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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48-02)

  


아들과 손자들에게 축복한 야곱

창세기 48장 8-20절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이들에 대한 뉴스를 듣곤 합니다. 재벌가 어린 자녀들이 태어나면서부터 거액의 주식과 부동산을 상속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씁쓸한 풍속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다른 가치와 삶의 방식을 좇는 이들입니다. 무엇을 물려주어야합니까?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을 보고 ‘이들은 누구냐?’고 묻습니다. 눈이 어두워진 노인의 입장에서 중요한 입양 의례에서 신분의 최종 확인을 위한 관례적인 질문으로 간주됩니다. 앞서 동일하게 눈이 어두워진 이삭도 변장을 하고 돌아온 야곱에게 동일한 질문과 더불어 신분을 확인하는 절차를 가졌으며(28:18) 뒤늦게 찾아온 에서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27:32).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하는 야곱(8-11)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구속하시고 또 지금도 인도하신 그분 안에서 인간으로서의 참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인정한다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바르게 세워가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행복이 하나님 안에 있고, 인생의 의미가 그 안에 발견된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후손들에게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8이스라엘이 요셉의 아들들을 보고 이르되 이들은 누구냐 9요셉이 그의 아버지에게 아뢰되 이는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들이니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그들을 데리고 내 앞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들에게 축복하리라 10이스라엘의 눈이 나이로 말미암아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요셉이 두 아들을 이끌어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니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입맞추고 그들을 안고 11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더니 하나님이 내게 네 자손까지도 보게 하셨도다(8-11)

야곱의 짤막한 양자 입양 의례가 시작됩니다. 눈이 어두워진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을 보고 그들이 누구냐고 묻습니다. 이로 인해 어떤 사람들은 현재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이 자리에 함께 있는 것을 모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편집 비평가들은 엉뚱해 보이는 이 질문이 편집의 결과라는 견해를 제시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은 입양 의례에서 필요한 형식적인 신분 확인 절차일 뿐입니다. 요셉은 그 두 아들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야곱이 에서를 만난 뒤 자신의 자녀들에 대해 했던 고백과 동일합니다(35:5;참조. 시 127편, 128편).

야곱은 요셉으로 하여금 그들을 앞으로 데리고 오라고 말합니다. 입양 의례와 더불어 그들에게 축복을 베풀기 위함입니다. 먼저 야곱은 그 두 아들에게 입을 맞추고 포옹을 한 뒤 덕담을 건넵니다. 살아생전 아들 요셉의 얼굴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상상도 못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요셉뿐 아니라 이제 그의 두 아들까지 보게 하셨습니다. 사르나(Sarna)는 여기서 입맞춤과 포옹을 단순한 인사가 아닌 양자 입양의 공식 절차로 이해합니다.

 

요셉의 두 아들의 장자권을 뒤집는 야곱(12-16)

참된 인생의 가치는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며, 진정한 인생의 깊이는 성취가 아니라 의미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목적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향하여 살도록 창조되었으므로 하나님을 인생의 목적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아는 지식과 그 계획을 우리의 삶을 통해 성취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야곱은 장자의 축복을 뒤집어 기도하고 있습니다.

12요셉이 아버지의 무릎 사이에서 두 아들을 물러나게 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고 13오른손으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왼손을 향하게 하고 왼손으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오른손을 향하게 하여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14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 15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16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12-16)

