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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39-01)


말씀을 멸시한 유다의 멸망

예레미야 39장 1-18절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했는데, 말씀 앞에서 더욱 그렀습니다. 설마 그런 불길한 말씀이 이루어질까? 그런 재앙이 임할까? 말씀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모두 ‘설마’거리지만, 말씀을 멸시한 대가는 두렵고도 혹독합니다. 지혜로운 자는 설마라는 말로 결코 말씀을 멸시하지 않습니다.

 

  • 아무 성과 없이 끝난 시드기야 왕과의 마지막 만남 직후, 시드기야 왕 제 11년 4월 9일에 예루살렘 성이 바벨론 군대에 의해 함락됩니다. 요시야 왕 13년부터 선포한 예레미야의 예언이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성취됩니다.

 

예루살렘의 함락(1-10)

오리라고 경고했던 날이 왔습니다. 하나님의 예언은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에게 최후의 날이 임했습니다. 아모스 시대부터 선지자들이 줄곧 경고한 바로 그 ‘여호와의 날’이 임하였습니다. 이제 거짓 선지자들의 거짓 예언은 틀렸고, 예레미야 선지자가 옳았음을 증명하게 되었습니다.

 

1유다의 시드기야 왕의 제구년 열째 달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과 그의 모든 군대가 와서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치더니 2시드기야의 제십일년 넷째 달 아홉째 날에 성이 함락되니라 예루살렘이 함락되매 3바벨론의 왕의 모든 고관이 나타나 중문에 앉으니 곧 네르갈사레셀과 삼갈네부와 내시장 살스김이니 네르갈사레셀은 궁중 장관이며 바벨론의 왕의 나머지 고관들도 있더라 4유다의 시드기야 왕과 모든 군사가 그들을 보고 도망하되 밤에 왕의 동산 길을 따라 두 담 샛문을 통하여 성읍을 벗어나서 아라바로 갔더니 5갈대아인의 군대가 그들을 따라 여리고 평원에서 시드기야에게 미쳐 그를 잡아서 데리고 하맛 땅 리블라에 있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로 올라가매 왕이 그를 심문하였더라 6바벨론의 왕이 리블라에서 시드기야의 눈 앞에서 그의 아들들을 죽였고 왕이 또 유다의 모든 귀족을 죽였으며 7왕이 또 시드기야의 눈을 빼게 하고 바벨론으로 옮기려고 사슬로 결박하였더라 8갈대아인들이 왕궁과 백성의 집을 불사르며 예루살렘 성벽을 헐었고 9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성중에 남아 있는 백성과 자기에게 항복한 자와 그 외의 남은 백성을 잡아 바벨론으로 옮겼으며 10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아무 소유가 없는 빈민을 유다 땅에 남겨 두고 그 날에 포도원과 밭을 그들에게 주었더라(1-10)

 

시드기야 왕 제 9년 10달에 느부갓네살에 의해 포위된 예루살렘은 마침내 제십일년 넷째 달 아홉째 날에 성벽이 뚫리고 점령당합니다(1-2). 18개월의 포위로 양식이 떨어진(참조. 38:9) 예루살렘은 기근으로 전투력을 상실하고, 성벽을 파괴하는 바벨론 군대를 막지 못합니다(52:6). 52:12-13에 의하면 다섯째 달 열째 날에 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들어와 성전과 왕궁과 모든 집을 불사릅니다. 유다 왕 시드기야는 야음을 틈타 ‘왕의 동산 길’을 따라 성벽 사이의 통로를 지나 도성 밖으로 탈출하여 아라바 쪽으로 피신합니다(4). 바벨론의 공격이 집중된 북쪽을 피해 남쪽으로 성을 빠져나갑니다. ‘아라바’는 원래 갈릴리 호수 남단에서 아카바 만 북쪽 끝에 위치한 엘랏까지 이어지는 요단 분지의 스텝 지역을 지칭하는 이름인데, 여기서는 여리고 평지를 가리킵니다. 그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합니다. 시드기야는 갈대아 군대의 추적 끝에 여리고 평지에서 사로잡혀 하맛 땅 립나(리블라)에 있는 느부갓네살의 사령부로 끌려갑니다(5). 느부갓네살은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그의 아들들을 죽인 후에(6) 그의 두 눈을 뽑고 사슬로 묶어 바벨론으로 끌고 갑니다(7).

성을 점령한 갈대아인들은 왕궁과 백성의 집에 불을 지르고 성벽을 허물어버립니다(8). 성에 다시 사람들이 거주할 수 없게 완전히 파괴해버립니다. 특히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안전을 보장해주는 성벽의 파괴가 치명적입니다. 느헤미야에 의해 성벽이 재건되기까지 예루살렘 주민은 적의 위협에 노출된 채 살아야 했습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친위대장 느부사라단은 성에 남아있던 백성과 항복한 자들과 그 밖의 남은 백성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지만(9), 모든 사람이 사로잡혀 가지는 않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다의 지배 계층에 속한 자들과 사회적·경제적으로 독립된 시민들과 수공업자들이 주로 유배를 당하고,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으로 낮은 지위에 있던 자들은 대부분 폐허가 된 가나안에 그대로 남겨집니다.

느부사라단의 마지막 조치가 특히 주목할 만합니다. 느부사라단은 ‘포도원과 밭을 유다 땅에 남겨진 아무 소유가 없는 빈민들’에게 나눠줍니다(10). 이러한 토지의 재분배는 유다의 기존 질서를 뒤흔들 수 있는 혁명적 정책입니다. 농경 사회에 속하는 유다에서 법적으로 완전한 시민은 자기 땅에서 독자적으로 농사를 짓는 자들입니다. 주류에 속했던 자들이 사로잡혀 가서 생긴 빈 공간을 주변부에 속했던 빈민들이 차지합니다.

 

예레미야의 석방(11-14)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은 하나님의 경고를 업신여긴 이들에겐 죽음과 포로의 날이 되지만, 갖은 조롱과 죽음의 위기 속에서도 가감 없이 주의 말씀을 전파한 예레미야에게는 자유의 날이 되게 하셨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예레미야를 선대하고 그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11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예레미야에 대하여 사령관 느부사라단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12그를 데려다가 선대하고 해하지 말며 그가 네게 말하는 대로 행하라 13이에 사령관 느부사라단과 내시장 느부사스반과 궁중 장관 네르갈사레셀과 바벨론 왕의 모든 장관이 14사람을 보내어 예레미야를 감옥 뜰에서 데리고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넘겨서 그를 집으로 데려가게 하매 그가 백성 가운데에 사니라(11-14)

 

시드기야의 비극을 중심으로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고한 다음에 예레미야의 구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왕과 예언자의 운명이 완전히 엇갈립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그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시드기야는 도주에 실패하고 바벨론 군대에 사로잡혀 모진 고초를 당하고, 끝까지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하다가 유다 고관들에 의해 죽음의 문턱까지 떨어졌던 예레미야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석방되고 후대를 받습니다. 물론 예레미야의 석방은 (아직 남겨진 사명이 있어서 허락된) 일시적 구원입니다. 그 역시 유다 민족과 다윗 왕조의 멸망이라는 파국적 재앙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습니다. 40-44장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예레미야의 고난이 그가 선포한 심판 예언의 성취로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심판을 선포한 예레미야는 끝까지 유다 백성과 함께 멸망의 무거운 짐을 집니다.

예레미야의 활동을 알고 있었던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친위대장(‘사령관’) 느부사라단에게 예레미야를 석방해 환대하고 그의 요구를 다 들어줄 것을 명령합니다(11-12). 예루살렘을 점령한 느부사라단은 느부갓네살 왕의 지시에 따라 사람들을 보내 시위대 뜰에서 예레미야를 데려다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맡겨 집으로 돌려보냅니다(13-14a). 시위대 뜰에 머물던 예레미야가 석방돼서는 백성 가운데 머뭅니다(14b). 예레미야가 물러나 있지 않고 두려움과 절망감에 사로잡힌 사람들과 함께합니다. 그다랴가 예레미야를 데리고 간 ‘그 집’이 누구의 집인지는 불분명합니다. 예레미야의 집도 가능하지만, 그다랴에게 맡겨 데려가게 했음은 그다라와 관련된 집임을 시사해줍니다. 40:5에 따르면 그다라는 바벨론 왕이 유다의 총독으로 세운 인물입니다. 그다랴는 예레미야를 새 행정부가 들어선 집으로 데려간 것 같습니다. 그다랴의 아버지 아히감은 예루살렘의 고위 관료로, 여호야김의 위협으로부터 예레미야의 생명을 보호해주었습니다(26:24).

온 나라가 무너진 것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왕궁과 백성의 집이며, 예루살렘 성벽 전체가 허물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찬란했던 나라와 성읍이 일시에 무너집니다. 말씀을 멸시한 대가가 얼마나 심한 대가인지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우리 시대에도 동일하지 않도록 기도할 뿐입니다.

 

에벳멜렉의 구원(15-18)

성도의 용기는 개인적 이익을 넘어 하나님의 정의와 뜻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위험을 감수하며 하나님의 뜻을 우선시하면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신실한 믿음과 용기를 보시고 안전과 보호를 약속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지키는 자들에게 신실하게 응답하신다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우리가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용기를 가질 때,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고 구원하실 것입니다.

 

15예레미야가 감옥 뜰에 갇혔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16너는 가서 구스인 에벳멜렉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이 성에 재난을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 한 나의 말이 그 날에 네 눈 앞에 이루리라 17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 날에 너를 구원하리니 네가 그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지 아니하리라 18내가 반드시 너를 구원할 것인즉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네가 노략물 같이 네 목숨을 얻을 것이니 이는 네가 나를 믿었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시더라(15-18)

 

시위대 뜰에 구금된 예레미야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명령으로 석방된 이야기 다음에 갑자기 구스인 에벳멜렉의 구원을 약속해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루살렘이 함락당하기 이전의 시점으로 돌아갑니다.

15절에 따르면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혀있을 때,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합니다. 38:7-13에 따르면 ‘왕의 아들 말기야의 구덩이’에 던져져 생사의 갈림길에 있던 예레미야가 ‘왕궁 내시 구스인 에벳멜렉’의 적극적 개입으로 구출돼 시위대 뜰로 옮겨집니다. 내용상으로나 시간상으로나 여기보다는 38:7-13 다음에 위치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에벳멜렉에게 주는 구원 약속이 의도적으로 예레미야의 석방 기사 다음에 놓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서에는 에벳멜렉의 구원 약속만 나오고 약속에 따라 그가 구원을 받았다는 이야기나 언급은 없습니다. 구원 약속의 성취를 (간접적으뢰 보여주기 위해 예레미야의 석방 기사 다음에 놓입니다. 예레미야에게 나타난 약속의 성취가 에벳멜렉에게 약속으로 주어진 구원의 성취를 보장해줍니다.

예레미야가 구스인 에벳멜렉의 도움으로 사지에서 벗어나 시위대 뜰에 머물고 있을 때(38:13) 여호와의 말씀이 내립니다. 말씀은 에벳멜렉에게 주는 구원의 약속입니다. 예레미야를 반역자로 처형하려는 고관들의 강압적 요청을 왕이 승인했기에 예레미야를 위해서 나선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특히 그 사람이 이방인이라면 죽음을 자초하는 행동입니다. 고관들의 불의에 맞서 여호와의 예언자를 살린 에벳멜렉의 헌신이 여호와에 의해 인정을 받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에벳멜렉에게 가서 당신께서 주시는 구원 약속을 전하게 하십니다. 약속에 앞서 예루살렘의 멸망의 날이 왔음을 알려줍니다. 에벳멜렉은 왕궁 내시였기에 바벨론 군대의 칼을 피하기는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예레미야에게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하리라’(1:8)는 약속을 주신 여호와께서 에벳멜렉에게도 약속을 주십니다. ‘내가 그 날에 너를 구원하리니 네가 그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지 아니하리라’(17). 시드기야 왕은 ‘바벨론의 왕의 손’에 넘겨지는데(37:17), 그의 시종인 에벳멜렉은 대적의 손에 넘겨지지 않습니다. ‘네가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유다의 고관들도 가능하지만, 성의 함락이라는 가까운 문맥을 고려하면 바벨론 군대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18a절은 내용상 17절의 반복으로, 구원 약속의 확실성을 강조합니다. 18b절은 여호와께서 에벳멜렉을 구원하시는 이유에 해당합니다. ‘이는 네가 나를 믿었음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사람이 복을 받듯이(17:7) 이방인 에벳멜렉이 복을 받습니다.


우리는 에벳멜렉의 신실한 믿음과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구원의 약속을 깊이 묵상하였습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신뢰하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신실함을 잃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시고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신뢰와 용기를 드리며, 그분의 구원의 약속을 확신하고 믿음의 길을 걸어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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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38-02)

 


중간에서 머뭇거리는 시드기야 왕

예레미야 38장 14-28절


 

시드기야는 나름 괜찮은 인생이었습니다. 나름 좋은 자질과 지혜를 가졌고, 어려운 시기지만 왕좌도 경험했으니, 나름 족적을 남긴 인생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아쉬운 것은, 진리 앞에 반응하는 용기가 부족했습니다. 시드기야의 면모를 살펴볼 때에, 그의 아쉬움이 우리에겐 없기를 바랍니다.

 

  • 시드기야 왕이 시위대 뜰에 구금된 예레미야를 성전 셋째 입구로 불러 만납니다. 왕이 예레미야에게 신탁을 묻자 예레미야는 왕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전해줍니다. 왕은 여호와의 예언자 예레미야를 신뢰하고 그에게 신탁을 묻지만, 그가 전해주는 신탁에 순종하지는 않습니다.

 

예레미야에게 묻는 시드기야(14-23)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목숨의 위협을 느끼면서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했습니다. 오늘 반드시 전해야할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용기 있게 실천합시다.

 

14시드기야 왕이 사람을 보내어 선지자 예레미야를 여호와의 성전 셋째 문으로 데려오게 하고 왕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내가 네게 한 가지 일을 물으리니 한 마디도 내게 숨기지 말라 15예레미야가 시드기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을 왕에게 아시게 하여도 왕이 결코 나를 죽이지 아니하시리이까 가령 내가 왕을 권한다 할지라도 왕이 듣지 아니하시리이다 16시드기야 왕이 비밀히 예레미야에게 맹세하여 이르되 우리에게 이 영혼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너를 죽이지도 아니하겠으며 네 생명을 찾는 그 사람들의 손에 넘기지도 아니하리라 하는지라 17예레미야가 시드기야에게 이르되 만군의 하나님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바벨론의 왕의 고관들에게 항복하면 네 생명이 살겠고 이 성이 불사름을 당하지 아니하겠고 너와 네 가족이 살려니와 18네가 만일 나가서 바벨론의 왕의 고관들에게 항복하지 아니하면 이 성이 갈대아인의 손에 넘어가리니 그들이 이 성을 불사를 것이며 너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19시드기야 왕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나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한 유다인을 두려워하노라 염려하건대 갈대아인이 나를 그들의 손에 넘기면 그들이 나를 조롱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20예레미야가 이르되 그 무리가 왕을 그들에게 넘기지 아니하리이다 원하옵나니 내가 왕에게 아뢴 바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하소서 그리하면 왕이 복을 받아 생명을 보전하시리이다 21그러나 만일 항복하기를 거절하시면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신 말씀대로 되리이다 22보라 곧 유다 왕궁에 남아 있는 모든 여자가 바벨론 왕의 고관들에게로 끌려갈 것이요 그 여자들은 네게 말하기를 네 친구들이 너를 꾀어 이기고 네 발이 진흙에 빠짐을 보고 물러갔도다 하리라 23네 아내들과 자녀는 갈대아인에게로 끌려가겠고 너는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바벨론 왕의 손에 잡히리라 또 네가 이 성읍으로 불사름을 당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14-23)

 

시드기야 왕은 예레미야에게 바빌론 침략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묻습니다. 예레미야는 바빌론에 항복하라고 충고하지만, 왕과 백성은 그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결국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예루살렘은 바빌론에 의해 함락되고, 시드기야는 포로로 잡혀갑니다.

 

⑴ 도입부 : 맹세하는 시드기야(14-16)

 

시드기야 왕과 예언자 예레미야의 마지막 만남입니다. ‘여호와의 성전 셋째 문’으로 불러 만납니다. 성전의 셋째 문은 왕이 사람들에게 노출되지 않고 성전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왕궁과 성전을 이어주는 문인 것 같습니다. 시드기야가 예레미야에게 강하게 ‘네게 한 가지 일을 물으리니 한 마디도 내게 숨기지 말라’(14)라고 묻습니다. 시드기야가 알기를 원하는 ‘한 가지 일’(참조, 사무엘하 3:13; 14:18)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습니다.

