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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05-03)


기도의 능력을 아는 공동체

야고보서 5장 13-20절


 

야고보 사도의 별명은 ‘낙타 무릎’입니다. 얼마나 많이 기도했던지 무릎이 딱딱하게 낙타 무릎과 같이 되어 붙여진 이름입니다. 자신이 기도했던 것처럼 성도들에게 고난을 당할 때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는 기도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깐 세상에 어떤 것보다 기도가 강력한 능력이라는 것을 안 것입니다.

 

  • 본문은 이제 야고보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야고보는 서신을 마치면서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초대교회 고난당한 성도들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합니다. 성도들이 고난을 당할 때 농부처럼 기다리며 오래 인내하고, 선지자들과 믿음의 사람 욥처럼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시험을 잘 인내하라고 권면합니다.

 

병든 사람을 위한 기도(13-16)

어려움은 기도를 배우는 시간이고, 문제는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는 기회입니다. 고난과 질병은 기도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는 영적 기회입니다. 장애물이 있을 때 기도하지 않으면 낙심과 침체에 빠집니다. 그러나 담대하게 기도로 나아가면 극복하지 못할 난관이 없으며, 회복과 치유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13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14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15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16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13-18)

 

사도 야고보가 서신을 기록할 때 많은 성도들이 고난을 겪고 있었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육신의 질병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서신을 마무리하면서 그들을 향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1) 고난 중에 있는 성도에게 권고(13)

 

야고보는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라고 권고합니다. 이것은 아주 간단한 말이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실천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고난 중에는 불평하기 쉽고 원망하기 쉽고 좌절하거나 낙담하기 쉽습니다. 고난 중에 기도한다는 것은 굉장한 의지를 사용해서 기도의 자리를 찾아가거나, 기도의 제목을 붙잡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고난 가운데 있다면 먼저 기도의 자리를 살펴보고, 먼저 기도의 자리에 가서 앉아보길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의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기도의 자리에 가서 기도의 제목을 붙잡는 지혜로운 백성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세 가지 기도의 제목(14-16)

 

세 가지 기도의 제목이 나와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병중에 있는 사람을 위한 기도로 집약할 수 있습니다. 그 기도의 세 가지 방법은 먼저, ‘병든 자가 있느냐 …… 기도할지니라’(14)고 권합니다. 다음으로 기도할 때 믿음으로 기도할 것이라고 권합니다(15). 마지막으로 서로 죄를 고백하며 기도할 것이라는 것입니다(16).

 

➀ 기도할지니라(14)

병든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기름을 바르며’(14)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하면서 치료의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누가복음 10장에서 선한 사마리아 비유에서 강도 만난 사람에 대해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눅 10:34)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기도하면서 치료의 방법을 함께 찾는 것입니다.

종종 병이 나면, 기도만 하는 사람이 있고, 치료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방법은 기도하며 치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면서 치료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병이 낫는데 기도하는 것은 미신적인 행동으로 치부해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현대 의술도 사람들에게 주신 능력입니다.

 

➁ 주의 종들과 함께 기도하라(14)

병든 자는 혼자만의 기도할 것이 아니라 공적으로 교회의 장로들과 함께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고 권고합니다. 믿음의 공동체는 자신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연약한 성도들을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로 연합된 자들이기 때문에 간절한 기도를 통해 서로 돕고 위로할 수 있습니다.

 

➂ 믿음의 기도를 해라(15)

어떤 기도가 ‘믿음의 기도’입니까? 자신의 감정에 근거한 기도, 자신의 감정이 뜨거워졌을 때, 큰 목소리로 ‘믿습니다!’하는 기도가 믿음의 기도는 아닙니다. 정말 믿음의 기도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임재하심을 의지하여 말씀에 근거하여 구하는 기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➃ 서로의 죄를 고백하며 기도하라(16)

언뜻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병중에 있는 사람이 믿음으로 간구하라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서로 죄를 고백하며 기도하라고 하셨습니까!

혹시 병든 것이 죄로 인한 것이면, 그 병을 치유하는 과정 가운데,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 것을 깨닫고 회개함으로 더 큰 영적인 치유함을 맛보다는 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강퍅해서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 사람의 죄를 고백하기까지 함께 기도함으로 영적인 모델을 만들어주며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병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함으로 몸의 치유와 함께 영혼의 치유도 경험할 수 있는 복된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삶에 모든 부분에서 기도하라고 이야기합니다. 특정한 경우에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에게 기도가 호흡이 되도록 권고합니다. 기도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지켜 나가도록 말씀합니다. 야고보는 그는 삶에 기도가 중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자신이 기도의 삶을 통해서 ‘낙타 무릎’이 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성도들에게 기도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하면 할수록 기도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특권입니다. 기도하는 것은 하늘의 문을 두드린 것입니다.

 

기도의 영적 모델(17-18)

기도는 하늘의 문을 여는 열쇠로서, 성도들에게 가장 큰 특권을 제공합니다. 이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중요한 방법이기도 하며, 사단을 대적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기도는 우리의 삶에 큰 축복으로 작용합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신앙의 깊이를 더하고, 어려움 속에서도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결국, 기도는 우리 영혼의 성장과 안전을 위한 중요한 도구입니다.

 

17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18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17-18)

 

사단이 가장 무서워하는 성도는 성경의 지식이 많은 사람, 직분이 좋은 사람 그리고 신앙의 연조가 많은 사람도 아닙니다. 기도하는 사람을 제일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기도하는 사람은 그 손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엘리야의 능력이 아니라 바로 기도의 능력이었습니다. 기도는 모든 사역의 기초인 동시에 참된 응답을 가져오는 통로입니다.

 

(1) 기도에 응답 받은 엘리야(17a)

 

본문은 기도의 삶을 살라는 것을 영적인 모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기도의 모델로 ‘엘리야’를 제시합니다. 구약 성경 중에 기도의 응답을 받은 내용 중에 ‘엘리야의 기도’에 아주 잘 나타나있습니다. 그는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엘리야는 우리와는 다른 사람이 아닙니까?’라고 반문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야고보는 그에 대한 대답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17)라고 말합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스티븐 아터번 박사님의 ‘중독성 믿음’이라는 책에서 ‘중독성 믿음에 나타나는 21가지 잘못된 신념 중에 하나는, 언제 하나님께서 영적인 거인들만 쓰신다는 잘못된 신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엘리야 정도 되니깐 쓰셨겠지!’라는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기도해야할 성도들을 심방하고 ‘함께 기도합시다.’라고 권고하면, 종종 ‘목사님 목사님이시니깐 기도하자고 하시는 것이죠!’라고 대답하는 경우를 봅니다. 이 말은 자신은 영적으로 약해서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좌절한 것입니다.

 

(2) 엘리야의 기도 방법(17b)

 

야고보는 그런 사람에게 단호하게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라고 말씀합니다. 엘리야도 우리와 다를 바 없이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가 우리와 달랐을 뿐입니다.

 

엘리야가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야고보는 엘리야의 기도를 ‘간절히 기도한즉’(17)라고 소개합니다. 18절에 ‘다시 기도하니’라고 강청하는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엘리야와 같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엘리야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응답되지 않는다고 쉽게 포기하지 않고, 다시 기도하고 또 다시 기도한다면, 엘리야와 같은 놀라운 기도의 사람으로 분명히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8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끈질긴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십니다. 한 억울한 과부는 불의한 재판장에서 하소연했지만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과부는 날마다 밤낮으로 찾아가서 귀찮게 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되어 그 재판관은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녀의 사건을 맡아서 그 문제를 해결해 주었단 말입니다.

 

기도의 능력(19-20)

영적으로 느슨해지고 믿음에서 탈선하는 것은 구원의 문제뿐 아니라 심각한 삶의 타락으로 이어집니다. 진리에서 떠난 신자는 영적 감각뿐 아니라 상식적인 분별력마저 잃어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이 사망에 이를 뿐 아니라 허다한 죄에 빠집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다른 성도들을 위한 중보기도가 필요합니다.

 

19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20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19-20)

 

성도들이 끈질긴 기도를 통해 놀라운 능력이 됩니다. 끈질긴 기도를 통해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19)는 기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미혹되어 떠난 자를 돌아오게 만듦’은 얼마나 복된 기도입니까!

미혹을 받아 신앙에서 떠난 사람을 포기하거나 단념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든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그 방법이 직접적인 건고도 있겠지만, 그들을 위해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떠나는 것’보다 ‘돌아오는 것’은 그만큼 많은 힘이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을 향해 가는 것보다 더 큰 힘이 있어야 돌아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도 ‘돌아오다’는 뜻입니다. 회개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죄악을 향해 달려 나가는 마음,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여기며 나가는 마음보다 더 큰 힘이 있어야 돌아옵니다.

우리에게는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힘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롬 1:16). 우리에게는 ‘복음의 능력(power)’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6)라고, 하나님의 말씀에 운동력이 있어야 돌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가족과 많은 성도들이 돌아오시길 원하십니까? 그들에게 돌아올 만한 더 큰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들에게 말씀을 열심히 들려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선포해야 합니다. 그러면 말씀(의 운동력으로 그들이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길에서 떠난 가족이나 지체가 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워하면서도 그대로 방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기도의 중요성과 공동체의 연합을 강조합니다. 고난 중에 있는 이들은 기도하고, 기쁨을 느끼는 이들은 찬송하라고 권면합니다. 병든 자는 교회의 장로에게 기도를 요청하며, 서로의 죄를 고백하고 치유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합니다. 마지막으로, 잘못된 길에서 돌아오는 한 영혼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를 강조합니다. 이러한 내용은 믿음 공동체의 사랑과 상호 돌봄을 통해 이루어져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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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05-02)


농부처럼 시험을 인내하라

야고보서 5장 7-12절


 

어린 시절 우리 어머니들은 키로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했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이는 고난을 당하는 태도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인내해주실 것을 알기 때문에 고난 속에서도 인내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고난은 고난을 당한 사람들을 단련시켜 성숙한 성도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끝까지 인내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인정을 받습니다.

 

  • 본문은 이제 야고보서의 결론에 이릅니다. 야고보 사도는 고난을 당하는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마지막으로 간절히 부탁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인내는 농부가 결실을 보기위해 기다리며 오래 인내하는 것처럼, 선지자들과 믿음의 사람 욥처럼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시험을 잘 인내하라고 권면합니다.

 

시험 상황에서 원망하지 말고 인내(7-11)

예수님의 재림은 우리에게 고난을 참고 견뎌 낼 힘과 소망을 줍니다. 농부가 추수 날을 바라며 더위와 힘든 수고를 참고 견디는 것처럼, 인내심과 희망을 갖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날을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오래 참고 기다리보면 서로에게 불평과 원망이 생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불평이나 원망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주님이 오실 날이 매우 가깝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7○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8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9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10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11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7-11)

 

본문은 인내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믿는 자들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인내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농부의 비유와 욥의 이야기를 통해 고난 속에서도 인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언급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인내하는 자를 축복하고 긍휼히 여기신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1) 주의 강림과 인내(7-8)

 

“형제들아”라는 표현으로 권면의 대상을 세상 부한 자들에서 수신자로 전환합니다. 인과 접속사 ‘그러므로’는 이 단락이 전 문맥인 부유한 땅 주인에게 핍박받는 상황의 결론임을 암시합니다. 불의한 상황은 주 예수님의 재림으로 바로잡힐 것입니다(7). 재림은 역사 끝에 있을 사건으로 모든 것에 대한 평가가 이뤄지는 때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은 형벌을 받겠지만(참조, 살 후 1:7-10; 계 20:12-15),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이미 경험한 자들은 두 번 심판받지 않을 것입니다(참조. 롬 3:24-26). 이들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믿음으로 죄 용서를 받은 자들이며, 반역의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로 옮겨진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악한 부자와 가난한 신자의 삶이 역전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의 재림은 전적으로 미래의 일이며, 더구나 그날이 언제일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반면에 가난한 사람들이 겪는 고통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그들은 죄 용서를 받고 구원을 경험했고, 약속된 미래가 있음에도 여전히 세상에 속해 불의한 상황을 겪으며 고통당합니다. 저자는 두 시점 사이를 ‘오래 참음’으로 채우라고 명령합니다(8). 시험 상황을 처음 언급할 때 제시한 두 번째 명령(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과 동일하지만, 인내하라는 이유를 여기서는 다른 관점으로 제시합니다. 1:4에서는 내적인 이유, 즉 스스로를 온전하고 부족함 없는 자로 세우기 위해 인내로 견뎌야 한다고 말했지만, 본문에서는 주의 재림이라는 외적 사건을 근거로 참으라고 말합니다. 내적 이유와 외적 이유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성도의 온전함은 주의 재림과 심판 때 칭찬받을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1:12에서 말한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 상황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도가 인내를 이루는 힘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무엇이 허상이고 무엇이 실제인지를 보게 하는 눈입니다(참조, 히 11:1). 현재 전개되는 암담한 상황이 영원하지 않을 것이며 주의 강림이 있음을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힘이 믿음입니다. 저자가 1:3에서 시험 상황을 ‘믿음’과 연결시킨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 믿음의 눈을 가진 것이 참 지혜입니다.

