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52-02)
예루살렘의 파괴와 회복의 희망
예레미야 52장 12-34절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신실하시며, 그분의 계획과 약속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우리는 어려운 시기에도 희망과 회복의 길을 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며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 여호와께 불순종한 결과로 바벨론에 의해 하나님 백성의 자랑거리인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잿더미가 되고 성벽이 허물어집니다. 성전 기물이 전리품으로 약탈당하고, 사로잡힌 자들은 처형을 당합니다. 예루살렘과 유다는 황무지로 변합니다.
예루살렘과 성전의 운명(12-16)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의 죄악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시며, 이는 정의와 공의를 실현하는 과정입니다. 성전의 파괴와 포로 생활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나타내며, 우리는 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회개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사건들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12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열아홉째 해 다섯째 달 열째 날에 바벨론 왕의 어전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13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과 고관들의 집까지 불살랐으며 14사령관을 따르는 갈대아 사람의 모든 군대가 예루살렘 사면 성벽을 헐었더라 15사령관 느부사라단이 백성 중 가난한 자와 성중에 남아 있는 백성과 바벨론 왕에게 항복한 자와 무리의 남은 자를 사로잡아 갔고 16가난한 백성은 남겨 두어 포도원을 관리하는 자와 농부가 되게 하였더라(12-16)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을 파괴하고, 성전 기물들을 포로로 잡아가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바벨론은 예루살렘의 남은 주민들을 포로로 잡아가고, 일부 사람들을 남겨두어 땅을 경작하게 합니다. 이로 인해 예루살렘의 공허함과 피폐함이 더욱 두드러지게 됩니다.
⑴ 성과 성전의 파괴(12-14)
예루살렘을 점령과 시드기야의 혹독한 징벌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보복이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열아홉째 해 다섯째 달 열째 날에’(5월 7일/열왕기하 28:8) 바벨론 왕의 어전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들어와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과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불태워 버립니다(12-13). 다윗 왕조의 두 기둥이었던 왕궁과 성전과 함께 예루살렘이 잿더미가 됩니다. 또 사령관이 이끄는 갈대아 사람의 부대는 ‘예루살렘 사면 성벽’을 모두 허뭅니다(14). 안전과 번영의 상징이 수치와 조롱의 상징으로 바뀌었습니다.
바벨론에 항복을 거부하고 18개월 동안 저항한 대가로 성이 잿더미가 되고 성벽이 헐립니다. 성전을 불태우는 것은 예외적인 경우로, 아마다 예루살렘 성전에 속한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이 끝까지 바벨론에 대항하여 싸우도록 부추겼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성벽은 주민의 안전과 보호에 필수적이었습니다. 성벽이 파괴된 성은 외부 위협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기에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은 목숨을 내놓고 살아야 했습니다.
⑵ 유배(15)
느부사라단은 성읍에 남아 있던 백성과 바벨론 왕에게 항복한 자들과 그 밖의 남은 자들을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15). 애굽 편에 서서 바벨론에게 대항하던 자들은 처절하게 죽임을 당했고, 항복한 이들과 남은 백성은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⑶ 남겨진 가난한 자들(16)
바벨론에게 반역할 능력이나 의지가 없어 보이는 빈민들만 남았습니다. ‘가난한 백성’을 얼마 남겨 포도원을 가꾸고 농사를 짓게 합니다(16; 참조.39:10). 유다의 정치와 종교와 사회를 지탱해온 자들은 모두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고, 가난한 하층 계급에 속한 자들만 남겨집니다.
