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01-01)
절망 중에도 함께하시는 하나님
에스겔 1장 1-14절
올림픽과 같은 큰 대회를 앞둔 선수가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우승을 하겠다고 열심히 연습했습니다. 만약 불행히도 훈련하다가 부상을 당해서, 그 경기에 못나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 선수의 마음은 얼마나 안타깝고 속상하겠습니까? 에스겔은 좋은 제사장으로 꿈꾸었지만, 현실은 포로로 끌려와 있었습니다. 아마 부상당한 선수처럼 에스겔의 마음도 비슷했을 것입니다.
- 에스겔서는 일반적으로 친숙하지 않는 성경이라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성령이 인도하시면 쉽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쫓겨나 바벨론 포로로 잡혀온 유다 백성들이 절망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환상을 보이시며 어디어서나 그들과 함께하심을 알려주셨습니다.
선지자로 부름 받은 에스겔(1-3)
하나님께서는 성전과 이스라엘 영토 안에만 국한되시는 분이 아닙니다. 절망과 낙담이 지배하는 바벨론 역시 하나님께서 거하시며 다스리십니다. 에스겔이 바벨론 그발 강가에서 하나님의 강력한 현존과 임재가 있은 환상을 경험하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체험 합니다.
1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에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 2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힌 지 오 년 그 달 초닷새라 3갈대아 땅 그발 강 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1-3)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포로된 땅 그발 강가에 있던 에스겔에게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의 현현과 임재는 일상을 새롭고 경이로운 날이 되게 하였고, 속된 장소를 거룩한 곳이 되게 합니다.
(1) 때와 장소(1)
에스겔은 ‘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 곧 ‘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힌 지 오년 그 달 초닷새’에 선지자로 부름을 받는 환상을 경험합니다. ‘서른째 해’가 그의 나이를 의미한다면, 에스겔은 제사장 직분을 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나이에(참조, 민수기 4:3,23,30)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2) 때의 연대기적 정보(2)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찾아오신 곳이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바벨론 유배된 곳에서 찾아오셨습니다. 유다 왕 여호야긴과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온 첫해 주전 597년에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습니다. 유배 5년째 되던 해 주전 593년에 에스겔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특이하게도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의 통치 연대를 사용하지 않고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바벨론으로 잡아간 여호야긴의 유배를 기점으로 삼아 연대를 언급합니다. 여기에서 에스겔서가 대변하는 바벨론 유배민들의 정치적 입장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들의 눈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왕위에 앉혀진 시드기야는 다윗 왕권의 적법한 계승자가 아니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시드기야 왕권의 (간접적) 부정은 유배민들을 하나님 백성의 뿌리에서 잘린 자들로 주장하는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11:15; 참조 33:24)에 대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다윗 왕권이 여호야긴을 통해 이어진다면, 하나님 백성의 정통성은 유배민들에 의해 계승됩니다.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이 아니라 바벨론에 유배당한 자들이 하나님 백성의 남은 자들이 됩니다(참조, 예레미야 24:1-10). 달리 말하자면, 예루살렘과 유대의 정치적 멸망으로 하나님 백성의 역사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3) 에스겔의 소개(3)
개인적으로 에스겔은 레위 지파사람으로 유력한 제사장 후보였습니다. 이제 나이 30살 생일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이것은 제사장으로서의 직무가 시작되는 시점입니다(민수기 4장).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곳은 하나님의 임재하신 곳으로 생각하는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짓밟았던 바벨론 그발 강가에서 에스겔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이전 같으면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장이 되어야 할 사람이 이방 땅에서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에스겔이 환상을 경험한 장소는 ‘그발 강 가’였습니다. 에스겔서에서 ‘그발 강’은 언제나 에스겔의 소명 사건과 관련하여 언급 됩니다(참조, 1:1,3; 3:15,23; 10:15,22; 43:3).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는 에스겔이 예배 중에 하나님을 만났음을 암시해줍니다. 제의적으로 더러운 이방 땅에(참조. 아모스 7:17; 에스겔 4:13) 사는 자들에게 제의적 깨끗함(정결의식)을 위해서는 물이 필수적이었습니다. 후대의 디아스포라 유대 전통이 보여주듯이, 바벨론 유배민들은 몸을 깨끗이 씻을 수 있는 강가에서 제의적 모임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신학적 전통에 따르면 여호와는 성전에 거하시거나 현현하시는 하나님으로 성전에서 제사를 통해 만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성전에 거하시는 여호와는 하늘에도 보좌를 갖고 계시지만, 하늘 보좌는 예루살렘 제의에서 거의 의미가 없었습니다. 