37:17에서는 예레미야에게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말씀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왕의 요청을 따르기 전에 예레미야는 먼저 두 가지를 분명히 합니다(15). 첫째는 자기 생명과 관련된 것입니다. ‘내가 이 일을 왕에게 아시게 하여도 왕이 결코 나를 죽이지 아니하시리이까?’ 예레미야의 의심과 두려움은 근거가 없지 않습니다. 고관들의 위협적 요청 때문이기는 하지만, 38:4-6에서 예레미야는 왕이 이들의 손에 자신을 넘겨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24절에서 시드기야는 예레미야가 자신과의 대화를 누설하면 죽게 되리라고 위협합니다. 두 번째는 예레미야가 이미 여러 번 경험한 시드기야의 우유부단한 성격과 관련된 것입니다. ‘가령 내가 왕을 권한다 할지라도 왕이 듣지 아니하시리이다.’ 예레미야는 시드기야 왕에게 말해봤자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⑵ 예레미야의 양자택일적 메시지(17-18)

 

예레미야는 시드기야에게 두 가지를 말했는데, 시드기야는 첫 번째에 관해서만 답변하고 두 번째의 ‘듣지 않음’에 관해서는 침묵합니다. 다시금 시드기야가 듣기는 듣지만 따르지는 않은 것을 시사해줍니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죽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의 목숨을 노리는 고관들의 손에도 넘기지 않을 것을 살아계신 여호와를 두고 ‘비밀히’ 맹세합니다(16). 은밀한 맹세는 신하들의 눈을 피하려는 시드기야의 염려를 시사해줍니다. 37:17에서도 시드기야는 왕궁에서 예레미야에게 ‘비밀히’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말씀이 있는지를 물어봅니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의 생명을 노리는 고관들을 ‘그 사람들’로 부릅니다. 자기 신하들에 대한 강한 불신감과 거리감을 보여줍니다. 38:9에서 에벳멜렉도 예레미야를 참소해 구덩이에 던져 넣은 고관들을 ‘저 사람들’로 부릅니다. ‘그 사람들’과 ‘저 사람들’은 같은 ‘하아나쉼 하엘레’의 번역입니다. 보통은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는데 시드기야는 여호와를 수식하는 관계문을 하나 덧붙입니다. ‘우리에게 영혼을 지으신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으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시드기야는 여호와를 생명을 주신 창조주로 고백합니다. ‘우리’는 좁게는 시드기야와 예레미야를 넓게는 모든 인간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생명을 주신 분임은 다른 한편으로는 누구도, 왕조차 생명을 빼앗을 수 없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시드기야는 생명을 주신 분이 여호와임을 고백하지만, 자신의 생명을 그분께 맡기지는 않습니다. 시드기야가 격식을 차려 엄숙하게 맹세하자 예레미야도 격식을 차려 응답합니다. ‘만군의 하나님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예레미야서에만 나오는 표현입니다(참조, 35:17: 44:7).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능력의 하나님 여호와의 권위에 의존해서 신탁을 전합니다. 1계의 신탁은 예레미야가 이미 여러 번 선포했던 메시지입니다(참조, 21:9; 38:2). 저항을 포기하고 자진해서 ‘바벨론 왕의 고관들’에게 항복하는 것만이 유일한 살길입니다. 항복이 가져오게 될 긍정적 결과로 세 가지가 언급됩니다. 왕의 생명이 살아남고 예루살렘 성도 불사름을 당하지 않고 왕의 집안도 살게 됩니다. 항복의 결과가 세 문장으로 표현된 것처럼 항복하지 아니했을 때의 결과가 세 문장으로 표현됩니다. 예루살렘 성이 갈대아인들의 손에 넘겨지고 그들은 성을 불사를 것이며, 왕은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18).

항복했을 때의 17절과 비교해보면 일부 변화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전자에서는 왕의 생명이 처음에 나오는데, 여기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이 첫머리에 나옵니다. 관심이 왕의 운명에서 예루살렘의 운명으로 옮겨집니다. 왕의 결정에 따라 예루살렘은 잿더미가 될 수도, 점령만 될 수도 있습니다.

 

⑶ 시드기야의 반응(19)

 

시드기야가 항복을 주저하는 이유가 그의 입을 통해 밝혀집니다. 시드기야는 먼저 항복한 유다 사람들에 의해 학대당할 것을 두려워합니다(19). 이들이 예레미야의 신탁(참조, 21:9; 38:2)에 따라 진영을 바꾼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유다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저항을 포기하고 바벨론에 항복했습니다. 이들의 입장에서 항복을 거절하는 또는 주저하는 시드기야는 유다를 회복 불능의 완전한 파멸로 몰아넣는 왕이었습니다.

 

⑷ 예레미야의 답변(20-23)

 

시드기야는 항복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조언을 받지 않을 것을 알지만, 그래도 예레미야는 포기하지 않고 한 번 더 왕에게 자신이 전한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할 것을 간절히 권면합니다(20). 왕이 항복할지라도 갈대아인들이 왕을 먼저 항복한 유다 사람들에게 넘기지 않을 것입니다. 왕의 생각과 달리 일이 잘 풀려서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드기야의 두려움은 예루살렘 왕궁에서 벌어졌던 주전파와 화친파 사이의 극심한 정쟁과 백성의 지지를 받지 못한 시드기야 왕권의 허약함을 반영하는 것 같습니다.

왕이 거절하는 경우와 관련해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이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여자들이 끌려가면서 부르는 노래는 형식상 애가이지만, 내용은 조롱의 노래입니다. ‘네 친구들’은 문자적으로는 ‘네 평화의 사람들’입니다(참조. 20:10). 동사 ‘빠지다’의 호팔은 단순 실수가 아니라 친구들의 꾐에 넘어가 진흙에 빠졌음을 보여줍니다(참조. 38:6). 시드기야를 죽음의 늪에 빠뜨린 자들은 그가 허우적거리자 등을 돌리고 떠납니다. ‘유다 왕궁에 남아 있는 여자’는 23절의 시드기야의 아내들과 구별되는, 여전히 왕궁에 남아 있는 여호야김이나 여호야긴에게 속했던 여자들을 가리킵니다.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의 고관들에게 ‘항복하기를’ 거절하기에(21) 왕궁에 남아 있는 여자들이 바벨론 왕의 고관들에게로 끌려갑니다. 23절은 18절을 받아 한 가지를 더 첨가합니다. 왕의 아내들과 자녀들도 포로로 끌려갑니다. 왕이 나가지 않기에 그의 아내들과 자녀들이 갈대인들에게 끌려갑니다.

날로 더해지는 박해 속에 목숨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전합니다. 국가적 위기에 직면하여 지혜로운 선택을 해야 했던 시드기야 왕은 예언자 예레미야를 은밀히 불러 하나님의 뜻을 묻습니다. 심한 절망에 빠진 왕의 갈등과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기위감에 절박한 심정으로 전합니다.

 

비밀 유지를 명하는 시드기야(24-27)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선택한 백성이고 구별한 도성이라도 살 길을 거부하면 반드시 심판하신 분입니다. 사람이 두려워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은 반드시 멸하십니다. 당신의 믿음은 하나님을 보면서 결단하는 신앙입니까?

 

24시드기야가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너는 이 말을 어느 사람에게도 알리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25만일 고관들이 내가 너와 말하였다 함을 듣고 와서 네게 말하기를 네가 왕에게 말씀한 것을 우리에게 전하라 우리에게 숨기지 말라 그리하면 우리가 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 또 왕이 네게 말씀한 것을 전하라 하거든 26그들에게 대답하되 내가 왕 앞에 간구하기를 나를 요나단의 집으로 되돌려 보내지 마소서 그리하여 거기서 죽지 않게 하옵소서 하였다 하라 하니라 27모든 고관이 예레미야에게 와서 물으매 그가 왕이 명령한 모든 말대로 대답하였으므로 일이 탄로되지 아니하였고 그들은 그와 더불어 말하기를 그쳤더라(24-27)

 

시드기야 왕의 요청에 따라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 동안 지속적으로 했던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드기야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바른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⑴ 왕의 지침(24-26)

 

예레미야의 말이 끝나자 시드기야가 그에게 위협적으로 비밀 유지를 당부합니다(24). 예레미야가 대화의 내용을 누설한다면 생명을 내놓아야 합니다. 예레미야가 전해준 이상/말씀에 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습니다.

시드기야의 침묵은 그가 예레미야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시사해줍니다. 같은 유대인들에게 당할 학대를 두려워한 시드기야는 여호와의 말씀보다 고관들의 움직임에 더 신경을 씁니다.

시드기야는 고관들이 예레미야를 찾아와서 자신과의 대화에 관해 캐물을 것을 알고 예레미야에게 이들에게 답변할 말을 가르쳐줍니다(25-26). 분명 고관들이 찾아와서 왕이 한 말뿐 아니라 예레미야가 한 말까지 왕과 나눈 모든 대화에 관해 물어볼 텐데, 그러면 요나단의 집으로 돌아가면 죽게 되니 그곳으로 보내지 말라달라고 왕에게 간청하였다(참조 37:20)고 그들에게 말하게 합니다.

 

⑵ 왕의 지침에 따른 예레미야(27)

 

왕은 예상대로 고관들이 모두 예레미야를 찾아와 묻지만, 예레미야는 왕이 명령한 대로 그들에게 말합니다. 예레미야가 달리 이야기하지도 않고, 대화에 관해 들은 바도 없기에 이들은 예레미야에게 묻는 일을 그만둡니다(27).

 

맺는 말(28)

어떤 성도가 부당하게 감옥에 갇혔지만, 진리를 전하는 사명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인내와 신실함에 감동한 사람들은 결국 그의 가르침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큰 재난을 겪은 후, 사람들은 회개하고 진리를 받아들여 그들은 변화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어려움 속에서도 진리를 지키고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는 것이 중요함을 보여줍니다.

 

28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날까지 감옥 뜰에 머물렀더라(28)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갇혀 있는 동안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죄로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그는 어떤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예언을 전했습니다. 이 절은 인간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계획이 반드시 이루어짐을 보여줍니다. 또한, 예레미야의 인내와 신실함은 우리에게 진리를 지키고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며 따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쳐줍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한 결과임을 상기시키며, 회개와 순종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귀한 면모를 많이 가졌지만, 아쉬움을 품은 인생이 많습니다. 말씀에 대한 관심도 좋고, 지혜도 좋지만, 우리의 삶을 결정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용기입니다. 진정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용기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대로 정성 다해 따르며 맡기신 하나님의 말씀을 용기 있게 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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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38-01)


고난과 구원을 경험한 예레미야

예레미야 38장 1-13절


우리는 모두 인생의 여정에서 다양한 형태의 고난과 도전에 직면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옳다고 믿는 일을 했을 때조차, 오히려 어려움과 반대에 부딪힐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순간에 우리는 흔들릴 수밖에 없고, 우리의 믿음은 시험에 들게 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 주위에서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있지만, 반대로 피해를 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종류의 사람입니까?

 

  • 예레미야가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자 고관들에 의해 반역자로 체포되었습니다. 예레미야를 왕의 아들 말기야의 우물 구덩이에 던져집니다. 물은 없고 진흙만 있는 구덩이에 빠졌기에 예레미야가 생존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도움의 손길이 완전히 끊어진 순간에 전혀 예기치 못했던 곳에서 도움이 옵니다.

 

구덩이에 갇힌 예레미야(1-6)

예루살렘 멸망을 예언한 것은 조국에 대한 반항이나 부정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조국을 사랑하고 조국이 살 길이 무엇인가를 예레미야는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다 민족에 운명을 쥐고 있는 하나님의 뜻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 내용을 변하지 않고 그대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조국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목숨을 걸고 조국에 충성된 사람이었습니다.

 

1맛단의 아들 스바댜와 바스훌의 아들 그다랴와 셀레먀의 아들 유갈과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이 예레미야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는 말을 들은즉 이르기를 2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 성에 머무는 자는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으리라 그러나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는 자는 살리니 그는 노략물을 얻음 같이 자기의 목숨을 건지리라 3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이 성이 반드시 바벨론의 왕의 군대의 손에 넘어가리니 그가 차지하리라 하셨다 하는지라 4이에 그 고관들이 왕께 아뢰되 이 사람이 백성의 평안을 구하지 아니하고 재난을 구하오니 청하건대 이 사람을 죽이소서 그가 이같이 말하여 이 성에 남은 군사의 손과 모든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나이다 5시드기야 왕이 이르되 보라 그가 너희 손 안에 있느니라 왕은 조금도 너희를 거스를 수 없느니라 하는지라 6그들이 예레미야를 끌어다가 감옥 뜰에 있는 왕의 아들 말기야의 구덩이에 던져 넣을 때에 예레미야를 줄로 달아내렸는데 그 구덩이에는 물이 없고 진창뿐이므로 예레미야가 진창 속에 빠졌더라(1-6)

 

시드기야 왕의 시위대 뜰 안에 갇혀있는 예레미야는 온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길을 계속하여 선포하고 예언했습니다. 본문에서도 예레미야는 동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명령대로 가감하지 않고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⑴ 고발의 근거(1-3)

 

예레미야가 체포되는 상황이 37:11-21과 달리 기술됩니다. ‘맛단의 아들 스바댜와 바스훌의 아들 그다랴와 셀레먀의 아들 유갈과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이 선지자 예레미야가 ‘모든 백성’에게 선포한 메시지의 내용을 문제 삼아 고발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유다 백성들에게 전하였습니다. 바벨론 군대에게 포위되었을 때,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벨론에 항복을 권고합니다. 계속적으로 유다가 저항하면, 전쟁과 기근과 염병으로 죽게 될 것이지만 항복하면 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보다 사람들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백성들은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심판하시는 가운데서도 그 백성의 살 길을 열어 두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면서도 그 가운데서 사랑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예레미야가 전했던 메시지의 핵심은 바벨론에 항복하는 자는 살겠고, 대항하는 자는 바벨론의 군대에 의해서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에레미야는 ‘이 성에 머무는 자는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으리라.’(2) 그리고 ‘이(예루살렘) 성이 반드시 바벨론의 왕의 군대의 손에 넘어가리니 그가 차지하리라’(3)고 멸망하겠다는 내용을 반복하여 전했습니다.

‘이 성’은 예루살렘 성입니다. 이 성은 하나님께서 계신 곳이며, 언약궤가 있는 곳이며,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이 성에 머무는 것을 사모하며 이 성에 머무는 것이 자랑과 큰 특권임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시편 15:1)라고 성전에 거하는 즐거움을 표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성은 이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여호와의 장막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성을 떠나셨으며, 오히려 이제는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키는 배반의 성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성이 반드시 바벨론의 왕에 의해 멸망하셨던 것을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32:12에서 예레미야는 ‘시위대 뜰에 앉아 있는 유다 모든 사람 앞에서’ 매매 증서를 바룩에게 주었습니다. 이들은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고발의 증거로 사용합니다. 2절은 21:9에 대한 인용입니다. 32:3을 인용하는 3절은 항복만이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이유를 보여줍니다. ‘이 성이 반드시 바벨론의 왕의 군대의 손에 넘어가리니 그가 차지하리라.’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의 점령은 여호와의 결정으로 어떤 경우에도 취소될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 성의 멸망이 확정됐기에 성을 떠

 

⑵ 말씀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4-6)

 

예레미야는 계속적으로 외쳤습니다. 이 말은 예루살렘에 평안이 아닌 재앙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몇몇 고위 관리들은 성 안에 남을 군인들과 백성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기는 이유로 예레미야를 죽여야 한다고 예레미야를 왕에게 고발합니다. 그들을 왕에게 나아갈 수 있는 ‘고관들’로 부릅니다. ‘셀레먀의 아들 유갈’은 37:3에서 시드기야에 의해 제사장 마아세야의 다들 스바냐와 함께, 마지막의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은 21:1에서 마찬가지로 제사장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와 함께,

예레미야의 이러한 예언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그 중에 예루살렘에 있는 고위 관리들은 예레미야를 죽이려 합니다. 그리고 왕은 그들의 고발을 허용하여 웅덩이에 집어넣습니다. 그 웅덩이는 물 대신에 진흙으로 채워진 웅덩이 속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사람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예레미야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한 사람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에렛멜렉이었습니다. 당신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한 제자답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까?

 

구스인 에벳멜렉을 통한 구출(7-13)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삶은 때때로 듣기 싫은 말이라 하더라도 그 말을 따라 사는 것을 뜻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따라 걷는 이가 바로 하나님의 사람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이방인 구스인 내시인 에벳멜렉을 통해 예레미야가 구출을 받습니다.

 

7왕궁 내시 구스인 에벳멜렉이 그들이 예레미야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음을 들으니라 그 때에 왕이 베냐민 문에 앉았더니 8에벳멜렉이 왕궁에서 나와 왕께 아뢰어 이르되 9내 주 왕이여 저 사람들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행한 모든 일은 악하니이다 성 중에 떡이 떨어졌거늘 그들이 그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으니 그가 거기에서 굶어 죽으리이다 하니 10왕이 구스 사람 에벳멜렉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는 여기서 삼십 명을 데리고 가서 선지자 예레미야가 죽기 전에 그를 구덩이에서 끌어내라 11에벳멜렉이 사람들을 데리고 왕궁 곳간 밑 방에 들어가서 거기에서 헝겊과 낡은 옷을 가져다가 그것을 구덩이에 있는 예레미야에게 밧줄로 내리며 12구스인 에벳멜렉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당신은 이 헝겊과 낡은 옷을 당신의 겨드랑이에 대고 줄을 그 아래에 대시오 예레미야가 그대로 하매 13그들이 줄로 예레미야를 구덩이에서 끌어낸지라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머무니라(7-13)

 

고관들이 왕을 강요해서 예레미야를 진흙 구덩이에 집어넣었기에 예레미야의 구출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왕과 고관들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진흙으로 덮인 깊은 구덩이에 던져져 마실 물도 먹을 양식도 없이 죽을 날만 기다리는 예레미야에게 관심을 가진 사람은 이방인이었습니다.

