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골로새서(04-02)


문안과 축복

골로새서 4장 10-18절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십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혼자 한 것 하나도 없습니다. 항상 누가 곁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참 좋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신세 많이 지고 간신히 해낸 일입니다. 기적 같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산다는 건 그걸 알고 잘난 척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과 함께 있는 동역자들에 무한 인사를 전합니다. 모두 6명의 동역자들을 소개하는데, 그 중 3명은 유대인이며, 다른 3명은 이방인 출신입니다. 바울은 함께 있는 동력자들의 무한 인사를 전하면서 서신을 마무리합니다. 특별히 바울은 에바브라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그는 골로새와 라오디게아 그리고 히에라볼리의 교회를 세우고 섬긴 사람입니다. 바울은 골로새와 라오디게아 교회에 각각 서신을 보내며 서로 돌려가며 그 서신을 읽으라고 부탁합니다.

 

바울의 동역자들의 문안(10-14)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서 함께 수고하는 동역자들을 어떤 마음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일하는 동역자보다 자신이 잘하는 것이 복음에 함께 동참하는 동역자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힌 처지면서도 함께 사역한 동역자들의 수고에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습니다.

10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11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들이 할례파이나 이들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12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13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언하노라 14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10-14)

바울의 골로새 교회를 향한 문안 인사에 대한 내용입니다. 바울과 함께 골로새 교회 문안인사를 보내는 6명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 중에서 3명은 유대인 아스다고 마가 유스도이고, 다른 3명은 개종한 헬라인 에바브라 누가 데마입니다.

⑴ 문안인사 : 아리스다고, 마가, 유스도(10-11)

사도 바울과 함께 골로새 교회에 문안인사를 보내는 여섯 명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 중에서 세 명은 유대인(아리스다고, 마가, 유스도)이며, 다른 세 명은 개종한 헬라인들입니다(에바브라, 누가, 데마). 복음을 위해 바울과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 마가 그리고 유스도를 소개합니다.

‘아리스다고’는 데살로니가 출신입니다.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 중에 데살로니가를 방문했을 때, 개종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행 17:1-9). 그는 개종 후 바울의 선교 사역에 동참했는데 바울과 함께 에베소에서 위험에 처하기도 했습니다(행 19:29). 또 바울이 예루살렘과 로마로 여행할 때 동행했으며, 로마에서 바울과 함께 투옥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를 가리켜 ‘나와 함께 갇힌 자’라고 소개합니다. 참된 친구와 동역자는 어려울 때 함께하는 자입니다. 아리스다고는 바울의 고난에 동참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참된 친구이며 동역자였습니다.

다음 인물은 바나바의 사촌인 ‘마가’입니다. 그는 예루살렘 출신으로서 요한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행 12:12,25). 마가는 바울의 제1차 전도여행을 함께 출발했으나 무슨 연유에서인지 버가에서 도중하차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행 13:13). 나중에 제2차 전도여행에 함께 동참하려고 했지만, 바울은 그를 데려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이 일로 바나바와 크게 싸운 후 결국 바울과 바나바는 결별하여 각각 따로 전도여행을 떠나게 됩니다(행 15:36-41). 그랬던 마가가 지금 바울과 함께 로마에 있다는 것은 다소 놀라운 일입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바울과 마가는 서로를 용납하고 받아들었으며 지금은 신실한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마가에 대해서 독자들이 이미 받은 명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그가 이르면 특별히 잘 영접하라고 부탁합니다.

‘마가’에 관한 명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바울이 특별히 마가를 잘 영접하라고 부탁한 것은 아마 그가 과거에 성실하지 못했던 일로 인해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그를 신뢰하지 않거나 홀대할까 염려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반성하고 그 이후에 심기일전하여 성실하고 헌신된 자로 점점 인정을 받아가고 있는 중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상황에서 마가에 대한 자신의 신뢰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가의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영원히 그를 적대감을 가지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인정받는 자로 거듭났습니다. ‘유두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지만, 바울은 그를 할례파 즉 유대인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세 사람의 유대인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함께 일하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바울 서신에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바울을 핍박하는 자들로 묘사되지만, 이들은 바울의 신실한 동역자일 뿐만 아니라 바울에게 큰 위로가 되는 자들이었습니다.

⑵ 문안 인사 : 에바브라, 누가, 데마(12-14)

바울은 세 명의 유대인 출신 동역자들의 문안 인사를 전한 후 이제 개종한 헬라인 동역자 세 명의 문안 인사를 전합니다.

바울은 특별히 ‘에바브라’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그를 가리켜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란 특별한 명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명칭은 평소에 바울 자신의 사도직 직분을 강조하면서 사용했던 표현입니다. 그런데 ‘에바브라’에게 그러한 표현을 적용한다는 것은 그를 얼마나 신뢰하고 인정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골로새서 1장 7절에서는 에바브라를 ‘함께 종 된 자’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 표현은 두기고에게도 적용되었습니다(골 1:7;4:7). 바울은 독자들에게 에바브라가 그들을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는지 알리고 있습니다. 그는 기도 가운데 너희를 위해서 항상 애쓰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애쓰다’는 고통 가운데 투쟁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에바브라’는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직면해 있는 골로새 교회의 상황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1장 9절에서 독자들에게 관한 소식을 들은 날부터 계속해서 기도해 오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에바브라는 골로새 교회의 소식을 바울에게 전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쉬지 않고 고향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에바브라가 골로새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내용은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깨닫고 확신 가운데 거하게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에바브라가 골로새 교회의 이단적 가르침에 대해서 얼마나 심각하게 염려하고 있었는지 보여주고 증거입니다.

바울은 에바브라가 골로새 교회뿐만 아니라 라오디게아와 히에라폴리스 교회를 위해서도 많은 수고를 했다는 것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증거한다는 것은 에바브라의 수고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의 가르침이 바울이 전했던 복음과 일치한다는 것을 보증하고 확인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의심하지 말고 에바브라의 가르침을 듣고 따라야 합니다.

‘누가’와 ‘데마’의 문안 인사도 전합니다. ‘누가’는 사랑받는 의사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누가가 바울의 의였다고 주장하지만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었습니다. 데마에 대해서도 별로 알려진 것은 없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10절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말합니다. 한때 바울을 도왔던 동역자들이 그가 노쇠하고 병들었을 때 버리고 떠난다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부탁과 마지막 인사(15-18)

누구나 고난이나 고통의 상황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만약 다른 사람의 극심한 고난을 함께 감당해야 한다면, 그 관계를 지속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긴병에 효자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천륜이라고 하는 부모와 자녀의 관도 고난 앞에서는 깨어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15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16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17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 18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내가 매인 것을 생각하라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15-18)

하나님을 믿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처음 믿을 때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성장 과정에서 때로는 환란과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끝까지 주님을 붙드는 것이 중요하지만, 신앙생활에서도 모든 성도와 오래 함께 협력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서로 함께함으로 귀한 동역자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⑴ 바울의 부탁(15-17)

바울은 동역자들의 문안 인사를 전한 후 이제 자신의 간단한 문안인사와 부탁의 말을 전합니다.

바울은 특히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눕바라는 여인과 그녀의 가정 교회에 문안인사를 대신 전해달라고 부탁합니다. ‘눕바(Νυμφα)’라는 여인은 자신의 집을 가정교회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이 가정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지 교회와 같은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바울은 골로새와 라오디게아에 각각의 서신을 따로 보내고 있습니다.

그는 성도들에게 라오디게아 교회와 서신을 서로 돌려 읽으라고 특별히 부탁합니다. 각각의 교회에 보낸 편지의 내용은 서로 달랐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 두 교회가 그 편지를 서로 교환하여 읽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특히 아킵보의 이름은 거론하고 있습니다. 아킵보는 빌레몬서에서 바울과 함께 군사된 자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아킵보는 빌레몬 가족의 일원이었습니다. 아마 빌레몬과 압비아의 아들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아킵보가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잘 감당하라고 부탁하는데 그 직분이 무엇인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독자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⑵ 끝인사(18)

바울은 마지막으로 이 서신이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을 친필로 서명하여 확증합니다. 바울이 골로새서를 누군가에게 대필하게 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자신의 친필로 문안 인사를 첨가함으로 이 서신이 다른 사람에 의해 조작된 것이 아니라 바울 자신의 서신이라는 사실을 보증합니다.

바울은 ‘내가 매여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달라’고 부탁하면서 그의 서신을 끝맺습니다. 아마 이것은 독자들에게 바울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달라는 부탁일 것입니다. 서신은 축복으로 마무리됩니다.


능력을 타고난 사람이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연약함을 주님 안에서 용납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 자신을 위해 기도해 주는 동역자들이 곁에 있는 사람, 용서하고 관용하며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사역자들과 함께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이 됩니다. 모든 성도들이 이런 일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구독과 광고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골로새서(04-01)


지혜롭고 은혜롭게 행하라

골로새서 4장 2-9절


혹시 직장이나 가정에 어려움을 당할 때, 무엇이 가장 생각이 납니까? 또 어떻게 행해야 하는 것이 정답입니까? 그것은 바로 기도가 정답입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대화이며 하나님꼐 모든 상황을 올려드리고 맡겨드린 문제의 마스터키입니다.

 

사도 바울은 실질적인 메시지를 마치고, 마지막 권면과 부탁의 말을 합니다. 권면의 내용은 기도와 지혜로운 행위 그리고 은혜로운 말을 하라고 명합니다. 마지막 권면은 성도들을 향한 태도와 믿지 않는 불신자들을 향한 태도에 관해서 설명합니다. 독자들은 자신과 성도들을 위해서 항상 기도하고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을 향해서는 지혜롭게 행동하고 은혜로운 말을 하여 복음에 합당한 모습을 보이라고 권면합니다.

 

마지막 권면(2-6)

성도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지혜롭게 행동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권하는 모든 권면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기도가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자신들을 위해 기도와 감사를,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갈 때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적절한 지혜로운 행동은 사람들의 경계심을 풀어 마음을 열어주고, 복음을 전할 기회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2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의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3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4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 5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6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2-6)

바울은 이 서신의 기록한 목적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이제 마지막으로 일반적인 성도의 삶에 대해 권면합니다. 이 권면은 크게 두 가지로 구별됩니다. 첫째, ‘계속해서 기도하라’라는 권면입니다. 이것은 골로새 성도들 자신들과 성도들을 위한 것입니다(2-4). 둘째, ‘지혜롭게 행하라’라는 권면인데, 이것은 믿지 않는 이방인들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것입니다(5-6).

⑴ 계속해서 기도하라(2-4)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에게 ‘계속해서 기도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는 먼저 그 자신이 골로새 성도들을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한다고 말했습니다(골 1:9). 이제 골로새 성도들에게도 ‘계속해서 기도하라’고 권고합니다(눅 11:5-13; 18:1-8). ‘계속하라’는 명령에는 단지 시간적으로 쉬지 말고 계속하라는 뜻이 아니라, 기도에 헌신되고 준비된 자가 되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이 계속 기도할 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누구를 위해서라도 기도할 수 있는 헌신되고 준비된 다가 되기를 원합니다. 바울은 ‘기도에 깨어 있으라’고 보충하여 말합니다. ‘깨어 있으라’는 것은 종말론적인 경각심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 경각심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으로 깨어 있는 것과 더불어 거짓 교사들의 속이는 가르침에 넘어가지 않도록 깨어 있으라고 말합니다. 특히, ‘감사함으로 기도에 깨어있으라’고 말합니다. 골로새 성도들은 항상 감사하면서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흑암에서 건짐을 받아 하나님 아들의 영광스러운 빛의 나라로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골 1:12-13). 바울은 독자들이 항상 감사하고 기도하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특별히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 자신과 그의 동역자들을 가리키는 것인데, 특별히 디모데와 에바브라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골 1:1,7; 4:12).

