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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11)


이스라엘의 치욕을 돌아본 선지자

예레미야애가 5장 1-10절


미국 역사에 기적과 같은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 중에 미네소타 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1874년부터 1877년까지 3년간 심한 가뭄과 메뚜기 떼로 농작물은 전멸하고, 더 나가서 미국 경제는 대공황에 빠졌습니다. 1877년 4월 27일 주지사 필스베리는 모든 주민에게 감사기도의 날을 선포하였습니다. 농작물이 전멸하였으나 몸이 살아있고, 앞으로도 기회를 주실 하나님께 먼저 감사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미네소타 주민 전체의 감사기도가 하늘을 덮었습니다. 정말 믿기 어려운 사실은 들판을 덮었던 메뚜기 떼가 며칠 사이에 전부 죽은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여러 가지로 설명을 시도하였지만 결론은 기적이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역사하신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예루살렘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여기저기서 탄식소리가 가득합니다. 그 탄식소리 중에도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의 빛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는 4장에서 예루살렘의 극심한 기근과 굶주림에 대해 말하며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책임이 지도자들에게 있음을 밝혔습니다. 이제 5장에서는 하나님께 자신들의 형편을 보고 기억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기억해달라고 요청하는 선지자(1)

성도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존귀함을 지켜야 합니다. 금과 보석처럼 귀하게 취급받던 유다 백성들은 죄악으로 인해 존귀함을 잃어버리고 질그릇처럼 업신여김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존귀함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여호와여 우리가 당한 것을 기억하시고 우리가 받은 치욕을 살펴보옵소서(1)
예루살렘의 참상을 하나님께서 전달한 선지자는 그 책임이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의 죄악으로부터 시작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고 그들을 죽인 피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종교지도자들을 외면과 멸시당하고 쫓겨 다니는 형벌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멸망을 도왔던 에돔의 멸망을 언급하시면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작은 희망의 빛을 비추고 계십니다. 선지자는 이러한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을 읽습니다. 그리고서는 다시 여호와께 이스라엘을 다시 기억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먼저 ‘우리가 당한 것을 기억하시고’라고 간구합니다. 이제부터 이어질 기도의 목적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 목적은 유다가 겪은 고난과 수욕을 기억하고 감찰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을 ‘기억’해 달라는 것은 여호와께서 현재 자신들이 처한 처지를 자세히 살펴주시고, 그 상황에 개입하셔서 회복시켜 달라는 의미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19에서처럼 또 다시 여호와께 기억해달라고 간구로 시작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어려운 현재의 상황에 개입하고 구원하시는 처음 단계입니다. 하나님께는 ‘백성이 있었고’, ‘약속이 있었고’, ‘하나님과 함께 보냈던 사랑의 시간’에 대한 기도합니다. 과거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혹독한 노예의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보내 구원하기로 하신 사건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출애굽기 2:25). 다음으로 선지자는 ‘치욕을 살펴 봐 달라!’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봐 달라’고 요청하는데, ‘주목하여 보소서’라는 뜻의 단어 ‘하베트(טיבה)’를 첨가하여 봐달라는 것을 반복하면서, 자세히 그 고통을 보시고 들으셔서 하나님께 요청합니다. 즉, 치욕적으로 나라를 이방인에게 빼앗겼으니 살펴서 다시 회복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그 동안 선지자는 혼자서 기도했지만, 4장 마지막 부분과 마찬가지로 ‘우리’라는 표현으로 기도합니다. 이렇게 ‘우리’라는 표현을 통해 이스라엘 공동체가 함께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한 것입니다. 한국 교회들도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함께 ‘우리’라는 공동체 안에서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다시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의지하는 신앙의 기본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함께 간구해야 합니다.
 

극심한 고통 중에 있는 백성들(2-5)

하나님께서는 주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빼앗기도 하십니다. 이스라엘에게 기업을 주셨지만,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등을 돌리자 주셨던 것을 빼앗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목적은 선물만 주신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주시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에 있어 가장 큰 보상은 하나님이십니다. 온갖 좋은 것은 모두 하나님께 있습니다.
2우리의 기업이 외인들에게, 우리의 집들도 이방인들에게 돌아갔나이다 3우리는 아버지 없는 고아들이오며 우리의 어머니는 과부들 같으니 4우리가 은을 주고 물을 마시며 값을 주고 나무들을 가져오며 5우리를 뒤쫓는 자들이 우리의 목을 눌렀사오니 우리가 기진하여 쉴 수 없나이다(2-5)
본문에서 선지자는 철저하게 멸망당한 유다의 회복을 구하기 전에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의 치욕적이고 비참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선지자가 하나님을 향해 이스라엘의 참상을 다시 아뢴 것은 진노를 거두시고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긍휼을 베풀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았지만, 이스라엘 공동체의 한 사람이 되어, 그들의 죄를 자신이 행한 것처럼 회개하며 하나님의 회복을 위해 간절히 기도합니다.
⑴ 기업을 빼앗긴 이스라엘(2)
이스라엘이 당한 치욕 가운데 가장 큰 치욕은 기업을 빼앗긴 것입니다. 선지자는 가장 먼저 하나님께 아뢴 것은 이방인들에게 기업을 빼앗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기업’은 조상 때부터 상속되어 오는 재산이나 소유물로서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주신 ‘가나안 땅’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땅을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기업’이라고 말씀합니다. 일반적으로 땅이 자녀에게 상속될 때, 상속 받은 자녀는 그 땅을 매매할 수 있는 소유권까지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업’은 매매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소유권은 이스라엘 각 개인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기업’은 소유하고 상속할 수 있지만, 소유권을 하나님께 있었기 때문에 매매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언약의 땅, 약속의 땅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의 땅, 삶의 터전인 기업의 땅을 이방인인 바벨론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 기업과 재산을 이방인에게 넘어갔다고 호소합니다. 이 기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파별로 나누어주신 땅입니다. 이 땅은 사고팔아서는 안 되고, 남에게 넘겨주거나 빼앗겨서, 남의 것을 빼앗아도 안 되는 땅입니다. 그런데 그 땅이 이제 이방인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땅뿐만이 아니라 집까지도 남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삶의 터전을 완전히 빼앗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신명기 28장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심판 목록 중 하나입니다. 신명기 28:30에 따르면, ‘…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에 거주하지 못할 것이요 포도원을 심었으나 네가 그 열매를 따지 못할 것이며’라고 경고하였습니다. 모두 이방인들에게 빼앗긴 상황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업을 이방인들에게 빼앗긴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내리신 심판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고 범죄함으로 ‘약속의 땅’, ‘언약의 땅’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신명기 8장에서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름다운 땅을 주시겠지만,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여호와를 잊어버리면 반드시 망하게 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따라서 현재 이스라엘이 기업을 빼앗긴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신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잊었기에 멸망당했지만, 이제 다시 여호와께 자신들을 기억해달라고 호소하면서 자신들의 어려움을 깊게 토로합니다. 완전히 멸망당하는 고통을 겪기 전에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는 것이 지혜입니다.
⑵ 고아와 과부 같은 이스라엘(3)
두 번째로 선지자는 현재 이스라엘의 형편을 부모를 잃은 고아처럼, 남편을 잃은 과부처럼 비유합니다. 이곳에서 언급된 고아와 과부는 이스라엘에서 기업이 없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경제·사회적으로 가장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들에 해당합니다. 이제 상황이 이방인 바벨론에게 땅과 집을 빼앗기고 모든 권리를 박탈당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업 없는 이방인처럼 살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에게 기업을 물려줄 아버지도 없는 고아와 남편 잃은 과부처럼 의지할 때가 없는 처지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이 말은 바벨론에 의해 무참한 살육으로 이스라엘에 고아와 과부가 많이 생겼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은 가장 불쌍한 자들이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기업이자 아버지이자 남편인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들의 어머니는 시온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예레미야애가 1:1에서 ‘시온이 과부같이 되었다’라고 하는 말과 평행을 이룹니다.
⑶ 물과 땔감을 구입해야할 이스라엘(4)
선지자는 고아와 과부 같은 이스라엘은 이제 물과 나무를 돈을 지불하고 구입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나무와 물은 생필품으로 당시 자연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전 같았으면 물과 나무는 공동 우물이나 산이나 들에서 값없이 얻을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이 마을과 산과 모든 곳을 점령하였기 때문에 예루살렘 사람들은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우물에서 물을 길으려 해도 돈을 내야했고, 산이나 들에게 땔감을 취하려 해도 돈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그만큼 자유가 없이 통제되고 억압된 상황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의 땅에서 예루살렘 사람들은 물 한 모금을 구하기 위해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⑷ 억눌리고 평안 없는 이스라엘(5)
선지자는 자유와 번영을 누리던 이스라엘에서 억눌리고 평안이 없는 삶으로 변했음을 묘사합니다. 기본적인 권리와 공의를 보장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목을 짓누르는 듯한 압제자들의 학대에 계속 시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치 추적을 당했다는 것처럼 정복자들은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거칠게 몰아붙였습니다. 이렇게 심한 괴롭힘 때문에 예루살렘 사람들은 피곤하지만 한순간도 쉴 수 없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즉 ‘평화의 도시’에서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백성들이 무거운 멍에를 멘 짐승과 같이 압제자들에게 무력하게 학대와 압제를 당하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자신들이 시온에서 겪는 심각한 상황을 토로하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기억하고 돌아보시길 기원합니다. 이러한 모든 상황은 바벨론이 이스라엘보다 강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역사상 이스라엘이 주변 나라들에 비해서 강한 적이 없었지만, 그래도 이스라엘은 망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이스라엘이 망했습니다. 자신들을 구원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목을 뻣뻣하게 세우고 대적한 그들은 이제 그 강퍅함의 대가로 이방인들에 의해 목이 짓눌리는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도움을 줄 자 없는 이스라엘(6-8)

성도들이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집니다. 그리고 남는 것은 치욕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배고픔의 연속이며 자유와 휴식은 사라집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십자가에서 해결하신 예수님이 계시기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항상 예수님께 가까이 나가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부요케 하시고, 만족케 하시며, 참된 쉼과 자유를 허락해 주십니다. 그 주님을 찬양합니다.
6우리가 애굽 사람과 앗수르 사람과 악수하고 양식을 얻어 배불리고자 하였나이다 7우리의 조상들은 범죄하고 없어졌으며 우리는 그들의 죄악을 담당하였나이다 8종들이 우리를 지배함이여 그들의 손에서 건져낼 자가 없나이다(6-8)
선지자는 다시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고백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보다 주변 강대국을 의지 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죄에 대한 고백과 회개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현재 당하는 고난이 자신의 죄 때문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시험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고난이 멈춥니다. 하나님의 시험이라면 그 시험이 지날 때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잠잠히 견디는 것의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⑴ 이방을 의지한 이스라엘(6)
선지자는 4장에서 지도자들의 잘못을 지적하였는데, 이제는 이스라엘이 국가적으로 범죄한 사실을 지적합니다. 그들이 환란을 당한 것은 자이스라엘의 보호자이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주변 강대국을 의지한 것입니다. 남유다는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이후 내내 앗수르의 속국으로 살면서 그들을 의지했습니다. 앗수르가 멸망한 후에는 앗수르를 멸망시킨 애굽의 속국이 되어 다시 애굽을 의지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애굽이 자신들을 도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침략할 때, 애굽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애굽은 이스라엘에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들, 이사야와 예레미야를 통해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고 계속 경고하였습니다(이사야 19장; 30:2-7; 31:1-3; 예레미야 42:14-19). 하지만 그들은 예언자들을 통한 경고를 듣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양식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서 간구하기 보다는 눈에 보이는 애굽을 의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먹을 것을 주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셨지만(신명기 8:9-10),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이방 나라를 의지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위대한 정체성을 빵 한 조각에 저버렸던 것입니다.
⑵ 변명으로 일관한 이스라엘(7)
선지자는 이스라엘은 조상 때부터 거역하고 이방 나라들을 의지하는 배역의 죄를 지었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범죄한 조상들이 모두 죽어 없어졌습니다. 이제 그들의 죗값을 현재 후손들이 그 죄를 짊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신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있다고 말한 것과 달리 자식들이 조상들의 죗값을 대신한다고 합니다. 자신들이 무죄하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앞에서 보듯이 오로지 조상들의 죗값으로 고통을 겪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후손들이 고통을 겪은 것은 그들 역시 조상들의 죄를 그대로 답습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현재 환란은 조상 때부터 저지른 죄와 자신들의 죄의 산물이라는 뜻입니다. 한편으로는 몇 세대에 걸친 죄의 무게가 매우 무겁다는 뜻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참으로 오랫동안 하나님이 참으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⑶ 종과 같은 비참한 이스라엘(8)
조상으로부터 가중된 죄 때문에 이스라엘은 아주 미약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나라를 잃은 그들은 바벨론의 침공으로 망하게 되었습니다. 수치스럽게 이전에 자신들의 종이었던 바벨론에게 종이었던 자들에게 지배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여기서 ‘종’은 실제적으로는 바벨론의 관리를 나타내지만 여기서는 상황의 역전을 효과적으로 나타냅니다. 어욱 절망스러운 것은 그런 수치스러운 지배에서 벗어날 길이 도무지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다시 일어날 능력을 완전히 살실했습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멸망당한 이유는 자신들의 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떠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기근으로 죽게 된 이스라엘(9-10)

우리는 세상에 화려함과 부요함에 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부요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면 순식간에 안개처럼 사라집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화려한 옷을 입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관계입니다.
9광야에는 칼이 있으므로 죽기를 무릅써야 양식을 얻사오니 10굶주림의 열기로 말미암아 우리의 피부가 아궁이처럼 검으니이다(9-10)
하나님께서 그들의 왕이시며 주인이실 때 그들은 약속의 땅에서 많은 축복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그 땅의 주인이 되려는 욕심을 가지자 하나님을 버리고 주변 나라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자기들이 알지도 못하는 이방인들의 종이 되어 그들의 통치를 받는 신세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다시 자신들의 비참한 상황에 대한 묘사로 돌아옵니다.
⑴ 양식을 얻기 어려운 이스라엘(9)
참기 어려운 고통 가운데 하나는 배가 고픈데 먹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굶주림이 심해지자 광야에 나가 먹을 것을 구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양식’이 아니라 ‘칼’인 거친 유목 민족의 공격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기본적인 양식까지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점점 양식을 구할 수 없어 심각한 영양실조에 걸린 자들도 있습니다. 선지자는 굶어 죽는 것보다 칼에 죽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할 정도로 백성들은 배고픔에 시달렸습니다. 백성들은 너무 굶주린 나머지 자기 자식을 먹기까지 했습니다.
⑵ 영양실조로 위기된 이스라엘(10)
극도의 굶주림은 강렬한 불길처럼 그들의 뼈와 살과 내장을 태웠습니다. 그래서 아름답고 윤택했던 지도자들의 얼굴이 아궁이 숯보다 검은 얼굴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오랫동안 먹지 못해 살가죽이 달라붙어 막대기 같은 몰골이 되었습니다. 피부가 검은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영양실조로 수척한 모습을 표현합니다. 선지자는 다시 어려움을 호소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고대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허기진 모습인 외형적인 몰골을 표현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를 돌아볼 때, 영적인 영양실조에 걸려서 수척해져 가고 있습니다. 영적 양식인 말씀을 어디서 제대로 먹을 수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배워보겠다고 열심을 내었지만, 이단으로 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기독교 방송에서 유명한 설교가들의 설교들이 모두가 제대로 된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유명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설교들을 잘 분별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영혼이 허기지지 않도록 하나님의 일용할 양식으로 항상 채워야 합니다.


예레미야애가 시대의 상황과 현재 한국 교회의 상황이 별반 다르진 않습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간절히 외쳤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와 영적 지도자들을 위해 함께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예레미야처럼 간절함과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겠다고 약속하신 사실을 믿고 간구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를 회복시켜달라고, 지도자들에게 말씀의 영이 충만하고, 성도들이 말씀으로 충만해지도록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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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09)

 


영광을 잃은 예루살렘을 본 선지자

예레미야애가 4장 1-10절


주변에서 일어나는 큰 아픔을 보면서, 오늘 하루하루 평온하게 시작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은혜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은 ‘어제 일을 지웠으면 좋겠다.’고, 반대로 ‘어제로 돌아가고 싶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지금 일어난 일들을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라도 눈앞에 놓인 결과 때문에 몹시 아프고 쓰립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일어나는 일이라면 후회하고 회개하면 되됩니다. 하지만 그것을 핑계나 변명하거나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면 당장에는 아픔이 덜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그런 불행은 언제든지 반복될 수 있습니다.
 
4장에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선지자의 개인적인 탄식으로 예루살렘의 참상을 기록한 탄식(1-10)과 지도층의 책임과 참상에 대한 탄식(11-16)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17-20절은 공동체의 탄식이로 21-22절은 선지자가 에돕과 시온에게 하는 말입니다. 시온의 멸망은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의 죄악들과 헛된 것들을 의지한 무리의 죄악들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심판은 모든 죄인들에게 공의롭게 적용됩니다.
 

성전 돌처럼 흩어진 예루살렘(1-2)

선지자는 시온의 굶주림을 주로 설명합니다. 금처럼 빛나던 시온에서 갓난아기는 젖을 먹지 못하고 아이들은 먹을 것을 찾으며 부유한 자들까지도 가장 비참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비쩍 마른 상태가 되었고 심지어는 자기 자식까지 잡아먹게 되는 끔찍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1슬프다 어찌 그리 금이 빛을 잃고 순금이 변질하였으며 성소의 돌들이 거리 어귀마다 쏟아졌는고 2순금에 비할 만큼 보배로운 시온의 아들들이 어찌 그리 토기장이가 만든 질항아리 같이 여김이 되었는고(1-2)
선지자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한 예루살렘과 성전의 참상을 묘사합니다. 단순한 사고 정도가 아니라 처참한 상태였습니다. 다시 일어설 수 없을 만큼 완전한 파괴였습니다. 건물과 성전만 무너진 것이 아니라 그들이 견고하게 만들어 놓은 신학이 무너졌습니다. 그 신학에 근거하여 누린 평화가 깨졌습니다. 마음에 평강도 살아졌고, 믿음도 누더기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이 가지고 있던 희망도 무너졌습니다. 그들은 희망이 아닌 것을 희망을 품고 의지할 수 없는 것을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거짓 성들이 모두 무너졌습니다. 그것은 당연히 재앙입니다.
⑴ 영광이 변질된 예루살렘 성전(1)
다시 형식을 따라서 선지자는 ‘에카(הכיא)’로 시작합니다. 그가 사용한 첫 번째 비유는 예루살렘의 모습을 ‘금이 빛을 잃고 순금이 변질하였다’라고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은 정금과 같이 찬란한 빛을 발했습니다. 아름다운 돌들과 고귀한 정금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은 그 찬란한 빛을 잃고 말았습니다. 상황을 강조하기 위해서 ‘순금이 변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절 하반절은 ‘성소의 돌들이 거리 어귀마다 쏟아졌는고’라고 고백합니다. 솔로몬 왕은 예루살렘 성전을 지을 때 성소와 지성소의 벽과 바닥은 금으로 입혀졌고 그곳에서 쓰였던 모든 기물들은 모두 금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을 점령한 바벨론이 성전의 모든 금과 기명을 가져갔습니다(예레미야 52:19). 그러므로 선지자는 금처럼 빛나던 성전을 비롯한 예루살렘의 모든 것이 퇴색되고 파괴되었다며 현재의 상황을 한탄합니다. 현재 예루살렘의 상황은 황금처럼 빛나던 옛날의 영화가 사라지고 무너진 돌만 나뒹구는 폐허가 된 예루살렘이었습니다. 황금과 돌이 다르듯이 하나님께서 계신 이스라엘과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이스라엘은 너무 달랐습니다. 이것은 영광의 차이였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세상적인 것으로 대신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대신한 성도와 교회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⑵ 질그릇 같이 천한 예루살렘(2)
선지자는 빛을 잃은 예루살렘과 성전을 이야기 한 후 시온의 아들들에 대해 비유로 시작합니다. 먼저 그 아이들이 금보다 보배롭다고 소개합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토기장이가 만든 질항아리’처럼 여겨지게 되었다며 한탄합니다. 여기서 토기는 금과 대조를 이룹니다. 즉, 토기는 금그릇처럼 귀하게 다루지 않고 천하게 취급합니다. 일상생활에서 토기는 막 다루어지고 쉽게 깨지는 그릇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보물 같은 백성들이 함부로 가치없게 다루어지는 것에 대해 매우 비통해합니다. 이곳에서 사용한 ‘어찌하여(에카הכיא)’라는 단어를 다시 사용하여 선지자는 자신의 비통한 심정을 더욱 강조합니다. 이렇게 된 것은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이 함락 직전까지 바벨론에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밟히지 않을 것이라는 소망을 심어주면서 예루살렘 성문을 굳게 걸어놓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백성들의 고통과 고난은 가중될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깨어있는 사람, 즉 예레미야 같은 사람들을 통해서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징계가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지금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비참한 지경에 놓이는 것을 원하시진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예루살렘이 비록 바벨론에 점령당하겠지만, 최악의 상황에 놓여 백성들이 목숨을 잃지 않도록 성문을 열고 항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패전을 예언하고 항복을 권유했던 예레미야를 매국노로 몰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벽이 무너지는 순간까지 하나님이 아닌 애굽을 의지했고, 애굽의 원군들이 자신들을 도울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이렇게 비참하게 멸망한 예루살렘의 모습이었습니다.
 

