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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01-02)


환상으로 영광을 보여주신 하나님

에스겔 1장 15-28절


 

결실한 가을에는 자신의 삶을 다시 한 번 돌아봅니다. 잘 읽은 곡식일수록 고개를 숙입니다. 마찬가지로 성숙한 성도일수록 엎드리는 겸손함이 있습니다. 많은 믿음의 선배들을 살펴보면 가장 먼저 하나님께 엎드렸습니다. 다니엘이도 예수님도 엎드리는 삶을 사셨습니다. 에스겔 또한 바로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멸망당한 이유는 엎드리지 않는 것에 있었습니다.

 

  • 선지자 에스겔은 하나님의 보좌로 이끌려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곁에는 하나님의 속성을 상징하는 물건들이 있었습니다. 본문은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는 네 바퀴와 궁창 위에 있는 보좌, 그 보좌에 앉으신 사람의 형상을 가진 이와 그를 둘러싼 영광의 광채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수레의 바퀴(15-21)

사람들은 웅장하고 장엄한 자연 광경을 보면 감탄하며 자신도 모르게 환호성을 지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 광경을 봐도 그럽니다. 그것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보면 어떻겠습니까? 에스겔은 하나님의 보좌에 수례 바퀴를 환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15내가 그 생물들을 보니 그 생물들 곁에 있는 땅 위에는 바퀴가 있는데 그 네 얼굴을 따라 하나씩 있고 16그 바퀴의 모양과 그 구조는 황옥 같이 보이는데 그 넷은 똑같은 모양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모양과 구조는 바퀴 안에 바퀴가 있는 것 같으며 17그들이 갈 때에는 사방으로 향한 대로 돌이키지 아니하고 가며 18그 둘레는 높고 무서우며 그 네 둘레로 돌아가면서 눈이 가득하며 19그 생물들이 갈 때에 바퀴들도 그 곁에서 가고 그 생물들이 땅에서 들릴 때에 바퀴들도 들려서 20영이 어떤 쪽으로 가면 생물들도 영이 가려 하는 곳으로 가고 바퀴들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의 영이 그 바퀴들 가운데에 있음이니라 21그들이 가면 이들도 가고 그들이 서면 이들도 서고 그들이 땅에서 들릴 때에는 이들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의 영이 그 바퀴들 가운데에 있음이더라(15-21)

 

에스겔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임재는 1장에서부터 끝까지 충만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서 바벨론에 포로 된 유다 백성들에게도 임했습니다. 에스겔에 나타난 환상을 그림으로 묘사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괴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선지자로 소명을 받을 때(1-3장), 하나님의 임재가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는 장면(8-11장), 그리고 다시 새로운 성전으로 돌아오는 장면(40-48장)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생물들 밑에 있는 바퀴들에 대해 말씀합니다.

 

(1) 바퀴의 위치(15)

 

선지자 에스겔은 네 생물 밑으로 있는 네 바퀴를 보았습니다. 보좌를 떠받치고 있는 네 생물에서 보좌 수레의 바퀴로 시선을 옮긴 후 계속해서 자신이 본 환상을 묘사합니다. ‘그 네 얼굴을 따라 하나씩 있고’에는 네 날개에 따라 네 얼굴의 네 생물을 통해 과시된 여호와 보좌의 자유로움과 이동성이 바퀴에 의해 한층 더 강조됩니다. 네 바퀴는 구조와 모양이 같았고 바퀴 안에 바퀴가 있는 것 같아서 선회하거나 방향을 바꾸지 않아도 어디든 갈 수 있었습니다. 에스겔은 생물들 곁 땅 위에 바퀴가 있는 것을 봅니다. ‘그 네 얼굴을 따라 하나씩’(15)은 아마도 ‘네 얼굴의 생물에 하나씩’을 의미하는 것 갑니다(참조. 10:9). 이는 모든 곳에서 자유롭게 임재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권능과 전능성, 초월성을 나타냅니다.

 

(2) 바퀴의 모양(16-18)

 

황옥 같이 빛나는 바퀴는 그 모양과 구조가 모두 같았는데, 마치 바퀴 안에 바퀴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16). 황옥 같이 번쩍이고 높고 무서운 바퀴는 정복자 바벨론보다 더 뛰어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며, 네 둘레로 가득 달린 눈들은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것을 감찰하시고 보살피시는 분임을 나타냅니다(요한계시록 4:8). 그 테두리는 ‘높고 무서우며’ 사방에 ‘눈’이 가득하였습니다(18). 테두리를 묘사하는 ‘높고 무서우며’의 구체적 의미는 불분명합니다. ‘무섭도록 높고’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현재의 문맥에서 테두리를 두르고 있는 ‘눈’은 사방을 보며, 동시에 사방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에스겔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주신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은 앞으로 예루살렘에 일어날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해서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심판의 눈이 가득한 것입니다. 바벨론의 그발 강가에서 에스겔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는 세상 모든 곳을 살펴보시고 당신 결정에 따라 자유롭게 개입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눈을 피해 숨을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네 바퀴의 테두리에 가득한 눈은 네 생물의 네 얼굴과 같은 역할을 담당합니다. 바퀴의 움직이는 모습은 생물의 움직이는 모습과 같습니다. 나아갈 때 네 생물이 몸을 돌이키지 않고 저마다 곧장 앞으로 가는 것처럼(9), 네 바퀴도 방향을 바꾸지 않고 사방 어디로나 갔습니다(17). 바퀴가 행하는 것은 사방 온 땅을 두루 감찰하기 위함인 것을 말해 줍니다.

