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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바냐(14-02)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의 날

스가랴 14장 12-21절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들에게 정의로운 심판을 내리셔서 그들의 교만과 악행을 무너뜨리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가 반드시 이루어짐을 보여줍니다. 또한, 그의 백성을 회복하시고 축복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주십니다. 우리는 이 약속을 믿고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삶이 중요합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을 더욱 깊게 하고 공동체를 강화하는 데 기여합니다.

 

  • 하나님의 남은 백성으로 대변되는 예루살렘의 구원이라는 주제(1-11)에 이어, 12-21절에서는 여호와의 날의 궁극적인 본질이 드러납니다. 곧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심지어 예루살렘을 공격하러 왔던 이방인조차 여호와를 경배하게 될 것입니다(12-19). 이로써 여호와께 성결이 온전히 성취될 것입니다(20-21).

 

민족들에 대한 징벌과 민족들의 여호와 경배(12-19)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들에게 심판을 내리시고, 그들의 교만과 악행을 무너뜨리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가 반드시 이루어짐을 나타냅니다. 또한, 그의 백성을 회복하시고 축복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주십니다. 우리는 이 약속을 믿고 소망을 가져야 하며,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삶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은 우리의 신앙을 더욱 깊게 하고 공동체를 강화하는 데 기여합니다.

 

12예루살렘을 친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내리실 재앙은 이러하니 곧 섰을 때에 그들의 살이 썩으며 그들의 눈동자가 눈구멍 속에서 썩으며 그들의 혀가 입 속에서 썩을 것이요 13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크게 요란하게 하시리니 피차 손으로 붙잡으며 피차 손을 들어 칠 것이며 14유다도 예루살렘에서 싸우리니 이 때에 사방에 있는 이방 나라들의 보화 곧 금 은과 의복이 심히 많이 모여질 것이요 15또 말과 노새와 낙타와 나귀와 그 진에 있는 모든 가축에게 미칠 재앙도 그 재앙과 같으리라 16○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이방 나라들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17땅에 있는 족속들 중에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18만일 애굽 족속이 올라오지 아니할 때에는 비 내림이 있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이방 나라들의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라 19애굽 사람이나 이방 나라 사람이나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가 받을 벌이 그러하니라(12-19)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들에게 심판을 내리시고, 그들의 교만을 무너뜨리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에게 회복과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모든 민족이 하나님께 나아와 그를 예배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1) 민족들에 대한 징벌(12-15)

 

12-15절은 16-19절에 대한 예비적 성격을 지닙니다. 16-19절에서는 여호와의 날에 온 민족이 여호와께 경배하러 오는 최절정의 상황을 묘사합니다. 12-15절에서의 민족들에 대한 징벌은 여호와의 뜻이 온전히 펼쳐지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이미 9-11절에서 여호와만이 온전한 왕이심이 강조되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 관계에서 종종 표현된 것으로, 여호와의 왕 되심은 이제 온 천하에 공포되었습니다. 그래서 온 민족이 여호와께 경배하기 위해 이제 시온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됩니다. 여기서 민족들에 대한 징벌의 묘사는 여호와의 정의가 온전히 세워지며, 그것도 철저하게 세워진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12-13절의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묘사에서 다시금 주변 나라에 대한 심판이 다루어집니다. 또한 이는 언약적인 맥락에서의 회복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은 후 언약에 순종하느냐 불순종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언약적인 저주와 축복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선포되었습니다(레 26장; 참조. 신 28장). 하나님께서는 전쟁에서 승리하고(레 26:7-9) ‘너희의 땅에서 안전하게 거주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곧 여호와의 날에 궁극적으로 이뤄질 일들은 하나님과의 언약 안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또한 여호와의 날에 대한 묘사에서 이스라엘의 응답은 매우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이스라엘은 현재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며 신실하게, 그리고 책임 있는 태도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12절의 ‘그들의 살이 썩으며’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힌 자들, 곧 하나님을 대적한 자들의 최후를 처절하고 잔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전염병과 관련한 심판인 듯합니다. 비록 현재는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고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분명하고도 철저하게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해 신실하게 좋을 것을 간접적으로 강조합니다. 13절 역시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초래하게 될 대적들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묘사합니다. 14절은 전쟁의 승리로 인해 차지하게 될 전리품을 묘사합니다. 완벽한 승리를 통해 그 결과를 누리게 될 것을 묘사합으로써 전쟁의 승리에 대한 확신을 약속합니다(학 2:7). 15절에서는 여호와가 내리는 재앙의 범위가 가축에게까지 확대됩니다. 그럼으로써 재앙이 미치는 효과를 강조합니다.

 

(2) 민족들의 여호와 경배(16-19)

 

16-19절은 여호와께 성결을 강조하는 20-21절과 더불어 여호와의 날에 관한 최절정이자 최종 마무리에 해당합니다. 여기서 묘사된 온 민족이 여호와께 경배한다는 것은 이미 아브라함 언약(창 12:3,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에서 간접적으로 드러났습니다. 또한 시내산에서 언약이 체결되는 배경에서도 확인됩니다. 이때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의 역할을 감당함으로써 온 민족이 여호와 앞에 나오게 될 것이라 기대됩니다(출 19:6). 그런 약속과 이상이 여호와의 날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스가랴서에서 나오는 것은 당연합니다.

레위기에서도 자세히 설명하듯이, 16절의 ‘초막절’은 출애굽 후 초막에서 거주하던 것을 기억하게 하는 절기입니다(레 23:43; 민 29:12 이하), 에스라 3:4과 8절에서는 성전 건축 전에 지킨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초막절과 성전 건축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우연하게도 시기(‘일곱째 달 열닷새 날’)가 겹쳐서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도 역시 왜 하필 초막절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날에 언약이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예루살렘 주민이라고 해서 모두 여호와의 날에 복을 받는 게 아닙니다. 여호와를 인정하고 그분께 경배하러 오는 자들만 여호와 앞에서 그분의 백성으로 인정받게 됩니다(17). 비를 내리지 않는다는 것은 언약적인 저주에 해당합니다(레 26장; 신 28장). 척박한 환경의 가나안 땅을 고려할 때,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은 크나 큰재앙입니다. 18절에서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애굽 족속으로 대변되는 이방 민족들에게도 여호와를 경배하러 오는 것이 허락됨을 언급합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그들이 여호와께로 나아오지 않는다면 임박한 재앙을 피할 수 없습니다. 19절에서는 애굽 사람뿐만 아니라 ‘이방나라 사람’이라고 명백히 언급합니다.

 

여호와께 성결(20-21)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그분의 거룩한 성품을 깊이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삶은 우리의 신앙의 근본입니다. 이러한 삶은 우리의 행동과 결정에 반영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하고, 그의 영광을 드러내는 길이 됩니다.

 

20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있는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21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가져다가 그것으로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20-21)

 

20-21절은 16-19절에서와 같이 여호와의 날의 최절정입니다. 여호와의 날에 온 민족이 여호와를 여호와로 인정하고 경배하게 됩니다(16-19). 동시에 세상을 향한 여호와의 계획(거룩하게 됨)이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이 거룩함은 여호와의 성품이기도 하면서, 자신의 백성에게 요구하며 이스라엘을 통해 온전히 실현되기를 원하는 이상이기도 합니다(레 19:2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또한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은 시내산 언약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의 핵심 내용이기도 합니다(출 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이와 같이 거룩함이 온전히 실현되는 것이 여호와의 날에 대한 최절정의 묘사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20절과 21절에 반복되는 ‘성결’이라는 주제는 시내산 언약을 맺을 때 언약 백성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신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문구는 특히 제사장의 직무와 관련하여 여호와 앞에서 구별됨을 뜻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여호와의 날 새 하늘과 새땅에 임할 새로운 질서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가장 흔한 것조차 하나님께 거룩하게 되는 날을 가리킵니다. 그만큼 여호와의 계획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날이 될 것을 의미합니다. 20절의 ‘말 방울’은 가장 하찮은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는 가장 사소한 것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새겨져 여호와 앞에서 구별됨이 만연하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원래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문구는 제사장의 금으로 만든 패 위에 새겨진 것이었습니다(출 28:36). 번쩍이는 금패와 작고 하찮은 말방울의 대조가 인상적입니다.

‘솥’에 대해서도 비슷한 맥락에서 언급됩니다. 전에는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되고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에 가까워질수록 사용되는 재료와 레위인 제사장, 또는 대제사장이 접근할 수 있는 곳을 제한하였습니다. 즉 거록함을 차별화하여 하나님께 가까워질수록 더욱 높은 수준의 거룩함이 요구되었습니다. 예컨대, 성전에서 사용되는 솥이라 하더라도 그 쓰임과 용도에 따라 차별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맥락 아래, 여기서 제단 앞 주발과 차이가 없게 합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이는 모든 것이 거룩하게 됨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20절에서는 여호와의 전에 있던 솥으로 한정했으나, 이제 21절에서 예루살렘과 유다에 있는 모든 솥으로 확대합니다. 점차 확대하여 결국 모든 솥이 성전에서 사용될 수 있을 만큼 거룩함이 확대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가져다가 그것으로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21절에서 ‘가나안 사람’이 언급되는 것은 특이합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상인들로 잘 알려졌기 때문에 이 단어가 상인들을 가리킬 수 있다고 제안하기도 하지만, 여기서 상인은 문맥상 어울리지 않습니다. 가나안 사람은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 가증한 것의 대상이었습니다(스 9:1-2). 여기서 ‘가나안 사람’은 상징적인 의미에서 가증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에게 심판을 내리시고, 그분의 백성을 회복하실 것임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축복과 구원의 약속을 주시며, 모든 민족이 그를 예배하는 날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약속은 우리의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하고, 공동체의 연합을 촉진합니다. 결국,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은 진정한 평화와 기쁨으로 이어질 것입니다.[임마누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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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바냐(14-01)


하나님과 함께하는 새 시대

스바냐 14장 1-11절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회복과 구원의 약속을 주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약속을 믿고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난을 아시고, 그 가운데 함께하십니다. 그의 약속은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킵니다. 우리는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시키고 구원하실 것입니다.

 

  • 12장에서부터 이어온 여호와의 날에 대한 주제가 최절정에 이릅니다. ‘그 날에’라는 표현이 계속해서 반복됩니다. 그날은 예루살렘이 포위되고 함락되지만, 궁극적으로는 남은 백성이 구원받는 날(1-5), 새 하늘과 새 땅의 혁신적인 구원의 날이 될 것입니다(6-11).

 

예루살렘의 포위와 구원(1-5)

구원하신 백성과 함께 만들 나라는 광명의 나라입니다. 모든 악의 세력이 진멸되는 날의 그림입니다. 모든 성도들 안에 미움과 다툼, 경쟁심, 열패감, 근심, 걱정, 욕심이 없는 나라를 만들 것입니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빛이 되고 우리 속에 어둠을 드러내 주는 빛이 될 때, 겸손한 빛, 온유한 빛, 관대한 빛으로 다가갈 때 수치를 당하지 않고서도 내 허물과 약함을 보고 돌이키게 될 것입니다.

 

1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 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네 가운데에서 나누이리라 2내가 이방 나라들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니 성읍이 함락되며 가옥이 약탈되며 부녀가 욕을 당하며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사로잡혀 가려니와 남 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3그 때에 여호와께서 나가사 그 이방 나라들을 치시되 이왕의 전쟁 날에 싸운 것 같이 하시리라 4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 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 산은 그 한 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 5그 산 골짜기는 아셀까지 이를지라 너희가 그 산 골짜기로 도망하되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 같이 하리라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들이 주와 함께 하리라(1-5)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위해 회복과 구원의 약속을 주십니다. 우리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분의 보호를 믿고 소망을 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의로운 심판을 통해 세상을 정화하시고, 새로운 시작을 허락하십니다. 그분의 왕국이 세워질 것이며, 우리는 그 왕국의 일원으로서 그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있게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지지하며 믿음의 길을 함께 걸어가야 합니다.

 

(1) 예루살렘의 포위(1-2a)

 

예루살렘이 포위당하며 약탈당하지만, 그 가운데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14:2). 이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친히 싸우시며 피할 길을 내신다(14:3-5). ‘남은 자’를 언급하는 것으로 볼 때, 여호와께 신실함을 요구하는 상황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12:1-9에서 묘사하는 예루살렘의 구원이라는 주제에 비해 14:1-3에서는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장면이 추가됩니다. 3절에서는 분명히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위해 싸우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14:4-21에서는 여호와의 날에 있을 구원과 승리의 주제가 돋보입니다. 여기서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약탈당하는 모습은 종말에 있을 고난, 고통과 관련이 있는 듯합니다. 이러한 고난의 상황은 하나님께서 베풀 구원을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그동안 주로 ‘그 날에’라고 표현되었던 때의 문제가 ‘여호와의 날’이라는 사실로 분명히 드러나게 됩니다(1).

 

(2) 예루살렘의 구원(2b-5)

 

2절의 ‘남은 백성’과 관련된 메시지에서, 13:79에 나오는 흩어지는 양들 가운데 ‘작은 자들’, 즉 남은 자의 주제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약탈당하게 되지만, 여호와로 말미암아 희망은 여전히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여호와의 날은 고통이나 고난이 없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기대나 착각과는 다릅니다(물론 여호와의 날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요소가 있다; 참조 14:6-9) 항상 희망과 승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고난 가운데서의 승리, 곧 고난을 통한, 고난을 이겨낸 구원이 허락되는 날입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나가사 그 이방 나라들을 치시되 이왕의 전쟁 날에 싸운 것 같이 하시리라.” 3절은 자'가 희망을 품을 수 있게 하는 분명한 근거를 제시합니다. 남은 자의 희망은 여호와의 날이 여호와가 자신의 백성을 위해 싸우시는 때라는 사실로부터 비롯됩니다. 이 주제는 12:1-9에서 예루살렘의 구원을 노래한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자신의 백성을 위해 싸우시는 하나님께서는 구약성경에서 신적 전사(Divine Warrior)의 이미지로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그때에는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물을 내리며 이 산과 저 산이 요동합니다(삿 5:4). 전사로서의 하나님과 관련한 이미지적인 묘사 혹은 서사적 진술은 오경에서도 수차례 나타난 바 있습니다(신 1:30).