 

⑴ 왕을 찾아간 에벳멜렉(7-8)

 

뜻밖에도 궁전에 있던 구스인 내시 에벳멜렉이 예레미야가 고관들에 의해 구덩이에 넣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행동에 나섭니다. 왕이 왕궁 밖에 있었지만, 그는 왕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왕을 찾아 나섭니다(8). 왕궁의 실세인 고관들의 결정에 맞서는 에벳멜렉의 행동은 목숨을 담보로 한 극히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번역에는 잘 나타나지 않았지만, 7절은 1절과 동일하게 ‘그리고 그가 들었다’로 시작합니다. 스바댜도 듣고 행동에 나서고 에벳멜렉도 듣고 행동에 나섭니다. 예레미야가 모든 백성에게 이른 말을 들은 구스인 에벳멜렉은 왕에게 예레미야의 구출을 호소합니다. 왕이 어떤 이유나 목적에서 ‘베냐민 문’에 앉아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전통적으로 성문에서 재판이 열리기에 왕이 법적 문제에 관한 백성의 호소를 듣고 판결해주기 위해 성문에 앉았을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바벨론의 포위 공격을 받는 성의 방비를 직접 살펴보기 위해 베냐민 문으로 시찰 나갔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베냐민 문’은 문맥적으로도 주목할 만합니다. 37:12-14에서 예레미야는 베냐민 문을 지나가려다가 수문장 이리야에 의해 체포됐습니다. 예레미야가 체포된 바로 그 문에서 예레미야의 구출이 결정됩니다.

 

⑵ 에벳멜렉과 왕의 대화(9-10)

 

이방인 에벳멜렉이 왕도 거스를 수 없었던 고관들(5)에 홀로 맞섭니다(9). 그는 먼저 예언자 예레미야를 참소해 구덩이에 던져 넣은 고관들의 행위를 악으로 고발합니다. 이들이 한 일은 모두 악하다고 고발합니다. 뒤이어 그는 예레미야의 절망적 처지를 언급합니다. 이미 성 중에 떡이 다 떨어졌기에 구덩이에 던져진 예레미야는 거기서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고 호소합니다. 9절에서 에벳멜렉과 고관들의 대비를 읽을 수 있습니다. 왕에게 말할 때 4절의 고관들은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칭하지 않고 ‘이 사람’(이 자)으로 부르고, 에벳멜렉은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칭하고 고관들을 이 사람의 복수형 ‘저/이 사람들’로 부릅니다.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인정하지 않고 홀대하던 유다의 고관들이 이방인 왕궁 내시에 의해 홀대받습니다. 유다 백성에게서 버림을 받은 예레미야가 이방인에 의해 예언자로 인정받습니다. 37:20-21에서 예레미야의 간청에 긍정적으로 응답했던 시드기야는 에벳멜렉의 개입에도 적극적으로 반응합니다. 힘이 없다는 핑계로 예레미야를 고관들의 손에 넘겼던 왕이 여기서는 예레미야가 구덩이에서 죽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왕은 여기 있는 사람들 가운데 서른 명을 데리고 가서 예언자 예레미야가 죽기 전에 그를 구덩이에서 끌어내도록 에벳멜렉에게 명령합니다. 예레미야를 구덩이에서 끌어내는 일은 대여섯 명으로도 충분했겠지만, 왕은 고관들의 방해나 저항을 염두에 두고 서른 명을 데려가게 한 것 같습니다.

 

⑶ 예레미야를 구하는 에벳멜렉(11-13)

 

예레미야를 구출하는 장면을 비교적 자세하게 기술합니다. 왕의 명령을 받은 에벳멜렉은 신속하게 움직이면서 구출 계획도 세우고 그들로 실행합니다. 먼저 왕궁 창고로 가서 구출하는 데 필요한 물품을 마련해 예레미야에게로 갑니다. 고관들은 예레미야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지만(6,9), 에벳멜렉은 바닥의 진흙에 더러워지지 않게 ‘헝겊과 낡은 옷’을 줄에 묶어 예레미야에게 내려 보냅니다. 그는 구출 중에 예레미야가 다치거나 사고가 나지 않게 신중하게 일을 처리합니다. 겨드랑이와 줄 사이에 헝겊과 낡은 옷을 끼워 넣게 한 후 줄을 당겨 예레미야를 구덩이에서 끌어올립니다. 하나님께서는 도움의 근원이십니다. 목숨이 위태로웠던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에벳벨렉을 통한 도움의 손길을 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지자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데, 이방인 환관은 자신의 안전을 돌아보지 않고 예레미야의 구원을 요청합니다. 그는 예레미야를 죽이는 일은 악한 일이라고 굶어 죽게 하는 것은 못할 짓이라며 왕에게 간구합니다. 삶의 모든 상황 속에서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신뢰하고 기대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삶에도 예레미야와 같은 고난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는 예레미야의 이야기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상황 속에서 일하고 계시며, 우리를 향한 그분의 계획은 언제나 선합니다. 이제 우리는 예레미야의 믿음과 순종을 본받아,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길 다짐해야겠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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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37-02)


예레미야와 시드기야 왕의 만남

예레미야 37장 11-21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들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고난의 십자가를 만날 수 있습니다. 특히 사명을 감당하다보면, 고난이 있습니다. 이 시대는 겉으로는 고난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서 진실한 삶을 살려고 하면 더 큰 고난을 당하기 쉬운 시대입니다. 고난의 십자가가 괴롭긴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로서 십자가를 감당하고 살아나가야 합니다. 그러한 고난의 십자가를 이겨내면 영광이 찾아옵니다.

 

  • 예루살렘을 포위했던 바벨론 군대는 애굽 군대가 예루살렘으로 진군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애굽 쪽으로 내려갔습니다. 바벨론 군의 철수가 이루어진 때에 선지자 예레미야는 고향 베냐민 땅으로 갑니다. 가던 중에 예루살렘 문에서 바벨론에게 항복하려 간다는 누명으로 체포당하고 감옥에 갇혀 고초를 당합니다. 그러나 시드기야 왕 앞에서는 또 당당히 바벨론에게 멸망당할 것을 선포합니다.

 

누명을 쓰고 옥에 간 예레미야(11-15)

진정하는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대변하는 자일뿐, 자신의 뜻을 신에게 관철시키는 자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자신의 뜻대로 기도하거나 설교해 주거나 그리고 교회 운영하지 않는 목회자를 인간적인 권력으로 거절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른 목회자는 그런 형태에서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11갈대아인의 군대가 바로의 군대를 두려워하여 예루살렘에서 떠나매 12예레미야가 베냐민 땅에서 백성 가운데 분깃을 받으려고 예루살렘을 떠나 그리로 가려 하여 13베냐민 문에 이른즉 하나냐의 손자요 셀레먀의 아들인 이리야라 이름하는 문지기의 우두머리가 선지자 예레미야를 붙잡아 이르되 네가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려 하는도다 14예레미야가 이르되 거짓이다 나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려 하지 아니하노라 이리야가 듣지 아니하고 예레미야를 잡아 고관들에게로 끌어 가매 15고관들이 노여워하여 예레미야를 때려서 서기관 요나단의 집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 집을 옥으로 삼았음이더라(11-15)

 

시드기야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찾아가서 중보기도를 요청했습니다. 그는 마치 영매를 찾아가서 신이 원하는 대로 빌어주면, 신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해준다고 믿는 사람과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예레미야가 시드기야 왕이 원하는 대로 해 줄리 없습니다. 반대로 이런 선지자를 시드기야 왕이 좋아할 리 없습니다. 자기 뜻을 거절한 선지자에게 왕이 어떻게 하는지, 본문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⑴ 성을 떠나는 예레미야(11-12)

 

이 단락은 예레미야가 어떻게 옥에 갇히게 됐는지를 보고합니다. 시기적으로 예레미야가 시드기야에게 그의 사절을 통해 여호와의 메시지를 전달한 직후가 됩니다. 바로의 군대가 궁지에 몰린 시드기야를 도와주려 애굽에서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갈대아인의 군대가 예루살렘 포위를 풀고 일시적으로 철수했습니다(11). 예루살렘의 성 밖 출입이 다시 가능해졌습니다. 그 시기에 예레미야는 자신의 고향 베냐민에서 분깃 상속 재산을 받으려고 고향집에 다녀오기 위해 나섭니다(12). 상속 재산과 관련한 이야기는 32:7-12에도 나옵니다.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예레미야는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32:2), 조카 하나멜이 예레미야를 찾아와서 고멜의 권리를 행사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아마도 두 개의 이야기는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관련된 하나의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⑵ 체포되는 예레미야(13-14)

 

고향으로 내려가려고 성을 떠나던 예레미야가 ‘베냐민 문’에 이르렀을 때, 수문장 셀레먀의 아들 이리야는 예레미야가 ‘네가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려 하는도다’는 오해를 받습니다(13; 참고 21:9; 38:2).

수문장 이리야 입장에서는 예레미야를 잘못 이해했던 것은, 지금까지 40년 동안 예레미야가 예언했던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항복하면 산다는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22:8-9에서 예레미야는 항복이 생명의 길임을 대놓고 주장했습니다. 바로 앞에 나오는 37:9-10에서도 예루살렘이 반드시 갈대아인들의 군대에 의해 불꽃의 먹이가 될 것을 선포 했습니다. 실제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바벨론에 항복해 망명을 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바벨론 군대에 맞서 성문을 지키는 이리야의 눈에는 예레미야는 제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도망하는 탈주병처럼 보였습니다. ‘베냐민 문’은 예루살렘 북쪽 베냐민 지역으로 나가는 성문 이름입니다. ‘문지기의 우두머리’는 특히 전시에는 중요한 직책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수문장 이리야에게 단호하게 ‘거짓이다 나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려 하지 아니하노라’라고 항변하지만, 이리야에게 체포당하고 고관들에게 데리고 가리고 갑니다(14). 그는 요나단의 집 지하 감옥에 투옥되어져 버립니다.

 

⑶ 구금되는 예레미야(15)

 

바벨론 근대가 예루살렘에서 일시적으로 떠난 후 예루살렘 출입이 자유로워졌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성을 빠져 나가려고 하는 이유가, 예레미야가 지금까지 예언한 내용들이 거짓이었기 때문에, 바벨론에 도망가려고 하지 않는가라고 오해를 했던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를 매국노라고 생각해서 고관들에게 끌고 갑니다. 고관들은 예레미야를 보자 노여워하고 때리고 감옥에 가두게 됩니다(15). 여호와김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26장에서는 고관들이 재판관의 입장에서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에 희해 고발당한 예레미야에게 무죄를 선언해주었는데, 여기서는 분노한 고관들이 재판 절차도 무시하고 예레미야를 때리고 옥에 가둬버립니다. 법 집행의 책임을 맡고 고관들이 집단적으로 불법을 저지릅니다.

36장에서는 일부 고관들이 위기에 처한 예레야를 도와주었는데(36:19,25), 이제는 고관들 가운데 예레미야를 돕는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서기관 요나단의 집’을 감옥으로 만들었다는 말은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전시 상황과 관련된 임시 조치였던 것 같은데, 어떤 배경이나 이유에서 서기관의 집이 그런 용도로 선택됐는지는 불분명한비다. 예레미야가 갇힌 감옥은 아마다 저수조로 사용했던, 지하에 판 천장이 둥근 구덩이였던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는 빛과 공기가 거의 차단된 어둡고 습한 지하 토굴에 버려집니다. 예레미야의 목숨이 이제대적의 손에 거의 넘겨집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포기하지 말고 담대하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고 해서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오해를 받아 어둡고 캄캄한 지하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말씀 때문에 고난을 각오해야 합니다. 이러한 고난이 찾아올 때, 감사함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시드기야와의 예레미야와의 만남(16-21)

자신의 아집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잡혀야 합니다. 타인의 충고가 쓴 말이라도 그것이 당신을 위하는 것이고 당신을 살리는 말이라면 그것을 귀담아 듣고 자신을 돌아보는 그런 지혜가 필요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시드기야 왕과의 만남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그대로 전하였습니다.

 

16예레미야가 뚜껑 씌운 웅덩이에 들어간 지 여러 날 만에 17시드기야 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이끌어내고 왕궁에서 그에게 비밀히 물어 이르되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말씀이 있느냐 예레미야가 대답하되 있나이다 또 이르되 왕이 바벨론의 왕의 손에 넘겨지리이다 18예레미야가 다시 시드기야 왕에게 이르되 내가 왕에게나 왕의 신하에게나 이 백성에게 무슨 죄를 범하였기에 나를 옥에 가두었나이까 19바벨론의 왕이 와서 왕과 이 땅을 치지 아니하리라고 예언한 왕의 선지자들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20내 주 왕이여 이제 청하건대 내게 들으시며 나의 탄원을 받으사 나를 서기관 요나단의 집으로 돌려보내지 마옵소서 내가 거기에서 죽을까 두려워하나이다 21이에 시드기야 왕이 명령하여 예레미야를 감옥 뜰에 두고 떡 만드는 자의 거리에서 매일 떡 한 개씩 그에게 주게 하매 성중에 떡이 떨어질 때까지 이르니라 예레미야가 감옥 뜰에 머무니라(16-21)

 

예레미야가 들어간 감옥은 아주 열약한 지하 토굴에 감금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여러 날’(많은 날들)이 지나 시드기야 왕이 신하들을 보내어 지하 감옥에 갇혀 있던 예레미야를 급히 찾아 사람들 은밀하게 왕궁으로 불러 드립니다.

 

⑴ 시드기야의 질문과 답변(17)

 

혹시 하나님께로부터 새롭게 받은 말씀이 있는지 조용하게 물어봅니다. 옥에 갇힌 예레미야를 왕궁으로 불러 개인적으로 묻는 것을 보면, 시드기야와 예루살렘의 상황이 절망적으로 더 악화된 것 같습니다. 왕은 예레미야와의 만남이 신하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합니다. 시드기야의 왕권이 매우 허약했음을 시사해 줍니다.

시드기야 왕의 기대는 지금까지는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에워싼 좋지 않는 상황 때문에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했지만,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떠난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회복되어지는 않을까하는 소식과, 그리고 자신의 왕의 자리가 계속 보존되어 지는 소식을 듣고 싶습니다. 시드기야 왕은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말씀이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왕의 질문에 예레미야는 먼저 ‘있나이다’라고 답변하고, 뒤이어 말씀의 내용을 알려줍니다(17).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시드기야에게 ‘왕이 바벨론의 왕의 손에 넘겨지리이다’(참조 32:4; 34:3)라는 신탁이 주어지지만, 시드기야가 거기에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달리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⑵ 예레미야의 질문(18-19)

 

예레미야는 시드기야 왕과 개인적으로 만나는 기회를 이용해서 서로 요구하는 질문이라기보다는 비난이나 책망이 담긴 질문입니다. 첫째 질문은 자신의 무죄 주장과 담긴 질문입니다. ‘내가 왕에게나 왕의 신하에게나 이 백성에게 무슨 죄를 범하였기에 나를 옥에 가두었나이까?’(18) 예레미야는 왕뿐만 아니라 왕의 신하들과 유다 백성 누구에게도 잘못을 범하지 않았다고 자신의 무죄를 주장합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을 옥에 가두기로 한 고관들의 결정에 왕도 연루됐음을 분명하게 주장합니다. 고대 근동에서처럼 이스라엘에서도 왕은 최고 재판관이었습니다. 왕이 모르는 신하들만의 결정이라면 왕은 이를 바로잡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예레미야와 경쟁 관계에 있었던 구원예언자들을 향합니다. ‘바벨론의 왕이 와서 왕과 이 땅을 치지 아니하리라고 예언한 왕의 선지자들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19) 누가 참 예언자이고 누가 거짓 예언자인지 확실해졌는데, 역설적이게도 참 예언자는 옥에 같혔고, 거짓 예언자들은 조용히 숨어버렸습니다. 최고 재판관인 왕은 누가 왕과 와의 신하와 백성에게 잘못을 범했는지를 바르게 판결해주어야 합니다. ‘어디’는 한편으로는 예상과 전혀 다른 상황에 직면해 입을 다문 구원예언자들의 기회주의적 침묵을 고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백성을 오도해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린 구원예언자들이야말로 옥에 넣어야 할 자들임을 보여줍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진실하고 솔직해야 합니다. 비록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처지였지만, 예레미야는 감옥에서 풀려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시드기야 왕의 기분을 맞춰 주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려운 상황일수록 더욱 진실하게 말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⑶ 예레미야의 탄원(20-21)

 

질문을 마친 예레미야는 마지막으로 왕에게 한 가지 억울함을 간청합니다. ‘내 주 왕이여 이제 청하건대 내게 들으시며 나의 탄원을 받으사 나를 서기관 요나단의 집으로 돌려보내지 마옵소서’(20) 앞에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한 예레미야는 석방을 요청하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요나단의 집에 있는 기하 토굴로 돌려보내지만 말아달라고 간청합니다. 아마도 예레미야는 왕이 신하들의 손아귀에서 자신을 구출해주기에는 능력이나 용기가 없음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의 간청에 시드기야가 긍정적으로 반응합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드기야 왕이 예레미야의 말을 듣습니다. 그는 예레미야를 시위대 뜰에 머물게 하고, 성에 떡이 모두 동날 때까지 ‘떡 만드는 자의 거리’에서 날마다 떡을 가져다주게 합니다(21). 고립무원의 예레미야가 왕의 도움을 받아 죽음의 위기를 넘긴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여호와의 의지를 대변하는 예언자로 인정하고 그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묻지만, 전해준 말씀에 순종해 결단을 내릴 만한 용기는 없었습니다. 38:9과 52:6에 따르면 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성 중에 떡이 완전히 동난 것 같습니다. 시위대 뜰로 옮겨진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날까지 거기에 있다가(38:28),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 바벨론 점령군에 의해 해방됩니다(39:14).

