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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30-01)

 


포로에서의 해방과 평안의 약속

예레미야 30장 1-11절


 

아침이 되면 해가 뜨고, 저녁이 되면 달이 뜹니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옵니다. 그리고 겨울이 찾아옵니다. 이렇게 순서를 따라 진행되는 것이 자연적으로 된 일입니까? 아니면 누구에 의해 되어진 일입니까? 자연적으로 되었다면, 어느 한 순간에 질서가 무너지면 전 우주가 모두 파괴될 것입니다.

 

  • 예레미야 30-33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심판 후에 회복이 있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불순종과 우상숭배의 죄악 때문에 심판을 당하지만, 하나님 백성의 영사가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께서는 심판을 집행하시는 중에 벌써 이스라엘과의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십니다. 본문은 도입 부분으로 이스라엘과 유다가 함께 포로에서 돌아와 메시아적인 왕인 다윗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1-3)

모든 일에는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하나님께서 정하십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때가 되면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과 유다를 해방하시겠다고 하시며 이를 기록하라고 하십니다.

 

1여호와께로서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니라 2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일러 가라사대 내가 네게 이른 모든 말을 책에 기록하라 3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과 유다의 포로를 돌이킬 때가 이르리니 내가 그들을 그 열조에게 준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 그들이 그것을 차지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1-3)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색다른 명령을 하십니다. 그 명령은 책에 기록하라는 것은 약속을 성취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계속해서 불순종한 유다 백성은 벌을 받아 바벨론 포로로 끌려갑니다. 포로로 끌려가지 않고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서운 질병과 굶주림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1) 도입부(1)

 

지금은 유다 백성들이 벌을 받고 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난 후에는 반드시 회복될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장차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공정하게 심판하시지만, 죄를 뉘우치고 돌아오면 다시 은혜를 베푸시는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십니다.

 

(2) 책을 기록하라(2)

 

예레미야가 여호와에게서 색다른 명령을 받는다. ‘내가 네게 일러 준 모든 말을 책에 기록하라’(2). 일반적으로 당사자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선포하도록 예언자에게 말씀이 주어지는데, 여기서는 두루마리에 기록하게 하십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선포와 달리 기록은 후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보존을 목적으로 합니다. 현재의 문맥에서 보자면, 심판 이후에 있을 구원 약속은 예레미야에게만 알려지고 이를 들어야 할 자들에게는 감춰집니다. 이들은 아직 심판의 대상이기에, 선포된 심판이 이뤄지기까지 구원의 말씀은 이들에게 공개되지 않습니다. 문서로 남겨져 읽힐 때를 기다립니다. 예언이 문서화하면서 예레미야가 없어도 그를 통해 주어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읽을) 수 있게 됩니다. 예언자를 통해 선포됐던 여호와의 의지가 이제는 글로 전달되고, 예언자의 선포에 주어졌던 신적 권위가 마찬가지로 글에도 주어집니다.

 

(3) 메시지의 요약(3)

 

3절은 책에 기록된 전체 내용의 요약입니다. 서두의 ‘보라 (그) 날들이 오고 있다’(보라 - 날이 오리니)는 지금과는 다른 시대가 오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새로운 시대는 여호와의 선포로 시작됩니다. 회개에 따른 응답으로 주어지지 않고, 그분의 은총이 이를 가능하게 합니다. 여호와께서 ‘내 백성 이스라엘과 유다’의 운명을 되돌리실 날이 옵니다. 그분께서 이스라엘과 유다를 유배지에서 그 조상들에게 준 땅으로 다시 데려와 그 땅을 다시 차지하게 하실 것입니다(참조. 7:7:32:22-23). 고향 땅에서 쫓겨나지만(참조, 32:23), 그렇다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셨다는 사실이 무효가 된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조상들에게 주셨던 땅을 유배당한 자들에게 되돌려주십니다. 주전 597년과 587년에 바벨론에 의해 유배당한 유다 사람들은 물론 주전 732년과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유배당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구원의 문이 열립니다. 가나안 땅이 열두 지파 공동체에 주어졌던 것처럼 하나님 백성의 회복에 북쪽 지파들도 참여합니다. 정치적 분열과 반목이 끝나고, 이스라엘과 유다가 다시 여호와의 백성으로 통일됩니다. 24장과 29장에서 살펴보았듯이, 가나안에 남은 자들이 아니라 유배민들이 여호와께서 베푸실 구원의 수혜자가 됩니다.

 

심판 이후의 해방(4-11)

하나님의 심판은 무섭습니다. 그 심판 앞에 용사도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토록 무섭게 심판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이 자신들이 지은 죄를 가볍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당신도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까? 죄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불러 드린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있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그 심판 날에 겪을 일들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4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하여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5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우리가 떨리는 소리를 들으니 두려움이요 평안함이 아니로다 6너희는 자식을 해산하는 남자가 있는가 물어보라 남자마다 해산하는 여인 같이 손으로 각기 허리를 짚고 그 얼굴 빛이 창백하여 보임은 어찜이뇨 7슬프다 그 날이여 비할데 없이 크니 이는 야곱의 환난의 때가 됨이로다마는 그가 이에서 구하여냄을 얻으리로다 8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네 목에서 그 멍에를 꺾어버리며 네 줄을 끊으리니 이방인이 다시는 너를 부리지 못할 것이며 9너희는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를 섬기며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일으킬 너희 왕 다윗을 섬기리라 10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종 야곱아 두려워 말라 이스라엘아 놀라지 말라 내가 너를 원방에서 구원하고 네 자손을 포로된 땅에서 구원하리니 야곱이 돌아와서 태평과 안락을 얻을 것이라 너를 두렵게 할 자 없으리라 11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할 것이라 내가 너를 흩었던 그 열방은 진멸한다 할찌라도 너는 진멸하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공도로 너를 징책할 것이요 결코 무죄한 자로 여기지 아니하리라(4-11)

 

본문에서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나옵니다. 먼저, 이스라엘과 유다는 큰 재난과 고통을 겪게 되지만, 이는 회복의 과정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포로 생활에서 해방시켜 다시는 이방의 종이 되지 않게 하시고, 평안을 주어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고 보호하시며, 그들을 괴롭힌 모든 민족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1) 여호와의 날과 그 이후(4-7)

 

개역개정은 5절의 화자로 여호와를 전제했지만, 전체 문맥으로 보아 두려움에 사로잡힌 백성의 아우성을 인용하고 있는 말로 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심판에 떨어진 백성은 서로 ‘무서워 떠는 자의 소리’(공포의 외침)만 듣습니다. 환난에 휩쓸린 땅에는 ‘두려움’만 있고, 생명과 사회의 안전을 보장해줄 ‘평안함’(샬롬)은 어디에도 없습니다(참조. 6:14; 8:11; 12:12). 여호와께서 심판하시는 날에는 공황에 빠진 자들의 절망적인 울부짖음만이 들릴 뿐입니다. 여호와께서 공포의 아우성을 듣는 ‘우리’를 2인칭 복수 ‘너희’로 부르면서 이들에게 ‘자식을 해산하는 남자가 있는가 물어보라’(남자가 애를 낳을 수 있는지 너희는 물어 보아라)하고 명령하십니다(6). 수사적 질문에 대한 답변은 물론 부정적입니다. 그런데 용사들이 마치 해산하는 여자처럼 창백해진 얼굴을 하고 배에 손을 대고 망연자실합니다. 현재의 문맥에서 ‘해산하는 여자’의 비유는 새로운 생명의 창조를 함의하지는 않ㅅㅂ니다. 여호와께서 심판하실 때 싸움에 용감한 자들이 해산하는 여자처럼 전투 능력(의욕)을 완전히 상실하고 절망적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참조. 4:31; 6:24; 13:21; 49:24; 50:43). 이들의 손은 맥이 풀려 무기를 들지도 못하게 됩니다.

야곱에게 닥친 환난의 구체적 내용에 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환난의 정도를 간결하게 언급합니다. ‘그 날’은 야곱이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큰 재앙의 날입니다(참조. 욜 2:31; 습 1:14; 말 4:5). 그러나 심판으로 야곱의 역사가 끝장나지는 않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심판이 구원 시대를 가능하게 해줍니다. 파괴적 심판에 긍정적 의미가 부여됩니다. 이 구원은 심판의 경감이나 중지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무서움과 두려움과 재앙이 지배하는 징계의 심판을 통과하지 않고는 구원의 때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2) 해방 약속(8-9)

 

‘그 날에’ 여호와께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부수고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실 것입니다. 7절의 ‘그날’은 야곱이 환난을 당하는 때이지만, 8절의 ‘그날’은 미래에 있을 환난이 끝나고 구원이 시작하는 때를 가리킵니다. ‘바벨론의 멍에’에 관한 표상은 27-28장에도 나옵니다. 앞에서는 유다의 심판을 상징한 멍에의 표상이 여기서는 구원의 약속과 관련해 사용됩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목에서 멍에를 부수시고 그의 사슬을 끊으실 것입니다(참조. 사 9:5; 10:27; 겔 34:27). 과거 애굽 바로의 멍에를 메고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을 해방하셨던(참조. 레 26:13) 여호와께서 다시 바벨론의 멍에로부터 그 후손들을 해방하실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8절의 선포는 예레미야에게 맞서 유다의 구원을 주장하였던 하나냐의 선포와 거의 일치합니다. 28:12에서 하나냐는 여호와께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꺾어버리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물론 차이가 있는데, 하나냐는 2년 안에 구원 시대가 열릴 것을 예언했고, 예레미야는 멸망의 심판 이후에 여호와의 구원이 있을 것을 선포했습니다. 바벨론의 멍에를 벗어버린 자들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분께서 일으켜주실 ‘그들의 왕 다윗’을 섬기게 됩니다(9; 참조. 겔 34:23-24; 호 3:5). 우상을 섬기다가 멸망을 당하고 이방 왕을 섬기던 자들이 다시 그들의 구원자 여호와께로 돌아오고 다윗 왕조의 통치를 받게 됩니다. 여호와의 주도로 그분 백성의 종교와 정치가 온전히 회복됩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세울 그들의 왕 다윗’이 단순히 다윗 왕조의 회복을 말하는지 또는 구원 시대의 메시아적 통치를 시사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23:5에서 여호와께서는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을 약속해주셨습니다. 아무튼 구원 시대에는 여호와께서 다윗과 같은 왕을 세워 다시 하나가 된 이스라엘과 유다를 통치하게 하십니다.

 

(3) 귀환 약속(10-11)

 

여호와께서 유배당한 자들을 ‘나의 종 야곱’과 ‘이스라엘’로 부르시며 그들을 먼 곳에서 구해내 ‘두렵게 할 자’(적들)가 없는 고향에서 안전하게 살게 해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참조. 겔 34:28; 39:26). 초점이 가나안에 남은 자들에서(5-7) 다시 유배민들에게로 옮겨집니다. ‘나의 종 야곱’은 이사야서를(참조. 사 41:8; 44:1,2; 45:4; 48:20) 제외하고는 예레미야서에만 나오는(참조. 렘 30:10; 46:27,28) 표현으로, 야곱을 한정하는 ‘나의 종’은 여호와와 야곱/이스라엘 사이의 특별한 관계, 곧 야곱/이스라엘이 여호와께 속했음을 강조합니다. 구원을 받는 장소를 막연히 ‘먼 곳에서’로 표현하는데, 유다 사람들의 유배지 바벨론뿐만 아니라 북왕국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로잡혀 간 앗수르까지 포함시키기 위한 것 같습니다. 여호와의 구원 행위는 야곱을 고향으로 데려오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종 야곱을 포로로 잡아간 민족들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야곱도 죄를 범했기에 징벌을 받기는 하겠지만(참조, 출 34:7), 민족들과 달리 완전한 멸망에 떨어지지는 않습니다(참조. 4:27; 5:10,18). 야곱은 그분의 종으로 그분의 보호 아래 있기에 여호와께서는 ‘법에 따라’ 징계하십니다(참조. 10:24). 10-11절은 애굽에 관한 신탁(46장)의 마지막에 거의 문자적으로 다시 등장합니다(46:27-28).


