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01-02)
환상으로 영광을 보여주신 하나님
에스겔 1장 15-28절
결실한 가을에는 자신의 삶을 다시 한 번 돌아봅니다. 잘 읽은 곡식일수록 고개를 숙입니다. 마찬가지로 성숙한 성도일수록 엎드리는 겸손함이 있습니다. 많은 믿음의 선배들을 살펴보면 가장 먼저 하나님께 엎드렸습니다. 다니엘이도 예수님도 엎드리는 삶을 사셨습니다. 에스겔 또한 바로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멸망당한 이유는 엎드리지 않는 것에 있었습니다.
- 선지자 에스겔은 하나님의 보좌로 이끌려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곁에는 하나님의 속성을 상징하는 물건들이 있었습니다. 본문은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는 네 바퀴와 궁창 위에 있는 보좌, 그 보좌에 앉으신 사람의 형상을 가진 이와 그를 둘러싼 영광의 광채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수레의 바퀴(15-21)
사람들은 웅장하고 장엄한 자연 광경을 보면 감탄하며 자신도 모르게 환호성을 지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 광경을 봐도 그럽니다. 그것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보면 어떻겠습니까? 에스겔은 하나님의 보좌에 수례 바퀴를 환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15내가 그 생물들을 보니 그 생물들 곁에 있는 땅 위에는 바퀴가 있는데 그 네 얼굴을 따라 하나씩 있고 16그 바퀴의 모양과 그 구조는 황옥 같이 보이는데 그 넷은 똑같은 모양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모양과 구조는 바퀴 안에 바퀴가 있는 것 같으며 17그들이 갈 때에는 사방으로 향한 대로 돌이키지 아니하고 가며 18그 둘레는 높고 무서우며 그 네 둘레로 돌아가면서 눈이 가득하며 19그 생물들이 갈 때에 바퀴들도 그 곁에서 가고 그 생물들이 땅에서 들릴 때에 바퀴들도 들려서 20영이 어떤 쪽으로 가면 생물들도 영이 가려 하는 곳으로 가고 바퀴들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의 영이 그 바퀴들 가운데에 있음이니라 21그들이 가면 이들도 가고 그들이 서면 이들도 서고 그들이 땅에서 들릴 때에는 이들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의 영이 그 바퀴들 가운데에 있음이더라(15-21)
에스겔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임재는 1장에서부터 끝까지 충만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서 바벨론에 포로 된 유다 백성들에게도 임했습니다. 에스겔에 나타난 환상을 그림으로 묘사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괴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선지자로 소명을 받을 때(1-3장), 하나님의 임재가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는 장면(8-11장), 그리고 다시 새로운 성전으로 돌아오는 장면(40-48장)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생물들 밑에 있는 바퀴들에 대해 말씀합니다.
(1) 바퀴의 위치(15)
선지자 에스겔은 네 생물 밑으로 있는 네 바퀴를 보았습니다. 보좌를 떠받치고 있는 네 생물에서 보좌 수레의 바퀴로 시선을 옮긴 후 계속해서 자신이 본 환상을 묘사합니다. ‘그 네 얼굴을 따라 하나씩 있고’에는 네 날개에 따라 네 얼굴의 네 생물을 통해 과시된 여호와 보좌의 자유로움과 이동성이 바퀴에 의해 한층 더 강조됩니다. 네 바퀴는 구조와 모양이 같았고 바퀴 안에 바퀴가 있는 것 같아서 선회하거나 방향을 바꾸지 않아도 어디든 갈 수 있었습니다. 에스겔은 생물들 곁 땅 위에 바퀴가 있는 것을 봅니다. ‘그 네 얼굴을 따라 하나씩’(15)은 아마도 ‘네 얼굴의 생물에 하나씩’을 의미하는 것 갑니다(참조. 10:9). 이는 모든 곳에서 자유롭게 임재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권능과 전능성, 초월성을 나타냅니다.
