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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48-01)


죽음을 준비하는 야곱

창세기 47장 27절-48장 7절


예외 없이 인생의 마지막에 다다릅니다. 가는 시간을 붙들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소소한 일들과 여가와 유흥으로 노후를 보냅니다. 수고하였기에 마땅한 보상입니다. 하지만 믿는 우리는 보다 값지게 생을 마무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황혼을 장식해야 해야 합니까?

 

혹독한 7년간의 가뭄이 끝나고 이집트는 평온을 되찾았습니다. 야곱 가족도 고센 땅에 잘 정착해서 안정을 찾았으며 호손이 번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애굽 땅으로 이주한 지 벌써 17년의 세월이 흘렀으며 야곱의 나이는 147세가 되었습니다. 비록 조상들의 수명에는 크게 못 미치나 그는 당시 이집트 문헌에 기록된 이상적인 수명인 110세를(Hamilton) 훌쩍 넘겨 살았습니다. 노후를 그는 요셉의 보살핌 속에 행복하게 보냈으며 안정된 삶 속에서 그의 자손이 크게 늘었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준비한 야곱(47:27-31)

사람은 죽음에 대해 어떻게 준비해야 합니까? 우리 모두는 죽습니다. 존재하는 이상 죽게 마련입니다. 죽음은 피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죽게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거듭해서 선언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야곱을 향해 ‘죽을 기한이 가까우니’(29)라는 말씀에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27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주하며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 28야곱이 애굽 땅에 십칠 년을 거주하였으니 그의 나이가 백사십칠 세라 29이스라엘이 죽을 날이 가까우매 그의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허벅지 아래에 넣고 인애와 성실함으로 내게 행하여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아니하도록 하라 30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 요셉이 이르되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31야곱이 또 이르되 내게 맹세하라 하매 그가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니라(27-31)

야곱이 고센 땅에 정착한 지 벌써 17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 그의 죽음이 임박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야곱은 가나안에서 요셉을 17년 동안 보살폈고, 이제 요셉이 애굽에서 야곱을 17년 동안 보살폈습니다. 그 사이 그의 후손은 크게 번성했습니다. 생육과 번성은 넓게는 창세기 1장의 창조와 홍수 이후 재창조에서 주어진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창조 명령의 성취이며 (1:28; 9:1,7), 특정하게는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에게 주었던 씨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입니다(28:3; 35:11). 특히 벧엘에서 야곱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이 씨의 번성 약속을 재확증하셨는데, 아래 야곱의 간증에서처럼 그것이 성취되는 중입니다(48:4). 그러나 이것은 이제 시작에 불과합니다. 출애굽기에서 보듯이 앞으로 이스라엘 민족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게 번성할 것입니다(출 1:7).

147세가 되어 죽을 날이 가까워진 야곱은 요셉을 불러 자신의 죽음을 준비시킵니다. 요셉에게 자신의 장례에 대한 유언을 남기고는 그에게서 이 유언의 확고한 실행을 위한 약속과 맹세를 받아냅니다.

‘은혜를 입었거든’이라는 아들의 호의를 구하는 말은 아버지에게 어울리지 않으며 그에게서 ‘인내와 성실함’을 요구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이러한 겸손한 부탁은 요셉의 총리로서의 위치를 예우하는 것이면서 또한 유언의 중대함과 간절함을 전달하기 위함일 수 있습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자신의 ‘허벅지 아래에 손을 넣고’ 맹세하도록 요구합니다. 분명히 ‘허벅지’는 성기에 대한 완곡어법입니다. 이것은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를 찾기 위해 자신의 종에게 맹세를 요구할 때 했던 행위와 동일합니다(24:2). 아브라함은 언약의 증표로 성기에 할례를 받았으며 성기는 씨의 번성을 위한 생식 기관입니다. 따라서 성기 주변 허벅지에 손을 대고 후손을 이어갈 며느리를 찾기 위한 기도와 맹세를 하는 것은 이해할 만합니다. 야곱이 그 행위를 반복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자신의 죽음 후 가나안 땅으로의 약속을 보장받기 위함입니다.