거짓말을 전하는 자와 거짓말을 따르는 자는 한통속입니다. 그들에게는 원하는 말이 진실이 되고, 갈망이 채워지면 진실이 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흔들림에 대해 변명할 수 없을 날이 올 것입니다. 거짓에 휘둘리지 말아야 합니다. 진실함과 도덕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자신에게 있는 은밀한 욕망을 제어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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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29-02)


불순종한 자들에 대한 경고

예레미야 29장 15-32절


 

누구나가 나를 보고 있을 때와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을 때 나의 행동은 다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보고 계신다는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 하나님께서는 유다에 남은 백성에게 칼과 기근과 전염병을 보내셔서 상해서 먹을 수 없는 몸쓸 무화과 같게 하실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에서 거짓을 예언한 아합과 시드기야는 느부갓네살 왕의 손에 죽을 것입니다.

 

유배지의 예언자들(15)

마지막 때가 될수록 기만과 거짓 평안의 메시지가 횡행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호응을 얻는 것은 거짓 예언일지라도 구미와 갈망에 들어맞아서입니다. 그러나 거짓 메시지는 잎만 무성한 나무를 키울 뿐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거짓에 휘둘리지 않고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합니까?

 

15너희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바벨론에서 선지자를 일으키셨느니라(15)

 

예레미야 29장 전반부에서 바벨론에 있는 포로들에 대해 예레미야가 쓴 편지 내용입니다. 하나냐 같은 사람은 베벨론 포로에서 2년이 돌아온다고 주장했지만, 예레미야는 70년의 포로 생활을 예언했습니다. 본문은 그 예레미야의 예언에 대한 반응들입니다.

예언자들에 관한 ‘너희’의 말을 인용하는 15절은 문맥에 이질적입니다. 현재의 위치에서는 아마도 바벨론 유배민에게 편지를 보낸 예언자 예레미야와 유배민들 가운데 활동하는 예언자들을 대비시키기 위해 유배민들과 관련한 말씀 마지막에 놓인 것 같습니다. ‘너희’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바벨론에서 선지자를 일으키셨느니라’라고 말하지만, 이는 ‘너희’의 생각에 불과합니다. ‘너희’ 가운데 활동하는 예언자들은 여호와께서 보낸 자들이 아닙니다(8-9). ‘너희’에게 편지를 보낸 예레미야만이 참된 예언자로, ‘너희’는 편지의 메시지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으로(4)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16-20)

평안한 삶이 늘 축복의 증거는 아닙니다. 평안하기 때문에 방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입니다. 편안할수록 자성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깨어 있는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에 임할 때 쓰임을 받는 성도가 될 것입니다.

 

16다윗의 왕좌에 앉은 왕과 이 성에 사는 모든 백성 곧 너희와 함께 포로 되어 가지 아니한 너희 형제에게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17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칼과 기근과 전염병을 그들에게 보내어 그들에게 상하여 먹을 수 없는 몹쓸 무화과 같게 하겠고 18내가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그들을 뒤따르게 하며 그들을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에 흩어 학대를 당하게 할 것이며 내가 그들을 쫓아낸 나라들 가운데에서 저주와 경악과 조소와 수모의 대상이 되게 하리라 19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들이 내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니라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들에게 꾸준히 보냈으나 너희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0그런즉 내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보낸 너희 모든 포로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16-20)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에게 재앙이 닥칠 것이라 경고합니다. 그들은 칼, 기근, 전염병으로 큰 고통을 겪고 여러 나라에 흩어질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무시한 결과입니다.

 

(1) 유배당하지 않는 자들(16)

 

첫 번째 유배를 모면하고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의 운명에 관한 말씀이 바벨론 유배민들에게 주어집니다. ‘다윗의 왕좌에 앉은 왕’(참조, 22:2)은 현재의 문맥에서는 여호야긴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시드기야를 가리킵니다. ‘너희 형제’는 남은 자들과 잡혀간 자들이 한 가족에 속했음을 보여주는 표현으로, 아마도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이 형제의 의무를 저버렸음을 시사해주는 것 같습니다(참조. 겔 11:15). 예루살렘에 남겨진 자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자들보다 신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나은 바가 있어서 유배를 면한 것은 아닙니다. 이들은 완전한 멸망을 위해 남겨졌을 뿐입니다. 바벨론 유배민을 기다리는 것은 구원과 평안과 소망의 미래이고(10-14),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을 기다리는 것은 더 큰 재앙입니다(참조. 28:14).

 

(2) 심판 선언(17-18)

 

여호와께서 ‘칼과 기근과 전염병’을 보내 이들을 세상 나라들 가운데로 쫓아내 ‘저주와 경악과 조소와 수모의 대상’으로 만드실 것입니다(17-18).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에게 멸망의 심판을 선포하는 17-18절은 전체적으로 24:8-10의 반복입니다.

 

(3) 심판의 근거(19)

 

이들이 이처럼 비참한 운명에 넘겨지는 데는 이유가 없지 않습니다. 이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19).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 예언자들을 꾸준히 이들에게 보내셨지만, 이들은 예언자들의 선포에 귀 기울이기를 거절하였습니다(참조. 25:4). 20절은 시선을 다시 바벨론 유배민에게로 돌려 이들에게 말씀에 순종할 것을 권면합니다

 

바벨론의 거짓 예언자들(21-23)

거짓 선지자들은 미래를 낙관적으로 희망과 축복이라는 마약으로 유혹합니다. 그렇다고 욕심을 낸다고 얻을 수 있는 미래는 아닙니다. 제멋대로 발행한 희망의 백지수표는 출저가 하나님이 아닌 이상 백지화될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가 말씀하신 만큼, 그가 보여주신 만큼만 믿고 따르면 됩니다.

 

21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골라야의 아들 아합과 마아세야의 아들 시드기야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그들은 내 이름으로 너희에게 거짓을 예언한 자라 보라 내가 그들을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너희 눈 앞에서 그들을 죽일 것이라 22바벨론에 있는 유다의 모든 포로가 그들을 저줏거리로 삼아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너를 바벨론 왕이 불살라 죽인 시드기야와 아합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리니 23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어리석게 행하여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며 내가 그들에게 명령하지 아니한 거짓을 내 이름으로 말함이라 나는 알고 있는 자로서 증인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시니라(21-23)

 

본문은 하나님에서는 바벨론의 거짓 예언자 아합과 시드기야가 악행과 거짓 예언으로 인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그들을 죽이고 시체를 불태울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죄악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1) 심판 선언(21-22)

 

이 단락은 ‘너희’가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해’ 일으키신 예언자들로 인정하는 자들의 정체를 폭로합니다. 유배지에서도 많은 예언자가 등장해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했지만, 이들은 거짓 예언자들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의 이름으로 유배민들에게 거짓을 예언한 골라야의 아들 아합과 마아세야의 아들 시드기야에게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2) 심판의 근거(23)

 

이들은 거짓을 예언했을 뿐만 아니라(21a) 이웃의 여자와 간음하는 망측한 짓을 저지르기까지 했습니다(23a; 참조. 23:14). 여호와의 예언자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떠들 뿐만 아니라 윤리적으로 파렴치한 짓도 범했습니다. 이들의 신학적·윤리적 타락을 속속들이 아시는 여호와께서 증인이시기에, 변명의 여지가 있을 수 없습니다(23b).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들을 느부갓네살의 손에 붙여 죽게 하고 저주거리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21b-22). 27장과 28장에 의하면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한 거짓은 유배민들의 조속한 귀향이었고, 29:26-28에 나오는 스마야의 편지도 유배지 예언자들의 메시지가 임박한 구원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아합과 시드기야도 다르지 않았음은 이들이 느부갓네살에 의해 공개적으로(‘너희 눈 앞에서’) 처형당했다는 사실로부터 어렵지 않게 끌어낼 수 있습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한 처형은 이들이 정치범으로 고발당했음을, 곧 바벨론에 해로운 정치적 내용이 이들의 메시지에 담겨 있었음을 전제합니다. 이들은 유배민 조기 귀환의 배경으로 바벨론의 멸망을 선포했던 것 같습니다. 바벨론의 입장에서 사로잡혀 온 예언자들이 바벨론의 멸망을 선언하는 것은 반역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거짓 예언자들의 윤리적 타락을 고발하는 말씀은 여호와의 율법을 범하는 자는 그분께서 보내신 예언자가 될 수 없음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참 예언과 거짓 예언의 구별이 매우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는 자가 그분의 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는 여호와께서 보내신 자가 아님이 분명하십니다

 

 

예언자 스마야(24-32)

거짓된 선지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그들의 죄에 상응하는 엄중한 형벌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거짓 예언과 악행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현혹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폭로하고 심판하십니다. 흔들려 잘못되었다고 변명할 수 없는 때가 오며, 하나님께서는 참된 말씀을 전할 자에게 자신의 말씀을 담아 전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쉽게 믿음의 대상을 바꾸거나 내어주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를 굳게 지켜야 합니다.

 

24○너는 느헬람 사람 스마야에게 이같이 말하여 이르라 25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가 네 이름으로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백성과 제사장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와 모든 제사장에게 글을 보내 이르기를 26여호와께서 너를 제사장 여호야다를 대신하여 제사장을 삼아 여호와의 성전 감독자로 세우심은 모든 미친 자와 선지자 노릇을 하는 자들을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과 목에 씌우는 쇠 고랑을 채우게 하심이어늘 27이제 네가 어찌하여 너희 중에 선지자 노릇을 하는 아나돗 사람 예레미야를 책망하지 아니하느냐 28그가 바벨론에 있는 우리에게 편지하기를 오래 지내야 하리니 너희는 집을 짓고 살며 밭을 일구고 그 열매를 먹으라 하셨다 하니라 29제사장 스바냐가 스마야의 글을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읽어서 들려 줄 때에 30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31너는 모든 포로에게 전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느헬람 사람 스마야를 두고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그를 보내지 아니하였거늘 스마야가 너희에게 예언하고 너희에게 거짓을 믿게 하였도다 32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느헬람 사람 스마야와 그의 자손을 벌하리니 그가 나 여호와께 패역한 말을 하였기 때문에 이 백성 중에 살아 남을 그의 자손이 하나도 없을 것이라 내가 내 백성에게 행하려 하는 복된 일을 그가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4-31)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스마야가 거짓 예언으로 예레미야를 대적한 죄를 지적하십니다. 스마야와 그의 후손은 벌을 받아 다시는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살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스마야가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거짓 예언으로 백성을 현혹했기 때문입니다.

 

(1) 예레미야에게 주시는 말씀(24)

 

예언자 예레미야가 바벨론으로 편지를 보내자, 이에 맞서 유배민들 가운데 활동하는 예언자 스마야가 예루살렘으로 편지를 보냅니다. 예레미야의 편지는 사로잡혀 간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에게 보내지고, 스마야의 편지는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백성과 제사장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와 모든 제사장’에게(25) 보내집니다. 예레미야는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유배민들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편지를 보내고(4), 스마야는 자기 개인의 이름으로(‘네 이름으로’) 편지를 보냅니다. 예언자 예레미야의 편지에는 유배민들이 인정하는 예언자가(15; 참조. 8-9) 반응하고, 예언자 스마야의 편지에는 여호와께서 직접 반응하십니다(24-25,30;참조․ 28:12-14). 예레미야가 바벨론으로 보낸 편지가 긍정적 반응을 불러일으켰던 것 같습니다. 유배민들 가운데서 활동하는 예언자 스마야가 이를 불안하게 생각하고 예루살렘의 공적 종교가 예레미야의 활동에 개입해 그를 단속하도록 요청합니다.