기도의 목적은 감옥에 갇힌 자신의 안전과 평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전도의 문을 열어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감옥에서 석방되어서 밖에 나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해달라는 뜻이 아니라 감옥 안에서도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재판정에서 자신을 위해서 변론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조차 복음을 전하는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지만 비교적 자유롭게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감옥에 있으면서도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갇힌 것도 복음을 전하기 위한 목적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밖에서 자유롭게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이제 갇혀 있을 때에도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갇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형편을 주시면 복음을 전하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어떤 형편에 있든지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오로지 복음을 위해서 헌신된 자입니다.

⑵ 지혜롭게 행하라(5-6)

사도 바울은 이제 믿지 않는 불신자들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지 않는 자들을 대할 때 지혜롭게 행동하고 은혜롭게 말을 해야 합니다. 먼저 이방인들에 대하여 지혜롭게 행하라고 명령합니다. 지혜는 바울이 강조했던 것으로, 모든 지혜와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골 2:3).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행동하는 것이 곧 지혜롭게 행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혜’는 거짓 교사들의 ‘교묘한 말’과 대조됩니다(골 2:4). 지혜는 이방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이지만, 교묘한 말은 독자들을 속여서 그리스도로부터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을 허투루 낭비하지 말고 잘 선용하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는 이방인들을 만나는 시간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물론 이것은 이방인들을 만날 때마다 항상 복음을 전하라는 뜻이 아니라, 이방인들과 쓸데없는 논쟁이나 무익한 말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그 시간을 유익하게 잘 사용하라는 뜻입니다. 지혜로운 행위는 선한 행위와 일맥상통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지혜롭게 행동하는 것은 그 자체가 복음을 전하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롬 15:9).

‘너희가 이방인 중에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벧전 2:12)

둘째, 이방인들에게 은혜로운 말을 하라고 명합니다. ‘은혜로운 말’이란 복음에 합당한 경건하고 의로운 말입니다. 이방인들에게 말할 때에는 말의 내용뿐만 아니라 태도에 있어서도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은혜로운 말을 소금으로 맛을 낸 음식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같은 음식이라도 간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맛이 달라집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불신자들이 기독교 신앙에 관해서 질문하면 언제라도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지혜롭게 행하고 은혜로운 말을 하는 것에 습관이 된 자들은 이방인들의 질문에 마땅히 어떻게 대답할 것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인사(7-9)

거룩한 성품을 가꾸는 데 있어서 ‘말’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큰 배를 움직이는 작은 키와 같이 말과 혀는 사람의 마음과 생명을 좌우하는 큰 힘을 갖고 있습니다(약 3:4-5; 잠 18:21). 그러므로 우리는 적절히 간을 맞춘 맛있는 음식을 대접함으로써 사람의 혀를 즐겁게 하듯, 지혜롭고 적절한 말로 사람의 마음에 위로와 힘을 공급하고 그의 마음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말로 상처를 준 일은 반드시 회개하고 회복해야 합니다.

7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니 그는 사랑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니라 8내가 그를 특별히 너희에게 보내는 것은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 9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그들이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려주리라(7-9)

사도 바울은 이제 골로새서를 마무리하면서 골로새 성도들에게 마지막 인사말을 전합니다. 성도의 삶에 대한 권면을 마치고 서신을 마무리 부분으로 진행합니다. 바울 곁에 있다가 골로새 교회로 갈 두 사람을 추천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⑴ 두기고를 보냄(7-8)

먼저 이 서신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바울의 사정에 대해서 설명하도록 두기고와 오네시모를 보낸다고 말합니다. 두기고가 바울의 사정과 형편을 독자들에게 다 알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골로새 교회 성도들은 그들의 지도자인 에바브라가 바울에게로 간 후에 그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고대인들은 주로 글보다는 말로 소식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꼭 필요한 메시지를 글로 써서 보내고 자신에 관한 여러 가지 소식과 사정은 두기고를 통해서 들으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두기고에 대해서 세 가지로 표현을 합니다. 첫째 그는 사랑받는 형제입니다. 둘째 신실한 일꾼입니다. 셋째 그는 주 안에서 함께 된 종된 자이라는 것입니다. 두기고는 바울의 3차 전도 여행 마지막 무렵 아시아에서 그리스도와 드로와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행에 동행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로마의 감옥에 있는 바울과 함께 있습니다. 바울이 젊어서 왕성하게 선교 사역을 할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와 함께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감옥에 갇혀 늙고 병들었을 때에는 사람들이 하나 둘 그의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두기고는 바울의 생애 마지막까지 함께 했던 몇몇 사람 중 하나입니다. 바울이 두기고를 보내는 목적은 이 서신을 전달할 뿐 아니라 바울을 대신해서 그들을 위로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⑵ 오네시모를 보냄(9)

두기고와 더불어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를 향해 신실하고 사랑받는 형제이며 너희에게서 온 자라고 말합니다. “오네시모가 너희로부터 내게 온 자”라고 말하는 것은 그가 골로새 출신임을 말해줍니다. 오네시모는 골로새 교회 성도였던 빌레몬의 종이었으나, 지금 주인을 버리고 도망쳐 로마에 있는 바울에게로 왔습니다. 바울이 도망친 종을 향하여 신실하고 사랑받는 형제라고 부르는 것은 파격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인사 치례가 아니라 사실 바울에게 오네시모는 지금 그러한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오네시모가 도망칠 때는 무익한 자였으나 이제 바울뿐 아니라 고르세 교회 성도들에게도 유익한 자가 되었습니다.

복음은 무익한 자를 유익한 자로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그가 다시금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만들었습니다. 당시 노예가 도망쳤다가 주인에게 잡히면 십중팔구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잘 대해주라고 부탁하긴 하지만 그가 다시 주인의 노예로 돌아간다는 것은 분명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를 보내면서 사로잡혀 돌아가는 도망친 노예로 취급받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사도 바울의 말을 전하는 사자로 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대책은 기도입니다. 우리는 당신의 자녀이며 일꾼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공동체입니다. 기도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기도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월을 아끼며 살 때 세상에게 할 말이 있는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진짜가 아니면 세상에게 진짜를 소개해줄 수 없습니다.


구독과 광고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골로새서(03-02)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

골로새서 3장 12절-4장 1절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 존재라면, 당연히 이제 과거가 되어버린 땅의 질서를 따라 살아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창조된 그리스도인들은 그 하나님을 닮아서 보시기에 심히 좋은 것을 창조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아버지 하나님께 어울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과 하나가 된 ‘작은 예수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골로새 성도들은 다양한 신분과 계층의 사람들로, 부부간, 유대인과 이방인, 노예들과 주인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가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행하신 것처럼 그들도 서로에게 그렇게 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창조된 자들은 그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새로운 삶의 옷 입으라(1) : 사랑의 삶(12-14)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택하심을 받아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거룩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변화된 신분인 새로운 사람에 걸맞게 살아가야 합니다. 과거에 구습은 벗어버리고 새로운 삶을 선택받은 우리는 주님처럼 서로 용납하고 피차 용서하면서 겸손 온유 오래 참음으로 새 사람의 성품을 녹여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12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3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12-14)

성도는 하나님의 택하시고 거룩한 사람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제 이전에 입었던 옷을 다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옷을 입어야 합니다. 이 부분의 내용과 의도는 앞부분과의 연관성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⑴ 다섯 개의 덕목(12)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을 향해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이곳에서 그 입어야할 ‘옷’이란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 그리고 ‘오래 참음’이라는 다섯 개의 기독교적 덕목입니다. 이 덕목은 하나님의 성품이며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이러한 아름다운 덕목으로 무장하는 것을 옷 입는 것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옷은 그 사람이 어떤 신분의 사람인지를 드러내는 표시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존재인지는, 그들이 입고 있는 영적인 옷에 의해 드러납니다. 독자들이 옷 입어야 할 다섯 가지 덕목은 모두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 창조를 받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았기에, 마땅히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먼저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이라고 묘사합니다(1). 이것은 구약에서 언약에 따라 택함을 입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묘사하는 전형적인 표현들입니다. 이제 이방 종교로부터 개종한 독자들에게 이 표현을 적용함으로, 그들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일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11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말한 것에 대한 증거입니다.

여기서 나열하고 있는 다섯 가지 덕목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몸소 실천하고 보여주신 것들입니다. ‘긍휼(σπλαγχνον스플랑크논)’이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 슬퍼하는 것이라면, ‘자비’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입니다. ‘겸손’은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며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온유함’은 성령의 열매이며 온유함의 전형은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인내’는 부당한 고난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분노하거나 보복하지 않고 온유한 마음으로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⑵ 서로 용납하라(13)

사도 바울은 다음으로 ‘서로 용납하라’고 합니다. 위 12절에서 말한 다섯 덕목에 대해서 포괄적으로 재진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은 우리가 서로 용서해야 할 원인이며, 우리가 따라가야 할 모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창조된 자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가야 합니다.

용서의 사람으로 변화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하지만 용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습니다. ‘용서함을 받았으면 당연히 용서해야 한다’고 말은 쉽지만, 사실 것이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고 하셨겠습니까! 그만큼 용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해야 할 것은 서로에게 있는 불만입니다. 불만은 본질적으로 불의이나 악이라기보다는 서로에 대한 오해에서 생길 수 있는 불평입니다. ‘용납한다’는 것은 형제들의 약점을 감당하고 견디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서로의 약점을 지적하고 비난하기보단 서로를 용납하고 감당해야 합니다. 여기서 ‘용서한다’는 단어는 ‘은혜를 베풀다’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형제의 약점을 용납하고 감당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은혜를 베푸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용서가 온몸으로 느껴질 때가 되면, 자신도 어느새 용서의 사람이 되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⑶ 사랑을 더하라(14)

바울은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위에서 설명한 여러 가지 기독교의 덕목들을 완전하게 하나로 묶는 띠이기 때문입니다. 즉, 앞에서 설명한 기독교의 덕목이나 용서는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그것이 완전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사랑 없이도 불쌍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정은 될 수 있어도 그리스도의 긍휼하심과 자비를 본받는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삶의 옷을 입으라(2) : 평강과 감사와 말씀의 삶(15-17)

기준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그 기준에 따라 자신의 자유가 제한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그 기준이 있어야 안전하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건 하나님의 기준을 얻는 일입니다. 이것은 물에서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구명조끼와 같습니다.

15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15-17)

성도는 자유인입니다. 그들은 주체적으로 자신이 누구의 통치를 받아야 할 것인지 정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이제 성도는 그리스도의 평화가 자신을 다스리게 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지배하게 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처럼 평화를 만들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창조하고 타인을 살려내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존재입니다.

⑴ 그리스도의 평강(15)

바울은 ‘옷 입으라’고 명령했던 바울은 이제 ‘주장하게 하라’는 명령으로 계속 권면합니다. ‘주장’하는 주체는 그리스도의 평강이며, ‘주장’되어야 할 대상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교회가 평강으로 한 몸이 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평강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속성이지만 사탄은 죄라는 수단을 통하여 다툼과 분쟁을 일으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여기서는 특별히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를 주장하게 하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주장한다’는 것은 운동경기에서의 심판처럼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⑵ 그리스도의 말씀(16)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하게 거할 때,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사랑의 공동체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란 ‘그리스도의 평강’과 병행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평강을 이룰 수 있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하게 거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하게 거하신다면, 우리는 서로 지혜로 가르치고 권면할 수 있게 됩니다. 모든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옵니다.

바울은 앞에서 모든 지혜와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으므로(골 2:3), 독자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 지식으로 가득하게 되기를 위해 기도했습니다(골 1:9). 여기서 강조하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지혜는 거짓 교사들의 속이는 말과 헛된 가르심과 대조됩니다(골 2:4,18).

