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서(04-01)
생명을 아끼시는 하나님
요나서 4장 1-11절
참된 회개는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다른 마음을 품는다면, 그것은 회심이 아니라 단지 신(神)을 바꾼 개종일 뿐입니다. 종교란 것은 자신이 주인이지만, 회심은 하나님께서 주인되신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변하지 않으면 회심이 아니고 개종일 뿐입니다. 자신의 뜻대로가 아니라 주님 뜻대로 되길 바라는 마음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백성을 긍휼히 여기며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반면 요나는 하나님이 니느웨를 멸망시키지 않으시자 이에 분개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요나를 바로 꾸짖지 않으시고 참고 기다리시며 왜 하나님께서 큰 성읍 니느웨의 멸망을 두고 보지 않으시고 아껴 사랑하셨는지, 멸망에서 생명을 얻게 하셨는지 깨닫도록 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이나 이스라엘 모두를 아끼시는 은혜와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죽기까지 화가 난 요나(1-4)
우리의 뜻에 집중하지 말고, 한 생명이라도 더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전념해야 합니다. 교회는 서로 정죄하고 미워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의 뜻인 구원을 이루기 위해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는 거룩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혹시 요나와 같이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1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2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4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1-4)
요나서 4장은 1-3장에 덧붙인 부록과 같은 장이면서도 앞에서 알지 못했던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어 세심히 봐야 합니다. 이미 3장에서 니느웨에 대한 결말, 즉 하나님이 니느웨의 심판을 구원으로 바꾸신 일이 다 기록되었기 때문에 요나서가 3장으로 끝나도 별 무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4장이 있음으로써 니느웨의 운명에 대한 요나의 본심, 그리고 요나와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본심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먼저, 요나는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꿔 니느웨에 재앙을 내리지 않으신 점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이 일에 화가 났습니다(1). “매우 싫어하고”란 어구는 문자적으로 ‘큰 불쾌함으로 불쾌하게 하다’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이때 불쾌함으로 번역되는 ‘라아’는 3:10에서 니느웨 백성의 “악”과 하나님이 내리려 하셨던 “재앙”으로 번역된 단어로서 상호연관성을 보여줍니다. 니느웨도 ‘라아’에서 벗어나고, 하나님도 ‘라아’를 내리지 않았지만, 이제 그 ‘라아’는 요나의 몫이 된 셈입니다. 결국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니느웨의 심판을 외쳤지만 내심으로는 니느웨의 멸망을 은근히 기대했던 것입니다.
큰 불만을 품은 요나는 기도를 통해 “내가 고국에 있을 때 이렇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아니하였나이까?”(2)라며 하나님께 따집니다. 이 말로 미루어 보아 이스라엘에서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에 심판을 선포하라고 명하셨을 때 주된 목적은 심판 선포만이 아니라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는 것도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요나는 니느웨가 진심으로 회개할 경우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꿔 재앙을 내리지 않을 것임을 이미 예상했고 하나님께도 자신의 생각을 전달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살려둘 수 있다는 생각에 다시스로 도망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의 미래에 대해 요나에게 알리지 않으셨으나 요나는 그가 지대한 은혜와 자비와 인애의 하나님이시며 화를 더디 내고 마음을 바꿔 재앙도 거두시는 분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혹시나 했던 일이 아니나 다를까 눈앞에 벌어졌으므로 요나는 화가 났습니다. 여기서 요나가 설명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등의 속성은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을 반역했을 때, 그들을 심판하신 후 다시 십계명을 주겠다고 하시며 모세에게 말씀하신 내용입니다(출 34:-7). 요나는 하나님이 직접 자신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인용하며 비꼬듯 불만을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나 요나가 지금 망각하고 있는 것은 그 자신이 바닷속에 빠졌을 때, 물고기 뱃속에 갇혀있었을 때 생명을 얻은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참으심 덕분이란 점입니다. 몹시 화난 요나는 차라리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죽는 게 낫소이다”라며 하나님께 반항합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죽은 것과 다름없어 하나님께 생명을 구했던 요나(2:2,7-9)가 이제 다시 죽기를 요청하는 것은 아이러니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요나를 꾸짖지 않으시고 대신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라고 물으십니다. “옳으냐”란 말은 ‘마땅하냐’, ‘잘한 것이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화와 불만에 진노하실 수 있으나 그러지 않으십니다. 참으로 자비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이지 않습니까?
니느웨에 대한 요나의 본심(5-7)
율법적 사고와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경건한 자라는 우월감을 가지고 불신자를 정죄한 적은 없는지 돌이켜봅시다. 우리는 편협한 신앙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5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6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7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5-7)
요나는 여전히 화가 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니느웨 성에 어떤 결과가 임할지 기다려보기로 합니다. 그는 성을 떠나 동편으로 가서 초막을 짓고 더위를 피해 그 아래에 앉았습니다.