 

(2) 스마야를 고발하시는 여호와(25-28)

 

스마야가 ‘여호와의 성전 감독자’, 곧 예루살렘 성전의 권위로 예언자를 침묵시키려 하자 유일하고도 최고의 권위이신 여호와께서 직접 개입하십니다(25). 예레미야에게 가해지는 고발이나 위해는 그를 예언자로 보내신 분을 향한 도발이기도 합니다. 여호와께서 공개하신 스마야의 편지에는 서로 관련된 두 개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먼저 스마야는 제사장 스바냐에게 여호와의 성전 감독자의 직무를 지체없이 이행하도록 촉구합니다. 그의 눈에 예레미야는 성전 주변에서 자주 보는 ‘모든 미친 자와 선지자 노릇을 하는 자들’(예언자 행세하는 미친 자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26). ‘선지자 노릇을 하는 아나돗 사람 예레미야’(27)는 성전을 소란케 하는 자이기에 붙잡아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과 목에 씌우는 쇠고랑’으로 체벌하고 쫓아버려야 했습니다(참조. 20:1-3a). 28절은 스마야가 예레미야를 사이비 예언자로 간주한 근거를 보여주는데, 5절을 거의 문자적으로 인용합니다. 스마야와 같은 구원 예언자들이 볼 때 바벨론의 지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결정으로 받아들이고 이방 땅에 정착해 살라고 권면하는 예레미야는 헛소리를 떠드는 ‘미친놈’에 불과했습니다.

 

(3) 스마야에게 심판을 선고하시는 여호와(29-32)

 

스마야의 기대와 달리 제사장 스바냐는 예레미야에게 호의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예레미야를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한 소란꾼으로 체포하지 않고 (아마도 성전으로 불러) 그에게 스마야의 편지를 읽어줍니다(29). 스마야의 편지를 알게 된 예레미야에게 여호와께서 유배민들에게 전할 메시지를 주십니다(30-31a). 유배민들은 자신들 가운데서 활동하는 스마야와 같은 예언자들의 정체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15). 31b절의 고발은 28:15의 고발과 거의 일치합니다. 스마야가 ‘이 년’ 이내의 구원을 선포한 하나냐와 같은 계열의 예언자였음을 보여줍니다. 32절의 심판은, 스마야의 후손까지 포함합니다. 스마야는 물론 그의 후손 가운데서도 여호와의 구원에 참여할 자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복된 일’은 칠십 년 후의 회복을 약속한 10절의 ‘선한 말’을 받습니다.


거짓을 따른 자와 거짓을 전한 자들이 받을 형벌이 각각 선고되고 있습니다. 흔들어서 흔들렸다고, 흔들린 자가 잘못이라고 변명할 수 없는 때가 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 자신의 말씀을 담아 들려주시겠습니까? 쉽게 믿음의 대상을 내어주지도 말고 바꾸려 둘지도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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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29-01)


바벨론 포로들에게 보낸 예레미야 편지

예레미야 29장 1-14절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자신들이 경험했던 일이나 배움으로 습득한 일을 모든 것으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곤 이것이 자신을 지배하고 변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처럼 잘 변하지 않는 생각이나 의식을 ‘고정관념(固定觀念)’이라고 합니다. 유다 백성들에게도 잘못된 고정관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만 계시다는 고정관념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잘못된 고정관념을 편지를 통해 깨뜨리고 있습니다.

 

 

  • 선지자 예레미야는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편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포로생활이 70년 동안 지속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바벨론에서 빠른 귀환을 전하는 거짓 메시지에 속지 말고, 바벨론에서 번영을 추구하며 살라고 합니다.

 

바벨론 포로를 향한 편지(1-3)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유다 백성의 정체성은 오늘날의 성도들과 닮아있습니다. 주님 오시는 날까지 우리는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 사이에서 영광과 고난이 공존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바벨론으로 끌려간 유다 백성들은 절망 속에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절망적인 생각에 빠진 백성들에게 희망의 지침을 편지로 전합니다.

 

1선지자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이같은 편지를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끌고 간 포로 중 남아 있는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에게 보냈는데 2그 때는 여고니야 왕과 왕후와 궁중 내시들과 유다와 예루살렘의 고관들과 기능공과 토공들이 예루살렘에서 떠난 후라 3유다의 왕 시드기야가 바벨론으로 보내어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에게로 가게 한 사반의 아들 엘라사와 힐기야의 아들 그마랴 편으로 말하되(1-3)

 

유다 백성들이 끌려간 바벨론 땅은 모든 것이 부정한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더욱 슬픈 것은 이제 더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계신 분이기 때문에 먼 바벨론에서 제사를 드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1) 수신자(1)

 

예레미야의 사역 범위가 예루살렘과 유다를 넘어 바벨론으로 확장됩니다. 예레미야는 유다 왕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파견하는 사절 편에 편지를 주어 유배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2) 보낸 때(2)

 

두 가지 사실이 전제됩니다. 첫째, 예루살렘 왕궁에 예레미야를 지지하거나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부르실 때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1:8,19). 여호와께서는 고관들을 통해 예레미야를 지켜주시고 도와주십니다. 둘째, 예레미야는 바벨론 유배민들 가운데 어느 정도 알려진 예언자였습니다. 예레미야가 여호야김이 통치할 때 활발하게 활동했기에 적어도 일부 유배민은 예루살렘에서 그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편지의 수신자는 ‘포로 중 남아 있는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입니다. 사회적·종교적 지도자들로부터 일반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배민이 읽어야 할 편지입니다. 편지의 내용이 전체 유배민과 관련된 것임을 시사해줍니다. 사절이 언제 파견됐는지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24:1의 경우처럼 주전 597년의 첫 번째 유배 후로만 나옵니다. 시드기야 제 4년에는 왕이 직접 사절을 이끌고 바벨론으로 갑니다(참조, 51:59). 사절을 보내는 목적도 달리 언급하지 않습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봉신 시드기야가 연례적으로 보내는 조공 사절일 수도 있고, (27:3의 회합이 정치적이었다면) 모의에 참여한 것을 변명하기 위한 진사 사절일 수도 있습니다.

 

(3) 전달자(3)

 

사반의 아들 엘라사와 힐기야의 아들 그마랴가 편지의 전달자로 소개됩니다. 엘라사는 여기에만 등장합니다. 26:24에서 예레미야를 보호해준 아히감의 아버지 이름도 사반인데, 엘라사와 아히감이 형제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마랴의 아버지 힐기야가 열왕기하 22장에 나오는 제사장 힐기야와 동일 인물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개연성은 충분합니다. 예레미야가 요시야 왕의 통치 아래 개혁정책을 추진했던 세력들과 친밀한 관계에 있었음을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엘라사와 힐기야가 바벨론에 사절로 파견되었다는 사실은 이들이 바벨론에 대하여 우호적이었음을 시사해줍니다. 그렇다면, 유다와 바벨론의 관계 설정 문제에 있어 이들의 정치적 입장은 바벨론의 칠십 년 지배(25:11; 29:10)를 선포한 예레미야의 신학적 입장과 겉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유배지의 삶과 관련한 권면의 말씀(4-9)

성경은 기록된 말씀입니다.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도 편지 형성으로 기록된 말씀입니다. 기록된 말씀이라고 좋아하는 부분만 읽고, 싫어하는 부분을 건너뛰면 안 됩니다. 기록된 모든 말씀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니 모두 읽고 순종해야 합니다.

 

4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5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6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7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8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 중에 있는 선지자들에게와 점쟁이에게 미혹되지 말며 너희가 꾼 꿈도 곧이 듣고 믿지 말라 9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함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4-9)

 

바벨론 제국에 포로로 끌려온 사람들에게 그들이 처한 모든 상황은 오직 심판과 재앙으로만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절망에 빠진 그들에게 현재의 고된 경험이 단순히 재앙만이 아니라 미래의 희망을 위해 계획된 섭리 가운데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 도입부(4)

 

조상들의 뿌리로부터 잘려 먼 이방 땅으로 옮겨진 이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가나안 땅으로의 조속한 귀환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전통 신학에 따르면 이방 신들의 통치 영역에 속하는 유배지에서 뿌리를 내리기 위해 노력하는 일은 차라리 배교 행위에 속했습니다. 이들에게 유배의 장기화는 정치적으로뿐만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너무 늦지 않게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곧 돌아가리라는 소망에 의지해 유배 생활을 견뎌내고 있는 자들에게 유배가 길어질 것이기에 그에 대비하도록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명령합니다. 여호와의 명령은 물론 그렇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2) 유배지에서의 삶(5-7)

 

유배민들은 그곳에 집을 짓고 과수원도 만들고 생활터전을 마련해야 합니다(5). 또 아내를 맞이하여 아들과 딸을 낳고, 그 아들들과 딸들을 장가보내고 시집보내 그들도 아들과 딸을 낳게 해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않게 하여야 합니다(6). 삼 대의 언급은 세 세대에 걸친 바벨론의 통치 기간과 일치합니다. 바벨론의 지배가 끝날 때까지 유배지에 살면서 후손이 번성하게 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유배지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 성읍을 위해 여호와께 기도해야 하는데,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7). 현실적으로 보자면, 바벨론의 평안이 유배민의 생존에 도움이 됩니다. 바벨론이 혼란에 빠지거나 침략을 당하면 유배민이 먼저 피해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예레미야서의 신학에 따르면, 바벨론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것이 곧 여호와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바벨론의 칠십 년 지배를 허락하셨기에 그 기간 동안 바벨론의 평안을 간구해야 합니다.

 

(3) 거짓 예언(8-9)

 

8-9절은 바벨론 유배지에도 많은 예언자가 활동했음을 전제합니다. 이들이 어떤 예언을 선포했는지는 달리 언급하지 않지만,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함이라’(9)는 이들도 하나냐처럼 유배민의 조속한 귀환을 예언했음을 시사해줍니다. 예루살렘과 유배지의 종교적 분위기가 다르지 않았습니다. 구원 예언자들이 값싼 위로의 말로 유배민들을 미혹했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파종, 수확, 집의 건축, 출생과 다산, 성읍의 평안과 같은 일상적인 생활은 종교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평안과 풍족한 삶은 신의 보호와 축복으로 돌려졌고, 이스라엘도 이 점에서는 다르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바벨론에서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축복이 가능한가입니다. 바벨론에는 여호와의 성전이 없기에 그분께 예배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제의적으로 더러운 이방 땅에 살기에 제의적 더러움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성전이 없는데 어떻게 여호와께 나아갈 수 있습니까? 제사를 드릴 수 없는 부정한 땅에 사는데 여호와의 축복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바벨론에서 생활하기 위해서는 바벨론 신들에게 축복을 구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성전도 제사도 없는 부정한 땅에서 어떻게 여호와신앙을 지킬 수 있습니까? 전통 신학의 틀 안에서 사고하는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에게는 조속한 귀환 선포 외의 다른 선택이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가나안을 여호와 종교의 전제조건이자 충분조건으로 생각하는 자들에게 바벨론은 가능한 한 빨리 떠나야 할 곳이었습니다. 이런 자들에 맞서 예레미야는 성전이 없어도, 제의적으로 부정한 이방 땅에서도 여호와를 만날 수 있고 그분의 축복이 가능함을 선포합니다. 요즘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예레미야는 새로운 신학을 제시했습니다.

 

여호와의 최종 목표(10-14)

기도에 깨어 있는 성도만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에 동참할 수 있고, 하나님과 함께 즐거워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권능을 목도하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역사와 개인의 삶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보기 원한다면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기도하는 이들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실 것입니다.

 

10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11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12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13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14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너희들을 만날 것이며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나라들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났던 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0-14)

 

현재의 상황만 보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마음에 안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성경의 말씀을 펼쳐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어떤 계획을 세우고 계시겠습니까?