 

(3) 생물과 바퀴가 일치(19-21)

 

생물들이 나아갈 때면 그 곁에서 바퀴들도 나아갔고, 그 생물들이 땅에서 떠오르면 바퀴들도 들렸습니다(19,21a). 생물들의 움직임과 방향을 결정하는 영이 바퀴들 가운데 있었기에 생물들과 바퀴들이 하나로 움직였습니다(20,21b). 눈이 가득한 테두리의 바퀴와 네 얼굴과 네 날개의 생물은 기능상 상호 보충적입니다. 여호와의 전지적 능력과 자유로운 활동성이 후자에서는 정적으로, 전자에서는 역동적으로 표현됩니다. 똑 같은 움직임을 21절에 다시 한 번 언급합니다. 그것은 영과 바퀴들이 일체가 되어 가득한 눈을 가지고 온 땅위를 운행하며 사람들을 감찰하심을 보여 줍니다.

환상의 구조에서 바퀴는 생물과 구별됩니다. 궁창에 연결된 생물과 달리 바퀴는 따로 서 있습니다. 생물은 보좌가 놓인 궁창을 떠받들고 있지만, 바퀴는 궁창과 연결되지 않습니다. 에스겔의 묘사에 따르면 바퀴는 생물에 연결되지도, 보좌에 속하지도 않습니다. 생물과 함께 움직이지만 독자적입니다. 네 바퀴의 표상이 전승사적으로 어디에서 기원하는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습니다. 에스겔 1장과 10장의 묘사는 수레를 전제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바퀴 달린 보좌를 염두에 둔 것 같지도 않습니다. 바퀴 달린 보좌는 (아직) 고대 근동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이성으로 다 이해할 수 없고,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분입니다. 에스겔이 본 환상은 하늘 보좌에 앉으셔서 모든 만물을 감찰하시며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가두어진 분이 아니라 온 우주와 역사를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찬양과 경배를 드려야 합니다.

 

네 생물 머리 위에 있는 창공(22-25)

하나님께서는 두려운 포효 소리를 발하며 움직이실 때도 있고 날개를 거둬 잠잠하실 때도 있습니다. 직접 역사에 개입하실 때도 있고 잠자코 보고 계실 때도 있지만, 항상 살아계셔서 모든 것을 주장하시는 전능한 주권자이십니다.

 

22그 생물의 머리 위에는 수정 같은 궁창의 형상이 있어 보기에 두려운데 그들의 머리 위에 펼쳐져 있고 23그 궁창 밑에 생물들의 날개가 서로 향하여 펴 있는데 이 생물은 두 날개로 몸을 가렸고 저 생물도 두 날개로 몸을 가렸더라 24생물들이 갈 때에 내가 그 날개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 소리와도 같으며 전능자의 음성과도 같으며 떠드는 소리 곧 군대의 소리와도 같더니 그 생물이 설 때에 그 날개를 내렸더라 25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서부터 음성이 나더라 그 생물이 설 때에 그 날개를 내렸더라(22-25)

 

에스겔의 시선이 생물과 바퀴에서 생물의 머리 위에 있는 궁창(하늘의 판)으로 옮겨집니다. 천사들의 날개 위로 궁창이 나타납니다. ‘궁창(穹蒼)’을 보여주면서 땅 위와 대조적으로 하늘을 운행하시는영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궁창은 하나님의 영역과 세상의 영역 중간에 있었습니다.

 

(1) 생물들 머리 위 궁창(22)

 

생물이나 바퀴의 경우와 달리 ‘궁창’의 모습은 간략하게 ‘수정 같은 궁창의 형상’으로 묘사합니다. 보기에 ‘높고 무서우며’라며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18) 궁창이 네 생물의 ‘머리 위에 펼쳐져’ 있었습니다(22). 생물들 머리 위에는 수정 같은 궁창의 형상이 나타나는데(22), 이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영적인 세계를 상징합니다. 수정(얼음)처럼 차갑게 반짝이는 궁창의 모습을 보고 두려움을 느꼈던 에스겔은 궁창 위를 계속 바라보지 못하고 시선을 다시 궁창 아래로 돌려 생물들에게로 향합니다.

 

(2) 궁창 아래 생물들(23)

 

생물들의 머리 위에 있는 궁창과 궁창 밑에 있는 생물들이 22-23절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제사장이 그 옷으로 몸을 가리듯이 그 생물들은 각 얼굴들의 몸을 두 날개로 가리고 있었습니다. 머리로 궁창을 떠받친 생물들이 두 날개로 몸을 가리고 다른 두 날개는 서로 맞닿게 펴서 움직였습니다(23; 11). 에스겔은 비록 땅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기회를 얻지 못했지만, 하늘의 성전, 하나님의 집에 대한 섬기고 있습니다. 포로기에 제사장 에스겔에게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성육신하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3) 생물들의 날개 소리(24)

 

생물들이 갈 때, 그 날개 소리는 ‘많은 물소리와도 같았다’(24)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편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인하여 빛나니’(43:2)라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요한계시록 14:12)는 하늘에서 나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분명 전능자의 음성이며, 떠드는 소리 곧 군대의 소리와도 같았습니다.

 

(4) 궁창 위의 소리(25)

 

펼쳐진 두 날개가 내는 엄청난 소리는 하늘 보좌에 앉으신 분(26)의 절대적 힘을 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그것은 예레미야서에서 87회 이상이나 언급되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칭호를 드러내 줍니다. 땅 위에서 움직일 때는 바퀴가 움직였지만 궁창을 움직일 때에는 날개가 움직였습니다(24). 그 생물들의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서부터 음성이 났으며 ‘그 생물들이 설 때에 그 날개를 내렸다’는 말도 20, 21절의 바퀴들의 움직임과 영의 움직임을 묘사한 것처럼 두 번 반복하여 묘사하였습니다(24, 25). 에스겔이 생물의 날개에 주목하고 있을 때 ‘궁창 위에서부터 (나는) 음성’이 그의 시선을 다시 궁창으로 향하게 합니다(25). 궁창 위의 음성이 에스겔을 피조세계의 경계(궁창)를 넘어 창조주의 거룩한 영역으로(26-28) 이끌어 들입니다.