4절의 ‘감람산’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본문의 정황만으로는 정확히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스가랴 4장에 나온 ‘두 감람나무’와 관련하여 추정해볼 수 있을 뿐입니다. (비록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4장에서 ‘두 감람나무’는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의 역할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기름 부음 받은 자’, 곧 메시아 사상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두 감람나무’와 관련한 환상은 성전 건축이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통해 완성되고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언약 관계)가 회복될 것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스가랴서 내에서 메시아를 통한 온전한 회복을 미리 선취하게 하는 문학적 역할을 합니다. ‘두 감람나무’의 이전 환상은 4절에서 현재적 의미(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통한 회복)와 더불어 미래적 의미(궁극적으로 메시아를 통환 온전한 회복)로 확장 발전되고 있습니다.

5절의 ‘그 산 골짜기’는 감람산이 동서로 갈라져 생긴 골짜기를 가리킵니다. 골짜기는 피난처로 다른 곳에서 언급되기도 했습니다(렘 21:13; 48:8). 산골짜기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는 상징입니다. ‘아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한편, 유다 왕 웃시야 때의 지진은 아모스 1:1에서도 언급된 바 있는데, 아마도 이 지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지진으로 인한 엄청난 재앙은 포로기 이후 사람들의 뇌리에도 깊이 각인될 만큼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단순히 재앙으로만이 아니라, 예루살렘이 침략당하고 함락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피하게 되는 상황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곧 엄청난 재앙 가운데도 하나님께서 개입하심을 예언합니다. ‘모든 거룩한 자들’은 여호와와 함께 골짜기로 도망 나온 자들을 가리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새 예루살렘(6-11)

어떻게 이 빛의 통치를 누릴 수 있습니까? 어떻게 성령에 충만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만끽할 수 있습니까? 그분의 통치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분이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것을 인정하는 피조물이 되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홀로 우리의 왕이시고 우리를 다스릴 분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분 앞에서 온 땅이 부복할 만큼 위대하고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6그 날에는 빛이 없겠고 광명한 것들이 떠날 것이라 7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8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9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한 분이실 것이요 그의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라 10온 땅이 아라바 같이 되되 게바에서 예루살렘 남쪽 림몬까지 이를 것이며 예루살렘이 높이 들려 그 본처에 있으리니 베냐민 문에서부터 첫 문 자리와 성 모퉁이 문까지 또 하나넬 망대에서부터 왕의 포도주 짜는 곳까지라 11사람이 그 가운데에 살며 다시는 저주가 있지 아니하리니 예루살렘이 평안히 서리로다(6-11)

 

여호와의 날에 사람들은 여호와의 임재를 새롭게 경험하게 됩니다. 이는 흔히 예언서에서 여호와의 임재 가운데 여호와의 심판을 묘사하는 것과 일치합니다(사30:26: 렘 4:23-27 암 5:20).

 

(1) 여호와의 임재 경험(6-7)

 

6-7절에서 자연 현상의 급격한 변화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을 때(출 19장), 심판의 메시지를 전할 때 이런 모습을 보이셨습니다(사 30:26; 렘 4:23-27; 암 5:20). 6절의 ‘광명한 것들이 떠날 것이라’라는 표현은 문맥상 7절과 비슷한 개념을 전달합니다. 여호와의 날에 빛은 하나님이 처음 창조한 빛이나 광명(천체)과는 다른 새로운 빛, ‘새 하늘과 새 땅’을 여는 빛으로 비춰집니다(참조. 계 21장). 7절의 ‘어두워 갈 때에 빛’은 낮과 밤에 비치는 빛, 광명(6)과는 다릅니다. 세상의 빛은 사라져도 어둠 가운데 발하는 빛은 있을 것입니다(참조. 계 21:23).

 

(2) 예루살렘에서 나오는 생수(8)

 

8절은 예루살렘에서 ‘생수’가 나오는 것을 묘사합니다. 여호와의 임재로 말미암아 생명의 근원이 시작됩니다. 예레미야 2:13과 7:13에서 ‘여호와를 생수의 근원’으로 표현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에스겔 47장에서는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성전은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는 곳으로,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영적 공급을 가리킵니다. 여기서도 예루살렘은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전이 있는 곳으로, 예루살렘 역시 종종 여호와의 임재를 가리키는 상징이 됩니다. ‘동해’는 사해를 가리키며(겔 47:18), ‘서해’는 지중해를 가리킵니다(신 11:24). 동해와 서해에 대한 언급은 온갖 바다의 근원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름’과 ‘겨울’에 대한 언급은 건기와 우기에 상관없이 지속적으로 생수가 흘러나올 것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3) 새 예루살렘(9-11)

 

8절의 임재에 관한 주제는 9-11절에서 더욱 발전되어 새 예루살렘의 새로움이 언명됩니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에 대한 9절의 선포에서 여호와의 왕 되심이 재천명 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날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그러한 언약 관계의 온전한 회복은 여호와의 날에 완성될 것입니다.

10절의 ‘아라바’는 헤브론에서 아카바 만까지 뻗는 요단강의 열곡(두 개의 평행한 단층애로 둘러싸인 좁고 긴 계곡)을 가리킵니다. 일반명사로 볼 경우 아라바는 ‘평원’을 의미합니다. 이는 ‘예루살렘이 높이 들려’ 예루살렘을 제외한 나머지 주변 지역이 낮아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상대적으로 예루살렘이 높아지는 것을 부각하며, 예루살렘의 회복, 안전을 강조하는 역할을 합니다. ‘게바’는 예루살렘 북동쪽으로 대략 10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하며, ‘림몬’은 예루살렘 남쪽, 약 35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합니다. 이것들은 예루살렘 주변의 산지를 말합니다. 아라바 같이 되었다는 것은 낮아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베냐민은 예루살렘 북쪽에 위치하므로(렘 37:13), ‘베냐민 문’은 예루살렘의 북쪽에 위치합니다. ‘첫 문 자리’는 명확하지 않지만, 대체로 예루살렘 주변 지역을 가리킵니다. ‘성 모퉁이 문’은 성의 북쪽과 서쪽 벽이 합쳐지는 곳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하나넬 망대’는 예루살렘의 북쪽 벽에 위치하고, ‘왕의 포도주 짜는 곳’은 왕의 동산(느 3:15) 근처의 남쪽에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표현들은 예루살렘과 그 주변 지역이 높아지는 것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 가운데에 살며 다시는 저주가 있지 아니하리니 예루살렘이 평안히 서리로다”(11). 언약적인 저주로 인한 심판을 가리킬 때, 땅에 사람이 거주하지 않게 되었다는 맥락에서 ‘야샤브’가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저주로 인한 땅의 황량한 모습을 가리킬 때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람들이 살게 된다는 ‘야샤브’가 저주가 아닌 축복을 상징하는 맥락에서 쓰입니다. ‘저주’는 예루살렘 멸망으로 완전히 파괴된 것을 가리킬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다시는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온전한 언약 관계가 실현될 것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위해 회복과 구원의 약속을 주십니다. 우리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분의 보호를 믿고 소망을 품어야 합니다. 정의로운 심판을 통해 세상을 정화하시고, 새로운 시작을 허락하십니다. 그분의 왕국이 세워질 것이며, 우리는 그 왕국의 일원으로서 그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있게 발전시키고,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지지하며 믿음의 길을 걸어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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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바냐(13-01)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스가랴 13장 1-9절


신앙의 여정에서 겪는 고난과 시험은 우리를 성숙하게 만드는 기회입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공동체로 부르시며, 서로의 아픔을 나누고 지지하는 삶을 살도록 요구하십니다. 우리는 함께 기도하고 서로를 격려해야 합니다. 결국, 이러한 연대감이 우리 신앙의 깊이를 더해줍니다.

 

  • 스가랴 13장은 12장에 이어 여호와의 날과 관련한 여러 모습 가운데 몇몇 양상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1-6절에서 여호와의 날은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리는 날로 묘사됩니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우상과 거짓 선지자들이 제거되는 날이 될 것입니다. 7-9절에서 여호와의 날은 목자를 치므로 양이 흩어지지만, 그 흩어진 자들 가운데 하나님의 신실한 자들을 모으는 날이 될 것입니다.

 

깨끗케 하는 샘 죄 씻음의 날(1-6)

 

죄의 씻음은 단순한 용서를 넘어서 영적 성장의 중요한 과정입니다. 우리는 이 과정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있게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진정한 회개와 정결함은 신앙 생활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새로운 시작을 허락하십니다. 이러한 은혜를 통해 우리는 더욱 성숙한 신앙인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1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2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귀신을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 3사람이 아직도 예언할 것 같으면 그 낳은 부모가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말을 하니 살지 못하리라 하고 낳은 부모가 그가 예언할 때에 칼로 그를 찌르리라 4그 날에 선지자들이 예언할 때에 그 환상을 각기 부끄러워할 것이며 사람을 속이려고 털옷도 입지 아니할 것이며 5말하기를 나는 선지자가 아니요 나는 농부라 내가 어려서부터 사람의 종이 되었노라 할 것이요 6어떤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에 있는 상처는 어찌 됨이냐 하면 대답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하리라(1-6)

 

12:10-14은 여호와의 날을 애통하는 날로 소개합니다. 곧 사람들은 여호와의 임재 앞에서 자신의 죄를 돌아보며 애통하게 될 것입니다. 13:1-6에서는 이런 애통에 이어, 이제 여호와의 주도 아래 하나님의 백성(하나님의 자녀)이 돌아올 길이 제시됩니다. 곧 죄와 더러움을 깨끗하게 하는 샘이 열리게 되어 이스라엘이 정결한 모습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이렇게 여호와의 날에 애통과 죄 사함을 통해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도 회복될 것입니다. 13장에서도 역시 ‘그 날에’라는 표현을 반복하며, 12장에서부터 시작된 주제가 통일되게 이어져 오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1) 죄 씻음의 날 선포(1)

 

1절의 ‘죄와 더러움’라는 표현은 포괄적 의미의 죄를 가리킵니다. ‘죄’는 흔히 사용되는 개념으로 하나님의 기준을 어기는 것을 가리키고, ‘더러움’은 정결 의식과 관련된 제의적 개념입니다. 각각 구분되는 개념을 가리키기보다는 두 단어가 한 쌍을 이루어 온갖 죄를 포괄적으로 의미하고 있습니다. ‘샘’은 생명의 근원을 가리킵니다. 여기서도 죄와 더러움의 씻음을 통해 궁극적으로 생명을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샘은 적절한 비유입니다. 죄와 더러움을 씻음은 곧 깨어진 관계 회복의 신호탄입니다. 궁극적으로 거룩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에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죄 씻음은 매우 중요합니다. ‘새 영’을 약속하는 에스겔 본문(36:25-29)에서도 정결함의 주제는 매우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1절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범했던 포괄적인 죄를 하나님께서 온전히 해결하시겠다는 그분의 광범위한 은혜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2) 우상과 거짓 선지자의 제거(2-6)

 

2절에서 언급된 ‘이름’은 구약에서 종종 존재, 성격, 명성을 포함하는 용어입니다(삼상 25:25). 여기서도 우상의 이름을 끊어지게 한다는 것은 단순히 이름 정도가 아니라 우상의 존재나 명성 자체를 근절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짓 선지자의 근절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회복과 관련이 있습니다. 신명기 18:15-20에서 밝히고 있듯이 선지자를 세우는 것은 여호와 자신입니다. 즉 주도권이 여호와께 있으며, 선지자는 자기 뜻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의 뜻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말씀이 아니라, 청중이 듣고 싶어 하는 말씀만 가려서 전하려 합니다(렘 14:14:23:16; 겔 13:6-8). 그러나 여호와의 날에 청중은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더 이상 거짓 선지자에게서 기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말씀에 비추어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봅니다. ‘더러운 귀신은 12:10의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에서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귀신이라기보다 사람의 영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12:10에서도 하나님의 영보다는 사람의 영을 가리킨다). 여기서도 악한 영보다는 사람의 영에 작용한 더러운 영향이나, 더러운 생각들을 완전히 뿌리 뽑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이 아직도 예언할 것 같으면 그 낳은 부모가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말을 하니 살지 못하리라 하고 낳은 부모가 그가 예언할 때에 칼로 그를 찌르리라.” 3절은 우상과 거짓 선지자들의 근절을 강조하기 위해 가정의 예를 듭니다. 사람이 예언할 때 그를 낳은 부모가 칼로 찌르는 상황은 단순한 사실적 묘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거짓 예언에 대해 분명하고도 확고하게 경고하고, 거짓 예언의 근절을 알리는 말씀입니다. 부모의 사랑만큼 강한 관계도 거짓 예언을 근절하는 일에 방해가 될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이 거짓 예언을 없애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편, 4절의 ‘털옷’은 선지자처럼 보이게 하는 눈속임 혹은 도구를 뜻합니다. 엘리야도 같은 단어는 아니지만 털옷을 입고 다니기도 했습니다(왕상 19:13). 여기서는 거짓 선지자들이 속이기 위해 겉으로 흉내 내는 행위까지도 근절될 것을 말합니다.

