) 두는 삶이 인생의 참 기쁨(JOY)임을 전하며 젊은이 선교에 힘써 왔습니다. 바울에게는 그렇게 사는 두 명의 동역자가 있었습니다.

 

1:27-2:18에서 교회 문제를 다룬 후 바울은 교회에게 보낼 두 사람을 추천합니다.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입니다. 디모데는 독자드의 상황을 알고 싶기 때문이며, 에바브라디도는 병이 들었다가 회복되어서 돌려보내는 것입니다. 이들은 교회가 이미 알고 있고 인정하는 사람들이지만, 바울은 그들을 예수를 따르는 신앙의 또 다른 모본으로 소개합니다.

 

동역자 디모데(19-24)

영적훈련은 고난을 통해서 연단을 받을 때 우리에게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도 바울이 자신감 있게 빌립보 교회에게 디모데를 추천하는 이유가 여기는 것입니다. 이미 그는 많은 훈련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너희 교회를 섬기기에 합당한 자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19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20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21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22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23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지를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24나도 속히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19-24)

감옥 안의 바울은 자신의 사정과 인위보다 빌립보 교회의 근황과 인부에 큰 관심을 갖고 심려했습니다. 몸은 사술에 매어 있지만 마음은 성도들을 향한 사랑에 매여 있습니다.

(1) 디모데를 보내기 원함(19)

1:27-2:18을 통해 교회 문제에 대한 권면을 마친 후, 19절부터 주제를 바꾸어 빌립보 교회에 보낼 두 사람을 추천합니다. 그중 한 사람은 디모데입니다. 상황을 보고 될수록 빨리 보내고 싶어 합니다. 독자들의 상황을 듣고 마음에 기쁨과 힘을 얻고 싶기 때문입니다. 보통은 감옥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수감된 사람의 안부를 듣고 싶어 할 텐데, 바울은 그 반대로 말합니다. 독자들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2) 디모데를 선택해 보내는 이유(20-22)

19절과 연결해 디모데를 선택해 보내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두 가지 때문입니다. 하나는 빌립보 교인을 향한 디모데의 사랑 때문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만큼 자기와 같은 뜻을 가지고 독자들을 염려하고 걱정해주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굉장한 칭찬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복음을 향한 디모데의 섬김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것보다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만, 디모데는 복음을 위해 바울과 함께 수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수고한다’는 말은 종으로 섬긴다는 말인데, 7-8절에서 예수의 겸손한 섬김과 동일한 표현이나. 즉, 바울이 예수를 본받아 복음을 위해 섬기는 것처럼 디모데 역시 그렇게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는 디모데의 이런 모습을 독자들이 이미 알고 있다고 합니다. 디모데가 빌립보 교회의 개척자 중 하나였고 그 이후의 모습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독자들의 인정을 이끌어내어 디모데를 보내는 이유에 공감하게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두 가지 이유 모두 바울을 중심으로 디모데를 묘사한다는 점입니다. 디모데는 독자를 사랑하는 것에 대해 바울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고, 복음과 관련해서도 마치 바울의 믿음의 아들처럼 함께 사역했습니다. 독자들이 바울을 사랑하고 신뢰한다면 디모데 역시 그렇게 하라는 의도를 전달합니다. 

(3) 바울의 빌립보 방문에 대한 확신(23-24)

21-22절의 이유 때문에 디모데를 즉시 보내기 원한다고 다시 말합니다. 즉시라고 말하기는 하지만, 얼마 후가 될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상황을 봐서 곧 보내겠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 역시 곧 빌립보 교인들을 만날 수 있게 될 것을 확신한다고 말합니다. 1:25-26에서 말한 것처럼 독자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해서입니다.

 

동역자 에바브로디도(25-30)

교회를 섬길 때 때로는 돕는 자라는 자기 Identity를 절대로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목회자의 동역자요. 교회에 팀장의 동역자요. 대표 장로님에 동역자요. 이런 동역자 의식을 가지고 함께 일할 줄 아는 그런 지혜로운 자가 될 때 그 교회가 영적으로 건강한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25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26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27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28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그를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라(25-28)

에바브로디도는 바울과 복음을 위해 충성하다가 병이 들었습니다. 죽을 지경에 이르렀지만 자신의 안위보다 교회의 안위를 걱정합니다. 성도들이 염려할까 근심했다기보다 그의 질병이 교회의 시험거리가 될까 근심한 것입니다.

(1) 에바브로디도를 보내려 함(25)

19-24절의 니모데에 이어 에바브로디도도 추천합니다. 빌립보 교회가 바울에게 보낸 것들을 가지고 온 사람입니다. 바울이 그를 소개하는 방법이 놀랍습니다. 무려 다섯 가지 표현을 사용해 소개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바울은 그를 형제라고 소개합니다. 함께 하나님의 자녀 된 자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그를 바울 자신과 함께 일하는 사역자와 군사로 묘사합니다. 복음 때문에 감옥에 갇힌 사도와 동일한 일을 하는 귀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이 필요한 것을 채우기 위해 빌립보 교회가 믿고 보낸 사자이고 돕는 자입니다. 정리하면 그는 하나님이 인정한 자녀이며, 바울도 인정한 복음 사역자이고, 교회도 인정한 섬기는 자입니다. 에바브로디도의 귀한 섬김을 알아주라는 의도입니다.

(2) 에바브로디도를 보내는 이유(26-27) 

25절과 연결해 에바브로디도를 보내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표면상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에바브라디도가 독자 모두를 너무 보고 싶어 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독자들이 들은 것을 알고 근심했기 때문입니다(26).

바울의 소개에 의하면 에바브로디도는 참 귀한 신앙인입니다. 우선적으로 그는 바울의 복음 사역에 동참하기 위해 교회를 대표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왔습니다. 복음에 충성스러운 사람입니다. 또한 병든 자신보다 자기 때문에 걱정할 교인들을 더 염려하는 사랑의 사람입니다. 6-8절에서 말한 대로 자기를 높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람들을 사랑하는 방법을 택한 그리스도의 모습이 엿보입니다. 또한 복음과 교인을 중요한 선택 기준으로 삼고 사는 1:12-26의 바울의 모습과도 닮았습니다.

이제 그가 회복되어 바울이 다시 보내려 합니다. 27절은 그간의 상황을 요약합니다. 병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지만, 하나님이 긍휼히 여겨 회복시키셨습니다. 그 회복은 에바브로디도에게 좋은 일이지만, 옆에서 지켜 본 바울에게도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그의 병은 바울에게도 깊은 근심이었기 때문 입니다.

