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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05-01)


날아가는 두루마리에 적힌 저주

스가랴 5장 1-11절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믿음의 사람으로서 버겁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다 지킨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삶의 기준이 있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견고하고 안정감 있게 지켜준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말씀을 지킬 때 더 큰 말씀이 우리를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 이전의 두 환상이 역사적 인물과 관계된 환상으로 특이한 점들이 많이 발견됐다면, 여기서는 다시 그 이전 환상들과 비슷한 양상을 보입니다. 5장에서는 두루마리에 대한 환상과 에바 속의 여인에 대한 환상을 보여주는데, 각각 철저한 심판과 완전한 죄악의 제거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여섯 번째 환상 : 두루마리(1-4)

성경에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말씀을 떠났을 때 어떤 결과가 있는지, 그런 사람이 받을 벌과 저주는 무엇인지 그 내용을 담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 받을 복에만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겼을 때 받을 벌을 가볍게 여기고 사랑과 축복에만 초점을 맞추면 정작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놓치게 될 것입니다.

 

1내가 다시 눈을 들어 본즉 날아가는 두루마리가 있더라 2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기로 내가 대답하되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보나이다 그 길이가 이십 규빗이요 너비가 십 규빗이니이다 3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온 땅 위에 내리는 저주라 도둑질하는 자는 그 이쪽 글대로 끊어지고 맹세하는 자는 그 저쪽 글대로 끊어지리라 하니 4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것을 보냈나니 도둑의 집에도 들어가며 내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서 그의 집에 머무르며 그 집을 나무와 돌과 아울러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1-4)

 

하나님께서는 날아가는 두루마리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2절의 두루마리는 기록을 목적으로 하는 종이 같은 것으로, 주로 파피루스나 동물의 가죽으로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두루마리는 십계명, 언약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언약을 상징하는 두루마리가 임할 때, 복이 아니라 저주가 임하고 있습니다.

 

(1) 두루마리 소개(1-2)

 

3장에서 죄(정결)의 문제를 해결할 필요성을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환상을 통해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간접적으로 이스라엘의 정결을 요구하지만, 이제 5:1-4은 저주를 상징하는 두루마리를 통해 온 땅에 저주로 인한 심판이 내릴 것을 예고합니다. 이렇게 죄를 제거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기 때문에 거룩하지 않은 이스라엘과 거주할 수 없으므로 이스라엘에게 거룩함(죄가 없음)을 요구하십니다(레 19:2). 가나안 족속을 멸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 이며,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그리고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포로로 끌려가게 된 것도 죄악 때문입니다(레 18:27-28, ‘너희가 전에 있던 그 땅 주민이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고 그 땅도 더러워졌느니라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가 있기 전 주민을 토함 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

2절의 ‘날아가는 두루마리’는 기록을 목적으로 하는 두루마리(렘 36:2)입니다. 주로 파피루스나 동물의 가죽으로 만들었습니다. 말아서 휴대할 수 있는 고대의 책입니다. 두루마리가 난다는 것은 누구나 볼 수 있게 한다는 의미이며, 두루마리에 기록된 저주(5:3)가 온 천하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두루마리의 길이가 이십규빗이면 약 9미터에 해당하며, 너비 십 규빗은 4.5미터에 해당합니다. 실제로 이런 크기의 두루마리는 없습니다. 대부분 길이는 이와 같이 길지만, 너비가 이처럼 넓지 않습니다. 모양도 특이하며, 굉장히 큰 두루마리가 하늘을 덮은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두루마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몇 가지 제안이 있습니다. 첫째, 두루마리의 크기와 법궤를 덮는 속죄소의 크기가 같은 점을 착안해 둘 사이의 연관성을 주장하기도 합니다(왕상 6:24-27). 크기 이외에도 두루마리가 난다는 점, 속죄소는 나는 존재인 두 그룹(cherub)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 비슷합니다. 그리고 3절에도 나오듯이 두루마리 양쪽에 기록된 저주의 내용이 십계명과 관련 있습니다. 속죄소가 덮은 법궤(언약궤)는 십계명 두 돌판을 보관한 곳입니다(왕상 8:9). 이렇게 볼 경우 두루마리가 하는 역할은 십계명, 즉 언약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내산 언약의 핵심 내용은 십계명입니다. 이 십계명이 담겨 있는 언약궤(법궤와 그 법궤를 덮는 속죄소는 언약의 핵심을 늘 기억하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두루마리가 속죄소에 연관된다면, 두루마리에 기록된 저주를 통해 이스라엘의 현재 상황을 언약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두루마리에 기록된 저주는 다름 아닌 이스라엘을 향한 저주이며, 죄악에서 돌이키라는 강력한 촉구의 메시지가 됩니다.

둘째, 어떤 학자는 ‘주랑’의 크기와 같다는 점에 착안합니다(왕상 6:3). ‘주랑’은 성전의 입구를 의미하며, ‘주랑’ 앞에 번제단이 있습니다. 열왕기상 7:7에서는 ‘재판하는 주랑’을 소개하는데, 주랑은 제사장이 재판하는 곳입니다(슥 3:7; 욜 2:7). 솔로몬의 기도에서 성전은 심판의 기능을 담당하는데(왕상 8:31-32), 이런 측면에서 날아다니는 두루마리가 심판의 성격을 지닌다고 제안하기도 합니다.

셋째, 어떤 학자는 두루마리의 크기가 성소(출 26장)의 크기와 같다고 제안합니다. 성소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만나는 곳이며, 하나님의 임재를 늘 기억하게 하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두루마리에 기록된 저주(5:3)는 하나님께서 보낸 저주이며, 따라서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도록 하는 강력한 권고를 의미합니다.

 

(2) 두루마리의 확인 및 파급 효과(3-4)

 

3절에서 ‘두루마리’'는 ‘온 땅 위에 내리는 저주’라고 확인됩니다. ‘온 땅 위에 내리는’이라는 표현은 저주가 미치는 범위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저주’는 궁극적으로는 언약적인 저주를 가리키며,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언약 관계를 기억나게 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 충실하지 못한 것에 대한 질책의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3절에는 두루마리 양쪽에 각각 ‘도둑질하는 자’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 대한 저주가 기록되어 있는데, 저주가 있게 된 죄악과 그 죄악으로 인한 저주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저주의 대상으로 도둑질과 망령되이 행한 거짓 맹세는 십계명의 셋째와 여덟째 계명에 해당합니다. 4절에서도 이 표현과 내용을 확대하여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뿐만 아니라, 언약 공동체를 훼손하는 죄악을 중대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일곱 번째 환상: 에바 속의 여인(5-11)

하나님의 기준 대신 자기 스스로 잣대를 가지는 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성숙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과는 별도로 자기중심적인 신앙, 왜곡된 믿음을 가지기가 쉽니다. 말씀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만 판단합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멋대로 행하면서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한다고 우깁니다.

 

5○내게 말하던 천사가 나아와서 내게 이르되 너는 눈을 들어 나오는 이것이 무엇인가 보라 하기로 6내가 묻되 이것이 무엇이니이까 하니 그가 이르되 나오는 이것이 에바이니라 하시고 또 이르되 온 땅에서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라 7이 에바 가운데에는 한 여인이 앉았느니라 하니 그 때에 둥근 납 한 조각이 들리더라 8그가 이르되 이는 악이라 하고 그 여인을 에바 속으로 던져 넣고 납 조각을 에바 아귀 위에 던져 덮더라 9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두 여인이 나오는데 학의 날개 같은 날개가 있고 그 날개에 바람이 있더라 그들이 그 에바를 천지 사이에 들었기로 10내가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묻되 그들이 에바를 어디로 옮겨 가나이까 하니 11그가 내게 이르되 그들이 시날 땅으로 가서 그것을 위하여 집을 지으려 함이니라 준공되면 그것이 제 처소에 머물게 되리라 하더라(5-11)

 

이어지는 에바 속에 들어앉은 여인의 환상은 보다 실생활 속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을 꼬집습니다. 에바는 곡식을 세는 단위로 곡식을 되로 다려줄 때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자주 남을 속여서 부당이익을 취하는 데 이용되었습니다. 여러 선지서에서 이런 죄악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1) 에바에 대한 소개(5)

 

여섯 번째 환상은 죄가 가득한 상황을 보여주는 환상이며, 일곱 번째 환상은 죄가 제거되는 상황을 보여주는 환상입니다. 이제 일곱 번째 환상에서 본격적으로 죄의 제거에 대한 미래적 소망을 다룹니다. 새 언약에서도 이미 죄에 대한 미래적 소망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렘 31:33-34). 특히 일곱 번째 환상에서는 주요 초점이 되는 대상을 옮겨가며 주목하게 합니다. 먼저 에바를 보여줍니다. 이것이 어떤 용도인지 궁금증을 유발하고, 이어지는 6-7절에서 에바의 용도를 알려줍니다. 즉, 한 여인을 담고 있으며, 무엇보다 에바 자체보다 에바를 덮은 뚜껑이 납으로 되어 있어 얼마나 무겁게 누르는지를 반복을 통해 강조합니다. 다음 장면인 8-11절에서는 이 ‘악’을 의미하는 여인을 담은 에바를 옮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2) 한 여인과 에바의 납 뚜껑 확인(6-7)