죄악에 가린 영안들은 이렇게 존귀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영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소경이 태양을 직접 보아도 두렵지 않듯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건강한 눈을 가진 사람들은 태양을 보면 두렵단 것을 압니다. 그래서 태양을 감히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물인 태양도 직접 볼 수 없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이랴 더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보좌와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26-28)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어느 곳에도 계신 분입니다. 그분의 영광은 말로 형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 하늘의 영광과 그곳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셨지만 직접적으로 볼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26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27내가 보니 그 허리 위의 모양은 단 쇠 같아서 그 속과 주위가 불 같고 내가 보니 그 허리 아래의 모양도 불 같아서 사방으로 광채가 나며 28그 사방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엎드려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들으니라(26-28)

 

이스라엘 백성들 멸망한 이유는 하나님 앞에 조아림과 겸손한 청종이 없어서 멸망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은 바로 그 조아림과 순종에서 시작합니다. 에스겔은 궁창 위에는 보좌가 있고, 그 보좌에는 사람의 모양을 한 어떤 분이 앉아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1) 궁창 위의 보좌(26a)

 

에스겔의 시선이 궁창 위의 보좌에 앉으신 분을 향합니다. 궁창의 경우처럼 보좌도 그 구체적 형태를 알 수 없게 간단하게 기술합니다. 궁창 위에는 남보석 같은 보좌의 형상이 있었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는 사람 모양의 형상이 있었습니다(26).

 

(2) 보좌 위에 한 형상(26b-28a)

 

놀랍게도 에스겔은 보좌에 앉아 계신 여호와를 보고, 더 나아가 묘사까지 합니다. 하늘 보좌에 앉으신 여호와의 표상은 온 세상이 그 분의 통치 아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바벨론 사람들이 섬기는 말둑(Marduk)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으로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바벨론도 통치하십니다. 에스겔은 여호와의 모습을 ‘사람의 모양 같은 형상’으로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했다는 창세기 1:27의 진술을 염두에 둔 표현인지는 불분명합니다. 관련성이 있다면, 창조주 여호와와 그분의 피조물 사람이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서로 연결됐음을 읽어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에스겔서는 다른 어떤 책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절대 간격을 강조합니다. 여호와는 에스겔을 언제나 ‘인자’로 부르신다.)

에스겔의 대담한 묘사는 계속됩니다. 보좌에 않아 계신 분의 모습은 전체적으로 빛나는 불과 같았습니다. 허리처럼 보이는 부분의 위쪽은 ‘단 쇠’(빛나는 금속) 같아서 사방이 둘러싸인 불과 같았고, 그 아래쪽은 불처럼 보였는데 사방이 광채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27). 사방으로 뻗은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처럼 보였습니다(28a). 궁창 위의 보좌에 앉아 계신 여호와의 영광이 마치 비가 온 후에 구름 사이로 빛을 발하며 나타나는 무지개와 같았습니다. 에스겔은 여호와의 영광을 무지개의 광채에 비교함으로써 묘사할 수 없는 것을 묘사합니다. 무지개의 비유가 창세기 9:1-16을 배경으로 하는지는 불분명합니다. 창세기에 의하면 홍수 후에 여호와께서 노아와 언약을 맺으시고 언약의 증거로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셨는데, 양자를 관련시켜 무지개에서 심판에 대한 암시를 읽어낼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아마도 1절의 ‘하늘’처럼 여호와께서 창조주와 세상의 통치자이심을 시사해주는 것 같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은 역사와 자연과 제의 안에 계시되는 여호와의 인격적 현존을 가리킵니다. 원래 ‘무겁다’를 의미하는 동사 ‘카베드’에서 나온 ‘영광’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체의 본질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은 여호와의 속성에 속한 것이기에 그분께 영광을 돌림은 그분의 위대하심과 권능의 인정을, 그분 앞에 엎드려 머리 숙임을 의미합니다. 에스겔에 의하면 여호와의 영광은 한편으로는 세상의 경계 저편에 실재하는 신비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 안에 들어와 활동하시는 그분의 능력입니다.

 

(3) 에스겔의 반응(28b)

 

에스겔은 압도적인 하나님의 환상을 보고 그 자리에 쓰러집니다(28b). 2:2에 따르면 에스겔이 여호와의 영의 도움을 받아 일어섭니다(참조, 3:15). 전체적으로, 에스겔의 환상은 다양한 비유(수정, 남보석, 단 쇠, 불 무지개)와 ‘-처럼’, ‘모양’, ‘형상’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여 궁창(수정 같은 궁창의 형상)과 보좌(‘보좌의 형상’)와 보좌에 앉아계신 분(‘사람의 모양 같은 형상’)과 그분의 영광(‘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을 간접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신비적 분위기를 창출합니다. 이를 통해 독자들이 환상의 구체적 모습에 관해 사변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경고합니다. 독자는 환산의 구체적 모습보다는 그 의미에 집중해야 합니다.

왕이신 하나님을 경외하며, 즉각적으로 복종해야 합니다.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 에스겔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이는 깊은 존경과 복종의 자세를 보여 줍니다. 나는 깊은 존경심으로 하나님을 대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고 있습니까?


전능한 주권자는 오직 여호와뿐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겸손히 엎드려 듣는 것뿐입니다. 이 조아림과 겸손한 청종이 없어서 이스라엘은 멸망했습니다. 회복은 바로 그 조아림과 순종에서 시작합니다. 엎드려 청종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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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01-01)


절망 중에도 함께하시는 하나님

에스겔 1장 1-14절


 

올림픽과 같은 큰 대회를 앞둔 선수가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우승을 하겠다고 열심히 연습했습니다. 만약 불행히도 훈련하다가 부상을 당해서, 그 경기에 못나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 선수의 마음은 얼마나 안타깝고 속상하겠습니까? 에스겔은 좋은 제사장으로 꿈꾸었지만, 현실은 포로로 끌려와 있었습니다. 아마 부상당한 선수처럼 에스겔의 마음도 비슷했을 것입니다.

