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03-02)
하늘로부터 오는 참 지혜
야고보서 3장 13-18절
흔히들 일 처리를 제대로 잘못 처리하는 사람을 가리켜 ‘지혜가 없다’라고 합니다. 또는 말을 상황에 맞게 하지 못하거나 행동을 잘못하여 남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을 보고도 ‘지혜가 없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세상에 지혜가 없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쉽게 ‘지혜가 없다’는 말을 하지만, 실은 지혜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소통의 방법이 다르고, 강조점이 달라서 상황이 꼬이는 것이지, 누구나 지혜를 가지고 있고 지혜를 드러내며 살아갑니다.
- 본문에서 배우게 될 본문은 바로 앞에서 있는 내용과 연관이 있습니다. 선생 된 자는 자기 혀를 다스릴 수 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사람을 대하는 자세도 지혜로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선행으로 행함을 보여야 합니다. 만약 시기, 다툼, 거짓은 땅과 정욕과 귀신의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부터 난 지혜는 성결하고 화평하며 선한 열매로 가득합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의의 열매를 거둘 것입니다.
참된 지혜의 구별법(13)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싸우면 그토록 심하게 싸우게 됩니까?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형제와 자매 사이의 싸움이 그렇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다툼이 있는 곳에서 지혜롭게 대처함으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원활하게 만들어 갑니다. 야고보는 이처럼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다툼에 고질병에 대해 매우 귀중한 치료책을 제시합니다.
13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13)
야고보는 혀가 그토록 위험한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야고보는 이미 1장 26절에서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의 삶, 즉 경건의 삶은 자기 혀에 제갈 물릴 것을 반드시 요구한다고 언급했습니다.
(1) 지혜와 총명 있는 선생(13a)
야고보는 말에 대한 교훈을 마치고, 다음 질문으로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라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지혜 있는 자’라는 말은 ‘선생’을 일컫는 말이며, ‘총명’은 ‘전문가’, ‘숙련자’, ‘학자’, ‘지식인’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물론 ‘선생’은 우리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을 의미하며, 목사와 교사들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강조되는 요점은, ‘당신은 지혜로운 선생이 되기를 원하는가? 당신은 총명 있는 선생이 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여기에 그 방법이 있는데, 당신은 몇 가지를 반드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고보의 편지를 받을 일부 선생들은 ‘참 지혜와 총명’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것을 주목됩니다. 그들 중 일부는 생각 없는 사람처럼 매우 어리석게 행하면서도 스스로 지혜롭고 총명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수세기를 걸쳐 내려오면서 지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목회자들과 선생들이 그들과 똑같은 어리석은 행동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본문은 목회자들과 선생들로 하여금 실제로 그들이 얼마나 지혜와 총평이 있는 자인지 한번 생각해 보라고 촉구하기 위하여 씌여졌습니다. 지혜롭고 총명한 선생은 두 가지 특성을 드러낼 것입니다.
(2) 지혜와 총명 있는 모습(13b)
야고보는 ‘지혜와 총명 있는 자’는 그것을 ‘선행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고 말합니다. 그 ‘지혜와 총명 있는 자’는 이 두 가지 특징을 삶 가운데 선행(善行)으로 명백히 드러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혜로운 선생’은 자신이 가르친 대로 산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지혜와 총명’은 단순하게 지식적인 어떤 사실을 알고자 하는 학문이 아니라 자기가 어떻게 실천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성경의 진리를 가르치는 분야에서는 특히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당시 초대교회 안에 자신의 지혜를 자랑하고 스스로 선생 되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판단력은 예리 했습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놀랄 만큼이나, 교회 안에 부족과 허물을 쪽지게처럼 잘 찾아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교회 안에 더 문제가 발생되고 덕이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문제점을 들추어냄으로 치유되고 건강해져야 하는데, 문제 속으로 더 빠져 들어갔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런 사람의 지혜는 ‘하늘부터 온 참된 지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입술로는 교훈과 실천 사항에 대해 청산유수였지만 본인들은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 삶으로 본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야고보는 ‘하늘로부터 온 지혜’에 대한 한 가지 교훈은 지혜를 ‘온유함’으로 나타내라고 합니다. ‘지혜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잠 1:7)입니다. 지혜란 일차적으로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의 실존을 깨달음으로 온유함(겸손)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이웃과 형제를 향해 선행으로 드러나는 개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온유함으로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시 분위기는 ‘온유함’을 비굴함의 일종으로 여기던 헬라인들에게는 온유함이 덕목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고보는 ‘지혜와 총명’이 있다면 그것은 행함으로 증명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공동체 안에 지혜로운 사람이 있다면, 교회가 건강해지고 하나님의 은혜가 전달되어지고 사람들의 더욱 경건해질 것입니다.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더 바라볼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거짓 지혜(14-16)
세상은 똑똑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망해 가는 것이 아니라, 너무 똑똑한 사람이 많기 때문에 망해 갑니다. 그 똑똑함으로 서로의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의를 내세우기 때문에 다툼이 시작된 것입니다. 서로 스스로 자기 자신을 세우려고 자랑하기 때문에 조용할 날이 없습니다. 야고보는 세상에 속한 거짓 지혜의 특징에 대해 설명합니다.
