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32-03)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이유
예레미야 32장 26-35절
세상의 갑들은 죄를 지어도 잘 나가고 잘 살아갑니다. 죄와 동거동락하면서도 자책도 없습니다. 너나 잘하라고 말하지만 나만 잘해선 요동 않는 사회입니다. 열어놓은 보마다 죄악이 무한 방류되는 4대강 수질만도 못한 이 사회를 어찌해야 합니까!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끙끙 앓고 계십니다.
- 예레미야의 기도에 대한 여호와께서 응답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여호와의 무관심이나 무능력이 불러온 참사가 아닙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배반과 우상숭배가 초래한 여호와의 징벌적 재앙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26-27)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탄식 밖에 나올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절망의 상황에서 생명을 만들어 오신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 환경에서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수 있습니다. 절망을 보고 절망하든지, 아니면 그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든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26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27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26-27)
예레미야는 조카 하나멜의 기업 물을 자가 되었습니다. 이는 크게 확대해서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기업 무를 자가 되시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선지자적 행동입니다. 나라가 망하면서 곧 포로로 잡혀 가야한 상황에서 땅을 사고파는 일이 아무 의미 없어보였지만, 하나님께 반드시 이 나라를 회복시키실 것이며, 하나님 나라는 다시 서게 될 것이니 그 땅을 사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점점 멸망되어갈 쯤에 하나님께서 ‘밭을 사라’는 명령에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예레미야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탄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고 과거에 어떤 놀라운 일을 이루셨는지를 기억하는 고백이 있었습니다.
⑴ 말씀의 계시(26)
예레미야의 기도에 여호와께서 응답하십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하나님의 무관심이나 무능력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우상숭배가 초래한 징벌이었습니다. 결국에는 회복의 메시지를 주시지만, 그 전에 예루살렘 성의 멸망을 선포하시고 그 이유를 알려 주십니다. 여호와의 구원을 원한다면 멸망의 원인을 알아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이스라엘의 구원자였습니다. 진노는 일시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다 행한 대로 갚으셨다면,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들처럼 사라졌을 것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이렇게 작은 나라가 이처럼 오래 유지된 경우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이나 유다의 우수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26절은 연결구에 해당합니다. 1절의 경우처럼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합니다. 예레미야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지지만, 예레미야에게 직접 주어진 말씀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야 할 그분의 상대는 ‘너희’입니다. ‘너희’에게 전달하도록 ‘예레미야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⑵ 여호와의 자기소개(27)
여호와의 답변은 그분의 자기소개로 시작합니다. ‘나는 여호와요’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24:7에서 여호와께서는 제1차 바벨론 유민들에게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모든 육체의 하나님’은 여기에만 나오는 표현으로, 현재의 문맥에서는 ‘인류의 모든 길을 주목하시며 그의 길과 그의 행위의 열매대로 보응하시는’(19) 하나님에 연결됩니다.
구체적으로 24절과 관련해 보자면, 갈대아인들이 예루살렘을 쳐서 빼앗지만 여호와 하나님 앞에 이들은 때가 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육체’에 불과할 뿐입니다.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는 예레미야의 주에게는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시니이다에 대한 여호와의 반응입니다. 여호와의 무한 능력을 인정하는 예레미야에게 여호와께서는 당신에게 불가능한 일이 있겠냐고 물으십니다. 물론 여호와의 질문은 답변을 요구하지 않는 수사적 질문입니다. 그렇다고 단순한 반복도 아닙니다. 양자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창조와 관련해 이 말을 하고, 여호와께서는 역사, 곧 이스라엘의 심판과 구원과 관련해 이 말을 하십니다. 전자가 창조에 근거한 일반적 진술이라면, 후자는 역사 가운데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실행 능력과 관련한 주장입니다(참조. 창세기 18:14).