야곱의 유언은 자신이 죽으면 약속의 땅 조상의 묘지에 자신을 묻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묘지는 마므레 앞 막벨라 굴을 의미합니다(50:13). 야곱은 자신이 약속의 땅에 매장됨으로써 죽음 후에라도 그의 번성할 후손과 그 땅에서 함께 거주하는 가족이 되고자 합니다. 야곱의 후손은 모두 야곱의 몸(야레크)에서 나온 자들입니다(46:26; 출 1:5). 따라서 그의 야레크(허벅지)에 손을 대고 맹세하는 행위는 그의 야레크에서 나올 후손들과의 연계성을 확증하기 위한 것입니다.

맹세 의례가 끝나자 야곱은 ‘하나님께 경배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동사 ‘이쉬타후’는 단지 ‘그가 허리를 굽혔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야곱이 요셉에게 절을 한 것인지, 혹은 하나님께 경배를 드린 것인지 모호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가 기력이 없어 침대 맡에 거꾸러진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이 중대한 의례에서 하나님께 경배를 올리며 그 의례를 마무리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회상하는 야곱(48:1-4)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을 사랑하는 것에 기반을 둔 결혼은 진정한 사랑에 이르게 합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에 근거하여 결혼한 사람들은 진정한 사랑을 체험합니다. 진정한 사랑을 아는 사람은 임종 시에 자기가 사랑한 사람을 기억할 것입니다. 야곱의 임종에 즈음하여 요셉은 두 아들과 함께 급히 아버지 곁으로 달려왔습니다.

1이 일 후에 어떤 사람이 요셉에게 말하기를 네 아버지가 병들었다 하므로 그가 곧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함께 이르니 2어떤 사람이 야곱에게 말하되 네 아들 요셉이 네게 왔다 하매 이스라엘이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아 3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 4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1-4)

‘이 일 후에는’ 약간의 시간의 흐름을 표현합니다. 여기서는 아마 이전의 병상에 누운 장면과 시간의 간격이 크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요셉이 두 아들을 데리고 야곱을 찾은 것은 당시 관례대로 그의 임종 전에 두 아들로 하여금 할아버지의 마지막 축복을 받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요셉에게’ 야곱의 상태를 알립니다. 이것은 고센의 연로하여 병든 야곱과 궁중의 요셉 사이에 비상 연락망이 마련되어 있음을 암시합니다. 또한 아마 야곱의 병시중을 들었던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두 아들을 데리고 떠납니다. 여기서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순서는 출생 순서를 따릅니다(1). 그러나 야곱의 말에서 그 순서가 바뀌기 시작합니다. 두 아들은 흉년이 들기 직전에 태어났으며 흉년이 시작된 2년째부터 17년의 세월이 흘렀으므로 약 20세 정도로 추정됩니다(41:50; 47:28).

요셉의 도착 소식을 들은 이스라엘은 힘을 내서 침상에서 일어나 앉았습니다. 그는 요셉에게 자신의 짧은 간증을 말하며 그분께 받은 약속을 확인시킵니다. 그가 에서를 피해 밧단(=밧단아람)으로 가는 도중 하나님이 루스, 곧 벧엘에서 나타나셨습니다. 야곱은 거기서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두 가지 약속, 씨의 번성과 가나안 땅의 점유를 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 이삭이 야곱을 밧단아람으로 보낼 때, 그에게 베푼 축복이기도 합니다(28:3-4). 그의 후손은 반드시 이집트에서 번성하여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 그 땅을 차지할 것입니다. 복수의 민족(암밈), 즉 ‘많은 백성이 나게 할 것이다’(4)라는 말씀은 아마 12지파로 구성된 이스라엘 연합체의 출현을 가리킬 것입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입양한 야곱(48:5-7)