요셉은 두 아이들을 할아버지의 ‘무릎 사이에서’ 물러가게 한 뒤 그에게 엎드려 절을 올립니다. 입양 의례에서 아이를 무릎 사이에 두는 행위는 그것이 자궁으로부터의 탄생을 상징하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 요셉의 두 아들은 거의 20세의 성인이며 할아버지는 거동이 거의 힘든 병든 몸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야곱의 무릎 위에 앉았을 리가 없기에 분명 그의 무릎 곁에 서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무릎에서 물러갔다는 것은 양자 입양 의식이 끝났음을 의미합니다. 이때 요셉은 아버지 앞에 엎드려 절합니다(12). 현재의 입양 의례와 축복에서 두 사람은 더 이상 총리와 시민의 관계가 아닌 완전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입양된 두 아들을 위한 축복 의례가 시작됩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임종 직전 아버지의 장자권 축복을 포함할 것입니다. 요셉은 두 아들을 양손으로 취했는데, 오른손으로 에브라임을 붙들고 왼손으로 므낫세를 붙든 채 야곱에게 가까이 갔습니다(13). 따라서 므낫세가 야곱의 오른손 안수를 받는 위치에 서 있습니다. 성경에서 오른손은 긍정적이고 신적 권위를 지니며, 또한 그것은 영광과 구원의 손입니다(출 15:6,12; 신 33:2; 시 17:7; 20:6; 48:10; 신 11:29; 시 110:1; 마 25:33; 히 1:3). 그러나 야곱은 양손을 어긋나게 해서 그의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 위에 올렸습니다(14). 결국 서열상 장자인 므낫세의 머리에 그의 왼손이 놓임으로써 므낫세의 장자권이 에브라임에게 넘어갑니다. 이것은 야곱의 독단적인 결정에 의한, 그러나 분명히 이미 그에게 내려졌을 하나님의 지시에 따른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빈번하게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에 의해 장차남의 지위가 역전됩니다. 가인과 아벨(4:1-8); 야곱과 에서(27장); 세라와 베레스(38:27-30); 그리고 르우벤과 요셉. 순전히 인간적인 관점으로 보자면, 므낫세의 입장에서 이것은 얼마나 부당하고 억울한 일입니까? 그러나 빈번하게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결정하시고 인간에게는 단지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인간은 그것이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루며 모두에게 유익한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야곱은 ‘요셉을 위하여’ 두 아들을 축복합니다(15). 이는 요셉이 두 아들의 몫을 유산으로 받는 장자의 자격으로 그가 복을 받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의 아버지 이삭과 조부 아브라함은 항상 ‘하나님 앞에서 행하였습니다’(원문은 ‘섬겼다’ 아닌 ‘걸었다’, ‘행하였다’). 바로 그 하나님이 야곱의 ‘평생 동안’ 지금에 이르기까지 목자로서 그를 길러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를 건져주신 구속자(고엘) 셨습니다. ‘구속하다’를 뜻하는 동사 ‘가알’은 구체적으로 빚을 대신 갚아서 속박으로부터 사면시키는 행위를 말합니다(출 6:6; 레 25:25,26,30; 27:13,15; 특히 룻기의 핵심 동사로 2:20, 3:9 등). 야곱은 특별히 라반에게서 당한 속박을 염두에 두고 이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분이 모든 억울한 빚을 갚아주셔서 라반으로부터 자신을 해방해 주셨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또한 ‘(여호와의) 사자’로 칭합니다.(원문은 단순히 ‘사자’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여호와와 여호와의 사자의 구별이 사라진다는 것이 확인됩니다. 말하자면, 여호와는 자신의 사자를 보내시는데 그 여호와의 사자는 여호와의 구별된 존재로 나타나면서도 또한 놀랍게도 빈번히 그는 인간의 형상을 입고 온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야곱은 자신의 목자요 구속자이신 바로 그 하나님께 두 아들의 복을 빕니다.

복의 내용인 16절은 약간 수정이 필요한 모호한 오역입니다. 이것은 입양된 두 아들이 향후 자신을 이어서 아브라함과 이삭뿐 아니라 야곱 자신의 이름을 부르게 되길 원한다는 기원입니다. 또한 요셉은 그들이 이 세상에서 ‘물고기처럼’ 번성하도록 축복합니다.

