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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서(04-01)


생명을 아끼시는 하나님

요나서 4장 1-11절


참된 회개는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다른 마음을 품는다면, 그것은 회심이 아니라 단지 신(神)을 바꾼 개종일 뿐입니다. 종교란 것은 자신이 주인이지만, 회심은 하나님께서 주인되신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변하지 않으면 회심이 아니고 개종일 뿐입니다. 자신의 뜻대로가 아니라 주님 뜻대로 되길 바라는 마음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백성을 긍휼히 여기며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반면 요나는 하나님이 니느웨를 멸망시키지 않으시자 이에 분개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요나를 바로 꾸짖지 않으시고 참고 기다리시며 왜 하나님께서 큰 성읍 니느웨의 멸망을 두고 보지 않으시고 아껴 사랑하셨는지, 멸망에서 생명을 얻게 하셨는지 깨닫도록 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이나 이스라엘 모두를 아끼시는 은혜와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죽기까지 화가 난 요나(1-4)

우리의 뜻에 집중하지 말고, 한 생명이라도 더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전념해야 합니다. 교회는 서로 정죄하고 미워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의 뜻인 구원을 이루기 위해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는 거룩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혹시 요나와 같이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1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2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4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1-4)

요나서 4장은 1-3장에 덧붙인 부록과 같은 장이면서도 앞에서 알지 못했던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어 세심히 봐야 합니다. 이미 3장에서 니느웨에 대한 결말, 즉 하나님이 니느웨의 심판을 구원으로 바꾸신 일이 다 기록되었기 때문에 요나서가 3장으로 끝나도 별 무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4장이 있음으로써 니느웨의 운명에 대한 요나의 본심, 그리고 요나와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본심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먼저, 요나는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꿔 니느웨에 재앙을 내리지 않으신 점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이 일에 화가 났습니다(1). “매우 싫어하고”란 어구는 문자적으로 ‘큰 불쾌함으로 불쾌하게 하다’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이때 불쾌함으로 번역되는 ‘라아’는 3:10에서 니느웨 백성의 “악”과 하나님이 내리려 하셨던 “재앙”으로 번역된 단어로서 상호연관성을 보여줍니다. 니느웨도 ‘라아’에서 벗어나고, 하나님도 ‘라아’를 내리지 않았지만, 이제 그 ‘라아’는 요나의 몫이 된 셈입니다. 결국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니느웨의 심판을 외쳤지만 내심으로는 니느웨의 멸망을 은근히 기대했던 것입니다.

큰 불만을 품은 요나는 기도를 통해 “내가 고국에 있을 때 이렇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아니하였나이까?”(2)라며 하나님께 따집니다. 이 말로 미루어 보아 이스라엘에서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에 심판을 선포하라고 명하셨을 때 주된 목적은 심판 선포만이 아니라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는 것도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요나는 니느웨가 진심으로 회개할 경우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꿔 재앙을 내리지 않을 것임을 이미 예상했고 하나님께도 자신의 생각을 전달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살려둘 수 있다는 생각에 다시스로 도망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의 미래에 대해 요나에게 알리지 않으셨으나 요나는 그가 지대한 은혜와 자비와 인애의 하나님이시며 화를 더디 내고 마음을 바꿔 재앙도 거두시는 분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혹시나 했던 일이 아니나 다를까 눈앞에 벌어졌으므로 요나는 화가 났습니다. 여기서 요나가 설명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등의 속성은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을 반역했을 때, 그들을 심판하신 후 다시 십계명을 주겠다고 하시며 모세에게 말씀하신 내용입니다(출 34:-7). 요나는 하나님이 직접 자신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인용하며 비꼬듯 불만을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나 요나가 지금 망각하고 있는 것은 그 자신이 바닷속에 빠졌을 때, 물고기 뱃속에 갇혀있었을 때 생명을 얻은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참으심 덕분이란 점입니다. 몹시 화난 요나는 차라리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죽는 게 낫소이다”라며 하나님께 반항합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죽은 것과 다름없어 하나님께 생명을 구했던 요나(2:2,7-9)가 이제 다시 죽기를 요청하는 것은 아이러니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요나를 꾸짖지 않으시고 대신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라고 물으십니다. “옳으냐”란 말은 ‘마땅하냐’, ‘잘한 것이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화와 불만에 진노하실 수 있으나 그러지 않으십니다. 참으로 자비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이지 않습니까?

 

니느웨에 대한 요나의 본심(5-7)

율법적 사고와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경건한 자라는 우월감을 가지고 불신자를 정죄한 적은 없는지 돌이켜봅시다. 우리는 편협한 신앙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5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6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7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5-7)

요나는 여전히 화가 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니느웨 성에 어떤 결과가 임할지 기다려보기로 합니다. 그는 성을 떠나 동편으로 가서 초막을 짓고 더위를 피해 그 아래에 앉았습니다.

한편, 요나를 위해 큰 물고기를 준비하셨던 하나님(1:17)은 이번에는 그를 위해 박넝쿨을 준비하셨습니다. 이 박넝쿨은 요나에게 그늘이 되어주어 그의 머리를 내리쬐는 햇볕의 재앙에서 벗어나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요나는 예기치 못한 박넝쿨의 덕을 보고 크게(문자적으로 ‘큰 기쁨으로’) 기뻐했습니다. 요나가 뜨거운 햇볕의 재앙에서 벗어나게 해준 박넝쿨을 크게 기뻐하는 모습은 1절에서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재앙에서 벗어나게 하신 일에 요나가 크게 불쾌해하던 모습과 뚜렷하게 대조됩니다.