굶주림에 허덕이는 예루살렘(3-4)

생명 얻는 신앙을 전수하지 못한다면 세상의 것으로 채우려합니다. 그 무엇을 자녀에게 무엇을 안겨준들, 그것은 직무 유기일 뿐입니다. 자녀를 통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려는 것일 뿐 진정한 부모의 사랑을 아닙니다.
3들개들도 젖을 주어 그들의 새끼를 먹이나 딸 내 백성은 잔인하여 마치 광야의 타조 같도다 4젖먹이가 목말라서 혀가 입천장에 붙음이여 어린 아이들이 떡을 구하나 떼어 줄 사람이 없도다(3-4)
선지자는 예루살렘에 비참한 모습을 두 가지 비유를 통해 설명합니다. 기성세대의 무책임하고 악한 행위가 다음 세대를 위기로 몰아넣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조와 어른들이 저지른 죄 때문에 무고한 아이들의 미래와 삶이 불타버렸습니다.
⑴ 먹을 것이 없는 아이들(3)
선지자는 아주 소중한 아들을 들개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들개들도 젖을 주어 그들의 새끼를 먹이나’라고 소개합니다. ‘들개’로 번역된 ‘탄님(םגית)’은 짝을 이루거나 떼를 지어 다니면서 시체를 뜯어먹는 들짐승으로 개나 자칼의 일종으로 여겨집니다. 구약에서 ‘탄님’은 보통 하나님의 심판으로 황폐해진 성읍들에 사는 동물(이사야서 13:22; 34:13: 예레미야 9:11)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보기에 부정하고 야비한 동물들일지라도 가슴에 끌어다가 자신의 새끼에게는 젖을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들개만도 못하게 자기 아이들에게 먹을 것조차도 줄 수 없었습니다. 선지자는 ‘딸 나의 백성은 광야에 있는 잔인한 타조 같도다’라고 합니다. 타조는 모래에 알을 낳고 둥지에 내버려둔 채 사냥하러 나가기 때문에, 구약에서 타조는 새끼를 잘 돌보지 않는 짐승으로 간주 되었습니다(참조, 욥기 39:16). 딸 시온이 자신들이 경멸하던 들개보다 못한 상황이라고 말하면서 선지자는 시온의 상황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⑵ 목말라서 죽어가는 젖먹이(4)
선지자는 ‘젖먹이가 목말라서 혀가 입천장에 붙었다’고 소개합니다. 최우선으로 보살핌을 받아야할 젖먹이까지도 먹지 못해서 목말라하는 모습입니다. 어머니가 물도 젖도 주지 못하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어미의 젖을 주지 못하는 것은 어머니가 물이나 음식을 먹지 못해 젖이 안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이 극도에 기근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4절 하반절은 ‘어린 아이들이 떡을 구하나 떼어 줄 사람이 없도다’라고 어린아이들이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다니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아이들이 양식을 구하지만 나누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아이들은 젖먹이보다 큰 아이들로 스스로 먹을 것을 달라고 요구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부모나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못합니다. 4절은 갓난아기와 아이들에게도 젖 한 모금, 떡 한 조각 줄 수 없는 전적으로 무능한 어머니로서의 예루살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한국교회는 매우 중요한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그 동안 화려한 모습으로 흥청거리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계셨는지 다시금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리를 교회들이 행하고 있는지도 스스로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경만 인용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back to the Bible’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많은 죄를 지은 예루살렘(5-6)

풍요로움은 하나님의 축복이지만, 그 축복을 바르게 누리지 못하면 재앙이 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주신 풍요를 축복으로 누리지 못하고 재앙으로 누렸습니다. 이제 한국 교회도 스스로를 살펴보아야할 시기입니다. 세상을 정죄하기 전에, 먼저 교회 안에 있는 악한 모습부터 제거해 나가야 합니다.
5맛있는 음식을 먹던 자들이 외롭게 거리 거리에 있으며 이전에는 붉은 옷을 입고 자라난 자들이 이제는 거름더미를 안았도다 6전에 소돔이 사람의 손을 대지 아니하였는데도 순식간에 무너지더니 이제는 딸 내 백성의 죄가 소돔의 죄악보다 무겁도다(5-6)
예루살렘은 곳곳에서 생명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의 말씀을 듣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활기차고 사람들로 가득했고, 어느 곳을 가나 식사를 대접 받을 수 있는 풍요로운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생명의 떡도, 육신의 떡도 심지어는 사람들까지도 찾아볼 수 없는 곳이 되었습니다.
⑴ 허기져서 고통을 당한 어른들(5)
선지자는 이제 어린이를 넘어서 어른들까지 당하는 고통을 이야기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던 자들이 외롭게 거리거리에 있으며’(5a)를 직역하면, ‘진수성찬을 먹던 사람들이 거리에 거지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과 어울려 흥겹게 잔치를 즐기던 사람들이 이제 먹을 것도 없이 쓸쓸하게 길거리에 앉아서 구걸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전에는 붉은 옷을 입고 자라난 자들이 이제는 거름더미를 안았도다’(5b)에서 ‘붉은 옷을 입은 사람들’은 ‘자색옷’을 입은 사람으로, ‘자색’은 왕과 귀족들이 사용하는 색입니다. 그러므로 자색옷을 입은 사람들은 귀족과 왕족들처럼 호화로운 생활을 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이제는 거름더미에 앉았습니다. 즉 쓰레기 더미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선지자는 이렇게 먹고 입는 것을 통해 예루살렘의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선자지가 말하는 역전된 모습은 사무엘상 2장의 한나의 노래를 연상시킵니다. 즉, 예루살렘의 상황이 역전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 때문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⑵ 소돔보다 더 악한 죄악들(6)
선지자는 딸 내 백성, 즉 이스라엘의 죄가 소돔보다 크다는 놀라운 말을 합니다. 불타 없어진 소돔은 가장 악한 사람들의 대명사입니다. 그들보다 악했다면 심판의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결과였습니다. 소돔이 사람의 손을 대지 않았는데도 순식간에 무너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19장을 기초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은 소돔을 가장 악한 도시의 상징으로 이야기해 왔습니다. 그런데 ‘딸 내 백성의 죄가 소돔의 죄악보다 무겁도다’고 말합니다. 이런 선지자의 이야기는 에스겔 5:6 및 16:46-47과 유사합니다. 소돔보다 시온의 죄가 무겁다고 보는 이유는 소돔은 순식간에 무너져 고통의 시간이 짧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천천히 하나님의 심판을 모두 받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신들의 죄를 소돔과 연결시키는 것은 선지자의 괴로움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다음 단락에서 선지자는 다시 시온의 참상을 고백합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일순간에 파괴되어 적들은 무너진 성벽 사이로 물밀 듯 들어와 살육과 노략질을 일삼았습니다. 유다의 결사항전의 각오는 성벽이나 성전 그리고 백성까지도 지킬 수 없는 허망한 외침이 되었습니다.
 

말라 비틀어진 예루살렘(7-8)

항상 성도들은 교회 안에 있지만 하나님 밖에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소돔의 죄보다 예루살렘의 죄가 더 크다는 고백처럼, 우리 교회 안에 더 큰 죄가 있지는 않은지, 교회 안에 하나님이 없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도와 교회 위에 하나님의 임재임을 기다려야 합니다.
7전에는 존귀한 자들의 몸이 눈보다 깨끗하고 젖보다 희며 산호들 보다 붉어 그들의 윤택함이 갈아서 빛낸 청옥 같더니 8이제는 그들의 얼굴이 숯보다 검고 그들의 가죽이 뼈들에 붙어 막대기 같이 말랐으니 어느 거리에서든지 알아볼 사람이 없도다(7-8)
다시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면서 현재의 비참한 상황을 묘사합니다. 기근으로 젖먹이, 아이들의 비참한 모습을 이야기하던 선지자는 이제 귀족들과 지도자들의 비참한 모습에 대해사도 노래합니다.
⑴ 존귀한 자들의 아름다웠던 모습(7)
선지자는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존귀한 사람들을 언급합니다. 이들은 ‘전에는 존귀한 자들의 몸이 눈보다 깨끗하고 젖보다 희며 산호들 보다 붉어 그들의 윤택함이 갈아서 빛낸 청옥 같더니’라고 표현합니다. 예루살렘의 이전 모습은 그 부유함과 영광이 드러날 만큼 윤택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자신이 아는 순결하고 아름답고 귀한 모든 것을 들어 선택받은 자인 나실인, 즉 이스라엘 백성의 아름다움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강조는 8절 이하의 시온의 비참함을 더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⑵ 비참해진 존귀한 자들(8)
바벨론 침공을 받아 오랫동안 포위되고 마침내 함락된 예루살렘의 모습은 뼈가 들어날 만큼 마르고 볼품이 없었습니다. 선지자는 눈처럼 희던 예루살렘이 이제 칠흑 같은 어둠이 되었다고 소개합니다. 여기서 흑백의 대비를 통해 과거와 현재 상황의 역전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그리고 재앙으로 얼굴과 몸 상태는 마른 나무같이 말랐습니다. 귀하던 모습이 사라지고 기근으로 인해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수척해졌습니다.
 

인간성마저 상실한 예루살렘(9-10)

돈이 주는 교양이나 권력이 주는 품격은 오래갈 수 없습니다. 그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됨됨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신앙 인격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세상적인 가식적으로 꾸며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예루살렘의 비참함은 인간성마저 무너지게 만들었습니다.
9칼에 죽은 자들이 주려 죽은 자들보다 나음은 토지 소산이 끊어지므로 그들은 찔림 받은 자들처럼 점점 쇠약하여 감이로다 10딸 내 백성이 멸망할 때에 자비로운 부녀들이 자기들의 손으로 자기들의 자녀들을 삶아 먹었도다(9-10)
기근을 견디지 못해 자녀를 먹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죄된 본성을 지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악행에는 한계가 없음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깊은 죄악성과 약함을 드러내는 이런 비국적인 사건들을 통해 우리는 왜 사람이 하나님께 복종해야 하는가에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⑴ 죽기보다 힘든 기근 재앙(9)
선지자는 예루살렘에 닥친 기근이 얼마나 심각했던지 전쟁에서 칼에 찔려 죽은 자가 낫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칼에 죽은 자가 더 낫다고 말하겠습니까! 칼에 찔려 죽는 자들은 고통도 짧고 ᄈᆞᆯ리 죽지만, 기근으로 즉는 자들은 극심한 고통과 공포 중에서 점점 쇠약해지면서 천천히 죽어가기 때문에 훨씬 불행하다고 본 것입니다. ‘토지의 소산이 끊겼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약속하신 신명기 28:47-51의 저주의 경고가 온전히 성취된 상황입니다.
⑵ 기근으로 인한 재앙들(10)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에 평소에 자비로운 여자들일지라고 자신들의 아기를 삶아 먹는다고 탄식합니다(신명기 28:53-57). 기근을 견디다 못한 사람들이 자기 자녀를 잡아먹는 끔찍한 이리들이 일어났는데, 이는 고통 가운데서 인간성을 상실한 것입니다. 주목할 것은 자녀를 삶아 먹었던 부녀들이 비정상적인 여인들이 아니라 ‘자비로운 부녀’들이었습니다. ‘자비로운’이란 단어는 ‘동정심이 많은’, ‘인정 많은’이란 뜻으로 모성애의 일면을 설명한 말입니다. 그런데 그 부녀들이 살아남기 위해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사랑인 자식에 대한 사랑마저 버린 무서운 상황을 보여줍니다. 극한의 고통과 공포에 빠진 이스라엘은 기본적인 인간성마저 지킬 수 없는 야만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심으로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원인을 분명히 교만입니다. 선지자의 말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운 분이지만, 동시에 두려운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만을 기억하며 자만하지 않도록 경고한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잃은 후에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부재(不在)를 인식하는 어리석음은 없어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지 못하면, 내일 삶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인생의 여정은 하나님의 부재로 살 수 있는 날들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평안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삶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과거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를 것이 하나 없습니다.
 


 
예루살렘에 비참함은 하나님 앞에 교만한 이스라엘의 결과입니다. 그 교만함은 예루살렘 성벽의 벽돌 한 장도 지켜낼 수 없을 만큼 초라했습니다. 심판을 가볍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별 어려움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고난이 찾아올 때, 진짜 신앙이 들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안할 때 감사하고, 어려움이 닥쳤을 쉬운 대답을 찾으려 하지 말고 깊이 아픔을 느껴야 합니다. 예루살렘에 임한 잔인한 심판을 거울삼아 정결한 삶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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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08)


과거를 기억하고 간구한 선지자

예레미야애가 3장 55-66절


기도는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이며 인격적인 교제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 아름다운 영적 교통이 있고, 이 속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인격적인 교통을 합니다. 기도를 통해 인격적인 교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느냐에 따라 영적 교통이 막히기도 하고 열리기도 합니다. 고통 가운데 마음이 너무 답답하면 어찌 기도해야 할지도 막막합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한 성도들에게 예레미야애가는 주님과 교통할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어려울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심기우면 생명이 뿌리내리고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공동체에게 여호와께로 돌아가자고 권면한 선지자가 도리어 자신은 곧 죽을 것 같다며 통곡합니다. 선지자가 자신의 영적인 상황이 죽음의 구덩이 속에 있는 것 같다고 밝힙니다. 이곳에서 과거에 응답하신 하나님께 기도하니 응답해 달라며 여호와께 자신의 사정을 말합니다. 대적에 대한 심판을 통해 구원을 얻게 해달라는 선지자의 기도에는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는 근거가 나타나 있습니다.

 

과거에 응답하셨던 여호와(55-58)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자신이 어려운 지경에서도 기도를 들어주신 것을 회상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모습은 그때와 같이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으니 자신을 구원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또한 원수들의 행위를 듣고 보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위대로 보응해주시길 선지자는 기도합니다.

55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 56주께서 이미 나의 음성을 들으셨사오니 이제 나의 탄식과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가리지 마옵소서 57내가 주께 아뢴 날에 주께서 내게 가까이 하여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58주여 주께서 내 심령의 원통함을 풀어 주셨고 내 생명을 속량하셨나이다(55-58) 

선지자 예레미야는 여호와께 과거 응답해주셨던 상황을 회상하면서 다시 한 번 응답해주실 간구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약속을 잘 지키신 신실한 분이며, 예전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시고 돌보아주셨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구원의 경험에 근거해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⑴ 구원 받은 일을 회상한 선지자(55)

선지자는 현재 상태가 구덩이에 빠져 죽기 일보 직전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왕궁 시위대 뜰 안에 있었던 왕자 말기야의 구덩이 사건을 떠올립니다(예레미야 38:7-13). 민족의 반역자로 누명을 쓰고 던져졌던 절망적인 상황을, 이제는 조국 유다의 절망적인 현실에 비유하여 탄식하고 있습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구원을 호소하기 전에 예레미야는 먼저 자신의 이 같은 경험을 아뢰며, 다시 한 번 부르짖음에 귀 기울여 주실 것을 호소합니다. 가장 원통하고 비통한 순간, 죽음 외에는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는 환경에서도 예레미야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소망의 끈을 끝까지 잡고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끝까지 여호와께서 자신의 원통함을 알고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깊은 구덩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이스라엘의 구원을 간절히 간구합니다. 이제 그는 과거로 돌아가 자신이 가장 깊은 구덩이에 빠져 있었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서 구원 받은 적을 회상합니다. 지금은 예전 같지 않았지만, 과거에도 신실하게 도와주셨던 하나님께서, 이제도 도와주실 것을 확신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셨던 일들을 회상한 것입니다.

⑵ 기도를 들어주셨던 하나님(56)

선지자는 자신의 기도에 대한 여호와의 음성을 들였다고 합니다. 과거에 자신이 여호와를 불렀을 때, 여호와께서 가까이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이처럼 선지자가 믿음의 기도로 담대하게 드릴 수 있는 것은,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직접 자신의 삶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통해 역사하셨던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간절하게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음성을 들었던 것을 기억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현재 자신의 외침과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에 귀를 닫지 말아달라고 요청합니다. 이것은 과거에도 자신의 음성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현재 도움의 외침도 들어주시리라는 확신에서 비롯된 요청입니다. 그는 41절에서 하나님을 구름에 가려진 분으로 묘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현재 자신의 상황을 기도가 원활하게 상달되지 않는 상태로 보고 있습니다. ‘구름에 가려졌다’는 것과 ‘귀가 가려졌다’는 것은 모두 기도를 듣지 않는다는 것을 표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귀를 여시고 기도를 들으시며 응답해주시길 요청합니다.

⑶ 불렀을 때 가까이 오셨던 하나님(57)

선지자는 자신이 여호와를 불렀을 때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가까이 오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셨다는 사실을 재차 강조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때 선지자가 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두려워하지 말라’였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표현은 예레미야애가 전체에서 유일하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입니다. 이 말은 여호와께서 본격적으로 돕기에 앞서 곤경에 처한 사람을 안심시키기 위해 들려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에게 선지자의 소명을 재확인시킬 때도 이 말씀이 들려졌습니다(예레미야 1:8). 하나님께서는 두려워하는 자, 상처 입은 자를 위로하시는 분입니다. 선지자도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있었고 그런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려고 합니다.

⑷ 변호자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58)

선지자는 법정 다툼 하는 상황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자신의 변호사가 되셔서 자신을 위해 싸워주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자신의 생명의 구속자라고 말합니다. ‘속량하다’로 번역된 동사는 사람이나 물건을 대신 사주는 것을 뜻합니다. 보통 ‘구속하다’로 번역합니다. 예수가 자신의 피로 우리의 생명을 사셨기 때문에 그는 우리의 구속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변호사로 사건을 맡아 자신을 구원해주신 구속자라고 고백합니다. 즉 선지자는 현재 자신이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의 구속하심 때문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현재의 상황을 기도하기에 앞서서 과거에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구원하신 것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현재적 구원을 기대합니다. 지금은 비록 상황이 매우 힘들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예전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불안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과거에 신실하셨고 자신을 지켜주셨습니다. 이제 그 하나님께서 다시 자신을 도와주었던 것처럼 이스라엘을 도와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처한 상황에서 항상 이렇게 과거 역사하셨던 하나님을 기억하는 가운데 기도하면, 더욱 힘을 얻고 능력을 얻게 됩니다.

