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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09)

 


영광을 잃은 예루살렘을 본 선지자

예레미야애가 4장 1-10절


주변에서 일어나는 큰 아픔을 보면서, 오늘 하루하루 평온하게 시작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은혜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은 ‘어제 일을 지웠으면 좋겠다.’고, 반대로 ‘어제로 돌아가고 싶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지금 일어난 일들을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라도 눈앞에 놓인 결과 때문에 몹시 아프고 쓰립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일어나는 일이라면 후회하고 회개하면 되됩니다. 하지만 그것을 핑계나 변명하거나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면 당장에는 아픔이 덜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그런 불행은 언제든지 반복될 수 있습니다.
 
4장에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선지자의 개인적인 탄식으로 예루살렘의 참상을 기록한 탄식(1-10)과 지도층의 책임과 참상에 대한 탄식(11-16)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17-20절은 공동체의 탄식이로 21-22절은 선지자가 에돕과 시온에게 하는 말입니다. 시온의 멸망은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의 죄악들과 헛된 것들을 의지한 무리의 죄악들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심판은 모든 죄인들에게 공의롭게 적용됩니다.
 

성전 돌처럼 흩어진 예루살렘(1-2)

선지자는 시온의 굶주림을 주로 설명합니다. 금처럼 빛나던 시온에서 갓난아기는 젖을 먹지 못하고 아이들은 먹을 것을 찾으며 부유한 자들까지도 가장 비참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비쩍 마른 상태가 되었고 심지어는 자기 자식까지 잡아먹게 되는 끔찍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1슬프다 어찌 그리 금이 빛을 잃고 순금이 변질하였으며 성소의 돌들이 거리 어귀마다 쏟아졌는고 2순금에 비할 만큼 보배로운 시온의 아들들이 어찌 그리 토기장이가 만든 질항아리 같이 여김이 되었는고(1-2)
선지자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한 예루살렘과 성전의 참상을 묘사합니다. 단순한 사고 정도가 아니라 처참한 상태였습니다. 다시 일어설 수 없을 만큼 완전한 파괴였습니다. 건물과 성전만 무너진 것이 아니라 그들이 견고하게 만들어 놓은 신학이 무너졌습니다. 그 신학에 근거하여 누린 평화가 깨졌습니다. 마음에 평강도 살아졌고, 믿음도 누더기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이 가지고 있던 희망도 무너졌습니다. 그들은 희망이 아닌 것을 희망을 품고 의지할 수 없는 것을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거짓 성들이 모두 무너졌습니다. 그것은 당연히 재앙입니다.
⑴ 영광이 변질된 예루살렘 성전(1)
다시 형식을 따라서 선지자는 ‘에카(הכיא)’로 시작합니다. 그가 사용한 첫 번째 비유는 예루살렘의 모습을 ‘금이 빛을 잃고 순금이 변질하였다’라고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은 정금과 같이 찬란한 빛을 발했습니다. 아름다운 돌들과 고귀한 정금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은 그 찬란한 빛을 잃고 말았습니다. 상황을 강조하기 위해서 ‘순금이 변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절 하반절은 ‘성소의 돌들이 거리 어귀마다 쏟아졌는고’라고 고백합니다. 솔로몬 왕은 예루살렘 성전을 지을 때 성소와 지성소의 벽과 바닥은 금으로 입혀졌고 그곳에서 쓰였던 모든 기물들은 모두 금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을 점령한 바벨론이 성전의 모든 금과 기명을 가져갔습니다(예레미야 52:19). 그러므로 선지자는 금처럼 빛나던 성전을 비롯한 예루살렘의 모든 것이 퇴색되고 파괴되었다며 현재의 상황을 한탄합니다. 현재 예루살렘의 상황은 황금처럼 빛나던 옛날의 영화가 사라지고 무너진 돌만 나뒹구는 폐허가 된 예루살렘이었습니다. 황금과 돌이 다르듯이 하나님께서 계신 이스라엘과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이스라엘은 너무 달랐습니다. 이것은 영광의 차이였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세상적인 것으로 대신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대신한 성도와 교회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⑵ 질그릇 같이 천한 예루살렘(2)
선지자는 빛을 잃은 예루살렘과 성전을 이야기 한 후 시온의 아들들에 대해 비유로 시작합니다. 먼저 그 아이들이 금보다 보배롭다고 소개합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토기장이가 만든 질항아리’처럼 여겨지게 되었다며 한탄합니다. 여기서 토기는 금과 대조를 이룹니다. 즉, 토기는 금그릇처럼 귀하게 다루지 않고 천하게 취급합니다. 일상생활에서 토기는 막 다루어지고 쉽게 깨지는 그릇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보물 같은 백성들이 함부로 가치없게 다루어지는 것에 대해 매우 비통해합니다. 이곳에서 사용한 ‘어찌하여(에카הכיא)’라는 단어를 다시 사용하여 선지자는 자신의 비통한 심정을 더욱 강조합니다. 이렇게 된 것은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이 함락 직전까지 바벨론에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밟히지 않을 것이라는 소망을 심어주면서 예루살렘 성문을 굳게 걸어놓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백성들의 고통과 고난은 가중될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깨어있는 사람, 즉 예레미야 같은 사람들을 통해서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징계가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지금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비참한 지경에 놓이는 것을 원하시진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예루살렘이 비록 바벨론에 점령당하겠지만, 최악의 상황에 놓여 백성들이 목숨을 잃지 않도록 성문을 열고 항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패전을 예언하고 항복을 권유했던 예레미야를 매국노로 몰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벽이 무너지는 순간까지 하나님이 아닌 애굽을 의지했고, 애굽의 원군들이 자신들을 도울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이렇게 비참하게 멸망한 예루살렘의 모습이었습니다.
 