 

  • 에스겔서는 일반적으로 친숙하지 않는 성경이라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성령이 인도하시면 쉽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쫓겨나 바벨론 포로로 잡혀온 유다 백성들이 절망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환상을 보이시며 어디어서나 그들과 함께하심을 알려주셨습니다.

 

선지자로 부름 받은 에스겔(1-3)

하나님께서는 성전과 이스라엘 영토 안에만 국한되시는 분이 아닙니다. 절망과 낙담이 지배하는 바벨론 역시 하나님께서 거하시며 다스리십니다. 에스겔이 바벨론 그발 강가에서 하나님의 강력한 현존과 임재가 있은 환상을 경험하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체험 합니다.

 

1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에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 2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힌 지 오 년 그 달 초닷새라 3갈대아 땅 그발 강 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1-3)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포로된 땅 그발 강가에 있던 에스겔에게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의 현현과 임재는 일상을 새롭고 경이로운 날이 되게 하였고, 속된 장소를 거룩한 곳이 되게 합니다.

 

(1) 때와 장소(1)

 

에스겔은 ‘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 곧 ‘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힌 지 오년 그 달 초닷새’에 선지자로 부름을 받는 환상을 경험합니다. ‘서른째 해’가 그의 나이를 의미한다면, 에스겔은 제사장 직분을 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나이에(참조, 민수기 4:3,23,30)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2) 때의 연대기적 정보(2)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찾아오신 곳이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바벨론 유배된 곳에서 찾아오셨습니다. 유다 왕 여호야긴과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온 첫해 주전 597년에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습니다. 유배 5년째 되던 해 주전 593년에 에스겔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특이하게도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의 통치 연대를 사용하지 않고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바벨론으로 잡아간 여호야긴의 유배를 기점으로 삼아 연대를 언급합니다. 여기에서 에스겔서가 대변하는 바벨론 유배민들의 정치적 입장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들의 눈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왕위에 앉혀진 시드기야는 다윗 왕권의 적법한 계승자가 아니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시드기야 왕권의 (간접적) 부정은 유배민들을 하나님 백성의 뿌리에서 잘린 자들로 주장하는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11:15; 참조 33:24)에 대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다윗 왕권이 여호야긴을 통해 이어진다면, 하나님 백성의 정통성은 유배민들에 의해 계승됩니다.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이 아니라 바벨론에 유배당한 자들이 하나님 백성의 남은 자들이 됩니다(참조, 예레미야 24:1-10). 달리 말하자면, 예루살렘과 유대의 정치적 멸망으로 하나님 백성의 역사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3) 에스겔의 소개(3)

 

개인적으로 에스겔은 레위 지파사람으로 유력한 제사장 후보였습니다. 이제 나이 30살 생일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이것은 제사장으로서의 직무가 시작되는 시점입니다(민수기 4장).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곳은 하나님의 임재하신 곳으로 생각하는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짓밟았던 바벨론 그발 강가에서 에스겔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이전 같으면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장이 되어야 할 사람이 이방 땅에서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에스겔이 환상을 경험한 장소는 ‘그발 강 가’였습니다. 에스겔서에서 ‘그발 강’은 언제나 에스겔의 소명 사건과 관련하여 언급 됩니다(참조, 1:1,3; 3:15,23; 10:15,22; 43:3).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는 에스겔이 예배 중에 하나님을 만났음을 암시해줍니다. 제의적으로 더러운 이방 땅에(참조. 아모스 7:17; 에스겔 4:13) 사는 자들에게 제의적 깨끗함(정결의식)을 위해서는 물이 필수적이었습니다. 후대의 디아스포라 유대 전통이 보여주듯이, 바벨론 유배민들은 몸을 깨끗이 씻을 수 있는 강가에서 제의적 모임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신학적 전통에 따르면 여호와는 성전에 거하시거나 현현하시는 하나님으로 성전에서 제사를 통해 만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성전에 거하시는 여호와는 하늘에도 보좌를 갖고 계시지만, 하늘 보좌는 예루살렘 제의에서 거의 의미가 없었습니다. 제의적 정결이 성전 예배의 전제 조건이기에 가나안을 벗어나 바벨론과 같은 이방 땅에서는 여호와께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완전히 벗어난, 전통적인 방식으로는 만날 수도 섬길 수도 없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전혀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여호와께서 하늘로부터 바벨론의 ‘그 강가’에 있는 에스겔을 찾아오십니다. ‘하늘이 열리며’는 여기에만 나오는 표현으로, 말둑(Marduk) 신을 섬기는 바벨론이 여호와의 통치 아래 있음을 처음부터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늘 보좌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제 당신의 우주적 왕권을 행사하십니다. 그발 강가의 환상은 부차적으로 유배민들이 바벨론에서 여호와를 섬길 수 있음을 보여주기도 합니다(11:16). ‘하나님의 모습/환상’은 환상이 하나님에게서 기원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역사 의지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환상은 예언자들에게 공통된 신적 계시의 통로이지만, 에스겔의 경우에는 그 규모와 표현의 강렬함에 있어 아주 독자적입니다. 에스겔서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하나님의 손/권능이 임하였다’(1:3; 3:14,22; 8:1; 33:22; 37:1; 40:1)도 예언 전통에 속한 표현으로(참조. 열왕기상 18:46; 열왕기하 3:15-16; 이사야 8:11; 예레미야 15:17), 예언자가 여호와의 능력에 완전히 사로잡혔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신비한 환상을 보여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통해 이스라엘의 죄상을 밝히고 그들의 운명을 알리시며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고 치유하여 하나님 형상으로 온전케 하시려고 권능으로 임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꿈이 되살아납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유배된 지 5년이 지난 지금 제사장 에스겔의 꿈은 점점 사라져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에스겔은 하나님과 만남과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환상을 통해 더 큰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북쪽에서 오는 폭풍우(4)