 

원통함을 보신 여호와(59-63)

부모들은 자녀를 키우면서 다양한 일들을 만납니다. 그 중에 가장 힘든 것은 자신의 자녀가 사람들에게 비방과 조롱을 당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어떤 부모든지 속상해서 자녀 편을 들어줄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비방과 조롱을 들고 있을 때, 당연히 하나님께서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59여호와여 나의 억울함을 보셨사오니 나를 위하여 원통함을 풀어 주옵소서 60그들이 내게 보복하며 나를 모해함을 주께서 다 보셨나이다 61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비방하며 나를 모해하는 모든 것 62곧 일어나 나를 치는 자들의 입술에서 나오는 것들과 종일 나를 모해하는 것들을 들으셨나이다 63그들이 앉으나 서나 나를 조롱하여 노래하는 것을 주목하여 보옵소서(59-63)

공의로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심각한 환란이 도래해서도 절망의 낙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현재 이스라엘이 당한 고난이 하나님의 심판이란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것은 공의로운 하나님의 징계였기 때문에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⑴ 본격적으로 요청한 선지자(59)

본격적으로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동안 자신이 당한 고난이나 모함을 보셨다고 하면서, 여호와께 이것을 심판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는 회개할 줄 모르는 패역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억울한 오해와 핍박을 많이 겪었습니다. 이렇게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도움을 베푸셨습니다. 여호와를 세상에 정의로운 재판장과 같이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수들에게 정의를 실현해 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⑵ 요청한 이유를 설명한 선지자(60)

선지자가 왜 하나님께 이런 요청을 하는지 그 이유가 나옵니다. 여호와는 모든 것을 살피신다는 사싱을 신횔 수 있었습니다. 원수들의 행동들과 악한 생각들을 모두 보고 계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제 일어나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을 위하여 도움의 손길을 베풀어 달라고 호소한 것입니다. 세상의 악한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약해서 패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믿는 하나님께서 없고, 자신들이 왕이며 재판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생각대로 남을 판단하고 재판하고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또한 악을 몰래 저지르는 사람은 아무도 자신의 악한 생각을 알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스라엘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회개할 필요도, 하나님께 돌아올 필요도 그리고 기도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다만 강대국 왕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선지자는 모든 재앙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며 모든 것을 보고 계신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겪는 불의한 상황과 억울한 고난 속에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의 개입을 요청하며 기다립니다.

⑶ 듣고 계신 걸 확신한 선지자(61-62)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모든 것을 들으셨다고 호소합니다. 여호와께서 들으신 것은 선지자를 향한 원수들의 비방과 모든 나쁜 생각과 대항자의 입술과 반복되는 노래입니다. 여기서 대항자의 입술은 선지자를 공격하는 자의 말이란 의미입니다. 즉, 말로 선지자를 공격하고 욕하고 모함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울려 퍼지는 노래’는 본래 ‘힉가욘’으로, 이것은 음악 용어로 ‘널리 퍼지는 음악’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비방의 말을 계속해서 널리 퍼뜨린다는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원수들은 선지자에 대한 비방을 하루 종일 끊임없이 했습니다. 이 모든 말을 여호와께서 들으셨다고 확신합니다. 그들의 입술의 열매대로 심판하실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⑷ 원수들을 확실히 지켜봐달라고 요청(63)

선지자는 다시 원수들의 앉고 서는 것을 자세히 봐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계속적으로 자신은 그들의 따돌림을 당한 노래한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선지자는 원수들의 말에 대해 두 절을 더 할애합니다. 몸이 당하는 고난도 힘들지만, 원수들의 말에 의한 공격이 선지자에게는 더 힘들고 참기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자신이 돌림 노래’라는 말 속에 선지자의 참담한 심정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오늘날 따돌림과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다 보고 알고 계셨습니다. 오늘날 인격 모독적인 말과 욕설로 인해 인정은 메마르고 사회는 날로 각박해집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인터넷상에 댓글로도 부정적인 인격을 모독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말을 하나님께서 듣고 계신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마음 죄로 여기시기 때문에 항상 말조심을 해야 합니다.

 

대적에게 보응하신 여호와(64-66)

성도들은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절망을 말하지 않습니다.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없을 수 없겠지만, 그 일들이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을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호소하고 여호와께 고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의 기도를 헛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십니다.

64여호와여 주께서 그들의 손이 행한 대로 그들에게 보응하사 65그들에게 거만한 마음을 주시고 그들에게 저주를 내리소서 66주께서 진노로 그들을 뒤쫓으사 여호와의 하늘 아래에서 멸하소서(64-66)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과 원수들이 자신에게 행한 일을 모두 듣고 계셨습니다. 이것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응해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⑴ 적들이 행한 대로 심판을 요청(64)

선지자는 그들의 손이 행한 대로 보응해달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을 심판하는데 도구였던 대적 바벨론은 자신들의 본분을 넘어섰습니다. 즉 유다에 대해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 이상의 가혹한 행위를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선지자는 자신들이 행한 대로 갚아주길 원하는 마음으로 신명기의 기록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동해보복법 사상이 나타납니다. 동해보복법의 원칙은 과도한 보복이나 형벌을 막기 위한 처벌의 원칙입니다. 선지자는 간구한 대적들에 대한 보응은 매우 구체적이었습니다. 그들이 말로 범죄하면 그에 상응하는 벌을 행동으로 범죄하였으면 또한 그에 상응하는 벌을 내려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적 보복과는 다른 것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이루어지길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입증해 달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믿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⑵ 회개하지 못할 마음을 달라고 요청(65)

선지자는 그들에게 강퍅하게 하며 저주를 내려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만한 마음’을 가지므로 회개할 기회를 갖지 못하게 해달라는 것과 ‘둔한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함으로 파멸을 구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들에게 그 자체가 이미 저주이고 심판인 것입니다. 죄에서 회개하지 못하면 결국 심판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⑶ 끝까지 추격해 진멸할 걸 요청(66)

선지자는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진노로 그들을 끝까지 추격하여 진멸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이것은 유다와 예루살렘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서 진노로 그들을 쫓아가서 심판하셨습니다(43). 이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쫓으신 상황과 반대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유다를 쫓고 죽이신 것처럼, 유다의 원수들도 그렇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를 기반으로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면 결국 대적들은 철저히 명절당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하는 고난이 있다면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어려움이 하나님께서 얼마나 혹독한 사랑을 베푸셨는지 모를 수 있습니다. 당하시는 순간은 아프고 쓰리고 원망스럽기까지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모두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뜻을 알 수 있도록 지혜를 구하시면서 놀라운 일을 발견할 것입니다. 끝까지 하나님만을 의지하시면 반드시 응답 받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과 황폐한 상태는 그 광경을 본 사람이라면 맨붕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선지자 예레미야는 그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슬픔과 고통이 가득한 예레미야애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해주신 기도의 언어들입니다. 마음을 담아 간절히 하나님께 간구할 때, 주께서는 귀를 기울이시고 응답하실 것입니다. 모든 원수와 대적들을 물리쳐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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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07)

 


회개하고 돌아가자는 선지자

예레미야애가 3장 40-54절


영화 ‘슈퍼맨’에서 종종 사람들이 위급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도와 달라고 외칩니다. 그러면 어디선가 슈퍼맨이 그 소리를 듣고 달려와서 위험한 위기에 처한 사람을 도와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면에서 같지는 않습니다만, 힘든 성도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소리를 들으십니다. 도움을 요청하는 자녀들을 위험에서 구해 주십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심판을 받아 아주 비참하게 된 이스라엘을 향해서 하나님께 돌아가자고 외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심판이 얼마나 무섭고 철저한지를 토로하던 선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구원할 분은 오직 여호와 밖에 없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여호와의 긍휼과 자비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사람들에게 현재의 고난을 잠잠히 받아들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일들을 멈추어야 된다고 종용합니다. 이제 사람들에게 함께 하나님께서 돌아가자고 권면합니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는 제안(40-41)

선지자는 자기의 동료들에게 같이 여호와께로 돌아가서 간절히 기도하자고 요청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께 돌아가기 위한 선결 조건으로 공동체의 죄를 고백할 것을 말합니다. 심판의 혹독함을 호소하며 눈물로 여호와의 도우심을 바랍니다.

40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41우리의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40-41) 

앞에서 강론한 말씀처럼 선지자 예레미야는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유다의 배교와 배도, 반역과 불순종이 극에 달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예루살렘에 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했고,예언한 대로 예루살렘에 임한 하나님의 진노를 목격하고 있는 중에서도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향한 소망의 끈을 절대로 놓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은 영원한 효력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돌아갈 길이 반드시 열리게 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⑴ 자기중심을 살피자는 선지자(40)

이제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 앞에서 왜 죄인인지를 살피자고 권유합니다. 먼저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자신들의 행동을 돌아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행위를 살핀다’는 것은 지금까지 왜 이스라엘이 이런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외부에서가 아닌 내부에서부터 찾아보려하는 반성하는 의미입니다. 그것도 대충이 아니라 철저하게 검증해보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죄에 대한 인식과 반성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첫걸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후 선지자는 ‘여호와께 돌아가자’고 권유합니다. 여기서 ‘돌아간다’는 것은 ‘회개(悔改)’를 의미합니다. 지금까지의 길을 버리고 다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방식대로 살아가겠다는 결단입니다. 위기와 어려움의 때에 자꾸 원인을 밖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은 바람직한 모습이 아닙니다. 회개와 회복의 전제 조건은 내부를 면밀하게 살피고 어떤 죄와 문제들이 숨어 있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와 문제들을 제거하는 것이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남 탓만 해서는 개혁이나 회복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⑵ 진실한 회개하자고 권한 선지자(41)

선지자는 ‘하나님을 향해 마음과 손을 들자’고 권유합니다. 일반적으로 ‘손을 드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을 함축합니다. 선지자는 형식적으로 손만 드는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드려서 진정한 회개를 드리자고 권유합니다. 즉 외식적인 회개보다 내면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회개가 있어야 하는 것이 선지자의 간절한 바람을 담은 권고입니다. ‘회복되리라’는 소망은 반드시 회개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회개는 외적으로 요란한 반응이 아니라 마음이 하나님께로 돌아서서 중심을 드리는 회개이어야 합니다. 오늘날 현실적으로 자신을 살피고 진심으로 죄를 고백하며 회개하면서 마음을 드리는 기도가 많이 부족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신앙은 외식적으로 흐르고 점점 영적 생명력은 사라지고 삶은 무기력해집니다. 정말로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원한다면 마음을 드리는 회개의 기도부터 다시 시작해야합니다.

 

공동체의 죄에 대한 고백(42-47)

죄인이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을 찾는다면 하나님을 만나주지 않습니다. 아무리 화려한 언변으로 기도한다 할지라도 그 기도는 하늘을 뚫고 하나님에게까지 상달될 수 없습니다. 진심으로 회개를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는 만나주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42우리의 범죄함과 우리의 반역함을 주께서 사하지 아니하시고 43진노로 자신을 가리시고 우리를 추격하시며 죽이시고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셨나이다 44주께서 구름으로 자신을 가리사 기도가 상달되지 못하게 하시고 45우리를 뭇 나라 가운데에서 쓰레기와 폐물로 삼으셨으므로 46우리의 모든 원수들이 우리를 향하여 그들의 입을 크게 벌렸나이다 47두려움과 함정과 파멸과 멸망이 우리에게 임하였도다(42-47)

이스라엘은 민족과 열방 중에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가 되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법과 질서를 무시했고, 세상의 것들이 진리인 것처럼 따랐습니다. 그들은 이로 인해 심판에 놓이게 되자 징계를 모면하기 위해 하나님을 사랑한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고 찬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받으시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함과 영광이 훼손되지 않도록 폐기물처럼 취급하시고 내쳤습니다.

⑴ 죄악을 사하지 않으신 하나님(42)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2인칭 ‘당신’으로 부르며 하나님께 공동체의 죄를 고백합니다. 선지자는 ‘우리의 반역함을 주께서 사하지 아니하시고’라고 고백합니다. 범죄 사실과 여호와의 용서하지 않으심을 대조하며 강조합니다. 선지자는 비슷한 단어를 반복함으로 공동체의 범죄를 더욱 강조합니다.

⑵ 심판을 멈추지 않으실 하나님(43)

선지자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범죄와 하나님의 용서하지 않음으로 인해 초래된 재난에 대해 서술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했지만, 예언한대로 심판이 도래하지 않길 간절히 바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진노로 자신을 가리시고 그 진노가 여호와의 모습을 가릴 만큼 크다는 뜻입니다. 큰 진노는 결국 자신의 백성을 추격하여 죽이시고, 전혀 인정을 베풀지 않으시는 것 같은 심판으로 나타납니다.

⑶ 자신을 가리우신 하나님(44)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에 자신을 가리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곳에서 ‘가린다’는 말이 계속 나오는데, 하나님께서는 구름으로 자신을 가리신 것입니다. 원래 여호와는 백성들을 만나기 위해 구름으로 자신을 가리고 나타나셨습니다(참조, 출애굽기 19:9: 신명기 4:11; 민수기 12:5; 신명기 31:15). 백성들이 하나님의 모습을 보고 죽을까봐 걱정이 되어 베일로 가리듯 구름으로 가리고 백성들을 만나러 오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자신을 가리우신 이유는 백성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방어막을 치듯 구름으로 자신을 감싸셨습니다. 선지자는 익숙한 표현을 반대로 해석함으로써 하나님의 철저한 거절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명기 4:7-8의 상황과 반대입니다.

⑷ 폐기물 취급하신 하나님(45)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모든 나라들 가운데 쓰레기와 폐기물로 두셨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19:5에서 ‘내 소유’ 즉 ‘내 보물’이라고 말씀하신 것과 반대의 상황입니다. 열방 중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특별한 보물이었던 이스라엘은 지금 열방 중에 쓰레기요 폐기물과 같은 처지가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본래 부강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은혜와 돌보심으로 이스라엘이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왕국으로 살아남으며 나름대로 명성을 이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교만해서 부와 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대로 방치하셨고, 그 결과 이스라엘은 쓰레기처럼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빠진 공동체는 더 이상 세상의 빛과 소금이 아닌 밖에 버려져야 폐기물과 같은 존재가 됩니다.

⑸ 입을 벌려 덤벼들게 하신 하나님(46)

하나님께 버림받는이스라엘을 보면서 적들은 입을 벌려 달려듭니다. 이 표현은 예레미야애가 1,2장에서 여러 번 등장했는데 비웃거나 조롱할 때 사용되는 관용어입니다. 마치 쓰레기장에 버려진 폐기물들 중에서 넝마주의들이 재활용거리라도 주어보겠다는 심정으로 이스라엘을 바라본 것입니다. 당시 바벨론은 이스라엘을 철저히 능욕했고 조롱했습니다.

⑹ 버림받은 이스라엘의 상황(47)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거절의 결과로 이스라엘이 맞이한 비참한 상황을 드러냅니다. 아주 부정적인 단어들을 나열하며, ‘두려움’과 ‘함정’과 ‘파멸’ 그리고 ‘멸망’의 상황입니다. ‘두려움’은 보통 하나님의 심판(출애굽기 15:16; 이사야서 19:16; 33:14)이나 예기치 않은 출현(이사야서 2:10, 19, 21)에 대한 반응을 묘사합니다. ‘파멸’은 ‘파괴’, ‘멸망’, ‘혼돈’ 또는 ‘죽음’을 전형적으로 묘사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멸망’은 ‘부서짐’, ‘깨짐’을 뜻하는 단어로, 여기서는 ‘흩어짐’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선지자는 여기서 음성학적 언어유희(파하트/파하드, 하쉐트/하샤베르)를 사용하여 자신들에게 임한 재앙의 심각성을 강조합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심판을 예언했지만, 그 심판이 이스라엘에게 임하지 않기를 간절히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동족에게 여러 가지 고난을 받아가면서까지 예언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자기 민족에 대한 사랑은 예레미야로 망해버린 이스라엘 민족에게 소망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고난에 대한 슬픔(48-51)

예레미야 시대 때뿐만 아니라 오늘날도 하나님의 공동체를 신뢰한다면 당신이 처한 자리를 인내할 수 있습니다. 모욕과 따돌림이 있고, 때로는 외면 받을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들어내시고 싶은 뜻이 있다면 인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뿐만 아니라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48딸 내 백성의 파멸로 말미암아 내 눈에는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49내 눈에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50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실 때까지니라 51나의 성읍의 모든 여자들을 내 눈으로 보니 내 심령이 상하는도다(48-51)

선지자 예레미야는 바벨론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닥친 멸망을 본 반응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유다는 초토화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적의 칼에 쓰러졌고, 아이들은 먹지 못해 아사했습니다. 심판으로 인한 유다의 참상은 생존자들의 눈에 눈물을 마르지 않게 했습니다. 그는 예레미야애가 1장 2절 및 16절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흩어짐’을 당한 것을 보면서 계속 슬퍼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⑴ 멸망한 예루살렘을 본 선지자(48-49)

선지자는 망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을 보면 눈물이 쉴 새 없이 계속해서 쏟아진다고 고백합니다(49). ‘흐르다’는 ‘쏟아지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원수들의 이유 없는 괴롭힘은 유다의 고통을 더했습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이 당하는 고통을 여러 모양으로 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처참함 모습을 보고 선지자의 눈에서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진다고 고백합니다. 비참해도 너무나 비참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⑵ 멸망한 이스라엘을 보실 하나님(50-51)

또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이스라엘의 형편을 굽어보실 때까지 이런 눈물이 계속 흐를 것이라고 합니다(50). 그러면서 하나님의 불쌍하게 여기셔서 개입을 하시길 간절히 바라는 선지자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예루살렘의 형편은 모든 딸들로 인해 나의 눈이 나의 마음을 괴롭게 만든다고 고백합니다(51). 여기서 딸들은 예루살렘 성안의 여성들을 나타낼 수도 있지만, 예루살렘 성읍에 딸린 마을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여성으로 특정하기보다는 예루살렘과 그 주변 마을들이 모두 파괴된 것을 보고 슬퍼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선지자는 비참하게 무너진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보면서도 가슴 아파하지만,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기대합니다. 돌아가겠다는 외침에 맞추어, 하나님께서도 마음을 돌리셔서 긍휼히 여겨주시기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회개하여 돌아온들, 하나님께서 돌이키시지 않는다면 이 모든 것은 헛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떤 환경이든지 어떤 공동체를 섬기든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백성들에게서 영광의 찬송을 받으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한 백성들이라면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의 날을 기대하며 세상에 하나님에 대해 담대하게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원수들이 공격하는 모습(52-54)

진정한 지도자는 자기가 속한 구성원이 잘 나가고 축복 받는 것을 시기해서는 안 됩니다.ᆞ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해주고 축복해 주어야 합니다. 반대로 구성원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는 마치 자신이 당한 어려움처럼 느껴져야 합니다. 한 나라의 훌륭한 지도자는 국가가 절망스러고 어려울 때, 국가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감당하고 슬퍼할 줄 알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52나의 원수들이 이유 없이 나를 새처럼 사냥하는도다 53그들이 내 생명을 끊으려고 나를 구덩이에 넣고 그 위에 돌을 던짐이여 54물이 내 머리 위로 넘치니 내가 스스로 이르기를 이제는 멸절되었다 하도다(52-54)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성이 당한 억울한 일들, 즉 원수들이 행한 일들을 하나님께 낱낱이 고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벌을 내려주시기를 간절히 간구합니다. 먼저 유다의 당한 어려움을 자신이 당한 것처럼 묘사합니다.

⑴ 원수들이 괴롭힌 상황(52-53)

선지자는 원수들이 이유 없이 자신을 새처럼 사냥한다고 고백합니다. 마치 아이들이 새총을 가지고 장난으로 새를 잡듯이 그렇게 자신을 다루고 있다고 호소합니다.

⑵ 쓰나미 같이 몰려오는 죽음(54)

본 절은 53절과 연결되어 원수들이 선지자를 물이 있는 구덩이에 넣고 죽이려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계속해서 원수들이 선지자의 생명을 끊으려고 선지자를 구덩이에 넣고 그 위에 돌을 던지며, 물이 선지자의 머리 위로 넘치니 선지자 스스로 멸절되었다고 느끼게 됩니다. 선지자는 이런 원수들의 공격에 이제는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다고 호소합니다. 선지자는 이렇게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음을 호소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재촉합니다. 애가 타는 선지자의 심정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는 사람은 때때로 죽을 것 같은 고통에 휩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정한 때에 움직이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울며 기다리는 것밖에 할 일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선지자 또한 한편으로는 잠잠히 기다리라고 말하다가도(예레미야애가 3:26) 극심한 고통 앞에서 다시 무너지고, 다시 하나님의 도우심을 재촉하는 기도를 합니다. 그러면서 근근이 이 고난의 시기를 이겨내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위해 자신들이 겪는 고통을 적극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자기 백성을 향해 심판의 손을 드신 하나님께서 이제 원수들에게도 심판의 손을 들어 그들이 행한 대로 되갚아 주시길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입니다. 자기 백성의 기도를 들으실 뿐 아니라 자기 백성을 향해 원수들이 꾸미는 음모도 들으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피할 길을 주실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모든 사정을 하나님께 말씀드리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당신의 자녀들 편이시기 때문입니다.


