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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06-01)


하나님의 임재와 구속의 상징

스가랴 6장 1-15절


 

하나님께서는 역사와 세상을 주관하시며, 그분의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심판하시고 정의를 세우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회의 불의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정의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자 책임입니다. 이러한 신념을 가지고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 여덟째 환상은 1-3절에서 환상의 내용을 보여주고, 이어서 4-8절에서는 이 환상의 의미와 나아가서 환상의 더 자세한 내용을 묘사하며 덧붙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8절에서 환상의 결론적 내용으로 환상을 통해 이룰 것들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습니다. 한편, 이 마지막 환상은 첫째 환상과 비슷한 배경을 이루는데, 첫째 환상에서 제기한 신학적 질문에 대해 하나님의 역사를 보장하면서 응답이 됩니다.

 

여덟째 환상 : 두루 다니는 말(1-8)

어려운 상황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역사와 삶을 주관하시며, 그분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현대 사회에서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부정과 불의를 일삼는 것에 대해 경계하며, 올바른 길을 걸어야 합니다. 이러한 신앙과 실천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1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네 병거가 두 산 사이에서 나오는데 그 산은 구리 산이더라 2첫째 병거는 붉은 말들이, 둘째 병거는 검은 말들이, 3셋째 병거는 흰 말들이, 넷째 병거는 어룽지고 건장한 말들이 메었는지라 4내가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이르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하니 5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하늘의 네 바람인데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다가 나가는 것이라 하더라 6검은 말은 북쪽 땅으로 나가고 흰 말은 그 뒤를 따르고 어룽진 말은 남쪽 땅으로 나가고 7건장한 말은 나가서 땅에 두루 다니고자 하니 그가 이르되 너희는 여기서 나가서 땅에 두루 다니라 하매 곧 땅에 두루 다니더라 8그가 내게 외쳐 말하여 이르되 북쪽으로 나간 자들이 북쪽에서 내 영을 쉬게 하였느니라 하더라(1-8)

 

하나님께서 네 대의 병거를 통해 세상의 심판과 정의를 이루신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각 병거는 북쪽, 남쪽, 동쪽, 서쪽으로 나아가며 하나님이 악을 심판하는 방법을 상징합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주권과 회복의 약속을 강조하며, 믿는 자들에게 소망을 줍니다.

 

(1) 환상의 주요 장면(1-3)

 

마지막 환상은 여러 면에서 첫 번째 환상(1:7-17)과 비슷합니다. 첫 번째 환상에서 말이 사방을 두루 다니는 것을 통해 하나님이 온 세상을 주관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듯이, 마지막 환상에서도 말과 병거가 온 세상을 두루 다닙니다. 결국에 세상은 하나님께서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첫 번째 환상의 주제),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주관하며 통치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마지막 환상은 특별히 병거와 함께 말의 모습을 통해 전쟁을 준비하는 모습입니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앞두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격려하며 담대하게 하신 것과 같습니다. 전사이신 하나님께서 전쟁을 벌이며 자신의 언약 백성을 위해 친히 싸우실 것입니다(신 1:29-30).

1절의 ‘네 병거’에서 숫자 4는 네 방향을 가리키며 온 땅에 권위가 미치고 있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두 번째 환상(1:18-21)에서도 네 뿔과 네 대장장이를 통해 숫자 4를 강조한 바 있습니다. 5절에서는 ‘하늘의 네 바람’이라고 다시 확인합니다. 1절의 ‘구리 산’은 문맥상 부연 설명이 없어 정확히 알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산은 하나님의 위엄 가운데 나타나는 임재 장소를 상징하여, ‘구리산’은 뻗어 나오는 ‘네 병거’와 함께 하나님의 온전한 심판과 회복이 분명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2-3절에서 네 병거가 각 종류의 말들과 연결되어 등장합니다. 말들은 첫 번째 환상(1:7-17)에서도 등장했으며 이제 마지막 환상을 마무리하는 데도 등장합니다.

