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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52-02)


예루살렘의 파괴와 회복의 희망

예레미야 52장 12-34절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신실하시며, 그분의 계획과 약속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우리는 어려운 시기에도 희망과 회복의 길을 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며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 여호와께 불순종한 결과로 바벨론에 의해 하나님 백성의 자랑거리인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잿더미가 되고 성벽이 허물어집니다. 성전 기물이 전리품으로 약탈당하고, 사로잡힌 자들은 처형을 당합니다. 예루살렘과 유다는 황무지로 변합니다.

 

예루살렘과 성전의 운명(12-16)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의 죄악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시며, 이는 정의와 공의를 실현하는 과정입니다. 성전의 파괴와 포로 생활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나타내며, 우리는 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회개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사건들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12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열아홉째 해 다섯째 달 열째 날에 바벨론 왕의 어전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13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과 고관들의 집까지 불살랐으며 14사령관을 따르는 갈대아 사람의 모든 군대가 예루살렘 사면 성벽을 헐었더라 15사령관 느부사라단이 백성 중 가난한 자와 성중에 남아 있는 백성과 바벨론 왕에게 항복한 자와 무리의 남은 자를 사로잡아 갔고 16가난한 백성은 남겨 두어 포도원을 관리하는 자와 농부가 되게 하였더라(12-16)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을 파괴하고, 성전 기물들을 포로로 잡아가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바벨론은 예루살렘의 남은 주민들을 포로로 잡아가고, 일부 사람들을 남겨두어 땅을 경작하게 합니다. 이로 인해 예루살렘의 공허함과 피폐함이 더욱 두드러지게 됩니다.

 

⑴ 성과 성전의 파괴(12-14)

 

예루살렘을 점령과 시드기야의 혹독한 징벌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보복이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열아홉째 해 다섯째 달 열째 날에’(5월 7일/열왕기하 28:8) 바벨론 왕의 어전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들어와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과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불태워 버립니다(12-13). 다윗 왕조의 두 기둥이었던 왕궁과 성전과 함께 예루살렘이 잿더미가 됩니다. 또 사령관이 이끄는 갈대아 사람의 부대는 ‘예루살렘 사면 성벽’을 모두 허뭅니다(14). 안전과 번영의 상징이 수치와 조롱의 상징으로 바뀌었습니다.

바벨론에 항복을 거부하고 18개월 동안 저항한 대가로 성이 잿더미가 되고 성벽이 헐립니다. 성전을 불태우는 것은 예외적인 경우로, 아마다 예루살렘 성전에 속한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이 끝까지 바벨론에 대항하여 싸우도록 부추겼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성벽은 주민의 안전과 보호에 필수적이었습니다. 성벽이 파괴된 성은 외부 위협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기에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은 목숨을 내놓고 살아야 했습니다.

 

⑵ 유배(15)

 

느부사라단은 성읍에 남아 있던 백성과 바벨론 왕에게 항복한 자들과 그 밖의 남은 자들을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15). 애굽 편에 서서 바벨론에게 대항하던 자들은 처절하게 죽임을 당했고, 항복한 이들과 남은 백성은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⑶ 남겨진 가난한 자들(16)

 

바벨론에게 반역할 능력이나 의지가 없어 보이는 빈민들만 남았습니다. ‘가난한 백성’을 얼마 남겨 포도원을 가꾸고 농사를 짓게 합니다(16; 참조.39:10). 유다의 정치와 종교와 사회를 지탱해온 자들은 모두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고, 가난한 하층 계급에 속한 자들만 남겨집니다.

 

성전의 기물들(17-23)

성전의 파괴는 하나님께서 백성의 죄와 교만을 심판하신 사건으로, 우리의 삶에서 정의와 공의를 실천해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성전과 기물의 상실은 하나님과의 중요한 영적 상실을 의미하며, 신앙 생활에서 그분의 임재와 영광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이러한 사건은 회개와 변화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기회를 제공하며, 우리의 영적 상태를 돌아볼 필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17갈대아 사람은 또 여호와의 성전의 두 놋기둥과 받침들과 여호와의 성전의 놋대야를 깨뜨려 그 놋을 바벨론으로 가져갔고 18가마들과 부삽들과 부집게들과 주발들과 숟가락들과 섬길 때에 쓰는 모든 놋그릇을 다 가져갔고 19사령관은 잔들과 화로들과 주발들과 솥들과 촛대들과 숟가락들과 바리들 곧 금으로 만든 물건의 금과 은으로 만든 물건의 은을 가져갔더라 20솔로몬 왕이 여호와의 성전을 위하여 만든 두 기둥과 한 바다와 그 받침 아래에 있는 열두 놋 소 곧 이 모든 기구의 놋 무게는 헤아릴 수 없었더라 21그 기둥은 한 기둥의 높이가 십팔 규빗이요 그 둘레는 십이 규빗이며 그 속이 비었고 그 두께는 네 손가락 두께이며 22기둥 위에 놋머리가 있어 그 높이가 다섯 규빗이요 머리 사면으로 돌아가며 꾸민 망사와 석류가 다 놋이며 또 다른 기둥에도 이런 모든 것과 석류가 있었더라 23그 사면에 있는 석류는 아흔여섯 개요 그 기둥에 둘린 그물 위에 있는 석류는 도합이 백 개이었더라(17-23)

 

바벨론의 군대가 성전의 기물들을 철저히 파괴하고, 성전의 금과 은 기구를 포함한 모든 보물을 약탈하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성전의 기물들은 그 당시 가장 귀중한 물품들로, 이들은 바벨론의 왕궁으로 옮겨집니다.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의 성전이 완전히 무너진 상징적 사건을 보여줍니다.

 

⑴ 약탈한 성전 기물 목록(17-19)

 

바벨론 점령 군대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놋과 음과 금으로 된 성전 기물들을 남김없이 약탈해갑니다(13-15). 약탈하여 바벨론으로 가져간 성전 기구들과 시설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바벨론 병사들이 가져간 것(17-18)과 시위대 장관이 가져간 것입니다(19).

 

⑵ 헤아릴 수 없는 놋 무게(20)

 

바벨론 병사들이 큰 놋 시설물들을 산산조각 내어 가져갑니다. 엄청난 무게의 량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⑶ 놋 기둥(21-23)

 

특별히 놋 기둥의 크기와 장식에 관한 언급을 합니다(열왕기상 7:41-42). 솔로몬 왕이 건축하였던 성전은 파괴되고 귀금속으로 만들어놓았던 성전 기물은 모두 약탈당합니다. 여호와의 축복 가운데 허락된 예루살렘 성전과 성전 제의가 그분의 심판으로 파탄에 떨어집니다.

 

고관들의 처형(24-27)

하나님께서는 죄와 불순종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며,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와 정의를 실현하는 과정으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본문은 회개와 변화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올바른 삶을 살아가야 함을 강조합니다.

 

24사령관이 대제사장 스라야와 부제사장 스바냐와 성전 문지기 세 사람을 사로잡고 25또 성 안에서 사람을 사로잡았으니 곧 군사를 거느린 지휘관 한 사람과 또 성중에서 만난 왕의 내시 칠 명과 군인을 감독하는 군 지휘관의 서기관 하나와 성 안에서 만난 평민 육십 명이라 26사령관 느부사라단은 그들을 사로잡아 리블라에 있는 바벨론의 왕에게 나아가매 27바벨론의 왕이 하맛 땅 리블라에서 다 쳐 죽였더라 이와 같이 유다가 사로잡혀 본국에서 떠났더라(24-27)

 

유다 멸망에 관한 보고는 사로잡힌 종교 지도자들과 고위 관료들과 군사 지도자들이 립나로 끌려가 처형당하는 이야기로 끝을 맺습니다. 대제사장 스라야(참조. 대상 6:14-15)와 부제사장 스바냐(참조. 21:1;29:26; 37:3)와 성전 문지기 세 사람(참조. 35:4; 왕하 12:9; 23:4), 군사를 거느린 지휘관 한 사람, 왕의 시종 일곱 명, 백성을 징집하는 서기관 한 명과 ‘평민’(땅을 소유한 유다의 지도자들 또는 일반 시민들?) 육십 명이 사로잡혀 처형당합니다. 유다의 통치 계급이 철저하게 궤멸됩니다.

 

고관들의 처형(28-30)

하나님께서는 당장 심판하시는 것 같지 않아도, 직접 말씀하신 심판은 반드시 행하시는 분입니다. 혹시 즉각 심판이 내리지 않는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방심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의식하며 행동해 나가야 합니다.

 

28느부갓네살이 사로잡아 간 백성은 이러하니라 제칠년에 유다인이 삼천이십삼 명이요 29느부갓네살의 열여덟째 해에 예루살렘에서 사로잡아 간 자가 팔백삼십이 명이요 30느부갓네살의 제이십삼년에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사로잡아 간 유다 사람이 칠백사십오 명이니 그 총수가 사천육백 명이더라(28-30)

 

예루살렘이 파괴된 후 유다에서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의 수를 언급합니다. 총 4,600명이 포로로 끌려갔으며, 이는 유다의 큰 재앙과 심각한 상황을 반영합니다. 이 통계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유다의 고난을 강조하는 부분입니다.

 

(1) 1차 유배(28)

 

이 세 구절은 예레미야서의 특별자료로 열왕기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 보고에 따르면 ‘제칠년에’ 3023명의 유다 사람이, ‘느부갓네살의 열여덟째 해에’ 예루살렘에서 사로잡힌 자 832명이, ‘느부갓네살의 제이십삼년에’ 745명의 유다 사람이 유배를 당했습니다. 전체 4600명으로 비교적 적은 수의 사람이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597년의 제1차 유배를 보고하는 열왕기하 24:14-16에 따르면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과 모든 지도자와 모든 용사 만 명과 모든 장인과 대장장이’(14) 또는 ‘용사 칠천 명과 장인과 대장장이 천명’(16)이 유배를 당합니다. 개략적 숫자를 제공해주는 열왕기의 보고와 달리 예레미야서의 목록은 끝자리까지 정확하게 제시해줍니다. 또 바벨론 왕의 연대기에 따라 세 차례의 유배를 꼭 필요한 내용만 보고하는 것도 주목할 만합니다. 전체적으로 예레미야서의 목록이 바벨론의 공식적인 자료에서 나왔을 가능성을 시사해줍니다.

 

(2) 2차 유배(29)

 

특히 587년의 제2차 유배민 832명은 제1차 유배민 3023명에 비해 지나치게 적습니다. 열왕기는 제2차 유배민의 수에 관해서는 달리 언급하지 않습니다. 유배민을 부르는 이름이 첫 번째와 세 번째 유배에서는 ‘유다 사람’이고 두 번째 유배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잡아 간 자’로, 서로 다릅니다. 아마도 ‘예루살렘에서 잡아 간 자’는 전체 유배민들 가운데 그런 이름으로 분류된 집단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느부갓네살의 제이십삼년에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유다 사람 745명을 사로잡아 갔다는 보고는 여기에만 나옵니다.

 

(3) 3차 유배(30)

 

582년의 세 번째 유배가 느부갓네살이 임명한 유다 총독 그다랴를 살해한 사건에(참조. 41:1-3) 대한 바벨론의 보복으로 이뤄진 유배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윗 집안에 속한 이스마엘에 의한 그다랴 암살이 세번째 유배의 역사적 배경이라면, 그다랴는 582년 암살당하기까지 대략 5년 동안 유다를 통치합니다. 때로는 세 번째 유배를 느부갓네살이 요단 동편 나라들을 점령할 때 파생된 사건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여호야긴의 사면(31-34)

하나님께서는 모든 상황 속에서 자신의 백성을 회복시키시며, 그분의 약속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야긴을 회복시키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희망과 회복의 길을 열어 주시며, 그분의 계획을 신뢰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여호야긴의 회복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상기시킵니다.

 

31유다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 지 삼십칠 년 곧 바벨론의 에윌므로닥 왕의 즉위 원년 열두째 달 스물다섯째 날 그가 유다의 여호야긴 왕의 머리를 들어 주었고 감옥에서 풀어 주었더라 32그에게 친절하게 말하고 그의 자리를 그와 함께 바벨론에 있는 왕들의 자리보다 높이고 33그 죄수의 의복을 갈아 입혔고 그의 평생 동안 항상 왕의 앞에서 먹게 하였으며 34그가 날마다 쓸 것을 바벨론의 왕에게서 받는 정량이 있었고 죽는 날까지 곧 종신토록 받았더라(31-34)

 

유다 왕 여호야긴이 바벨론의 에빌-메록 왕에게 석방되어 존중받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여호야긴은 바벨론에서의 포로 생활 중에도 권력을 일부 회복하고, 매년 식사를 제공받으며 명예로운 대우를 받습니다. 이로 인해 여호야긴의 삶은 비록 포로였지만 존경받는 위치로 변화하게 됩니다.

 

(1) 사면과 높임(31-33)

 

597년 바벨론으로 끌려간 유다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 지 삼십칠 년이 되는 해, 곧 느부갓네살의 아들 에월므로닥(562-560)이 왕위에 오른 바로 그해 열두째 달 스물다섯째 날에 감옥에서 석방됩니다(병행기사인 왕하 25:27에는 ‘십이월 그 달 이십칠일’로 나온다). 왕위 등극에 따른 일반 사면으로 다른 왕들과 함께 풀려났던 것 같습니다. 열여덟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석 달을 다스리다가(왕하 24:8) 바벨론으로 끌려간 여호야긴에게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던(대상 3:17-18) 것을 보아 그가 처음부터 감옥에 갇혔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초기에는 인질의 신분이었다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중도에 옥에 갇히게 됐던 것 같습니다. ‘머리를 들어 주었고’는 원래 왕을 알현할 때의 의례적인 행위와 관련된 표현으로, 여기서는 ‘사면하다’를 의미합니다. 에월므로닥은 여호야긴을 남달리 대우해줍니다(32). ‘그에게 친절히 말하고’는 문자적으로는 ‘그에게 좋은 것들을 말하고’로 아마도 친절 이상의 좋은 관계를 시사해주는 것 같습니다. 현재의 문맥에서 이 표현은 9절의 ‘그가 그를 심문하니라 (판결하니라)’에 대비됩니다. 에월므로닥은 바벨론에 사로잡혀 온 다른 왕들의 자리보다 높은 곳에 여호야긴의 자리를 마련해줍니다. 감옥에서 풀려난 여호야긴은 죄수복을 벗고 평생 동안 언제나 바벨론 왕 앞에서 음식을 먹게 되었습니다(33; 참조. 삼하 9:7,10,13).

 

(2) 양식의 공급(34)

 

또 여호야긴은 바벨론 왕이 정해준 일정한 생계비를 ‘죽는 날까지 곧 종신토록’ 받았습니다(34). ‘그가 날마다 쓸 것’은 여호야긴과 그의 가족이 생활하는 데 필요한 물품을 가리킵니다. 여호야긴의 석방 기사는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의 역사가 멸망과 유배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시작과 소망이 있을 것을 어렴풋이나마 시사해줍니다. 예레미야는 24장에서 무화과 열매 두 광주리의 환상을 통해 하나님 백성의 남은 자들이 가나안이나 애굽이 아니라 바벨론의 제1차 유배민들 가운데 있을 것을 선포했습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유배의 암울한 시기를 살아가는 중에 들려온 여호야긴의 석방 소식은 적어도 유배민들에게는 유다 회복의 서곡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상황 속에서 자신의 백성을 회복시키시며, 그분의 약속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성전의 파괴와 예루살렘의 멸망 속에서도 여호야긴의 회복을 통해 희망의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여호야긴의 회복은 어려운 시기에도 희망과 회복의 길을 열어 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며,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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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52-01)

 


시드기야의 불순종과 예루살렘의 함락

예레미야 52장 1-11절


 

예배와 순종은 동전의 양면처럼 우선순위를 매길 수 없습니다. 에배는 신앙의 정체성을 강화하면 순종할 능력을 줍니다. 일상과 일터에서 말씀대로 신실하게 순종할 때, 우리 예배는 감격과 격려를 주고 받는 시간이 됩니다. 순종의 삶과 예배의 감각이 유지되고 있습니까?

 

  • 민족들의 신탁이 끝나고 다시 예레미야서의 중심 주제인 유다의 심판으로 돌아옵니다. 예루살렘과 유다의 멸망에 관한 예레미야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됩니다. 여호와의 진노로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시드기야는 포로로 잡혀갑니다.