항상 언제든지 자신의 위치를 깨닫고 잘못된 위치에 있다면 빨리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너무 많이 잘못된 길을 왔습니다. 이제는 돌아가야 합니다. 앞으로 나가는 인생이 멋있지만, 돌아가는 인생이야말로 존귀하고 정결합니다. 사정을 살피시고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돌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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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06)


소망을 버리지 않는 선지자

예레미야애가 3장 19-39절


이란에서 2007년에 17세 ‘발랄’이 다른 청년과 싸우던 중에 격분하여 상대방을 살해해서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7년 후, 사형 집행 당일에 피해자 부모님도 자식을 죽인 살인범을 처형하는 장면을 보기 위해 사형장에 참석했었습니다. 피해자 아버지는 발랄에게 ‘마지막으로 할 말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 살인범은 ‘부모님을 봐서라도 살려 달라.’고 말했습니다. 피해자 어머니는 화가 나서 사형수 따귀를 치면서 ‘너는 우리에게 무슨 자비를 보여주었냐?’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잠시 있다가 한 마디 하길, ‘우리는 너를 용서한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형수 의자를 빼서 사형시키는 대신 목에 밧줄을 풀어주었습니다. 이 장면은 TV중계가 되어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본문은 예레미야애가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락입니다. 1-3장까지는 무너진 예루살렘을 목격했던 것에 대한 비참한 현실을 토로한 내용이었습니다. 본문에서는 비참한 현실에 낙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희망과 믿음으로 바뀌는 극적인 전환이 나타납니다. 성벽과 성전이 파괴된 현장에서 탄식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고백과, 무너진 터를 회복시키실 하나님에 대한 소망으로 바뀌어 나타납니다.

 

성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찬양(19-24)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마음에 품고 새로운 희망을 가집니다. 하나님께서 성실하신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치욕을 참으며 하나님께서 베푸실 구원의 때를 잠잠히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신속하게 인자를 베푸실 것입니다.

19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20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21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22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24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19-24)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비참한 멸망인 하나님의 심판을 보고 울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이 이렇게 심각한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고 나서, 하나님의 징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완전히 진멸되는 않는 사실에 대해서 오히려 감사했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품은 소망은 당면한 재난과 참상을 경감시킨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을 의지하지 않으면 가질 수 없는 마음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파괴 되었어도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선하신 분이십니다. 그렇게 하신 행하신 일도 옳으신 분입니다.

⑴ 고통을 기억해 달라는 선지자(19-21)

선지자는 하나님께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난과 재난을 기억해달라고 강청합니다. 하나님께서 아주 철저하게 버리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동일시하면서, 자기 문제처럼 아파하면서 이스라엘을 향해 회개하자고 부르짖었습니다. 이제 선지자는 고통스런 상황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기억하소서!’는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기도합니다. ‘기억’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의 시작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고통당하는 것을 보시고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기억하셨습니다. 이로써 출애굽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고난을 기억해달라고, 그리고 구원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선지자는 ‘내 마음이 반드시 기억한다’고 고백하는 동시에 낙담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여기서 선지자가 기억하는 것은 고난과 재난이었지만, 이것을 마음에 담아두었기 때문에 소망이 되었다면서 갑자기 분위기를 전환합니다(21). 이것은 하나님께서 소유하신 사랑의 성품들이었습니다.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기억하며 소망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⑵ 긍휼하심을 고백한 선지자(22-23)

선지자는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끝이 없다고 고백하는데, 직역하면 ‘하나님의 자비로 참으로 우리는 끝나지 않습니다. 그의 긍휼은 참으로 멈추지 않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끝이 없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자비와 긍휼은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4:6-7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신 인자 그리고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십니다. 선지자는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으로 인해 현재는 힘들지만, 자신들이 완전히 망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침마다 새롭다’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증거들을 날마다 새롭게 경험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성실함이 크다’라는 말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의 고백과 찬미로 하나님이 성실하시기 때문에 약속을 반드시 지키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때리셨지만,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자비를 풍성하게 내려 주실 분이기 때문입니다.

⑶ 절망에서 소망을 보는 선지자(24)

선지자는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소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스스로에게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라고 하며, 그 때문에 자신은 끝까지 소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를 바라리라’(24)는 ‘나의 소망이 되었다’(21)와 동일한 의미의 문장입니다. ‘여호와가 나의 기업’은 세상의 모든 기업을 빼앗겨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허락하실 기업은 남아 있다는 의미입니다. 선지자는 이것을 믿고 끝까지 기다리겠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믿음에 대한 태도를 보면서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환경만 바라보면 아무런 희망이 없고 절망만 보일 뿐이지만 모든 성도들이 희망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면 그곳에서 희망의 불빛이 비추어진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징계 중에도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이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호세아서 6: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너무 힘이 들더라도 잠시 하늘을 바라보며 끝까지 하나님의 긍휼을 기다려야 합니다.

 

성도들이 실천해야 할 일들(25-30)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베푸실 때, 사람들이 원하고 길들려지지 않은 방식으로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이 몇 번 실패했다고, 성도를 향해 기대를 버리진 않으십니다. 끝까지 성도들을 바라보시면서 소망과 기대를 가지고 계십니다.

25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26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27사람은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28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그에게 메우셨음이라 29그대의 입을 땅의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 30자기를 치는 자에게 뺨을 돌려대어 치욕으로 배불릴지어다(25-30)

징계를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차피 받아야할 징계라면 달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징계를 받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긍휼을 기다리는 동안 태도로 기다려야 할지에 대해 소개합니다. 특히 본문 25-27절에서는 동일한 형식으로 세 가지 좋은 방법을 제시합니다.

⑴ 여호와의 선하심을 기다림(25-26)

선지자는 여호와를 기다리고 찾는 자들에게 그는 선하신 분이라고 찬양합니다. 좋은 것을 잊어버렸는데(17), 좋은 것 되시는 여호와를 다시 기다리고 찾습니다(25). ‘여호와를 구하다’는 ‘여호와께 묻고 도움을 요청한다’는 의미입니다. 계속해서 기다림의 동기가 이어집니다(26). 화자는 잠잠히 여호와의 구원을 기다리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시간이 시작될 때까지, 즉 구원을 하나님의 주권에 맡겨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때,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태복음 6:6)고 하셨습니다. 조용한 시간에 오직 하나님과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의미로 선지자는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⑵ 여호와의 해방을 기다림(27-28)

선지자는 젊었을 때는 멍에를 메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27). ‘멍에’는 노예나 포로를 상징합니다. 누구나 멍에는 맺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멍에를 젊었을 때 메는 것이 좋다’는 것은 아직 어려움을 견딜만한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늙어서 당하면 자신의 몸도 지탱할 힘도 없는데 고난까지 겹치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래서 조금이라도 젊은 나이에 겪는 것이 좋다는 의미입니다. 멍에에 대한 것이 이어 지는데, 홀로 조용히 그 멍에를 묵묵히 감당하라고 말합니다(28). 이 멍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 때문에 놓으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풀어주실 때까지 감당해야 합니다. 여기서의 침묵은 절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징벌의 시간을 끝내고 다시 구원을 시작하실 날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것으로 곧 희망의 시간입니다.

⑶ 여호와의 소망을 기다림(29-30)

선지자는 ‘입을 티끌에 둔다’(29)는 의미는 얼굴을 땅바닥에 붙여야 한다는 표현입니다. 즉 이것은 자신을 최대한 낮추는 행동입니다. 이렇게 최대한 낮추고 침묵하며 견디는 것은 혹시 여호와가 구원해주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철저히 낮아져서 하나님의 처분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다고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회복하신다는 보장은 없지만, 아주 조심스럽게 작은 소망이라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이런 기간 동안에 받는 치욕도 견디라는 의미입니다(30). 왜냐하면 이런 치욕은 죄를 범한 이스라엘 백성이 감당해야할 몫이며, 이런 치욕의 기간이 지나야 비로소 여호와의 구원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선지자의 모습에서 고난을 대하는 좋은 자세를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와 긍휼을 믿고 지금의 상황들, 심지어 치욕까지도 잘 견디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자신의 죄악을 하나도 빠짐없이 낱낱이 아뢰는 동시에, 하나님께로부터 용서와 구원이 임하신 것을 믿고 잠잠히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과 죽음의 길을 가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함께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죄에 대해 의로우신 하나님(31-36)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위한 심판, 징계를 위한 징계를 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자하심과 긍휼하심 때문에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죄인들을 위해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로 십자가의 은혜를 요청할 만큼에 가난하고 애통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31이는 주께서 영원하도록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며 32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33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34세상에 있는 모든 갇힌 자들을 발로 밟는 것과 35지존자의 얼굴 앞에서 사람의 재판을 굽게 하는 것과 36사람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것은 다 주께서 기쁘게 보시는 것이 아니로다(31-36)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이 고생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럼에도 자녀들에게 징계하신 것은 죄악으로 인해 더 이상이 기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긍휼도 베풀어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⑴ 긍휼하게 여기실 하나님을 소망(31-32)

본문에서는 ‘왜냐하면’으로 시작하면서, 현재의 고통과 고난을 왜 참고 기다려야 하는지 이유를 설명합니다. 주님께서 영원히 이스라엘을 내쫓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70년 뒤에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를 징계하시지만 영원히 버리는 분이 아니십니다. 고통스럽게 하실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인자하심이 많기 때문에 끝내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⑵ 본심은 자녀를 사랑하는 하나님(33)

선지자는 인간을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는 게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아무리 범죄한 이스라엘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을 벌하는 것을 기뻐하시지는 않습니다. 즉, 현재 이스라엘에게 내려진 고난과 슬픔은 이스라엘의 죄 때문이지 하나님의 변덕이나 악함 때문이 아닙니다.

⑶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세 가지(34-36)

세상이 혼란스러운 가운데도 성도들은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세 가지 악한 행동을 언급합니다. 이 행동은 하나님의 정의로운 성품과 연결됩니다. 어두운 세상 속에서도 성도들은 힘들고 어렵더라도 바른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① 갇힌 자를 밟는 것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것 중, 첫 번째, 세상의 모든 갇힌 자를 발로 밟는 것입니다. 여기서 갇힌 자는 포로로 끌려온 자들입니다. 그들은 포로로 끌려온 약자입니다. 약자를 학대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시편 68:5-6에서는 여호와가 특별히 돌보신 사람들이 고아와 과부와 함께 갇힌 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발로 밟는 것’은 학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약자에 대한 학대를 하나님께서는 결코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② 재판을 굽게 하는 것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두 번째, 지존자의 얼굴 앞에서 사람의 재판을 굽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정의를 훼손한다는 의미입니다. 재판은 하나님의 정의를 이 세상에 드러내는 기본적인 제도입니다. 그런데 이런 행동을 이스라엘은 몰래도 아니고 뻔뻔스럽게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하나님의 심판을 좌초한 것입니다. ③ 억울한 재판하는 것 마지막으로 재판과 연결된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재판을 억울하게 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십니다. 이런 악한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지도자나 힘 있는 자들입니다. 지도자들이 솔선수범해야 하지만 앞장서서 재판으로 악을 행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선지자는 특별히 힘 있는 자들에게 약자들을 억울하게 만들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지금까지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 가운데 기억해야할 것은 하나님의 심판은 우연히 진행된 것이나 강대국 바벨론의 횡포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을 받은 하나님께서 재판장으로 공정하게 심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인정해야만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강조(37-39)

부모님들은 자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마음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이 잘못된 것을 보면 가슴이 아파합니다. 때로는 자녀가 지나치다 싶으면 채벌하기도 하지만, 자녀를 벌하면서 마음이 좋은 부모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책망하실 때 동일합니다.

37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이것을 능히 말하여 이루게 할 수 있으랴 38화와 복이 지존자의 입으로부터 나오지 아니하느냐 39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들 때문에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37-39)

하나님의 심판은 정치적인 희생양이 아니라 죄에 대한 대가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바벨론에 심판당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대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하나님께 대한 신뢰로부터 시작합니다.

⑴ 비극적인 명령하신 하나님(37)

선지자는 다시 자신들에게 일어난 재난과 비극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말한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명령은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비극적인 일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비극적인 것을 명령하신 분이지만 그러한 일들을 기뻐하신 분은 아닙니다.

⑵ 화복을 주관하신 하나님(38)

선지자는 이제 화와 복이 동일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다고 고백합니다. 결국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받고 있는 벌은 자신들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다시 고백하는 셈입니다. 그러면서 선지자는 산 사람이 어찌 불평하는냐고 합니다. 여기서 비록 현실은 힘들지만, 그래도 살아있는 것에만도 감사하는 선지자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⑶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말 것(39)

결국 선지자로 하여금 끔찍한 슬픔 가운데서도 희망을 가지게 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과 진실하심을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이런 선지자의 믿음은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이 배워야 할 참 신앙의 모습입니다.

 


선지자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소망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사실입니다.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회개하는 백성들을 향해 긍휼과 인자가 무궁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변함없는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반드시 회복시킬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힘겹더라도 마음을 다해 주께 온전히 돌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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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05)


응답을 기다리는 선지자

예레미야애가 3장 1-18절


 

탈무드에서 ‘그 사람의 신발을 신고 10리를 가보기 전에는 그 사람에 대해 말하지 말라.’는 교훈이 있습니다. 살아가는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고난과 고통이 있습니다. 어떤 것은 알고 있는 고난도 있지만, 어떤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고난과 아픔을 우리 편에서 손쉽게 생각하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이 흔들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에 대해 회의를 품기도 합니다. 비신자들은 비아냥거리고 빈정거리기도 합니다. 잘못된 자신의 죄로 인해 고난이라면 누구에게 하소연하겠습니까! 하나님께 범죄한 이스라엘은 철저히 파괴되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가고 있었습니다.

 

본 3장은 예레미야애가에서 가장 긴 장입니다. 1,2,4장이 알파벳의 개수에 따라 22절로 구성된 것과 다르게 3장은 각 알파벳의 철자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장의 세 배 분량인 66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3장은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고난을 여러 가지로 묘사한 1-18절과 누군가 여호와께 이야기하는 19-39절, 우리끼리 하는 말인 40-41절, 우리가 여호와께 하는 말인 42-47절, 나의 탄식인 48-54절, 나의 기도인 55-66절로 구분됩니다.

 

참상으로 인해 슬픔에 쌓인 예루살렘(1-6)

선지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분노의 매를 맞으며 하나님께서 만드신 감옥에 갇혔다고 합니다. 현재는 하나님께서 도망갈 수 없게 길을 막으시며 자신을 향해 화살을 날리고 죽이려 하신다고 고백합니다.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복과 희망의 하나님이 아닌 심판하는 두려운 하나님이십니다. 

1여호와의 분노의 매로 말미암아 고난 당한 자는 나로다 2나를 이끌어 어둠 안에서 걸어가게 하시고 빛 안에서 걸어가지 못하게 하셨으며 3종일토록 손을 들어 자주자주 나를 치시는도다 4나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며 나의 뼈들을 꺾으셨고 5고통과 수고를 쌓아 나를 에우셨으며 6나를 어둠 속에 살게 하시기를 죽은지 오랜 자 같게 하셨도다(1-6)

예레미야애가 1,2장을 통해서 예루살렘의 참상을 보면서 제3자 입장에서 애통했던 선지자는, 이제는 그 문제를 자신의 한 가운데에서 격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고통당하는 자가 자신이 당하는 것처럼 1인칭 화법으로 받아들이고 그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나님께서 눈물의 호소합니다. 남들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범죄 하면서 왕과 제사장들은 말씀을 거짓으로 바꾸어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음으로 그 고통과 고난이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⑴ 직접 매를 때리신 하나님(1)

선지자는 자신을 여호와께 분노의 매를 맞은 자로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다는 점을 한탄합니다. 바로 이것이 이 쓰디쓴 고통의 원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자기 백성들에게 매로 진노하십니다. ‘매’는 아이들을 훈육하거나 목자들이 양들을 인도할 때 사용하는 막대기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해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사무엘하 7: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후손들이라도 잘못하면 사람의 막대기로 치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또한 다윗을 통해서 ‘31내 율례를 깨뜨리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32내가 회초리로 그들의 죄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그들의 죄악을 벌하리로다’(시편 89:31-32)라고 다시 언급하시면서 모든 이스라엘에게로 확대되어 심판을 받게 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매는 현재는 아프고 슬프지만 결국은 유익한 것이 됩니다.

⑵ 어둠으로 행하게 하신 하나님(2)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빛이 아닌 어둠으로 행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어둠은 고난과 혼란을 의미합니다. 이때 ‘어둠’은 요엘서 2:1-2에 나오는 심판의 날의 어둠입니다. ‘이끌다’라는 단어는 막대기로 양들을 몰아가는 것을 뜻합니다(창세기 31:18; 출애굽기 3:1). 일반적으로는 여호와께서 목자처럼 이스라엘을 푸른 초장이나 물이 많은 곳으로 인도할 것이라 예상되지만, 여기서는 반대로 자기 백성에게 분노하셔서 어둠으로 인도하십니다. 예루살렘에 임한 재앙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임했습니다.

⑶ 대적으로 나타나신 하나님(3)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대적으로 나타나신 것에 한탄합니다. 하루 종일 자신을 말처럼 이리저리 몰고 다니시면서 괴롭히신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양을 이끌듯이 부드럽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매우 거칠게 자신을 재앙으로 몰고 가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매로 치시며 돌이켜 돌아올 때 까지 종일토록 계속하십니다. 또한 여호와께서 ‘손을 들어’서 친다고, 2장에서 ‘손을 들어’ 간구한다와 대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 중에 손을 들어 기도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고통 중에 있는 그의 백성들을 향해 손을 들어 매섭게 치십니다.

⑷ 고통을 더하신 하나님(4)

선지자는 유다의 상태를 나이 많아서 노쇠한 사람으로 비유합니다. 노쇠하여 자신의 몸도 지탱할 수 없는데, 그곳에 고통을 더하신 것입니다. 회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분노는 그치지 않습니다. 아픈 상처로 멈출 수 없는 눈물을 흘리지만 치유는커녕 또 다른 질병으로 더욱 괴롭기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고 뼈를 꺾으셨다고 고백합니다. ‘쇠하게 하다’는 ‘마찰로 갈아지고 떨어져 나갔다’는 의미로 예레미야애가 2:24, 5, 8절과 16절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뼈를 꺾다’는 직역하면 ‘뼈를 부서뜨리다’의 의미입니다. 이 표현은 예레미야애가 1:15과 2:9과 11절에서 예루살렘의 젊은이들, 도성의 방비, 도성을 부수어 흩어버릴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선지자는 이렇게 예루살렘의 멸망에 사용된 단어를 자신에게 적용함으로써 이스라엘 전체의 고난과 자신의 고난이 연결하고 있습니다.

⑸ 피할 수 없게 하신 하나님(5)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위에 담즙과 고통을 쌓으시고 둘러 놓으셨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에 완전히 포위되었다는 뜻입니다. 마치 예루살렘이 적들에게 완전히 포위된 것처럼 포위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에서 도망갈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에 주의를 기울이는 만큼, 하나님의 심판에도 두려워하며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⑹ 잊혀진 사람처럼 만드신 하나님(6)

2절에서 언급된 어둠의 동기가 다시 등장합니다. 어둠 가운데 처하게 된 선지자는 마치 오래전부터 죽은 자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현재 자신의 삶을 보니 무덤에 있는 시체와도 같았습니다. 자신은 살아도 산 자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심판을 철저하게 받아서 회복 불가능한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런 고통을 겪습니다. 아무도 헤아려 줄 수 없고 위로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더 잘살아보겠다고 하나님을 떠났던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회복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철저하게 파괴됩니다. 그 분노의 매는 선지자 자신의 죽도록 시시때때로 내려칩니다. 고난이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완전히 파괴되도록 계속적으로 임했던 것입니다. 연속된 고난으로 숨 쉴 여유조차 없는 선지자는 쇠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적인 복만 추구한 사람들의 결말은 이렇게 비참합니다.