 

죽기까지 화난 요나(8-9)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이방인들도 하나님 앞에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만 구원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박널쿨 그늘을 주셨다가 거두심으로 니느웨 주민들과 가축들까지 아끼시는 자신의 마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차별 없는 하나님의 사람과 구원을 기억할 때, 우리도 생명을 아끼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8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9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8-9)

박넝쿨이 주는 시원함에 기뻐하는 요나에게 하나님은 벌레와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습니다. 이튿날 새벽에 벌레가 박넝쿨을 강타해 다 갉아 먹어버리자 요나는 더 이상 그늘진 자리를 찾지 못했습니다. 해가 뜨고 설상가상으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뜨거운 동풍이 불어와 요나의 머리를 강타하자 요나는 실신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요나는 다시금 죽기를 구하며 죽는 게 낫다고 한탄하였습니다. 요나는 원하지 않는 곳에 심판을 선포하러 가기보다는 죽기를 바랐고, 자기가 바란 대로 심판이 이르지 않은 것에 화가 나 죽기를 바랐고, 이제 자기가 원했던 박넝쿨이 없어져 고통을 당하자 죽기를 바랍니다. 물론 여기서 “죽는 것이 낫다”는 요나의 말은 죽을 만큼 괴롭다는 뜻입니다. 요나는 자기가 조종할 수 없는 일에 분개하고 있습니다. 이런 요나에게 하나님께서는 다시 “네가 성내는 게 옳으냐?”고 물으셨습니다. 요나는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라고 외칩니다.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본심(10-11)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우리 안에 요나의 마음이 있다면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한 생명이라도 구원하기 위해 힘을 다합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10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11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10-11)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명령으로 시작한 요나서는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며 끝난다. 10-11절은 하나님이 요나를 위해 박넝쿨, 벌레, 동풍을 준비하신 이유와 니느웨를 멸망시킬 계획을 바꿔 살려주신 이유를 자명하게 알려준다.

불만과 화로 어쩔 줄 몰라 하는 요나에게 하나님께서는 박넝쿨을 비유로 들어 니느웨의 심판을 번복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의중을 밝히십니다. 요나에게 있어 박넝쿨은 수고하여 키운 것도 아니고 그저 하룻밤 있었다가 하룻밤에 시들어버린 존재였습니다. 그럼에도 그 박넝쿨은 요나에게 큰 기쁨을 가져다주었고, 요나도 그 박넝쿨에 관심을 두고 아꼈습니다. 그 박넝쿨이 계속 있어 자기에게 큰 기쁨을 주기를 바랐습니다. 이런 박넝쿨에 반해, 큰 성읍인 니느웨는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오랜 세월 관심 있게 살피고 키우신 곳입니다. 이 도시에는 현재 오른쪽 왼쪽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의 어린이만 해도 12만 여 명이 될 정도로 많은 무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한 가축도 많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인이 경멸하는 이방인들이지만 하나님께는 손수 창조하신 소중한 피조물이며 이스라엘과 매한가지로 그의 사랑하는 백성입니다. 이 백성과 그 안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창조물은 오랜 세월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왔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런 성읍을 긍휼히 여기지 않으시겠습니까!

요나서는 이처럼 “큰 성읍 니느웨”에 대한 선포를 명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하여 “큰 성읍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밝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끝납니다. 그 중간에 큰 바람(1:4), 큰 두려움(경외, 1:10, 16), 큰 물고기(1:17), 큰 성읍(3:2, 3), 큰 불쾌함(4:1), 큰 기쁨(4:6)의 ‘큰+명사’ 조합이 여덟 번 나와 총 열 번을 이룹니다. 이 모든 예는 각각의 양적 질적 크기를 나타내면서 동시에 큰 성읍 니느웨에 초점을 맞추게 하는 역할을 꾸준히 수행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요나에 대한 하나님의 끊임없는 자비하심과 은혜입니다. 요나는 요나 자신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대표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의 생명을 구해줬다고 해서 자신이 선택한 이스라엘을 등한시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불순종을 심판하셨지만 그를 죽음에서 건지셨고 그의 부당한 분노에도 그를 위해 여러 가지를 예비해주시는 등 이방인과 이스라엘을 향해 품은 깊은 관심과 사랑을 끝까지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만일 심판이 뜻이라면 이 땅에 과연 남을 사람이 있습니까? 한 생명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하여 생명을 구원하는 최선을 다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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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서(03-01)


니느웨에 일어난 회개 운동

요나서 3장 1-10절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실 만큼 하나님께서 순종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순종을 통해 뜻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역사를 훼방하려고 우리를 유혹해 불순종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순종 하나도 귀하게 여기십니다. 순종을 통해 오늘도 역사하십니다.

 

요나는 두 번째로 임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니느웨로 가서 심판을 선포합니다. 니느웨 성은 이를 듣고 왕부터 모든 백성이 하나님께 회개하며 자기들이 지은 죄와 악한 일을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백성의 참된 회개를 보시고 그들을 긍휼히 여겨 성을 멸하려는 마음을 바꿔 그들의 생명을 건져주셨습니다.

 

여호와의 명령과 요나의 순종(1-3a)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인이 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구원 얻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 구원 얻기를 원하십니다(벧후 3:9). 하지만 끝내 회개하지 않고 돌이키지 않는다면,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회개의 기회를 잡는 자에게 구원의 은혜가 주어집니다.

1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3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1-3a)

일부를 제외하면 두 번째 파견 보고는 첫 번째 파견보고를 거의 문자적으로 반복합니다. 요나의 파견 목적이 니느웨의 심판임을 시사해주는 1:2의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가 탈락하고, 그 자리를 “내가 네게 명한 바”가 대신합니다. 상응해서 부정적 의미를 갖는 ‘그것을 거슬러 외쳐라’가 가치중립적인 ‘그것에게 외쳐라’로 바뀝니다. 무게중심이 악독으로 가득 찬 니느웨의 심판에서 요나에 의한 여호와의 명령 이행으로 옮겨집니다. 예언자는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는 자이기에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참조. 렘 26:2) ‘내가 네게 명한 바를 외쳐라’와 같은 명령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요나의 첫 번째 불순종과 관련된 언급입니다.

여호와는 요나의 불순종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확고한 의지 표명으로 이를 대신하십니다. 이 언급은 또 요나가 여전히 여호와의 계획에 동의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며, 4장에서 벌어질 충돌을 암시해줍니다. 속마음이 어떻든 요나가 이번에는 순종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갑니다.

