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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49-02)

 


자녀들의 앞날을 예언하는 야곱(2)

창세기 49장 13-28절


야곱은 아들들의 행동가 성향, 분량대로 예언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예언대로이루십니다. 각 사람에게 삶의 책임을 부여하시고 성향에 맞는 역할도 주십니다. 나는 내 행동에 책임감을 갖고 삽니까? 내 성향과 은사로 공동체를 섬깁니까?
  
레아의 아들들 중에 앞서 유다까지는 출생 순서를 따랐으나 스불론(여섯째)과 잇사갈(다섯째)은 순서가 바뀝니다. 이것은 신명기 33장의 모세의 축복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신 33:18). 잇사갈과 스불론은 구약에서 함께 묶여서 언급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두 경우를 제외하고 잇사갈이 앞에 놓입니다. 학자들은 이에 대한 몇 가지 이유를 제시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미약한 잇사갈이 능동적인 활동을 하는 스불론에게 의존적으로 살아가게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야곱의 예언: 스불론, 잇사갈(13-15)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축복의 근원이십니다. 자연의 이치를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생명과 건강과 일해서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목적과 그에 따른 성취를 알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을 사용하여 우리 주변의 사람을 섬기고 돕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13스불론은 해변에 거주하리니 그 곳은 배 매는 해변이라 그의 경계가 시돈까지리로다 14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로다 15그는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에서 섬기리로다(13-15)
저마다 받은 은혜가 넘치며, 알맞은 분량의 축복을 받습니다. 비교하거나 부러워해서는 안 되며, 감사로 소임을 다해야 합니다. 스불론의 후손은 시돈 가까운 북쪽 바닷가에 정착하며 바다의 풍성함을 누릴 것이고, 잇사갈은 비옥하고 아름다운 토지를 얻지만 압제를 받을 것입니다.
(1) 스불론(13)
스불론은 해안 지역을, 구체적으로 시돈 근처까지 차지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13). 그러나 실제적으로 스불론의 영토는 육지로 둘러싸여 있습니다(수 19:10-16). 따라서 현재 예언의 문제는 스불론은 지정학적으로 해안 지역이 아니며 항구와도 거리가 멀다는 점입니다. 더구나 신명기 모세의 예언에서는 스불론이 바다의 생산물들을 마음껏 향유할 것이라고 말합니다(신 33:19). 아마 스불론은 내륙에서 지파 경계너머의 해양 지역까지 활동 영역을 넓혔을 가능성이 큽니다.
(2) 잇사갈(14-15)
이어지는 잇사갈에 대한 예언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잇사갈의 영토는 갈릴리 남쪽 지역(Lower Galilee)의 비옥한 평원에 독자적으로 위치했던 것으로 보입니다(수 19:17-24). 그런데 기름진 땅을 얻은 잇사갈이 꿇어 앉아 있는 강인한 나귀와 같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14) 이것이 매우 부정적인 묘사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강인한 나귀가 아마도 지쳐서 힘없이 누워 있습니다. 잇사갈은 안락한 쉼을 가져다 줄 그 땅을 아름답게 여기지만 정작 압제 아래서 짐 나르는 노동으로 섬기며 살아야 하는 운명입니다(15). 잇사갈이 어깨에 짐을 메면서 압제 아래 놓인다는 뜻은 아마 그들이 적들에 의해, 즉 가나안 족속에 의해 고통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잇사갈이 외부 세력에게 압제 당했다는 기록을 구약에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혹시 이것은 단순히 잇사갈이 미약한 지파로서 마치 종의 신분처럼 스불론에게 크게 의존하며 살게 된다는 예언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경우 동포에게 ‘압제받는 종’이란 말은 여전히 어울리지 않습니다. 어쩌면 다음과 같은 추론이 가능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잇사갈은 땅 정복 후에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해 그들이 잇사갈을 위해 종노릇했었습니다(삿 1:30). 그러나 성경에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모세의 경고대로 훗날 여전히 쫓아내지 못한 주변의 가나안 족속이 그들에게 가시가 되고 올무가 되어 결국 잇사갈 족속이 오히려 가나안 족속에게 억눌리며 살았을지 모릅니다(사 9:1을 보라).
 