⑶ 그리스도의 이름(17)

바울은 ‘그리스도의 평강’과 ‘그리스도의 말씀’에 이어 ‘그리스도의 이름’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한다는 뜻과 ‘그리스도의 마음과 심장으로’ 한다는 뜻입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말에나 행동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행한다면, 그리스도의 이름이 욕되지 않고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

 

행하는 구체적인 방법(18-4:1)

성도의 가정에는 사랑과 섬김의 질서가 작동합니다. 순종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며 사랑으로 그 순종에 화답합니다. 주 안에서 종들에게 주인은 하늘의 상전과 같습니다. 하늘의 상전을 대하듯이 정직하게 인간 주인을 상대해야 하고, 상전은 하늘 상전을 대하듯 종의 가치를 존중해야 합니다.

18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19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20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21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22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 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23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24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25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 1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18-4:1)

사도 바울은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17)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제 몇 가지 삶의 영역에서 구체적으로 주의 이름으로 행하는 방법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이는 가정의 영역에서 각 구성원인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그리고 종과 주인의 관계에 대해 서로에게 어떻게 대하고 행할 것인지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1) 부부관계(18-19)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그 안에 남자와 여자로 구성하여 만들어 주셨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께서 본질적으로 동등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역할적인 부분에서 남자에게만 특별한 역할을 주시고, 또 여성에게도 특별한 역할 주셔서 가장을 이룰 수 있는 동기를 주셨습니다.

첫째는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라고 권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성에게도 잘 협조하고 순종함으로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는 것이, 본문에 메시지인 것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을 가지고 사랑할 때, 그 안에 진정한 순종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남편에게는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라고 권고합니다. 남자들에게는 힘이 있습니다. 또 여자들에게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이렇게 조화롭게 아름답게 주셨습니다. 남편들이 힘을 가지고 부인들을 어렵게 하면 가정이 불화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을 하더라도 아내를 사랑할 때, 아가페적인 사랑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때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을 가지고 사랑하는 아내를 자신의 마음에 품고 그것으로 기쁘게 해야 될 의무가 있는 것이 남편된 도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남편으로서, 또한 부인으로서 역할을 주셨는데, 그 주의 마음으로 잘 품고 나눌 때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아름다운 부부가 된다는 것입니다.

(2) 부자관계(20-21)

다음으로, 자녀들에게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것이니라’(20)라고 권고하십니다. 자녀들에게 주시는 주시는 말씀은 부모님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에게 모든 것들을 겸비하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는 주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특별히 특별히 십계명 중에 1-4계명에는 하나님께 대한 계명이지만, 5-10계명까지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내용입니다. 사람들의 계명 중에서 첫 계명으로 세우신 것은 그만큼 부모님을 공경할 때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21절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 바로 자녀들입니다. 계속적으로 자녀를 통해 축복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마음을 품고 축복을 나눌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아직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성적이거나 비이성적인 것을 가지고, 때로는 우리가 대화할 때, 마음이 깨어지거나 또 감정이 상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자녀를 대할 때, 유리그릇을 다루듯이 조심해서 그 아이의 인격이 상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가정은 좋은 것입니다. 많은 시간을 내고 잘 가꾸면 쉼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정으로 들어가고 싶은 곳입니다. 그렇지만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지 않고 가꾸지 않으면 엉겅퀴가 나고 다른 가시가 나서, 가정은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정을 잘 복구하고 관리하고 잘 수리하는 것이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복된 메시지라고 믿습니다. 바울을 통해 골로새 교회 안에 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가정에서부터 아름다움을 잘 양육하여서 하나님의 거룩을 가지고 계속 거룩함을 추구함으로, 그런 거룩한 교회로 발전시키는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3) 주종관계(23-4:1)

종들에게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22)라고 권고하고 계십니다.

그 당시에는 종과 상전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관계도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잘 섬기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현재 적용한다면, 회사 안에 직원이 상사인 우리 지도자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잘 섬기는 것이, 하나의 예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하지 말라’(23)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을 대하듯 행할 수 있다면, 그 삶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계시고, 바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섬길 때, 또한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24)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적과 스타일이 있다면, 여러 면에서 다르게 사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모든 사람들을 주께 대하듯 살아가는 것입니다.

25절에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래 본성이 우리를 외모로 취하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을 때, 어리고 비록 연약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시고 왕으로 이끌어 주시고, 또 이스라엘을 맡겨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분이기에, 항상 중심이 하나님께 열려있고 순종하고 솔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종들에게만 권고하신 것이 아니라 이제 상전들에게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1)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상전은 하나님이십니다. 언제나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마음을 모든 사람들을 대할 때, 하나님께서는 인과응보로 우리에게 큰 축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우리에게 여러 가지 판을 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 가운데 잘하면 함께 축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당신의 모습이 이러한 가운데서 아름답게 생활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바울은 남성 우월주의나 노예 제도에 대해서 어떤 평가도 내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 시대 사람들이 살아가는 문화와 제도일 뿐입니다. 사실 어떤 시대에 어떤 문화와 제도라도 이상적인 것은 없습니다.

죄 아래 살아가는 인간의 문화와 제도에는 항상 어떤 모순과 문제가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상황 가운데서라도 주 예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종들에 대해서 특히 많이 강조하면서 주인에 대한 권면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은 성도들 중 종의 신분에 있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골로새 교회 오네시모라는 종은 주인인 빌레몬으로부터 도망쳐서 로마에 있는 바울에게 갔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바울은 종들에게 특별히 권면을 해야 될 필요를 느꼈을 것입니다.


도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그분의 힘을 의지하여 살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는 존재입니다. 그분처럼 사랑하고 욕망면 그분처럼 자유로워집니다. 인간다워집니다. 삶이 행복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고 그분의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구독과 광고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골로새서(03-01)


위의 것을 찾으라

골로새서 3장 1-11절


성도는 빛 가운데 선한 열매를 맺으며 살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성도들이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단지 구원만 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 사람입니다. 자신의 의지가 없는 것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내 뜻과 계획 그리고 바람보다는 하나님 나라와 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마음을 성령으로, 성경의 말씀으로 거룩한 주의 교회를 통해 지침을 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독자들이 세례 가운데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설명한 후에 이제 긍정적인 측면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남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받고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죄 아래 속했던 옛 사람이 죽고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새로운 존재로 다시 창조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늘의 것들을 추구하려면 땅에 속한 옛 사람의 생각과 행위를 버리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새롭게 창조된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때달아야 합니다.

 

위의 것을 찾으라(1-4)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계신 나라,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를 소중에게 여기며 하나님의 가치들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하고 따르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1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1-4)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시편 110편 1절)는 세상 밖의 존재가 아니라 세상의 통치자입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라’는 것은 예수님이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라는 뜻이요, 땅의 것은 무엇이든 상대화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의 다스림을 망각하면 땅의 것, 돈이나 권력의 지배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영생의 소망과도 멀어집니다. 나는 세상에서 부와 명예를 얻을 때보다 주의 통치가 이뤄지는 것을 더 사모하며 기뻐합니까?

⑴ 위의 것을 생각하라(1-2)

사도 바울은 앞에서 육체에 따라 살아가던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강조했습니다. 옛 사람은 죽었지만,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독자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하여 하늘에 속한 새로운 존재로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독자들이 살리심을 받았다는 설명은 육체적인 사실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영적이고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위에 것을 생각하라’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정체성에 걸맞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정이나 직장에서 그들이 판단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세상의 논리로, 교회에서는 교회의 논리로 산다고 하는 이분법적인 사고는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께 다스리는 곳을 의미하고, 그것은 교회만 온 세상을 의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었으므로, 영적인 측면에서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일은 곧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광한 자기 정체성을 분명하게 확립하는 것이야말로 복음에 합당하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골로새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다면 지금 그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후에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이것은 독자들도 지금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속한 존재들이란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자들은 마땅히 하늘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고 하늘에 있는 거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독자들이 여전히 과거에 살던 모습 그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들은 육신의 눈으로 볼 때에는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과거에 행하던 생각과 습관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찾고 생각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바울은 독자들에게 의식적으로 자신들이 지금 어디에 속한 자들인지 의식적으로 자신들이 지금 어디에 속한 자들인지 인식하라고 촉구합니다.

그들이 세상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은 육체에 속한 세상 것들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함께 살리심을 받았다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의 관계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하늘에 속한 자들이라면 하늘의 것들을 추구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⑵ 너희는 하늘에 속한 자들이다(3-4)

사도 바울은 독자들이 하늘에 속한 자들이 한 사실을 다시 강조합니다. 바울은 독자들에게 육신의 눈으로 보지 말고 영적인 눈으로 자신을 돌아보도록 인도합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면 그리스도는 죽었고, 지금 그는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도 않고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안목으로 바라보면 그리스도는 지금 하나님과 함께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에 계십니다. 독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된 존재라면 그들의 영적인 생명도 지금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독자들은 지금 육신의 눈으로는 그것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감추어진 것과 같습니다. 그렇더라고 그것은 사실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을 믿는다면 이 사실도 믿어야 할 것입니다. 독자들은 그들의 영적인 생명이 종말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남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영광 중에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독자들도 나중에 그렇게 영광 중에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영광 중에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영광 중에 나타날 것에 대한 소망은 지금 이 세상에 죄와 더불어 고난 가운데 투쟁하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소망과 격려가 되는 것입니다.

 

땅에 속한 육신을 죄로부터 떠나라(5-11)

육체의 목숨이 있으면 충분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것은 짐승과 다를 봐가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소통할 때만 영위할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그 생명은 하나님 안에만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통해서만 누릴 수 있습니다. (박대영 2:32)

5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7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8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9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10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11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 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5-11)

위의 것을 차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겸손입니다. 성도는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모습을 늘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이 전에 그 가운데 살 때는 그 가운데서 행했다고 말합니다.

⑴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5-7)

바울은 1절에서 ‘위의 것들을 찾으라’고 했는데, 이제 구체적으로 위의 것들을 찾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인지 설명합니다. 위의 것들을 찾고 생각하기 위해서는 먼저 땅의 것들을 생각하던 땅의 지체를 죽여야 합니다.

땅의 지체를 죽이라는 명령은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선언했던 것을 상기시킵니다(골로새서 2:12,13,20;3:3). ‘죽었다’는 사실적인 선언과 ‘죽이라’는 명령이 함께 나타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사역을 통한 것이지만, 여전히 우리에게는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으로 덧입어야 할 책임과 사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새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과거의 죄에 얽매여 있던 습성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의 마음과 행동에 배어 있는 죄의 속성을 지체에 비유하여 설명하면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예수께서도 범죄하는 눈을 빼버리고 손을 찍어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5:27-30).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는 것은 은유적인 표현으로 죄에 얽매여 있는 생각이나 행위를 철저하게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죽여야 할 땅에 있는 지체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바울은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이라는 다섯 개의 악의 목록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독자들이 회심하기 전 과거 이방인으로 있을 때 행했던 습성들입니다. 이 다섯 개의 목록은 주로 마음의 생각과 관련된 것입니다.

⑵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8-9)

사도 바울은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는 것에 대해서 재차 강조합니다. 이번에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말로 바꾸어 설명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비슷한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설명하는 것은 독자들이 과거에 행하던 죄의 습관에서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이번에도 벗어버려야 할 다섯 개의 악의 목록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분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입에서 나오는 부끄러운 말입니다. 바울은 말과 행위로 나타나는 죄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바울은 특히 서로 거짓말하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속이는 거짓말은 사탄이 인간을 타락시킨 전형적인 수법입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죄 아래 있는 옛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바울은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라고 말합니다. 옛 사람은 존재론적인 문제이고 행위는 실천적인 문제입니다. 우리가 벗어버려야 할 것은 단지 어떤 불의한 행위만이 아닙니다. 죄 아래 있는 인간 존재가 그대로 있으면서도 어떤 죄의 행위를 절제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위선이고 속이는 것입니다. 바울은 존재론적인 측면과 행위론적인 측면에서 모두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고 명령합니다.

