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32-01)
믿을 수 없는 심판과 약속
예레미야 32장 1-15절
바둑이나 장기는 잘 뒤는 사람을 ‘고수(高手)’라고 하고, 미숙한 사람을 ‘하수(下手)’라고 합니다. 고수들은 하수들이 놓는 방법에 따라 다음 수를 읽어서 대처를 잘 합니다. 그러나 하수들은 고수들이 진행하는 수를 모르기 때문에 답답하기만 합니다. 하수들에게는 고수들의 훈수하나가 승패를 좌우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의 역사들을 보시면서 모든 것을 환히 꿰뚫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훈수를 받을 때, 지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언약 백성들이 죄의 길을 고집할 때, 그들을 바벨론이라는 용광로에 넣으셔서 징계하십니다. 이는 그들을 소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회복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에워쌌을 때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벨론에게 항복하도록 예언하여 예레미야는 붙잡혔습니다. 그리고 그런 중에도 하나멜의 밭을 사라는 명령에 순종합니다.
시위대 뜰에 갇힌 이야기(1-5)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진심으로 의지하지 못합니다. 주님의 뜻을 몰라서가 아니라 자신의 뜻을 꺾고 싶지 않아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막고, 선한 충고를 물리치고, 기도를 멈추지 않는지 돌아볼 일입니다.
1유다의 시드기야 왕 열째 해 곧 느부갓네살 열여덟째 해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2그 때에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선지자 예레미야는 유다의 왕의 궁중에 있는 시위대 뜰에 갇혔으니 3이는 그가 예언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성을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차지할 것이며 유다 왕 시드기야는 갈대아인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반드시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진 바 되리니 입이 입을 대하여 말하고 눈이 서로 볼 것이며 그가 시드기야를 바벨론으로 끌어 가리니 시드기야는 내가 돌볼 때까지 거기에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갈대아인과 싸울지라도 승리하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더니 유다 왕 시드기야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같이 예언하였느냐 하고 그를 가두었음이었더라(1-5)
예레미야는 변함없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유다 왕 시드기야에게 말을 전했습니다. 계속해서 예루살렘 성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침략 당해 남 유다 나라가 망하고, 시드기야 왕은 바벨론 왕에게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 예레미야가 예언한 대로 시드기야 왕이 통치한지 10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에워 쌓습니다. 이 사건은 유다 멸망하기 1년 전에 일어난 상황입니다. 예레미야는 계속해서 예루살렘 성이 바벨론에 멸망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유다 왕 시드기야 때문에 예레미야는 궁중 시위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⑴ 사건이 발생한 시기(1)
원문에는 ‘여호와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처음부터 여호와로부터 주어진 말씀임을 분명히 합니다. 16절부터 25절까지는 예레미야의 기도이고, 26절에 다시 계시 사건의 공식이 나오기에 1절은 일차적으로는 6-15절의 표제이지만, 예레미야의 기도가 독자적 단락이 아니라 전후의 단락에 의존적이기에 32장 전체의 도입부로 읽는 것도 가능합니다. 25:1의 경우처럼 유다 왕의 연대와 바벨론 왕의 연대가 함께 주어집니다. 유다의 역사가 바벨론의 역사에 연동된다. 유다 왕 시드기야의 열째 해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열여덟째 해의 영향아래 놓였음을 시사해줍니다. 바벨론 왕이 유다의 마지막 시간을 결정합니다.
⑵ 시위대 뜰의 예레미야(2)
이제 말씀이 주어진 때의 외적 상황을 알려줍니다. 바벨론 왕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었고, 예레미야는 왕궁의 시위대 뜰에 갇혀 있었습니다. 예레미야가 언제부터 시위대 뜰에 구금당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바벨론 군대가 처음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예레미야는 자유로웠습니다(참조 37:35).