14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15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16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14-16)
세상뿐만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도 ‘세상에 속한 지혜’를 따르는 것을 자랑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특징을 야고보는 소개합니다. ‘세상 속한 지혜’를 ‘땅으로부터 오는 지혜’이며, ‘마귀적인 것’, ‘정욕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지혜가 세상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변화되지 않는 성도들의 내면에도 무섭게 존재합니다. 사실은, 목회자이든지 일반 성도이든지 간에 세상으로 온 거짓 지혜를 따르는 선생들이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1) 거짓 지혜의 열매들(14)
‘세상에 속한 거짓 지혜’는 잘못된 열매를 몇 가지 맺습니다.
① 시기
첫 째는 ‘시기(猜忌)’입니다. 이 시기는 세속적인 욕망과 자기중심적 열심을 말합니다. 시기가 긍정적으로 활동할 때는 역사적인 발전을 가져온데 촉매적인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부정적인 역할을 많이 합니다. ‘거짓 지혜’는 지독한 시기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선생이든 일반 성도들이든지 간에 다른 사람들이 지닌 지위, 능력, 명성, 인기 등. 이와 같은 것들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30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잠언 14:30)
이러한 시기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사역보다 누가 더 큰지에 대한 관심에 집중했습니다(마 18:1-4). 비교는 잘못된 시기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마음에 기초는 시기심(猜忌心)이었습니다.
② 다툼
다음 거짓 지혜의 특징은 사람에게 다투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합니다. ‘다툼’이란 마찰 또는 더 정확하게는 이기적인 야망을 의미합니다. 불행하게도 선생들과 목회자들을 포함해서 너무도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기적인 야망을 불태우고 있습니다.
그들의 특징은 자신이 앞자리에서 칭송 받기를 원하고, 자신이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로 알려지기를 원하며, 훌륭한 지도자로 보이길 원합니다. 크게는 이상한 사상이나 주창자, 이단의 두목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지도자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야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이 취해야 할 태도와는 상반되는 것입니다.
그 영혼은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도 화평하지 못합니다. 만족이 없고 그리스도와 대의와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야망을 불태웁니다. 다툼과 이기적인 야망을 불러일으키는 이것이 바로 거짓 지혜와 거짓 가르침의 가른 길입니다.
➂ 자랑
계속해서 거짓 지혜의 특징은 ‘자랑’하고 자기가 영광을 받으려는 마음을 갖습니다. 자랑한다는 것은 꼭 큰소리로 떠들고 다니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말은 오히려 자신의 마음속에서 느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설교를 하는 것을 원합니다. 다른 사람을 세워주는 일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는 일만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따라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는 일에 쏠려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다른 이들과는 다른 자신의 신념을 추구하거나 자신이 처한 입장에 자부심을 느끼든가 하는 둘 중 하나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사상이나 입장을 과시하여 알리거나, 조용히 마음속에만 간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신념과 입장은 하나님의 말씀의 지혜와 가르침과는 반대 입장입니다. 그는 거짓 지혜와 거짓 교훈으로 인해 교만해지고 자기가 영광 받으려는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➃ 거짓
마지막으로 거짓 지혜의 특징은 진리를 대적하여 ‘거짓’을 말합니다. 이것은 적어도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첫째로, 거짓 선생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일관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진리를 바르게 가르치지도, 그것에 대해서 실천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거짓된 삶을 살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 것을, 즉 거짓 교리, 거짓 행동을 가르칩니다. 둘째로, 거짓 선생은 자기가 가르치고 행하는 것에 일관성이 없습니다. 그는 진리를 가르치지만 진리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향해 경고한 적이 있습니다.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2) 거짓 지혜의 영향(15-16)
결과적으로 ‘세상의 지혜’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을 낫습니다. 세상에 지혜를 가지고 살아간 사람들은 독한 시기심과 이기적인 욕심으로 행동합니다. 자기 고집만 부리면 공동체를 파괴하고, 그 결과는 분열과 혼란을 조장합니다.