3절이 실제 일어난 일을 진술한 것이 아니라 가정의 예를 든 것처럼, 5-6절 역시 가정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6절의 ‘네 두 팔 사이에 있는 상처’는 아마도 거짓 선지자들이 신의 뜻을 구하기 위해 자해해서 생긴 상처를 가리킬 것입니다. 바알 선지자들이 간구한 바를 얻기 위해 자해하는 모습이 성경에도 나옵니다(왕상 18:28). 상처를 물어보는 것은 ‘네가 거짓 선지자가 아니냐?’라고 묻는 것입니다. 이렇게 물어볼 때 친구 집에서 난 상처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나는 거짓 선지자가 아니라고 거짓으로 핑계를 대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는 거짓 선지자들이 공공연하게 배척될 것을 보여주는 예언입니다.

 

양을 흩으심 : 하나님의 사람이 구별되는 날(7-9)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명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그분의 뜻을 따르는 삶을 지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우리는 이 약속을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있게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7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8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의 이는 멸망하고 삼분의 일은 거기 남으리니 9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에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7-9)

 

7-9절은 갑작스럽게 목자에 대한 심판 내용이 나오는 듯합니다. 그러나 12장에서부터 이어져 온 맥락을 고려하면, 여호와의 날은 여호와 앞에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구별되는 날이기도 함을 보여줍니다. 여호와의 날은 구원의 날이기도 하지만(12:19) 애통(12:10-14)과 죄 씻음의 날(1-6절)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날은 양을 흩어서 그 가운데 남은 자를 세우는 날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7-9).

 

(1) 목자를 치라는 명령(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7절의 첫 표현인 ‘칼’은 이미 11:7에서도 심판의 도구로 언급된 바 있습니다. 여기서도 심판의 인상이 매우 강렬할 것임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칼이 목자를 치고 그로 인해 양들이 흩어지는데, 강렬한 칼의 이미지로 시작해서 급박하게 양들이 흩어지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목자’는 스가랴 선지자가 상징적 행동을 통해 수차례 보여주기도 했으며,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계속해서 가리켰습니다. 여기서도 역시 목자를 치는 행위는 양을 흩는 과정을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내 짝 된 자’의 ‘내 짝’은 건장하고 젊고 강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는 심판의 ‘칼’과 대조를 이룹니다. 동시에 역설적으로 ‘칼’의 심판이 강력할 것임을 보여줍니다.

 

(2) 시험을 통과하는 하나님의 백성(8-9)

 

8절에서 선지자는 이 온 땅 삼분의 이는 멸망하고 삼분의 일은 남을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삼분의 일’에 대한 언급은 에스겔 5:2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삼분의 일’이라는 표현은 연단을 통해 하나님 백성으로 남게 된 ‘남은 자’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8-9절의 묘사는 역사적으로 성취될 사건이라기보다는 종말론적으로 여호와의 날에 성취될 일반적 묘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신실하지 못한 자들에게 여호와의 날은 심판의 날이 되지만, 신실한 남은 자들에게 여호와의 날은 연단을 통해 받는 구원의 날이 될 것입니다. 한편, 8절의 ‘멸망하고’라는 표현은 언약과 관련된 의도적 사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자르다’라는 의미를 지니지만, ‘(언약을) 맺다’라는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언약을 어길 경우에 처하게 될 상황을 동물의 쪼개짐을 통해 보여주듯이, 이제 언약을 어긴 자들도 이와 같은 심판의 운명에 처 해지게 됩니다.

9절에서는 남는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 같이 연단하여 시험할 것이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내 이름을 부를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부름말은 사랑의 기호와 같습니다. 즉 ‘내 이름을 부르리니’는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회복과 소통을 의미합니다(욜 2:32: 습 3:9). 다시 말해, 온전한 여호와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됨을 보여주는 종말론적 구원의 표지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내 백성이라’하시고 이스라엘이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한다는 것은, 전형적으로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친밀한 관계, 깨어진 언약이 다시금 회복됨을 표현합니다(레 26:12; 렘 30:22; 32:38; 겔 36:28: 37:27;참조. 계 21:7).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고, 회복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 본문은 우리에게 깨끗한 샘과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상기시킵니다. 우리는 죄의 씻음과 정결함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집니다. 또한, 우리를 공동체로 부르시며, 서로의 아픔을 나누고 지지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이 약속을 믿고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는 진정한 구원을 경험하며, 더욱 깊이 있는 신앙을 이루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역사를 간직하며,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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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바냐(12-01)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의 약속

스가랴 12장 1-14절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강력하게 보호하시며, 그들을 구원하기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어려움에 처할 때에도 결코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항상 우리의 곁에 계시며, 우리의 필요를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구원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이러한 믿음은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며,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됩니다.

 

  • 스가랴 12-14장에서는 여호와의 날을 본격적으로 소개합니다. 12:1-9에서 여호와의 날은 무엇보다 하나님 백성이 구원받는 날임을 선포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특히, 4-8절에서는 여호와의 날이 애통의 날로도 소개됩니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무조건적인 구원의 날이 아니라, 애통함으로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가 회복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구원(구원의 날)(1-9)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밝은 미래를 약속하십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분은 결코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구원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은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제공합니다. 희망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은 언제나 밝은 길로 인도될 것입니다.

 

1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경고의 말씀이라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이가 이르시되 2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그 사면 모든 민족에게 취하게 하는 잔이 되게 할 것이라 예루살렘이 에워싸일 때에 유다에까지 이르리라 3그 날에는 내가 예루살렘을 모든 민족에게 무거운 돌이 되게 하리니 그것을 드는 모든 자는 크게 상할 것이라 천하 만국이 그것을 치려고 모이리라 4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모든 말을 쳐서 놀라게 하며 그 탄 자를 쳐서 미치게 하되 유다 족속은 내가 돌보고 모든 민족의 말을 쳐서 눈이 멀게 하리니 5유다의 우두머리들이 마음속에 이르기를 예루살렘 주민이 그들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로 말미암아 힘을 얻었다 할지라 6그 날에 내가 유다 지도자들을 나무 가운데에 화로 같게 하며 곡식단 사이에 횃불 같게 하리니 그들이 그 좌우에 에워싼 모든 민족들을 불사를 것이요 예루살렘 사람들은 다시 그 본 곳 예루살렘에 살게 되리라 7여호와가 먼저 유다 장막을 구원하리니 이는 다윗의 집의 영광과 예루살렘 주민의 영광이 유다보다 더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8그 날에 여호와가 예루살렘 주민을 보호하리니 그 중에 약한 자가 그 날에는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 같고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 같을 것이라 9예루살렘을 치러 오는 이방 나라들을 그 날에 내가 멸하기를 힘쓰리라(1-9)

 

여호와의 날이 구원의 날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날을 단지 구원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마치 출애굽의 구원이 더큰 목적을 이루기 위한 첫걸음인 것과 마찬가지다. 출애굽을 시작으로 이스라엘은 가나안 정착, 온전한 신정왕국으로의 성장을 향해 나아갔다.

 

(1) 서론, 여호와에 대한 인식 확인(1)

 

1절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소개합니다.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이가 이르시되.” 여호와가 어떤 하나님인가에 대한 인식은 이 단락(12:1-9)의 의미 추를 결정짓는 결정적 요소입니다. 예루살렘이 에워싸이고(2), 천하만국이 예루살렘을 치기 위해 모여듭니다(3). 이런 상황에서 지도자와 예루살렘 주민들의 곤고한 단결(5)이 요구됩니다. 이때 여호와가 어떤 분인가를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누구신가에 대한 확신으로 말미암아 닥쳐오는 어려움과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승리를 확신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셨고, 사람을 창조하신 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승리를 약속하셨습니다.

 

(2) 예루살렘을 강하게(2-4)

 

2-4절은 예루살렘을 강하게 하여 승리하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2절의 ‘취하게 하는 잔’은 심판의 잔을 의미합니다(사 51:22-23). ‘예루살렘이 취하게 하는 잔’이 된다는 것은 예루살렘으로 말미암아 공격하는 나라들이 비틀거리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절(그 날에는 내가 예루살렘을 모든 민족에게 무거운 돌이 되게 하리니)의 ‘무거운 돌’도 비슷한 의미를 지닙니다. 돌의 무게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들어 올리려 했으나, 오히려 그가 돌의 무게에 짓눌려 상하게 될 것입니다.

 

(3) 유다 지도자와 예루살렘 주민의 협력(5-6)

 

5-6절은 지도자와 예루살렘 주민의 협력으로 승리를 얻게 되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런 예루살렘 주민들의 지지는 11장에서 줄곧 묘사된 목자와 양 떼의 갈등에서 드러나듯, 목자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여 양 떼들이 피해를 보는 상황과 크게 대조를 이룹니다.

 

(4) 유다 장막의 우선적 구원(7)

 

7절은 유다 장막이 우선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예언합니다. 7절에서는 세 구분되는 집단, 즉 유다 장막, 다윗의 집, 예루살렘 주민이 나옵니다. ‘다윗의 집’은 보통 다윗 혈통의 왕이나 왕조(사 7:2;왕상 12:19-20;왕하 17:21;시 122:5) 다윗의 가정과 가족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예루살렘 주민’들과 나란히 사용됩니다(10절도 그러하다). 5절에서 ‘유다의 우두머리 (지도자)’와 ‘예루살렘 주민’이 나란히 사용되는 것으로 볼 때. 다윗의 집은 유다 지도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루살렘 주민은 성안에 산다는 이유로 더 안전하다고 느끼는, 즉 특권 의식을 지닌 계층을 가리킵니다. ‘유다 장막’이라는 표현은 매우 생소하지만, 장막이 집단을 가리키는 경우는 구약성경 안에서 종종 발견됩니다(시 83:7, ‘에돔의 장막’). 여기서는 예루살렘 외부에 거주하는 일반 백성을 가리킵니다. 유다 장막(곧 일반백성들)을 먼저 구원하겠다는 것은 지도자와 특권 계층의 사람들보다 일반 백성을 우선시하겠다는 의미입니다.

 

(5) 약자를 강하게(8)

 

8절의 ‘다윗 같겠고’라는 표현은 강함을 상징합니다. 다윗이 통치하던 시기에 이스라엘은 전례 없는 군사적 승리와 더할 나위 없는 안정을 국가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있던 대적들은 자취를 감추었고, 이스라엘은 국가로서의 든든한 기반을 다지게 되었습니다. 유례없는 경제적 풍요로움에 사람들의 삶의 질은 높아졌습니다.

 

(6) 마무리, 완전한 승리 (9)

 

9절에서는 예루살렘의 철저한 승리와 이스라엘의 구원이 약속됩니다. 이런 점에서 9절은 ‘그 날에’ 이뤄질 예루살렘 구원의 완전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단락을 매듭짓는 역할을 합니다.

 

애통의 영: 애통의 날(10-14)

애통의 경험은 우리를 영적으로 성숙하게 만듭니다. 이 경험은 하나님의 뜻을 더 깊이 이해하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우리는 슬픔과 회개의 과정을 통해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의 신앙이 더욱 깊어집니다. 결국, 애통함은 더 나은 신앙인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발판이 됩니다.

 

10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11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 12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되 다윗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나단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13레위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시므이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14모든 남은 족속도 각기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리라(10-14)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주시는 회복과 회개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진정한 슬픔과 회개를 통해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교훈을 제공합니다.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통해 진정한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됨을 강조합니다.

 

(1) 예루살렘에서의 애통(10-11)

 

여호와의 날은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회복에 초점을 두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백성은 정결하고 거룩해져야 합니다. 이는 출애굽의 역사에서도 교훈으로 알 수 있는 바와 같습니다. 출애굽은 구원의 시작일 뿐입니다. 이후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백성다운 자들로 성장해가는 데 더욱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과거 은혜의 기억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과거로부터 현재와 미래의 영적 성숙을 위한 자양분을 얻어야 합니다. 애통 가운데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우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 앞에 선 존재자로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10절의 ‘애통’은 개인에 대한 애통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된 애통을 말합니다. 이 애통은 11절에서도 반복되고 12-14절에서도 다시 주요한 화제(topic)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 애통과 관련한 주제는 13:1-6의 회개 주제와 깊게 연관되어 발전해갑니다. 한편, 독자의 죽음을 기록한 것은 아니지만, 아브라함의 독자 이삭이 죽음 직전까지 갔습니다(22장). ‘독자를 위하여’와 ‘장자를 위하여’라는 표현은 소중히 여기는 자들을 잃은 슬픔을 통해 애통의 깊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11절의 지명인 ‘하다드림몬’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혹자는 ‘하다드’를 다산과 관련한 신명(神名)으로 읽고 ‘림몬’은 폭풍의 신명으로 간주하여, 이 신들을 위한 애도 예식을 염두에 둔 것이라 해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문맥상 이 해석은 다소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한편, 므깃도 골짜기는 유다 왕 요시야의 죽음을 애도한 장소를 가리킵니다(대하 35:20-27). 아마도 스가랴서의 저자는 므깃도 골짜기에 더 구체적 지명인 ‘하다드림몬’을 추가한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역대하 35:25에는 예레미야가 그의 죽음을 위해 애가를 짓고 대대적으로 애통하며 그에 대한 기억이 오래 전해진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도 기억할 만한 애통을 예로 든 것으로 여겨집니다.

