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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05)


응답을 기다리는 선지자

예레미야애가 3장 1-18절


 

탈무드에서 ‘그 사람의 신발을 신고 10리를 가보기 전에는 그 사람에 대해 말하지 말라.’는 교훈이 있습니다. 살아가는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고난과 고통이 있습니다. 어떤 것은 알고 있는 고난도 있지만, 어떤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고난과 아픔을 우리 편에서 손쉽게 생각하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이 흔들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에 대해 회의를 품기도 합니다. 비신자들은 비아냥거리고 빈정거리기도 합니다. 잘못된 자신의 죄로 인해 고난이라면 누구에게 하소연하겠습니까! 하나님께 범죄한 이스라엘은 철저히 파괴되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가고 있었습니다.

 

본 3장은 예레미야애가에서 가장 긴 장입니다. 1,2,4장이 알파벳의 개수에 따라 22절로 구성된 것과 다르게 3장은 각 알파벳의 철자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장의 세 배 분량인 66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3장은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고난을 여러 가지로 묘사한 1-18절과 누군가 여호와께 이야기하는 19-39절, 우리끼리 하는 말인 40-41절, 우리가 여호와께 하는 말인 42-47절, 나의 탄식인 48-54절, 나의 기도인 55-66절로 구분됩니다.

 

참상으로 인해 슬픔에 쌓인 예루살렘(1-6)

선지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분노의 매를 맞으며 하나님께서 만드신 감옥에 갇혔다고 합니다. 현재는 하나님께서 도망갈 수 없게 길을 막으시며 자신을 향해 화살을 날리고 죽이려 하신다고 고백합니다.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복과 희망의 하나님이 아닌 심판하는 두려운 하나님이십니다. 

1여호와의 분노의 매로 말미암아 고난 당한 자는 나로다 2나를 이끌어 어둠 안에서 걸어가게 하시고 빛 안에서 걸어가지 못하게 하셨으며 3종일토록 손을 들어 자주자주 나를 치시는도다 4나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며 나의 뼈들을 꺾으셨고 5고통과 수고를 쌓아 나를 에우셨으며 6나를 어둠 속에 살게 하시기를 죽은지 오랜 자 같게 하셨도다(1-6)

예레미야애가 1,2장을 통해서 예루살렘의 참상을 보면서 제3자 입장에서 애통했던 선지자는, 이제는 그 문제를 자신의 한 가운데에서 격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고통당하는 자가 자신이 당하는 것처럼 1인칭 화법으로 받아들이고 그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나님께서 눈물의 호소합니다. 남들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범죄 하면서 왕과 제사장들은 말씀을 거짓으로 바꾸어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음으로 그 고통과 고난이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⑴ 직접 매를 때리신 하나님(1)

선지자는 자신을 여호와께 분노의 매를 맞은 자로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다는 점을 한탄합니다. 바로 이것이 이 쓰디쓴 고통의 원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자기 백성들에게 매로 진노하십니다. ‘매’는 아이들을 훈육하거나 목자들이 양들을 인도할 때 사용하는 막대기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해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사무엘하 7: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후손들이라도 잘못하면 사람의 막대기로 치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또한 다윗을 통해서 ‘31내 율례를 깨뜨리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32내가 회초리로 그들의 죄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그들의 죄악을 벌하리로다’(시편 89:31-32)라고 다시 언급하시면서 모든 이스라엘에게로 확대되어 심판을 받게 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매는 현재는 아프고 슬프지만 결국은 유익한 것이 됩니다.

⑵ 어둠으로 행하게 하신 하나님(2)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빛이 아닌 어둠으로 행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어둠은 고난과 혼란을 의미합니다. 이때 ‘어둠’은 요엘서 2:1-2에 나오는 심판의 날의 어둠입니다. ‘이끌다’라는 단어는 막대기로 양들을 몰아가는 것을 뜻합니다(창세기 31:18; 출애굽기 3:1). 일반적으로는 여호와께서 목자처럼 이스라엘을 푸른 초장이나 물이 많은 곳으로 인도할 것이라 예상되지만, 여기서는 반대로 자기 백성에게 분노하셔서 어둠으로 인도하십니다. 예루살렘에 임한 재앙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임했습니다.

