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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50-02)


약속의 땅을 사모하며 애굽에서 죽은 요셉

창세기 50장 15-26절



 
요셉이 완벽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없고, 그를 비판적으로 읽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하나님께 붙들린 인생을 살았습니다. 모든 인간에겐 공과가 있습니다. 성경은 그가 남긴 발자취가 후세의 귀감이자 걸어야할 이정표라고 합니다. 그가 보여준 신앙은 무엇입니까?
 
 
가장인 아버지 야곱의 사망은 그의 가족 내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동안 야곱의 아버지로서의 권위인해 총리 요셉의 권위가 통제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통제가 풀렸습니다. 형들은 이 상황이 염려됩니다. 더구나 애굽 2인자인 요셉은 가정 내에서도 아버지로부터 장자의 권리를 부여받은 상태입니다. 이 상황에서 형들은 자신들과 요셉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되었는지 확신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무려 17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말입니다.
 
 
다시 요셉을 두려워하는 형제들(15-17)
 
죄책감은 우리를 과거에 억매이게 만듭니다. 현제에서 미래로 나가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죄책감을 해결할 수 있는 하나님께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자녀들을 구원의 자리로 초청하신 것뿐만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용서와 구원의 자리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15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16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17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15-17)
 
아버지 야곱이 죽은 후, 요셉의 형제들은 아버지가 없는 상황에 요셉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을 느낍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틀림없이 요셉이 자신들의 죄를 더 이상 거론하지 않는 이유가 극진히 사랑하던 아버지 때문이었던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에서 또한 야곱에 대한 복수를 아버지의 사망 이후로 연기하고 있지 않았습니까?(27:41) 형들은 누군가를 통해 요셉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이 문제에 대한 부탁의 ‘말을 전달합니다’(치바, 명령하다). 즉 형제들은 처음부터 요셉을 직접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요셉의 마음을 1차로 누그러트리기 위한 절차였을 것입니다. 18절에서 그들이 요셉을 찾아갑니다. 아버지는 형들이 그에게 범한 악행과 죄를 용서하라는 말을 남기셨습니다(17). 그들은 여기서 자신들을 ‘요셉의 종’으로 부르지 않고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로 칭합니다: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 그들은 지금 계급 관계가 아닌 가족 관계에 호소하면서 용서를 구합니다. 이 상황은 독자에게 형제들에 대한 두 가지 사실을 인식시킵니다. 첫째, 그들은 자신들의 죄가 너무나 컸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15, 17절의 그들이 자신들의 죄를 묘사한 표현들을 보라). 자신들의 죄는 이렇게 쉽게 피해자에게 용서받을 만한 죄가 아니었습니다. 둘째, 그들은 요셉의 진정한 용서와 형제애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형들은 요셉과 눈물의 화해를 했음에도 지금까지 그에게 용서를 구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죄책감을 느끼며 감히 용서를 구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로 인해 용서한 자만 있었고 진정으로 용서를 받은 자는 없었습니다.
 
야곱도 그것을 알고 있었는지 자신의 죽음 후에 아들들 사이에서 이 문제가 다시 불거질까 염려되어 용서를 유언으로 남기고 떠났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형제들간에 발생했던 그 충격적인 사건의 실체를 알고 임종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아마 아들들이 모든 사실을 고백했을 것으로 추론됩니다. 그리하여 야곱은 요셉의 진정한 용서를 유언으로 남겨 부탁했을 것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형제들이 아버지의 요셉을 향한 용서의 부탁을 거짓으로 꾸미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미 진실한 회개의 모습을 보인 형제들이 아버지에게 끝까지 과거를 감추고, 심지어 지금 또다시 목숨이 두려워 요셉에게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형제들은 이제 요셉이 자신들의 죄를 보복할까 봐 걱정하며 비로소 그의 용서를 구합니다. 그들의 진정성은 18절에서 그들의 태도에서 확인됩니다.
 
형제들의 말을 전해들은 요셉은 다시 한 번 슬피웁니다(17). 그가 왜 우는지는 모호합니다. 아마도 가장 그럴듯한 설명은 형제들을 통해 전달된 아버지의 마지막 부탁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들의 완전한 화해를 마지막으로 소망하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진정한 용서와 사랑을 형들이 신뢰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그의 눈물은 여전히 죄책으로 두려워하는 형들에 대한 연민의 눈물입니다. 이것은 그가 형들을 만난 자리에서 반복해서 두려워 말라고 말한 것에서 암시됩니다.
 
 
형들을 안심시키는 요셉(18-21)
 
지금 당신은 어디에 머물러 있습니까? 그리고 어디를 향하여 나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대해 신실해야 합니다. 그리고 풍성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과 손자들에게 그리스도와 위대한 약속들을 따르도록 가르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여 그들을 말씀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18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19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18-21)
 
형제들이 요셉을 찾아갔습니다. 그들은 엎드려 절합니다. 그리고 다시 그들은 자신들을 요셉의 종으로 낮춥니다: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그들은 다시 화해 이전의 원상태로 돌아갔습니다. 이제 가족 관계가 아닌 계급 관계에 호소하면서 요셉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모든 것이 원점입니다. 요셉은 그들을 다시 한 번 안심시키며 용서를 확증합니다. 그는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인간은 결코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야곱도 라헬에게 자녀 출산을 원하는 대로 하지 못하는 인간 능력의 한계를 고백하기 위해서 이 말을 사용했습니다(30:2). 이 고백은 인간의 계획과 통제 밖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인간은 거스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을 만드신 하나님 앞에서 ‘복수는 나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용서가 하나님의 뜻입니다. 20절 요셉의 신앙고백적 진술은 이미 20여 년 전 처음 그들에게 자신을 드러낼 때 신앙고백으로 말했던 내용의 반복입니다(45:511).
요약하자면,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 섭리적 목적은 야곱의 가족과 많은 백성을 살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요셉은 그들의 두려움과 염려를 말끔히 없앱니다. 그는 애굽 땅에서 형들과 그들의 가족을 잘 보살필 것이라고 약속하며 그들을 위로합니다. 이로써 요셉 이야기의, 나아가 족장사 전체의 최종 목표가 드디어 요셉 이야기 마지막에서 달성됩니다. 바로 이스라엘 아들들의 궁극적인 연합입니다.
 
 
요셉의 사망과 장례(22-26)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 죽음 넘어서까지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인간과 파괴된 세상의 질서로 인한 고통은 허용하시지만, 이것을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작정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삼아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요셉처럼 곧 잠깐 후에 인생의 끝을 맞이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날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22요셉이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주하여 백십 세를 살며 23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 24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25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26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22-26)
 
요셉의 죽음과 그의 장례에 대한 이야기와 더불어 요셉 이야기가 막을 내립니다. 또한 이것은 야곱의 거대한 족장사의 마무리이며, 나아가 창세기 대하드라마의 종막입니다. 요셉은 110세를 살았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애굽에서 110세는 이상적 나이였는데, 이것은 요셉이 애굽의 이상적이고 영웅적인 인물임을 말해줍니다. 요셉은 에브라임의 자손 3대를 보았습니다(23).
또한 그는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까지 보았는데 이 역시 므낫세의 자손 3대입니다: 므낫세-마길-마길의 아들들. 므낫세의 아들 마길이 여기서 특별히 언급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마길의 아들들은 요셉에게 입양되었습니다. 23절의 ‘마길의 아들들이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다’는 말의 원문 의미는 ‘그들이 요셉의 무릎 위에서 태어났다’입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입양 형식문(formula)입니다. 둘째, 마길은 훗날 이스라엘의 영웅적 인물로 떠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길의 후손은 400년이 지나 출애굽 후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요단 동편의 길르앗 정복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므낫세 반 지파가 그 땅을 얻어 정착할 수 있게 만듭니다(민 32:39-40; 신 3:15; 수 13:31).
 
요셉은 죽음 직전에 그들을 통해 승계되어온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확증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철회될 수도, 변개될 수도 없습니다. 요셉 자신은 여기서 죽을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야곱의 가족들을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시어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24). ‘인도하여 내다’는 출애굽을 가리키는 전형적인 어구입니다(창 15:13-14). 결국 요셉의 진술은 장차 있게 될 출애굽을 예고합니다. 요셉은 자신이 죽은 뒤에는 하나님이 그들을 계속 보살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24, 25). 그는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을 떠날 때 반드시 자신의 묘를 가나안 땅으로 이장해줄 것을 부탁합니다(25).
 
요셉의 유언은 약 400년이나 지난 후 성취됩니다(요셉 사망 후부터 애굽에서 약 340년 + 광야 40년 +가나안 땅 정복 후 약 20~30년).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을 떠날 때 요셉의 뼈를 들고 나옵니다(출 13:19). 이후 광야 40년 생활을 거쳐 가나안에 입성한 뒤 약 20~30년이 지난 여호수아 말년에 땅 정복이 비로소 완료됩니다. 그 후에야 여호수아와 백성은 요셉의 뼈를 세겜에 묻었습니다(수 24:32). 그의 뼈를 세겜에 묻은 이유는 세겜이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 후손의 땅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세겜의 장지는 야곱이 세 사람들에게서 100크시타를 주고 산 땅입니다(33:19; 수 24:32). 요셉이 110세에 죽자 애굽인들은 아버지 야곱의 사망 때와 마찬가지로 요셉의 시신을 향품 처리한 뒤 매장했습니다(26). 이렇게 요셉은 애굽에 묻힙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그의 유골은 최종적으로 약속의 땅으로 이장되어 거기에 묻힙니다. 이제 요셉의 죽음과 더불어 창세기가 막을 내리면서 오경의 다음 이야기인 출애굽기가 시작됩니다. 그 사이 40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나면서 하나님의 씨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어 이스라엘은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애굽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남아있는 땅에 대한 약속의 성취를 향해 하나님의 구원사가 진행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젊은 날에는 숱한 고난과 시련으로 연단하셨지만, 노년에는 더없이 복되고 평안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믿음으로 응답하여 사는 종을 결코 버리거나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고난과 시련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까? 선하신 하나님을 믿고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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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50-01)


애굽에서 삶을 다하고 죽은 야곱

창세기 49장 13절-50장 14절


야곱은 아들들에 대해 예언을 마치고 자신은 가나안 땅에 묻어달라고 유언한 후 숨을 거둡니다. 요셉은 그를 가나안 땅 막벨라 밭에 있는 굴에 장사합니다. 우리도 언젠가 삶을 마칠 것입니다. 그때 후회 없는 인생이 ㅚ기 위해 우리가 보여야 할 삶의 방식은 무엇입니까?
 
야곱은 열두 아들의 미래 운명에 대한 예언을 마친 뒤 그들에게 마지막 당부를 합니다. 자신의 시신을 약속의 땅에 묻어달라는 것입니다. 그는 앞서 죽음이 임박했음을 직감하고 요셉에게 이미 두 차례 동일한 부탁을 건넨 적이 있습니다(47:29-31; 48:21-22). 그럼에도 그는 이것을 한 번 더 마지막 유언으로 남깁니다. 그는 선조들로부터 자신에 이르기까지 거듭되었던 그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마지막 순간까지 잊지 않고 있습니다.
 

야곱의 죽음(29-33)

우리는 죽음으로써 우리 삶을 평가받고 우리의 믿음에 대한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약속의 씨인 세상의 구조, 즉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우리도 야곱처럼 죽음으로 하나님과 함께 있는 다른 믿는 자들에게 돌아갑니다. 야곱과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은 가나안 땅이 그들에게 주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소망 뒤에는 이보다 훨씬 좋은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29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되 내가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 30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의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31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 곳에 장사하였노라 32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 사람에게서 산 것이니라 33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니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더라(29-33)
죽음을 앞둔 요셉은 이제 마지막 당부를 아들들에게 전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시신을 반드시 선조들이 묻혀있는 가나안 땅의 가족묘에 매장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가 애굽으로 건너오기 직전 약속하신 말씀이 성취되고 있습니다. ‘내가…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46:4).
야곱은 이제 자신이 내 조상들(백성)에게 돌아갈 때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에 대해 밀그롬(Milgrom)은 죽은 자가 단순히 조상들의 묘에 함께 묻힌다는 뜻이 아니라 죽음 후에 스올에서 지속되는 사후의 삶에서 조상들과 다시 재결합한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야곱은 가족묘의 위치를 정확히 알려줍니다. 아들들은 모두 그 장소를 알고 있을 것이며 어쩌면 청소년기까지 가족과 함께 살았던 요셉도 알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자세히 그 가족묘에 대한 정보를 알려줍니다. 그곳은 헤브론, 곧 마므레 땅의 막벨라 밭에 있는 굴입니다. 일찍이 조상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매장하기 위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땅값 400세겔을 주고 그 묘지를 매입했었습니다(23장).
막벨라 굴에는 조부모님이신 아브라함과 사라, 그리고 부모님이신 이삭과 리브가가 묻혀 있고, 야곱의 아내 레아도 거기에 묻혔습니다. 그러나 오직 라헬만은 사정상 에브랏(베들레헴)에 묻혔습니다(35:19; 48:7). 여기서 야곱은 선조인 사라와 리브가는 각각 남편의 아내, 곧 ‘그의 아내’로 칭하나 레아는 단순히 ‘나도 레아를’이라고 칭합니다. 아마 그는 여전히 레아가 아닌 라헬을 진정한 아내로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꺼이 막벨라 굴의 레아 곁에 묻히기를 원하는데, 이는 그에게는 약속의 땅에서의 조상들과의 연계성과 일체감이 더욱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마지막 당부의 유언과 더불어 침상에서 숨을 거두고 선조들의 안식에 합류합니다.
 

