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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01-02)

 

 


시험이 유혹이 될 때

야고보서 1장 12-18절


산을 오를 때는 더욱 불조심해야 합니다. 산에는 불탈만한 것들이 많아서 한 번 불이 붙으면 쉽게 먼지기 때문입니다. 산불은 처음에는 작은 불씨로 시작하지만, 큰 불로 이어지면 끄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처럼 성도들도 어떤 실수를 범했을 때, 다른 사람이나 환경을 탓하곤 합니다. 물론 사람들은 외부의 환경을 받기 때문에 무시할 순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잘못을 범죄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더라면, 범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죄악에 대한 작은 불씨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주님을 사랑함으로 시련을 견디라는 권면에 이어 시련 중에 다가오는 유혹을 경계합니다. 유혹은 각 사람의 육신적 욕망에서 기인함을 밝히며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는 것을 방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선물을 주시며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신 분임을 일깨우고 변함없는 그분을 신뢰하도록 돕습니다. 야고보는 속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인가를 설명합니다.

 

 

시련을 찾는 자의 복(12)

일반적인 생활에서 진짜와 가짜 믿음을 바르게 구분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용광로 같은 시험과 시련의 과정을 통해 증명됩니다. 진실한 믿음은 어떤 어려움 시험 속에서 빛이 나지만, 거짓 믿음은 시험에서 불태워지고 말 것입니다.

 

12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12)

 

본문에서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하는데, 시험으로 번역된 ‘시험’은 ‘시련(trial)’ 또는 테스트(test)를 의미합니다. ‘시련을 참으라’, ‘인내하라’는 주제는 1:3-4에서 다루었던 주제인데, 야고보는 이 단락에서 시련을 인내하는 것의 가치를 새로운 관점에서 언급합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왜 복이 됩니까? 시련을 참는 성도를 바라보시며 응원하시는 주님이 계시며 주님은 시련을 참는 자에게 승리의 월계관을 주듯 약속된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의 아담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했습니다. 이럴 때 그들은 유혹에 넘어가고 시련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야고보는 시련을 견디는 것과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동일시하고 있음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된 면류관은 시련을 참는 자들이 받습니다. 시련의 시간은 주님에 대한 사랑을 테스트하는 시간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시련 중에 다가오는 유혹(13-15)

사탄은 항상 ‘이번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라고 속이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불이 나지 않도록 해야지, 불이 한 번 붙으면 나중에는 자신이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강하게 단련하시려고 시험하시되(test), 믿음을 파괴하고 넘어뜨리기 위해서 유혹(temptation)하시는 분은 결코 아닙니다.

 

13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4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13-15)

 

야고보는 13절에서 같은 단어를 사용하여 ‘시련’과 ‘유혹’을 동시에 표현합니다. 사람이 겪는 ‘시련’은 죄에 빠지도록 하는 ‘유혹’이 될 수 있습니다. ‘시련’을 벗어나고 싶은 강렬한 욕망은 부정한 방법이나 죄와도 타협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시련’을 만날 때, 성도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인내하며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것을 통과하여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1:5).

 

(1) 하나님 때문이 아님(13)

 

하나님께선 성도들이 성장하기 위해 시험(test)는 하시는 분이지만, 넘어지도록 함정을 만들어 놓고 유혹한 분은 아니십니다. 유혹을 받는 것은 외부에 유혹 거리들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유혹에 반응하는 욕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쉬운 비유를 하자면, 아무리 기름이 많아도 불씨가 없으면 불날 염려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아주 작은 불씨라도 있다면 순식간에 불이 붙어서 매우 큰 불이 되고 말 것입니다. 작은 불씨가 큰 불이 되어 온 산을 태운 것처럼 작은 욕심이 큰 죄가 되어 인생을 망치게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시련을 당할 때 찾아오는 유혹에 대해 마치 하나님이 성도를 죄에 빠지도록 유혹하는 것인 양 생각하는 어리석음 또는 속임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사람이 시련을 겪을 때 내가 하나님의 유혹을 받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유혹과 관련하여 야고보는 하나님의 두 가지 모습을 제시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악에게 유혹을 받지 않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친히 아무도 유혹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아니기에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부정하는 것보다 안전합니다. 미리 자신을 알고 대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모두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유혹을 받지 않으십니다. 완전하신 선이시며 죄악된 욕망을 갖지 않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악에게 유혹을 받지 않는 하나님의 속성은 아무도 유혹하지 않는 선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짓게 만들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촉발자가 아닙니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시련 중에 유혹을 받아 넘어지고 실패한 후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며 원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자주 사람들은 자신의 실패와 죄의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기보다 하나님 탓으로 돌리며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 정당화하려 합니까?

13절에서 시련과 유혹을 동시에 언급하는 것은 시사 하는 바가 있습니다. 시련을 참는다는 것은 결국 유혹을 끝까지 이겨내고 승리하는 것을 포함하는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2)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14-15)

 

유혹을 받는 책임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에게 있습니다. 14절에서 유혹을 받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유혹을 받는 것은 하나님 대문이 아니라 각 사람의 육신적 욕망, 악한 욕망 때문입니다. 한글 개역개정 성경에 욕심으로 번역된 ‘에피뛰미아’는 육신적이며 악한 욕망을 가리킵니다. 이런 육신적 욕망은 물고기를 잡는 낚시 줄의 미끼와 같이, 동물을 포획하는 그물 같이 사람을 유혹하다가 걸려들면 여지없이 끌고 갑니다.