(2) 바퀴의 모양(16-18)
황옥 같이 빛나는 바퀴는 그 모양과 구조가 모두 같았는데, 마치 바퀴 안에 바퀴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16). 황옥 같이 번쩍이고 높고 무서운 바퀴는 정복자 바벨론보다 더 뛰어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며, 네 둘레로 가득 달린 눈들은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것을 감찰하시고 보살피시는 분임을 나타냅니다(요한계시록 4:8). 그 테두리는 ‘높고 무서우며’ 사방에 ‘눈’이 가득하였습니다(18). 테두리를 묘사하는 ‘높고 무서우며’의 구체적 의미는 불분명합니다. ‘무섭도록 높고’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현재의 문맥에서 테두리를 두르고 있는 ‘눈’은 사방을 보며, 동시에 사방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에스겔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주신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은 앞으로 예루살렘에 일어날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해서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심판의 눈이 가득한 것입니다. 바벨론의 그발 강가에서 에스겔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는 세상 모든 곳을 살펴보시고 당신 결정에 따라 자유롭게 개입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눈을 피해 숨을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네 바퀴의 테두리에 가득한 눈은 네 생물의 네 얼굴과 같은 역할을 담당합니다. 바퀴의 움직이는 모습은 생물의 움직이는 모습과 같습니다. 나아갈 때 네 생물이 몸을 돌이키지 않고 저마다 곧장 앞으로 가는 것처럼(9), 네 바퀴도 방향을 바꾸지 않고 사방 어디로나 갔습니다(17). 바퀴가 행하는 것은 사방 온 땅을 두루 감찰하기 위함인 것을 말해 줍니다.
(3) 생물과 바퀴가 일치(19-21)
생물들이 나아갈 때면 그 곁에서 바퀴들도 나아갔고, 그 생물들이 땅에서 떠오르면 바퀴들도 들렸습니다(19,21a). 생물들의 움직임과 방향을 결정하는 영이 바퀴들 가운데 있었기에 생물들과 바퀴들이 하나로 움직였습니다(20,21b). 눈이 가득한 테두리의 바퀴와 네 얼굴과 네 날개의 생물은 기능상 상호 보충적입니다. 여호와의 전지적 능력과 자유로운 활동성이 후자에서는 정적으로, 전자에서는 역동적으로 표현됩니다. 똑 같은 움직임을 21절에 다시 한 번 언급합니다. 그것은 영과 바퀴들이 일체가 되어 가득한 눈을 가지고 온 땅위를 운행하며 사람들을 감찰하심을 보여 줍니다.
환상의 구조에서 바퀴는 생물과 구별됩니다. 궁창에 연결된 생물과 달리 바퀴는 따로 서 있습니다. 생물은 보좌가 놓인 궁창을 떠받들고 있지만, 바퀴는 궁창과 연결되지 않습니다. 에스겔의 묘사에 따르면 바퀴는 생물에 연결되지도, 보좌에 속하지도 않습니다. 생물과 함께 움직이지만 독자적입니다. 네 바퀴의 표상이 전승사적으로 어디에서 기원하는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습니다. 에스겔 1장과 10장의 묘사는 수레를 전제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바퀴 달린 보좌를 염두에 둔 것 같지도 않습니다. 바퀴 달린 보좌는 (아직) 고대 근동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이성으로 다 이해할 수 없고,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분입니다. 에스겔이 본 환상은 하늘 보좌에 앉으셔서 모든 만물을 감찰하시며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가두어진 분이 아니라 온 우주와 역사를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찬양과 경배를 드려야 합니다.
네 생물 머리 위에 있는 창공(22-25)
하나님께서는 두려운 포효 소리를 발하며 움직이실 때도 있고 날개를 거둬 잠잠하실 때도 있습니다. 직접 역사에 개입하실 때도 있고 잠자코 보고 계실 때도 있지만, 항상 살아계셔서 모든 것을 주장하시는 전능한 주권자이십니다.
22그 생물의 머리 위에는 수정 같은 궁창의 형상이 있어 보기에 두려운데 그들의 머리 위에 펼쳐져 있고 23그 궁창 밑에 생물들의 날개가 서로 향하여 펴 있는데 이 생물은 두 날개로 몸을 가렸고 저 생물도 두 날개로 몸을 가렸더라 24생물들이 갈 때에 내가 그 날개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 소리와도 같으며 전능자의 음성과도 같으며 떠드는 소리 곧 군대의 소리와도 같더니 그 생물이 설 때에 그 날개를 내렸더라 25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서부터 음성이 나더라 그 생물이 설 때에 그 날개를 내렸더라(22-25)
에스겔의 시선이 생물과 바퀴에서 생물의 머리 위에 있는 궁창(하늘의 판)으로 옮겨집니다. 천사들의 날개 위로 궁창이 나타납니다. ‘궁창(穹蒼)’을 보여주면서 땅 위와 대조적으로 하늘을 운행하시는영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궁창은 하나님의 영역과 세상의 영역 중간에 있었습니다.