굶주림에 허덕이는 예루살렘(3-4)

생명 얻는 신앙을 전수하지 못한다면 세상의 것으로 채우려합니다. 그 무엇을 자녀에게 무엇을 안겨준들, 그것은 직무 유기일 뿐입니다. 자녀를 통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려는 것일 뿐 진정한 부모의 사랑을 아닙니다.
3들개들도 젖을 주어 그들의 새끼를 먹이나 딸 내 백성은 잔인하여 마치 광야의 타조 같도다 4젖먹이가 목말라서 혀가 입천장에 붙음이여 어린 아이들이 떡을 구하나 떼어 줄 사람이 없도다(3-4)
선지자는 예루살렘에 비참한 모습을 두 가지 비유를 통해 설명합니다. 기성세대의 무책임하고 악한 행위가 다음 세대를 위기로 몰아넣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조와 어른들이 저지른 죄 때문에 무고한 아이들의 미래와 삶이 불타버렸습니다.
⑴ 먹을 것이 없는 아이들(3)
선지자는 아주 소중한 아들을 들개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들개들도 젖을 주어 그들의 새끼를 먹이나’라고 소개합니다. ‘들개’로 번역된 ‘탄님(םגית)’은 짝을 이루거나 떼를 지어 다니면서 시체를 뜯어먹는 들짐승으로 개나 자칼의 일종으로 여겨집니다. 구약에서 ‘탄님’은 보통 하나님의 심판으로 황폐해진 성읍들에 사는 동물(이사야서 13:22; 34:13: 예레미야 9:11)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보기에 부정하고 야비한 동물들일지라도 가슴에 끌어다가 자신의 새끼에게는 젖을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들개만도 못하게 자기 아이들에게 먹을 것조차도 줄 수 없었습니다. 선지자는 ‘딸 나의 백성은 광야에 있는 잔인한 타조 같도다’라고 합니다. 타조는 모래에 알을 낳고 둥지에 내버려둔 채 사냥하러 나가기 때문에, 구약에서 타조는 새끼를 잘 돌보지 않는 짐승으로 간주 되었습니다(참조, 욥기 39:16). 딸 시온이 자신들이 경멸하던 들개보다 못한 상황이라고 말하면서 선지자는 시온의 상황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⑵ 목말라서 죽어가는 젖먹이(4)
선지자는 ‘젖먹이가 목말라서 혀가 입천장에 붙었다’고 소개합니다. 최우선으로 보살핌을 받아야할 젖먹이까지도 먹지 못해서 목말라하는 모습입니다. 어머니가 물도 젖도 주지 못하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어미의 젖을 주지 못하는 것은 어머니가 물이나 음식을 먹지 못해 젖이 안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이 극도에 기근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4절 하반절은 ‘어린 아이들이 떡을 구하나 떼어 줄 사람이 없도다’라고 어린아이들이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다니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아이들이 양식을 구하지만 나누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아이들은 젖먹이보다 큰 아이들로 스스로 먹을 것을 달라고 요구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부모나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못합니다. 4절은 갓난아기와 아이들에게도 젖 한 모금, 떡 한 조각 줄 수 없는 전적으로 무능한 어머니로서의 예루살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한국교회는 매우 중요한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그 동안 화려한 모습으로 흥청거리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계셨는지 다시금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리를 교회들이 행하고 있는지도 스스로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경만 인용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back to the Bible’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많은 죄를 지은 예루살렘(5-6)