사람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이만큼이면 됐겠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더 철저하게 무너지고 나서야 온전하게 회복될 수 있다고 생각하실 때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한 환경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죄악과 세상에 대하여 아직 충분히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4내가 보니 북쪽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 그 속에서 불이 번쩍번쩍하여 빛이 그 사방에 비치며 그 불 가운데 단 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이고(4)

 

에스겔은 ‘폭풍과 큰 구름’ 가운데 오시는 하나님의 표상은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신현 묘사에 속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에 개입하셔서 당신 모습을 드러내실 때 산과 땅이 흔들리고 폭풍우나 구름과 불이 함께합니다(참조, 출애굽기 19:16-18; 20:18; 사사기 5:4-5; 욥기 38:1; 시편 50:3, 104:32; 144:5).

하늘이 열리고 계시된 환상임에도(1) 방향이 별도로 ‘북쪽에서부터’로 언급됩니다. 지리적 방향보다는 신현의 신학적 의미를 내포한 표현 같습니다. 신현 사건은 주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고 민족들을 심판하는 문맥에 등장하는데, 그발 강가에서 에스겔이 경험한 신현 사건은 이스라엘의 심관과 관련됐음을 시사해줍니다.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경험한 적(아람, 앗수르, 바벨론)은 거의 예외 없이 북쪽에서 침략해 오기에 북쪽은 자주 심판의 방향으로 사용됩니다(참조. 예레미야 1:13-15; 4:5-6; 6:1,22-23; 에스겔 9:2; 38:6,15).

 

환상 속에 네 생물(5-14)

성도들은 어떤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현존과 임재를 떨어져 나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초월적인 분으로 세상 어느 곳에나 항상 자녀들과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자녀들을 위해 강인하시고 민첩하신 분입니다.

 

5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 그들에게 사람의 형상이 있더라 6그들에게 각각 네 얼굴과 네 날개가 있고 7그들의 다리는 곧은 다리요 그들의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고 광낸 구리 같이 빛나며 8그 사방 날개 밑에는 각각 사람의 손이 있더라 그 네 생물의 얼굴과 날개가 이러하니 9날개는 다 서로 연하였으며 갈 때에는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 10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오른쪽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왼쪽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11그 얼굴은 그러하며 그 날개는 들어 펴서 각기 둘씩 서로 연하였고 또 둘은 몸을 가렸으며 12영이 어떤 쪽으로 가면 그 생물들도 그대로 가되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 13또 생물들의 모양은 타는 숯불과 횃불 모양 같은데 그 불이 그 생물 사이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며 그 불은 광채가 있고 그 가운데에서는 번개가 나며 14그 생물들은 번개 모양 같이 왕래하더라(4-14)

 

에스겔은 자신이 그발 강가에서 보았던 환상을 설명합니다. 하늘 보좌에 앉으신 여호와의 영광을 본 에스겔은 시선을 아래에서 위로 옮겨가며 네 생물(5-14)과 그들 곁의 바퀴들(15-21)과 네 생물 위의 궁창(22-25)과 궁창 위의 보좌에 앉으신 여호와의 영광(26-28)을 차례로 묘사합니다.

 

(1) 사람 형상의 네 생물(5-8a)

 

사람의 형상을 한 네 생물(5)은 저마다 네 얼굴과 네 날개를 갖고 있었고(6), 곧은 다리와 송아지 발바닥 같은 발바닥은 광내 구리 같이 빛났고(7), 저들의 날개 밑에는 사방으로 사람의 손이 보였습니다(8). 네 얼굴의 모양이 각기 다른데, 앞은 사람의 얼굴, 뒤는 독수리의 얼굴, 오른쪽은 사자의 얼굴, 왼편은 소의 얼굴이었습니다(10). 네 생물은 나아갈 때 몸을 돌이키지 않고 저마다 곧장 앞으로 영이 가려는 쪽으로 갔습니다(9,12). 그 생물들 가운데에는(‘그 생물들의 모양’) 불타는 숯불 같은 모습과 왔다 갔다 하는 횃불 같은 모습이 있어 광채를 낼 뿐만 아니라 그 불에서 번개가 나왔습니다(13). 생물들은 번개가 치는 모습처럼 나갔다 들어갔다 했습니다(14).

현대인에게는 아마도 기괴하게 보일 네 얼굴의 생문은 고대근동에서 벽화나 장식품들을 통해 잘 알려진, 적어도 바벨론에 유배당한 에스겔의 청자와 독자에게는 그렇게 낯설지 않은 형상이었다. 사람은 피조물의 정점이고, 사자는 들짐승 가운데, 독수리는 날짐승 가운데, 황소는 집짐승(가축) 가운데 가장 힘이 센 존재로 일찍부터 인정받았습니다. 고대인들은 각 분야에서 최고의 힘을 상징하는 대표적 존재를 종합하여 하나의 신화적 생물을 만들고 이를 통해 비교가 불가능한 최상급의 힘을 표현하였다. 물론 네 생물의 묘사는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피조물에 대한 여호와의 절대적 우위를 통해 직접 기술할 수 없는 여호와의 무한 능력과 위엄을 보여줍니다.

 

(2) 날개와 얼굴(8b-11)

 

고대 근동에서 ‘네 날개’는 원래 사방의 우주적 바람을 가리켰고, 둘 또는 네 날개를 가진 생물은 신적 존재로 하늘을 떠받들거나 운반하는 신들이었습니다. 에스겔의 환상에서 네 날개의 생물은 신적 지위를 상실합니다. 이들은 단지 여호와의 보좌가 놓여 있는 궁창을 떠받들고 있는 존재로, 여호와의 영에 따라 움직입니다. 날개의 기능에도 변화가 주어집니다. 진행하는데 두 날개만 사용하고, 다른 두 날개로는 자신의 몸을 가립니다(11).