저자는 “보라”라는 표현으로 주의를 집중시키고, 농부의 예를 들어 믿음으로 오래 참으라는 명령을 부연합니다(7-8). 농부는 열매를 기대하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립니다. 농부는 씨를 심고 바로 거두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농부에게 기다림은 책임의 유기나 게으름이 아닙니다. 그것은 적극적이고 순종적이며,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열매를 거두기까지는 적절한 비와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기다림이 비를 주고, 인내가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씨가 심겼으니, 그 씨가 열매 맺을 때까지 주의 은혜를 바라고 기다리며 견뎌야 합니다. 독자들 또한 오래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해야 합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8).

 

(2) 서로 원망하지 말라(9)

 

저자는 “형제들아”라는 호칭으로 또 다른 주제로 이동합니다. 이번에는 서로에 대해 탄식하며 불평하지 말라고 합니다. 앞 내용과 별개의 주제처럼 보이지만, 7-11절의 전체 구조를 볼 때 연관성이 있습니다. 이 구절은 오래 참음으로 견디라고 말한 7-8절과 그에 대한 예를 제시하는 10-11절 사이에 위치합니다. 아마도 이 권면은 단순히 개인적 불평을 멈추라는 의미에 그치지 않고, 부와 가난에 대한 세속의 관점과 기준으로 동료 신자를 대하지 말라는 포괄적 명령의 일부로 보입니다. 이것은 앞서 소유로 형제를 차별하지 말라는 명령(2:1-13)과 혀로 사람을 저주하지 말라는 것(3:9-10), 시기와 다툼 대신 화평을 추구하는 참 지혜의 사용(3:14-18), 세상 욕심으로 서로 전쟁하지 말라는 것(4:1-12) 등과 관련 있습니다. 이렇게 명령한 이유는 물질을 기준으로 이웃을 판단하고 대하는 일은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오는 불신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언급한 재림과 관련한 주의 심판을 전제로 하여 주신 권면입니다. ‘심판자가 문 앞에 서 계신다’는 표현을 첨언함으로써 다시 한 번 주님의 재림 상황을 권면의 근거로 분명히 합니다. 문 앞에 서 계신다는 것은 앞선 7,8절에서 두 번 주의 강림을 강조한 것에 이어 그 긴박성을 강조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명령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진노를 받을 것입니다. 첫째, 세상 관점과 욕심에 젖어 있는 것은 멸망할 어둠의 영역에 속해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형제를 판단하는 것은 율법 정신에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핵심 정신인 형제 사랑의 원리에도 위배되며, 또한 하나님만이 감당하실 수 있는 심판자 위치에 자신이 앉는 것이기에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원리를 위반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3) 인내의 모본들(10-11)

 

세 번째 “형제들아”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번에는 앞서 밝힌 오래 참음의 근거이면서 본보기가 되는 예를 소개합니다. 하나는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이고(10) 다른 하나는 욥입니다(11). 그들이 누구이고 어떤 상황인지에 대한 구체적 설명 없이 그들의 고난과 오래 참음을 본받으라고 명령합니다. 늘 악한 시대에 야당으로서 양심과 말씀의 최후 보루가 되어 타락한 기성 권력을 불편하게 하였고, 그 대가로 핍박을 당했던 선지자들의 이야기는 수없이 많은 예로 존재하기에 특정 인물을 거론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어서 저자는 “보라”(이두)라는 표현으로 독자의 이목을 집중시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욥’이라는 구체적 인물을 등장시켜 더욱 생생한 예를 제시합니다. 선지자의 본을 제시할 때와 달리 욥의 예를 들면서는 명령하지 않고 독자 스스로 결정하도록 유도합니다. 저자는 1인칭 복수 지시어(‘우리’)를 통해 독자들이 공유하는 지식(“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을 언급하고, 이어서 구체적으로 욥의 예를 제시합니다. 독자들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은혜롭고 자비로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인내의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 독자들도 인내하면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지식의 기준에 따라 복되다는 평가를 받을 것입니다. 이로써 저자는 독자들도 용이나 선지자들처럼 인내하며 행하도록 간접적으로 권면합니다. 저자가 말하려는 핵심은 하나님의 최후 평가를 기대하면서 오늘을 인내하라는 것입니다. 고난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 말고 견디라는 것입니다.

 

맹세하지 말라(12)

우리의 말과 맹세가 진실해야 하며, 불필요한 맹세를 피해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함과 신뢰가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맹세를 할 때는 그 의미와 결과를 깊이 생각해야 하며, 자신의 말을 신중하게 지켜야 합니다. 결국, 신앙 생활에서 진실성과 정직함이 핵심이라는 교훈을 전달합니다.

 

12○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 받음을 면하라(12)

 

네 번째 “형제들아”라는 표현을 써서 맹세와 관련한 주제로 전환합니다. 편지 마무리 권면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하늘이나 땅이나 다른 어떤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합니다. 오직 아닌 것은 아니라 하고, 그런 것은 그렇다고 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심판을 면하는 길입니다. 마태복음 5:33-37에서 말한 예수의 가르침을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7-11절과는 심판이라는 주제로 연결됩니다. 또 편지 전체로 보아도 이 내용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이미 4:13-17에서 장사하는 자와 관련해 헛된 자랑을 하지 말라고 했고, 1:26이나 3:1-12에서 혀 사용을 조심하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맹세하지 말라는 저자의 권면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고백과 삶이 함께하는 ‘의로운’ 삶을 살라는 이전 권면과도 일치합니다. 이런 면에서 12절은 하나님의 최종 평가를 의식하고, 내면의 생각, 말과 일치하는 투명하고 진실한 ‘삶’을 촉구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이는 또한 신자의 정체성과도 연관됩니다. “무엇보다도”라는 표현은 이 삶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결론은 인내의 중요성과 하나님의 신실함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의 재림을 바라보며 인내해야 하며, 농부처럼 기다림의 과정을 통해 성장할 수 있습니다. 욥의 예를 통해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어떻게 축복으로 이어지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인내는 단순한 고통을 넘어서, 믿음의 깊이를 더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인내하는 자에게 긍휼과 축복을 베푸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우리의 신앙을 더욱 굳건히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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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05-01)


믿음으로 사는 자의 삶의 원칙

야고보서 4장 13절-5장 6절


구원에 대한 일반적인 편견은 이 땅에서의 삶이 구원과 무관하다는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재 삶은 구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이지만, 인간의 반응도 중요합니다. 신앙고백이나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라고 해서 자동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으며, 이 믿음은 지식이나 감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철저한 신뢰와 의존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입술이 아닌,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행위로 나타납니다.

 

  • 화제를 바꾸어 세상 부를 추구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경고합니다. 세상과 벗하지 말라는 권면 (4:4)과 연결되지만, 좀더 구체적으로 부와 가난으로 인한 독자들의 시험 상황을 다룬 1:2-18과 연결됩니다. 내용은 등장인물에 따라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째는 4:13-17로 상인들을 예로 들어 주님을 염두에 두지 않는 교만한 자랑을 경고합니다. 둘째는 5:1-6로 부유한 땅 주인을 예로 들어 탐욕으로 사람을 억압하는 것에 대한 심판을 경고합니다.

 

상인들에게 대한 경고(13-17)

아무리 치밀한 구상과 뛰어난 전략을 세운다 하더라도 하나님과 관계없는 계획은 무의미합니다. 모든 일의 때와 기한, 장소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내일에 대한 확신조차 가지지 못하는 상황에서 1년 후의 일을 어떻게 예측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계획은 항상 하나님의 뜻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결국, 진정한 지혜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계획에 있습니다.

 

13○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15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16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17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13-17)

 

본문에서는 사람들에게 내일 일을 계획하며 살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먼저 고려하라고 경고합니다. 저자는 "오늘이나 내일 한 도시로 가서 일 년 동안 있으리라"는 계획이 무모하다고 지적하며, 인생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또한, 선을 행할 기회를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죄라고 강조합니다. 결국, 모든 계획과 행동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져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1) 장사 계획을 세우는 상인들에게(13)

 

‘자, 이제 ~을 하는 너희여’라는 표현을 사용해 대화상대로 상인들을 호출합니 13-17절은 전체적으로 2인칭 복수 지시어를 사용해 대화 상황을 연출하고, 때로는 1인칭 복수형을 사용해 마치 그들의 말을 직접 인용하듯 표현합니다(13,15). 저자는 가상의 대화 상대자를 세워 내용을 생동감 있게 전달하는 수사적 방법을 사용합니다. 13절은 장사 계획을 자랑하는 상인들을 대화 자리에 앉히고, 직접 화법으로 그들의 독백을 독자에게 전달합니다. ‘우리가 오늘이나 내일 어떤 도시에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해 이익을 얻겠다.’ 그들의 말 자체는 문제가 없습니다. 사업을 하기 전에 기획하는 것은 빠질 수 없는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오히려 이 사람을 사업 계획을 갖고 있는 성실한 상인으로 평할 수도 있습니다.

 

(2) 그들의 어리석음을 지적(14-16)

 

그러나 저자는 장사 계획을 말한 상인들이 갖고 있는 두 가지 문제점을 지적합니다. 첫째, 그들은 지금 자신들의 삶이 자기 것이고 그 삶이 영원할 듯이 착각한다는 점입니다. 자신들의 생명이 잠시 존재하다 곧 사라지는 안개와 같다는 유한한 실존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숨 쉬고 행동하기에 생명과 삶을 자기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몸이 병들어 일부가 기능을 못하면 그 주인이 자기가 아닌 것을 알게 되고, 궁극적으로 죽음을 맞이하면 삶의 주인이 따로 있음을 그때가 되어서야 인식하게 됩니다. 사람의 삶은 길지 않습니다. 죄로 망가진 반역의 세상에 영원함이란 없습니다. 성경도 여러 곳에서 그 사실을 말합니다(참조. 전 6:12;호 13:3 등). 문제는 사람이 그 사실을 알고도 그 유한성을 자기 삶의 중요한 변수로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과 사람의 삶이 날아가듯 짧음을 회고하며, 주님을 의지하라 권하고 있습니다(시 90편). 그러나 사람들은 오늘의 삶이 영원히 지속될 것으로 여기며 사는 듯이 보입니다. 이는 어리석고 지혜 없는 태도입니다. 오죽하면 그 사실을 인식하는 것을 복음의 내용으로 소개하겠습니까(사 40:6-8; 벧전 1:24). 둘째, 그들의 잘못은 하나님을 삶의 핵심에 두지 않은 점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만일 주가 뜻하시면 우리가 살고 이곳저곳으로 갈 것이다’라고 말했어야 했습니다. 장사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삶을 대하고 운영하는 그들의 관점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임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을 헤아려 살려는 마음은 없고, 오직 자기 계획과 그 계획을 실행할 수 있는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들(‘너희’)은 지금 거만하게 자랑하며, 스스로 자기의 삶을 꾸려갈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습니다. 그들은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는 그것을 실현함으로 얻을 경제적 이익에 한껏 취해 있습니다. 이미 얻은 것처럼 말입니다.

 

(3) 교만한 상인들에 대한 경고(17)

 

교만한 상인들과의 가상 대화를 결론짓습니다. 행해야 할 선(善)이 무엇인지 알고도 행치 않는 것은 죄가 됩니다. 여기서 선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것,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라는 율법의 핵심 계명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살라는 마태복음 6:33과 같습니다. 스스로 하나님 백성이라고 고백할지라도 삶이 하나님과 상관없다면, 그것은 악한 자랑입니다(16).

 

부유한 땅 주인들에 대한 경고(5:1-6)

부자로 산다는 것이 그 자체로는 비난받을 일이 아닙니다. ‘부’는 엄청난 기회인 동시에 치명적인 유혹이기도 합니다. 돈이 치명적인 유혹으로 역사할 때는, 이 세상에서 절대 권력을 가지고 하나님보다 더 복종을 요구합니다. ‘부’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용한 양식에 만족하지 않으며, 더 큰 부를 축적하기 위해 끊임없이 편법과 불의를 요구합니다.