야곱의 예언: 단, 갓, 아셀, 납달리(16-21)

이 세상에서 선하게 보이는 것이 항상 선한 것은 아닙니다. 이 땅은 갓 지파에게는 선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곳은 끊임없이 그들을 침범하는 적들이 숨어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찬란함과 쾌락과 물질과 권력과 명예로 가득하여 간혹 우리가 살기에 이상적으로 생되는, 선하게 보이는 장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하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을 노략질하여 우리를 파멸시키려는 대적들로 가득한 곳이 바로 세상입니다.
16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17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18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19갓은 군대의 추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하리로다 20아셀에게서 나는 먹을 것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수라상을 차리리로다 21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라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도다(16-21)
하나님께서는 백성의 필요를 채우시고, 삶을 풍요롭게 하십니다. 각양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갓은 약탈자들에 맞서 용감하게 적을 추격할 것입니다. 아셀은 비옥한 걸릴리에 거하며 수라상에 오를 먹거리를 생산할 것입니다. 납답리는 산악지역을 누비는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1) 단(16-19)
레아의 아들들에 대한 예언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이제 라헬과 레아의 여종들인 빌하와 실바의 네 아들들에 대한 미래가 나열됩니다. 역시 등장하는 순서는 출생 순서와 다르며 이러한 순서에 대해 별다른 이유를 찾기는 어렵습니다. 우선 단 지파는 ‘재판관’이라는 그의 이름 뜻에 걸맞게 이스라엘의 한 ‘지파로서’(개역개정 ‘지파같이’) 그의 백성을 심판합니다. 여기서 ‘심판한다’(딘)는 것은 비난을 위한 사법적 재판이 아니라 권리를 옹호하고 변호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단은 이미 이스라엘의 한 지파이므로 이 말은 이상하게 들립니다. 하지만 단은 원래 서쪽 해안 가까운 곳에 할당된 내륙의 땅을 점유하지 못해 이스라엘의 한 지파로서 역할을 못했습니다. 나중에 그들은 최북단으로 이주해 라이스 지역을 점령함으로써 비로소 한 지파로서의 위상을 확립합니다. 아마 이 예언은 이러한 상황에 대한 진술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단은 미약한 뱀으로 비유되지만, 결국 말 탄 자의 말을 물어 떨어지게 한다함으로써 이스라엘을 위해 자기 몫을 다합니다(17). 또한 훗날 단 지파는 사사(심판관) 삼손의 혁혁한 공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해냅니다(삿 14-16장). 이로써 단은 이스라엘 백성의 권리를 옹호합니다. 18절의 구원을 구하는 기도는 미래의 단 지파가 겪을 곤궁한 상황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단은 이 기도의 소망대로 역경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실바의 첫째 아들 갓은 가장 좋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입니다(20). 르우벤, 갓,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가 요구해서 얻은 땅은 요단 동편의 좋은 목초지였습니다. 19절에서 갓은 군대의 공격을 받지만 오히려 그가 그 군대의 뒤를(아케브, 그 배후를) 공격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명기의 모세의 예언에서도 갓은 웅크린 사자처럼 숨어 있다가 기습을 할 것이라고 묘사됩니다(신 33:20). 공격에 취약한 요단 동편 (트랜스 요르단)에 정착한 갓 지파는 그들의 역사 속에서 내내 여러 민족들의 공격을 받습니다. 암몬 족속 (삿 10-12장; 렘 49:1-6), 아람 민족(왕상 22:3; 왕하 10:32-33), 그리고 앗시리아(앗수르) 민족(왕하 15:29). 그들은 분명히 매번의 패배 후에 역공을 하며 싸웁니다. 갓 지파 백성은 싸우는 전사들로 칭송을 받습니다(대상 5:18; 12:8).
(2) 아셀(20)
아셀 지파는 갈릴리 고지대 서쪽 경사면의 납달리와 지중해 사이에 있던 비옥한 땅을 할당 받았습니다(수 19:24-31). 모세의 예언에서 아셀은 다른 지파들보다 더욱 풍족한 복을 누리고 형제들의 기쁨이 될 것이며 그들의 발이 감람유에 잠길 정도로 삶은 풍요로울 것입니다(신 33:24). 실제로 그곳은 풍부한 감람유(올리브 유) 산지로 유명했습니다. 그들의 삶은 왕의 식탁을 준비할 수 있을 정도로 풍요롭습니다(20).
(3) 납달리(21)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에 비유됩니다(21). 이것은 납달리 지파의 자유로움, 민첩함을 의미할 것입니다. 납달리는 북부 갈릴리 쪽에 영토를 배당받았는데 그곳은 물이 많고 초목이 우거지며 과실수도 잘 자라는 땅이었습니다. 더구나 디베랴(갈릴리) 호수에서 어업도 가능했습니다. 그들이 차지할 ‘서쪽과 남쪽’은 디베랴호수를 기준으로 서쪽과 남쪽을 가리킵니다.
 

