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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51-05)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경고와 바벨론의 파멸

예레미야 51장 45-53절


 

맘몬과 소비주의의 제국에서 사람들은 극도의 불안에 싸여 살아갑니다. 도처에서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립니다. 깊은 바라의 검은 파도가 개인과 공동체를 흔들며 생명과 평화의 길을 위협합니다. 그럴 때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이 도전에 맞서야 할 것입니까?

 

  • 바벨론을 향한 여호와의 진노가 전쟁의 형태로 나타나기에 적이 바벨론을 침략할 때 그곳에서 유배살이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전쟁의 칼에 희생당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심판하실 때 유배인들은 지체하지 많고 그곳을 떠나 목숨을 구해야 합니다.

 

나의 백성(45-46)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나약하게 말고 수문에 두려워하라고 하십니다. 믿음은 살아가면서 세상의 소리보다 하나님의 목소리를 더 크게 들을 때 생깁니다. 그 소리에 반응할 때 믿음을 더 커집니다. 그 믿음의 결과를 묵도할 때 믿음은 내 성품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포로 된 백성에게 이제 그곳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45나의 백성아 너희는 그 중에서 나와 각기 여호와의 진노를 피하라 46.너희 마음을 나약하게 말며 이 땅에서 들리는 소문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라 소문은 이 해에도 있겠고 저 해에도 있으리라 그 땅에는 강포함이 있어 다스리는 자가 다스리는 자를 서로 치리라(45-46)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바벨론을 떠나라고 경고하시며, 바벨론이 곧 큰 멸망과 심판을 맞이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이 심판에서 벗어나도록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떠나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이 그들과 함께함을 의미합니다.

 

⑴ 도피 명령(45)

 

침략군이 바닷물처럼 바벨론을 덮쳐 모든 성읍을 폐허로 만들고 바벨론 성벽도 무너지기에 사로잡혀 와 그곳에 사는 유다 사람들의 목숨도 위태롭게 됩니다. 벨이 삼킨 것을 끄집어내시는 여호와께서 유배민을 ‘내 백성’이라 부르시며(참조. 30:3), 이들에게 바벨론에서 나와 당신의 진노에서 목숨을 구하라고 긴급하게 권면하십니다(45; 50:8; 51:6). ‘내 백성’은 여호와의 연민을 담고 있는 표현으로, 50:6에 따르면 목자들의 잘못으로 길을 잃고 떠도는 양 떼와 같은 자들입니다. ‘여호와의 진노’는 바벨론을 향한 진노이지만(참조, 25:37,38), 전쟁을 통해 구현되기에 바벨론에 사는 모든 사람이 그 파괴적 영향 아래 놓입니다. 여호와의 분노는 악인을 심판하시는 그분 정의의 부정적 모습입니다. 유다의 좋은 땅을 황무지로 만들고 그 모든 성읍을 허문(4:26) 여호와의 진노가 바벨론 성읍들을 황폐하게 하고 사람이 살 수 없는 사막으로 만듭니다(43).

 

⑵ 소문을 두려워하지 말라(46)

 

바벨론 제국의 불안한 정세가 언급됩니다(46). 문법적으로는 유배지를 떠나야 할 근거로 제시되지만, 실질적으로 바벨론이 멸망하기 직전 시대를 사는 자들에게 주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바벨론으로 끌려와 유배살이 하는 자들에게 바벨론의 정치적 혼란은 제국의 종말이 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소망의 징조이자 이들을 두려움에 빠뜨리는 불안 요인이었습니다(참조. 29:7).

멸망의 시간이 가까이 올수록 불안한 소문이 계속 들려오기에 그런 소문에 휩싸여 실족할 기회도 더 많아집니다. 매년 소문에 소문이 꼬리를 물고 들리겠지만, 강포함이 기승을 부리고 통치자들이 서로 싸우겠지만, 그런 소문과 폭력에 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참조, 마태복음 24:67). ‘마음을 나약하게 말며 … 두려워하지 말라’는 원래 싸움을 앞둔 용사들에게 주는 권면의 말입니다(참조, 신명기 20:3; 이사야 7:4). 유배민들이 전쟁의 위험에 버금가는 위기에 빠질 것을 시사해줍니다. 562년 느부갓네살(605/4-562)이 죽은 후 바벨론 제국의 중앙권력은 정치적 안정을 잃고 흔들렸습니다. 562년부터 556년의 짧은 기간 동안 네 명의 왕이 등장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의 뒤를 이어 보좌에 오른 그의 아들 에윌므로닥은 2년 반 만에 네리글리살에 의해 쫓겨나고, 네리글리살의 짧은 통치(560-556)를 그의 아들 라바시-마르둑이 계승하지만, 바벨론의 과두정체(寡頭政體)에 속한 자들의 음모에 의해 3개월 만에 제거됩니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47-48)