 

6절의 ‘에바’는 측정 단위나 담는 용기를 가리킬 수도 있는데,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담는 용기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1에바는 약 22리터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포로기 이후 시기에는 큰 용기를 가리키며, 사람이 들어갈 정도로 클 수도 있었습니다. 어떤 학자는 에바에 들어있는 여자(7)를 작은 조각상, 즉 우상으로 보기도 합니다. 한편 에바는 단순한 용기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측정 용기이기 때문에 측정하는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상징적으로 언약의 기준에 맞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7절의 장면은 에바에 납으로 된 뚜껑이 덮고 있었으나 이 뚜껑을 여니 ‘한 여인’이 있다고 소개합니다. ‘한 여인’은 이 환상에서 ‘악’(8)으로 확인하고 있으며, 더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있습니다. 문맥상 ‘여인’은 우상을 가리킬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우상에만 한정할 수는 없고 통상적인 의미에서 이스라엘 전반에 일어난 죄를 대표적으로 언급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3) 여인을 담은 에바의 이동 확인(8-11)

 

8절의 ‘납 조각’은 무거움을 상징하며, 악을 에바 용기에 넣어 닫을 때 무거워서 꼼짝하지 못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무거워 꼼짝하지 못하도록 하여에바에 ‘악’을 가두는 것은 악을 완전히 해결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9절의 ‘두 여인’은 8절에서 ‘악’을 상징하는 ‘한 여인’과는 다릅니다. 9절의 ‘두 여인’은 ‘악’의 해결을 상징합니다. 날개에 바람이 있다는 표현은 사무엘하 22:11과 시편 18:10에도 등장하며, 하나님이 그룹을 타고 가는 장면을 묘사할 때 나옵니다. 여기서도 역시 그릅과 같은 존재인 ‘두 여인’이 하늘을 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두 여인’은 사람을 지칭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영적 존재(그룹)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환상의 장면에서 에바를 옮겨간다는 것은 상징적으로 ‘악’을 옮겨가는 것, 즉 악의 제거를 의미합니다.

11절의 ‘시날’은 메소포타미아에 있으며, 바벨론과 연관됩니다(단 1:1). 한편, ‘시날’은 바벨탑을 쌓은 곳이기도 합니다(창 11:2). 바벨론이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명칭이지만, ‘시날’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의도적으로 바벨탑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는 죄악과 연결시키기 위한 저자의 의도로 보입니다. 집은 악을 가둘 장소를 가리킵니다. ‘바이트’는 ‘집’이나 ‘성전’(또는 사원)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바벨론에 우상들을 놓을 사원을 의미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이 당연시하는 죄를 피하고 멀리해야 합니다. 다들 죄를 짓는다고 해서 우리까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고 우리 안에 있는 죄악을 버리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욕심과 죄악을 제해 버리고 우리의 정체성에 걸맞은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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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04-01)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스가랴 4장 1-14절


 

살아오면서 한 번쯤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기도하며 실행했는데, 큰 장애물을 만난 경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으로 인도하던 여호수아가 맞닥뜨린 여리고 성이 그러했고, 와서 도우라는 호나산을 따라간 빌립보 성에 이른 바울과 실라가 귀신 들린 여종을 깨끗하게 해 준 후에 맞이하게 된 심한 매질을 당하고 감옥에 투옥되는 일이 그렇습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 제건이라는 큰 문제 앞에 서게 됩니다.

 

  • 네 번째 환상과 비슷하게 다섯 번째 환상 역시 다른 환상들과는 다른 특징들이 보입니다. 네 번째 환상이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집중했다면, 다섯 번째 환상은 스룹바벨에게 집중합니다. 역시 성전 재건을 주요한 주제로 다루고 있으며, 본문에서 직접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스룹바벨과 관련된 두 감람나무에 대한 환상을 소개하고 두 감람나무의 정체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다섯 번째 환상(1-5)

이 세상에는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무리 힘쓰고 애써도 아니 되고 모든 기술과 재능을 다 동원해도 안 되는 일은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낙심하고 포기합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 말씀을 주십니까? 그것은 성령의 은혜를 받으면 아니 되는 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1내게 말하던 천사가 다시 와서 나를 깨우니 마치 자는 사람이 잠에서 깨어난 것 같더라 2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잔대가 있는데 그 위에는 기름 그릇이 있고 또 그 기름 그릇 위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기름 그릇 위에 있는 등잔을 위해서 일곱 관이 있고 3그 등잔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기름 그릇 오른쪽에 있고 하나는 그 왼쪽에 있나이다 하고 4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이르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하니 5내게 말하는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이것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하므로 내가 대답하되 내 주여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1-5)

 

동 시대에 선포된 학개서와 스가랴서의 차이 중 하나는 학개는 사람의 책임을, 스가랴서는 하나님의 주권과 책임을 강조합니다. 인간의 힘이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급을 통해서 성전 건축이 완성될 것이고 방해들이 없어질 것이라는 언약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들을 명확히 지적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다른 것을 통하여 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지도자들을 통하여 들어내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환상의 내용(1-3)

 

2절에서는 순금 등잔대에 초점을 두고 등잔대의 위에까지 어떻게 기름이 공급되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는 3절에서 등잔대 곁의 두 감람나무에까지 연결됩니다. 감람나무는 감람유를 내는 나무로, 등잔을 밝히는 재료인 기름의 근원이 됩니다. 감람나무와 기름을 연결시키는 것은 이 장면에서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11-14절에서 감람나무와 기름의 관계를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두 감람나무는 2절에서 묘사하기 시작한 순금 등잔대 위의 등잔을 밝히기 위한 기름의 근원입니다. 다시 거꾸로 보자면, 이는 두 감람나무에서 끊임없이 기름이 공급되어 순금 등잔대 위의 등잔이 밝게 비추고 있는 장면을 소개한 것입니다. 두 감람나무에 대한 설명은 12-14절에서 다시 거론하며 설명하는데, 거기서는 기름부음 받은 자 둘이라고 대답합니다.

 

(2) 환상에 대한 질문(4-5)

 

두 감람나무의 정체는 환상의 의미를 밝히는 가운데 드러나지만, 순금 등잔대는 이 환상과 환상에 대한 설명에서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추측할 수밖에 없는데, 이에 대해 대체로 세 가지 해석이 제시됩니다. 문맥상 순금 등잔대의 환상이 성전 재건과 관련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순금 등잔대는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기보다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며, 더욱 구체적으로는 성전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 감람나무의 정체가 궁극적으로는 메시아적 인물이겠지만, 구체적으로는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이라는 두 인물이라고 한다면, 순금 등잔대의 환상은 기름이 공급되어 등잔대가 유지되듯이 이 둘을 통해 성전이 완성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환상과 관련된 말씀(6-10)

순금 등대와 같은 교회에 성령님의 은혜가 충만해질 때 교회는 세상에 빛을 밝게 비출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은혜가 없는 교회와 성도는 빛을 발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 성령의 충만함을 힘입어야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성도가 성도답게 살 수가 있습니다.

 

6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7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8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9스룹바벨의 손이 이 성전의 기초를 놓았은즉 그의 손이 또한 그 일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 10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사람들이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이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라 하니라(6-10)

 

시작이 미약해 보인다 하여 우습게 여겨서도 안됩니다. 여전히 지금 상황은 성전을 건축하기에 낙담할만한 환경, 그리고 지쳐버리고 무감각해져 버린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회복의 차원에서 주어진다는 문맥에서 이 모든 것을 해석해야 합니다. 즉, 지쳐버리고 무감각해져 버리면 성전 건축 자체가 매우 무가치한 일 정도로 치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 (6-7)

 

1-3절에서 환상의 내용을 소개했는데, 4절 이후에서는 이 환상이 의미하는 바에 집중합니다. 다른 환상들에서는 스가랴가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1:9,19)라고 물을 때 천사가 대답하며 환상의 의미를 밝혔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11-14절에 가서야 이 질문을 다시 확인한 후 감람나무의 정체에 대해 밝히는데, 그 대답도 역시 구체적이지는 않습니다. 또한 순금 등잔대의 의미는 더욱 모호하게만 남겨집니다. 4-5절에서는 환상에서 보여주는 것들이 무엇인지 주목하게 합니다. 그러나 6-7절의 대답은 이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이 아닙니다. 6-7절은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6절의 ‘힘’과 ‘능력’은 ‘내 영’과 대조되는 인간의 힘을 의미합니다. 물론 ‘내 영’의 역사는 9절에 표현된 성전의 기초와 관계가 있습니다. 스가랴가 이 메시지를 전하는 당시의 역사적 배경은 성전 건축이 여러 반대에 부딪혀 중단된 상황이었습니다. 학개 스가랴 선지자는 성전재건을 독려하고 있었는데, 스룹바벨은 정치적인 지도자로서 성전 재건을 주도해야 할 인물입니다.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가 아니라 여호와의 영으로 성전 재건이 가능함을 권고하며, 주변 환경이나 인간적인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권고하는 메시지입니다.