우리에게 교훈한 것은 우리들은 너무 많은 경우 자신의 번영이나 소유와 같은 것에만 관심 있고 집착합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부합되는 아첨의 말들이 독이 되는 것을 모르고 그것을 즐기고 그곳에 중독되어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안타까운 인생들을 많이 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가 뜻하지 않은 고난이 찾아와도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고난 때문에 정당히 거짓된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 때에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 때문에 당한 고난이라는 감사함으로 잘 감당하고, 복음 때문에 고난당하는 지체를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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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37-01)


시드기야의 선택: 순종과 불순종의 갈림길

예레미야 37장 1-10절


 

종종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기도 부탁해 온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웃으면서 기도의 제목을 받습니다. 기도의 부탁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기도는 합니다만, 마음은 영 꺼림직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 기도의 제목이 응답될 없을 것입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할 때, 먼저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기도하고, 하나님의 합당한 방법대로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 본문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데 기도해 달라고 한 사람과 같은 사람이 나옵니다.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았던 시드기야 왕이 사람을 보내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예루살렘은 바벨론에 의해 함락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도입부(1-2)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축복의 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믿음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되새깁니다.

 

1요시야의 아들 시드기야가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으니 이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그를 유다 땅의 왕으로 삼음이었더라 2그와 그의 신하와 그의 땅 백성이 여호와께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을 듣지 아니하니라(1-2)

 

본문에서는 시드기야가 여호야김의 아들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유다의 왕이 되었으나, 그와 그의 신하들과 백성들이 예레미야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시대가 바뀌어서 남유다의 멸망의 날이 더 다가왔습니다. 역대적으로 기록해 나간다면, 예레미야 37-38장은 유다가 멸망하기 직전에 예레미야에게 일어난 사건들을, 39장은 멸망의 날을 보고합니다. 시드기야 왕의 마지막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37-39장이 연대기적으로 약 17-18전 이야기를 다룹니다. 그러므로 37장은 34장 뒤에 나온 것이 가장 잘 어울립니다.

이 시기에 있던 사건은 바벨론 부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여호와께 계약을 맺고 종들을 자유롭게 놓아 주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사람들이 애굽 군대가 개입한 결과로, 잠시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 성의 포위를 풀자, 예루살렘 사람들이 해방시켰던 종들을 다시 잡아서 종으로 부렸습니다(34장). 여호와께서 이러한 불순종을 보시고, 다시 바벨론 군대를 오도록 하셔서 성을 빼앗아 불사르는 장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37장). 이 장면 다음에 나오는 것이 예레미야 37장의 내용입니다.

예레미야 저자의 의도는 시간적 차이를 무시하고 36장을 시대적 배경으로 37-39장을 읽도록 한 것입니다. 어떤 두려움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두루마리를 불에 태워버리는 여호야김 왕의 오만에 대해서 여호와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37-39장에 수집된 이야기들은 여호야김에 의해 확정된 심판의 구체적 집행 과정입니다.

 

⑴ 느부갓네살의 봉신 시드기야(1)

 

본 1-2절은 예레미야 37:1-10절을 넘어 예루살렘의 함락과 시드기야의 체포를 보고하는 39장까지의 도입부 역항을 담당합니다. 먼저 시드기야 왕권의 출발에 관한 기술합니다.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여호야긴)의 뒤로 요시야의 아들 시드기야의 아들 시드기야가 이었는데, 그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유다 땅의 왕으로 앉혀졌습니다(1).

바벨론 연대기에 의하면 주전 598년 겨울 서쪽으로 원정을 떠난 느부갓네살은 597년 3월에 예루살렘을 점령합니다. 그는 유다 왕 여호야긴(고니야)을 포로로 잡아가고 삼촌 맛다니야를 보좌에 앉히고 이름을 시드기야로 바꿉니다(열왕기하 24:17). 시드기야의 왕권은 처음부터 종속적이었습니다. 시드기야의 배반은 봉신조약의 파기이며 그를 유다의 왕으로 임명한 느부갓네살의 개인적 권위에도 큰 상처를 준 사건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시드기야의 배반을 철저하게 보복합니다. 느부갓네살의 예루살렘 침공은 다른 한편으로는 유다의 불순종을 징계하는 신학적 사건이었습니다.

 

⑵ 예레미야의 선포를 듣지 않는 자들(2)

 

시드기야와 신하들과 땅의 백성은 여호와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전하신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2). 총체적 불순종입니다. 왕을 포함한 예루살렘의 정치 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백성도 예레미야의 선포를 무시했습니다.

 

예레미야에게 신탁을 구하는 시드기야(3-5)

종종 환경에 따라 기분이 좌우될 때가 있습니다. 잠시 환경이 희망적일 때는 좋았다가, 희망이 없어볼 때는 힘들어하는 성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환경을 지배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지, 환경에 지배받는 성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3시드기야 왕이 셀레먀의 아들 여후갈과 마아세야의 아들 제사장 스바냐를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보내 청하되 너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라 하였으니 4그 때에 예레미야가 갇히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 가운데 출입하는 중이었더라 5 바로의 군대가 애굽에서 나오매 예루살렘을 에워쌌던 갈대아인이 그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에서 떠났더라(3-5)

 

하나님께서는 시드기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루살렘 살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또 한 번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벨론 군대를 일시로 예루살렘에서 철수시킵니다.

 

⑴ 사절을 보내는 시드기야(3)

 

21:1에서처럼 시드기야 왕은 두 사람을 예레미야에게 사절로 보내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라고 부탁합니다(3). 중보 기도는 예언자의 역할에 속하기에 시드기야의 기도 요청은 그 자체로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참조, 이사야 37:4; 7). 21장에서는 과거의 구속사에 소망을 두었다면(‘여호와께서 혹시 그의 모든 기적으로 우리를 도와 행하신다면 그가 우리를 떠나리라’) 여기서는 유다 백성과 여호와의 개인적 관계에 의지합니다. 예레미야를 통해 전한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서도(2) 여호와를 ‘우리 하나님’으로 부릅니다. 극단적 위기에 처해 도움이 필요할 때만 여호와를 찾습니다(참조, 2:27). 여호와를 일방적으로 유다 백성의 구원자로 이해합니다. 사절로 파견된 여후갈과 스바냐는 아마도 각각 예루살렘 정치와 종교를 대표해서 선발된 것 같습니다.

 

⑵ 예레미야의 개인적 상황(4)

 

셀레마의 아들 여후갈이 38:1에 나오는 ‘셀레먀의 아들 여후갈’과 동일 인물이라면, 여후갈은 예레미야에게 매우 적대적인 인물이고, 성전 관리의 책임을 맡은 마아세야의 아들 제사장 스바냐는 우호적인 인물입니다(참조 29:24-32). 시드기야가 예레미야에게 사절을 파견해 중보 기도를 부탁한 때에 관한 정보가 뒤늦게 나옵니다. 특이하게도 이중적으로 시점이 제시됩니다. 먼저 예레미야의 개인적 형편과 관련해 언급됩니다. ‘그때에 예레미야가 갇히지 아니 하였으므로 백성 가운데 출입하는 중이 었더라’(4). 예언자의 구금은 선포의 중단 또는 끝이기에, 예레미야의 예언자적 활동이 막바지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줍니다. 뒤따르는 11-16절에서 예레미야는 바벨론 진영으로 옮겨 가려 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됩니다.

 

⑶ 예루살렘의 정치적 형편(5)

 

다음으로는 예루살렘의 정치적 형편과 관련해 언급됩니다. 애굽 군대가 유다를 돕기 위해 원정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갈대아인들이 예루살렘 포위를 풀고 물러났을 때였습니다(34:21; 참조. 열왕기하 19:7; 이사야 37:7).

애굽의 개입은 시드기야가 애굽을 섬기기 위해 바벨론에 등을 돌렸음을 시사해줍니다. 주전 589-570년에 애굽을 통치한 바로 호브라(참조 44:30)는 포위된 예루살렘을 구출하기 위해 588년 초여름에 군대를 동원해 원정을 떠납니다. 애굽 군대를 막기 위해 느부갓네살은 일시적으로 예루살렘의 포위를 풉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애굽 원정군은 바벨론 군대에게 격퇴되고 예루살렘은 고립무원이 됩니다. 시드기야는 아마도 애굽의 출정에서 소망을 보고 사절을 예레미야에게 보냈던 것 같습니다.

 

여호와의 응답(6-10)

제도나 환경이 바뀐다고 사람의 마음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환경이 좋아지기 때문에 신앙이 더 좋아진 것은 아닙니다. 지금 마음을 바꾸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게 하고, 공동체를 하나 되게 하기 위해 헌신하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제도나 환경을 바뀐 문제는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6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7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를 보내어 내게 구하게 한 유다의 왕에게 아뢰라 너희를 도우려고 나왔던 바로의 군대는 자기 땅 애굽으로 돌아가겠고 8갈대아인이 다시 와서 이 성을 쳐서 빼앗아 불사르리라 9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스스로 속여 말하기를 갈대아인이 반드시 우리를 떠나리라 하지 말라 그들이 떠나지 아니하리라 10가령 너희가 너희를 치는 갈대아인의 온 군대를 쳐서 그 중에 부상자만 남긴다 할지라도 그들이 각기 장막에서 일어나 이 성을 불사르리라(6-10)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시드기야 왕에게 말씀하십니다. 유다가 요청한 애굽의 군대는 돌아갈 것이며,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다시 공격하여 점령하고 불태울 것입니다. 유다는 바벨론의 침략을 피할 수 없음을 경고받습니다. 심지어 부상당한 바벨론 군인들도 예루살렘을 불태울 것이라는 예언이 주어집니다.

 

⑴ 말씀의 계시(6)

 

예레미야는 시드기야 왕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메시지를 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유다가 애굽의 군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애굽의 군대는 돌아갈 것이고 유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유다에게 바벨론의 침략을 피하려는 인간적인 방법이 성공하지 못할 것임을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유다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주변 강대국의 힘을 의지하려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의지하는 애굽이 그들을 구원하지 못할 것이라고 명확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⑵ 돌아올 바벨론 군대(7-8)

 

문맥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3)에 비교될 수 있습니다. 시드기야는 여호와를 ‘우리 하나님’으로 부르고, 여호와께서는 당신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소개하시고, 시드기야를 ‘유다의 왕’으로 부르십니다.

시드기야가 다스리는, 정치적 단위에 속하는 유다의 하나님이 아니라 신학적 의미로 각인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하십니다. 거리감은 ‘내게 구하게 한’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에게 중보기도를 부탁했는데, 여호와께서는 이를 신탁을 구한 것으로 간주하십니다. 2절과 함께 보면 중보를 요청한 시드기야의 불순종 때문이고, 예레미야서의 문맥에서는 심판이 최종적으로 확정됐기 때문이기도 합니다(참조 7:16; 11:14; 14:74). 시드기야가 피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답변으로 주어집니다. ‘너희를 도우려고 나왔던 바로의 군대는 자기 땅 애굽으로 돌아가겠고 갈대아인이 다시 와서 이 성을 쳐서 빼앗아 불사로리라’(7-8절), 바벨론 군대가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애굽 군대가 돌아갑니다. 포위를 풀고 떠났던 바벨론 군대가 반드시 다시 돌아와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불태워 버릴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내리기로 하신 심판은 어떤 경우에도 취소되지 않습니다.

 

⑶ 피할 수 없는 예루살렘의 멸망(9-10)

 

9절은 애굽 군대의 출정과 바벨론 군대의 철군이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해방의 기대감을 심어주었음을 보여줍니다(참조. 34:11). 예루살렘을 둘러싼 국제정치적·군사적 상황의 급변은 구원 예언자들의 선포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이들은 목소리를 높여 바벨론의 굴레로부터의 임박한 해방을 선포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일시적인 호전에 들떠 상황을 오도하지 말 것을 엄중하게 경고하십니다. 예루살렘이 바벨론의 공격에서 살아남을 길은 전혀 없습니다. 일시적으로 바벨론 군대에게 피해를 준다 해도 예루살렘은 반드시 점령당합니다. 바벨론 군대가 패하여 부상자들만 남는다 할지라도 이들이 진영에서 일어나 예루살렘 성을 잿더미로 만들 것입니다(10). 예레미야의 선포는 사람들의 막연히 들뜬 기대감과 소망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레미야가 체포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살아가면서 악한 마귀와 싸워 나가는 승리할 수 있는 무기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나가는 것입니다(엡 6:10-18). 말씀으로 깨어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 안에 순종하며 그리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관계가 바르게 형성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지 않으시는 데 스스로 속여 말하고 있는 것은 없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심판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백성들이 죄에서 떠나게 하시려고 책망하시고 심판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밖에 할 줄 모르는 하나님으로 착각하며, 심판하실 하나님을 무시하진 않습니까?


바벨론 군데는 다시 돌아오고 애굽 군대는 자기 땅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말씀에는 귀를 막으면서 세속적인 안녕을 구한다면 그것은 무엇이든 자기기만입니다. 예루살렘이 불타는 날 진실하지 못한 기도는 후회를 낳지만, 진실한 선포의 사역은 위로와 구원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심판자가 되시고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감사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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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36-02)


끝까지 패역한 이스라엘

예레미야 36장 20-32절


 

세상에는 수많은 책이 있지만 성경은 그것들과는 전적으로 다른 책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은 정확하고 틀림이 없으며 결코 사라지고 않고 다 이루어집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무엇입니까? 어둠을 드러내는 말씀, 욕망의 재조정하도록 요구하는 말씀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본문은 예레미야에 의해 전해지고 바룩에게 대서했던 재앙의 경고를 여호야김 왕이 듣습니다. 왕은 선포된 말씀을 듣고 기록된 두루마리의 성경을 찢어 불에 태워버리고 예레미야와 바룩을 잡으라고 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시 두루마리에 말씀을 기록하되 더 많이 기록하게 하십니다.

 

말씀을 불태우는 여호야김 왕(20-23)

이스라엘은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왕도 여호와의 권위 아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왕들은 여호와의 권위로부터 분리된 자기만의 독자적인 권위를 주장했습니다. 왕은 정치와 종교를 분리해서 여호와의 활동은 종교 영역에 한정 시켰습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종교와 정치를 분리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 안에서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삶의 영역에서 왕이시라고 주장했습니다.

 

20그들이 두루마리를 서기관 엘리사마의 방에 두고 뜰에 들어가 왕께 나아가서 이 모든 말을 왕의 귀에 아뢰니 21왕이 여후디를 보내어 두루마리를 가져오게 하매 여후디가 서기관 엘리사마의 방에서 가져다가 왕과 왕의 곁에 선 모든 고관의 귀에 낭독하니 22그 때는 아홉째 달이라 왕이 겨울 궁전에 앉았고 그 앞에는 불 피운 화로가 있더라 23여후디가 서너 쪽을 낭독하면 왕이 면도칼로 그것을 연하여 베어 화로 불에 던져서 두루마리를 모두 태웠더라(20-23)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바룩에게 두루마리를 기록하게 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모든 백성들과 고관들 그리고 왕에게 하나님의 의도대로 읽혀졌고, 이 말씀을 들음으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으로 나오기를 기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3).

 

⑴ 왕에게 보고(20)

 

본문의 여호야김은 바룩이 예레미야의 말이 적힌 두루마리를 낭독하는 갓을 들은 미가야가 서기관 방으로 들어가서 고관들에게 보고한 것처럼, 두루마리의 내용을 알게 된 고관들은 왕을 찾아가 보고합니다.

 

⑵ 두루마리의 낭독(21)

 

고관들이 여후디를 보내 바울이 두루마리를 가져와 낭독하게 한 것처럼 왕은 여후디를 보내 두루마리를 가져와서 낭독하게 합니다. 여호야김 왕과 고관들 앞에서 읽어졌지만, 그들의 반응은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과는 정반대로 다릅니다. 왕은 여후디에게 서기관 엘리사마의 방에 있던 두루마리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왕과 신하들 앞에서 그것을 읽게 합니다. 그들의 반응은 정반대였습니다.

 

⑶ 여호야김 왕의 반응(23)

 

두 이야기는 모두 낭독을 들은 자들의 반응으로 끝납니다. 하지만 두 이야기에서 반응은 다릅니다. 고관들은 듣고 놀라 서로 바로보고, 왕과 측근들은 듣고 놀라지 않습니다. 고관들은 바룩에게 예레미야와 함께 몸을 숨기도록 권면하고, 왕은 바룩과 예레미야를 잡아 오게 명령합니다.

이런 병행 구조는 유다의 멸망이 여호야김에 의해 되돌릴 수 없게 확정됐음을 보여줍니다. 유다의 파멸에서 구할 수 있는 기회가 여호야김에게 주어졌지만, 그는 이 기회를 잡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예언자가 대변하는 여호와의 권위마자 짓밟아버렸습니다. 여호야김 왕의 아버지는 요시야 왕입니다. 요시야 왕은 성전을 청소하다가 두루마리 성경을 발견하고, 그것을 읽어가면서 자기 옷을 찢으면서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습니다(열왕기하 22장). 하지만 그의 아들인 여호야김은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무시하였습니다.

고관들로부터 보고를 받은 왕은 여후디를 보내 두루마리를 가져와서 읽게 합니다(20-21). 요약해서 보고를 받지 않고 낭독하게 합니다. ‘∼의 귀에 낭독하다’가 모두 열 번 사용되면서 듣는 자들의 반응을 연결해줍니다. 서기관들의 귀만 긍정적으로 반응하고, 백성과 여호야김과 그의 측근 신하들의 귀는 부정적으로 반응합니다.

