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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50-01)


애굽에서 삶을 다하고 죽은 야곱

창세기 49장 13절-50장 14절


야곱은 아들들에 대해 예언을 마치고 자신은 가나안 땅에 묻어달라고 유언한 후 숨을 거둡니다. 요셉은 그를 가나안 땅 막벨라 밭에 있는 굴에 장사합니다. 우리도 언젠가 삶을 마칠 것입니다. 그때 후회 없는 인생이 ㅚ기 위해 우리가 보여야 할 삶의 방식은 무엇입니까?
 
야곱은 열두 아들의 미래 운명에 대한 예언을 마친 뒤 그들에게 마지막 당부를 합니다. 자신의 시신을 약속의 땅에 묻어달라는 것입니다. 그는 앞서 죽음이 임박했음을 직감하고 요셉에게 이미 두 차례 동일한 부탁을 건넨 적이 있습니다(47:29-31; 48:21-22). 그럼에도 그는 이것을 한 번 더 마지막 유언으로 남깁니다. 그는 선조들로부터 자신에 이르기까지 거듭되었던 그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마지막 순간까지 잊지 않고 있습니다.
 

야곱의 죽음(29-33)

우리는 죽음으로써 우리 삶을 평가받고 우리의 믿음에 대한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약속의 씨인 세상의 구조, 즉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우리도 야곱처럼 죽음으로 하나님과 함께 있는 다른 믿는 자들에게 돌아갑니다. 야곱과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은 가나안 땅이 그들에게 주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소망 뒤에는 이보다 훨씬 좋은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29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되 내가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 30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의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31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 곳에 장사하였노라 32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 사람에게서 산 것이니라 33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니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더라(29-33)
죽음을 앞둔 요셉은 이제 마지막 당부를 아들들에게 전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시신을 반드시 선조들이 묻혀있는 가나안 땅의 가족묘에 매장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가 애굽으로 건너오기 직전 약속하신 말씀이 성취되고 있습니다. ‘내가…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46:4).
야곱은 이제 자신이 내 조상들(백성)에게 돌아갈 때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에 대해 밀그롬(Milgrom)은 죽은 자가 단순히 조상들의 묘에 함께 묻힌다는 뜻이 아니라 죽음 후에 스올에서 지속되는 사후의 삶에서 조상들과 다시 재결합한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야곱은 가족묘의 위치를 정확히 알려줍니다. 아들들은 모두 그 장소를 알고 있을 것이며 어쩌면 청소년기까지 가족과 함께 살았던 요셉도 알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자세히 그 가족묘에 대한 정보를 알려줍니다. 그곳은 헤브론, 곧 마므레 땅의 막벨라 밭에 있는 굴입니다. 일찍이 조상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매장하기 위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땅값 400세겔을 주고 그 묘지를 매입했었습니다(23장).
막벨라 굴에는 조부모님이신 아브라함과 사라, 그리고 부모님이신 이삭과 리브가가 묻혀 있고, 야곱의 아내 레아도 거기에 묻혔습니다. 그러나 오직 라헬만은 사정상 에브랏(베들레헴)에 묻혔습니다(35:19; 48:7). 여기서 야곱은 선조인 사라와 리브가는 각각 남편의 아내, 곧 ‘그의 아내’로 칭하나 레아는 단순히 ‘나도 레아를’이라고 칭합니다. 아마 그는 여전히 레아가 아닌 라헬을 진정한 아내로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꺼이 막벨라 굴의 레아 곁에 묻히기를 원하는데, 이는 그에게는 약속의 땅에서의 조상들과의 연계성과 일체감이 더욱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마지막 당부의 유언과 더불어 침상에서 숨을 거두고 선조들의 안식에 합류합니다.
 