 

(1) 선한 계획(10-11)

 

바벨론 유배는 한 세대를 넘어 세 세대까지 계속되겠지만, 그 기간은 분명하게 한정되어 있습니다. 바벨론에 허락한 칠십 년의 기간이 차면 여호와께서 이전에 쫓아 보내셨던 모든 곳에서 유배민들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입니다(10,14). 여호와께서 당신 계획에 따라 정한 때가 되면 당신의 ‘선한 말’(은혜로운 약속)을 성취하십니다. 그분께서 세우신 계획은 ‘평안’을 위한 것이지 ‘재앙’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11a). 바벨론 유배가 유례를 찾기 힘든 재앙임은 틀림없지만, 그분 계획의 최종 목표는 아닙니다. 그분의 계획에 따르면 바벨론 유배민은 하나님 백성의 ‘미래와 소망’입니다(11b). 바벨론 유배민이 하나님 백성의 남은 자로 인정을 받습니다(참조, 24:5-7). 가나안에서 중단된 하나님 백성의 역사가 이들의 귀향과 더불어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2) 회복된 관계(12-13)

 

현재의 문맥에서 12-13절은 이방 땅에서도 여호와와 교제가 가능함을 보여줍니다. 물론 교제의 문은 여호와에 의해서 열립니다. 그분의 약속에 의해 전통 신학의 한계가 극복됩니다. ‘너희가 나를 구하면 (나를) 만나리라. 온 마음으로 나를 찾는다면 내가 너희에게 만나지리라.’ 여호와께서는 당신을 찾는 자가 어느 곳에 있든지 그가 온 마음으로 찾는다면 응답해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당신 이름을 두신 여호와에 의해 성전과 제사가 없는 이방 땅에서 그분과 교제를 나누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약속을 믿고 부르짖는 성도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기 원한다면 현재의 일에 충실하되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구하되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기도로 하나님 앞에서 겸비할 줄 아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만나 주시고 그의 삶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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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28-01)


거짓 예언자 하나냐의 최후

예레미야 28장 1-17절


 

선거철이면 많은 후보자들이 자신이 적격자라고 외치고 다닙니다. 그들의 공약을 들어보면, 금방이라도 나라를 살릴 수 있는 적임자 같습니다. 집권하면 나라가 몇 년 내에 선진국이 되고, 통일이 되고, 빈민이 하나도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진짜 나라를 위한 애국자 같은 사람은 통치권자가 되어보면, 그 진실은 들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영적인 부분에도 한 예언자는 망한다고 외치고, 다른 예언자는 망하지 않는다고 외쳤습니다. 이것을 들은 백성들은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모두 자신이 하나님이 보낸 예언자라고 말했습니다. 누가 진짜 예언자이며, 누구의 말이 맞겠습니까? 예언은 시간이 지나면 진실은 들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 선지자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유다와 주변 모든 나라들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항복하라고 예언했습니다. 하지만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반대의 예언을 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냐가 거짓 선지자로 일어나서 모든 백성들 앞에게 거짓 예언을 합니다. 하지만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그의 거짓 예언을 밝히시고, 거짓 예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게 하십니다.

 

거짓 예언을 선포하는 하나냐(1-4)

거짓된 세상에서 진리를 품고 살아가는 삶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성도는 진리를 따라 살아가다가 손해를 보거나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거짓된 이치를 따라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참 예언자 예레미야도 오늘 그런 생활을 만났습니다.

 

1이 해, 유다 왕 시드기야의 즉위한지 오래지 않은 해 곧 사년 오월에 기브온 앗술의 아들 선지자 하나냐가 여호와의 집에서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 앞에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2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여 가라사대 내가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었느니라 3내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이곳에서 바벨론으로 옮겨간 여호와의 집 모든 기구를 두 해가 차기 전에 다시 이곳으로 가져 오게 하겠고 4내가 또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니야와 바벨론으로 간 유다 모든 포로를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니 이는 내가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을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는지라 5선지자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집에 선 제사장들의 앞과 모든 백성 앞에서 선지자 하나냐에게 말할쌔 6선지자 예레미야가 말하되 아멘, 여호와는 이 같이 하옵소서 여호와께서 네 예언대로 이루사 여호와의 집 기구와 모든 포로를 바벨론에서 이곳으로 다시 옮겨오시기를 원하노라 7그러나 너는 이제 내가 네 귀와 모든 백성의 귀에 이르는 이 말을 들으라 10선지자 하나냐가 선지자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취하여 꺾고 11모든 백성 앞에서 말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두 해가 차기 전에 열방의 목에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이 같이 꺾어버리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선지자 예레미야가 자기 길을 가니라(1-11)

 

선지자 예레미야가 전한 예언은 유다 사람들에게는 듣기 거북스러운 내용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비유를 맞추는 거짓스러운 사람들은 자칭 선지자가 되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귀에 달콤한 내용으로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계속해서 유다가 망할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예레미야의 말에 귀를 기울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레미야를 거짓 예언자로 내몰며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1) 예언자 하나냐의 구원 예언(1-4)

 

주변 나라들의 사신들이 예루살렘에서 모임을 가진 해에 예레미야와 하나냐가 대결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다스리기 시작한 지’는 문자적으로는 ‘통치 처음에’로 통치 원년이나 초기를 가리킵니다. 통치 초반이 다시 ‘사 년 다섯째 달’(주전 594년 7/8월)로 구체적으로 제시됩니다. 51:59에 의하면 시드기야 왕은 통치 제 4년에 (달은 나오지 않음) 사절을 이끌고 바벨론으로 올라갑니다. ‘달’의 언급은 매우 이례적인데, 아마도 17절의 ‘그 해 일곱째 달’과 관련된 것 같습니다. 예언자 예레미야의 상대역으로 기브온 앗술의 아들 선지자 하나냐가 소개됩니다. 하나냐는 아마도 예루살렘 성전 소속의 예언자였던 것 같습니다. 사건의 장소로 ‘여호와의 성전’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의지를 대변하는 두 예언자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서로 충돌합니다. 27:16의 경우처럼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이 청중으로 등장합니다. 하나냐 역시 예레미야처럼 사자의 전언 양식(‘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일러 말씀하시기를’)을 사용하며 신탁을 선포합니다(2;참조. 26:16). 예언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사자의 전언 양식은 이들의 선포에 신적 기원(정당성)을 부여해주는 기능을 담당합니다. 하나냐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선포한 말씀은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선포한 말씀과 완전히 충돌합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 왕의 멍에를 메고 그를 섬기는 것만이 살길임을 선포하고(27:12,17), 하나냐는 여호와께서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었다고 선포합니다(2).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과 예루살렘의 남아 있는 기구마저 바벨론으로 옮겨질 것을 선포하고(27:19-22), 하나냐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빼앗아 바벨론으로 옮겨간 성전의 모든 기구가 2년 안에 제자리로 되돌아 올 것을 선포합니다(3). 예레미야는 사로잡혀간 고니야가 유배지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을 것을 선포하고(22:24-30), 하나냐는 ‘여고니야와 바벨론으로 간 유다 모든 포로’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것을 선포합니다(4). 예레미야는 칠십 년(25:11-12) 또는 세 세대(27:7)의 바벨론 지배를 선포하고, 하나냐는 바벨론 왕의 멍에가 2년을 넘지 못할 것을 선포합니다. 주전 597년의 재앙을 경험한 자들에게 예레미야는 더 큰 재앙을 선포하고, 하나냐는 자기 이름(‘여호와께서는 자비로우시다’)에 걸맞게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예레미야와 하나냐가 선포한 예언은 서로 조화될 수 없는 것으로, 누군가 한 사람은 거짓을 예언한 자가 됩니다.

 

(2) 예언자 예레미야의 응수(5-9)

 

예언자 하나냐가 그러했던 것처럼(1) 예레미야도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예언자 하나냐에게 말합니다(5). 예레미야는 내면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반격합니다. 예루살렘과 유다의 멸망은 예레미야에게 결코 좋은 소식일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도 개인적으로는 하나냐의 구원 예언이 성취되어 빼앗긴 성전 기구와 사로잡혀간 동포들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 당연히 더 좋습니다(6절; 참조. 29:10; 33:14). 예레미야도 바라지 않지만, 유다의 멸망은 여호와의 되돌릴 수 없는 결정이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가지고 있는’ 예언자라면 개인 기대를 내려놓고 그분의 결정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냐의 구원 예언에 맞서 예레미야는 역사적 입장에서 심판 예언의 정당성을 주장합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예언 전통을 심판 예언자들에게서 찾습니다. ‘나와 너 이전의 선지자들이 예로부터 많은 땅들과 큰 나라들에 대하여 전쟁과 재앙과 전염병을 예언하였느니라’(8). 역사적으로 볼 때, 예레미야의 심판 선포는 예외적 현상이 아닙니다. 이미 이전의 예언자들이 나라들과 왕국들에 심판을 선포했고, 선포된 예언은 그대로 성취됐습니다. 이스라엘의 예언 역사는 구원 예언자들이 아니라 심판 예언자들의 정당성을 증명해줍니다. 구원 예언자는 선포된 구원 신탁이 실제로 이뤄질 때만 여호와께서 보낸 예언자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9). 예레미야는 아직 하나냐를 거짓 예언자로 정죄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냐가 여호와에 의해 보냄을 받은 예언자로 인정받으려면 먼저 그가 선포한 예언이 성취되어야 합니다.

 

(3) 하나냐의 표적행위와 예레미야의 반응(10-11)

 

바벨론의 지배를 표적 행위로 연출한 예레미야에(27장) 맞서 하나냐도 같은 표적 행위로 구원 예언의 확실성을 과시합니다. 하나냐는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참조, 27:2) 빼앗아 부숴버립니다(10). 예레미야는 목에 멍에를 메고 바벨론 왕을 섬기는 것만이 살길임을 예언하고, 하나냐는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벗겨내 부수고 여호와께서 민족들의 목에서 바벨론의 멍에를 꺾어버리기로 하셨다고 예언합니다(11a). 두 예언자가 언어를 넘어 행위에서도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하나냐가 단지 예레미야를 모독하거나 무시하려고 멍에를 빼앗아 부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대립적 표적행위는 예레미야가 같은 표적 행위로 선포한 심판 예언을 무력화하려는 시도였습니다. 두 예언자의 대결은 배경에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7절에서 예레미야가 ‘모든 백성의 귀’에 말한 것처럼 하나냐도 ‘모든 백성 앞에서’ 말합니다. 1절과 5절에 나오는 ‘제사장들’이 동일하게 탈락합니다. 도발적으로도 보이는 하나냐의 표적 행위에 예레미야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자기의 길을 가니라’(11b). 두 예언자의 대결이 끝을 맺지 못하고 끝납니다. 예레미야의 행동은 하나냐에 대한 무시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냐를 아직 여호와의 예언자로 인정하고 있음을 함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냐가 자신과 다른 신탁을 선포하지만, 그 신탁이 여호와로부터 주어졌을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습니다(참조. 4:10). 예레미야는 하나냐가 대변하는 구원 예언의 진정성을 의심하지만, 확정적인 평가는 보류합니다. 예언자 하나냐와 예언자 예레미야 모두 여호와의 권위에 의존하고 있기에 그분의 결정만이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습니다.

 

거짓 예언자 하나냐(12-17)

거짓 예언자들이 보여 주는 특징은 다른 사람의 주장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다른 사람들과 어떤 소통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오로지 자신만이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계시를 받았다는 주장을 접하면, 우리는 이러한 배타적인 가르침이 사람들을 미혹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야 합니다.