(3) 에바브라디도를 보내려 함(28)

26-27절의 이유 때문에 에바브로디도를 보내려 한다고 다시 말합니다. 그가 돌아감으로 교회가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될 것이고, 또한 교회와 에바브로디도로 인한 바울의 걱정도 해결될 것입니다. 빌립보로 다시 가는 것은 에바브로디도 자신에게도 큰 기쁨일 것입니다. 교회를 향한 그의 근심이 해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바브라디 도와 관련한 이 모든 과정은 교회와 사역자 사이, 교회 성도들 간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바울과 빌립보 성도들, 에바브라디도 모두는 복음에 충성스러울 뿐 아니라 누구도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자가 없습니다. 오직 성도를 향한 사랑으로 상대방이 힘들지 않게 되기를 생각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에바브로디도의 회복을 통해 그림의 사랑에 기쁨과 웃음을 주십니다. 그분 역시 함께 좋아하셨을 것입니다.

  

성도들을 향한 당부(29-30)

자기가 맡은 일에 대하여 리더인 사도 바울과 함께 일할 줄 알고, 섬기면서 일할 줄 알고, 또 사랑이 충만하고 그리고 믿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부족함이 없는 성숙한 일꾼으로서 에바브로디도가 생활을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29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30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28-30)

에바브로디도를 보내면서 독자들에게 두 가지를 당부합니다. 하나는 주님 안에서 큰 기쁨으로 그를 잘 영접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와 같은 사람들을 존귀히 여기라는 것이다. 앞의 것은 독자들이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뒤의 것에 더 비중을 두는 듯합니다. 30절에서 에바브로디도가 무엇을 했는지를 추가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독자들이 바울의 복음 사역에 물리적으로 함께하지 못한 것을 에바브로디도가 채웠습니다. 사실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바울이 필요로 하는 것을 보낸 것은 교회이기에 교회가 복음 사역에 참여한 것입니다. 하지만 목숨을 아끼지 않고 그 일을 수행한 것은 마땅히 칭찬받을 만한 훌륭한 태도입니다. 에바브로디도가 교회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위와 상관없이, 교회 내 유명세와 상관없이, 그리스도께 충실하고 사람들을 사랑하는 이와 같은 사람들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합니다. 신성한 믿음의 사람, 곧 하나님 나라의 참 시민이기 때문입니다.


목회도 ‘성공’을 논하는 시절을 삽니다.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찾아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는 사역자를 보는 일은 희귀한 사건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일을 자기의 일보다 먼저 구하는 참 기쁨이 교회 안에 넘치기를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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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02-02)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빌립보서 2장 5-18절


교회의 분쟁과 분열 소식이 끊임없이 들려옵니다. 옳음가 틀림의 싸움보다 아픈 건 옳음과 옳음의 싸움입니다. 서로 옳다는 주장에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한 마음 한 뜻을 품으라고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한마음 공동체가 될 수 있겠습니까?

 

앞에서 다룬 대내외적 문제에 대해 그리스도의 예를 듭니다. 그분은 신적 영광을 가지고 계셨지만 겸손함으로 성육신하시고 십자가 가역을 하셨습니다. 이후 하나님께서는 부활과 승천을 통해 그리스도의 이전 영광을 회복시키고 모든 것의 주인이심을 확증하셨습니다. 이 그리스도는 교회에게는 겸손한 섬김의 본이고 세상에게는 로마 황제도 무릎 꿇어야 하는 주님입니다. 바울은 이런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더욱 겸손히 그리고 굳건히 복음 안에 서야 함을 권면합니다.

 

그리스도의 모본(5-11)

하나님과 같아지려 했던 교만한 아담(창세기 장)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동등하게 누릴 수 있는 당연한 지위와 권리마저 다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종의 형체를 입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죽음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까지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5-11)

바울은 교회를 향한 사도의 애정 어린 당부가 이어집니다. 그리스도도 안에 있는 권면, 사랑의 위로, 성령의 교제, 긍휼, 자비가 있거든, 같은 마음과 같은 사랑으로 뜻을 합하라고 권고합니다. 

(1) 빌립보 성도들을 향한 권면(5)

5절은 1-4절과 6-11절을 연결해 주는 고리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명령합니다. 그 시작은 생각의 영역입니다. 그리스도가 생각했던 것처럼 하라고 말합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6)

3절에 이어 예수의 모습을 소개하기 시작합니다. 성육신 이전 모습입니다. 전통적으로 본체를 하나님의 본질이나 속성 같은 존재론적 표현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 단어의 기본 의미는 외적 형태입니다. 하나님의 본체란 신으로서의 영광과 존귀로 옷 입은 외적 상태를 말하며 하나님의 지위를 갖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지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로마 황제를 비롯한 인간들은 자신을 신격화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신적 지위를 갖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경쟁 대상으로 여기거나 그 지위를 남용하고 움켜쥐지 않았습니다. 주목할 것은 본문의 주동사인 ‘여기다’입니다. 3절 표현과 같은 것으로 생각 차원입니다. 실제로 행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5절에서 예수처럼 생각하라는 명령의 구체적 모습입니다. 경쟁과 비교의식을 갖고 있는 교회 내 사람들의 태도와 다릅니다. 그들이 일차적으로 배워야 할 모습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7-8)

예수님에 대한 두 번째 상황입니다. 6절이 성육신 이전 생각 영역에 대한 것이라면, 7-8절은 그 이후 그리스도의 행동에 대한 것입니다. 두 개의 주동사를 통해 표현하는데, 그중 하나는 성육신입니다. 성육신은 사람이 되는 것이지만, 바울은 ‘비웠다’는 동사로 시작합니다.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과 반대 행동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신성이나 능력 등 본질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형체로서의 지위와 신분을 내버렸다는 의미입니다. 이 비유는 모습은 세 가지로 부연됩니다. 첫째, 종의 형체를 가졌습니다. 종이란 당시 인간 사회에서 가장 낮은 모습을 말하는 것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형체와 극렬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둘째, 사람들과 같이 되었습니다. 본질상 피조물인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셋째, 사람의 모양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수동태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인식되었다는 말입니다. 사람 중 하나라는 말입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형체이지만 피조물 중 하나인 사람이 되었고 마치 종처럼 가장 낮은 지위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분 스스로 한 일입니다.

주동사를 통해 표현한 그리스도의 또 다른 행동은 자신을 낮춘 것입니다. 성육신이 종의 형체가 되는 것이라면 낮추는 것은 종으로서의 행동입니다. 죽기까지 복종한 것으로 묘사되며, 그 죽음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이라고 부연됩니다. 당시 로마 사회에서 종과 십자가는 잘 어울리는 말입니다. 하지만 신이 그렇게 되었다는 것은 조롱거리입니다. 예수는 그 조롱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위한 것이지만, 한 사람들을 위한 사랑이기도 합니다.