 

에브라임이 장자가 되리라(17-20)

하나님의 주권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그렇지는 않아도 대개는 어려움에 처하게 되어 가족의 책임을 맡기는 데에 장자를 택하는 것이 관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심중을 아시며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사람을 택하시는 권한을 갖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장자를 택하지 않으실 때에는 사람은 그 분의 주권을 받아들여야 하며 자신의 판단과 계획을 겸손하게 포기해야 합니다.

17요셉이 그 아버지가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여 아버지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여 18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이니 오른손을 그의 머리에 얹으소서 하였으나 19그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아니하며 이르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20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너로 말미암아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네게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며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17-20)

야곱의 오른손이 에브라임에게 놓인 것을 본 요셉은 심기가 매우 불편했습니다. 동사 ‘라아’는 상당히 강한 감정적 불쾌감을 표현합니다. 요셉의 반감은 출생과 더불어 과거의 괴로움을 잊게 했던 큰 아들 므낫세에 대한 요셉의 애정이 매우 특별했음을 암시합니다.

어쩌면 그는 아버지의 눈이 어두워서 혼동을 일으킨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간파한 요셉은 즉시 야곱의 손을 붙들고 위치를 변경해 그의 실수를 교정하려 합니다(18). 하지만 야곱은 자신이 결코 실수를 한 것이 아님을 또렷하고 총명한 말로 확인해줍니다. 그리고 므낫세 또한 에브라임 못지않은 큰 민족이 될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에브라임의 복은 더 커서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룰 것이다.’ 이것은 해석하기 난해합니다. ‘민족들의 충만함’이란 어구는 여기에서만 사용되기에 더욱 해석하기 어렵습니다. 가장 무난하게 아브라함이 열국(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는 예언이(17:46) 여기서 에브라임에게 승계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장차 에브라임이 북쪽 지파들 중 가장 강력한 지파로서 북왕국의 모든 지파들을 자신의이 름으로 칭하게 만들게 될 것을 예고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참조. 사 7:5, 8-9; 렘 31:9; 호 4:16-17; 5:3; 7:1).

한편, 20절의 야곱의 축복 내용은 다음과 같이 수정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너(요셉)로 말미암아 축복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요셉)를 에브라임처럼, 그리고 므낫세처럼 만드시길 바란다’고 할 것이다.”

 

야곱이 요셉을 축복함(21-22)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장자를 택하지 않으시고 어린 자를 택하실 때에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법과 관습에 따르면 어린 자가 결코 더 큰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만약 그가 더 큰 축복을 받게 되면 그것은 그에게 거저 주어진 것입니다.

21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또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22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세겜 땅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21-22)

야곱은 요셉에게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시며 그로 하여금 약속의 땅으로 다시 돌아가도록 하실 것이라고 확신시켜 주었습니다(21). 야곱은 하나님께서 그와 항상 함께하셨기 때문에 그의 아들과도 항상 함께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야곱은 요셉의 후손이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갈 것을 재차 확증합니다. 그 땅에서 요셉의 후손은 다른 형제들보다 ‘세겜 땅’(혹은 ‘산마루’)을 하나 더(?) 받을 것입니다. 그 땅은 야곱이 아모리 족속에게서 빼앗은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가나안 사람들로부터 세겜 근처에 한 필지의 땅을 매입한 후 거기에서 제단을 쌓은 적이 있습니다(33:18-19).

또한 그 직후 시므온과 레위의 주도하에 야곱의 아들들은 세겜 성 사람들을 학살하면서 성을 노략했습니다(34장). 따라서 이 축복은 장차 가나안의 요충지인 이 세겜 땅이 다시 요셉의 몫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후대의 땅 분배에서 세겜이 에브라임에게 할당됨으로써 실현되었습니다.


 자녀에게 물질적 유산을 남겨주고 원하고, 더러는 인내심, 사랑, 개성, 배움, 꿈을 나며주고자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좋은 추억과 지혜, 건강, 바른 심성이나 습관을 꼽기도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남겨주기 원합니까? 믿음, 소망, 사랑이야말로 취상의 유산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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