 

시드기야의 통치와 여호와의 징벌(1-3a)

죄는 무지와 어리석음입니다. 영적 분별력이 덜어지면 사물과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기 쉽지 않습니다. 욕심과 오만은 지혜를 앗아가고 분별의 영을 흐리게 합니다. 우상과 도덕적 부패에 물든 시드기야는 무고하게 바벨론에게 반기를 듭니다. 그것은 애국심이 아니라 국가를 망하게 하는 지름길이었습니다.

 

1시드기야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일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일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하무달이라 립나인 예레미야의 딸이더라 2그가 여호야김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지라 3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에게 진노하심이 그들을 자기 앞에서 쫓아내시기까지 이르렀더라(1-3a)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의 통치를 간결하게 보고합니다. 스물한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시드기야는 예루살렘에서 십일 년(597-587)을 통지합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 삼은 유다 왕 여호아긴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그의 삼촌 맛다니야를 왕위에 앉히고 그의 이름을 시드기야로 바꿔주었습니다(열왕기하 24:17).

시드기야는 요시야의 셋째 아들로(대상 3:15), 그의 어머니는 하무달로 립나 출신 에레미야의 딸이었습니다. 요시야가 죽은 후 백성에 의해 그의 후계자로 세움을 받았다가 바로 느고에 의해 애굽으로 잡혀간 여호아하스의 어머니도 하무달입니다(열왕기하 23:31). 시드기야에 관한 신학적 평가는 부정적입니다. 그는 여호야김처럼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저질렀습니다(2). 보통은 아버지가 비교의 대상으로 등장하는데(참조, 열왕기하 15:3,34; 21:20; 24:9), 시드기야는 그의 배다른 형 여호야김에 비교됩니다. 3b절은 유다의 멸망에 관한 신학적 요약입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를 당신 앞에서 쫓아내시기까지 그들이 그분을 진노하시게 했습니다.

 

예루살렘의 함락과 시드기야의 운명(3b-11)

정의와 자비를 실행하지 않을 때 자기중심적 욕망에 갇혀서 죄악의 종노릇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 노예의 삶을 삽니다. 나의 요망의 감옥에서 나오는 것은 공동체 속에서 사랑의 나눔을 연습하고 약자의 음성을 경청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하지만 시드기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못하고 심판을 자초하고 있습니다.

 

3b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을 배반하니라 4시드기야 제구년 열째 달 열째 날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그의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와서 그 성에 대하여 진을 치고 주위에 토성을 쌓으매 5그 성이 시드기야 왕 제십일년까지 포위되었더라 6그 해 넷째 달 구일에 성중에 기근이 심하여 그 땅 백성의 양식이 떨어졌더라 7그 성벽이 파괴되매 모든 군사가 밤중에 그 성에서 나가 두 성벽 사이 왕의 동산 곁문 길로 도망하여 갈대아인들이 그 성읍을 에워쌌으므로 그들이 아라바 길로 가더니 8갈대아 군대가 그 왕을 뒤쫓아 가서 여리고 평지에서 시드기야를 따라 잡으매 왕의 모든 군대가 그를 떠나 흩어진지라 9그들이 왕을 사로잡아 그를 하맛 땅 리블라에 있는 바벨론 왕에게로 끌고 가매 그가 시드기야를 심문하니라 10바벨론 왕이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그의 눈 앞에서 죽이고 또 리블라에서 유다의 모든 고관을 죽이며 11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놋사슬로 그를 결박하여 바벨론 왕이 그를 바벨론으로 끌고 가서 그가 죽는 날까지 옥에 가두었더라(3b-11)

 

예루살렘과 유다의 멸망을 신학적 차원에서 간략하게 언급한 다음에 예루살렘의 함락과 시드기야의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가 뒤따릅니다. 화자는 마지막의 긴박했던 순간을 담담하게 보고합니다.

 

⑴ 시드기야의 배반(3b)

 

먼저 예루살렘이 바벨론의 공격을 받게 된 이유를 전해줍니다.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에게 반역했기 때문입니다(3). 봉신이었던 시드기야가 주군 느부갓네살을 배반했기에 바벨론의 보복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시드기야의 반역에 관한 언급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이는 아마도 의도적인 것 같습니다. 이를 통해 두 가지가 분명해집니다. 첫째, 시드기야의 배반이 바벨론의 보복적 침략을 초래했습니다. 시드기야의 어리석은 정치적 판단이 예루살렘을 멸망에 떨어뜨렸습니다. 둘째, 시드기야의 비극적 운명이 어리석은 자의 운명으로 그려집니다. 바벨론 왕의 가혹한 형벌은 정치적으로 미숙했던 시드기야가 자초한 형벌입니다.

 

⑵ 예루살렘의 포위(4-6)

 

시드기야 왕 제구년 열째 달 열째 날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예루살렘에 진을 치고 공성 축대를 쌓고 제 십 일년까지 포위합니다(4-5). 예루살렘에 양식이 바닥나고, 넷째 달 아홉째 날에 점령당합니다(6). 18개월 동안의 포위 공격으로 양식이 떨어진 예루살렘은 전투력을 상실하고 성벽을 파괴하는 바벨론 군대를 막지 못합니다(일부 학자들의 계산에 따르면 588년 1월 15일에 예루살렘이 포위되고 587년 7월 29일에 성벽이 뚫린다).

 

⑶ 시드기야의 탈출(7)

 

성이 뚫리자 유다 왕 시드기야는 야음을 틈타 탈출을 시도합니다. 바벨론의 공격이 성 북쪽에 집중됐기에 남쪽으로 성을 빠져나갑니다. 그는 병사들과 함께 왕의 동산 주변에 있는 두 성벽 사이의 통로를 지나 성 밖으로 탈출해 아라바 쪽으로 피신합니다(7).

‘두 성벽 사이(의 문)’는 다윗 성 남동쪽에 위치한 문으로, 이 문을 통해 왕의 동산으로 나갔습니다. 느헤미야 3:15에 나오는 ‘샘문’과 같은 문인 것 같습니다. ‘두 성벽’은 옛 성벽과 저수지를 보호하기 위해 히스기야가 추가로 만든 성벽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아라바’는 갈릴리 호수 남단에서 아카바 만 북쪽 끝에 위치한 엘랏까지 이어지는 요단 분지의 스텝 지역을 가리키는 이름인데, 여기서는 여리고 평지를 가리킵니다.

 

⑷ 사로잡힌 시드기야(8-9)

 

바벨론 군대가 포위한 성을 빠져나오는 데는 성공했지만, 시드기야의 행운은 거기까지였습니다. 갈대아 군대의 추적을 받아 여리고 평지에서 왕을 호위하던 군대가 다 흩어지고 시드기야는 사로잡힙니다(8). 사로잡힌 시드기야는 하맛 땅 리블라(립나)에 있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사령부로 끌려갑니다(9). 리블라는 레바논 계곡 북쪽 오론테스 강가에 있는 성읍으로 으로 바벨론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한 앗수르를 돕기 위해 하란으로 올라간 바로 느고가 사령부를 세운 곳이기도 합니다(열왕기하 23:33).

 

⑸ 시드기야의 비참한 운명(10-11)

 

바벨론 왕은 자신을 배반한 봉신 시드기야를 직접 심문한 후 혹독한 판결을 내립니다. 그는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그의 아들들을 죽이고 사로잡힌 유다의 모든 고관도 리블라에서 죽이고(10), 아들들의 처형을 본 시드기야의 두 눈을 톱고 놋사슬로 묶어 바벨론으로 끌고 가 죽는 날까지 감옥에 가두어 놓습니다(11). 눈을 빼내는 형벌은 고대 세계에서 주로 배반한 종에게 가해지는 형벌이었습니다.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칠 때 예레미야가 시드기야에게 전한 경고 ‘네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반드시 사로잡혀 그의 손에 넘겨져서 네 눈은 바벨론 왕의 눈을 볼 것이며 그의 입은 네 입을 마주대하여 말할 것이요 너는 바벨론으로 가리라’(34:3)가 그대로 현실이 됩니다. 신체적·정신적으로 완전히 고갈된 시드기야는 바벨론으로 끌려가 아마도 오래지 않아 감옥에서 죽은 것 같습니다.


청결한 양심과 선한 행실로 기독교 신앙을 증거 하지 않으면 복음은 울리는 괭가리가 됩니다. 그건 돌들에게 소리치는 것이고, 피리를 불어도 울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복음전도는 맘몬의 사회에서 고아와 과부를 돌보며 돈과 소비주의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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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51-06)


바벨론의 최후를 선포하는 스라야

예레미야 51장 54-64절


 

예레미야 46장에서 시작된 바벨론 제국의 몰락에 대한 긴 단원이 끝이 납니다. 두루마리가 유브라데 강물에 가라앉는 사건은 제국의 물락을 의미합니다. 강대국 바벨론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는 것은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선지자는 주께 보고 들은 바를 그대로 전하였습니다.

 

  • ‘만군의 여호와라 일컫는 왕’께서 파멸의 왕인 바벨론을 영원한 잠에 빠져 다시는 깨어나지 못하게 하십니다. 파괴자들에 의해 정복된 바벨론이 잿더미가 됩니다. 보복하시는 여호와의 정의가 바벨론에 남김없이 집행됩니다.

 

보복의 하나님 여호와(54-58)

성도들의 교만은 주변에 우려할 일이 많음에도 세상의 것에 만족하여 간절하고 애절하게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교만입니다. 바벨론의 교만은 자신들이 평생 동안 누렸던 것들은 다른 나라를 멸망시켜서 얻었던 것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누리면서도 자신들은 결코 망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그들은 이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54바벨론으로부터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도다 갈대아 사람의 땅에 큰 파멸의 소리가 들리도다 55이는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황폐하게 하사 그 큰 소리를 끊으심이로다 원수는 많은 물 같이 그 파도가 사나우며 그 물결은 요란한 소리를 내는도다 56곧 멸망시키는 자가 바벨론에 이르렀음이라 그 용사들이 사로잡히고 그들의 활이 꺾이도다 여호와는 보복의 하나님이시니 반드시 보응하시리로다 57만군의 여호와라 일컫는 왕이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 고관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도백들과 태수들과 용사들을 취하게 하리니 그들이 영원히 잠들어 깨어나지 못하리라 58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의 성벽은 훼파되겠고 그 높은 문들은 불에 탈 것이며 백성들의 수고는 헛될 것이요 민족들의 수고는 불탈 것인즉 그들이 쇠잔하리라(54-58)

 

바벨론의 멸망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악을 응징하시며, 보복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은 무너지는 날 스스로 안전을 장담하던 자들이 먼저 무너질 것입니다. 고관들과 지혜 있는 다들과 도백들과 태수들과 용사들을 휘하게 하시고 다시는 깨어나지 못하게 하실 것입니다.

 

⑴ 바벨론의 최후(54-56)

 

멸망에 처한 바벨론은 울부짖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54-56절에서는 ‘소리’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합니다. 여기저기에서 큰 파멸과 무너짐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여호와께서 멸망시키는 자를 보내 바벨론을 치게 하시기에 성에서는 ‘부르짖는 소리’가 갈대아 사람의 땅에서는 ‘큰 파멸’(참조 4:6; 6:1; 14:17; 48:3; 50:22)의 소리가 들립니다(54). 다른 민족을 혼돈과 죽음에 빠뜨렸던 바벨론 제국이 혼돈과 죽음의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황폐하게 하시고 그곳에서 ‘큰 소리’가 사라지게 하시기 때문입니다(55a). 바벨론은 자신의 ‘큰 소리’를 빼앗기고 다른 무서운 소리를 듣습니다. ‘원수는 많은 물 같이 그 파도가 사나우며 그 물결은 요란한 소리를 내는도다’(55b). 침략자들의 기세가 거센 파도의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비유됩니다. 적들은 홍수처럼 밀려들어와 바벨론 전역을 황폐케 만들었습니다. 바벨론은 물의 도시였습니다. 그들은 범람하는 물의 무서움을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이제 원수들이 범람하는 물처럼 밀려들어와 공격했습니다. 그들이 자랑하던 철옹성과 같은 요새는 원수의 공격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현재의 문맥에서 ‘큰 소리’는 한편으로는 수많은 사람이 살아가며 내는 소리로 번잡하고 소란스러운 바벨론의 모습을(참조, 50:11), 다른 한편으로는 기세등등하게 민족들을 침략하는 바벨론 군대의 모습을(참조. 4:13) 대표하는 것 같습니다. 대도시의 활기와 번영을 상징하는 ‘큰 소리’가 사라지고 죽음의 영역에 속하는 절박함과 간절함의 ‘부르짖는 소리’와 ‘큰 파멸’이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큰 소리’를 지르며 거세게 민족들을 짓밟던 자들이 침략자들이 내지르는 요란한 소리를 듣습니다. 반드시 되갚으시는 ‘보복의 하나님’(56) 여호와께서 침략자의 편에서 싸우시기에 바벨론에 쳐들어오자, 바벨론의 용사들이 사로잡히고 그들의 활이 부러집니다. 적에 맞서 싸워야 할 용사들이 싸움을 포기합니다. ‘만군의 여호와라 일컫는 왕’께서 바벨론의 전투 능력을 마비시키기에 적의 공세를 조직적으로 방어하지 못합니다.

 

⑵ 바벨론의 영원한 집(57)

 

왕이신 하나님께서 진노의 잔으로 바벨론 안에 있는 모든 지위에 사람들을 잠들게 하시고 그들의 수고를 불태우신다고 하십니다. ‘내가 그 고관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도백들과 태수들과 용사들을 취하게 하리니 그들이 영원히 잠들어 깨어나지 못하리라’(57; 참조. 39). 바벨론이 자랑하는 통치 조직과 지혜가 무용지물이 됩니다. 중앙과 지방에서 전투를 계획하고 지휘해야 할 자들이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하나님의 보복’은 바벨론의 모든 지도자들을 취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바벨론이 고레스에게 침략 당할 때, 그들은 술에 취해 있었습니다. 그 결과 폭력 없이 그 성에 진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술 취한 사람들은 자기중심에 빠진 사람들이며, 극도에 이기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며 시대를 읽지도 못합니다. 다른 사람들과도 소통이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교만한 사람들은 언제 떠질지 모르는 폭탄과 같습니다.

 

⑶ 잿더미가 된 바벨론(58)

 

지도자들이 판단력과 용기를 잃고 제대로 맞서지 못하기에 바벨론의 두터운 성벽과 높은 성문도 적의 공세 앞에 무용지물이 됩니다(58a). 성벽이 허물어지고(참조. 50:15; 51:44) 성문은 불타버립니다. 바벨론 신탁을 마무리하는 58b절(참조 합 2:13)의 시야는 바벨론을 넘어 민족들까지 포함합니다. 전체 민족들 신탁의 신학적 요약에 해당합니다. ‘백성들의 수고는 헛될 것이요 민족들의 수고는 불탈 것인즉 그들이 쇠잔하리라.’(58) 바벨론뿐만 아니라 바벨론에 의존하거나 유사하게 처신하는 민족들이 폭력과 불의로 얻은 것들이 불타 잿더미가 됩니다. 민족들의 모든 수고는 헛된 것으로, 결국에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과거에 바벨론은 많은 나라들을 정복하고 지배했습니다. 그들은 비웃으면서 공격하여 약한 나라들을 울부짖게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입장이 완전히 반대가 되었습니다. 바벨론 곳곳에 즐거움과 기쁨에 소리는 모두 다 사라지고 탄식과 절망으로 부르짖는 소리와 죽음 때문에 통곡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보복하시는 분으로 그 분은 바로 우리가 아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다면 보복의 하나님도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의 큰 사랑은 우리에게 아무런 책임이나 반응을 요구하지 않는 눈먼 사랑이 아닙니다.

 

확정된 바벨론의 운명(59-64)

민족들이 헛된 일을 도모할 때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비웃으십니다. 제국은 영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권력은 절대적일 수 없습니다. 심고 세우시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나라와 민족의 새로운 미래를 여십니다. 하나님께서 변치 않으시니 우리의 길은 인정되고 가야 할 힘을 얻는 것입니다.