 

(3) 움직임(12-14)

 

궁창이 그 위의 신적 영역과 그 아래의 세속적 영역을 엄격하게 구분하지만, 네 생물의 생명을 안전하게 지키기에는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여호와의 파괴적·배타적· 절대적 거룩함 앞에서 그분의 보좌를 운반하는 생물마저 제 몸을 가려야 했습니다. 궁창 위 보좌에 앉으신 여호와와 궁창 아래 네 생물 사이의 간격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절대 간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곳이나 계시며 어느 곳에서든 말씀하신 분입니다.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와 있을 때,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이방 바벨론 땅 그발 강가에서도 하나님의 사람 에스겔에게 말씀하시고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곳에 계시며,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해 주실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버려진 땅, 심판의 땅, 부정한 땅에 유배 중인 곳에 나타나십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계시하고 그곳이 성전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순종하는 곳에 하나님 나라가 섭니다. 심판을 뼈 아프게 받고 돌아 선 백성이 있는 곳에 주님도 함께 하십니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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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스겔 서론


에스겔서 서론


 

우리는 ‘장차 되어질 일’에 대한 예언자들의 글을 대할 때, 요한이 들었던 ‘이리로 올라오라’(요한계시록 4:1)는 부르심이 들리는 것을 느낍니다. 이 에스겔서의 예언을 접할 때에는 마치 ‘더 높이 올라오라’는 소리를 듣는 듯합니다. 시간적으로 앞으로 나아가고(예레미야는 포로 직전에 예언했지만 에스겔은 포기에 예언했으므로) 신적 영광은 장엄한 광명 속으로 높이 솟구쳐 오르게 됩니다. 이 지성소의 물은 더욱 깊어집니다. 이 물은 건너갈 수가 없을 만큼 깊어서 어떤 곳은 그 깊이를 측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비록 깊다고는 하더라도 이들로부터는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는(시편 64:4) 시내가 흘러나옵니다. 우리 앞에 있는 이 예언서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고찰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의 표제

에스겔서는 히브리어로 ‘하나님께서 강하게 하실 자’라는 의미로, 그 저자의 이름으로 ‘에스겔’로 명명되었습니다. 70인역이나 라틴어 역본인 불가타, 그리고 대부분의 현대 역본들도 이 명칭을 따르고 있습니다. 흠정역(KJV)에서는 이 책은 큰 네 선지자들의 기록들 가운데 세 번째에 위치했습니다. 에스겔서는 에스겔과 동 시대의 두 위대한 인물들의 책 사이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 정확한 연대적 위치는 틀림이 없습니다. 이들 중 예레미야는 오래 전에 그의 예언을 시작하였고, 다니엘은 오랜 후에 그의 예언들을 계속하였습니다.

 

에스겔의 저자

최근까지 에스겔서의 신빙성과 정경성에 대해 심각한 공격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많은 비평적 학파들과 마찬가지로 보수적인 학자들은, 에스겔 자신이 현재 그의 이름으로 된 예언적인 기록들의 편집 저자라고 하는 전통적인 입장을 고수한다.

 

(1) 내증 : 본 에스겔서의 내증(1:1;24)과 전체적인 내용의 일관성, 본서에서 묘사되는 저자의 성품과 인격에 대한 기록들을 살펴볼 때, 본 서가 단일 저자에 의해 기록되었으며, 에스겔의 단일 저작임을 드러낸다.

 

(2) 외증 : 에스겔 선지자의 개인적인 내력에 관해서는 이 책 자체로나 저자가 살던 당시 환경에서 얻어질 수 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그는 구약의 다른 어떤 책에도 언급되지 않았으며, 계시록에 그의 비유적 표현에 대한 많은 암시들이 있기는 하지만 신약에서도 그의 글은 한 번도 직접 인용되지 않았습니다(고린도후서 6:17을 제외). 성경 이외에서 그는 단지 요세푸스(고대의 x. 5.1; 6.3; 7.2; 8.2)와 시락(Sirach)의 아들 예수에 의해 언급되었는데(외경, 집회서 49:8), 두 부분이 모두 어떤 중요한 항목에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에스겔은 자신을 ‘부시의 아들 제사장’이라 부릅니다(에스겔 1:3). 부시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에스겔이 여호야긴의 포로시(주전 597년, 에스겔 1:2)에 잡혀간 ‘모든 방백과 모든 용사들’(열왕기하 24:14)중에 포함되었던 사실은 그가 예루살렘의 귀족 중 한 사람이었을 것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이 포로 신세가 되었을 때 몇 살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에스겔 1:1의 ‘제삼십년’은 그의 생애의 30번째에 해당될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이 가정에 의하면 그가 유배되었을 때는 25세였을 것입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그 선지자는 당시 한 청년이었습니다(고대의 x. 6.3). 그 당시 그가 최소한 꽤 젊었음이 틀림없다고 하는 것은 그의 예언 중 하나가 그로부터 27년 후인 주전 570년, 혹은 571년(에스겔 29:17)의 것인 사실에 의해 입증되었으며, 그는 분명히 그의 직분을 좀 더 오랫동안 수행하였습니다.

결혼을 하지 않고 지냈던 예레미야(예레미야 16:2)와는 달리 에스겔은 그의 눈에 기뻐하는(에스겔 24:16) 한 아내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포로 9년째 되던 해에 갑자기 죽었으며(에스겔 24:1; 1:2) 에스겔은 그 선지자직에 따르는 커다란 시련들을 홀로 감당하도록 남겨진 바 되었습니다.