 

12○선지자 하나냐가 선지자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꺾어 버린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이르시기를 13너는 가서 하나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나무 멍에들을 꺾었으나 그 대신 쇠 멍에들을 만들었느니라 14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쇠 멍에로 이 모든 나라의 목에 메워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게 하였으니 그들이 그를 섬기리라 내가 들짐승도 그에게 주었느니라 하라 15선지자 예레미야가 선지자 하나냐에게 이르되 하나냐여 들으라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지 아니하셨거늘 네가 이 백성에게 거짓을 믿게 하는도다 16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너를 지면에서 제하리니 네가 여호와께 패역한 말을 하였음이라 네가 금년에 죽으리라 하셨느니라 하더니 17선지자 하나냐가 그 해 일곱째 달에 죽었더라(12-17)

 

거짓된 세상에서 진실하게 흘리는 우리의 눈물을 아십니다. 거짓된 세상에서 흘리는 우리의 눈물을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국 거짓 평안이 아니라 참 평안을 반드시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1) 예레미야에게 힘한 여호와의 말씀(12-14)

 

예레미야와 하나냐 사이의 팽팽한 대결은 여호와의 개입으로 해결됩니다(12).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을 주어 하나냐가 당신의 의지에 반하여 예언했음을 알려주십니다. 예레미야의 표적 행위에 맞서 그의나무 멍에를 부순 하나냐의 표적 행위가 다시금 여호와의 반격으로 무력화됩니다. ‘네가 나무 멍에들을 꺾었으나 그 대신 쇠 멍에들을 만들었느니라’(13). 바벨론으로부터의 해방을 보여주기 위해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빼앗아 부숴버린 하나냐의 행동이 바벨론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만듭니다. 부서진 나무멍에 대신에 무겁고 부술 수 없는 쇠 멍에가 씌워집니다. 유다를 포함한 모든 민족이 쇠 멍에를 메고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섬겨야 합니다(14a). 여호와께서 민족들뿐만 아니라 들짐승까지도 바벨론 왕에게 넘겨주십니다(14b; 참조. 27:6).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예레미야가 하나냐를 다시 찾아가서 그와의 대결을 마무리 짓습니다.

 

(2) 심판의 선포(15-16)

 

예레미야는 하나냐를 여호와께서 보내지 않으셨음에도 그분의 이름으로 예언해 백성에게 거짓을 믿게 한 거짓 예언자로 고발하고(15) 그에게 멸망의 심판을 선언합니다. ‘내가 너를 지면에서 제하리니 네가 여호와께 패역한 말을 하였음이라 네가 금년에 죽으리라’(16).

 

(3) 심판의 성취(17)

 

예레미야의 심판 선고에 따라 하나냐가 ‘그 해 일곱째 달’ 죽습니다(17). ‘그 해 다섯째 달’에 있었던 예레미야와 하나냐의 대결이 두 달 후에 하나냐의 징벌적 죽음으로 끝납니다. 예레미야가 여호와께서 보내신 참된 예언자임이, 곧 그가 선포한 바벨론 왕의 멍에가 여호와의 의지에 속함이 입증됩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세상의 기준과 가치관으로 말씀을 해석하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기준은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고 만족시키려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리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삶을 추구하겠다는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모함과 간절함이 있어야 거짓된 가르침에서 자기 영혼을 정결하게 지켜 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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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27-02)

 


거짓 예언자들에 대한 경고

예레미야 27장 12-22절


 

여성들이라면 명품 물건 하나쯤은 가지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살 수 없을 때, 모조품이나 가짜 물건을 구입하기도 합니다. 이런 가짜 물건을 ‘짝퉁’이라고 부릅니다. 영적인 부분에서도 짝퉁이 있습니다. 그들은 진짜보다 더 진짜처럼 꾸며서 영적인 세계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예레미야 활동할 당시에도 이런 짝퉁 예언자들이 많았습니다.

 

  •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시드기야 왕과 제사장들 그리고 모든 백성들에게 바벨론에게 항복하는 길만이 살 길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하지만 많은 거짓 예언자들은 신속한 회복을 예언했습니다. 그들의 예언은 여호와의 결정에 반하는 거짓 예언이었습니다. 제사장들과 백성들에게 거짓 선지자들에게 속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시드기야에게 주는 경고(12-15)

아름다운 신앙은 자신의 생각과 다른 메시지가 전해질 때,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 드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자신의 프레임 속에만 갇혀 있으면 성장할 수 없습니다. 성취하는 생각은 문제에 ‘접근’ 프레임이며, 반면에 안주하는 생각은 ‘회피’하는 프레임입니다. 안락한 지대를 벗어나 ‘지도 밖으로 행군’하는 용기 있는 행동은 오직 접근 프레임을 가진 사람들에게서만 가능합니다.

 

12내가 이 모든 말씀대로 유다의 왕 시드기야에게 전하여 이르되 왕과 백성은 바벨론 왕의 멍에를 목에 메고 그와 그의 백성을 섬기소서 그리하면 사시리라 13어찌하여 당신과 당신의 백성이 여호와께서 바벨론의 왕을 섬기지 아니하는 나라에 대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으려 하나이까 14그러므로 당신들은 바벨론의 왕을 섬기게 되지 아니하리라 하는 선지자의 말을 듣지 마소서 그들은 거짓을 예언함이니이다 15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니 내가 너희를 몰아내리니 너희와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멸망하리라(12-15)

 

위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예레미야가 유다 왕 시드기야와 그의 백성에게 주는 말씀은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창조와 역사의 주로 소개하는 4-7절을 제외하면, 에돔과 모압과 암몬과 두로와 시돈의 왕들에게 주는 말씀과 대체로 일치합니다. 8-11절에 사용된 단어와 표현뿐만 아니라 때로는 문장까지도 거의 그대로 12-15절에 다시 등장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후자에서는 예언자들에 대한 고발이 더 심화됐다는 점입니다.

구원 예언자들의 거짓이 두 번 언급되는데, 10a절과 똑같은 14b절 다음에 한 번 더 나옵니다.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니’(15a)는 구원을 선포하는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말아야 할 이유가 같은 표현을 사용해 반복적으로 언급됩니다. 새로운 내용은 없고, 구원 예언자들의 거짓만 한층 강조됩니다. 이들은 여호와께서 보내지 아니 하였는데도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는 자들이기에 이들의 예언은 거짓이고 들어서는 안 됩니다. 상응해서 10절의 경우와 달리 15절은 ‘너희’뿐만 아니라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에게도 멸망을 선포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시드기야에게 바벨론 왕에 항복하고 그 지배를 받는 것만이 유일한 살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모욕적이고 수치스럽다고 할지라도 항복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의 왕으로서 다른 나라의 왕에게 항복한다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자존심을 꺾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유다 백성은 전쟁과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죽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을 전했지만, 그것이 사람의 말로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예레미야 선지자를 대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라고 권고(16-22)

누구의 말을 듣느냐에 따라서 운명이 달라집니다. 거짓 예언자들의 말은 듣지도 따르지도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달콤하고 듣기 좋은 말이라 해도 하나님의 뜻과 다른 말은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반대로 아무리 듣기 싫고 기분 나쁜 말이라 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따라야 합니다.

 

16내가 또 제사장들과 그 모든 백성에게 전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여호와의 성전의 기구를 이제 바벨론에서 속히 돌려오리라고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이는 그들이 거짓을 예언함이니라 하셨나니 17너희는 그들의 말을 듣지 말고 바벨론의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살리라 어찌하여 이 성을 황무지가 되게 하려느냐 18만일 그들이 선지자이고 여호와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이 여호와의 성전에와 유다의 왕의 궁전에와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기구를 바벨론으로 옮겨가지 못하도록 만군의 여호와께 구하여야 할 것이니라 19만군의 여호와께서 기둥들과 큰 대야와 받침들과 이 성에 남아 있는 기구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나니 20이것은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유다의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니야와 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귀인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옮길 때에 가져가지 아니하였던 것이라 21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성전과 유다의 왕의 궁전과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그 기구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22그것들이 바벨론으로 옮겨지고 내가 이것을 돌보는 날까지 거기에 있을 것이니라 그 후에 내가 그것을 올려 와 이 곳에 그것들을 되돌려 두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6-22)

 

거짓 예언자들은 바벨론에 빼앗겼던 성전의 기구들이 다시 돌아오리라고 선포했습니다. 이에 대해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에게 그들의 예언을 듣지도 말고 믿지도 말 것을 경고했습니다. 

 

⑴ 구원을 선포하는 예언자들(16-18)

 

‘제사장들과 그 모든 백성’이 등장하는 16절은 새로운 단락의 시작입니다. 주제의 일치와 일부 표현의 공유를 통해 앞 단락에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16절의 ‘~고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이는 그들이 거짓을 예언함이니라 하셨나니’는 14절의 ‘~하는 선지자의 말을 듣지 마소서 그들은 거짓을 예언함이니이다’와 거의 문자적으로 일치하고, 17a절의 ‘∽을 섬기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12b절의 ‘∽을 섬기소서 그리하면 사시리라’의 문자적 반복입니다. 예언자의 안타까움과 간절함을 담은 ‘어찌하여’로 시작하는 17b절은 마찬가지로 ‘어찌하여’로 시작하는 13절과 내용상 상응합니다.

 

거짓 예언과 바벨론의 지배를 다루지만 ‘바벨론 왕의 멍에’ 대신 ‘여호와의 성전 기구’가 등장합니다. 성전 기구의 일부가 바벨론으로 옮겨졌음을 전제하기에 말씀의 시대적 배경으로 시드기야의 통치 초반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28:1). 주전 597년의 파국 이후 예언자들이 여호와의 성전 기구가 이제 속히 바벨론에서 돌아올 것을 예언했습니다(16). 28:3에서 예언자 하나냐는 여호와께서 ‘이 년 안에 다시 이 곳으로’ 돌려놓으실 것을 선포했습니다. 빼앗긴 성전 기구의 되돌아옴은 바벨론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습니다. 바벨론의 압도적인 군사력 앞에 무릎을 꿇고 겨우 목숨을 건진 자들에게 예언자들의 구원 선포는 분명 위로와 소망을 주는 말씀으로 들렸겠지만, 이는 실체 없는 거짓 약속이었습니다. 구원 예언자들의 거짓을 따른다면 예루살렘 성은 황무지가 될 것입니다(17).

여호와께서 바벨론 왕에게 칠십 년 또는 세 세대의 지배를 허락하셨기에 바벨론 왕을 섬기는 것만이 유일한 살길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가지고 있는’ 참된 예언자라면 값싼 위로로 백성을 현혹하지 말고, ‘여호와의 성전과 유다 왕의 궁전과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기구를 바벨론으로 옮겨가지 못하도록 만군의 여호와께 구하여야 한다’(18). 여호와께서 심판을 결정 하셨기에 남은 유일한 길은 그분 앞에 나아가 중보 기도를 돌릴 수 있었던 것처럼(참조. 출 32:7-14; 민 14:13-20; 신 9:18-29) 그분의 심판 결정을 아는 예언자는 백성을 위해 여호와께 매달려애 합니다.

 

(2) 심판을 선포하는 예레미야(19-22)

 

‘보라 여호와의 성전의 기구를 이제 바벨론에서 속히 돌려오리라’(16)라고 여호와의 임박한 구원을 선포하는 예언자들에 맞서 예레미야는 ‘기둥들과 큰 대야와 받침들과 이 성에 남아 있는 기구’(19)가 바벨론으로 옮겨질 것을 선포합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니야와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귀족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유배할 때(20; 참조. 열왕기하 24:13-18) 가져가지 않은 것마저 빼앗깁니다.

여호와께서 결정하신 예루살렘과 유다의 몫은 구원이 아닌 완전한 멸망이었습니다. 성전 기물의 구체적 언급은 여호와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완전히 떠나셨음을 시사해줍니다. 예레미야 52:7에 따르면 ‘갈대아 사람은 또 여호와의 성전의 두 놋기둥과 받침 들과 여호와의 성전의 놋대야를 깨뜨려 그 놋을 바벨론으로 가져갔다.’ 21절은 19절의 반복으로, 재앙의 정도가 더 강조됩니다. ‘여호와 성전과 유다의 왕의 궁전과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그 기구’가 바벨론으로 옮겨집니다.

 

바벨론의 지배가 한시적인 것처럼 옮겨진 기물이 바벨론에 머무는 기간도 제한적입니다. 여호왂서 찾으실 때까지(‘돌보는 날까지’) 바벨론에 있을 것입니다. 그 후에 여호와께서 기물을 다시 올려와 원래 자리에 돌려놓으실 것입니다. 에스라 1:7-11에 따르면 바사 왕 고레스는 늡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옮겨다가 자기 신전에 두었던 여호와의 성전 그릇을 꺼내 유다 총독 세스바살에게 넘겨주어 예루살렘으로 가져가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축복뿐만 아니라 불순종의 결과에 대해서도 말씀 안에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양심을 찌르며 도전하는 말씀 앞에서 마음을 열고 귀를 닫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자세를 유지할 때만 우링는 거짓된 영적 지도자의 그릇된 가르침을 분별하고 물리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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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27-01)


열방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

예레미야 27장 1-11절


 

선지자는 말씀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하늘의 언어가 불덩이처럼 내면을 뜨겁게 하여 토해 내어놓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사람입니다. 멈추고 싶어도 가야 하고 가고 싶어도 멈추어야 합니다. 언어와 행동, 전 생애를 통해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드러내야 합니다.