⑶ 대적으로 나타나신 하나님(3)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대적으로 나타나신 것에 한탄합니다. 하루 종일 자신을 말처럼 이리저리 몰고 다니시면서 괴롭히신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양을 이끌듯이 부드럽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매우 거칠게 자신을 재앙으로 몰고 가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매로 치시며 돌이켜 돌아올 때 까지 종일토록 계속하십니다. 또한 여호와께서 ‘손을 들어’서 친다고, 2장에서 ‘손을 들어’ 간구한다와 대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 중에 손을 들어 기도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고통 중에 있는 그의 백성들을 향해 손을 들어 매섭게 치십니다.

⑷ 고통을 더하신 하나님(4)

선지자는 유다의 상태를 나이 많아서 노쇠한 사람으로 비유합니다. 노쇠하여 자신의 몸도 지탱할 수 없는데, 그곳에 고통을 더하신 것입니다. 회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분노는 그치지 않습니다. 아픈 상처로 멈출 수 없는 눈물을 흘리지만 치유는커녕 또 다른 질병으로 더욱 괴롭기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고 뼈를 꺾으셨다고 고백합니다. ‘쇠하게 하다’는 ‘마찰로 갈아지고 떨어져 나갔다’는 의미로 예레미야애가 2:24, 5, 8절과 16절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뼈를 꺾다’는 직역하면 ‘뼈를 부서뜨리다’의 의미입니다. 이 표현은 예레미야애가 1:15과 2:9과 11절에서 예루살렘의 젊은이들, 도성의 방비, 도성을 부수어 흩어버릴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선지자는 이렇게 예루살렘의 멸망에 사용된 단어를 자신에게 적용함으로써 이스라엘 전체의 고난과 자신의 고난이 연결하고 있습니다.

⑸ 피할 수 없게 하신 하나님(5)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위에 담즙과 고통을 쌓으시고 둘러 놓으셨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에 완전히 포위되었다는 뜻입니다. 마치 예루살렘이 적들에게 완전히 포위된 것처럼 포위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에서 도망갈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에 주의를 기울이는 만큼, 하나님의 심판에도 두려워하며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⑹ 잊혀진 사람처럼 만드신 하나님(6)

2절에서 언급된 어둠의 동기가 다시 등장합니다. 어둠 가운데 처하게 된 선지자는 마치 오래전부터 죽은 자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현재 자신의 삶을 보니 무덤에 있는 시체와도 같았습니다. 자신은 살아도 산 자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심판을 철저하게 받아서 회복 불가능한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런 고통을 겪습니다. 아무도 헤아려 줄 수 없고 위로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더 잘살아보겠다고 하나님을 떠났던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회복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철저하게 파괴됩니다. 그 분노의 매는 선지자 자신의 죽도록 시시때때로 내려칩니다. 고난이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완전히 파괴되도록 계속적으로 임했던 것입니다. 연속된 고난으로 숨 쉴 여유조차 없는 선지자는 쇠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적인 복만 추구한 사람들의 결말은 이렇게 비참합니다.

 

주변에 조롱당하신 예루살렘(7-9)

고난을 당할 때 자신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위로를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신보다 더 힘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보다 더 비참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비참한 슬픔이 마음으로 다가올 때 아무런 희망도 없어 보입니다.