 

니느웨의 멸망을 선포하는 요나(3b-4)

순종은 나 편하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일입니다. 순종은 우리를 살리시고 믿음을 갖게 하신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반응입니다. 순종하는 자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3…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4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3b-4)

요나의 니느웨 선포가 간단하게 언급됩니다. 메시지보다 선포의 외적 환경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니느웨의 크기가 이중적으로 소개됩니다. ‘사흘 길’이라는 표현은 성을 가로질러 가는 데 사흘이 걸린다는 것인지, 성벽을 한 바퀴 도는 데 사흘이 걸린다는 것인지 불분명합니다. 하룻길이 대략 30km이기에 사흘 길은 90km가 됩니다. 어떻게 이해하는 과장법에 속합니다. 최전성기의 니느웨 성벽 둘레는 대략 12.5km, 성의 길이와 폭은 평균적으로 대략 4.2km와 1.2km였습니다. “하나님 앞에”(문자적으로 ‘하나님에게 속한’)는 보통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표현이지만, 여기서는 최상급의 의미를 갖는 숙어입니다. 니느웨가 세상에서 가장 큰 성임을 이중으로 강조하면서 니느웨에 남다른 지위, 곧 대표성을 부여해줍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성읍 니느웨가 땅을 대표하는 세력이라면, 니느웨의 심판은 온 땅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통치 아래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 됩니다. “하루 동안 다니며”는 ‘하룻길을 가서’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요나는 사흘 길의 성읍에 들어가 하룻길을 가서 외칩니다. 예언의 선포 장소는 보통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성문 앞이나 성전 앞이기에 굳이 성읍 가운데로 들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사흘 길’과 ‘하룻길’이 특별한 의도에서 사용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오기는 했지만 큰 성읍 니느웨의 운명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가 선포한 메시지는 다섯 단어로 된 짧은 문장에 불과합니다. ‘아직 사십 일이 [남았다]. 니느웨가 무너질 것이다.’ 멸망의 심판만 선포하지 않고 멸망의 시점까지 알려준다는 점에서 요나의 메시지는 심판을 선포한 다른 예언자들의 메시지와 구별됩니다. 즉, 메시지의 초점이 멸망의 심판보다 아직 남은 사십 일의 기간에 맞춰집니다. 직접 회개를 요청하는 말씀은 아니지만, 그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된 것도 아닙니다. 5-9절을 보면 니느웨 사람들은 이 행간의 가능성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요나의 선포에 대한 니느웨의 응답: 전면적 회개(5-9)

회개하는 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겸손한 마음입니다. 회개의 은혜는 겸손한 자들에게 임합니다. 왕은 구원을 위해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왕은 구원을 위해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우리도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적극적으로 간구해야 합니다. 삶에 변화가 없다면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변화된 삶을 살아 참된 회개의 길로 갑시다.

5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6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7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이르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8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9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3b-9)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선포에 즉시 반응합니다. 요나의 멸망 선포에서 하나님의 심판 의지를 읽어내고 긴박하게 움직입니다. 니느웨의 멸망을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전면적인 회개운동에 나섭니다. 금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굵은 베옷을 입습니다(5). 금식과 굵은 베옷은 회개의 외적 표지에 해당합니다. “하나님을 믿고”는 여기를 제외하고 언제나 이스라엘과 관련해 사용됩니다. 이방 선원들은 폭풍을 일으키고 통제하시는 여호와를 두려워하고, 니느웨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심판을 선포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요나가 원하지 않았고 오히려 막으려 했지만, 역설적으로 이방인들이 요나를 통해 여호와를 알고 그분의 구원 능력을 경험합니다. 니느웨 주민들에서 시작된 회개운동이 왕궁에까지 미친다. “그 일” (문자적으로 ‘그 말’)은 요나가 니느웨에서 선포한 말씀을 가리킵니다. 니느웨 사람들을 움직였던 요나의 메시지가 왕에게 전해지자 왕도 즉시 반응합니다.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옷을 걸친 후에 잿더미 위에 앉습니다(6절). 백성은 베옷만 입는데, 왕은 베옷을 입고 잿더미에 앉습니다. 심판 경고를 왕이 백성보다 더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입니다. 보좌에서 내려와 잿더미 위에 앉는 행동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는 겸비합의 표현입니다. 먼저 자신을 낮춘 왕은 대신들과 함께 조서를 내립니다. 금식에 관한 조서는 세 개의 금령(7)과 세 개의 요청(8)으로 구성됩니다. 왕이 니느웨에 선포한 금식은 그 범위와 철저함에서 일반적인 금식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도 참여하고, 다들 맛을 보지도 먹지도 마시지도 말아야 합니다. 니느웨 성이 무너져 내리는 파멸적 재앙이기에 성안에 사는 사람이나 소나 양이나 예외 없이 금식해야 합니다.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자료에 따르면 금식과 관련해 군사용 말과 나귀의 갈기나 꼬리를 깎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해야 할 것’ 세 가지는 사람이나 짐승이나 모두 굵은 베옷을 입고 온 힘을 다해 하나님께 부르짖고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처음 둘은 애도 행위에 속하고, 세 번째는 회개의 본질적 지향점입니다. 외적 내적 행위는 삶의 공간에서 실천되는 구체적 결단으로 옮겨져야 합니다. 요나의 선포에 멸망의 원인(1:25)에 관한 언급이 없지만, 왕은 내느웨의 폭력과 악행이 심판을 초래했음을 알고(참조. 1:7) 백성들에게 폭력과 악한 삶에서 떠날 것을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9절은 왕이 조서를 내린 동기나 목적을 보여줍니다. 왕은 요나의 선포에서 하나님의 심판 의지를 보지만, 이를 되돌릴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그는 멸망을 결정하신 분께서 뜻을 돌이키신다면 멸망을 피할 수도 있음을 압니다. 그는 니느웨의 멸망과 생존이 하나님께만 달렸음을 알고, 결정은 그분께 맡기고 그분을 움직이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참조. 1:14). 하나님을 강제할 수 없지만, 니느웨의 참된 회개를 보시고 그분께서 뜻을 돌이켜 멸망하지 않게 하실지 누가 알겠습니까(참조. 욘 2:14a)? 예언자들이 이스라엘 왕들에게 기대한 하나님 앞에 겸비한 모습을 니느웨 왕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니느웨의 회개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뜻을 돌이키심(10)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순종에도 크게 기뻐하시고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순종의 시작은 하나님 약사의 시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긍휼이 풍성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회개하는 자에게 임합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마지막까지 기다리십니다. 속히 회개하시길 바랍니다.