 

 

  •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선지자적 행동을 요구하십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로부터 자유를 얻기 예루살렘에 찾아온 열국 왕들에게 예레미야에게 줄과 멍에를 목에 걸고 나가라고 하십니다. 이것을 통해 그들이 느부갓네살에게 모두 항복하고 그를 섬기라고 요구하십니다. 왜 이렇게 하셨겠습니까?

 

도입부(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의 운명도 주관하십니다. 예나 지금이나 모든 역사는 왕들의 합의와 이해관계에 따라서 움직이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어느 한순간도 하나님의 간섭과 주권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사역을 살피겠습니다.

 

1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의 즉위한지 오래지 아니하여서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나 예레미야에게 이르시니라(1)

 

여호야김은 27장의 문맥에 이질적입니다. 3절에 따르면 주변 나라의 사신들이 시드기야를 보러 예루살렘으로 왔고, 12절에 따르면 예레미야가 유다 왕 시드기야에게 경고의 말씀을 전합니다. 문맥에 따르면 여호야김이 아니라 시드기야로 읽어야 합니다.

1절은 ‘예레미야에게’를 제외하면 26:1과 문자적으로 완전히 일치합니다. 필사자의 단순 실수로 돌리기 어렵다면, 26장 1절 전체의 의도적?) 반복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27장에서 25장으로 이어주는 연결점을 찾기는 사실 어렵지 않습니다.

 

에돔과 모압과 암몬 자손과 두로와 시돈은 같은 순서로 25:21-22에도 나오고, 27:7의 세 세대 통치 후에 종살이하는 바벨론의 운명은 25:12-14의 칠십 년 지배 후의 종살이에 일치합니다. 또 ‘멍에’의 표상은 25장의 ‘진노의 술잔’이나 ‘칼’의 표상에 연결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추론이 맞는다면 26장의 원래 도입부는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예레미야에게 임하시니라’였는데,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넷째 해’의 선포를 기록한 25장을 배경으로 읽도록 이끌어주기 위해 26장의 도입부에 의지해서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이 다스리기 시작할 때에’가 첨가됐습니다.

요약하자면, 27장은 시드기야 통치 초반에 있었던 사건을 보고하는 이야기이지만, 25장에 기록된 바벨론의 칠십 년 지배의 구체적 전개 과정으로 읽어야 합니다.

 

표적행위의 명령(2-3)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존재하게 하시고 자신의 뜻대로 땅을 나눠주신 창조주의 권위로 세상 역사에 관여하고 계십니다. 악하든 선하든 존재하는 모든 권력에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유다뿐만 아니라 이방나라들도 주관하신 분입니다. 이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유다뿐 아니라 유다의 주변 나라들에게 경고하십니다.

 

2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줄과 멍에를 만들어 네 목에 얹고 3유다 왕 시드기야를 보러 예루살렘에 온 사신들의 손에도 그것을 붙여 에돔 왕과 모압 왕과 암몬 자손의 왕과 두로 왕과 시돈 왕에게 보내며(2-3)

 

유다의 시드기야 왕 때에 바벨론은 강해졌습니다. 그래서 주변국들인 에돔, 모압, 암몬, 두로, 시돈의 사신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였습니다. 바벨론으로부터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길을 모색하기 위해 시드기야를 만나러 모였습니다.

 

⑴ 표적행위의 내용(2)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모든 열국들에 대한 예언을 하라고 하십니다. 그 예언은 이상한 예언입니다. 해방이 아니라 바벨론에게 항복하라는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이상한 주문을 하십니다. 그것은 줄과 막대기로 멍에를 만들어 목에 걸게 하심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더욱 강력하고 분명하게 전달하셨습니다.

 

⑵ 표적행위의 대상(3)

 

이것은 소가 멍에를 매고 주인에게 시키는 대로 순종하듯이, 앞으로 모든 나라들이 망하게 될 것이며, 바벨론 사람들에게 여러 나라 사람들이 종으로 글려 갈 것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 백성들에게 능력을 주시어 모든 나라를 다스릴 수 있도록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많은 나라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항복하라는 것입니다.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 참으로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당장에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속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 담겨 있습니다.

 

세상의 일들을 바라볼 때, 세상 사람들처럼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루어 가는지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온 세상에 왕이신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표적행위의 해석(4-11)

예나 지금이나 모든 역사는 왕들의 합의와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듯 보임입니다. 실제로는 어느 한 순간도 하나님의 간섭과 주권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4그들에게 명하여 그 주에게 이르게 하기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너희 주에게 이같이 고하라 5나는 내 큰 능과 나의 든 팔로 땅과 그 위에 있는 사람과 짐승들을 만들고 나의 소견에 옳은대로 땅을 사람에게 주었노라 6이제 내가 이 모든 땅을 내 종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주고 또 들짐승들을 그에게 주어서 부리게 하였나니 7열방이 그와 그 아들과 손자를 섬기리라 그의 땅의 기한이 이르면 여러 나라와 큰 왕이 그로 자기를 섬기게 하리라 마는 8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지 아니하는 국민이나 그 목으로 바벨론 왕의 멍에를 메지 아니하는 백성은 내가 그의 손으로 진멸시키기까지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벌하리라 9너희는 너희 선지자나 너희 복술이나 너희 꿈꾸는 자나 너희 술사나 너희 요술객이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바벨론 왕을 섬기지 아니하리라 하여도 듣지 말라 10그들은 너희에게 거짓을 예언하여서 너희로 너희 땅에서 멀리 떠나게 하며 또 나로 너희를 몰아내게 하며 너희를 멸하게 하느니라 11오직 그 목으로 바벨론 왕의 멍에를 메고 그를 섬기는 나라는 내가 그들을 그 땅에 머물러서 밭을 갈며 거기 거하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의 말이니라(4-11)

 

예레미야에게 목에 멍에를 메고 시드기야 왕을 만나려고 온 여러 나라의 사신들에게 가서 모든 나라가 바벨론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그들의 나라들이 바벨론 왕에게 항복하지 않으면(바벨론 와의 멍에를 목에 메지 않으면), 바벨론에 의해서 망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⑴ 표적행위의 해석(4-8)

 

하나님께서는 “나의 소견에 옳은대로 땅을 사람에게 주었노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 세상을 만드시고 자신의 뜻대로 땅을 나눠주신 창조주의 권위로 세상 역사에 주관하고 계십니다. 세상에 모든 권세자들은 하나님께서 힘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금은 바벨론을 높은 자리에 놓으셨지만, 지금 잠간 필요하여 부리는 종일뿐입니다. 그 나라를 흥하게 하실 분도 망하게 하실 분도 여호와입니다. 때가 되면 바벨론도 멸망하고 느부갓네살도 노예로 전락하겠지만, 지금은 바벨론을 사용하여 주의 역사를 이루실 때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역사가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 권력에든 복종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악하든 선하든 존재하는 모든 권력에 하나님의 뜻이 있으며, 그들도 결국에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주의 궁극적인 뜻을 이루는 종으로 사용될 것입니다. 원치 않는 시련이나 부당한 멍에 앞에서 하나님과 자신을 해하는 분노나 체념을 멀리해야 합니다.

 

⑵ 거짓 예언자들에 대한 경고(9-11)

 

이 일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이기에 바벨론의 노예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거짓 선지자의 말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십니다. 거짓 예언자들의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거짓 예언자의 말은 아무리 듣기 좋은 말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망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거짓 예언자들에게 속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추어 잘 분별하시길 바랍니다.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하십니다. 항복하지 않으면 천히 하나님께서 나서서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심판하시겠지만, 바벨론의 멍에를 수용하면 무난한 일상이 이어질 것입니다. 바벨론을 섬기지 말라는 말이 훨씬 더 매력적으로 들리겠지만, 그것을 거짓 예언이며 멸망에 이르게 할 말이니 듣지 말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심각한 위협은 나라를 잃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신앙이 부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들이 자신의 나라, 교회, 그리고 가정의 번영보다 더 앞서야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선지자는 모든 흥함과 망함에 하나님의 때가 있음을, 내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으로 전합니다. 말씀의 내용은 물론 형식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냅니다. 교회는 세상의 방식으로 세상을 구원하려는 모든 시도를 멈추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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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26-01)


사명 때문에 죽음 앞에선 예레미야

예레미야 26장 1-15절


 

맡겨진 임무를 사명(使命)이라고 하고, 죽은 목숨을 사명(死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루고자 했던 예레미야는 이제 사명(死命)에 이 되었습니다. 유다 백성에게 성전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을 경험하는 장소였습니다. 놀랍게도 선지자 예레미야는 그런 성전이 유다의 죄로 말미암아 파괴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하나님께사 성전을 파괴하시는 이유는 무엇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유다 왕 여호야김이 통치하기 시작한 때 예레미야가 성전 틀에 서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을 가감 없이 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메시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순종치 않으니 성전이 세계 모든 민족의 저주거리가 되리라 예언하라고 하셨습니다.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이 예레미야가 죽어 마땅하다 하자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이 메시지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정적인 반응이 나옵니다.

 

예레미야의 성전 설교(1-7)

옛날이나 오늘이나 사람들은 축복과 평안의 말을 듣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축복이나 평안을 전한다 할지라도 모두 임하는 것은 아닙니다. ‘축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것이고, ‘평안’은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언하라고 하였습니다.

 

1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의 즉위 초에 여호와께로서 이 말씀이 임하니라 가라사대 2나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여호와의 집 뜰에 서서 유다 모든 성읍에서 여호와의 집에 와서 경배하는 자에게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게 한 모든 말을 고하되 한 말도 감하지 말라 3그들이 듣고 혹시 각각 그 악한 길에서 떠나리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의 악행으로 인하여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려 하던 뜻을 돌이키리라 4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내 법을 행치 아니하며 5내가 너희에게 보내고 부지런히 보낸 나의 종 선지자들의 말을 이미 듣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가 만일 다시 듣지 아니하면 6내가 이 집을 실로 같이 되게 하고 이 성으로 세계 열방의 저줏거리가 되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7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집에서 이 말을 하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듣더라(1-7)

 

예레미야 26장은 예레미야 7장의 ‘성전 설교’를 배경으로 합니다. 예레미야 7장의 성전 설교의 내용을 보여준다면, 26장은 그 설교에 대한 반응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1) 예레미야의 성전 설교(1-3)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말씀을 전하라는 시기는 여호야김(주전 609-598년)의 통치 초기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모든 예배자에게 열려 있는 공간인 성전 뜰에 서서 설교하되, 그들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그대로 가감 없이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듣기 좋은 말이나 원하는 말을 끼어 넣지 말고, 반대로 환영하지 않는 말은 빼지 말고 그대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예레미야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는 이 사명 때문에 많은 고난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심판을 내리겠다고 하시지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자기 백성을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판을 피하여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자를 보내신 시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으로 떠나 잘못된 생활하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으로 돌아오도록 권고하신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성전 뜰에 서서 예배하러 오는 백성들에게 한 마디도 빠짐없이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오도록 다양한 방법으로 시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도 율법도 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전달하는 수많은 일꾼들을 보내셨습니다. 좋은 이야기로 달래보기도 하였고, 싫은 이야기로 회개토록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듣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않았습니다.