정당하게 행동하고, 절차에 문제가 없고, 헌신적으로 일했더라도 사람들에게 상처와 아픔을 줄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선의의 경쟁조차 조심해야 합니다. 비록 성도들에게 열심과 헌신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의도라 할지라도, 잘못하면 공동체의 불협화음과 무질서를 낳을 우려가 있습니다. 영적 지도자의 자격 요건은 지식과 재능이 아니라 겸손한 인격과 온유한 태도임을 다시 한 번 알려줍니다.
하늘로부터 온 지혜(17-18)
운동에게는 선수들을 훈련시키는 감독이나 방송을 통해 해설해 주는 해설 위원이 있습니다. 이들은 운동선수들의 단점과 약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특징은 선수들을 바르게 교정을 시켜줍니다. 본인들이 뛴다면 선수보다 더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은 아닙니다. 아는 지식으로 다른 사람을 바르게 세워주는 일을 합니다.
17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18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17-18)
야고보는 지혜의 두 종류로 말했습니다. 전반부에는 세상으로부터 이루어진 지혜, 총명한 것 같지만 교회를 어렵게 하고 자신을 교만하게 만드는 세상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이제부터는 하늘부터 임한 지혜입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1) 참 지혜의 특징(17)
거짓 지혜와 반하여 ‘참 지혜’는 세상의지식이나 학자들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입니다. 참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와 총명을 구할 때 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 지혜’는 무엇입니까? 참 지혜가 명확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왕들과 학자들의 지혜보다 훨씬 뛰어난 이 지혜는, 하나님의 종들과 선생들이 가르쳐야 할 지혜입니다 성경은 그의 특징을 여덟 가지로 설명합니다.
➀ 성결(17)
‘하늘부터 온 참 지혜’는 가장 먼저 ‘성결’합니다. ‘성결’하는 것은 때가 없이 깨끗하다는 의미입니다. 즉 도덕적인 성결을 의미합니다. 부정과 그릇된 행동에서 완전히 성별되고 하나님께 따로 구별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선악상반의 상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깨끗합니다. 마음이 청결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성결할 때만 하나님의 뜻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참 지혜’를 소유한 사람은 깨끗하고 성결한 삶을 삽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먼저, 자기 자신의 몸을 성결하게 지킵니다. 다음으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성결을 지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성결하게 지킴으로써 하나님과 항상 교제의 관계를 이루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원하신 만큼 사용하실 수 있도록 합니다.
‘참 지혜로운 사람’은 첫 번째 특징이 ‘성결’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참 지혜를 찾는 사람에게 주시는 첫 번째 덕목입니다. 누구나 지혜로운 선생은 성결한 삶을 살며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성결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선생입니다.
➁ 화평(17)
하늘로부터 온 참 지혜의 다음 특징은 ‘화평’을 추구합니다. 그 의미는 함께 묻고, 연합하고, 함께 엮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즉 지혜로운 선생은 자기 자신과 하나님과 그리고 그의 동료들과 함께 연합하고 엮어진다는 것입니다.
참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 상하고 오해하고 있던 교회에 들어가서 사람들을 토닥이고 격려해주고 세워줍니다. 그리고 영혼을 살립니다. 한 사람 때문에 서로 용서함으로 관계들이 회복되고 회복하게 된다면 정말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마귀의 지혜는 칼날처럼 날카로워 다른 사람의 허물을 파헤쳐서 하나님의 공동체인 교회를 파괴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위로부터 온 지혜는 공동체를 세웁니다. 부족한 사람들을 ‘아직은 미숙해서 그렇다!’라 이해하고 기다리고 관용합니다.
➂ 관용(17)
참 지혜를 가진 사람들은 ‘관용’합니다. 이 말은 ‘온화함’, ‘합리적임’, ‘사려 깊음’, ‘상냥함’. ‘예의바름’, ‘인내’, ‘부드러움’ 등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적절한 표현은 ‘온화함’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정의보다 더 나은 개념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즉 은혜로운 온유함이라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선생은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온유와 관용으로 대해야 합니다.
➃ 양순(17)
참 지혜는 ‘양순’합니다. 이 말은 합리적이라는 의미입니다. 합당한 것과 간절한 호소에 기꺼이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즉 자기가 틀렸을 때에는 기꺼이 고치려는 자세를 갖는다는 말입니다. 참 지혜는 완고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선생은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믿음생활을 하는 믿는 자들의 권면을 듣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잘못되었을 때에는 그 행동을 고칩니다.
➄ 긍휼(17)
참 지혜는 ‘긍휼’이 가득합니다. 이 말은 ‘동정심’, ‘연민의 정’, ‘애정’, ‘친절함’을 의미합니다. 이는 연약한 지체를 도와주려는 열망을 뜻합니다. 친절하게 보살펴주고 보호해 주려는 열망입니다.