성전의 기물들(17-23)
성전의 파괴는 하나님께서 백성의 죄와 교만을 심판하신 사건으로, 우리의 삶에서 정의와 공의를 실천해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성전과 기물의 상실은 하나님과의 중요한 영적 상실을 의미하며, 신앙 생활에서 그분의 임재와 영광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이러한 사건은 회개와 변화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기회를 제공하며, 우리의 영적 상태를 돌아볼 필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17갈대아 사람은 또 여호와의 성전의 두 놋기둥과 받침들과 여호와의 성전의 놋대야를 깨뜨려 그 놋을 바벨론으로 가져갔고 18가마들과 부삽들과 부집게들과 주발들과 숟가락들과 섬길 때에 쓰는 모든 놋그릇을 다 가져갔고 19사령관은 잔들과 화로들과 주발들과 솥들과 촛대들과 숟가락들과 바리들 곧 금으로 만든 물건의 금과 은으로 만든 물건의 은을 가져갔더라 20솔로몬 왕이 여호와의 성전을 위하여 만든 두 기둥과 한 바다와 그 받침 아래에 있는 열두 놋 소 곧 이 모든 기구의 놋 무게는 헤아릴 수 없었더라 21그 기둥은 한 기둥의 높이가 십팔 규빗이요 그 둘레는 십이 규빗이며 그 속이 비었고 그 두께는 네 손가락 두께이며 22기둥 위에 놋머리가 있어 그 높이가 다섯 규빗이요 머리 사면으로 돌아가며 꾸민 망사와 석류가 다 놋이며 또 다른 기둥에도 이런 모든 것과 석류가 있었더라 23그 사면에 있는 석류는 아흔여섯 개요 그 기둥에 둘린 그물 위에 있는 석류는 도합이 백 개이었더라(17-23)
바벨론의 군대가 성전의 기물들을 철저히 파괴하고, 성전의 금과 은 기구를 포함한 모든 보물을 약탈하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성전의 기물들은 그 당시 가장 귀중한 물품들로, 이들은 바벨론의 왕궁으로 옮겨집니다.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의 성전이 완전히 무너진 상징적 사건을 보여줍니다.
⑴ 약탈한 성전 기물 목록(17-19)
바벨론 점령 군대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놋과 음과 금으로 된 성전 기물들을 남김없이 약탈해갑니다(13-15). 약탈하여 바벨론으로 가져간 성전 기구들과 시설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바벨론 병사들이 가져간 것(17-18)과 시위대 장관이 가져간 것입니다(19).
⑵ 헤아릴 수 없는 놋 무게(20)
바벨론 병사들이 큰 놋 시설물들을 산산조각 내어 가져갑니다. 엄청난 무게의 량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⑶ 놋 기둥(21-23)
특별히 놋 기둥의 크기와 장식에 관한 언급을 합니다(열왕기상 7:41-42). 솔로몬 왕이 건축하였던 성전은 파괴되고 귀금속으로 만들어놓았던 성전 기물은 모두 약탈당합니다. 여호와의 축복 가운데 허락된 예루살렘 성전과 성전 제의가 그분의 심판으로 파탄에 떨어집니다.
고관들의 처형(24-27)
하나님께서는 죄와 불순종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며,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와 정의를 실현하는 과정으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본문은 회개와 변화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올바른 삶을 살아가야 함을 강조합니다.
24사령관이 대제사장 스라야와 부제사장 스바냐와 성전 문지기 세 사람을 사로잡고 25또 성 안에서 사람을 사로잡았으니 곧 군사를 거느린 지휘관 한 사람과 또 성중에서 만난 왕의 내시 칠 명과 군인을 감독하는 군 지휘관의 서기관 하나와 성 안에서 만난 평민 육십 명이라 26사령관 느부사라단은 그들을 사로잡아 리블라에 있는 바벨론의 왕에게 나아가매 27바벨론의 왕이 하맛 땅 리블라에서 다 쳐 죽였더라 이와 같이 유다가 사로잡혀 본국에서 떠났더라(24-27)
유다 멸망에 관한 보고는 사로잡힌 종교 지도자들과 고위 관료들과 군사 지도자들이 립나로 끌려가 처형당하는 이야기로 끝을 맺습니다. 대제사장 스라야(참조. 대상 6:14-15)와 부제사장 스바냐(참조. 21:1;29:26; 37:3)와 성전 문지기 세 사람(참조. 35:4; 왕하 12:9; 23:4), 군사를 거느린 지휘관 한 사람, 왕의 시종 일곱 명, 백성을 징집하는 서기관 한 명과 ‘평민’(땅을 소유한 유다의 지도자들 또는 일반 시민들?) 육십 명이 사로잡혀 처형당합니다. 유다의 통치 계급이 철저하게 궤멸됩니다.