가나안으로 운송되는 야곱의 시신(50:1-9)

우리는 때로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과 슬픔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위기들이 우리를 상하게 하거나 우리를 사로잡지 못하게 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슬픔을 이겨내고 일어나 우리에게 닥친 모든 어려움들을 극복하고 우리에게 맡겨진 의무를 충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1요셉이 그의 아버지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고 2그 수종 드는 의원에게 명하여 아버지의 몸을 향으로 처리하게 하매 의원이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하되 3사십 일이 걸렸으니 향으로 처리하는 데는 이 날수가 걸림이며 애굽 사람들은 칠십 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 4곡하는 기한이 지나매 요셉이 바로의 궁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원하건대 바로의 귀에 아뢰기를 5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 놓은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내가 다시 오리이다 하라 하였더니 6바로가 이르되 그가 네게 시킨 맹세대로 올라가서 네 아버지를 장사하라 7요셉이 자기 아버지를 장사하러 올라가니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원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원로와 8요셉의 온 집과 그의 형제들과 그의 아버지의 집이 그와 함께 올라가고 그들의 어린 아이들과 양 떼와 소 떼만 고센 땅에 남겼으며 9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가니 그 떼가 심히 컸더라(1-9)
요셉은 임종하신 아버지의 얼굴에 머리를 숙여 입을 맞추며 울었습니다. 이때 아마 그는 아버지의 눈을 감겨드렸을 것입니다. 이로써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그의 눈을 감겨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습니다(46:4),
요셉은 수종 드는 의원에게 아버지의 시신을 향품으로 처리하도록 지시합니다. 그 의원은 아마 왕실 주치의였을 것입니다. 다만 고대의 의사는 현대의 의사와는 역할과 직무가 차이가 났습니다. 때로 제사장과 의사, 치료를 담당하는 주술사의 구분이 모호했습니다. 의사는 야곱의 시신을 40일 동안 특수한 향품으로 처리했습니다. 그리고 70일간 애곡이 계속되었습니다. 이 70일에는 앞의 40일이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이렇듯 야곱의 장례는 애굽식 방식을 따랐습니다. 막대한 비용이 들었던 시신의 방부 처리는 부자와 고위층만 가능했습니다. 야곱의 시신과 더불어 나중에 요셉의 시신이 이렇게 미라로 만들어집니다. 야곱이 애굽에서 얼마나 큰 예우를 받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총 70일간의 애곡 기간이 끝난 뒤, 요셉은 바로의 왕실 사람들을 통해 아버지의 매장 문제에 대해 부탁의 말씀을 올립니다. 이때 그는 왕실 사람들에게 ‘내가 너희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했다면’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것은 상대방의 은혜를 구하는 어법인데, 상대방의 신분에 따라 다른 뉘앙스를 갖습니다. 현재의 경우 총리가 궁중 사람들에게 정중한 부탁을 하고 있으므로 ‘내가 너희에게 부탁하니’가 가장 무난합니다. 한편, 요셉이 왕실의 바로에게 사람의 중재를 통해 말씀을 전했던 이유는 그때가 아직 하관식이 남은 여전한 장례 기간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여전히 부정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바로를 향한 요셉의 대화 방식은 다분히 전략적입니다. 애굽이 아닌 가나안에 야곱의 시신을 매장하겠다는 것은 바로와 애굽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미 전 가족이 애굽에 이민 와서 살고 그들에게 모든 호의를 베풀었는데 왜 여기에 묻히지 않겠다는 것입니까? 요셉은 아버지의 말을 모두 생략하고 필요한 말만 전하는 전략을 구사합니다. 그는 지혜롭게 아버지가 이미 가나안에 자신의 묘지를 마련해 두었다는 점을 부각시킵니다(5). 만일 그가 단순히 아버지가 애굽이 아닌 가나안에 묻히고 싶어 하셨다고 말한다면, 일을 그르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령의 가장이이미 애굽에 오기 전에 특별히 자신이 묻힐 곳을 준비해 두었다면, 그 유언을 따르는 것은 망자에 대한 예우였을 것입니다. 바로의 허락이 떨어졌습니다.
요셉은 아버지를 장사하기 위해 가나안으로 올라갑니다. 이때 엄청난 규모의 장례 대열이 구성되었습니다. 우선 요셉의 온 집안 식구와 그의 형제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집의 모든 가족이 올라갔습니다. 거기에 애굽의 신하들, 왕실의 원로들 그리고 애굽 온 땅의 모든 원로들이 거기에 합류했습니다. 다만 어린아이들과 가축들만 고센 땅에 남겨두었습니다. 아마 아이들에게 그 여행길은 매우 벅찼을 것입니다. 또한 여기에는 요셉과 야곱의 온 식구의 애굽으로의 확실한 복귀를 바로에게 확신시키려는 의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장례 대열에 마지막으로 애굽의 병거들과 기병들이 합류했습니다. 마지막에 군대의 추가로 이 행렬은 마치 군대 행렬과 같은 성격을 지닙니다. 9절에서 병거와 기병의 합류와 더불어 ‘그 떼가 심히 컸다’고 말합니다. ‘떼’로 번역된 히브리어 ‘마하네’는 ‘군대’를 뜻합니다. 70인역과 타나크 역(TNK), 그리고 어떤 주석가들(예. Wenham)은 그것을 ‘군대’(troop) 혹은 ‘진영’(encampment)으로 번역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역본들은 ‘무리’, ‘떼’, ‘일행(company)’으로 옮깁니다. ‘떼’(군대)가 컸다는 것은 병거와 기병들의 규모가 굉장했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혹은 군대가 동원된 장례 대열 전체를 군대로 간주하여 그것이 대규모의 대열이라는 뜻일 수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출애굽 했던 이스라엘 민족이 ‘마하네’로 불립니다(출 14:19,20;신 2:14). 이런 군인들의 동반은 여행길에서 요셉의 장례 일행 보호를 위함이 분명합니다. 아이러니한 장면이 관찰됩니다. 큰 군대가 가나안을 향하는 이스라엘 가족을 보호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400년이 지난 뒤, 거대한 바로의 군대가 가나안으로 향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해치려고 뒤따라 왔습니다. 한편, 야곱의 시신이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옮겨진다는 것은 명백히 출애굽의 전조입니다. 애굽은 최상의 예우를 갖춰 야곱의 시신 운송식과 가나안에서 하관식을 치릅니다. 이로써 애굽은 미래의 이스라엘을 극진히 섬깁니다.
 

막벨라 굴에 안장된 야곱(50:10-14)

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이 아무 고난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악을 선으로 바꾸십니다. 성경에서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고 하였습니다. 성경의 말씀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지실 것입니다.
10그들이 요단 강 건너편 아닷 타작 마당에 이르러 거기서 크게 울고 애통하며 요셉이 아버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애곡하였더니 11그 땅 거민 가나안 백성들이 아닷 마당의 애통을 보고 이르되 이는 애굽 사람의 큰 애통이라 하였으므로 그 땅 이름을 아벨미스라임이라 하였으니 곧 요단 강 건너편이더라 12야곱의 아들들이 아버지가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그를 위해 따라 행하여 13그를 가나안 땅으로 메어다가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매장지를 삼은 곳이더라 14요셉이 아버지를 장사한 후에 자기 형제와 호상꾼과 함께 애굽으로 돌아왔더라(10-14)
요셉 일행은 요단강 건너편의 아닷 타장 마당에 도착했습니다. ‘아닷의 타작마당’(고렌 하아타드)에서 ‘아타드’는 가시나무의 일종(bramble 혹은buckthorn)으로 추정됩니다. 이것은 그 자체로 고유명사로서 지명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Gorn-ha-Atad; NJB; NAB; TNK). 이곳의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분명 요셉 일행은 요단 동편에서 요단강을 건너 아닷 타작마당으로 여행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해안 길이 아닌 사해 동편을 거쳐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여행 경로는 출애굽의 마지막 경로와 비슷했을지 모릅니다. 아닷 타작마당에서 요셉 일행은 크게 울면서 7일간의 애도 기간을 가졌습니다. 이것은 애굽에서 있었던 궁중 애도식에 추가된 의식입니다. 완전한 주기를 가리키는 7일은 이스라엘과 고대 중동에서 통상적인 애도 기간입니다(삼상 31:13; 욥 2:13; 겔 3:15). 가나안 주민들이 애굽 사람들이 아닷 마당에서 크게 애곡하는 것을 보고 그 땅 이름을 ‘아벨미스라임’으로 칭했습니다. 그것은 ‘애굽의 애도’를 뜻합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시신을 유언대로 마므레의 막벨라 굴에 장사했습니다. 요셉은 모든 장례 절차를 마치고 형제들과 올라갔던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애굽으로 돌아왔습니다.


야곱의 인생은 험난했고, 쉽지 않은 나그네 길이었습니다. 온갖 정념 때문에 부침이 있는 생이었지만, 끝까지 약속을 따라 동행함으로 마침내 믿음의 조상들의 반열에 이름을 남깁니다(히 11:21). 우리가 영원히 기억되고 다시 사는 길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믿음으로 걷는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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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49-02)

 


자녀들의 앞날을 예언하는 야곱(2)

창세기 49장 13-28절


야곱은 아들들의 행동가 성향, 분량대로 예언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예언대로이루십니다. 각 사람에게 삶의 책임을 부여하시고 성향에 맞는 역할도 주십니다. 나는 내 행동에 책임감을 갖고 삽니까? 내 성향과 은사로 공동체를 섬깁니까?
  
레아의 아들들 중에 앞서 유다까지는 출생 순서를 따랐으나 스불론(여섯째)과 잇사갈(다섯째)은 순서가 바뀝니다. 이것은 신명기 33장의 모세의 축복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신 33:18). 잇사갈과 스불론은 구약에서 함께 묶여서 언급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두 경우를 제외하고 잇사갈이 앞에 놓입니다. 학자들은 이에 대한 몇 가지 이유를 제시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미약한 잇사갈이 능동적인 활동을 하는 스불론에게 의존적으로 살아가게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야곱의 예언: 스불론, 잇사갈(13-15)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축복의 근원이십니다. 자연의 이치를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생명과 건강과 일해서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목적과 그에 따른 성취를 알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을 사용하여 우리 주변의 사람을 섬기고 돕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13스불론은 해변에 거주하리니 그 곳은 배 매는 해변이라 그의 경계가 시돈까지리로다 14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로다 15그는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에서 섬기리로다(13-15)
저마다 받은 은혜가 넘치며, 알맞은 분량의 축복을 받습니다. 비교하거나 부러워해서는 안 되며, 감사로 소임을 다해야 합니다. 스불론의 후손은 시돈 가까운 북쪽 바닷가에 정착하며 바다의 풍성함을 누릴 것이고, 잇사갈은 비옥하고 아름다운 토지를 얻지만 압제를 받을 것입니다.
(1) 스불론(13)
스불론은 해안 지역을, 구체적으로 시돈 근처까지 차지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13). 그러나 실제적으로 스불론의 영토는 육지로 둘러싸여 있습니다(수 19:10-16). 따라서 현재 예언의 문제는 스불론은 지정학적으로 해안 지역이 아니며 항구와도 거리가 멀다는 점입니다. 더구나 신명기 모세의 예언에서는 스불론이 바다의 생산물들을 마음껏 향유할 것이라고 말합니다(신 33:19). 아마 스불론은 내륙에서 지파 경계너머의 해양 지역까지 활동 영역을 넓혔을 가능성이 큽니다.
(2) 잇사갈(14-15)
이어지는 잇사갈에 대한 예언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잇사갈의 영토는 갈릴리 남쪽 지역(Lower Galilee)의 비옥한 평원에 독자적으로 위치했던 것으로 보입니다(수 19:17-24). 그런데 기름진 땅을 얻은 잇사갈이 꿇어 앉아 있는 강인한 나귀와 같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14) 이것이 매우 부정적인 묘사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강인한 나귀가 아마도 지쳐서 힘없이 누워 있습니다. 잇사갈은 안락한 쉼을 가져다 줄 그 땅을 아름답게 여기지만 정작 압제 아래서 짐 나르는 노동으로 섬기며 살아야 하는 운명입니다(15). 잇사갈이 어깨에 짐을 메면서 압제 아래 놓인다는 뜻은 아마 그들이 적들에 의해, 즉 가나안 족속에 의해 고통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잇사갈이 외부 세력에게 압제 당했다는 기록을 구약에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혹시 이것은 단순히 잇사갈이 미약한 지파로서 마치 종의 신분처럼 스불론에게 크게 의존하며 살게 된다는 예언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경우 동포에게 ‘압제받는 종’이란 말은 여전히 어울리지 않습니다. 어쩌면 다음과 같은 추론이 가능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잇사갈은 땅 정복 후에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해 그들이 잇사갈을 위해 종노릇했었습니다(삿 1:30). 그러나 성경에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모세의 경고대로 훗날 여전히 쫓아내지 못한 주변의 가나안 족속이 그들에게 가시가 되고 올무가 되어 결국 잇사갈 족속이 오히려 가나안 족속에게 억눌리며 살았을지 모릅니다(사 9:1을 보라).
 

야곱의 예언: 단, 갓, 아셀, 납달리(16-21)

이 세상에서 선하게 보이는 것이 항상 선한 것은 아닙니다. 이 땅은 갓 지파에게는 선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곳은 끊임없이 그들을 침범하는 적들이 숨어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찬란함과 쾌락과 물질과 권력과 명예로 가득하여 간혹 우리가 살기에 이상적으로 생되는, 선하게 보이는 장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하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을 노략질하여 우리를 파멸시키려는 대적들로 가득한 곳이 바로 세상입니다.
16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17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18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19갓은 군대의 추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하리로다 20아셀에게서 나는 먹을 것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수라상을 차리리로다 21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라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도다(16-21)
하나님께서는 백성의 필요를 채우시고, 삶을 풍요롭게 하십니다. 각양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갓은 약탈자들에 맞서 용감하게 적을 추격할 것입니다. 아셀은 비옥한 걸릴리에 거하며 수라상에 오를 먹거리를 생산할 것입니다. 납답리는 산악지역을 누비는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1) 단(16-19)
레아의 아들들에 대한 예언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이제 라헬과 레아의 여종들인 빌하와 실바의 네 아들들에 대한 미래가 나열됩니다. 역시 등장하는 순서는 출생 순서와 다르며 이러한 순서에 대해 별다른 이유를 찾기는 어렵습니다. 우선 단 지파는 ‘재판관’이라는 그의 이름 뜻에 걸맞게 이스라엘의 한 ‘지파로서’(개역개정 ‘지파같이’) 그의 백성을 심판합니다. 여기서 ‘심판한다’(딘)는 것은 비난을 위한 사법적 재판이 아니라 권리를 옹호하고 변호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단은 이미 이스라엘의 한 지파이므로 이 말은 이상하게 들립니다. 하지만 단은 원래 서쪽 해안 가까운 곳에 할당된 내륙의 땅을 점유하지 못해 이스라엘의 한 지파로서 역할을 못했습니다. 나중에 그들은 최북단으로 이주해 라이스 지역을 점령함으로써 비로소 한 지파로서의 위상을 확립합니다. 아마 이 예언은 이러한 상황에 대한 진술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단은 미약한 뱀으로 비유되지만, 결국 말 탄 자의 말을 물어 떨어지게 한다함으로써 이스라엘을 위해 자기 몫을 다합니다(17). 또한 훗날 단 지파는 사사(심판관) 삼손의 혁혁한 공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해냅니다(삿 14-16장). 이로써 단은 이스라엘 백성의 권리를 옹호합니다. 18절의 구원을 구하는 기도는 미래의 단 지파가 겪을 곤궁한 상황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단은 이 기도의 소망대로 역경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실바의 첫째 아들 갓은 가장 좋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입니다(20). 르우벤, 갓,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가 요구해서 얻은 땅은 요단 동편의 좋은 목초지였습니다. 19절에서 갓은 군대의 공격을 받지만 오히려 그가 그 군대의 뒤를(아케브, 그 배후를) 공격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명기의 모세의 예언에서도 갓은 웅크린 사자처럼 숨어 있다가 기습을 할 것이라고 묘사됩니다(신 33:20). 공격에 취약한 요단 동편 (트랜스 요르단)에 정착한 갓 지파는 그들의 역사 속에서 내내 여러 민족들의 공격을 받습니다. 암몬 족속 (삿 10-12장; 렘 49:1-6), 아람 민족(왕상 22:3; 왕하 10:32-33), 그리고 앗시리아(앗수르) 민족(왕하 15:29). 그들은 분명히 매번의 패배 후에 역공을 하며 싸웁니다. 갓 지파 백성은 싸우는 전사들로 칭송을 받습니다(대상 5:18; 12:8).
(2) 아셀(20)
아셀 지파는 갈릴리 고지대 서쪽 경사면의 납달리와 지중해 사이에 있던 비옥한 땅을 할당 받았습니다(수 19:24-31). 모세의 예언에서 아셀은 다른 지파들보다 더욱 풍족한 복을 누리고 형제들의 기쁨이 될 것이며 그들의 발이 감람유에 잠길 정도로 삶은 풍요로울 것입니다(신 33:24). 실제로 그곳은 풍부한 감람유(올리브 유) 산지로 유명했습니다. 그들의 삶은 왕의 식탁을 준비할 수 있을 정도로 풍요롭습니다(20).
(3) 납달리(21)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에 비유됩니다(21). 이것은 납달리 지파의 자유로움, 민첩함을 의미할 것입니다. 납달리는 북부 갈릴리 쪽에 영토를 배당받았는데 그곳은 물이 많고 초목이 우거지며 과실수도 잘 자라는 땅이었습니다. 더구나 디베랴(갈릴리) 호수에서 어업도 가능했습니다. 그들이 차지할 ‘서쪽과 남쪽’은 디베랴호수를 기준으로 서쪽과 남쪽을 가리킵니다.
 