7절은 성전 재건에 방해가 되는 것을 ‘산’에 비유하였으며(사 40:4), 산이 평지가 된다는 것은 평탄하게 일이 진행될 것이라는 점을 의미합니다. 7절의 ‘머릿돌’은 건물의 완성 단계에 놓는 중요한 돌을 가리키며, 성전이 완성될 때에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모두가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전의 완성은 곧 성전이라는 건물의 완성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순금 등잔대라는 환상을 통해 암시하듯이, 여호와께서 자신의 언약 백성 가운데 다시 거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전의 완성은 언약 공동체, 신앙 공동체의 회복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인 셈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전 재건은 단순히 인간의 힘이나 능력이 아니라 여호와의 영이 함께하시는 역사입니다.

 

(2) 백성에게 하는 촉구의 말씀(8-10)

 

6-7절이 스룹바벨에게 한 말씀이었다면, 여기서는 스룹바벨이 할 일과 관련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촉구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9절의 ‘손’은 하나님의 사역 대행자를 가리킵니다(8:9,13). 6절에서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라고 했으나, 이는 단순히 하나님의 영이 모든 것을 다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구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기를 원한다는 말씀입니다.

9절의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라는 표현은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이 성취될 것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참조, 즉 2:9). 다시 말해, 선지자를 통해 대언되는 여호와의 말씀이 성취됨으로써, 그 선지자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임을 인정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10절에서 ‘작은 날’이라고 멸시하는 것은 당시 제2성전의 초라한 외양에 얽힌 사람들의 시선을 가리킵니다. 파괴되기 전 솔로몬 성전에 비해 기초를 놓은 제2성전의 겉모습은 볼품이 없었습니다. 부푼 기대를 안고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에게는 이만저만한 실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기초를 놓은 후에도 십육 년 동안 여러 가지 요인으로 공사가 중단되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실망은 커져만 갔을 것입니다.

10절에서 스룹바벨의 손에 있는 ‘다림줄’은 다른 단어이기는 하지만, 2:1의 측량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이는 스룹바벨이 성전 건축에 중대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10절의 ‘일곱 눈’은 아마도 3:9의 ‘일곱 눈’과 연결될 것입니다. 2절에서도 눈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일곱’이 반복됩니다. 순금 등잔대와 그 위에 있는 것을 보는 환상이 세상을 두루 다니며 보는 여호와의 눈 일곱과 연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친히 증인이 됨과 동시에 성전의 완성에 대한 예언이 확고히 성취될 것을 보증하는 이가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두 감람나무의 정체(11-14)

교회는 세상의 빛의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빛의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순금 등잔대처럼 불을 밝힐 수 있는 기름을 무한 공급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기름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 기름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의 헌신입니다. 나아가 그 기름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이끄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입니다.

 

11내가 그에게 물어 이르되 등잔대 좌우의 두 감람나무는 무슨 뜻이니이까 하고 12다시 그에게 물어 이르되 금 기름을 흘리는 두 금관 옆에 있는 이 감람나무 두 가지는 무슨 뜻이니이까 하니 13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이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하는지라 내가 대답하되 내 주여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14이르되 이는 기름 부음 받은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는 자니라 하더라(11-14)

 

여기서는 두 감람나무가 무엇인지에 대해 초점을 두고 내용이 진행되며, 감람나무와 순금 등잔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서도 추가적인 묘사가 있습니다(12). 11-12절은 두 감람나무의 위치를 다시 확인하고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반복하여 묻습니다. 이어서 13절은 스가랴 선지자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재차 확인합니다. 14절에서는 두 감람나무의 정체를 알립니다. 이렇게 많은 양을 할애해서 주목하게 하는 것은 그만큼 두 감람나무가 무엇을 가리키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감람나무를 ‘기름 부음 받은 자 둘’이라고 확인하는데, 여기서 사용된 기름(이츠하르)은 보통 임명할 때 붓는 기름이나 연료로 사용하는 기름(셰멘)과는 다릅니다. 혹자는 여호수아는 제사장으로 기름 부음 받았지만 스룹바벨의 경우는 다르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그리하여 ‘기름 부음 받은 자들’을 역사적 인물인 여호수아와 스룹바벨로 해석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특별한 언급이 없다는 것은 스가랴서의 첫 독자들이 ‘기름 부음 받은 자’ 둘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를 분명히 알았다는 것을 암시할 것입니다. 따라서 일차적으로는 ‘기름 부음 받은 자들’은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대행자로서의 ‘기름 부음 받은 자 둘’은 궁극적으로 메시아를 통해서만 성취될 것입니다. 요컨대, 우리는 일차적으로 당시의 역사적인 두 인물에게 적용하지만,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성전의 완성을 이룰 메시아적 인물을 가리킨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실 처소를 거룩하게 하시고 그곳을 통해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성전 한 곳에만 머물러 계시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고자 하시는 곳에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며 자녀들과 교통해 주셨습니다. 교회를 세우시고 사랑하시어 끊임없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공급해 주시고, 변함없이 말씀의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항상 그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신앙을 위협하는 큰 산과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큰 산을 넘어야 한다면 자신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감당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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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03-01)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

스가랴 3장 1-10절


 

이스라엘을 향한 조건없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기억해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허랑방탕한 삶, 우상숭배와 점철된 죄악으로 시간과 삶을 낭비하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택하시고 꺼내주시고, 더러운 옷을 벗기시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고, 정결한 관을 씌워 제사장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들에게 기회를 주시며, 하나님의 도와 규례를 따름으로써, 제사장으로서의 직무를 이어갈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관련된 네 번째 환상은 이전 환상들과는 사뭇 다른 형식을 띠며, 새로운 주제가 등장합니다. 1:1-6에서 돌이킴과 회복이라는 주제를 제시했으며, 첫 세 환상은 회복에 초점을 둡니다. 반면에 1-7절에서 네 번째 환상은 여호수아의 위임식을 보여주며 죄악의 문제를 통해 돌이킴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8-10절에서는 죄악을 해결하는 온전한 회복을 다룹니다.

 

환상의 내용(1): 여호수아의 위임식(1-7)

그리스도인은 완전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죄악의 불구덩이를 피하게 된 존재입니다. 죄로 인한 상처를 치유받은 존재이고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에 따라 선택받은 자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로 죄를 용서받은 성도에게는 책임이 따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이웃을 사랑하고 그들이 우리에게 범한 죄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1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2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3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 4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5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 6○여호와의 천사가 여호수아에게 증언하여 이르되 7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만일 내 도를 행하며 내 규례를 지키면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내 뜰을 지킬 것이며 내가 또 너로 여기 섰는 자들 가운데에 왕래하게 하리라(1-7)

 

네 번째 환상과 다섯 번째 환상(4:1-14)은 다른 환상에 비해 특이한 점들이 발견됩니다. 연속된 환상들 가운데 다른 특이한 요소들이 많은 것은 저자의 의도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구문들은 독특한 특성을 보이며, 환상의 내용에 있어서도 역사적 인물(여호수아, 스룹바벨)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다른 환상과 다릅니다. 연속된 환상들은 전체 환상이 모여 궁극적인 흐름, 즉 주제의 흐름을 갖게 되는데(1:1-6 특히 1:3에 나오는 주제를 이후의 본문들에서 확대, 발전시킨다), 그중에서도 네 번째와 다섯 번째 환상은 연속적인 환상의 가운데에 위치하면서 주제 역할도 합니다. 스가랴서의 주제는 이스라엘의 회개와 여호와의 회복입니다(1:3). 조건적인 관계는 아니지만 역동적으로 여호와는 회복을 약속하면서 이스라엘의 회개를 요구합니다. 이스라엘이 회개하는 방법, 곧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돌아오는 방법은 역사적 인물인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의 역할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들은 각각 종교와 정치 지도자로서 언약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여호수아의 위임식 장면은 출애굽기 29장과 레위기 8장에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위임하는 위임식 내용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환상의 배경은 대체로 천상 회의로 간주됩니다. 여호수아는 스룹바벨과 함께 포로 후기 유다 공동체의 대표적인 지도자인데(학1:1,12,14; 2:2,4), 이 위임식은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공식적으로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역사적 인물로서의 개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를 대표합니다. 3절에서 더러운 옷을 입은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죄로 더럽혀진 것을 나타냅니다. 여호수아를 전면에 내세우는 이유는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이스라엘이 신앙 공동체로 회복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가 더럽혀진 옷에서 깨끗한 옷으로 바뀔 필요가 있듯이 이스라엘도 깨끗해져야 합니다.

