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02-02)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
야고보서 2장 14-26절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그 종교들도 그들만의 구원관이 있습니다. 대부분 선행과 종교적인 행위를 통해 천당이나 윤회한다고 주장합니다. 예로 티벳 불교에서는 불경을 많이 읽어야 다음 생에 좋은 윤회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불경을 읽는 대신에 ‘마니차(摩尼車)’를 돌립니다. 그 마니차가 돌 때마다 불경을 읽은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므로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돌려야 합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행위(行爲)가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습니다. 이것을 ‘이신칭의(以信稱義)’라고 합니다.
- 본문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단언합니다. 성경 전체, 특히 바울의 구원관과는 약간 충돌된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이 둘은 같은 말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믿음과 야고보가 말한 믿음은 같은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구원 받는 믿음’을 말한 것이고, 야고보가 말하는 구원은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은 반드시 행위로 들어난다는 것입니다.
행함 없는 믿음은 무익함(14-17)
‘그림자’는 본체(本體)가 움직이는 데로 움직임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서 그대로 세상에 투영(投影)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기 때문에, 성도들은 하나님을 본받아서 그 사랑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이 실천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이유 때문이겠습니까?
14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14-17)
본문은 야고보서에서 가장 유명한 부분 중 하나로, ‘디아트리베(diatribe)’ 헬라식 강화(講話)의 대표적인 형태로 가상의 대화나 질문, 수사학적 역설을 통해 한 주제를 변론하고 강론하는 형식입니다. 야고보는 당시 교육 방법으로 진리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1) 행함이 없는 믿음(14)
야고보는 믿음의 행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라고 묻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실천이 없다면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믿음이 구원을 얻습니다.
야고보는 공동체 안에서 가난한 자들을 차별하지 말라는 가르침에 이어(2:1-13), 가난한 자들을 향해 자비를 베풀지 않으면서도 자신은 믿음이 있으니 구원 받았다고 확신에 차 있는 사람들을 질타하고 있습니다. 타 종교처럼 종교 행위와 말로만 믿는다고 고백해 봐야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단언하고 시작합니다.
(2) 잘못된 믿음의 태도(15-16)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이 무익하다’는 실제적인 ‘만일’이라고 예를 들어서 설명합니다. 공동체 안에 ‘형제, 자매’는 아름다운 공동체입니다. 그 안에 너무 가난해서 헐벗고 먹을 것이 없는 형제들이 있는데, 그들을 향해 나름 사랑을 표현합니다. 그런데 사랑한다고 관심을 표하지만, 말로만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는 것은, 그 가난한 당사자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도 같은 개념으로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기가 아브라함의 자손, 곧 유대인으로 태어나 할례를 받았으므로 구원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이 사실을 부정하면서 ‘하나님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마 3:9; 눅 3:8)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나는 예수님을 믿으니 비록 믿음대로 행하지는 않지만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나타난 셈입니다. 야고보는 이들에게 과거 세례 요한이 유대인들에게 퍼부은 것과 같은 질타를 퍼붓고 있습니다.
(3) 행함이 없는 믿음(17)
야고보는 단호하게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17)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은 종교적인 행위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실천되는 것을 원합니다. 그러므로 공동체 안에 형제를 적극적으로 돌보는 행위를 포함합니다(사 58:6-7). 바울이 ‘오직 믿음’을 가르칠 때 염두에 두었던 대상은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믿는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죄를 벗어나지 못하고 거룩하지 못한데 어찌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라며 탄식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과연 신앙을 따라 살기 위해 애쓰고 있는지 진지하게 점검해 봅시다.
믿음은 행함으로 증명(18-26)
사람을 외모로 보면 그가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함께 지내보면 그의 삶을 통하여 그의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의 믿음은 행함으로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예수님께 복종하지 않고 따르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구원이 있을 수 없습니다.
18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19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21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23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25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18-26)
야고보는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진 자를 예증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자는 귀신이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마음의 믿음이 행함으로 역사 했고 그 믿음이 온전케 됐다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믿음은 온전케 되는 성장하는 믿음입니다.
(1) 귀신들의 믿음(18-20)
아마도 이 예화는 누가복음 8:26 이하에 기록된 사건, 즉 예수님께서 거라사 지방에서 군대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신 사건을 염두에 두고 한 것 같습니다.