야곱의 예언: 요셉, 베냐민(22-28)

무기력하고 안일하며 안락함과 편함을 추구하는 태도는 우리 영혼의 적입니다. 그러한 태도는 의욕적이고 창의적이며, 생산적이고 보람 있게 일하려는 마음을 파괴시키며 심지어 삶 그 자체를 파멸하게 합니다. 한님께서는 진정으로 그분을 따르는 자에게 부어주시는 축복은 제한이 없습니다. 새롭게 생각해 볼 수 있도록 복을 내려주십니다.
22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23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24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25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26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 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27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 28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22-28)
같은 배에서 대어났지만 받은 축복은 다릅니다. 그 차이 때문에 유대와 도움, 보호를 제공해야 합니다. 요셉은 샘 곁의 나무와 같을 것입니다. ‘샘’과 ‘비’와 ‘시냇물’, ‘젖가슴’과 ‘태’로 상징되는 풍성함을 누릴 것입니다. 베냐민은 이리와 같은 호전성으로 약탈물에 의지해 살아갈 것입니다.
(1) 요셉(22-26)
요셉에게는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돌아갈 두 몫의 복이 주어집니다. 요셉 지파의 자손이 크게 번성할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 구절의 ‘무성한 가지’는 오역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것은 요셉이 샘 곁의 ‘들나귀’와 담장 곁의 ‘들나귀들’(망아지들) 이라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견해는 이어지는 23절과도 잘 어울리는 장점을 지닙니다. 즉 이 짐승들은 활을 가진 사냥꾼의 표적입니다. 23절의 요셉을 향한 활 쏘는 자의 학대와 적개심, 그리고 공격은 요셉지파에게 언제 성취되었습니까? 역사적 사례가 드문 이유로 여러 학자들이 이것을 요셉 개인에게 고통을 준 여러 적들로 해석합니다. 요셉의 형들, 노예로 매입한 이스마엘 사람들, 보디발의 아내 등. 그러나 이것은 24-25절과 더불어 미래의 요셉 지파가 맞설 여러 적들을, 또한 그의 용맹함과 강성함을 가리킬 것입니다. 실제로 지도력을 갖춘 용맹한 요셉 지파는 훗날 북이스라엘의 대장 지파 노릇을 합니다.
요셉 지파 역시 엄청난 풍요를 누립니다(25-26). 이것은 모세의 예언에서도 반복됩니다. 그들은 하늘의 상수원(‘위로 하늘의 복’)과 땅의 지하수로부터(‘아래로 깊은 샘의 복’) 물이 넉넉히 공급되는 좋은 땅, 농사와 목축이 잘되는 기름진 땅을 얻을 것입니다. 실제로 요셉 족속의 땅 에브라임과 므낫세 반 지파의 요단 서편 땅은 산림이 우거지고 나중에 많은 과수원이 개간되었습니다(수 17:16-18). 므낫세 반 지파의 요단동편 고원 지대도 좋은 숲과 목초지를 지녔습니다. 그들은 ‘구별된 자’(나지르, 뛰어난 자)란 말을 들을 만큼 특별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결국 그들은 그런 엄청난 하나님의 축복을 내다 버리고 배교의 길을 가고야 말았지만 말입니다.
(2) 베냐민(27-28)
마지막 예언은 막내아들 베냐민을 향합니다.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에 비유됩니다. 그는 오전에 약탈한 먹이를 먹고 저녁에는 그것을 나누어 먹습니다(27). 해밀턴은 이 예언은 미래에 베냐민 지파가 군대의 약탈자가 되어 전리품을 팔아넘길 것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베냐민의 물어뜯는 이리와 같은 특징은 훗날 베냐민 지파의 사사 에훗에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삿 3:15-30). 후대에 베냐민 지파는 ‘용감한 장사요 활을 잘 쏘는 자’라는 칭찬을 듣습니다(대상 8:40;12:2). 이렇듯 용맹한 베냐민 지파는 초대 왕 사울을 배출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열두 아들에 대한 예언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이들은 12지파를 구성합니다. 아버지 야곱은 그들을 축복하되 각자의 분량대로 축복하였습니다.


아들들에게 준 축복은 다르지만 저마다 소중합니다. 풍요도 축복이고 한계도 축복입니다. 풍요를 통해 섬기게 하셨고, 한계를 통해 교만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축복은 책임을 동반합니다. 받은 축복에 감사하며 경쟁하지 말고 그 선물로 받은 유업으로 제사장 나라, 빛의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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