7나를 둘러싸서 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내 사슬을 무겁게 하셨으며 8내가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나 내 기도를 물리치시며 9다듬은 돌을 쌓아 내 길들을 막으사 내 길들을 굽게 하셨도다(7-9)

이스라엘에게서 생명의 하나님께서 돌아서셨으니 죽음 밖에 남은 것은 없습니다. 돈과 직장 그리고 명예가 없으면 힘들지만,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으면 살아도 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돌아섰다고 할 때는 아무런 소망도 없습니다. 선지자를 절망스럽게 하는 것은 돌아갈 길이 보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고통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길을 막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자신이 어둠에서 빠져나가려고 해도 하나님께서 자기 주위에 담을 쌓아놓으셨기 때문에 나갈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또한 자신의 쇠사슬을 더욱 무겁게 하셨다고 합니다. 감옥의 이미지를 통해 사슬에 묶인 채로 갇혀서 꼼짝달싹 못하는 선지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선지자는 여호와께 도움을 구하기 위해 간절히 외칩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의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철저한 하나님의 유기(遺棄)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가장 혹독한 심판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자신의 길에 담을 쌓고 길을 굽게 하고 재앙에서 도망갈 수 없게 만드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탈출구 없는 절망적인 상황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유일한 도움이신 하나님조차 자신을 외면하셨습니다.

살다보면 사방이 이렇게 막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좋지 않은 일은 꼭 한꺼번에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그리고 반드시 한계점을 보도록 하십니다. 자신이 진짜 사랑하고 의지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반드시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 외에 사랑하고 있다면, 유일한 출구이신 하나님마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해자인 것처럼 보이는 상황을 만나게도 하실 것입니다.

 

모든 소망이 끊어진 예루살렘(10-18)

교만은 자신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 때 찾아옵니다. 하나님 없는 생활, 하나님 없는 가정, 하나님 없는 직장 그리고 하나님 없는 교회에서 교만은 시작합니다. 성경에서는 스스로 바벨탑을 쌓아서 하나님 없는 생활을 자유롭게 살려는 것이 방탕하게 되고 결국은 타락했다고 소개합니다. 하나님 없는 삶은 절대로 겸손할 수 없습니다.

10그는 내게 대하여 엎드려 기다리는 곰과 은밀한 곳에 있는 사자 같으사 11나의 길들로 치우치게 하시며 내 몸을 찢으시며 나를 적막하게 하셨도다 12활을 당겨 나를 화살의 과녁으로 삼으심이여 13화살통의 화살들로 내 허리를 맞추셨도다 14나는 내 모든 백성에게 조롱거리 곧 종일토록 그들의 노랫거리가 되었도다 15나를 쓴 것들로 배불리시고 쑥으로 취하게 하셨으며 16조약돌로 내 이들을 꺾으시고 재로 나를 덮으셨도다 17주께서 내 심령이 평강에서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내가 복을 내어버렸음이여 18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10-18)

선지자는 앞 단락보다 고난을 강화시켜서 소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예루살렘을 고난을 넘어서 죽이기 위해 움직이십니다. 꼼짝 못하도록 하고 마치 덧에 걸린 짐승처럼 감옥에 갇힌 죄수처럼 여기시고 죽이려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⑴ 살해하려고 기다리신 하나님(10)

선지자는 이제 하나님께서는 잡아 죽이려는 기다리는 곰과 사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곰과 사자처럼 가만히 숨어 있다가 기회를 보아서 먹잇감을 잡아먹는 맹수로 표현합니다.

⑵ 적막하게 방치하신 하나님(11)

여기서 ‘나를 적막하게 하셨다’는 표현은 ‘나를 황폐하게 두셨다’는 의미입니다. 맹수에게 찢겨 황폐해진 상황에서 이 단어는 각각 ‘예루살렘의 문’, ‘예루살렘 자체’, ‘예루살렘의 자녀’를 묘사합니다(예레미야애가 1:4,13,16). 아름다운 예루살렘은 다들 외면한 도시, 누구든지 마음대로 유린하는 도시, 사람들은 다 도망치고 포로로 끌려가고 이제 유령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들짐승의 거처로 변해버렸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더 예루살렘 성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⑶ 자신을 활로 쏘시는 하나님(12)

이제 하나님께서는 사냥꾼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이번에도 싸움의 대상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과녁 삼아서 살을 쏘신다고 합니다. 예레미야애가 2:4에는 원수같이 이스라엘을 향해 활을 당기는 모습이 나옵니다. 사냥꾼은 프로이기 때문에 활쏘는 것을 실수하지 않을 것입니다.