(4)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의 결과(9-11)

6-8절에서 말한 예수의 생각과 행동의 결과입니다. 주어가 예수에서 하나님으로 바뀝니다. 하나님께서 부활과 승천을 통해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영적 존재들을 포함해 세상 모든 존재들이 예수님의 이름에 무릎을 꿇고 주라고 고백하며 궁극적으로 그렇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원래 상태로의 회복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거절한 모든 존재들이 하나님/예수의 왕권을 인정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무릎 꿇게 되는 자들 속에는 로마 황제를 포함해 그 밑에서 위세 떨치는 권력자들도 포함됩니다. 외적 어려움을 겪는 교회에게 세상의 실제 모습을 보여줌으로 써 온 우주의 왕을 섬기는 하늘 시민권자로서 당당하고 굳세게 서라고 격려하고픈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 문제들에 대한 종합적 권면(12-18)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자기를 낮추어 죽기까지 복종하셨던 예수님에게 가장 높고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 앞에 모든 피조물들이 복종하게 하셨고, 예수님을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그 주권에 순종하는 삶을 살 때 신앙은 자라고 공동체는 하나가 됩니다,

12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 이루라 13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14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15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16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17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18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12-18)

바울은 사랑하는 빌립보 교회를 향해 권면합니다. 바울이 있을 때뿐 아니라 지금 바울이 없을 때에도 하나님께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그들의 구원을 이루라고 말합니다. 빌립보 성도들에게 언제 돌아갈지 알 수 없었지만, 확신을 담아 권고합니다.

(1) 대내적 문제에 대한 결론적 권면(12-13)

6-11질에서 말한 예수의 모습을 근거로 구체적 권면을 합니다. 먼저 교회 내적 상황에 대해 자신들의 구원을 이루라고 말합니다. 행위 차원의 명령입니다. 이 구원이 개인의 종말적 구원을 의미한다는 견해도 있지만 문맥상 일차적으로 교회 상황에 대한 것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경쟁의 사고를 버리고, 자기를 비워 섬긴 그리스도처럼 바른 사고와 행위를 통해 온전한 하나님의 공동체를 받들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1-4절에서 말한 다른 사람을 항한 사랑과 배려의 모습도 담겨 있습니다. 그렇기에 온전한 공동체를 만드는 삶은 구원 속에 있는 신사 개인의 온전함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 명령에 세 가지 요소를 추가합니다. 첫째,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표현입니다. 명령이 친밀한 관계 안에서 나오는 것임을 확인시킵니다. 둘째, 어떤 태도로 행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바울이 함께 있는 것과 상관없이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조심해서 순종하라고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그분은 신자 개개인의 삶을 통해 공동체의 온전함을 만들어 가실 소원을 주시고 실제로 그 일을 행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먼저 일하시기에 그분을 의지해 행하라고 합니다. 이런 요소들은 온전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바울과 독자, 그리고 하나님 모두에게 중요한 것임을 전달하여 바울의 명령을 강조합니다.

(2) 대외적 문제에 대한 결론적 권면(14-16)

교회 밖 사람들에 대한 실제적 권면으로 이어집니다. 모든 일을 원망과 논쟁의 다툼 없이 행하라고 합니다. 진정한 왕이신 예수를 증거하는 과정에서 겸손한 섬김을 주문합니다. 두 가지 목적 때문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거절하는 세상에서 그분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흠 없는 삶을 통해 잘 유지하여 복음 증거와 삶으로 하나님을 드러내는 생명의 통로가 되게 하기 위해서다. 둘째는 바울 자신 때문입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수고한 열매인 빌립보 교인들이 끝까지 복음을 위한 삶을 잘 살아가 훗날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바랍니다. 독자를 향한 사랑과 자부심이 담겨 있습니다. 이 두 목적은 바울의 기도인 1:10-11 내용을 반영합니다. 따라서 대외적 문제에 대한 바울의 권면은 그리스도의 겸손한 섬김을 본받아 진리의 기준을 지혜로 적용하는 분별의 삶을 통해 복음을 증거하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3)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마음(17-18)

자신이 무엇을 기뻐하는지를 소개함으로 권면을 마무리합니다. ‘믿음의 제물과 섬김’이란 빌립보 교회가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바울에게 전해준 것(2:25,30)을 제사장적 섬김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설사 그들의 섬김을 받고 자신이 죽는다 해도 독자들로 인해 기뻐나고 합니다. 자신의 죽음이 슬프지 않을 더 중요하고 기쁜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독자들의 믿음의 진보와 복음 안에서 하나 되어 계속 함께 서는 것입니다. 독사들에게 동일한 관점을 갖고 기뻐하라고 요청합니다.


하나 되는 일은 구호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 개인의 비젼으로 하나가 된다고 해도 저절로 그것이 주님의 몸인 교회가 되지 못합니다. 성도 각자가 죽기까지 복종하신 겸손한 예수의 마음을 품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그것이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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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02-01)


 복음에 합당한 삶

빌립보서 1장 27절-2장 4절


이민자들은 늘 정체성의 질문을 받습니다. 미국인인가? 한국인인가? 전쟁 시 어느 편에 설 것인가? 로마 시민임을 자랑스러워하던 이들에게 바울은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제 속한 나라가 바뀌었으니 그 나라에 걸맞은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뜻입니다.

 

화제를 빌립보 교회 상황에 대한 것으로 옮겨 두 가지 문제를 다룹니다. 하나는 외적인 것으로 로마에 충성하는 도시의 분위기가 주는 압력입니다. 다른 하나는 내적인 것으로 복음 증거 과정에서의 갈등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복음 안에서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시킴으로써 대외적으로 더 버티고 대내적으로 서로 화목하라고 권면합니다.

 

빌립보 교회의 외적 문제(27-30)

복음을 위해 사는 이들은 ‘혼자서’가 아니라 ‘함께’ 달려가야 합니다. 복음을 방해하는 대적들이 있기에 성도들의 협력은 더욱 필수적입니다. 무한경쟁의 세상에서 서로 연대하며 이기주의를 부추기는 문화에 저항하는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일, 곧 하늘 시민에 합당한 삶입니다.

27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28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29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30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27-30)

바울은 빌립보 서오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하늘 시민답게 생활하라고 권면합니다. 빌립보 사람들이 로마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로마 시민답게 살아야 하듯 말입니다.

(1) 바울의 명령(27a)

본격적으로 교회 문제에 대한 권면을 시작합니다. 첫 주제는 대외적인 것으로 로마 시민권을 가진 빌립보 도시민들이 황제에 대한 충성심으로 기독교인들을 압박하는 상황입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명령합니다. 도입 부분만 자신의 상황 소개에 이어 계속해서 복음을 전체 주제 삼아 독자와 연결하고 있습니다.

‘생활하라’는 말의 원뜻은 한 도시의 시민으로 합당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 도시가 어디인지 말하지 않지만, 3:20은 성도를 하늘 시민권을 가진 자로 말합니다. 본문도 빌립보 도시가 아니라 하늘의 시민으로서 합당하게 살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 함의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첫째, 1:1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과 빌립보 지역 거주민이라는 신자의 이중 정체성을 인식하라는 말입니다. 이 땅에 살지만 이 땅 백성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둘째, 자신의 정체성에 맞게 어디에 충성할지를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로마 황제 같은 세상 권력자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셋째, 세상 가치관과 문화에 충성하지 말라는 것으로, 황제를 위해 사는 도시 문화와 다르게 살라는 것입니다. 넷째, 다른 삶의 기준은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1:10에서 말한 것처럼 진리의 지식으로 분별하는 삶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다섯째, 그런 삶은 고난을 수반합니다. 고난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왕에게 충성하며 살아가는 신자 삶의 정상적 모습입니다. 바울은 ‘오직’이라는 말로 첫 번째 명령을 시작합니다. 빌립보교회 문제에 대한 유일한 조언이며 신자들이 반드시 기억하고 따라야 할 것임을 강조합니다.