이사야 64:6에서 이스라엘의 의롭지 못한 상태를 더러운 옷에 비유한 바 있습니다. 대제사장이 입는 의복은, 에봇, 겉옷, 흉패, 우림과 둠밈, 관입니다(출 28:6-14;39:2-7). 에봇의 경우 금실, 청색, 자색, 홍색의 실, 가늘게 꼰 베실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속죄일에 일 년에 단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갈 때에는 가는 베실이 아닌 단순한 베실(세마포)을 사용했으며, 이는 단순함을 강조합니다. 또 대제사장은 세마포 속옷, 세마포 속바지, 세마포 띠, 세마포 관을 입었습니다(레 16:4). 이는 단순하지만 ‘거룩한 옷’임을 강조합니다(레 6:4,32).

한편, ‘더러운 옷’이라는 것은 대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4절은 ‘더러운 옷’이 의미하는 바를 더욱 발전시킵니다. ‘죄악’이라는 분명한 단어는 여호수아의 죄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시사합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죄악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죄악을 제거함으로써(4) ‘정결한 관’을 쓰게 됩니다(5). 이 ‘정결한 관’은 3절의 ‘더러운 옷’과 대조되어, 4절에서 표현하는 대로 죄악을 제거했음을 상징합니다. 이렇게 환상을 통해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공동체가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더러움에서 정결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정결함은 거룩함의 개념과 더불어 언약 백성으로서의 삶에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곧 정결함은 거룩함과 더불어 여호와께 다가가기 위한 중요한 조건입니다(레15:13; 16:30; 참조 사 66:20). 이는 단순히 의식적인 면에서만이 아니라 종교 생활과 분리되지 않은 전반적 사회생활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아우르는 개념입니다. 정결과 거룩함의 개념은 모든 삶의 영역이 하나님 중심의 삶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도 성전과 관련된 의식적인(제의적) 문제만을 다룬 것이 아닙니다. 이런 제도적 장치를 통해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나님 중심의 언약 공동체로 회복하기를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환상의 내용(2) : 온전한 회복(8-10)

자신이 가정이나 직장 등에서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기쁨과 평화를 누리고 있는지 자문해 보시길 바랍니다. 기쁨과 평화는 세상적인 방법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자연스럽게 누리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힘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셔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믿음과 실제 삶을 일치시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8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들이라 내가 내 종 싹을 나게 하리라 9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거기에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 10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8-10)

 

온전한 회복이란 무엇입니까? 본문은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 가운데 거하려면 그들이 정결하고 거룩해야 합니다. 거룩한 하나님께서 더럽혀진 사람들과 함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떠나시며 그들을 각각 앗수르와 바벨론으로 추방한 것도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그들과 함께 더 이상 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포로기를 지나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가나안 땅에 돌아온 현재에도 그들이 깨끗하게 되며 거룩하게 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전 재건은 언약 백성과 신앙 공동체의 회복에 관한 시발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회복하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임재가 있어야 하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에 거하시려면 죄악의 문제, 다시 말해 그들의 정결과 거룩함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문제는 단순히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 공동체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8-10절에서는 더욱 분명하게 죄의 문제를 이야기하며, 현재적 관점과 미래적 관점에서 더욱 큰 소망을 품고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8절의 ‘싹’은 6:12에서도 다시 언급되는데, 여기서 ‘내 종’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중대한 역할을 할 메시아적 인물을 가리킵니다. ‘종’ 개념은 이사야에서 처음 등장하며, 메시아적인 인물로 고난을 통해 백성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존재로 소개됩니다(사 52:13; 53:4-11). 예레미야에서는 싹을 다윗과 연관된 왕으로 그립니다(23:5, ‘의로운 가지’ : 33:15, ‘공의로운 가지’).

스가라는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에서 메시아적 인물을 가리키는 데 빈번하게 사용되는 표현인 ‘싹’이나 ‘종’의 개념을 차용합니다. 그리하여 스가랴는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통한 사역이 궁극적으로는 여호와의 미래 계획 및 완성과 연결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 한편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전 재건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합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성전 재건 자체보다는 성전 재건이 상징하는 의미, 곧 궁극적으로는 메시아를 통한 미래적 완성에 주목하게 합니다. 네 번째 환상과 다섯 번째 환상(4:1-14)은 역사적 인물에 집중하면서도 ‘그 날에’(10)에 대한 언급을 통해 종말론적·미래적 관점을 제시하는데, 하나님 백성의 궁극적인 회복은 메시아를 통해 성취될 것을 미리 보여줍니다.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9)는 표현이 이런 온전한 회복을 잘 보여줍니다.

9절의 ‘돌’에 대한 해석은 다양합니다. 귀중한 돌, 즉 보석으로 보기도 하고 비슷하게 장식용 돌로 보기도 하며, 성전 재건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여호수아가 요단을 건너면서 취한 열두 돌을 표징으로 삼아 이스라엘이 기념하도록 한 것과 같이 돌은 증거의 역할을 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수 4:5-7). 여기서도 이 돌은 증거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4:10에서 일곱을 ‘세상에 두루 돌아다니는 여호와의 눈’으로 설명하는데, 이를 고려할 때, 9절의 ‘일곱 눈’ 역시 여호와의 눈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곧 ‘일곱 눈’은 ‘내 종 싹’을 통한 미래적인 일, 곧 성전 회복을 통한 죄악 제거에 대한 증인 역할을 하며 그 증인이 다름 아닌 여호와시라는 것을 보증합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눈이 직접 보며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이 환상에서 보여주는 내용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의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도를 행하면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할 것입니다. 성전이 서면 강한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돌아온 자들에게는 죄 용서의 은혜가 되겠지만, 이 은혜를 거절한 자들에게는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모든 죄가 용서받는 그날이 되면 이스라엘은 어떤 복을 누리게 되는가? 하나님과 잔치를 누릴 것입니다. 눈물도 없고 슬픔도 없고 사망도 없는 메시아 잔치로 초대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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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02-01)


척량줄을 잡은 사람

스가랴 2장 1-13절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길 원하십니다. 에덴동산에서도, 또 성소에서도 우리를 부르시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오라고 말씀하신 것도 언제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시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한가운데 살아가다 보면 마치 벌판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 이 단락은 예루살렘을 측량하는 환상을 보여주며, 예루살렘이 성곽 없는 성읍이 될 정도로 풍요롭게 될 것을 약속합니다. 이전 환상들과는 다르게 명령문을 사용하여 강력하게 권고하는 여호와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각각 6-9절과 10-13절에서 북방 땅 바벨론에서 피하라는 권고와 여호와께서 함께하실 것이므로 그분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라는 권고가 이어집니다.

 

셋째 환상 : 측량줄을 잡은 한 사람(1-5)

 

자신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이고 다른 성도는 함께 구원받는 형제자매라는 의식을 가지고 예배드리는지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이스라엘이나 교회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있는데, 교회는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힘쓰고 있는지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와 구원받은 백성으로서의 삶에 대해서 고민해 보고,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우리 마음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1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측량줄을 그의 손에 잡았기로 2네가 어디로 가느냐 물은즉 그가 내게 대답하되 예루살렘을 측량하여 그 너비와 길이를 보고자 하노라 하고 말할 때에 3내게 말하는 천사가 나가고 다른 천사가 나와서 그를 맞으며 4이르되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예루살렘은 그 가운데 사람과 가축이 많으므로 성곽 없는 성읍이 될 것이라 하라 5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에서 영광이 되리라(1-5)

 

셋째 환상에서의 특이한 점은 이전 환상들처럼 회복의 주제를 전하면서도 명령문을 써서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전 환상들에서는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권고를 간접적으로 전달했다면, 여기서는 더욱 직접적으로 이스라엘의 행동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둘은 약간 다릅니다. 앞선 두 환상에서는 천사와 스가랴의 대화를 통해 환상의 의미를 전달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직접적인 여호와의 말씀이 추가되고 있습니다. 이런 형식의 변화는 3-4장에 나오는 넷째와 다섯째 환상에서 더욱 두드러질 것입니다.

 

(1) 환상의 내용(1-2)

 

1절의 ‘측량’은 1:16의 먹줄과는 다른 단어이지만 관련이 있습니다. ‘측량’은 심판과 관련되어 사용되기도 하지만(암 7:7-9), 여기서는 예루살렘의 구원과 회복을 상징합니다. 1:7-17의 첫 환상에서는 환상이 나온 후 조용한 온 땅과 여호와의 역사로 인해 예루살렘이 풍요롭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이어졌습니다. 여기서는 더 구체적으로 환상을 보여주면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을 더 해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후에 나오는 두 번의 여호와의 말씀에서는 이 환상에 대해 이스라엘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가 나옵니다. 곧 여호와께서 함께하시니,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께 돌아가야 하는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2절의 ‘측량하다’라는 동사(마다드)는 에스겔 40-47장에서도 성전 건축과 관련해서 자주 나옵니다. 예루살렘은 단순히 이스라엘이 거주하는 성읍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함께하시는 성읍입니다.