야곱의 예언: 요셉, 베냐민(22-28)

무기력하고 안일하며 안락함과 편함을 추구하는 태도는 우리 영혼의 적입니다. 그러한 태도는 의욕적이고 창의적이며, 생산적이고 보람 있게 일하려는 마음을 파괴시키며 심지어 삶 그 자체를 파멸하게 합니다. 한님께서는 진정으로 그분을 따르는 자에게 부어주시는 축복은 제한이 없습니다. 새롭게 생각해 볼 수 있도록 복을 내려주십니다.
22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23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24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25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26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 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27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 28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22-28)
같은 배에서 대어났지만 받은 축복은 다릅니다. 그 차이 때문에 유대와 도움, 보호를 제공해야 합니다. 요셉은 샘 곁의 나무와 같을 것입니다. ‘샘’과 ‘비’와 ‘시냇물’, ‘젖가슴’과 ‘태’로 상징되는 풍성함을 누릴 것입니다. 베냐민은 이리와 같은 호전성으로 약탈물에 의지해 살아갈 것입니다.
(1) 요셉(22-26)
요셉에게는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돌아갈 두 몫의 복이 주어집니다. 요셉 지파의 자손이 크게 번성할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 구절의 ‘무성한 가지’는 오역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것은 요셉이 샘 곁의 ‘들나귀’와 담장 곁의 ‘들나귀들’(망아지들) 이라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견해는 이어지는 23절과도 잘 어울리는 장점을 지닙니다. 즉 이 짐승들은 활을 가진 사냥꾼의 표적입니다. 23절의 요셉을 향한 활 쏘는 자의 학대와 적개심, 그리고 공격은 요셉지파에게 언제 성취되었습니까? 역사적 사례가 드문 이유로 여러 학자들이 이것을 요셉 개인에게 고통을 준 여러 적들로 해석합니다. 요셉의 형들, 노예로 매입한 이스마엘 사람들, 보디발의 아내 등. 그러나 이것은 24-25절과 더불어 미래의 요셉 지파가 맞설 여러 적들을, 또한 그의 용맹함과 강성함을 가리킬 것입니다. 실제로 지도력을 갖춘 용맹한 요셉 지파는 훗날 북이스라엘의 대장 지파 노릇을 합니다.
요셉 지파 역시 엄청난 풍요를 누립니다(25-26). 이것은 모세의 예언에서도 반복됩니다. 그들은 하늘의 상수원(‘위로 하늘의 복’)과 땅의 지하수로부터(‘아래로 깊은 샘의 복’) 물이 넉넉히 공급되는 좋은 땅, 농사와 목축이 잘되는 기름진 땅을 얻을 것입니다. 실제로 요셉 족속의 땅 에브라임과 므낫세 반 지파의 요단 서편 땅은 산림이 우거지고 나중에 많은 과수원이 개간되었습니다(수 17:16-18). 므낫세 반 지파의 요단동편 고원 지대도 좋은 숲과 목초지를 지녔습니다. 그들은 ‘구별된 자’(나지르, 뛰어난 자)란 말을 들을 만큼 특별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결국 그들은 그런 엄청난 하나님의 축복을 내다 버리고 배교의 길을 가고야 말았지만 말입니다.
(2) 베냐민(27-28)
마지막 예언은 막내아들 베냐민을 향합니다.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에 비유됩니다. 그는 오전에 약탈한 먹이를 먹고 저녁에는 그것을 나누어 먹습니다(27). 해밀턴은 이 예언은 미래에 베냐민 지파가 군대의 약탈자가 되어 전리품을 팔아넘길 것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베냐민의 물어뜯는 이리와 같은 특징은 훗날 베냐민 지파의 사사 에훗에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삿 3:15-30). 후대에 베냐민 지파는 ‘용감한 장사요 활을 잘 쏘는 자’라는 칭찬을 듣습니다(대상 8:40;12:2). 이렇듯 용맹한 베냐민 지파는 초대 왕 사울을 배출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열두 아들에 대한 예언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이들은 12지파를 구성합니다. 아버지 야곱은 그들을 축복하되 각자의 분량대로 축복하였습니다.


아들들에게 준 축복은 다르지만 저마다 소중합니다. 풍요도 축복이고 한계도 축복입니다. 풍요를 통해 섬기게 하셨고, 한계를 통해 교만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축복은 책임을 동반합니다. 받은 축복에 감사하며 경쟁하지 말고 그 선물로 받은 유업으로 제사장 나라, 빛의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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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49-01)

 


자녀들의 앞날을 예언하는 야곱(1)

창세기 49장 1-12절


누구나 저주보다 복을 원합니다. 하지만 축복과 보상을 원하면서 자기 삶에 대해서는 책임감을 보여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야곱은 아들들의 의로운 행위에 대해서는 합당한 보상을, 불의한 죄에 대해서는 혹독한 저주를 선언합니다. 축복된 삶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야곱의 임종이 다가왔습니다. 그는 모든 아들들을 불러들인 뒤 그들의 미래를 축복하면서 각자의 운명을 선언합니다. 기나길 시 형식의 예언을 대단히 난해합니다. 왜냐하면, 희귀하게 사용되는 많은 고어들의 잔재가 남아 있고 전형적인 간결한 시 형식의 문장들로 인해 해석이 어려우며 또한 무엇보다 숱한 비유와 상징 언어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이 야곱의 예언은 신명기 33장의 모세의 예언과 비교하며 해석해야 합니다.

 

야곱의 예언: 르우벤(1-4)

부도덕함은 사람의 내면의 결점을 드러내 줍니다. 훈련이나 자제력 등의 부족함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결점은 거리낌 없이 사람들에게 상체를 입히고 고통을 주며, 모든 사람들을 동등하게 이끌어 가는 능력이 없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도덕함을 심는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1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가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2너희는 모여 들으라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 3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4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1-4)

르우벤 임종을 앞둔 야곱은 모든 아들들을 불러 마지막 유언을 남깁니다. 그것은 아들들의 미래 운명과 그들을 위한 축복입니다. 그러나 어떤 아들들에게는 축복이 아닌 사실상 저주가 선언됩니다. 야곱은 자신의 두 이름을 모두 사용합니다.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들으라’(2). 49장의 이해를 돕는 서론의 도표 <야곱의 12아들과 12지파>와 <12 아들과 12지파에 대한 야곱의 예언(창 49장)과 모세의 예언(신 33장) 비교>를 참고해보시길 바랍니다. 야곱은 레아의 아들들로부터 대체로 출생 순서를 따라 예언을 시작합니다.

첫 번째는 장남 르우벤입니다. 그는 장남의 위상에 걸맞게 야곱의 ‘능력’, ‘기력의 첫 열매(시작)’라는 칭송을 듣습니다. 그의 위세와 권능은 출중합니다. 그러나 그는 ‘물처럼 요동을 치는’ 불안정한 인물입니다. 이것은 통제되지 않는 그의 경망스러운 행동을 가리킬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아버지의 침상을, 즉 그분의 신성한(카도쉬) 결혼 관계를 더럽혔습니다(할랄). 이것은 르우벤이 빌하를 범했던 사건을 가리킵니다(35:22). 그로 인해 그는 더 이상 ‘출중(탁월)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은 그의 탁월한 지위, 즉 장자권이 박탈된다는 선언입니다.

4절 마지막 문구 ‘그가 내 침상에 올랐다’에서 2인칭 단수 문장이 3인칭 단수 문장으로 갑자기 바뀝니다. 이 난해한 짧은 히브리어 문장에 대한 많은 해석이 있지만, 단순하게 이것은 여기서 야곱의 연설 대상이 르우벤에서 아들들로 바뀐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형식적으로 르우벤이 장남으로서 지위는 유지하나 그의 장자 권리는 박탈당합니다(대상 5:1). 그 결과 어떤 예언자나 사사, 제사장 혹은 왕도 르우벤 지파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야곱의 예언: 시므온과 레위(5-7)

사람들은 대부분 정상적으로 태어나지만, 여러 가지 장애를 가지고 출생하기도 합니다.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는데 미흡하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남들보다 탁월함을 구하기 전에 이미 주신 것을 주의 뜻대로 실천하면 살아가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5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6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7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5-7)

이어서 레아의 다음 아들들인 시므온과 레위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미래가 선언됩니다. 둘은 잔인한 폭력행사에 의기투합한 형제였습니다. 그들의 범죄인 세겜의 학살 사건은 창세기 34장에서 언급됩니다. 그들은 ‘무기(칼)’(메케라)를 폭력의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메케라’가 무엇인지는 불분명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칼이 할례용 칼이었는데 야곱의 예언은 그것이 무기로 사용된 것에 대한 징벌이라고 이해합니다. 일부 랍비들은 이 단어가 ‘칼’을 뜻하는 헬라어 마카이라(χαιρα)에서 차용된 단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야곱의 시의 고대성을 고려해 볼 때 이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기원이 무엇이든 이것은 ‘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6절은 야곱 자신은 시므온과 레위의 학살극을 허가한 적이 없었음을 상기시킵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아버지의 뜻과 상관없이 ‘분노하여’(분노대로) 세겜 사람을 학살했으며 ‘기분 내키는 대로’(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습니다. 그들이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다’는 것은 세겜 사건에서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가축들을 노략했을 뿐입니다(34:28-29). 따라서 이것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제시되었습니다. 가능한 해석으로 가나안에서 소는 지도자를 가리킬 수 있으므로 이 경우 소는 세겜의 지도자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월키는 야곱 가족은 농부가 아닌 이유로 목축을 위해 양과 염소만 약탈하고 소는 모두 살처분했다고 해석합니다. 말하자면, 정착민인 세겜 사람들에게는 농사가 중요했기에 그들이 농사를 짓지 못하도록 소를 모두 없앴습니다.

그들의 과도한 분노와 폭력 행사는 이제 그 대가를 지불받습니다. 그들은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7), 구체적으로 시므온과 레위는 이제 분리되어 더 이상 연합하지 못할 것입니다. 나중에 레위 지파 전체가 성소 직무를 위한 별정직으로 선별되어 임명되기에 시므온 지파와 자연히 분리됩니다. 무엇보다 민수기 25장의 바알브올 음행 사건 당시 제사장 비느하스(레위 지파)는 집단음행의 주동자인 시므온 지파 지도자를 처형합니다.

또한 시므온과 레위는 이스라엘 중에서 흩어집니다. 시므온 지파는 제비뽑기로 가나안 땅이 분배될 때 무슨 연고인지 유다 지파 영역 내에 더부살이 하는 방식으로 땅을 할당 받았습니다(수 9:1-9). 나중에 그들은 남북이 나뉠 때 북쪽으로 흡수되며 흩어져 분산됩니다. 이러한 그들의 운명은 신명기 33장 모세의 예언에서 놀랍게도 그들이 아예 누락된다는 사실에서도 암시됩니다. 레위지파는 성소 직무를 위해 구별되었기에 독자적인 땅을 할당받지 못하고 대신 그들에게는 48개의 레위 도성이 주어져 결국 사방에 흩어집니다. 그러나 레위 지파는 나중에 시내산 아래의 금송아지 사건에서 주동자들을 처단하는 데 앞장서는 공로로 성소의 직무를 맡는 지파로 승격됩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땅을 받지 못하고 흩어진다는 예언은 유효하기에 전국에서 레위 도성들을 받아 이스라엘 전역에서 더부살이를 합니다.

 

야곱의 예언: 유다(8-12)

하나님께서는 인정하시는 사람을 인정하시고 책임지는 자를 책임지십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고 책임지는 자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께서 많은 복을 내려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가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큰 복을 내려주십니다. 유다와 그의 가족에게 선포된 예언적 축복을 주목해 보시길 랍니다.

8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9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10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11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12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의 이는 우유로 말미암아 희리로다(8-12)

레아의 넷째 아들 유다에 대한 예언이 주어집니다. 장차 모든 형제들이 그를 찬송할 것입니다. 유다는 장자권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나 강한 리더십을 갖춘 대장 지파가 될 것입니다. 그의 군사적 기개 앞에 모든 형제들이 그에게 절을 할 것입니다(참조. 삿 1:1-2; 20:18). 유다는 어린 사자와 다 큰 사자에 비유되니다. 새끼 사자가 먹이를 잡아먹고 올라가는 것처럼 그는 적들을 공격할 것입니다. 이어서 암수 사자들이 엎드리고 웅크려 있는 것은 휴식을 위함입니다. 잠자는 사자를 누가 함부로 건드릴 수 있겠습니까? 유다가 바로 그런 두려운 지파가 될 것입니다.

또한 장차 유다에게 궁극적으로 왕권이 주어질 것입니다. 통치자의 권위를 나타내는 규와 지팡이는 ‘실로가 올 때까지’ 유다의 것이 되어 모든 백성(즉 모든지파)이 복종할 것입니다. 참고로 규(珪, scepter)는 왕이 지니고 다니는 지팡이의 일종으로 왕의 권위를 상징합니다. 한편, 나귀를 포도나무에 맨다는 것은 나귀가 포도열매와 잎을 먹어치우기 때문에 고양이에게 생선을 던지는 격입니다. 품종이 좋은 나귀는 왕과 같은 고귀한 사람이 타던 짐승이었기에 포도를 마음껏 먹게 한다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유다는 그만큼 귀한 나귀를 탈 것입니다. 포도주와 우유의 비유는 풍요와 생명력을 상징합니다. 옷을 포도주와 포도즙(문자적으로 '포도의 피)에 빤다는 것은 귀한 포도주가 넘치도록 풍요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유다의 눈빛은 포도주보다 더 진할 것이고 그의 이빨은 우유보다 더 하얄 정도로 그는 생명력이 충만할 것입니다.