 

1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2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3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4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5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륙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6너희는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으나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1-6)

 

본문에서는 부자들에게 경고하며 그들의 재물이 결국 재앙을 초래할 것임을 알립니다. 부자들은 노동자들의 품삭을 착취하고 그들의 울음소리가 하늘에 닿았다고 강조합니다. 저자는 부자들이 사치와 방종으로 자신을 기쁘게 하였지만, 그로 인해 의인을 정죄하고 죽이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비난합니다. 결국, 이러한 행위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것임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1) 부하고 악한 땅주인들에게(5:1)

 

4:13처럼 ‘아게 눈’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화제의 대상을 전환합니다. 대화의 상대가 부한 자들로 바뀝니다. 부정적 평가와 함께 하나님의 심판 대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불신자일 것입니다. 그들은 독자들을 시험 상황으로 이끈 원인 제공자들이며(1:2, 9-11), 가난한 성도를 업신여기고 법정으로 끌고 가서 하나님을 비방하는 자들입니다(2:6-7), 2인칭 지시어를 써서 저자와 부한 자들의 직접 대화로 묘사하지만, 4:13-17처럼 실제 상황을 염두에 둔 가상의 대화입니다. 고통 받던 독자들이 악한 부자의 운명을 듣고 위로와 용기를 얻어 하나님 안에서 견디도록 돕고 싶은 것입니다. 이 부분은 4:13-17과 달리 2인칭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장차 임할 ‘너희’(부자들)의 비참함에 통곡하고 울라고 합니다. 현재와 미래 상태의 대조를 통해 그들의 비참한 운명을 경고한 것입니다. 이것은 반대로 신자의 현재와 미래 상태의 대조를 암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현재 세상의 부자들은 즐겁게 웃으며 신자를 압박하지만, 미래는 그 둘의 운명이 바뀌어 부자들은 비참하게 되어 울고 신자들은 위로와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어 웃을 것입니다(참조. 1:9-11).

 

(2) 비참한 운명의 이유 1: 땅 주인들의 부에 대해(5:2-3)

 

부한 자들이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는 이유를 그들의 현재 모습에 비추어 설명합니다. 본 단락은 첫 번째 이유인데, 먼저 그들이 부유함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오직 재물과 좋은 옷과 금은 같은 세상 것들에 집착합니다. 그런 것을 소유하는 것이 그들의 자랑이요 삶의 목적과 이유입니다. 그들은 소유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아끼던 재물은 썩고 명품 옷은 좀먹었으며 금과 은도 녹이 슬었습니다. 이처럼 소유는 그들의 미래를 보장하지 못합니다. 도리어 녹슨금과 은이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고 자기 욕망을 따라 살아왔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며, 또한 그들이 하나님께 반역하는 세상에 속했음을 고발하는 증거가 됩니다. 그 증거로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토록 집착하며 쌓은 재물이 오히려 그들을 삼키는 심판의 불이 됩니다. 그들은 인간적인 지혜로 재물을 모으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알지 못하는 어리석고 참 지혜가 없는 자들입니다. 저자와 가상의 부자와의 생생한 대화 표현은 시험 상황에 있는 독자에게 후련함을 줄 뿐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 세상을 동경하는 것(2:1-9; 4:1-11)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킵니다.

 

(3) 비참한 운명의 이유 2: 땅 주인들의 악행에 대해(5:4-6)

 

두 번째 이유는 그들의 방탕과 악행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 밭에서 일한 자의 삯을 주지 않고 사치와 방종의 삶을 삽니다. 당시 팔레스틴 지역에 살았던 독자 중 많은 이들은 소작농이거나 일꾼들이었습니다. 독자들은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이지만, 세상에서는 힘의 서열 구조 아래 있는 자들입니다. 세상에서는 소유가 곧 힘입니다. 부자들은 그 힘이 있기에 안하무인이고 무자비합니다. 채무 관계에 있는 의인, 즉 신자들을 법정에서 정죄하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부당하고 억울해도 가난한 자들은 그 상황을 뒤집을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당장 부자가 되거나 세상이 뒤바뀌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은 고난 중에도 견디게 하는 힘입니다. 저자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언급하며 부자들에게 경고합니다. 그 모든 일을 하나님, 곧 하늘 군대의 수장이신 만군의 주가 알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을 평가하시는 두려운 창조주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날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날이지만, 신자들에게는 구원의 날이 될 것입니다. 이로써 저자는 독자에게 부자들의 결말을 알고, 오늘을 견디라는 위로를 전합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계획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내일을 보장받지 못하며, 인생의 덧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부와 자원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이를 올바르게 사용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또한, 믿음은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나야 하며, 정직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행위에 대한 책임이 있음을 명심하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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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04-01)


질투를 넘어서는 은혜

야고보서 4장 1-12절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정욕(情慾)은 행동의 동기가 됩니다. 좋은 면으로 일을 추진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절제되지 않으면 경계선이 무너진 정욕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고 분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성숙한 사람은 정욕을 잘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다툼이 일어납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싸움과 다툼은 정욕에서 나오며, 우리가 구해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면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줍니다. 마음을 성결하게 하고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면 주님이 높이십니다.

 

싸움과 다툼의 원인(1-3)

세상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합니다. 다른 사람을 이기고 최고 자리에 도달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정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아무리 노력하고 과도하게 경쟁한다 해도 결코 원하는 만족은 얻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목표에서 더 멀어질 뿐입니다.

 

1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2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3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1-3)

 

우리들도 마찬가지이지만, 믿을 가진다고 한 순간에 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직 초대교회 성도들도 미숙한 공동체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긴 했지만 크고 작은 분쟁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교회 안에서 분쟁은 무엇 때문에 일어나겠습니까? ‘분쟁(分爭)’은 이기적인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1) 다툼의 근원(1-2a)

 

야고보는 그 다툼의 근본 원인이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정욕’이라고 지적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다투는 이유를 외부에 있는 것으로 보지 않고, 내부에 있는 이기적인 마음, ‘정욕(情慾)’때문이라고 단정합니다.

‘정욕’이란 ‘기쁨(헤도네)’으로 여기서 판생된 단어가 ‘쾌락’과 ‘쾌락주의(hedonism)’가 있습니다. 즉, ‘마음속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욕구’라고 표현합니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욕구들을 절제하지 못함으로 결국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욕심으로 부리고, 욕심이 싸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 싸움은 정욕끼리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욕을 억누르려고 하기 보다는 성령에 압도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직 성령의 충만으로 모든 싸움을 멈출 수 있습니다.

 

(2) 얻을 수 없는 이유(2b-3)

 

누구나 욕심을 내면서 얻을 수 있고, 살인하고 시기해서라도 취할 수 있다면 싸움이 줄어들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욕심은 그 깊이와 넓이를 알 수 없을 만큼 깊고 크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 구할 수 있는 특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하지 않거나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싸워도 얻지 못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2b). 얻는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말입니다. 성도들이 얻는 방법은 딱 하나,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아무 노력 없이 기도만 하면 된다는 말이 아니라 싸우고 시기하고 살인할 정도로 다투어서 얻는 삶이 아니라 구하는 삶이 하늘의 지혜라는 말입니다.

두 번째 잘못된 방법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3). 맘대로 써 버리기 위해 구하는 것은 비참한 결말이 예견된 ‘잘못된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는데 ‘탐욕’으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욕구를 위해 나쁘게 구하기 때문에 기도해도 응답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른 자세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면 받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주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눅 12:32). 후히 주는 분입니다(약 1:5).

 

‘욕심’을 생각하면 어린 시절이 생각이 납니다. 남자분이라면 어린 시절에 땅 따먹기를 해보았을 것입니다. 땅따먹기에서 땅을 따먹으면 선을 그리는데 욕심이 많은 아이들은 선을 반듯하게 그린 것이 아니라 불룩하게 그립니다. 다른 편 아이들이 보고, 항의하기 시작하면서 싸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양 녘에 노을이지는 저녁이면, 어머니들이 저녁 먹으라고 자녀들을 부르면 모든 것을 두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다음날이면 새롭게 시작합니다.

 

교회 안에서 분쟁이 일어나는 것은 자신이 모든 일의 중심이 되고 싶은 마음,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반드시 이루겠다는 욕심이 분쟁을 초래합니다. 욕심, 곧 정욕에서 시작한 봉사, 헌신, 사역은 그 끝이 아름답지 못합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한 삶(4-8)

모든 불화와 분쟁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성도는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하는 것입니다(엡 6:12). 모든 갈등의 밑바탕에는 하나님을 향한 영적 교만과 불순종이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마귀를 대적하면서 회개와 겸손을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때 참된 화해와 일치를 맛볼 수 있습니다.

 

4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5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6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4-6)

 

하나님의 공동체에서 분쟁을 가져오는 ‘정욕’을 버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개인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마음과 삶의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1) 간음한 여인들(4)

 

야고보는 육신의 욕심으로 싸우는 자들을 ‘간음한 여인들’이라고 말합니다(4). ‘간음한 여인들’이란 말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계에서 회계를 촉구할 때, 사용되는 관용구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계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입니다(사 54:5,6). 그러나 불순종과 반역을 일삼는 피조물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간음한 여자’가 되는 경우는,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해서 세상의 지혜와 방법대로 싸우고 다투는 모습을 취할 때입니다. 얻기 위해서 남편 되신 하나님께 구하지 않을 때입니다. 그렇게 남편에게 구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쾌락을 위해 맘대로 쓰려고 잘못 구할 때입니다.

이런 행동을 야고보는 ‘세상과 벗됨’이라고 말합니다. ‘세상과 벗됨’이란 세상의 가치 기준을 다라 살고, 목숨 바쳐 세상을 사랑하지만, 하나님의 뜻에는 무관심하고 세상의 방식으로 세상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을 친구 삼으면 그것이 곧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 됩니다.

 

정욕적인 삶의 예로 간음하는 행위를 듭니다. 간음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간음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간음하는 이유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정욕을 이기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의 모습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분의 뜻을 행해야 합니다.

 

(2) 하나님과 원수들(5-6)

 

세상에는 빛과 어두움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빛 가운데로 가면 자연스럽게 어두움은 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두움으로 가면 빛이 임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가면 하나님의 빛이 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멀리하면 영적 어두움이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과 벗됨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면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시기를 받게 됩니다(5). 이 ‘시기심(프도노스)’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이 질투는 결코 제 3자가 끼어 들 수 없는 부부 관계에서 생기는 배타적 절대적 적개심입니다. 용서가 안 되는 질투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쟁취하기 위해서 싸우고,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정욕으로 쓰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면, 그래서 세상과 벗하면, 하나님께서 결코 가만히 있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절대적, 배타적 질투로 변해서 심판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 하나님의 질투를 해결하는 길은 그 질투를 넘어서는 ‘더욱 큰 은혜’를 받는 것뿐입니다(6). 더욱 큰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비결이 바로 ‘겸손’입니다(6).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십니다. ‘교만’은 하나님 말씀 위에 서 있는 태도로, 얻기 위해 싸우고,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정욕대로 쓰려고 하나님을 이용하는 태도입니다. 솔로몬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라고 경고합니다(잠 16:18).

 

성도가 관심을 쏟아야 하는 것은 선하신 하나님을 닮기 위해 노력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가까이 하시며 정욕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시편 73:28)라고 했던 것입니다.

 

주 앞에 선 겸손한 삶(7-10)

하나님께서는 두 마음을 품는 자를 싫어하십니다. 그들은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자리까지 높아져서 차지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죄’라고 지적하지만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무서워하며 애통하며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만한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7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8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9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10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7-10)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마음이 정결한 사람, 애통하는 사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사람입니다. 7-10절에서 겸손을 설명합니다.

 

(1) 겸손한 삶(7-8)

 

첫째로 겸손이란 마귀를 대적하는 것입니다(7). 이것은 하나님께 복종하므로 하나님의 뜻 아래 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기록된 말씀 아래 머무는 것입니다. 교만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적하시고, 겸손하면 우리가 마귀를 대적할 수 있습니다. 겸손하면 마귀가 피하고 교만하면 하나님이 피하십니다. 여기서 두 가지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마귀의 피함은 일시적인 것이라는 점, 둘째는 마귀를 대적하는 것은 싸우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아래 머물러 그의 궤계를 피하거나 떠나는 것입니다.

겸손이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8). 이것은 외적으로는 손을 깨끗이 하여 행동을 바꾸는 것이고, 내적으로는 세상과 벗되고 하나님과도 벗될 수 있다는 두 마음을 정리하여 성결케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하나님께로만 돌리는 것이다. 의심과 믿음 중에 믿음을 선택하고(1:6-8), 세상과 하나님 중에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이 두 마음을 성결케 하는 것입니다(4:4).