심판 받을 우상숭배(28-29)
자신이 기도한 대로 응답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무력하고 무능력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기도가 이루어졌을 때, 자신도 도움도 안 되고 하나님께도 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안 들어 주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구원하신 길에 참여하고 싶은 사람은 유다의 멸망이 여호와의 연약함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의 징벌 때문이었음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28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이 성을 갈대아인의 손과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손에 넘길 것인즉 그가 차지할 것이라 29이 성을 치는 갈대아인이 와서 이 성읍에 불을 놓아 성과 집 곧 그 지붕에서 바알에게 분향하며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드려 나를 격노하게 한 집들을 사르리니(28-29)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고 말씀하신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의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모든 육체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바벨론의 손에 넘겨 불에 타게 하십니다. 불가능을 모르시는 분의 결정이기에 성은 어떤 경우에도 멸망을 피하지 못합니다. 28절은 ‘바벨론 왕의 손에’ 대신 ‘갈대아인의 손과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손에’가 나온 것을 제외하면 3b절 후반의 말씀과 문자적으로 일치합니다. 예루살렘의 점령으로 재앙이 끝나지 않습니다. 바벨론 점령군은 성에 불을 질러 그 지붕에서 바알에게 분향하며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드려 나를 격노하게 한 집들을 모두 잿더미로 만들 것입니다(29). 성의 심판이 만연한 우상숭배 때문임을 시사해줍니다. 지붕에서의 분향은 아마도 가나안을 통해 받아들인 앗수르와 바벨론의 일월성신 숭배를 가리킵니다. 예루살렘 주민은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드렸습니다. 성 안에 있는 집들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우상숭배가 저질러졌습니다.
예레미야는 19:13(참조 7:18)에서 예루살렘 집들과 유다 왕들의 집들이 그 집 위에서 하늘의 만상에 분향하고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부음으로 더러워졌은즉 도벳 땅처럼 되리라고 멸망의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이유(30-35)
하나님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도록 하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신봉한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이 부리는 하나님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아무리 하나님을 알려고 해도 알 수 없습니다. 그 어떤 것으로 표현해도 그분께 받은 사랑을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우리 지식 안에 가두려고 합니다.
30이는 이스라엘 자손과 유다 자손이 예로부터 내 눈 앞에 악을 행하였을 뿐이라 이스라엘 자손은 그의 손으로 만든 것을 가지고 나를 격노하게 한 것뿐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1이 성이 건설된 날부터 오늘까지 나의 노여움과 분을 일으키므로 내가 내 앞에서 그것을 옮기려 하노니 32이는 이스라엘 자손과 유다 자손이 모든 악을 행하여 내 노여움을 일으켰음이라 그들과 그들의 왕들과 그의 고관들과 그의 제사장들과 그의 선지자들과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다 그러하였느니라(30-35)
본문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악을 행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켰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우상을 숭배하고, 심지어 자녀를 몰렉에게 제물로 바치는 등 가증한 행위를 했습니다. 이러한 죄악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벌어졌으며, 이는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혔습니다. 하나님은 이로 인해 그들에게 큰 재앙을 내리기로 결심하셨습니다.
⑴ 뿌리 깊은 죄악(30-31)
