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32-04)
내게 기쁨으로 복을 주시는 하나님
예레미야 32장 36-44절
밤은 캄캄하기 때문에, 어렵고 힘든 시간들을 종종 밤으로 비유합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현실에도 이런 밤들은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이 어려움을 이길 수입니까? 어려움이 닥쳤을 때 그 사람의 진짜 신앙이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신앙이 어려움을 이겨 가는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참고 기다리지만 신앙이 없는 사람은 끝까지 인내하지 못합니다.
- 예루살렘 성이 바벨론의 손에 넘겨지는 파국적 재앙의 신학적 원인을 알려주신 후에, 여호와께서 그 이후에 있을 구원을 약속해주십니다. 멸망의 원인에 대한 바른 깨달음 없이는 새로운 출발도 없습니다. 우상숭배의 필연적 결과가 예루살렘과 유다의 멸망임을 알아야 합니다.
징계하시는 하나님(36-42)
환자가 자기 병을 모르면 건강 한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구원이 얼마나 과분한 것인지 알게 되면, 구원 받기 전에 우리들의 모습이 얼마나 비참한 상태였는지, 앞으로 얼마나 더 비참한 삶이 계속 될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세상에 속지 않을 수 있습니다.
36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말하는 바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말미암아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긴 바 되었다 하는 이 성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37보라 내가 노여움과 분함과 큰 분노로 그들을 쫓아 보내었던 모든 지방에서 그들을 모아들여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여 안전히 살게 할 것이라 38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39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길을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 40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41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 42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이 백성에게 이 큰 재앙을 내린 것 같이 허락한 모든 복을 그들에게 내리리라(38-42)
여호와께서 예루살렘 성을 ‘갈대아인의 손과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손에 넘길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려주신(28-35) 후, 회복에 관한 말씀을 주십니다. 여호와의 약속은 예레미야의 탄식에 대한 본격적인 답변으로, 두 단락으로 구성됩니다. 첫째 단락(36-42)은 유배 민의 귀향과 영원한 언약과 축복을 약속하고, 둘째 단락(43-44)은 유다 온 땅에서 밭이 다시 매매될 것을 약속합니다. 특이하게도 각 단락은 ‘너희’의 탄식을 인용하는 말로 시작합니다. 예레미야 개인의 탄식 기도(16)에 대한 응답으로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주신 말씀이기에(26) 원래는 2인칭 단수 ‘너’가 사용돼야 합니다. 이 두 인용문을 제외하면, 고발과 심판의 대상이나 구원의 대상이나 언제나 3인칭 복수 ‘그들’로 나옵니다. 기도에 따른 여호와의 응답이지만 예레미야에게 직접 주시지 않은 것입니다. 문맥으로 보면 예레미야 개인의 탄식이 여호와에 의해 ‘너희’ 공동체의 탄식으로 수용된 것입니다. 응답이 공동체를 지향하기에 36절은 신명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용합니다. 사실 36절과 43절에 인용된 ‘너희’의 탄식은 예레미야의 탄식(25b)과 내용상 차이가 없습니다. ‘너희’와 예레미야 모두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과 유다의 멸망을 탄식 합니다. 정리하자면, 심판 이후를 내다보는 예레미야의 탄식과 간구는 공동체를 대신하여 드려진 것으로, 그의 기도와 여호와의 답변은 멸망의 시대를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는 가르침입니다.
⑴ 성에 관한 ‘너희’ 말의 인용(36)
‘그러나’는 원문에 따라 연속성을 보여 주는 ‘그러므로 이제’로 옮겨야 합니다. 심판(28-29절)과 고발(30-35절)로 이뤄진 첫 번째 말씀도 ‘그러므로’로 시작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36절에는 ‘이제’가 더 나옵니다. 심판의 말씀과 구원이 모두 27절의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에 걸리는데, 무게중심이 구원에 놓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상숭배의 늪에 빠진 이스라엘을 바벨론의 손에 넘겨 징벌하시지만, 그분의 시선은 처음부터 심판 이후의 회복을 내다봅니다.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말미암아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긴 바 되었다’는 24절의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말미암아 이 성이 이를 치는 갈대아인의 손에 넘긴 바 되었으니’와 대체로 일치합니다.
⑵ 영원한 언약(37-40)
첫 번째 약속은 유배민의 귀향과 관련됩니다. 큰 진노로 민족들 가운데로 쫓아 보내셨던 여호와께서 이들을 다시 모든 나라에서 모아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여 안전하게 살게 하실 것입니다(38; 참조, 29:14).
유다와 예루살렘을 심판하신 분께서 이제 구원자로 함께하십니다. 통속적 사고에 따르면 한 민족의 멸망은 그 민족이 섬기는 신의 패배를 의미하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경우는 전혀 다릅니다. 예루살렘의 함락과 유배는 여호와의 징벌적 진노의 구체적 모습입니다. 심판에서는 여호와의 능력이 부정적으로 표출된다면, 구원에서는 그분의 능력이 긍정적으로 과시됩니다. 이 곳은 예루살렘과 유다를 가리킵니다. 번역을 달리했지만 ‘노여움과 분함과 큰 분노’는 21:5의 ‘진노와 분노와 대노’와 같습니다. 31절에서는 처음 두 표현 ‘노여움’과 분만 나옵니다. 두 번째 약속은 신학적 차원에 속합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바벨론의 손에 넘겨주시고 당신 백성을 포로로 잡혀가게 하셨음은 다른 한편으로는 출애굽 이후 계속돼온 언약 관계의 종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파기된 언약 관계의 회복 없이는 구원도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조상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시고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셨던 것처럼 이제 민족들 가운데 유배살이하던 자들을 돌아오게 하시고 언약 관계를 회복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다시 이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들은 그 분의 백성이 됩니다(38; 참조 . 참조 24:7; 30:22; 31:1,33). 회복된 언약 관계가 파탄에 직면하는 일이 없도록 언약을 지킬 수 있는 길도 마련해 주십니다.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은 여호와와 우상들을 겸하여 섬기다가 심판을 받았습니다. 다시는 우상에게 한눈팔지 않고 당신만 섬길 수 있도록 여호와께서 유배민들에게 한 마음과 한 길을 주십니다(39; 참조. 31:33). ‘한 마음’(참조. 역대상 12:30; 역대하 30:12)은 나누이지 않은 마음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와 우상들을 겸하여 섬기다가 심판을 받았습니다. ‘한 길’도 의미상 다르지 않습니다. 혼합주의에 빠진 자들은 열심히 우상을 찾아다니다가도 환난을 당하면 또 여호와를 찾아와서 구원을 요청했습니다(참조, 2:27).