 

(2) 애통하는 겸손(9-10)

 

겸손이란 애통하는 것입니다(9). 이 말은 세상과 벗하면서, 세상 방식대로 살고, 세상을 즐거워하는 그 마음을 애통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 말은 슬프게 살라는 말이 아니라 진정한 기쁨을 위해 기뻐할 자격을 갖추라는 말입니다. 그 자격이 바로 세상과 벗된 나를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애통이 있을 때 진정으로 하나님의 질투를 능가하는 더욱 큰 은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겸손이 하늘의 지혜입니다.

 

형제를 비방하지 말라(11-12)

타인을 비판하는 행위는 삼가야 합니다. 이는 율법을 판단하는 것과 동일하며, 스스로 율법의 자리에 올라서는 교만함이기 때문입니다. 판단은 오직 하나님만이 가지신 고유한 권한이므로, 인간이 타인을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침해하는 행위와 같습니다. 피조물인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에 겸손히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타인을 비판하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뜻에 순종하는 삶은 공동체의 화합을 이루고 개인의 영적 성장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11○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12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11-12)

 

화제를 바꾸어 형제를 비방하지 말라고 합니다. 시기와 다툼을 말하는 1-3절과 형제와 관련해 높은 마음을 낮추라는 9-10절과 관련 있습니다. 하지만 명령의 이유가 다릅니다. 앞부분에서는 그런 일이 세상에 속한 것이고 형제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금했다면, 이 부분은 자신을 판단자 위치에 세우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비방하는 것은 이미 옳고 그름을 스스로 판단하고 그 결과를 타인에게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율법을 행하는 자가 오히려 심판자 위치에 서는 것입니다(참조. 2:4). 이런 면에서 형제를 비방하는 것은 이웃 사랑의 계명과 함께 하나님 사랑의 계명도 범하는 것입니다. 저자는 2인칭 단수 대명사(‘너’)를 사용한 수사적 질문으로 비방의 자격이 없음과 그 일이 옳지 않음을 강하게 전달합니다. 결론적으로 지금까지 제시된 구체적 명령들은 윤리적 차원을 넘어 하나님 나라에서 그분과의 관계에 합당한 ‘다움’, 곧 정체성에 맞게 사는 충성스러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이런 방식은 옛 언약의 관계를 배경으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 준수를 명령할 때와 동일합니다(참조. 출 20:1-17). 율법은 언약 백성을 향한 영원한 가르침입니다. 새 언약 신자들도 하나님 사랑/이웃 사랑의 율법 계명을 따라 세상과 동료 신자들, 하나님에 대해 바른 모습을 유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모든 분쟁은 욕망을 이루려는 헛된 집념에서 시작됩니다. 신앙은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주님은 말씀을 통해서 욕망을 다스리고 이기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그 은혜는 겸손한 자에게 임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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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03-02)


하늘로부터 오는 참 지혜

야고보서 3장 13-18절


 

흔히들 일 처리를 제대로 잘못 처리하는 사람을 가리켜 ‘지혜가 없다’라고 합니다. 또는 말을 상황에 맞게 하지 못하거나 행동을 잘못하여 남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을 보고도 ‘지혜가 없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세상에 지혜가 없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쉽게 ‘지혜가 없다’는 말을 하지만, 실은 지혜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소통의 방법이 다르고, 강조점이 달라서 상황이 꼬이는 것이지, 누구나 지혜를 가지고 있고 지혜를 드러내며 살아갑니다.

 

  • 본문에서 배우게 될 본문은 바로 앞에서 있는 내용과 연관이 있습니다. 선생 된 자는 자기 혀를 다스릴 수 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사람을 대하는 자세도 지혜로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선행으로 행함을 보여야 합니다. 만약 시기, 다툼, 거짓은 땅과 정욕과 귀신의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부터 난 지혜는 성결하고 화평하며 선한 열매로 가득합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의의 열매를 거둘 것입니다.

 

참된 지혜의 구별법(13)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싸우면 그토록 심하게 싸우게 됩니까?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형제와 자매 사이의 싸움이 그렇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다툼이 있는 곳에서 지혜롭게 대처함으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원활하게 만들어 갑니다. 야고보는 이처럼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다툼에 고질병에 대해 매우 귀중한 치료책을 제시합니다.

 

13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13)

 

야고보는 혀가 그토록 위험한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야고보는 이미 1장 26절에서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의 삶, 즉 경건의 삶은 자기 혀에 제갈 물릴 것을 반드시 요구한다고 언급했습니다.

 

(1) 지혜와 총명 있는 선생(13a)

 

야고보는 말에 대한 교훈을 마치고, 다음 질문으로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라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지혜 있는 자’라는 말은 ‘선생’을 일컫는 말이며, ‘총명’은 ‘전문가’, ‘숙련자’, ‘학자’, ‘지식인’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물론 ‘선생’은 우리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을 의미하며, 목사와 교사들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강조되는 요점은, ‘당신은 지혜로운 선생이 되기를 원하는가? 당신은 총명 있는 선생이 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여기에 그 방법이 있는데, 당신은 몇 가지를 반드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고보의 편지를 받을 일부 선생들은 ‘참 지혜와 총명’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것을 주목됩니다. 그들 중 일부는 생각 없는 사람처럼 매우 어리석게 행하면서도 스스로 지혜롭고 총명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수세기를 걸쳐 내려오면서 지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목회자들과 선생들이 그들과 똑같은 어리석은 행동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본문은 목회자들과 선생들로 하여금 실제로 그들이 얼마나 지혜와 총평이 있는 자인지 한번 생각해 보라고 촉구하기 위하여 씌여졌습니다. 지혜롭고 총명한 선생은 두 가지 특성을 드러낼 것입니다.

 

(2) 지혜와 총명 있는 모습(13b)

 

야고보는 ‘지혜와 총명 있는 자’는 그것을 ‘선행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고 말합니다. 그 ‘지혜와 총명 있는 자’는 이 두 가지 특징을 삶 가운데 선행(善行)으로 명백히 드러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혜로운 선생’은 자신이 가르친 대로 산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지혜와 총명’은 단순하게 지식적인 어떤 사실을 알고자 하는 학문이 아니라 자기가 어떻게 실천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성경의 진리를 가르치는 분야에서는 특히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당시 초대교회 안에 자신의 지혜를 자랑하고 스스로 선생 되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판단력은 예리 했습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놀랄 만큼이나, 교회 안에 부족과 허물을 쪽지게처럼 잘 찾아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교회 안에 더 문제가 발생되고 덕이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문제점을 들추어냄으로 치유되고 건강해져야 하는데, 문제 속으로 더 빠져 들어갔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런 사람의 지혜는 ‘하늘부터 온 참된 지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입술로는 교훈과 실천 사항에 대해 청산유수였지만 본인들은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 삶으로 본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야고보는 ‘하늘로부터 온 지혜’에 대한 한 가지 교훈은 지혜를 ‘온유함’으로 나타내라고 합니다. ‘지혜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잠 1:7)입니다. 지혜란 일차적으로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의 실존을 깨달음으로 온유함(겸손)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이웃과 형제를 향해 선행으로 드러나는 개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온유함으로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시 분위기는 ‘온유함’을 비굴함의 일종으로 여기던 헬라인들에게는 온유함이 덕목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고보는 ‘지혜와 총명’이 있다면 그것은 행함으로 증명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공동체 안에 지혜로운 사람이 있다면, 교회가 건강해지고 하나님의 은혜가 전달되어지고 사람들의 더욱 경건해질 것입니다.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더 바라볼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거짓 지혜(14-16)

세상은 똑똑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망해 가는 것이 아니라, 너무 똑똑한 사람이 많기 때문에 망해 갑니다. 그 똑똑함으로 서로의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의를 내세우기 때문에 다툼이 시작된 것입니다. 서로 스스로 자기 자신을 세우려고 자랑하기 때문에 조용할 날이 없습니다. 야고보는 세상에 속한 거짓 지혜의 특징에 대해 설명합니다.

 

14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15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16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14-16)

 

세상뿐만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도 ‘세상에 속한 지혜’를 따르는 것을 자랑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특징을 야고보는 소개합니다. ‘세상 속한 지혜’를 ‘땅으로부터 오는 지혜’이며, ‘마귀적인 것’, ‘정욕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지혜가 세상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변화되지 않는 성도들의 내면에도 무섭게 존재합니다. 사실은, 목회자이든지 일반 성도이든지 간에 세상으로 온 거짓 지혜를 따르는 선생들이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1) 거짓 지혜의 열매들(14)

 

‘세상에 속한 거짓 지혜’는 잘못된 열매를 몇 가지 맺습니다.

 

① 시기

첫 째는 ‘시기(猜忌)’입니다. 이 시기는 세속적인 욕망과 자기중심적 열심을 말합니다. 시기가 긍정적으로 활동할 때는 역사적인 발전을 가져온데 촉매적인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부정적인 역할을 많이 합니다. ‘거짓 지혜’는 지독한 시기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선생이든 일반 성도들이든지 간에 다른 사람들이 지닌 지위, 능력, 명성, 인기 등. 이와 같은 것들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30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잠언 14:30)

 

이러한 시기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사역보다 누가 더 큰지에 대한 관심에 집중했습니다(마 18:1-4). 비교는 잘못된 시기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마음에 기초는 시기심(猜忌心)이었습니다.

 

② 다툼

다음 거짓 지혜의 특징은 사람에게 다투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합니다. ‘다툼’이란 마찰 또는 더 정확하게는 이기적인 야망을 의미합니다. 불행하게도 선생들과 목회자들을 포함해서 너무도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기적인 야망을 불태우고 있습니다.

그들의 특징은 자신이 앞자리에서 칭송 받기를 원하고, 자신이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로 알려지기를 원하며, 훌륭한 지도자로 보이길 원합니다. 크게는 이상한 사상이나 주창자, 이단의 두목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지도자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야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이 취해야 할 태도와는 상반되는 것입니다.

그 영혼은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도 화평하지 못합니다. 만족이 없고 그리스도와 대의와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야망을 불태웁니다. 다툼과 이기적인 야망을 불러일으키는 이것이 바로 거짓 지혜와 거짓 가르침의 가른 길입니다.

 

➂ 자랑

계속해서 거짓 지혜의 특징은 ‘자랑’하고 자기가 영광을 받으려는 마음을 갖습니다. 자랑한다는 것은 꼭 큰소리로 떠들고 다니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말은 오히려 자신의 마음속에서 느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설교를 하는 것을 원합니다. 다른 사람을 세워주는 일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는 일만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따라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는 일에 쏠려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다른 이들과는 다른 자신의 신념을 추구하거나 자신이 처한 입장에 자부심을 느끼든가 하는 둘 중 하나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사상이나 입장을 과시하여 알리거나, 조용히 마음속에만 간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신념과 입장은 하나님의 말씀의 지혜와 가르침과는 반대 입장입니다. 그는 거짓 지혜와 거짓 교훈으로 인해 교만해지고 자기가 영광 받으려는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➃ 거짓

마지막으로 거짓 지혜의 특징은 진리를 대적하여 ‘거짓’을 말합니다. 이것은 적어도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첫째로, 거짓 선생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일관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진리를 바르게 가르치지도, 그것에 대해서 실천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거짓된 삶을 살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 것을, 즉 거짓 교리, 거짓 행동을 가르칩니다. 둘째로, 거짓 선생은 자기가 가르치고 행하는 것에 일관성이 없습니다. 그는 진리를 가르치지만 진리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향해 경고한 적이 있습니다.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2) 거짓 지혜의 영향(15-16)

 

결과적으로 ‘세상의 지혜’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을 낫습니다. 세상에 지혜를 가지고 살아간 사람들은 독한 시기심과 이기적인 욕심으로 행동합니다. 자기 고집만 부리면 공동체를 파괴하고, 그 결과는 분열과 혼란을 조장합니다.

정당하게 행동하고, 절차에 문제가 없고, 헌신적으로 일했더라도 사람들에게 상처와 아픔을 줄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선의의 경쟁조차 조심해야 합니다. 비록 성도들에게 열심과 헌신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의도라 할지라도, 잘못하면 공동체의 불협화음과 무질서를 낳을 우려가 있습니다. 영적 지도자의 자격 요건은 지식과 재능이 아니라 겸손한 인격과 온유한 태도임을 다시 한 번 알려줍니다.