(2) 명령의 목적(27b-28a)

27a절 명령에 대한 목적을 기술합니다. 독자들의 귀한 삶의 소식을 듣고 싶기 때문입니다. 복음 안에서 믿음의 삶이 온전해지는 진보의 소식이 바울에게는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25-26절에서 독자들을 위해 자신의 석방을 기대하는 마음과 동일합니다. 그의 이 마음은 ‘가서 보나 떠나 있으나’라는 것으로 강조됩니다. 외적 환경 속에서 그들의 모습이 정말 이랬으면 좋겠다는 소망의 표현입니다.

바울이 기대하는 모습은 구체적으로 그들이 한 성령 안에서 굳게 서서 복음의 신앙을 위해서 함께 싸우는 상황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공동체가 함께하는 것입니다. 하나 됨과 함께함의 표현이 반복되는데, 인간적 차원에서 개인의 싸움을 넘어 공동체가 함께 맞서는 것임을 말합니다. 그렇기에 4:2-3과 같은 공동체의 분열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둘째, 버티고 견디는 적은 복음의 신앙 때문입니다. 소속과 정체성이 연결된 것으로 하나님/그리스도에 대한 충성과 사람을 사랑하는 구원의 진리 때문에 세상에 맞서는 것입니다.

째, 한 성령 안에서 그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신적인 요소입니다. 단순히 인간적 버팀은 한계가 있습니다. 세상 어둠의 영역에 맞서는 것이기에 신적 도우심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바울은 이 세 요소 통해 세상에 맞서 복음의 진리에 합당하게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3) 세 가지 부연 설명(28b-30)

계속해서 28a절 내용에 대해 세 가지 추가 설명을 이어갑니다. 첫째는 고난당하며 복음을 위해 굳게 서는 것의 의미입니다(28b). 대적하는 자들에 대해 견디는 것은 불신자들이 멸망당할 영역에 속해 있다는 것이고, 반대로 신자에게는 자신들이 구원의 영역에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서로 다른 영역 속에서 다른 결과를 당할 운명임을 보여주는 역할도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리스도께 은혜 받은 것은 예수를 믿는 궁정적인 것뿐 아니라 죄악의 세상에서 신자가 받을 고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중 정체성을 갖고 있는 신자가 하늘 시민으로 충성하면서 경험하는 자연스런 갈등입니다. 바울은 이 점을 분명히 인식시킵니다. 셋째, 바울 자신의 예입니다(30). 자신이 로마 감옥에 갇힌 것 또한 세상에서 하늘 시민으로서 복음에 충성하고 있는 것이기에, 자신을 보고 힘을 내라고 말합니다. 신자들로 하여금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한 깊은 사랑의 권면입니다.

 

빌립보 교회의 내적 문제(2:1-4)

대적은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다툼과 허영이 성도의 연합과 복음의 진보를 방해합니다. 빌립보 교회를 바라보는 바울은 기쁘지만, 그 기쁨은 충만하지 않습니다. 다툼과 분쟁을 넘어 한 마음으로 겸손히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온전한 기쁨이 됩니다.

1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3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2:1-4)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함께 싸워야 할 뿐 아니라, 복음 안에서 하난 되기를 힘쓰라고 권고합니다. 교회 내의 다툼과 분열을 극복하고 하나 됨을 지키기 위해 합당한 그리스도인의 인격과 실천을 촉구합니다.

(1) 바울의 명령: 하나 되어 살라(2:1-2)

시선을 교회 내적 문제로 돌립니다. 교회 안에 있는 갈등 상황입니다. 4:2-3에 나온 복음에 열심인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경쟁으로 인한 문제인 듯합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교회의 상황 개선을 통해 자신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고 명령합니다. 개역개정은 그 명령을 4절에서 언급하지만, 원래는 2절에 있어야 합니다. 명령이 특이합니다. 보통은 문제 해결 자체에 집중할 것 같은데 바울은 자신과의 관계에 집중합니다. 철저히 바울과 독자 사이의 사랑과 신뢰 관계에 기인한 표현입니다. 그만큼 바울이 독자들을 염려하고 있고, 그 상황이 해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반영합니다.

독자들을 향한 명령을 가운데 두고 앞뒤로 그에 대한 근거와 어떤 모습으로 기쁘게 할 것인가가 위치해 있습니다. 명령의 근거는 조건절로 표현됩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위로나 성령의 교제나 안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친밀한 감정이나 사랑의 마음이나 자비가 있다면…’ 모두 독자들이 믿음을 동해 삼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경험했던 것들입니다. 한편, 바울이 기대하는 모습은 독자들이 같은 생각으로 연합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생각하기를 기대합니다. 모두 생각의 영역과 관련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교회 내의 문제가 복음 사역과 관련한 경쟁과 비교의식임을 알았기에, 바울은 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미 경험했거나 혹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은혜를 근거로 하나로 연합하기를 원했습니다. 연합의 시작은 생각의 영역을 바꾸는 것입니다. 일차적으로 같은 생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지향하는 곳을 같이 보는 것입니다. 행동은 그 다음입니다.

(2) 두 가지 부연 설명(2:3-4)

바울이 기대하는 독자들 모습에 대한 부연입니다. 생각이 영역에서 시작된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구체화합니다. 경쟁이나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고 겸손한 생각으로 서로를 자기보다 높게 생각하는 것입니다(3).

또한 자기의 일들에만 집중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의 일들도 주의 깊게 보는 것입니다(4). 행위에 대한 것이 아니라, 모두 보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과 관련 있습니다. 내면의 생각 영역에서 변화를 시작하라는 것이고, 그 모습은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과정에서 경쟁이나 비교의식이 아닌 배려와 겸손함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10에서 말한 기도 내용을 떠올리게 합니다. 진리와 바른 분별의 지혜가 수반된 사랑의 삶으로 복음에 집중해 살아갈 것을 요구합니다. 본문은 생각 영역에 집중하고 사랑과 관련한 행위의 모습은 5-11절에서 그리스도의 예를 말한 후 12절부터 시작됩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선행해야 할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입니다. 정체성이 우리의 말과 행동 방식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 삶의 방식은 우리가 천국 시민임을 증명하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는 세상의 질서를 거슬러 하나님 나라 질서를 보여주는 겸손과 사랑의 공동체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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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01-02)


바울의 최우선 순위

빌립보서 1장 12-26절


사람을 만남에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항상 만나고 싶은 사람이며, 두 번째는 있으나마나 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마지막으로 절대로 만나고 싶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처럼 만나고 싶지 않는 사람은 부정적인 사람이며,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은 항상 만나고 싶어합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사람일수록 은혜가 충만한 긍정적인 사람입니다.