하지만 여호야김 왕은 자기 아버지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신하 여후디가 두루마리를 서너 단씩 읽어 내려갈 때마다 왕은 칼로 그 두루마리를 잘라서 화롯불에 모두 태워 버렸습니다. 심판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불살라 버렸습니다. 마치 시기적으로 아홉째 달이어서 화롯불이 타고 있는 겨울궁전에 머물고 있던 왕은, 여후디가 서너 단을 낭독하면 서기관의 칼로 그것 을 베어 화롯불에 던져 두루마리를 모두 태워버립니다(22-23). 예레미야와 바룩의 수고가 값비싼 양피지가 무엇보다도 여호와의 말씀이 재로 사라집니다. 여호야김은 여호와의 심판 의지를 제거하는 데 성공하는 듯 보입니다.

아홉째 달(9)은 대략 604년 12월에 해당합니다. 여호야김의 겨울 궁전은 추운 겨울을 지내기 위해 만든 왕궁 일부를 가리킵니다. 22:14에 따르면 여호야김은 자신을 위하여 ‘큰 집과 넓은 다락방’을 지었습니다. 여호야김 왕의 이러한 태도는 교만이 극치를 이룬 것입니다.

 

교만을 말리는 신하들(24-26)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대접을 받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자리에 서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 만큼 말씀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사랑한 만큼 말씀을 사랑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만큼 말씀을 존중해야 합니다.

 

24왕과 그의 신하들이 이 모든 말을 듣고도 두려워하거나 자기들의 옷을 찢지 아니하였고 25엘라단과 들라야와 그마랴가 왕께 두루마리를 불사르지 말도록 아뢰어도 왕이 듣지 아니하였으며 26왕이 왕의 아들 여라므엘과 아스리엘의 아들 스라야와 압디엘의 아들 셀레먀에게 명령하여 서기관 바룩과 선지자 예레미야를 잡으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그들을 숨기셨더라(24-26)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듣고 여호야김 왕과 고관들의 반응은 정말 놀랍습니다. 교만한 행동은 화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그들 중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한 엘리단과 들라야와 그마랴라는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왕으로 하여금 두루마리를 불태우는데 말리지만, 왕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지자 예레미야와 서기관 바룩을 잡아 오도록 명령하기까지 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선포된 말씀에 조금도 두려움을 모르는 여호야김과 그의 주변 신하들의 태도와 예레미야의 선포에서 여호와의 의지를 읽는 일부 서기관들의 태도가 대조됩니다. 왕의 신하들은 ‘왕의 곁에 선 모든 고관’(21)으로, 12절 이하에 나오는 ‘고관들’과는 구별되는 자들입니다. 고관들은 그 모든 말씀을 듣고 놀라 서로 쳐다보았는데(16), 왕과 측근 신하들은 두루마리에 적힌 이 모든 말을 듣고도 두려워하거나 자기들의 옷을 찢지 않았습니다(24). ‘두려워 하거나’와 ‘놀라’(16)는 같은 단어입니다. ‘엘라단과 들라야와 그마랴’가 두루마리를 태우지 말도록 왕에게 간청해보지만, 예언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왕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습니다(25). 악볼의 아들 엘라단은 애굽으로 도피한 예언자 우리아를 소환해오기 위해 여호야김이 바로에게 파견한 사절의 일원이었고(26:22), 열왕기하 24:8에 언급된 엘라단과 동일인이라면, 그는 여호야김의 장인이요 여호야긴의 외조부가 됩니다. 두루마리를 조각조각 잘라 불태워버린 왕은 ‘왕의 아들 여라므엘과 아스리엘의 아들 스라야와 압디엘의 아들 셀레먀’를 보내 두루마리를 만들어 낭독한 예레미야와 바룩 사로잡아 오게 합니다(26; 참조, 26:21-23). ‘왕의 아들’은 혈통보다는 직분과 관련된 표현일 것입니다. 물론 왕의 권력은 명령을 내리는 데까지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의 예언자 예레미야와 그의 동반자 바룩을 지켜주시기에 왕의 시도는 실패로 끝납니다. 여호와께는 고관들을 통해 (19절) 이들을 지켜주십니다. 예레미야와 바룩이 언제까지 숨어 지냈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여호야김의 통치 후반을 배경으로 하는 35장에서 예레미야는 자유롭게 활동합니다.

전체적으로 여호야김의 모습은 그의 아버지 요시야의 모습과 대조적입니다. 여호야김은 두루마리의 말을 듣고 옷을 찢지 않는데, 요시 야는 제사장 힐기야가 성전 수리 중에 발견한 율법책을 사반이 읽어야 합니다. 그 말을 듣고 자신의 옷을 찢습니다(열왕기하 22:11; 참조 3:6-7), 여호야김은 부하들을 보내 예레미야와 바룩을 잡아 오게 하는데, 요시야는 여 예언자 훌다에게 사절을 보내 여호와의 신탁을 묻습니다(열왕기하 22:12.14). 여호야김은 여호와의 말씀을 불쏘시개로 사용하고, 요시야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율법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준수합니다(열왕기하 23:3), 여호야김은 시신이 들판에 버려지는 저주받은 죽음에 떨어지고, 요시야는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된다(열왕기하 22:20). 요시야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 앞에 어떻게 서야 할지를 보여주는 모범적 인물이고, 여호야김은 악한 왕의 전형입니다.

예레미야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경고의 메지시가 전파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반응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서 한 가닥 마지막 소망을 가지고 회개하길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왕은 회개치 않고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하니깐 예레미야를 숨겨주십니다.

말씀을 듣지 않고 무시하는 교만한 자를 하나님께서는 미워하십니다. 혹시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교만한 마음이 있지 않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앞에서 듣는 것처럼 들어야 합니다.

 

다시 기록된 두루마리(27-32)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부족한 죄악들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마음을 찢으며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니면 반대로 성경을 아는 만큼 지적인 유희를 즐기고, 말씀을 개인적인 이득을 챙겨보려는 도구로 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거룩하게 존경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먀에게 불타버린 두루마리 책 대신에 말씀을 다시 기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27왕이 두루마리와 바룩이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 기록한 말씀을 불사른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8너는 다시 다른 두루마리를 가지고 유다의 여호야김 왕이 불사른 첫 두루마리의 모든 말을 기록하고 29또 유다의 여호야김 왕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이 두루마리를 불사르며 말하기를 네가 어찌하여 바벨론의 왕이 반드시 와서 이 땅을 멸하고 사람과 짐승을 이 땅에서 없어지게 하리라 하는 말을 이 두루마리에 기록하였느냐 하도다 30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유다의 왕 여호야김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그에게 다윗의 왕위에 앉을 자가 없게 될 것이요 그의 시체는 버림을 당하여 낮에는 더위, 밤에는 추위를 당하리라 31또 내가 그와 그의 자손과 신하들을 그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벌할 것이라 내가 일찍이 그들과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에게 그 모든 재난을 내리리라 선포하였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32이에 예레미야가 다른 두루마리를 가져다가 네리야의 아들 서기관 바룩에게 주매 그가 유다의 여호야김 왕이 불사른 책의 모든 말을 예레미야가 전하는 대로 기록하고 그 외에도 그 같은 말을 많이 더 하였더라(27-32)

 

여호야김 왕이 예레미야가 기록한 두루마리를 불태우자,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두루마리를 다시 기록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레미야는 바룩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받아 적게 했으며, 이번 두루마리에는 이전보다 더 많은 심판의 내용이 추가되었습니다.

 

⑴ 여호와의 지시내용(27-28)

 

여호야김이 두루마리를 불살라버린 후에 여호와 말씀이 다시 예레미야에게 임합니다(27). 여호와의 두 가지 명령이 주어집니다. 첫 번째 명령은 두루마리를 준비해 첫 번째 두루마리에 기록했던 모든 말씀을 다시하는 것입니다. ‘너는 다시 다른 두루마리를 가져와, 유다 왕 여호야김이 태워버린 첫 번째 두루마리에 (적혀) 있던 첫 번째 말씀을 다 거기에 적어라’(28절의 사역), ‘첫 번째’를 두 번 사용해 두 번째 두루마리가 첫 번째 두루마리의 완전한 복사본임을 강조합니다.

 

⑵ 여호야김에게 주신 말씀(29-31)

 

여호야김이 첫 번째 두루마리를 태워버렸지만, 거기에 적힌 말씀은 하나도 변경되거나 상실되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 명령이 그대로 실행됩니다. ‘이에 예레미야가 다른 두루마리를 가져다가 네리야의 아들 서기관 바룩에게 주매 그가 유다의 여호야김 왕이 불사른 책의 모든 말을 예레미야가 전하는 대로 기록하고 그 의에도 그 같은 밭을 많이 더 하였더라’(32절). 첫 번째에도 두루마리에 적힌 말씀뿐만 아니라 비슷한 내용의 많은 말씀이 더 첨가됩니다. 두 번째 명령은 두루마리를 태워버린 여호야김에게 심판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심판 선포에 앞서 심판의 근거로 여호야김의 말이 인용됩니다(26). 21-26절은 여호야김의 외적 반응만 기술하고, 그가 여호와의 말씀이 기록된 두루마리를 불에 태워버리고 예레미야와 바룩을 체포하려는 동기에 관해서는 달리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인용을 통해 기록된 말씀의 내용 때문임을 알게 됩니다.

여호야김은 두루마리에 기록된 말씀의 내용을 세 가지로 요약합니다. 1) 바벨론 왕이 반드시 옵니다. 예레미야는 20:4부터 바벨론 왕에 의한 유다의 멸망을 선포했습니다. 여기서는 ‘반드시’를 통해 이를 더욱 강조합니다. 2) 그가 이 땅을 멸합니다(참조, 열왕기하 18:25, 이사야 36:10). 3) 그가 사람과 짐승(참조. 7:20, 21:6), 곧 살아있는 모든 것을 없애버립니다. 27:5에 따르면 여호와께서는 당신께서 만드신 사람과 짐승을 내가 보기에 옳은 사람에게 주십니다.

고발의 말씀에 뒤이어 두 가지 내용으로 이뤄진 심판의 말씀이 주어집니다(30). 첫째, 여호야김에게는 후계자가 없을 것입니다(참조 22:30). 둘째, 여호야김에게는 왕에게 합당한 장례가 허락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시신은 들판에 버려져 낮과 밤의 기온 차로 급속히 부패하게 됩니다(참조 22:18,19). ‘던져서’(23)와 ‘버림을 당하여’는 같은 단어입니다. 두루마리를 낭독하는 대로 서기관의 칼로 잘라 화롯불에 ‘던져서’ 태워버린 왕에게 그의 시산이 들판에 ‘던져지는’ 징벌이 선언됩니다. 심판의 대상이 왕을 넘어 ‘그의 자손과 신하들’과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에게로 확대됩니다(31).

 

⑶ 지시의 이행(32)

 

두루마리의 말을 듣고 돌이키지 않기는 왕이나 일반 백성이나 다름이 없었다. 여호와께서 당신의 선포에 귀를 막은 자들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하십니다. 바벨론에 의한 유다의 멸망은 약소국의 바에가 아닙니다. 겉으로는 정치적 파국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호와께서 아들의 죄악에 책임을 물으시는 신학적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소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순종 여부에 상관없이 말씀하신 그대로 다 이루어집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지혜이고 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며, 겸손히 그 말씀을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기득권에 취해 돌 같은 마음이 되어 말씀이 읽혀지지 않는 인생은 자신의 욕망을 불태우게 됩니다. 자기 옷을 찢고 우상을 불태우는 삶에 소망이 있습니다. 신앙 양심에 비추어 아닌 것은 아니라 말하고 불의에 침묵하지 않는 담대한 성도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열려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귀를 기울이며, 주신 말씀을 겸손히 말씀에 순종하며 나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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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36-01)


두루마리에 기록된 말씀

예레미야 36장 1-19절


 

지도자의 중요성은 누누이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그 지도자의 리더십에 따라 그가 속한 조직이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리더십 부재의 지도자는 조직원들의 방종과 혼란을 불러옵니다. 영적인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가 경험과 지혜가 많으면 좋겠지만, 가장 중요한 지혜는 여호와를 사랑하고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은 나라는 흔들림이 없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남 유다가 회개하길 원하시면서 여호야김 시대를 향해 말씀을 기록하고 권하십니다. 예레미야는 붙잡혀 있었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동역자인 바룩을 통해 대신 기록하도록 한 후, 그 내용을 백성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에게 읽어줍니다.

 

말씀을 백성들에게 낭독됨(1-8)

종교 지도자들이 권위로 행세하면서 외형적인 형식과 의식으로 자신들을 치장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 사람들에게 인정과 존경을 받기를 바랐습니다. 거짓과 위선으로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속일 수도 있을 뿐 아니라, 자기기만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이 같은 위선적인 삶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가차 없이 책망하신 것입니다.

 

1유다의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야김 제사년에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이르시되 2너는 두루마리 책을 가져다가 내가 네게 말하던 날 곧 요시야의 날부터 오늘까지 이스라엘과 유다와 모든 나라에 대하여 내가 네게 일러 준 모든 말을 거기에 기록하라 3유다 가문이 내가 그들에게 내리려 한 모든 재난을 듣고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리니 그리하면 내가 그 악과 죄를 용서하리라 하시니라 4이에 예레미야가 네리야의 아들 바룩을 부르매 바룩이 예레미야가 불러 주는 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두루마리 책에 기록하니라 5예레미야가 바룩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나는 붙잡혔으므로 여호와의 집에 들어갈 수 없으니 6너는 들어가서 내가 말한 대로 두루마리에 기록한 여호와의 말씀을 금식일에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백성의 귀에 낭독하고 유다 모든 성읍에서 온 자들의 귀에도 낭독하라 7그들이 여호와 앞에 기도를 드리며 각기 악한 길을 떠나리라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 대하여 선포하신 노여움과 분이 크니라 8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선지자 예레미야가 자기에게 명령한 대로 하여 여호와의 성전에서 책에 있는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니라(1-8)

 

심판을 초래한 이스라엘의 범죄가 한 사람의 범죄가 아니라 왕에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나라 전체가 총체적으로 부패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호야김 왕의 타락을 잘 소개하면서 한 나라의 지도자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 번 보여줍니다.

 

⑴ 말씀을 기록케 받은 예레미야(1-4)

 

본문에 나타난 시기는 ‘여호야김 제 4년’(주전 605년; 25:1)입니다. 이 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왕이 갈그미스 전투에서 애굽을 대파하고 시리아와 팔레스틴 지역 통치권을 손에 넣은 해입니다. 예레미야가 오래전부터 선포했던 여호와의 재앙이 북쪽에서부터 구체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시기가 이 해입니다(1:13-14). 바벨론이 근동의 패권을 장악하는 시점에 예레미야는 여호와로부터 명령을 받습니다.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두루마리 책을 가져와 그에게 이른 모든 말을 기록하게 하십니다(2). 문맥상 말씀의 기록은 심판의 확정성을 보여줍니다. 3절에서는 유다의 회개에 대한 여호와의 막연한 기대가 동기로 언급됩니다.

25:3에 의하면 예레미야는 요시야 왕 13년부터 오늘까지 23년 동안,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참조 1:2-3). 25:1에 의하면, 오늘은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4년이 됩니다. 요시야는 남 유다의 역사 상 가장 하나님을 섬겼던 신실한 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우상과 산당을 제거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인 여호야김은 아버지가 없앤 우상과 산당을 다시 지었습니다.

그동안 입술로만 선포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이제는 요시야 때부터 이제껏 이스라엘과 유다, 열방을 향해서 말씀하신 것을 두루마리 책에 낱낱이 기록하게 하십니다. 두루마리에 기록할 내용의 시간적·공간적 범위가 제시됩니다. 요시야의 날부터 오늘까지 이스라엘과 유다와 모든 나라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이르신 말씀입니다. 유다의 회개에 대한 여호와의 긍정적 기대감을 담고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돌이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시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백성을 끝까지 포기하실 수 없는 그분의 절망적 안타까움의 표현입니다. 여호와께서 재앙을 내리시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 혹시 악한 길에서 돌이킬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유다의 악과 죄를 용서해주고 싶으신 여호와께서는 유다가 마지막 가능성을 뿌리치지 않고 당신께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십니다. ‘길’을 수식 하는 ‘악한’과 ‘재난’은 히브리어로는 동일합니다. 재난은 한편으로는 악한 길에 대한 여호와 징벌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악한 길의 필연적 결말입니다.

악한 길은 운명처럼 재난을 초래하는 길입니다. 말씀을 기록하라는 여호와의 명령을 받은 예레미야는 네리야의 아들 바룩을 불러 자기가 불러주는 대로 두루마리 책에 받아 적게 합니다(4). 네리야의 아들 바룩은 예레미야의 동역자로서 끝까지 그와 함께합니다(참조. 43:3, 6). 그 시기는 예레미야가 예언자로 부름을 받은 627년부터 605년까지 선포한 말씀이 고스란히 두루마리 책에 기록합니다. 예레미야서의 현재 구조에 따르면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말씀은 1-20장에서 ‘모든 나라’에 대한 말씀은 46-51장에서(참조. 46:2)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포기할 수 없어서 끝까지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남 유다의 악과 죄를 용서하고 싶으신 여호와께서 이제 마지막 가능성을 뿌리치지 않고, 돌아오길 간절히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⑵ 말씀을 대신 기록한 바룩(5-8)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입이었다면, 예레미야의 손과 입이 되어준 신실한 동역자 ‘바룩’이었습니다. 그는 예레미야가 불러준 대로 두루마리에 받아 적었습니다. 바룩을 ‘서기관’으로 부릅니다(26,32). 전문적인 직업교육을 받은 서기관은 비교적 높은 지위에 속한 자로 주로 왕궁에서 고위관료로 활동했습니다.