가나안으로 운송되는 야곱의 시신(50:1-9)

우리는 때로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과 슬픔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위기들이 우리를 상하게 하거나 우리를 사로잡지 못하게 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슬픔을 이겨내고 일어나 우리에게 닥친 모든 어려움들을 극복하고 우리에게 맡겨진 의무를 충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1요셉이 그의 아버지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고 2그 수종 드는 의원에게 명하여 아버지의 몸을 향으로 처리하게 하매 의원이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하되 3사십 일이 걸렸으니 향으로 처리하는 데는 이 날수가 걸림이며 애굽 사람들은 칠십 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 4곡하는 기한이 지나매 요셉이 바로의 궁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원하건대 바로의 귀에 아뢰기를 5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 놓은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내가 다시 오리이다 하라 하였더니 6바로가 이르되 그가 네게 시킨 맹세대로 올라가서 네 아버지를 장사하라 7요셉이 자기 아버지를 장사하러 올라가니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원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원로와 8요셉의 온 집과 그의 형제들과 그의 아버지의 집이 그와 함께 올라가고 그들의 어린 아이들과 양 떼와 소 떼만 고센 땅에 남겼으며 9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가니 그 떼가 심히 컸더라(1-9)
요셉은 임종하신 아버지의 얼굴에 머리를 숙여 입을 맞추며 울었습니다. 이때 아마 그는 아버지의 눈을 감겨드렸을 것입니다. 이로써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그의 눈을 감겨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습니다(46:4),
요셉은 수종 드는 의원에게 아버지의 시신을 향품으로 처리하도록 지시합니다. 그 의원은 아마 왕실 주치의였을 것입니다. 다만 고대의 의사는 현대의 의사와는 역할과 직무가 차이가 났습니다. 때로 제사장과 의사, 치료를 담당하는 주술사의 구분이 모호했습니다. 의사는 야곱의 시신을 40일 동안 특수한 향품으로 처리했습니다. 그리고 70일간 애곡이 계속되었습니다. 이 70일에는 앞의 40일이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이렇듯 야곱의 장례는 애굽식 방식을 따랐습니다. 막대한 비용이 들었던 시신의 방부 처리는 부자와 고위층만 가능했습니다. 야곱의 시신과 더불어 나중에 요셉의 시신이 이렇게 미라로 만들어집니다. 야곱이 애굽에서 얼마나 큰 예우를 받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총 70일간의 애곡 기간이 끝난 뒤, 요셉은 바로의 왕실 사람들을 통해 아버지의 매장 문제에 대해 부탁의 말씀을 올립니다. 이때 그는 왕실 사람들에게 ‘내가 너희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했다면’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것은 상대방의 은혜를 구하는 어법인데, 상대방의 신분에 따라 다른 뉘앙스를 갖습니다. 현재의 경우 총리가 궁중 사람들에게 정중한 부탁을 하고 있으므로 ‘내가 너희에게 부탁하니’가 가장 무난합니다. 한편, 요셉이 왕실의 바로에게 사람의 중재를 통해 말씀을 전했던 이유는 그때가 아직 하관식이 남은 여전한 장례 기간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여전히 부정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바로를 향한 요셉의 대화 방식은 다분히 전략적입니다. 애굽이 아닌 가나안에 야곱의 시신을 매장하겠다는 것은 바로와 애굽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미 전 가족이 애굽에 이민 와서 살고 그들에게 모든 호의를 베풀었는데 왜 여기에 묻히지 않겠다는 것입니까? 요셉은 아버지의 말을 모두 생략하고 필요한 말만 전하는 전략을 구사합니다. 그는 지혜롭게 아버지가 이미 가나안에 자신의 묘지를 마련해 두었다는 점을 부각시킵니다(5). 만일 그가 단순히 아버지가 애굽이 아닌 가나안에 묻히고 싶어 하셨다고 말한다면, 일을 그르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령의 가장이이미 애굽에 오기 전에 특별히 자신이 묻힐 곳을 준비해 두었다면, 그 유언을 따르는 것은 망자에 대한 예우였을 것입니다. 바로의 허락이 떨어졌습니다.
요셉은 아버지를 장사하기 위해 가나안으로 올라갑니다. 이때 엄청난 규모의 장례 대열이 구성되었습니다. 우선 요셉의 온 집안 식구와 그의 형제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집의 모든 가족이 올라갔습니다. 거기에 애굽의 신하들, 왕실의 원로들 그리고 애굽 온 땅의 모든 원로들이 거기에 합류했습니다. 다만 어린아이들과 가축들만 고센 땅에 남겨두었습니다. 아마 아이들에게 그 여행길은 매우 벅찼을 것입니다. 또한 여기에는 요셉과 야곱의 온 식구의 애굽으로의 확실한 복귀를 바로에게 확신시키려는 의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장례 대열에 마지막으로 애굽의 병거들과 기병들이 합류했습니다. 마지막에 군대의 추가로 이 행렬은 마치 군대 행렬과 같은 성격을 지닙니다. 9절에서 병거와 기병의 합류와 더불어 ‘그 떼가 심히 컸다’고 말합니다. ‘떼’로 번역된 히브리어 ‘마하네’는 ‘군대’를 뜻합니다. 70인역과 타나크 역(TNK), 그리고 어떤 주석가들(예. Wenham)은 그것을 ‘군대’(troop) 혹은 ‘진영’(encampment)으로 번역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역본들은 ‘무리’, ‘떼’, ‘일행(company)’으로 옮깁니다. ‘떼’(군대)가 컸다는 것은 병거와 기병들의 규모가 굉장했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혹은 군대가 동원된 장례 대열 전체를 군대로 간주하여 그것이 대규모의 대열이라는 뜻일 수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출애굽 했던 이스라엘 민족이 ‘마하네’로 불립니다(출 14:19,20;신 2:14). 이런 군인들의 동반은 여행길에서 요셉의 장례 일행 보호를 위함이 분명합니다. 아이러니한 장면이 관찰됩니다. 큰 군대가 가나안을 향하는 이스라엘 가족을 보호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400년이 지난 뒤, 거대한 바로의 군대가 가나안으로 향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해치려고 뒤따라 왔습니다. 한편, 야곱의 시신이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옮겨진다는 것은 명백히 출애굽의 전조입니다. 애굽은 최상의 예우를 갖춰 야곱의 시신 운송식과 가나안에서 하관식을 치릅니다. 이로써 애굽은 미래의 이스라엘을 극진히 섬깁니다.
 