제의적 정결이 성전 예배의 전제 조건이기에 가나안을 벗어나 바벨론과 같은 이방 땅에서는 여호와께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완전히 벗어난, 전통적인 방식으로는 만날 수도 섬길 수도 없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전혀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여호와께서 하늘로부터 바벨론의 ‘그 강가’에 있는 에스겔을 찾아오십니다. ‘하늘이 열리며’는 여기에만 나오는 표현으로, 말둑(Marduk) 신을 섬기는 바벨론이 여호와의 통치 아래 있음을 처음부터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늘 보좌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제 당신의 우주적 왕권을 행사하십니다. 그발 강가의 환상은 부차적으로 유배민들이 바벨론에서 여호와를 섬길 수 있음을 보여주기도 합니다(11:16). ‘하나님의 모습/환상’은 환상이 하나님에게서 기원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역사 의지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환상은 예언자들에게 공통된 신적 계시의 통로이지만, 에스겔의 경우에는 그 규모와 표현의 강렬함에 있어 아주 독자적입니다. 에스겔서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하나님의 손/권능이 임하였다’(1:3; 3:14,22; 8:1; 33:22; 37:1; 40:1)도 예언 전통에 속한 표현으로(참조. 열왕기상 18:46; 열왕기하 3:15-16; 이사야 8:11; 예레미야 15:17), 예언자가 여호와의 능력에 완전히 사로잡혔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신비한 환상을 보여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통해 이스라엘의 죄상을 밝히고 그들의 운명을 알리시며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고 치유하여 하나님 형상으로 온전케 하시려고 권능으로 임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꿈이 되살아납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유배된 지 5년이 지난 지금 제사장 에스겔의 꿈은 점점 사라져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에스겔은 하나님과 만남과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환상을 통해 더 큰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북쪽에서 오는 폭풍우(4)
사람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이만큼이면 됐겠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더 철저하게 무너지고 나서야 온전하게 회복될 수 있다고 생각하실 때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한 환경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죄악과 세상에 대하여 아직 충분히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4내가 보니 북쪽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 그 속에서 불이 번쩍번쩍하여 빛이 그 사방에 비치며 그 불 가운데 단 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이고(4)
에스겔은 ‘폭풍과 큰 구름’ 가운데 오시는 하나님의 표상은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신현 묘사에 속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에 개입하셔서 당신 모습을 드러내실 때 산과 땅이 흔들리고 폭풍우나 구름과 불이 함께합니다(참조, 출애굽기 19:16-18; 20:18; 사사기 5:4-5; 욥기 38:1; 시편 50:3, 104:32; 144:5).
하늘이 열리고 계시된 환상임에도(1) 방향이 별도로 ‘북쪽에서부터’로 언급됩니다. 지리적 방향보다는 신현의 신학적 의미를 내포한 표현 같습니다. 신현 사건은 주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고 민족들을 심판하는 문맥에 등장하는데, 그발 강가에서 에스겔이 경험한 신현 사건은 이스라엘의 심관과 관련됐음을 시사해줍니다.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경험한 적(아람, 앗수르, 바벨론)은 거의 예외 없이 북쪽에서 침략해 오기에 북쪽은 자주 심판의 방향으로 사용됩니다(참조. 예레미야 1:13-15; 4:5-6; 6:1,22-23; 에스겔 9:2; 38:6,15).
환상 속에 네 생물(5-14)
성도들은 어떤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현존과 임재를 떨어져 나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초월적인 분으로 세상 어느 곳에나 항상 자녀들과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자녀들을 위해 강인하시고 민첩하신 분입니다.
5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 그들에게 사람의 형상이 있더라 6그들에게 각각 네 얼굴과 네 날개가 있고 7그들의 다리는 곧은 다리요 그들의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고 광낸 구리 같이 빛나며 8그 사방 날개 밑에는 각각 사람의 손이 있더라 그 네 생물의 얼굴과 날개가 이러하니 9날개는 다 서로 연하였으며 갈 때에는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 10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오른쪽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왼쪽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11그 얼굴은 그러하며 그 날개는 들어 펴서 각기 둘씩 서로 연하였고 또 둘은 몸을 가렸으며 12영이 어떤 쪽으로 가면 그 생물들도 그대로 가되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 13또 생물들의 모양은 타는 숯불과 횃불 모양 같은데 그 불이 그 생물 사이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며 그 불은 광채가 있고 그 가운데에서는 번개가 나며 14그 생물들은 번개 모양 같이 왕래하더라(4-14)
에스겔은 자신이 그발 강가에서 보았던 환상을 설명합니다. 하늘 보좌에 앉으신 여호와의 영광을 본 에스겔은 시선을 아래에서 위로 옮겨가며 네 생물(5-14)과 그들 곁의 바퀴들(15-21)과 네 생물 위의 궁창(22-25)과 궁창 위의 보좌에 앉으신 여호와의 영광(26-28)을 차례로 묘사합니다.