한편, 요나를 위해 큰 물고기를 준비하셨던 하나님(1:17)은 이번에는 그를 위해 박넝쿨을 준비하셨습니다. 이 박넝쿨은 요나에게 그늘이 되어주어 그의 머리를 내리쬐는 햇볕의 재앙에서 벗어나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요나는 예기치 못한 박넝쿨의 덕을 보고 크게(문자적으로 ‘큰 기쁨으로’) 기뻐했습니다. 요나가 뜨거운 햇볕의 재앙에서 벗어나게 해준 박넝쿨을 크게 기뻐하는 모습은 1절에서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재앙에서 벗어나게 하신 일에 요나가 크게 불쾌해하던 모습과 뚜렷하게 대조됩니다.
죽기까지 화난 요나(8-9)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이방인들도 하나님 앞에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만 구원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박널쿨 그늘을 주셨다가 거두심으로 니느웨 주민들과 가축들까지 아끼시는 자신의 마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차별 없는 하나님의 사람과 구원을 기억할 때, 우리도 생명을 아끼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8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9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8-9)
박넝쿨이 주는 시원함에 기뻐하는 요나에게 하나님은 벌레와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습니다. 이튿날 새벽에 벌레가 박넝쿨을 강타해 다 갉아 먹어버리자 요나는 더 이상 그늘진 자리를 찾지 못했습니다. 해가 뜨고 설상가상으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뜨거운 동풍이 불어와 요나의 머리를 강타하자 요나는 실신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요나는 다시금 죽기를 구하며 죽는 게 낫다고 한탄하였습니다. 요나는 원하지 않는 곳에 심판을 선포하러 가기보다는 죽기를 바랐고, 자기가 바란 대로 심판이 이르지 않은 것에 화가 나 죽기를 바랐고, 이제 자기가 원했던 박넝쿨이 없어져 고통을 당하자 죽기를 바랍니다. 물론 여기서 “죽는 것이 낫다”는 요나의 말은 죽을 만큼 괴롭다는 뜻입니다. 요나는 자기가 조종할 수 없는 일에 분개하고 있습니다. 이런 요나에게 하나님께서는 다시 “네가 성내는 게 옳으냐?”고 물으셨습니다. 요나는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라고 외칩니다.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본심(10-11)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우리 안에 요나의 마음이 있다면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한 생명이라도 구원하기 위해 힘을 다합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10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11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10-11)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명령으로 시작한 요나서는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며 끝난다. 10-11절은 하나님이 요나를 위해 박넝쿨, 벌레, 동풍을 준비하신 이유와 니느웨를 멸망시킬 계획을 바꿔 살려주신 이유를 자명하게 알려준다.
불만과 화로 어쩔 줄 몰라 하는 요나에게 하나님께서는 박넝쿨을 비유로 들어 니느웨의 심판을 번복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의중을 밝히십니다. 요나에게 있어 박넝쿨은 수고하여 키운 것도 아니고 그저 하룻밤 있었다가 하룻밤에 시들어버린 존재였습니다. 그럼에도 그 박넝쿨은 요나에게 큰 기쁨을 가져다주었고, 요나도 그 박넝쿨에 관심을 두고 아꼈습니다. 그 박넝쿨이 계속 있어 자기에게 큰 기쁨을 주기를 바랐습니다. 이런 박넝쿨에 반해, 큰 성읍인 니느웨는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오랜 세월 관심 있게 살피고 키우신 곳입니다. 이 도시에는 현재 오른쪽 왼쪽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의 어린이만 해도 12만 여 명이 될 정도로 많은 무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한 가축도 많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인이 경멸하는 이방인들이지만 하나님께는 손수 창조하신 소중한 피조물이며 이스라엘과 매한가지로 그의 사랑하는 백성입니다. 이 백성과 그 안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창조물은 오랜 세월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왔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런 성읍을 긍휼히 여기지 않으시겠습니까!
요나서는 이처럼 “큰 성읍 니느웨”에 대한 선포를 명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하여 “큰 성읍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밝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끝납니다. 그 중간에 큰 바람(1:4), 큰 두려움(경외, 1:10, 16), 큰 물고기(1:17), 큰 성읍(3:2, 3), 큰 불쾌함(4:1), 큰 기쁨(4:6)의 ‘큰+명사’ 조합이 여덟 번 나와 총 열 번을 이룹니다. 이 모든 예는 각각의 양적 질적 크기를 나타내면서 동시에 큰 성읍 니느웨에 초점을 맞추게 하는 역할을 꾸준히 수행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요나에 대한 하나님의 끊임없는 자비하심과 은혜입니다. 요나는 요나 자신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대표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의 생명을 구해줬다고 해서 자신이 선택한 이스라엘을 등한시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불순종을 심판하셨지만 그를 죽음에서 건지셨고 그의 부당한 분노에도 그를 위해 여러 가지를 예비해주시는 등 이방인과 이스라엘을 향해 품은 깊은 관심과 사랑을 끝까지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만일 심판이 뜻이라면 이 땅에 과연 남을 사람이 있습니까? 한 생명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하여 생명을 구원하는 최선을 다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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