앞으로는 두 마음을 품거나 곁길로 빠지지 않고 오직 여호와를 경외함으로써 자신뿐만 아니라 후손까지도 복을 받습니다. 새로이 맺게 될 언약(참조. 31:31-34)은 ‘영원한 언약’입니다. 쌍무적이었던 시내산 언약과 달리 여호와께서 일방적으로 의무를 지시기에 언약은 파기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서 등을 돌리지 않고 그들이 잘되게 해주시고, 또 이스라엘이 그분을 떠나는 일이 없도록 그들의 마음에 경외심을 주십니다(40).
⑶ 축복(41-42)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이 언약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모든 필요조건을 충족시켜주신다. 언약의 파기가 초래한 저주의 시대가 끝나고 언약의 회복과 함께 축복의 시대가 전개됩니다. 여호와께서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가나안에 심으십니다(41). ‘분명히(성실하게, 신실하게) 심다.’는 구약성경에 한 번만 나오는 표현으로, 구체적 의미는 불분명합니다. 2:21과 관련된 표현이라면 왕정 시대처럼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로 변질하는 일이 없게 심으신 포도나무를 성심껏 돌보실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가 여호와께 적용된 경우도 여기가 유일합니다. 원래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고 기대하셨던 순종의 모습입니다(참조, 신명기 4:29; 6:5 등등). 이스라엘이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당신을 섬기도록 여호와께서 직접 본을 보여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둥을 돌리지 않듯이 이스라엘은 여호와에게서 돌아서지 말아야 하고(40), 여호와께서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이스라엘을 돌보시듯이 이스라엘은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여호와를 경외하여야 합니다.
42절은 37절의 경우처럼 심판과 구원을 하나의 연속된 사건으로 언급합니다. ‘노여움과 분함과 큰 분노로 그들을 쫓아 보내었던’ 여호와께서 이들을 유배지에서 다시 고토로 ‘돌아오게 하여 안전히 살게 하시고, 이 백성에게 이 (모든) 큰 재앙’(참조. 16:10)을 내리신 그분께서 이제는 허락한 모든 복을 그들에게 내리 십니다.
유다의 재건(43-44)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혹독하게 징계하신 것은 약속하신 복을 온전히 부어주시기 위함입니다. 오물로 가득 찬 그릇은 온전히 비워야만 생수로 채울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빈 그릇처럼 사람도 짐승도 없는 폐허가 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곳을 다시 사람들로 북적거리게 하시고, 평지와 고지가 다 유다 백성의 일터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43너희가 말하기를 황폐하여 사람이나 짐승이 없으며 갈대아인의 손에 넘긴 바 되었다 하는 이 땅에서 사람들이 밭을 사되 44베냐민 땅과 예루살렘 사방과 유다 성읍들과 산지의 성읍들과 저지대의 성읍들과 네겝의 성읍들에 있는 밭을 은으로 사고 증서를 기록하여 봉인하고 증인을 세우리니 이는 내가 그들의 포로를 돌아오게 함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43-44)
마지막 두 절은 다시 처음의 표적행위(7-15)로 돌아갑니다. ‘너희’의 말은 내용상 25b절에 일치합니다. 25절과 36절에서는 ‘이 성’(예루살렘)이 갈대아인의 손 또는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졌다고 말하고, 여기서는 ‘이 땅’(유다 땅)이 갈대아인의 손에 넘겨졌다고 말합니다.
⑴ 밭 매매의 재개(43)
예루살렘의 멸망은 곤 유다의 멸망입니다. ‘이 땅에서 사람들이 밭을 사되’는 15절의 경우처럼 수동의 문장으로, 매매 행위가 강조됩니다. 여호와께서 유다 백성의 운명을 되돌리십니다. 짐승마저 살 수 없을 정도로 폐허가 된 에루살렘과 유다에서 밭을 사고파는 일이 재개됩니다. 사람들이 돈을 주고 밭을 사고 제약서에 서명하고 봉인하고 증인을 세웁니다(10). ‘이 땅’의 범위가 유다로 한정되고 북왕국 이스라엘은 제외됩니다(참조. 17:26; 33:13).
⑵ 온 땅에서의 밭 거래(44)
‘베냐민 땅’은 예루살렘 북쪽 지역을, ‘예루살렘 사방’은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 지역을, ‘유다 성읍들’은 방어시설이 갖춰진 유다의 주요 성읍들을, ‘산지’는 예루살렘 남쪽의 유다 산지를, ‘저지대’는 유다 산지와 헤인 평야 사이의 완만하게 경사진 구릉지대를, ‘네겝’은 유다 산지 남쪽의 광야 지대를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겠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심판은 그분의 떠남에 있었다면, 회복은 그분의 함께하심에 있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오게 해주시고 새 언약을 세워주시고, 허락한 모든 복을 주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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