 

59유다의 시드기야 왕 제사년에 마세야의 손자 네리야의 아들 스라야가 그 왕과 함께 바벨론으로 갈 때에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에게 말씀을 명령하니 스라야는 병참감이더라 60예레미야가 바벨론에 닥칠 모든 재난 곧 바벨론에 대하여 기록한 이 모든 말씀을 한 책에 기록하고 61스라야에게 말하기를 너는 바벨론에 이르거든 삼가 이 모든 말씀을 읽고 62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이 곳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이 땅을 멸하여 사람이나 짐승이 거기에 살지 못하게 하고 영원한 폐허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라 하니라 63너는 이 책 읽기를 다한 후에 책에 돌을 매어 유브라데 강 속에 던지며 64말하기를 바벨론이 나의 재난 때문에 이같이 몰락하여 다시 일어서지 못하리니 그들이 피폐하리라 하라 하니라 예레미야의 말이 이에 끝나니라(59-64)

 

시드기야와 함께 바벨론 왕을 찾아가는 스라야에게 바벨론의 멸망을 기록한 책을 바벨론 앞에서 읽고, 그 책을 돌에 매달아 유브라데 강에 던짐으로 책의 운명처럼 바벨론도 멸망하여 다시 일어서지 못할 것을 보여줍니다.

 

⑴ 표제(59)

 

예레미야가 바룩에게 말했던 45:1의 경우처럼 다시 예레미야가 명령하는 주체로 등장합니다. 예레미야가 ‘시드기야 왕 제사년에’ 왕을 수행해서 바벨론으로 가는 병참감 ‘마세야의 손자 네리야의 아들 스라야’에게 지침을 줍니다(59). 예레미야는 그에게 두 가지를 명령합니다. 첫째는 바벨론의 멸망을 예언한 두루마리를 바벨론 포로자들에게 선포할 것과, 둘째는 두루마리에 돌을 매달아 유브라데 강 속에 던져서 바벨론의 회복 불가능한 멸망을 시연하도록 명령합니다.

 

⑵ 기록된 바벨론 신탁(60)

 

예레미야의 동역자인 바룩도 마세야의 손자 네리야의 아들이기에(32:12) 스라야와 바룩은 형제 간이 됩니다. 바룩뿐만 아니라 그의 집안이 예레미야를 후원했음을 보여줍니다. 시드기야 왕 제사년은 594년에 해당합니다. 시드기야 왕의 바벨론 방문이 27장에 기록된 사건과 관련된 것이라면, 주변 나라들과의 접촉으로 바벨론의 의심을 사게 된 봉신 시드기야는 주군 느부갓네살에게 충성을 다짐하기 위해 바벨론을 방문했던 것 같습니다.

27장에서는 표제의 연대기적 정보와 보고된 사건의 시대적 배경이 서로 충돌합니다. 1절의 표제에 따르면 ‘여호야김이 다스리기 시작한 때’인데, 3절은 시드기야를 사건의 당사자로 언급합니다. 또 27장에 연속된 28:19의 ‘그 해 곧 유다 왕 시드기야가 다스리기 시작한 지 사 년 다섯째 달’은 27장에 보고된 사건이 시드기야 제사년에 일어났음을 보여줍니다. 27:1의 연대기적 정보는 아마도 예레미야서의 구성과 관련된 것 같습니다. 정리하자면, 여호야김 통치 초반이 아니라 시드기야 제 사년에 에돔, 모압, 암몬, 두로, 시돈의 사신들이 예루살렘으로 유다 왕을 방문했습니다.)

36장에서 예루살렘과 유다에 선포했던 심판의 말씀을 두루마리 책에 기록하고 바룩을 시켜 이를 성전에서 낭독하게 했던 예레미야가 여기서는 ‘바벨론에 닥칠 모든 재난’에 관해 선포한 말씀을 한 권의 책에 기록하고 이를 스라야에게 넘겨주며 그가 해야 할 일도 가르쳐줍니다(60). 책에 기록된 바벨론의 신탁은 아마도 50:1-51:58에 기록된 말씀 또는 그 일부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기록은 일반적으로 보존을 목적으로 하지만(참조, 32:14), 여기서는 심판의 확정성과 관련된 기록입니다. 한 번 문서로 기록되면 그 내용이 변경될 수 없는 것처럼 바벨론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 의지가 최종적으로 확정됐습니다.

 

⑶ 스라야에게 주는 말(61-64)

 

여호와께서 예언자에게 명령을 내리시듯 예레미야가 스라야에게 책의 낭독과 표적 행위의 이중적 사명을 위임합니다. 스라야는 먼저 예레미야가 넘겨준 책에 기록된 말씀을 바벨론에 가서 읽어야 합니다(61).

‘읽다’로 옮긴 단어는 여러 사람 앞에서 낭독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낭독 행위에 관해서는 바벨론에 이르거든, 하라는 막연한 가르침만 주어지고 낭독의 장소나 청자에 관한 언급은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스라야에게 책을 읽고 나서 할 말도 가르쳐줍니다.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이곳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이 땅을 멸하여 사람이나 짐승이 거기에 살지 못하게 하고 영원한 폐허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라’(63). 내용상 바벨론 신탁의 요약입니다. 바벨론의 멸망은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결정에 속하기에 반드시 성취됩니다. ‘이 모든 땅’과 ‘들짐승들’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주어 섬기게 하신 여호와께서(27:6) 바벨론을 폐허로 만들고 거기에 짐승도 살지 못하게 하십니다.

예레미야가 스라야에게 맡긴 두 번째 사명은 표적 행위와 관련됩니다. 두 가지 측면에서 예외적인 표적행위입니다. 첫째, 표적 행위의 실행을 명령하는 주체는 언제나 여호와이신데, 여기서만 예언자가 그 역할을 대신합니다. 둘째, 명령을 받는 자도 언제나 예언자인데, 여기서만 왕의 신하에게 명령이 주어집니다. 여호와(명령하시는 분)와 예레미야(명령을 따르는 자)의 관계가 예레미야와 스라야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스라야는 책에 돌을 매달아 유브라데 강 한복판에 던지고(63) ‘바벨론이 나의 재난 때문에 이같이 몰락하여 다시 일어서지 못하리니 그들이 피폐하리라’ 하고 선포해야 합니다(64). 돌을 매어 유브라데 강 한복판에 던져진, ‘바벨론에 닥칠 모든 재난’을 기록한 책이 바로 바벨론의 운명입니다. 강바닥에 가라앉은 책이 다시 물 위로 떠오르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처럼 바벨론도 그렇게 멸망하여 다시 일어서지 못할 것입니다. ‘나의 재난’은 ‘내가 그에게 가져올 재난’으로 옮겨야 합니다. ‘그들이 피폐하리라’로 번역한 히브리어 표현은 ‘그들이 지쳐버리리라’를 의미합니다. 완전한 멸망을 선포하는 이곳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 이 구절은 58절 마지막에 나오는 ‘그들이 쇠잔하리라’와 동일한 표현으로 59-64절을 앞 단락에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의 말이 이에 끝나니라’(참조. 48:47)는 직역하면 ‘여기까지가 예레미야의 말들(이다)’가 됩니다. 이 말은 59-64절의 정부가 아니라, 예레미야서 전체를 끝맺는 말입니다. 원문에 따르면 예레미야서는 ‘예레미야의 말들’(1:1)로 시작해서 ‘예레미야의 말들’로 끝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은 모든 적대감이 완전하게 종결된 샬롬의 통치입니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는 것이고, 세세토록 왕 노릇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는 맘몬의 제국은 영원할 수 없습니다. 성공과 번영에 물든 신앙은 빛과 소금이 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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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51-05)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경고와 바벨론의 파멸

예레미야 51장 45-53절


 

맘몬과 소비주의의 제국에서 사람들은 극도의 불안에 싸여 살아갑니다. 도처에서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립니다. 깊은 바라의 검은 파도가 개인과 공동체를 흔들며 생명과 평화의 길을 위협합니다. 그럴 때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이 도전에 맞서야 할 것입니까?

 

  • 바벨론을 향한 여호와의 진노가 전쟁의 형태로 나타나기에 적이 바벨론을 침략할 때 그곳에서 유배살이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전쟁의 칼에 희생당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심판하실 때 유배인들은 지체하지 많고 그곳을 떠나 목숨을 구해야 합니다.

 

나의 백성(45-46)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나약하게 말고 수문에 두려워하라고 하십니다. 믿음은 살아가면서 세상의 소리보다 하나님의 목소리를 더 크게 들을 때 생깁니다. 그 소리에 반응할 때 믿음을 더 커집니다. 그 믿음의 결과를 묵도할 때 믿음은 내 성품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포로 된 백성에게 이제 그곳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45나의 백성아 너희는 그 중에서 나와 각기 여호와의 진노를 피하라 46.너희 마음을 나약하게 말며 이 땅에서 들리는 소문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라 소문은 이 해에도 있겠고 저 해에도 있으리라 그 땅에는 강포함이 있어 다스리는 자가 다스리는 자를 서로 치리라(45-46)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바벨론을 떠나라고 경고하시며, 바벨론이 곧 큰 멸망과 심판을 맞이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이 심판에서 벗어나도록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떠나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이 그들과 함께함을 의미합니다.

 

⑴ 도피 명령(45)

 

침략군이 바닷물처럼 바벨론을 덮쳐 모든 성읍을 폐허로 만들고 바벨론 성벽도 무너지기에 사로잡혀 와 그곳에 사는 유다 사람들의 목숨도 위태롭게 됩니다. 벨이 삼킨 것을 끄집어내시는 여호와께서 유배민을 ‘내 백성’이라 부르시며(참조. 30:3), 이들에게 바벨론에서 나와 당신의 진노에서 목숨을 구하라고 긴급하게 권면하십니다(45; 50:8; 51:6). ‘내 백성’은 여호와의 연민을 담고 있는 표현으로, 50:6에 따르면 목자들의 잘못으로 길을 잃고 떠도는 양 떼와 같은 자들입니다. ‘여호와의 진노’는 바벨론을 향한 진노이지만(참조, 25:37,38), 전쟁을 통해 구현되기에 바벨론에 사는 모든 사람이 그 파괴적 영향 아래 놓입니다. 여호와의 분노는 악인을 심판하시는 그분 정의의 부정적 모습입니다. 유다의 좋은 땅을 황무지로 만들고 그 모든 성읍을 허문(4:26) 여호와의 진노가 바벨론 성읍들을 황폐하게 하고 사람이 살 수 없는 사막으로 만듭니다(43).

 

⑵ 소문을 두려워하지 말라(46)

 

바벨론 제국의 불안한 정세가 언급됩니다(46). 문법적으로는 유배지를 떠나야 할 근거로 제시되지만, 실질적으로 바벨론이 멸망하기 직전 시대를 사는 자들에게 주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바벨론으로 끌려와 유배살이 하는 자들에게 바벨론의 정치적 혼란은 제국의 종말이 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소망의 징조이자 이들을 두려움에 빠뜨리는 불안 요인이었습니다(참조. 29:7).

멸망의 시간이 가까이 올수록 불안한 소문이 계속 들려오기에 그런 소문에 휩싸여 실족할 기회도 더 많아집니다. 매년 소문에 소문이 꼬리를 물고 들리겠지만, 강포함이 기승을 부리고 통치자들이 서로 싸우겠지만, 그런 소문과 폭력에 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참조, 마태복음 24:67). ‘마음을 나약하게 말며 … 두려워하지 말라’는 원래 싸움을 앞둔 용사들에게 주는 권면의 말입니다(참조, 신명기 20:3; 이사야 7:4). 유배민들이 전쟁의 위험에 버금가는 위기에 빠질 것을 시사해줍니다. 562년 느부갓네살(605/4-562)이 죽은 후 바벨론 제국의 중앙권력은 정치적 안정을 잃고 흔들렸습니다. 562년부터 556년의 짧은 기간 동안 네 명의 왕이 등장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의 뒤를 이어 보좌에 오른 그의 아들 에윌므로닥은 2년 반 만에 네리글리살에 의해 쫓겨나고, 네리글리살의 짧은 통치(560-556)를 그의 아들 라바시-마르둑이 계승하지만, 바벨론의 과두정체(寡頭政體)에 속한 자들의 음모에 의해 3개월 만에 제거됩니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47-48)

생각하는 것은 존재와 삶을 영적 사고방식으로 유지하는 일입니다. 생각의 훈련을 통해 성찰의 습관을 강화해야 합니다. 영적 나태를 쳐서 복종시키는 일은 평생의 작업입니다. 국운이 기울어진 상황에서 여호와의 방식을 따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경건 없이 승리는 없습니다.

 

47그러므로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바벨론의 우상들을 벌할 것이라 그 온 땅이 치욕을 당하겠고 그 죽임 당할 자가 모두 그 가운데에 엎드러질 것이며 48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바벨론으로 말미암아 기뻐 노래하리니 이는 파멸시키는 자가 북쪽에서 그에게 옴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47-48)

 

바벨론의 멸망이 우주적 차원에서 선포됩니다. 바벨론이 곧 심판을 받아 모든 우상이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날이 오면 바벨론이 무너지고, 하늘과 땅의 모든 피조물이 그들의 멸망을 기뻐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는 날이 될 것임을 의미합니다.

 

⑴ 우상들의 징벌(47)

 

서두의 ‘그러므로’는 유배민의 구원과 바벨론의 멸망을 긴밀하게 연결해줍니다. 보통은 고발의 말씀 다음에 ‘그러므로’로 시작하는 심판 선언이 이어지는데, 여기서는 권면의 말씀을 뒤따릅니다. 마치 여호와의 진노를 피해 바벨론을 떠난 결과로 심판의 날이 오는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바벨론의 심판이 유배민의 구원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시사해줍니다. 넓은 문맥에서 보면, 나의 백성의 송사에 따른(참조. 34-36절) 판결이기도 합니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는 심판의 날이 지금 오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날은 여호와께서 바벨론의 신상들을 벌하시는 날로, 바벨론 온 땅이 치욕을 당하고 칼에 맞은 자들이 그 가운데 엎드러집니다.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치실 때 우상들의 그대들의 무능력이 그대로 노출됩니다. 이들은 숭배자들이 칼에 맞아 죽어가지만 그들을 도와주지 못합니다. 신상들로 가득 찬 바벨론이 죽은 자들로 더러워져 수치를 당합니다. 바벨론의 심판에 창조세계가 반응합니다.

 

⑵ 우주적 기쁨(48)

 

바벨론을 ‘파멸시키는 자가 북쪽에서’ 오기에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바벨론을 두고 기뻐 소리친다(48; 참조, 이사야 14:7). 어떤 존재도 바벨론의 멸망을 슬퍼하지 않습니다. 온 세상이 그 가운데 나타난 여호와의 구속 사역을 찬양합니다.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사람을 포함해서 하늘과 땅을 채우고 있는 모든 것(참조, 창세기 1:11-27)을 가리킵니다.

 

칼을 피한 자들(49-51)

혼돈과 무질서의 풍랑이 거세게 몰려올 때 마음의 고삐를 잡고 있어야 합니다. 정체성이 흔들릴 때 낙담이 찾아옵니다. 이때는 우리는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물어야 합니다. 불안을 하나님께 토로하면서 질문하며 정체를 확인하고 확립해 가야 합니다.

 

49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죽여 엎드러뜨림 같이 온 세상이 바벨론에서 죽임을 당하여 엎드러지리라 50칼을 피한 자들이여 멈추지 말고 걸어가라 먼 곳에서 여호와를 생각하며 예루살렘을 너희 마음에 두라 51외국인이 여호와의 거룩한 성전에 들어가므로 우리가 책망을 들으며 수치를 당하여 모욕이 우리 얼굴을 덮었느니라(49-51)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포함한 여러 민족을 죽였으므로, 그들도 심판을 받아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에서 받은 수치와 모욕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질 날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두려움과 부끄러움 속에서 하나님께 돌아가기를 소망합니다.

 

⑴ 바벨론의 멸망(49)

 

문법적으로 복잡하고 생략어법이 사용됐기에 49절은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최근의 영어번역본을 따릅니다. 온 땅의 칼에 맞은 자들이 바벨론 때문에 쓰러졌듯이 바벨론도 이스라엘의 칼에 맞은 자들 때문에 쓰러져야 합니다. 바벨론 때문에 민족들이 멸망한 것처럼 이스라엘 때문에 바벨론이 멸망합니다. 전반절은 여호와께서 바벨론에게 허락한 칠십 년의 통치를 배경으로, 후반절은 이스라엘의 소송과 그에 따른 여호와의 보복을 배경으로 이해해볼 수 있습니다. 바벨론이 여호와의 손에 들린 심판의 도구(참조 50:23;51:7,20)이기는 하지만, 이들은 허락된 이상으로 이스라엘을 가혹하게 짓밟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칼로 죽였기에 바벨론도 마찬가지로 칼에 맞아 죽어야 합니다.