 

주변에 조롱당하신 예루살렘(7-9)

고난을 당할 때 자신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위로를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신보다 더 힘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보다 더 비참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비참한 슬픔이 마음으로 다가올 때 아무런 희망도 없어 보입니다.

7나를 둘러싸서 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내 사슬을 무겁게 하셨으며 8내가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나 내 기도를 물리치시며 9다듬은 돌을 쌓아 내 길들을 막으사 내 길들을 굽게 하셨도다(7-9)

이스라엘에게서 생명의 하나님께서 돌아서셨으니 죽음 밖에 남은 것은 없습니다. 돈과 직장 그리고 명예가 없으면 힘들지만,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으면 살아도 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돌아섰다고 할 때는 아무런 소망도 없습니다. 선지자를 절망스럽게 하는 것은 돌아갈 길이 보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고통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길을 막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자신이 어둠에서 빠져나가려고 해도 하나님께서 자기 주위에 담을 쌓아놓으셨기 때문에 나갈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또한 자신의 쇠사슬을 더욱 무겁게 하셨다고 합니다. 감옥의 이미지를 통해 사슬에 묶인 채로 갇혀서 꼼짝달싹 못하는 선지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선지자는 여호와께 도움을 구하기 위해 간절히 외칩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의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철저한 하나님의 유기(遺棄)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가장 혹독한 심판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자신의 길에 담을 쌓고 길을 굽게 하고 재앙에서 도망갈 수 없게 만드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탈출구 없는 절망적인 상황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유일한 도움이신 하나님조차 자신을 외면하셨습니다.

살다보면 사방이 이렇게 막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좋지 않은 일은 꼭 한꺼번에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그리고 반드시 한계점을 보도록 하십니다. 자신이 진짜 사랑하고 의지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반드시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 외에 사랑하고 있다면, 유일한 출구이신 하나님마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해자인 것처럼 보이는 상황을 만나게도 하실 것입니다.

 

모든 소망이 끊어진 예루살렘(10-18)

교만은 자신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 때 찾아옵니다. 하나님 없는 생활, 하나님 없는 가정, 하나님 없는 직장 그리고 하나님 없는 교회에서 교만은 시작합니다. 성경에서는 스스로 바벨탑을 쌓아서 하나님 없는 생활을 자유롭게 살려는 것이 방탕하게 되고 결국은 타락했다고 소개합니다. 하나님 없는 삶은 절대로 겸손할 수 없습니다.

10그는 내게 대하여 엎드려 기다리는 곰과 은밀한 곳에 있는 사자 같으사 11나의 길들로 치우치게 하시며 내 몸을 찢으시며 나를 적막하게 하셨도다 12활을 당겨 나를 화살의 과녁으로 삼으심이여 13화살통의 화살들로 내 허리를 맞추셨도다 14나는 내 모든 백성에게 조롱거리 곧 종일토록 그들의 노랫거리가 되었도다 15나를 쓴 것들로 배불리시고 쑥으로 취하게 하셨으며 16조약돌로 내 이들을 꺾으시고 재로 나를 덮으셨도다 17주께서 내 심령이 평강에서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내가 복을 내어버렸음이여 18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10-18)

선지자는 앞 단락보다 고난을 강화시켜서 소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예루살렘을 고난을 넘어서 죽이기 위해 움직이십니다. 꼼짝 못하도록 하고 마치 덧에 걸린 짐승처럼 감옥에 갇힌 죄수처럼 여기시고 죽이려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⑴ 살해하려고 기다리신 하나님(10)

선지자는 이제 하나님께서는 잡아 죽이려는 기다리는 곰과 사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곰과 사자처럼 가만히 숨어 있다가 기회를 보아서 먹잇감을 잡아먹는 맹수로 표현합니다.

⑵ 적막하게 방치하신 하나님(11)

여기서 ‘나를 적막하게 하셨다’는 표현은 ‘나를 황폐하게 두셨다’는 의미입니다. 맹수에게 찢겨 황폐해진 상황에서 이 단어는 각각 ‘예루살렘의 문’, ‘예루살렘 자체’, ‘예루살렘의 자녀’를 묘사합니다(예레미야애가 1:4,13,16). 아름다운 예루살렘은 다들 외면한 도시, 누구든지 마음대로 유린하는 도시, 사람들은 다 도망치고 포로로 끌려가고 이제 유령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들짐승의 거처로 변해버렸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더 예루살렘 성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⑶ 자신을 활로 쏘시는 하나님(12)

이제 하나님께서는 사냥꾼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이번에도 싸움의 대상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과녁 삼아서 살을 쏘신다고 합니다. 예레미야애가 2:4에는 원수같이 이스라엘을 향해 활을 당기는 모습이 나옵니다. 사냥꾼은 프로이기 때문에 활쏘는 것을 실수하지 않을 것입니다.

⑷ 치명상으로 고통을 주신 하나님(13)

하나님께서 자신의 허리를 맞추셨다고 합니다. ‘허리’는 본래 ‘콩팥’을 의미합니다. 콩팥은 신체 중에서 가장 예민하고 생기가 넘치는 장기에 해당합니다. 그만큼 치명상을 입었을 때 가장 고통스러움을 느낄만한 곳입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을 파괴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콩팥을 화살로 맞추었다는 것은 고통스럽게 생명을 취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⑸ 조롱거리가 된 상태를 탄식하는 선지자(14)

선지자는 자신이 조롱거리가 되어 있는 상태에 대해 탄식합니다. 예루살렘은 주변 백성들 사이에서 노래와 조롱거리가 됩니다. 여기서 노래는 조롱을 하기 위한 노래를 가르칩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백성들로부터 조롱을 받습니다. 유다 공동체와 구별되며 공동체 안에서 따돌림 당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예레미야나 욥이나 시편 탄원시의 주인공들처럼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겪는 불행 때문에 가슴 아파합니다. 그리고 배척당한 예언자들처럼 선지잔 또한 공동체로부터 배척을 당했습니다.

⑹ 쓴 것으로 배불리신 하나님(15)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쓴 것들로 배불리시고 쑥으로 취하게 하셨다고 소개합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힘든데 그 상태에서 쓴 것으로 먹여서 고통을 더하게 하십니다. 쓴 것은 속으로 들어가서 복통을 일으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고통을 더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곡식과 포도주가 없는 궁핍한 상황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곡식과 포도주로 배부르게 하는 대신에 고통의 쓴 것과 쑥으로 채우셨습니다.

⑺ 재로 덮으신 하나님(16)

계속해서 먹는 것과 조약돌로 선지자의 이를 꺾으시고 재로 덮으셨습니다. 조약돌로 이를 꺾는다는 표현은 먹는 문제와 연결되는 바, 이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쓴 것도 먹지 못하게 자신의 이를 돌로 부수어버리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예 재로 덮어버리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일말의 희망도 남겨놓지 않으시고 철저하게 짓밟으셨다고 토로합니다.

⑻ 소망까지도 거두시는 하나님(17-18)

본문에는 ‘평강’, ‘복’, ‘소망’이란 희망적인 단어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단어들은 역설적으로 희망이 전부 사라졌다는 슬픈 현실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17절에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심령을 평강에서 떼어놓았고 좋은 모든 것을 잊게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현재 선지자의 상태는 평강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언제 좋은 일이 있었는지 잊을 정도로 오랫동안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평강과 행복은 모두 자신의 율법에 순종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버린 백성들은 결코 평강과 행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런 극심한 고통의 상황에서 선지자는 자신의 힘과 여호와를 향한 소망이 모두 끊어졌다고 합니다. ‘힘’으로 번역된 ‘명성’, ‘부유함’을 의미합니다. 즉 선지자는 자신의 명성과 여호와께로부터 오는 희망 모두가 사라졌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선지자는 죽음에 이를 만큼의 고통과 재앙을 당하는 의인입니다. 또한 공동체로부터 조롱을 당하는 의인입니다. 그는 비록 하나님 앞에 서는 선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공동체가 받는 고난을 같이 받습니다. 이로부터 공동체와 그 일원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부분의 잘못을 전체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체 일원으로서 전체의 잘못을 통감하려는 태도는 바람직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교회는 한 분 예수님만을 모시고 사는 하나의 교회이기 때입니다.


 

예레미야애가의 언어는 잔인하고 거칠지만, 그곳에도 하나님께서는 함께 하시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에게 고통을 주지만 그 고통을 몰라라 하지 않으시고 함께 고통에 동참하십니다. 그 고통을 감당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고통을 지나고 나면 이제 좀 더 성숙한 모습으로 변할 것입니다.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넓은 마음으로 지체들을 대할 수 있게 되어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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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04)


멸망의 참상을 목격한 선지자

예레미야애가 2장 11-22절


중동 시리아 내전에 대한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국민 약 500만 명이 안전한 나라를 찾아 유럽 국가로 피난을 떠났습니다. 종종 피난을 떠나면서 배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면서 많은 사람들이 바다에 빠져 죽는다는 소식도 들려옵니다. 얼마 전에는 시리아 난민 3살배기 아이가 익사한 채 터키 해변으로 밀려와서 전 세계 사람들을 울렸습니다. 더 슬픈 것은 지금도 전쟁 때문에 죄 없는 아이들이 죽어간다는 것입니다. 어른들의 욕심 때문에 피어보지 못하고 죽습니다. 이 비참한 모습들은 시리아만이 아니라 전쟁이 일어난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선지자가 멸망한 예루살렘을 보면서 아파하는 마음은 이보다 몇 백배 더 할 것입니다. 이전에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예루살렘 성과 하나님의 성전까지 철저히 무너졌다고 슬퍼했습니다. 여기서는 자신을 1인칭으로 슬픔을 표현합니다. 그는 먹을 것이 없어 자식을 먹어야 하는 비참한 예루살렘의 재앙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재앙에 대해 이스라엘을 사랑하셨던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고합니다. 늦긴 했지만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 부르짖으라고 호소합니다.

 

시온의 참상으로 인한 슬픔(11-12)

바벨론에 멸망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노로 일어난 일입니다. 이 전쟁으로 인해 군인이나 청년들뿐만 아니라 아이들까지도 굶어 죽었습니다. 선지자는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된 예루살렘을 소개합니다. 사람들에게 눈물로 호소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라고 요청합니다. 

11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끊어지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딸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 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기절함이로다 12그들이 성읍 길거리에서 상한 자처럼 기절하여 그의 어머니들의 품에서 혼이 떠날 때에 어머니들에게 이르기를 곡식과 포도주가 어디 있느냐 하도다(11-12)

계속적으로 예레미야애가는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패망한 후, 성벽이 무너지고 성전까지 파괴되었습니다. 선지자의 눈에 비친 예루살렘의 참상을 소개합니다.

⑴ 참상을 목격한 선지자(11)

전쟁이 일어나면 군인이나 청년들뿐만 아니라 아이들과 여성들이 피해를 당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가장 큰 참상은 전쟁과 연관이 없는 사람들이 치명적인 피해를 당한다는 사실입니다. 선지자는 세 개의 기관으로 고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눈’에서는 눈물이 마르고, ‘창자’는 끊어지고 ‘간’이 땅에 쏟아졌습니다. 고대근동에서는 간을 감정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므로 ‘간을 땅에 쏟아놓는다’는 말은 ‘자신의 감정, 특히 슬픔의 감정을 물처럼 땅에 쏟아놓는다’는 의미입니다. ‘창자가 끊어진다’는 표현은 ‘속이 부글부글 끓다’라는 뜻으로 속에서 올라오는 강한 슬픔을 표현합니다. 이 표현은 예레미야애가 1:20에서도 나왔습니다. 선지자는 어린 아이들의 죽음을 보면서 느꼈던 슬픔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면서 동일하게 느꼈던 슬픔을 표현합니다. 선지자가 슬퍼하는 이유를 말해줍니다(11b). 그것은 이스라엘이 패망으로 해밝게 웃고 있어야할 어린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서 굶주려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힘없이 길거리에 누어서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고, 힘없이 눈만 끔뻑이며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리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⑵ 엄마 품에서 죽어가는 아이들(12)

선지자는 아이들의 상황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조금 다행인 아이들은 어머니의 품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길거리에 죽어가는 아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품에서도 굶주려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아이들은 어머니를 향해 양식을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어머니의 품 혹은 가슴은 원래 젖먹이가 젖을 먹으며 가장 배부르고 행복한 곳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기근으로 어머니의 젖까지 말라버렸습니다. 말라버린 젖을 빨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서 죽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명기 28:41과 50절 및 53-57절에서 경고한 것처럼 전쟁으로 인한 기근 때문에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선지자는 엄마 품에서까지 죽어가는 어린아이들을 보면서 통곡합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아이들이 배 굶주림에 죽어가진 않습니다. 하지만 육적인 것보다 영적인 굶주림이 심하다는 것입니다. 부모들의 야망과 경쟁문화 때문에 아이들의 영혼은 굶주려 죽어가고 있습니다. 좋은 대학과 직장만 가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예루살렘을 멸망시켰던 우상숭배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우상 재물로 불에 던져진 우상숭배와 너무나도 흡사합니다. 기근으로 인해서 어머니의 젖이 말라버린 것처럼, 성도들의 기도와 말씀은 마르지 않아야 합니다.

 

조롱당하는 시온(13-17)

전 세계적으로 전쟁으로 죄 없는 많은 아이들이 죽어갑니다. 아이들은 전쟁에 대한 이유도 모른 채, 집과 가족 그리고 친구를 잃어 갑니다. 심지어는 아이들이 약탈과 성폭력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세상을 향해 아이들의 아픔을 소리쳐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습니다. 어른들의 욕심이 수많은 아이들을 거리로 내몰고 조롱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13딸 예루살렘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증거하며 무엇으로 네게 비유할까 처녀 딸 시온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비교하여 너를 위로할까 너의 파괴됨이 바다 같이 크니 누가 너를 고쳐 줄소냐 14네 선지자들이 네게 대하여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를 보았으므로 네 죄악을 드러내어서 네가 사로 잡힌 것을 돌이키지 못하였도다 그들이 거짓 경고와 미혹하게 할 것만 보았도다 15모든 지나가는 자들이 다 너를 향하여 박수치며 딸 예루살렘을 향하여 비웃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온전한 영광이라, 모든 세상 사람들의 기쁨이라 일컫던 성이 이 성이냐 하며 16네 모든 원수들은 너를 향하여 그들의 입을 벌리며 비웃고 이를 갈며 말하기를 우리가 그를 삼켰도다 우리가 바라던 날이 과연 이 날이라 우리가 얻기도 하고 보기도 하였다 하도다 17여호와께서 이미 정하신 일을 행하시고 옛날에 명령하신 말씀을 다 이루셨음이여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무너뜨리사 원수가 너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게 하며 네 대적자들의 뿔로 높이 들리게 하셨도다(13-17)

하나님께서는 바벨론과 대적한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징계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난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지 선지자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선지자는 계속해서 황폐해진 예루살렘 상황을 더 자세히 소개합니다.

⑴ 위로와 치유자가 없는 시온(13)

아이들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이런 큰 비극과 슬픔 앞에서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시적 형식을 살려 배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무엇으로 네게 증거할까? 무엇으로 너에게 비유할까? 딸 예루살렘이여 무엇으로 너에게 비교하며 내가 너를 위로할 수 있을까? 딸 시온이여 너의 파괴됨이 바다 같이 크니 누가 너를 고칠까? 세 번이나 ‘무엇으로’라고 사용하면서 질문합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이 회복 불가능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미 예루살렘은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네 개의 의문문을 통해, 현재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비극에 대해 어떻게 증언해야 할지, 어떤 비유를 들어 설명해야 할지, 또 어떤 말을 해야 위로가 될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선지자의 참담하고 답답한 심정이 잘 드러납니다. 마지막 문장의 ‘누가 너를 고칠까?’는 한편으로는 전적인 무능함을 고백하는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심정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⑵ 책임이 있는 거짓 선지자들(14)

이런 멸망의 책임은 1차적으로 거짓된 선지자들에게 있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이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만을 전달하고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어리석다’는 눈가림을 위해 석회를 발라놓은 상태를 말합니다. 들어내어야 할 죄에 석회를 발라 덮어주는 것입니다. 꾸짖고 책망할 죄를 지적하지 않고 넘어가 버립니다. 그로 인해 백성들은 거짓 평화와 안정 속에서 속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죄에서 돌아서고 심판을 면하게 되지 못했습니다. 예언자는 말씀을 지키는 파수꾼인데, 예언자가 그 역할을 못하여 결국 이스라엘이 망하게 되었습니다(참조, 에스겔 3:17-21). 교만한 성도들은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에 빠질 수 있는 위험한 상태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⑶ 비웃고 조롱당하는 예루살렘(15)

과거 예루살렘은 완전한 영광, 더 할 나위 없는 영광스러운 도시로 불렸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기쁨이 되는 환희의 도시였습니다. 자신이 제일 잘 한줄 알고 엄청난 교만에 빠져 타인을 무시하고 그래서 미혹에 빠져 자신의 삶과 미래를 망쳐 버립니다. 주변 나라들뿐만 아니라 그 원수들까지 예루살렘을 조롱합니다. 예레미야애가 1:12에서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본 증인으로 나타나는데, 예루살렘의 멸망을 조롱하며 박수치는 사람들로 표현됩니다(참조. 욥기 27:23). 머리를 흔드는 행동도 조롱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그러한 행동뿐만 아니라 꼴좋다는 말로 계속해서 조롱을 이어갑니다. 조롱은 원수들에게서도 계속됩니다. 원수들은 입을 벌리고 비웃고 이를 갑니다. 입을 벌린다는 것은 험담하고 놀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간다는 표현은 ‘비웃다’라는 단어와 같이 사용되어 놀리면서 웃는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회개의 눈물이 마른 자는 머지않아 비웃을 당할 것입니다. 원수들이 기뻐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을 멸망시켰기 때문입니다. 원수들은 ‘우리가 삼켰다’고 의기양양해합니다. 그런데 ‘삼키다’라는 표현은 예레미야애가 2:2과 5절 및 8절에서 여호와께 돌린 표현이었습니다. 즉 이스라엘 입장에서 보면 이스라엘의 멸망은 여호와의 심판이지만, 원수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의 능력으로 점령한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의기양양해 있습니다.

⑷ 원수들이 기다렸던 멸망의 날(16)

이날에 원수들은 얻기도 하고 보기도 하였다며 즐거워합니다. 여기서 ‘이 날’(16)은 여호와의 날에 대한 암시합니다. 이스라엘은 적의 멸망을 원하는 날이었지만, 오히려 결과는 정반대로 원수들이 이긴 날이 되었습니다. 환난 날에 쉴 곳을 찾으며(13), 음식을 찾으며(1:6), 묵시를 찾았지만(2:9), 이스라엘 사람들은 결국 자신들이 찾고자 하는 것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원수들은 단번에 찾아냈습니다. 여호와를 찾고 보기를 원했지만 이들은 찾지도 보지도 못하였습니다. 원수들의 말속에서 모든 것이 이스라엘이 원한 것과 반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과는 정반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 속에 그분의 주권 아래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원수들의 뿔이 높아지고 즐거워하는 모든 일은 원수들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어서 바벨론 신에 패한 것이 아닙니다.

⑸ 철저히 멸망시킬 여호와의 계획(17)

예루살렘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폐허가 된 모습을 보고 손뼉을 치며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선지자는 이러한 모든 일은 여호와의 계획과 명령에 의해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미 정하신 일과 옛날에 명령하신 말씀은 같은 의미로 신명기 28장의 말씀을 전제로 합니다. 모든 것은 원수들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의 계획, 즉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은 자들에 대한 징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와 우리를 징벌하실 때 우리가 조롱하던 사회와 사람들을 통해서 하십니다. 이들을 통해 부끄러운 민낯을 철저하게 드러내십니다. 예루살렘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경고하신 일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주셨던 말씀을 무시했기 때문에 갑자기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계획하신 일과 명령하셨던 말씀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명령하시고 경고하셨던 대로 예루살렘을 파괴하셨습니다. 온 천하에 기쁨을 주고 복의 근원과 온전한 영광이 되어야 할 성읍이 불의한 자들에게 기쁨을 주는 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원수들은 ‘우리가 그를 삼켰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옛적에 경고하신 대로 이루신 것뿐입니다.