1-9절은 ‘그 날에’를 반복하며 각각의 내용들에 긴밀한 통일성이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와 같이 11절의 ‘그 날에’라는 표현은 애통과 관련한 주제가 여호와의 날과 조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합니다. 곧 1-9절은 예루살렘 구원을 주제로 삼고 있지만, 여기서는 심판으로 인한 애통과 회개(13:1-6에서 본격적으로 발전되는 주제)를 주제로 언급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주제가 ‘그 날에’ 여호와의 날에 관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에 구원과 회개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2) 온 땅에서의 애통(12-14)

 

12-14절은 예루살렘 거주자뿐 아니라 온 땅의 사람들이 애통에 참여하게 되는 것을 강조합니다. 온 땅이 구원을 받기 전(14:10,16),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애통하고 회개하며 정결하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12절의 나단은 선지자가 아니라(삼하 7:2), 다윗의 아들을 가리킵니다(삼하 5:14). 시므이는 레위의 자손입니다(출6:17; 민 3:21). 따라서 여러 족속을 언급하는 듯하지만, 실상은 다윗 족속과 레위 족속, 그리고 거기에 속한 몇몇 족속을 언급한 것입니다. 다윗 족속은 왕족을 대표하며, 레위 족속은 제사장을 대표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전체적으로 애통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대표적으로 두 지파를 선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향한 강력한 보호와 구원의 약속을 다시 한번 확립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겪는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를 기억하시며, 회복의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 구절은 또한 우리에게 진정한 회개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 줍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신뢰하고 따르는 삶을 살아가야 함을 다짐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의 태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격려하며 나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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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11-01)


하나님의 목자와 거짓 목자

스가랴 11장 1-17절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참된 목자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을 따를 때, 우리는 진정한 생명과 안전을 찾을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르며 살아갈 때, 우리는 올바른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계를 통해 우리는 더욱 깊은 신앙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 스가랴 11장은 주로 목자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묶여있는데,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먼저 11:1-3은 이방 민족의 목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메시지로서, 11장 전체에 대한 서론 역할을 합니다. 둘째 11:4-14 스가랴의 상징적 행동으로서 목자에 대한 실상을 드러냅니다. 마지막 11:15-17도 상징적 행동이 이어지는데, 못된 목자가 하는 행위의 실상과 그에 대한 심판을 전합니다.

 

쓰러진 요단(1-3)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고 인도하는 참된 목자이십니다. 그분은 양떼를 위해 안전한 환경을 마련해 주십니다. 또한,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분입니다. 이러한 돌봄과 인도하심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목자 됨을 신뢰하며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안전과 평안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1레바논아 네 문을 열고 불이 네 백향목을 사르게 하라 2너 잣나무여 곡할지어다 백향목이 넘어졌고 아름다운 나무들이 쓰러졌음이로다 바산의 상수리나무들아 곡할지어다 무성한 숲이 엎드러졌도다 3목자들의 곡하는 소리가 남이여 그들의 영화로운 것이 쓰러졌음이로다 어린 사자의 부르짖는 소리가 남이여 이는 요단의 자랑이 쓰러졌음이로다(1-3)

 

1-3절과 4-17절은 심판의 대상이 다릅니다. 4-17절이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한다면, 1-3절에서는 레바논과 바산, 요단에게 심판이 내려집니다. 예언서에서 보통 심판 메시지가 이스라엘 주변 국가에서 시작하여 이스라엘로 이어지는 경향이 여기서도 비슷하게 나타납니다. 보편적인 관점에서 하나님께서는 열국과 이스라엘 모두에게 관심을 가지고 심판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여기서는 특별히 부를 상징하는 레바논, 바산, 요단에 대한 심판을 소개합니다. 아울러 이스라엘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가늠하게 합니다.

1-3절은 목자들(곧 지도자들)에게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1-2절의 레바논, 바산 그리고 이들을 대표하는 백향목과 상수리나무들은 지도자를 가리킵니다(렘22:20-23) 3절의 ‘어린 사자’(젊은 사자) 역시 지도자를 가리킵니다. 심판은 ‘아름다운 나무들’과 ‘무성한 숲’을 쓰러뜨림으로써 시행됩니다. 이는 심판의 대상을 지도자에 국한하지 않고 레바논과 바산의 백성 전체를 아우르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취지의 말씀은 3절에서도 이어집니다. 목자들과 어린 사자가 곡하는 소리가 나는 것은 ‘영화로운 것’, ‘요단의 자랑’이 쓰러졌기 때문입니다. ‘요단의 자랑’은 강 유역의 숲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는 사자뿐만 아니라 많은 야생 동물들이 살았는데, 이런 숲이 사라지면 당연히 사자의 먹이와 거주지 모두를 잃게 됩니다.

나무와 숲의 언급은 한 나라의 기반, 다시 말해 백성의 파멸을 의미합니다. 곧 백성 없이 지도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 나무와 숲이 쓰러지는데, 하물며 지고지순한 백향목과 상수리나무들이 견딜 수 있겠습니까! 백성의 몰락은 지도자의 몰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백성과 지도자의 관계는 4-17절에서도 계속됩니다. 양과 목자의 관계, 즉 지도자와 백성의 관계가 바로 그러합니다. 양 떼가 온전하지 않고 목자들이 있을 수 없는데, ‘잡혀 죽을 양 떼’를 자신과는 무관하게 이익의 대상으로만 보는 것은 스스로가 어리석은 목자인 것을 입증하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은 다가올 심판의 날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상징적 행동(4-14)

어리석은 지도자들은 잠시만 번성하고 한 줌의 권력만 잠시 움켜쥐면 그것이 영원히 자신을 안전하게 할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지난 날 쓰라린 경험에서 아무런 교훈도 건지지 못한 채 다시 하나님 주신 면류관의 보석 같은 축복을 저버리고 영광의 옷을 벗어버리고 오만의 면류관을 자신에게 씌웁니다. 목자나 사자의 어리석음은 자신들이 초장과 울창한 밀림을 의지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한 데 있습니다.

 

4여호와 나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는 잡혀 죽을 양 떼를 먹이라 5사들인 자들은 그들을 잡아도 죄가 없다 하고 판 자들은 말하기를 내가 부요하게 되었은즉 여호와께 찬송하리라 하고 그들의 목자들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는도다 6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다시는 이 땅 주민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사람들을 각각 그 이웃의 손과 임금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이 이 땅을 칠지라도 내가 그들의 손에서 건져내지 아니하리라 하시기로 7내가 잡혀 죽을 양 떼를 먹이니 참으로 가련한 양들이라 내가 막대기 둘을 취하여 하나는 은총이라 하며 하나는 연합이라 하고 양 떼를 먹일새 8한 달 동안에 내가 그 세 목자를 제거하였으니 이는 내 마음에 그들을 싫어하였고 그들의 마음에도 나를 미워하였음이라 9내가 이르되 내가 너희를 먹이지 아니하리라 죽는 자는 죽는 대로, 망하는 자는 망하는 대로, 나머지는 서로 살을 먹는 대로 두리라 하고 10이에 은총이라 하는 막대기를 취하여 꺾었으니 이는 모든 백성들과 세운 언약을 폐하려 하였음이라 11당일에 곧 폐하매 내 말을 지키던 가련한 양들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이었던 줄 안지라 12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품삯을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그만두라 그들이 곧 은 삼십 개를 달아서 내 품삯을 삼은지라 13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삯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 개를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14내가 또 연합이라 하는 둘째 막대기를 꺾었으니 이는 유다와 이스라엘 형제의 의리를 끊으려 함이었느니라(4-14)

 

11장은 크게 두 가지의 상징적 행동을 소개한다는 점에서 이목을 끕니다. 하나는 양 떼를 돌보는 목자의 역할입니다. 4-6절은 목자로서 상징적 행동을 하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소개합니다. 7-9절은 이 지시에 따라 양떼를 돌보려 했으나 다른 목자들(아마도 스가라는 전체를 책임지는 목자인 듯)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함으로 하나님께서 그만두게 하십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 양 떼는 더욱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9). 10-14절은 양 떼를 넘겨주고서 얼마 안 되는 돈을 받는 비참한 목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또 다른 상징적인 행동은 은총과 연합이라고 새긴 막대기를 취하는 행위로, 이는 이스라엘의 상황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후 10-14절에서 다시 이 막대기와 관련된 상징적 행동이 나올 것입니다. 에스겔(4:1-17;5:1-4; 26:1-6)은 상징적 행동을 통해 강력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또 호세아는 자녀의 이름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례 역시 일종의 상징적 행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는 목자에 대한 상징적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1) 목자로서의 상징적 행동 지시(4-6)

 

4절의 ‘혀 죽을 양 떼’ 대한 언급은 5절에서 ‘그들의 목자들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는도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목자들의 태도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제대로 된 목자가 없는 이스라엘의 운명은 잡혀 죽게 될 양 떼와 같다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합니다. 잡혀 죽을 운명의 양 떼를 기르도록 하나님께서는 명령하고, 이 명령대로 스가랴 선지자는 이행합니다. 죽을 운명임을 알면서도 먹이를 먹이는 선지자의 심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의 이런 상징 행동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보다 강력하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십니다.

 

(2) 지시에 따른 상징적 행동(7-9)

 

7-9절은 스가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행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목자를 제거하는 일과 ‘은총’과 ‘연합’의 막대기 둘을 취하는 것은 상징적 행동에 포함됩니다. 8절의 ‘한 달 동안’이라는 기간과 ‘세 목자’의 정체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목자로서의 직무를 감당하지 못한 목자는 제거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9절에서는 스가랴 선지자의 상징적 행동이 절정에 이릅니다(“내가 이르되 내가 너희를 먹이지 아니하리라 죽는 자는 죽는대로, 망하는 자는 망하는 대로, 나머지는 서로 살을 먹는 대로 두리라 하고”). 선지자는 양 떼를 먹이던 것을 중단할 뿐만 아니라 이제는 내버려둔다고 합니다. 이는 목자들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않은 것 때문에 생길양 떼의 비극적인 운명을 보여줍니다. 목자 자신의 비참한 최후는 물론 언급할 필요도 없습니다.

 

(3) 은총과 연합에 대한 상징적 행동(10-14)

 

‘은총’과 ‘연합’으로 불리는 막대기는 이미 7-9절에서 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 막대기를 꺾는 상징적 행동을 통해 언약의 불순종에 대한 경고 메시지를 매우 심각하게 전합니다. ‘은총’의 막대기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께 복을 받았는지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은총의 막대기가 잘렸다는 것은 곧 언약이 끊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이 상징적 행동이 아브라함의 언약 자체를 폐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언약 백성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며 반응하기를 촉구하는 통렬한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12-13절은 선지자가 목자로 일하면서 그 대가를 요구하는 장면입니다. 선지자는 지금 양 떼, 곧 불쌍한 백성과 불의한 목자들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양떼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 목자들은 양떼를 선지자에게 넘겨주면서도 품삯을 제대로 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선지자가 품삯으로 받은 은 삼십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합니다. 이 액수를 그리 크지 않은 돈으로 이해한다면, 당연히 선지자가 제대로 대우받지 못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14절은 선지자가 ‘연합’이라는 두 번째 막대기를 꺾었다고 보고합니다. 이는 언약 백성으로서 연합을 이뤄야 하는데, 그들이 끝내 이루지 못했음을 지적합니다.

 

목자에 대한 심판(상징적 행동과 함께)(15-17)

하나님께서는 못된 목자를 가만두지 않으십다. 쓸모없고 무능한 목자가 사용하는 기구를 빼앗으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잃은 양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양들이 흩어져도 찾지 않았습니다. 상한 자는 고치지 않고, 강건한 자는 먹이지 않았습니다. 참 목자 스가랴를 거절한 양들은 거짓 목자들에 의해서 죽는 자는 죽는 대로, 망하는 자는 망하는 대로, 나머지는 서로 살을 먹으며 살도록 두실 것입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여호와의 칼이 못된 목자의 팔과 눈에 임할 것입니다.

 

15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또 어리석은 목자의 기구들을 빼앗을지니라 16보라 내가 한 목자를 이 땅에 일으키리니 그가 없어진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흩어진 자를 찾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강건한 자를 먹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살진 자의 고기를 먹으며 또 그 굽을 찢으리라 17화 있을진저 양 떼를 버린 못된 목자여 칼이 그의 팔과 오른쪽 눈에 내리리니 그의 팔이 아주 마르고 그의 오른쪽 눈이 아주 멀어 버릴 것이라 하시니라(15-17)

 

목자와 막대기, 은 삼십에 관한 상징에 이어서 또 다른 상징적 행동이 소개됩니다. 15절은 어리석은 목자의 행위들을 묵과하지 않고 회복시킬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16절은 또 다른 목자를 세우겠다고 하시는데, 이 ‘한 목자’는 목자로서 하지 말아야 할 행동만을 합니다. “보라 내가 한 목자를 이 땅에 일으키리니, 그가 없어진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흩어진 자를 찾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강건한 자를 먹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살진 자의 고기를 먹으며 또 그 굽을 찢으리라.” 물론 바로 이어지는 17절에서 이런 목자에 대한 심판이 예고되고(칼이 그의 팔과 오른쪽 눈에 내리리니), 하나님의 최종적인 의도가 드러납니다.