 

야고보는 여성이 잉태하고 자녀를 낳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욕망이 죄를 낳는 과정을 묘사합니다. 욕망이 잉태하지 못하도록 해야 할 뿐 아니라 욕망이 죄를 낳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그 상태에 머물지 말고 속히 결단하고 돌이켜야 할 것을 암시합니다. 죄는 결국 사망을 낳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유혹에 빠진 것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리의 욕심을 더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욕심 충만’과 ‘성령 충만’은 반비례합니다. ‘욕망의 소리’와 ‘하나님의 말씀’은 반비례합니다. 우리 마음에 욕심으로 가득할수록 하나님의 말씀보다 욕망의 소리가 더 크게 들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욕망의 소리를 따르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 마음에 성령이 충만할수록 욕망의 소리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크게 들릴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지금 당신에게는 어떤 소리가 더 크게 들립니까?

 

속지 말라(16)

사탄은 우리의 욕심을 부추겨 죄를 짓도록 만들어 멸망으로 이끌지만,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고 생명을 누리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함이 조금도 없으시며, 어떤 상황과 조건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좋은 분이십니다. 또한 모든 선하고 좋은 것을 주신 분입니다. 결코 악과 죄는 하나님 탓이 아닙니다.

 

16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라는 야고보의 말에 애정이 담겨있습니다. 16절은 앞 구절들과 뒤 구절들 사이에서 양쪽을 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유혹하여 죄를 짓게 만든다는 잘못된 생각에 속지 말아 16절 ‘속지 말라야’하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좋은 선물의 근원이신 하나님(17-18)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죄를 만들지 않았으면 사람들이 죄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죄에 대한 책임이 결국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죄인들을 위해 자신의 독생자를 아끼지 안했습니다.

 

17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18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17-18)

 

하나님께서는 죄를 만들어서 부추기고 유혹에 빠지도록 조장하신 분이 아닙니다. 모든 악과 죄는 하나님 탓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고 양육하신 아버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함이 조금도 없으시며 모든 선하고 좋은 것들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1) 좋고 온전한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과 그분의 속성(17)

 

하나님께서는 어떤 분인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1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유혹하지 않으신다고 밝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죄를 짓게 만들거나 파멸을 야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16절에서 속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 오해를 불식하고 속임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야고보는17절에서 하나님이 좋은 것을 주시는 분임을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주십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은사’와 ‘선물’은 원어상 의미에 큰 차이가 없이 모두 선물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은 ‘위로부터’ 오는 선물입니다. 세상이 주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이 좋은 것, 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선물을 하나님은 주십니다. 세상은 좋은 선물과 온전한 선물이 다 세상에 있으며 세상이 줄 수 있다고 속입니다. 그러나 속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좋은 선물과 완전한 선물은 위로부터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빛들의 아버지이심을 밝힙니다. 빛들의 아버지라는 말은 하나님이 태양과, 달과 별들을 창조하신 분임을 의미합니다(참조, 창세기 1:14-18; 시편 136:7-9), 좋은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권능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 능력이 부족하여 주실 수 없는 것은 없습니다. 모든 좋은 선물, 온전한 선물을 주실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부족함이 없습니다(참고, 시편 23편)

 

하나님께서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십니다. 천체는 변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변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변화에 따른 그림자도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불변성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변치 않기 때문에 그를 신뢰하는 사람은 안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좋은 선물을 주셨다가 변덕스럽게 어느 순간 다시 빼앗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겉은 화려하고 좋아 보이나 뒤집어 보면 어둡고 흉한 이중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반영합니다. 모든 좋은 것, 온전한 선물 중에는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지혜도 틀림없이 포함될 것입니다(1:5).

 

(2) 진리의 말씀을 통해 생명을 낳음(18)

 

15절과 18절에 ‘낳는다’는 말이 대조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혹은 죄에 빠지게 하여 사망을 낳습니다(15). 하지만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이신(17)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통해 우리를 낳으십니다(18).

얼마나 상반되는 대조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악으로 유혹하여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하는 분이 아닙니다. 사망의 출발점은 육적 욕망입니다(1:15). 그것은 사람에게서 기원합니다. 그러나 생명의 출발점은 진리의 말씀입니다(1:18).

그리고 진리의 말씀의 기원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통해 우리를 낳으십니다. 즉 생명을 얻게 하십니다. 구원은 위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가장 좋은 선물입니다.

 

야고보는 구원받은 성도를 첫 열매라고 말합니다. 즉 피조 세계의 회복을 예견하는 첫 열매이며 거룩히 구별된 값진 존재입니다. 야고보가 보여주는 하나님께서는 온갖 시련 중에서도 좋은 것을 주시며 궁극적으로 성도를 구원하사 첫 열매가 되게 하시는 신실하시며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입니다. 그를 의지하며 시련을 끝까지 견디는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습니다(1:12).


유혹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 악한 욕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미혹당하는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기보다는 그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여 정욕을 이기고 선한 열망을 품어 하나님 주시는 온갖 좋은 은사와 선물을 누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유혹을 이기는 길은 하나님께 주시는 선한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선한 마음과 인내심을 주셔서 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승리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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