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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02-03)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골로새서 2장 16-23절


죽어라고 열심히 지키고 의지하고 붙들어도 바람을 잡는 것 같은 쓸데없는 것이 있습니다. 속이 허해서 더 쓸데없는 것에 집착하게 됩니다. 진짜 믿는 게 아니면 믿을수록 힘들고 믿을수록 더 거짓이 됩니다. 자신을 망치게 되고 남도 망치게 됩니다.

 

바울은 앞에서 철학과 헛된 속임수에 속지 말라고 했습니다(8). 본문에서는 그것들이 무엇인지를 자세히 설명합니다. 철학으로 간주된 사람의 전통에 대한 설명이며, 세상적인 영에 의한 헛된 속임수에 관한 설명입니다. 철학과 헛된 속임수는 금욕주의와 천사를 숭배하는 사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육체에 속한 것이며 세상적인 것으로 인간의 전통과 가르침일 뿐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헛된 가르침과 권위에 저항하고,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참 자유와 승리를 누리는 길로 초대합니다.

 

거짓 교사와 관련한 권면3 : 유대교 관습에 현혹되지 말라(16-19)

역사적으로 영적인 면에서 거짓 교사는 어느 시대나 존재했습니다. 그들의 특징은 진리를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되고 헛된 인간의 사상을 가르칠 뿐입니다. 그리고 연약한 성도들을 통해 자신의 이득을 삼는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실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시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만을 붙들어야 합니다.

16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17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18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어 과장하고 19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16-19)

유대주의자들은 골로새 교회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골로새 성도들은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들에 관련된 율법 문제로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엄격한 율법 준수가 구원에 필수인 양 미혹했습니다.

⑴ 유대적 절기에 대해서(16-17)

사도 바울은 율법주의를 경계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로워진 우리는 율법의 요구들이 심판하지 못하게 하라고 합니다. 먼저 독자들을 향해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아무도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고 명합니다.

거짓 교사들은 단순한 유대주의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유대적 전통을 이교 사상과 결합하여 혼합주의적인 종교를 만들어 금욕주의와 천사숭배를 주장하는 자들입니다. 금욕주의와 천사숭배는 분명 유대적 전통도 아니고 기독교적 가르침도 아닙니다.

거짓 교사들이 먹고 마시는 것으로 성도들이 복음의 진리에 근거해 누리는 자유를 그들은 불경건한 행위로 비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하는 것과 같습니다(갈라디아서 4:29). 거짓 교사들은 마치 자신들만 진리를 가진 것처럼 성도들을 비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실상을 폭로하면서 성도들이 그들로부터 비판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선언합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에 관한 것은 장차 올 것에 대한 그림자일 뿐이라고 합니다. 또한 거짓 교사들에 의해 왜곡된 가르침은 물론이고 유대적인 전통과 관습도 그것은 장차 올 참된 진리를 미리 보여주는 그림자일 뿐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절에서는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나 바울은 여기서 복음의 참된 진리를 ‘참 형상’이라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던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골로새서 1:18). 거짓 교사들이 그림자를 붙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독자들은 진리의 참된 실체인 그리스도에게 붙어있는 그분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거짓 교사들로부터 비판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고, 그들의 비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도 없습니다.

⑵ 천사 숭배에 대해서(18-19)

사도 바울은 천사숭배를 반대합니다. 이제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서 직접 언급합니다. 그는 ‘아무도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위에서 ‘아무도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는 말과 유사합니다. 거짓 교사들이 성도들을 비난하고 정죄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은 자신들의 꾸며낸 겸손과 천사숭배에 동참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경험하지 못하면 2류 신자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꾸며낸 겸손이란 거짓 교사들이 스스로 자신을 낮추기 위해서 행했던 금욕주의적 의식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금욕주의적 행위는 천사숭배 사상과 관련이 있었을 것입니다. 천사숭배 사상에 대한 정확한 실체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천사들이 만물을 다스리는 자로 세움을 받았다고 이해하고 유대적 전통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각각의 천사들에 의해서 다스림을 받고, 세상 민족들의 경계도 천사들의 숫자에 따라 정해져 그들이 다스리도록 맡겨졌다고 간주합니다. 거짓 교사들은 환상 가운데 하늘에 올라가 천사들이 다스리고 우주에 대한 비밀을 보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영적인 계시는 금요적인 상태를 유지할 때 잘 수납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거짓 교사들이 꾸며낸 겸손과 천사숭배로 독자들을 정죄한 것은 자신들이 본 것에 근거하여 육신적인 생각을 따라 헛된 자랑을 한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거짓 교사들은 자신들이 본 환상을 영적인 계시라고 자랑했지만, 그것은 사실 육체에 속한 헛되 자랑일 뿐입니다. 거짓 교사들이 그것을 자랑하고 있는 한 그들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붙들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머리에 붙어있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온 몸이 머리로부터 영향을 받고 힘을 얻어 서로 연합하여 자라게 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을 자라게 하십니다(골로새서 1:6,10). 거짓 교사들이 복음을 붙들지 않고 헛된 것을 자랑하는 한 그들은 머리에서 떨어져 나간 자들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앞 두 명령에 대한 부연(20-23)