참고로 ‘실로가 올 때까지’는 ‘구약 전체에서 가장 유명한 해석의 난제(crux interpretum)’로 간주됩니다. 이에 대한 해석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1) ‘아드키 야보 실로’(실로가 올 때까지). ‘아드키’는 ‘~할 때까지’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습니다. 여호수아 18:1에서 ‘실로 성막안치’확인되는데 유다 지파는 실로가 올 때까지만 홀을 잡은 게 아니라 그 후 솔로몬 때까지 계속 유다가 12지파 전체의 홀을 잡았습니다. 그러다 르호보암 때 10지파가 떨어져 나가 전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홀을 놓칩니다;

(2) ‘아드키 야보 샤이 로’(조공이 그분에게 올 때까지). 이것은 ‘실로’를 ‘샤이 로’(조공이 그분에게)로 수정한 것에 근거합니다. ‘샤이’는 ‘선물, 조공, 공물’의 뜻입니다. 이것은 결국 다윗을 내다보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3) ‘아드 키야보 쉘로’ 그것[규]이 그에게 속해 있는 분이 올 때까지, וֹל󰚆(쉘로) = וֹל(그에게) + 󰚆(관계대명사)). 이것은 부분적으로 에스겔 21:27에 근거해 있습니다. 거기서 현재의 이 문구와 거의 축어적으로 동일한 표현이 나타납니다. ‘마땅히 (그 왕관을, 26절) 얻을 자가 이르면 그에게 주리라.’ ‘실로’는 마소라 사본의 여백에 대안적 철자인 ‘헤’가 빠진 ‘실로’가 제안되므로 쉘로는 얼마든지 가능한 재구성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매력적인 대안입니다.

어느 견해가 되었든지 이 문구는 공통적으로 결국 다윗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나아가 먼 훗날 영원한 홀을 들고 오실 가장 위대한 메시아 왕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메시아가 유다의 계보를 통해 오십니다.


 야곱은 자기 후손들의 미래를 예언했습니다. 이는 희망 사항이 그치지 않습니다. 언약의 계승자로서 그 특성과 행위에 걸맞은 예언적 진술을 한 것입니다. 정 많은 아비이기 이전에 무거운 책임을 진 언약 상속자이자 선지자이기 때문입니다. 위임받는 권한과 책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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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48-02)

  


아들과 손자들에게 축복한 야곱

창세기 48장 8-20절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이들에 대한 뉴스를 듣곤 합니다. 재벌가 어린 자녀들이 태어나면서부터 거액의 주식과 부동산을 상속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씁쓸한 풍속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다른 가치와 삶의 방식을 좇는 이들입니다. 무엇을 물려주어야합니까?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을 보고 ‘이들은 누구냐?’고 묻습니다. 눈이 어두워진 노인의 입장에서 중요한 입양 의례에서 신분의 최종 확인을 위한 관례적인 질문으로 간주됩니다. 앞서 동일하게 눈이 어두워진 이삭도 변장을 하고 돌아온 야곱에게 동일한 질문과 더불어 신분을 확인하는 절차를 가졌으며(28:18) 뒤늦게 찾아온 에서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27:32).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하는 야곱(8-11)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구속하시고 또 지금도 인도하신 그분 안에서 인간으로서의 참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인정한다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바르게 세워가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행복이 하나님 안에 있고, 인생의 의미가 그 안에 발견된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후손들에게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8이스라엘이 요셉의 아들들을 보고 이르되 이들은 누구냐 9요셉이 그의 아버지에게 아뢰되 이는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들이니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그들을 데리고 내 앞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들에게 축복하리라 10이스라엘의 눈이 나이로 말미암아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요셉이 두 아들을 이끌어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니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입맞추고 그들을 안고 11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더니 하나님이 내게 네 자손까지도 보게 하셨도다(8-11)

야곱의 짤막한 양자 입양 의례가 시작됩니다. 눈이 어두워진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을 보고 그들이 누구냐고 묻습니다. 이로 인해 어떤 사람들은 현재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이 자리에 함께 있는 것을 모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편집 비평가들은 엉뚱해 보이는 이 질문이 편집의 결과라는 견해를 제시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은 입양 의례에서 필요한 형식적인 신분 확인 절차일 뿐입니다. 요셉은 그 두 아들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야곱이 에서를 만난 뒤 자신의 자녀들에 대해 했던 고백과 동일합니다(35:5;참조. 시 127편, 128편).

야곱은 요셉으로 하여금 그들을 앞으로 데리고 오라고 말합니다. 입양 의례와 더불어 그들에게 축복을 베풀기 위함입니다. 먼저 야곱은 그 두 아들에게 입을 맞추고 포옹을 한 뒤 덕담을 건넵니다. 살아생전 아들 요셉의 얼굴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상상도 못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요셉뿐 아니라 이제 그의 두 아들까지 보게 하셨습니다. 사르나(Sarna)는 여기서 입맞춤과 포옹을 단순한 인사가 아닌 양자 입양의 공식 절차로 이해합니다.

 

요셉의 두 아들의 장자권을 뒤집는 야곱(12-16)

참된 인생의 가치는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며, 진정한 인생의 깊이는 성취가 아니라 의미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목적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향하여 살도록 창조되었으므로 하나님을 인생의 목적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아는 지식과 그 계획을 우리의 삶을 통해 성취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야곱은 장자의 축복을 뒤집어 기도하고 있습니다.

12요셉이 아버지의 무릎 사이에서 두 아들을 물러나게 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고 13오른손으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왼손을 향하게 하고 왼손으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오른손을 향하게 하여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14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 15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16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12-16)

요셉은 두 아이들을 할아버지의 ‘무릎 사이에서’ 물러가게 한 뒤 그에게 엎드려 절을 올립니다. 입양 의례에서 아이를 무릎 사이에 두는 행위는 그것이 자궁으로부터의 탄생을 상징하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 요셉의 두 아들은 거의 20세의 성인이며 할아버지는 거동이 거의 힘든 병든 몸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야곱의 무릎 위에 앉았을 리가 없기에 분명 그의 무릎 곁에 서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무릎에서 물러갔다는 것은 양자 입양 의식이 끝났음을 의미합니다. 이때 요셉은 아버지 앞에 엎드려 절합니다(12). 현재의 입양 의례와 축복에서 두 사람은 더 이상 총리와 시민의 관계가 아닌 완전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입양된 두 아들을 위한 축복 의례가 시작됩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임종 직전 아버지의 장자권 축복을 포함할 것입니다. 요셉은 두 아들을 양손으로 취했는데, 오른손으로 에브라임을 붙들고 왼손으로 므낫세를 붙든 채 야곱에게 가까이 갔습니다(13). 따라서 므낫세가 야곱의 오른손 안수를 받는 위치에 서 있습니다. 성경에서 오른손은 긍정적이고 신적 권위를 지니며, 또한 그것은 영광과 구원의 손입니다(출 15:6,12; 신 33:2; 시 17:7; 20:6; 48:10; 신 11:29; 시 110:1; 마 25:33; 히 1:3). 그러나 야곱은 양손을 어긋나게 해서 그의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 위에 올렸습니다(14). 결국 서열상 장자인 므낫세의 머리에 그의 왼손이 놓임으로써 므낫세의 장자권이 에브라임에게 넘어갑니다. 이것은 야곱의 독단적인 결정에 의한, 그러나 분명히 이미 그에게 내려졌을 하나님의 지시에 따른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빈번하게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에 의해 장차남의 지위가 역전됩니다. 가인과 아벨(4:1-8); 야곱과 에서(27장); 세라와 베레스(38:27-30); 그리고 르우벤과 요셉. 순전히 인간적인 관점으로 보자면, 므낫세의 입장에서 이것은 얼마나 부당하고 억울한 일입니까? 그러나 빈번하게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결정하시고 인간에게는 단지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인간은 그것이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루며 모두에게 유익한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야곱은 ‘요셉을 위하여’ 두 아들을 축복합니다(15). 이는 요셉이 두 아들의 몫을 유산으로 받는 장자의 자격으로 그가 복을 받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의 아버지 이삭과 조부 아브라함은 항상 ‘하나님 앞에서 행하였습니다’(원문은 ‘섬겼다’ 아닌 ‘걸었다’, ‘행하였다’). 바로 그 하나님이 야곱의 ‘평생 동안’ 지금에 이르기까지 목자로서 그를 길러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를 건져주신 구속자(고엘) 셨습니다. ‘구속하다’를 뜻하는 동사 ‘가알’은 구체적으로 빚을 대신 갚아서 속박으로부터 사면시키는 행위를 말합니다(출 6:6; 레 25:25,26,30; 27:13,15; 특히 룻기의 핵심 동사로 2:20, 3:9 등). 야곱은 특별히 라반에게서 당한 속박을 염두에 두고 이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분이 모든 억울한 빚을 갚아주셔서 라반으로부터 자신을 해방해 주셨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또한 ‘(여호와의) 사자’로 칭합니다.(원문은 단순히 ‘사자’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여호와와 여호와의 사자의 구별이 사라진다는 것이 확인됩니다. 말하자면, 여호와는 자신의 사자를 보내시는데 그 여호와의 사자는 여호와의 구별된 존재로 나타나면서도 또한 놀랍게도 빈번히 그는 인간의 형상을 입고 온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야곱은 자신의 목자요 구속자이신 바로 그 하나님께 두 아들의 복을 빕니다.

복의 내용인 16절은 약간 수정이 필요한 모호한 오역입니다. 이것은 입양된 두 아들이 향후 자신을 이어서 아브라함과 이삭뿐 아니라 야곱 자신의 이름을 부르게 되길 원한다는 기원입니다. 또한 요셉은 그들이 이 세상에서 ‘물고기처럼’ 번성하도록 축복합니다.

 

에브라임이 장자가 되리라(17-20)

하나님의 주권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그렇지는 않아도 대개는 어려움에 처하게 되어 가족의 책임을 맡기는 데에 장자를 택하는 것이 관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심중을 아시며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사람을 택하시는 권한을 갖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장자를 택하지 않으실 때에는 사람은 그 분의 주권을 받아들여야 하며 자신의 판단과 계획을 겸손하게 포기해야 합니다.

17요셉이 그 아버지가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여 아버지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여 18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이니 오른손을 그의 머리에 얹으소서 하였으나 19그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아니하며 이르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20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너로 말미암아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네게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며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17-20)

야곱의 오른손이 에브라임에게 놓인 것을 본 요셉은 심기가 매우 불편했습니다. 동사 ‘라아’는 상당히 강한 감정적 불쾌감을 표현합니다. 요셉의 반감은 출생과 더불어 과거의 괴로움을 잊게 했던 큰 아들 므낫세에 대한 요셉의 애정이 매우 특별했음을 암시합니다.

어쩌면 그는 아버지의 눈이 어두워서 혼동을 일으킨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간파한 요셉은 즉시 야곱의 손을 붙들고 위치를 변경해 그의 실수를 교정하려 합니다(18). 하지만 야곱은 자신이 결코 실수를 한 것이 아님을 또렷하고 총명한 말로 확인해줍니다. 그리고 므낫세 또한 에브라임 못지않은 큰 민족이 될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에브라임의 복은 더 커서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룰 것이다.’ 이것은 해석하기 난해합니다. ‘민족들의 충만함’이란 어구는 여기에서만 사용되기에 더욱 해석하기 어렵습니다. 가장 무난하게 아브라함이 열국(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는 예언이(17:46) 여기서 에브라임에게 승계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장차 에브라임이 북쪽 지파들 중 가장 강력한 지파로서 북왕국의 모든 지파들을 자신의이 름으로 칭하게 만들게 될 것을 예고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참조. 사 7:5, 8-9; 렘 31:9; 호 4:16-17; 5:3; 7:1).

한편, 20절의 야곱의 축복 내용은 다음과 같이 수정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너(요셉)로 말미암아 축복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요셉)를 에브라임처럼, 그리고 므낫세처럼 만드시길 바란다’고 할 것이다.”

 

야곱이 요셉을 축복함(21-22)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장자를 택하지 않으시고 어린 자를 택하실 때에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법과 관습에 따르면 어린 자가 결코 더 큰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만약 그가 더 큰 축복을 받게 되면 그것은 그에게 거저 주어진 것입니다.

21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또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22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세겜 땅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21-22)

야곱은 요셉에게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시며 그로 하여금 약속의 땅으로 다시 돌아가도록 하실 것이라고 확신시켜 주었습니다(21). 야곱은 하나님께서 그와 항상 함께하셨기 때문에 그의 아들과도 항상 함께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야곱은 요셉의 후손이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갈 것을 재차 확증합니다. 그 땅에서 요셉의 후손은 다른 형제들보다 ‘세겜 땅’(혹은 ‘산마루’)을 하나 더(?) 받을 것입니다. 그 땅은 야곱이 아모리 족속에게서 빼앗은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가나안 사람들로부터 세겜 근처에 한 필지의 땅을 매입한 후 거기에서 제단을 쌓은 적이 있습니다(33:18-19).

또한 그 직후 시므온과 레위의 주도하에 야곱의 아들들은 세겜 성 사람들을 학살하면서 성을 노략했습니다(34장). 따라서 이 축복은 장차 가나안의 요충지인 이 세겜 땅이 다시 요셉의 몫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후대의 땅 분배에서 세겜이 에브라임에게 할당됨으로써 실현되었습니다.


 자녀에게 물질적 유산을 남겨주고 원하고, 더러는 인내심, 사랑, 개성, 배움, 꿈을 나며주고자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좋은 추억과 지혜, 건강, 바른 심성이나 습관을 꼽기도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남겨주기 원합니까? 믿음, 소망, 사랑이야말로 취상의 유산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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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48-01)


죽음을 준비하는 야곱

창세기 47장 27절-48장 7절


예외 없이 인생의 마지막에 다다릅니다. 가는 시간을 붙들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소소한 일들과 여가와 유흥으로 노후를 보냅니다. 수고하였기에 마땅한 보상입니다. 하지만 믿는 우리는 보다 값지게 생을 마무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황혼을 장식해야 해야 합니까?