 

(2) 환상의 의미(3-5)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 함께하신다는 개념은 5절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 가운데에서 영광이 되리라’라는 표현은 여호와의 임재에 대한 다른 표현입니다. 성막(출 16:10;40:34)과 에스겔 환상의 성전(겔 9:3)이 스가랴 본문과 비슷하게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언약 백성 가운데 거하며 자신을 드러내시겠다는 의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가운데에서 영광이 되리라’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다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을 공식화하는 언약 회복의 표현입니다.

5절의 ‘불’은 여호와의 임재를 가리킬 때 자주 사용됐습니다.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을 때 불이 쪼갠 제물 사이로 지나갔고(창 15:17), 모세를 부르실 때 가시떨기 나무에 불로 나타나셨습니다(출 3:2). 홍해를 건너는 상황에서, 그리고 광야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습니다(출 14:24: 신 1:33). 시내 산에서 언약을 맺으며 불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출 19:18). 이처럼 여호와의 나타나심이 자주 불로 표현되는데, 여기서도 역시 여호와께서 친히 나타나는 것이 불로 표현됐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불로 둘러싼 성곽은 여호와의 보호를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아무도 넘볼 수 없는 성벽으로 이스라엘을 막겠다는 뜻입니다. 한편, 4절의 ‘성곽 없는 성읍’은 무방비 상태의 성읍이 아니라, 사람과 가축이 가득한 상태로 회복된 성을 의미합니다. 이는 성전 재건이 중단된 상태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다시 한 번 성전 재건을 독려하고 확신을 주기 위해 주신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6-13)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관해서 수많은 회의와 질문을 빠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선하시고 정의로우시다는 말씀을 접할 때 자신의 경험이나 세상의 형편을 떠올리며 그 말씀을 믿지 못하고 회의를 품는 성도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포로로 끌려가고 죽음과 같은 고난을 경험하는 동안 완전히 절망했을 것입니다.

 

6오호라 너희는 북방 땅에서 도피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내가 너희를 하늘 사방에 바람 같이 흩어지게 하였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7바벨론 성에 거주하는 시온아 이제 너는 피할지니라 8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영광을 위하여 나를 너희를 노략한 여러 나라로 보내셨나니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 9내가 손을 그들 위에 움직인즉 그들이 자기를 섬기던 자들에게 노략거리가 되리라 하셨나니 너희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리라 10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와서 네 가운데에 머물 것임이라 11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에 머물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 12여호와께서 장차 유다를 거룩한 땅에서 자기 소유를 삼으시고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 13모든 육체가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의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 하라 하더라(6-13)

 

셋째 환상에 이어 여호와 말씀은 6-9절과 10-13절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습니다. 10-13절은 직접적으로 환상의 주제를 다루지만, 6-9절은 예루살렘을 측정하는 환상과는 직접 관련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도피할지어다’, ‘피할지니라’라는 권고에서 볼 수 있듯이 6-9절은 환상 자체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이라기보다는 환상을 보여주는 목적, 즉 이스라엘 백성을 권고하려는 의도에서 말씀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1) 여호와의 말씀(1):북방에서 피하라(6-9)

 

6절의 ‘북방 땅’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침략한 나라의 방향을 의미합니다(렘 1:14). 그러나 스가랴 당시 앗수르와 바벨론은 더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페르시아(바사) 제국도 회개하고 돌아온 이스라엘에 위협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북방 땅에서 도피하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분명하지 않아 보입니다. ‘북방 땅’이 현재는 위협의 대상이 아니지만,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강대국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일 수 있습니다. 스가랴 10:10에서도 당시와는 상관없는 애굽과 앗수르를 언급하는 것으로 볼 때, 이스라엘에게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현재의 회개를 촉구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북방 땅에서 피하라는 메시지의 문맥은 8-9절이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을 범한 자들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입니다. 그들은 ‘노략거리’가 될 것입니다(9). 북방 땅 바벨론에서 돌아오라는 메시지는 이들에게 심판이 임박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강대국들이 평안하고 세상은 고요한 듯하지만(1:7-17의 환상의 주제),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정의를 세우시며 이들을 멸하실 것입니다(네 대장장이의 환상, 1:18-21). 따라서 멸망이 임박했으므로 바벨론(이제는 바사 제국 아래에 안주하여 남아있지 말고, 시온(예루살렘)으로 돌아오라는 의미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이미 바벨론 문화에 익숙하여 돌아오지 않고 바벨론에 정착하려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겨냥한 메시지로 볼 수 있습니다. 스가랴가 메시지를 전했던 때는 주전 520년경으로, 곧 1차 바벨론 포로귀환(주전 538년) 이후에 해당합니다. 역사적으로 볼때 이후에도 2차(주전 458년)와 3차(444년)에 걸쳐 이스라엘 백성은 본토로 귀환했습니다.

 

(2) 여호와의 말씀(2):네 가운데 머물리라(10-13)

 

10-13절은 직접적으로 환상의 내용과 연결되어 예루살렘의 회복을 노래합니다. 이는 마치 강대국을 멸망시키고 돌아올 때 승전보를 알리며 예루살렘에 대한 회복을 확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시 말해 10-13절은 5절의 ‘내가…그 가운데에서 영광이 되리라’라는 주제를 반복하고 있으며, 환상의 내용을 더욱 구체적으로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10절에서 이스라엘이 기뻐할 이유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머물기 때문입니다. 이는 궁극적으로 언약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머물다’라는 동사는 성막에도 사용된 단어이며, 출애굽을 통해 이룬 언약 공동체의 회복을 시사합니다. 여호와의 임재가 언약 관계에서 하나님이 언약 백성의 하나님이 되심을 선언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듯이(출 29:45-46), 언약의 파기로 바벨론에 끌려갔던 이스라엘의 회복 또한 여호와께서 그들 가운데 머물겠다는 선언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11절의 ‘그 날에’는 문맥상으로는 여호와께서 회복할 미래의 어느 날을 가리키지만, 궁극적으로는 스가랴서 후반에서 충분히 발전되는 개념인 종말의 ‘여호와의 날’을 가리킵니다.

‘많은 나라가 … 내 백성이 될 것이요’라는 표현은 약에서 언약 백성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문구입니다(참조. 신 7:6; 14:2; 렘 24:7; 겔 11:20; 37:23). 뒤에 이어지고 반복되는 ‘나는 네 가운데에 머물리라’라는 표현 역시 언약적인 회복을 시사하며, 여기서 ‘그 날’은 언약의 회복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돌아오는 것은 새 언약의 성취 장면에서 자주 언급됩니다(참조, 사 2:2-3; 56:6-8; 미 4:1-2). 이 표현은 종말론적인 어투가 짙은 스가랴서 후반부에서도 다시 언급될 것입니다(슥 14:16). 이는 원래 아브라함의 언약에서 예언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3). 또한 시내산 언약에서도 나타났습니다.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출 19:6)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적인 맥락에서 스가랴서는 하나님의 약속이 미래에 이루어질 것임을 종말론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편, 12-13절의 예루살렘을 다시 택한다는 선언은 예루살렘의 회복이라는 맥락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으며(1:17), 여기서는 많은 나라가 하나님 앞에 돌아온다는 선언과 함께 한층 더 발전된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주변 열국의 심판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세상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대국으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팔레스틴 땅 그곳에 정한 경계 안에서 걱정 없이 살게 하십니다. 다만 주변 나라들을 흥하게도 하시고 쇠하게도 하시는 방법으로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기도 하시고 벌을 주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그 가운데 영광이 되시므로 아무리 강한 나라라도 이스라엘을 넘보지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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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01-02)


홍마 탄 사람과 내 뿔의 환상

스가랴 1장 7-21절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개입해 들어오시는 날이 여호와의 날입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도무지 변화가 없는 것 같아도 결국 주께서 내 기도에 응답하시는 날이 옵니다. 그날에는 주님을 믿고 섬긴 자들에게는 복 있는 날이 되지만, 주님을 섬기기를 싫어하고 게으름을 피운 자들에게는 심판이나 재앙의 날이 됩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반드시 응답하실 날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 스가랴 1:7-6:8에서 여러 환상이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 7-17절에서는 첫째 환상이 나오고, 18-21절에서는 둘째 환상이 나옵니다. 첫째 환상에서는 ‘붉은 말을 탄 자’가 여러 색의 말들과 더불어 온 땅을 두루 돌아다니며 세상을 관찰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둘째 환상에서는 네 뿔과 네 대장장이의 모습을 통해 유다와 주변 나라들의 운명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 환상:붉은 말을 탄 자(7-17)