 

본문은 서신의 시작입니다. 첫 주제는 바울의 근황입니다. 수감된 바울을 염려하는 독자들을 안심시키고 오히려 그 상황이 복음이 더 확장되는 기회가 되었다는 긍정의 소식을 전합니다. 이와 함께 석방될지 순교될지 아직은 확실하지 않지만, 석방을 통해 독자들의 기도와 염려를 기쁨으로 바꾸어주실 것을 기대한다고 말합니다. 독자들을 위로하고 상황과 상관없이 복음 안에서의 삶을 계속 살라고 독려하려는 의도입니다.

  

외부 사건들과 바울의 반응(12-18)

하나님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연이란 없습니다. 매인 상황에서 허우적대며 원망했던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바울은 매임을 통하여 주님을 더욱 신뢰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약할 때가 강함인 것을 믿고 매인 상황 속에서도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2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3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4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15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16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17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18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12-18)

바울이 감옥에 투옥된 일은 오히려 복음 전파에 진보를 이루었습니다. 옥에 갇히지 않았으면 시위대 안에 복음이 전파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울의 고난이 형제들의 담대함을 이끌어냈습니다.

(1) 도입(12)

바울은 자신의 경험에 미루어서 빌립보 신자들이 한 가지 중요한 진리를 배우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에서는 실수는 없으신 분입니다. 바울은 투옥됨으로 그의 사역이 움츠러들기는커녕 진보하고 있었습니다. 감옥에 있는 것이 오히려 복음의 진보가 되었습니다. 독자들을 안심시키고 ‘복음’과 관련한 권면을 이어가려는 의도입니다.

(2) 갇힘과 진보(13-14)

12절과 연결해서 왜 자신의 상황이 복음의 진보가 되었는지 설명합니다. 두 가지 사건 때문입니다. 하나는 교회 외적 차원에서 불신자들인 시위대와 그 밖의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진 기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바울이 그리스도 때문에 갇혀 있다는 것을 설명할 기회를 통해서이거나 혹은 실제로 그들에게 직접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모든’이란 말은 과장된 표현으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또 다른 사건은 교회 내적 차원에서 동료 성도들(형제들) 중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사왕에 자극 받아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두 사건 모두 바울이 의도하지 않은 것들입니다. 감옥에 갇힌 것은 안 좋은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그 과정에서 일하고 계심을 소개함으로써 복음 때문에 의부로부터 압박 받고 있는 빌립보 성도들을 격려합니다.

(3) 두 가지 복음 증거 태도(15-17)

14절에서 언급한 바울 때문에 복음 전하는 사람들에 대한 추가 설명입니다. 복음 전하는 사람들에 대한 추가 설명입니다. 그들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그리스도를 전했으나 어떤 사람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15). 착한 뜻으로 전한 사람들은 바울이 복음을 변증했기 때문에 매임을 당했다는 것을 알고서 사랑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16). 그리스도를 투기와 분쟁으로 전하는 자들(15)의 전파 동기는 이기적인 야심이었습니다(17). 바울이 갇혀 있는 동안 고의적으로 바울을 괴롭게 하려고 했습니다. 물리적 고통보다는 경쟁심을 부추겨 바울에게 경쟁에서 뒤처졌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또 다른 부류는 착한 뜻으로 전합니다.

바울이 복음 때문에 갇힌 것을 알고 좋은 자극을 받아 사랑의 마음으로 전합니다. 이 두 부류는 로마 신자들로서 독자들과 직접적 연관성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을 언급한 것은 빌립보 교회의 상황과 관련 있기 때문입니다. 독자들의 교회 안에서도 복음 사역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경쟁과 비교의식으로 인한 갈등이 있었습니다(4:2-3). 바울은 이에 대한 권면(2:1-4)에 앞서 그들의 문제 상황을 이해하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4) 바울의 반응(18a) 

앞에서 말한 두 부류의 복음 전파에 대한 바울의 반응입니다. ‘그게 뭐?’라는 반응으로 시작해서 둘 다 괜찮다고 말합니다. 독특한 반응입니다. 보통은 좋은 뜻으로 전하는 쪽을 지지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굳이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좋은 뜻으로 복음 전하는 쪽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다른 관점을 갖고 있음을 보입니다. 그 두 부류 모두 바울과 관련해 복음을 전하지만, 정작 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되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전해지고 그 복음으로 사람들이 주께 돌아오면 됩니다. 이것이 그에게 진정한 기쁨이다. 바울의 이런 태도는 10절에서 독자들을 위해 기도한 내용, 곧 바른 지식의 기준과 지혜로 더 나은 것을 분별하는 사랑의 삶을 살 것에 대한 적용입니다. 비교의식이나 경쟁 같은 자신의 유익에 휘둘리지 않고,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이라는 더 나은 가치로 상황을 분별해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독자들에게 이 모습을 말한 것은 그들 또한 동일한 원리로 교회 문제를 대하라고 권면하려는 의도입니다. 이런 면에서 바울은 기도할 뿐 아니라 실제로 그 기도 내용대로 살아가려는 그리스도인이며 빌립보 교회의 모델입니다.

 

바울의 내적 반응과 기대(19-26)

사명자의 삶은 자신의 원함과 유익보다 교회를 위한 사명과 유익을 더 앞세운 것입니다. 복음의 진보와 그리스도의 영광은 물론 ‘성도들의 신앙’도 바울이 살아 있는, 또는 살아야할 이유였습니다. 바울은 석방보다 더 간절히 기대와 소망은 오직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19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20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22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25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26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19-26)

살고 죽는 것보다는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웅처럼 죽는 일은 차라리 쉽습니다. 바울에겐 그 편이 더 낫습니다. 그리스도와 성도들을 위하는 길이라면 기꺼이 살아서 고난을 감내하기로 합니다.

(1) 바울의 또 다른 기쁨과 그 이유(19-20)

11-18a절과 다르게 이번에는 갇힌 상황에 대한 바울 자신의 반응과 기대를 서술한다. 앞서 말한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기쁨 외에 또 다른 기쁨이 있다고 말함으로 시작합니다. 살든지 죽든지 오직 자기 삶을 통해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는 구원의 상태에 더 든든히 서 있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이를 위해 세 가지요소를 언급합니다. 첫째는 함께 동역하고 있는 성도들의 기도와 사랑이고,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이고, 셋째는 그런 삶으로 살고자 하는 믿음 안에서의 강한 열망과 열정입니다.

바울은 복음 때문에 갇혀 있는 것이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통로가 된 것으로 인해 기뻐한다고 말하고, 그분을 향한 삶이 지속되기를 소망합니다. 이런 열망은 3장에서 끊임없이 주를 추구하는 모습을 설명할 때 다시 표현됩니다. 이런 바울의 기쁨 역시 1:10에서 언급한 기도 내용의 적용이기도 합니다. 11-18a절이 외적 상황에 대한 반응이었다면, 18b-20절은 자신의 상황 자체에 대한 것입니다. 무엇이 주 안에서 더 중요한지를 분별하여 적용한 것입니다. 독자 역시 동일한 원리로 적용해야 합니다.