 

⑵ 도피 명령(50)

 

45-46절의 경우처럼 바벨론의 멸망 선언 다음에 유배민들에게 주는 권면의 말씀이 나옵니다. ‘나의 백성’(45)이 ‘칼을 피한 자들’(49)로 불립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바벨론에 머물지 말고 어서 떠나야 합니다. 바벨론의 멸망을 귀향과 구원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가나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지만, 여호와를 기억하고 예루살렘을 마음속에 떠올리며 바벨론을 떠나야 합니다(참조, 31:21). 시간이 지나면서 유배민들은 나름대로 정착했고 예루살렘은 여전히 폐허로 남았기에, 유배지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은 모든 면에서 쉬운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모험에 가까운 결단과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여호와를 생각하며’는 ‘여호와를 기억하며’로, 여호와께 자신을 내맡기는 행위를 가리킨다. 여호와를 기억함으로써 바벨론과 예루살렘 사이의 공간적 거리감도 극복됩니다. 예루살렘을 너희 마음에 두라는 목적지가 예루살렘임을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⑶ 탄식 인용(51)

 

오직 여호와와 예루살렘만 바라보라는 권면에 우리가 탄식으로 응답했습니다. ‘외국인이 여호와의 거룩한 성전에 들어가므로 우리가 책망을 들으며 수치를 당하여 모욕이 우리 얼굴을 덮었느니라.’(51)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의 형편을 생각하기만 하면 유배민들은 수치심에 얼굴을 가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여호와의 성전이 이방인들에 의해 짓밟혔습니다. 고대의 다신론적 사고에 따르면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는 바벨론의 신 말둑에 의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패배를 의미했습니다. ‘여호와의 거룩한 성전은 문자적으로는 여호와의 집의 거룩한 곳들’로, 성전 지역의 여러 건물을 가리키는지 또는 낭실과 성소와 지성소를 가리키는지는 불분명합니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52-53)

레위기적 정결은 예배를 통해 오염된 개인과 공동체를 정화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혼돈과 무질서를 새로움으로 덮습니다. 예배는 죄와 사망의 풍랑이 개인과 공동체를 삼키려 할 때, ‘잠잠하라!’고 명하신 예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일상과 일터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세워 줍니다.

 

52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그 우상들을 벌할 것이라 부상자들이 그 땅에서 한숨을 지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53가령 바벨론이 하늘까지 솟아오른다 하자 높은 곳에 있는 피난처를 요새로 삼더라도 멸망시킬 자가 내게로부터 그들에게 임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52-53)

 

47절을 거의 문자적으로 반복하고, 53절은 새로운 내용으로 48절을 보충합니다. 바벨론의 운명이 멸망으로 확정됐기에, 바벨론의 모든 시도가 헛일이 됩니다. 바벨론이 하늘 끝까지 올라간다 할지라도, 접근이 불가능한 높은 곳에 요새를 만든다 할지라도(참조. 이사야 14:13-14) 살아남지 못합니다. 바벨론을 쳐서 ‘멸망시킬 자’가 여호와로부터 오기에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방책을 마련할지라도 무용지물이 됩니다.


세상은 부의 양극화와 불평들의 파도가 밀려오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교회는 정결의 힘을 의지하여 새로운 창조를 소망해야 합니다. 위기의 때 성도들의 본 모습이 자신의 신앙의 진정성을 보여줍니다. 세속적인 성공개념과 이미지가 교회 안에 잔존합니다. 회심의 무의식 속에 있는 세속적인 세계관이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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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51-04)


바벨론의 멸망과 하나님의 구원

예레미야 51장 33-44절


 

세상의 나라는 화복(禍福)이 교차됩니다. 죄는 있어야 할 자리를 이탈하여 다른 길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열방을 지으셨고 생명을 주셨습니다. 열방은 생명과 복을 받을 두 가능성을 모두 부여 받았습니다. 제국이 여호와의 명령과 뜻을 위반하면 징벌을 받거나 멸절될 것입니다.

 

  • 바벨론에 당한 대로 되갚아주길 호소하는 시온에 여호와께서 긍정적으로 반응하십니다. 그분께서 시온의 송사를 들으시고 시온을 위하여 보복하십니다. 바벨론을 돌무더기로 만들어 승냥이의 소굴이 되게 하십니다.

 

나의 백성(33-40)

폭력적인 국가는 폐허의 무덤과 이리 때의 소굴이 될 것입니다. 무자비한 권력은 아무도 살 수 없는 황무지처럼 참혹한 모습을 낳을 것입니다. 권력과 권위의 오용은 하나님의 진노를 몰고 오는 일임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파수꾼이 되어 기도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33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딸 바벨론은 때가 이른 타작 마당과 같은지라 멀지 않아 추수 때가 이르리라 하시도다 34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나를 먹으며 나를 멸하며 나를 빈 그릇이 되게 하며 큰 뱀 같이 나를 삼키며 나의 좋은 음식으로 그 배를 채우고 나를 쫓아내었으니 35내가 받은 폭행과 내 육체에 대한 학대가 바벨론에 돌아가기를 원한다고 시온 주민이 말할 것이요 내 피 흘린 죄가 갈대아 주민에게로 돌아가기를 원한다고 예루살렘이 말하리라 36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네 송사를 듣고 너를 위하여 보복하여 그의 바다를 말리며 그의 샘을 말리리니 37바벨론이 돌무더기가 되어서 승냥이의 거처와 혐오의 대상과 탄식 거리가 되고 주민이 없으리라 38그들이 다 젊은 사자 같이 소리지르며 새끼 사자 같이 으르렁거리며 39열정이 일어날 때에 내가 연회를 베풀고 그들이 취하여 기뻐하다가 영원히 잠들어 깨지 못하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40내가 그들을 끌어내려서 어린 양과 숫양과 숫염소가 도살장으로 가는 것 같게 하리라(33-40)

 

바벨론은 바다 괴물이 되어 폭력과 학대를 자행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아벨의 피처럼 신원하는 소리가 땅에 가득합니다. 불의에 고통을 당한 자들이 하늘을 향해 탄원하며 법정에 고발하였습니다. 폭력국가는 하나님을 대항하는 일이며, 하나님께서는 약자들의 호소에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⑴ 추수 때(33)

 

(일반적으로 33절은 27-32절에 붙여 읽는다.) 바벨론의 방어선이 침략군에 의해 차례로 허물어지는 긴박한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 후에 여호와께서 다시금 바벨론의 종말이 왔음을 선포하십니다. 익은 곡식 잘라 거두어들이는 추수와 마른 곡식의 이삭을 떠는 타작은 자주 심판의 표상으로 사용됩니다. ‘때가 이른’은 문자적으로는 밟아야 할 때가 됩니다. 보통 성문 안쪽 평편하고 통풍이 잘되는 곳에 마련된 타작마당은 가을 수확기 한두 달만 사용되고 나머지 열 달은 그대로 놀렸습니다. 추수 때가 돼서 타작마당으로 다시 사용하려면 바닥을 발로 밟아 다시 평평하게 만들고 깨끗하게 정리해놓아야 했습니다. 타작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타작마당을 발로 다지는 단계가 비유로 사용됩니다. 이제 곧 바벨론에 추수 때가 닥칩니다. 사람들이 타작마당을 밟듯이 바벨론이 침략군에 의해 곧 짓밟힙니다.

 

⑵ 시온의 호소(34-35)

 

바벨론이 자기에게 저지른 악행을 시온/예루살렘이 재판장 여호와께 호소합니다. 시온은 자신을 한때 맛있는 음식으로 가득 찼던, 그러나 이제는 깨끗하게 빈 ‘그릇’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자기 배를 가득 채워도 배부르지 않은 괴물(큰 뱀)에 비유합니다(34). 바벨론은 시온을 정복하고, 시온의 귀한 것들은 모두 빼앗아 가져가고 빈 그릇(껍데기)만 남겨놓았습니다. ‘나를 쫓아내었으니’는 유배를 가리킵니다. 배를 채운 바벨론은 시온 주민들을 사로잡아 갔습니다. ‘큰 뱀’으로 옮긴 ‘바다 괴물’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바벨론 왕을 바다 괴물에 비유하는 의도는 이중적입니다. 한편으로는 바벨론 왕의 엄청난 힘을 보여줍니다. 바벨론은 유다가 상대하기에는 너무 거대한 세력이었습니다. 바벨론이 잡아먹으려 하면 유다는 먹힐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바벨론이 이미 멸망에 떨어졌음을 시사해줍니다. 여호와께서는 일찍이 탄닌의 머리를 부수셨습니다(참조. 시편 74:13). 바벨론이 무서운 괴물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여호와에 의해 이미 그 운명이 결정된 괴물입니다.

바벨론의 무자비한 폭력에 넘겨져 피를 흘린 시온은 재판관 여호와께 되갚아주시길 호소합니다(35). 시온이 바벨론에 당한 대로 바벨론에게 그대로 되돌려주어야 합니다. 바벨론은 시온에서 저지른 폭력의 결과에 책임져야 합니다. ‘내가 받은 폭행과 내 육체에 대한 학대’로 번역한 히브리어 표현은 ‘나의 폭행과 나의 살’로 그 의미가 불분명합니다. 뒤따르는 ‘내 피’와 함께 보면, 살이 찢기고 피가 흐르는 야만스러운 폭력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호소에 긍정적으로 반응하십니다. 36절 도입부의 ‘그러므로’는 여호와께서 시온의 고발과 호소에 전적으로 동의하셨음을 시사해줍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송사를 들어주어(50:34) 그를 위하여 보복해주십니다. 바벨론의 바다를 말리시고 그의 샘을 메마르게 하십니다. 바다와 샘은 유브라데 강과 그 수로들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유브라데는 바벨론의 생존에 결정적이었습니다. 그 강물이 말라버리면 바벨론도 말라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벨론이 돌무더기가 되어 승냥이의 소굴이 되고 인적이 끊깁니다(참조. 9:11).

 

⑶ 영원한 잠(38-40)

 

‘혐오(의 대상)과 탄식 거리’는 ‘놀람(의 대상)과 조롱거리’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갈대아인들이 굶주린 사자들의 무리에 비교됩니다(38). ‘그들’의 신분에 관해 본문이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39-40절의 묘사는 바벨론 백성에 적합합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사자는 자주 왕을 상징했는데, 여기서는 바벨론 사람들로 확장됩니다. 갈대아인들이 젊은 사자들처럼 으르렁거리며 울부짖습니다. 여호와께서 바벨론의 바다와 샘을 말리기로 하셨지만, 이를 모르는 갈대아인들은 무서울 것이 없었습니다. 비유가 (사냥에 나서는) 굶주린 사자에서 (전쟁의 승리를 즐기는) 주연 자리로 뀝니다. 여호와께서 술자리를 마련하시고 이들이 술 취해 ‘영원히 잠들어 깨지 못하게’ 하십니다(39).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잡으려고 올무를 놓으셨던 것처럼(50:24) 술자리를 베풀어 이들이 정신을 잃고 취하게 하십니다. ‘열정이 일어날 때에’의 원문은 ‘그들이 뜨거워졌을 때’입니다. 싸움과 약탈의 흥분과 열기로 들뜬 상태에서 연회에 참석해 소란스럽게 떠들며 코가 삐뚤어지게 마시다가 그 자리에 쓰러져 깊은 잠에 빠집니다. 승리에 도취한 바벨론이 자신의 앞날을 생각지 않고 즐기기만 하다가 영원한 멸망에 떨어집니다.

40절에서는 다시 표상이 바뀝니다. 38절의 경우처럼 바벨론이 짐승에 비교되는데, 도살장으로 가는 어린 양과 숫양과 숫염소에 비유됩니다. 여호와께서 갈대아 인들을 어린 양들처럼, 숫양과 숫염소들처럼 도살장으로 끌고 가십니다. 으르렁 거리며 어린 양과 숫양과 숫염소에 달려들던 사자와 같았던 바벨론이 술에 취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숫양과 숫염소’가 됩니다.

 

바벨론에 대한 애가(41-44)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탐욕스러운 권력의 말로(末路)는 매우 비참합니다. 아무리 화려한 도시와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 죽음의 적막 속으로 사라질 것이며, 여호와의 분노의 칼은 견고한 성벽까지 날려버릴 것입니다. 교만한 바벨론은 함락되고 제국의 영광은 참혹하게 몰락할 것입니다.

 

41슬프다 세삭이 함락되었도다 온 세상의 칭찬 받는 성읍이 빼앗겼도다 슬프다 바벨론이 나라들 가운데에 황폐하였도다 42바다가 바벨론에 넘침이여 그 노도 소리가 그 땅을 뒤덮었도다 43그 성읍들은 황폐하여 마른 땅과 사막과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 되었으니 그리로 지나가는 사람이 없도다 44내가 벨을 바벨론에서 벌하고 그가 삼킨 것을 그의 입에서 끌어내리니 민족들이 다시는 그에게로 몰려가지 아니하겠고 바벨론 성벽은 무너졌도다(41-44)

 

하나님께서는 온 세계를 취하게 하는 금잔으로서 젊은 사자같이, 새끼 사자같이 기세를 올리며 잔뜩 흥분한 바벨론에게(51:7) 연회를 베푸십니다. 교만한 바벨론은 자신들에게 마땅한 잔치라고 여기겠지만,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는 죽음의 연회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⑴ 애가(41-43)

 

이 애가는 바벨론의 멸망을 전제합니다. 한 때 여호와의 망치(철퇴)로 온 세상을 부수었던(20-23) 바벨론이 함락됐습니다. ‘온 세상의 칭찬’(온 세상의 자랑거리)이 민족들 가운데 공포의 대상이 됐습니다(41). ‘황폐하였도다’는 문맥에 맞게 ‘공포의 대상이 됐다’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느부갓네살은 전리품과 조공과 정복민의 노동력을 착취해서 신 바벨론 제국의 수도 바벨론을 화려하게 건축했습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바벨론의 영화가 한순간에 끝장이 났습니다. 50:23에서처럼 감탄사 ‘어찌’를 두 번 사용해 탄식의 강도를 높입니다. (개역개정은 ‘슬프다’의 삽입으로 대체했다.) 세삭은 바벨론의 암호에 해당합니다. 바벨론의 몰락이 홍수로 인한 침몰에 비교됩니다. 바닷물이 밀려오고 바벨론은 요란한 파도에 잠겨 버립니다(42). 홍수가 사납게 땅을 뒤덮고 모든 것을 휩쓸어 가듯이 적이 바벨론 온 땅을 뒤덮고 침략해옵니다(참조. 46:7 이사야 8:7, 17:12-14). 적의 공격으로 성읍들이 파괴되고 ‘마른 땅과 사막’이 됩니다(43). 유브라데 강의 풍부한 수량과 촘촘하게 설치된 관개 수로 덕분에 물 부족을 모르던 바벨론이 메마른 땅이 됩니다. 36절에서는 여호와께서 바벨론의 바다와 샘을 말리시는데, 여기서는 적에 의해 바벨론이 마른 땅이 됩니다. 물이 없기에 사람이 살 수 없는 불모지가 되고, 그곳을 지나는 사람도 없게 됩니다. 고대적 사고에 따르면 폐허가 된 도성은 신의 저주가 내린 곳이기에 사람들은 멀리 돌아갔습니다.

 

⑵ 바벨론의 심판(44)

 

바벨론의 멸망을 전제하는 애가가 끝나고, 여호와께서 다시 바벨론의 멸망을 선포하십니다(44). 여호와께서 ‘벨을 바벨론에서 벌하고 그가 삼킨 것을 그의 입에서’ 끄집어내십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처럼(34) 바벨론의 신 벨(50:2)도 게걸스러운 괴물에 비유됩니다. 벨이 삼킨 것이 전자의 경우처럼 시온을 가리키는지는 불분명합니다. 여호와에 의한 바벨론 제국의 신 벨의 징벌은 이중적입니다. 벨로 불리는 말둑의 무능력뿐만 아니라, 바벨론 제국이 여호와의 통치 아래 있음을 보여줍니다. 화려하고 거대한 건축물로 치장된 제국의 수도 바벨론은 민족들의 시선을 잡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정치는 물론 경제의 중심지였기에 이방인들이 바벨론으로 몰려들었는데, 앞으로는 그럴 일이 없게 됩니다. 바벨론의 자랑인 성벽의 무너짐(50:15; 51:58)은 바벨론의 완전한 멸망을 상징합니다. 넓은 문맥에서는 예루살렘 성벽의 파괴(참조. 39:8b; 52:14)에 연결됩니다.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그 성벽을 허물었던 바벨론이 그대로 되갚음을 당합니다.