고관들의 처형(28-30)
하나님께서는 당장 심판하시는 것 같지 않아도, 직접 말씀하신 심판은 반드시 행하시는 분입니다. 혹시 즉각 심판이 내리지 않는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방심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의식하며 행동해 나가야 합니다.
28느부갓네살이 사로잡아 간 백성은 이러하니라 제칠년에 유다인이 삼천이십삼 명이요 29느부갓네살의 열여덟째 해에 예루살렘에서 사로잡아 간 자가 팔백삼십이 명이요 30느부갓네살의 제이십삼년에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사로잡아 간 유다 사람이 칠백사십오 명이니 그 총수가 사천육백 명이더라(28-30)
예루살렘이 파괴된 후 유다에서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의 수를 언급합니다. 총 4,600명이 포로로 끌려갔으며, 이는 유다의 큰 재앙과 심각한 상황을 반영합니다. 이 통계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유다의 고난을 강조하는 부분입니다.
(1) 1차 유배(28)
이 세 구절은 예레미야서의 특별자료로 열왕기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 보고에 따르면 ‘제칠년에’ 3023명의 유다 사람이, ‘느부갓네살의 열여덟째 해에’ 예루살렘에서 사로잡힌 자 832명이, ‘느부갓네살의 제이십삼년에’ 745명의 유다 사람이 유배를 당했습니다. 전체 4600명으로 비교적 적은 수의 사람이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597년의 제1차 유배를 보고하는 열왕기하 24:14-16에 따르면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과 모든 지도자와 모든 용사 만 명과 모든 장인과 대장장이’(14) 또는 ‘용사 칠천 명과 장인과 대장장이 천명’(16)이 유배를 당합니다. 개략적 숫자를 제공해주는 열왕기의 보고와 달리 예레미야서의 목록은 끝자리까지 정확하게 제시해줍니다. 또 바벨론 왕의 연대기에 따라 세 차례의 유배를 꼭 필요한 내용만 보고하는 것도 주목할 만합니다. 전체적으로 예레미야서의 목록이 바벨론의 공식적인 자료에서 나왔을 가능성을 시사해줍니다.
(2) 2차 유배(29)
특히 587년의 제2차 유배민 832명은 제1차 유배민 3023명에 비해 지나치게 적습니다. 열왕기는 제2차 유배민의 수에 관해서는 달리 언급하지 않습니다. 유배민을 부르는 이름이 첫 번째와 세 번째 유배에서는 ‘유다 사람’이고 두 번째 유배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잡아 간 자’로, 서로 다릅니다. 아마도 ‘예루살렘에서 잡아 간 자’는 전체 유배민들 가운데 그런 이름으로 분류된 집단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느부갓네살의 제이십삼년에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유다 사람 745명을 사로잡아 갔다는 보고는 여기에만 나옵니다.
(3) 3차 유배(30)
582년의 세 번째 유배가 느부갓네살이 임명한 유다 총독 그다랴를 살해한 사건에(참조. 41:1-3) 대한 바벨론의 보복으로 이뤄진 유배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윗 집안에 속한 이스마엘에 의한 그다랴 암살이 세번째 유배의 역사적 배경이라면, 그다랴는 582년 암살당하기까지 대략 5년 동안 유다를 통치합니다. 때로는 세 번째 유배를 느부갓네살이 요단 동편 나라들을 점령할 때 파생된 사건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여호야긴의 사면(31-34)
하나님께서는 모든 상황 속에서 자신의 백성을 회복시키시며, 그분의 약속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야긴을 회복시키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희망과 회복의 길을 열어 주시며, 그분의 계획을 신뢰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여호야긴의 회복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상기시킵니다.