생각하는 것은 존재와 삶을 영적 사고방식으로 유지하는 일입니다. 생각의 훈련을 통해 성찰의 습관을 강화해야 합니다. 영적 나태를 쳐서 복종시키는 일은 평생의 작업입니다. 국운이 기울어진 상황에서 여호와의 방식을 따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경건 없이 승리는 없습니다.

 

47그러므로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바벨론의 우상들을 벌할 것이라 그 온 땅이 치욕을 당하겠고 그 죽임 당할 자가 모두 그 가운데에 엎드러질 것이며 48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바벨론으로 말미암아 기뻐 노래하리니 이는 파멸시키는 자가 북쪽에서 그에게 옴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47-48)

 

바벨론의 멸망이 우주적 차원에서 선포됩니다. 바벨론이 곧 심판을 받아 모든 우상이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날이 오면 바벨론이 무너지고, 하늘과 땅의 모든 피조물이 그들의 멸망을 기뻐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는 날이 될 것임을 의미합니다.

 

⑴ 우상들의 징벌(47)

 

서두의 ‘그러므로’는 유배민의 구원과 바벨론의 멸망을 긴밀하게 연결해줍니다. 보통은 고발의 말씀 다음에 ‘그러므로’로 시작하는 심판 선언이 이어지는데, 여기서는 권면의 말씀을 뒤따릅니다. 마치 여호와의 진노를 피해 바벨론을 떠난 결과로 심판의 날이 오는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바벨론의 심판이 유배민의 구원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시사해줍니다. 넓은 문맥에서 보면, 나의 백성의 송사에 따른(참조. 34-36절) 판결이기도 합니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는 심판의 날이 지금 오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날은 여호와께서 바벨론의 신상들을 벌하시는 날로, 바벨론 온 땅이 치욕을 당하고 칼에 맞은 자들이 그 가운데 엎드러집니다.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치실 때 우상들의 그대들의 무능력이 그대로 노출됩니다. 이들은 숭배자들이 칼에 맞아 죽어가지만 그들을 도와주지 못합니다. 신상들로 가득 찬 바벨론이 죽은 자들로 더러워져 수치를 당합니다. 바벨론의 심판에 창조세계가 반응합니다.

 

⑵ 우주적 기쁨(48)

 

바벨론을 ‘파멸시키는 자가 북쪽에서’ 오기에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바벨론을 두고 기뻐 소리친다(48; 참조, 이사야 14:7). 어떤 존재도 바벨론의 멸망을 슬퍼하지 않습니다. 온 세상이 그 가운데 나타난 여호와의 구속 사역을 찬양합니다.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사람을 포함해서 하늘과 땅을 채우고 있는 모든 것(참조, 창세기 1:11-27)을 가리킵니다.

 

칼을 피한 자들(49-51)

혼돈과 무질서의 풍랑이 거세게 몰려올 때 마음의 고삐를 잡고 있어야 합니다. 정체성이 흔들릴 때 낙담이 찾아옵니다. 이때는 우리는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물어야 합니다. 불안을 하나님께 토로하면서 질문하며 정체를 확인하고 확립해 가야 합니다.

 

49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죽여 엎드러뜨림 같이 온 세상이 바벨론에서 죽임을 당하여 엎드러지리라 50칼을 피한 자들이여 멈추지 말고 걸어가라 먼 곳에서 여호와를 생각하며 예루살렘을 너희 마음에 두라 51외국인이 여호와의 거룩한 성전에 들어가므로 우리가 책망을 들으며 수치를 당하여 모욕이 우리 얼굴을 덮었느니라(49-51)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포함한 여러 민족을 죽였으므로, 그들도 심판을 받아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에서 받은 수치와 모욕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질 날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두려움과 부끄러움 속에서 하나님께 돌아가기를 소망합니다.