 

이제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전하게 하셨습니다. 예레미야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유다 백성이 악한 길에서 돌이켜서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무너뜨리시고 실로(Shiloh)같이 되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자랑거리였던 곳을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재앙을 내리시어 황무지로 만드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실로(Shiloh)’는 사무엘상 3-4장에 나온 내용입니다. 예루살렘에 성전이 세워지기 전 실로에 성막이 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사장을 비롯한 많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자 하나님은 실로의 성막을 떠나셨고, 실로는 B.C.1050년경에 블레셋에 의해 폐허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고는 에베소 교회에도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요한계시록 2:5)고 경고하셨습니다.

 

듣기 싫은 말씀도 잘 들어야 합니다. 유다 백성은 예레미야의 말을 듣고 기분 상할 것이 아니라 정신 차리고 회개개해야 했습니다. 잘못을 지적당할 때, 누구나 힘들긴 하지만 그것을 통해 자신을 세우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들이 되어 집니다. 경고와 책망의 말씀은 외면하고 위로와 소망을 주는 말씀만 좋아하지 않습니까?

 

전체 일곱 절 가운데 실체로 성전에서 선포한 말쓰은 4-6절의 세 절에 불과하고, 나머지 네 절은 선포의 배경과 관련한 언급입니다. 선포의 배경이 메시지만큼이나 중요했음을 시사한다. 먼저 사건의 시점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언급됩니다.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이 다스리기 시작한 때에’ 여호와로부터 말씀이 주어집니다(1).

 

여호야김 왕은 주전 608년에서 598년까지 십 일 년을 통치하기에 아마도 주전 605년을 전후해서 말씀이 주어지지 않았을까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25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주전 605년은 느부갓네살이 지휘하는 바벨론 군대가 유브라데 상류에 위치한 갈그미스에서 애굽 왕 느고의 군대를 대파한(46:2), 즉 시리아와 가나안의 주도권이 애굽에서 바벨론으로 옮겨진 해였습니다.

유다 왕 여호야김은 애굽 왕 느고의 선택에 따라 왕위에 오른 그의 봉신이었기에, 애굽의 패배는 유다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적어도 주전 605년을 기점으로 바벨론이 앗수르의 후계자임이 분명해지고, 애굽의 봉신국인 유다는 주군을 바꿔야 하는 정치적 위기에 직면합니다. 근동의 정치 지형도가 크게 뒤흔들리며 새로이 자리를 잡아가는 때에 여호와께서 당신 백성의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십니다.

요시야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외세에 의한 왕위의 강제적 교체로 혼란에 빠지기는 했지만 유다에게는 멸망을 피할 수 있는 기회가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땅의 역사와 민족들의 운명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결정하시기에 반전도 가능합니다. 이어서 선포의 장소가 언급됩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성전 뜰에 서서, 여호와의 성전에 예배하러 오는 유다 모든 성읍 (주민들)’에게 여호와의 명령을 전해야 합니다(2). 성전 뜰은 예루살렘 성에 여호와의 성전이 있기에 구원이 보장된다고 믿는 자들에게 성전과 성의 멸망을 선포하기에 가장 극적인 장소였다. 또 ‘유다 모든 성읍 (주민들)’을 한정하는 ‘여호와의 성전에 와서 예배하는’도 의도적인 표현으로 보입니다. 예배하러 성전을 찾아온 자들에게 성전 파괴의 선포는 충격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예배하러 성전에 오는 자들이라면 여호와께서 보내신 예언자의 말에 순종해야 함도 시사해 줍니다. 구원은 성전 또는 성전 예배(제사)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예언자들을 통해 당신의 의지를 전달하시는 여호와께서 결정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예레미야를 보내 당신 의지를 전달하게 하시는 동기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여호와께서는 당신 백성에 대한 희망의 끈을 완전히 놓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언제라도 당신 결정을 되돌리 실 준비가 돼 있으셨습니다. 저들이 당신의 종 예언자들의 말을 줄곧 듣지 않았지만, 단념하지 않으십니다. ‘혹시’ 이번에는 예레미야의 말을 들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하고도 절망적인 기대 속에 다시 경고의 말을 전하게 하십니다. 그분은 선포된 재앙을 집행하기보다는 거두길 원하십니다. 여호와의 ‘혹시’는 예루살렘 성전과 성의 심판이 어쩔 수 없는 마지막 선택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능력이 없어서나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어떻게 해서든 구해주고 싶으셨지만, 유다 백성은 끝까지 여호와의 도움을 거절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여호와의 ‘혹시’는 유다 백성의 완악함을 고발하고 멸망과 유배의 책임이 전적으로 저들에게 있음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여호와의 ‘혹시’는 36:3과 에스겔 12:3에 두 번 더 나옵니다.

 

조건문과 주문으로 구성된(도움말 참조) 4-6절의 메시지는 내용상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다가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고 그분의 율법대로 걷지 않는다면(4), 그분께서 보내신 예언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5), 예루살렘 성전은 실로처럼 되고(참조 7:12-15) 예루살렘은 세상 모든 민족의 저주거리가 될 것입니다(6). ‘내가 너희 앞에 둔 율법’은 특히 신명기 율법을 가리킨다(참조, 신명기 11:32; 열왕기상 9:6). 신명기 신학에 따르면 율법의 준수는 구원과 축복으로, 율법의 무시는 심판과 저주로 응답을 받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성이 귀하기는 하지만, 불순종에 면죄부를 줄 정도의 절대적 존재는 아닙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행하지 않는다면 성전은 하나의 건물에 불과할 뿐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당신 율법을 바로 세우기 위해 예언자들을 거듭 보내셨지만(참조 신명기 18:15-18), 유다는 예언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참조 7:25-26;25:4). 유다의 불순종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광야를 떠나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부터 계속된, 이제는 거의 본성이 되어버린 죄악입니다. 예언자들을 지칭하는 ‘나의 종(들)’은 예언이 자신을 보내신 주인의 일을 하는 자들임을 보여 줍니다. 곧 종/예언자를 대적하는 행위는 종/예언자를 보내신 주인/여호와께 맞서는 것과 같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실로 성소의 멸망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합니다. 사사 시대 말기에 이스라엘의 중앙 성소 역할을 담당하다가 멸망에 떨어진 실로 성소의 운명(사무엘상 1-4장)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마찬가지로 심판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실로 성소의 몰락이 보여주듯이 하나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성소의 존재가 구원을 보장해주지는 않습니다. 성소가 제구실을 못하고 악을 조장할 경우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성소라 할지라도 멸망에 넘기십니다.

 

예레미야의 설교에 대한 반응들(8-15)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죄를 슬퍼하고 행위를 고치는 자에게는 징계를 거두시고 당신과 새로운 관계를 누리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지 못한 언어 습관과 행위 들을 지적하실 때 지체 없이 죄악을 버릴 수 있도록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새로운 행동 방식을 배우고 익혀 성도다운 성숙을 경험하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 예레미야를 통해서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을 들은 백성과 종교 지도자들은 반응이 나옵니다.

 

8예레미야가 여호와께서 명하신 말씀을 모든 백성에게 고하기를 마치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그를 붙잡고 이르되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9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고 예언하여 이르기를 이 집이 실로 같이 되겠고 이 성이 황무하여 거민이 없으리라 하느뇨 하며 그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집에서 예레미야에게로 모여드니라 10유다 방백들이 이 일을 듣고 왕궁에서 여호와의 집으로 올라와서 여호와의 집 새문 어귀에 앉으매 11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방백들과 모든 백성에게 말하여 가로되 이 사람은 죽음이 합당하니 너희 귀로 들음 같이 이 성을 쳐서 예언하였느니라 12예레미야가 모든 방백과 백성에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사 너희의 들은바 모든 말로 이 집과 이 성을 쳐서 예언하게 하셨느니라 13그런즉 너희는 너희 길과 행위를 고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고하신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시리라 14보라 나는 너희 손에 있으니 너희 소견에 선한대로, 옳은대로 하려니와 15너희는 분명히 알라 너희가 나를 죽이면 정녕히 무죄한 피로 너희 몸과 이 성과 이 성 거민에게로 돌아가게 하리라 이는 여호와께서 진실로 나를 보내사 이 모든 말을 너희 귀에 이르게 하셨음이니라(8-15)

 

예레미야를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기는커녕 예레미야를 붙잡고 죽이려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회개하고 돌아오면 재앙을 내리시겠다는 뜻을 거두겠다는 약속은 듣지도 않았습니다. 단순히 예루살렘과 성전에 대한 멸망을 선포하는 것만 부각시켜 예레미야 선지자를 고소했습니다.

 

⑴ 예레미야의 대적(8-9)

 

여호와의 ‘혹시’가 ‘역시’가 됩니다. 여호와의 성전 뜰에서 행한 예레미야의 선포는 적대적인 반발만 불러일으킵니다. 예레미야의 말을 들은 제사장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예레미야를 붙잡고 위협한다. 이들은 예레미야의 선포에서 ‘네가 반드시 죽어야 할’ 중한 죄를 봅니다. 이들에게 문제가 된 것은 예레미야가 선포한 예언의 내용입니다(9).

성전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여호와의 성전과 예루살렘의 멸망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선포될 수 없는 예언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분 성전과 그분께서 택하신 도성의 몰락을 선포하는 행위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훼방하는 불경죄로 반드시 죽음에 붙여야 했습니다(참조, 레위기 24:15-16). 이들에게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한 여호와께로부터 보냄을 받지 않은 거짓 예언자였습니다.

 

⑵ 예레미야를 고발하는 제사장들과 예언자들(10-11)

 

성전에서 발생한 소란을 듣고 고관들이 왕궁에서 성전으로 올라와 ‘여호와의 성전 새 대문 입구’에 앉고, 재판정이 꾸려집니다. 왕의 신하들 주관 아래 예레미야의 재판이 열립니다. 고관들이 재판장으로,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이 고발자로 등장합니다.

8절에서 제사장들과 예언자들과 함께했던 백성은 증인과 방청인의 역할을 맡습니다.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은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성을 거슬러 예언했기에 죽어야 마땅하다고 고관들과 백성에게 그를 고발합니다.

 

⑶ 예레미야의 자기변호(12-15)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의 고발에 뒤이어 예레미야가 자신을 변호한다. 예레미야는 고발의 내용을 인정하고(12), 성전 뜰에서 행한 메시지를 다시금 선포합니다(13). 예레미야는 자신의 목숨이 백성의 손에 달린 현재의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들에게 책임있게 판단할 것을 요구합니다(14-15). 그는 여호와의 예언자를 죽여 여호와로부터 징계를 받지 않도록 신중할 것을 모든 고관과 백성에게 경고합니다. 여호와께서 현존하시는 예루살렘 성전과 성의 멸망을 선언하는 예언자는 여호와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일 수 없다고 고발하고, 예레미야는 자신은 바로 그 일을 위해 여호와로부터 보냄을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곳이기 때문에 무너지고 그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황무지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악한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전반적인 내용과 교훈을 살펴보기 보다는, 문제성 있어 보이는 부분만 부각시켜서 그것을 문제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실수를 지적한 선지자들을 눈 속에 가시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들을 제거하기 위해 말씀을 외곡하고 오용했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구덩이를 파고 들어갔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분입니다. 예레미야가 전한 심판과 재앙의 경고를 통해 유다 백성이 악한 길에서 돌이키길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거듭 말씀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께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자기의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의 목숨을 걱정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고 하셨습니다.

 

예레미야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두려워 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전한 말은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이 그의 사명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경고와 책망을 거부하지 않으며 기쁨으로 받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회개는 성도들에게서 볼 수 있는 삶의 방식입니다. 성도는 회개를 통해서만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죄가 드러날 때 우리의 마땅한 태도는 겸손히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자복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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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25-03)

 


젊은 사자 같이 진노하는 여호와

예레미야 25장 30-38절


 

살면서 제일 안타까운 것은뒤늦게 후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다에 이미 경고를 하셨습니다. 순종하면 복이요 거역하면 멸망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허투루듣고 살았습니다. 그들에게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고 후회했을 땐 이미 늦었습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뒤늦은 후회를 막을 수 있는 주의사항을 알려 줍니다.