10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10)

최선을 다하는 왕의 간절한 기대가 수포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의 전심을 다한 실천적 희개에 하나님께서 긍정적으로 응답하십니다. ‘그들이 행한 것(마아세)’을 인정하시고 하나님께서 행하지(내리지) 않는 것으로 화답하십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돌이키자, 하나님께서도 마음을 돌려 ‘재앙’을 내리지 않기로 하십니다. ‘그들의 길’을 수식하는 ‘악한’과 ‘재앙’의 히브리어는 ‘라아 ’로 동일합니다. 악의 열매가 재앙임을 시사해줍니다. 후반절은 문맥에 따른 차이를 제외하면 출애굽기 32:14에 일치합니다.

9-10절이 출애굽기 32장을 배경으로 한다면, 이스라엘과 니느웨의 대비를 읽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이들이 악에서 떠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징벌 결정을 되돌리시고, 니느웨의 경우는 악에서 떠난 것을 보고 결정을 되돌리십니다. 회개의 자세와 준비에 있어 니느웨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더 뛰어났음을 시사해줍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매 순간이 하나님께서 주신 순종의 기회입니다. 내 마음대로 순종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십시오. 우리의 작은 순종을 통해 큰 역사를 이루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오늘도 순종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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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서(02-01)


고기 뱃속에서 기도한 요나

요나서 2장 1-10절


인간은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께 순종하기보다 방종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요나도 자신의 고집을 내세워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했습니다. 인간은 애석하게도 자유를 잃고 고난을 당한 후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이것이 고난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요나가 바다에 내던져지지만, 그의 의도대로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려 요나의 도주를 막으셨던 여호와께서 이번에는 ‘큰 물고기’를 준비해 요나를 삼키게 하십니다. 요나가 제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죽음의 영역에 떨어지지만, 완전히 죽음에 넘겨지지는 않습니다. 요나는 스올의 뱃속에서 그가 멀리하려 했던 여호와를 다시 만납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하는 요나(1)

믿음의 회복은 인생의 회복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는 소망의 줄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그 벼랑 끝에서 우리를 독수리처럼 날아오르게 하십니다. 요나의 물고기 뱃속은 아무런 희망도 없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먼저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고 합니다.

1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1)

구약성경의 그리스어 번역본인 칠십인역 전통에 따라 1장 마지막에 자리한 1:17은 히브리어 성경의 전통에 따라 2장의 처음으로 옮겨지는 것이 더 좋습니다.

요나는 이전에는 하나님을 떠나려 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를 회피했습니다. 요나의 자리가 큰 폭풍으로 거의 부서지게 된 배에서 다시 잔잔해진 바다의 물고기 뱃속으로 바뀝니다. 배는 여호와를 피해 도주하는 요나가 선택한 수단이고, 물고기는 바다에 빠진 요나를 위해 여호와께서 준비하신 그분의 도구입니다. 요나의 자리만 바뀐 것이 아닙니다. 배에서 물고기 뱃속으로 옮겨지면서 요나도 바뀝니다.

요나는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며, 여호와께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배에서는 끝까지 여호와께 등을 돌리고 맞서던 요나가 마침내 여호와를 바라봅니다. 여호와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도망하려던 요나가 그분께 가까이 나아갑니다. 위기의 순간에도 기도하는 사람은 살아납니다. 완악함과 불순종의 요나가 여호와의 은혜로 기도와 순종의 요나로 바뀌고, 자신의 생각과 신학으로 여호와를 통제하려 했던 요나가 그분의 주권과 구원 능력을 온전히 받아들입니다. 요나는 여호와께서 준비하신 물고기 뱃속에서 새사람으로 거듭납니다. 기도는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기 시작하는 요나(2-9)

하나님께서는 서원에 따라 드리는 제사보다 진정한 회개와 순종의 결단을 바라셨을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에게는 수많은 생각이 밀려옵니다. 수많은 방법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놀라운 생각들이 가득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 놀라운 응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2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3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4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5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6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7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8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9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2-9)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생각을 합니다. 생각 없이 사는 것도 문제지만 생각이 너무 많아도 문제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생각 속에서 우리가 은혜는 좋아하면서 감사에는 인색합니다. 감사함으로 기도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주십니다.

(1)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2-4)

고난이 찾아왔을 때 요나는 기도했습니다. 2절은 요나의 전체 기도의 요약이자 핵심입니다. 요나는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2)라고 말합니다. 죽음의 위협 아래 놓였던 요나는 응답하시는 여호와를 경험합니다. 겁에 질린 선원들의 부르짖음에 침묵하는 이방신들(1:4)과 달리, 다른 한편으로는 당신께 부르짖는 선원들의 간구에 긍정적으로 반응하신 것처럼 (1:14-15),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1:9) 분께서는 당신을 찾는 부르짖음에 귀를 기이시고 응답하십니다.

“스올의 뱃속”은 요나가 이미 삶의 영역에서 죽음의 영역으로 옮겨졌음을 시사해줍니다(참조 사 38:10). 요나가 처한 고난은 용기 내거나 애써서 벗어날 수 있는 고난이 아닙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멸망으로 끝나는 고난입니다.

“부르짖었더니”의 동사 ‘샤와’는 도움을 구하는 외침을 가리킵니다(시 5:2; 18:6; 22:24; 30:2 등). 요나는 자신이 받는 고난이 여호와에 의한 것임을 강조합니다. 여호와께서 요나를 바다 한가운데 깊은 곳에 던지셨을 뿐만 아니라, 큰물에 에워싸인 요나 위로 파도와 물결이 넘치게 하셨습니다(3). 자신을 던지는 주체가 여호와임을, 더 나아가 바다에 빠진 자신의 생명을 위협한 “파도와 큰 물결”마저 그분께서 보내신 것임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1:15에 따르면 선원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집니다. 그렇다고 선원들만의 결정은 아닙니다. 선원들이 요나를 던지자 여호와의 “큰 바람”이 일으킨 “큰 폭풍”으로 성난 바다가 잔잔해졌음은 저들의 결정이 여호와의 뜻이었음을 시사합니다. 요나의 주장이 책임 전가처럼 보이지만 이는 피상적 이해로, 현재 문맥에서는 기도의 동기로 작용합니다. 여호와께서 고난의 원인자이시기에 여호와만이 요나를 도울 수 있고, 그래서 요나는 여호와께 도움을 청한다. “깊음”(출 15:5;시 68:22: 69:2,15; 88:6; 107:24)과 “바다”는 생명과 질서를 위협하는 혼돈의 세력으로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여호와만 통제하실 수 있습니다.