권력은 영원할 수 없고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합니다. 귀 있는 자들은 듣고 철저한 새로움으로 매진해야 합니다.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영적인 나태는 금물입니다. 우리는 이리 떼에게 던져진 양으로서 분별력과 기백을 갖고 담대히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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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51-03)

성전을 위해 바벨론을 보복

예레미야 51장 20-32절


 

열방은 주권과 열정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증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깨어짐과 회복이라는 구원의 이야기를 어떻게 이끌어 가시는지 열방도 듣고 있습니다. 선지자들은 열방의 운명을 마치 이스라엘의 문제인 것처럼 언급합니다. 예언자적 사고와 통찰의 지평은 널고도 깊습니다.

 

  • 여호와께서 온 세상을 파괴한 바벨론을 치십니다. 사람들이 거기서 모퉁잇돌이나 주춧돌 하나 얻지 못할 정도로 철저히 파괴됩니다. 한때 여호와의 철퇴로 민족들을 부수었던 바벨론이 여호와에 의해 영원히 황무지가 됩니다.

 

너는 나의 철퇴(20-24)

세상 모든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으며, 이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따라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열방은 본질적으로 멸망의 운명 속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되지만, 여호와를 섬기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공동체로 변화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순종의 공동체로서의 참여를 통해 실현될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민족이 그분의 뜻에 따라 회복되고 구원의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20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의 철퇴 곧 무기라 나는 네가 나라들을 분쇄하며 네가 국가들을 멸하며 21네가 말과 기마병을 분쇄하며 네가 병거와 병거대를 부수며 22네가 남자와 여자를 분쇄하며 네가 노년과 유년을 분쇄하며 네가 청년과 처녀를 분쇄하며 23네가 목자와 그 양 떼를 분쇄하며 네가 농부와 그 멍엣소를 분쇄하며 네가 도백과 태수들을 분쇄하도록 하리로다 24너희 눈 앞에서 그들이 시온에서 모든 악을 행한 대로 내가 바벨론과 갈대아 모든 주민에게 갚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0-24)

 

하나님께서는 바벨론과 여러 나라들을 심판할 나라를 자신의 ‘철퇴와 무기’라고 부르십니다. 그 철퇴를 피할 수 있는 대상은 없습니다. 아무리 빠른 기마별과 병거과 병거대라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을 짓밟고 성전 기구를 바벨론으로 옮겨감으로써 성전을 더럽힌 바벨론의 악행을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갚아주실 것입니다.

 

⑴ 철퇴의 노래(20-23)

 

이 단락의 번역과 이해는 청자 ‘너’의 신분에 따라 달라집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의 철퇴로 사용하시는 ‘너’가 누구인지 본문은 직접 언급하지 않습니다. 판단은 동사의 시제에 의존적입니다. 20a절은 시제가 없는 명사구분이고 20b-23절은 바브 연속 완료형입니다. 보통은 후자가 전자에 의존적이기에, 뒤따르는 동사구분의 시제는 현재(미래) 또는 과거가 모두 가능합니다. 시제를 과거로 간주하면 2인칭 단수 남성의 ‘너’는 민족들을 ‘(이미) 분쇄한’ 바벨론 왕이 되고, 현재(미래)로 간주하면 (바벨론을 포함해) 민족들을 ‘(앞으로) 분쇄할’ 메대-바사 왕 고레스가 됩니다. (개역개정은 20-24절에 ‘바벨론은 여호와의 철퇴’라는 제목을 달아 놓고 동사의 시제를 미래로 옮겼는데, 이는 잘못된 번역으로 이 경우에는 20-23절을 다음과 같이 과저 시제로 번역해야 합니다. 고레스의 등장을 예언한 말로 이해할 경우에는 ‘무기였다’를 ‘무기이다’로, ‘부수었다’와 ‘분쇄했다’를 각각 ‘부수리라’와 ‘분쇄하리라’로 읽으면 됩니다.)

 

⑵ 되갚으신 여호와(24)

 

심판의 대상이 민족들에서 이제 바벨론으로 바뀝니다.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부수시는 데 사용한 그분의 망치 바벨론이 여호와에게 보복을 당합니다(24). 6절과 달리 여겨서는 보복의 이유가 비교적 분명하게 제시됩니다. ‘너희 눈앞에서 그들이 시온에서 모든 악을’ 행하였기에 여호와께서 ‘바벨론과 갈대아 모든 주민’에게 갚으십니다. 바벨론이 시온에서 저지른 온갖 악이 여호와의 보복을 초래합니다. 여기서는 시온에서 저지른 모든 악으로 그 범위가 확대됩니다. 성전만 파괴된 것이 아닙니다.

바벨론 점령군은 왕궁과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태워버리고 성벽을 허물고, 많은 사람을 처형하거나 사로잡아 갔습니다(52:12-27). ‘너희’는 1차적으로는 시온의 파괴를 경험한 자들이지만, 2차적으로는 바벨론의 멸망을 여호와의 보복으로 기다리는 예레미야서의 독자도 포함합니다.

 

나는 네 원수라(25-26)

세상 모든 나라들은 만군의 여호와께 모든 주권이 있음을 배워야 했습니다. 다른 우상들에게 충성하거나 스스로 자율적 존재임을 선포하지 말아야 합니다. 정의를 향한 하나님의 요구를 거절할 때, 열방은 심판을 받아 흩어집니다. 우리가 속한 교회는 조국과 열방을 위해 이런 원칙에 따라 기도해야 합니다.

 

25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온 세계를 멸하는 멸망의 산아 보라 나는 네 원수라 나의 손을 네 위에 펴서 너를 바위에서 굴리고 너로 불 탄 산이 되게 할 것이니 26사람이 네게서 집 모퉁잇돌이나 기촛돌을 취하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영원히 황무지가 될 것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5-26)

 

여호와께서 당신의 망치(철퇴) 바벨론에게 다양한 표상을 사용해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강력한 성벽과 방어를 무너뜨리고, 그 땅을 황폐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바벨론의 파괴는 하나님의 공의와 권능을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온 세계를 멸하는’은 21-23절의 요약에 해당합니다.

 

⑴ 멸망의 산(25)

 

특이하게도 평원에 세워진 도성 바벨론을 ‘멸망의 산’으로 부릅니다. 바벨론의 주장에 따르면 바벨론 성은 ‘사람들의 생명의 산’ 또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산’이었습니다.

바벨론은 사람들에게 생명이 아니라 죽음과 멸망을 가져다주는 성입니다(참조. 열왕기하 23;13). ‘멸망의 산’을 통해 구약성경 안에서 신의 자리에 오른 바벨론과 우상숭배로 더렵혀진 감람산이 연걸됩니다. 산과 관련해 또 다른 표상이 사용됩니다. 여호와께서 당신 손을 펼쳐 바벨론을 바위에서 굴려 내리십니다. 흔들림이 없는 견고한 바위는 자주 안전과 피난처를 상징한비다. 민족들을 다 짓밟았기에 자신은 짓밟히지 않으리라 자신하겠지만, 여호와께서 치시기에 바벨론이 영화로운 자리에서 굴러 떨어집니다. 다시 산의 표상이 바벨론에 적용됩니다. 멸망의 산 바벨론이 ‘불에 탄 산’이 됩니다.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불태워버린 바벨론이 같은 운명에 떨어집니다. 적에 점령당한 바벨론이 불에 타 잿더미가 됩니다.

 

⑵ 영원한 왕무지(26)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게 철저히 파괴되기에 사람들이 모퉁잇돌이나 주춧돌 하나도 얻지 못합니다(26). 고대 세계에서는 파괴되거나 허물어진 건물의 잔해에서 돌을 가져다가 건축자재로 사용했습니다. 온 세상을 취하게 하였던 금잔(7) 바벨론이 ‘영원히 황무지가’가 됩니다.

 

그를 치게 하라(27-32)

하나님께서는 모든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그의 계획에 따라 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바벨론의 멸망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의롭고 공의로우셔서 악행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며, 그분의 뜻에 따라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27땅에 깃발을 세우며 나라들 가운데에 나팔을 불어서 나라들을 동원시켜 그를 치며 아라랏과 민니와 아스그나스 나라를 불러 모아 그를 치며 사무관을 세우고 그를 치되 극성스런 메뚜기 같이 그 말들을 몰아오게 하라 28뭇 백성 곧 메대 사람의 왕들과 그 도백들과 그 모든 태수와 그 관할하는 모든 땅을 준비시켜 그를 치게 하라 29땅이 진동하며 소용돌이치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쳐서 그 땅으로 황폐하여 주민이 없게 할 계획이 섰음이라 30바벨론의 용사는 싸움을 그치고 그들의 요새에 머무르나 기력이 쇠하여 여인 같이 되며 그들의 거처는 불타고 그 문빗장은 부러졌으며 31보발꾼은 보발꾼을 맞으려고 달리며 전령은 전령을 맞으려고 달려가 바벨론의 왕에게 전하기를 그 성읍 사방이 함락되었으며 32모든 나루는 빼앗겼으며 갈대밭이 불탔으며 군사들이 겁에 질렸더이다 하리라(27-32)

 

하나님께서 바벨론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시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여러 민족과 왕국들에게 바벨론을 공격할 것을 명령하시며, 바벨론의 군대는 무력해지고 방어선은 무너질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바벨론의 멸망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이루어지며, 그들의 교만과 악행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나타냅니다.

 

⑴ 전투 명령(27-29)

 

‘너희’에게 약속한 여호와의 보복이 구체적으로 실행됩니다. 여호와께서 ‘온 세상을 멸하는 멸망의 산’ 바벨론을 공격하기 위해 온 땅에서 군대를 소집하십니다(27-28). 땅에 깃발을 세우고 민족들 가운데 나팔을 불어 바벨론을 칠 민족들을 동원해야 합니다. ‘동원시켜’는 ‘구별하여’로 바벨론 침략군이 여호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자들임을 시사해줍니다.

여호와의 전쟁에 부름을 받은 민족은 메대(11)와 그의 지배 아래 있는 민족들입니다. 그 가운데 세 민족은 구체적으로 이름이 열거됩니다. 아카드어로는 ‘우라르투(Urartu)’로 부르는 아라랏은 반(Van) 호수와 우르미아(Urmia) 호수 사이에 있는, 앗수르 북쪽의 산지대를 가리킵니다(참조, 열왕기하 19:37; 이사야 37:38). 여기에만 나오는 민니는 우르미아 호수 남남동쪽의 아르메니아에 있었으리라 추측한다. ‘사무관을 세우고 그를 치되’는 ‘그를 칠 사령관을 임명하고’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연합군을 관리하고 지휘할 자들을 세워 모든 준비를 끝마칩니다. 침략군의 진격하는 군마가 극성스런 메뚜기, 떼에 비교됩니다. 셀 수 없이 많은 메뚜기가 땅을 덮고 모든 푸른 것을 다 갉아 먹듯이 많은 군마가 땅을 덮고 거침없이 진격해 옵니다. 사람의 힘으로 천문학적 수익 메뚜기 떼를 퇴치할 수없는 것처럼 바벨론은 여호와께서 불러오는, 땅이 흔들리고 뒤틀릴 정도로 엄청난 군대를 막아낼 수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쳐서 그 땅으로 황폐하여 주민이 없게 할 계획’이 성취됩니다(29; 참조. 50:45).

 

⑵ 바벨론의 패배 묘사(30-34)

 

침략군의 압도적인 세력 앞에 바벨론 용사들은 전투를 포기하고 요새로 물러나 다시 나오지 않았습니다. 용사라 하는 자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기력을 잃고 여자처럼 되어버렸습니다(30; 참조 50:37). 용사들이 전선을 떠나 숨어버렸기에 적은 거침없이 진격하며 바벨론을 짓밟았습니다. 바벨론의 집들은 불타고 성문의 빗장은 부서졌습니다. ‘그 문빗장’은 아마도 바벨론 외곽 성문의 빗장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보발꾼과 전령이 바쁘게 달려 전선의 상황을 왕에게 보고하지만, 절망적인 소식뿐입니다(31). 바벨론 성의 방어벽이 뚫리는 순서대로 왕에게 보고됩니다(31b-32). 먼저 그의 성읍이 끝에서 끝까지 점령됐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그 성읍’은 왕의 성읍이기에 바벨론 성을 가리킵니다. 바벨론의 바깥 방어벽이 완전히 허물어졌습니다. 다음에는 모든 나루가 점령됐다는 소식이 뒤따릅니다. 유브라데 강을 건너는 나루터 또는 다리가 적의 수중에 떨어졌습니다. 적이 바벨론으로 들어가는 모든 통로를 장악했습니다. 외곽의 방어벽을 뚫고 진격한 적이 벌써 성벽 아래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갈대밭이 불에 탔다는 소식마저 왕에게 전달된다. 침략군은 바벨론 군대가 해자를 이용할 수 없게 또는 공격에 방해가 되지 않게 그곳에서 자라는 갈대에 불을 놓았습니다. 이제 성벽 공략만 잉용할 수 없게 또는 공격에 방해가 되지 않게 그곳에서 자라는 놓았습니다. 이제 성벽 공략만 남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왕에게 전달된 소식은 전사들이 겁에 질렸다는 보고인비다. 성을 보호하기 위해 겹겹이 만들어놓은 방어 시설이 다 적에게 점거되는 것을 보고 병사들은 겁에 질려 전의를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적이 성벽을 깨고 들어오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가 되었습니다.


개인과 공동체는 자기중심적 욕망이 고삐 풀린 교만이 되고 급기야 자멸에 이르게 한다는 살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겸손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신앙이 생명에 이르는 길입니다. 교회는 열방이 순종과 찬양의 길을 걷도록 기도하고 선교적 삶을 통해 증거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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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51-02)

 


성전을 위해 바벨론을 보복

예레미야 51장 11-19절


 

살아가면서 자신들이 말을 해놓고 신뢰하지 못한다며 그 다음부터는 그 사람의 말을 신뢰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께서는 믿을 수 없는 말씀을 먼저 하셨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 그 일을 확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그 말에 정확한 논리 때문이 아니라 그 말씀을 신뢰하는 것은 그 말씀을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지식이나 정보에 그치지 않습니다.

 

  • 여호와께서 선포하신 말씀에 따라 바벨론을 멸망시킬 계획을 세우시고 실행하십니다. 메대를 불러 당신 성전을 짓밟은 바벨론의 죄악을 징벌하십니다. 바벨론을 치러 북쪽에서 오는 적이 메대로 밝혀집니다.

 

계획대로 행하신 여호와(11-14)

풍부한 물을 확보한 기름진 땅에서 엄청난 부를 누리며 살면서도 그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지 않은 바벨론에게 종말을 선고하십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대적을 메뚜기같이 가득하게 보내실 때가 되면 그가 의지하던 재물이 그의 수명을 단 한 자도 연장시키지 못합니다.

 

11화살을 갈며 둥근 방패를 준비하라 여호와께서 메대 왕들의 마음을 부추기사 바벨론을 멸하기로 뜻하시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보복하시는 것 곧 그의 성전을 위하여 보복하시는 것이라 12바벨론 성벽을 향하여 깃발을 세우고 튼튼히 지키며 파수꾼을 세우며 복병을 매복시켜 방비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바벨론 주민에 대하여 말씀하신 대로 계획하시고 행하심이로다 13많은 물 가에 살면서 재물이 많은 자여 네 재물의 한계 곧 네 끝이 왔도다 14만군의 여호와께서 자기의 목숨을 두고 맹세하시되 내가 진실로 사람을 메뚜기 같이 네게 가득하게 하리니 그들이 너를 향하여 환성을 높이리라 하시도다(11-14)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장초하실 지혜가 있고 명철이 있습니다. 그 세상을 당신의 뜻과 계획대로 이끌어 가실 능력이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 대한 심판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나가고 계십니다.

 

⑴ 여호와의 보복(11-12)

 

하나님께서 그 동안은 한 민족을 일으켜서 바벨론을 심판하시겠다고 예언하셨지만, 이제야 ‘여호와께서 메대 왕들의 마음을 부추기사’(11)라고, 그 무명의 한 민족이 누구인지 설명합니다. 포위된 바벨론 성 공략을 앞둔 병사들에게 여섯 개의 짧은 명령이 전달됩니다. 먼저 활잡이들에게 화살촉을 갈고 화살통을 채우라는 두 개의 명령이 주어집니다(11a; 참조 50:14-16,29).