(2)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한 바울의 갈등(21-24)

‘이는’이라는 접속사로 앞부분을 부연합니다. 자신의 상황이 석방으로 연결될지 죽음으로 이어질지 아직 확실치 않습니다. 어느 쪽이든 괜찮지만, 바울은 갈등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죽어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죽음으로 고통을 끝내려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으로 육신의 장막을 벗으면 그리스도로 인해 영광의 몸, 곧 부활의 몸으로 변화되고 하나님과 영원한 교제를 누리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3:20-21).

바울이 삶과 죽음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은 현재의 삶과 미래의 완전함과의 가치 비교 때문입니다. 그 핵심은 과거 십자가/부활을 통해 보이신 주님의 사랑과 은혜다(3:7-9). 그것이 확실하기에 미래를 소망할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신자의 삶은 과거 십자가/부활의 은혜를 발판으로 미래를 소망하며, 오늘이 땅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역시 10절에서 말한 진리로 중요한 것을 분별하는 삶의 한 단면이다. 하지만 바울에게는 또 다른 생각이 있습니다. 자신이 죽으면 독자들이 너무 슬퍼하고 힘들어한 것 같아서,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독자들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다. 신앙 안에서 자신에게 최선의 것과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의 모습 사이의 갈등입니다.

(3) 바울의 확신(25-26)

21-24절의 갈등에 대한 바울의 선택과 확신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석방될 것을 기대합니다. 자신의 목숨 보전 차원이 아니라 철저하게 독자들을 위해서입니다.

그의 석방은 믿음으로 바울을 위해 기도하던 이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고, 그 결과 하나님을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바울을 다시 보게 되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것도 10절의 기도 내용처럼 무엇이 중요한지를 분별하는 사랑의 삶의 적용입니다. 자신의 생명이나 소원보다 성도들의 유익이 무엇인가를 분별합니다. 여기서의 기준은 성도 사랑이다. 이전 18a절과 연결하면 바울의 삶의 기준은 (1) 그리스도와 복음과 (2) 성도들이다.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이라는 율법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선교로 세워진 빌립보 교회는 어려운 상황에 놓인 바울을 아낌없이 후원한 교회입니다. 그들은 교회 내부에 자리 잡고 있는 시기와 다툼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교회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성도들의 끊임없는 기도가 필요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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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01-01)


교회를 향한 감사와 기도

빌립보서 1장 1-11절


 성경공부 프로그램인 프리셉트(precept)의 창시자인 Kay Arthur는 “빌립보서는 수많은 신자들의 일상생활 속에 새로운 기쁨과 평화를 가져다 준 영적 진리의 샘이다”고 했습니다. 그에 빌립보서에 대한 표현이 정확합니다. 이 서신을 읽을수록 하늘에 속한 새로운 기쁨과 평화를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도 빌립보서를 통해 진리의 샘 속으로 빠져드시길 바랍니다. 모든 세상의 눈물을 씻고 하늘의 위로와 기쁨 그리고 평화를 보길 바랍니다.

 

로마 감옥에 있던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편지합니다. 그들이 지금까지 복음에 참여한 것에 감사하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들 안에서 착한 일을 이루실 것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빌립보 성도들의 사랑이 지식과 총명으로 더 풍성하게 되어, 선한 것을 분별하며 의의 열매가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서론(1:1-2)

세상에서 마음 맞은 사람들과 일을 함께 하는 것처럼 행복한 일은 없습니다. 바울에게는 영적인 아들인 디모데가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종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바울이 원하는 일이라면 목숨을 걸고 헌신했던 사람입니다. 바울에게 빌립보 교회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 좋은 소식을 듣고서 바울은 기쁜 마음으로 편지를 쓰고 있었습니다.

1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2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1-2)

사도 바울은 당시 편시의 도입 부분은 발신자와 수신자, 문안 인사로 구성됩니다. 동일한 형태를 사용하지만, 바울은 나름의 독특한 몇 가지를 넣어 자신의 의도를 넌지시 소개합니다.

(1) 발신자(1)

바울은 당시 자신의 이름을 두 가지로 사용하는데, 헬라식 이름인 ‘바울’과 히브리식인 ‘사울’이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이방인의 중심의 교회이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이름을 헬라식인 ‘바울’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➀ 예수 그리스도의 종(1)

바울은 자신에 관련하여 ‘사도’라는 말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란 표현을 사용합니다. ‘사도’라는 표현을 안 쓴 것은 사도로서의 권위를 내세우고 싶지 않다는 끗이고, 종을 사용한 것은 예수에 대한 충성과 그분을 섬기는 자임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교회 내적 갈등에 대해 권면하면서 예수의 섬김을 말할 때 다시 사용됩니다(2:7). 교회의 문제에 대해 종으로 섬기신 예수를 따라 살라고 말하려는 것이고 더 나아가 바울 자신을 예수를 따라 섬기는 모본으로 소개하여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하려는 것입니다(3:17).

➁ 동역자 디모데(1)

바울은 디모데를 자신과 같이 동급으로 소개합니다. 발신자에 대한 특별한 소개 없이 이름만 나열한 데살로니가전후서의 경우를 제외하면 바울 서신 중 유일한 표현입니다. 보통은 바울은 사도로, 디모데를 형제로 말합니다. 그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졌으며(빌립보서 2:20), 바울의 감금과 관련되어 있습니다(2:19,23). 디모데는 3인칭으로 언급되기 때문에 이 서신의 공동 저자는 아닙니다(2:19-24). 로마에 잡혀 있던 하나님의 이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의 종들(‘노예’)이었다가 없다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사용한 헬라어 ‘하기오이(ἅγιοι)’는 ‘구별된 자들’을 의미합니다. 빌립보 성도들은 하나님께 구별되었습니다. 비록 빌립보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었습니다.

또한, 바울은 자신과 디모데를 ‘종’으로 표현한 것과 함께 생각하면, 디모데 역시 자신과 똑같이 예수를 충심으로 섬기는 자로 소개하려는 의도입니다. 디모데가 빌립보 교회 개척자 중 한 사람이었기에 교회는 그를 잘 알고 있었지만, 바울은 그를 더욱 추천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도는 2:19-24에서 구체화 됩니다.

(2) 수신자(2)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의 일꾼인 감독과 집사들뿐 아니라, 모든 평신도에게 하나님과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으로 문안하며 편지를 보냅니다.

➀ 빌립보 성도들(2a)

바울은 수신자와 관련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성도의 이중 소속과 정체를 말합니다. 하나는 그리스도 안이라는 영적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빌립보라는 물리적 차원입니다. 이런 이중 정체성은 교회의 내적(2:1-11,12-13), 외적 문제(1:27-30;2:14-18)를 다루는 권면의 기초입니다. 하늘의 시민권을 말하며 복음에 합당하게 살라고 한 3:20과도 연결됩니다.