 

혹독한 7년간의 가뭄이 끝나고 이집트는 평온을 되찾았습니다. 야곱 가족도 고센 땅에 잘 정착해서 안정을 찾았으며 호손이 번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애굽 땅으로 이주한 지 벌써 17년의 세월이 흘렀으며 야곱의 나이는 147세가 되었습니다. 비록 조상들의 수명에는 크게 못 미치나 그는 당시 이집트 문헌에 기록된 이상적인 수명인 110세를(Hamilton) 훌쩍 넘겨 살았습니다. 노후를 그는 요셉의 보살핌 속에 행복하게 보냈으며 안정된 삶 속에서 그의 자손이 크게 늘었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준비한 야곱(47:27-31)

사람은 죽음에 대해 어떻게 준비해야 합니까? 우리 모두는 죽습니다. 존재하는 이상 죽게 마련입니다. 죽음은 피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죽게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거듭해서 선언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야곱을 향해 ‘죽을 기한이 가까우니’(29)라는 말씀에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27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주하며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 28야곱이 애굽 땅에 십칠 년을 거주하였으니 그의 나이가 백사십칠 세라 29이스라엘이 죽을 날이 가까우매 그의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허벅지 아래에 넣고 인애와 성실함으로 내게 행하여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아니하도록 하라 30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 요셉이 이르되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31야곱이 또 이르되 내게 맹세하라 하매 그가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니라(27-31)

야곱이 고센 땅에 정착한 지 벌써 17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 그의 죽음이 임박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야곱은 가나안에서 요셉을 17년 동안 보살폈고, 이제 요셉이 애굽에서 야곱을 17년 동안 보살폈습니다. 그 사이 그의 후손은 크게 번성했습니다. 생육과 번성은 넓게는 창세기 1장의 창조와 홍수 이후 재창조에서 주어진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창조 명령의 성취이며 (1:28; 9:1,7), 특정하게는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에게 주었던 씨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입니다(28:3; 35:11). 특히 벧엘에서 야곱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이 씨의 번성 약속을 재확증하셨는데, 아래 야곱의 간증에서처럼 그것이 성취되는 중입니다(48:4). 그러나 이것은 이제 시작에 불과합니다. 출애굽기에서 보듯이 앞으로 이스라엘 민족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게 번성할 것입니다(출 1:7).

147세가 되어 죽을 날이 가까워진 야곱은 요셉을 불러 자신의 죽음을 준비시킵니다. 요셉에게 자신의 장례에 대한 유언을 남기고는 그에게서 이 유언의 확고한 실행을 위한 약속과 맹세를 받아냅니다.

‘은혜를 입었거든’이라는 아들의 호의를 구하는 말은 아버지에게 어울리지 않으며 그에게서 ‘인내와 성실함’을 요구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이러한 겸손한 부탁은 요셉의 총리로서의 위치를 예우하는 것이면서 또한 유언의 중대함과 간절함을 전달하기 위함일 수 있습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자신의 ‘허벅지 아래에 손을 넣고’ 맹세하도록 요구합니다. 분명히 ‘허벅지’는 성기에 대한 완곡어법입니다. 이것은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를 찾기 위해 자신의 종에게 맹세를 요구할 때 했던 행위와 동일합니다(24:2). 아브라함은 언약의 증표로 성기에 할례를 받았으며 성기는 씨의 번성을 위한 생식 기관입니다. 따라서 성기 주변 허벅지에 손을 대고 후손을 이어갈 며느리를 찾기 위한 기도와 맹세를 하는 것은 이해할 만합니다. 야곱이 그 행위를 반복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자신의 죽음 후 가나안 땅으로의 약속을 보장받기 위함입니다.

야곱의 유언은 자신이 죽으면 약속의 땅 조상의 묘지에 자신을 묻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묘지는 마므레 앞 막벨라 굴을 의미합니다(50:13). 야곱은 자신이 약속의 땅에 매장됨으로써 죽음 후에라도 그의 번성할 후손과 그 땅에서 함께 거주하는 가족이 되고자 합니다. 야곱의 후손은 모두 야곱의 몸(야레크)에서 나온 자들입니다(46:26; 출 1:5). 따라서 그의 야레크(허벅지)에 손을 대고 맹세하는 행위는 그의 야레크에서 나올 후손들과의 연계성을 확증하기 위한 것입니다.

맹세 의례가 끝나자 야곱은 ‘하나님께 경배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동사 ‘이쉬타후’는 단지 ‘그가 허리를 굽혔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야곱이 요셉에게 절을 한 것인지, 혹은 하나님께 경배를 드린 것인지 모호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가 기력이 없어 침대 맡에 거꾸러진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이 중대한 의례에서 하나님께 경배를 올리며 그 의례를 마무리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회상하는 야곱(48:1-4)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을 사랑하는 것에 기반을 둔 결혼은 진정한 사랑에 이르게 합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에 근거하여 결혼한 사람들은 진정한 사랑을 체험합니다. 진정한 사랑을 아는 사람은 임종 시에 자기가 사랑한 사람을 기억할 것입니다. 야곱의 임종에 즈음하여 요셉은 두 아들과 함께 급히 아버지 곁으로 달려왔습니다.

1이 일 후에 어떤 사람이 요셉에게 말하기를 네 아버지가 병들었다 하므로 그가 곧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함께 이르니 2어떤 사람이 야곱에게 말하되 네 아들 요셉이 네게 왔다 하매 이스라엘이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아 3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 4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1-4)

‘이 일 후에는’ 약간의 시간의 흐름을 표현합니다. 여기서는 아마 이전의 병상에 누운 장면과 시간의 간격이 크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요셉이 두 아들을 데리고 야곱을 찾은 것은 당시 관례대로 그의 임종 전에 두 아들로 하여금 할아버지의 마지막 축복을 받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요셉에게’ 야곱의 상태를 알립니다. 이것은 고센의 연로하여 병든 야곱과 궁중의 요셉 사이에 비상 연락망이 마련되어 있음을 암시합니다. 또한 아마 야곱의 병시중을 들었던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두 아들을 데리고 떠납니다. 여기서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순서는 출생 순서를 따릅니다(1). 그러나 야곱의 말에서 그 순서가 바뀌기 시작합니다. 두 아들은 흉년이 들기 직전에 태어났으며 흉년이 시작된 2년째부터 17년의 세월이 흘렀으므로 약 20세 정도로 추정됩니다(41:50; 47:28).

요셉의 도착 소식을 들은 이스라엘은 힘을 내서 침상에서 일어나 앉았습니다. 그는 요셉에게 자신의 짧은 간증을 말하며 그분께 받은 약속을 확인시킵니다. 그가 에서를 피해 밧단(=밧단아람)으로 가는 도중 하나님이 루스, 곧 벧엘에서 나타나셨습니다. 야곱은 거기서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두 가지 약속, 씨의 번성과 가나안 땅의 점유를 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 이삭이 야곱을 밧단아람으로 보낼 때, 그에게 베푼 축복이기도 합니다(28:3-4). 그의 후손은 반드시 이집트에서 번성하여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 그 땅을 차지할 것입니다. 복수의 민족(암밈), 즉 ‘많은 백성이 나게 할 것이다’(4)라는 말씀은 아마 12지파로 구성된 이스라엘 연합체의 출현을 가리킬 것입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입양한 야곱(48:5-7)

요즘 100세 시대를 맞이하면서 ‘웰빙’(well-being)못지 않게, 웰다잉(well dying)에 대한 관심도 많아집니다. ‘어떻게 살았느냐?’ 그것이 곧 ‘어떻게 죽느냐?’를 결정 합니다. 살아갈 동안 행복하고 즐겁게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의미 있고 복된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또한 중요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야곱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의 웰다잉을 준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5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6이들 후의 네 소생은 네 것이 될 것이며 그들의 유산은 그들의 형의 이름으로 함께 받으리라 7내게 대하여는 내가 이전에 밧단에서 올 때에 라헬이 나를 따르는 도중 가나안 땅에서 죽었는데 그 곳은 에브랏까지 길이 아직도 먼 곳이라 내가 거기서 그를 에브랏 길에 장사하였느니라(에브랏은 곧 베들레헴이라)(5-7)

이어서 야곱은 갑자기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양자 입적을 선언합니다.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손자의 입양이 매우 기이하고 불법적으로 보이지만, 멘델슨(I. Mendelsohn)과 같은 학자들은 고대근동의 우가릿에서 나온 아카드 법률 문서에서 그와 동일한 사례를 찾아냈습니다. 야곱은 여기서 장자 므낫세 대신 차남 에브라임을 먼저 언급합니다. 이것은 두 아들의 지위가 역전될 것임을 예고합니다. 요셉의 두 아들은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그 두 아들이 현재의 장남과 차남의 지위를 대체한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현재 야곱의 발언은 요셉에게 장자권을 부여하는 선언입니다.

이것은 15절에서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는’ 그의 기도를 통해서 확인됩니다. 요셉은 두 아들이 야곱에게 입적되어 결과적으로 두 배의 유산을 상속받습니다. 이것은 장자의 유산이 다른 형제들의 두 몫이라는 사실에 부합합니다(신 21:15-17). 역대기에 이 사실이 확정되어 있습니다: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하였느니라’(대상 5:1; 참조. 창 49:3-4). 차남 시므온과 레위의 경우 세겜에 대한 그들의 범죄로 인해 장자권 승계 자격이 박탈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49:5-6). 요셉은 야곱이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낳은 야곱의 첫 아들일 뿐 아니라 가족 전체를 살린 특별한 아들로서 레아가 낳은 그의 형들을 능가합니다.

요셉이 이후에 낳을 아이들은 요셉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70인역은 요셉의 아들의 명부에 현재의 두 아들 외에 일곱 명의 아들들의 이름을 더 올려 총 아홉 명으로 만듭니다. 6b절은 해석상의 문제를 야기합니다. 먼저 개역개정의 오역은 이것은 ‘그들의 형제들의(아헤헴) 이름으로’로 수정되어야 합니다. 먼저 이 표현에서 ‘그들’이 요셉이 나중에 낳은 아이들로 이해되면서, 이것은 그들이 ‘그들의 형제들 이름으로’ 요셉의 유산을 상속받는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그 아이들이 결국 에브라임과 므낫세 족속에 합류된다는 뜻입니다. 더 나은 해석으로 이것은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야곱의 아들로 입양됨으로써 이제 야곱의 아들들이 되었으며, 따라서 이제 ‘그들이 그들의 형제들의 이름과 더불어’, 즉 형제들과 더불어 야곱의 유산을 상속받는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어서 야곱은 사랑하는 아내라헬의 죽음과 장사에 대해 언급합니다. 그것은 가나안에서 요셉이 함께 겪은 일이기도 합니다. 밧단아람에서 20년의 세월을 보내고 귀환 도중 에브랏 근처에서 라헬이 베냐민을 출산하고 사망합니다(35:16-20). 야곱이 특별히 여기서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죽음과 매장을 언급한 것은 이제 자신의 죽음과 매장을 앞두고 있기 때문일 것이며, 또한 야곱은 라헬의 아들 요셉이 낳은 두 손자를 라헬의 아들로 입적시키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생을 잘 마무리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노년을 고집과 불평과 노욕으로 망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아쉬운 것은 아쉬운 대로 받아들이고, 마지막을 거룩한 소망과 헌신적인 사랑과 깊은 감사로 보낼 수 있도록 끝까지 경성합시다. 값지게 생을 마무리할 수 있는 것이 복된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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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47-02) 

 


애굽에 새로운 기근 정책을 편 요셉

창세기 47장 13-26절


 무능력하거나 사심 가득한 지도자만 만나고 백성들을 살필 줄 아는 지도자를 만나지 못할 때, ‘복이 없다’는 말을 합니다. 지도자는 백성들을 곤경에서 건져줄 실제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성취하는 자입니다. 요셉을 볼 때 주를 따르는 우리는 세상에 무엇을 주어야 합니까?

  

기근이 심각해지자 요셉은 저장해둔 곡식을 팝니다. 요셉은 이미 흉년 첫해부터 애굽 백성과 가나안 일대에 식량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41:54 이하). 결과적으로 애굽의 모든 현금이 마지막 동전까지 거두어져 국고에 쌓였습니다. 그것은 도두 바로의 재산으로 귀속됩니다(14). 이렇듯 그는 판매 대금을 충성스럽게 바로에게 바칩니다. 이것은 요셉이 언제니 주인에게 정직했으며 충성을 다한 인물임을 보여줍니다.

  

심화된 기근과 요셉의 새로운 국정 계획(13-17)

자연 재해 앞에 인간은 무기력합니다. 아무리 애굽과 같이 강한 강대국이라 할지라도 기근 앞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겉으로는 바로의 종이 되고 토지 역시 바로의 소유가 되었지만, 하나님의 사람 요셉을 통해 애굽이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자연재해, 전염병들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13기근이 더욱 심하여 사방에 먹을 것이 없고 애굽 땅과 가나안 땅이 기근으로 황폐하니 14요셉이 곡식을 팔아 애굽 땅과 가나안 땅에 있는 돈을 모두 거두어 들이고 그 돈을 바로의 궁으로 가져가니 15애굽 땅과 가나안 땅에 돈이 떨어진지라 애굽 백성이 다 요셉에게 와서 이르되 돈이 떨어졌사오니 우리에게 먹을 거리를 주소서 어찌 주 앞에서 죽으리이까 16요셉이 이르되 너희의 가축을 내라 돈이 떨어졌은즉 내가 너희의 가축과 바꾸어 주리라 17그들이 그들의 가축을 요셉에게 끌어오는지라 요셉이 그 말과 양 떼와 소 떼와 나귀를 받고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되 곧 그 모든 가축과 바꾸어서 그 해 동안에 먹을 것을 그들에게 주니라(13-17)

더욱 심각해진 가뭄과 식량난이 상세히 묘사됩니다. 3년째 가뭄으로 애굽 땅과 가나안 땅은 황무지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이때 아마 이미 구상해 놓은 치밀한 계획을 단계별로 실천에 옮깁니다. 그것의 최종 목표는 애굽 토지의 국유화입니다.

그는 3단계로 이 일을 진행합니다. (1) 백성이 현금으로 곡식을 사게 하여 모든 은전을 국고로 귀속시킵니다(13-14); (2) 백성이 가축으로 곡식을 사게 하여 모든 가축을 매입합니다(혹은 저당물로 삼는다; 15-17); (3) 백성이 몸과 농토로 곡식을 사게 하여 토지를 국유화하고 백성을 소작농으로 만듭니다(18-26). 사실 첫 번째와 두 번째 단계는 세 번째 단계를 성취하기 위한 전략적 과정에 불과합니다. 모든 것을 잃은 뒤에야 마지막에 백성이 토지를 팔면서 소작농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후에는 백성이 비록 소작농이지만 자신의 농업과 경제 활동으로 다시 돈을 벌고 가축도 소유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현금과 가축의 몰수는 최종적으로 토지를 국유화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요셉의 토지 국유화 시도와 그 과정이 그의 폭압적 정책인지, 아니면 선한 정책인지에 대한 평가는 뒤로 미루기로 합니다.

요셉은 창고를 열어 식량을 팔기 시작합니다. 그는 모든 판매 대금을 바로에게 바칩니다. 그는 여전히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는 종입니다. 현금이 동난 백성은 식량이 떨어지자 다시 요셉을 찾아와 간곡히 식량을 구했습니다(15-16). 그러나 요셉은 이번에는 백성이 기르는 가축을 요구했습니다. 백성은 모든 가축을 현금 대신 지불하고 그 해를 버틸 식량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백성의 가축이 단지 담보물로 저당 잡혔을 수도 있습니다. 은전과 토지는 요셉이 모두 바로에게 돌렸다는 말이 있으나 가축의 경우 그것이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마 가축은 고기와 우유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농사를 비롯한 다양한 생산 활동과 일상생활에 필수적이었기에 저당물로 잡힌 채로 계속 키우거나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렇게 해서 요셉은 한 해 동안 비축해둔 식량을 판매하여 공급함으로써 백성의 생명을 보존하며 ‘이끌었다.’(나할;17).