 

에스겔의 배경

에스겔은 주전 593/592년 여호야긴의 사로잡힌 지 5년째 되던 해(에스겔 1:2)에 그의 예언을 시작하였습니다. 북방 이스라엘 왕국은 100여 년 전에 소멸되었으며, 유다의 멸망은 급속히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바벨론의 예속은 여호야긴의 위에 있은지 3년(주전 605년),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렀을 때(다니엘 1:1) 이미 시작되었었습니다. 이때에 얼마나 포로들이 잡혀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들 중에서 ‘왕족과 귀족’(다니엘 1:3; 열왕기하 24:1)의 몇 사람이 있었습니다.

여호야김은 그의 통치 11년 만에 불명예스러운 종말을 고하고, 그의 아들 여호야긴에 의해 그 위가 계승되었습니다(주전 597년; 열왕기하 24:1). 불과 3개월의 통치 후 여호야긴은 에스겔을 포함하는 1만 명의 방백들과 더불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열왕기하 24:12-16; 에스겔 1:1,2; 33:21).

여호야긴의 후계자 시드기야는 그의 선조들 보다 조금도 낫지 않았습니다. 그의 통치 11년째 되던 해(주전 586년)에 유다의 마지막 멸망이 이르렀습니다(열왕기하 25:1-11). 남아있던 백성들이 잡혀갔으며, 성전은 불살라졌고 예루살렘은 파괴되었습니다. ‘그 땅의 빈천한 국민들’ 소수만이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와 농부로 남겨진 바 되었습니다(열왕기하 25:12).

아직 청년이었던 에스겔이 선지자직에 부르심을 받은 때는 그렇게 소란스러운 시기였습니다. 전망은 몹시도 암담했습니다. 이미 예루살렘에 내려진 심판의 타격은 유다의 거민들을 근실하게 하는 대신 저들을 더욱 깊은 배도와 타락으로 빠져들게 할 뿐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바벨론 그발(Chebar) 강가의 유랑자들에게는 ‘징계’에 의한 ‘연달(練達)’이(히브리서 12:11)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반역과 우상 숭배를 계속하였으며(에스겔 2:3; 20:39), 철저한 개혁에 대한 의향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에스겔의 주제

(1) 에스겔이 여기에서 말하는 예언(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속에는 신비스럽고, 모호하고, 이해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것들이 많이 있기에, 유대 랍비들은 이스라엘의 젊은 사람들에게 30세 되기까지는 이 예언서를 읽지 못하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예언의 이런 난해성 때문에 그들이 성경에 대해 편견을 품게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경의 이런 난해한 부분들을 겸손함과 경외감을 가지고 읽으며, 근면하고 꾸준히 연구한다면, 자연계의 현상을 모두 풀 수 없듯 성경에서 부닥치는 모든 매듭을 다 풀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경배하는 하나님께 대한 희망을 북돋아 주며 신앙을 굳세게 하는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2) 이 책에 나오는 환상은 마치 코끼리라도 수영할 수 있을 만큼 복잡할지라도 그 설교는 양이 개울을 건너가듯 아주 평이 합니다. 이 예언서의 중요한 의도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들의 허물을 보여 주는’ 것이며, 포로 기간 동안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불평하지 않기를 바라는 데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계속 백성들의 주의를 끌고(‘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 네 말을 듣는다’는 말씀이 나오므로, 33:31) 가끔씩 백성의 자문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이스라엘 장로 두어 사람이 그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물으러 왔다고 하는 때문에, 14:1). 예언자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 피압박 포로였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고 그들을 조롱하고 그들의 종교를 멸시하던 자들에게는 그들의 거룩한 종교에 대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3) 책망과 위협이 매우 신랄하고 대담하지만, 이 책 끝부분으로 가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간직하신 큰 자비에 대해 주시는 위로의 확신이 나옵니다. 거기서 마침내 메시아 왕국에서 성취될 복음 시대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과 만나게 되는데, 에스겔은 다른 어느 선지자보다 메시아를 덜 언급했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두려우심을 통해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합니다. 죄는 율법으로써 알려집니다. 그래서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됩니다(갈라디아서 3:24).

 

에스겔의 신임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 환상은 1-3장에 나오며 책망과 위협은 4-24장 사이에 나타납니다. 이런 책망의 경고와 뒷부분에 나올 위로 사이에 이스라엘 인접 국가에 대한 멸망의 예고가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회복과 그들의 도성 및 성정의 재건을 위한 길을 예비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과, 그들의 성읍과 성전의 재건이 예고됩니다(36-마지막장). 이스라엘 백성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선포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그들에게 참회의 메시지를 선포해야 합니다.

 

에스겔 구조

 

에스겔의 예언들은 적절히 연구된 방식을 따라 기록되었습니다. 그것들은 자연스럽게 두개의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처음 33장은 주로 예루살렘 멸망 이전에 전해진 예언들을 나타내고 있으며, 나중 15장은 멸망 후에 전해진 것들입니다. 제1부는 순서에 따라 두 부분으로 나뉠 수 있는데, 1-24장은 포로 생활과 관련된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리고 25:1-32:32은 주변 나라들에 대한 심판에 관하여 기록된 것입니다.

에스겔의 예언들에 있어 또 다른 흥미로운 특색으로는 그것들의 일자 기입이 정확하게 돼 있는 것입니다. 개요 끝에 나오는 에스겔 연대표는 그 선지자가 제시한 연대순으로 된 일자들을 가지고 거의 도표를 작성할 수 있으리만큼 책의 여러 부분들에 대한 날짜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각 주요 부분은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라는 표현의 감탄사를 통해 그 자체가 자연히 몇 개의 부분으로 재구분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책 전체에 29회 나타납니다. 내용 구분은 위에 제시된 방식을 따릅니다. 다음과 같이 에스겔서를 분류해 볼 수 있습니다.