요즘 100세 시대를 맞이하면서 ‘웰빙’(well-being)못지 않게, 웰다잉(well dying)에 대한 관심도 많아집니다. ‘어떻게 살았느냐?’ 그것이 곧 ‘어떻게 죽느냐?’를 결정 합니다. 살아갈 동안 행복하고 즐겁게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의미 있고 복된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또한 중요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야곱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의 웰다잉을 준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5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6이들 후의 네 소생은 네 것이 될 것이며 그들의 유산은 그들의 형의 이름으로 함께 받으리라 7내게 대하여는 내가 이전에 밧단에서 올 때에 라헬이 나를 따르는 도중 가나안 땅에서 죽었는데 그 곳은 에브랏까지 길이 아직도 먼 곳이라 내가 거기서 그를 에브랏 길에 장사하였느니라(에브랏은 곧 베들레헴이라)(5-7)

이어서 야곱은 갑자기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양자 입적을 선언합니다.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손자의 입양이 매우 기이하고 불법적으로 보이지만, 멘델슨(I. Mendelsohn)과 같은 학자들은 고대근동의 우가릿에서 나온 아카드 법률 문서에서 그와 동일한 사례를 찾아냈습니다. 야곱은 여기서 장자 므낫세 대신 차남 에브라임을 먼저 언급합니다. 이것은 두 아들의 지위가 역전될 것임을 예고합니다. 요셉의 두 아들은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그 두 아들이 현재의 장남과 차남의 지위를 대체한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현재 야곱의 발언은 요셉에게 장자권을 부여하는 선언입니다.

이것은 15절에서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는’ 그의 기도를 통해서 확인됩니다. 요셉은 두 아들이 야곱에게 입적되어 결과적으로 두 배의 유산을 상속받습니다. 이것은 장자의 유산이 다른 형제들의 두 몫이라는 사실에 부합합니다(신 21:15-17). 역대기에 이 사실이 확정되어 있습니다: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하였느니라’(대상 5:1; 참조. 창 49:3-4). 차남 시므온과 레위의 경우 세겜에 대한 그들의 범죄로 인해 장자권 승계 자격이 박탈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49:5-6). 요셉은 야곱이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낳은 야곱의 첫 아들일 뿐 아니라 가족 전체를 살린 특별한 아들로서 레아가 낳은 그의 형들을 능가합니다.

요셉이 이후에 낳을 아이들은 요셉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70인역은 요셉의 아들의 명부에 현재의 두 아들 외에 일곱 명의 아들들의 이름을 더 올려 총 아홉 명으로 만듭니다. 6b절은 해석상의 문제를 야기합니다. 먼저 개역개정의 오역은 이것은 ‘그들의 형제들의(아헤헴) 이름으로’로 수정되어야 합니다. 먼저 이 표현에서 ‘그들’이 요셉이 나중에 낳은 아이들로 이해되면서, 이것은 그들이 ‘그들의 형제들 이름으로’ 요셉의 유산을 상속받는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그 아이들이 결국 에브라임과 므낫세 족속에 합류된다는 뜻입니다. 더 나은 해석으로 이것은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야곱의 아들로 입양됨으로써 이제 야곱의 아들들이 되었으며, 따라서 이제 ‘그들이 그들의 형제들의 이름과 더불어’, 즉 형제들과 더불어 야곱의 유산을 상속받는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어서 야곱은 사랑하는 아내라헬의 죽음과 장사에 대해 언급합니다. 그것은 가나안에서 요셉이 함께 겪은 일이기도 합니다. 밧단아람에서 20년의 세월을 보내고 귀환 도중 에브랏 근처에서 라헬이 베냐민을 출산하고 사망합니다(35:16-20). 야곱이 특별히 여기서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죽음과 매장을 언급한 것은 이제 자신의 죽음과 매장을 앞두고 있기 때문일 것이며, 또한 야곱은 라헬의 아들 요셉이 낳은 두 손자를 라헬의 아들로 입적시키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생을 잘 마무리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노년을 고집과 불평과 노욕으로 망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아쉬운 것은 아쉬운 대로 받아들이고, 마지막을 거룩한 소망과 헌신적인 사랑과 깊은 감사로 보낼 수 있도록 끝까지 경성합시다. 값지게 생을 마무리할 수 있는 것이 복된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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