 

(2) 환상의 의미 및 장면에 대한 부연 설명(4-8)

 

5절에서 ‘병거’를 ‘하늘의 네 바람’이라고 확인하는데, 네 병거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도구임을 더욱 분명히 합니다. 2:6에서는 직유법으로 ‘하늘 사방에 바람같이’라고 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묘사한 바 있습니다. 여기서도 숫자 4는 하나님의 영향력이 사방에 미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말들이 ‘땅에 두루 다니며’(1:10,11) 하나님의 영향력이 안 미치는 곳이 없음을 환상을 통해 시각적으로 보여준 바 있습니다. 이 동사 역시 마지막 환상(6:1-8)에서도 나와(6:7) 여호와의 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8절의 ‘북쪽’은 반드시 바벨론만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북쪽의 다른 나라들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렘 46:10; 50:9). 예레미야에서는 이 표현이 추방의 땅(3:18; 6:22; 16:15; 23:8)이나 적들이 쳐들어오는 방향(10:22)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여기서도 구체적으로 바벨론을 가리키기보다는 포괄적으로 북쪽 방향의 적들을 가리킬 것입니다(2:6에서도 비슷한 맥락에서 ‘북쪽 땅’을 사용한 바 있다). 8절의 ‘북쪽에서 내 영을 쉬게 하였느니라’라는 표현은 1-8절에서 점차 주제가 발전해가며 절정에 이르는 가운데 마지막 결론적 언급으로 강조되는 표현입니다. 그동안 북쪽에서 하나님은 활발하게 역사하셨습니다. 유다를 언약적인 저주로 멸망하게 하셨으며 바벨론에 의해 포로로 끌려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페르시아 왕 고레스를 일으켜 바벨론을 멸망하게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북쪽에서 하나님의 영이 쉬게 됐다는 것은 이런 활발한 하나님의 역사가 쉬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문제가 해결되고 평화가 찾아올 것에 대해 예고하는 표현입니다.

 

면류관과 싹(9-15)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 속에 명확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 계획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더라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살아가는 삶은 진정한 의미의 축복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9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0사로잡힌 자 가운데 바벨론에서부터 돌아온 헬대와 도비야와 여다야가 스바냐의 아들 요시아의 집에 들어갔나니 너는 이 날에 그 집에 들어가서 그들에게서 받되 11은과 금을 받아 면류관을 만들어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고 12말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13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자리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자리에 있으리니 이 둘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고 14그 면류관은 헬렘과 도비야와 여다야와 스바냐의 아들 헨을 기념하기 위하여 여호와의 전 안에 두라 하시니라 15먼 데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너희가 알리라 너희가 만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진대 이같이 되리라(9-15)

 

하나님께서 스가랴에게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관련된 명령을 주십니다. 여호와는 여호수아를 통해 새로운 제사장 왕국을 세우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것임을 약속합니다. 이 구절은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회복과 구원의 비전을 제시하며,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고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1) 상징적 행동(면류관 씌움)(9-11)

 

여러 환상을 보여주신 후 이제 구체적인 현실로 메시지가 옮겨갑니다. 면류관을 만들어 대제사장에게 씌우는 행위, 싹에 대한 언급은 미래에 구체적으로 성취될 것을 기대하게 합니다. 특히 면류관을 만들어 대제사장에게 씌우는 행위는 상징적 행동(symbolic action)으로 ‘기념’, 즉 기억나게 하는 행위입니다. 당시의 관점에서는 성전 건축에 대한 메시지로 모아지지만, 동시에 싹이라는 인물(메시아)을 통해 미래적 관점을 기대하게 합니다. 성전 건축 역시 최종 목표가 아닌 미래를 위한 첫 단계인 셈입니다.