 

Ⅰ. 이스라엘에 관한 심판의 예언들 1:1-24:27

1. 제1편 1:1-7:27

      (1) 에스겔을 부르심 1:1-3:11

               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이상 1:1-28

               ② 그 선지자에 대한 거룩한 위임 2:1-3:11

       (2) 예언적인 활동을 시작함 3:12-7:27

               ① 그발에서의 주저함 3:12-16

               ② 주저함을 책망하심 3:17-27

               ③ 상징적으로 묘사된 예루살렘의 포위 4:1-17

               ④ 네 가지 징조와 그 해석 5:1-17

               ⑤ 이스라엘의 산들을 견책하심 6:1-14

               ⑥ 이스라엘의 황폐가 예언됨 7:1-17

 

2. 제2편 8:1-19:14

       (1) 영적으로 본 예루살렘에 대한 계시들 8:1-11:25

               ① 성전 안에서의 가증한 것들 8:1-18

               ② 심판의 행사 9:1-11

               ③ 생물들에 대한 이상이 다시 나타남 10:1-22

               ④ 백성들 지도자들이 힐책당함 11:1-25

       (2) 두개의 상징적인 징조들 12:1-20

               ① 시드기야의 계획적인 피신과 포로가 예증됨 12:1-16

               ② 포위에 대한 두려움이 예증됨 12:17-20

       (3) 위협적인 심판들의 원인과 절박성을 나타내는 말들 12:21-14:23

               ① 신속한 성취의 확실성 12:21-28

               ② 거짓 선지자들과 여선지자들을 반대하는 글 13:1-23

               ③ 신탁을 추구하는 우상 숭배자들을 반대하는 증언 14:1-23

       (4) 여러가지 예화들과 비유들 15:1-19:14

               ① 포도 나무 15:1-8

               ② 가련한 유아와 음탕한 간부 16:1-63

               ③ 두 마리의 독수리와 포도 나무 17:1-24

               ④ 신 포도들 18:1-32

               ⑤ 사자의 새끼들 19:1-9

               ⑥ 무익한 포도 나무 19:10-14

 

3. 제3편 20:1-23:49

       (1) 이스라엘의 반역에 대한 진술 20:1-49

       (2) 위협적인 심판들에 관한 다양한 표현들 21:1-32

               ① 예루살렘을 대적하는 칼 21:1-7

               ② 살륙을 위해 마광된 칼 21:8-17

               ③ 바벨론 왕이 점을 침 21:18-27

               ④ 암몬을 대적하는 칼 21:28-32

       (3) 예루살렘 죄악들의 목록과 그 결과적 운명 22:1-31

               ① 방백들과 백성들의 추행 22:1-16

               ② 예루살렘의 두려운 파멸 22:17-22

               ③ 한명의 중재자도 없음 22:23-31

       (4) 한 비유로 표현된 배도의 역사 23:1-49

 

4. 제4편 24:1-27

(1) 끓는 가마솥에 관한 이상 24:1-14

(2) 에스겔의 아내의 죽음 24:15-27

 

Ⅱ. 이방 나라들에 관한 심판의 예언들 25:1-32:32

1. 제1편 25:1-28:26

       (1) 이스라엘에 인접한 이웃 나라들에 대한 일련의 예언들 25:1-17

               ① 암몬 족속을 대적하여 25:1-7

               ② 모압 족속을 대적하여 25:8-11

               ③ 에돔 족속을 대적하여 25:12-14

               ④ 블레셋 족속을 대적하여 25:15-17

       (2) 두로에 관한 일련의 예언들 26:1-28:19

               ① 두로의 멸망이 예언됨 26:1-21

               ② 두로에 대한 애가 27:1-36

               ③ 두로 왕이 슬퍼함 28:1-10

               ④ 두로 왕을 표상으로 하여 사단의 기원과 역사 및 운명이 묘사됨 28:11-19

       (3) 시돈을 대적하는 예언 28:20-26

 

2. 제2편 (애굽에 관한 예언들) 29:1-32:32

       (1) 제1부 29:1-6

               ① 바로를 대적한 심판 29:1-7

               ② 애굽 땅의 황폐함 29:8-12

               ③ 포로에서의 귀환이 약속됨 29:13-16

       (2) 제2부(제27년, 정월 초하루 애굽에 대한 예언을 보완 위해 삽입됨) 29:17-21

               ① 두로를 친 대가로 느브갓네살에게 애굽이 주어짐 29:17-20

               ② 이스라엘의 회복 29:21

       (3) 제3부(날짜 없음 위의 ①과 같을 것): 애굽과 그를 돕는 자들이 멸망함 30:1-19

       (4) 제4부(제11년 1월 7일): 바벨론이 애굽을 대적하여 강해짐 30:20-26

       (5) 제5부(제11년 3월 1일): 애굽의 영화와 몰락이 앗수르의 것과 같음 31:1-18

       (6) 제6부(제12년 12월 1일): 애굽을 위한 애가들 32:1-16

       (7) 제7부(제12년어느15일): 애굽이 다른 멸망한 나라들과 자리를 같이 함 32:17-32

 

Ⅲ. 이스라엘에 관한 자비의 예언들 33:1-48:35

1. 제1편(제12년 10월 5일) 33:1-39:29

       (1) 새롭게 된 에스겔의 사명 33:1-20

       (2)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소식이 이르름 33:21-33

       (3) 이스라엘의 목자들이 책망받음 34:1-31

       (4) 에돔을 대적하는 예언 35:1-15

       (5) 이스라엘의 산들이 위로받음 36:1-38

              ① 황폐된 이스라엘이 재건될 것임 36:1-15

              ② 새 왕국의 초석이 되는 영적 부흥 36:16-38

       (6) 마른 뼈들에 관한 이상 37:1-28

       (7) 곡과 마곡을 대적하는 예언들 38:1-39:29

 

2. 제2편(제25년, 정월 10일) 장래의 회복에 관한 이상들 40:1-48:35

       (1) 성전에 관하여 40:1-43:27

       (2) 성전 의식 44:1-47:12

       (3) 그 땅을 분배함 47:13-4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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