 

여호와께 탄원하는 선지자(18-19)

부르짖는 자의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응답해 주십니다. 여러 번 성경을 통해 ‘부르짖으라!’고 권고합니다. 비록 부족해서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었을지라도, 연약해서 무능력해 보일지라도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응답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담대하게 부르짖어야 합니다.

18그들의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딸 시온의 성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를 쉬게 하지 말지어다 19초저녁에 일어나 부르짖을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각 길 어귀에서 주려 기진한 네 어린 자녀들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 하였도다(18-19)

지금도 교회들이 세상에 조롱을 당하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조롱을 스스로 자초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교회가 세상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에게 수치를 주셔서 교회의 민낯을 철저히 들어내시고 싶은 것입니다. 그곳에서부터 하나님과의 교제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⑴ 밤낮 쉬지 말고 간구(18)

이제 선지자는 시온에게 이제라도 하나님께 부르짖으라고 요청합니다. 부르짖어 다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의지해 보자고 청합니다. 이 재앙의 근원이 여호와임을 알고 그 근원 되신 여호와께 부르짖으라고 요청합니다. 그런다고 용서해 주실 것이란 보장은 없지만, 당연히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부르짖을 때는 밤낮으로 쉬지 말고 울부짖으라고 요청합니다. 이스라엘은 밤낮 쉬지 않고 범죄했습니다. 이제 반대로 밤낮 쉬지 말고 간구하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여기서 울음은 회개를 상징합니다. 계속적으로 흘리는 눈물을 반복해서 언급한 것은 계속된 회개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⑵ 어린 자녀들을 위한 간구(19)

이스라엘에게 멈추지 말고 회개의 기도하며 주의 자비하심을 구하라고 말합니다. 선지자의 간곡한 요청은 굶어 죽어가는 어린 자녀들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른들은 자신의 죄 때문에 죽어가더라도, 재앙 이후에 이스라엘을 재건할 희망인 어린 아기들은 살려야 되지 않겠냐는 뜻입니다. ‘주를 향하여 손을 든다’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한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일은 빈손을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하는 것뿐입니다.

 

여호와께 대한 탄원(20-22)

하나님을 향한 부르짖음에는 믿음이 배어 있어야 합니다. 주께서 나의 울부짖음을 들으신다는 믿음, 그리고 주께서 반드시 우리를 회복시키리라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비록 징계를 받고 있지만, 그분의 자녀입니다. 못나고 부족해도 그분의 사랑하는 자녀입니다.

20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주께서 누구에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 여인들이 어찌 자기 열매 곧 그들이 낳은 아이들을 먹으오며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어찌 주의 성소에서 죽임을 당하오리이까 21늙은이와 젊은이가 다 길바닥에 엎드러졌사오며 내 처녀들과 내 청년들이 칼에 쓰러졌나이다 주께서 주의 진노의 날에 죽이시되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도륙하셨나이다 22주께서 내 두려운 일들을 사방에서 부르시기를 절기 때 무리를 부름같이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시는 날에는 피하거나 남은 자가 없나이다 내가 낳아 기르는 아이들을 내 원수가 다 멸하였나이다(20-22)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아가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삶을 책임저주십니다. 하지만 다른 곳에 마음이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방치해 놓으십니다. 선지자는 사람들이 울부짖으며 기도할 때, 자신도 하나님께 응답해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20-22절에 나오는 언급은 신명기 28:53-57의 심판 내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⑴ 허기진 사람들을 위한 기도(20)

선지자는 ‘여인들이 어찌 자기 열매 곧 그들이 낳은 아이들을 먹으오며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어찌 주의 성소에서 죽임을 당하오리이까’라고 기도합니다. 다시 여호와를 부르며 자신들의 자녀들을 돌보아 달라고 요청합니다.

⑵ 유일하신 여호와를 위한 기도(21)

‘주께서 누구에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너무 심하게 다루셨다는 호소입니다. 문자 그대로 사실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다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대적에게 잔인한 손에 이스라엘을 맡겨 버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눈감으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겨달라는 기도입니다.

⑶ 자신의 처지를 위한 기도(22)

여기서는 여러 부류의 죽음이 나오는데, 어머니의 손에 죽는 아기들, 성소에서 죽임을 당하는 제사장과 선지자들, 길거리에서 칼에 죽은 늙은이, 젊은이, 청년들과 처녀들 등장합니다. 이들이 모두 주의 날, 즉 심판의 날에 하나님께서 부르신 적들로 인해 모두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고 탄원하며 애곡합니다. 시온의 자녀들을 지독한 심판을 이제 멈추고 구원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시지만,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요즘 고통은 무엇입니까? 그 고통을 통해 깨닫고 회개해야 할 것이 있다면, 빨리 회개하고 주님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항상 주의 곁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픔을 토로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기도의 교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이고, 진정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심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자녀와 교회와 나라 그리고 온 세상을 위해서 기도해야할 때입니다. 멸망한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 말씀으로 살아나게 해달라고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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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03)


맹렬하게 진노하시는 하나님

예레미야애가 2장 1-10절


하나님께서는 항상 자기 백성의 편에서 일하십니다. 항상 당신 편일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우리가 어느 편에 서느냐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우리 편이 될 수도 있고, 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은 하나님을 공경한다면서도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은 부패된 신앙과 영적인 흑암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노의 막대기로 치십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돌봄을 받기 위해서는 항상 하나님의 편에 서 있어야 합니다. 항상 주님과 동행하는 힘찬 발걸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때론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을 만날 수 있지만, 믿음의 눈으로 해석하고 하나님의 의미를 찾는 날이 되길 바랍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2장에서도 1장에서처럼 알파벳순으로 이루고 있습니다. 2장은 시온과 하나님의 백성이 받는 재앙이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황폐하게 하는 일에 하나님께서 앞장섭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결코 정치적, 군사적 패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었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전까지는 선지자와 예루살렘이 탄식의 마음을 토로했다면, 이제 하나님의 분노의 감정이 전면에 드러납니다. 본 장에서는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와 분노에 온 유다가 통곡합니다.

 

시온에 진노를 내리신 하나님(1-3)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반대로 잘못하면 원수가 되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배반하고 반대편에 설 때, 보호의 손길을 거두시고 진노의 손길로 우리를 대하십니다. 지금 하나님을 적과 원수로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편에 서시길 바랍니다. 

1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딸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는가 이스라엘의 아름다움을 하늘에서 땅에 던지셨음이여 그의 진노의 날에 그의 발판을 기억하지 아니하셨도다 2주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들을 삼키시고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셨음이여 노하사 딸 유다의 견고한 성채들을 허물어 땅에 엎으시고 나라와 그 지도자들을 욕되게 하셨도다 3맹렬한 진노로 이스라엘의 모든 뿔을 자르셨음이여 원수 앞에서 그의 오른손을 뒤로 거두어 들이시고 맹렬한 불이 사방으로 불사름 같이 야곱을 불사르셨도다(1-3)

선지자 예레미야는 1장에서 예루살렘의 멸망한 후 그 참상을 탄식하였습니다. 아무도 그들을 위로해 줄 사람이 없었고, 주변 나라들은 바벨론의 침공할 때 도와서 이스라엘의 멸망을 재촉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2장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잃어버린 예루살렘의 모습에서 시작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그들의 죄악 때문이었다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성은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었습니다. 예레미야애가는 1장에 이어서 탄식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시편 탄식시는 탄식하다 마지막에 회복이나 기대에 대한 신뢰 고백으로 끝을 맺지만, 예레미야애가는 거의 대부분 탄식으로만 끝납니다. 계속적으로 예루살렘의 참상을 반복해서 말하는데, 단적으로 그만큼 얼마나 힘든 상태인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⑴ 아름다운 성전을 파괴하심(1)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자기가 사랑했던 예루살렘을 얼마나 철저하게 징계 하셨는지를 설명합니다. ‘슬프다’라는 ‘에카(הכיא)’로 시작합니다. 이 단어는 장송곡의 분위기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처음을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1)라고 시작하고, ‘여호와께 진노하시는 날에는’(22)으로 마칩니다. 본 장의 핵심 주제가 ‘여호와의 진노’라는 것을 잘 드러냅니다. 한 가지 잊어서는 안 되는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복도 허락해 주시지만 반대로 재앙도 내리신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2장에서는 화법(話法)을 3인칭 화자로 등장시켜 예루살렘과 거리를 두고 상황을 설명합니다. 선지자는 예루살렘을 상징하는 ‘땅 시온’, ‘이스라엘의 아름다움’이란 두 가지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기뻐하사 자신을 친구처럼 나타냈습니다. 하지만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노하셨다는 점입니다. 진노하심의 첫 번째 징계는 ‘딸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는가?’(1)는 것입니다. ‘구름’은 출애굽기에서 광야를 행진할 때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성막을 짓거나 성전을 지었을 때도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으로 구름이 성전과 성막을 덮었습니다. 이제는 구름이 여호와의 심판을 상징으로 변했고, 성전에는 여호와의 심판을 상징하는 구름으로 덮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예루살렘의 아름다움을 하늘에서 땅에 던지셨음이여!’라고, 심판의 구름이 임하자 아름다운 예루살렘 성전은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그 짓밟힌 아름다움이 예루살렘 성 전체로 확장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광을 땅에 던져 완전히 비참한 상황으로 만드셨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그의 발판’은 기본적으로 언약궤를 나타내지만, 여기서는 확대되어 언약궤가 있었던 시온 전체를 상징합니다. 성전과 언약궤만 있으면 안전하리라는 이스라엘의 신학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궤가 있는 예루살렘 성마저 버리셨습니다. 심판은 하늘에서 땅으로 던지셨습니다. 언약은 깨어졌고 기억에서 사라졌습니다. 사람들도 기억하고 싶지 않는 사건들이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배신과 거짓으로 가득한 이스라엘을 기억하고 싶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매우 강력한 표현들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의 파멸과 몰락을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무자비하게 다루셨습니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토록 미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언약을 맺지 않았다면 그토록 잔인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망각의 하나님께서는 무서운 분이십니다. 마치 치매에 걸린 부모님이 자녀를 타인으로 대한 것처럼, 그 동안 관계를 잊으시고 무자비한 심판으로 매우 잔인하게 다루셨습니다.

⑵ 견고한 성벽까지도 파괴하심(2)

이전에 이스라엘은 매우 융성하여 근처 나라들보다 강력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반대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먼저 스스로 욕되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긍휼히 여기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서 두셨습니다. 그 결과 야곱의 성읍인 예루살렘은 바벨론에 의해 정복당한 것입니다. 난공불락의 견고한 성채들도 무너졌습니다. 특히 예루살렘의 강함을 ‘도성’, ‘성벽’, ‘망대’, ‘성문’, ‘빗장’ 등으로 다양하게 묘사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강력한 요새들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거두시자 견고한 성이 잿더미로 변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발등상이며 이스라엘의 영광인 성전도 돌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발판인 언약궤까지 원수들에게 빼앗기고 짓밟히게 하셨습니다. 그날에는 나라 전제와 지도자들도 수치를 당했습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긍휼을 떠난 사람들을 많이 소개합니다. 가인은 범죄한 후 여호와 앞을 떠나서 먼저 한 일은 성을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그 성의 이름을 ‘에녹성’, 즉 ‘선생’이라고 불렀습니다(창세기 4:17-18). 가인은 자신이 왕으로 군림 하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성은 자기 방어와 보호 본능에서 나온 불신의 벽이었습니다. 그 성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가 결코 될 수 없었습니다. 노아 홍수 후 바벨탑을 쌓은 것도 홍수와 같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기 위한 안전 대책이었습니다(창세기 11:1-9). 사람들은 오늘도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끊임없이 성을 쌓습니다. 전혀 안전 조치가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지 않는 안전은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성도들은 이 세상을 안전하게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성도들의 목적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안전을 추구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안전은커녕 파멸과 멸망을 맛보고 말았습니다.

⑶ 이스라엘의 능력을 제거하심(3)

다음으로 선지자는 여호와의 진노가 ‘이스라엘의 모든 뿔을 자르셨음이여’라고 소개합니다. 여기서 ‘뿔’은 힘과 권능을 상징하고, 오른손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잘랐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모든 힘과 권위 그리고 왕권을 거두어 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오른손’은 원래 하나님의 백성을 돕던 손길이지만, 이제는 원수들 앞에서 그 손을 거두십니다. 더 어려운 것은 하나님의 돕는 손길마저 없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을 돕지 않은 것뿐만 아니라 야곱을 불살라 버리셨습니다. 모든 것을 태우며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 불 심판으로 야곱은 흔적도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원수가 되신 것입니다. 예레미야애가는 일관되게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리신 것을 말씀하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불의에 눈감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자신의 불의로 타인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못 본척하면서 사랑하신 분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시자 예루살렘은 너무 쉽게 무너졌습니다. 친히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이신 성전도 돌보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보다 성전과 법궤를 우상화한 이들을 향한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결과입니다(예레미야 3:16). 자신의 죄와 하나님의 진노의 심각성을 무디게 하는데 십자가의 사랑을 이용한다면 십자가마저 수단과 우상으로 전락할 것입니다.

 

시온의 원수가 되신 여호와(4-5)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맹목적인 사랑을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면 언제든 하나님의 능력과 긍휼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하신 적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을 이길 수 있는 세력은 없습니다. 하지만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원수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자신 밖에 없습니다.

4원수 같이 그의 활을 당기고 대적처럼 그의 오른손을 들고 서서 눈에 드는 아름다운 모든 사람을 죽이셨음이여 딸 시온의 장막에 그의 노를 불처럼 쏟으셨도다 5주께서 원수 같이 되어 이스라엘을 삼키셨음이여 그 모든 궁궐들을 삼키셨고 견고한 성들을 무너뜨리사 딸 유다에 근심과 애통을 더하셨도다(4-5)

이 단락의 핵심은 ‘원수 같이’라는 표현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원수와 대적으로 등장합니다. 아무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이라고, 그분의 역사가 기억나지 않을 만큼 혹독하게 심판하십니다.

⑴ 진노의 불을 내리신 하나님(4)

하나님께서는 자녀와 같았던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지키셨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이스라엘 배신의 결과 ‘원수 같이’와 여기신 것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던 그의 오른손을 거두셨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대적에게 향할 손으로 활을 잡으시고 이제 반대로 이스라엘을 향해 유다에게 활을 쏘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지키던 여호와의 오른손이 이제는 분노를 불처럼 일으키며 딸인 시온의 장막 위에 쏟고 계셨습니다. 예레미야서에서 선지자는 ‘주를 알지 못하는 이방 사람들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아니하는 족속들에게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 그들은 야곱을 씹어 삼켜 멸하고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였나이다 하니라’(10:25)라고, 야곱을 삼킨 이방인에게 내려달라고 요청한 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진노의 불을 열방이 아닌 야곱에게 쏟아놓으셨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해 인내하셨고, 하나님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⑵ 애통을 더하게 하신 하나님(5)

이전에 예루살렘과 유다의 다른 성읍들은 견고하고 요새화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원수가 되어 진노하사 그들을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삼키다’란 반복적으로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여호와께서 유다 땅을 철저히 파괴하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마치 삼킨 것처럼 파괴되었습니다. 과거에 이스라엘은 환란과 적에 공격에 대하여 위풍당당한 성들이었습니다. 이러한 궁궐과 성들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는 성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성으로 무너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궁궐과 성들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두부가 깨어지듯 손쉽게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로 딸인 유다는 슬픔과 애통에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시온 성전을 허무신 여호와(6-7)

이스라엘에게는 역설과 모순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버리면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멸망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면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우상까지도 불태워지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신 막을 거두시면 더 이상 안전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망각했던 것입니다.

6주께서 그의 초막을 동산처럼 헐어 버리시며 그의 절기를 폐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절기와 안식일을 잊어버리게 하시며 그가 진노하사 왕과 제사장을 멸시하셨도다 7여호와께서 또 자기 제단을 버리시며 자기 성소를 미워하시며 궁전의 성벽들을 원수의 손에 넘기셨으매 그들이 여호와의 전에서 떠들기를 절기의 날과 같이 하였도다(6-7)

하나님께서는 작정하신 몇몇 사람을 데려가서 천국에 채우시려는 분은 아니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하나님을 닮은 자,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자만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나라를 사모하지 않는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도 그리고 하나님 성전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지키는 절기와 제사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성전 파괴와 절기를 폐하신 모습을 묘사합니다.

⑴ 절기를 폐하신 하나님(6)

이스라엘은 이전에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켜 행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 중에 거룩한 임재의 표시를 남겨 놓으셨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아름답게 해주시던 것들이 사라졌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초막’은 이스라엘이 절기를 지킬 때 하나님을 만나는 곳으로 임시 거처(居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무지막지한 힘으로 파괴하시고, 흔적도 남지 않은 동산처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이곳은 더 이상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완전하게 파괴시킨 것입니다. 좀 더 확장시켜 이해하면 이스라엘과의 만나는 절기를 흔적도 없이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도 폐하신 것입니다. 다시 반복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시온에서의 절기와 안식일을 잊어버리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포로로 끌려가고,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어 시온에서 더 이상 절기와 안식일을 지킬 수 없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와는 맹렬한 진노를 내려 왕과 제사장들이 큰 치욕을 당하도록 버려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고 지키길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런 역할을 온전히 못하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그들의 영적인 권위와 제사를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책임은 일반 백성들의 책임보다 무거웠습니다.

⑵ 제사를 거부하신 하나님(7)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제단을 버리시고 자신의 성소를 미워하셨다고 합니다. ‘제단을 버렸다’는 것은 ‘거부하였다’는 뜻입니다. 선지자는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이유를 여호와가 제단을 거부하시고 미워하셨기 때문으로 해석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망하기 직전에 예루살렘 성에서는 각종 이방 신들을 위한 제의가 행해졌으며, 죄 지은 손과 피 흘린 손으로 부정한 제사를 드리는 경우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종교와 관련된 모든 날과 상징물들이 모두 파괴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성전, 초막, 절기와 안식일, 제단, 성벽, 성문, 왕과 대신들, 예언자들, 장로들 등 모든 종교 제도들을 파괴하시고, 가장 거룩한 지성소마저 원수들의 손에 넘겨주셨습니다. 또한 궁전의 성벽도 원수의 손에 넘기셨다고 표현하는데, 이는 전쟁의 맥락에서 ‘ ~를 ~의 손에 넘겨준다.’라는 말이 승리를 약속하는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언제나 이 약속을 듣고 전쟁에 나가 승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호와는 원수와 손잡고 그들의 손에 성벽을 넘겨주십니다. 원수들은 여호와의 전에서 승리를 축하하며 잔치를 열고 떠들썩하게 먹고 마십니다. 그 모습에서 마치 예전에 절기의 축제를 즐기던 이스라엘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그러면서 씁쓸하고 가슴 아픈 풍경에 애통해합니다. 성도들에게 가장 비참한 결과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불행과 고난도 하나님과 함께하면 소망이 있습니다. 아직은 끝이 아니라 붙잡을 수 있는 기회가 있고 힘차게 날아오를 순간이 있습니다. 하지만 물질이 풍부하고 염려할 것이 전혀 없으며 모든 일들이 형통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떠나셨다면 절망의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더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정한 인간들의 종교적인 행위만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왕과 대신들을 포로로 잡아갔으며,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백성들에게 성막이나 절기와 안식일, 제단 그리고 왕이나 제사장도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것이 더러워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대하신 것은 자기만족을 위해 종교행위가 아니라 자기 백성들과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화해의 제단을 버려졌습니다. 각종 번제물을 드림으로 용서와 기회는 사라졌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지성소에 거하지 않습니다.