6:9-15은 현재와 미래라는 이중적 의미를 지닙니다. 스가랴 3장과 4장은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하는 환상을 다룹니다. 하지만, 당시의 구체적 인물인 여호수아와 스룹바벨 뿐만 아니라, ‘싹’이나 ‘두 감람나무’등을 통해 이 두 역사적 인물과 연결시키면서도 미래적 관점에서 장래의 성취를 기대하게 하는 메시지를 전하고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6:9-15에서도 일차적으로는 일련의 환상 메시지와 함께 최종적으로 성전 건축을 독려합니다. 그러나 이런 현실적이며 구체적인 메시지와 더불어서 미래적 관점도 제시합니다. ‘싹’은 스룹바벨이나 여호수아와 연결시키기보다 미래적 인물(메시아)을 기대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10절의 ‘헬대와 도비야와 여다야'는 바벨론에서 막돌아온 자들이며, 아마도 요시아 집에서 잠시 머무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헬대라는 이름은 스가랴서 이외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도비야는 역대하 17:8-9에도 등장하는데, ‘야’가 들어간 것을 볼 때 전통적인 신앙의 가문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여야는 예루살렘에 귀환할 때 스룹바벨과 동행한 레위인의 이름으로 나옵니다(느 7:39; 12:6; 스 2:36). 이 셋은 스룹바벨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인물들로 보입니다. ‘스바냐’는 바벨론에 의해 포로로 끌려간 제사장입니다(왕하 25:18). 그러므로 스바냐의 아들인 요시아 역시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헬대, 도비야, 여야는 바벨론에서 돌아올 때에 성전에 쓰기 위해 귀중품을 가져왔고, 요시아는 이런 귀중품을 관리하는 일을 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11절의 ‘면류관’은 여기서 성전 건축을 통해 회복될 제사장의 권위를 인정해주는 행위로 보입니다(실제 구약에서는 왕뿐만 아니라 영광의 의미로 관을 씌우기도 한다: 예를 들어 에스더서에서 모르드개에게 왕관을 씌워 그의 공적을 인정하고 권위를 부여하는 행위가 그러하다). 여기 대제사장에게 금으로 만든 관을 씌우는 것은 의외의 일입니다. 흰 세마포로 관을 만들어 착용했지만, 금으로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2) 성전 건축에 대한 예언(12-14)

 

12절의 ‘짝’은 이미 3:8에서도 ‘싹’이 등장했습니다. 3:8에서도 이 ‘짝’은 여호수아 대제사장과는 별개의 인물로 확인됐습니다. 여기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스룹바벨 역시 ‘싹’이 아닙니다. ‘짝’에는 관사가 없으므로, 구체적인 인물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만약 스룹바벨이 ‘싹’이었다면 4:9에서 스룹바벨이 성전의 기초를 놓고 그의 손이 또한 마칠 것이라고 했으므로, 여기서 다시 스룹바벨을 언급하거나 정관사를 붙여 표현했을 것입니다. 현재로서는 아직 ‘싹’이 정해지지 않은 인물, 미래적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스가랴 본문에서도 다윗의 후손 혹은 메시아적 인물로 ‘싹’을 언급하며 그를 통한 성전 건축, 미래적 관점에서의 성전 건축을 언급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3절의 ‘이 둘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는 일차적으로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한 성전 재건을 가리킵니다. 또한 미래적 관점에서 제사장과 왕의 직위 결합을 의미합니다. 신약은 이 두 직위가 그리스도 안에서 결합되는 것을 언급합니다(딤전 6:15; 히 8:1; 계 19:16).

 

(3) 성전 건축에 대한 촉구(15)

 

15절은 6:9-15에서도 결론적인 메시지로, 여호와의 전 건축과 ‘너희가 만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진대’라고 합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메시지가 주를 이룹니다. 성전 건축은 언약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성전 건축을 통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 의식입니다. 이스라엘은 언약 공동체로서 하나님 중심의 삶, 하나님의 임재를 늘 의식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5절의 ‘멀리 있는 사람들’은 북쪽, 즉 바벨론에 아직 머무르고 있는 사람들로만 한정하기 어렵습니다. 스가랴서는 용어나 표현을 구체적으로나 한정적으로 사용하기보다는 포괄적이며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역시 바벨론에서 돌아온 자들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가리킬 수도 있고, 보편적인 의미에서 이방인들이 여호와 앞에 나와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는 미래적 상황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정의의 실현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며, 그분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호수아를 통해 이루어질 새로운 제사장 왕국은 우리에게 소망과 회복의 메시지를 제공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통해 그의 영광을 드러내길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나아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충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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