어떤 사람들은 밤에 불이 들어오는 수많은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나라에 복음의 꽃이 피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수많은 교회가 교회로서 책임과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장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수의 교회와 목회자가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말씀과 삶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 노력하지만 그렇지 않은 때도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이중성과 교회의 순결하지 못한 모습에 대해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면 철저히 회개하고 죄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7다리오 왕 제이년 열한째 달 곧 스밧월 이십사일에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니라 8내가 밤에 보니 한 사람이 붉은 말을 타고 골짜기 속 화석류나무 사이에 섰고 그 뒤에는 붉은 말과 자줏빛 말과 백마가 있기로 9내가 말하되 내 주여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하니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이들이 무엇인지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니 10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땅에 두루 다니라고 보내신 자들이니라 11그들이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여호와의 천사에게 말하되 우리가 땅에 두루 다녀 보니 온 땅이 평안하고 조용하더이다 하더라 12여호와의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려 하나이까 이를 노하신 지 칠십 년이 되었나이다 하매 13여호와께서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으로 대답하시더라 14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너는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예루살렘을 위하며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15안일한 여러 나라들 때문에 심히 진노하나니 나는 조금 노하였거늘 그들은 힘을 내어 고난을 더하였음이라 16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불쌍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에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쳐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17그가 다시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 여호와가 다시 시온을 위로하며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리라 하라 하니라(7-17)

 

이스라엘은 성전 재건이 주변 방해로 중단되자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는지 의심하며 나태해졌습니다. 학개 선지자의 독려로 공사는 재개되었습니다. 스가랴가 회개하라는 첫 메시지를 전한지 석 달 째 하나님께서는 8개의 환상을 통해 종말적 구원을 생생한 그림 언어로 약속 보증하십니다.

 

(1) 시대적 배경(7)

 

“다리오 왕 제이년 열한째 달 곧 스밧월 이십사일에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니라.” 스가랴서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받은 시간에 대한 언급은 주제의 흐름이 어떻게 전환되는지를 알리는 표시어 역할을 합니다.

 

(2) 첫째 환상의 내용(8-11)

 

이 환상에서는 붉은 말을 타고 있는 ‘한 사람’을 주목합니다. 여호와의 사자와의 대화를 통해 이 사람(또 다른 여호와의 사자)을 소개합니다. 또 이 사람의 행동을 말한 후에 다시 여호와의 사자와의 대화 내용이 나옵니다. 이 한 사람이 무엇을 보았는지가 이 환상의 핵심 주제인 것입니다. 한 사람이 골짜기 속 화석류나무 사이에 서 있습니다. ‘화석류나무’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흔한 관목으로 뿌리가 깊게 내리며 겨울에도 푸름을 유지합니다. 이런 점에서 화석류나무는 생명의 재탄생(rebirth)을 의미합니다. 이사야 41:19-20과 55:13에서도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맥락에서 이 나무가 표현되고 있습니다. 특히 성전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나무이기에, 환상에서 화석류나무를 보는 것은 새로운 시작과 관련한 메시지임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8절에 ‘붉은 말을 탄 자’와 더불어 여러 색의 말이 등장하는데, 여기 등장하는 말들이 다시 6장의 환상에 등장합니다(비록 같은 색은 아니지만). 색이 상징하는 의미보다는 말들이 활기차게 온 땅을 두루 돌아다니는 모습에 더 주목해야 합니다. 이 말들이 두루 돌아다니는 것(10)은 여호와의 통치 영역이 온 세상에 두루미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여호와의 주권이 온 세상에 미친다는 메시지는 스가랴서의 맥락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학개서와 마찬가지로 스가랴서는 성전 건축이 중단된 상황을 주요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성전 건축이 중단된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의 주권에 대해 회의하고 불신하였기 때문입니다. 포로에서 돌아오고 나서 성전 재건을 시작했지만 여러 어려움을 연달아 겪고 외부 세력들의 방해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에 대한 신념이 스가랴서의 주요 신학적 주제로 등장한 것입니다. 말들이 온 세상을 두루 다니듯이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온 세상을 주권적으로 다스리고 계십니다.

11절에서 ‘붉은 말을 탄 자’는 ‘온 땅이 평안하고 조용하더이다’라고 합니다. 평안하고 조용한 모습은 이스라엘 주변 강대국들이 방해받지 않고 승승장구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온 땅의 모습은 이스라엘의 불안정한 상황과 대조적입니다. 이스라엘은 포로에서 돌아와 정착하며 성전을 재건하고 과거의 모습을 회복하려 했지만, 그리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서는 여호와에 대한 불신과 의구심이 편만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온 땅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평화롭기만합니다. 여기서 여호와에 대한 신학적 질문이 나타납니다. 여호와의 백성이 왜 회복을 볼 수 없습니까? 오히려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나라, 불의한 나라가 평안합니까? 환상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대답하기 시작하십니다.

 

(3) 첫째 환상의 의미(12-17)

 

7-11절이 환상의 내용을 보여주었다면, 12-17절에서는 환상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보여줍니다. 12절의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려 하나이까”에서 ‘언제까지’는 여호와의 긴 침묵을 한탄하는 표현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에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에 대해 호소하고 있습니다. 12절의 ‘칠십 년’은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에서 언약 파기에 대한 징벌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벨론 포로 기간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사 23:15-17; 렘 25:11; 29:10). 그러나 고레스 칙령이 있던 주전 538년 이후 1차 포로귀환이 있은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여호와의 회복은 요원합니다.

13절의 여호와께서 천사에게 하신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14-15절은 환상이 보여주는 의미의 핵심에 해당합니다. ‘붉은 말을 탄 자’가 여러 색의 말들과 함께 세상을 두루 다녀 관찰한 결과, ‘온 땅이 평안하고 조용하게’(11) 보이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시온을 위해 크게 질투하실 것입니다. 자신들은 안전할 것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는(15) 여러 나라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심히 진노하실 것입니다. 여기서 ‘질투’는 결혼 관계에서 사용되는 용어이며, 구약 성경에서 종종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남편으로 묘사해 질투하는 하나님으로 소개하곤 했습니다(참조, 출 20:5; 겔 5:13;8:3;16:38).

16-17절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질투하신 결과로 나타나게 될 구체적 양상을 묘사합니다. 학개와 스가랴 당시 주요 관심사였던 성전 건축과 관련한 메시지가 여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 집’은 여호와의 성전을 의미하지만 건물로서의 성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며,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회복된 모습을 뜻합니다. 성전에서 거슬러 올라가면 성막이 있습니다. 이 성막은 출애굽 후 시내 산에서 언약을 맺을 때에 이스라엘 가운데 나타나신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합니다(출 25:22; 29:44-45).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겨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그 위에 먹줄을 치시겠다고 합니다(16). 여기 ‘먹줄’(측량줄)은 파괴와 건설, 혹은 회복 모두를 상징하는 말로 성경에 쓰이고 있습니다(파괴: 왕상 21:13; 사 34:11; 애 2:8/건설 : 왕상 7:23: 대하 4:2; 겔 47:3). 16절의 성전과 예루살렘(여호와의 거주 장소를 상징) 회복에 이어, 17절에서는 ‘내 성읍’, 곧 땅의 회복을 다시 확증하고 있습니다. 땅은 언약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로, 땅의 회복은 언약의 회복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신 28:11; 30:9).

 

둘째 환상:네 뿔과 네 대장장이(18-21)

성도가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데 방해 요인이 되는 것은 미디어에서 쏟아져 나오는 세속적 사상, 출세 지향적 가치관, 성적 유혹과 도덕적 타락 등입니다. 물론 이보다 더 다양한 요인들이 신앙생활을 저해하고 성도를 성결한 생활로부터 이탈하도록 만듭니다. 그렇다면 마귀의 당한 뿔을 부러뜨릴 수 있는 것은 기도, 말씀, 영적 훈련, 예배의 회복일 것입니다.

 

18○내가 눈을 들어 본즉 네 개의 뿔이 보이기로 19이에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묻되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하니 내게 대답하되 이들은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흩뜨린 뿔이니라 20그 때에 여호와께서 대장장이 네 명을 내게 보이시기로 21내가 말하되 그들이 무엇하러 왔나이까 하니 대답하여 이르시되 그 뿔들이 유다를 흩뜨려서 사람들이 능히 머리를 들지 못하게 하니 이 대장장이들이 와서 그것들을 두렵게 하고 이전의 뿔들을 들어 유다 땅을 흩뜨린 여러 나라의 뿔들을 떨어뜨리려 하느니라 하시더라(18-21)

 

스가랴 1장 18절에서 스가랴 선지자가 네 개의 뿔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내가 눈을 들어 본즉 네 뿔이 보이기로”(슥 1:18). 이 뿔은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헤친 뿔이라고 했습니다. 헤쳤다는 것은 흩어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 개의 뿔은 정치적인 힘을 의미합니다. 네 개의 정치적인 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온 세계로 헤쳐 놓았다는 것입니다.