 

하늘로부터 온 지혜(17-18)

운동에게는 선수들을 훈련시키는 감독이나 방송을 통해 해설해 주는 해설 위원이 있습니다. 이들은 운동선수들의 단점과 약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특징은 선수들을 바르게 교정을 시켜줍니다. 본인들이 뛴다면 선수보다 더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은 아닙니다. 아는 지식으로 다른 사람을 바르게 세워주는 일을 합니다.

 

17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18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17-18)

 

야고보는 지혜의 두 종류로 말했습니다. 전반부에는 세상으로부터 이루어진 지혜, 총명한 것 같지만 교회를 어렵게 하고 자신을 교만하게 만드는 세상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이제부터는 하늘부터 임한 지혜입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1) 참 지혜의 특징(17)

 

거짓 지혜와 반하여 ‘참 지혜’는 세상의지식이나 학자들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입니다. 참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와 총명을 구할 때 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 지혜’는 무엇입니까? 참 지혜가 명확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왕들과 학자들의 지혜보다 훨씬 뛰어난 이 지혜는, 하나님의 종들과 선생들이 가르쳐야 할 지혜입니다 성경은 그의 특징을 여덟 가지로 설명합니다.

 

➀ 성결(17)

‘하늘부터 온 참 지혜’는 가장 먼저 ‘성결’합니다. ‘성결’하는 것은 때가 없이 깨끗하다는 의미입니다. 즉 도덕적인 성결을 의미합니다. 부정과 그릇된 행동에서 완전히 성별되고 하나님께 따로 구별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선악상반의 상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깨끗합니다. 마음이 청결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성결할 때만 하나님의 뜻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참 지혜’를 소유한 사람은 깨끗하고 성결한 삶을 삽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먼저, 자기 자신의 몸을 성결하게 지킵니다. 다음으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성결을 지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성결하게 지킴으로써 하나님과 항상 교제의 관계를 이루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원하신 만큼 사용하실 수 있도록 합니다.

‘참 지혜로운 사람’은 첫 번째 특징이 ‘성결’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참 지혜를 찾는 사람에게 주시는 첫 번째 덕목입니다. 누구나 지혜로운 선생은 성결한 삶을 살며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성결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선생입니다.

 

➁ 화평(17)

하늘로부터 온 참 지혜의 다음 특징은 ‘화평’을 추구합니다. 그 의미는 함께 묻고, 연합하고, 함께 엮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즉 지혜로운 선생은 자기 자신과 하나님과 그리고 그의 동료들과 함께 연합하고 엮어진다는 것입니다.

참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 상하고 오해하고 있던 교회에 들어가서 사람들을 토닥이고 격려해주고 세워줍니다. 그리고 영혼을 살립니다. 한 사람 때문에 서로 용서함으로 관계들이 회복되고 회복하게 된다면 정말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마귀의 지혜는 칼날처럼 날카로워 다른 사람의 허물을 파헤쳐서 하나님의 공동체인 교회를 파괴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위로부터 온 지혜는 공동체를 세웁니다. 부족한 사람들을 ‘아직은 미숙해서 그렇다!’라 이해하고 기다리고 관용합니다.

 

➂ 관용(17)

참 지혜를 가진 사람들은 ‘관용’합니다. 이 말은 ‘온화함’, ‘합리적임’, ‘사려 깊음’, ‘상냥함’. ‘예의바름’, ‘인내’, ‘부드러움’ 등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적절한 표현은 ‘온화함’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정의보다 더 나은 개념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즉 은혜로운 온유함이라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선생은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온유와 관용으로 대해야 합니다.

 

➃ 양순(17)

참 지혜는 ‘양순’합니다. 이 말은 합리적이라는 의미입니다. 합당한 것과 간절한 호소에 기꺼이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즉 자기가 틀렸을 때에는 기꺼이 고치려는 자세를 갖는다는 말입니다. 참 지혜는 완고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선생은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믿음생활을 하는 믿는 자들의 권면을 듣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잘못되었을 때에는 그 행동을 고칩니다.

 

➄ 긍휼(17)

참 지혜는 ‘긍휼’이 가득합니다. 이 말은 ‘동정심’, ‘연민의 정’, ‘애정’, ‘친절함’을 의미합니다. 이는 연약한 지체를 도와주려는 열망을 뜻합니다. 친절하게 보살펴주고 보호해 주려는 열망입니다.

긍휼한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즉 필요를 보고 그 필요를 채워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보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엡 2:1-3).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또한 ‘긍휼’은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긍휼’은 차별을 전혀 알지도 못합니다. 긍휼은 성자나 죄인 모두에게 베풀어집니다. 지혜로운 선생, 즉 참 지혜의 선생은 사람들이 얼마나 신분이 낮든지 아니면 아무리 심하게 타락 했든지에 상관없이,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도우러 나아갑니다.

참 지혜를 몸소 실천하며 보여주는 선생은 긍휼의 마음을 지닙니다. 그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어려움과 곤경에 처한 모든 사람을 도와주려고 나아갑니다.

 

➅ 선한 열매(17)

참 지혜는 ‘선한 열매’가 가득합니다. 이는 지혜로운 선생이 실제로 곤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나아가 도와준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긍휼을 베풀어야겠다고 느끼면 결코 지나쳐버리지 않습니다. 그는 실행하여 사람들의 필요들을 채워줍니다. 즉 고통당하는 자, 소외된 자, 갇힌 자, 과부와 홀아비, 고아, 편부나 편모슬하의 어린이, 슬픔에 빠진 자, 가난한 자, 궁핍한 자, 집 없는 자, 배고픈 자, 죄인, 배교자, 잃어버려진 자, 사악한 자들을 도와줍니다. 참 지혜의 선생은 자신도 행하면서 따르는 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사회, 도시, 국가, 그리고 세상의 어려운 사람들을 향해 나아가도록 이끌어줍니다. 지혜로운 선생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절박한 자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합니다.

사실, 그는 세상의 잃어버려지고 빈핍한 사람들의 필요들을 채워주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내어주며, 자신의 가족의 필요 이상으로 지닌 모든 소유를 내어줍니다. 참 지혜의 선생은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전하고 그들을 도와 인생의 모든 문제와 환난을 잘 헤쳐 나가도록 도와주기 위해 선한 일에 온전히 헌신되어 있습니다.

 

➆ 편백(17)

참 지혜는 ‘편벽’, 즉, ‘편애’가 없습니다. 헬라어로 이 말은 실제로 두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먼저 지혜로운 선생은 공평합니다. 그는 누구도 편애하거나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확신하고 판단한 일에 전념합니다.

그는 진리, 즉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바를 정확히 압니다. 그는 거짓 사상이나 가르침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는 가르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다르지 않습니다.

 

➇ 거짓 없음(17)

참 지혜는 ‘거짓’이 없습니다. 이 ‘거짓’이란 ‘불성실함’, ‘위선’, ‘하는 척함’, ‘겉과 속이 다름’을 의미합니다. 참 지혜의 선생은 사람들을 속이지 않습니다. 그는 가르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선생이라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선생이라 주장하면서 더럽고 불의한 삶, 또는 무절제한 자기 만족의 삶을 살지 않습니다.

 

(2) 참 지혜의 열매(18)

 

참 지혜는 ‘의의 열매’, 즉 ‘의의 삶’과 세상이 되도록 영향을 끼칩니다. 그러나 ‘의’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주목해 보시길 바랍니다. ‘의’는 ‘화평’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사람이 마땅히 살아야 할 방식대로 살며, 마땅히 대해야 할 방식으로 이웃과 하나님을 대하며 사는 삶, 즉 의는 우리가 서로, 그리고 하나님과 화평하지 않는 한 걸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 사실은 극히 중요한 어떤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화평이라는 사실입니다. 서로간의 화평, 하나님과의 화평입니다. 참 지혜의 선생은 화평을 위해 열심으로 일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서로 그리고 하나님과 화평하도록 하기 위해 싸우고 또 싸움입니다.

그 결과는 사람들이 마땅히 살아야 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즉 모든 사람들이 서로서로 사랑하고 기뻐하고 화평하고 돌아보는 삶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사회와 세상이 될 것입니다. 모든 일들이 의로 이루어 질 것입니다. 즉 마땅히 되어야 하는 방식대로 정확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의의 세상, 즉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런 세상이 될 수 있게 할 수 있습니까? 목회자나 일반성도 할 것 없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선생들이 모두 참 지혜의 선생이 되어, 화평을 이루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평하며 서로 화평하도록 이끌어주어야만 가능합니다.


칼 중에서 예리한 칼일수록 칼집이 필요합니다. 칼집에 들어 있지 않으면 주변 사람들과 자신까지 상하게 하는 무서운 무기가 도구가 됩니다. 만약에 당신이 가진 지혜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빛나고 예리하면 온유함이란 칼집 속에 집어넣어야 합니다. 교회에 덕을 세울 수 있는 행함으로 들어나야 합니다. 당신의 지혜가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면 온유함이라는 칼집에 넣으시길 바랍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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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03-01)


행함 있는 믿음의 열매

야고보서 3장 1-12절


 

일상 생활 속에서 어떤 말을 가장 많이 합니까? 부정적인 말, 거룩하지 않은 말을 주로 사용하지 않습니까? 말은 인격의 다른 표현입니다. 사람의 지체들 중에 신묘막축한 지체는 혀인 것 같습니다. 10cm 혀로 다른 사람과 자신의 의사 소통을 이루어집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을 통해 하나님께 신앙고백을 하기도 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기도 합니다.

 

  •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임을 증명하기 위해 첫 번째로 혀의 올바른 사용에 대해서 말합니다. 총 네 가지의 법주로 설명합니다. 그 첫 번째 범주는 ‘말의 심판’에 관한 것입니다. 야고보는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입니다.

 

말에 대한 힘(1-2)

지도자는 다른 많은 사람을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책임을 지기도 합니다. 지도자에게는 그에 따르는 많은 직책도 주어지지만 책임도 부여됩니다.

 

1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2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1-2)

 

야고보서 1-2장은 ‘행함으로 입증되어야 하는 믿음’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 행함이란 하나님의 긍휼(헤세드)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긍휼의 실천 중 첫 번째 행함인 ‘혀의 올바른 사용’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먼저 혀의 부정적 이미지를 크게 네 파트로 나눠서 예를 들어 설명하고 강조합니다. 그것을 근거로 혀의 사용에 대한 교훈을 줍니다.

 

(1) 말이 많은 사람(1)

 

당시 야고보를 읽는 대상은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선생’이 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는 ‘선생’하면, 유대인의 율법 선생인 ‘랍비’이 가졌던 모종의 지위와 존경을 받고자 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사도적 혹은 예언자적 지위를 갖춘 정식 선생들에 대한 것으로 보기는 힘듭니다. 초대교회는 당시에는 낯선 사람들까지도 가르치는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분위기가 관대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선생’ 대우를 받으면서 많은 것을 누리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검증되지 않는 사람들이 강단에 서게 되니, 강론 시간이 ‘아무 말 대찬치’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을 잘하는 사람들이 인기 강사가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복음’은 없고 ‘강연회’가 되어버리니 교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선생’들이 누리는 것만 생각하고 자신의 책임은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몰려드는데, 점점 식상해져 버리고, 사회 사교장이 되어버려서 교회를 완전히 망쳐놓았습니다.

기독교의 가르치는 일은 꼭 수행되어야 할 일입니다. 가르치는 자는 자신의 책임을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선생 된 자들이 더 큰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생이 받을 정죄함이 더 큰 이유는, 그리스도인의 의무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가졌다고 고백한 자에게는 그 의무를 수행할 더 많은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2)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2)

 

야고보는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만 손가락질하는 마음으로 지적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주변에 발행한 문제들은 대부분 말의 실수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함에 있어서 여러 가지 수단이 있지만, 보통은 말로 하기 때문에 그로 인한 오해도 많습니다. 어디를 막론하고 붙어 다니는 이 조그만 혀만큼 그리스도인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도 없습니다. 만일 성도가 말에 실수가 없으면, 그는 온전한 사람(완벽한 사람)입니다. 혀는 능히 자기 온 몸도 굴레 씌어서 움직이지 못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영적으로 성숙하다는 것은 길들려진 혀를 필요로 합니다.

 

말에 대한 문제(3-8)

우리 몸에서 혀는 작은 편입니다. 하지만 제어하기 어렵고, 엄청난 파괴력이 있습니다. 혀는 훈련시키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혀로 악의를 가지고 내뱉은 한마디 말은 인격을 파괴하고 영혼을 실족하게 합니다. 그래서 혀는 인생의 방향까지도 결정합니다. 혀는 훈련시킨 대로 움직임입니다.