⑶ 새롭게 창조된 자들(10-11)

바울은 우리가 옛 사람을 벗어버려야 할 당위성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8절에 ‘벗어버리라’는 말은 명령형입니다. 그러나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10새 사람을 입었으니’라는 말은 사실적인 것에 대한 설명입니다. 성도들이 악한 행위를 벗어버려야 할 이유는 이미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창조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새 창조는 단지 불의한 행위를 벗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에까지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죄 아래 있던 인간이 스스로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가능했다면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시지 않았어도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창조 되었으므로 우리는 마땅히 땅에 속한 옛 지체의 죄악을 죽이고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의 백성들에게는 신분이나 인종이나 민족에 따라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헬라파나 무헬라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런 차별이 없는 한 하나님의 한 백성들입니다.


우리는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것은 지식의 변화와 공동체의 연합으로 나타납니다. 생각이 바뀌어야 행동도 변합니다. 새 사람을 입은 삶은 인종, 지역, 성별의 벽을 허물고 차별하지 않습니다. 차별은 만유를 지으시고, 만유 안에 계시고 만유를 하나되게 하시는 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구독과 광고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골로새서(02-03)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골로새서 2장 16-23절


죽어라고 열심히 지키고 의지하고 붙들어도 바람을 잡는 것 같은 쓸데없는 것이 있습니다. 속이 허해서 더 쓸데없는 것에 집착하게 됩니다. 진짜 믿는 게 아니면 믿을수록 힘들고 믿을수록 더 거짓이 됩니다. 자신을 망치게 되고 남도 망치게 됩니다.

 

바울은 앞에서 철학과 헛된 속임수에 속지 말라고 했습니다(8). 본문에서는 그것들이 무엇인지를 자세히 설명합니다. 철학으로 간주된 사람의 전통에 대한 설명이며, 세상적인 영에 의한 헛된 속임수에 관한 설명입니다. 철학과 헛된 속임수는 금욕주의와 천사를 숭배하는 사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육체에 속한 것이며 세상적인 것으로 인간의 전통과 가르침일 뿐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헛된 가르침과 권위에 저항하고,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참 자유와 승리를 누리는 길로 초대합니다.

 

거짓 교사와 관련한 권면3 : 유대교 관습에 현혹되지 말라(16-19)

역사적으로 영적인 면에서 거짓 교사는 어느 시대나 존재했습니다. 그들의 특징은 진리를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되고 헛된 인간의 사상을 가르칠 뿐입니다. 그리고 연약한 성도들을 통해 자신의 이득을 삼는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실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시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만을 붙들어야 합니다.

16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17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18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어 과장하고 19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16-19)

유대주의자들은 골로새 교회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골로새 성도들은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들에 관련된 율법 문제로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엄격한 율법 준수가 구원에 필수인 양 미혹했습니다.

⑴ 유대적 절기에 대해서(16-17)

사도 바울은 율법주의를 경계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로워진 우리는 율법의 요구들이 심판하지 못하게 하라고 합니다. 먼저 독자들을 향해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아무도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고 명합니다.

거짓 교사들은 단순한 유대주의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유대적 전통을 이교 사상과 결합하여 혼합주의적인 종교를 만들어 금욕주의와 천사숭배를 주장하는 자들입니다. 금욕주의와 천사숭배는 분명 유대적 전통도 아니고 기독교적 가르침도 아닙니다.

거짓 교사들이 먹고 마시는 것으로 성도들이 복음의 진리에 근거해 누리는 자유를 그들은 불경건한 행위로 비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하는 것과 같습니다(갈라디아서 4:29). 거짓 교사들은 마치 자신들만 진리를 가진 것처럼 성도들을 비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실상을 폭로하면서 성도들이 그들로부터 비판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선언합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에 관한 것은 장차 올 것에 대한 그림자일 뿐이라고 합니다. 또한 거짓 교사들에 의해 왜곡된 가르침은 물론이고 유대적인 전통과 관습도 그것은 장차 올 참된 진리를 미리 보여주는 그림자일 뿐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절에서는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나 바울은 여기서 복음의 참된 진리를 ‘참 형상’이라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던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골로새서 1:18). 거짓 교사들이 그림자를 붙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독자들은 진리의 참된 실체인 그리스도에게 붙어있는 그분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거짓 교사들로부터 비판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고, 그들의 비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도 없습니다.

⑵ 천사 숭배에 대해서(18-19)

사도 바울은 천사숭배를 반대합니다. 이제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서 직접 언급합니다. 그는 ‘아무도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위에서 ‘아무도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는 말과 유사합니다. 거짓 교사들이 성도들을 비난하고 정죄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은 자신들의 꾸며낸 겸손과 천사숭배에 동참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경험하지 못하면 2류 신자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꾸며낸 겸손이란 거짓 교사들이 스스로 자신을 낮추기 위해서 행했던 금욕주의적 의식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금욕주의적 행위는 천사숭배 사상과 관련이 있었을 것입니다. 천사숭배 사상에 대한 정확한 실체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천사들이 만물을 다스리는 자로 세움을 받았다고 이해하고 유대적 전통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각각의 천사들에 의해서 다스림을 받고, 세상 민족들의 경계도 천사들의 숫자에 따라 정해져 그들이 다스리도록 맡겨졌다고 간주합니다. 거짓 교사들은 환상 가운데 하늘에 올라가 천사들이 다스리고 우주에 대한 비밀을 보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영적인 계시는 금요적인 상태를 유지할 때 잘 수납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거짓 교사들이 꾸며낸 겸손과 천사숭배로 독자들을 정죄한 것은 자신들이 본 것에 근거하여 육신적인 생각을 따라 헛된 자랑을 한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거짓 교사들은 자신들이 본 환상을 영적인 계시라고 자랑했지만, 그것은 사실 육체에 속한 헛되 자랑일 뿐입니다. 거짓 교사들이 그것을 자랑하고 있는 한 그들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붙들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머리에 붙어있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온 몸이 머리로부터 영향을 받고 힘을 얻어 서로 연합하여 자라게 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을 자라게 하십니다(골로새서 1:6,10). 거짓 교사들이 복음을 붙들지 않고 헛된 것을 자랑하는 한 그들은 머리에서 떨어져 나간 자들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앞 두 명령에 대한 부연(20-23)

우리의 체험이 우리가 더욱 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예수님을 굳건히 붙잡게 하지 않는다면, 결과적으로 그 체험은 우리의 영혼을 영적 타락으로 이끄는 잘못된 것에 불과합니다. 모든 성도가 자랑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행한 종교적 행위도, 영적 환상 같은 체험도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자랑입니다.

20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21(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22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 23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20-23)

그리스도의 연합한 우리에게 더 이상 율법의 규례는 아무런 구속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십자가의 능력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런데 골로새 성도들은 유대주의자들의 꾐을 받아 다시 율법의 종이 되는 모순에 빠졌습니다.

⑴ 금욕주의를 배격하라(20-21)

바울은 8절에서 언급한 ‘세상 초등학문’에 대해서 다시 언급합니다. 여기서도 초등학문이란 표현보다 세상이 지배하는 영적인 세력들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거짓 교사들이 섬겼던 천사들은 세상의 영적 세력에 해당합니다.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는 흑암의 권세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죽음으로 세상의 통치자와 권세들을 무력화하셨습니다(골로새서 2:15).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하여 세상 권세에 속박되었던 과거의 존재는 죽었고, 그의 부활하심에 연합하여 새로운 존재로 일으키심을 받았습니다(골로새서 2:12). 그런데도 불구하고 성도들 중에는 여전히 세상의 영들에 속해 있는 것처럼 살아가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독자들에게 ‘어찌하여 세상의 영들의 가르침에 순종할 수 있느냐?’라고 반문합니다. 그러면 독자들이 어떤 측면에서 여전히 세상 규례에 순종하고 있었습니까? 그들은 금욕주의적인 가르침에 동참하고 있었습니다.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는 것은 금요주의자들의 주장이었습니다. 독자들은 이러한 금욕주의적인 가르침에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금욕주의적인 가르침에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은 분명합니다(고린도전서 7장). 그러나 그것은 결코 복음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바울은 금욕주의를 미혹하는 영과 귀신을 가르침이라고 정죄하고 있습니다(디모데전서 4:1-4).

⑵ 금욕주의의 허구성(22-23)

바울은 금욕주의의 허구성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거짓 교사들은 자신들이 영적이고 천상적인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그것은 잠시 있다 없어질 일시적인 것이며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일 뿐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한때 쓰이고 없어지는 것’이란 말은 금욕주의자들의 관심이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있으며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먹고 마시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거들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며,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심판에 모두 불타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짓 교사들의 금욕주의는 그들을 영적인 계시와 천상적인 지식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가르침이 지혜 있는 가르침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인간의 전통과 가르침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상당히 매력적이고 논리적인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신성으로 충만한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스스로 자신을 괴롭게 하는 금욕주의자들의 고행일 뿐입니다. 이 모든 것은 육체적이고 자의적인 경건일 뿐 성도들이 거룩한 경건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교부들의 금욕주의적인 경건이나 수도원주의적 경건은 사실 헬라 철학에서 기인한 것이지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는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금욕주의가 인간의 육체적인 정욕을 금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단정합니다. 세속적인 육체의 정욕을 금하는 것으로 금욕주의적인 행위를 통해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연합하여 육체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성령의 능력으로 새로운 존재로 부활함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오직 아들을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만이 우리를 육체의 정욕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선한 일에 자라게 하실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 지역에 창궐하는 율법주의나 천사 숭배 등을 갈력하게 경계했습니다. 이것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근본적으로 훼손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자신의 존재를 만들어 가야지 껍데기 경건만 꾸미려 해서는 안 됩니다. 원래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그분한테 연결되어 있어야 사는 게 사는 게 됩니다. 그분처럼 살아야 사는 것입니다. 그래야 쓸데없는 우월감이나 열패감에 잠기지 않고 충만하게 나로 살 수 있습니다.


구독과 광고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골로새서(02-02)


주 예수 안에서 거하는 방법

골로새서 2장 6-15절


우리의 삶에 누구를 주님으로 모셨는지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정합니다. 삶의 방식을 정해주고 삶의 목표를 정해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고 경배하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그가 어떻게 살았고, 우리에게 무엇을 주었고, 또 약속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그를 잘 믿을 수 있습니다.

 

교회를 어지럽힐 수 있는 거짓 교사들 문제에 대해 구체적 권면을 시작합니다. 첫째는 ‘걸으라’는 명령을 중심으로 바울이 전한 가르침에 따라 살라고 말합니다(6-7). 둘째는 ‘조심하라’는 명령을 통해 거짓 가르침에 대해 경고합니다(8-15). 구체적으로 거짓 교사를 경계하라는 명령(8)과 예수님을 통한 구원 과정의 여러 요소를 골로새 성도들에게(9-12)와 하나님 중심(13-15)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작게 구분됩니다.

 

거짓 교사와 관련한 권면 1:복음의 가르침에 굳게 서라(6-7)

그리스도를 주로 받은 사람들은 그분의 사람을 살아야 합니다. 사죄의 은혜와 구원의 도를 깨달은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고 가르침을 받은 대로 행해야 합니다. 더 이상 신령한 가르침을 구할 때가 아니라 가르침을 받은 대로 살 때입니다. 무엇인가를 더하는 데 시간과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그리스도 안에서 뿌리 박고 굳건히 서서 새로운 삶으로 살아가는 주의 백성들이 되어야 합니다.

6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7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6-7)

바울은 이 단락에서 성도들을 향한 권면에 메시지로 전환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비밀이며 복음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관한 교리적 설명에 집중했습니다. 이제 그러한 설명에 근거하여 성도들이 믿음 가운데 뿌리를 내려 성장하라고 명령합니다.