그동안 선포된 예언으로도 이미 충분했지만, 하나님께서 말씀을 기록하게 하신 이유는 두루마리에 기록된 말씀을 통해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또 두루마리에 기록된 말씀은 그냥 입으로 들려지는 말씀보다 더 정확하고 분명하게 전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붙잡혀서 자유롭게 다닐 수 없으니, 예레미야는 신실한 바룩에게 말씀을 기록하라고 명합니다.

5-7절의 말씀은 기록의 배경과 동기를 보여줍니다. 성전에 들어갈 수 없게 된 예레미야가 바룩에게 대신 성전에 가서 그가 불러준 대로 두루마리에 기록한 여호와의 말씀을 금식일에 낭독하기 위해서입니다.

여호와의 성전은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하기에 최적의 장소였고(참조 7:2, 19:14, 26:2),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금식일은 최상의 시점이었습니다. 성전에 모인 자들은 금식을 위해 유다 모든 성읍에서 온 자들이었습니다. 바룩이 성전에서 낭독한 말씀은 모든 유다 백성이 들어야 할 말씀이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 예레미야가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는지는 달리 언급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가 아직 행동의 자유를 빼앗기지 않았기에 ‘붙잡혔으므로’는 ‘제한받고 있어’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예레미야는 소란을 일으키는 자로 제사장에 의해서 성전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금지를 당했던 것입니다.

7절은 내용상 3절의 반복입니다. 하나님께서 ‘행여 그들의 기도가 여호와 앞에 올라가고 그들이 저마다 제 악한 길에서 돌아설지도 모른다.’라고 기대하셨다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의 회개는 예레미야에게도 막연한 희망 사항이었습니다. 가능성이 없음을 아시면서도 여호와께서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예레미야도 실낱같은 소망에 몸을 던집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크신 노여움과 분에서 회개의 이유라고 찾습니다.

그 말씀대로 회개하지 않은 이스라엘은 멸망했고, 그 말씀대로 절대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앗수르 제국이 무너지고 애굽도 패하고 바벨론이 새롭게 중동의 패권을 차지했습니다(주전 605년). 그러니 유다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 말씀대로 바벨론에 붙이실 것임을 깨닫게 하고 싶으셨으며, 유다라도 악한 길에서 돌아서서 죄사함을 받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타오르는 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서는 속히 악한 길에서 떠나서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바울은 예레미야의 명령을 그대로 수행합니다(8). 악한 길에는 반드시 재난이 따를 것입니다. 기록된 말씀을 우리에게 남겨두신 뜻도 이것일 것입니다. 말씀을 묵상하여 주님을 만남으로써 내가 선 자리와 가는 방향이 주께서 앞서 가신 길이고 동행하고 계신 길인지 확인합시다.

 

낭독된 말씀과 그들의 반응(9-19)

복음은 모두에게나 복음이 아닙니다. 누군가에게는 불편하고 위협적인 메시지입니다. 회개한 자에게는 불온한 소식이기에 말씀 선포자는 항상 위태롭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복음의 전달자로 우리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기록하고 낭독하고 전달해야 합니다.

 

9유다의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야김의 제오년 구월에 예루살렘 모든 백성과 유다 성읍들에서 예루살렘에 이른 모든 백성이 여호와 앞에서 금식을 선포한지라 10바룩이 여호와의 성전 위뜰 곧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새 문 어귀 곁에 있는 사반의 아들 서기관 그마랴의 방에서 그 책에 기록된 예레미야의 말을 모든 백성에게 낭독하니라 11사반의 손자요 그마랴의 아들인 미가야가 그 책에 기록된 여호와의 말씀을 다 듣고 12왕궁에 내려가서 서기관의 방에 들어가니 모든 고관 곧 서기관 엘리사마와 스마야의 아들 들라야와 악볼의 아들 엘라단과 사반의 아들 그마랴와 하나냐의 아들 시드기야와 모든 고관이 거기에 앉아 있는지라 13미가야가 바룩이 백성의 귀에 책을 낭독할 때에 들은 모든 말을 그들에게 전하매 14이에 모든 고관이 구시의 증손 셀레먀의 손자 느다냐의 아들 여후디를 바룩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백성의 귀에 낭독한 두루마리를 손에 가지고 오라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두루마리를 손에 가지고 그들에게로 오니 15그들이 바룩에게 이르되 앉아서 이를 우리 귀에 낭독하라 바룩이 그들의 귀에 낭독하매 16그들이 그 모든 말씀을 듣고 놀라 서로 보며 바룩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모든 말을 왕에게 아뢰리라 17그들이 또 바룩에게 물어 이르되 너는 그가 불러 주는 이 모든 말을 어떻게 기록하였느냐 청하노니 우리에게 알리라 18바룩이 대답하되 그가 그의 입으로 이 모든 말을 내게 불러 주기로 내가 먹으로 책에 기록하였노라 19이에 고관들이 바룩에게 이르되 너는 가서 예레미야와 함께 숨고 너희가 있는 곳을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 하니라(9-19)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유다가 돌아오길 간절하게 원했습니다. 그는 제사장들에 의해서 성전 출입 금지로 인해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 대신에 동역자인 서기관 바룩으로 하여금 성전에서 예레미야에게 전해진 여호와의 말씀을 낭독합니다.

 

⑴ 선포의 배경(9)

 

9-10절은 내용상 6절의 구체적 설명에 해당합니다. ‘여호야김의 제오년 구월’에 예루살렘에서 금식이 선포됩니다. 특이하게도 왕이 아니라 ‘예루살렘 모든 백성과 유다 성읍들에서 예루살렘에 이른 모든 백성’이 금식 선포의 주체로 등장합니다.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백성의 주도로 자발적 금식이 거행됩니다. ‘여호야김의 제오년 구월’은 604년 11/12월에 해당합니다. 주전 605년 9월 7일 바벨론에서 왕위에 오른 느부갓네살은 곧 시리아로 돌아와 주변을 종속시키고 주전 604년 12월에 아스글론 원정을 떠나 하나씩 성을 점령합니다.

예루살렘과 유다가 아스글론까지 진출한 바벨론 군대를 보고 혼란과 두려움에 빠져 금식을 선포했다면 예레미야는 아스글론의 멸망에서 예루살렘의 위기를 보고 특히 예루살렘 왕궁이 긴박한 현실을 직시하도록 호소하기 위해 두루마리를 성전에서 낭독한 것 같습니다.

 

⑵ 서기관 미가야의 반응(10-13)

 

바룩이 성전 위 뜰에 있는 사반의 서기관 그마랴의 방에서 두루마리에 적힌 말씀을 모두 백성에게 낭독합니다(10). 그마랴는 서기관 사반의 아들입니다. 그마랴의 방에서 예레미야의 말을 낭독했음은 그마랴가 예레미야에게 우호적이었음을 시사해줍니다. 26:24에 의하면 사반의 아들 아히감이 예레미야를 여호야김 왕의 손에서 지켜줍니다.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지만(31), 성과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자발적으로 금식을 선포한 백성은 말씀에 무관심했지만, 일부 서 기관들이 긍정적으로 반응합니다. 백성의 귀에 낭독된 두루마리의 말씀이 그마랴의 아들 미가야에 의해 고관들의 귀에 알려지고, 뒤이어 왕의 귀에도 들려지게 됩니다.

두루마리에 적힌 ‘예레미야의 말’의 중요성을 인지한 미가야는 지체하지 않고 행동합니다(11). 그는 서기관 엘리사마의 방으로 가서 그곳에 모인 모든 고관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12-13). 고관들 가운데 다섯 사람의 이름이 소개됩니다. ‘서기관 엘리사마와 스마야의 아들 들라야와 악볼의 아들 엘라단과 사반의 아들 그마랴와 하나냐의 아들 시드기야로’ 이들 가운데 세 사람의 이름은 25절에 다시 나옵니다.

 

⑶ 왕궁 서기관들의 반응(14-19)

 

미가야의 보고를 들은 고관들도 즉각적으로 반응합니다. 이들은 여후디를 바룩에게 보내 두루마리를 가져오게 하고, 두루마리를 손에 들고 온 바룩에게 낭독해주기를 청합니다(14-15). 유다 사람을 의미하는 ‘여후다’(14, 21, 23)의 경우 특이하게도 삼 대에 걸쳐 집안을 소개합니다. 미가야가 바룩의 낭독을 듣고 상황의 위중함을 감지했던 것처럼 고관들도 두루마리의 심각성과 중요성을 알아챕니다. 바룩이 읽어주는 말씀을 다 들은 고관들은 놀라 서로를 쳐다보다가 왕에게 보고하기로 합니다(16). 두루마리에 적힌 말씀은 누구보다도 왕이 알아야 할 말씀이었습니다. 두루마리의 내용에 관해서는 달리 언급하지 않습니다(29). 왕에게 보고하기에 앞서 고관들이 바룩에게 두루마리에 적힌 말씀의 출처에 관해 묻자(17), 바룩은 예레미야가 직접 입으로 불러주는 것을 받아 자신이 먹으로 기록했다고 말합니다(18). 말씀의 기원이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있음을 강조합니다(10). 왕의 폭력적 성품을 잘 알고 있던(참조, 22:13-19) 고관들은 바룩에게 예레미야와 함께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어 있도록 충고합니다(19). 많은 사람이 예레미야에게 적대적이었지만,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에 예레미야를 도와주는 사람이 일부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들을 통해 예레미야에게 하신 구원 약속(참조, 13,19)을 지켜 나가십니다. 26절은 고관들의 예상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26:21-23에 따르면 ‘예레미야의 모든 말과 같이 이 성과 이 땅에 경고하여 예언한’ 예언자 우리야가 애굽으로 피신하자 여호야김은 사절을 보내 그를 애굽에서 데려다가 처형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 많으셔서 심판 가운데서도 백성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사랑을 알고 있는 우리도 그렇게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한 참고자료가 아닙니다. 정보가 아닙니다.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회개한 자에게는 두렵고 기쁜 소식이지만, 거부하는 자에게는 불온한 소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복음의 전달자로 우리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기록하고 낭독하고 전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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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35-01)


레갑 자손들을 통한 교훈

예레미야 35장 1-19절


 

어두움이 깊을수록 아주 작은 빛이라도 그 빛은 더 선명하게 밝습니다. 세상에 어두워지면 경건치 못한 성도들은 세상의 풍조에 따라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모든 성도들이 세상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신실한 성도들은 자신의 위치에 서서 믿음의 사람으로서 분명하게 빛을 비추면서 살아갑니다. 지금도 세상에는 엘리야 시대 남은 칠천 명처럼 자기 믿음을 지킨 신실한 성도들이 있습니다.

 

  • 남 유다의 멸망을 앞두고 성경은 레갑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레갑 자손의 순종과 대비하여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불순종을 고발합니다. 레갑 사람들은 수백 년이 지나도록 조상의 명령을 지켜왔는데, 여호와 백성을 자랑하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은 그분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엔 심판을, 레갑 자손의 순종에는 축복을 선포하십니다.

 

레갑 사람들의 순종(1-11)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갈 때, 불편하게 살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사람들에게 무시와 조롱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들을 불러 신앙의 본보기로 세우십니다. 이스라엘은 절박할 때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맹세까지도 상황이 호전되자마자 금방 저버렸지만, 레갑 족속 사람들은 조상 요나답의 명령을 지키기 위해 예레미야가 권해도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1유다의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야김 때에 여호와께로부터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2너는 레갑 사람들의 집에 가서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을 여호와의 집 한 방으로 데려다가 포도주를 마시게 하라 하시니라 3이에 내가 하바시냐의 손자요 예레미야의 아들인 야아사냐와 그의 형제와 그의 모든 아들과 모든 레갑 사람들을 데리고 4여호와의 집에 이르러 익다랴의 아들 하나님의 사람 하난의 아들들의 방에 들였는데 그 방은 고관들의 방 곁이요 문을 지키는 살룸의 아들 마아세야의 방 위더라 5내가 레갑 사람들의 후손들 앞에 포도주가 가득한 종지와 술잔을 놓고 마시라 권하매 6그들이 이르되 우리는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겠노라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와 너희 자손은 영원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며 7너희가 집도 짓지 말며 파종도 하지 말며 포도원을 소유하지도 말고 너희는 평생 동안 장막에 살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머물러 사는 땅에서 너희 생명이 길리라 하였으므로 8우리가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한 모든 말을 순종하여 우리와 우리 아내와 자녀가 평생 동안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9살 집도 짓지 아니하며 포도원이나 밭이나 종자도 가지지 아니하고 10장막에 살면서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한 대로 다 지켜 행하였노라 11그러나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이 땅에 올라왔을 때에 우리가 말하기를 갈대아인의 군대와 수리아인의 군대를 피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자 하고 우리가 예루살렘에 살았노라(1-11)

 

예레미야 34장은 시드기야 시대에 일어난 일이고, 35장은 여호야김 시대에 일어난 일로서 35장이 34장보다 시간적으로 앞선 본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연대순으로 기록하지 않고 메시지 중심으로 편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요나답 후손들의 순종과 하나님이 택한 유다 백성의 불순종이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⑴ 여호와의 명령(1-2)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주어진 때를, 막연히 ‘유다의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야김 때에’(1)로 말합니다. 말씀이 여호야김과 직접 관련되지 않았음을 시사해 줍니다. 좀 더 정확한 시점은 레갑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살게 된 배경을 보고하는 11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레갑 자손은 유목민으로 목축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유목민인 레갑 사람들은 ‘갈대아인의 군대와 수리아인의 군대’의 위험을 피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와 살게 됐습니다. 열왕기하 24:1-2에 관련된 사건이 나옵니다.

601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산은 애굽 원정을 떠나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돌아갑니다. 이를 바벨론의 패배로 오인한 여호야김은 느부갓네살에게 바치던 조공을 중단합니다. 애굽 원정 때 병력 손실이 적지 않았기에 느부갓네살은 배반한 여호야김을 즉시 징계하지 못합니다. 대신 ‘갈대아의 부대와 아람의 부대와 모압의 부대와 암몬 자손의 부대’를 보내 유다를 약탈하게 명령합니다. 이런 배경에서 보자면 레갑 사람들은 대략 주전 600년경에 적들의 약탈을 피해 예루살렘에서 피난처를 찾았던 것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해야 할 일을 ‘레갑 사람들의 집에 가서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을 여호와의 집 한 방으로 데려다가 포도주를 마시게 하라’(2)고 구체적으로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예레미야를 통해 레갑 사람들이 성전 한 방으로 초대를 받아 포도주를 마시도록 권고합니다.

 

⑵ 예레미야의 명령 이행(3-5)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예레미야는 레갑 자손들에게 성전으로 인도합니다. ‘하바시냐의 손자요 예레미야의 아들인 야아사냐와 그의 형제와 그의 모든 아들과 모든 레갑 사람들’을 여호와의 집에 있는 ‘익다랴의 아들 하나님의 사람 하난의 아들들의 방’으로 데려가 그들에게 ‘포도주가 가득 담긴 단지와 잔을 내놓고 포도주를 마시라’고 권합니다(3-5).

레갑 사람들이 빠짐없이 모두 성전의 한 방으로 초대를 받습니다. 야아사냐의 조부 하바시냐는 여기에만 나오는 이름입니다. 에스겔 11:1의 야아사냐는 앗술의 아들입니다. ‘형제들’은 친족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불리는 것으로 보아 ‘하난’은 성전에서 활동하는 제의 예언자였던 것 같고, ‘(그의) 아들들’은 그의 제자들을 의미합니다. 예레미야에게 자신들의 방을 빌려준 것으로 보아 ‘하난의 아들들’은 예레미야에 동조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모임을 갖는 방의 위치가 상세하게 언급됩니다. ‘마이세야의 방 위’는 ‘하난의 아들들의 방’이 아마도 중간층에 있었음을, ‘고관들의 방 곁’은 비중 있는 인물의 방이었음을 시사해줍니다. 마아세야가 문지기로 되는데, 열왕기하 12:9에 따르면 예루살렘 성전 문을 지키는 제사장들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고대 근동에서 성전의 문지기는 고위 직분이었습니다.

 

⑶ 레갑인의 답변(6-11)

 

레갑 사람들은 예레미야의 권유를 단호하게 거절하며 자기네 조상 레갑의 아들 요나답의 명령을 인용합니다. 요나답의 지침은 네 개의 부정명령과 한 개의 긍정명령과 결과문으로 구성되어 거절합니다. ‘너희와 너희 자손은 영원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며 너희가 집도 짓지 말며 파종도 하지 말며 포도원을 소유하지도 말고 너희는 평생 동안 장막에 살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머물러 사는 땅에서 너희 생명이 길리라’(6-7). 이 레갑 자손들은 자신들이 지금까지 조상 요나답의 명령을 철저하게 준수하며 살아왔음을 주장합니다.

6-7절을 거의 그대로 받는 8-10절은 내용뿐만 아니라, 그 구조에서도 실천에 초점을 맞춥니다. ‘우리가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한 모든 말을 순종하여’로 시작해서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한 대로 다 지켜 행하였노라’로 당당하게 말합니다. 레갑의 아들 요나답의 후손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 조상의 명령에 따라 포도주도 마시지 않고 집도 짓지 않고 포도원이나 밭도 갖지 않았습니다. 농경생활에 관한 최소한 것도 소유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명령의 상대 ‘너희와 너희 후손(아들들), 이 명령의 실천에서는 우리와 우리 아내와 자녀(너희 아들들과 너희 딸들)’로 확대됩니다. 남녀를 불문하고 집안의 모든 사람이 순종했습니다. ‘파종도 하지 말며’를 받는 ‘밭이나 종자도 가지지 아니하고’는 농경 생활과 관련한 최소한 소유하지 않았음을 강조합니다. 그들은 나그네 삶인 고단한 방식을 고수해 온 것입니다.