‘어리석은 목자’(15), ‘못된 목자’(17)에 대한 심판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실 것입니다. 여기서 ‘칼’은 여호와의 심판하시는 칼을 가리킵니다(겔 30:24; 암 4:10). ‘팔’은 힘의 근원을 상징하고(렘 17:5), ‘눈’은 영적·정신적 판단력을 의미합니다(사 44:18). ‘마르다’(‘그의 팔이 아주 마르고’)는 심판 메시지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전형적인 용어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물을 마르게 하심으로 땅이 황폐해집니다(렘 50:38; 사 15:6; 19:5-7; 슥 10:11). 또한 열왕기상 13:4에서는 사람에 대한 심판으로 손이 마르게 되는 경우가 소개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보내신 참된 목자에 대한 깊은 성찰로 마무리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사랑하시며, 그들을 보호하고 인도하시는 목자이십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거짓 목자들이 존재하여 우리의 신앙을 흔들고,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거짓 목자들을 경계하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참된 목자로서, 그분을 따르는 길이 진정한 생명과 안전으로 이어짐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있게 유지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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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10-01)


하나님의 회복과 구원의 약속

스가랴 10장 1-12절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인내는 신앙 생활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종종 힘든 시기를 겪으며 불안과 초조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계획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기다리는 과정은 우리를 더욱 강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신실함을 경험하게 합니다. 결국, 인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있게 하고, 그의 약속을 확신하는 기초가 됩니다.

 

  • 미래적 종말론적 여호와의 구원이 무엇보다 온전한 여호와와의 관계 회복이라는 것이 여러 방면으로 강조됩니다. 1-2절에서는 목자 없는 백성이 허탄한 것을 구하고 있는데, 돌이켜 여호와께 구하라고 권고하며 관계 회복을 강조합니다. 3-7절에서는 이스라엘을 강하게 하여 여호와와의 온전한 관계를 회복할 것이라고 합니다. 8-12절에서는 여호와께 돌아옴을 통해 이뤄질 온전한 회복을 예언합니다.

 

목자 없는 백성(1-2)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기다리고 구하는 자세는 신앙 생활에서 필수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뜻에 따라 인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잘못된 것에 신뢰를 두고, 우상 숭배나 거짓 지도자들에게 의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선택은 결국 헛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만 우리의 신뢰를 두고, 그분의 은혜를 바라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1봄비가 올 때에 여호와 곧 구름을 일게 하시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시리라 2드라빔들은 허탄한 것을 말하며 복술자는 진실하지 않은 것을 보고 거짓 꿈을 말한즉 그 위로가 헛되므로 백성들이 양 같이 유리하며 목자가 없으므로 곤고를 당하나니(1-2)

 

1-2절에서는 이스라엘이 처한 고질적인 문제의 원인을 지적합니다. 이스라엘이 처한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여호와와의 관계에서 실패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곧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1-2절에서 드러난 바, 이스라엘은 다른 신을 섬기고 우상을 숭배하며 엉뚱한 것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께 간구하지도 않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도움을 구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드라빔을 이용하는 복술자(신접자)를 통해 자신들의 운과 명을 점쳐보려 했습니다.

1절의 ‘늦은 비’는 보통 봄에 내리는 비로 농사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1절은 진정으로 비를 허락하는 분이 여호와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여호와께 구하라고 권고합니다. 이스라엘이 거주한 가나안 지역은 큰 강과도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땅은 끈끈하지 못한 점성으로 인해 빗물을 담지 못하고 대부분 흘려보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항상 우기에 물을 저장해놓고 건기를 대비해야만 했습니다. 가나안의 이런 지리적 배경 속에서 숙고해보면, 1절의 ‘늦은 비’는 농경과 관련된 크나큰 축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강력하게 말합니다.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이 메시지는 이스라엘의 근본적 삶의 방향이나 의식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단순하게 종교 행사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하는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2절의 ‘드라빔’과 ‘복술자’에 대한 묘사에서, ‘허탄한 것’과 ‘진실하지 않은 것’과 ‘헛되므로’ 등은 우상의 성격을 부각하는 표현들입니다. 드라빔과 복술자를 의지하는 신앙은 곧 복과 구원을 받을 것 같지만, 결국 그러한 믿음은 헛될 뿐임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또한 2절에서는 이스라엘이 처한 근본적인 문제들과 관련하여 지도자(목자)들의 몫이 결코 적지 않음을 환기합니다. 지도자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옳은 길로 가지 못하고 유리하며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2절에서는 ‘드라빔’과 ‘복술자’만 나오고 구체적으로 지도자가 등장하지 않다가 갑작스럽게 ‘목자가 없으므로’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드라빔과 복술자, 그리고 목자가 정확히 어떻게 연관되는지는 본문이 깔끔하게 명시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이 문제의 해석과 관련하여 두 가지 추측을 해볼 수 있을 따름입니다. 첫째, 지도자들이 드라빔과 복술자를 의지해 나라의 운명을 점치려 했을 수 있습니다. 둘째,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여기는 것들을 의지했고, 특별히 이 책임이 이스라엘 지도자에게 있습니다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강하게 하실 여호와(3-7)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힘을 주시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항상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힘들고 지칠 때, 그분의 위로와 지혜를 통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얻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며, 그분의 계획에 따라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이러한 믿음은 우리가 어떤 고난을 겪더라도 흔들리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회복과 평안을 경험하게 됩니다.

 

3내가 목자들에게 노를 발하며 내가 숫염소들을 벌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그 무리 곧 유다 족속을 돌보아 그들을 전쟁의 준마와 같게 하리니 4모퉁잇돌이 그에게서, 말뚝이 그에게서, 싸우는 활이 그에게서, 권세 잡은 자가 다 일제히 그에게서 나와서 5싸울 때에 용사 같이 거리의 진흙 중에 원수를 밟을 것이라 여호와가 그들과 함께 한즉 그들이 싸워 말 탄 자들을 부끄럽게 하리라 6내가 유다 족속을 견고하게 하며 요셉 족속을 구원할지라 내가 그들을 긍휼히 여김으로 그들이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가 내버린 일이 없었음 같이 되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라 내가 그들에게 들으리라 7에브라임이 용사 같아서 포도주를 마심 같이 마음이 즐거울 것이요 그들의 자손은 보고 기뻐하며 여호와로 말미암아 마음에 즐거워하리라(3-7)

 

본문에서는 목자들에게 노하며 하나님께서 지도자들을 세우고 그들을 통해 승리(회복)를 가져올 것을 언급합니다. 승리를 통한 회복은 여호와와의 관계에 역시 집중됩니다(특히 6-7절,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라’). 3-7절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가져다주되 이스라엘을 강하게 하는 방식(3-5절)을 다루는 부분과 여호와와의 온전한 관계가 회복된다는 내용입니다(6-7).

 

(1) 이스라엘을 강하게 하심(3-5)

 

스가랴서에서 언약이 강조되고 있는 맥락을 고려할 때, 전쟁에서의 승리는 언약을 순종함으로 받게 되는 전형적인 축복의 방식이라 할 수 있으며, 온전한 관계 회복은 언약 관계의 회복을 가리킵니다고 할 수 있습니다.

3a절은 지도자들에 대해 여호와께서 노하시는 것을 언급합니다. ‘목자들’과 ‘숫염소들’은 지도자를 가리킵니다. 예레미야 50:8에서 숫염소를 양 떼에 앞서가는 것으로 묘사한 바 있습니다. 지도자들에게 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36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친히 백성을 돌보시고 ‘전쟁의 준마’와 같이 만들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어서 4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 승리를 가져다줄 지도자들을 세우겠다고 하십니다. 4절의 ‘모퉁잇돌’은 건축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비유적인 의미에서 지도자(삼상 14:38: 사 19:13)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말뚝’은 움직이지 않게 잘 박혀 고정되었다는 의미에서 안전한 장소를 가리키기도 합니다(사 22:23). ‘싸우는 활’은 지도자를 세우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5절은 전투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에서 여호와는 유다를 위해 강한 용사 같이 싸우시는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여호와가 그들과 함께하시므로’ 유다 족속은 그들의 회복(승리)을 확신해야 합니다.

 

(2) 여호와와의 온전한 관계 회복(6-7)

 

6절의 표현들은 모두 언약을 상기하거나 언약 회복을 약속합니다. ‘유다 족속’과 ‘요셉 족속’은 각각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이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온전한 연합과 이상적인 회복을 가리키는 것이며(이미 9:10에서도 표현한 바 있다), 11:14에서도 이 연합을 구체화하고 있습니다. ‘돌아오게 하리니’는 단순히 지리적인 차원에서 바벨론으로부터 돌아오게 하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풀 회복을 가리킵니다. ‘내버린 일’은 언약에 대한 불순종으로 예루살렘을 멸망하게 한 사건을 가리킵니다. ‘내가 내버린 일이 없었음 같이 되리라’는 언약적인 저주의 상태에서 벗어나 완전히 회복되게 하리라는 약속의 표현입니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언약의 기본적인 공식에 해당합니다.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고 십계명을 주실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심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0:2:29:45-46: 출 6:7,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7절 역시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온전한 회복을 말합니다.

 

회복시키는 여호와(8-12)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부르시고 전인격적으로 회복시키기를 원하십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그분을 신뢰하고 순종해야 하며, 이는 회복의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능력 있는 분이시며, 그분의 손길이 우리의 삶을 지키고 인도합니다. 회복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새로운 소망을 가지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8내가 그들을 향하여 휘파람을 불어 그들을 모을 것은 내가 그들을 구속하였음이라 그들이 전에 번성하던 것 같이 번성하리라 9내가 그들을 여러 백성들 가운데 흩으려니와 그들이 먼 곳에서 나를 기억하고 그들이 살아서 그들의 자녀들과 함께 돌아올지라 10내가 그들을 애굽 땅에서 돌아오게 하며 그들을 앗수르에서부터 모으며 길르앗 땅과 레바논으로 그들을 이끌어 가리니 그들이 거할 곳이 부족하리라 11내가 그들이 고난의 바다를 지나갈 때에 바다 물결을 치리니 나일의 깊은 곳이 다 마르겠고 앗수르의 교만이 낮아지겠고 애굽의 규가 없어지리라 12내가 그들로 나 여호와를 의지하여 견고하게 하리니 그들이 내 이름으로 행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8-12)

 

8-12절은 온전한 회복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돌아오게 한다는 이미지가 강조되는데, 이 돌아오게 함은 스가랴서에서 회복에 관한 주제와 관련하여 빈번하게 등장합니다(사실, 이는 스가랴서의 전체 주제이기도 하다. 특히 1:3을 참조하라). 역시 회복의 궁극적인 목적은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관계 회복에 있습니다(특히 12절을 참조하라). 여기서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개인적인 차원으로 축소하여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가랴서에서 관계 회복은 개인과 여호와와의 관계를 넘어서서 공동체와 여호와, 즉 사회적 공적 차원까지 확장되는 개념입니다. 여호와와의 관계 회복과 구원을 결코 개인적인 차원으로만 축소시킬 수 없습니다.

“내가 그들을 향하여 휘파람을 불어 그들을 모을 것은 내가 그들을 구속하였음이라 그들이 전에 번성하던 것 같이 번성하리라.” 8절의 ‘휘파람을 불어’는 이스라엘을 불러 모으는 신호입니다. ‘구속’은 언약의 배경에서 자주 사용되는 표현으로, 언약적인 회복을 가리킵니다. ‘번성’은 창조 언약(창 1:22)과 노아 언약(창 9:1), 아브라함 언약(창 17:2)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모세 언약을 전후로 하여 이 약속이 성취되어 번성하였다는 사실도 자주 언급됩니다(창 47:27: 출 1:7, 12, 20; 신 10:10). 여기서도 언약은 민족적·사회적·공적 차원을 포괄하는 총체적 개념의 회복입니다.

10절의 ‘길르앗 땅과 레바논’은 기름진 땅으로 잘 알려진 곳입니다(사 29:17; 겔 31:16). 레바논은 이사야서에서 회복된 시온을 상징한 바 있습니다(사 60:13; 35:10). 길르앗은 흩어진 양들을 돌아오게 하는 장소로 언급된 바 있습니다(렘 50:19-20; 미 7:14). 여기서 언급된 애굽과 앗수르는 물론 시대착오적인(anachronism)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거나 괴롭힌 강대국들을 대표하여 애굽과 앗수르가 거론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회복과 은혜의 약속에 대한 확신으로 마무리됩니다. 하나님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강하게 하시며, 우리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신뢰와 인내로 그 은혜를 기다려야 합니다. 또한, 잘못된 것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우리의 신뢰를 두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을 통해 우리는 회복과 소망의 길로 나아가게 되며,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속에서 진정한 평안과 기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여호와이심을 믿고, 그분의 은혜를 기대하며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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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09-02)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스가랴 9장 9-17절


 

예루살렘을 안전하게 지키시는 구원자는 누구일까요? 그는 나귀를 타고 오시는 평화의 왕이며,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자 공의롭고 겸손한 왕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안전하고 평화로운 나라를 만드는 왕이 강력한 통치자일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강력한 군사적 힘을 이용하는 왕들과는 달리 참된 평화를 가져오는 왕이 다스립니다. 교만한 블레셋의 왕과는 다른, 참된 겸손과 사랑의 왕이십니다.

 

  • 스가랴의 후반부(9-14장)로 갈수록 여호와의 날이라는 주제가 강화됩니다. 9-17절은 주로 여호와의 임재라는 주제를 다루며, 언약에 근거하여 여호와의 임재로 말미암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합니다. 9-10절에서는 시온의 왕을 다룹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은 전쟁 승리를 통한 화평(11-15)과 소산물의 축복을 통한 땅의 화평(16-17)을 이야기합니다.