먼저 성도들이 에바브라에게서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예수를 그들의 주로 영접하였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거짓 교사로 인해 생길 문제와 관련해 본격적 권면을 시작합니다. 첫 명령은 예수 안에서 행하라는 것입니다(6b).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삶의 걸음에 대한 주문입니다. 먼저 명령의 전제는 골로새 성도가 메시아 예수를 주로 받은 것입니다(6).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듣고 믿었고,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1:4). 바울의 설명 방식에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신자 삶에 대한 명령을 주절로 말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을 종속절로 언급한 점입니다. 바울의 초점은 예수님의 정체와 사역이라는 교리 차원보다 신자의 삶에 있습니다. 비록 1:15-20에서 예수에 대해 부연했지만, 내용이 짧고 압축적입니다. 골로새 성도들이 이미 아는 지식을 상기시키는 목적일 것입니다. 이후에도 예수님에 대한 추가 설명(8-12)이 있긴 하지만, 이 역시 신자 삶에 대한 권면의 근거로 소개됩니다. 이런 면에서 편지의 첫 명령을 전달하는 구조는 예수에 대한 진리와 연관된 ‘신자의 삶’이 바울의 주된 관심임을 짐작게 합니다. 한편, 바울은 예수님 안에서의 걸음을 네 개의 분사로 ⑴ 예수 안에 뿌리박게 되어 ⑵ 세움을 입게 되며 ⑶ 믿음에 굳게 서게 되어 ⑷감사를 넘치게 하는 것으로 말합니다(7).

이 표현에는 몇 가지 관찰점이 있습니다. 첫째, 모든 과정에 일련의 연속성이 있습니다. 바울은 전체 과정을 마치 땅에 심은 식물이 뿌리 내리고 세워져 튼튼하게 되어 열매 맺는 과정처럼 묘사합니다. 신자의 삶이 시간과 인내가 필요한 성숙 과정이라는 말입니다. 둘째, 신자의 삶이 성숙하게 되는 토양은 예수에 대한 진리입니다. 뿌리를 내리고 세워져 열매 맺는 모든 과정은 예수에 대한 지식과 믿음에 근거합니다. 이 점에서 신자 삶의 성숙은 진리에 대한 성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지식만을 추구하란 뜻은 아닙니다. 바울이 기존 가르침을 따라 믿음에 서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지식도 복음에 근거해야 합니다. 거짓 가르침을 반대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셋째, 신자의 성숙은 주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성숙의 최종 단계를 감사가 넘치는 것으로 말합니다. 성공이나 성취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모든 과정이 주의 은혜임을 인정하고 그분을 칭찬하는 사랑의 관계 표현입니다. 이런 면에서 신자 삶의 핵심은 관계성이고, 진리 또한 관계성이 핵심입니다. 관계에 끝이 없듯 예수에 대한 지식과 그에 근거한 삶도 끝이 없습니다. 오직 깊어지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넷째, 신자의 삶에는 신적 도움과 인간의 응답이 함께 있습니다. 첫 세 과정을 수동태를 통해 신적 도움을 받는 것으로 묘사하고, 마지막을 능동태로 신자의 응답으로 말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의 삶은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그분 도움을 의지하여 은혜에 응답하며 정성스레 사는 것입니다.

 

거짓 교사와 관련한 권면 2(8-15)

성도는 흑암의 권세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스스로 누구의 통치를 받으면서 살아가야 할 것인지 선택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통치하게 하고,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도하심을 받게 하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평화를 만들고 타인을 살려내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존재입니다.

8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9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10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11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12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13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14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8-15)

구원은 그리스도과 연합으로 그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부활이며 할례입니다. 언약의 외인이던 사람들이 새 언약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용서하시고 악한 영들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와 함께 참여하는 일입니다.

(1) 명령:거짓 교사를 경계하라(8)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에게 두 번째 교훈을 전합니다. ‘누가’라고 지칭한 ‘거짓 교사’들이 생기지 않게 주의하라고 합니다. 이것을 따르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런 것을 따르다 보면 정말 중요한 예수 그리스도를 놓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에 우리의 삶을 드려야 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주객이 전도되어서 주님을 놓치고 마음을 빼앗기는 결과를 맺고 맙니다. 이러한 결고는 절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미래형 동사(에스타이 ἔσται)를 사용하는데, 그들로 인한 문제가 아직 골로새 교회 안에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인 듯합니다. 그러나 가능성 있고 임박한 위험입니다. 그들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골로새 성도들을 사로잡으려고 할 텐데, 그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 초등학문에 따른 것이며 메시아와 관련 없습니다. 거짓 교사들에 대한 구체적 정보를 얻기 어렵지만,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이란 표현을 보면 유대교와 관련된 사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는 이 표현을 율법과 관련된 유대교 가르침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갈 4:3,9). 할례(11)와 유대교 관습(16)을 언급한 것에서도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의 표현에는 골로새 성도들이 왜 그들을 조심해야 하는지에 대한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골로새 성도들을 향한 그 거짓 교사들의 동기와 모습이 선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사로잡는 자’로 묘사합니다. 마치 전쟁에서 포로를 노획하듯 골로새 성도들을 통제하고 종으로 삼으려는 모습입니다. 그들의 모습은 골로새 성도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주 안에서 온전한 자로 만들려는 바울과 대조됩니다. 둘째, 그들의 가르침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상관없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가르침을 유명인들의 말과 세상에 기인한 것으로 평가합니다. 그들의 주장은 세상의 초등학문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어둠의 영역에 속한 사람에게는 매력적일지 모르지만, 빛의 새 영역으로 옮김을 받은 자에게는 쓸모없는, 단지 신자를 속이는 사변적 가르침일 뿐입니다. 절대로 그 가르침에 현혹되면 안 됩니다.

(2) 설명1: 골로새 성도들이 경험한 예수를 통한 구원 과정(9-12)

예수님을 믿고 따를 때 우리의 삶에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세상의 학문과 세상의 철학이 주지 못하는 삶의 변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변화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리고 죄의 구속에서 우리가 자유를 얻게 됩니다.

바울은 예수님으로 인한 구원 과정과 결과에 대한 설명을 통해 왜 거짓 가르침을 따르면 안 되는지를 부연 설명합니다.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설명을 진행합니다. 하나는, 시간 흐름과 관련한 진행입니다. 예수님과 성도의 현재 상태에서 그 상태를 가능케 한 과거의 구원 과정 순으로 제시합니다. 다른 하나는 어둠과 빛이라는 통치 영역과 그 속에 있는 개인 차원을 구분합니다. 이 둘을 조합해 과거에서 현재 순서로 본문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비유대인인 골로새 성도들은 과거에 하나님께 반역하는 어둠의 영역에서 세상 질서와 관련한 통치자와 권세자의 영향력과 그 이면에 있는 영적 세력들 아래 있었습니다. 그 안에서 그들은 개인적으로도 하나님을 거절하는 죄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손으로 쓴 법조문, 곧 모세를 통해 전달된 옛 언약 율법에 의해 죄인으로, 그리고 언약 백성 밖에 있는 무할례자로 정죄 받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 죽을 존재들이었습니다(13-14).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통치 영역과 그 속에 있는 골로새 성도들의 상태를 완전히 뒤집는 과정입니다. 개인과 관련해 예수님의 죽음은 사람들의 죄에 대한 율법의 정죄를 십자가에 대신 못 박은 것이고,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 받은 것입니다(14). 그로 인해 죄 용서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과 새 생명 얻는 길이 열렸고, 예수의 부활은 그에 대한 증거입니다. 한편, 반역의 세상과 관련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어둠의 통치를 깨는 과정입니다. 마치 전쟁에서 적장을 무장 해제시키고 많은 군중 앞에서 포로로 이끌고 개선하듯, 어둠의 통치자와 권세자들을 굴복시켰습니다(15). 셋째, 믿음은 예수의 사역 결과를 경험하는 열쇠입니다. 믿음의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과 죽음에서 그를 일으킨 하나님의 일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12; 참고, 롬 4:24-25). 더 나아가 이 믿음은 세례의 고백, 곧 하나님 심판에 대해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연합해 하나님 앞에서 새 생명 받았음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으로 표현됩니다(12; 참고, 롬 6:3-11). 흥미로운 것은 세례를 마치 새 언약의 할례처럼 묘사한 점입니다(11). 옛 언약에서 육체의 할례를 통해 언약 백성의 표지를 얻은 것처럼 세례를 통해 메시아의 할례, 곧 새 언약에서 정체성 표지를 얻는 것으로 말합니다. 한편, 본문에서 언급되진 않았지만, 신자의 믿음에는 과거 상태에 대한 회개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 사역의 결과로 예수와 성도의 상태가 달라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원래 가지고 있었던 신성의 모든 충만함을 부활의 몸에 가득 채우게 되었고(9) 모든 통치자와 권세자의 머리, 곧 창조주와 통치자로서의 원래 위치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10; 참고, 1:14-18; 빌 2:9-11). 성도는 죄를 용서받고(13; 참고, 1:14) 예수 안에서 충만한 존재가 되었습니다(10). 어둠에서 하나님/예수의 나라로 옮김받아(1:13) 새 생명 안에서 새 언약 백성(11)과 그분의 자녀로서 영광을 누릴 자가 된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정리하면, 9-15절은 1:15-20처럼 구원의 큰 그림을 담고 있으며, 예수와 골로새 성도(‘너희’)와 모든 신자(‘우리’)를 중심으로 그 과정을 소개한 복음의 내용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옛 언약에 속한 가르침으로 비유대인 성도를 흔들 것인데, 이에 대해 바울은 첫째는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할례로 대표되는 옛 언약을 넘어 어둠을 깨고 새 언약을 성취한 분이고, 다음으로 골로새 성도는 그분을 통해 하나님/예수의 통치 안에서 새 언약 관계에 있기 때문에 거짓 가르침에 속아서 옛 언약이나 세상을 따라 살면 안 된다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충만한 신성으로 자존하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역시 그분 안에서 충만해진 존재들입니다. 그러니 감히 세상의 원리로 삶의 방식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허접한 삶으로 우리에게 이미 주신 영광스런 승리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구독과 광고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골로새서(02-01)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는 복음

골로새서 1장 24절-2장 5절


하나님의 종들의 사역은 예수님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일꾼들은 그분이 이 땅에서 시작하셨고 남기고 가신 사역을 마무리하는 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 내용은 무엇이며 그 목표는 무엇입니까? 그 사역을 감당하는 데 필요한 차원은 어디서 공급받습니까?

 

바울은 먼저 자신이 복음의 일꾼으로 세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그가 전한 복음은 하나님의 비밀인데, 그것은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며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골로새 교회 성도들을 위해 얼마나 힘쓰는지 골로새 성도들이 알고 더욱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풍성히 깨닫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그 믿음 위에 서기를 소망합니다.

 

바울의 사역 모습과 현재 상태(24-29)

2000년 전에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오늘날 우리는 이 세상에 성육신을 반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나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 살지 않는다면, 성경에 있는 예수님만 만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골로새 성도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24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25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26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28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29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24-29)

사도의 사역은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일입니다. 그 고난을 통해 주를 믿는 만민의 구원과 만물의 회복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성도들에게 나타내는 일입니다. 그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있고, 그분은 성도들이 소망하는 영광이 되십니다.

⑴ 바울의 현재 상태(24)

바울은 자신이 ‘복음의 일꾼’(23)으로 부름받은 사실을 말한 것과 연결해 그 직분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됨’으로 바로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수고한 헌신이 “너희”(골로새 교인들)를 위한 것이며, 메시아 고난의 남은 것들을 자기 육체에 채운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는 서신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감옥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골로새 성도들과 모든 성도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이 골로새 성도들을 향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를 이해하는 열쇠는 “그(예수)의 몸 곧 교회를 위해서”라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새 언약 백성인 교회를 만드는 과정이었다면, 이후 그의 몸인 교회를 온전하게 유지하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그 과정에서 겪는 고난은 교회를 위한 메시아의 고난을 이어받는 ‘메시아의 남은 고난’입니다. 바울의 괴로움은 바로 이 과정에서 겪는 것이고, 골로새 성도들도 예수님의 몸인 교회의 부분이기에 바울의 고난이 골로새 교인 때문이라는 말은 전혀 틀린 말이 아닙니다. 골로새 교인도 바울이 왜 투옥되어 어려움 당하는지를 알고 있는데도 이렇게 말한 것은 자신의 마음을 전달해 이후 권면을 잘 받게 하려는 의도입니다.