(1) 사람 형상의 네 생물(5-8a)
사람의 형상을 한 네 생물(5)은 저마다 네 얼굴과 네 날개를 갖고 있었고(6), 곧은 다리와 송아지 발바닥 같은 발바닥은 광내 구리 같이 빛났고(7), 저들의 날개 밑에는 사방으로 사람의 손이 보였습니다(8). 네 얼굴의 모양이 각기 다른데, 앞은 사람의 얼굴, 뒤는 독수리의 얼굴, 오른쪽은 사자의 얼굴, 왼편은 소의 얼굴이었습니다(10). 네 생물은 나아갈 때 몸을 돌이키지 않고 저마다 곧장 앞으로 영이 가려는 쪽으로 갔습니다(9,12). 그 생물들 가운데에는(‘그 생물들의 모양’) 불타는 숯불 같은 모습과 왔다 갔다 하는 횃불 같은 모습이 있어 광채를 낼 뿐만 아니라 그 불에서 번개가 나왔습니다(13). 생물들은 번개가 치는 모습처럼 나갔다 들어갔다 했습니다(14).
현대인에게는 아마도 기괴하게 보일 네 얼굴의 생문은 고대근동에서 벽화나 장식품들을 통해 잘 알려진, 적어도 바벨론에 유배당한 에스겔의 청자와 독자에게는 그렇게 낯설지 않은 형상이었다. 사람은 피조물의 정점이고, 사자는 들짐승 가운데, 독수리는 날짐승 가운데, 황소는 집짐승(가축) 가운데 가장 힘이 센 존재로 일찍부터 인정받았습니다. 고대인들은 각 분야에서 최고의 힘을 상징하는 대표적 존재를 종합하여 하나의 신화적 생물을 만들고 이를 통해 비교가 불가능한 최상급의 힘을 표현하였다. 물론 네 생물의 묘사는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피조물에 대한 여호와의 절대적 우위를 통해 직접 기술할 수 없는 여호와의 무한 능력과 위엄을 보여줍니다.
(2) 날개와 얼굴(8b-11)
고대 근동에서 ‘네 날개’는 원래 사방의 우주적 바람을 가리켰고, 둘 또는 네 날개를 가진 생물은 신적 존재로 하늘을 떠받들거나 운반하는 신들이었습니다. 에스겔의 환상에서 네 날개의 생물은 신적 지위를 상실합니다. 이들은 단지 여호와의 보좌가 놓여 있는 궁창을 떠받들고 있는 존재로, 여호와의 영에 따라 움직입니다. 날개의 기능에도 변화가 주어집니다. 진행하는데 두 날개만 사용하고, 다른 두 날개로는 자신의 몸을 가립니다(11).
(3) 움직임(12-14)
궁창이 그 위의 신적 영역과 그 아래의 세속적 영역을 엄격하게 구분하지만, 네 생물의 생명을 안전하게 지키기에는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여호와의 파괴적·배타적· 절대적 거룩함 앞에서 그분의 보좌를 운반하는 생물마저 제 몸을 가려야 했습니다. 궁창 위 보좌에 앉으신 여호와와 궁창 아래 네 생물 사이의 간격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절대 간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곳이나 계시며 어느 곳에서든 말씀하신 분입니다.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와 있을 때,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이방 바벨론 땅 그발 강가에서도 하나님의 사람 에스겔에게 말씀하시고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곳에 계시며,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해 주실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버려진 땅, 심판의 땅, 부정한 땅에 유배 중인 곳에 나타나십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계시하고 그곳이 성전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순종하는 곳에 하나님 나라가 섭니다. 심판을 뼈 아프게 받고 돌아 선 백성이 있는 곳에 주님도 함께 하십니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려야 합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베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26 에스겔(7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스겔(03) - 에스겔 1장 15-28절 - 환상으로 영광을 보여주신 하나님 (0) | 2024.08.25 |
---|---|
에스겔(01) - 에스겔 서론 (1) | 2024.08.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