4절은 고난 중에 있던 요나의 이전 기도의 인용입니다. 요나는 여호와의 목전, 곧 그분 성전에서 쫓겨났지만, 구원의 기대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전을 다시 바라보게 될 것을 확신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보이지 않게 현존하시는 장소이라는 점에서 “주의 성전”과 “주의 목전”(문자적으로, ‘당신의 눈앞’)은 동격입니다. 3절의 ‘여호와께서 던지심’과 내용상 일치하는 ‘여호와의 목전에서 쫓겨남’은 고난으로 귀결되고, 2절의 ‘여호와께 부르짖음’과 내용상 일치하는 ‘성전을 바라봄’은 구원과 회복(고난에서 벗어남)으로 구체화 됩니다. 1:3에 따르면 요나는 쫓겨난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다시스로 도망을 시도합니다.

(2)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5-7)

회고적 인용 다음에 나오는 5-6절은 표현과 내용에서 3절에 가깝습니다. 장면이 다시 바다로 바뀌고, 요나의 고난이 깊은 물에 빠져 죽어가는 자의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물은 목구멍까지 차올랐고, 바다의 풀은 머리를 휘감았고, 심연이 에워쌉니다(5).

허우적거릴수록 더 깊이 빠져 산의 뿌리까지 내려가 빗장이 걸린 지하세계에 갇힙니다(6). 고대 우주관에 따르면 큰 산은 바다 밑바닥까지 그 뿌리를 내리고 있고, 지하세계는 대문과 빗장이 갖춰진 성곽과 같아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1장의 주요 모티브인 ‘바다’와 ‘내려감’이 2장에서도 계속 사용됩니다. ‘여호와께로부터 멀어짐’과 관련한 요나의 도피는 수평적이며 동시에 수직적입니다. 요나는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동쪽의 니느웨로 가지 않고 그 반대편인 서쪽 땅 끝의 다시스로 도망합니다. 또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피해 거듭 아래로 내려갑니다. 욥바로 ‘내려간’ 요나는 배로 ‘내려가’(1:3) 그 밑창으로 ‘내려간다’입니다(15). 바다에 던져진 요나는 허우적거리다가 바다 밑 산의 뿌리까지 ‘내려가’ 빗장이 쳐진 지하세계에 갇힙니다(6a). ‘내려감’이 죽음과 심판의 길이라면 ‘올라감’은 생명과 구원의 길입니다. 죽음이 이미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됐을 때 여호와께서 개입하십니다. 그분께서 요나를 구덩이에서 건져 올리십니다(6).

7절은 2절과 4절의 중심 단어인 ‘기도’와 ‘성전’을 받아 요나의 입장에서 구원 경험을 기술합니다. 생명력이 거의 사라졌을 때 요나는 여호와를 기억합니다. ‘여호와를 기억하다’는 신뢰와 고백의 표현입니다. 여호와의 기억이 요나가 여호와께로 나가도록 이끕니다. 요나의 기도가 여호와께, 그분의 거룩한 성전에 다다릅니다.

(3)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8-9)

8절의 우상숭배에 대한 비판은 감사 예배에 참여한 자들에게 주는 말입니다. 우상숭배자들은 여호와께서 베푸신 은혜를 저버리는 자들입니다. 요나의 말은 권면보다는 경고 또는 고발에 가깝습니다. 우상숭배자들에 대한 비판은 예언자들의 주요 주제 가운데 하나지만, 요나의 고난과 아무 관련이 없기에 그의 고발성 경고는 감사기도의 문맥에서 매우 돌출적입니다. 더 넓은 문맥을 내다보는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자들을 비판하는 말이지만,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은 이방인과 다르지 않기에 이방인들에게로 확장이 가능합니다. 여호와께 맞서다가 그분의 은혜로 구원받지만, 요나의 시각이 여전히 이스라엘의 경계를 벗어나지 못함을 시사해줍니다.

요약하면, 우상숭배자들에 대한 요나의 고발성 경고는 4장의 여호와와 요나의 충돌을 예비해줍니다. 1장과 3장의 이방인들에 대한 긍정적 전망과 요나의 이스라엘 중심적 시각이 긴장 속에 공존하다가 4장에서 파열음을 내며 맞부딪칩니다. 요나의 감사기도가 선원들의 구원 이야기와 유사하게 끝을 맺습니다. 요나의 개인적 구원 경험을 고백적-교리적으로 집약한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를 제외하면 10절은 대체로 1:16을 반복합니다. 큰 폭풍에서 구원받은 선원들이 여호와께 희생제물을 드리고 서원했던 것처럼 바다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가 구원을 받은 요나도 감사기도와 함께 여호와께 희생제물을 드리며 서원을 갚겠다고 약속합니다. 1장에서 대조적이었던 이스라엘사람 요나와 이방 선원들의 모습이 2장에서는 자주 중첩됩니다.

 

요나를 구해주신 여호와(10)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도하지만, 주의 뜻대로 구하지 않은 기도가 응답 되는 것만큼 큰 불행은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기도 응답을 구하기 전에 주님이 기뻐하시는 기도인지를 살피는 것이 더 우선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10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10)

요나의 도피로 발생한 사건이 끝을 맺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고난 중에 하나님을 만난 요나가 죽음의 영역에서 생명의 영역으로 옮겨집니다. 물고기를 준비하셔서 요나를 삼키게 하셨던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령하셔서 요나를 육지에 뱉어내게 하십니다.

여호와의 명령을 거절했던 요나가 죽음의 바다에 빠졌다가 기도에 응답하시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의 은혜로 원래 있어야 할 육지로 다시 돌아옵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1:2)는 여호와의 명령이 실행될 여건이 다 마련됩니다. 선원들이 먼저 인정했듯이(1:14) 여호와께서는 당신 뜻대로 행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신다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상황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말고 주님만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을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리시길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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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서(01-01)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한 요나

요나서 1장 1-17절


연륜과 신앙적인 신념이 하나님의 손 아래 있을 때, 신앙의 가치를 갖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칫 자기중심적 완고함과 자기 고집 그리고 교만으로 변질하여, 신앙이 왜곡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허위의식과 완고함에 사로잡혀 있는 요나의 모습을 통해 우리 자신의 신앙의 상태를 돌아보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태도는 무엇입니까?