(2) 바울의 소명(25)

바울은 교회의 일꾼 됨을 자신의 소명으로 정의하고 두 가지를 추가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직분을 따라’라는 소명의 기원에 대한 표현입니다. ‘직분’은 ‘오이코노마(οικονομα)’란 말인데, ‘경영’이나 ‘경륜’, ‘사명’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향한 경륜에 근거해 자신에게 사명을 주셨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는 바울의 사역과 관련해 두 가지 의미를 전달합니다. 하나는 ‘왜 고난에도 충성하고 있는가’에 대한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바울 사역의 중요성입니다. 사명, 직분과 관련해 ‘너희를 위해 내게 주신 것’이란 첨가된 말씀에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사역은 사람의 계획이나 열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구원의 큰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맡기신 것입니다. 그 구원 계획 속에 골로새 성도들이 들어 있기에, 교회를 위한 바울의 일꾼됨은 골로새 성도들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골로새 성도들은 바울의 사역을 가벼이 여기거나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거짓 교사의 가르침을 따라서는 안 됩니다. 둘째 추가 설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말씀을 이룬다는 것은 내용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사역으로 모든 이에게 말씀이 전해져 가득 차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소명의 목적에 대한 것입니다.

(3) 바울의 선포 내용(26-27)

25절에서 말한 하나님 말씀을 비밀로 묘사함으로써 바울의 선포 내용으로 주제를 전환합니다. 그 비밀은 오랫동안 감춰져 있다가 지금 하나님의 성도들에게 나타난 것으로(26) 영광의 소망 예수 메시아라고 말합니다(27). 바울이 전하는 핵심 내용이 예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골로새 성도들도 이미 그 내용을 알고 있고(참고, 5-6), 짧지만 앞에서(15-20) 그 내용을 서술했기에 짧게만 말했을 것입니다.

바울의 표현은 복음과 관련해 몇 가지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복음은 역사의 전 과정을 아우르는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담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감춰져 있다가 드러났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는데, 여기에는 구약 약속을 성취하는 하나님의 신실함이 들어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영광의 소망이라고 묘사한 것(27)은 미래도 아우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완성의 핵심입니다. 비밀이 메시아라고 말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셋째, 복음에는 비유대인을 향한 구원 계획도 들어 있습니다. 바울은 감춰져 있던 비밀이 하나님의 성도들에게 드러났다고 말하고는(26), 곧이어 하나님이 비유대인 안에서도 이 비밀의 영광, 곧 예수를 알리기 원했다고 합니다(27). 유대인과 비유대인 모두가 구원을 경험하는 것이 하나님 뜻인데, 비유대인 골로새 성도들(“너희”) 역시 그분의 의도 속에 들어 있음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4) 바울의 사역 방법과 목적(28-29)

27절의 ‘메시아’와 연결해 사역 방법과 목적을 소개합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주신 세상 최대 명령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첫 시작은 메시아 예수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곧이어 두 개의 분사로 다음 과정을 묘사하는데, 하나는 모든 사람을 권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지혜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 둘은 선포 이후 교회를 통해 신자의 삶을 세우는 과정입니다.

한편, 사역 목적은 신자를 메시아 안에서 온전하게 세우는 것으로 말합니다(28b). 이 문장은 상당히 짧아서 바울의 전체 사역과 그 안에 있는 세세한 과정을 다 읽어내기 어렵습니다. 단지, 자기 사역에 이런 요소들이 있고 그것을 위해 열심히 애쓴다는 말을 하려는 듯합니다(29).

그럼에도 이 부분은 사역과 관련해 의미 있는 관찰 거리가 있습니다. 첫째, 바울은 사역자로서 성도 삶에 대한 긴 안목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선포해 믿음으로 이끄는, 소위 ‘이신칭의’를 궁극적인 목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작이며 성도의 삶이라는 다음 단계를 염두에 두고 사역합니다. 또한, 그는 성도의 삶, 곧 신앙의 여정을 마치 어떤 프로그램을 끝내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복음이 과거와 미래를 아우르는 구원 과정을 담고 있는 것처럼 믿음으로 그 과정에 참여하게 된 신자의 삶도 긴 안목과 지속성의 관점으로 접근합니다. 둘째, 신자 삶에는 가르침과 교정이 필요합니다. 구원 이전의 삶은 어둠의 영역에서 자기를 중심으로 한 죄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았다고 완전히 해방된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세상의 영향력이 있고 죄에 쉽게 굴복하는 육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아래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분의 뜻을 배우고 세상의 더러움을 인식하고 벗어버리는 과정이 요구됩니다. 사역자는 이것을 돕는 자입니다. 셋째, 사역은 하나님의 도움을 힘입어 최선으로 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요소들은 사역 대상자인 신자들에게도 필요한 항목들입니다. 그들 역시 긴 관점으로 자기 삶을 보아야 하고, 바른 가르침으로 세상과 다르게 살되 무엇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정성스럽게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골로새 성도들을 위한 바울의 수고(1-5)

태양을 본 사람은 촛불을 보고 밝다고 감탄하지 않습니다. 태양을 본 사람은 촛불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만물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는 인생 전체를 홀연히 바꾼 사람입니다. 많은 것을 섭렵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더 이상 세상의 지식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1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얼마나 힘쓰는지를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2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3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4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교묘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5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가 질서 있게 행함과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이 굳건한 것을 기쁘게 봄이라(1-5)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이는 바른 하나님 나라와 교회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얼마나 값진 구원을 주셨는지를 알게 되면, 우리는 자신을 귀하게 여기며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게 되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 풍성히 알고 싶어 하고, 그 안에 있는 지혜와 지식의 보물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1) 바울의 수고를 알기 원함(1-3)

본문 1절에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얼마나 힘쓰는지를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하고 시작합니다. 골로새 성도들은 대부분 바울의 얼굴을 알지 못합니다. 비록 바울은 그들이 자신을 보지 못했지만, 골로새와 라오디게아 성도들을 위해 수고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바울의 수고를 알아주길 바랍니다. 칭찬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에베소의 두란노 서원에서 3년간 사역할 때 신앙 훈련받은 자 중에 이곳 출신인 에바브라, 빌레몬 등이 은혜를 받고 나가서 교회를 세운 곳이 바로 골로새, 라오디디게아, 히에라볼리 교회입니다. ‘왜냐하면’과 ‘너희’를 통해 위에서 말한 바울의 사역과 열심의 이유를 골로새 성도들과 연결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교회를 분리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 차원에서 보면 모든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도들이 하나 되길 위해 기도하셨습니다(요 17:22).

골로새 교회의 어려움은 두 가지였습니다. 교회 외부로 오는 어려움은 황제숭배 사상이었습니다. 로마의 황제는 많은 곳을 점령하고 자신을 신격화했습니다. 세상에 어떤 신보다 자신이 능력 있는 신이다고 주장하고 섬기도록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황제가 더 높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수치와 모욕을 주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2)라고 고백합니다. 이러한 어려움 중에서 믿음을 지키니, 바울은 큰 위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다음 문제로는, 바울은 교회 안에 성도들이 거짓 철학과 잘못된 신앙의 태도를 이야기합니다. 이 두 가지 어려움 때문에, 그들을 향해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라고 권합니다. 어려운 세상에서 이기는 힘은 사랑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우리가 묶인 바 됨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세상을 이길 수 있고, 우리의 현실을 견디며 인내함을 통해서 더 큰 영광 상급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이 자기 지식을 자랑하면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지식을 배우고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지금까지 자신의 삶 자체가 이 거친 정치와 잘못된 신앙 생활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본인도 어려움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과 위로는 누가 할 수 있습니까? 그 고난과 그 어려움을 겪고 있거나 겪어본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악을 대신하여 돌아가신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4:15)라고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을 다 이해가고 동감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구원에 이르는 참된 지혜요 지식임을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그는 유대인으로 유대교 지식을 연구했으며, 유대인의 엘리트로 많은 철학 공부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자기가 가진 지식이 최고 여기고 다른 사람들을 핍박하려 했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서 구원에 필요한 지식과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만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풍족한 은혜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참된 지혜요 지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것이 감추어져 있습니다(3).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이 세상의 헛된 복음의 진리 위에 굳건하게 서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과 고통을 예수님께서는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고난과 어려움 속에 있을 때, 우리의 시선이 땅을 보면 안 됩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고난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에 많은 옷들을 입고 있습니다. 고난이라는 자극이 와야 그 옷을 벗습니다.

고난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깨닫기 하기 위해서는 어떤 태도가 필요합니까? 바울은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3)라고 믿음의 고백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고 설명하셨습니다. 고난 속에서 사람들에게 필요하는 것은 사람의 위로의 말이 아니라 진리 대신 그리스도입니다. 그 고난을 주는 원인과 그 사람들 그 상황에 대한 진리 되신 예수님의 판단과 하나님의 통치가 있어야만, 우리는 고난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2) 교회가 속지 않는 길(4-5)

바울이 자신의 일꾼 됨을 자세하게 말한 두 번째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것은 골로새 교회를 향하여 힘을 주고 더 믿음 속에 흔들리지 않기를 복을 빌고 있습니다. 1-3절은 적극적인 이유라며, 4-5절은 소극적인 이유에 해당합니다. 바울은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교묘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5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가 질서 있게 행함과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이 굳건한 것을 기쁘게 봄이라”(4-5)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우리 믿음의 원천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채우시고 돌보시고 보호하시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 다른 것으로 너희 마음을 흔들리거나 속지 말라고 이야기 한 것입니다. 이 당시에 잘못된 신앙이 너무나 큰 영향을 주고 있었습니다. 영적인 갈등으로 시간만 낭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엉터리 교훈에 속지 않기를 바란다는 점입니다.

바울은 고난 당하면서도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전파한다고 했습니다(1:24-29). 이런 설명이 골로새 교회에 깨달음과 자극이 되어 그들이 엉터리 교사의 말을 거부하는 기회가 되길 바란 것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교묘한 말로 골로새 주변 교회들을 속였습니다. 이들은 그들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문제의 사람들이 교묘한 말로 성도를 속이지만, 바울의 가르침과 역할을 제대로 이해한 성도는 현혹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구구절절한 표현으로 바울이 얼마나 골로새 교회의 온전한 모습을 바라고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참된 복음은 창조자요 통치자여 구원자이신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 소망을 갖는 성도들의 기도, 이것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사도 바울 자신은 비록 감옥에 갇혀 있을지라도, 자기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분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함으로, 골로새 교회를 비롯한 이방인들로 구성된 교회를 세우려고 했던 것은 자신이 믿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 자의 하나님이신 것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분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함으로, 그 수고를 통해서 누군가의 인생이 살아나고 새롭게 된다면, 그것보다 가치 있는 일은 없습니다. 그 통로로 쓰임 받기 위해 살아 계신 자의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구독과 광고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골로새서(01-02)


창조의 주 예수 그리스도

골로새서 1장 15-23절


적어도 우리에게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과 거의 같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니고서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없고, 복음과 구원을 이해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기독론적인 설명이 중심 내용입니다. 창조와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아들은 그 중심에 서 있습니다. 만물의 창조는 아들을 통하여 그리고 아들을 위하여 된 것입니다. 만물이 타락한 후에 그것을 회복시키는 역사도 아들에 의해서 성취됩니다. 아들은 교회의 머리가 되어 만물을 회복시킵니다. 바울은 이 복음을 전하도록 부름 받은 일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의 주(15-17)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우리 존재의 시작이며 마침입니다. 예수님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성이며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계신 분이십니다. 만물의 시작도 유지도 그분에게 달려있습니다. 우리 존재의 시작도 목적도 그분입니다. 그리므로 그리스도에 대한 앎은 우리의 근본이요, 우리 존재에 대한 대답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15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6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15-17)

사도 바울은 우리가 아들 안에서 죄사함을 얻고 흑암에서 생명으로 옮긴바 되었다고 설명한 후 곧이어 그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⑴ 하나님의 형상과 먼저 나신 이(15)

하나님의 아들의 존재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창조된 만물과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설명됩니다. 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여기서 ‘형상’이란 하나님과 아들의 관계를 설명한 것입니다. 아들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아들은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상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⑵ 만물 위에 있는 그리스도의 주권(16-17)

바울은 만물과 아들과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아들은 만물보다 먼저 나신 분입니다. 여기서 ‘먼저 나신 이’라는 표현은 만물의 창조 이전부터 있었던 아들의 선재성을 설명한 것입니다. 17절에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라는 표현과 같은 것입니다.