첫 번째와 두 번째 포위 사이(참조. 37:11-16) 또는 바벨론 군대가 다시 돌아와 예루살렘을 포위한 후 성의 함락이 임박했을 때(참조. 38: 1-6) 체포됐던 것 같습니다. ‘왕의 궁중에 있는 시위대 뜰’이 예레미야가 구금된 장소로 나옵니다. 왕궁 단지 안에 있는 시위대의 역할은 왕과 왕궁을 보호하는 것으로, 시위대 뜰에 감옥이 있었는지는 의심스럽습니다. 포위된 예루살렘에서 왕궁의 시위대 뜰은 안전한 곳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⑶ 시위대 뜰에 갇힌 이유(3-5)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갇히게 된 배경을 보여줍니다. 시드기야 왕이 예레미야가 성의 패망과 자신의 유배를 선포했다고 그를 시위대 뜰에 가뒀습니다. 예레미야의 체포와 구금에 관해서는 37:11-21과 38:1-13을 참조하면 됩니다. 시드기야 왕이 인용하는 예레미야의 예언은 시작(3a)과 마지막(5b)을 제외하면 모두 시드기야 개인의 운명에 관한 것입니다. 시드기야는 갈대아인들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로잡혀 바벨론 왕 앞에 끌려가 그에게 심문을 당하고 바벨론으로 잡혀가 여호와께서 그를 ‘돌볼 때까지’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45a). 처음의 ‘보라 내가 이 성을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차지할 것이며’와 마지막의 '너희가 갈대아인과 싸울지라도 승리하지 못하리라는 예루살렘의 운명에 초점을 맞춥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 성을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주기로 결정하셨기에 갈대아인들과 싸울지라도 이길 수 없습니다. 시드기야의 유배와 예루살렘의 패망은 여호와께서 결정하신 이들의 운명입니다. ‘시드기야는 내가 돌볼 때까지 거기에 있으리라’(5)는 때가 되면 여호와께서 다시 돌보실 것을, 곧 바벨론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을 약속하시는 말처럼 들립니다(참조. 15:15, 27:22, 29:10: 32:5). 39:4-7; 52:5-11이 보고하는 시드기야의 비참한 운명하고는 매우 다릅니다. 52:11에 따르면 바벨론으로 끌려간 시드기야는 죽는 날까지 감옥에서 나오지 못한다. 5b절의 ‘너희가 갈대아인과 싸울지라도 승리하지 못하리라’는 여호와의 도움으로 바벨론과 싸워 이길 수 있다고 선동하는 자들에게 주는 답변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구원자로 아는 자들은 주전 701년의 경우처럼 여호와께서 극적으로 개입해 구원해주실 것을 기대하겠지만(참조. 21:2), 이는 헛된 소망입니다. 예루살렘의 구원자로 알고 있는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바벨론의 손에 넘겨주기로 하셨습니다.
시드기야의 말은 5절을 제외하면 대체로 34:2-3의 인용입니다. ‘내가 이 성을’부터 바벨론으로 끌려 가리까지는 거의 문자적으로 일치한다. 후자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과 그의 모든 군대와 그의 통치 아래에 있는 땅의 모든 나라와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과 그 모든 성읍을 칠 때에(34:1) 여호와께서 시드가야에게 전하라고 주신 말씀입니다. ‘시드기야는 내가 돌볼 때까지 거기에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갈대아인과 싸울지라도 승리하지 못하리라’는 예레미야의 예언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특히 첫 번째 문장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예레미야의 선포와 충돌하는 내용으로, 시드기야의 오해나 개인적 첨가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밭 구매에 관한 예레미야의 보고(6-15)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 명령이 이치에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제 곧 포로로 잡혀갈 상황이었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 밭을 샀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이 혹시 무모하고 비현실적이라고 느껴 본 적이 없습니까? 오늘 당신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있습니까? 지금 당신이 처한 상황은 어렵더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약속의 말씀을 붙드시길 바랍니다. 순종은 지금 당장은 아니라 할지라도 최상의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6예레미야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였느니라 이르시기를 7보라 네 숙부 살룸의 아들 하나멜이 네게 와서 말하기를 너는 아나돗에 있는 내 밭을 사라 이 기업을 무를 권리가 네게 있느니라 하리라 하시더니 8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이 시위대 뜰 안 나에게 와서 이르되 청하노니 너는 베냐민 땅 아나돗에 있는 나의 밭을 사라 기업의 상속권이 네게 있고 무를 권리가 네게 있으니 너를 위하여 사라 하는지라 내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인 줄 알았으므로 9내 숙부의 아들 하나멜의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사는데 은 십칠 세겔을 달아 주되 10증서를 써서 봉인하고 증인을 세우고 은을 저울에 달아 주고 11법과 규례대로 봉인하고 봉인하지 아니한 매매 증서를 내가 가지고 12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과 매매 증서에 인 친 증인 앞과 시위대 뜰에 앉아 있는 유다 모든 사람 앞에서 그 매매 증서를 마세야의 손자 네리야의 아들 바룩에게 부치며 13그들의 앞에서 바룩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14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 증서 곧 봉인하고 봉인하지 않은 매매 증서를 가지고 토기에 담아 오랫동안 보존하게 하라 15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하셨다 하니라(6-15)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사촌 하나멜의 밭을 사라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멜의 밭을 사고, 증서를 봉인하여 저장하며, 이를 통해 하나님이 장차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복과 재건의 약속을 상징합니다. 이 행동은 포로 생활 후 땅을 다시 소유하게 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를 통해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을 믿고 순종합니다.