 

왕을 통한 여호와의 임재(9-10)

일상에서 우리는 다양한 도전과 어려움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잊지 않으시며, 구원의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의 계획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진행될 수 있지만, 믿음으로 그 소망을 붙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힘들고 지칠 때,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뜻을 신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9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10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9-10)

 

전반적인 내용은 언약에 근거한 회복을 예언합니다. 시온의 왕은 다윗 언약에서 약속한 다윗 혈통의 왕이며, 궁극적으로는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시온의 회복은 전쟁 승리를 통한 화평과 소산물의 축복을 통한 땅의 화평으로 나뉘지만, 이는 모두 언약적인 축복에 해당합니다(레 26장; 신 28장). 이 화평은 언약을 순종할 때에 오는 축복을 언약적인 회복의 차원에서 예언한 것입니다. 이런 내용상의 전개와 더불어 본문 안에서 강조되는 또 다른 내용이 있습니다. 이는 스가랴 당시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당시는 성전 재건 중이거나 성전 재건 후 얼마 안 되었거나, 혹은 한참 지난 시점으로 여전히 이스라엘은 어려움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이스라엘에게 아브라함 언약, 모세 언약, 다윗 언약 등이 여전히 유효한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스가랴서는 궁극적으로 언약을 이루어가는 분이 여호와이심을 강조합니다(본문에서는 ‘나’를 계속해서 강조함).

전체 맥락을 생각해보면, 왜 스가랴서가 여호와의 임재를 그토록 강조하는지 알 수 있게 됩니다. 스가랴서는 학개서와 함께 성전 재건의 가장 큰 주제를 이룹니다. 여기서 성전 재건은 옛 유대교의 부활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언약을 재확립하는 기초로서의 성전 재건을 의미합니다. 성전은 이스라엘에서 단순한 종교 활동의 영역이 아닙니다. 성전은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중심이 되는 것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성전 재건은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생활을 회복한 것에 주된 초점을 맞춥니다. 바벨론에 의한 성전 파괴(주전 586년)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셨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즉 언약에 불충실함에 대한 저주가 이루어진 셈입니다. 그러나 물론 성전 파괴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완전한 관계적 단절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에게 혹독한 포로기의 시련은 다시 하나님과의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는 일종의 계기적 사건으로 이해됩니다. 이제 성전 재건은 이스라엘과 여호와의 내적 관계가 외적 형식으로 드러난 것을 상징적이고 가시적으로 보여줍니다.

9절의 ‘시온’과 ‘예루살렘’에 대한 언급은 이스라엘에 대한 편애적인 호칭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여호와의 임재 장소를 상기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바벨론 침략 이후 폐허가 되었던 시온이자 예루살렘, 곧 여호와가 떠나셨던 예루살렘이 다시 여호와의 임재로 활기를 띠는 것을 보여줍니다. 9절의 왕은 여호와의 임재를 대변하는 왕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메시아적 인물입니다. 다윗 언약(삼하 7장)에 따라 다윗의 혈통으로 올 왕을 가리킵니다. 9절 나머지 부분에서는 이 왕을 묘사하고, 이어서 예루살렘(시온)에 올 왕이 행할 일들을 기록합니다. 초반 내용은 전쟁이 그칠 것을 묘사하는데, 이는 겸손하게 올 왕의 이미지와 조화를 이룹니다.

10절에서 ‘에브라임’은 예루살렘이 유다를 대표하듯 북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지파이며,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호 5:3). ‘에브라임의 병거’를 언급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통일을 의미합니다(겔 37:16–20; 렘 31:31; 사 11:13; 슥 11:14). 이는 불화가 없는 온전한 평화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전쟁을 일으키는 왕이 아니라, 겸손하게 세상에 화평을 가져다주는 왕입니다(미 5:10-15). 그러나 화평을 전하지만 그의 통치는 세상 곳곳에 미칠 것입니다. 이 화평은 이방 사람에게도 전해질 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이미 스가랴서에서 자주 반복된 주제입니다. 직전 8:18-23에서도 온 민족이 여호와 앞에 나오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9-14장에서는 특히 여호와의 날에 이루어질 종말론적인 일들을 묘사할 때 온 민족이 나오는 것으로 강조됩니다(14:17). ‘바다에서 바다까지’와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라는 표현은 광범위한 지역을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됐습니다(시 72:8; 미 7:11-12). 따라서 통치의 범위가 온 지역에 미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시온의 회복(1) : 승리를 통한 화평(11-15)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의 곁에 계시며, 그분의 임재를 인식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그와의 관계를 깊이 있게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기도와 말씀 묵상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계는 우리에게 힘과 위로를 주며, 어려운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게 합니다.

 

11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내가 네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12갇혀 있으나 소망을 품은 자들아 너희는 요새로 돌아올지니라 내가 오늘도 이르노라 내가 네게 갑절이나 갚을 것이라 13내가 유다를 당긴 활로 삼고 에브라임을 끼운 화살로 삼았으니 시온아 내가 네 자식들을 일으켜 헬라 자식들을 치게 하며 너를 용사의 칼과 같게 하리라 14여호와께서 그들 위에 나타나서 그들의 화살을 번개 같이 쏘아내실 것이며 주 여호와께서 나팔을 불게 하시며 남방 회오리바람을 타고 가실 것이라 15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들을 호위하시리니 그들이 원수를 삼키며 물맷돌을 밟을 것이며 그들이 피를 마시고 즐거이 부르기를 술취한 것 같이 할 것인즉 피가 가득한 동이와도 같고 피 묻은 제단 모퉁이와도 같을 것이라(11-15)

 

시온의 언약적인 축복에서 언약에 순종할 때 얻게 되는 전쟁의 승리는 빈번하게 등장하는 주제 중 하나입니다(레 26장: 신 28장). 여기서 전쟁에서의 승리, 곧 하나님께서 친히 싸워 이스라엘에게 화평을 가져다준다는 것은 언약의 회복 관점에서 읽혀야 합니다(레 26:5-6). 11절의 ‘네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은 시온의 왕을 통한 회복이 하나님과의 언약에 근거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11절의 ‘물 없는 구덩이’는 물이 있는 구덩이에 비해 위험한 상황에 처하지만 일말의 희망을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포로기를 거치고, 성전 재건이 중단될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였음에도 이스라엘에게는 아직도 실낱같은 희망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하나님의 언약적인 저주는 최종적인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하려는 데 최종적인 의도를 두고 있습니다.

‘구덩이’가 이스라엘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비유하는 것처럼, 12절의 ‘요새’는 여호와나 여호와가 마련하는 피난처를 가리킵니다. 곧 여호와께로 돌아오라는 의미입니다. 13절의 ‘유다를 당긴 활로 삼고 에브라임을 끼운 화살로’ 삼는다는 표현은 유다와 에브라임(북이스라엘을 대표)을 무기로 삼는다는 것을 표현하는 생생한 비유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유다와 에브라임이 스스로 전쟁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가 이들을 무기로 삼는다는 데에 그 강조점이 놓여있습니다. 따라서 여호와는 현재 어려움에 처한 이스라엘을 그들의 힘으로가 아니라 여호와의 힘으로 회복하실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14-15절은 여호와의 임재로 인해 전쟁에서 승리하고 그로부터 얻은 기쁨을 묘사합니다. 특히 ‘주 여호와께서 나팔을 불게 하시며’라는 표현은 철저하게 여호와의 주권 아래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질 것을 의미합니다. ‘회오리바람’은 여호와의 개입으로 파멸이 일어난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나타냅니다(사 29:6; 렘 30:23).

‘물맷돌’은 무기이므로 무기를 밟는다는 것은 적의 무기를 무력화해 철저하게 정복할 것을 가리킵니다. 15절의 ‘동이와도 같고..… 제단 모퉁이와도 같을 것이라’라는 표현은 제사장이 바칠 희생 제물로 인해 피가 가득할 것을 묘사합니다. 이 역시 전쟁의 승리로 인한 결과를 묘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이’(미즈라크)는 일반적인 용기를 뜻하기도 하지만 보통은 희생 제의에 사용되는 용기를 가리킵니다(왕상 7:40에서는 여호와의 전에서 사용하는 기구 가운데 하나인 ‘물두멍’을 가리킨다). 또한 여기서는 ‘제단 모퉁이’와 병행구로 사용되므로 더더욱 희생 제의에서 사용되는 ‘동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단 모퉁이’는 제사장이 희생 제물의 피를 뿌리는 곳입니다(레 9:12,18). 따라서 ‘동이’에 담은 피를 ‘제단 모퉁이’에 뿌리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온의 회복(2) : 땅의 화평(16-17)

하나님과의 관계는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분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 우리는 삶의 방향성을 찾고,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겸손한 자세와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는 진정한 리더십을 이해하고, 그분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러한 교훈은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깊이 생각하게 만듭니다.

 

16이 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 떼 같이 구원하시리니 그들이 왕관의 보석 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 17그의 형통함과 그의 아름다움이 어찌 그리 큰지 곡식은 청년을, 새 포도주는 처녀를 강건하게 하리라(16-17)

 

언약에 순종할 때 언약적인 축복으로 소산물의 풍요로움을 얻게 된다는 것도 자주 등장하는 주제 중 하나입니다(레 26장; 신 28장). 여기서도 소산물의 축복을 언약 회복의 신호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16절의 ‘그 날에’는 특히 스가랴서에서 자주 나오는 표현으로, 여호와께서 궁극적으로 임재하실 ‘여호와의 날’을 가리킵니다. 특히 12-14장에서는 더욱 빈번하게 이 표현이 나오며, 미래적 관점에서 여호와의 날을 강조하면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권고합니다. 17절의 ‘곡식’과 ‘새 포도주’는 땅의 대표적인 소산물을 가리킵니다(창 27:28; 신 33:28; 사 36:17; 호 7:14). 여기서도 소산물의 풍요로움이 사람들에게까지 미치는 것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임재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 구절은 겸손한 왕이 오심을 통해 진정한 리더십과 희망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그와의 관계를 깊이 있게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며, 그분의 은혜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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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바냐(09-01)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

스가랴 9장 1-8절


 

하나님께서는 열국을 심판하시며, 그의 백성을 철통같이 지켜주실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 백성을 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왕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심으로 가능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대적을 심판하고 언약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는 겸손한 왕이자 목자이시며, 대적에게는 강력한 용사이십니다.

 

  • 스가랴 7-8장이라는 한 단위의 메시지가 끝나고 9장에서 새로운 단락이 시작됩니다. 이 주제는 예루살렘의 구원이라는 주제는 변함없이 계속됩니다. 갑작스럽게 1-8절에서 온 민족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가운데 정의가 온전히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다른 예언서에서도 등장하는 메시지입니다.

 

이웃 나라에 대한 심판(1-8)

하나님께서는 모든 민족과 국가에 대한 주권을 가지십니다. 그들은 각자의 행동에 따라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심판은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의와 공의를 통해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올바르게 살아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1여호와의 말씀이 하드락 땅에 내리며 다메섹에 머물리니 사람들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눈이 여호와를 우러러봄이니라 2그 접경한 하맛에도 임하겠고 두로와 시돈에도 임하리니 그들이 매우 지혜로움이니라 3두로는 자기를 위하여 요새를 건축하며 은을 티끌 같이, 금을 거리의 진흙 같이 쌓았도다 4주께서 그를 정복하시며 그의 권세를 바다에 쳐넣으시리니 그가 불에 삼켜질지라 5아스글론이 보고 무서워하며 가사도 심히 아파할 것이며 에그론은 그 소망이 수치가 되므로 역시 그러하리라 가사에는 임금이 끊어질 것이며 아스글론에는 주민이 없을 것이며 6아스돗에는 잡족이 거주하리라 내가 블레셋 사람의 교만을 끊고 7그의 입에서 그의 피를, 그의 잇사이에서 그 가증한 것을 제거하리니 그들도 남아서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유다의 한 지도자 같이 되겠고 에그론은 여부스 사람 같이 되리라 8내가 내 집을 둘러 진을 쳐서 적군을 막아 거기 왕래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포학한 자가 다시는 그 지경으로 지나가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눈으로 친히 봄이니라(1-8)

 

스가랴 1-8장까지 1부를 마친 다음, 9-14장까지는 미래의 메시아의 나라에 대한 다양한 모습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먼저 9-11장까지는 장차 오실 겸손하실 메시야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12-14장으로 미래에 메시아의 나라에 대한 또 다른 모습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스가랴의 주요 내용
1-8장 9-14장
메시아의 왕국을 위한 준비 메시아의 오심을 통한
구원과 통치

 

9장 1-8절은 이웃 나라 곧 온 민족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며, 9절 이후에서 본격적인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런 양상은 아모스서와 비슷합니다. 아모스서는 유다와 이스라엘을 향해 심판 메시지를 전하기 전에 온 민족에 대한 심판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이웃 나라에 대한 심판은 곧 이스라엘에게는 회복과 복의 메시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모스서에서는 온 민족에 대한 심판이 유다와 이스라엘에 경고가 되는 메시지였습니다. 유다와 이스라엘 온 민족과 다를 바가 없는 죄를 지었고, 또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온 민족과 마찬가지로 심판 메시지를 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온 민족에 대한 심판은 공의의 차원에서 죄악에 대한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거룩함이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온 땅에 전달되고, 그런 거룩함을 닮아 거룩한 모습이 열방에게서 드러나기를 바라십니다. 온 민족이 거룩함과 거리가 먼 삶을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리지 못한 이스라엘의 책임입니다. 이스라엘이 복의 근원이 되어 복을 전달해야 하며 제사장 나라가 되어 하나님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해야 하지만, 그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열방에 대한 심판을 단순히 이스라엘을 세워주기 위한 방편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한편, 심판 대상이 유다와 먼 이웃 나라에서 점차 가까운 나라로 이동하는 패턴은 아모스서에서도 비슷하게 묘사되는데, 유다도 예외 없이 심판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 여호와의 말씀(1)

 

12:1에서는 ‘여호와의 경고의 말씀이라’라고 번역했지만, 여기서는 ‘맛사’의 번역을 생략했습니다.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맛사는 일부 본문에서 제목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습니다(잠 30:1; 31:1; 왕하 9:25: 렘 23:33-34; 말 1:1). 여기서도 역시 새로운 단락을 시작하면서, 아마도 제목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2) 북쪽 나라: 하드락, 다메섹, 하맛(1-2a)