관통력을 높이기 위해 화살촉을 날카롭게 하고, 화살이 부족하지 않게 충분히 준비합니다. 다음의 네 명령은 성을 포위한 병사들에게 주어집니다(12a). 바벨론 성벽을 향해 깃발을 세워 공격 목표가 바벨론 성벽임을 알려줍니다. 경비를 튼튼히 하고 보초(파수꾼)를 세워 포위된 성을 완전히 봉쇄합니다. 주민들이 성을 빠져나가거나 바벨론 군대가 성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철저하게 감시합니다. 매복을 준비시켜 포위망을 깨뜨리려는 시도에 대비합니다. 성을 공략하기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납니다. 지금까지는 침략군을 북쪽에서 오는 민족으로 막연히 언급했는데(50:9,41), 11a절은 침략군의 정체를 메대로 밝혀 줍니다.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멸망시킬 계획을 세우시고, 이를 위해 메대 왕들의 마음을 깨우셨습니다(12b). 메대 왕들을 불러 당신 성전을 짓밟은 바벨론의 죄악을 징벌하십니다(11b 참조 50:15, 24). 메대는 여기서 페르시아를 가리킵니다. 바벨론은 여호와 앞에서 그분의 성전을 잿더미로 만든(52:13) 만행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합니다.

 

⑵ 바벨론의 종말(13-14)

 

메대인은 이란 북쪽 산지와 코카서스 지방(흑해와 카스피해 사이 지역)의 산기슭에 거주하는 인도-이란계의 민족으로 앗수르 비문에 주전 9세기경부터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바벨론과 함께 612년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함락했습니다. 앗수르가 멸망한 후 이들은 앗수르의 본래 영토인 티그리스 북쪽 지역과 소아시아 지역을 차지하고 그 세력을 크게 확대했습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죽은 후에는 바벨론에게도 매우 위협적이었습니다. 메대의 전성기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메대의 마지막 왕 아스티아게스(Astyages)의 봉신이었던 고레스가 페르시아의 지파들을 결속하고 559년 페르시아의 왕이 됩니다. 메대의 세력 확장을 저지하기 위해 고레스와 바벨론 왕 나보니드는 동맹을 맺고, 고레스가 승자가 됩니다. 그는 550년에 메대의 왕도(王都) 엑바타나를 점령하고 페르시아(바사)와 메대의 왕이 됩니다. 고레스는 계속 세력을 확장하여 547년에 리디아의 크로이소스 왕을 무찌르고 소아시아의 서쪽 해안선까지 자신의 통치 영역을 확대합니다. 539년 여름 바벨론에 대한 페르시아의 공격이 시작됩니다. 10월 초 티그리스 강의 오피스(Ops)에서 바벨론 군의 방어선을 뚫고, 10월 29일에 고레스는 바벨론에 입성합니다. 예언자가 직접 바벨론에게 심판을 선고합니다. 바벨론은 한마디로 ‘많은 물가에 살면서 재물이 많은 자’였습니다(13a). 유브라데 강은 바벨론의 젖줄이었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수로를 만들어 유브라데 강물을 물이 부족한 지역으로 끌어들여 농사를 지었습니다. 바벨론 성도 수로를 통해 물을 공급받았습니다. 바벨론은 계속된 원정으로 많은 전리품을 약탈했고 봉신국으로부터는 주기적으로 조공을 받았습니다. 바벨론의 창고는 값비싼 보물로 가득 찼습니다. 하지만 유브라데 강과 재물이 바벨론을 안전하게 지켜주지는 못합니다. 바벨론의 종말이, 바벨론의 생명줄이 잘릴 때가 왔습니다(13b). 여호와께서 ‘바벨론 주민에 대하여 말씀하신 대로 계획하시고 행하시기에’(12b) 바벨론은 멸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분께서 당신 목숨을 두고 맹세하셨기에 바벨론의 운명은 어떤 경우에도 되돌려지지 않습니다(14). 바벨론이 민족들을 굴복시킨 대제국이지만, 여호와께서 보내신 메뚜기 떼처럼 많은 침략자를 대적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바벨론이 많은 주민과 동맹국의 지원을 받아 맞서겠지만, 여호와께서는 그보다 훨씬 많은 병사를 보고 승리의 함성을 지르며 진격합니다.

 

무한 능력의 창조주 여호와(15-19)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우상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더 의지합니다. 자신들이 만든 우상을 자신들을 만든 하나님보다 더 경배합니다. 생기 없는 신상을 살아계신 하나님보다 더 경배합니다. 하지만 야곱 이스라엘은 창조주 하나님의 상속 재산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분깃이십니다.

 

15여호와께서 그의 능력으로 땅을 지으셨고 그의 지혜로 세계를 세우셨고 그의 명철로 하늘들을 펴셨으며 16그가 목소리를 내신즉 하늘에 많은 물이 생기나니 그는 땅 끝에서 구름이 오르게 하시며 비를 위하여 번개를 치게 하시며 그의 곳간에서 바람을 내시거늘 17사람마다 어리석고 무식하도다 금장색마다 자기가 만든 신상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18그것들은 헛된 것이요 조롱거리이니 징벌하시는 때에 멸망할 것이나 19야곱의 분깃은 그와 같지 아니하시니 그는 만물을 지으신 분이요 이스라엘은 그의 소유인 지파라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니라(15-19)

 

바벨론의 멸망을 선포하는 말씀 가운데 창조주와의 무한 능력을 찬양하는 단락이 놓인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 단락은 10:12-16의 반복입니다. 민족들이 섬기는 우상들이 아니라, 무한 능력의 창조주이신 여호와께서 민족들의 흥망성쇠를 결정하십니다.

 

⑴ 창조주(15-16)

 

이제 여호와의 창조 능력을 찬양합니다(15). 누가 땅과 세계와 하늘을 만들었습니까? 여호와께서 당신 능력으로 땅을 만드시고, 당신 지혜로 세계를 세우시고, 당신의 명철로 하늘을 펼치셨습니다. ‘세계’로 옮긴 단어는 육지나 대륙을 가리킵니다. 땅과 하늘과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여호와께서 능력과 명철과 지혜로 만드신 것이기에,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모두 그분의 능력과 지혜와 명철을 찬양해야 합니다. 창조와 지혜의 결합은 특히 바벨론의 지혜에 대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여호와께서는 땅과 세상과 하늘을 만드신 창조주이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비를 내려주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창조주로서 세상의 질서를 보장해주십니다. 창조와 역사와 삶이 한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려지면서 민족들도 그분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됩니다. 고대근동의 신화는 창조신과 역사와 삶을 주관하는 신을 구별합니다.

여호와께서 천둥과 같은 큰 음성으로 명령하시면 하늘이 창문을 열고 그 위의 물을 쏟습니다. ‘하늘에 많은 물이 생기나니’는 ‘하늘에 있는 물이 요동치니’로 옮겨야 합니다. 하늘의 물은 궁창 위의 윗물을 가리킵니다. 히브리적 우주관에 따르면 여호와께서 문을 열고 궁창 위의 윗물을 땅으로 내려 보내는 것이 비입니다(참조. 창 7:11; 왕하 7:2,19; 사 24:8). 그분은 땅끝에서 비구름(안개)을 피어오르게 하시고 번개를 만들어 비를 내리시며, 당신의 곳간에서 바람을 내보내십니다(참조 시 135:7). 바알과 같은 우상이 아니라, 바로 창조주 여호와께서 땅의 풍요를 주관하십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들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우상을 만들어 섬깁니다.

 

⑵ 우상의 실체(17-18)

 

17-18절은 우상의 정체를 폭로합니다. 사람마다 어리석고 지식이 없어 역사와 자연 가운데 활동하시는 창조주 여호와의 능력을 보지 못하고 우상을 만들어 숭배합니다. 우상숭배자들 가운데서도 특히 우상을 만들어 화려하게 장식하는 ‘금장색’이 조각한 신상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합니다. 그가 부어 만든 상은 ‘거짓’으로 그 안에 ‘생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상은 자신을 숭배하는 자들을 속여 멸망으로 이끄는 거짓이고, 이들에게 생명을 줄 수 없는 죽은 나무토막에 불과합니다. 우상은 장인들이 만든 헛것으로 조롱거리에 불과합니다. 숭배를 위해 만들었지만 아무 능력이 없기에 결국은 조롱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여호와께서 우상을 만든 자들을 징계하실 때 그들의 작품인 우상도 사라집니다. 헛것이요 조롱거리인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도 마찬가지로 헛것과 조롱거리가 됩니다.

 

⑶ 야곱의 분깃(19)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배경으로 여호와를 찬양합니다(19).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배하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헛것으로 조롱거리에 불과한 우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르십니다. ‘야곱의 분깃’과 ‘그의 소유인 지파’는 여호와와 이스라엘 사이에 내재하는 사적 관계를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야곱이 여호와의 분깃인 것처럼(참조, 신 32:9) 여호와께서는 야곱의 분깃이십니다. 야곱이 알아야 할 하나님께서는 창조주 여호와이십니다. ‘소유’로 번역한 단어는 남에게 팔아넘길 수 없는 집안의 상속 재산으로, 이스라엘이 (다른 신들에게 넘겨질 수 없는) 여호와의 영원한 소유임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은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여호와를, 이스라엘을 당신 몫으로 택하신 여호와를 섬겨야 합니다.


돈과 권력에 물든 사람이나 교회는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묵상해야 합니다. 신적 부요함을 거머쥐려고 할 때 모든 것을 잃어버립니다. 제국의 이야기는 자기를 강화하고 과시해야 때문에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본을 보여 따라오게 하신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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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51-01)


바벨론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회복

예레미야 51장 1-10절


하나님께서는 마치 두 얼굴을 가진 사람처럼 공존하기 어려운 성격을 갖고 계십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좌지우지할 수 없고 관계를 종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실한 자비는 관계를 지속시킬 뿐 아니라 상대방의 고통과 어려움을 함께 겪습니다. 이 두 성품 사이의 긴장을 유지해야 합니다.

 

  • 바벨론의 멸망과 하나님 백성이 멸망은 차이가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여호와께 범죄하고 멸망을 당했지만, 여호와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벨론은 그분의 심판으로 완전한 멸망에 떨어지지만, 유배민들은 구원을 경험하고 자기 땅으로 돌아갑니다.

 

재난의 날(1-6)

종종 악인들이 형통을 보면서 낙심하는 경우를 봅니다. 한편으로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 낙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거나 시기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일시적인 것뿐입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 의와 정의의 나라가 서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이 세상에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1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멸망시키는 자의 심령을 부추겨 바벨론을 치고 또 나를 대적하는 자 중에 있는 자를 치되 2내가 타국인을 바벨론에 보내어 키질하여 그의 땅을 비게 하리니 재난의 날에 그를 에워싸고 치리로다 3활을 당기는 자를 향하며 갑옷을 입고 일어선 자를 향하여 쏘는 자는 그의 활을 당길 것이라 그의 장정들을 불쌍히 여기지 말며 그의 군대를 전멸시켜라 4무리가 갈대아 사람의 땅에서 죽임을 당하여 엎드러질 것이요 관통상을 당한 자가 거리에 있으리라 5이스라엘과 유다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거역하므로 죄과가 땅에 가득하나 그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에게 버림 받은 홀아비는 아니니라 6바벨론 가운데서 도망하여 나와서 각기 생명을 구원하고 그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끊어짐을 보지 말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보복의 때니 그에게 보복하시리라(1-6)

 

하나님을 대적하는 바벨론을 치기 위해 한 나라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천하를 호령하던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서 쭉정이에 불과하니 바람을 일으켜 키질할 자들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오만한 자들은 그들을 무겁게 여길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⑴ 심판 선언(1-2)

 

여호와께서 바벨론의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멸망시키는 자의 심령을 깨워 바벨론과 렙-카마이(갈대아) 주민들을 치게 하십니다.

2절에 키질의 비유가 나오기에 ‘멸망시키는 자의 심령은 열망시키는/파괴하는 바람’으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바람은 자주 파괴적인 심판의 표상으로 사용됩니다(참조, 4:11-12; 13:24; 18:17; 22:22; 49:36). 북쪽에서 ‘큰 민족의 무리’를 일으켜 바벨론을 쳐들어가게 하신(50:9, 참조 41) 여호와께서 파괴하는 바람을 일으켜 바벨론을 치게 하십니다. ‘나를 대적하는 자 중에 있는 자’로 번역은 ‘나를 거슬러 일어나는 자들의 마음의 주민들’ 정도로 옮길 수 있습니다. ‘갈대아 주민들’의 암호로 간주하는 것이 앞에 나온 ‘바벨론’에도 일치합니다. 바벨론은 그대로 사용하고 ‘갈대아’만 굳이 암호를 사용한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2a절은 기질의 비유를 사용해 바벨론의 심판을 선포합니다. 여호와께서 ‘키질하는 자들’(타국인)을 보내 바벨론을 키질해서 그 땅이 비게 하십니다. ‘타국인’으로 번역된 단어는 원래 낯선 사람, 곧 본토 사람들 가운데 섞여 사는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바벨론을 공격하는 자들은 북쪽에서 오는 민족이기에, 또 동사 ‘키질하다’가 나오기에 키질하는 자로 읽는 것이 문맥에는 더 적합합니다. 원래 키질은 알곡과 쭉정이를 나누는 작업입니다. 바람이 적당히 부는 곳에서 마른 곡식을 던지면 가벼운 쭉정이는 날려가고 무거운 알곡만 남습니다. 분리 작업이기에 보통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는 심판의 표상으로 사용됩니다.

여기서는 쭉정이뿐만 아니라 알곡까지도 ‘파괴하는 바람’에 다 날려갑니다. 여호와께서 보내신 키질하는 자들이 바벨론 땅에 있는 것을 모두 광풍에 던져 날려버립니다. 바벨론 땅이 깨끗하게 비워집니다. 주민들이 다 쫓겨나고 땅은 폐허가 됩니다. 2b절에서는 바벨론의 심판이 사실적으로 선포됩니다. 재앙의 날에 침략자들이 바벨론을 사방에서 포위하고 공격합니다(50:14-15, 29).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포위한 침략자들에게 무자비한 공격 명령을 내리 십니다.

 

⑵ 전투 명령(3)

 

‘활을 당기는 자를 향하며 갑옷을 입고 일어선 자를 향하여 쏘는 자는 그의 활을 당길 것이라 그의 장정들을 불쌍히 여기지 말며 그의 군대를 전멸시켜라’(3). 침략군이 퍼부어 대는 화살에(50:14) 바벨론의 활잡이들이 감히 반격도 못합니다. 바벨론의 젊은이들은 죽음을 피하지 못하고, 그 군대는 궤멸합니다(50:30). 동정심을 모르는 침략군의 잔인한 공격으로 바벨론이 죽음에 넘겨집니다.

 

⑶ 심판의 묘사(4)

 

갈대아 땅에는 칼에 맞아 죽은 자들뿐이고, 거리에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자들뿐입니다(4). 바벨론의 멸망이 확정적이기에 살고 싶으면 바벨론에서 도망쳐야 합니다. 바벨론 한가운데서 도망쳐 저마다 제 생명을 구하고 바벨론의 죄악 때문에 함께 죽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6a; 50:8). 전쟁의 심판이기에 바벨론에 남은 자는 누구도 칼을 피하지 못합니다.

 

⑷ 이스라엘의 구원(5-6)

 

바벨론에서 도망치라고 경고를 받는 ‘너희’가 누구인지는 불분명하지만, 5절의 문맥에 따르면 이스라엘과 유다의 유배 민들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6b절은 바벨론의 멸망에 관한 신학적 해석입니다. ‘이는 여호와의 보복의 때니 그에게 보복하시리라’(6b) 이제 여호와께서 바벨론에게 책임을 물으실 때가 왔습니다. 바벨론이 민족들에게 행한 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보복하십니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거역하므로 죄과가 땅에 가득하나 그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에게 버림 받은 홀아비는 아니니라’(5)은 여호와에 의한 이스라엘과 유다의 심판이 제기한 신학적 문제에 대한 답변입니다.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자주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묘사되는데, 여기서는 특이하게도 이스라엘을 ‘여호와에게 버림받은 홀아비’로 표현합니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여호와께 저지른 넘치는 죄과로 멸망하고 사로잡혀 가 유배살이 하지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 관계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반면에 이사야 54:7은 여호와께서 시온을 감사 버렸다고 말하고(참조. 52:3), 시편 44:12에서 시인은 ‘주께서 주의 백성을 헐값으로 파심이여 그들을 판 값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셨나이다.’하고 탄식합니다. 이사야 50:1은 많은 바벨론 유배민이 유배를 여호와에 의한 쫓겨날(이혼)으로 간주했음을 보여줍니다(참조. 예레미야 31:31-34).