이 사건에서 주목할 것은, 귀신은 예수님께서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리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눅 8:28). 당시는 아직 제자들까지도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확실히 모르던 때였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이라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이보다 훨씬 뒤에 일어났습니다. 귀신은 그보다 먼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알았고, 그가 장차 자신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리고 아직 그때가 되지 않았고, 귀신 자신은 예수님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귀신은 예수님께 간구해 허락을 받고 돼지 떼에게로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귀신의 지적은 놀랄 만한 것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귀신은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단지 지식적으로 알았을 뿐이었습니다. 그 귀신에게 지식은 있었지만, 그 지식 뒤에 반드시 따라야 할 믿음의 행함이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식을 믿음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믿음과 지식은 별개의 것입니다. 예수에 대해서 안다고 그가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교리에 대한 지적인 동의 (同意)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20).
(2) 아브라함의 믿음(21-24)
야고보는 아브라함을 통해 믿음의 행위에 중요성을 논증합니다. 창세기 22:1-14에 기록된 사건을 근거로 설명합니다. 바울과 야고보는 같은 사건을 각각 다른 해석을 내리고 있습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오직 믿음’으로 그의 믿음 때문이라고 논증했지만(롬 4장), 반면에 야고보는 본문에 기록된 바와 같이 아브라함은 그의 행위로 의롭게 되었다고 말합니다(21). 하지만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 모순은 그 표현 형식에 있는 것이지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행위’란 바울이 로마서에서 언급한 ‘율법의 행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믿음의 행위’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회개에 합당한 열매’로서의 행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4:1 이하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과 야고보가 말한 것의 차이는 그들이 염두에 두었던 대상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유대 율법주의자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행함에 대하여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야고보는 믿음만 고백하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바울의 ‘이신득의’(以信得義)를 곡해하여 행함은 구원과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15:6에는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참된 믿음이었다는 증거가 바로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린 순종을 통해서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지 않았다면 그의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함으로 그의 믿음이 참 믿음이라는 것을 증거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의 참된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말합니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22).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 온전해져 가는 것입니다.
(3) 라합의 믿음(25)
야고보는 또 다른 예를 라합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이 라합이 정탐꾼들을 숨겨 준 행위를 통해 의로움을 입었다고 주장하는데(2). 사실 이 역시 믿음에 근거한 행위였습니다. 이 예화는 여호수아 2:1-24; 6:21-25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을 염두에 두고 한 것입니다.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여리고 성으로 두 명의 정탐꾼을 보냈는데 그들은 라합의 집으로 갔습니다. 라합은 하나님을 믿었고, 또 하나님께서 이 성을 그의 백성들에게 주셨다고 믿었으므로 그 정탐꾼들을 숨겨 주었습니다. 그로 인해 그녀는 그 성(城)이 멸망할 때 구원을 받게 됩니다. 라합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녀가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도와주는 것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 믿음의 표현 때문에 라합은 여리고 성이 멸망 당하는 와중에서도 구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만약 그녀가 자기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그 정탐꾼들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들처럼 성과 함께 멸망했을 것입니다.
(4) 결론(26)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신앙고백이 얼마나 쓸모없는가를 보여줌으로써, 그의 논의의 결론을 내리고자 합니다. 야고보는 행함 없는 믿음을 영혼이 없는 몸에 비유합니다. 여기서 ‘영혼 없는’이란 문자적으로 ‘호흡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에게서 호흡이 끊어졌다고 하는 것은 곧 그의 생명이 다했음을 증거 합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은 있는데 믿음의 행함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합니다. 야고보가 그의 논의를 마치면서 이러한 비유를 사용한 것은 영이 몸에 생명을 가져다주듯이, 행함은 그 믿음을 생명으로 이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인 듯합니다.
믿음과 행함은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 서로 보충적인 개념입니다. 믿음이라는 뿌리를 행함이라는 열매로 우리의 신앙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사실 믿음과 행함의 관계는 논리적으로나 가능한 것이지 실제적으로 그러한 구분은 불가능합니다. 믿음과 행함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불법을 행하는 자들에 대한 예수의 경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문맥으로 보아 여기서 ‘그날’은 하나님의 심판 날입니다. 그날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구원받고 어떤 사람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우리 삶의 대부분은 믿음에 근거합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왕으로 모신다면 당연히 삶의 모습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예배가 무의미한 종교 행위로 그치지 않고, 기도가 공허한 중얼거림이 아니기 위해서는 나의 믿음이 일상의 영역까지 적용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진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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