 

애굽 전 토지를 국유화하는 요셉(18-22) 

성도들은 세상의 복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세우신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성실로 모든 사람들을 섬겨야 합니다. 요셉의 지혜로운 통치는 모두에게 생명과 복이 되었습니다. 사람을 살리고 곤경에 처한 자들을 도와주고 약한 자들의 처지를 살펴야 합니다. 사심을 버리고 지혜와 성실을 다해야 합니다.

18그 해가 다 가고 새 해가 되매 무리가 요셉에게 와서 그에게 말하되 우리가 주께 숨기지 아니하나이다 우리의 돈이 다하였고 우리의 가축 떼가 주께로 돌아갔사오니 주께 낼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아니하고 우리의 몸과 토지뿐이라 19우리가 어찌 우리의 토지와 함께 주의 목전에 죽으리이까 우리 몸과 우리 토지를 먹을 것을 주고 사소서 우리가 토지와 함께 바로의 종이 되리니 우리에게 종자를 주시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며 토지도 황폐하게 되지 아니하리이다 20그러므로 요셉이 애굽의 모든 토지를 다 사서 바로에게 바치니 애굽의 모든 사람들이 기근에 시달려 각기 토지를 팔았음이라 땅이 바로의 소유가 되니라 21요셉이 애굽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의 백성을 성읍들에 옮겼으나 22제사장들의 토지는 사지 아니하였으니 제사장들은 바로에게서 녹을 받음이라 바로가 주는 녹을 먹으므로 그들이 토지를 팔지 않음이었더라(18-22)

사람들은 한 해를 그렇게 버텼으나 가뭄은 새해에도 지속되었습니다. 현재 이것이 가뭄 몇 년 째 상황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백성은 이제 식량을 구입할 재원이 모두 떨어졌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노동력과 농토를 내놓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현재 식량난으로 미래를 대비해야 하는 곡식의 종자까지 다 먹어 치운 상태입니다. 가뭄이 끝나면 심을 종자마저 없기에 그들은 종자를 달라고 요청합니다(19).

언제든 비가 오면 씨를 심어야 밭이 황폐화하지 않고 살아날 것입니다. 요셉은 결국 애굽의 모든 농토를 사들여 바로에게 바쳤습니다. 21절의 의미는 설명이 필요합니다. 마소라 본문을 따라 요셉은 애굽 끝에서 끝까지 모든 백성을 도시들로 이주시켰습니까? 그렇다면, 광활한 농토에서 농사는 누가 짓습니까? 70인역은 이것을 백성이 국가의 노예로 전락되었다는 뜻으로 번역했으며 이러한 해석은 앞서 백성이 자신들을 바로의 종으로 팔겠다고 말한 것과 잘 어울립니다. 따라서 애굽 땅 전역의 백성이 ‘종들이 되었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애굽 모든 농부는 국가에 귀속된 소작농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단지 제사장들은 바로에게서 급여를 받았기에 그들은 토지를 팔 필요가 없었습니다.

 

요셉이 세운 애굽 토지법(23-26)

우리는 주님을 따르도록 부름 받았지만, 큰 일을 하도록 부름받은 것만은 아닙니다. 기회가 되어 높은 자리에 올라서 나라를 섬길 수도 있지만, 서민들로서 자신의 일터와 가정에서 하나님과 사람들을 섬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각자의 그 자리에서 누군가에게 생명과 복이 되어야 합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지혜로 애굽에 새로운 토지법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3요셉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늘 내가 바로를 위하여 너희 몸과 너희 토지를 샀노라 여기 종자가 있으니 너희는 그 땅에 뿌리라 24추수의 오분의 일을 바로에게 상납하고 오분의 사는 너희가 가져서 토지의 종자로도 삼고 너희의 양식으로도 삼고 너희 가족과 어린 아이의 양식으로도 삼으라 25그들이 이르되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고 바로의 종이 되겠나이다 26요셉이 애굽 토지법을 세우매 그 오분의 일이 바로에게 상납되나 제사장의 토지는 바로의 소유가 되지 아니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니라(23-26)

요셉은 전 농토를 국유화한 다음 농부들에게 종자를 배급하여 뿌리도록 합니다. 아마 이것은 드디어 가뭄이 끝난 상황을 가리킬 것입니다. 요셉은 새로운 조세법을 마련하여 시행령을 내립니다. 백성은 수확의 1/5을 국가에 상납해야 하며 남은 4/5는 그들이 소유할 수 있습니다. 애굽 백성은 ‘주께 은혜를 입었다’는 말로 1/5의 납세에 대한 만족감을 표시하며 기꺼이 바로의 소작농이 되겠다고 자청합니다(25). ‘애굽인들은 요셉을 독재자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구세주로 간주합니다(45:7; 47:15,19을 보라)’.

요셉은 제사장의 농토를 제외하고 백성의 농토에서 수확된 생산물의 1/5을 바로에게 바치는 새로운 애굽 토지법을 마련했으며 이 법이 저자의 시대인 ‘오늘날’까지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이 저자의 ‘오늘날’의 시점에 대해서는 오경의 저작설과 맞물려 여러 견해들로 나뉩니다.

비평학자들은 애굽의 토지 제도가 요셉 이야기에 삽입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요셉 이야기의 역사성에 대한 논쟁과는 별도로 이러한 애굽 토지 제도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은 분분합니다. 드보(R. de Vaux)는 이 배경을 애굽의 영향으로 왕권을 절대시하여 백성에게 중노동을 시키며 과도한 세금을 거둔 주전 10세기의 솔로몬 시대로 추정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 배경의 정확한 시기에 대한 논쟁과는 별도로 고대 애굽에서는 거의 전 시대에 걸쳐 제사장의 토지를 제외한 모든 영토가 바로와 공공기관의 소유였으며 사유지는 거의 없었다는 것은 명백하다고 말합니다.

흥미롭게도 애굽에서 토지의 소유권이 국가로 넘어가는 과정은 구약 이스라엘에서 토지의 사용권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는 과정과 약간 차이가 나지만 병행을 이룹니다. 참고로 구약 이스라엘에서는 토지의 소유권은 결코 찬탈될 수 없으며 잠시 사용권만이 넘어갑니다. 어떤 사람이 빚을 져갚을 돈이 없으면 빚을 채울 때까지 채권자에게 단기적인 종이 되어 최대 6년간 노동력을 제공합니다(출 21:2-11; 신 15:1-18). 빚이 과도하면 땅이 채무자에게 저당 잡혀 일시적으로 넘어갑니다(레 25:25-34; 그러나 희년에는 모든 땅이 원주인에게 돌아온다). 땅값으로 빚을 충당하기 부족하기 부족하면 최종적으로 채무자는 채권자의 장기적인, 혹 종신 노예가 되어 빚을 감당해야 합니다(레 25:35-54; 그러나 희년에는 모든 노예가 사면됩니다). 또한 애굽 전 국토가 바로의 소유인 것과 이스라엘의 토지는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이 병행을 이룹니다. 말하자면 둘 다 사유지가 허용되지 않은 채 애굽 백성은 바로의 소작농이며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소작농입니다. 애굽 농부들은 수확의 1/5을 바로에게 바쳤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십일조(1/10)를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참고로 랍비들을 따르는 유대교 전통에서는 신명기 12장의 십일조는 민수기 레위기의 십일조와 별개로 결국 제2의 십일조가 존재하므로 이스라엘도 십의 이조, 즉 1/5를 성소에 바쳤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으며 신명기의 십일조는 궁극적으로 민수기의 십일조와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애굽에서는 제사장만이 유일하게 사유지가 허용되고 국가로부터 봉급을 받는데, 이스라엘에서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농토가 부여되지 않고(단지 레위인에게 일부 목초지만 제공된다) 백성의 십일조로 생계를 유지합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자신의 권력욕과 야망을 위해 폭압적인 토지법을 마련했습니까? 그래서 요셉 역시 어쩔 수 없는 죄인입니까? 본문은 백성의 반응과 이 법이 도출하는 최상의 결과를 통해 정반대의 평가를 내리는 것이 분명합니다. 요셉의 토지법은 레위기 25장의 희년법과 토지법의 그림자요 암시일 수 있습니다. 애굽의 실제적인 통치자는 바로가 아닌 요셉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 즉 신적 지혜에서 기원한 정책을 가지고 국정을 이끕니다. 그에게 통치의 지혜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따라서 애굽에서 요셉을 통해 일시적으로 신정국가의 통치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의 토지 개혁은 레위기 희년법의 전조로서 바로 신정국가의 실현이었습니다. 바로는 요셉의 중재를 통한 하나님의 통치 아래 놓인 대리 통치자일 뿐입니다. 또한 무엇보다 바로가 받은 축복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셨던 바 그들의 후손을 통해 열국이 복을 누릴 것이라는 약속의 성취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보내 위기에서 백성을 건져주시고 나은 삶의 조건을 부여하십니다. 애굽 백성들의 생명도 소중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정책 입안자들에게 주를 경외하는 마음과 백성에 대한 사랑을 주셔서 사람들의 삶을 살리는 정책을 펼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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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46-01)

 


애굽으로 이주한 이스라엘의 가족

창세기 46장 1-27절


야곱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머물러야 합니까? 기근을 피해 아들이 부르는 애굽으로 내려가야 합니까? 우리는 지금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이 우리를 뜻밖의 여정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예측할 수 없는 하루하루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이 장면은 요셉 이야기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시는 최초이자 유일한 사례입니다(2). 이스라엘과 야곱의 이름이 교대로 등장합니다. 해설자는 그를 이스라엘로 언급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야곱으로 부르십니다. 이스라엘은 대체로 그의 민족적이고 공식적인 특징을 드러낼 때 사용되며, 야곱은 대체로 개인적이고 가족적인 특징에 초점을 맞춥니다. 5절에서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자기들의 아버지 야곱을 태우고’라고 이름 사용법의 차이를 잘 보여줍니다.

 

애굽 땅에서 성취될 큰 약속(1-4)

삶의 중요한 결정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중요한 방식 중 하나는 그분께 홀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즉 기도하고 하나님께 행해야 할 바를 정확히 보여주시도록 간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으로 하여금 애굽으로 이주하는 데 대한 학식을 주시고 그는 이제 떠날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1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니 2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3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4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1-4)

야곱은 가족을 데리고 애굽으로 출발합니다. 야곱의 가족은 지금 헤브론에 거주하고 있습니다(35:27; 37:14). 그는 그곳을 떠나 남쪽으로 이동하다 브엘세바에 이릅니다. 브엘세바는 아브라함과 이삭 가족의 중요한 거점지 중 하나였으며 그들은 각각 거기서 예배를 드렸습니다(21:31-33; 26:23-25). 바로 그 장소에서 이제 야곱이 하나님께 제사를 올립니다. 하나님께서 그날 밤에 야곱에게 이상 중에 나타나시어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하십니다. 앞서 자신들의 조상들에게 주셨던 격려 말씀의 반복입니다(15:1;26:24). 야곱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에 다시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시어 그를 격려하시며 동행을 약속하십니다.

여기서 야곱이 희망의 땅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더 이상 두려워할 이유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거동이 불편한 연약한 노인뿐 아니라 누구에게든 미지의 땅으로 떠나는 여행은 그 자체로 언제나 불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야곱의 가족은 애굽에서 큰 민족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3).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방 땅이 후손의 번성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는 씨의 배양지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다고 그를 안심시키시면서 ‘반드시’,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가나안에 올라오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44). 여기서 물론 ‘너’는 야곱이 아닌 야곱의 후손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귀환은 그의 죽음 후 400년의 세월이 흐른 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죽은 후에 그의 시신이 가나안 땅에 운송되어 묻힌다는 점에서 이 선언은 야곱 자신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50:5-14). 그가 죽을 때는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그의 눈을 감겨줄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이 애굽에서 앞으로 17년의 여생을 편안히 살다죽을 것을 의미합니다(47:28).

 

애굽으로 떠나는 야곱의 가족(5-7)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할 일을 명하셨을 때, 우리는 지체없이 행해야 합니다. 우리는 즉시 하나님께 순종하여 그분의 뜻대로 속히 행해야 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후에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신속하게 순종했습니다.

5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날새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바로가 그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에 자기들의 아버지 야곱과 자기들의 처자들을 태우고 6그들의 가축과 가나안 땅에서 얻은 재물을 이끌었으며 야곱과 그의 자손들이 다함께 애굽으로 갔더라 7이와 같이 야곱이 그 아들들과 손자들과 딸들과 손녀들 곧 그의 모든 자손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5-7)

애굽이 마치 노아의 방주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생명을 보존코자 노아가 그의 가족과 모든 동물을 방주로 이끈 것처럼 야곱은 그의 가족과 모든 가축을 애굽으로 이끕니다. ‘이스라엘 아들들’이 아버지와 자신들의 아내와 자녀들을 수레에 태웁니다. 그리고 가축들과 모든 재물들을 신고서 애굽으로 떠납니다. ‘이스라엘 아들들’, 즉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통상적인 호칭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이 표현은 다분히 의도적이며 축소판 이스라엘 민족의 애굽 이주와 미래의 애굽 탈출을 암시적으로 가리키고 있습니다. 참고로 여기서 야곱에게는 디나 외의 여러 딸들과 손녀딸들이 있음이 다시 확인됩니다(7).

 

야곱 가족의 목록(8-27)

전혀 만나지 못한 어려운 상황은 변화는 적응하기도, 짐작하기도 어렵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사고의 전환과 변화에 대한 적응, 신속한 결단과 행동을 요구합니다. 상황을 통해 뜻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믿고 변혁과 성숙의 계기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뜻이 있음을 믿고 두려움 없이 나가야 합니다.