긍휼한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즉 필요를 보고 그 필요를 채워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보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엡 2:1-3).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또한 ‘긍휼’은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긍휼’은 차별을 전혀 알지도 못합니다. 긍휼은 성자나 죄인 모두에게 베풀어집니다. 지혜로운 선생, 즉 참 지혜의 선생은 사람들이 얼마나 신분이 낮든지 아니면 아무리 심하게 타락 했든지에 상관없이,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도우러 나아갑니다.
참 지혜를 몸소 실천하며 보여주는 선생은 긍휼의 마음을 지닙니다. 그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어려움과 곤경에 처한 모든 사람을 도와주려고 나아갑니다.
➅ 선한 열매(17)
참 지혜는 ‘선한 열매’가 가득합니다. 이는 지혜로운 선생이 실제로 곤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나아가 도와준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긍휼을 베풀어야겠다고 느끼면 결코 지나쳐버리지 않습니다. 그는 실행하여 사람들의 필요들을 채워줍니다. 즉 고통당하는 자, 소외된 자, 갇힌 자, 과부와 홀아비, 고아, 편부나 편모슬하의 어린이, 슬픔에 빠진 자, 가난한 자, 궁핍한 자, 집 없는 자, 배고픈 자, 죄인, 배교자, 잃어버려진 자, 사악한 자들을 도와줍니다. 참 지혜의 선생은 자신도 행하면서 따르는 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사회, 도시, 국가, 그리고 세상의 어려운 사람들을 향해 나아가도록 이끌어줍니다. 지혜로운 선생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절박한 자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합니다.
사실, 그는 세상의 잃어버려지고 빈핍한 사람들의 필요들을 채워주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내어주며, 자신의 가족의 필요 이상으로 지닌 모든 소유를 내어줍니다. 참 지혜의 선생은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전하고 그들을 도와 인생의 모든 문제와 환난을 잘 헤쳐 나가도록 도와주기 위해 선한 일에 온전히 헌신되어 있습니다.
➆ 편백(17)
참 지혜는 ‘편벽’, 즉, ‘편애’가 없습니다. 헬라어로 이 말은 실제로 두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먼저 지혜로운 선생은 공평합니다. 그는 누구도 편애하거나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확신하고 판단한 일에 전념합니다.
그는 진리, 즉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바를 정확히 압니다. 그는 거짓 사상이나 가르침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는 가르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다르지 않습니다.
➇ 거짓 없음(17)
참 지혜는 ‘거짓’이 없습니다. 이 ‘거짓’이란 ‘불성실함’, ‘위선’, ‘하는 척함’, ‘겉과 속이 다름’을 의미합니다. 참 지혜의 선생은 사람들을 속이지 않습니다. 그는 가르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선생이라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선생이라 주장하면서 더럽고 불의한 삶, 또는 무절제한 자기 만족의 삶을 살지 않습니다.
(2) 참 지혜의 열매(18)
참 지혜는 ‘의의 열매’, 즉 ‘의의 삶’과 세상이 되도록 영향을 끼칩니다. 그러나 ‘의’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주목해 보시길 바랍니다. ‘의’는 ‘화평’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사람이 마땅히 살아야 할 방식대로 살며, 마땅히 대해야 할 방식으로 이웃과 하나님을 대하며 사는 삶, 즉 의는 우리가 서로, 그리고 하나님과 화평하지 않는 한 걸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 사실은 극히 중요한 어떤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화평이라는 사실입니다. 서로간의 화평, 하나님과의 화평입니다. 참 지혜의 선생은 화평을 위해 열심으로 일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서로 그리고 하나님과 화평하도록 하기 위해 싸우고 또 싸움입니다.
그 결과는 사람들이 마땅히 살아야 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즉 모든 사람들이 서로서로 사랑하고 기뻐하고 화평하고 돌아보는 삶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사회와 세상이 될 것입니다. 모든 일들이 의로 이루어 질 것입니다. 즉 마땅히 되어야 하는 방식대로 정확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의의 세상, 즉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런 세상이 될 수 있게 할 수 있습니까? 목회자나 일반성도 할 것 없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선생들이 모두 참 지혜의 선생이 되어, 화평을 이루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평하며 서로 화평하도록 이끌어주어야만 가능합니다.
칼 중에서 예리한 칼일수록 칼집이 필요합니다. 칼집에 들어 있지 않으면 주변 사람들과 자신까지 상하게 하는 무서운 무기가 도구가 됩니다. 만약에 당신이 가진 지혜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빛나고 예리하면 온유함이란 칼집 속에 집어넣어야 합니다. 교회에 덕을 세울 수 있는 행함으로 들어나야 합니다. 당신의 지혜가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면 온유함이라는 칼집에 넣으시길 바랍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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