 

여호와의 일을 선포하자(7-10)

행한 대로 우리에게 돌려주셨다면 우리는 이미 멸절되었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납하시고 받으셨습니다. 이 은혜를 당연하게 받지 말고 이해할 수 없는 은혜를 하나님께, 그리고 사랑스럽지 않은 이웃들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심은 이러한 모든 하나님의 사역들을 감사하며 간증하길 원하셨습니다.

 

7바벨론은 여호와의 손에 잡혀 있어 온 세계가 취하게 하는 금잔이라 뭇 민족이 그 포도주를 마심으로 미쳤도다 8바벨론이 갑자기 넘어져 파멸되니 이로 말미암아 울라 그 상처를 위하여 유향을 구하라 혹 나으리로다 9우리가 바벨론을 치료하려 하여도 낫지 아니한즉 버리고 각기 고향으로 돌아가자 그 화가 하늘에 미쳤고 궁창에 달하였음이로다 10여호와께서 우리 공의를 드러내셨으니 오라 시온에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일을 선포하자(7-10)

 

바벨론은 한때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온 땅에 쏟아 부어 심판하는 수단이었지만, 갑자기 넘어져 파멸하게 하십니다. 너무나 갑작스런 이 멸망을 믿을 수 없어 이스라엘마저 유향을 구하여 낫게 해보자고 하지만, 멸망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바벨론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⑴ 여호와의 손에 잡힌 금잔(7)

 

바벨론에 대한 여호와의 멸망 선포(1-4절)에 뒤이어 예언자의 탄식이 뒤따릅니다. 바벨론이 이미 멸망에 떨어졌음을 전제하고 탄식합니다. 바벨론이 여호와의 심판에서 살아남을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예언자는 먼저 바벨론의 화려했던 과거와 절망적인 현재를 대비합니다. ‘바벨론은 여호와의 손에 잡혀 있어 온 세계가 취하게 하는 금잔이라 뭇 민족이 그 포도주를 마심으로 미쳤도다 바벨론이 갑자기 넘어져 파멸됐다’(7-8a). ‘여호와의 손에 잡혀 있어’는 바벨론이 여호와께서 역사를 경영하는 데 사용하시는 도구였음을 보여줍니다. 25:9에서 여호와께서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내 종으로 부르십니다.

 

⑵ 치료가 불가능한 바벨론이 병(8-9)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심판의 집행자로 삼으셨기에 민족들은 바벨론의 술잔을 마시고 취해야 했습니다(참조. 25:15-29). 바벨론에 의한 민족들의 정복은 여호와의 역사 의지를 구현해 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금잔은 바벨론의 넘치는 부와 패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점령지의 금은보화가 바벨론의 창고를 가득 채웠고, 바벨론은 주변 모든 나라를 발아래 굴복시켰습니다.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영화가 한순간에 사라집니다. 바벨론이 갑자기 쓰러져 멸망합니다. 갑자기는 여호와의 간섭에 의한 멸망을 시사해줍니다. 맡겨진 역할이 끝나면 지체 없이 역사의 무대에서 떠나야 합니다.

바벨론의 멸망을 바라보는 자들의 반응이 바벨론의 시각에서 다양하게 묘사됩니다. 사람이 죽으면 남은 자들이 죽음을 애도해 통곡하듯이 바벨론의 멸망을 애도해 통곡합니다(8a). 바벨론은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음에도 치료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환자와 같습니다. 유향을 발라보지만 아무 효과가 없습니다(8b절). 고대 세계에서 유향은 상처를 치료하거나 진통을 완화하는 약제였습니다. 바벨론의 상처를 치료하려고 이것저것 시도해보지만 아무 효과가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보내신 칼에 맞아 생긴 중한 상처이기에 일반적인 치료제로는 회복이 불가능합니다(참조. 8:22; 46:11). 바벨론의 멸망을 막아보려 는 모든 시도가 실패로 끝납니다. 바벨론과 함께 죽지 않고 살려 면 바벨론을 버리고 저마다 제 고향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습니다(9a). 바벨론을 치료하기 위해 애쓰는 ‘우리’는 바벨론을 돕는 그의 동맹군을 바벨론을 떠나는 ‘우리’는 바벨론에 사는 이방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중상을 입은 바벨론이 홀로 남겨져 죽음을 맞습니다. ‘그 화가 하늘에 미쳤고 궁창에 달하였음이로다’(9b)는 바벨론이 파멸적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징벌의 크기가 하늘에 닿았음은 바벨론의 죄과가 하늘에 미칠 정도로 엄청났음을 시사해줍니다(50:46)

 

⑶ 구원의 고백(10)

 

바벨론 심판은 여호와께서 당신 백성을 위해 개입하시는 구원사이 기도 합니다. 바벨론에서 도망친 자들이 시온에 와서 바벨론의 멸망을 ‘여호와께서 우리 공의를 드러내신’ 사건으로 고백하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일을 선포합니다(10). ‘우리 공의’는 아마도 유배민들의 구원과 관련한 언급인 것 같습니다. 구원이 의로움의 인정이라는 점에서 유배살이로부터의 해방과 귀향은 우리 공의가 됩니다.


신앙은 안 만큼 믿고 삶에서 경험한 것에 비례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하나님을 신뢰하거나 터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두 성품을 묵상과 삶의 자리에서 경험하여 체득해야 합니다. 공허하고 맹목적인 신앙에서 벗어나 네용과 개념을 갖춘 제자의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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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50-04)

 


하나님의 경고와 바벨론의 몰락

예레미야 50장 33-46절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선택한 백성들에게 깊고 배타적인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이 사랑은 때로 상처받기 쉬운 자비로 표현되며, 백성들이 고난을 겪을 때 그들의 부르짖음과 탄원을 듣고 응답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랑으로 백성들의 고통에 참여하시며, 그들의 구원을 위해 직접 개입하십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잘 이해하고 있었으며,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강조했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과 능력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바벨론의 손아귀에서 당신 백성을 구출하기에 충분히 강한 구속자이셨습니다. 이제 그분께서 바벨론 때문에 평안을 잃었던 땅이 다시 평안함을 누리게 해주시고, 폭력을 즐겼던 바벨론 주인들은 불안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33-34)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난과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으시며,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은 모든 상황을 초월하여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능력을 믿고 의지하며 문제를 극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속은 확실하고 완전하며, 그분의 약속을 신뢰하고 그분의 계획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33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이스라엘 자손과 유다 자손이 함께 학대를 받는도다 그들을 사로잡은 자는 다 그들을 붙들고 놓아 주지 아니하리라 34그들의 구원자는 강하니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라 반드시 그들 때문에 싸우시리니 그 땅에 평안함을 주고 바벨론 주민은 불안하게 하리라(33-34)

 

다시금 교만한 바벨론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구원이 연계됩니다. 예언자의 시선이 이스라엘과 유다의 유배당한 자들에게로 향합니다(33; 4,20). 앗수르에 멸망당하고 사로잡혀 간 이스라엘 자손들과 597년과 58877년 바벨론에 멸망당하고 사로잡혀간 유다 자손들이 억압을 받았지만 여전히 해방되지 못했습니다. 33b절에 출애굽 때의 바로를 생각나게 해줍니다. ‘놓아 주지 않다’는 ‘돌려보내기를 거절하다’로, 출애굽 4:23; 7:14; 9:2에도 나옵니다. 또 출애굽기 9:2의 ‘잡아두면’은 ‘붙들고’와 같은 동사로 번역입니다. 애굽 왕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 보내기를 거절했던 것처럼 (앗수르와) 바벨론은 사로 잡아 간 자들을 붙잡아두고 돌려보내길 거절했습니다. 바벨론으로부터의 해방이 제2의 출애굽이 될 것을 시사해줍니다.

34절은 여호와를 구원자(고엘)로 소개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바베론의 손아귀에서 당신 백성을 구출하시기에 충분히 강한 구원자이십니다(34a). 구원자는 원래 씨족이나 친죽의 구성원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그 권리를 찾아주는 가까운 친척을 가리킵니다. 그는 집안의 일원이 살해 되었을 때는 ‘피를 보복하는 자’로 살인자에게 복수해야 하고(참조 민수기 35:19-27), 가장이 푸손없이 죽었을 때는 그 부인과 결혼을 해서 죽은 자의 아들을 낳아주어야 하며(참고 룻 3:12; 4:14),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곤경ㅇ[ 처하거나 종이 되었을 때는 그 빚을 갚아주거나 속량해주어야 합니다(참조 레위기 25:23-28, 47-49).

이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서 유배자들의 권리를 되찾아주십니다. 유배자들을 위한 여호와의 개입이 온 땅에 그 영향을 미칩니다. 바벨론으로 인해 평안을 잃었던 세상에 다시 평안이 회복되고, 폭력과 억압을 즐겼던 바벨론 주민들은 불안에 떨게 됩니다.

 

바벨론의 완전한 멸망(35-40)

하나님께서는 악행과 교만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단순한 재난이 아니라 그분의 계획과 목적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정의를 믿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35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칼이 갈대아인의 위에와 바벨론 주민의 위에와 그 고관들과 지혜로운 자의 위에 떨어지리라 36칼이 자랑하는 자의 위에 떨어지리니 그들이 어리석게 될 것이며 칼이 용사의 위에 떨어지리니 그들이 놀랄 것이며 37칼이 그들의 말들과 병거들과 그들 중에 있는 여러 민족의 위에 떨어지리니 그들이 여인들 같이 될 것이며 칼이 보물 위에 떨어지리니 그것이 약탈되리라 38가뭄이 물 위에 내리어 그것을 말리리니 이는 그 땅이 조각한 신상의 땅이요 그들은 무서운 것을 보고 실성하였음이니라 39그러므로 사막의 들짐승이 승냥이와 함께 거기에 살겠고 타조도 그 가운데에 살 것이요 영원히 주민이 없으며 대대에 살 자가 없으리라 40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성읍들을 뒤엎었듯이 거기에 사는 사람이 없게 하며 그 가운데에 머물러 사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하시리라(35-40)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지혜자와 군대에게 심판의 칼을 내리시고, 그 땅을 황폐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벨론은 기근과 전쟁으로 인해 완전히 파괴될 것이며, 이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의로운 심판의 결과입니다. 바벨론의 멸망은 하나님의 권위와 정의를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⑴ 칼의 노래(35-38a)

 

35-38절은 바벨론 주민들이 어떻게 불안에 떨게 될지를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이들에게 칼이 임하게 하십니다. 전쟁의 재앙이 바벨론에 닥칩니다. 칼이 어디에서 오는지는 말하지 않지만, 앞 단락에서처럼 북쪽에서 오는 침략군의 칼)을 전제하는 것 같습니다. 칼이 바벨론의 모든 분야(정치, 종교, 국방, 경제)를 쳐서 무력화합니다. 칼이 갈대아인과 바벨론 주민들과 그 고관들과 지혜로운 자들에게 떨어집니다(35). 고관들과 지혜로운 자들은 정치 지도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칼이 신탁 제사장들(자랑하는 자)에게 떨어져 그들을 어리석은 자들로 만듭니다(36). 나라가 멸망의 위기에 처했는데도 제사장들은 거짓 신탁만 내립니다. 고대 근동에서 유명했던 바벨론의 지혜와 종교가 그 기능을 상실합니다. 칼이 용사와 말들과 병거들과 용병들(여러 민족)에게 떨어집니다(36b-37a).

 

(2) 심판의 이유(38b)

 

바벨론이 자랑하는 군사력도 무용지물이 됩니다. 적에 맞서 용감하게 싸워야 할 자들이 겁에 질려 여자처럼 됩니다. 칼이 보물 창고에 떨어져 보물이 약탈당합니다(37). 민족들에게서 빼앗아 온 보물을 빼앗깁니다. 바벨론의 농업을 책임진 유브라데 강이 가뭄으로 말라버립니다(38).

 

(3) 멸망의 심판(39-40)

 

바벨론을 지탱해온 모든 것이 전쟁으로 남김없이 파괴됩니다. 바벨론이 칼의 재앙에 떨어지는 이유는 바벨론 사람들이 우상에 미쳤기 때문입니다(38b). 헛된 우상을 숭배한 결과로 바벨론은 여호와께서 뒤엎으신 소돔과 고모라처럼 사람이 영원히 살 수 없는 폐허가 됩니다(40). 인적이 완전히 끊기고 사막의 들짐승과 승냥이와 타조가 대신 자리를 잡습니다(39). 이것들은 황무지에 사는 대표적인 짐승들입니다.

 

바벨론을 침략하는 무서운 죄(41-43)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와 교만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우리는 교만과 악행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올바른 길을 걸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와 정의를 실현하는 과정이며, 우리는 이를 믿고 정의와 공의를 실천해야 합니다. 바벨론의 심판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에 주권을 가지신다는 것을 믿고 순종해야 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41보라 한 민족이 북쪽에서 오고 큰 나라와 여러 왕이 충동을 받아 땅 끝에서 일어나리니 42그들은 활과 투창을 가진 자라 잔인하여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그들의 목소리는 바다가 설레임 같도다 딸 바벨론아 그들이 말을 타고 무사 같이 각기 네 앞에서 대열을 갖추었도다 43바벨론의 왕이 그 소문을 듣고 손이 약하여지며 고통에 사로잡혀 해산하는 여인처럼 진통하는도다(41-43)

 

바벨론이 침략받을 무서운 죄를 언급하며, 그로 인해 큰 재앙이 임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의 교만과 악행을 심판하기 위해 강력한 민족들을 보내어 그들을 공격하게 하실 것입니다. 바벨론의 왕과 백성들은 그들의 죄로 인해 두려움과 고통에 빠지게 되며,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로써 바벨론의 자만심과 죄가 드러나며,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될 것입니다.

 

(1) 북쪽에서 오는 한 민족(41)

 

바벨론을 치려고 ‘한 민족이 북쪽에서’ 오고, ‘큰 나라와 여러 왕이 땅 끝에서’ 일어납니다(41). 서두의 ‘보라’는 이미 사건이 진행 중임을 시사합니다. 북방 민족의 침략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지금 발생하고 있는 재앙입니다. 바벨론을 치는 민족은 많은 왕을 봉신으로 거느린 큰 나라입니다. 침략군의 정체에 관해서는 여전히 침묵하고 그 방향만 알려줍니다. 이미 9절에서 여호와께서는 ‘큰 민족의 무리를 북쪽에서 올라오게 하여’ 바벨론을 쳐들어가게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땅 끝’은 두려움을 모르는 야만족이 사는 신화적 장소입니다.

 

(2) 잔인하고 무자비한 적(42)

 

바벨론을 목표로 원정을 떠난 자들은 사납고 무서운 제국의 군대입니다. 활과 투창(칼?)으로 무장한 이들은 동정심을 모르는 잔인한 자들로, 그 함성은 바다의 포효처럼 땅을 뒤흔듭니다(42; 참조. 사 5:30; 17:12). 이들은 말을 타고 신속하고도 거침없이 내달립니다. 이들은 벌써 전열을 갖추고 바벨론을 공격할 준비를 끝냈습니다. 바벨론을 향해 오는 군대를 바라보던 예언자의 시선이 바벨론 왕궁으로 옮겨집니다.

 

(3) 고통에 사로잡힌 바벨론 왕(43)

 

바벨론 왕은 북쪽에서 적이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맥이 풀립니다(43a; 참조. 삼하 4:1; 사 13:7; 겔 7:17). 군대를 이끌고 침략군에 맞서 싸워야 할 왕이 먼저 두려움에 사로잡혀 전의를 상실합니다. 마치 해산하는 여인과 같이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43b). 바벨론은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멸망의 공포에 사로잡혀 죽은 목숨이 됩니다.

 

바벨론을 치시는 여호와(44-46)

하나님께서는 모든 악행과 교만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교훈을 바벨론의 예를 통해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분의 공의와 정의를 실현하는 과정이며,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정의와 공의를 실천해야 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바벨론의 멸망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에 주권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믿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야 함을 상기해야 합니다.