아들은 시간적인 측면에서 아들은 시간적인 측면에서 만물보다 먼저 존재하시고 그 지위에 있어서 만물 위에 있는 주권을 가지신 분입니다. 아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만물이 그에 의해서 그리고 그를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바울은 ‘아들이 만물보다 조금 더 먼저 창조되었다’라고 설명한 것이 아니라 만물의 창조 이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들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아마도 아마도 골로새 교회에 이단적 가르침을 염두해 둔 것으로 생각됩니다. 천사를 숭배했던 거짓 교사들은 아들을 천사와 같은 존재나 혹은 그보다 낮은 인간적 존재로 간주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서 아들의 신적인 속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6-17절은 ‘만물 위에 있는 그리스도의 주권’을 말합니다. 아들의 신적 속성과 선재성에 대해 말한 후, 이제 아들의 창조 활동에 대해 설명합니다. 아들의 창조 활동은 세 가지 측면에서 설명됩니다. 첫째, 만물은 그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이것은 아들을 하나님 위치에 올려놓은 것입니다. 만물이 아들 안에서 창조되었다는 것은 만물에 대한 아들의 주권을 한층 더 강조한 것입니다. 둘째, 만물은 아들을 통해 창조되었습니다. 만물이 하들을 통해 창조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창조의 궁극적인 주권자로 묘사하는 신약의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마지막으로, 만물은 아들을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만물의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설명합니다. 이것 역시 창조에 대한 아들의 절대적 주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아들이 창조한 만물은 하늘에 있는 겻들과 땅에 있는 것들, 그리고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입니다. 바울은 단순히 하늘에 있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 것이며, 땅에 있는 것들은 보이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을 통해 창조된 천지 만물에 대한 포괄성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이중적으로 진술하고 있습니다. 왕권들과 주권들 그리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이라는 표현도 창조의 포괄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세계뿐 아니라 우주적 세력과 인간 세상의 권력과 제도도, 모두 아들의 주권과 권세 아래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17절은 아들의 선재성에 대해 다시 강조합니다.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만물이 그 안에 서있다’는 것은 만물의 존재와 보존이 아들의 손에 달렸다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의 관심은 창조와 우주론적 관점에서 구원론적 관점으로 옮겨갑니다. 천지만물의 창조자이며 주권자이신 아들은 이제 교회의 머리로 소개됩니다. 교회는 그의 몸에 비유됩니다. 몸이 머리의 지배와 지시를 따르듯이,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두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와 그리스도의 끊을 수 없는 관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오직 아들이십니다. 왜냐하면, 아들이 교회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근본’이란 아들이 교회의 기초이며, 시작이란 뜻입니다. 교회는 아들에 의해 시작되었고, 아들은 교회의 기초입니다. 아들은 또한 죽은 자들 가운데 먼저 나신 이로 소개되고 있는데, 이것은 아들이 머리로 있는 교회 정체성을 설명합니다.

교회는 죽음에서 부호라한 자들의 공동체입니다. 물론 이 부활은 미래에 성취될 종말론적 구원을 의미합니다. 아들의 부활은 죽은 자들을 위한 첫 열매입니다. 아들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이유는 그 자신의 만물의 으뜸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창조주이신 아들은 이제 구원의 주가 되십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18-20)

성도들은 복음이 아닌 것에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거룩하고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우고자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곧 목적이 분명한 구속에 있습니다. 그분의 생명을 나눈 구속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는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믿음에 곧게 서야 됩니다. 더는 복음이 아닌 것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18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오 죽은 자들 가운에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19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20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18-20)

예수님께서는 만물보다 먼조 존재하신 하나님으로서, 성부 하나님의 창조를 실행한 자일뿐만 아니라 창조된 세계를 아름답고 조화롭고 질서 있게 지금껏 유지하고 계신 분입니다. 바울은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신 이유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⑴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18)

첫째, 아들 아래 하나님의 모든 충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모든 신성의 충만은 아들 안에 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들은 만물의 으뜸이 되신 아버지처럼 그도 만물의 으뜸이 되십니다.

⑵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계획(19-20)

둘째, 아들은 그의 십자가의 피로 만물을 아버지께로 화목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만물을 회복시키는 것이 아들의 사명입니다. 아들은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그것을 성취하셨습니다. 아들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과 만물은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아들은 하나님과 만물 사이에 가로막고 있는 죄의 장막을 허무시고 화평케 하셨습니다. 구속 사역을 통해서 그는 만물의 으뜸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통해 성취된 평화(21-23)

성도들은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자기중심적 생각과 삶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타락한 이 세상의 세속적인 가치관에 순응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고 흠 없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우리를 빚으셨습니다. 완성될 날까지 여전히 대적하는 세력들이 있겠지만, 아무도 주의 통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굳게 서서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21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22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23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21-23)

바울은 이제 20절에서 말한 ‘화목하게 됨’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어떤 일을 행하고 계시는지에 대한 사례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성도들의 과거의 상태에 대해서 먼저 설명한 후, 화목게 된 현재의 상태에 관해서 설명합니다.

⑴ 성도들의 과거의 모습(21)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에게 하나님과 화목하게 됨에 대해, 과거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비교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과거에 하나님과 원수로 있던 성도들의 상태를 두 가지로 설명됩니다. 첫째, 그들은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된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죄로 타락한 인간은 그 마음에 하나님을 원수처럼 생각하는 불행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저항하고 대적하는 악한 마음과 타락한 양심을 갖고 있습니다. 둘째, 이들은 악을 행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원수 된 마음에 외적인 표출입니다.

⑵ 성도들의 현재의 모습(22-23a)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죽음으로 화목게 된 성도들의 현재 상태는 어떠합니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갈 2:20). 이제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움을 받았습니다(22). 바울은 여기서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의 죽음과 보혈을 통한 계속적인 효과에 관해서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은 그들의 죄를 씻고 정결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계속해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정결한 상태에 거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터 위에 굳게 서서 복음을 통해서 그들에게 주어진 소망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⑶ 복음의 일꾼인 바울(23b)

우리가 하나님께서 쓰실 만한 참 견고한 일꾼이 되려면, 복음의 소망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복음의 소망에 대한 확신. 23절을 보시면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들은 바 무엇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라고 합니다. 복음의 소망을 가진 사람, 복음의 소망에 대한 확신을 가진 사람, 그리고 바울이 고백을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라고 고백합니다. 구원에 대한 소망은 그들을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굳게 서게 할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골로새 성도들이 복음 안에 세워져 하나님과 화목게 된 것처럼, 이 복음을 전하도록 세움을 받은 일꾼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이미 천하 만민에게 선포되었습니다. 골로새 성도들도 그 복음에 대해 들었을 것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기독론적 가르침은 정확하게 깨닫는 것이 복음의 진리입니다. 이 복음이 이미 천하 만민에게 선포되었다는 것은 이제 복음의 진리가 밝히 드러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은 이미 선포된 바울의 복음에 근거하여 교회 안에서 이단적 가르침을 분별하고 그것을 배격해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왜 중요합니까? 세상과 성도의 창조와 새창조가 예수님에 의해 되었고 또 지금도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로 지음을 받았고, 어떤 존재 방식으로 살아야 하고, 어떤 인생의 목표를 따라, 어떤 능력을 받아 살아야 하는지 예수님이 결정하십니다.


구독과 광고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골로새서(01-01)


선한 열매로 드러나는 능력

골로새서 1장 1-8절


D.L무디는 “용기를 내라! 오늘은 광야를 걷지만, 내일은 약속의 땅을 걷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자에게 가장 큰 기쁨은 무엇입니까? 성도들이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역자의 가장 간절한 기도의 제목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잘 알아서 복음의 열매를 맺고 구원받은 백성에게 어울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된 바울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합당히 행하여 선한 일에 열매 맺기를 기도합니다. 먼저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기원합니다. 바울과 디모데가 기도할 때마다 감사하는 것은 골로새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에 대해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골로새 성도들이 이렇게 좋은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에바브라에게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었습니다.

 

서신의 도입 부분(1-2)

현실이 전부라고 여긴다면, 당연히 내세에 대한 소망은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통치 아래서 하나님을 믿음으로 살 수 없고, 하나님과 사람들을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소망은 복음, 즉 진리의 말씀을 듣고서 알게 되었고, 이는 하늘에 쌓아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부터 나옵니다.

1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2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1-2)

바울은 당시의 서신 양식에 따라 서두에서 발신자, 수신자, 인사말을 쓰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다는 것, 골로새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감사와 기도는 특별합니다. 감사와 기도가 매일의 양식이고, 삶의 목표점이 하늘을 향하여, 복음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서 있습니다.

⑴ 발신자 바울(1)

사도 바울은 자신이 세우지 않았던 골로새 교회를 향해서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라고 소개합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되었다고 소개합니다. 자신의 사도권에 대해서 강조한 것은 갈라디아나 고린도 교회에서처럼 자신의 사도권에 대한 도전이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 서신에서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지적하면서 복음의 참된 진리를 독자들에게 설명할 것인데, 자신의 가르침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주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여 주길 원했던 것입니다. 그의 사도직은 ‘하나님의 뜻으로’ 세워졌습니다. 골로새 교회가 사람의 의도가 아닌 하나님의 뜻으로 세워진 것처럼, 바울의 사도직도 하나님의 뜻으로 세워졌던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뤄지기를 바라고 매일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그는 현재 자신의 모습은 하나님의 뜻으로 되어졌다고 간증합니다. 그래서 바울의 삶에 하나님의 뜻이 깊이 묻어납니다. 그러나,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전통에 사람, 율법을 붙들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변화된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그토록 소중하게 목숨처럼 여겼던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게 된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신이 변화되었다고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음을 간증합니다. 갈라디아서에서 그는 자신의 소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15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갈라디아서 1:15-16)

(2) 수신자 골로새 성도들(2)

바울은 변화되기 전에 기독교인들에 대해 살기가 등등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사랑의 사도가 변화되었습니다. 저돌적이던 그가 디모데를 형제라고 부릅니다. 아직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했지만, 골로새의 성도들을 ‘신실한 형제들’이라고 부릅니다.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영적 가족이 되었습니다.

지금, 그는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의 입에서는 저주보다 축복이 흘러나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향해 은혜와 평강을 기원합니다.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만족과 기쁨입니다. 또한, 이것은 삶에서 하나님의 뜻이 배어나는 사람의 고백입니다.

 

하나님께 감사(3-8)

모든 사람들에게 각자 기쁨을 얻는 방법이 있습니다. 목회자들에게 있어 가장 큰 기쁨은 성도들이 믿음 안에서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 중심으로 성장하고 있는 소식만큼 감사한 것이 있겠습니까?

3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4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5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6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7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8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알린 자니라(3-8)

복음을 들으면서부터 골로새 성도의 삶에 열매가 맺혔고, 신앙은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영향력은 골로새 지역을 벗어나 온 천하에 미쳤습니다.

⑴ 독자들로 인한 하나님께 감사(3)

사도 바울은 디모데와 함께 골로새 성도들을 위해 항상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감사할 수 없는 투옥이라는 상황 가운데 있었지만, 그들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함을 고백했습니다.