 

구약성경에 다른 예가 없는 특별한 예언자가 등장합니다. 예언자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맞받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처신합니다. 그는 동쪽의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당시 세계관에 따르면 서쪽 끝에 해당하는 다시스로 도망을 시도합니다. 그 이유는 달리 언급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명령과 요나의 도주(1-3)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불의한 일들을 만나면, 불의한 세계에 대해서 우리 마음은 정죄 의식과 분노로 들끓기 쉽습니다. 자칫 연민을 잃어버린 회색빛 종교인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향한 복음으로 정복하길 명령하시지만, 완고한 신념에 사로잡히면 하나님과의 대립각을 세우면 반항하게 될 것입니다.

1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3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1-3)

하나님께서는 앗수르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려고 하시자, 그 사명을 받은 요나는 정반대의 길을 선택하여 당시 서쪽 땅끝인 다시스로 도망하여 그 뜻을 무산시키려고 합니다. 인간적인 감정으로 생각해보면, 원수의 나라가 은혜를 얻는 꼴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1) 말씀 사건(1)

요나서는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함으로 시작합니다. 아밋대의 아들 요나는 열왕기하 14:25-28에 따르면 가드헤벨 출신으로서 북이스라엘 여로보암2세(주전 793-753) 당시 활동한 여호와의 종이자 선지자였습니다. 말씀 사건의 양식 다음에는 일반적으로 선포할 말씀이 나오는데, 요나에게는 선포의 장소와 관련한 지침이 주어집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겨 여로보암 2세를 통해 이스라엘의 땅을 넓혀주실 것을 예언하였고, 그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2) 여호와의 명령(2)

이처럼 이스라엘 내에서 사역하던 요나에게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에서 동쪽으로 800km 떨어진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가라는 뜻밖의 명령을 내리십니다. 여호와께서 요나에게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2)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에게 임한 명령은 3가지 ‘일어나라’, ‘가라’, ‘외치라’로 구성되었습니다. 요나는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 성읍을 거슬러 외쳐야 합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는 것이 중요했음을 시사해줍니다. 니느웨는 산헤립 이후부터 앗수르의 수도가 됐습니다. 니느웨를 수식하는 ‘큰 성읍’은 물리적 크기뿐만 아니라 그 의미의 남다름까지 포함합니다(참조. 4:11).

여호와께서 요나를 니느웨로 파견하시는 이유는 니느웨 사람들의 죄악이 여호와에게까지 올라왔기 때문입니다(참조, 출 2:23).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니느웨의 하나님으로서 저들의 삶에 개입하십니다.

(3) 요나의 도주(3)

여호와의 명령을 받은 요나가 반응하는데, 전혀 뜻밖입니다. 그는 명령에 순종해서 동쪽의 니느웨로 가지 않고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 반대편에 있는 서쪽의 다시스로 달아나려고 항구도시 욥바로 내려갑니다(3). 여호와의 예언자가 여호와의 명령을 단호하게 거절하고 이를 행동으로 옮깁니다. 여호와의 명령에 주저하는 경우는 있지만(참조. 출 3:11; 4:10,13; 삿 6:15; 삼상 9:21; 렘 1:6), 대놓고 그분의 명령을 무시하는 예는 요나가 유일합니다.

그 이유는 뒤늦게 4:2에서 언급됩니다. 욥바로 내려간 요나는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 뱃삯을 치르고 배에 올라탑니다. 니느웨는 오늘날의 모술(Mosul) 맞은편 티그리스 강좌안에 위치했고, 다시스는 일반적으로 스페인의 남서쪽에서 찾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다시스는 서쪽의 세상 끝에 해당합니다. 아마도 요나가 여호와의 시선 밖으로 벗어나려고 다시스를 목적지로 선택한 것 같습니다. 고대적 사고에 따르면 세상 끝은 여호와의 관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입니다.

 

여호와의 간섭으로 도주에 실패하는 요나(4-16)

상황이 자신의 걸음을 가로막을 때 잠시 멈추어 서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거나 순종하지 않는다면 불신자보다 못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탄 배가 깨어질 정도로 강력한 바람을 보내어 그의 불순종을 간접적으로 꾸짖으십니다.

4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5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6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 7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아 보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뽑힌지라 8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말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하니 9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10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11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하니 12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13그러나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하다가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용하므로 능히 못한지라 14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때문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하고 15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가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16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4-16)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해 가시는 과정을 보면 놀라운 분이십니다. 큰 폭풍과 선장의 말, 제비뽑기를 통해 요나를 질책하십니다. 하지만 요나는 요지부동입니다. 만물의 창조자를 경외한다는 입술의 말은 공허하기만 합니다.

(1) 여호와의 ‘큰 바람’(4)

요나가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도망가자 여호와께서 반응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바다 위로 “큰 바람”을 보내 바다에 “큰 폭풍”이 일어나게 하셔서 배가 부서지게 만드십니다(4). 배가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난파하는 경우는 고대 세계의 흔한 재난이지만, 요나가 탄 배를 위협한 폭풍은 여호와의 특별한 간섭으로 발생한 파괴적 자연현상입니다.

(2) 두려움에 사로잡힌 선원들(5-6)

큰 폭풍으로 배가 거의 부서지게 되자 선원들이 먼저 반응합니다. 이들의 반응은 이중적입니다. 한편으로는 자기 신에게 부르짖고, 다른 한편으로는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안에 있던 짐을 모두 바다에 던집니다(5). 전자는 선원들이 이방인들이었음을 전제합니다. 배를 구하려고 다들 정신없이 움직일 때 한 사람은 예외였습니다.

큰 바람 속에 아등바등하고 있는 갑판 무리의 모습을 뒤로하고 초점을 요나에게 향합니다. 그 시간 요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려고 욥바로 내려가고 베로 내려갔으며 배 안에서도 밑층으로 내려가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코를 골고 잘 정도로 깊은 잠에 빠집니다(5b). 여호와의 명령을 무시했던 요나는 그분의 ‘큰 바람’도 무시합니다.