31유다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 지 삼십칠 년 곧 바벨론의 에윌므로닥 왕의 즉위 원년 열두째 달 스물다섯째 날 그가 유다의 여호야긴 왕의 머리를 들어 주었고 감옥에서 풀어 주었더라 32그에게 친절하게 말하고 그의 자리를 그와 함께 바벨론에 있는 왕들의 자리보다 높이고 33그 죄수의 의복을 갈아 입혔고 그의 평생 동안 항상 왕의 앞에서 먹게 하였으며 34그가 날마다 쓸 것을 바벨론의 왕에게서 받는 정량이 있었고 죽는 날까지 곧 종신토록 받았더라(31-34)
유다 왕 여호야긴이 바벨론의 에빌-메록 왕에게 석방되어 존중받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여호야긴은 바벨론에서의 포로 생활 중에도 권력을 일부 회복하고, 매년 식사를 제공받으며 명예로운 대우를 받습니다. 이로 인해 여호야긴의 삶은 비록 포로였지만 존경받는 위치로 변화하게 됩니다.
(1) 사면과 높임(31-33)
597년 바벨론으로 끌려간 유다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 지 삼십칠 년이 되는 해, 곧 느부갓네살의 아들 에월므로닥(562-560)이 왕위에 오른 바로 그해 열두째 달 스물다섯째 날에 감옥에서 석방됩니다(병행기사인 왕하 25:27에는 ‘십이월 그 달 이십칠일’로 나온다). 왕위 등극에 따른 일반 사면으로 다른 왕들과 함께 풀려났던 것 같습니다. 열여덟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석 달을 다스리다가(왕하 24:8) 바벨론으로 끌려간 여호야긴에게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던(대상 3:17-18) 것을 보아 그가 처음부터 감옥에 갇혔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초기에는 인질의 신분이었다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중도에 옥에 갇히게 됐던 것 같습니다. ‘머리를 들어 주었고’는 원래 왕을 알현할 때의 의례적인 행위와 관련된 표현으로, 여기서는 ‘사면하다’를 의미합니다. 에월므로닥은 여호야긴을 남달리 대우해줍니다(32). ‘그에게 친절히 말하고’는 문자적으로는 ‘그에게 좋은 것들을 말하고’로 아마도 친절 이상의 좋은 관계를 시사해주는 것 같습니다. 현재의 문맥에서 이 표현은 9절의 ‘그가 그를 심문하니라 (판결하니라)’에 대비됩니다. 에월므로닥은 바벨론에 사로잡혀 온 다른 왕들의 자리보다 높은 곳에 여호야긴의 자리를 마련해줍니다. 감옥에서 풀려난 여호야긴은 죄수복을 벗고 평생 동안 언제나 바벨론 왕 앞에서 음식을 먹게 되었습니다(33; 참조. 삼하 9:7,10,13).
(2) 양식의 공급(34)
또 여호야긴은 바벨론 왕이 정해준 일정한 생계비를 ‘죽는 날까지 곧 종신토록’ 받았습니다(34). ‘그가 날마다 쓸 것’은 여호야긴과 그의 가족이 생활하는 데 필요한 물품을 가리킵니다. 여호야긴의 석방 기사는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의 역사가 멸망과 유배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시작과 소망이 있을 것을 어렴풋이나마 시사해줍니다. 예레미야는 24장에서 무화과 열매 두 광주리의 환상을 통해 하나님 백성의 남은 자들이 가나안이나 애굽이 아니라 바벨론의 제1차 유배민들 가운데 있을 것을 선포했습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유배의 암울한 시기를 살아가는 중에 들려온 여호야긴의 석방 소식은 적어도 유배민들에게는 유다 회복의 서곡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상황 속에서 자신의 백성을 회복시키시며, 그분의 약속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성전의 파괴와 예루살렘의 멸망 속에서도 여호야긴의 회복을 통해 희망의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여호야긴의 회복은 어려운 시기에도 희망과 회복의 길을 열어 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며,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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