(1) 여호와의 계시적 정보(6-7)
여호와께서 계시로 예레미야에게 곧 일어날 일을 미리 알려주신다. ‘네 숙부 살롬의 아들 하나멜이 네게 와서 말하기를 너는 아나돗에 있는 내 밭을 사라 이 기업을 무를 권리가 네게 있느니라 하리라’(7)
(2) 하나멜의 방문(8)
그리고 여호와께서 알려주신 대로 그대로 일어납니다(8; 참조. 사무엘상 9:15-17; 에스겔 24:15-18, 33:21-22). 예레미야는 조카 하나멜의 방문이 여호와의 결정임 깨닫습니다. 하나멜이 어떤 이유에서 삼촌 예레미야에게 땅을 팔려 줬는지는 달리 언급하지 않습니다. ‘기업의 상속권이 네게 있고 무를 권리가 네게 있으나’(8)로부터 추론해보면 아마도 하나멜은 빚을 갚지 못해서 채권자에게 땅을 넘겨야 하는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족이나 씨족이 소유한 땅은 상속 재산에 속했습니다.
하나멜은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친척 예레미야를 찾아와서 고엘의 권리를 행사해달라고 요청했던 것 같습니다. 고엘 제도는 씨족사회에 뿌리를 둔 전통으로 집안의 일원이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곤경에 처하거나 종이 되었을 때는 그 빚을 갚아주거나 속량해주어야 합니다(참조. 레위기 25:23-28, 47-49; 민수기 35:19-27, 룻기 3:12; 4:14).
(3) 하나멜의 밭 구매(9-14)
예레미야는 고엘의 자격으로 조카 하나멜에게서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사기로 하고 은 십칠 세겔을 달아줍니다(9). 세겔은 무게 단위로 대략 11.4그램에 해당합니다. 예레미야는 200그램 못 미치는 은을 달아 주고 밭을 사는데, 이것이 적당한 가격인지 또는 전시라서 싼값에 사들인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10-11절은 통상적인 계약서 작정 과정을 보여줍니다. 예레미야와 하나엘과 증인들이 계약서에 서명하고 봉인합니다. 서명은 주로 이름과 직분이 새겨진 도장이 사용됐습니다. 매매 계약서는 빈 공간을 기준으로 둘로 나뉜 두루마리에 동일하게 두 번 적고 그 반은 말아 봉인하고 바깥쪽에 서명합니다. 다른 반은 필요하면 펴볼 수 있도록 그냥 말아둡니다. 계약의 진위가 의심스러울 때는 봉인한 계약서의 봉인을 풀고 조사합니다. 매매의 법적 절차가 마무리된 후에 예레미야는 매매 계약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모든 사람이 보는 가운데 그 매매 계약서, 곧 봉인한 매매 계약서와 봉안하지 않은 계약서를 마세야의 손자 네리야의 아들 바룩에게 넘겨주고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도록 토기에 넣게 합니다(12-14). 네리야의 아들 바룩은 주전 605년 이전부터 동역자와 서기관으로 예레미야와 함께했습니다. ‘앞에서’(12)를 세 번 사용해(원문에 따르면 하나엘 앞에도 나온다) 매매 계약서의 전달과 보관 행위의 공적 성격을 강조합니다. 당사자들 외에도 ‘시위대 뜰에 앉아 있는 유다 모든 사람’이 증인으로 참여합니다. 오랫동안 보존하기 위해 토기에 넣어 보관할 뿐만 아니라 증인들도 많기에 예레미야가 하나멜과 맺은 매매 계약은 잊히지 않습니다.
(5) 밭 구매의 해석(15)
마지막 15절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목전에 둔 시점에 행해진 밭의 매매를 표적 행위로 해석해줍니다.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유다가 멸망하기는 하지만 영원히 폐허가 되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이 다시 집과 밭과 포도원을 사고팔고 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집과 밭과 포도원의 거래 재개는 바벨론의 침략으로 멸망한 자들에게 주어진 구원 약속으로는 너무 소박하게 보이 기도 합니다. 뒤따르는 예레미야의 기도는 이를 배경으로 합니다.
믿기 힘든 현실, 그것이 이스라엘이 믿어야 할 현실이었습니다. 놀랍게도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심판을 수용하는 데서 구원은 시작됩니다. 오독(誤讀)은 오판(誤判)을 낳습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뜻이 우선이라면 과연 현실을 제대로 읽을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생각한 결말과 하나님의 대단원이 다를 경우 과감히 자신 생각을 철회할 수 있겠습니까!
구독과 아래 [광고베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24 예레미야(완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레미야(73) - 예레미야 32장 26-35절 -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이유 (0) | 2024.07.13 |
---|---|
예레미야(72) - 예레미야 32장 16-25절 -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 (0) | 2024.07.13 |
예레미야(70) - 예레미야 31장 23-40절 - 새로운 언약을 세우시는 하나님 (0) | 2024.07.12 |
예레미야(69) - 예레미야 31장 10-22절 - 북 이스라엘을 회복시킨 것처럼 (0) | 2024.07.12 |
예레미야(68) - 예레미야 31장 1-9절 - 하나님의 회복의 은혜와 축복 (0) | 2024.07.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