(1) 생물들 머리 위 궁창(22)
생물이나 바퀴의 경우와 달리 ‘궁창’의 모습은 간략하게 ‘수정 같은 궁창의 형상’으로 묘사합니다. 보기에 ‘높고 무서우며’라며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18) 궁창이 네 생물의 ‘머리 위에 펼쳐져’ 있었습니다(22). 생물들 머리 위에는 수정 같은 궁창의 형상이 나타나는데(22), 이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영적인 세계를 상징합니다. 수정(얼음)처럼 차갑게 반짝이는 궁창의 모습을 보고 두려움을 느꼈던 에스겔은 궁창 위를 계속 바라보지 못하고 시선을 다시 궁창 아래로 돌려 생물들에게로 향합니다.
(2) 궁창 아래 생물들(23)
생물들의 머리 위에 있는 궁창과 궁창 밑에 있는 생물들이 22-23절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제사장이 그 옷으로 몸을 가리듯이 그 생물들은 각 얼굴들의 몸을 두 날개로 가리고 있었습니다. 머리로 궁창을 떠받친 생물들이 두 날개로 몸을 가리고 다른 두 날개는 서로 맞닿게 펴서 움직였습니다(23; 11). 에스겔은 비록 땅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기회를 얻지 못했지만, 하늘의 성전, 하나님의 집에 대한 섬기고 있습니다. 포로기에 제사장 에스겔에게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성육신하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3) 생물들의 날개 소리(24)
생물들이 갈 때, 그 날개 소리는 ‘많은 물소리와도 같았다’(24)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편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인하여 빛나니’(43:2)라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요한계시록 14:12)는 하늘에서 나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분명 전능자의 음성이며, 떠드는 소리 곧 군대의 소리와도 같았습니다.
(4) 궁창 위의 소리(25)
펼쳐진 두 날개가 내는 엄청난 소리는 하늘 보좌에 앉으신 분(26)의 절대적 힘을 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그것은 예레미야서에서 87회 이상이나 언급되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칭호를 드러내 줍니다. 땅 위에서 움직일 때는 바퀴가 움직였지만 궁창을 움직일 때에는 날개가 움직였습니다(24). 그 생물들의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서부터 음성이 났으며 ‘그 생물들이 설 때에 그 날개를 내렸다’는 말도 20, 21절의 바퀴들의 움직임과 영의 움직임을 묘사한 것처럼 두 번 반복하여 묘사하였습니다(24, 25). 에스겔이 생물의 날개에 주목하고 있을 때 ‘궁창 위에서부터 (나는) 음성’이 그의 시선을 다시 궁창으로 향하게 합니다(25). 궁창 위의 음성이 에스겔을 피조세계의 경계(궁창)를 넘어 창조주의 거룩한 영역으로(26-28) 이끌어 들입니다.
죄악에 가린 영안들은 이렇게 존귀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영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소경이 태양을 직접 보아도 두렵지 않듯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건강한 눈을 가진 사람들은 태양을 보면 두렵단 것을 압니다. 그래서 태양을 감히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물인 태양도 직접 볼 수 없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이랴 더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보좌와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26-28)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어느 곳에도 계신 분입니다. 그분의 영광은 말로 형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 하늘의 영광과 그곳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셨지만 직접적으로 볼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26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27내가 보니 그 허리 위의 모양은 단 쇠 같아서 그 속과 주위가 불 같고 내가 보니 그 허리 아래의 모양도 불 같아서 사방으로 광채가 나며 28그 사방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엎드려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들으니라(26-28)
이스라엘 백성들 멸망한 이유는 하나님 앞에 조아림과 겸손한 청종이 없어서 멸망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은 바로 그 조아림과 순종에서 시작합니다. 에스겔은 궁창 위에는 보좌가 있고, 그 보좌에는 사람의 모양을 한 어떤 분이 앉아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1) 궁창 위의 보좌(26a)
에스겔의 시선이 궁창 위의 보좌에 앉으신 분을 향합니다. 궁창의 경우처럼 보좌도 그 구체적 형태를 알 수 없게 간단하게 기술합니다. 궁창 위에는 남보석 같은 보좌의 형상이 있었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는 사람 모양의 형상이 있었습니다(26).