 

(1) 네 뿔의 환상(18-19)

 

7-17절의 첫 환상에서 세상의 평온함은 겉모습만 그러할 뿐임이 드러났습니다. 곧 여호와께서 개입하셔서 예루살렘의 회복(1:16-17)을 통해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때, 세상의 참 평안이 찾아옵니다. 둘째 환상은 회복의 측면을 더욱 발전시켜 ‘뿔’로 상징되는 강력한 대적이 이스라엘을 괴롭힐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둘째 환상은 아울러 하나님이 세운 ‘뿔’을 상대하는 ‘대장장이’를 통해, 대적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할 것 보여줍니다. 짧은 단락이지만 각각 뿔과 대장장이에 대한 환상을 보여주고, 그 환상의 의미를 설명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회복시킬 것에 대해 확증해주고 있습니다. 18절의 ‘뿔’은 뿔 있는 동물의 힘을 상징합니다. 비유적인 의미로 힘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신 33:17; 삼상 2:1-10; 왕하 22:11; 렘 48:25; 단 8:20-21;시 18:2; 75:10; 92:10).

 

(2) 네 대장장이의 환상(20-21)

 

숫자 넷은 구체적으로 네 나라를 의미한다기보다는 사방의 방향을 가리켜서 이스라엘을 공격한 사방의 강대국들을 포괄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사방에서 쳐들어오는 무시무시한 대적을 가리킵니다(참조. 사 11:12; 렘 49:36; 겔 7:2; 37:9; 단 7:2). 여기서 ‘흩뜨렸다’는 것은 포로로 추방당했다는 뜻입니다. 역사적으로는 앗수르가 주전 722년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으며, 바벨론은 주전 586년 남유다를 멸망시켰습니다. 이 포로(추방) 개념은 언약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언약을 깨뜨린 결과(레 26장: 신 28장)로 임하는 언약의 저주 가운데 하나가 이 흩어짐입니다. 20절의 ‘대장장이’는 다양한 유형의 기술자를 의미합니다. 여기서는 어떤 종류의 일을 하는가 보다는 ‘뿔’ 넷에 대응해 이들을 처리하는 그의 파괴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사 54:16에서 무기를 만드는 자로 대장장이를 언급한 바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 속에서는 항상 핍박받고 멸시당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일곱 금 촛대 사이에 거하신다고 나와 있고, 스가랴 1장에서도 화석류나무 사이에 거하신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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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01-01)


깨어 여호와의 날을 대비하라

스가랴 1장 1-6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어느 시대, 어느 상황을 막론하고 죄악에서 돌이킬 것을 기다리셨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은 둔하고 어리석어 이 하나님의 인내와 자비를 등한시할 때가 너무 많았습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는 광야 40년 동안 복 주시기 위해서 많은 권면과 훈련으로 인내하셨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조상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들을 잊어버리곤 하였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선지자를 통하여 잘못을 촉구하고 회개를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 스가랴 1:1-6은 스가랴서 전체의 서론적인 역할을 합니다. 저자는 가장 중요한 주제를 먼저 제시한 후에 이 주제를 확대 발전시키는 방식으로 전개합니다. 이스라엘 조상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면서 현 세대를 향해 회개와 순종을 촉구합니다. 핵심 구절은 3절에 나오는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입니다.

 

시대적 배경(1)

하나님께서는 다른 길로 가는 백성들에게 경고하십니다. 경거를 무시한 채 욕심대로 행한 사람들에게 진노하셨습니다. 그들은 악한 길을 떠나 돌아오기를 촉구하셨던 음성을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며 행한 대로 갚으십니다. 선을 행한 자는 영생의 부활로, 악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1다리오 왕 제이년 여덟째 달에 여호와의 말씀이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1)

 

스가랴서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이 임한 시기를 세 번 언급합니다(1:1; 1:7; 7:1). 이는 스가랴가 여호와에게서 받은 예언의 시기를 가리키는 동시에 스가랴서 전체의 흐름을 가늠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곧 장면이 바뀌거나 주제의 흐름이 전환되는 것을 가리키는 표시어(marker)에 해당합니다. 시간에 대한 언급을 중심으로 1:1-6과 1:7-6:15과 7:1-8:23이 구분되고, 9장 이후부터는 시간에 대한 언급과는 다른 표시어가 나옵니다. 전혀 다른 표시어는 주제의 흐름이 더 크게 바뀐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회개와 회복(2-4)

믿음의 선조들의 삶을 통해 거울삼아 속히 돌아가야 합니다. 악을 떠나 하나님께로 오면, 하나님께서 돌아와 함께 거하겠다고 하십니다. 죄를 범했을지라도 회개하고 돌아가면 주께서는 용서하시고 품어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성전 재건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돌아가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2여호와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 3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4너희 조상들을 본받지 말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위를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2-4)

 

스가랴서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의 성전 재건 문제를 다룹니다. 하나님께서는 땅 위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실 것입니다. 짐승과 새와 고기뿐 아니라 사람들도 그리하실 것입니다. 이 엄중한 심판은 유다 민족을 대표하는 예루살렘을 향해 집중적으로 선포됩니다.

 

(1) 조상들에 대한 심판(2)

 

“여호와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이 표현이 스가랴를 통해 전달되는 첫 메시지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는 아마도 당시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이 가지고 있었던 신학적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전달된 메시지였을 것입니다. 스가랴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온 상황이었지만, 여전히 자신들의 포로 됨에 대한 신학적 질문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스가랴 당시(주전 520년경) 이스라엘이 주전 538년 1차로 바벨론에서 돌아오고 성전 건축을 시작했으나, 내외의 어려움으로 중단된 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습니다. 또한 국제 정치와 경제적으로도 이스라엘은 여전히 나아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 이스라엘은 더더욱 포로 됨에 대한 신학적 질문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남유다는 왜 바벨론에 멸망하여 포로로 끌려가게 됐는가?’ 다시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고 신앙 공동체를 회복해야 할 임무를 부여받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여호와에 대한 의문을 갖고 있었습니다. ‘과연 여호와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인가? 살아계신 하나님인가?’ ‘하나님이 능력의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의 백성이 멸망하고 포로로 끌려가게 허락했겠는가?’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려 할 때, 왜 성전 재건에 대한 방해가 있었는가?’ ‘과연 성전을 재건하는 게 의미가 있는 일인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전하는 메시지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무능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무능하셔서 그의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는 어려움에 처했고, 돌아와서도 성전 재건과 더불어 공동체 재건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조상들의 문제였습니다. 그들의 죄악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셨고, 하나님의 심판으로 그들이 포로로 끌려간 것입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어 약속과는 달리 성전과 신앙 공동체의 재건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온전히 돌아오지 않는 ‘너희’에게 있습니다.

 

(2) 회개와 회복의 메시지(3)

 

‘너희의 조상들에게’는 과거 불순종한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과거에 대한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 시점의 이스라엘에게도 이 말씀은 그대로 해당합니다. 선지자는 지금 과거 이스라엘 모습에 빗대어 현재 이스라엘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2절의 이 말씀(“여호와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은 하나님께서 선지자 스가랴와 ‘너희’(현재의 이스라엘)에게 전하는 첫 메시지입니다. 이후 스가랴 선지자는 이 메시지를 확장 발전시킵니다. 3절의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에서 ‘그들’은 스가라 당시의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2절에서 ‘너희 조상들’을 이야기하고, 4절에서 다시 ‘너희 조상들을 본받지 말라’고 하면서 조상들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지만, 단락의 주요한 초점은 현재의 이스라엘에 있습니다.

또한 이 단락의 핵심 표현은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돌아가리라’입니다(참조, 호 6:1; 암 4:6,8,9; 말 3:7). 이 표현은 스가랴서 전체의 주제를 통제하기도 합니다. 이후에 나오는 환상이나 ‘여호와의 날’에 대한 반복적인 언급처럼 양상은 달라지지만, 이 핵심 주제는 스가랴서 전체를 통해 유지됩니다. 동일한 동사 ‘슈브’를 가지고 ‘돌아오다’와 ‘돌아가다’를 표현했지만, 이 동사는 이스라엘의 회개와 여호와의 회복이라는 주제를 모두 전달합니다.

 

(3) 조상들을 본받지 말라(4a)

 

이전 세대가 선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 자신들의 악한 행위에서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의 땅을 물려받았지만, 그들은 결국 땅을 빼앗기고 포로로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6절에서는 이런 비극이 이스라엘이 범한 악한 행위로 인해 심판을 받았기 때문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그들이 돌이켜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 길대로, 우리 행위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고 뜻하신 것을 우리에게 행하셨도다”). ‘악한 길’과 ‘악한 행위’는 병행을 이루며 이스라엘의 악한 행위를 지적합니다.