➁ 감독들과 집사들(2b)

감독들과 집사들을 수신자 속에 포함합니다. 모든 바울 서신 중에 유일한 표현입니다. ‘감독’이나 ‘주교’는 ‘장로들’로 부르기도 했으며(디도서 1:5,7). 그들은 양떼를 돌보거나 목양하는 책임을 졌습니다(참조, 사도행전 20:17,28). ‘집사들’은 회중 안에서 특별히 봉사의 직무를 지닌 교회 지도자들이었습니다(참조, 사도행전 6장). 감독들과 집사들을 따로 말하지만 그들도 모든 성도 안에 포함됩니다. 아마도 4:2-3에 나오는 유오디아와 순두게와 관련한 문제 해결을 위한 포석일 것입니다. 모든 내용은 독자의 상황을 알고 그들과 소통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바울의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➂ 은혜와 평강(2c)

빌립보 성도들에게 보내는 인사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은혜를 묘사하는 두 개의 단어인 ‘은혜와 평강’을 사용했습니다. 이 단어의 사용 순서는 의미가 큽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은 갈보리에서 결정적으로 나타났는데, 어떤 진심에서 우러난 평강이 있기 전에 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격적인 응답이 있어야 합니다. 은혜와 평강은 그 근원이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을 향한 감사(3-8)

하나님께서는 구속을 시작하신 끝까지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하늘의 풍성한 은혜를 채워 가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늘에 속한 온갖 은혜를 교회 안에 충만하게 채워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시고, 날마다 세우신 그 교회를 은혜로 채워 가시는 분이십니다.

3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5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6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7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8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3-8)

빌립보 교회는 연약한 자들을 이해하고 고통 받는 현장을 찾아와 그의 필요한 것을 채웠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행위는 바울에게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교회를 위해 바울은 쉬지 않고 기도하였습니다.

(1) 끓임 없는 증거에 감사(3-6)

바울이 그들과 함께 일하기 시작한 지 10년이 흘렀습니다. 시간은 흘렀어도 그들을 향한 바울의 사랑과 관심은 식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항상 그들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 때문에 하나님께 얼마나 자주 감사하고 있는지 서신을 통해 들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마음속에 큰 기쁨이 왔음이 틀림없습니다. 여기에 1,300km나 떨어진 로마에 있는 사람에게서 온 감사의 편지가 있습니다.

믿는 자들 중 어느 하나도 바울의 기도에서 제외되지 않았습니다. 죄수에게서 온 감사, 이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도 기쁨으로 하나님께 그들을 위해 간구했습니다. 고난은 바울을 고통스럽게 만들지 못했으며 오히려 그에게 유익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하나님의 자녀를 위하여 무엇인가를 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과 바울은 그리스도의 일하는 동역자였습니다. 이는 바울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들이 자기의 소유를 함께 나누었음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원하여 바울에게 주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빌립보 교인 들은 바울을 위하여 그가 진 짐을 대신해서 그리스도께 자신들을 드린 셈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죄수로 있었던 어려운 때에만 소유를 나누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은 첫날부터 그와 교제해 왔습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의 마음에 큰 기쁨을 주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을 생각하며 기도할 때에 큰 확신에 사로잡혔습니다. ‘확신하노라’는 헬라어 단어의 완료 시제는 바울이 일찍이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되었으며 아직도 그것이 사실임을 확신한다는 지적입니다. 그는 무엇을 그렇게 확신하고 자신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 속에서 시작하신 ‘착한 일’을 틀림없이 계속하여 완성하실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그 ‘착한 일’은 바로 그들의 구원입니다. 거기에는 그들이 바울과 교제하고 그에게 후원금을 보내주는 일도 포함될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빌립보 교인들 가운데서 시작하신 일을 계속 하시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들 가운데서 일하실 것입니다. 2:16에서 바울은 이날을 ‘그리스도의 날’이라고 불렀습니다. 바울은 그날이 언제인지 몰랐지만(그때에 모든 믿는 자들이 주를 만나기 위해 공중으로 올려질 것이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 속에서 시작하신 그 일을 계속 하시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2) 복음을 염려함에 대한 감사(7)

이 구절의 첫 부분은 3-6절에 나타난 대로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 대해 생각했던 바에 대한 일종의 해명이자 변호입니다.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라는 구절의 헬라어는 ‘너희가 나로 나의 마음에 있게 했기 때문에’로 변역할 수 있습니다. 확실히 바울과 빌립보 교인들은 서로의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관점에서 보면 NIV성경의 번역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을 향한 그의 사랑은 1:8과 4:16에서도 서술됩니다.

바울이 구금 상태에 있든지 풀려났든지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하여 하시는 일 속에서 그와 함께했습니다. 그 일은 우선적으로 복음 전파와 관련됩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를 전파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그와 함께 교통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복음 전파를 위해 염려하는 모습에 그들에게 감사를 표현했습니다.

(3) 바울의 사랑으로 나타난 감사(8)

바울은 계속해서 하나님이 빌립보 교인을 향한 자기의 감정을 증거하는 증인이시라고 합니다. 바울은 마치 빌립보 교인이 그러기나 한 것처럼, 그들이 자기 마음을 알아주지 못할까 봐 염려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전부 아셨습니다. 빌립보 교인에 대한 바울의 사랑은 단순히 인간적인 관심이나 흥미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랑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바울을 완전히 압도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바울 자신의 것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사실은 그들에 대한 바울의 감사의 실재와 강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빌립보 성도들을 위한 바울의 기도(9-11)|

과실은 한 해 동안 열심히 광합성을 하여 때가 되면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 농부를 기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속 받은 백성에게 의의 열매를 원하십니다. 우리 안에 성령의 열매, 하나님의 형상을 좇는 아름다운 열매가 맺히길 기도합시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광스러운 교회는 끊임없이 자라가는 열매 맺는 교회임을 기억해 합니다.

9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10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1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9-11)

4절과 연결된 기도의 내용으로 독자들의 사랑에 대한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사랑하게 해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복음 안에서 사랑하고 있는 것을 전제로 두 가지를 추가해 그 사랑의 삶을 더 풍성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 두 가지는 지식과 총명입니다. 지식은 하나님의 뜻과 관련한 것이고, 총명은 통찰력이나 판단의 지혜입니다. 모두 분별의 삶을 위해 필요합니다.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바른 기준으로서의 지식과 그에 따라 잘 판단하는 지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바울의 기도는 독자들이 지식과 총명으로 분별하는 사랑의 삶을 살아가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바울은 이런 삶이 왜 필요한지를 첨가합니다(10-11). 그들이 진실하며 허물없는 모습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진실하다는 것은 개인과 교회 공동체 내에서 복음과 관련해 순수하고 바른 동기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고(2:1-4), 허물이 없다는 것은 세상 속에서 복음의 장애가 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2:15).