8애굽으로 내려간 이스라엘 가족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야곱과 그의 아들들 곧 야곱의 맏아들 르우벤과 9르우벤의 아들 하녹과 발루와 헤스론과 갈미요 10시므온의 아들은 여무엘과 야민과 오핫과 야긴과 스할과 가나안 여인의 아들 사울이요 11레위의 아들은 게르손과 그핫과 므라리요 12유다의 아들 곧 엘과 오난과 셀라와 베레스와 세라니 엘과 오난은 가나안 땅에서 죽었고 베레스의 아들은 헤스론과 하물이요 13잇사갈의 아들은 돌라와 부와와 욥과 시므론이요 14스불론의 아들은 세렛과 엘론과 얄르엘이니 15이들은 레아가 밧단아람에서 야곱에게 난 자손들이라 그 딸 디나를 합하여 남자와 여자가 삼십삼 명이며 16갓의 아들은 시뵨과 학기와 수니와 에스본과 에리와 아로디와 아렐리요 17아셀의 아들은 임나와 이스와와 이스위와 브리아와 그들의 누이 세라며 또 브리아의 아들은 헤벨과 말기엘이니 18이들은 라반이 그의 딸 레아에게 준 실바가 야곱에게 낳은 자손들이니 모두 십육 명이라 19야곱의 아내 라헬의 아들 곧 요셉과 베냐민이요 20애굽 땅에서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요셉에게 낳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이요 21베냐민의 아들 곧 벨라와 베겔과 아스벨과 게라와 나아만과 에히와 로스와 뭅빔과 훕빔과 아릇이니 22이들은 라헬이 야곱에게 낳은 자손들이니 모두 십사 명이요 23단의 아들 후심이요 24납달리의 아들 곧 야스엘과 구니와 예셀과 실렘이라 25이들은 라반이 그의 딸 라헬에게 준 빌하가 야곱에게 낳은 자손들이니 모두 칠 명이라 26야곱과 함께 애굽에 들어간 자는 야곱의 며느리들 외에 육십육 명이니 이는 다 야곱의 몸에서 태어난 자이며 27애굽에서 요셉이 낳은 아들은 두 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가 모두 칠십 명이었더라(8-27)

야곱과 그의 후손들을 이끌고 애굽으로 간 사람이 야곱이었다는 사실(7)을 있습니다. 요점은 야곱이 친히 전 가족을 이끌고 애굽으로 이주했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한 사람도 남겨두지 않고 모두 다 데리고 떠났습니다. 그는 가족 전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고 확신했습니다.

(1) 레아와 실바의 후손들(8-18절)

이스라엘의 가족(‘이스라엘의 아들들’) 명부가 제시됩니다. 아래에 제시된 <도표>를 참고해 보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이스라엘 아들들’이라는 의도적인 표현이 사용됩니다. 레아의 가족은 딸 디나를 포함하여 총 33명으로 집계됩니다(15).

그러나 이 숫자는 혼동을 일으킵니다. 신학자 웬함은 총계 33명은 남자만 계수한 숫자로 디나는 제외하고 사망한 엘과 오난을 포함한 숫자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런 셈법은 15절에 ‘남자와 여자가(아들들과 딸들이) 합하여 33명이다’라는 진술에 들어맞지 않습니다. 디나는 의도적으로 명부에 추가되며, 또한 그 외에도 아셀의 딸 세라가 명부에 포함되므로(17) 디나를 제외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만일 디나와 사망한 엘과 오난이 모두 포함되면 34명입니다. 반면에 만일 사망한 엘과 오난을 제외하고 디나가 계수되었다면, 레아를 포함해 총 32명입니다. 이에 대해 해밀턴은 저자가 야곱을 첫 아내 레아의 가족에 집어넣음으로써 33명이 되었다고 추론하지만 억지스럽습니다. 월키는 이것은 사본상의 문제로 10절의 히브리어 ‘오핫’이 ‘스할’의 철자와 비슷해 발생한 서기관의 실수로 본문에 들어왔을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오핫이 70인역뿐 아니라 병행본문인 민수기 26:12-13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오핫이 제외되고 엘과 오난이 포함되면 총계는 33명으로 본문의 숫자와 일치합니다. 어떤 해결책을 따르든지 창세기의 야곱 자손 목록은 의도적으로 70명에 맞추고 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 명부는 레아 후손 33명, 실바 후손 16명, 라헬 후손 14명, 그리고 빌하 후손 7명으로 70명을 채웁니다.

이 명부와 병행되는 명부가 민수기 26장과 역대상 4장에 나타나는데 이름들의 차이 뿐 아니라 무엇보다 숫자에서 차이가 두드러집니다. 현재의 명부에서 숫자는 분명히 병행 본문들의 명부와 달리 의도적으로 10명에 맞추기 위해 별도로 선별되었습니다. 저자는 의도적으로 여종들의 후손들 숫자보다 라반의 두 딸 레아와 라헬의 후손들 숫자를 두 배로 만듭니다. 또한 여러 딸과 손녀들이 있음에도(7; 37:35) 두 명만을 특별히 명부에 올리는가 하면, 어떤 경우 손자들을 명부에 올려 숫자를 맞춥니다. 디나와 마찬가지로 아셀의 딸 세라도 특별한 여성이었던 것으로 추론됩니다(민 26:46; 대상 7:30). 또한 아래 설명하듯이 젊은 베냐민의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많은 아들들의 등록은 불합리해 보입니다. 따라서 이 명부는 신학적인 의도로 70명의 숫자를 채우고 있습니다. 숫자 7과 그것의 배수들이 이 목록에서 특징적으로 반복됩니다. 참고로 70명의 후손은 창세기 10장에서 노아 후손이 흩어져서 세운 70개의 열국 목록과 대비됩니다. 분명히 70명의 야곱의 후손은 70열국에 대응하는 언약 백성의 집합을 상징합니다.

(2) 라헬과 빌하의 후손들(19-27)

베냐민의 사례는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는 아직 30대 청년입니다. 따라서 그에게서 이미 10명이나 되는 아들들이 이미 태어났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아마 베냐민의 아들들 대부분은 애굽에서 태어났을 것입니다. 저자는 애굽으로 내려갈 때 인원의 총계를 며느리들을 제외하고(어머니들도 제외됨) 66명으로 명시합니다(26). 아마 사망한 엘과 오난이 제외되고, 이미 애굽에 있는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제외한 숫자로 보입니다. 다시 애굽에 정착한 야곱 가족의 총계가 70명으로 집계됩니다. 그러나 이 총계는 앞서 언급된 셈법과 더불어 다소 복잡한 계산상의 문제가 연루되어 있습니다. 한편, 사도행전 7:14에서 스데반은 애굽에 내려간 숫자를 75명으로 명시합니다. 스데반의 75명은 70인역을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70인역은 요셉의 아들을 두 명이 아닌 9명으로 크게 늘려 총계 75명으로 만듭니다. 요셉은 이후에도 분명 애굽에서 여러 아들을 낳았을 가능성이 크므로 스데반의 숫자가 잘못되었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가나안을 떠나는 것이 기업을 잃어버리는 일도, 약속을 버리는 행위도 아닙니다. 그것은 약속 성취를 위한 과정입니다. 코로나가 가져온 변화에 개인과 공동체 모두 어렵지만, 크신 하나님의 뜻을 믿으며 수용하고 기대해야 하겠습니다. 근본을 찾고, 본질을 회복하는 기회가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모친 후손 명단과 숫자 총계
레아 르우벤 하녹, 발루, 헤스론, 갈미 5 33명
시므온 여무엘, 야민, 오핫, 야긴, 스할, 사울 7
레 위 게르손, 그핫, 므라리 4
유 다 엘(사망), 오난(사망), 셀라, 베레스(헤스론,하물), 셀라 6
잇사갈 돌라, 부와, 욥, 시므론 5
스블론 세렛, 엘론 얄르엘 4
디나(딸)   1
실바 시뵨, 학기, 수니, 에스본, 8 16명
아셀 임나, 이스와, 이스위, 브라아(헤벨,말기엘), 세라(딸) 8
라헬 요셉 므낫세, 에브라임 3 14명
베냐민 벨라, 베겔, 아스벨, 게라, 나아만, 에히, 로스, 뭅빔, 훕빔, 아릇 11
빌하 후심 2 7명
납달리 야스엘, 구니, 예셀, 실렘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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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45-02)

 


 애굽으로 이사한 이스라엘

창세기 45장 16-28절 


요셉은 자신을 노예로 부렸던 바로와 그 왕국에 선을 베풀었습니다. 형들에 대한 증오와 보복 감정에 휩싸이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선대했습니다. 그의 선함은 하나님께 대한 깊은 신뢰와 믿음에서 비롯된 거이었습니다. 그의 선한 삶이 불러온 결과는 무엇입니까?

 

왕실 전역에 문제-의 방문객들이 요셉의 형들이라는 소식이 퍼졌습니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은 모두 기뻐했습니다. 왕실에서 맞은 큰 경사와 어울리게 ‘좋다, 선하다’를 뜻하는 어근 ‘토브’가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좋았다’는 ‘아름다운 것’, ‘좋은 것’ 혹은 ‘아름다움 물품’, 바로와 온 신하들이 보인 기쁨의 반응은 요셉이 애굽에서 얼마나 큰 신임을 받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야곱 가족의 이주를 지시하는 바로(16-20)

분리와, 다툼과, 분열은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이런 것들은 관련 당사자들은 물론 다른 사람들까지도 마음을 상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화해를 하게 되면 다른 사람들도 우리와 함께 기뻐하게 됩니다. 화해를 이룬다는 것은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강한 증거가 됩니다.

16요셉의 형들이 왔다는 소문이 바로의 궁에 들리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기뻐하고 17바로는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에게 명령하기를 너희는 이렇게 하여 너희 양식을 싣고 가서 가나안 땅에 이르거든 18너희 아버지와 너희 가족을 이끌고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애굽의 좋은 땅을 주리니 너희가 나라의 기름진 것을 먹으리라 19이제 명령을 받았으니 이렇게 하라 너희는 애굽 땅에서 수레를 가져다가 너희 자녀와 아내를 태우고 너희 아버지를 모셔 오라 20또 너희의 기구를 아끼지 말라 온 애굽 땅의 좋은 것이 너희 것임이니라(16-20)

요셉의 형제들과의 상봉 소식은 궁중에 퍼졌으며 바로와 그의 신하들도 기뻐했습니다. 바로는 요셉을 불러 즉시 요셉 가족을 돕기 위한 명령을 하달합니다. 그는 요셉이 앞서 약속한 가족들의 초청과 그들의 생계 지원을 최종 승인합니다. 나아가 그는 이집트 땅 최고의 것들을 제공하겠다고 말합니다. 국정의 최종 결정권자는 분명 바로였기에 이런 중대한 결정은 그의 재가 없이 집행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 월키는 바로의 선심은 요셉의 보고를 들은 후 그것을 승인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요셉의 보고 장면이 서사에 전혀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요셉과 무관하게 애굽을 구한 영웅의 가족에 대한 마땅한 예우로 스스로 판단하여 내린 독자적인 지시입니다. 그러나 항상 서사는 자세한 내용을 생략하고 불필요한 곁가지는 잘라내는 특징을 갖습니다. 서사의 목적과 흐름상 요셉이 바로에게 자초지종을 전달한 내용은 불필요했을 뿐입니다.

바로는 양식을 나귀에 싣고 가나안에 돌아간 뒤 즉시 그들의 아버지와 함께 온 가족이 애굽으로 이주해 오도록 지시합니다. 그는 ‘애굽의 좋은 것’을 약속합니다. 역본들은 ‘좋은 땅’과 ‘좋은 것’으로 양분되어 있으나 ‘좋은 것’이 옳은 번역입니다.

18b절의 나라의 기름진 것이 이것과 병행을 이루며, 20절의 동일한 표현 또한 분명히 ‘애굽 땅의 좋은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바로는 특별히 수레를 준비시킵니다. 당시 수레는 주로 소가 끌었으며 두 개의 바퀴가 달려 있었습니다(민 7:3; 삼상 6:7,10). 수레는 특히 노약자의 장거리 여행을 위해 필수적이었습니다. 야곱은 매우 늙었고 아내들과 자녀들은 연약하기에 수레를 타야 합니다(19). 바로는 요셉보다 더욱 자상하고 세밀한 배려를 베풉니다.

요셉은 초대 대상에 여자와 아이들은 생략했으나 바로는 그들까지 모두 목록에 넣어 언급합니다. 또한 요셉은 좋은 목초지인 고센 땅을 약속하지만 바로는 애굽의 온갖 좋은 것들과 기름진 것, 즉 최상의 것들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들이 이주해 올 때 각종 생활 비품들을 두고 떠나는 것을 아까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바로는 야곱이 가족의 대이주를 망설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온 가족이 모든 것을 두고 고향을 떠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로는 그들의 재산을 두고 오는 것을 걱정하지 말라면서 안심시킵니다. 그들에게 애굽 땅에서 생산되고 제조되는 온갖 좋은 것들이 제공될 것입니다(20).

그러나 바로는 고센 땅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46:31-34과 47:3에 비추어 볼 때, 그가 아직 요셉 가족의 직업을 모르고 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아버지를 모시러 떠나는 형제들(21-24)

화해는 항상 후속 조치를 필요합니다. 우리는 요셉이 취한 행동을 본받음으로써 이 일을 행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와 반목했던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요셉이 이외에도 형제들에게 특별한 선물을 주었습니다. 선물은 재결합과 화해를 강화시켜 주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21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그대로 할새 요셉이 바로의 명령대로 그들에게 수레를 주고 길 양식을 주며 22또 그들에게 다 각기 옷 한 벌씩을 주되 베냐민에게는 은 삼백과 옷 다섯 벌을 주고 23그가 또 이와 같이 그 아버지에게 보내되 수나귀 열 필에 애굽의 아름다운 물품을 실리고 암나귀 열 필에는 아버지에게 길에서 드릴 곡식과 떡과 양식을 실리고 24이에 형들을 돌려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당신들은 길에서 다투지 말라 하였더라(20-24)

요셉은 바로의 지시대로 가나안으로 떠나는 이들을 위해 수레와 양식을 챙겼습니다. 덧붙여 바로의 지시를 넘어 그는 특별한 선물을 추가해서 보냅니다. 먼저 요셉은 형제들에게 옷 한 벌씩을 선물했습니다. 이 옷은 ‘겉옷’(시믈라)이며(41:14) ‘한 벌씩’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어구는 ‘(갈아입을) 여벌의 옷들’을 뜻합니다. 당시에 겉옷은 덮고 자는 담요 역할도 했기에 매우 중요한 물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점심의 연회에서 그랬던 것처럼(43:34) 베냐민에게 다시 특혜가 주어집니다. 요셉은 베냐민에게는 다섯 벌의 옷을 주면서 별도로 은 300을 선물합니다. 은 300은 구체적으로 300세겔(쉐켈)일 것입니다. 당시 화폐 단위였던 은 1세겔은 약 11.4그램이므로 은 300세겔은 3.4킬로그램 정도의 무게입니다. 요셉은 베냐민에게 두둑한 현금을 용돈으로 챙겨준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요셉 이야기에서 ‘옷'은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하는데 여기서 옷들이 다시 등장합니다. 형제 불화의 큰 원인 중 하나가 아버지의 편애를 대표한 요셉의 채색옷이었으며 나중에 형제들은 그 옷을 벗겨 피를 묻힌 뒤 아버지를 속입니다.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은 그의 옷을 강탈한 유혹녀에게 모함을 당합니다. 옥중에 갇힌 요셉이 나중에 극적으로 애굽 총리가 될 때 바로는 그에게 가장 권위 있는 옷을 입혔습니다.

여기서 요셉은 자신의 옷을 벗긴 형제들에게 옷을 선물합니다. 벗겨진 옷은 부서진 형제관계를 나타냈지만, 선물로 주어진 옷은 그들의 회복된 관계를 잘 보여줍니다. 은 또한 옷과 더불어 요셉 서사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 요셉은 은 20냥에 팔려갔으나 이제 그보다 15배가 넘는 넉넉한 은으로 베냐민을 채웁니다.