 

(4) 순종하지 않았던 조상들(4b)

 

그뿐만 아니라 조상들이 듣지 아니하고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지적하는데(“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위를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조상들의 불순종을 가리키지만, 궁극적으로는 현 세대 이스라엘 역시 조상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과 법도(5-6)

기회는 영원히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후회가 남지 않도록 기회가 있을 때, 두려우신 하나님께 속히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아직까지도 이방인의 가치관으로 살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그 법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5너희 조상들이 어디 있느냐 또 선지자들이 영원히 살겠느냐 6내가 나의 종 선지자들에게 명령한 내 말과 내 법도들이 어찌 너희 조상들에게 임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돌이켜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 길대로, 우리 행위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고 뜻하신 것을 우리에게 행하셨도다 하였느니라(5-6)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자신과 백성의 관계가 올바로 세워지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서 돌아와 가장 먼저 착수해야할 고적인 과업은 성전 재건축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변의 방해와 불리한 상황으로 인해 그 과업에 대한 열망은 식고 건축이 중단되었습니다.

 

(1) 조상들과 선지자들의 운명(5)

 

5절에서의 “너희 조상들이 어디 있느냐 또 선지자들이 영원히 살겠느냐”라는 표현은 6절의 ’내 말과 내 법도‘가 영원하며 끝까지 미치는 것과 대조됩니다. 이를 통해 조상들이나 심지어 말씀을 전했던 선지자들도 영원하지 않으며 일시적일 뿐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2) 대조되는 하나님의 말씀과 법도(6)

 

6절에서는 조상들이나 선지자들은 일시적인 존재들이지만, 여호와의 말씀과 법도(율법)는 반드시 이루어지며 그 행한 대로 결과를 낳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6절의 “내 말과 내 법도들이 어찌 너희 조상들에게 임하지 아니하였느냐”는 여호와 말씀대로, 곧 율법에 기록한 대로 조상들에게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이 의미는 6b절에서 조상들이 스스로 하는 말에서도 드러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길대로, 우리 행위대로’ 행하셨다는 표현에서도 하나님께서 조상들을 심판하신 근거가 그들에게 임한 여호와의 법도와 말씀이었음을 알려줍니다(여기서 ‘우리’는 조상들이 자신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시내산 언약(레 26장)과 모압 언약(신 28장)에서 언약적인 저주와 축복을 선포하여 언약에 충실할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이 언약에 따라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앗수르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점령과 정착보다 중요한 것은, 그 땅을 주신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 충실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를 따라 제사장 나라로서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출 19:6). 현재의 이스라엘은 언약의 길을 떠난 조상들을 하나님께서 쫓아내시고 포로로 만드신 비극의 역사를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 땅을 차지한 것이 끝이 아니듯이, 포로에서 돌아온 것이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역사에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의도와 뜻이 무엇인지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불순종하여 벌을 받은 조상들의 행적은 오늘을 향한 경고가 됩니다. 악한 선조들의 전철을 밟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호와께 돌이켜야 할 만큼 주께로부터 떠나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복을 예배하고 계십니다. 헛된 것에서 돌이켜 어서 속히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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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 서론


스가랴 서론


스가랴서의 서론은 학개서의 첫 부분과 비슷합니다. 이 책의 배경은 모두 다리오 왕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가랴와 학개는 같은 시대에 사역했던 선지자들이며, 동일한 사건을 예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스가랴서와 학개서를 함께 읽으면 두 성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1. 명칭

본서의 제목은 ‘스가랴’입니다. 히브리 성경은 하나님께서 기록하게 하신 저자의 이름을 따서 그 제목을 ‘스가랴’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스가랴는 ‘여호와를 기억하셨다’이란 뜻입니다.

 

2. 저자

본서의 저자는 제사장 잇도의 손자이며 베레갸의 아들인 스가랴입니다. 학개와는 다르게 그가 출생한 족보를 잘 소개됩니다. 그에게 하나님 말씀이 직접 임했으며(1:1,7,4:8,6:9,7:8,8:18), 스가랴 자신을 1인칭 ‘내가’로 칭한 점에서 확인됩니다(1:8,9,14,18, 2:1).

 

3. 기록 연대

본서 자체에는 정확한 기록 시기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스가랴의 활동 시기를 본서의 저작 시기로 보고 있습니다. 그는 잇도의 아들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잇도는 귀한 공동체에서 꽤 유명한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스가랴가 처음 말씀을 선포할 때가 다리오 왕 2년 8월(B.C.520)이고 마지막으로 말씀을 선포한 시기가 다리오 왕 4년 9월(B.C.518)입니다(1:1, 7:1). 그러므로 본 서의 기록 시기는 바사(페르시아) 포로 귀환 이후인 B.C.520-518년 경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4. 기록 목적

스가랴서는 유다 백성으로 하여금 성전을 재건하며 영적 부흥을 도모하도록 격려하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당시 바사에서 49,897명이 귀환했는데, 그들은 성전을 재건하고자 하는 큰 소망을 가지고 귀환했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번제단을 만들고 예배를 드리고 귀환한 지 2년 2개월만에 성전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여러 가지 방해를 받게 되었고, 성전 건축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중단된 건축 사역은 약 16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스가랴는 유다 백성을 고무시켜 성전 재건을 완수하도록 하려고 하나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5. 기록 배경

유다 백성이 3차에 걸쳐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습니다. 1차 포로는 B.C.605년 유다왕 여호야김 3년에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2차 포로는 B.C.597년 유다왕 여호야긴 1년에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3차 포로는 B.C.586년 유다왕 시드기야 11년에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신 대로 70년이 차자 바사왕 고레스를 감동시켜 유다 백성이 유다로 귀환해도 좋다는 조서를 내리게 합니다. 그래서 유다 백성이 3차에 걸쳐 귀환하게 됩니다. 1차 귀환은 B.C.537년 바사왕 고레스 때 스룹바벨과 예수아의 지도 하에 49,897명이, 2차 귀환은 B.C.458년 바사왕 아닥사스다 때 에스라의 지도하에 1,754명이, 3차 귀환은 B.C.444년 바사왕 아닥사스다 때 느헤미야의 지도하에 (통계는 나와 있지 않음)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1차로 귀환한 자들이 고레스왕의 조서가 내려진지 2년만에 성전 기초를 놓았습니다. 하지만 주변 민족들의 악의적인 고소를 하므로 유다 백성이 흔들리게 되고 급기야 성전 건축을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성전 중단의 이유를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재건 의지를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스가랴는 유다 백성에게 불신적 태도를 깨우지려 노력했고 그 후 비로소 다리오왕이 즉위하여 성전 재건을 허락하자 성전 재건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학 1:5).

 

6. 주제

본서는 성전 재건 중단으로 인해 혼돈과 분열에 빠지게 된 유다 백성을 다시금 성전을 재건하도록 격려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스가랴는 주로 미래 성전의 영광을 보이면서 백성들이 고통 속에서도 성전을 재건할 수 있다는 확신과 용기를 줍니다. 본서의 주제는 크게 두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성전 재건의 중요성입니다. 스가랴는 귀환한 유다 백성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모범적으로 실현하는 것이 번영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그 중에서도 예배 의식 회복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내적 신앙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성전 재건을 강조한 것입니다. 둘째는 메시야를 통한 승리의 기대입니다. 스가랴는 현재의 고통과 아픔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은 메시야가 궁극적으로 승리하고 영원히 통치할 때가 오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이 메시야의 임재의 처소가 되고 메시야로 인하여 유다의 미래가 번영을 이룰 것이라고 생각하여 유다 백성이 그 날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각성할 것을 촉구하게 됩니다.

 

7. 스가랴와 그리스도

스가랴는 이사야를 제외하고 그 어떤 선지자들 보다도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많이 했습니다. 본서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초림(3:8, 9:9,10, 11:11-13, 12:10, 13;1,6)과 그리스도의 재림(6:12, 14:1-21)에 대해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순(3:8), 제사장과 왕(6:13), 왕국 건설 자(9:9-10), 배신당해 팔리는 자(11:11-14), 구원자(13:9) 등으로 묘사했습니다.

 

 

8. 내용 구조

1부/ 메시야 왕국에 대한 환상과 현재의 명령

 

회개 촉구(1:1-6),

스가랴의 8가지 환상(1:7-6:8),

여호수아의 면류관(6:9-15),

금식에 대한 질문(7:1-3),

스가랴의 4가지 메시지(7:4-8:23)

 

2부/ 미래 메시야의 도래

 

배척받은 메시야(9:1-11:17)

메시야의 통치(12:1-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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