(2) 보좌 위에 한 형상(26b-28a)
놀랍게도 에스겔은 보좌에 앉아 계신 여호와를 보고, 더 나아가 묘사까지 합니다. 하늘 보좌에 앉으신 여호와의 표상은 온 세상이 그 분의 통치 아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바벨론 사람들이 섬기는 말둑(Marduk)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으로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바벨론도 통치하십니다. 에스겔은 여호와의 모습을 ‘사람의 모양 같은 형상’으로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했다는 창세기 1:27의 진술을 염두에 둔 표현인지는 불분명합니다. 관련성이 있다면, 창조주 여호와와 그분의 피조물 사람이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서로 연결됐음을 읽어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에스겔서는 다른 어떤 책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절대 간격을 강조합니다. 여호와는 에스겔을 언제나 ‘인자’로 부르신다.)
에스겔의 대담한 묘사는 계속됩니다. 보좌에 않아 계신 분의 모습은 전체적으로 빛나는 불과 같았습니다. 허리처럼 보이는 부분의 위쪽은 ‘단 쇠’(빛나는 금속) 같아서 사방이 둘러싸인 불과 같았고, 그 아래쪽은 불처럼 보였는데 사방이 광채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27). 사방으로 뻗은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처럼 보였습니다(28a). 궁창 위의 보좌에 앉아 계신 여호와의 영광이 마치 비가 온 후에 구름 사이로 빛을 발하며 나타나는 무지개와 같았습니다. 에스겔은 여호와의 영광을 무지개의 광채에 비교함으로써 묘사할 수 없는 것을 묘사합니다. 무지개의 비유가 창세기 9:1-16을 배경으로 하는지는 불분명합니다. 창세기에 의하면 홍수 후에 여호와께서 노아와 언약을 맺으시고 언약의 증거로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셨는데, 양자를 관련시켜 무지개에서 심판에 대한 암시를 읽어낼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아마도 1절의 ‘하늘’처럼 여호와께서 창조주와 세상의 통치자이심을 시사해주는 것 같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은 역사와 자연과 제의 안에 계시되는 여호와의 인격적 현존을 가리킵니다. 원래 ‘무겁다’를 의미하는 동사 ‘카베드’에서 나온 ‘영광’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체의 본질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은 여호와의 속성에 속한 것이기에 그분께 영광을 돌림은 그분의 위대하심과 권능의 인정을, 그분 앞에 엎드려 머리 숙임을 의미합니다. 에스겔에 의하면 여호와의 영광은 한편으로는 세상의 경계 저편에 실재하는 신비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 안에 들어와 활동하시는 그분의 능력입니다.
(3) 에스겔의 반응(28b)
에스겔은 압도적인 하나님의 환상을 보고 그 자리에 쓰러집니다(28b). 2:2에 따르면 에스겔이 여호와의 영의 도움을 받아 일어섭니다(참조, 3:15). 전체적으로, 에스겔의 환상은 다양한 비유(수정, 남보석, 단 쇠, 불 무지개)와 ‘-처럼’, ‘모양’, ‘형상’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여 궁창(수정 같은 궁창의 형상)과 보좌(‘보좌의 형상’)와 보좌에 앉아계신 분(‘사람의 모양 같은 형상’)과 그분의 영광(‘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을 간접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신비적 분위기를 창출합니다. 이를 통해 독자들이 환상의 구체적 모습에 관해 사변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경고합니다. 독자는 환산의 구체적 모습보다는 그 의미에 집중해야 합니다.
왕이신 하나님을 경외하며, 즉각적으로 복종해야 합니다.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 에스겔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이는 깊은 존경과 복종의 자세를 보여 줍니다. 나는 깊은 존경심으로 하나님을 대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고 있습니까?
전능한 주권자는 오직 여호와뿐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겸손히 엎드려 듣는 것뿐입니다. 이 조아림과 겸손한 청종이 없어서 이스라엘은 멸망했습니다. 회복은 바로 그 조아림과 순종에서 시작합니다. 엎드려 청종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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