⑷ 치명상으로 고통을 주신 하나님(13)

하나님께서 자신의 허리를 맞추셨다고 합니다. ‘허리’는 본래 ‘콩팥’을 의미합니다. 콩팥은 신체 중에서 가장 예민하고 생기가 넘치는 장기에 해당합니다. 그만큼 치명상을 입었을 때 가장 고통스러움을 느낄만한 곳입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을 파괴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콩팥을 화살로 맞추었다는 것은 고통스럽게 생명을 취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⑸ 조롱거리가 된 상태를 탄식하는 선지자(14)

선지자는 자신이 조롱거리가 되어 있는 상태에 대해 탄식합니다. 예루살렘은 주변 백성들 사이에서 노래와 조롱거리가 됩니다. 여기서 노래는 조롱을 하기 위한 노래를 가르칩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백성들로부터 조롱을 받습니다. 유다 공동체와 구별되며 공동체 안에서 따돌림 당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예레미야나 욥이나 시편 탄원시의 주인공들처럼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겪는 불행 때문에 가슴 아파합니다. 그리고 배척당한 예언자들처럼 선지잔 또한 공동체로부터 배척을 당했습니다.

⑹ 쓴 것으로 배불리신 하나님(15)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쓴 것들로 배불리시고 쑥으로 취하게 하셨다고 소개합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힘든데 그 상태에서 쓴 것으로 먹여서 고통을 더하게 하십니다. 쓴 것은 속으로 들어가서 복통을 일으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고통을 더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곡식과 포도주가 없는 궁핍한 상황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곡식과 포도주로 배부르게 하는 대신에 고통의 쓴 것과 쑥으로 채우셨습니다.

⑺ 재로 덮으신 하나님(16)

계속해서 먹는 것과 조약돌로 선지자의 이를 꺾으시고 재로 덮으셨습니다. 조약돌로 이를 꺾는다는 표현은 먹는 문제와 연결되는 바, 이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쓴 것도 먹지 못하게 자신의 이를 돌로 부수어버리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예 재로 덮어버리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일말의 희망도 남겨놓지 않으시고 철저하게 짓밟으셨다고 토로합니다.

⑻ 소망까지도 거두시는 하나님(17-18)

본문에는 ‘평강’, ‘복’, ‘소망’이란 희망적인 단어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단어들은 역설적으로 희망이 전부 사라졌다는 슬픈 현실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17절에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심령을 평강에서 떼어놓았고 좋은 모든 것을 잊게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현재 선지자의 상태는 평강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언제 좋은 일이 있었는지 잊을 정도로 오랫동안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평강과 행복은 모두 자신의 율법에 순종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버린 백성들은 결코 평강과 행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런 극심한 고통의 상황에서 선지자는 자신의 힘과 여호와를 향한 소망이 모두 끊어졌다고 합니다. ‘힘’으로 번역된 ‘명성’, ‘부유함’을 의미합니다. 즉 선지자는 자신의 명성과 여호와께로부터 오는 희망 모두가 사라졌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선지자는 죽음에 이를 만큼의 고통과 재앙을 당하는 의인입니다. 또한 공동체로부터 조롱을 당하는 의인입니다. 그는 비록 하나님 앞에 서는 선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공동체가 받는 고난을 같이 받습니다. 이로부터 공동체와 그 일원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부분의 잘못을 전체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체 일원으로서 전체의 잘못을 통감하려는 태도는 바람직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교회는 한 분 예수님만을 모시고 사는 하나의 교회이기 때입니다.


 

예레미야애가의 언어는 잔인하고 거칠지만, 그곳에도 하나님께서는 함께 하시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에게 고통을 주지만 그 고통을 몰라라 하지 않으시고 함께 고통에 동참하십니다. 그 고통을 감당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고통을 지나고 나면 이제 좀 더 성숙한 모습으로 변할 것입니다.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넓은 마음으로 지체들을 대할 수 있게 되어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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