선물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수나귀 열 필과 암나귀 열 필에 아버지를 위한 선물을 잔뜩 싣습니다. 그것은 애굽의 ‘아름다움 물품’(투브), 즉 ‘좋은 것’인데 이집트의 특산품을 가리킬 것입니다. 그 나귀들에는 또한 풍성한 음식과 식량이 실렸습니다. 이 나귀들은 그들이 끌고 온 나귀들에 추가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암수 각 열 마리는 열한 명의 형제들의 숫자와 맞지 않는데, 아마 이 경우에도 요셉이 베냐민을 편애하여 짐 수송의 부담에서 제외했을 수 있습니다.

요셉은 그들이 길에서 ‘다투지 말라’고 말합니다. 동사 ‘라가즈’의 부정명령은 ‘요동치 말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대부분의 번역과 주석가들은 이것을 여행 도중 형제간의 말다툼과 분쟁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지시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아마 이것은 형제간의 다툼과 갈등을 염려한 말이 아닐 것입니다.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 아무런 책임 공방이 불필요한 지금 형제들이 귀향길에 다툴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많은 유대 주석가들의 해석대로 이것은 여행 도중에 두려워하거나 떨지 말라는 지시로 이해됩니다. 특히 당시 장거리 약대 상들은 자주 산적 떼나 노상강도들의 공격을 받았는데, 요셉의 지시는 그것을 염려하지 말라는 의미인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 귀중품을 싣고 가는 그들을 위해 소수 정예의 경호원들을 딸려 보냈을 가능성이 큽니다. 물론 이것이 형제들의 말다툼을 염려하여 내린 명령일 수도 있습니다. 이제 요셉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아버지에게 알릴 때, 그들은 과거 자신들의 범죄를 고백해야만 했을 수 있습니다. 이때 책임 공방이 벌어질 수 있으며 노상에서 그들은 이 문제로 다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과거지사가 그들에게 더 이상 문제될 수는 없었을 것으로 추론됩니다.

 

요셉의 생존 소식을 들은 야곱(25-28)

이 세상에 가장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자식들끼리 사로 반목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들이 서로 화목하고 사랑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부모가 가장 기뻐하는 것 중의 하나는 형제들끼리 서로 화목하고 다시 연합된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이처럼 가족간의 화해가 가져오는 놀라운 결과는 부모의 마음을 소생케 하고 기쁨으로 가득하게 합니다.

25그들이 애굽에서 올라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아버지 야곱에게 이르러 26알리어 이르되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 애굽 땅 총리가 되었더이다 야곱이 그들의 말을 믿지 못하여 어리둥절 하더니 27그들이 또 요셉이 자기들에게 부탁한 모든 말로 그에게 말하매 그들의 아버지 야곱은 요셉이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기운이 소생한지라 28이스라엘이 이르되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하니라(25-28)

형제들은 가나안 땅에 무사히 도착하여 아버지 야곱에게 이 모든 사실을 알립니다. 요셉이 살아 있으며 더구나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다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 야곱은 놀라움으로 잠시 넋을 잃으며 그것을 믿지 못합니다. 그의 반응을 표현한 ‘어리둥절하다’의 동사 ‘푸그’는 구약에서 4회밖에 사용되지 않은 드문 동사인데 말문이 막히거나 무기력한 상태를 표현합니다.

야곱은 아들들의 말을 듣고 어안이 벙벙한 상태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이 가져온 엄청난 선물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요셉이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아들들의 말이 사실임을 알게 됩니다. 그의 기운이 소생했습니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야곱의 영/혼(루아흐)이 살아났다’를 뜻합니다. 아들들의 말을 듣고 야곱은 잠시 넋을 잃었으나 요셉이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그의 넋이 돌아옵니다. 그는 기쁨에 겨워 ‘족하도다’(라브)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자주 넉넉하다’, ‘만족스럽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는데(출 9:28; 민 16:3; 신 1:6;2:3), 여기서는 ‘이제 여한이 없다’로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참조. 공동번역; 새번역). 요셉을 잃은 야곱은 낙심하여 슬픔 중에 ‘내가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라고 했습니다(37:35).

또한 시므온이 볼모로 잡혀 있는 데다 베냐민까지 잃을지 모르는 상황이 되자 그는 가중된 슬픔 속에 스올로 내려가게 될 것을 한탄했습니다(42:38;44:29,31). 그러나 이제 상황이 역전되었습니다.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었으며 내려갈 곳은 스올이 아닌 식량이 넉넉한 낙원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을 베푸는 일은 매우 어렵습니다. 하지만 용서하고 선대하는 것만이 선한 결과를 불러옵니다. 악의에 찬 말과 행동으로 상처 받았습니까? 억울함을 아시고 상황을 선으로 바꾸어주실 하나님을 믿고 선대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을 따라 갚아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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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45-01)

  


자신을 헤쳤던 형제들과 대면한 요셉

창세기 45장 1-15절


참담한 고난을 겪은 인생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고백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사는 자만이 누군가를 변화시키는 영향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형들에게 새 삶의 지평을 열어주는 요셉을 보면서 하나님 백성이 가져야 할 믿음에 대해 고찰해 봅시다.

 

현재의 장면은 성경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들 중 하나입니다. 요셉이 드디어 자신의 신분을 밝힙니다. 유다의 긴 탄원을 들은 후 요셉은 더 이상 감정을 억누르지 못합니다. 앞서 그는 두 번 그들 앞에서 눈물을 감췄으나(42:24; 43:30) 세 번째 눈물은 더 이상 감출 수가 없습니다. 요셉은 신하들 앞에서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는데 이제 한계가 왔습니다. 그는 마음껏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신하들에게 퇴장을 명령합니다.

 

자신의 신분을 밝힌 요셉(1-3)

우리가 우리를 해친 사람, 우리에게 커다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대면해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든 사람과 화평하게 지내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사람과도 화해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물론 항상 화해가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화해의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1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 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 2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3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1-3)

유다의 탄원을 들은 요셉은 눈물을 더 이상 감출 수 없어 시중드는 모든 애굽 신하를 내보냅니다. 46:1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행동은 애굽인들에게 비밀을 지키기 위함은 아니었습니다. 애굽의 지혜문헌은 격한 감정을 감추는 것을 고상한 성품으로 칭하지만, 요셉은 감정의 솔직한 표현이 더 고상한 지혜임을 보여줍니다. 구약성경은 결코 인간의 원초적 감정을 억누르지 않습니다. 요셉의 울음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궁중의 사람들이 모두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요셉이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던 이유는 유다와 형제들이 자신의 친동생 베냐민을 위해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상상도 못한 충격적인 사실 앞에서 형제들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놀람을 표현한 동사는 예컨대, 무서운 전쟁 통에서 전신이 마비될 정도의 큰 두려움을 느낄 때 사용됩니다. 요셉이 자신을 드러낸 후 첫마디는 아버지의 안부를 묻는 것입니다. 유다가 아버지에 대한 염려를 장황하게 설명하며 베냐민의 석방을 탄원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무엇보다 아버지의 상태가 염려되었을 것이며, 또한 아마 요셉은 형제들이 연로하신 아버지의 상태에 대해 진실을 말하고 있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을지 모릅니다. 이때 요셉은 더 이상 야곱을 ‘너희의 아버지’로 칭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자마자 야곱을 ‘내 아버지’로 부르기 시작합니다.

 

요셉의 위대한 신앙고백(4-8)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끼치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을 용서하도록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그분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시리라고 경고하실 만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용서하기를 원하십니다.

4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6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7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4-8)

요셉은 형들을 향해 가까이 오라 말하면서 자신이 바로 형들이 팔았던 아우 요셉임을 밝힙니다.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는 말은 그가 요셉이라는 의심할 수 없는 증거입니다. 그 사실은 형제들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말문이 막힌 그들을 가까이 오라고 요청합니다. 통상적으로 인간관계에서 공간의 근접성과 심리적 친밀감은 비례합니다. 불편한 사람과는 심리적 물리적 공간의 간격이 큽니다. 더구나 대제국의 절대 권력자와 자그마한 가나안 지역에서 온 사람들과의 신분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장벽이 존재합니다. 요셉은 지금 그 장벽을 무너트리고 있습니다.

요셉은 그들을 향해 ‘근심하지 말고 한탄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안심시킵니다(5). 이 이중적 감정 표현은 그들의 죄책감과 그에 따른 보복에 대한 염려가 뒤섞인 심리적 상태를 반영합니다. 요셉은 그들을 안심시키면서 용서를 뛰어넘은 놀라운 경지의 신앙이 담긴 발언을 쏟아냅니다. 그것이 4중적으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들의 생명을 구하시려고 나를 이곳으로 보내셨습니다(5); 하나님이 당신들의 생명을 구해 이 땅의 남은 자로 남겨두시고자 먼저 나를 이곳에 보내셨습니다(7);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닌 하나님이십니다(8a); 나를 애굽의 총리로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8b).

요셉의 위대한 용서는 형제들의 진실한 회개에서 비롯되었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대한 인정과 고백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요셉은 장기간의 기근 속에서 아버지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먼저 애굽 땅에 보내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인간의 범죄마저 이용해 섭리하십니다. 이 땅에 2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도 5년의 연속적인 대기근이 남아 있습니다(6). 자신이 애굽에 노예로 팔려 온 것은 이 오랜 기근 동안 온 땅과 자신의 가족의 보존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난 일입니다.

요셉의 신앙고백은 기나긴 요셉 이야기의 핵심과 본질입니다. 요셉의 입술에서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개별적인 인생 여정과 집단적인 인간의 역사는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는 이끌어 가십니다. 요셉은 언제부터 자신의 역경의 인생을 이렇게 높은 신앙의 안목으로 해석할 수 있었습니까? 틀림없이 그가 형제들을 최초로 조우한 이후 2년 동안의 오랜 사색과 묵상 속에서 그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특히 구속사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보존의 섭리가 작용합니다. 흥미롭게도 현재의 대흉년 속에서 하나님의 보존의 섭리는 6장 이하의 대홍수 속 보존의 섭리와 비교됩니다. 대홍수 때에는 세상의 모든 물이 창궐했으나 현재의 대가뭄에서는 세상의 모든 물이 다 말라버렸습니다. 홍수가 왔을 때 하나님께서 노아의 가족을 보존했던 것처럼, 흉년이 닥칠 때 야곱의 가족을 보존하십니다. 홍수에서는 방주가 구원의 수단이었으나, 흉년에서는 요셉이 구원의 수단이 됩니다.

7절의 번역은 약간 수정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가족을 ‘남은 자’로 땅에 보존하기 위해 요셉을 애굽으로 먼저 보내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다. 이는 당신들을 위해 남은 자를 (그) 땅에 두시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을 살리시기 위함이다.’ 개역개정의 번역처럼, 과거의 학자들은 여기서 사용된 ‘쉬에리트’를 생존하여 살아남은 ‘후손’으로 해석하는 것을 선호했으나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큰 구원으로’의 의미에 대해서도, 이 어구는 ‘많은 생존자들을 위해’로 번역될 여지가 있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파라오의 아버지’로 칭합니다. 혈통적 관계가 아닌 ‘아무개의 아버지’라는 말과 비슷한 표현들이 구약에서도 종종 나타납니다(삿 17:10; 18:19; 왕하 6:21; 13:14). 그는 통찰력을 가지고 왕의 곁에서 그에게 중대한 조언을 하는 인물로서 보통 제사장이나 왕실 선지자들, 그리고 왕의 최측근입니다(삿 17:10; 18:19; 왕하 5:13; 6:21; 사 22:21), 바로의 아버지는 바로 자신의 신격화한 호칭인 ‘신의 아버지’와 동등한 표현으로 보입니다. 언뜻 무엄해 보이는 이 표현은 바로의 통치를 돕는 지혜로운 조언자를 뜻합니다.

 

가족의 이주를 요청한 요셉(9-15)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이 종종 우리 가족일 경우가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이웃, 친구, 동료 혹은 모르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우리를 해치고 잘못 대우하는 사람들과도 우리는 가능한 한 화평하게 지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참된 용서는 복수하지 않는 데서 그치지 않고 상대방의 이익을 도모하는 실천을 동반합니다.

9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아뢰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지체 말고 내게로 내려오사 10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머물며 나와 가깝게 하소서 11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과 아버지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나이다 하더라고 전하소서 12당신들의 눈과 내 아우 베냐민의 눈이 보는 바 당신들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내 입이라 13당신들은 내가 애굽에서 누리는 영화와 당신들이 본 모든 것을 다 내 아버지께 아뢰고 속히 모시고 내려오소서 하며 14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15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서야 요셉과 말하니라(9-15)

요셉의 말이 일방적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이는 서사적 편성에 따른 대화의 재구성이라기보다는 형제들의 말문이 막힌 상황에 따른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즉시 돌아가 아버지를 애굽로 데려오도록 요청합니다. 야곱은 지체 없이 모든 가족을 이끌고 애굽로 내려와야 합니다(9). 그는 여생을 절망과 비탄 속에서 살다 죽음의 장소인 스올로 내려갈 것이라고 말했지만, 이제 생명의 땅인 애굽로 내려갈 예정입니다. 그들을 위해 준비된 땅은 고센인데 이곳은 나일 삼각주의 동쪽에 위치한 초원 지대로 당시왕실이 위치한 수도와 매우 가까웠을 것입니다(10). 요셉은 향후 5년간 지속될 기근의 기간 동안 가족의 안전한 생존과 넉넉한 생활 지원을 약속합니다(11). ‘아버지를 봉양한다’는 말은 1차적으로 식량난을 겪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미이며, 그 외에도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없게 하겠다는 요셉의 배려가 깃들어 있습니다. 수년간 흉년이 지속될 예정이라면 야곱의 가족은 반드시 이주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기근이 끝난 후의 귀향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5년 후가 아닌 무려 400년이 지난 뒤에야 고향으로 복귀합니다. 현재 그들은 통역사 없이 자신들의 언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요셉이 특히 베냐민을 별도로 증인으로 내세우고 있는 이유는 분명히 그들에 대한 용서를 재확증 해주면서 그들이 안심하고 즉시 애굽으로 이주해오도록 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 야곱이 아들들의 말을 신뢰하기 위해서는 베냐민의 증언이 절대적이었을 것입니다.

발언을 마친 요셉은 베냐민과 더불어 서로 목을 껴안고 웁니다. 이어서 형들과 입을 맞추며 껴안고 울고 난 뒤 비로소 형들이 요셉에게 말을 건네면서 형제 사이의 진정한 소통이 시작됩니다. 본문은 요셉이 베냐민과는 목을 서로 껴안고 우는 반면, 형제들과는 단순히 키스를 나누며 울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다시 한 번 베냐민에 대한 요셉의 특별한 애정을 차별화하기 위함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뜨거운 형제애를 회복한 그들 모두가 서로 껴안으며 목 놓아 울었으리라는 추론은 충분히 정당합니다.


 요셉의 용서와 관용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끊임없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시선으로 자기 인생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참고 인내하며 자기 삶에 베푸신 하나님의 크신 인애를 묵상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로 사는 자만이 관용할 수 있고 변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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