풍요로움은 하나님의 축복이지만, 그 축복을 바르게 누리지 못하면 재앙이 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주신 풍요를 축복으로 누리지 못하고 재앙으로 누렸습니다. 이제 한국 교회도 스스로를 살펴보아야할 시기입니다. 세상을 정죄하기 전에, 먼저 교회 안에 있는 악한 모습부터 제거해 나가야 합니다.
5맛있는 음식을 먹던 자들이 외롭게 거리 거리에 있으며 이전에는 붉은 옷을 입고 자라난 자들이 이제는 거름더미를 안았도다 6전에 소돔이 사람의 손을 대지 아니하였는데도 순식간에 무너지더니 이제는 딸 내 백성의 죄가 소돔의 죄악보다 무겁도다(5-6)
예루살렘은 곳곳에서 생명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의 말씀을 듣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활기차고 사람들로 가득했고, 어느 곳을 가나 식사를 대접 받을 수 있는 풍요로운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생명의 떡도, 육신의 떡도 심지어는 사람들까지도 찾아볼 수 없는 곳이 되었습니다.
⑴ 허기져서 고통을 당한 어른들(5)
선지자는 이제 어린이를 넘어서 어른들까지 당하는 고통을 이야기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던 자들이 외롭게 거리거리에 있으며’(5a)를 직역하면, ‘진수성찬을 먹던 사람들이 거리에 거지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과 어울려 흥겹게 잔치를 즐기던 사람들이 이제 먹을 것도 없이 쓸쓸하게 길거리에 앉아서 구걸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전에는 붉은 옷을 입고 자라난 자들이 이제는 거름더미를 안았도다’(5b)에서 ‘붉은 옷을 입은 사람들’은 ‘자색옷’을 입은 사람으로, ‘자색’은 왕과 귀족들이 사용하는 색입니다. 그러므로 자색옷을 입은 사람들은 귀족과 왕족들처럼 호화로운 생활을 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이제는 거름더미에 앉았습니다. 즉 쓰레기 더미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선지자는 이렇게 먹고 입는 것을 통해 예루살렘의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선자지가 말하는 역전된 모습은 사무엘상 2장의 한나의 노래를 연상시킵니다. 즉, 예루살렘의 상황이 역전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 때문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⑵ 소돔보다 더 악한 죄악들(6)
선지자는 딸 내 백성, 즉 이스라엘의 죄가 소돔보다 크다는 놀라운 말을 합니다. 불타 없어진 소돔은 가장 악한 사람들의 대명사입니다. 그들보다 악했다면 심판의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결과였습니다. 소돔이 사람의 손을 대지 않았는데도 순식간에 무너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19장을 기초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은 소돔을 가장 악한 도시의 상징으로 이야기해 왔습니다. 그런데 ‘딸 내 백성의 죄가 소돔의 죄악보다 무겁도다’고 말합니다. 이런 선지자의 이야기는 에스겔 5:6 및 16:46-47과 유사합니다. 소돔보다 시온의 죄가 무겁다고 보는 이유는 소돔은 순식간에 무너져 고통의 시간이 짧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천천히 하나님의 심판을 모두 받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신들의 죄를 소돔과 연결시키는 것은 선지자의 괴로움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다음 단락에서 선지자는 다시 시온의 참상을 고백합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일순간에 파괴되어 적들은 무너진 성벽 사이로 물밀 듯 들어와 살육과 노략질을 일삼았습니다. 유다의 결사항전의 각오는 성벽이나 성전 그리고 백성까지도 지킬 수 없는 허망한 외침이 되었습니다.
 

말라 비틀어진 예루살렘(7-8)