 

하드락은 다메섹 북쪽에 위치한 시리아와 아람 지역의 도시입니다. 다메섹은 시리아의 수도이기도 하고, 페르시아 제국 시대에는 유다 지역을 다스리는 총독이 거주하던 도시입니다. 하맛은 시리아의 주요 도시이며, 본문(1절과 함께)에서는 다메섹의 접경지대에 하맛이 위치한 것으로 소개됩니다. 이방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가 임했다고 하는 것은 이 가운데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람들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눈이 여호와를 우러러봄이니라’라는 표현에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키’가 있습니다. 앞의 ‘여호와의 말씀이 하드락 땅에 내리며 다메섹에 머물리니’라는 표현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따라서 학자들은 70인역에 근거하여 사람들이 여호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가 사람들을 보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제안하기도 합니다. 문맥상으로는 여호와의 주권적 행사를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2) 지중해 해안(북쪽) : 두로, 시돈(2b-4)

 

두 도시 두로와 시돈은 베니게(페니키아) 지역에서 중요한 두 도시로 나란히 등장합니다. 에스겔에서도(27:8) 두로의 ‘지혜자’들을 언급한 바 있는데, ‘그들이 지혜로움이니라’라는 표현은 냉소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3절에서처럼 두로는 요새를 건축하고 금과 은을 쌓으며 지혜롭게 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의 지혜로움은 소용이 없게 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두로의 특징으로 ‘자기를 위하여 요새를 건축하며’라고 했는데, 이 표현은 당시 두로의 상황과 잘 어울립니다. 앗수르의 공격을 5년(주전 622년에 끝남)과 13년(주전 572년에 끝남; 겔 29:18)동안 버텼습니다. 두로는 그만큼 요새로서의 자연적 입지 조건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명성이 있더라도 여호와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될 것입니다(9:4, ‘주께서 그를 정복하시며’). 두로의 명성에는 요새뿐만 아니라 금과 은도 포함되는데, 여기서는 이것들이 ‘티끌’과 ‘진흙’과 같다고 과장합니다. 그러나 이런 엄청난 부의 축적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그것도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될 것입니다.

 

4절의 ‘주께서 그를 정복하시며’라는 표현 앞에 ‘보라!’를 의미하는 불변화사 ‘힌네’가 있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두로와 시돈을 정복하심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또한 지혜롭다고 하는 두로와 시돈의 군사적 요새와 재물이 더 이상 쓸모가 없게 되었음을 강조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두로를 심판하는 메시지는 흥미롭습니다. ‘그의 권세를 바다에 쳐넣으시리니’라는 표현은 두로가 정복당하는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본래 두로는 육지에도 성읍을 두고 섬에도 성읍을 두어 좀처럼 공략하기가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더 대왕은 주전 332년에 육지를 먼저 점령한 후, 거기에서 나온 건축폐기물로 섬에 있는 성읍까지 연결해 두로를 멸망시켰습니다.

 

(3) 블레셋 도시 국가: 아스글론, 가사, 아스, 에그론(5-8)

 

앞의 나라들에 대한 심판 메시지와는 다르게, 블레셋 도시 국가들이 당하는 고통의 내적 심경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여호와의 심판이 북쪽에서부터 유다에 가까운 나라로 임박하면서 그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커졌을 것입니다(참조. 신 2:25). 이 도시 국가들은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도시들입니다. 지리적 순서의 원근에 따라 언급되는 순서가 결정되었습니다.

6절의 ‘잡족’은 아스돗이 다른 민족에게 멸망 당하게나 쫓겨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만’은 사람이 자랑하거나 영광을 돌리는 것을 가리킵니다(사 13:19; 호 5:5;7:10). 여기서는 블레셋이 지금까지 쌓아온 영광이나 자랑 모두를 가리키며, 이것들을 끊겠다는 심판의 메시지를 뜻합니다. 여기서 단순히 교만은 마음의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쌓은 구체적인 업적과 관련됩니다. 블레셋의 업적은 그들을 교만한 상태로 몰아갔습니다.

7절은 온 민족의 심판과 더불어 구원을 알리고 있습니다. 이는 8:20-23에서도 밝혔듯이 열방이 여호와 앞에 나아와 예배하는 장면과 일치합니다. ‘가증한 것’은 우상에 바친 제물로 보입니다. 이는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바친 자들이 나누어 먹음으로써 이 사이에 낀 상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제거하리니’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블레셋에게서 가증한 것을 제거함으로써 ‘그들도 남아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그 결과를 보게 됩니다. 곧 블레셋도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것임을 뜻합니다. 이는 하나님 자신의 백성뿐만 아니라 온 민족을 구원하시겠다는 종말론적 메시지에 해당합니다. ‘유다의 한 지도자 같이 되겠고’라는 표현은 블레셋을 구원하는 것을 점진적으로, 그리고 최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죄와 우상을 제거하는 일, 그리고 남은 자를 두는 일, 이제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유다에 합류하여 지도자까지 되는 일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제 곧 이방인과 유대인의 경계는 무너질 것입니다(참조. 롬 11:17-18).

‘여부스 족속’(8)은 산지에 살았으며(수 11:3), 다윗이 쫓아내기 전까지는 예루살렘 성읍을 차지했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여부스 족속은 유다 족속에 흡수되어 일꾼이 됐습니다(대하 8:7-8). ‘여부스 사람 같이 되리라’라는 표현은 여부스 족속이 유다 족속이 아니었으나 그들이 이스라엘에 흡수된 것처럼, 블레셋도 이와 비슷한 운명이 될 것을 시사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민족과 국가에 대한 주권을 가지시며, 그들의 행동에 따라 심판하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이해해야 합니다. 역사 속에서 적극적으로 일하시며, 그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올바른 삶을 살아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행동으로 이어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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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08-02)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스가랴 8장 14-23절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바라보며,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고난의 날이 지나갈 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우리를 감싸주실 것입니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매 순간이 축복이며,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를 인도합니다. 예수님의 희생을 기억하며, 우리는 새로운 소망과 기쁨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평화와 위로 속에서 우리는 다시 일어섭니다.

 

  • 스가랴 8:14-17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시기 위해 이스라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시고, 8:18-23에서는 다시 7장 초반(7:1-7)에서 다룬 금식 문제와 관련하여 궁극적으로 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18-19절에서처럼 금식과 관련되어 있지만, 이는 단순한 금식의 문제를 넘어서는 온전한 평강에 대한 것입니다. 20-23절에서처럼 온 민족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이상이 실현되는 것과 관련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14-17)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그분의 분노로 인해 벌을 내리셨지만, 이제는 다시 축복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진리와 평화를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서로 진실되게 말하고 정의로운 재판을 하며, 마음으로 이웃을 해치려는 악한 계획을 세우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거짓 맹세를 싫어하시며, 정직과 공의를 행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러한 삶의 태도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번영과 평화를 약속하십니다.

 

14○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 조상들이 나를 격노하게 하였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뜻하고 뉘우치지 아니하였으나 15이제 내가 다시 예루살렘과 유다 족속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뜻하였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16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17마음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내가 미워하는 것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14-17)

 

11-13절에서 회복에 대해 분명히 약속한 후에, “손을 견고히 하라”고 조언하였습니다. 이제 14-15절은 왜 그들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지를 말한 후, 16-17절에서는 이에 반응해 이스라엘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이미 시내산 언약에서 선포된 십계명에 포함된 것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는 덕목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하나님이시기에 자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도 거룩함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맺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언약 백성다운 모습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14-15절에서 선지자는 왜 이스라엘이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지를 하나님의 성품을 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에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격노하여 ‘재앙’을 내렸지만, 이제 예루살렘과 유다 족속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하셨기에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언약에 불순종한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게 하셨으나, 이제 뜻을 돌이켜 다시 그들에게 기회를 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술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 30:5)라고 한 시편 기자의 말처럼, 하나님께서는 곧 마음을 바꾸신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바꾸었기 때문에 마음을 바꾸신 것이 아니라, 그분이 은혜를 베풀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돌이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서 그 은혜를 받기 위해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합니까? 그것을 16-17절이 말해줍니다. 그것은 정확히 그들의 열조가 버렸던 그것입니다. 열조가 무시하고 듣지 않고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면서까지 외면한 말씀입니다. 여기 ‘진리’는 8:3에서도 언급된 바 있으며,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하나로 언약 백성이 닮아야 할 덕목입니다. 16절의 ‘성문’은 광장 개념으로 거래나 재판이 이루어지는 장소입니다(룻 4:1-2; 삼하 19:8; 렘 29:7; 암 5:10). 공정하고 ‘화평’을 가져오는 재판을 권고합니다. 17절의 거짓 맹세하는 것은 5장의 환상에서도 죄악으로 지적된 바 있습니다(5:4). 또한 마음에 해하기를 도모한다는 것도 7:10에서 예루살렘이 멸망당한 이유를 제시하는 맥락에서 지적된 바 있습니다. 이 모두는 언약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덕목들입니다.

 

금식과 관련된 약속(18-19)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정의를 행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추구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금식을 대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더욱 풍성히 누릴 수 있습니다. 금식은 우리의 마음과 삶을 하나님께로 돌리며,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강화하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18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9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넷째 달의 금식과 다섯째 달의 금식과 일곱째 달의 금식과 열째 달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들이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리와 화평을 사랑할지니라(18-19)

 

7:1-7에서 제기됐던 금식 문제가 다시 언급됩니다. 다섯째 달 금식과 일곱째 달 금식은 이미 7:1-7에서 다루어졌습니다. 여기서는 금식과 관련된 문제를 확대해서, 곧 단순히 벧엘 사람들이 묻는 금식만이 아니라, 넷째달과 열째 달을 추가해서 전반적인 금식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7장을 처음에 시작할 때 금식으로 시작하고서는 전반적인 문제로 확대하듯이, 여기서도 역시 7장에서 이어져 오는 내용을 마무리하는 차원에서 금식을 다시금 거론합니다. 하지만, 금식을 넘어서는 근본적인 회복의 약속은 8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회복에 대한 약속을 잇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회복과 구원의 때가 되면 고통의 금식이 기쁨이 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이전 금식은 성전 파괴와 예루살렘 멸망과 관계가 깊은 금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여호와의 승리로 말미암아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가 될 것입니다. 이는 성전 파괴와 예루살렘 멸망이 완전히 잊힐 정도로 회복되는 예루살렘의 온전한 모습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 회복을 약속하면서도,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돌아옴에 대해 동시에 강조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엿볼 수 있는 사실은 금식 문제가 단순히 금식을 준수하느냐 그러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온전히 회복됨과 관련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이 하나님께로 그들 삶의 중심을 온전히 돌이켰느냐 그러지 않았느냐의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복을 누리는 이스라엘은 하나님 백성다운 삶, 언약 백성으로서의 삶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진리와 평강을 사랑하라는 권고는 하나님의 성품이 그들의 삶에 온전히 반영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이미 바로 앞의 8:16-17에서도 비슷하게 언급된 바 있습니다. ‘진리’는 단순히 사실의 옳고 그름의 문제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 충실하냐 그러지 않느냐의 문제를 포함합니다. ‘평강’ 역시 단순히 전쟁이나 다툼이 없는 상태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인간관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함하여 모든 면에서 온전함이 회복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평강’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마땅히 갖춰야 할 태도이자 덕목입니다.

 

온 민족이 주께로(20-23)

신실하고 진실된 믿음이 주변 사람들에게 전파되어 하나님을 찾게 만드는 힘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각 민족의 진정한 회개와 진리를 추구하는 삶을 통해 모든 민족이 그분께 나아올 것을 기대하십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맺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더 많은 이들이 주님께 돌아오게 할 수 있습니다.

 

20만군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다시 여러 백성과 많은 성읍의 주민이 올 것이라 21이 성읍 주민이 저 성읍에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속히 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자 하면 나도 가겠노라 하겠으며 22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리라 23만군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그 날에는 말이 다른 이방 백성 열 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20-23)

 

그 날 주님이 돌아오셔서 진실로 화평을 사랑하는 백성들 가운데 거하실 때, 그리고 땅과 하늘이 이 백성을 위해 이슬을 내리고 곡식을 풍성하게 내어줄 때, 그리고 아무도 억울하게 고통당하는 사람이 없고, 아무도 남을 해하려는 마음 없이 은혜로 사는 사람들로 가득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 공동체를 첫 이스라엘처럼(출 19:5-6) ‘거룩한 제사장 나라’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기이하게 회복되고 축복을 받는 모습을 보고 온 열국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나아올 것입니다(20; 참조 사 2:2-4; 60:1-3; 66:18–21; 미 4:15). 온 열방과 온 민족이 주께로 나와 예배하게 된다는 예언은 8:13에서 이스라엘이 ‘복’이 됨으로써 비롯되는 결과이기도 합니다. 이때의 복은 개인적인 복의 의미를 넘어섭니다. ‘타자’를 위한 혹은 ‘타자’를 향한 확대된 개념의 복입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 주변 나라들이 이스라엘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나아오게 되는 길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는 본래 아브라함 언약(창 12:3,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과 시내산 언약을 체결하는 배경(출 19:6, ‘제사장 나라’)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약속이자 이스라엘을 향한 목적이기도 합니다.

