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예레미야애가(07)

 


회개하고 돌아가자는 선지자

예레미야애가 3장 40-54절


영화 ‘슈퍼맨’에서 종종 사람들이 위급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도와 달라고 외칩니다. 그러면 어디선가 슈퍼맨이 그 소리를 듣고 달려와서 위험한 위기에 처한 사람을 도와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면에서 같지는 않습니다만, 힘든 성도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소리를 들으십니다. 도움을 요청하는 자녀들을 위험에서 구해 주십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심판을 받아 아주 비참하게 된 이스라엘을 향해서 하나님께 돌아가자고 외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심판이 얼마나 무섭고 철저한지를 토로하던 선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구원할 분은 오직 여호와 밖에 없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여호와의 긍휼과 자비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사람들에게 현재의 고난을 잠잠히 받아들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일들을 멈추어야 된다고 종용합니다. 이제 사람들에게 함께 하나님께서 돌아가자고 권면합니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는 제안(40-41)

선지자는 자기의 동료들에게 같이 여호와께로 돌아가서 간절히 기도하자고 요청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께 돌아가기 위한 선결 조건으로 공동체의 죄를 고백할 것을 말합니다. 심판의 혹독함을 호소하며 눈물로 여호와의 도우심을 바랍니다.

40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41우리의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40-41) 

앞에서 강론한 말씀처럼 선지자 예레미야는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유다의 배교와 배도, 반역과 불순종이 극에 달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예루살렘에 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했고,예언한 대로 예루살렘에 임한 하나님의 진노를 목격하고 있는 중에서도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향한 소망의 끈을 절대로 놓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은 영원한 효력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돌아갈 길이 반드시 열리게 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⑴ 자기중심을 살피자는 선지자(40)

이제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 앞에서 왜 죄인인지를 살피자고 권유합니다. 먼저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자신들의 행동을 돌아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행위를 살핀다’는 것은 지금까지 왜 이스라엘이 이런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외부에서가 아닌 내부에서부터 찾아보려하는 반성하는 의미입니다. 그것도 대충이 아니라 철저하게 검증해보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죄에 대한 인식과 반성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첫걸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후 선지자는 ‘여호와께 돌아가자’고 권유합니다. 여기서 ‘돌아간다’는 것은 ‘회개(悔改)’를 의미합니다. 지금까지의 길을 버리고 다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방식대로 살아가겠다는 결단입니다. 위기와 어려움의 때에 자꾸 원인을 밖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은 바람직한 모습이 아닙니다. 회개와 회복의 전제 조건은 내부를 면밀하게 살피고 어떤 죄와 문제들이 숨어 있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와 문제들을 제거하는 것이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남 탓만 해서는 개혁이나 회복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⑵ 진실한 회개하자고 권한 선지자(41)

선지자는 ‘하나님을 향해 마음과 손을 들자’고 권유합니다. 일반적으로 ‘손을 드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을 함축합니다. 선지자는 형식적으로 손만 드는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드려서 진정한 회개를 드리자고 권유합니다. 즉 외식적인 회개보다 내면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회개가 있어야 하는 것이 선지자의 간절한 바람을 담은 권고입니다. ‘회복되리라’는 소망은 반드시 회개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회개는 외적으로 요란한 반응이 아니라 마음이 하나님께로 돌아서서 중심을 드리는 회개이어야 합니다. 오늘날 현실적으로 자신을 살피고 진심으로 죄를 고백하며 회개하면서 마음을 드리는 기도가 많이 부족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신앙은 외식적으로 흐르고 점점 영적 생명력은 사라지고 삶은 무기력해집니다. 정말로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원한다면 마음을 드리는 회개의 기도부터 다시 시작해야합니다.

 

공동체의 죄에 대한 고백(42-47)

죄인이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을 찾는다면 하나님을 만나주지 않습니다. 아무리 화려한 언변으로 기도한다 할지라도 그 기도는 하늘을 뚫고 하나님에게까지 상달될 수 없습니다. 진심으로 회개를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는 만나주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42우리의 범죄함과 우리의 반역함을 주께서 사하지 아니하시고 43진노로 자신을 가리시고 우리를 추격하시며 죽이시고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셨나이다 44주께서 구름으로 자신을 가리사 기도가 상달되지 못하게 하시고 45우리를 뭇 나라 가운데에서 쓰레기와 폐물로 삼으셨으므로 46우리의 모든 원수들이 우리를 향하여 그들의 입을 크게 벌렸나이다 47두려움과 함정과 파멸과 멸망이 우리에게 임하였도다(42-47)

이스라엘은 민족과 열방 중에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가 되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법과 질서를 무시했고, 세상의 것들이 진리인 것처럼 따랐습니다. 그들은 이로 인해 심판에 놓이게 되자 징계를 모면하기 위해 하나님을 사랑한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고 찬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받으시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함과 영광이 훼손되지 않도록 폐기물처럼 취급하시고 내쳤습니다.