 

3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4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5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6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7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8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3-8)

 

사람들이 실수하기 쉬운 부분은 바로 말(言)입니다. 인간은 듣는 존재인 동시에 말하는 존재입니다. 언어로 의사소통을 합니다. 말을 통해 생각을 전달하고 다른 이들의 슬픔을 위로하기도 합니다. 반면 말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1) 혀의 위력(3-5)

 

말(馬)은 입에 물리는 작은 재갈로 통제하고, 큰 배도 조타실에서 작은 키로 운항을 진행합니다. 그리고 작은 불씨로 큰 불을 냅니다. 이처럼 혀는 작지만, 그 위력은 전체 방향을 좌우하는 큰 힘을 지닙니다.

말 한마디가 축복과 저주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혀는 잘 사용하면 엄청난 유익이 있지만, 잘못 사용하면 엄청난 손해를 끼칩니다. 그래서 말실수는 한 번에 그 동안 평생 쌓아온 높은 직위와 주변 관계 그리고 많은 재물까지도 허물어뜨리고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말 한마디로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대단한 능력이 있습니다.

 

(2) 혀를 통한 사단의 공격(6-8)

 

혀가 큰 위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위험성 또한 큽니다. 더 위험한 것은 길들이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혀는 작으면서도 그 영향력은 대단하기 때문에, 사단이 이용하려고 합니다. 사단은 사람들에게 말을 사용할 때, 부정적이고 폭력적으로 구사하도록 합니다.

야고보는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고 단언합니다. 화가 난 혀가 타오르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산불처럼 타오릅니다. 혀를 악하게 사용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영혼을 파멸로 몰아갑니다. 때로 온 몸을 더럽히고 인생 전부 불태우며 지옥 불을 경험하게 합니다. 말은 진실을 전하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실을 왜곡하는 거짓의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말이 중요한 만큼 통제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혀는 불과 같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혀가 무서운 것은 길들려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모든 생물들은 훈련만 시키면 얼마든지 길 드려집니다. 개들도 훈련을 통해서 주인의 뜻대로 순종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새들도 훈련시키면 순종합니다. 하지만 혀는 길 드려지지 않습니다. 혀를 길 드릴 수 없는 이유는 ‘정함이 없는 악’이고, ‘죽이는 독이 가득하기’ 때문에, 제어하기 쉽지 않습니다.

혀로 나오는 말은 곧 그 사람의 인격을 나타냅니다. 어떤 말을 하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습니다. 혀는 자연 상태로는 타락한 사람들의 혀에서 나오는 말은, 절대로 용기를 주고 살리는 말이 나올 리가 없습니다. 이미 죄로 물들어 길들일 수 없을 정도로 타락했습니다.

 

말에 대한 이중성(9-12)

누구나 말 실수를 피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말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의 선한 기능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올바른 방법이 필요합니다. 그 방법은 오직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통해 우리는 말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9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10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11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12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9-12)

 

본문에서는 혀의 힘과 그 위험성에 대해 설명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하면서도 동시에 악을 말할 수 있으며, 이는 모순된 행동입니다. 또한, 같은 근원에서 단맛과 쓴맛이 나올 수 없듯이, 우리의 말도 일관성이 있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1) 양면성을 가진 혀(9-10)

 

야고보는 이중적인 언어를 ‘독사의 둘로 갈라진 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온다는 것은 올바른 일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은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은혜로운 찬양을 할 때 보면, 찬양하는 모습이 천사가 내려와서 찬양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사람들이 형제·자매들과 싸우며 욕하는 모습을 보면, 사탄 같아 보입니다. 어떤 모습이 진짜 모습인지 분간할 수 없습니다.

 

(2) 선한 혀를 가짐(11-12)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하나님의 사역자로 부르셨을 때 먼저 거룩한 제단의 숯불을 그의 입술에 닿게 합니다. 그러므로 그를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에게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입술의 변화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의 내면세계가 변했음을 의미합니다. 언어(言語)의 변화는 인격(人格)의 변화입니다. 인격이 변하면 언어도 변합니다.

우리의 입술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은혜로만 거듭날 수 있습니다. 혀로 지은 모든 죄를 성령의 불로 깨끗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입술에 성령의 기름이 부어질 때에 우리의 죄와 허물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입술은 찬양의 제사를 드리는 입술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혀를 주신 이유는 진리를 말하라고 주셨습니다. 찬양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언어를 주셨습니다. 죄로 물든 입술을 날마다 성령의 불로 정결케 해주시기를 간구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혀를 창조하신 분의 뜻에 맞게 진리를 나누고 찬양하는 거룩한 삶을 사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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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02-02)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

야고보서 2장 14-26절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그 종교들도 그들만의 구원관이 있습니다. 대부분 선행과 종교적인 행위를 통해 천당이나 윤회한다고 주장합니다. 예로 티벳 불교에서는 불경을 많이 읽어야 다음 생에 좋은 윤회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불경을 읽는 대신에 ‘마니차(摩尼車)’를 돌립니다. 그 마니차가 돌 때마다 불경을 읽은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므로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돌려야 합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행위(行爲)가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습니다. 이것을 ‘이신칭의(以信稱義)’라고 합니다.

 

  • 본문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단언합니다. 성경 전체, 특히 바울의 구원관과는 약간 충돌된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이 둘은 같은 말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믿음과 야고보가 말한 믿음은 같은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구원 받는 믿음’을 말한 것이고, 야고보가 말하는 구원은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은 반드시 행위로 들어난다는 것입니다.

 

행함 없는 믿음은 무익함(14-17)

‘그림자’는 본체(本體)가 움직이는 데로 움직임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서 그대로 세상에 투영(投影)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기 때문에, 성도들은 하나님을 본받아서 그 사랑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이 실천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이유 때문이겠습니까?

 

14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14-17)

 

본문은 야고보서에서 가장 유명한 부분 중 하나로, ‘디아트리베(diatribe)’ 헬라식 강화(講話)의 대표적인 형태로 가상의 대화나 질문, 수사학적 역설을 통해 한 주제를 변론하고 강론하는 형식입니다. 야고보는 당시 교육 방법으로 진리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1) 행함이 없는 믿음(14)

 

야고보는 믿음의 행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라고 묻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실천이 없다면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믿음이 구원을 얻습니다.

야고보는 공동체 안에서 가난한 자들을 차별하지 말라는 가르침에 이어(2:1-13), 가난한 자들을 향해 자비를 베풀지 않으면서도 자신은 믿음이 있으니 구원 받았다고 확신에 차 있는 사람들을 질타하고 있습니다. 타 종교처럼 종교 행위와 말로만 믿는다고 고백해 봐야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단언하고 시작합니다.

 

(2) 잘못된 믿음의 태도(15-16)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이 무익하다’는 실제적인 ‘만일’이라고 예를 들어서 설명합니다. 공동체 안에 ‘형제, 자매’는 아름다운 공동체입니다. 그 안에 너무 가난해서 헐벗고 먹을 것이 없는 형제들이 있는데, 그들을 향해 나름 사랑을 표현합니다. 그런데 사랑한다고 관심을 표하지만, 말로만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는 것은, 그 가난한 당사자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도 같은 개념으로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기가 아브라함의 자손, 곧 유대인으로 태어나 할례를 받았으므로 구원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이 사실을 부정하면서 ‘하나님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마 3:9; 눅 3:8)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나는 예수님을 믿으니 비록 믿음대로 행하지는 않지만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나타난 셈입니다. 야고보는 이들에게 과거 세례 요한이 유대인들에게 퍼부은 것과 같은 질타를 퍼붓고 있습니다.

 

(3) 행함이 없는 믿음(17)

 

야고보는 단호하게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17)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은 종교적인 행위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실천되는 것을 원합니다. 그러므로 공동체 안에 형제를 적극적으로 돌보는 행위를 포함합니다(사 58:6-7). 바울이 ‘오직 믿음’을 가르칠 때 염두에 두었던 대상은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믿는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죄를 벗어나지 못하고 거룩하지 못한데 어찌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라며 탄식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과연 신앙을 따라 살기 위해 애쓰고 있는지 진지하게 점검해 봅시다.

 

믿음은 행함으로 증명(18-26)

사람을 외모로 보면 그가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함께 지내보면 그의 삶을 통하여 그의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의 믿음은 행함으로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예수님께 복종하지 않고 따르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구원이 있을 수 없습니다.

 

18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19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21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23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25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18-26)

 

야고보는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진 자를 예증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자는 귀신이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마음의 믿음이 행함으로 역사 했고 그 믿음이 온전케 됐다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믿음은 온전케 되는 성장하는 믿음입니다.

 

(1) 귀신들의 믿음(18-20)

 

아마도 이 예화는 누가복음 8:26 이하에 기록된 사건, 즉 예수님께서 거라사 지방에서 군대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신 사건을 염두에 두고 한 것 같습니다.

이 사건에서 주목할 것은, 귀신은 예수님께서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리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눅 8:28). 당시는 아직 제자들까지도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확실히 모르던 때였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이라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이보다 훨씬 뒤에 일어났습니다. 귀신은 그보다 먼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알았고, 그가 장차 자신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리고 아직 그때가 되지 않았고, 귀신 자신은 예수님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귀신은 예수님께 간구해 허락을 받고 돼지 떼에게로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귀신의 지적은 놀랄 만한 것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귀신은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단지 지식적으로 알았을 뿐이었습니다. 그 귀신에게 지식은 있었지만, 그 지식 뒤에 반드시 따라야 할 믿음의 행함이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식을 믿음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믿음과 지식은 별개의 것입니다. 예수에 대해서 안다고 그가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교리에 대한 지적인 동의 (同意)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20).

 

(2) 아브라함의 믿음(21-24)

 

야고보는 아브라함을 통해 믿음의 행위에 중요성을 논증합니다. 창세기 22:1-14에 기록된 사건을 근거로 설명합니다. 바울과 야고보는 같은 사건을 각각 다른 해석을 내리고 있습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오직 믿음’으로 그의 믿음 때문이라고 논증했지만(롬 4장), 반면에 야고보는 본문에 기록된 바와 같이 아브라함은 그의 행위로 의롭게 되었다고 말합니다(21). 하지만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 모순은 그 표현 형식에 있는 것이지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행위’란 바울이 로마서에서 언급한 ‘율법의 행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믿음의 행위’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회개에 합당한 열매’로서의 행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4:1 이하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과 야고보가 말한 것의 차이는 그들이 염두에 두었던 대상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유대 율법주의자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행함에 대하여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야고보는 믿음만 고백하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바울의 ‘이신득의’(以信得義)를 곡해하여 행함은 구원과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15:6에는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참된 믿음이었다는 증거가 바로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린 순종을 통해서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지 않았다면 그의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함으로 그의 믿음이 참 믿음이라는 것을 증거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의 참된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말합니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22).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 온전해져 가는 것입니다.

 

(3) 라합의 믿음(25)

 

야고보는 또 다른 예를 라합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이 라합이 정탐꾼들을 숨겨 준 행위를 통해 의로움을 입었다고 주장하는데(2). 사실 이 역시 믿음에 근거한 행위였습니다. 이 예화는 여호수아 2:1-24; 6:21-25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을 염두에 두고 한 것입니다.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여리고 성으로 두 명의 정탐꾼을 보냈는데 그들은 라합의 집으로 갔습니다. 라합은 하나님을 믿었고, 또 하나님께서 이 성을 그의 백성들에게 주셨다고 믿었으므로 그 정탐꾼들을 숨겨 주었습니다. 그로 인해 그녀는 그 성(城)이 멸망할 때 구원을 받게 됩니다.​ 라합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녀가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도와주는 것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 믿음의 표현 때문에 라합은 여리고 성이 멸망 당하는 와중에서도 구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만약 그녀가 자기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그 정탐꾼들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들처럼 성과 함께 멸망했을 것입니다.

 

(4) 결론(26)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신앙고백이 얼마나 쓸모없는가를 보여줌으로써, 그의 논의의 결론을 내리고자 합니다. 야고보는 행함 없는 믿음을 영혼이 없는 몸에 비유합니다. 여기서 ‘영혼 없는’이란 문자적으로 ‘호흡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에게서 호흡이 끊어졌다고 하는 것은 곧 그의 생명이 다했음을 증거 합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은 있는데 믿음의 행함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합니다. 야고보가 그의 논의를 마치면서 이러한 비유를 사용한 것은 영이 몸에 생명을 가져다주듯이, 행함은 그 믿음을 생명으로 이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인 듯합니다.