이 모습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에 합당한 의의 열매가 가득 맺히는 것이고,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돌려지는 삶입니다. 바울은 독자들의 이런 모습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계속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기도 내용은 신자의 삶에 대해 몇 가지 중요한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신자의 삶은 ‘진리’로 ‘분별’하는 ‘사랑’의 삶입니다. 둘째, 신자의 삶은 크고 길게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날을 인식하고, 세상 속에서 오늘이란 시간을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충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셋째, 그리스도와 궁극의 초점인 하나님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삼십여 년 동안 주님을 섬긴 사도가 내일을 보장할 수 없는 감옥에서 성도를 향해 이 기도를 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치 그의 유언 같은 것으로 신자 삶의 핵심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선교로 세워진 빌립보 교회는 어려운 상황에 놓인 바울을 아낌없이 후원한 교회입니다. 그들은 교회 내부에 자리 잡고 있는 시기와 다툼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교회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성도들의 끊임없는 기도가 필요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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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서론


복음 없는 사람은 상황에 따라 울고 웃습니다. 하지만 복음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과 자족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삶의 중심이 나에서 그리스도로 옮겨졌을 때 가능합니다. 감옥에서도 기쁨과 소망을 이야기한 바울의 모습은 성도다운 삶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는 본보기가 됩니다.

  

1. 빌립보서의 저자

빌립보서를 기록한 사람은 사도 바울입니다.

(1) 내증 : 확실히 바울은 디모데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들에게’라고 서두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제1인칭 단수로 전체를 썼다는 사실은 양자 중 바울에게 주된 책임이 놓여 있다는 점에서 분명히 밝혀집니다. 빌립보서의 저자는 디모데가 아니라 바울이었습니다.

(2) 외증 :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의 요새의 공격을 지휘한 사람은 바울이였는데 그는 갈라디아서, 고린도후서, 그리고 로마서를 제외한 나머지 사도의 이름으로 통하는 모든 서신들에 대하여 바울 저작권을 공격 하였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감독들과 집사들에 대한 언급(1:1)은 바울 후기의 교회 정치 무대에 속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6:1-6, 11:30,14:23,20:27,28 그리고 데살로니가전서 5:12,13의 연구는 이런 직분이 빌립보서가 기록되기 오래 전부터 있었음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2. 빌립보서의 기록연대

기록 장소는 분분하지만, 대략 주후 61~63년(로마 감옥에 1차 투옥되었던 말기)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바울이 옥중에서 쓴 편지(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중의 하나입니다.

 

3. 빌립보서의 수신자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들’ (1:1)

 

4. 빌립보 교회 :

 (1) 사도 바울이 유럽 땅에 세운 최초의 교회이었습니다. 주후 52년경, 제2자 전도 여행 중 드로아에서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고, 유럽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해 빌립보로 건너갔습니다(사도행전 16:9). 이곳에서 자주장사인 루디아와 한 간수의 집안이 바울의 복음을 듣고 회개하였는데, 이들의 가정은 유럽교회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바울인 제3차 전도 여행 때 다시 빌립보 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사도행전 20장, 고린도후서 2,7장).

(2) 사도 바울과 빌립보 교회는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 같습니다. 대부분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이 교회는, 작고 가난했지만 무척 관대하고 자선적인 교회였습니다. 이 편지가 기록하기 전에도 이 교회는 바울에게 최소한 두 번 정도의 헌금을 보냈으며(4:16), 그가 로마에 감금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또다시 헌금을 보내 바울을 도왔습니다(4:10,14). 또한 그들의 헌신적인 신앙의 미덕은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헌금한 일에서도 나타납니다(고린도후서 8장).

 

5. 빌립보 (도시)

(1)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필립2세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당시 빌립보는 번영하는 로마의 식민지(유명한 로마 ‘에그라티아 도로’변 비옥한 평원 위에 건설된 동부 마게도냐의 도시로, 주변의 산에서 엄청난 양의 금이 채굴되었다)였습니다. 이곳은 마게도냐 로마 속주의 첫 번째 지역이었습니다(사도행전 16:12). 이곳에는 유대인들이 많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중세기 후반까지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나, 지금은 황무지가 되었습니다. 이곳에서는 고대에서 중세에 걸친 광범휘한 기간의 유적들이 발굴되었습니다.

(2)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전도 중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었으나, 옥터가 흔들리고 쇠고랑이 풀려 감옥에서 풀려나왔습니다(사도행전 16:25~40). 그들은 신자들을 격려한 후, 빌립보를 또 났습니다. 후에 제3차 전도여행 때, 빌립보에 다시 한 번 머문 적이 있었습니다(사도행전 20:6).

 

4. 빌립보서의 기록 배경

(1) 사도 바울은 주후 50년경 제2차 전도여행 때 로마군의 전초기지이며 각종 철학, 종교, 우상이 성행하던 빌립보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바울은 많은 교회들을 돌보았지만 빌립보 교회에 대해서는 특별한 애정을 나타냈습니다.

(2) 빌립보 교회가 사도 바울의 복음 전파를 적극적으로 도왔으며 다른 교회와 바울의 ‘주고받는 일’이 없을 때에도 지속적으로 바울을 도왔기 때문입니다(4:15). 그러나 빌립보 교회에도 내부적인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할례를 주장하는 유대주의자들로 인한 분쟁(3:1~3),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중심으로 일어난 분열(4:2), 바울의 투옥으로 인한 갈등(2:19~24) 등이 그것들입니다.

 

5. 빌립보서의 기록목적

(1) 감옥에 있던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빌립보 교회에 대한 소식을 듣고, 빌립보 교인들에 대한 사랑과 권면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2) 자신이 투옥된 상황은 복음의 퇴보가 아니라, 오히려 복음의 진보임을 밝힘으로써 빌립보 교인들이 일치와 기쁨을 누리도록 권면하기 위함입니다(1:12~26).

(3) 빌립보 교인들이 그에게 보내준 헌금에 대해서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함입니다(4:10,14~18).

(4)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가 왜 에바브로 디도를 되돌려 보내는지 설명하기 위함입니다(2:25~30).

(5) 빌립보 교회에 분열의 위험이 있음을 듣고, 그들이 한 마음으로 연합할 것을 권면하기 위함입니다(1:27; 2:1~11; 4:2).

(6) 빌립보 교회에 만연한 율법주의가 복음의 근본정신에 어긋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함입니다(3:3~11).

(7) 성도의 경험이 외부 상황에 의해 형성되지 않고 성도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생명에 의해 형성되는 것임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8) 빌립보 성도들이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했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처럼 순종하는 것입니다.

 

6. 빌립보서의 구성

1:1-2 첫인사

1:3-11 바울의 감사와 기도

1:12-26 바울 자신의 형편 소개

1:27-2:18 빌립보 교인들의 형편과 권면

1:27-30 굳게 섬

2:1-2 하나됨

2:3-11 겸손

2:12-18 순종과 성결

2:19-30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 형편 소개

3:1-4:1 거짓 선생들에 대한 경고

4:2-9 유오디아와 순두게에 대한 권면

4:10-20 선물들에 대한 감사

4:21-23 끝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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