우리의 체험이 우리가 더욱 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예수님을 굳건히 붙잡게 하지 않는다면, 결과적으로 그 체험은 우리의 영혼을 영적 타락으로 이끄는 잘못된 것에 불과합니다. 모든 성도가 자랑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행한 종교적 행위도, 영적 환상 같은 체험도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자랑입니다.

20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21(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22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 23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20-23)

그리스도의 연합한 우리에게 더 이상 율법의 규례는 아무런 구속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십자가의 능력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런데 골로새 성도들은 유대주의자들의 꾐을 받아 다시 율법의 종이 되는 모순에 빠졌습니다.

⑴ 금욕주의를 배격하라(20-21)

바울은 8절에서 언급한 ‘세상 초등학문’에 대해서 다시 언급합니다. 여기서도 초등학문이란 표현보다 세상이 지배하는 영적인 세력들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거짓 교사들이 섬겼던 천사들은 세상의 영적 세력에 해당합니다.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는 흑암의 권세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죽음으로 세상의 통치자와 권세들을 무력화하셨습니다(골로새서 2:15).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하여 세상 권세에 속박되었던 과거의 존재는 죽었고, 그의 부활하심에 연합하여 새로운 존재로 일으키심을 받았습니다(골로새서 2:12). 그런데도 불구하고 성도들 중에는 여전히 세상의 영들에 속해 있는 것처럼 살아가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독자들에게 ‘어찌하여 세상의 영들의 가르침에 순종할 수 있느냐?’라고 반문합니다. 그러면 독자들이 어떤 측면에서 여전히 세상 규례에 순종하고 있었습니까? 그들은 금욕주의적인 가르침에 동참하고 있었습니다.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는 것은 금요주의자들의 주장이었습니다. 독자들은 이러한 금욕주의적인 가르침에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금욕주의적인 가르침에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은 분명합니다(고린도전서 7장). 그러나 그것은 결코 복음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바울은 금욕주의를 미혹하는 영과 귀신을 가르침이라고 정죄하고 있습니다(디모데전서 4:1-4).

⑵ 금욕주의의 허구성(22-23)

바울은 금욕주의의 허구성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거짓 교사들은 자신들이 영적이고 천상적인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그것은 잠시 있다 없어질 일시적인 것이며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일 뿐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한때 쓰이고 없어지는 것’이란 말은 금욕주의자들의 관심이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있으며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먹고 마시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거들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며,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심판에 모두 불타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짓 교사들의 금욕주의는 그들을 영적인 계시와 천상적인 지식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가르침이 지혜 있는 가르침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인간의 전통과 가르침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상당히 매력적이고 논리적인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신성으로 충만한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스스로 자신을 괴롭게 하는 금욕주의자들의 고행일 뿐입니다. 이 모든 것은 육체적이고 자의적인 경건일 뿐 성도들이 거룩한 경건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교부들의 금욕주의적인 경건이나 수도원주의적 경건은 사실 헬라 철학에서 기인한 것이지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는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금욕주의가 인간의 육체적인 정욕을 금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단정합니다. 세속적인 육체의 정욕을 금하는 것으로 금욕주의적인 행위를 통해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연합하여 육체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성령의 능력으로 새로운 존재로 부활함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오직 아들을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만이 우리를 육체의 정욕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선한 일에 자라게 하실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 지역에 창궐하는 율법주의나 천사 숭배 등을 갈력하게 경계했습니다. 이것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근본적으로 훼손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자신의 존재를 만들어 가야지 껍데기 경건만 꾸미려 해서는 안 됩니다. 원래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그분한테 연결되어 있어야 사는 게 사는 게 됩니다. 그분처럼 살아야 사는 것입니다. 그래야 쓸데없는 우월감이나 열패감에 잠기지 않고 충만하게 나로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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