믿음과 행함은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 서로 보충적인 개념입니다. 믿음이라는 뿌리를 행함이라는 열매로 우리의 신앙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사실 믿음과 행함의 관계는 논리적으로나 가능한 것이지 실제적으로 그러한 구분은 불가능합니다. 믿음과 행함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불법을 행하는 자들에 대한 예수의 경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문맥으로 보아 여기서 ‘그날’은 하나님의 심판 날입니다. 그날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구원받고 어떤 사람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우리 삶의 대부분은 믿음에 근거합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왕으로 모신다면 당연히 삶의 모습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예배가 무의미한 종교 행위로 그치지 않고, 기도가 공허한 중얼거림이 아니기 위해서는 나의 믿음이 일상의 영역까지 적용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진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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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02-01)


외모로 판단하지 말아야할 이유

야고보서 2장 1-13절


 

‘능력 있는 설교’는 어떤 설교입니까? 감동적인 설교, 다박한 지석 설교, 파워풀한 설교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답은 삶을 변화시키는 설교입니다. 설교를 듣고 성령의 감동으로 ‘내가 어찌할꼬?’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 되는 설교가 ‘능력 있는 설교’입니다. 60-70년대 선배 목사들은 현 후배들보다 지식도, 파워도 적었지만, 모범적인 삶을 통해 설교함으로 성도들이 변화되었고 교회는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 본문에서 에서는 차별 없이 모든 사람을 대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야고보는 믿음과 행위가 함께 가야 함을 언급하며, 부자와 가난한 자를 차별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사랑하고 섬기며, 하나님 앞에서 공정하게 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비를 실천하는 자가 하나님의 심판에서 긍휼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믿음이 차별 없는 사랑과 자비를 통해 나타나야 함을 가르칩니다.

 

사람 차별하지 말라(1-4)

사람들의 ‘외모(外貌)’는 어떤 사람의 첫인상뿐 아니라 지위, 경제적인 수준 심지어 성격까지도 판단하게 하는 자료가 됩니다. 하지만 겉모습이 속사람을 완전히 나타내지는 못합니다. 믿음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1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2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4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1-4)

 

어느 사회에서나 부자들은 사회의 구성원으로 중심이 되고 가난한 자들은 주변인이 됩니다. 야고보 사도는 성도들이 믿음의 공동체 안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그 사람의 외모를 가지고 차별하지 않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차별하지 않는 하나님처럼 성도들도 편견으로 대하지 않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1) 차별 금지(1)

 

우리가 사람을 만나거나 관계를 맺게 될 때, 차별 없이 대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대할 때, 선입견이나 편견으로 대합니다. 특별히 사람의 외모로 판단하는 실수할 때가 많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거나 판단하지 말라고 합니다.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가난한 자들을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하게 하셨으며, 천국을 유업으로 주셨습니다. 그러나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며 핍박합니다. 야고보는 교회 안에서 사람을 차별했던 한 실례를 듭니다.

 

(2) 차별했던 실례(2-3)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공평하게 대하시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외모로 판단하고 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고 우리 모두를 공평하게 대하셨습니다.

초기 기독교 시대 사람들은 옷차림과 경제적인 수준으로 믿음까지 판단했습니다. 어느 날 예배당에 금가락지를 낀 부자와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교회 성도들의 반응이 두 사람에게 달랐습니다. ‘부자’에게는 ‘여기에 앉으소서!’라고 존대하면서 받았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자에게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라고 무시하며 말했습니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고 대접한 것입니다. 이 같은 모습은 오늘날에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서울 온누리 교회에서 서울역 근처 노숙인 전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깐 노숙인들이 교회를 출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성도들이 그들을 꺼렸습니다. 하지만 점차적으로 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노숙인들이 인간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다가 교회에서 대접을 받기 시작하면서 그들이 새로운 삶으로 변화되어 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에 있어서 가난한 사람과 부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의 믿음을 사용하셔서 부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기까지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 것처럼, 예수님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길 원하신 것처럼 우리들이 그런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해야 합니다.

 

(3) 외모로 판단하는 것(4)

 

야고보 사도는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4)라고 합니다.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악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날 우리는 외모 지상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더욱 겉모양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차별하는 것이 악한 이유(5-11)

많은 사람이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기분이나 생각에 따라 행동할 뿐이지 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만드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규모에 따라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함 그대로 사랑스럽게 살펴보고 계신 것입니다. 오직 믿음의 눈으로 사람을 볼 수 있는 능력을 키워나가야 합니다.

 

5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6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7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8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9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10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11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5-11)

 

예수님께서는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깔보면, 언젠가는 자신보다 나은 사람에게 똑같이 무시당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판단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라고 교훈했습니다(고전 6:2).

 

(1) 차별이 악한 이유(5-6)

 

차별이 악한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외모나 소유에 상관없이 차별하지 않으시고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시려고 믿음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받은 그 믿음으로 소유에 따라 차별하기 때문입니다. 모두는 주님의 날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심판대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남을 판단하는 그 사람 역시 하나님께 판단 받는 사람일 뿐입니다.

 

(2) 모든 죄는 심판의 대상(7-9)

 

사람들은 시대와 시간에 따라 죄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고, 죄에 대한 경중을 판단합니다. 똑같은 죄라도 어느 나라에서 범죄 했으냐에 따라서 중죄가 되고, 경죄가 됩니다. 살인자는 사형시켜야 한다고 하며, 경범죄는 그런 것 정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요한복음 8장에는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소개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여인을 둘러쌓고 분개하면서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라고 외치면서 이 여인은 죽어야 한다고 돌을 던지려고 합니다(요한복음 8:3-11).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라고 하시고, 묵묵히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습니다. 사람들은 ‘내로남불’로 생각합니다. 자신의 죄는 없거나 매우 작게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죄는 눈덩이처럼 매우 크게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래서 모두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임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3) 최고의 법(8-11)

 

성경에서 기록된 ‘최고의 법’은 레위기 19:18에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이 율법은 하나님께서 원하신 ‘최고의 법’입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그렇게 큰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범죄한 사실이 없기 때문에 범죄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마음에 자책감은 조금 있을 뿐입니다.

본문으로 돌아와서, 부자들을 대접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는 것은 단연코 죄라고 합니다. 가난한 사람이든 부한 사람이든 주님이 이미 받으셨음에도 불구하고 판단하고 차별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입니다. 겉모습으로 다른 사람의 믿음까지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을 가로채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죄에 대해 가장 무서운 것은 죄가 죄인지를 모르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는 것처럼 무서운 죄인데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가장 큰 죄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이것을 ‘참람’(blasphemy), ‘신성 모독’라고 합니다(마 9:3;26:65).

 

하나님의 심판(12-13)

‘판단하고 차별하는 것’의 반대개념은 ‘긍휼을 베푸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도들이 ‘선(善)’을 행하면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을 합니다. 하지만 스스로 좋은 사람이여서 긍휼을 베푼 것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맛보았기 때문에 그 사랑을 나누어준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선행을 통해 우리가 나타나야 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야 합니다.

 

12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13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12-13)

 

사람들은 자신에게 따뜻하게 잘해준 사람은 잘해주지만, 자신을 괴롭히거나 힘들게 하는 사람을 사랑으로 대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야고보 사도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긍휼을 베풀라고 권고합니다. 결국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유를 야고보는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합니다.

 

(1) 사랑의 법으로 심판(12)

 

첫 이유는 ‘자유의 율법’, 예수님께서 자기 목숨을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와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자유케 했습니다. 즉 사랑의 법으로 심판받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으로 대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받아서 용서받을 것입니다. 율법에 제일 큰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마 22:37-29).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요 13:34)고 하셨습니다.

 

(2) 긍휼 없는 심판(13)

 

우리가 긍휼을 베풀지 않으면 긍휼이 없는 심판을 받게 때문입니다. 이 긍휼은 우리 속에 있는 긍휼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흉내 내는 개념입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긍휼’은 인간 속에 있는 윤리적 덕목으로서의 인간 본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헤세드, 긍휼입니다. 따라서 형제를 차별하지 말고,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흉내 내며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주변에 가난한 자들, 문화적인 수준의 차이가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을 향해 긍휼의 마음을 가지십시오. 남을 긍휼히 여기는 당신을 하나님도 긍휼히 여기실 것입니다. 긍휼을 베풀지 않는 사람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만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는 그 은혜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믿음을 주셔서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긍휼을 베풀 때 하나님의 긍휼은 우리를 향한 심판을 거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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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01-03)

 


하나님 말씀을 듣고 실천함

야고보서 1장 19-27절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고 맵시를 가다듬기 위해 거울을 봅니다.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흠을 고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거울을 보고도 고치지 않는다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말씀을 읽고 듣고서 행동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일분입니다.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고쳐야할 부분은 그대로 두고 잊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접한 이유는 자신의 본 모습을 발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바르게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낳은 자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특히 가난하고 악한 자들을 돌보는 것이야말로 참된 경건의 증거입니다. 19절을 전제로 20-27절까지는 하나씩 세부적으로 설명합니다. 20-21절에서는 ‘성내는 것’에 대해서, 22-25절은 ‘듣는 것’에 대해서 26-27절은 ‘말하는 것’에 대해 설명합니다.

 

성도로서 감정 조절하는 지혜(19-21)

많은 성도들이 말씀을 접하면서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말씀이 가슴까지는 도착한데, 손과 발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참된 경건은 삶의 현장에서 변화의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말씀으로 변화된 사람에게 첫 번째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본문에서 언어(말)이라고 소개합니다.

 

19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20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21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19-21)

 

타락한 마음은 항상 자기중심적입니다.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 그리고 행동하는 것은 자신이 표준입니다. 자기가 하는 것은 다 맞고, 다른 사람은 틀리다고 단정하고 단죄해 버립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성도들은 예수님을 닮은 이타적인 사람들입니다.

 

(1) 일반적인 삶이 법칙(19)

 

야고보는 말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일반적인 법칙부터 설명합니다. 당시에 세상에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대한 격언을 들어 말합니다. 그것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지혜로운 사람들은 ‘듣는 속히 함’과, ‘말하는 것’과 ‘성내기는 것’은 더디 하는 사람입니다.

 

(2) 성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20)

 

성내기를 ‘더디 하는 것’은 일반적인 관계의 법칙이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에 대한 반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들의 죄악을 보시면서 성내지 않고 길이 참으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즉흥적으로 심판하셨다면 우리는 몇 번이나 죽어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야고보는 성도들이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때문이라고 소개합니다(20). 말을 반대로 성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옳은 것’,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인간 행동 규범으로서의 하나님의 기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성내기를 더디 하는 방법(21)

 

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버리는 것(21a)

‘성내기를 더디 하는 법’은 첫 번째는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는 것’입니다(21). 반대로 말하면, 성내는 이유가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심령은 사탄의 형상을 닮았습니다. 마음이 죄악의 필터로 덮여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행동에서 급한 모습으로 죄악이 나타난 것입니다. ‘더러운 것’은 우리 영혼에 묻은 얼룩이 더러운 오물이 돼서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을 가리키고(에베소서 4:31), ‘넘치는 악’은 스스로를 통제(control)가 안 되서 솟구쳐 표출되는 악한 행동을 의미합니다. ‘우리 속에서 성령의 통제가 되면서 나오는 말과 행동’은 성내기를 더디 할 수 있습니다.

 

②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들이는 것(21b)

두 번째는 ‘마음에 심긴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온유함’이란 ‘성냄’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 팔복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 기준이 됩니다(마태복음 5:5).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태복음 11:28-3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온유함’은 구원받아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에게 나타나는 특징이라고 말합니다(갈라디아 5:23). 바울은 고린도후서 10장 1절에서 ‘온유함’을 예수님의 것으로 언급하면서, 이것이 교회가 본 받아야 할 모습이라고 제시합니다.

 

결과적으로 ‘온유함’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속히 듣고, 더디 말하여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배움으로 가능해집니다. 배운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 속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그 사람을 지배해서 감정이나 행동을 잘 조절됩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성도들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칭찬이 자자할 것입니다. 성령께서 당신을 잘 조절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내놓으시기 바랍니다. 

 

성도로서 듣는 지혜(22-25)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할 때, 진정한 변화와 성장이 일어납니다. 말씀은 자신을 돌아보게 하여 삶을 고쳐 나가도록 합니다.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복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의 순종과 실천은 하나님의 축복과 연결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갑니다.