먼저 30-31a절은 역사적 측면에서 이스라엘의 죄악을 고발합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점령한 이후 줄곧 우상을 숭배하면서 여호와를 노하게 할 뿐이었습니다(30; 참조. 23). ‘예로부터’는 문자적으로는 ‘어릴 패부터’, ‘젊을 때부터’로, 광야를 떠나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부터를 의미합니다(참조, 3:4,24,25; 22:21; 31:19). 그의 손으로 만든 것은 우상의 실체를 보여주는 표현으로, 이스라엘이 여호와 앞에서 저지른 가장 대표적인 악입니다. 이스라엘은 ‘모든 육체의 하나님’을 떠나 육체에 불과한 자들이 제 손으로 만든 것을 신으로 승배했습니다. 뿌리 깊은 반역의 중심에는 여호와의 성전에 자리 잡은 예루살렘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건설된 날부터 오늘까지’ 여호와의 ‘노여움과 분’만 일으켜왔습니다. 예루살렘의 타락은 일시적 현상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 줄곧 우상을 숭배하며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것처럼 예루살렘도 성에 세워진 처음부터 지금까지 여호와의 진노를 돋우기만 해왔습니다(참조, 겔 16:1-52). 더 이상의 기다림이 무의미해졌기에 마지막 결정이 내려집니다. 여호와께서 당신 앞에서 성을 치워버리기로 하십니다(31b). ‘옮기려 하노니’는 ‘치워버리겠다’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⑵ 편만한 죄악(32-33)
이제 악의 편만을 고발합니다. 여호와를 진노하게 하는 악행은 특정 집단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주전 722년에 멸망한 이스라엘이나 멸망을 앞둔 유다나 여호와를 격노하게 함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었습니다. 사실 이 둘은 한 악한 뿌리에서 나온 두 가지였습니다. 악을 저지른 북왕국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진노로 멸망한 것을 보았음에도 유다 역시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과 그들의 왕들과 그의 고관들과 그의 제사장들과 그의 선지자들과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은 앞에 나온 ‘유다 자손’의 구체적 설명입니다. 정치 지도자와 종교 지도자는 물론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예루살렘 왕궁과 성전에서 유다의 산지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온갖 악을 저지르며 여호와를 화나게 했습니다. 이들의 불순종은 의도적이며 의식적이었습니다(33). 이들은 여호와께 얼굴이 아니라 등을 보이고 그분에게서 멀어져만 갔습니다. ‘그 마음의 완악함을 따라 조상들이 자기에게 가르친 바알들’(9:14)을 따라가는 자들을 돌려세우기 위해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 예언자들을 통해 줄곧 가르치셨지만, 이들은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맹목적 질주 앞에 그분의 가르침과 훈계(교훈)는 허공을 가를 뿐이었습니다.
‘가르치되 끊임없이 가르쳤는데’는 여호와께서 이들의 얼굴을 당신께로 되돌리게 하려고 얼마나 많이 애쓰셨는지를 보여줍니다. ‘듣지 아니하며’는 현재분사 문장으로, 불순종이 이들의 유일한 답변이었음을 시사해줍니다(23). 여호와의 심판은 유다 자손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한 모든 노력이 수포로 끝난 후의 어쩔 수 없는 마지막 선택이었습니다.
⑶ 우상숭배(34-35)
앞에서 막연히 언급한 우상숭배의 악을 구체적으로 고발하는 34-35절은 일부를 제외하면 7:30b-31의 반복입니다. 이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예루살렘 성전에 가증한 물건들을 세워 더럽혔습니다(34, 참조. 열왕기하 23:4-7). 당신 백성인 이스라엘에 의해 여호와께서 당신 집에서 우상들과의 동거를 강요받으십니다. 우상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면 성전 밖의 형편이 어떠할지는 뻔했습니다. 우상들에게 여호와의 성전을 내준 자들은 예루살렘 남서쪽을 두르고 있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다 바알을 위한 산당을 세우고 ‘자기들의 아들들과 딸들을 몰래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습니다(35). 예루살렘 주민들은 몰렉에게 자기 아이들을 희생 제물로 드리기까지 했습니다. 어린아이 회생제사가 여호와와 전혀 상관이 없음을 보여주는 ‘내가 명령한 것도 아니요 내 마음에 둔 것도 아니니라’는 사람들이 어린아이 희생 제사를 여호와의 명령에 따른 것으로 간주했음을 시사해 줍니다(참조. 출애굽기 22:29b; 에스겔 20:25-26; 미가 6:6-7), 아마도 혼합주의에 빠진 자들은 몰렉 숭배가 여호와 예배 안에서 가능하다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몰렉은 어린아이 희생 제사와 관련해 등장하는 신의 이름입니다(참조. 레위기 18:21; 20:2-5; 열왕기하 23:10). 예루살렘 성이 성전에서부터 주변의 골짜기에 이르기까지 우상에의 역겨운 짓거리로 온통 더럽혀졌는데, 그런데도 여호와께서는 은혜를 베푸시어(18) 예루살렘 성을 지켜주셔야 하였습니까?
불순종과 반역, 우상숭배로 하나님을 격노케 한 이스라엘의 일대기를 듣다 보면, 임박한 심판 앞에 애도의 대상은 이스라엘이 아닌 하나님임을 깨닫게 됩니다. 범람하는 홍해만큼이나 출렁이는 죄악의 수위를 높이는 일에 우리 또한 기여하고 있진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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