이때 중재자가 등장합니다. 선장이 배가 난파 위기에 처했는데도 잠만 자는 요나를 깨워 책망하면서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라고 요청합니다(6). 선장의 ‘일어나라’, ‘외치라’는 명령은 놀랍게도 앞서 하나님의 명령에 쓰인 세 단어 중 두 단어이므로 요나는 선의 말을 통해 하나님의 명령을 떠올렸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선장의 요청에 요나가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요나는 재앙을 초래했으면서도 재앙과 관계없는 듯이 행동합니다. “혹시”는 신의 주권을 인정하는 행동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위기에 처한 자들이 신께 도움을 부르짖지만, 개입은 신의 주권적 결단에 합니다.

(3) 폭풍의 원인을 찾는 선원들(7-10)

선원들이 다시 반응합니다. 이번에는 제비를 뽑아 자신들에게 닥친 재앙의 원인을 알아보기로 합니다(7). 큰 폭풍이 배에 탄 누군가의 잘못 때문에 발생했음을 전제합니다.

요나에게 제비가 뽑히자, 사람들이 요나에게 질문을 던집니다(8). 다섯 질문 가운데 첫 번째 질문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말하라”라는 제비뽑기로 이미 해결됐고, 그 다음의 세 질문은 “네 생업이 무엇이며”,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생략됩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 질문인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에만, 요나의 답변이 주어집니다. 답변은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로 충분하지만, 요나는 자신을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 소개합니다(9). 민족적 정체성과 종교적 정체성이 분리될 수 없음을 시사해줍니다. ‘하늘의 하나님’은 하늘에서 통치하시는 하나님으로 온 땅이 여호와께 속했음을, ‘바다와 육지(마른 땅)’는 주로 창조(창 1:9-10)와 출애굽(출 14:16, 22, 29; 15:19; 시 66:6; 느 9:11)에 등장하는 표현으로 여호와께서 창조와 역사의 주이심을 보여줍니다.

그의 고백은 부족함 없는 신학적 진술이지만, 그의 행동은 입술의 고백에 완전히 어긋납니다.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분으로 고백하면서도 여호와의 통치가 땅 끝까지는 미치지 않으리라는 생각 속어 다시스로 도망하고, ‘하늘의 하나님’을 고백하면서도 이방 세계가 그분의 통지 안에 포함되는 것에 결사 반대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고 주장하면서도 자신 여호와의 명령을 무시하고 도망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를 일종의 슬로건으로 사용하는 요나와 달리 그의 답변을 듣고 상황을 파악하게 된 선원들은 더욱더 두려워하게 됩니다(10).

(4) 선원들과 요나의 대화(11-12)

바다가 점점 더 거칠어지자 선원들은 요나와 다시 대화를 시도합니다.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11)는 라고 묻습니다. 그 질문에 요나는 아주 냉정하게 답변합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12) 원인이 자신 때문임을 알면서도 요나는 여호와께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는 배와 자신을 분리시켜 끝까지 여호와께 맞섭니다. 다시스 행이 좌절됐다고 여호와께서 이기신 것이 아닙니다. 요나는 이번에는 바다, 곧 도망보다 훨씬 강력한 죽음을 선택해 그분의 계획을 좌초시키려 합니다.

(5) 실패로 끝난 선원들의 마지막 노력(13)

여호와를 피해 도망하는 요나 때문에 폭풍이 발생했음을 알았음에도 선원들은 그 원인을 곧바로 제거해버리지 않습니다. 요나를 포기하지 않고 육지로 돌아가려고 힘껏 노를 젓습니다(13).

어떻게든 요나도 살려보려는 선원들의 모습은 생명에 무관심한 요나, 여호와의 계획에 맞서 죽음도 불사하는 요나의 모습과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더는 어쩔 수 없게 되자 선원들은 요나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6) 선원들의 기도(14)

마지막까지 여호와를 찾지 않는 요나와 달리 이들은 요나를 바다에 내던지기 전에 여호와께 부르짖는다. 자기 신들에게 부르짖던 자들(5)이 이제는 “이 사람의 생명 때문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14)라고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 선원들은 요나가 거절한 여호와의 주권과 이방인까지 포함하는 구원 능력을 철저하게 인정합니다.

(7) 바다에 던져진 요나(15)

요나가 바다에 내던져지자 성난 바다가 곧 잔잔해집니다(15).

(8)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선원들(16)

다시 잔잔해진 바다를 보고 사람들은 여호와를 더 “크게” 두려워하여 그분께 희생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합니다(16). 희생 제사 다음에 행한 서원의 내용은 달리 언급되지 않습니다. 여호와를 바다 폭풍의 신으로 경험했기에, 선원들은 그분과 지속적 관계를 맺고자 서원을 했던 것 같습니다.

 

요나의 기도(17)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을 세상 가운데 영광스러운 백성으로 세우고자 하십니다. 그 영광의 핵심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랑에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우리를 그 순종의 자리로 인도하십니다. 하지만 성도의 불순종으로 인해서 세상이 큰 풍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의 경건과 사명은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순종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며 완성됩니다.

17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17)

여호와를 모르던 선원들은, 그분을 알면서도 명령에는 순종하지 않는 요나 덕분에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이 됩니다. 요나의 승리로 끝날 것 같은 이야기가 마지막 순간 여호와의 개입으로 반전됩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다시스를 향하여 도망가다 결국 바다에 던져진 요나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일단 바다에 던져진 것 자체는 불순종의 대가로서 죽음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죽이기보다는 이미 큰 물고기를 준비하셔서 그를 삼키도록 하셨습니다. 다만 요나가 물에 던져지자마자 큰 물고기가 그를 삼킨 것은 아닙니다. 1:17의 ‘큰 물고기’는 구체적으로 어떤 종류를 가리키는지 단서가 나와 있지 않아 알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초점은 하나님께서 요나를 위해 이 물고기를 준비하셨다는 것이며, 부수적으로 이 물고기가 크다는 점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요나를 위해 물고기를 준비하신 것은 반역한 요나를 바로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의미입니다. 더구나 요나를 위해 준비하신 것은 이 물고기만이 아니라 물고기를 시작으로 4장에서 정점에 다다르게 됩니다.