⑴ 죄악을 사하지 않으신 하나님(42)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2인칭 ‘당신’으로 부르며 하나님께 공동체의 죄를 고백합니다. 선지자는 ‘우리의 반역함을 주께서 사하지 아니하시고’라고 고백합니다. 범죄 사실과 여호와의 용서하지 않으심을 대조하며 강조합니다. 선지자는 비슷한 단어를 반복함으로 공동체의 범죄를 더욱 강조합니다.

⑵ 심판을 멈추지 않으실 하나님(43)

선지자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범죄와 하나님의 용서하지 않음으로 인해 초래된 재난에 대해 서술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했지만, 예언한대로 심판이 도래하지 않길 간절히 바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진노로 자신을 가리시고 그 진노가 여호와의 모습을 가릴 만큼 크다는 뜻입니다. 큰 진노는 결국 자신의 백성을 추격하여 죽이시고, 전혀 인정을 베풀지 않으시는 것 같은 심판으로 나타납니다.

⑶ 자신을 가리우신 하나님(44)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에 자신을 가리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곳에서 ‘가린다’는 말이 계속 나오는데, 하나님께서는 구름으로 자신을 가리신 것입니다. 원래 여호와는 백성들을 만나기 위해 구름으로 자신을 가리고 나타나셨습니다(참조, 출애굽기 19:9: 신명기 4:11; 민수기 12:5; 신명기 31:15). 백성들이 하나님의 모습을 보고 죽을까봐 걱정이 되어 베일로 가리듯 구름으로 가리고 백성들을 만나러 오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자신을 가리우신 이유는 백성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방어막을 치듯 구름으로 자신을 감싸셨습니다. 선지자는 익숙한 표현을 반대로 해석함으로써 하나님의 철저한 거절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명기 4:7-8의 상황과 반대입니다.

⑷ 폐기물 취급하신 하나님(45)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모든 나라들 가운데 쓰레기와 폐기물로 두셨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19:5에서 ‘내 소유’ 즉 ‘내 보물’이라고 말씀하신 것과 반대의 상황입니다. 열방 중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특별한 보물이었던 이스라엘은 지금 열방 중에 쓰레기요 폐기물과 같은 처지가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본래 부강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은혜와 돌보심으로 이스라엘이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왕국으로 살아남으며 나름대로 명성을 이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교만해서 부와 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대로 방치하셨고, 그 결과 이스라엘은 쓰레기처럼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빠진 공동체는 더 이상 세상의 빛과 소금이 아닌 밖에 버려져야 폐기물과 같은 존재가 됩니다.

⑸ 입을 벌려 덤벼들게 하신 하나님(46)

하나님께 버림받는이스라엘을 보면서 적들은 입을 벌려 달려듭니다. 이 표현은 예레미야애가 1,2장에서 여러 번 등장했는데 비웃거나 조롱할 때 사용되는 관용어입니다. 마치 쓰레기장에 버려진 폐기물들 중에서 넝마주의들이 재활용거리라도 주어보겠다는 심정으로 이스라엘을 바라본 것입니다. 당시 바벨론은 이스라엘을 철저히 능욕했고 조롱했습니다.

⑹ 버림받은 이스라엘의 상황(47)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거절의 결과로 이스라엘이 맞이한 비참한 상황을 드러냅니다. 아주 부정적인 단어들을 나열하며, ‘두려움’과 ‘함정’과 ‘파멸’ 그리고 ‘멸망’의 상황입니다. ‘두려움’은 보통 하나님의 심판(출애굽기 15:16; 이사야서 19:16; 33:14)이나 예기치 않은 출현(이사야서 2:10, 19, 21)에 대한 반응을 묘사합니다. ‘파멸’은 ‘파괴’, ‘멸망’, ‘혼돈’ 또는 ‘죽음’을 전형적으로 묘사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멸망’은 ‘부서짐’, ‘깨짐’을 뜻하는 단어로, 여기서는 ‘흩어짐’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선지자는 여기서 음성학적 언어유희(파하트/파하드, 하쉐트/하샤베르)를 사용하여 자신들에게 임한 재앙의 심각성을 강조합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심판을 예언했지만, 그 심판이 이스라엘에게 임하지 않기를 간절히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동족에게 여러 가지 고난을 받아가면서까지 예언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자기 민족에 대한 사랑은 예레미야로 망해버린 이스라엘 민족에게 소망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고난에 대한 슬픔(48-51)

예레미야 시대 때뿐만 아니라 오늘날도 하나님의 공동체를 신뢰한다면 당신이 처한 자리를 인내할 수 있습니다. 모욕과 따돌림이 있고, 때로는 외면 받을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들어내시고 싶은 뜻이 있다면 인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뿐만 아니라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48딸 내 백성의 파멸로 말미암아 내 눈에는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49내 눈에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50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실 때까지니라 51나의 성읍의 모든 여자들을 내 눈으로 보니 내 심령이 상하는도다(48-51)

선지자 예레미야는 바벨론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닥친 멸망을 본 반응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유다는 초토화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적의 칼에 쓰러졌고, 아이들은 먹지 못해 아사했습니다. 심판으로 인한 유다의 참상은 생존자들의 눈에 눈물을 마르지 않게 했습니다. 그는 예레미야애가 1장 2절 및 16절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흩어짐’을 당한 것을 보면서 계속 슬퍼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⑴ 멸망한 예루살렘을 본 선지자(48-49)