 

시온 성벽을 허무신 여호와(8-10)

지금은 교회들이 고난을 받는 시대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처럼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고난은 아닐지라도 교회들이 직간접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다. 이것은 스스로 잘못된 행동들을 통해 부끄러움을 자초한 것이며 그로 인해 영적인 능력을 잃은 힘겨운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들이 고난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떤 자세를 취해야 살아가야 합니까?

8여호와께서 딸 시온의 성벽을 헐기로 결심하시고 줄을 띠고 무너뜨리는 일에서 손을 거두지 아니하사 성벽과 성곽으로 통곡하게 하셨으매 그들이 함께 쇠하였도다 9성문이 땅에 묻히며 빗장이 부서져 파괴되고 왕과 지도자들이 율법 없는 이방인들 가운데에 있으며 그 성의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묵시를 받지 못하는도다 10딸 시온의 장로들이 땅에 앉아 잠잠하고 티끌을 머리에 덮어쓰고 굵은 베를 허리에 둘렀음이여 예루살렘 처녀들은 머리를 땅에 숙였도다(8-10)

선지자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모습을 계속해서 기록합니다. 이제 아름답고 견고했던 성벽이 허물어지는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후손들에게 죄악의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장면을 후손들이 잊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⑴ 성벽을 파괴하신 하나님(8)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벽을 헐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아름다운 성전을 허무셨던 여호와께서 이제는 이스라엘의 보호 장치인 예루살렘 성벽들마저 허무십니다. 이 장면은 매우 자세하게 나타나는데, 성벽을 헐기로 결심하신 하나님께서 줄을 띠십니다. 여기서 줄은 ‘다림줄’을 의미합니다. 원래 다림줄은 집이나 건물을 지을 때 주로 반듯하게 세우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성벽을 허무실 때 다림줄로 측량하며 매우 계획적이고 정밀하게 파괴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성벽을 허무는 일에서 손을 거두지 않고 부지런히 계획한 일을 실행하신다고 고백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역을 보며 성벽과 성곽은 통곡합니다. 여기서 성벽과 성곽을 다시 의인화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성벽의 무너짐을 바라보는 예루살렘 사람들의 심정을 표현한 것입니다.

⑵ 말씀이 사라지도록 만드신 하나님(9)

이스라엘에 점점 비참한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성문은 넘어져 땅에 묻히고 문빗장은 부서져 파괴되었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성이 완전히 파괴되어 더 이상 예루살렘 사람들을 지켜줄 것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침략 속에서 왕과 제사장은 이방인의 나라로 끌려가고, 그 성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묵시를 받지 못합니다. 이미 하나님의 인내와 자비의 시간이 지났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많은 예언자들을 통해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제 하나님은 더 이상 말씀하시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⑶ 장례식처럼 심판하신 하나님(10)

이런 재앙에 대한 반응으로 장로들은 애도하며 침묵하고, 예루살렘의 처녀들은 땅에 머리를 대고 엎드립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으로 위로를 받을 곳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선지자는 마치 장례식장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묘사합니다. 이것은 깊은 슬픔과 절망에 망연자실한 모습입니다. 장로와 처녀라는 대조되는 묘사는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이런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에게 예배와 안식은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과 영광이며 거룩으로 단장하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느새 예배는 짐이 되고 안식일은 지겨운 시간이 되었습니다. 영광과 거룩을 버리고 쾌락과 탐심을 추구하는 세속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이 싫었습니다. 말씀은 구속과 억압의 상징이었고 자기 죽음은 멍청한 짓이며 섬김과 헌신은 열정을 강조하는 노동 착취이며, 복음을 위해 권리를 포기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며, 복음만이 진리라고 외치는 것은 미개인이나 하는 수준 낮은 것이라고 치부해버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멸시하고서 무사한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묵시를 외면한 백성들의 성인 예루살렘을 하나님께서 원수들과 함께 직접 파괴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그들의 유희를 통곡으로 바꾸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맹렬한 심판을 하셨습니다. 그들을 너무도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직접 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브리서 12:8)라고 하였습니다. 징계를 통한 주의 부르심에 겸손히 돌아가야 합니다. 지금은 회개하고 돌아갈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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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02)


징벌을 내리시는 하나님

예레미야애가 1장 12-22절


중환자들을 위한 ‘무균실’을 만들고 아무나 출입하지 못하는 통제지역입니다. 이 실은 먼지보다 더 작은 바이러스와 같은 것까지도 통제하는 곳입니다. 무균실처럼 하나님의 거룩은 아주 작은 죄까지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도 자신과 같이 거룩함을 담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죄인들을 십자가의 은혜로 용서하시고 거룩하셨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처럼 본받아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용서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죄악 가운데 살아가는 자녀들을 벌하십니다. 진정으로 자녀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아파하시며 진노하신 것입니다.

 

본문에는 예레미야가 징벌 당한 비참한 이스라엘을 보면서 매우 가슴 아파는 애가입니다. 예레미야는 앞서 바벨론 침공으로 폐허가 된 예루살렘의 참혹하고 황폐하게 된 현실을 설명했습니다. 이제 그는 예루살렘을 여성으로 의인화하여 예루살렘처럼 고통을 겪은 사람이 있는지를 물으면서 시작합니다. 선지자는 마치 자신이 고통을 겪을 것처럼 설명해갑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합니다.

 

뿌린 대로 심판하신 하나님(12-17)

선지자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에 내린 재앙이 여호와의 심판이라고 분명히 고백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심판에서 위로해주고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절망합니다. 그러나 심판이 자신들의 죄 때문이라는 것과 심판을 행하시는 여호와는 의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확실히 고백합니다. 

12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나의 고통과 같은 고통이 있는가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그의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 13높은 곳에서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 이기게 하시고 내 발 앞에 그물을 치사 나로 물러가게 하셨음이여 종일토록 나를 피곤하게 하여 황폐하게 하셨도다 14내 죄악의 멍에를 그의 손으로 묶고 얽어 내 목에 올리사 내 힘을 피곤하게 하셨음이여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자의 손에 주께서 나를 넘기셨도다 15주께서 내 영토 안 나의 모든 용사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고 성회를 모아 내 청년들을 부수심이여 처녀 딸 유다를 내 주께서 술틀에 밟으셨도다 16이로 말미암아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 같이 흘러내림이여 나를 위로하여 내 생명을 회복시켜 줄 자가 멀리 떠났음이로다 원수들이 이기매 내 자녀들이 외롭도다 17시온이 두 손을 폈으나 그를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사방에 있는 자들에게 명령하여 야곱의 대적들이 되게 하셨으니 예루살렘은 그들 가운데에 있는 불결한 자가 되었도다(12-17)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루살렘에 내린 재앙이 여호와의 심판이란 사실을 분명히 고백합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신보다 약해서가 아닙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으로 돌려드렸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돌아오라고 해도, 오히려 돌아오라고 전한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멸망당함에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이스라엘을 위로하고 도와줄 사람이 없는 현실에 대해 절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은 매우 정당했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이제 선지자는 육체에 미친 고통을 하나씩 열거하기 시작합니다. 먼저 뼈가 타는 듯한 아픔을 겪습니다. 움직이고 활동하는 발까지도 꼼짝도 할 수 없고, 손도 목과 함께 묶여 숨만 겨우 쉴 뿐입니다. 총체적으로 힘이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마치 짐승을 나무에 매달아 놓은 것과 같습니다.

⑴ 누구나 알 수 있는 심판(12)

선지자는 서두에서 설명한 것처럼 예루살렘을 여성으로 의인화(擬人化)하여 설명합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고통을 바라보는 자들에게 고통을 호소하며 동정을 베풀어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 호소는 길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이스라엘이 비참하게 멸망당한 이유를 묻습니다. 이렇게 묻는 것은 이스라엘 멸망의 책임이 비단 한 두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있다는 의미입니다. 선지자는 자신보다 더 괴로운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것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가장 괴로울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날’은 구약에서는 ‘주의 날’을 의미합니다. 이 날은 주님이 임하신 날이며, 주님이 임하시면 심판과 구원이 함께 합니다. 창세기에 나온 바벨탑 사건(창세기 11장)에서도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사건이며, 심판과 구원이 일어났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심판과 구원을 받겠습니까? 이스라엘은 열방과 이방이 심판을 받지만 언약 백성인 자신들은 받는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이런 잘못된 확신을 깨기 시작했습니다. 심판의 대상은 언약을 배반한 이스라엘에게도 동일하게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점점 교회들이 타락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타락해가는 것에 대해 목회자나 특정 그룹의 책임이 아니라 성도들 모두의 책임입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고쳐야할 일이 있다면 자신부터 고쳐야 합니다. 냉소적인 태도로 비판할 것이 아니라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해야 마땅합니다.

⑵ 불로 묘사된 하나님의 심판(13)

이제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불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를 불로 심판하셨듯이 예루살렘을 심판하셨다는 것입니다. ‘내 발 앞에 그물을 치사’는 어부가 물고기를 잡는 것처럼 예루살렘을 잡으려고 공격적이셨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발 앞에 그물을 친다는 것은 어부가 물고기를 잡는 것처럼 잡으려고 공격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도망가지 못하고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무게로 인해 선지자는 피곤하고 힘들어 흔들리고 있습니다.

⑶ 자기 백성을 넘기신 심판(14)

선지자는 모든 것들이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그 죄악 때문에 강력한 바벨론에게 자기 백성을 넘기셨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나의 죄악의 멍에’란 이스라엘의 죄악이 자신을 얽매는 멍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이 만든 죄악의 멍에를 이스라엘의 목에 씌우신 것입니다. 그 무게로 인해 이스라엘은 힘들어 흔들렸습니다. 이제는 이스라엘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손을 묶어서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자에게 넘겨졌습니다. 이것은 현재의 심판이 자신이 쌓아 올린 죄악 때문이라는 것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이러한 상황은 이스라엘이 맞이하고 있는 현실이었습니다. 여호와의 날, 심판의 날에 열방이나 이방이 아닌 이스라엘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망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뜻하지 않게 당한 멸망이 크나큰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호소한 것입니다.

⑷ 청년 용사도 필요 없는 심판(15)

여호와께서는 예루살렘 성 안에 있던 모든 용사를 물리치셨고 젊은 남자들을 성회에 모아 부수셨습니다. 성회(聖會)는 원래 여호와께 감사하고 여호와의 보호를 구하는 모임인데, 오히려 이 모임 때 이스라엘을 부수는 역설적인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온 유다 성읍에 큰 살육으로 포도즙 틀에서 포도즙이 흘러나온 것처럼 살육의 현장에서 피가 흘러 나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수들을 불러들여 자신의 자녀인 유다를 포도즙 틀에 넣고 짓밟은 것처럼 심판하였습니다. 선지자가 느끼는 심판의 무서움과 잔혹함이 잘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 모든 것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날에는 용사와 청년도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용사와 청년과 처녀들이 모두 사라지는 절망적인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특히 청년과 처녀는 미래를 암시함으로 이스라엘의 미래는 절망적이라는 의미입니다. 예루살렘은 미래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현실이 힘들고 고통과 아픔이 있더라도 보장된 미래가 있다면, 결국은 좋아질 것입니다. 결국은 위기가 기회라는 확신만 있다면, 지금 당하는 고통이 힘들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여인에게 작은 소망이나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그들의 땅으로 두려움과 영원한 웃음거리가 되게 하리니 그리로 지나는 자마다 놀라서 그의 머리를 흔들리라”(예레미야 18:16)고 미리 경고하셨습니다. 그 경고대로 유다에게 큰 고통을 내리셨습니다. 유다 백성에게 불을 내리시고, 그물을 치시고, 멍에를 얽어매셨습니다.

⑸ 하나님 심판에 대한 반응(16)

이제는 여호와의 징벌에 대한 선지자의 반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이로 인해 자신의 눈에서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다며 자신의 비통함을 표현합니다. 이스라엘이 멸망당한 것에 슬프고 비참한 것은 위로할 자, 생명을 소생시켜줄 자가 자기로부터 멀리 떠났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회개하라고 했지만 회개하지 않음으로 당한 모습을 조롱하지 않았습니다. 끝내 심판을 면하지 못한 자기 백성들을 보면서 슬퍼하고 있습니다. 회복에 대한 희망이 없을 만큼 혹독한 재앙임을 알고 절망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언제까지 지속할 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회복될 수 있는 상태에서 받는 징벌은 그래도 견딜 만하지만, 회복에 대해 아무런 희망이 없는 상태에서 내려진 재앙은 매우 절망적입니다. 또한 선지자는 원수들의 뛰어난 능력으로 인해 나의 자녀, 즉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들이 황폐하게 되고 진멸되었다고 고백합니다.

⑹ 도와줄 사람이 없는 심판(17)

선지자는 시온(예루살렘)을 주어로 등장시켜서 ‘시온이 두 손을 폈으나 그를 위로할 자가 없도다’라고 합니다. 친구 같이 생각했던 나라들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두 손을 펴는 것’은 도움을 구하는 행동으로, 예레미야 4:31에서 해산하는 여인이 극심한 고통 중에 도움을 구하기 위해 손을 펴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런 시도까지도 헛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위로할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위로자가 되시기는커녕 오히려 이스라엘 사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스라엘의 적이 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여호와가 다른 나라에 명령을 내리시는 모습은 그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시라는 예언자들의 사상과 일맥상통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자신들을 위로하고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절망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신 분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심판은 정당했다는 것만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타락을 책임져야할 사람 따로, 비판해야할 사람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책임으로 알고 자신이 고칠 것이 있으면 냉소적인 태도를 함께 울며 주님의 긍휼을 간구해야 마땅합니다. 선지자는 주변 나라들에게 짓밟힌 이스라엘은 그들 가운데 불결한 자가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이곳에서 말하는 ‘불결’인 ‘니다’(הדּנ)는 기본적으로는 ‘여성의 생리’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또 다른 의미인 ‘오물’, ‘혐오스러운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이제 예루살렘은 더 이상 주변 나라들로부터 공주가 아니라, 이제는 오물 취급을 받아서 혐오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여호와로부터 버려진 여호와의 도성은 사람들에게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성도들도 이스라엘처럼 착각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성도와 교회의 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착각입니다. 교회와 성도가 언약에 신실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성도 편이 아닙니다. 악을 행하는데도 그것을 지지한다면, 하나님께서 악을 좋아한다는 이상한 논리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없이 사랑하지만 진리 안에서 사랑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악을 행하고 있지만, 주일마다 예배에 빠지지 않고, 매일 묵상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안전하게 지키실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악을 사랑하면서도 하나님을 찾는 것은, 남편이 있음에도 정부(情夫)와 불륜에 빠진 부정한 일과 같습니다.

 

여호와께 죄를 인정함(18-19)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인생은 결코 아름답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치장하지 않으면, 그것은 오물을 뒤집어 쓴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인간의 그 무엇으로 과시하고 꾸미고 노력해도 전혀 아름다워 보지지가 않습니다.

18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그러나 내가 그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 너희 모든 백성들아 내 말을 듣고 내 고통을 볼지어다 나의 처녀들과 나의 청년들이 사로잡혀 갔도다 19내가 내 사랑하는 자들을 불렀으나 그들은 나를 속였으며 나의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들의 목숨을 회복시킬 그들의 양식을 구하다가 성 가운데에서 기절하였도다(18-19)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것은 혹독하지만, 이것은 매우 정당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오물 취급하고, 더 나가서 하나님을 존재하지 않는 신처럼 취급한 죄를 생각하면 당연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그렇게까지 심판하실 줄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것은 이 세상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란 것을 증명하는 방법이기도 하였습니다.

⑴ 심판에도 의로우신 하나님(18)

선지자는 이와 같이 맹렬한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라고 고백합니다. 어쩐지 ‘매를 든 하나님’과 ‘의로운 하나님’은 조화롭지 않아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는 의롭다고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유다가 당하는 고난은 그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심한 환란을 당했지만 여호와는 의로우신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모든 환란의 원인은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 축복과 보호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거역하는 자에게는 심각한 징계를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이 받을 복과 벌이었습니다. 선지자는 지금 자신들의 고난은 언약을 어긴 벌을 받는다고 고백합니다. 예루살렘 멸망의 원인을 외적의 강함이나 악함에서 찾지 않고 자신의 죄에서 찾는 선지자의 모습은 매우 신앙적입니다. 성경은 외적인 요인이 아니라 내적인 부패, 즉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않음으로 인해 교회가 어려워진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따라서 이런 죄의 고백이 필요하며 예루살렘처럼 망하기 전에 여호와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⑵ 하나님을 배반한 이스라엘(19)

사랑하던 자의 배반에 탄식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여기서 사랑하던 자는 여호와를 제외하고 이스라엘이 의지하던 모든 것입니다. 그들이 의지한 것은 이방나라들, 이방신들, 재물 등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의지하면 잘 살 줄 알았는데, 정작 환란 날에 이 모든 것은 아무 것도 위로자나 구원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는 제사장과 장로들이 등장한데, 이들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선지자는 평상시에 권력을 행하던 자들이 이제는 처참하게 양식을 찾아 헤매다가 성 안에서 죽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유다가 이렇게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죄였습니다. 죄의 결과는 알면서도 쉽게 죄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만큼 달콤해 보지만 그 결과는 비참합니다. 뒤늦게 후회해도 결과를 돌이키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불의한 일에 대해 진노하십니다. 의로운 하나님께서 진노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혹시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호소하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긍휼을 구하는 선지자(20-22)

범죄한 사람들에게 살 길은 오직 하나, 겸손히 회개하는 일입니다. 아픈 현실을 보며 아파할 필요가 있고, 슬픈 현실을 슬퍼할 필요도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에는 진중한 성찰과 진심을 담은 회개가 필요합니다. 눈물은 단지 아픔과 슬픔의 눈물을 넘어서, 회개의 눈물이 되어야 합니다.

20여호와여 보시옵소서 내가 환난을 당하여 나의 애를 다 태우고 나의 마음이 상하오니 나의 반역이 심히 큼이니이다 밖에서는 칼이 내 아들을 빼앗아 가고 집 안에서는 죽음 같은 것이 있나이다 21그들이 내가 탄식하는 것을 들었으나 나를 위로하는 자가 없으며 나의 모든 원수들은 내가 재난 당하는 것을 듣고 주께서 이렇게 행하신 것을 기뻐하나이다 그러나 주께서 그 선포하신 날을 이르게 하셔서 그들이 나와 같이 되게 하소서 22그들의 모든 악을 주 앞에 가지고 오게 하시고 나의 모든 죄악들로 말미암아 내게 행하신 것 같이 그들에게 행하옵소서 나의 탄식이 많고 나의 마음이 병들었나이다(20-22)

사람들은 범죄 후에 비참한 결과를 맺을 것을 알면서도 인간은 어리석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다의 죄악을 단순하게 후회하며 낙심한 것은 아닙니다. 원인을 찾아 그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탓을 돌리지 않고 자신에게 돌리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자신들의 모습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멸망시켰던 원수들이 저지른 악행을 하나님께 고발합니다.

⑴ 자기 죄로 인한 고백(20)

예레미야 선지자는 다시 11절처럼 ‘여호와여 보시옵소서’라고 자신들의 형편을 봐달라는 탄원합니다. 예루살렘의 비참한 처지를 탄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반역한 자신의 죄를 탄식합니다. 먼저 자신의 환란이 심각하지만 모든 것이 자신의 죄 때문인 줄 안다고 고백합니다. 개인과 사회의 고통스런 현실을 직면하며 정직하게 탄식하되, 이러한 상황을 야기한 우리의 죄를 더욱 절실히 탄식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구원의 은총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고린도후서 7:10).

