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29-01)
바벨론 포로들에게 보낸 예레미야 편지
예레미야 29장 1-14절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자신들이 경험했던 일이나 배움으로 습득한 일을 모든 것으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곤 이것이 자신을 지배하고 변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처럼 잘 변하지 않는 생각이나 의식을 ‘고정관념(固定觀念)’이라고 합니다. 유다 백성들에게도 잘못된 고정관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만 계시다는 고정관념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잘못된 고정관념을 편지를 통해 깨뜨리고 있습니다.
- 선지자 예레미야는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편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포로생활이 70년 동안 지속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바벨론에서 빠른 귀환을 전하는 거짓 메시지에 속지 말고, 바벨론에서 번영을 추구하며 살라고 합니다.
바벨론 포로를 향한 편지(1-3)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유다 백성의 정체성은 오늘날의 성도들과 닮아있습니다. 주님 오시는 날까지 우리는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 사이에서 영광과 고난이 공존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바벨론으로 끌려간 유다 백성들은 절망 속에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절망적인 생각에 빠진 백성들에게 희망의 지침을 편지로 전합니다.
1선지자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이같은 편지를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끌고 간 포로 중 남아 있는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에게 보냈는데 2그 때는 여고니야 왕과 왕후와 궁중 내시들과 유다와 예루살렘의 고관들과 기능공과 토공들이 예루살렘에서 떠난 후라 3유다의 왕 시드기야가 바벨론으로 보내어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에게로 가게 한 사반의 아들 엘라사와 힐기야의 아들 그마랴 편으로 말하되(1-3)
유다 백성들이 끌려간 바벨론 땅은 모든 것이 부정한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더욱 슬픈 것은 이제 더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계신 분이기 때문에 먼 바벨론에서 제사를 드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1) 수신자(1)
예레미야의 사역 범위가 예루살렘과 유다를 넘어 바벨론으로 확장됩니다. 예레미야는 유다 왕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파견하는 사절 편에 편지를 주어 유배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2) 보낸 때(2)
두 가지 사실이 전제됩니다. 첫째, 예루살렘 왕궁에 예레미야를 지지하거나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부르실 때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1:8,19). 여호와께서는 고관들을 통해 예레미야를 지켜주시고 도와주십니다. 둘째, 예레미야는 바벨론 유배민들 가운데 어느 정도 알려진 예언자였습니다. 예레미야가 여호야김이 통치할 때 활발하게 활동했기에 적어도 일부 유배민은 예루살렘에서 그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편지의 수신자는 ‘포로 중 남아 있는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입니다. 사회적·종교적 지도자들로부터 일반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배민이 읽어야 할 편지입니다. 편지의 내용이 전체 유배민과 관련된 것임을 시사해줍니다. 사절이 언제 파견됐는지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24:1의 경우처럼 주전 597년의 첫 번째 유배 후로만 나옵니다. 시드기야 제 4년에는 왕이 직접 사절을 이끌고 바벨론으로 갑니다(참조, 51:59). 사절을 보내는 목적도 달리 언급하지 않습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봉신 시드기야가 연례적으로 보내는 조공 사절일 수도 있고, (27:3의 회합이 정치적이었다면) 모의에 참여한 것을 변명하기 위한 진사 사절일 수도 있습니다.
(3) 전달자(3)
사반의 아들 엘라사와 힐기야의 아들 그마랴가 편지의 전달자로 소개됩니다. 엘라사는 여기에만 등장합니다. 26:24에서 예레미야를 보호해준 아히감의 아버지 이름도 사반인데, 엘라사와 아히감이 형제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마랴의 아버지 힐기야가 열왕기하 22장에 나오는 제사장 힐기야와 동일 인물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개연성은 충분합니다. 예레미야가 요시야 왕의 통치 아래 개혁정책을 추진했던 세력들과 친밀한 관계에 있었음을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엘라사와 힐기야가 바벨론에 사절로 파견되었다는 사실은 이들이 바벨론에 대하여 우호적이었음을 시사해줍니다. 그렇다면, 유다와 바벨론의 관계 설정 문제에 있어 이들의 정치적 입장은 바벨론의 칠십 년 지배(25:11; 29:10)를 선포한 예레미야의 신학적 입장과 겉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유배지의 삶과 관련한 권면의 말씀(4-9)
성경은 기록된 말씀입니다.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도 편지 형성으로 기록된 말씀입니다. 기록된 말씀이라고 좋아하는 부분만 읽고, 싫어하는 부분을 건너뛰면 안 됩니다. 기록된 모든 말씀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니 모두 읽고 순종해야 합니다.