막벨라 굴에 안장된 야곱(50:10-14)

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이 아무 고난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악을 선으로 바꾸십니다. 성경에서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고 하였습니다. 성경의 말씀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지실 것입니다.
10그들이 요단 강 건너편 아닷 타작 마당에 이르러 거기서 크게 울고 애통하며 요셉이 아버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애곡하였더니 11그 땅 거민 가나안 백성들이 아닷 마당의 애통을 보고 이르되 이는 애굽 사람의 큰 애통이라 하였으므로 그 땅 이름을 아벨미스라임이라 하였으니 곧 요단 강 건너편이더라 12야곱의 아들들이 아버지가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그를 위해 따라 행하여 13그를 가나안 땅으로 메어다가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매장지를 삼은 곳이더라 14요셉이 아버지를 장사한 후에 자기 형제와 호상꾼과 함께 애굽으로 돌아왔더라(10-14)
요셉 일행은 요단강 건너편의 아닷 타장 마당에 도착했습니다. ‘아닷의 타작마당’(고렌 하아타드)에서 ‘아타드’는 가시나무의 일종(bramble 혹은buckthorn)으로 추정됩니다. 이것은 그 자체로 고유명사로서 지명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Gorn-ha-Atad; NJB; NAB; TNK). 이곳의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분명 요셉 일행은 요단 동편에서 요단강을 건너 아닷 타작마당으로 여행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해안 길이 아닌 사해 동편을 거쳐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여행 경로는 출애굽의 마지막 경로와 비슷했을지 모릅니다. 아닷 타작마당에서 요셉 일행은 크게 울면서 7일간의 애도 기간을 가졌습니다. 이것은 애굽에서 있었던 궁중 애도식에 추가된 의식입니다. 완전한 주기를 가리키는 7일은 이스라엘과 고대 중동에서 통상적인 애도 기간입니다(삼상 31:13; 욥 2:13; 겔 3:15). 가나안 주민들이 애굽 사람들이 아닷 마당에서 크게 애곡하는 것을 보고 그 땅 이름을 ‘아벨미스라임’으로 칭했습니다. 그것은 ‘애굽의 애도’를 뜻합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시신을 유언대로 마므레의 막벨라 굴에 장사했습니다. 요셉은 모든 장례 절차를 마치고 형제들과 올라갔던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애굽으로 돌아왔습니다.


야곱의 인생은 험난했고, 쉽지 않은 나그네 길이었습니다. 온갖 정념 때문에 부침이 있는 생이었지만, 끝까지 약속을 따라 동행함으로 마침내 믿음의 조상들의 반열에 이름을 남깁니다(히 11:21). 우리가 영원히 기억되고 다시 사는 길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믿음으로 걷는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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