둘째, 요나서에서 자주 나오는 단어 중 하나는 ‘큰’이라는 형용사입니다. “큰 성읍”(1:2; 3:2,3; 4:11), “큰 바람”(1:4), “큰 두려움”(1:10, 16)에 이어, 오늘 본문에는 “큰 물고기”(1:17)가 소개되었습니다. 여기서 니느웨를 가리키는 “큰 성읍”이 요나서의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1:2; 4:11)에 나오며 총 네 번이나 나온 것으로 보아 니느웨에 주목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큰’이라는 형용사는 표면적으로는 같이 나오는 명사의 크기를 강조하면서 암시적으로는 니느웨 성이 크고 하나님께서 구원해야 할 사람이 많은 중요한 도시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완고한 신앙인, 인간미가 없는 편협한 종교인, 이기적이고 차가운 선민의식은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복음의 제사장으로서 인간에 대한 연민, 행동으로 드러내 보이는 경외심, 마음으로 뜻을 순종하는 순종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형식적인 종교인이 아닌 참 순수한 신앙을 가진 신앙인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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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서 서론


요나서 서론


1. 저자와 제목

이 책의 제목은 주인공인 선지자 요나입니다. 1장 1절은 “여호와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했다”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요나(비둘기)’이며 가드헤벨 사람 아밋대의 아들입니다.

 

2. 저작 연대

요나는 기원전 803-790년경 사람입니다. 에리야와 엘리사 다음 북이스라엘의 기록된 선지자 중 최초 선지자입니다.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주전 8세기입니다(왕하 14:23-28). 주전 2세기의 시락서 49:10에 12선지자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요나서는 주전 8세기에서 주전 3세기 말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보입니다.

 

3. 주제

여호와는 ‘우리’(요나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이 아니라 ‘그들’(이방인 선원들과 니느웨 사람들)에게도 한없는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4. 기록 목적과 배경

(1) 기록 목적

요나서의 기록 목적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베푸시는 한없는 긍휼을 깊이 깨닫고, 그분의 사명은 모든 피조물의 차별 없는 보호와 행복에 관심을 가지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긍휼의 도구로 살아갈 것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2) 기록 배경

요나는 주전 782년부터 753년까지 이스라엘(북왕국)을 다스렸던 여로보암 2세 (왕하 14:23~28) 의 통치기에 예언했습니다. 그 시기는 국가적으로 크게 번민스러운 때였습니다(왕하 14:26,27). 이스라엘의 왕좌에 앉은 왕들은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으므로 국가적 심판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통하여 국력이 회복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 이후의 완화 조치는 그 나라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한 유도정책으로 계획된 것 같습니다. 번영은 오직 하나님의 축복 밑에서 그 나라가 달성할 수 있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은 그의 후계자들과 마찬가지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왕하 14:24).

여로보암 Ⅱ세 통치기간 동안 앗수르의 왕들은 아다드-니라리 Ⅲ세(Adad-nirari Ⅲ. B.C. 810-782), 살마네셀 Ⅳ세(Shalmaneser Ⅳ, 782-772), 아수르단 Ⅲ세(Ashur-dan Ⅲ, 772-754), 아수르 니라리 Ⅴ세(Ashur-nirari Ⅴ, 754-746)이었습니다. 그중 아다드 니라리 3세의 통치 기간에 한 종교 개혁이 발생했다는 것을 다분히 암시하는 증거가 있습니다. 보시파의 신(神)나부(Nabu,Nebo)가 유일신, 또는 적어도 주신(主神)으로 선언된 것으로 보입니다. 혹자는 이 일신론적 개혁과 요나의 니느웨 선교사이에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5. 장르

요나를 역사적인 실제의 선지자로 볼 것인지, 아니면 우화적으로 가상의 인물로 볼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습니다. 요나는 열방에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사명을 거부한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저자는 요나를 성공한 선교사가 아니라 실패한 선교사로, 반면교사를 삼아 요나와 같이 죄지 않도록 가르치는 역할을 합니다.

요나서의 기록속에는 당대의 선지자들이었던 엘리야와 엘리사의 이야기와 비슷한 내용들이 등장합니다. 예언자에게 빵과 고기를 제공하는 까마귀의 이야기(왕상 17:6)가 등장하는데, 요나서에서도 물고기가 요나를 하나님이 명하신 목적지로 운송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유의 주재이심을 알리기 위해서 물고기(1:17), 식물(4:6), 벌레(4:7), 동풍(4:8) 사용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이야기를 인용하시면서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었음을 보여주십니다(마 12:40-41).

 

6. 핵심 주제

앞서 말한대로 요나서의 핵심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긍휼이 우리에게만이 아니라 그들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이 책 전체를 통해서 요나뿐만 아니라 이방인 선원, 니느웨 백성 모두가 하나님의 긍휼의 대상입니다. 요나서의 마지막은 요나 4: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로 마무리된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모든 이들을 아끼시는데 너는 이렇게 아끼는 마음이 있느냐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 너는, 이 이야기를 읽고 있는 너는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를 묻고 계십니다.

요나는 말라버린 식물(4:10)을 염려했지만 니느웨 사람들에게는 긍휼의 마음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실패한 선교사일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방인 선원들(1:14), 선장(1:6), 니느웨 왕(3:9)은 요나를 포함한 인간들이 멸망하지 않는데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다른 몇 가지 참고할만한 주제는 다음과 같다.

(1) 지상의 사건들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통제

(2) 자신의 메시지를 열방에 전달하시려는 하나님의 결심

(3) 일반적으로 죄에 대한 회개의 필요성

(4) 구체적으로 자기중심성과 위선에 대한 회개의 필요성

(5) 사람들이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실 것

 

7. 개요

Ⅰ. 요나의 임무와 불순종 1:1-17

    1. 요나의 거절과 폭풍 1:1-10

    2. 큰 고기가 요나를 삼킴 1:11-17

Ⅱ. 요나의 기도와 구출 2:1-10

Ⅲ. 요나의 전도와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 3:1-10

Ⅳ. 요나의 성냄과 하나님의 꾸짖으심 4:1-11

    1. 불평 4:1-5

    2. 마른 박넝쿨과 그 교훈 4: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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