4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5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6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7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8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 중에 있는 선지자들에게와 점쟁이에게 미혹되지 말며 너희가 꾼 꿈도 곧이 듣고 믿지 말라 9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함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4-9)
바벨론 제국에 포로로 끌려온 사람들에게 그들이 처한 모든 상황은 오직 심판과 재앙으로만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절망에 빠진 그들에게 현재의 고된 경험이 단순히 재앙만이 아니라 미래의 희망을 위해 계획된 섭리 가운데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 도입부(4)
조상들의 뿌리로부터 잘려 먼 이방 땅으로 옮겨진 이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가나안 땅으로의 조속한 귀환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전통 신학에 따르면 이방 신들의 통치 영역에 속하는 유배지에서 뿌리를 내리기 위해 노력하는 일은 차라리 배교 행위에 속했습니다. 이들에게 유배의 장기화는 정치적으로뿐만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너무 늦지 않게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곧 돌아가리라는 소망에 의지해 유배 생활을 견뎌내고 있는 자들에게 유배가 길어질 것이기에 그에 대비하도록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명령합니다. 여호와의 명령은 물론 그렇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2) 유배지에서의 삶(5-7)
유배민들은 그곳에 집을 짓고 과수원도 만들고 생활터전을 마련해야 합니다(5). 또 아내를 맞이하여 아들과 딸을 낳고, 그 아들들과 딸들을 장가보내고 시집보내 그들도 아들과 딸을 낳게 해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않게 하여야 합니다(6). 삼 대의 언급은 세 세대에 걸친 바벨론의 통치 기간과 일치합니다. 바벨론의 지배가 끝날 때까지 유배지에 살면서 후손이 번성하게 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유배지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 성읍을 위해 여호와께 기도해야 하는데,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7). 현실적으로 보자면, 바벨론의 평안이 유배민의 생존에 도움이 됩니다. 바벨론이 혼란에 빠지거나 침략을 당하면 유배민이 먼저 피해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예레미야서의 신학에 따르면, 바벨론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것이 곧 여호와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바벨론의 칠십 년 지배를 허락하셨기에 그 기간 동안 바벨론의 평안을 간구해야 합니다.
(3) 거짓 예언(8-9)
8-9절은 바벨론 유배지에도 많은 예언자가 활동했음을 전제합니다. 이들이 어떤 예언을 선포했는지는 달리 언급하지 않지만,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함이라’(9)는 이들도 하나냐처럼 유배민의 조속한 귀환을 예언했음을 시사해줍니다. 예루살렘과 유배지의 종교적 분위기가 다르지 않았습니다. 구원 예언자들이 값싼 위로의 말로 유배민들을 미혹했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파종, 수확, 집의 건축, 출생과 다산, 성읍의 평안과 같은 일상적인 생활은 종교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평안과 풍족한 삶은 신의 보호와 축복으로 돌려졌고, 이스라엘도 이 점에서는 다르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바벨론에서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축복이 가능한가입니다. 바벨론에는 여호와의 성전이 없기에 그분께 예배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제의적으로 더러운 이방 땅에 살기에 제의적 더러움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성전이 없는데 어떻게 여호와께 나아갈 수 있습니까? 제사를 드릴 수 없는 부정한 땅에 사는데 여호와의 축복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바벨론에서 생활하기 위해서는 바벨론 신들에게 축복을 구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성전도 제사도 없는 부정한 땅에서 어떻게 여호와신앙을 지킬 수 있습니까? 전통 신학의 틀 안에서 사고하는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에게는 조속한 귀환 선포 외의 다른 선택이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가나안을 여호와 종교의 전제조건이자 충분조건으로 생각하는 자들에게 바벨론은 가능한 한 빨리 떠나야 할 곳이었습니다. 이런 자들에 맞서 예레미야는 성전이 없어도, 제의적으로 부정한 이방 땅에서도 여호와를 만날 수 있고 그분의 축복이 가능함을 선포합니다. 요즘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예레미야는 새로운 신학을 제시했습니다.
여호와의 최종 목표(10-14)
기도에 깨어 있는 성도만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에 동참할 수 있고, 하나님과 함께 즐거워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권능을 목도하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역사와 개인의 삶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보기 원한다면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기도하는 이들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실 것입니다.
10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11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12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13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14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너희들을 만날 것이며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나라들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났던 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0-14)
현재의 상황만 보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마음에 안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성경의 말씀을 펼쳐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어떤 계획을 세우고 계시겠습니까?
(1) 선한 계획(10-11)
바벨론 유배는 한 세대를 넘어 세 세대까지 계속되겠지만, 그 기간은 분명하게 한정되어 있습니다. 바벨론에 허락한 칠십 년의 기간이 차면 여호와께서 이전에 쫓아 보내셨던 모든 곳에서 유배민들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입니다(10,14). 여호와께서 당신 계획에 따라 정한 때가 되면 당신의 ‘선한 말’(은혜로운 약속)을 성취하십니다. 그분께서 세우신 계획은 ‘평안’을 위한 것이지 ‘재앙’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11a). 바벨론 유배가 유례를 찾기 힘든 재앙임은 틀림없지만, 그분 계획의 최종 목표는 아닙니다. 그분의 계획에 따르면 바벨론 유배민은 하나님 백성의 ‘미래와 소망’입니다(11b). 바벨론 유배민이 하나님 백성의 남은 자로 인정을 받습니다(참조, 24:5-7). 가나안에서 중단된 하나님 백성의 역사가 이들의 귀향과 더불어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2) 회복된 관계(12-13)
현재의 문맥에서 12-13절은 이방 땅에서도 여호와와 교제가 가능함을 보여줍니다. 물론 교제의 문은 여호와에 의해서 열립니다. 그분의 약속에 의해 전통 신학의 한계가 극복됩니다. ‘너희가 나를 구하면 (나를) 만나리라. 온 마음으로 나를 찾는다면 내가 너희에게 만나지리라.’ 여호와께서는 당신을 찾는 자가 어느 곳에 있든지 그가 온 마음으로 찾는다면 응답해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당신 이름을 두신 여호와에 의해 성전과 제사가 없는 이방 땅에서 그분과 교제를 나누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약속을 믿고 부르짖는 성도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기 원한다면 현재의 일에 충실하되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구하되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기도로 하나님 앞에서 겸비할 줄 아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만나 주시고 그의 삶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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