골로새 성도들이 가진 믿음에 대한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가진 믿음과 사랑, 하늘에 쌓아둔 소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베풀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또 그 믿음과 사랑이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하늘에 쌓아 둔 소망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 소망은 복음 안에서 이미 들은 진리의 말씀을 근거한다고 말합니다.

⑵ 감사의 이유(4-6)

사도 바울은 감사하는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독자들의 믿음과 사랑 그리고 그들이 가진 소망으로 인해 감사합니다. 이처럼 성도가 진실로 감사하는 이유는 물질이나 세상 권세를 소유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믿음과 소망, 사랑을 잃지 않고 복음을 위해 애쓰는 삶이 감사의 이유가 됩니다. 골로새 성도들은 이 땅에서의 대가를 바라며 사랑을 베푼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듣고 깨달았기에, 약속된 하나님의 기업을 의식했기에 행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진정한 나눔과 사귐, 그리고 그들의 열매 맺는 삶을 보며 감사합니다. 삶에서 얼마나 자주 복음의 열매를 거두며 감사드립니까? 나는 “범사에 감사하라”라는 주님의 명령대로 살아갑니까?

⑶ 신실한 일꾼 에바브라(7-8)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소식을 전해준 에바브라를 향해 신실한 일꾼이라고 칭찬합니다. 골로새 출신으로서 바울의 신실한 동역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골로새서 4:12). 그는 골로새를 비롯하여 히에라폴리스와 라오디게아 지역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그를 매우 높이 평가합니다.

그는 바울과 함께 개종한 사람입니다. 골로새 성도들을 가르치며 섬기므로 복음이 열매 맺고 자라기 때문입니다. 골로새 성도들은 바울의 동역자인 에바브라에 의해 양육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군이었던 에바브라는 골로새 교회를 개척하고 그들을 양육하였습니다. 에바브라에게 배운 복음이 참되고 진실한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사실을 보증하고 있습니다.

바울에게 이러한 좋은 동역자가 많았습니다. 바울의 인생은 녹록치 않았으나 동역자들의 사역 소식을 들으며 기쁨과 보람을 느꼈습니다.

 

독자를 위한 간구(9-14)

구원은 우리가 흑암의 권세에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님의 통치 아래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그때 그 예수 안에서 우리가 속량을 받고 죄용서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 그것이 구원입니다.

9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시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10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11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12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3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9-14)

바울은 이 서신을 쓸 때, 로마의 옥중에 갇혀 있었습니다. 이 무렵 근 위대한 골로새 목회자인 에바브라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새우신 바울에게 조언을 구하기 위해 찾아왔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에게 골로새 성도들을 서신을 쓰면서,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 후, 이제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⑴ 독자들을 위한 간구의 내용(9-12)

비록 골로새 성도들이 믿음과 사랑 가운데 잘 자라고 있었지만, 여전히 그들에게는 더욱 크신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독자들에게는 더욱 크신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했습니다.

바울이 골로새 성도들을 위한 바울이 그들을 위해 기도한 내용은 네 가지입니다. 첫째, 독자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하길 기도합니다(9). 그런데 그 지식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지혜와 영적인 깨달음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철학이라고 불리는 거짓 교사들의 헛된 지식과 대조되는 것입니다(골로새서 2:8). 둘째, 주를 기쁘시게 하는 선한 행위의 열매가 풍성하도록 기도합니다(10). 올바른 지식은 올바른 행위를 가져온 것입니다. 올바른 독자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근거하여 선한 행위를 풍성히 하도록 기도합니다. 셋째,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능력으로 인내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11). 넷째, 독자들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가 되도록 기도합니다. 감사의 이유는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영광스러운 기업을 얻기에 합당한 자가 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업을 예비하고 약속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로 하여금 그 기업을 얻기에 합당한 자가 되도록 이끄시는 분입니다.

⑵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구속 받음(13-14)

독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기업을 얻기에 합당한 자가 되었는지 설명합니다. 그들이 흑암의 권세에서 벗어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지게 된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통한 죄 사함을 통해서 성취된 것입니다. 독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통해서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죄 사함을 흑암의 권세에서 벗어나 아들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죄 사함은 단순히 형벌의 면함을 말하는 것이 이날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것으로 의미합니다. 그것은 흑암에서 빛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사찬의 통치에서 벗어나 아들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복음 안에 일치된 마음을 가진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영적 영향력을 주고받으며 함께 성장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것만큼 복된 것도 없습니다. 우리에겐 바울과 같은 동역자가 있습니까? 누군가에게 바울과 같은 동역자가 되어 주고 있습니까? 자신의 삶에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은혜와 평강을 전하며 살길 원합니다. 제가 전한 복음이 이웃의 삶에서 열매를 맺고 꽃 피우는 것을 보며 감사하는 복된 인생이 되게 하소서.


구독과 광고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골로새서 서론


 

이 골로새서의 서신은 4장으로 구성되어 있어 내용상으로 보잘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본 서신 자체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메시지의 모든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서신을 읽은 사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 위대하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게 됩니다.

1. 저자와 수신자

골로새서 1장 1절에 보면, 바울 사도는 본 서신의 저자라고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그의 동역자로서 문안 인사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편지를 받는 대상이 2절에서 보면,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라고 편지를 받는 대상 또한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꼭 골로새 교회만이 아니라 라오디게아 교회의 성도들에게도 본 서신을 읽을 수 있도록 골로새 교회에 부탁하고 있습니다(4:16, 참조 2:1). 그리고 이후로 모든 성도들에게도, 20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전해주는 말씀입니다.

 

2. 기록장소와 연대

바울 사도는 주후 61년경에 로마의 감옥에서 골로새서를 기록하였습니다. 빌레몬와 에베소서도 같은 시기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래서 감옥에서 기록하였다고 하여 우리는 에베소서, 빌레몬서, 빌립보서와 같이 골로새서를 옥중서신(獄中書信) 이라고 합니다.

이 편지를 전달한 사람들은 두기오와 오네시모가 하였습니다(엡 6:21-22, 골 4:7-9, 몬 12,23-24).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집에 종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빌레몬의 집에서 로마로 도망하여 살다가 이곳에서 또 부정된 일을 하다가 감옥 속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로마 감옥 속에서 바울을 만나고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서 개종한 사람입니다. 그가 복음을 받기 전에는 쓸모없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일군이 된 것입니다.

 

3. 기록 당시의 상황

이 골로새 서신은 골로새 교회 안에 이단들이 있었기 때문에 쓰게 되었습니다. 에바브라는 그 당시 골로새 교회에 있었던 거짓된 견해들과 그릇된 행위들을 로마의 감옥 속에 있는 사도 바울에게 보고했습니다(1:7-8). 비록, 사도 바울이 이단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지만, 2장 8-23절까지 명백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거짓된 견해들을 “이단들”이라고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라고 복수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은 대부분 이방인 회심자들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골 1:21,22,27, 2:11-13, 3:5-7). 이 지방에는 그 당시에 알려진 거의 모든 종류의 이교들이 번창하고 있었습니다.

이단들 중에는 성경의 내용을 살펴보면,

⑴ 유대주의적 율법주의 - 할례(2:11,3:11), 종교의식(2:14), 음식과 안식일(2:16) 등

⑵ 엄격한 금욕주의(2:16, 20-23)

⑶ 천사에 대한 숭배(2:18)

⑷ 인간의 지식에 대한 찬양과 숭배(2:8) 가 있었습니다.

이런 거짓된 견해들에 대해서는 다음 설교에서 좀 더 자세히 논의할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우리가 주목할 점은 순수하게 증거함으로써 적극적으로 이러한 이단들에게 도전했으며 이단들을 폭로했다는 점입니다.

 

4. 골로새 고을

골로새서를 이해하는 데는 골로새의 지형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골로새의 고을은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골로새는 루고 골짜기(Lycus Valley)에 있는 골로새(Colosse, 골 1:2), 라오디게아(Laodicea, 골 2:1, 4:3-16), 히에라볼리(Hierapolis, 골 4:13)라는 “세 고을”중에 하나입니다. 골로새는 계시록에 나와 있는 라오디게아에서 약 11마일 떨어진 곳에 있으며, 에베소에서 약 100마일 떨어진 내륙지방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주전 5세기경 골로새가 “부루기아의 커다란 성읍”이라고 알려 졌습니다. 그렇지만 이 골로새는 점점 작아지기 시작하여 바울 당시에는 작은 고을로 변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동서양을 있는 에베소 지방에서 유브라데 지방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던 교역의 통로가 다른 곳으로 이동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가 골로새를 기록할 당시에는 그 근처에는 3개의 교회가 있었습니다(4:13). 이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헬라인과 부르기아인이 있었고, 원주민들은 잡다한 신들을 숭배하였습니다. 이곳에는 유대인들도 상당 수 살고 있었습니다. 이곳의 특산물은 부드러운 양털이 많이 생산되었습니다.

 

5. 골로새 교회

이 골로새 교회를 사도행전에서는 바울 사도가 설립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골로새 교회가 신설된 것은 바울 사도가 3차 선교 여행 도중에 그가 에베소에서 전도하고 목회한 것이 골로새에 교회가 생겨난 동기가 되었습니다. 이 골로새 성도들은 대부분 바울 사도를 직접적으로 만나지 못했던 것으로 바울 사도의 얼굴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참고 1:3-4, 2:1-2).

교회가 세워진 동기는 바울 사도가 에베소에서 목회하고 있을 때에 믿게 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인 에바브라가 이 골로새 교회의 창설자(1:7)일 뿐만 아니라, 그는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의 교회들까지도 창설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참고 4:13). 아무튼 에바브라는 골로새의 회중들 중에서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4:12).

골로새 교회의 예배당은 개인의 집에 속해 있었습니다. 골로새 교회는 그 당시 활동적인 성도 중의 한 사람이었던 빌레몬의 집에서 모였습니다(4:9, 몬 1:5-7).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모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은 헬라인 들이였고, 몇몇의 유대교에서 개종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6. 골로새서 구조

이 골로새서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의 으뜸」(Jesus Christ is Preeminent)이라는 것입니다. 골로세서의 중심되는 성경 말씀은 골로새서 1장 18절 말씀입니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라는 것입니다.

① 교리 : 그리스도께서 머리로 선언(1장)

복음의 메시지(1:1-12)

구원(1:13-14)

창조(1:15-17)

교회(1:18-23)

바울의 목회(1:24-29)

② 위험 : 그리스도께서 머리로 선언(2장)

헛된 철학의 경계(2:1-10)

율법주의의 경계(2:11-17)

금욕주의의 경계(2:18-23)

③ 의심 : 그리스도께서 머리로 증명(3-4장)

사적인 청결(3:1-11)

그리스도인의 교재(3:12-17)

가정적인 생활(3:18-21)

일상적인 일(3:22-4:1)

그리스도인 증인(4:2-6)

그리스도인 봉사(4:7-18)

 

바울 사도는 골로새서를 진행해 나갈 때, 먼저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의 으뜸이라는 증거합니다(1장). 다음으로 골로새 교회의 들어오고 이단 사설에 대해 잘못된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2장). 마지막으로 만물의 으뜸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사람들이 실천해야할 내용(3,4장)으로 진행합니다.

 

7. 골로새서를 통한 교훈

이 골로새서 강해를 통하여, 배울 수 있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골로새서는 골로새 교회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단의 허구성을 밝히며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 사람을 입은 성도의 삶에 대해 교훈하기 위해 쓰인 것입니다. 이곳에서 우리들에게 크게 세 가지의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①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는 사실을 합니다. 이 말씀은 교회의 주인이 그리스도란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② 교회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어느 것도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그릇된 기독교(이단)에 대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③ 그리스도인들이 개인들이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인들로 실천해야 할 일들을 행해야 합니다.

이렇게 한 가지 한가지씩을 살펴봄으로 은혜를 받아 가겠습니다. 여러분들의 하나님을 향하는 믿음이 하루하루 더 성장하시길 기원합니다.


구독과 광고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