 

22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3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24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25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22-25)

 

야고보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울에 비유하며 말씀을 통해 자신을 살피고 고쳐 나가야 한다고 권면하며,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격려합니다. 참된 경건도 행동으로 증명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 구절에서 야고보는 단순히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실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거울을 보고 자신을 잊어버리는 사람과 같다고 비유하면서, 말씀을 실천할 때 진정한 변화와 성장이 일어난다고 강조합니다. 또한,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은 그의 행위에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이는 우리의 순종과 실천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과 연결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말하는 지혜(26-27)

옛날부터 언어(말)에 속담이나 교훈들은 수도 없이 많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속담 중에 ‘말 한마디로 천량 빚을 갚는다.’란 말이 있습니다. 과거에 ‘천량’은 사형수들을 형을 면할 수 있는 량의 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속담은 ‘격에 맞는 좋은 말은 사형수도 살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26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27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26-27)

 

성도들에게 실수하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만 잘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1) 말하기를 더디(26)

 

‘말하기를 더디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성급하게 말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더디 말하는 것은 속히 듣는 작업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 말은 말씀을 배우라는 뜻에 더 가깝습니다(잠 10:19).

26절은 말을 더디 하는 것(혀를 재갈 물리는 것)과 경건을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속으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 겉으로 말을 가려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경건은 ‘헛것(우상숭배)’입니다. 내적인 실상으로 경건을 가능하는 것은 ‘자기 마음을 속이는 것’입니다. 내적 경건은 반드시 외적 표현, 말로 드러나야 합니다.

  

(2) 경건의 외적 확장(27)

 

경건은 두 가지 측면으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첫째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으로 확장되어야 합니다(27). 이들은 사회적 소외 계층으로 생명과 권리를 대변해 줄 고아와 과부들입니다. ‘돌보다’라는 말은 ‘방문하다, 심방하다, 관여하다, 찾아내다’라는 뜻입니다. 고아와 과부들이 환란 중에 있을 때, 실제적으로 이들을 찾고 돌보는 것으로 우리의 경건을 확증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세속에 물들지 않게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세속’이란 이 세상 가치 기준을 말하고, ‘물들지 않다’는 말은 ‘흠도 없고 티도 없다’(베드로전서 1:19)는 뜻입니다. ‘지키다’는 말은 ‘경각심을 갖고 지속적으로 간직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세상 가치 기준을 따르지 않고 예수님처럼 살기 위해서 경각심을 갖고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경건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고, 세상의 악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6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야 58:6-7)

 이처럼 삶에서 더러움과 악을 버리고 하나님의 의를 실천할 때, 진정한 자유와 안식과 형통을 경험합니다. 매일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잘 받게 하시고, 그 말씀대로 행동하며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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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01-02)

 

 


시험이 유혹이 될 때

야고보서 1장 12-18절


산을 오를 때는 더욱 불조심해야 합니다. 산에는 불탈만한 것들이 많아서 한 번 불이 붙으면 쉽게 먼지기 때문입니다. 산불은 처음에는 작은 불씨로 시작하지만, 큰 불로 이어지면 끄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처럼 성도들도 어떤 실수를 범했을 때, 다른 사람이나 환경을 탓하곤 합니다. 물론 사람들은 외부의 환경을 받기 때문에 무시할 순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잘못을 범죄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더라면, 범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죄악에 대한 작은 불씨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주님을 사랑함으로 시련을 견디라는 권면에 이어 시련 중에 다가오는 유혹을 경계합니다. 유혹은 각 사람의 육신적 욕망에서 기인함을 밝히며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는 것을 방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선물을 주시며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신 분임을 일깨우고 변함없는 그분을 신뢰하도록 돕습니다. 야고보는 속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인가를 설명합니다.

 

 

시련을 찾는 자의 복(12)

일반적인 생활에서 진짜와 가짜 믿음을 바르게 구분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용광로 같은 시험과 시련의 과정을 통해 증명됩니다. 진실한 믿음은 어떤 어려움 시험 속에서 빛이 나지만, 거짓 믿음은 시험에서 불태워지고 말 것입니다.

 

12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12)

 

본문에서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하는데, 시험으로 번역된 ‘시험’은 ‘시련(trial)’ 또는 테스트(test)를 의미합니다. ‘시련을 참으라’, ‘인내하라’는 주제는 1:3-4에서 다루었던 주제인데, 야고보는 이 단락에서 시련을 인내하는 것의 가치를 새로운 관점에서 언급합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왜 복이 됩니까? 시련을 참는 성도를 바라보시며 응원하시는 주님이 계시며 주님은 시련을 참는 자에게 승리의 월계관을 주듯 약속된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의 아담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했습니다. 이럴 때 그들은 유혹에 넘어가고 시련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야고보는 시련을 견디는 것과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동일시하고 있음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된 면류관은 시련을 참는 자들이 받습니다. 시련의 시간은 주님에 대한 사랑을 테스트하는 시간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시련 중에 다가오는 유혹(13-15)

사탄은 항상 ‘이번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라고 속이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불이 나지 않도록 해야지, 불이 한 번 붙으면 나중에는 자신이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강하게 단련하시려고 시험하시되(test), 믿음을 파괴하고 넘어뜨리기 위해서 유혹(temptation)하시는 분은 결코 아닙니다.

 

13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4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13-15)

 

야고보는 13절에서 같은 단어를 사용하여 ‘시련’과 ‘유혹’을 동시에 표현합니다. 사람이 겪는 ‘시련’은 죄에 빠지도록 하는 ‘유혹’이 될 수 있습니다. ‘시련’을 벗어나고 싶은 강렬한 욕망은 부정한 방법이나 죄와도 타협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시련’을 만날 때, 성도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인내하며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것을 통과하여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1:5).

 

(1) 하나님 때문이 아님(13)

 

하나님께선 성도들이 성장하기 위해 시험(test)는 하시는 분이지만, 넘어지도록 함정을 만들어 놓고 유혹한 분은 아니십니다. 유혹을 받는 것은 외부에 유혹 거리들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유혹에 반응하는 욕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쉬운 비유를 하자면, 아무리 기름이 많아도 불씨가 없으면 불날 염려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아주 작은 불씨라도 있다면 순식간에 불이 붙어서 매우 큰 불이 되고 말 것입니다. 작은 불씨가 큰 불이 되어 온 산을 태운 것처럼 작은 욕심이 큰 죄가 되어 인생을 망치게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시련을 당할 때 찾아오는 유혹에 대해 마치 하나님이 성도를 죄에 빠지도록 유혹하는 것인 양 생각하는 어리석음 또는 속임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사람이 시련을 겪을 때 내가 하나님의 유혹을 받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유혹과 관련하여 야고보는 하나님의 두 가지 모습을 제시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악에게 유혹을 받지 않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친히 아무도 유혹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아니기에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부정하는 것보다 안전합니다. 미리 자신을 알고 대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모두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유혹을 받지 않으십니다. 완전하신 선이시며 죄악된 욕망을 갖지 않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악에게 유혹을 받지 않는 하나님의 속성은 아무도 유혹하지 않는 선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짓게 만들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촉발자가 아닙니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시련 중에 유혹을 받아 넘어지고 실패한 후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며 원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자주 사람들은 자신의 실패와 죄의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기보다 하나님 탓으로 돌리며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 정당화하려 합니까?

13절에서 시련과 유혹을 동시에 언급하는 것은 시사 하는 바가 있습니다. 시련을 참는다는 것은 결국 유혹을 끝까지 이겨내고 승리하는 것을 포함하는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2)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14-15)

 

유혹을 받는 책임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에게 있습니다. 14절에서 유혹을 받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유혹을 받는 것은 하나님 대문이 아니라 각 사람의 육신적 욕망, 악한 욕망 때문입니다. 한글 개역개정 성경에 욕심으로 번역된 ‘에피뛰미아’는 육신적이며 악한 욕망을 가리킵니다. 이런 육신적 욕망은 물고기를 잡는 낚시 줄의 미끼와 같이, 동물을 포획하는 그물 같이 사람을 유혹하다가 걸려들면 여지없이 끌고 갑니다.

 

야고보는 여성이 잉태하고 자녀를 낳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욕망이 죄를 낳는 과정을 묘사합니다. 욕망이 잉태하지 못하도록 해야 할 뿐 아니라 욕망이 죄를 낳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그 상태에 머물지 말고 속히 결단하고 돌이켜야 할 것을 암시합니다. 죄는 결국 사망을 낳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유혹에 빠진 것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리의 욕심을 더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욕심 충만’과 ‘성령 충만’은 반비례합니다. ‘욕망의 소리’와 ‘하나님의 말씀’은 반비례합니다. 우리 마음에 욕심으로 가득할수록 하나님의 말씀보다 욕망의 소리가 더 크게 들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욕망의 소리를 따르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 마음에 성령이 충만할수록 욕망의 소리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크게 들릴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지금 당신에게는 어떤 소리가 더 크게 들립니까?

 

속지 말라(16)

사탄은 우리의 욕심을 부추겨 죄를 짓도록 만들어 멸망으로 이끌지만,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고 생명을 누리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함이 조금도 없으시며, 어떤 상황과 조건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좋은 분이십니다. 또한 모든 선하고 좋은 것을 주신 분입니다. 결코 악과 죄는 하나님 탓이 아닙니다.

 

16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라는 야고보의 말에 애정이 담겨있습니다. 16절은 앞 구절들과 뒤 구절들 사이에서 양쪽을 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유혹하여 죄를 짓게 만든다는 잘못된 생각에 속지 말아 16절 ‘속지 말라야’하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좋은 선물의 근원이신 하나님(17-18)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죄를 만들지 않았으면 사람들이 죄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죄에 대한 책임이 결국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죄인들을 위해 자신의 독생자를 아끼지 안했습니다.

 

17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18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17-18)

 

하나님께서는 죄를 만들어서 부추기고 유혹에 빠지도록 조장하신 분이 아닙니다. 모든 악과 죄는 하나님 탓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고 양육하신 아버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함이 조금도 없으시며 모든 선하고 좋은 것들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1) 좋고 온전한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과 그분의 속성(17)

 

하나님께서는 어떤 분인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1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유혹하지 않으신다고 밝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죄를 짓게 만들거나 파멸을 야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16절에서 속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 오해를 불식하고 속임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야고보는17절에서 하나님이 좋은 것을 주시는 분임을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주십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은사’와 ‘선물’은 원어상 의미에 큰 차이가 없이 모두 선물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은 ‘위로부터’ 오는 선물입니다. 세상이 주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이 좋은 것, 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선물을 하나님은 주십니다. 세상은 좋은 선물과 온전한 선물이 다 세상에 있으며 세상이 줄 수 있다고 속입니다. 그러나 속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좋은 선물과 완전한 선물은 위로부터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빛들의 아버지이심을 밝힙니다. 빛들의 아버지라는 말은 하나님이 태양과, 달과 별들을 창조하신 분임을 의미합니다(참조, 창세기 1:14-18; 시편 136:7-9), 좋은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권능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 능력이 부족하여 주실 수 없는 것은 없습니다. 모든 좋은 선물, 온전한 선물을 주실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부족함이 없습니다(참고, 시편 23편)

 

하나님께서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십니다. 천체는 변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변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변화에 따른 그림자도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불변성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변치 않기 때문에 그를 신뢰하는 사람은 안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좋은 선물을 주셨다가 변덕스럽게 어느 순간 다시 빼앗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겉은 화려하고 좋아 보이나 뒤집어 보면 어둡고 흉한 이중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반영합니다. 모든 좋은 것, 온전한 선물 중에는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지혜도 틀림없이 포함될 것입니다(1:5).

 

(2) 진리의 말씀을 통해 생명을 낳음(18)

 

15절과 18절에 ‘낳는다’는 말이 대조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혹은 죄에 빠지게 하여 사망을 낳습니다(15). 하지만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이신(17)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통해 우리를 낳으십니다(18).

얼마나 상반되는 대조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악으로 유혹하여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하는 분이 아닙니다. 사망의 출발점은 육적 욕망입니다(1:15). 그것은 사람에게서 기원합니다. 그러나 생명의 출발점은 진리의 말씀입니다(1:18).

그리고 진리의 말씀의 기원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통해 우리를 낳으십니다. 즉 생명을 얻게 하십니다. 구원은 위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가장 좋은 선물입니다.

 

야고보는 구원받은 성도를 첫 열매라고 말합니다. 즉 피조 세계의 회복을 예견하는 첫 열매이며 거룩히 구별된 값진 존재입니다. 야고보가 보여주는 하나님께서는 온갖 시련 중에서도 좋은 것을 주시며 궁극적으로 성도를 구원하사 첫 열매가 되게 하시는 신실하시며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입니다. 그를 의지하며 시련을 끝까지 견디는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습니다(1:12).


유혹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 악한 욕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미혹당하는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기보다는 그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여 정욕을 이기고 선한 열망을 품어 하나님 주시는 온갖 좋은 은사와 선물을 누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유혹을 이기는 길은 하나님께 주시는 선한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선한 마음과 인내심을 주셔서 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승리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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