레갑 사람들의 기원과 해석에 관해서는 통일된 입장이 없지만, 다수는 열왕기하 10:15-17을 배경으로 이해합니다. 엘리사가 보낸 제자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은 예후는 열렬한 여호와주의자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혼합주의에 빠진 오므리 왕조에 반기를 듭니다. 예후의 혁명에 가담한 여호나답은 그와 함께 사마리아의 바알 제사장들을 진멸해 버립니다(열왕기하 10장). 35장의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 예후의 혁명에 가담한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과 같은 인물이라면, 레갑 족속의 시조이자 스승인 요나답은 여호와 종교가 가나안의 바알 숭배로 오염되는 것에 맞서 싸운 인물입니다. 예후가 반정을 시도한 때가 845년 또는 842년이기에, 레갑 사람들은 240년 이상의 긴 기간 동안 조상 요나답의 명령을 지켜왔습니다.

요나답의 명령을 배경으로 추론해보면, 레갑 사람들은 가나안적 농경 생활을 거절하고 천막에 살면서 반유목민 생활을 하는 자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의 생존 방식은 유목민 시대부터 내려오는 사회·종교적 흐름이라기보다는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에 (아마도 9세기경에) 발생한 종파적 운동이었던 것 같습니다. 레갑 자손은 이토록 조상의 말에 철저하게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무시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의 신의를 지킨 레갑 자손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여호와의 말씀(12-19)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겁지 않은 하나님의 계명에 불순종하는 것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한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좋아하는 것이 있기에 순종이 안 되고, 주의 말씀보다 더 그럴듯하게 여기는 소리가 있기에 말씀대로 행하기 않았던 것입니다. 이 불순종에 대해 오늘도 하나님이 말씀으로 재앙을 경고하시는 까닭은 불순종에서 돌이켜 순종하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12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13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는 가서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내 말을 들으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겠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4레갑의 아들 요나답이 그의 자손에게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 한 그 명령은 실행되도다 그들은 그 선조의 명령을 순종하여 오늘까지 마시지 아니하거늘 내가 너희에게 말하고 끊임없이 말하여도 너희는 내게 순종하지 아니하도다 15내가 내 종 모든 선지자를 너희에게 보내고 끊임없이 보내며 이르기를 너희는 이제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켜 행위를 고치고 다른 신을 따라 그를 섬기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가 너희와 너희 선조에게 준 이 땅에 살리라 하여도 너희가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며 내게 순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6레갑의 아들 요나답의 자손은 그의 선조가 그들에게 명령한 그 명령을 지켜 행하나 이 백성은 내게 순종하지 아니하도다 17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에게 내가 그들에게 대하여 선포한 모든 재앙을 내리리니 이는 내가 그들에게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며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함이니라 하셨다 하라 18예레미야가 레갑 사람의 가문에게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너희 선조 요나답의 명령을 순종하여 그의 모든 규율을 지키며 그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행하였도다 19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게서 내 앞에 설 사람이 영원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12-19)

 

주인을 몰라보고 주인의 말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이스라엘에게는 선지자들이 누누이 경고했던 재앙이 임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명령이지만 조상의 명령에 오래도록 신실했던 레갑 족속에게는 대가 영영히 끊어지지 않는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⑴ 말씀의 계시(12-13)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레갑 자손들의 태도에 대해 반응하십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는 이미 죽은 지 오랜 사람보다 못한 대접을 받아오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순종에는 축복으로, 불순종에는 심판으로 응대하십니다. 축복이 선언됨과 대조적으로 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거민에게는 재앙을 경고하십니다. 복과 화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고, 그분의 말씀에 대한 태도에서 결정됩니다.

 

⑵ 레갑인의 순종(14-16)

 

여호와께서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의 불순종을 레갑 족속의 순종에 대비하여 고발하십니다. 레갑 사람들은 조상 요나답이 준 규정을 수 세기가 지나도록 변함없이 지켜왔는데, 유다 백성은 여호와의 계명과 율법을 거듭 위반하였습니다(14-16). 명령의 기원이 다르기에 유다의 불순종은 더욱 악합니다. 레갑 사람들은 자신들이 준수하는 규정의 기원을 시종일관 요나답에게로 돌렸습니다(6,8,10).

 

⑶ 근거가 제시된 심판의 말씀(17)

 

사람의 입에서 나온 규정도 추종자들에 의해서 그처럼 존중을 받아왔는데,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명령은 그분 백성 이스라엘에 의해 처음부터 무시되어 왔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사람의 명령보다도 못한 대우를 받습니다. 여호와께서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며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참조. 7:13, 27) 유다 백성에게 ‘내가 그들에게 대하여 선포한 모든 재앙’(참조 19:15)을 내리기로 확정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보라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에게 내가 그들에게 대하여 선포한 모든 재앙을 내리리니 이는 내가 그들에게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며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함이니라’(17)고 경고하십니다.

 

⑷ 레갑인들의 구원 약속(18-19)

 

반면에 조상 요나답의 명령을 그대로 실천한 신앙인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 레갑 사람들의 순종은 여호와에 의해 인정받습니다.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게는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너희 선조 요나답의 명령을 순종하여 그의 모든 규율을 지키며 그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행하였도다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게서 내 앞에 설 사람이 영원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라고 여호와 앞에 서 있을 사람이 영원히 끊어지지 아니할 것입니다(19; 참조. 33:18). ‘여호와 앞에 서다’는 제의적 표현으로, ‘여호와께 예배를 드리다’ 또는 ‘성전에서 제사장으로 일하다’를 의미합니다(참조. 신 4:10; 10:8).

스스로 예배자의 자격이 있다고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멸시하였던 자들이 아니라, 이렇게 성실하고 신실하게 살아왔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주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유다 백성을 책망하시고 요나답의 후손들에게는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결국 요나답의 후손들은 하나님 앞에서 지속적으로 쓰임 받는 믿음의 가문을 이루게 됩니다. 거듭해서 말씀하실 뿐 아니라 순종하는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조상의 명령에 순종한 레갑 사람들을 칭찬하시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복을 주셨습니다.


레갑 사람들은 240년 이상 조상의 명령을 섬겼던 뚝심을 우리도 닮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유나 하나님께 드림보다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반응을 요구하십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대하는지, 그분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는지, 이웃을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사랑하는지를 보십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을 하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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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34-02)

 


끝까지 패역한 이스라엘

예레미야 34장 8-22절


 

사람들에게 모든 자유가 다 바람직한 자유는 아닙니다. 주변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 또한 사랑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자신 맘대로 하기 위하여 말씀의 요구를 거절하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 관계를 벗어나는 자유는 필경 자신을 구속하고 얽어매어 욕망의 노예로 만듭니다. 이스라엘은 어떤 자유를 추구했습니까?

 

  • 본문은 예레미야는 시드기야 왕이 계약을 맺는 일로 시작합니다. 그 동안 알고도 시행하지 않았던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을 선포하였습니다. 바벨론이 물러가자 노예의 주인들은 이 결정을 번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심판을 단행하십니다.

시드기야 계약과 백성의 불복(8-11)

하나님과의 약속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깔보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혹시 하나님께 한 약속 중 잊어버리고 지키지 못한 것이 있다면 지키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소중히 여기시길 바랍니다.

 

8시드기야 왕이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백성과 한 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계약을 맺고 자유를 선포한 후에 여호와께로부터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9그 계약은 사람마다 각기 히브리 남녀 노비를 놓아 자유롭게 하고 그의 동족 유다인을 종으로 삼지 못하게 한 것이라 10이 계약에 가담한 고관들과 모든 백성이 각기 노비를 자유롭게 하고 다시는 종을 삼지 말라 함을 듣고 순복하여 놓았더니 11후에 그들의 뜻이 변하여 자유를 주었던 노비를 끌어다가 복종시켜 다시 노비로 삼았더라(8-11)

 

남 유다가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야 했던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 중에 하나는 자기 민족의 약자들을 돌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돌보기는커녕 그들에게 갑질하며 억압하고 탈취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남 유다는 바벨론 군대에 의해 모든 성읍들이 공격을 받았습니다. 바벨론에 성읍들이 점령을 당하자, 시드기야는 긴급 상황을 인지하게 됩니다(7). 위기에 빠진 시드기야 왕과 유다 백성은 하나님 앞에서 계약을 맺는 일을 행합니다. 처음 네 절은 시드기야 왕 때 있었던 종의 해방과 관련한 특별한 사건을 보고합니다.

 

⑴ 계약의 소개(8-9)

 

시드기야 왕은 어려운 상황에 처하자 나름대로 노력을 합니다. 먼저 이스라엘은 자기 동족을 종으로 삼지 못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시드기야 왕의 주도로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백성, 이 자유를 선포하기로 계약을 맺었습니다(8). 그 계약은 ‘사람마다 각기 히브리 남녀 노비를 놓아 자유롭게 하고 그의 동족 유다인을 종으로 삼지 못하게’하는 것이었습니다(9). 계약은 곧 실행에 옮겨졌습니다. 그 계약의 내용이 같은 민족인 히브리 남녀 노비를 모두 풀어 주어 자유롭게 하기로 하나님과 약속합니다. 시드기야의 이런 행동에 고관들과 백성들이 가담을 했습니다. 그리고 종들을 놓아 주었습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나라를 빼앗기면 수많은 종들도 필요 없습니다.

이 약속은 옛날 모세 때부터 7년마다 모든 종을 풀어 주던 율법과 관련이 있었습니다(신 15:12). 이것은 비록 종이라고 해도 지나치게 학대해서는 안 되고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자유롭게 풀어 주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⑵ 계약의 실천(10)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비를 자유롭게 하고 다시는 종을 삼지’ 않겠다고 계약에 참여한 자들은 그 계약에 따라 종들을 풀어주었습니다(10). 하나님께서는 불변하시고 진실하셔서 하나님과 맺은 약속은 꼭 지키기를 원하십니다. 시편 기자는 ‘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 사방에 있는 모든 자도 마땅히 경외할 이에게 예물을 드릴지로다’(시편 76: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⑶ 계약의 파기(11)

 

얼마 후에 계약에 참여한 자들이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자유롭게 놓아준 종들을 도로 데려다가 다시 종으로 부렸습니다(11). 사건의 과정만 평가 없이 보고하고 그 배경이나 동기에 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단락의 마지막 두 절을 통해서야 계약 체결과 파기의 배경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너희에게서 떠나간 바벨론 왕의 군대’(21)와 ‘내가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 성읍에 다시 오게 하리니’(22)는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공격하다가 물러났음을 전제합니다.

37장 5절에 따르면 애굽의 바로 군대가 출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에서 일시적으로 물러났습니다. 계약 체결이 바벨론 군대에 의한 예루살렘의 포위 공격과 관련됐다면 종을 해방하기로 계약을 맺은 동기와 목적이 비교적 분명해집니다. 세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① 군사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종은 징집 대상이 아니지만 해방된 종은 자유민으로 징집 대상이 되기에 병력을 확충하기 위해 해방했을 수 있습니다. ② 경제적 측면에서 보자면, 주인은 종의 먹거리를 책임져야 했다. 평시에는 노동으로 되갚을 수 있었지만, 전시에는 주인에게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주인은 부족한 양식을 밭에 나가 일하지도 않고 노는 종에게 나눠 주어야 했습니다. ③ 종교적 측면에서 보자면, 여호와만이 바벨론 군대의 포위 공격으로부터 예루살렘을 지켜주실 수 있기에 그분의 도움을 기대하며 계약을 맺었을 수 있습니다.

바벨론 군대에 포위당한 예루살렘의 형편과 계약을 주도한 왕과 적극적으로 참여한 예루살렘 백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보면 군사적·경제적·종교적 요인이 모두 종을 해방하는 동기와 목적으로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계약에 참여했던 자들은 목적이 달성되자 종을 해방하는 계약을 없었던 일로 하고 무시했습니다. 애굽의 개입으로 바벨론 군대가 철군하는 것을 보고 이들은 예루살렘의 안전이 확보됐다고 생각했던 것 같았습니다. 바벨론 군대의 철군으로 노동력이 다시 필요해졌기에 이들은 자신들이 풀어주었던 종들을 다시 데려와 일을 시켰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시적으로만 계약을 지켰지 지속적으로는 지키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내내 지키지 않다가 어려운 일을 당하니깐, 하나님의 환심을 사기 위해 시드기야 왕의 개혁에 동참합니다. 유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순종한척하다가 시간이 지나서 환경이 좋아지면 순종하지 않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유다 백성(12-16)

우리는 ‘갑질’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성도들은 절대로 소유의 많고 적음에 따라 지체를 착취하거나 차별대우 그리고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소유에 상관없이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신 것은 약자들을 관심과 돌봄으로 베푸셨습니다.

 

12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13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너희 선조를 애굽 땅 종의 집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그들과 언약을 맺으며 이르기를 14너희 형제 히브리 사람이 네게 팔려 왔거든 너희는 칠 년 되는 해에 그를 놓아 줄 것이니라 그가 육 년 동안 너를 섬겼은즉 그를 놓아 자유롭게 할지니라 하였으나 너희 선조가 내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였느니라 15그러나 너희는 이제 돌이켜 내 눈 앞에 바른 일을 행하여 각기 이웃에게 자유를 선포하되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에서 내 앞에서 계약을 맺었거늘 16너희가 돌이켜 내 이름을 더럽히고 각기 놓아 그들의 마음대로 자유롭게 하였던 노비를 끌어다가 다시 너희에게 복종시켜 너희의 노비로 삼았도다(12-16)

 

하나님의 계약을 헌신짝처럼 내던진 유다 백성들의 파렴치한 행태를 여호와께서 당신께 대한 불순종으로, 특히 여호와 신앙의 초석에 속하는 출애굽과 언약의 시각에서 고발하신다(13). 종의 해방이 출애굽과 언약의 목표로 제시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년에 동족 히브리 종들을 모두 해방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의 종 되었던 데서 해방되어 한 형제가 된 운명 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⑴ 말씀의 계시(12)

 

처음에는 주인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종들을 성전에 풀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제물로 쓰일 송아지를 둘로 쪼개고 그 사이를 지나게 했습니다. 만약 하나님과의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쪼개진 송아지처럼 죽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⑵ 조상들의 불순종(13-14)

 

이스라엘 백성들이 히브리 종들을 놓아주는 모습을 하나님께서 보셨습니다. 그래서 적군인 바벨론을 예루살렘 에워쌌던 애굽 군대들과 싸우도록 예루살렘에서 군대를 물러가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 눈앞에서 적 바벨론이 사라지자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풀어 주었던 종들을 다시 데려다가 종으로 삼았습니다.

출애굽이 종을 해방하는 사건이라면, 종의 해방이 곧 ‘너를 애굽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출애굽기 20:2; 신명기 5:6)께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언약을 맺으며 이르기를’은 마치 종의 해방과 관련해서 언약을 맺은 것 같은 인상마저 줍니다. 많은 율법 가운데 하나인 종의 해방에 관한 규정이 언약 준수의 척도가 됩니다. 일곱째 해에 종을 자유롭게 놓아주라는 명령을 어긴 것이 곧 여호와께 대한 불순종이요 언약 위반입니다. 종의 해방에 관한 규정을 준수하지 않음으로써 조상들은 언약을 파기했고 더 나아가 출애굽 전통마저 무시했습니다(14).

 

⑶ 현 세대의 불순종(15-16)

 

이제 시선을 과거에서 현재로 돌립니다. 여께서 먼저 ‘너희의 돌이킴’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십니다(15). 시드기야의 계약에 따른 종의 해방이 여호와 보시기에 ‘바른 일’이었습니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에서 내 앞에서는 계약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체결됐음을, 곧 여호와께서도 계약에 참여하셨음을 보여줍니다. ‘너희의 선조’로부터 돌이켜 바른길을 가는 듯 했지만,'너희'도 결국에는 다르지 않았다. 이들은 여호와 앞에서 맺은 계약을 폐기하고 그분의 이름을 더럽혔습니다(16). 이들은 신실함이 없는 거듭 돌이키는 자들이었습니다. 조상들의 불순종에서 ‘돌이켜’ 여호와 보시기에 바른 일을 행한 자들이 이제는 바른 일에서 ‘돌이켜’ 자유롭게 놓아준 종들을 끌어다가 ‘다시’ 종으로 부립니다.

이렇게 변질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동을 보고 하나님께서 다시 징계를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행동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과 같습니다. 그들은 어려운 일이 생길 때는 약속을 지키겠다고 말했지만, 어려움이 지나가고 난 후에, 그들은 다시 하나님의 약속을 어기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심판에 대한 경고(17-22)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죄를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죄를 지으면 회개하도록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회개를 거부하면 뒤따르는 결과는 참혹한 심판입니다.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회개는 빠를수록 좋습니다.