선지자는 망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을 보면 눈물이 쉴 새 없이 계속해서 쏟아진다고 고백합니다(49). ‘흐르다’는 ‘쏟아지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원수들의 이유 없는 괴롭힘은 유다의 고통을 더했습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이 당하는 고통을 여러 모양으로 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처참함 모습을 보고 선지자의 눈에서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진다고 고백합니다. 비참해도 너무나 비참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⑵ 멸망한 이스라엘을 보실 하나님(50-51)

또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이스라엘의 형편을 굽어보실 때까지 이런 눈물이 계속 흐를 것이라고 합니다(50). 그러면서 하나님의 불쌍하게 여기셔서 개입을 하시길 간절히 바라는 선지자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예루살렘의 형편은 모든 딸들로 인해 나의 눈이 나의 마음을 괴롭게 만든다고 고백합니다(51). 여기서 딸들은 예루살렘 성안의 여성들을 나타낼 수도 있지만, 예루살렘 성읍에 딸린 마을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여성으로 특정하기보다는 예루살렘과 그 주변 마을들이 모두 파괴된 것을 보고 슬퍼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선지자는 비참하게 무너진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보면서도 가슴 아파하지만,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기대합니다. 돌아가겠다는 외침에 맞추어, 하나님께서도 마음을 돌리셔서 긍휼히 여겨주시기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회개하여 돌아온들, 하나님께서 돌이키시지 않는다면 이 모든 것은 헛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떤 환경이든지 어떤 공동체를 섬기든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백성들에게서 영광의 찬송을 받으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한 백성들이라면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의 날을 기대하며 세상에 하나님에 대해 담대하게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원수들이 공격하는 모습(52-54)

진정한 지도자는 자기가 속한 구성원이 잘 나가고 축복 받는 것을 시기해서는 안 됩니다.ᆞ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해주고 축복해 주어야 합니다. 반대로 구성원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는 마치 자신이 당한 어려움처럼 느껴져야 합니다. 한 나라의 훌륭한 지도자는 국가가 절망스러고 어려울 때, 국가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감당하고 슬퍼할 줄 알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52나의 원수들이 이유 없이 나를 새처럼 사냥하는도다 53그들이 내 생명을 끊으려고 나를 구덩이에 넣고 그 위에 돌을 던짐이여 54물이 내 머리 위로 넘치니 내가 스스로 이르기를 이제는 멸절되었다 하도다(52-54)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성이 당한 억울한 일들, 즉 원수들이 행한 일들을 하나님께 낱낱이 고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벌을 내려주시기를 간절히 간구합니다. 먼저 유다의 당한 어려움을 자신이 당한 것처럼 묘사합니다.

⑴ 원수들이 괴롭힌 상황(52-53)

선지자는 원수들이 이유 없이 자신을 새처럼 사냥한다고 고백합니다. 마치 아이들이 새총을 가지고 장난으로 새를 잡듯이 그렇게 자신을 다루고 있다고 호소합니다.

⑵ 쓰나미 같이 몰려오는 죽음(54)

본 절은 53절과 연결되어 원수들이 선지자를 물이 있는 구덩이에 넣고 죽이려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계속해서 원수들이 선지자의 생명을 끊으려고 선지자를 구덩이에 넣고 그 위에 돌을 던지며, 물이 선지자의 머리 위로 넘치니 선지자 스스로 멸절되었다고 느끼게 됩니다. 선지자는 이런 원수들의 공격에 이제는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다고 호소합니다. 선지자는 이렇게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음을 호소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재촉합니다. 애가 타는 선지자의 심정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는 사람은 때때로 죽을 것 같은 고통에 휩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정한 때에 움직이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울며 기다리는 것밖에 할 일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선지자 또한 한편으로는 잠잠히 기다리라고 말하다가도(예레미야애가 3:26) 극심한 고통 앞에서 다시 무너지고, 다시 하나님의 도우심을 재촉하는 기도를 합니다. 그러면서 근근이 이 고난의 시기를 이겨내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위해 자신들이 겪는 고통을 적극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자기 백성을 향해 심판의 손을 드신 하나님께서 이제 원수들에게도 심판의 손을 들어 그들이 행한 대로 되갚아 주시길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입니다. 자기 백성의 기도를 들으실 뿐 아니라 자기 백성을 향해 원수들이 꾸미는 음모도 들으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피할 길을 주실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모든 사정을 하나님께 말씀드리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당신의 자녀들 편이시기 때문입니다.


항상 언제든지 자신의 위치를 깨닫고 잘못된 위치에 있다면 빨리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너무 많이 잘못된 길을 왔습니다. 이제는 돌아가야 합니다. 앞으로 나가는 인생이 멋있지만, 돌아가는 인생이야말로 존귀하고 정결합니다. 사정을 살피시고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돌아가야 합니다.


구독과 공감 ♡ 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