⑵ 원수를 심판해 달라는 청원(21)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현재 당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하나님께 자비와 공의로 호소합니다.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주변 나라들에게 심판을 요청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보다 더 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기 위한 도구로 그들을 잠시 사용하셨던 것이지만, 이제 자신에게 행한 일에 대해 같이 심판을 받아야 된다고 호소합니다. ‘주께서 선포하신 날’(21b)은 12절에서 언급된 ‘진노하신 날’과 반대되는 여호와의 날입니다. 예언서에는 두 가지 ‘여호와의 날’이 언급되는데,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날’과 ‘이방인을 심판하시는 날’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하기 전까지 여호와의 날이 자신들을 구원하고 이방인들을 심판하는 날로만 생각하며 안이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동일하게 임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원수의 행위를 심판해주시기를 요청합니다. 범죄하여 심판을 받은 것처럼, 원수들의 악행도 동일하게 판단하고 벌하시라고 촉구합니다. 그들은 시온을 약탈하고 학살한 책임을 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의 약자들과 소외된 사람들이 착취당하고 억울한 일을 겪지 않도록, 이 땅 구석구석에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의 손길이 미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⑶ 원수 죄를 들어 내달라는 청원(22)

이스라엘을 심판할 ‘여호와의 날’이 이미 도래했고, 다음 순서로 이방인을 심판할 ‘여호와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의’와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이 비록 하나님께 반역하여 벌을 받게 되었지만, 회초리로 쓰였던 원수들도 이스라엘보다 선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그들의 악함대로 그들을 심판해달라며 공의의 하나님께 탄원하며 시를 마칩니다. 그들의 죄악을 모든 사람들 앞에 들어나게 하시고, 그 죄과에 대한 심판을 공의롭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이것은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끝까지 붙들며 고난의 상황을 이겨 나갑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을 위해 자신의 일처럼 하나님께 간구한 것처럼, 우리들도 자신과 교회 그리고 나라의 범죄들을 통렬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디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대로는 계속 죄악으로 가득한 한국교회는 안 됩니다. 모든 성도들이 예레미야처럼 공동체의 죄를 자신의 죄처럼 안고 기도하듯이 함께 기도하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진리 안에서 바르게 살아가도록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비참한 예루살렘의 멸망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고난의 의미를 깨닫고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이 의미를 깊이 묵상해보면, 우리에게도 닥친 고난이 단지 재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아프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희망의 근거가 됩니다. 우연한 재앙은 통제가 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진심으로 돌이키면 얼마든지 회복될 수 있습니다. 모두가 겸손하게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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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01)


멸망으로 비탄한 예루살렘

예레미야 애가 1장 1-11절


우리나라에서는 여성들을 중심으로 ‘미투(#Me Too)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과거에 자신이 당했던 성범죄를 고발하고 그 심각성을 알리는 캠페인입니다. 성폭력 가해자들의 실명이 공개되면서 유명한 정치인, 연예인, 문학가, 연극영화계 심지어는 종교계까지도 추잡한 민낯을 들어냅니다. 그들은 잘못된 행동으로 그 동안 쌓아왔던 모든 것을 파괴시켰습니다. 과연 이 가해자들만의 문제이겠습니까? 모두는 자신의 잘못된 행동이 들어난다면, 대부분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울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서 있는 것뿐입니다. 이처럼 한 때 모든 성 가운데서 여왕처럼 칭송을 받았던 예루살렘이 순식간에 과부와 노예처럼 변해 버렸습니다.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예루살렘, 특히 성전에는 매일 찬송 소리가 가득하던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성과 성전은 바벨론 침략으로 완전히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 광경을 보며 탄식하면서 작성한 시가 본 예레미야애가입니다. 이렇게 예루살렘 성이 파괴된 이유를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겨서 하나님의 은혜를 내려주시길 간구합니다.

 

멸망으로 황폐해진 예루살렘(1-4)

예레미야 애가는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고 철저히 파괴되고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가고 황폐하게 된 것을 소개하며 시작합니다. 아무런 희망이 없고 시온이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적들이 오히려 승승장구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돌봐주시길 간구합니다.

1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 2밤에는 슬피 우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들 중에 그에게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들도 다 배반하여 원수들이 되었도다 3유다는 환난과 많은 고난 가운데에 사로잡혀 갔도다 그가 열국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쉴 곳을 얻지 못함이여 그를 핍박하는 모든 자들이 궁지에서 그를 뒤따라 잡았도다 4시온의 도로들이 슬퍼함이여 절기를 지키려 나아가는 사람이 없음이로다 모든 성문들이 적막하며 제사장들이 탄식하며 처녀들이 근심하며 시온도 곤고를 받았도다(1-4)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슬프다’라는 ‘에카(הכיא)’로 시작하는데, 이 단어는 장송곡을 부를 때 사용하는 형식적인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이 애가는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장송곡(葬送曲)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사랑 받을 때는 철옹성 같았던 성에서 완전히 파괴되어 황폐된 성으로 변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단지 선지자뿐만 아니라 자녀로서 이스라엘을 본 하나님의 슬픈 마음일 것입니다. 이제 예루살렘 성은 인간의 교만과 자기만족의 어리석음을 나타내는 성읍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⑴ 과거와 대조되는 예루살렘(1)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현재의 모습을 보고 과거를 회상하고 있습니다. 활기차던 예루살렘 성은 적막한 외로운 도시가 되었습니다. 황폐해진 예루살렘을 보고 선지자의 첫마디는 ‘슬프다’였습니다. 예루살렘의 변화는 먼저 그 많던 예루살렘의 사람들이 사라졌습니다. 전쟁으로 죽거나 포로 끌려가서 쓸쓸하고 적막한 성이 되었습니다. 또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하고 화려했던 예루살렘 성이 이제는 남편 잃은 과부처럼 부모 없는 고아처럼 연약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공주처럼 존경받고 영화를 누리던 성이 이방나라에 조공을 받쳐야 하는 노예와 같이 비천한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선지자는 번성하고 화려했던 과거 모습을 생각할 때 현재 적막하고 초라한 모습은 더욱 비참하게 느껴졌습니다.

⑵ 철저하게 배신당한 예루살렘(2)

이처럼 번성하고 화려했던 예루살렘이 철저히 파괴된 모습을 목도했습니다. 선지자는 낮은 물론이고 밤새도록 통곡하며 뺨에 눈물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더 비참한 것은 이런 형편에도 불구하고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친구이던 주변 나라들이 예루살렘을 배반해서 원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던 자들 중에 그에게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들도 다 배반하여 원수들이 되었도다’라고 소개합니다. 이스라엘과 동맹 관계를 맺고 서로 돕기로 약속하면서 왕래하던 주변 나라들, 즉 애굽을 비롯해서 에돔이나 모압, 그리고 암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어려울 때는 이스라엘이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위기에 처하자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벨론에 협력해서 이스라엘의 멸망을 재촉했습니다. 하나님 대신 인간의 동맹을 의지하던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배신을 당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멸망당한 후에는 도움은커녕 오히려 조롱하고 괴롭히는 대적이 되었습니다. 이런 처지를 살피면서 선지자는 밤에 안식을 누려야할 시간까지도 밤새도록 눈물로 지새웁니다. 인생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건강과 부를 잃은 것도 아니라 주위에 위로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위로는 힘든 일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줍니다. 고통과 아픔을 공유하고 함께 나눌 위로자가 있다는 것은 재기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40:1)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⑶ 포로로 끌려간 예루살렘(3)

예루살렘이 함락되면서 예루살렘에 살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야 했습니다. 그 삶은 ‘유다가 쉴 곳을 얻지 못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구속으로 하나님의 도성을 이루고 살면서 하나님의 보호가운데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약속의 기업을 잃고 포로가 되어 이방 민족에게 온갖 핍박을 당하며 살아간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공주와 같던 이스라엘이 포로가 되고 과부와 고아 같은 상황을 볼 때, 충격적이고 그 고통으로 육체는 편히 쉴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어딘가에 살고 있었지만 살만한 곳이나 쉴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포로이며 이주민이며 떠돌이 생활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서도 몇몇 사람들 외에 고달픈 생활은 계속해야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도망치기도 했지만, 추적자들이 그들을 붙잡아 갔습니다.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 앞에서 편안하게 숨어 지낸 곳이 없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간 후에 황무한 예루살렘 성을 보면서 울며 탄식하면서 슬픈 시를 썼습니다. 다른 탄식시를 보면,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찬양이 마지막에 등장합니다. 예레미야애가에서는 시편보다 덜 두드러지게 나오지만 절망만 하지 않고 하나님께 대한 소망도 나타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과 싸우시는 ‘전사(戰士)’로 나타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시고 자기 백성들과 전쟁하시기 위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적하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에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격파하시고 언약궤를 가져가버린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더 나가서 자기 백성에서 고난을 가져다준 바벨론 같은 대리인들에게도 징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예레미야애가를 살펴보면서 우리들이 붙잡는 너무 값싼 희망을 경계해야 할 것을 가르칩니다. 무슨 악한 일을 행하든지, 하나님께서 눈감아주시고 용서하시고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대하지 않으심을 알아야 합니다. 한 때 신실했었다고 모든 것이 용서되고 정당화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들은 항상 오늘을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합니다. 과거에 이룬 업적으로 하나님께 사죄를 요청할 수 없습니다. 진심으로 회개하고 돌아와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마음인 겸비한 마음으로 섬기지 않으면,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대적할 수 있다는 것을 본 서가 보여줍니다.

⑷ 절기가 없어 황폐한 예루살렘(4)

예루살렘은 하나님께 드린 많은 제사로 풍성한 영광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으로 바벨론에 멸망당했습니다. 하나님께 사랑받던 이스라엘은 이방 민족들에게 사로잡혀 갔습니다. 예전 명성과는 전혀 다르게 볼품없는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과거의 명성은 살아지고 이제 황폐하고 쓸쓸한 성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기로 인해 대부분 1년에 세 번씩 예루살렘에 올라 왔습니다. 그 시기에는 예루살렘 거리마다 절기를 지키려는 사람들로 넘쳐났고 순례자들이 가득했습니다. 예루살렘의 도로는 하나님께 절기의 제사하러가며 기뻐하는 행렬로 가득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절기를 지키려는 사람들조차도 사라진 적막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시온의 도로들이 슬퍼함이여 절기를 지키려 나아가는 사람이 없음이로다 모든 성문들이 적막하며 제사장들이 탄식하며 처녀들이 근심하며 시온도 곤고를 받았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이 없으니 제사장도 할 일이 없어지고, 제사 예식을 수종을 들며 춤추던 처녀들도 일들이 없어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에서 점점 기쁨은 살아지고 근심으로 가득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이스라엘을 향해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외쳤습니다(이사야서 1:11-17). 혹시 죄악을 즐기면서 현재 명성을 누리는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 마지막이 그렇게 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라 할지라도 죄를 모른척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징벌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고 기다리시지만 죄의 문제를 그냥 넘어가지만 않으십니다. 혹시 하나님께 감추고 있는 죄가 있다면 지금 돌이키고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심판 받아서 황폐해진 예루살렘(5-7)

하나님께 사랑 받고 풍성했던 예루살렘이 이렇게 비참함과 끔찍한 고통을 겪는 것은, 바로 그들이 하나님을 떠난 죄의 결과입니다. 죄를 통해 얻는 잠시 달콤함보다 비참한 결과를 생각하고 죄를 멀리하시길 바랍니다. 범죄는 생각한 것보다 비참한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5그의 대적들이 머리가 되고 그의 원수들이 형통함은 그의 죄가 많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곤고하게 하셨음이라 어린 자녀들이 대적에게 사로잡혔도다 6딸 시온의 모든 영광이 떠나감이여 그의 모든 지도자들은 꼴을 찾지 못한 사슴들처럼 뒤쫓는 자 앞에서 힘없이 달아났도다 7예루살렘이 환난과 유리하는 고통을 당하는 날에 옛날의 모든 즐거움을 기억하였음이여 그의 백성이 대적의 손에 넘어졌으나 그를 돕는 자가 없었고 대적들은 그의 멸망을 비웃는도다(5-7)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바벨론 침공으로 이스라엘은 그의 자녀들은 바벨론으로 노예로 끌려갔습니다. 여호와께서 떠나시니 시온을 지켜줄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여호와의 딸이었던 이스라엘은 모든 영광이 떠났고, 지도자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사냥꾼 앞에 사슴처럼 자기 혼자 살겠다고 도망했습니다. 버려진 예루살렘은 주변 사람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⑴ 예루살렘의 심판 받은 이유(5)

선지자는 비극적인 상황을 탄식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 모든 비국의 원인에 눈을 돌립니다. 예루살렘이 이렇게 황폐하게 된 이유를, ‘그의 죄가 많으므로’(5)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맺었던 언약을 깨뜨리고 불순종했습니다. 그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선물로 주시고, 거룩한 백성으로 살라는 사명을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팔아서 우상을 사고, 부자가 되는 걸림돌이 되는 모든 율법들을 제거하고, 탐욕과 탐심에 사로잡혀 정의와 공의는 무시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거듭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많은 죄를 저질러서 그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았습니다.

⑵ 예루살렘의 심판 받은 결과(6-7)

선지자는 이제 하나님의 언약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운명이 걸려 있음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생명과 산성 그리고 양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언약의 가치가 점점 퇴색이 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과 가정 그리고 공동체의 현재와 미래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입니다.

① 영광이 떠난 이스라엘(6)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렸던 이스라엘 백성은 순식간에 먹구름이 밀려와서 사면이 깜깜하게 되었습니다. ‘처녀 시온’은 하나님의 정결한 신부로서의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시적 표현입니다. 정결하고 아름답던 신부와 같던 예루살렘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성전이 있는 것으로 영광이 넘쳐났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으로 더렵혀졌고 하나님께서는 부정해진 그곳에 더 이상 머무실 수 없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떠난 예루살렘은 그 모든 영광과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고 초라하고 삭막한 곳이 되었습니다.

② 비웃을 당하는 예루살렘(7)

말씀을 저버리고 자신만을 위해서만 살아온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불결해지고 낮아집니다. 원수들이 사방에서 공격해 쫒기는 신세와 비웃음 그리고 조롱을 받습니다. 환란을 당한 이스라엘은 언제 웃음소리가 퍼졌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움이 깊어집니다. 하나님과 함께하심으로 큰 영활르 누리며 즐거워하던 때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신만을 위해 살아왔던 지도자라면 위기에는 더욱 이기적이 될 것입니다. 말씀 안에 거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다 사라집니다. 존경은커녕 예루살렘처럼 사방에서 비웃음과 조롱이 밀물처럼 밀려올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범죄했다면 대가를 지불할 생각해야 합니다. 상황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만드는 것을 사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자신에게 용서하면 자신의 마음은 편해질 것이지만, 피해자들은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편해진다고 하나님께 용서 받았다고 착각하는 것은 진실한 회개와는 먼 것입니다.

 

기근으로 황폐해진 예루살렘(8-11)

존경할만한 지도자가 없다는 것은 장차 공동체를 어둡게 하는 것입니다. 가정에 머리된 부모님이 가정을 버리고 자기 욕심만을 위해 살 때, 그 가정은 결코 밝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지도자일수록 회개와 자기 비움이 필요합니다. 큰 영향을 주는 만큼 큰 책임이 따릅니다.

8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함으로 조소거리가 되었으니 전에 그에게 영광을 돌리던 모든 사람이 그의 벗었음을 보고 업신여김이여 그는 탄식하며 물러가는도다 9그의 더러운 것이 그의 옷깃에 묻어 있으나 그의 나중을 생각하지 아니함이여 그러므로 놀랍도록 낮아져도 그를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여 원수가 스스로 큰 체하오니 나의 환난을 감찰하소서 10대적이 손을 펴서 그의 모든 보물들을 빼앗았나이다 주께서 이미 이방인들을 막아 주의 성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명령하신 그 성소에 그들이 들어간 것을 예루살렘이 보았나이다 11그 모든 백성이 생명을 이으려고 보물로 먹을 것들을 바꾸었더니 지금도 탄식하며 양식을 구하나이다 나는 비천하오니 여호와여 나를 돌보시옵소서(8-11)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존재한 장소였습니다. 날마다 하나님께 제사가 드려지는 거룩하고 경건한 곳이며, 은혜와 진리가 선포되는 곳입니다. 하지만 거룩해야할 곳이 범죄 집단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예루살렘을 가만히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⑴ 영광이 사라진 예루살렘(8)

황폐해진 예루살렘 성을 보면서 선지자 예레미야는 탄식합니다. 그는 ‘그의 죄가 많으므로’(5)라고 표현했는데, 이제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함으로’(8)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매일 제사를 드리지만, 가식과 불법 그리고 불의가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점점 하나님의 진노를 살만큼 죄악이 쌓여졌습니다. 그 결과로 바벨론에 의해서 모든 것을 빼앗기고 자기보다 못한 주변 나라들이 스스로 큰 체하며 이스라엘을 업신여기니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겠습니까! 환난 당한 예루살렘은 ‘옛날의 즐거움’, 즉 하나님과 함께 했던 영화로운 그 때와 비교하면 매우 초라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영광을 누리던 예루살렘은 죄로 인해 낮아지게 되었습니다. 죄를 지을 때 그 결과를 생각지 못한 예루살렘은 어느 날 갑자기 큰 파멸을 당하고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⑵ 범죄 후 추악한 예루살렘(9)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죄악된 상태는 ‘그의 더러운 것이 그의 옷깃에 묻어 있으나’(9)라고 표현합니다. 이 표현은 여인들이 생리 때문에 생리혈이 옷에 묻어 있거나 성폭행을 당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방의 풍습을 좇고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숭배함으로, 하나님께 ‘음행의 죄를 범함으로 더러워진 것입니다. 이제 예루살렘은 더 이상 하나님께서 거하신 거룩하신 곳이 아닙니다. 영광은 사라지고 부정한 곳으로 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벌써 예루살렘을 떠나신 것입니다. 죄에 물들게 될 때, 가장 무서운 것은 그 상태가 얼마나 부정하고 역겨운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정한 죄를 온갖 핑계로 합리화하며 심지어는 의로운 행동으로 미화까지 하는 것입니다.

⑶ 약탈을 당한 예루살렘(10)

계속해서 예루살렘이 죄로 인해 촐한 비극적인 결과가 묘사되고 있습니다. 성전은 이방인들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떠나버린 예루살렘과 성전은 더 이상 거룩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을 정복한 바벨론 군인들이 군화발로 성전을 훼손합니다. 선택받은 백성의 자부심으로 여겨지던 성소가 이방인들에 의해 약탈되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룩한 성소도 텅 비고, 쌓아 놓은 보물도 생명 부지를 위해 탕진됩니다. 선지자는 함부로 적들이 성전 안에 들어가서 성소를 침범하고 성물을 빼앗아갔다고 고발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영광인 하나님의 성전이 짓밟히는 것은 경건한 백성들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되었을 것입니다.

⑷ 기근으로 황폐해진 예루살렘(11)

바벨론은 쉽게 항복하지 않는 예루살렘을 항복시키기 위해 장시간동안 성을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심한 기근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아무리 귀한 것일지라도 양식과 바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얼마나 어려웠던지 그 자녀들을 양식과 바꿀 정도로 기근이 극심했습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황폐해진 예루살렘에서 선지자는 무엇을 느껴졌습니까? ‘나는 비천하오니 여호와여 나를 돌보시옵소서’라고 오직 한 가지만 간구합니다. 환난 중에도 그들의 중보자가 되어 하나님의 긍휼을 호소합니다. 자기 죄를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고 그 결과를 생각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성전이 짓밟히고 영적 곤경과 양식이 떨어지는 육적인 빈곤을 당합니다. 모든 것을 팔아서 양식을 구해야 하는 상황을 돌아봐달라고 간절히 호소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시 한 번 용서해 달라고 구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비를 내려달라고 간청합니다. 멸망당하기 전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가 현재 한국 교회 상황이라면 너무 지나친 말이겠습니까! 교회 안에 헌금이나 성도들이 줄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있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죄를 미워하는 마음이 사라져 갔습니다. 이제 예레미야처럼 성도들이 여호와께 돌아가도록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심판의 참상을 목도하는 상황이 오기 전에 하나님께서 한국교회 위에 긍휼을 베푸시고 다시 회복시켜 달라고 간구하길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없이도 잘 살아갈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났고 그 순간부터 점점 죄악 가운데 빠져 갔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징계를 불러온 것입니다. 종종 하나님 앞에 범죄로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서 부러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들에는 성공한 것 같지만, 예루살렘처럼 하나님의 심판이 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심판받은 상태는 처음보다 더 비참할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며 경외해야 합니다. 죄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아직까지 끊지 못하는 죄 속에 빠져있다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 전에 빨리 결단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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