 

⑴ 바벨론의 멸망(49)

 

문법적으로 복잡하고 생략어법이 사용됐기에 49절은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최근의 영어번역본을 따릅니다. 온 땅의 칼에 맞은 자들이 바벨론 때문에 쓰러졌듯이 바벨론도 이스라엘의 칼에 맞은 자들 때문에 쓰러져야 합니다. 바벨론 때문에 민족들이 멸망한 것처럼 이스라엘 때문에 바벨론이 멸망합니다. 전반절은 여호와께서 바벨론에게 허락한 칠십 년의 통치를 배경으로, 후반절은 이스라엘의 소송과 그에 따른 여호와의 보복을 배경으로 이해해볼 수 있습니다. 바벨론이 여호와의 손에 들린 심판의 도구(참조 50:23;51:7,20)이기는 하지만, 이들은 허락된 이상으로 이스라엘을 가혹하게 짓밟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칼로 죽였기에 바벨론도 마찬가지로 칼에 맞아 죽어야 합니다.

 

⑵ 도피 명령(50)

 

45-46절의 경우처럼 바벨론의 멸망 선언 다음에 유배민들에게 주는 권면의 말씀이 나옵니다. ‘나의 백성’(45)이 ‘칼을 피한 자들’(49)로 불립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바벨론에 머물지 말고 어서 떠나야 합니다. 바벨론의 멸망을 귀향과 구원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가나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지만, 여호와를 기억하고 예루살렘을 마음속에 떠올리며 바벨론을 떠나야 합니다(참조, 31:21). 시간이 지나면서 유배민들은 나름대로 정착했고 예루살렘은 여전히 폐허로 남았기에, 유배지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은 모든 면에서 쉬운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모험에 가까운 결단과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여호와를 생각하며’는 ‘여호와를 기억하며’로, 여호와께 자신을 내맡기는 행위를 가리킨다. 여호와를 기억함으로써 바벨론과 예루살렘 사이의 공간적 거리감도 극복됩니다. 예루살렘을 너희 마음에 두라는 목적지가 예루살렘임을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⑶ 탄식 인용(51)

 

오직 여호와와 예루살렘만 바라보라는 권면에 우리가 탄식으로 응답했습니다. ‘외국인이 여호와의 거룩한 성전에 들어가므로 우리가 책망을 들으며 수치를 당하여 모욕이 우리 얼굴을 덮었느니라.’(51)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의 형편을 생각하기만 하면 유배민들은 수치심에 얼굴을 가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여호와의 성전이 이방인들에 의해 짓밟혔습니다. 고대의 다신론적 사고에 따르면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는 바벨론의 신 말둑에 의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패배를 의미했습니다. ‘여호와의 거룩한 성전은 문자적으로는 여호와의 집의 거룩한 곳들’로, 성전 지역의 여러 건물을 가리키는지 또는 낭실과 성소와 지성소를 가리키는지는 불분명합니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52-53)

레위기적 정결은 예배를 통해 오염된 개인과 공동체를 정화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혼돈과 무질서를 새로움으로 덮습니다. 예배는 죄와 사망의 풍랑이 개인과 공동체를 삼키려 할 때, ‘잠잠하라!’고 명하신 예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일상과 일터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세워 줍니다.

 

52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그 우상들을 벌할 것이라 부상자들이 그 땅에서 한숨을 지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53가령 바벨론이 하늘까지 솟아오른다 하자 높은 곳에 있는 피난처를 요새로 삼더라도 멸망시킬 자가 내게로부터 그들에게 임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52-53)

 

47절을 거의 문자적으로 반복하고, 53절은 새로운 내용으로 48절을 보충합니다. 바벨론의 운명이 멸망으로 확정됐기에, 바벨론의 모든 시도가 헛일이 됩니다. 바벨론이 하늘 끝까지 올라간다 할지라도, 접근이 불가능한 높은 곳에 요새를 만든다 할지라도(참조. 이사야 14:13-14) 살아남지 못합니다. 바벨론을 쳐서 ‘멸망시킬 자’가 여호와로부터 오기에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방책을 마련할지라도 무용지물이 됩니다.


세상은 부의 양극화와 불평들의 파도가 밀려오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교회는 정결의 힘을 의지하여 새로운 창조를 소망해야 합니다. 위기의 때 성도들의 본 모습이 자신의 신앙의 진정성을 보여줍니다. 세속적인 성공개념과 이미지가 교회 안에 잔존합니다. 회심의 무의식 속에 있는 세속적인 세계관이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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