 

44보라 사자가 요단의 깊은 숲에서 나타나듯이 그가 와서 견고한 처소를 칠 것이라 내가 즉시 그들을 거기에서 쫓아내고 택한 자를 내가 그 자리에 세우리니 나와 같은 자 누구며 출두하라고 나에게 명령할 자가 누구며 내 앞에 설 목자가 누구냐 45그런즉 바벨론에 대한 여호와의 계획과 갈대아 사람의 땅에 대하여 품은 여호와의 생각을 들으라 양 떼의 어린 것들을 그들이 반드시 끌어 가고 그들의 초장을 황폐하게 하리니 46바벨론이 약탈 당하는 소리에 땅이 진동하며 그 부르짖음이 나라들 가운데에 들리리라 하시도다(44-46)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멸망을 예고하십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의 강력한 지도자와 군대를 찾아내어 파멸시킬 것이며, 그 땅은 황폐하게 될 것입니다. 바벨론의 멸망은 그들의 교만과 악행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상징이며, 이로 인해 민족들이 두려워하고 놀라게 될 것입니다.

 

(1) 사자처럼 공격하시는 여호와(44)

 

바벨론을 치는 주체가 북쪽에서 오는 어떤 잔인하고 무자비한 민족에서 여호와로 바뀝니다. 한 민족에 의한 바벨론의 멸망이 여호와의 결정에 따른 것임을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직접 바벨론을 치십니다. 바벨론을 공격하시는 여호와께서 들짐승 가운데 가장 힘이 세고 무서운 사자에 비유됩니다(44). 요단의 깊은 숲에서 사자가 올라와 물가에 있는 푸른 초장을 습격해 그곳에서 풀을 먹거나 쉬고 있는 양 떼를 쫓아내듯이 여호와께서 한순간에 바벨론을 쳐서 그 주민들을 몰아내시고 당신께서 택한 자를 그곳에 세우십니다.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다스릴 자로 택한 자가 누구인지는 달리 언급하지 않습니다. 민족들을 통치하던 바벨론이 이방 통치자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바벨론의 이방 지배는 여호와의 결정으로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민족들의 운명을 결정하시는 여호와와 같은 자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분의 결정에 불복해 그분을 소환할 자는 없습니다. 그분 앞에서 맞설 수 있는 목자(왕)는 없습니다.

 

(2) 여호와의 계획(45)

 

여호와께서는 바벨론에 대한 당신의 생각과 계획을 이미 확정하셨습니다. 그렇기에 ‘바벨론을 거슬러 세우신(계획하신) 여호와의 계획과 갈대아 사람의 땅을 거슬러 정하신(생각하신) 그분의 생각’(45절의 사역)을 들어야 합니다. 여호와의 결정이 바벨론을 포함한 민족들의 운명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우신 계획에 따라 땅 위의 역사가 전개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계획에 따르면 바벨론은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합니다(42). 바벨론의 멸망은 전면적입니다. 양 떼의 어린 것들마저 다 쫓겨나 초장이 황폐해집니다(45b; 참조. 44).

 

(3) 진동하는 땅(46)

 

바벨론이 주민들을 다 잃고 아무도 살지 않는 황무지가 됩니다. 한때 민족들을 지배했던 바벨론의 참혹한 멸망이 세상을 뒤흔듭니다. 바벨론이 함락됐다는 외침에 땅이 흔들리고, 그 부르짖는 소리가 민족들 가운데 들립니다(46). 멸망한 바벨론 사람들의 부르짖음이 온 땅에 퍼짐으로써 모든 민족이 바벨론의 함락을 알게 됩니다.


권력이 제멋대로 자행하는 잔악함의 끝은 파멸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하나님의 혹독한 징벌을 불러옵니다. 하나님께 부여받은 권위를 스스로 얻은 듯 착각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지독하게도 미워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은 권위를 잘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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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50-03)


하나님의 말씀과 바벨론의 운명

예레미야 50장 21-32절


 

우리 시대에 미국이나 중국과 같은 강대국들이 망한다고 말을 들으면 많은 사람들이 코웃음을 칠 것입니다. 작게는 대제벌 ‘삼성’이나 ‘현대’가 망한다면 동일할 것입니다. 그들이 지금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고, 그 지배세력은 항상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 흘러간 적이 없습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늙고 쇠하듯이 나라도 조직도 교회도 그리고 권력도 사라졌습니다.

 

  • 바벨론이 앗수르를 정복하고 근동에 패권을 장왁할 때만 해도 그 제국은 아주 오래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이 70년만에 안전하게 약속의 땅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하는 것을 믿을 사람은 없었습니다.

 

여호와의 올무(21-28)

강한 자기 충족 추구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통제원리로 두지 않는 자율은 파괴적이고 압제적으로 나타납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사사화 된 자기중심적 신앙은 하나님께서 원하는 세상, 공적인 영역에 임하는 하나님의 통치에 무관심하게 만듭니다.

 

21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는 올라가서 므라다임의 땅을 치며 브곳의 주민을 쳐서 진멸하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대로 다하라 22그 땅에 싸움의 소리와 큰 파멸이 있으리라 23온 세계의 망치가 어찌 그리 꺾여 부서졌는고 바벨론이 어찌 그리 나라들 가운데에 황무지가 되었는고 24바벨론아 내가 너를 잡으려고 올무를 놓았더니 네가 깨닫지 못하여 걸렸고 네가 여호와와 싸웠으므로 발각되어 잡혔도다 25여호와께서 그의 병기창을 열고 분노의 무기를 꺼냄은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갈대아 사람의 땅에 행할 일이 있음이라 26먼 곳에 있는 너희는 와서 그를 치고 그의 곳간을 열고 그것을 곡식더미처럼 쌓아 올려라 그를 진멸하고 남기지 말라 27그의 황소를 다 죽이라 그를 도살하려 내려 보내라 그들에게 화 있도다 그들의 날, 그 벌 받는 때가 이르렀음이로다 28바벨론 땅에서 도피한 자의 소리여 시온에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보복하시는 것, 그의 성전의 보복하시는 것을 선포하는 소리로다(21-28)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심판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어 그 땅을 파괴하고 혼란에 빠뜨리신다고 선언하십니다. 바벨론의 지도자와 군대는 패배하고 권세는 무너질 것이며, 이는 그들의 악행에 대한 응징입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의 멸망을 보고 구원의 기쁨을 얻게 됩니다.

 

⑴ 공격 명령(21-23)

 

여호와께서 신분이 밝혀지지 않은 ‘너’에게 올라가서 므라다임의 땅을 치며 브곳의 주민을 쳐서 진멸하라는 명령을 내리십니다(21). 명령을 받은 자는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그들을 쫓아가서 모조리 없애버려야 합니다. ‘므라다임’과 ‘브곳’은 바벨론이 지역으로, 바벨론을 대신하는 경우는 여기가 유일한데, 아마도 바벨론을 조통하려는 의도에서 사용된 것 같습니다. ‘므라다임’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이 합쳐지는 남부 바벨론의 늪지를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바벨론은 여호와를 거슬러 갑절로 고집을 부리는 성입니다. 에스겔 23:33에 한 번 더 나오는 브곳은 동부 바벨론 지역에 사는 아람 부족 푸쿠두(Pukudu)를 히브리어로 옮긴 표현입니다. ‘브곳’은 ‘징벌하다’, ‘보복하다’를 뜻하는 (‘징벌 받은 자’)로 읽을 수 있습니다. 바벨론이 여호와에 의해 징벌을 받게 될 것을 보여줍니다. ‘진멸하다’로 옮긴 단어는 원래 전쟁에서 얻은 모든 전리품(사람과 짐승과 물건과 성읍)을 승리한 자가 소유할 수 없도록 여호와께 속한 것으로 모조리 없애버리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바벨론과의 전쟁이 여호와의 전쟁처럼 언급됩니다. 상응해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모두 실행할 것을 분명하게 권면합니다.

여호와께서 익명의 적을 보내셔서 바벨론을 치게 하십니다. 이 익명의 나라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페르시아로 보입니다. 치는 시기에 바벨론 땅이 ‘싸움의 소리와 큰 파멸’로 가득 찹니다(22). 전쟁을 모르고 살던 바벨론이 전쟁의 무대가 됩니다. 침략하기만 했던 바벨론이 전쟁의 아우성을 듣습니다. 파괴하기만 했던 바벨론이 파괴를 당합니다.

23절은 형식상 죽은 자를 애도하는 노래입니다. 바벨론이 애가의 대상이 됐음은 어떤 경우에도 바벨론이 멸망을 피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여호와의 명령에 따른 공격이기에 바벨론이 적의 침략에서 살아남을 길은 없습니다. 바벨론은 이미 죽은 존재와 다름없습니다.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우고 민족들을 짓밟은 바벨론이 여호와의 명령을 수행하는 적에 의해 멸망하고 황무지가 됩니다(참조. 50:3; 51:29,41,43). 한때 온 세계의 망치로 사방으로 원정을 다니며 원하는 대로 땅을 파괴하고 정복하던 바벨론이 파괴를 당합니다. 바벨론이 황무지가 된 것을 보고 민족들은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고대적 사고에 따르면 폐허로 변한 성읍은 신의 저주를 받은 표징입니다. 망치와 유사한 표상이 사용된 51:20-23과 비교하면 한 가지가 눈에 띕니다. 20절에 따르면 여호와께서는 누군가를 ‘나의 철퇴 곧 무기’로 부르시며 민족들을 파괴할 자로 세우십니다. 여기서는 여호와의 손에 들린 망치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바벨론의 폭력성을 강조하기 위해 그냥 망치로만 표현한 것 같습니다. 51:7은 바벨론을 ‘여호와의 손에 잡혀 있는’ 금잔에 비유합니다.

 

⑵ 올무에 걸린 바벨론(24-25)

 

온 세상의 망치가 공포를 자아낼 정도로 철저하게 파괴될 때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습니다. 새 사냥꾼이 올무를 놓아 새를 잡듯이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잡으려고 올무를 놓으셨는데, 민족들의 정복자 바벨론은 이를 알지 못하고 만용을 부리다가 올무에 걸려 붙잡힙니다(24). 여호와께 대들다가 피하지 못하고 올무에 걸려듭니다. 민족들을 정복한 바벨론은 자신들이 파괴한 변방의 작은 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온 땅의 하나님이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분의 성전을 파괴한 것 이 올무가 되어 돌아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징계하시려고 무기고를 열고 ‘분노의 무기’를 꺼내십니다. 그리고 이제 갈대아 땅에서 하실 일을 하십니다. 직접 무기를 들고 바벨론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십니다. 현재의 문맥에서 무기고에서 꺼낸 그분의 ‘분노의 무기’는 바벨론을 침략하는 민족들입니다. 이사야는 앗수르를 여호와의 진노의 막대가로 불렀습니다(이사야 10:5).

 

⑶ 공격 명령(26-27)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침략하는 군대에게 공격을 명령하십니다. 21절에서는 청자가 2인칭 단수 남성이었는데, 26-27a절에서는 2인칭 복수의 청자에게 명령이 주어집니다. 여호와께서 먼저 침략군을 바벨론으로 불러들이십니다. ‘먼 곳에 있는 너희는 와서 그를 치고’는 ‘사방에서 와서 그를 치고’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바벨론을 치기 위해 온 세상에서 민족들이 소집됩니다. 다음 두 개의 명령은 서로 일치하지 않아 이해가 어렵습니다. ‘그의 곳간을 열고 그것을 곡식더미처럼 쌓아 올려라’의 원문은 ‘그의 곳간을 열고 그를 곡식더미처럼 쌓아 올려라’입니다. 바벨론의 곡식 창고를 열고 그 안에 보관된 곡식 더미를 끌어내 쌓아 올리는 것이 아니라, 곡식더미처럼 바벨론을 쌓아올립니다. 아마도 곡식 더미를 쌓아 올리고 불태워 여호와께 돌리듯이 바벨론도 그렇게 돌리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바벨론을 진멸해서 그에게 남은 것이 없게 해야 합니다(21). ‘그의 황소를 다 죽이라 그를 도살하려 내려 보내라는 사실적 또는 상징적 이해가 모두 가능합니다. 앞에 나온 곡식 더미는 전자의 이해를 지지할 수 있습니다. 곡식뿐만 아니라 황소(짐승)까지도 모두 여호와께 드려야 합니다. 또 황소는 우두머리 나 용사들을 가리키 기도 하기에(참조, 이사야 34:7; 에스겔 39:18; 시편 22:13) 전쟁 용사들을 죽여버리라는 말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침략자의 공격으로부터 바벨론을 지켜야 할 용사들이 다 죽습니다. 26-27a절은 바벨론 침략 전쟁을 헤렘(여호와의 전쟁)으로 선포하는 것 같다. 바벨론과 그의 곡식 더미와 황소(용사)가 모두 여호와께 희생 제물로 드려집니다. 27b절은 다시금 바벨론의 열망을 탄식합니다. ‘그들의 날’은 바벨론이 벌 받아 죽게 될 날입니다. 바벨론의 멸망은 먼 미래의 가능성이 아니라, 이미 눈앞에 다가온 현실입니다.

 

⑷ 여호와의 보복(28)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당하고 포로로 잡혔기에 바벨론의 운명과 시온의 운명이 서로 연동됩니다. 바벨론이 심판받을 때 도망쳐 나온 자들이 시온에 와서 여호와께서 바벨론에 행하신 놀랍고도 두려운 일을 전해줍니다(28). 이들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짓밟고 종으로 부린 바벨론 제국을 심판하셨다고 경험적·고백적으로 선포합니다. 바벨론의 멸망은 강대국 사이에서 벌어진 패권 다툼의 정치적 결과물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당신 성전을 위해 보복하시는(15,24), 예루살렘 성전을 잿더미로 만들고(52:13) 당신 백성을 포로로 잡아간 바벨론의 만행을 징벌하시는 신학적 사건입니다.

 

여호와께서 벌하시는 때(29-32)

성경에서 가장 경계할 죄중에 하나가 ‘교만’입니다. 성경에서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라는 유명합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교만하다는 생각은 하지 못합니다. 교만에서는 반드시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뒤따라옵니다. 더 나가서 하나님을 무시하는 경우까지 발생합니다.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교만을 얼마나 싫어 하신지를 설명하고 계십니다. 말씀을 통해서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교만이 있지 않은지 점검해 봐야 합니다.

 

29활 쏘는 자를 바벨론에 소집하라 활을 당기는 자여 그 사면으로 진을 쳐서 피하는 자가 없게 하라 그가 일한 대로 갚고 그가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라 그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여호와를 향하여 교만하였음이라 30그러므로 그 날에 장정들이 그 거리에 엎드러지겠고 군사들이 멸절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1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교만한 자여 보라 내가 너를 대적하나니 너의 날 곧 내가 너를 벌할 때가 이르렀음이라 32교만한 자가 걸려 넘어지겠고 그를 일으킬 자가 없을 것이며 내가 그의 성읍들에 불을 지르리니 그의 주위에 있는 것을 다 삼키리라(29-32)

 

교만한 자랑과 거만한 자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활보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제국은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은 권위를 잘 분별하는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⑴ 포위 명령(29-30)

 

여호와께서 복수 2인칭의 청자에게 바벨론을 공격하여 모조리 불태워버릴 것을 명령하신다. 궁수들을 소집하고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성을 완전히 포위하게 하시고, 바벨론이 이전에 저지른 대로 보복하라고 명령하십니다(29a; 15). 압도적인 군사력을 앞세워 민족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던 ‘온 세상의 망치’ 바벨론이 민족들에 의해 진멸을 당합니다. 바벨론의 젊은이들은 광장에서 쓰러지고, 군인들은 모두 죽음에 넘겨집니다(30). 바벨론의 교만이 멸망을 초래합니다.

 

⑵ 바벨론 심판(31-32)

 

‘교만하다’를 의미하는 단어를 29절에서는 동사로, 31절과 32절에서 명사로 반복 사용됩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께 맞서 교만하게 굴었기 때문에(29b) 그분의 징벌로 바벨론이 멸망합니다. 이제 여호와께서 바벨론의 교만을 징벌하시는 날이 왔습니다(31). 그분이 직접 교만한 바벨론을 치시기에 비틀거리다 넘어져도 도의 손길을 찾지 못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성읍들에 불질러 그 주변까지 모두 태워버리 십니다(32).


권력이 제멋대로 자행하는 잔악함의 끝은 파멸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하나님의 혹독한 징벌을 불러옵니다. 하나님께 부여받은 권위를 스스로 얻은 듯 착각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지독하게도 미워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은 권위를 잘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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