 

17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각기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포한 것을 실행하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너희를 대적하여 칼과 전염병과 기근에게 자유를 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너희를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에 흩어지게 할 것이며 18송아지를 둘로 쪼개고 그 두 조각 사이로 지나매 내 앞에 언약을 맺었으나 그 말을 실행하지 아니하여 내 계약을 어긴 그들을 19곧 송아지 두 조각 사이로 지난 유다 고관들과 예루살렘 고관들과 내시들과 제사장들과 이 땅 모든 백성을 20내가 그들의 원수의 손과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먹이가 될 것이며 21또 내가 유다의 시드기야 왕과 그의 고관들을 그의 원수의 손과 그의 생명을 찾는 자의 손과 너희에게서 떠나간 바벨론 왕의 군대의 손에 넘기리라 22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 성읍에 다시 오게 하리니 그들이 이 성을 쳐서 빼앗아 불사를 것이라 내가 유다의 성읍들을 주민이 없어 처참한 황무지가 되게 하리라(17-22)

 

이처럼 약속을 변심하는 유다 백성들에 대해 하나님께서도 변심 하십니다. 약속을 뒤집는 유다 백성들을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무서운 심판을 준비하십니다.

 

⑴ ‘너희’의 심판(17)

 

하나님께서는 돌려보냈던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입니다. 바벨론 왕이 그들을 공격하여 성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죽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당신 이름을 더럽힌 ‘너희’의 불순종에 책임을 물으신다. ‘자유를 선포하다’(17)를 두 번 사용해 상응하는 징벌을 선언합니다. 제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포하라는 명령을 듣지 않은 자들에 맞서 여호와께서 ‘칼과 전염병과 기근’에게 자유를 선포하십니다. 동포에게 자유를 주지 않은 자들을 칼과 전염병과 기근이 자유롭게 치도록 허락하십니다. 세상 모든 나라에 공포의 대상이 될 정도로 심판은 혹독하게 집행됩니다.

 

⑵ ‘그들’의 심판(18-22)

 

유다 백성들이 형제들에게 선포한 자유를 실행하지 않았으니 하나님께서도 이 백성에게 행할 언약적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유다 백성에게는 전쟁과 굶주림과 무서운 병들이 그들을 자유롭게 찾아들도록 허락 하십니다.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계약 조인에 따른 제의적 의식과 언어유희를 활용해 계약을 어긴 자들에게 멸망의 심판을 선언합니다(18-19). 송아지를 둘로 쪼개고 그 사이로 지나가며 맺은 계약을 내버린 자들을 여호와께서 모두 쪼개진 송아지처럼 만드실 것입니다. 계약 체결 의식을 위해 두 조각으로 가른 송아지의 운명이 계약을 파기한 자들의 운명이 됩니다. 계약을 조인할 때 행하는 이 의식(참조, 창세기 15:10,17)은 계약을 위반하면 조각난 짐승처럼 쪼개짐을 당할 것을 맹세하는 일종의 자기 저주 의식입니다. 조각난 송아지 사이로 ‘지나가며’ 규정의 준수를 의무로 받아들인 자들이 바로 계약을 ‘어긴 자들’입니다. 계약에 ‘가담한’ 자들(10)이 계약 안에 머물지 않고 그대로 지나가버렸습니다.

시드기야가 주도한 계약이 15절에서는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에서 내 앞에서’ 맺은 계약으로, 18절에서는 ‘내 계약’으로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계약의 증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계약의 당사자가 되십니다. 시드기야의 주도로 이루어진 계약 위반은 여호와의 계약을 위반한 것이기에 그분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징벌의 방식과 멸망의 철저성에 초점을 맞춰 심판을 선언합니다(20). 여호와께서 계약을 어긴 자들을 ‘그들의 원수의 손과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의 손’에 넘겨 ‘그들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먹이’가 되게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심판의 도구로 활용해 내 계약을 어긴 자들을 남김없이 진멸하십니다. 전면적인 파국입니다. 들판에 버려진 수많은 시체를 날짐승과 들짐승이 뜯어 먹지만, 그것들을 쫓아내고 시체를 지켜줄 사람이 없습니다(참조. 7:33; 16:4).

시드기야 왕과 그의 고관들에게 주어지는 심판의 말씀으로 일부를 제외하고 20a절과 거의 문자적으로 일치합니다(21). 계약을 주도한 시드기야도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집니다. ‘너희에게서 떠나간 바벨론 왕의 군대’는 주전 588년에 유다를 돕기 위해 애굽의 군대가 출정한 사건과 관련된 언급입니다(참조. 37:5). 애굽 왕 호프라(Hophra)가 원정에 나섰다는 소식을 듣고 바벨론 군대는 일시적으로 예루살렘의 포위를 풀었습니다. 결과는 물론 바벨론 원정에 나섰다는 소식을 듣고 바벨론 군대는 일시적으로 예루살렘의 포위를 풀었다. 결과는 물론 바벨론의 승리였습니다.

다시 예루살렘 성의 멸망을 선포합니다(22). 마음이 ‘변하여’ 자유롭게 놓아준 종들을 ‘끌어다가’ 다시 종으로 부린 자들에 맞서(11; 참조 15-16) 여호와께서도 철군한 바벨론 군대에게 명령하여 성읍에 다시 ‘오게’ 하십니다. 이제 중도에 철군하는 일은 없습니다. 예루살렘은 불길에 휩싸이고(참조 39:8), 유다 성읍들은 폐허가 됩니다.


회개의 열매가 없으면 참 회가 아닙니다. 벗어나야 할 것에는 벗어나고 매여야 할 것에는 매이는 것이 회개입니다. 둘 사이에 걸쳐 있는 것은 참된 회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격성을 무시한 채 그분을 이용하려고 하는 것은 회심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을 대하는 모습이 변해야만, 하나님께서도 성도들을 향한 모습이 변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맺은 약속은 어떤 일이 있어도 꼭 지킬 수 있도록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형편에 따라 바꾸는 믿음은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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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34-01)

 


심판 중에도 끝까지 남겨놓은 은총

예레미야 34장 1-7절


 

사람에게나 동물에게 무서워서 기를 펴지 못하고 움츠러드는 것을 일컬어 ‘주눅 들었다’고 합니다. 가끔 사람이나 환경 앞에서 주눅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꼼짝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결코 주눅 들어서는 안 됩니다.

 

  • 하나님의 경고대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예루살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멸망은 초읽기에 다다랐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왕 시드기야는 항복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다시 변경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과 함께 그리고 여전히 남은 하나님의 은총의 기회를 전합니다.

 

피할 수 없는 예루살렘의 멸망(1-2)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시드기야 왕에게 예루살렘 성의 멸망을 경고하십니다. 바벨론의 공격을 받아 머지않아 함락될 것입니다. 이는 그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1바벨론 왕 느부갓네살과 그 모든 군대와 그 통치하에 있는 땅의 모든 나라와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과 그 모든 성읍을 칠 때에 말씀이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2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는 가서 유다 왕 시드기야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성을 바벨론 왕의 손에 붙이리니 그가 이 성을 불사를 것이라(1-2)

 

느헤미야는 지금까지 감옥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당당하게 전합니다. 새롭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바벨론 왕에게 붙이실 것입니다. 그리고 시드기야 왕은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서 바벨론 왕 앞에 설 것을 예언합니다.

신탁의 시대적 배경을 제공해주는 1절은 시점보다는 바벨론의 엄청난 군 병력에 초점을 맞춥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과 그의 모든 군대와 그의 통치 하에 있는 땅의 모든 나라와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과 그 모든 성읍을 칠 때’ 여호와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했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다를 공격하는 바벨론의 군대를 이처럼 자세히 서술하는 곳은 여기가 유일합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동원 가능한 모든 병력을 거느리고 예루살렘과 유다를 공격합니다. 군사력에서 비교될 수 없는 변방의 유다가 앗수르의 뒤를 이어 근동의 패권을 장악한 바벨론의 공격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7절의 정보는 좀 더 구체적입니다. 유다의 모든 성읍이 점령당하고, 예루살렘 방어의 전략적 요충지 라기스와 아세가만 남습니다. 이 두성마저 함락된다면 예루살렘은 완전히 고립됩니다. 예루살렘 다음으로 중요했던 라기스(Telled-Duweir)는 예루살렘 남서쪽으로 40km 떨어진 곳에, 아세가(Tell ez-Zakariyeh; 참조. 수 10:10-11; 15:35; 삼상 17:1; 대하 11:9)는 예루살렘 남서쪽으로 대략 30km, 라기스 북쪽으로 18km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이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대항하는 전쟁을 멈추라고 합니다. 심판을 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인정하고 지금이라도 심판을 수용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는 항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받아 들려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마음대로 살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누릴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 앞에서도 당당하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비록 왕이 라고 해도 눈치 보거나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파할 수 있습니까?

 

전달할 신탁 내용(3-5)

하나님의 마음이 심판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개념은 하나님께서 본질적으로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시며, 인간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신다는 사실에 기초합니다. 심판은 하나님의 공의의 표현이지만, 그 최종 목적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들여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며, 이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완전히 실현됩니다.

 

3그러나 유다 왕 시드기야여 나 여호와의 말을 들으라 나 여호와가 네게 대하여 이같이 말하노라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5평안히 죽을 것이며 사람이 너보다 먼저 있은 네 열조 선왕에게 분향하던 일례로 네게 분향하며 너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슬프다 주여 하리니 이는 내가 말하였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3-5)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신탁을 받아 시드기야 왕에게 전한 내용입니다. 예루살렘이 바벨론 왕에게 함락될 것이며 시드기야는 포로로 잡혀가지만, 죽을 때는 평안히 죽고 백성들이 그를 위해 애도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1) 첫 번째 신탁: 시드기야의 절망적 운명(2-3)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신탁이 전달될 상대를 분명하게 알려주십니다(2). 예레미야는 유다 왕 시드기야에게 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소유적 관계를 보여 주는 표현으로, 현재의 문맥에서는 ‘유다의 왕 시드기야’와 짝을 이룹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기에 유다 왕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21:1과 37:3에서는 시드기야가 예레미야에게 신하들을 보내 신탁을 구하고, 37:17과 38:14에서는 시드기야가 요나단의 집 또는 시위대 뜰에 갇혀 있는 예레미야를 불러 여호와의 신탁을 묻습니다. 예레미야를 통해 전달된 여호와의 말씀에 시드기야가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달리 언급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유다 왕 시드기야의 파국적 운명에 큰 관심을 갖고 개입하시지만, 정작 위기의 당사자인 시드기야는 그분의 신탁에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신탁의 주제는 예루살렘 성의 멸망과 시드기야의 사로잡힘인데, 후자에 대해 무게가 주어집니다. 성의 운명에 관해서는 두 개의 동사가, 시드기야의 운명에 관해서는 여섯 개의 동사가 사용됩니다. 동사 ‘넘기다’와 ‘바벨론 왕의 손’은 양쪽에 다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시기에 시드기야 왕이 ‘그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의 손’에 넘겨집니다. 예루살렘과 시드기야의 운명이 하나로 묶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의 완전한 파괴와 시드기야의 사로잡힘을 결정하셨기에, 막연한 또는 최소한의 소망마저(참조. 21:2) 다 사라집니다. 시드기야 왕 제십일년 넷째 달 아홉째 날에 점령당한(39:2; 52:6) 예루살렘은 한 달 후인 다섯째 달 열째 날에 화염에 휩싸입니다(52:12-13). 신탁이 전하는 시드기야의 절망적 처지는 39:4-7과 52:7-11에 그대로 나옵니다. 성벽이 깨지자 시드기야 왕은 야음을 틈타 왕실 정원길을 따라 성벽 사이의 통로를 지나 도성 밖으로 탈출하여 아라바 쪽으로 피신하지만 성공하지 못합니다. 갈대아 군대의 추적을 받아 여리고 평지에서 사로잡혀 하맛 땅 립나(리블라)의 느부갓네살의 사령부로 끌려갑니다. 느부갓네살은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아들들을 죽인 후에 그의 두 눈을 뽑고 사슬로 묶어 바벨론으로 끌고 갑니다. 시드기야는 죽는 날까지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2) 두 번째 신탁 : 예루살렘의 운명(4-5)

 

예루살렘의 운명을 먼저 짧게 언급했던 첫 번째 신탁과 달리 두 번째 신탁은 오직 시드기야의 운명에 집중합니다. 2절의 ‘유다의 시드기야 왕’을 호격으로 사용하는 권면의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라’는 10절의 경우처럼 순종의 의미도 함축합니다(10절의 ‘듣고’와 ‘순복하여’는 같은 동사 ‘듣다’의 번역이다). ‘여호와께서 네게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는 예외적인 표현으로, 여호와께서 시드기야의 운명을 결정하시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신탁의 주제는 시드기야가 맞게 될 죽음입니다. 시드기야는 칼에 맞아 죽지 않고 평화롭게 죽고, 사람들은 정상적인 장례 의례에 따라 이전 왕들의 죽음을 애도했던 것처럼 그에게도 격에 맞게 불을 피우고 애곡을 할 것입니다. ‘칼에 의한 죽음’에 대비되는 ‘평화로운 죽음’은 불행이나 폭력으로 세상을 떠나지 않고 제 명을 다한 죽음을 가리킵니다. ‘분향하던 것’과 ‘분향하며’는 각각 명사 ‘불에 태움’을 의미하는 ‘미스러 포트’와 ‘불에 태우다’를 의미하는 동사 ‘사라프’의 번역입니다. ‘선왕들에게 분향하던(불에 태우던) 것 같이’는 ‘불에 태우는 의식’이 전통적인 장례 의식의 일부에 속했음을 시사해줍니다. 다른 표현이 사용됐지만, 역대하 16:14; 21:19도 유다에서는 왕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불을 피우는 의식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시신 가까이에 불을 켜놓고 그 위에 유향이나 향신료를 태웠던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 언급된 애곡은 장례 의식의 핵심에 속합니다. ‘슬프다 주여’는 여기와 22:18에만 나오는 애도의 표현으로(참조. 왕상 13:30), 시드기야의 죽음과 여호야김의 죽음을 서로 대비해줍니다. 시드기야를 위하여 사람들이 ‘슬프다 주여’하고 애곡하지만, 여호야김을 위하여는 ‘슬프다 주여 슬프다 그 영광이여’하고 통곡하지 않습니다. 불의와 불법으로 통치한 여호야김의 (저주받은) 죽음과 다른 죽음이 시드기야에게 약속됩니다. 첫 번째 신탁은 시드기야에게 사로잡힘과 유배를 선포하고, 두 번째 신탁은 평화로운 죽음을 약속합니다. 두 신탁 사이에 있는 긴장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일부는 후자가 전자의 심판을 조금 완화하고 있다고 해석하지만, 고대적 사고에 따르면 유배지에서의 죽음은 평화로운 죽음이 될 수 없습니다. 평화로운 죽음과 왕에게 걸맞은 장례 의식은 시드기야가 예루살렘에서 죽게 될 것을 전제합니다. 예레미야서의 보고(참조. 39:4-7;52:7-11; 왕하 25:4-7)에 따르면 시드기야는 극히 비참하게 유배지의 감옥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시드기야의 운명이 질적으로 상이하게 언급됐다면, 두 말씀은 선택의 문제에 속하게 됩니다. 달리 말하자면, 두 번째 신탁은, 본문에 직접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조건이 함축된 약속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여호와에 의해 확정된 운명이기에 피할 수 없습니다. 유일한 가능성은 바벨론에 항복하고 완전한 파멸을 모면하는 것뿐입니다(참조. 21:8-10). 시드기야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여호와의 심판 의지로 받아들이고 바벨론에 항복한다면, 그에게는 평화로운 죽음과 유다 왕에 합당한 장례 의식이 허락될 것입니다(참조. 38:17-18).

 

바벨론 군대의 침략(6-7)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면 산성이고 방패이십니다. 유다가 멸망한 것은 바벨론이 강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켜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셔야 우리 삶이 안전할 수 있습니다. 아직까지 하나님께 맡기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하나님께 맡기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는 유다의 많은 성들은 너무나 쉽게 바벨론 군대에 의해 점령당했습니다. 우리의 삶도 하나님이 지켜 주셔야 넘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6선지자 예레미야가 이 모든 말씀을 예루살렘에서 유다 왕 시드기야에게 고하니라 7때에 바벨론 왕의 군대가 예루살렘과 유다의 남은 모든 성을 쳤으니 곧 라기스와 아세가라 유다의 견고한 성읍 중에 이것들만 남았음이더라(6-7)

 

시드기야의 실패는 믿음과 자기신념을 구별하지 못한 맹신과 자기기만이 가져다준 비참한 결말을 봅니다. 바벨론 왕의 군대는 계속해서 이스라엘 성들을 침략하고 점령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전쟁은 너무나 손쉽게 진행되었습니다.

여호와의 명령(2a)을 예레미야가 그대로 이행했다는 6절의 보고는 매우 특이합니다. 예언자에 의한 실행보고가 주요 구성 요소에 속하는 표적행위의 경우와 달리 말씀 선포에서는 일반적으로 명령 이행에 관한 보고가 나오지 않습니다. 아마도 예레미야의 즉각적이고도 단호한 순종과 시드기야의 침묵(불순종)을 대조하기 위한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예언자 예레미야를 보내 유다 왕 시드기야에게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는 길을 알려주셨지만, 그는 듣기만 하고 따르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는 돌출적입니다. 32:2에 따르면 예레미야는 왕의 궁중에 있는 시위대 뜰에 갇혀 있었는데, ‘예루살렘에서’는 그의 출입이 자유로웠음을 전제합니다. 양자를 함께 보면, 예레미야가 전한 ‘이 모든 말씀’을 들은 시드기야의 반응은 예레미야의 체포와 구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시드기야 왕에게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습니다. 기회를 주셨을 때,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고 돌이켜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하며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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