20-23절은 온 민족이 주께 나오는 장면을 점차적으로 발전시키며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7-8장의 맥락에서는 바벨론에서 귀환한 사람들로 여겨지는 벧엘 사람들만 금식 문제를 제기하며 나아왔는데, 이제 20절에서는 ‘여러 백성과 많은 성읍의 주민’들로 확대됩니다. 이것이 22절에서는 성읍에서 나라로 확대됩니다. 이렇게 점진적으로 온 민족이 주 앞에 나아와 예배하는 것을 확대하는 것은 여호와의 약속이 점차 확고하게 이루어질 것을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함입니다. 23절의 옷자락을 잡는 행위는 복종하거나 충성한다는 표시의 행위일 수도 있고, 도움을 구하는 행위일 수도 있습니다(삼상 15:27, 사울은 자비를 구하며 사무엘의 옷자락을 붙잡기도 했습니다). 문맥상으로는 도움을 구하는 행위와 더 가까워 보입니다. 또한 23절의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표현은 언약 관계를 표현한 것으로, 여기서는 언약의 온전한 회복을 가리킵니다(8:3; 겔 48:35).

금식 문제는 성전과 관련해서 처음 제기되었고(7장), 이제는 성전을 포함해서 이스라엘에게 온전한 미래상을 제시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합니다(금식과 같은 종교적 관습의 현안 문제를 넘어서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이룰 여호와의 날을 제시합니다). 성전 재건이 완성되고서도 이스라엘은 성전이 파괴되기 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또다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며언약 백성의 삶을 저버릴 수 없습니다. 성전 재건은 온전한 의미의 회복, 이스라엘의 회복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성전 역시 금식처럼 관습으로만 남고 그 의미는 퇴색할 것입니다. 성전은 본래 여호와의 거하심을 상징하며,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에서의 예배를 통해 자신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확인받습니다. 여호와와 그의 백성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됩니다. 온전한 관계의 회복은 진리와 화평을 사랑하는 것으로(19), 스스로 복이 됨을 통해(8:13) 이루어집니다. 그때 온 민족은 여호와 앞에 나아와 예배하는 일(8:20-23)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성전 재건을 통해 하나님이 제시한 미래의 청사진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셨지만, 이제는 그들에게 축복을 약속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진리와 평화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전파하는 힘이 됩니다. 우리의 신실함과 순종은 하나님의 축복을 초대하며, 모든 민족이 주님께 돌아오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을 위한 구원의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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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08-01)


하나님께서 주신 회복의 약속

스가랴 8장 1-13절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돌보시며 그들의 삶에 평화와 안전을 가져다주실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구원은 모든 인류에게 미치는 보편적인 성격을 띱니다. 이러한 회복은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또한, 이 말씀은 믿음과 인내의 중요성을 일깨우며, 어려운 시기를 견디는 힘을 줍니다. 결국, 하나님은 언제나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한 분임을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 본래는 8:1-17까지가 하나의 큰 문맥으로 예루살렘의 회복을 주제로 다룹니다. 1-8절은 진리의 성읍이요 성산이 될 것이라는 예루살렘을 향한 임재의 약속이 나오고, 9-13절은 예루살렘의 번영과 평화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14-17절에서 말해줍니다. 이는 예루살렘 회복에 대한 기대 가운데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신실히 반응하는 권고입니다.

 

예루살렘의 회복(1-8)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향한 깊은 사랑과 긍휼을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이러한 사랑은 그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회복의 약속을 주심으로써,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희망을 제공합니다. 이 약속은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결국, 언제나 자신의 백성을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되 2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 3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4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예루살렘 길거리에 늙은 남자들과 늙은 여자들이 다시 앉을 것이라 다 나이가 많으므로 저마다 손에 지팡이를 잡을 것이요 5그 성읍 거리에 소년과 소녀들이 가득하여 거기에서 뛰놀리라 6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 일이 그 날에 남은 백성의 눈에는 기이하려니와 내 눈에야 어찌 기이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7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내 백성을 해가 뜨는 땅과 해가 지는 땅에서부터 구원하여 내고 8인도하여다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주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진리와 공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1-8)

 

하나님께서는 시온을 향한 강한 사랑과 긍휼을 드러내시며, 이스라엘 백성을 회복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들이 다시 하나님의 도시에서 안전하게 거주할 수 있도록 하시고, 어린아이들이 거리에서 뛰놀며, 노인들이 평안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회복은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임을 강조하십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그들의 미래에 대한 희망과 약속을 주십니다.

 

(1) 예루살렘의 회복(1-6)

 

7:8-14에서는 언약적인 저주로 심판을 받아 이스라엘이 포로로 끌려갔으나, 여기서는 이제 돌아왔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것에 대해 약속합니다. 2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질투’하신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이미 첫 번째 환상에서도 언급되었습니다. 거기서는 온 세상이 고요하고 하나님께서 없는 듯한 세상으로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이스라엘을 특별히 여긴다는 개념을 ‘질투’로 표현한 바 있습니다. 이 단락도 역시 이런 환상의 주제를 발전시키는 것으로, 여호와의 개입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자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적인 관계를 상기시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3절의 ‘돌아와’는 스가랴서의 핵심 구절인 1:3(“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에서도 나온 표현으로,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것을 가리킵니다.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하리니’라는 표현은 여호와의 임재, 곧 언약의 회복을 가리킵니다. 성막과 성전은 여호와가 거한다는 것을 상징하므로(출 25:22; 29:45), 예루살렘 멸망과 성전 파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서 떠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거하신다는 것은 다시 언약을 회복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 여호와의 약속과 그들의 실질적인 삶이 불일치하는 쓰라린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진리의 성읍’은 이제 여호와의 약속과 그들의 실질적인 삶이 일치하게 될 것임을 가리킵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고 일컫게 되는 것도 성전과 예루살렘이 거룩함을 온전히 회복하여 ‘성산’이라고 불리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이 든 사람들에서 어린 사람들까지, 다시 예루살렘은 많은 사람들로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4-5). 다시 말해 성전 파괴와 예루살렘 멸망으로 말미암아 황폐해졌으나, 이제 하나님의 회복으로 말미암아 다시 풍요로움을 되찾게 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는 6절에 덧붙여 언급함으로써, 살렘 회복의 놀라운 역사를 재차 강조합니다.

 

(2) 예루살렘에 돌아오게 함 (7-8)

 

1-6절에서 예루살렘 회복에 대해 약속했는데, 7-8절은 회복에 대한 요약적 진술입니다. 여기서 예루살렘 회복의 핵심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해가 뜨는 땅과 해가 지는 땅에서부터’는 전 범위의 온 세상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이 언약을 어기고 죄악을 범할 때 바람을 불어 그들을 흩으셨으나(7:14), 이제 온 세상에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인도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특히 8절의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진리와 공의로 그들의 하나님께서 되리라’라는 표현은 전형적인 언약 공식에 해당합니다. 언약의 회복을 통해 다시 공식적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회복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와 공의’는 하나님의 주요 성품을 가리키며, 이 성품에 따라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다시 회복한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신실함, 견고함을 의미하는 바, 이는 하나님께서 약속한 바를 신실하게 실행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공의’는 어떤 기준에 일치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하나님 자신이 그 기준에 부합하게 언약 백성을 보호하는 하나님께서 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회복의 약속과 권고(9-13)

하나님께서는 다시 기회를 주신 은혜를 받기 위해 우리가 진실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바로 그들의 열조들이 버렸던 진리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성읍이 성산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공동체가 올바른 마음가짐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진실함이 회복과 은혜의 기초가 될 것입니다.

 

9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집 곧 성전을 건축하려고 그 지대를 쌓던 날에 있었던 선지자들의 입의 말을 이 날에 듣는 너희는 손을 견고히 할지어다 10이 날 전에는 사람도 삯을 얻지 못하였고 짐승도 삯을 받지 못하였으며 사람이 원수로 말미암아 평안히 출입하지 못하였으나 내가 모든 사람을 서로 풀어 주게 하였느니라 11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제는 내가 이 남은 백성을 대하기를 옛날과 같이 아니할 것인즉 12곧 평강의 씨앗을 얻을 것이라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산물을 내며 하늘은 이슬을 내리리니 내가 이 남은 백성으로 이 모든 것을 누리게 하리라 13유다 족속아,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이방인 가운데에서 저주가 되었었으나 이제는 내가 너희를 구원하여 너희가 복이 되게 하리니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손을 견고히 할지니라(9-13)

 

이 단락은 권고로 시작해서 권고의 근거가 되는 약속이 나오고, 다시 권고로 마무리하는 내용으로 구성됩니다. 9-10절은 곤경에서의 권고에 해당하고, 11-13절에서는 이렇게 권고하는 근거로 곤경에서의 회복에 대해 약속합니다. 이어서 15-17절은 다시 언약 백성에 대해 권고하며 마무리합니다.

 

(1) 권고 손을 견고히 하라(9)

 

9절의 ‘손을 견고히 할지어다’라는 표현은 육체적인 힘을 의미하거나 (겔 22:14), 격려의 의미로 사용하는데(삼하 2:7; 슥 8:13), 여기서는 문맥상 권고의 상황을 고려할 때 격려의 의미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표현은 13절에서도 한번 더 나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있었습니다. 그 전환점은 그들이 불순종의 삶에서 돌아와 선지자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바벨론이 페르시아에게 멸망할 때가 아닙니다. 포로에서 돌아올 때도 아닙니다. 선지자 학개 스가랴의 말씀을 듣고 성전 지대를 쌓던 날입니다(학 2:4, 15-19). 당장 자기들이 살 집도 없었지만 주의 전을 먼저 짓겠다고 순종했을 때입니다. 그런 성전 건축이 중단된 상태입니다. 지금도 그들 안팎에서 회의적인 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었을 것입니다. 선지자는 그런 그들을 격려합니다. “너희는 손을 견고히 하라”(9).

 

(2) 과거와 미래(10-12)

 

10절은 말씀에 순종하기 전, 즉 성전 재건을 중단했던 지난 16년간 현실 논리에 젖어 성전 건축을 중단했던 때에 그들의 형편이 어떠했는지를 말해줍니다. 사람도 짐승도 일한 대로 삯을 받지 못했습니다. 평안할 날이 없었습니다.

10절의 ‘삶’은 일에 대한 금전적 대가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보상(상급)을 의미하기도 합니다(사 40:10). 사람도 짐승도 삯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겪게 될 경제적 위기를 가리킵니다. 10절의 ‘내가 모든 사람을 서로 풀어주게 하였으니라’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경제적인 위기를 가리킵니다. 직역하면, ‘곧 내가 모든 사람을 서로 등지게 했기 때문입니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9-10절에서는 곤경 가운데서도 ‘담대하라’는 격려의 메시지를 전하면서, 11절에서는 ‘이제는’ 이런 곤경에서 벗어나게 하겠다는 약속이 15절까지 이어집니다(접속사 ‘바브’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그러나’라는 표현을 첨가하여 번역하는 것이 옳다). 그들이 순종하기 시작할 때, 어떤 놀라운 변화가 시작될지를 11-12절이 말해줍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제는 내가 이 남은 백성을 대하기를 옛날과 같이 아니할 것인즉 곧 평강의 씨앗을 얻을 것이라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산물을 내며 하늘은 이슬을 내리리니 내가 이 남은 백성으로 이 모든 것을 누리게 하리라.” 그들의 순종을 보고 제일 먼저 마음을 바꾼 것이 땅과 하늘이었습니다. 사람과 짐승의 수고를 헛되게 하였던 땅과 하늘이 이제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마음을 바꾸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내가 이 남은 백성을 대하기를 옛날과 같이 아니할 것인즉” 여기 ‘평강의 씨앗’에서 ‘평강’은 샬롬입니다. 10절에서는 대적들 때문에 출입이 ‘평안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평안이 찾아온 것입니다. 율법이 약속한 대로(레 26:4), 순종한 백성들에게 땅이 풍성한 곡식을 내어놓을 것입니다. 지난날에는 ‘곡식 종자(씨)가 창고에서 끊어졌고,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었지만’(학 2:19), 이제 하늘이 이슬을 내리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가득 맺히게 하실 것입니다(참조. 겔 34:25-27). 이 축복은 ‘남은 백성’의 몫이 될 것입니다. 모든 혈통적인 이스라엘이 아니라, 외식적인 금식을 버리고 진심으로 여호와로 배고픈 사람에게 이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정의와 진실로 언약을 지키시는 여호와께 진실함으로 화답하는 백성들이 바로 이 남은 자입니다. 여전히 성전 짓기를 비난만 하고 조롱만 하는 구경꾼들과 훼방꾼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축복에서 제외될 것입니다(레 26:20).

 

(3) 권고 손을 견고히 하라(13)

 

이렇게 이방 가운데 저주거리였던 데서 구원하여 이제 이방이 부러워하는 축복이 되게 하셨으니, 이제 더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뒤돌아보지 말고 환상으로 보여주신 그 미래를 향해 ‘손을 견고히 하며’ 나아가라고 하십니다(13). 13절의 ‘이방인 가운데에서 저주’는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 이방인 앞에서 조롱거리가 된 비운의 역사를 가리킵니다. 신명기 28장은 언약에 불순종할 때 내릴 저주를 언급하는데, 그 저주 가운데는 적에 패해 포로로 끌려가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습니다(참조. 26:25,36; 레 16장). 따라서 여기서 ‘저주’는 언약을 순종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은 언약적인 저주를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은 언약에 불순종하여 율법에서 미리 예고한 대로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는 미리 약속하신 언약대로 ‘너희가 복이 되게 합니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형식적인 경배보다 진정한 마음과 행동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우리가 외적인 의식이나 금식에 그치지 않고, 내면의 진실함과 정의, 자비를 실천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웃과의 관계에서 사랑과 도움을 베풀기를 기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진정으로 회개하며 순종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회복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은 내적인 변화와 실천을 통해 드러나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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