항상 성도들은 교회 안에 있지만 하나님 밖에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소돔의 죄보다 예루살렘의 죄가 더 크다는 고백처럼, 우리 교회 안에 더 큰 죄가 있지는 않은지, 교회 안에 하나님이 없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도와 교회 위에 하나님의 임재임을 기다려야 합니다.
7전에는 존귀한 자들의 몸이 눈보다 깨끗하고 젖보다 희며 산호들 보다 붉어 그들의 윤택함이 갈아서 빛낸 청옥 같더니 8이제는 그들의 얼굴이 숯보다 검고 그들의 가죽이 뼈들에 붙어 막대기 같이 말랐으니 어느 거리에서든지 알아볼 사람이 없도다(7-8)
다시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면서 현재의 비참한 상황을 묘사합니다. 기근으로 젖먹이, 아이들의 비참한 모습을 이야기하던 선지자는 이제 귀족들과 지도자들의 비참한 모습에 대해사도 노래합니다.
⑴ 존귀한 자들의 아름다웠던 모습(7)
선지자는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존귀한 사람들을 언급합니다. 이들은 ‘전에는 존귀한 자들의 몸이 눈보다 깨끗하고 젖보다 희며 산호들 보다 붉어 그들의 윤택함이 갈아서 빛낸 청옥 같더니’라고 표현합니다. 예루살렘의 이전 모습은 그 부유함과 영광이 드러날 만큼 윤택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자신이 아는 순결하고 아름답고 귀한 모든 것을 들어 선택받은 자인 나실인, 즉 이스라엘 백성의 아름다움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강조는 8절 이하의 시온의 비참함을 더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⑵ 비참해진 존귀한 자들(8)
바벨론 침공을 받아 오랫동안 포위되고 마침내 함락된 예루살렘의 모습은 뼈가 들어날 만큼 마르고 볼품이 없었습니다. 선지자는 눈처럼 희던 예루살렘이 이제 칠흑 같은 어둠이 되었다고 소개합니다. 여기서 흑백의 대비를 통해 과거와 현재 상황의 역전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그리고 재앙으로 얼굴과 몸 상태는 마른 나무같이 말랐습니다. 귀하던 모습이 사라지고 기근으로 인해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수척해졌습니다.
 

인간성마저 상실한 예루살렘(9-10)

돈이 주는 교양이나 권력이 주는 품격은 오래갈 수 없습니다. 그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됨됨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신앙 인격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세상적인 가식적으로 꾸며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예루살렘의 비참함은 인간성마저 무너지게 만들었습니다.
9칼에 죽은 자들이 주려 죽은 자들보다 나음은 토지 소산이 끊어지므로 그들은 찔림 받은 자들처럼 점점 쇠약하여 감이로다 10딸 내 백성이 멸망할 때에 자비로운 부녀들이 자기들의 손으로 자기들의 자녀들을 삶아 먹었도다(9-10)
기근을 견디지 못해 자녀를 먹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죄된 본성을 지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악행에는 한계가 없음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깊은 죄악성과 약함을 드러내는 이런 비국적인 사건들을 통해 우리는 왜 사람이 하나님께 복종해야 하는가에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⑴ 죽기보다 힘든 기근 재앙(9)
선지자는 예루살렘에 닥친 기근이 얼마나 심각했던지 전쟁에서 칼에 찔려 죽은 자가 낫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칼에 죽은 자가 더 낫다고 말하겠습니까! 칼에 찔려 죽는 자들은 고통도 짧고 ᄈᆞᆯ리 죽지만, 기근으로 즉는 자들은 극심한 고통과 공포 중에서 점점 쇠약해지면서 천천히 죽어가기 때문에 훨씬 불행하다고 본 것입니다. ‘토지의 소산이 끊겼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약속하신 신명기 28:47-51의 저주의 경고가 온전히 성취된 상황입니다.
⑵ 기근으로 인한 재앙들(10)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에 평소에 자비로운 여자들일지라고 자신들의 아기를 삶아 먹는다고 탄식합니다(신명기 28:53-57). 기근을 견디다 못한 사람들이 자기 자녀를 잡아먹는 끔찍한 이리들이 일어났는데, 이는 고통 가운데서 인간성을 상실한 것입니다. 주목할 것은 자녀를 삶아 먹었던 부녀들이 비정상적인 여인들이 아니라 ‘자비로운 부녀’들이었습니다. ‘자비로운’이란 단어는 ‘동정심이 많은’, ‘인정 많은’이란 뜻으로 모성애의 일면을 설명한 말입니다. 그런데 그 부녀들이 살아남기 위해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사랑인 자식에 대한 사랑마저 버린 무서운 상황을 보여줍니다. 극한의 고통과 공포에 빠진 이스라엘은 기본적인 인간성마저 지킬 수 없는 야만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심으로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원인을 분명히 교만입니다. 선지자의 말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운 분이지만, 동시에 두려운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만을 기억하며 자만하지 않도록 경고한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잃은 후에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부재(不在)를 인식하는 어리석음은 없어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지 못하면, 내일 삶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인생의 여정은 하나님의 부재로 살 수 있는 날들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평안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삶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과거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를 것이 하나 없습니다.
 


 
예루살렘에 비참함은 하나님 앞에 교만한 이스라엘의 결과입니다. 그 교만함은 예루살렘 성벽의 벽돌 한 장도 지켜낼 수 없을 만큼 초라했습니다. 심판을 가볍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별 어려움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고난이 찾아올 때, 진짜 신앙이 들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안할 때 감사하고, 어려움이 닥쳤을 쉬운 대답을 찾으려 하지 말고 깊이 아픔을 느껴야 합니다. 예루살렘에 임한 잔인한 심판을 거울삼아 정결한 삶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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