 

  • 민족들의 심판이라는 주제로는 앞 단락의 연속이지만, 표현과 관심 분야에서는 일부 차이를 보입니다. 진노의 잔의 표상이 더는 등장하지 않고, 목자와 양의 표상이 주로 사용됩니다. 또 심판의 대상보다 심판의 철저함에 초점이 맞추어집니다.

 

온 땅의 재앙(30-33)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 무섭게 진노하시며 철저하게 심판하십니다. 악한 사람을 심판하시되, 악한 지도자들에게 더욱 무섭게 책임을 물으십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거부하며 원하는 대로 살았던 사람들은 죽어서도 묻어 줄 사람이 없어 시체가 거름덩이처럼 땅 위에 뒹굴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시체가 매장되지 못하고 방치되는 것을 가장 수치스러운 일 중 하나로 여겼습니다.

 

30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 모든 말로 예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높은 데서 포효하시고 그의 거룩한 처소에서 소리를 내시며 그의 초장을 향하여 크게 부르시고 세상 모든 주민에 대하여 포도 밟는 자 같이 흥겹게 노래하시리라 31요란한 소리가 땅 끝까지 이름은 여호와께서 뭇 민족과 다투시며 모든 육체를 심판하시며 악인을 칼에 내어 주셨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2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재앙이 나서 나라에서 나라에 미칠 것이며 큰 바람이 땅 끝에서 일어날 것이라 33그 날에 여호와에게 죽임을 당한 자가 땅 이 끝에서 땅 저 끝에 미칠 것이나 그들을 위하여 애곡하는 자도 없고 시신을 거두어 주는 자도 없고 매장하여 주는 자도 없으리니 그들은 지면에서 분토가 되리로다(30-33)

 

불순종은 이미 그 안에 사망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삶은 결국 인간에게 한시적 쾌락과 낙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말로는 장차 도살당할 짐승의 처지와 같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려면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1) 모호하시는 여호와(30-31)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성’ 예루살렘에서 시작한 재앙이 ‘세상의 모든 주민’에게로 확대되는 것처럼(29), 여기서도 ‘그의 초장’과 ‘세상 모든 주민’이 다 여호와의 심판에 넘겨집니다. 여호와께서 독립인칭대명사 ‘너’를 사용해 민족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선포할 사명이 바로 예레미야에게 맡겨졌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30절 전반절은 38a절과 함께 전체 단락을 포효하는 사자의 음성으로 들려줍니다. 쉽을 끝내고 굴을 나서는 사자가 포효하듯이 여호와께서 당신 처소로부터 민족들을 향해 큰 소리로 고함을 치십니다. ‘높은 데’(참조. 17:12; 31:12; 51:53)와 ‘그의 거룩한 처소’는 그 자체로는 하늘의 성전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도 가리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도 심판의 대상에 포함되기에(18,29) 하늘의 성전이 문맥에 더 일치합니다. ‘그의 초장’은 예루살렘/시온(참조, 삼하 15:25)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한편으로는 29절의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성’에, 다른 한편으로는 36절의 ‘그들의 초장’에 연결됩니다. 수확한 포도를 술 틀에 넣고 발로 밟아 포도즙을 짜내는 일은 축제와 잔치에서 빠질 수 없는 포도주를 만드는 작업이기에 일차적으로는 기쁨과 즐거움을 상징하지만, 본문에서처럼 포도를 밟아 포도즙을 짜낼 때 붉은 포도즙이 마치 검붉은 핏자국처럼 온몸에 얼룩지기에 때로는 전쟁과 심판의 표상이 되기도 합니다(참조. 사63:1-6).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된다. 포도를 밟을 때 포도즙이 옷에 튀어 온통 붉게 물들 듯이 여호와께서 그렇게 민족들을 짓밟으십니다.

 

(2) 나라들에 임하는 재앙(32)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주민을 거슬러 외치시기에 온 땅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립니다. 31a절은 민족들의 심판을 사법적 관점에서 기술합니다. ‘다투시며’는 ‘법정에서 시시비비를 가리다’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을 불러 옳고 그름을 따지신(2:9)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불러 소송하십니다. ‘모든 육체의 하나님’(32:27)께서 ‘모든 육체’를 ‘악인’으로 판결하시고 칼에 넘기십니다. 뭇 민족과 모든 육체와 악인은 동격입니다. ‘육체’는 인간의 덧없음과 사멸성을 내포한 표현입니다. 재판관이신 여호와 앞에 민족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악인’은 하나님 심판의 정당성을 시사합니다. 민족들이 악인으로 판결 받았기에 멸망의 형벌에 넘겨집니다. 32절 서두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는 다시금 온 땅의 심판을 집행하시는 분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이심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한 재앙(29)이 민족에서 민족으로 퍼져 나갑니다. 모든 민족이 들불처럼 번지는 전쟁/칼의 재앙에 사로잡힙니다. ‘큰 바람’은 거센 폭풍으로 파괴적 전쟁을, ‘땅 끝’은 땅의 가장 먼 지역으로, 두려움과 사나움과 낯섦을 함축합니다.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엄청난 전쟁의 광풍이 일어나 모든 민족을 파괴해버립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내리실 재앙은 전면적이고 파멸적입니다.

 

(3) 죽음뿐인 세상(33)

 

땅이 끝에서 땅 저 끝까지 여호와께 죽임을 당한 자들이 널려 있는데도, 그들을 위하여 애도하는 사람이 없고 시신을 거두어 장사 지낼 사람도 없어 땅바닥에 뒹굴다 거름이 됩니다. ‘세상 모든 주민’(29,30)이 죽음을 피하지 못합니다. 살아남은 자가 없기에 죽은 자들이 거름처럼 그대로 버려집니다. 33b절은 예루살렘과 유다에 임할 재앙을 선포하는 말씀에도 등장합니다(참조. 8:2; 9:22; 16:4). 하나님 백성과 민족들이 동일한 운명에 떨어집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한 유다가 이방 민족과 다르지 않음을 시사합니다(참조.9:25-26).

 

목자들의 멸망(34-38)

구하며 살았던 사람들은 거름덩이처럼 될 것입니다.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살았던 지도자들은 깨진 항아리처럼 될 것입니다. 목장의 풍요로움과 황폐함은 결국 그 목장을 책임진 지도자의 경건에 달렸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복을 받고 거역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공동체의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그들이 바믿음과 경건함으로 공동체를 이끌어 가도록 기도합시다.

 

34너희 목자들아 외쳐 애곡하라 너희 양 떼의 인도자들아 잿더미에서 뒹굴라 이는 너희가 도살 당할 날과 흩음을 당할 기한이 찼음인즉 너희가 귀한 그릇이 떨어짐 같이 될 것이라 35목자들은 도망할 수 없겠고 양 떼의 인도자들은 도주할 수 없으리로다 36목자들이 부르짖는 소리와 양 떼의 인도자들이 애곡하는 소리여 여호와가 그들의 초장을 황폐하게 함이로다 37평화로운 목장들이 여호와의 진노하시는 열기 앞에서 적막하게 되리라 38그가 젊은 사자 같이 그 굴에서 나오셨으니 그 호통치시는 분의 분노와 그의 극렬한 진노로 말미암아 그들의 땅이 폐허가 되리로다 하시니라(34-38)

 

목자들에게 주는 심판의 말씀입니다. 34절은 목자들을 이인칭 복수 ‘너희’로, 35-38절은 그냥 ‘목자들’ 또는 삼인칭 ‘그들’로(36,38) 칭합니다. 전자는 목자들에게 직접 심판을 선포하고, 후자는 이들의 절망적 형편과 그 배경을 알려줍니다. 여호와는 일관하여 삼인칭으로 등장합니다.

 

(1) 죽음에 넘겨지는 목자들(34-35)

 

예레미야가 화자로 선포하는 말입니다. 34a절은 세 개의 명령을 사용해 목자들의 절망적 처지를 극적으로 표현합니다. 예언자는 여호와께서 내리시는 칼의 재앙에 넘겨진 세상 모든 나라의 왕들에게 통곡하고 울부짖으며 재에 뒹굴라고 명령합니다. ‘외쳐 애곡하라’(‘통곡하고 부르짖으라’)는 애도 행위의 표현으로, 47:2에서는 블레셋의 멸망, 48:20,31에서는 모압의 멸망, 49:3에서는 암몬의 멸망과 관련해 사용됩니다. ‘뒹굴라’도 죽은 자를 위한 애도 의식에 속하는 행위로 다른 곳에서는 ‘재’와 함께 나옵니다(참조. 렘 6:26; 겔 27:30; 미 1:10). 죽은 자를 위한 애도 의식의 명령은 목자들이 다스리는 나라들의 멸망이 확정됐음을 전제하는데, 34b절은 이를 명시적으로 언급합니다. ‘이는 너희가 도살 당할 날과 흩음을 당할 기한이 찼음인즉 너희가 귀한 그릇이 떨어짐 같이될 것이라.’ 기한이 다 찼고 멸망의 징벌이 시작되기에 죽음을 애도하는 것 외에 달리 할 일이 없습니다. ‘너희가 도살 당할 날’에서 풍자적 함의를 읽어내는 것도 가능합니다. 원래 ‘양과 같은 짐승을 잡다’를 의미하는 동사 ‘도살하다’가 ‘양 떼의 인도자들’인 ‘목자들’에게 적용됩니다. 도살당하는 양의 운명이 바로 양을 먹이는 목자들의 운명이다. 멸망은 회복이 불가능하게 철저하게 집행됩니다. 귀중한 그릇일지라도 한번 떨어져 깨지면 버려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재앙에 넘겨진 목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참조. 19:11; 13:7,10). 다시 통치자의 지위를 회복하지 못하고 완전히 사라집니다. 여호와의 칼은 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전혀 미래를 기대할 수 없게 철저하게 집행됩니다. 전쟁에서 패했을 때 왕들과 귀족들은 도망해 목숨을 구하는 경우가 없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그런 행운이 허락되지 않습니다(35). 처음 두 절이 목자들에게 초점을 맞춰 멸망을 선포한다면, 다음 두 절은 시선을 목장으로 돌립니다. 36a절은 34a절의 청각과 관련한 처음 두 동사의 순서를 바꿔 명사로 사용합니다. 앞에서 목자들과 양 떼의 인도자들에게 애곡하고 부르짖으라고 명령한 예언자가 여기서는 이들이 부르짖고 애곡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전자에서는 ‘너희가 도살 당할 날과 흩음을 당할 기한이 찼기’ 때문이고, 후자에서는 ‘여호와가 그들의 초장을 황폐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초장을 황폐하게 하는 심판이 시작됐기에 예언자는 목자들이 부르짖는 소리와 양 떼 인도자들이 애곡 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양 떼가 꼴을 먹고 물을 마시는 초장을 여호와께서 보내신 칼이 황폐하게 하지만, 목자들은 부르짖고 애곡할 뿐 속수무책입니다.

 

(2) 폐허가 되는 목장(36-37)

 

37절은 내용상 36b절의 반복인데, 심판의 철저성을 이중적으로 강화합니다. 먼저 목장을 황폐하게 하는 주체를 ‘여호와의 진노하시는 열기’로 표현합니다. 분노로 열이 나신 여호와께서 목장을 폐허로 만드십니다. 다음은 심판 이전의 모습과 심판 이후의 모습을 대비합니다. ‘평화로운 목장들’이 황무지가 됩니다. 진노의 열기가 모든 것을 불살라버립니다. ‘평화로운 목장들’은 적의 침략을 당한 적이 없는 목장들(나라들)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양 떼가 목장에서 누리는 평화는 일시적인 평화일 뿐입니다. 진노하신 여호와의 개입으로 목장들이 황폐해진다.

 

(3) 여호와의 분노와 진노(38)

 

여호와를 사자에 비유한 38a절은 표상에서 30a절에 연결됩니다. 높은 곳에 있는 당신 처소에서 사자처럼 포효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당신 처소를 떠나십니다. 심판이 시작됐기에 목자들과 목장들이 여호와의 타오르는 진노를 피해 살아남을 길은 없습니다. 후반절은 내용상 37절과 일치합니다. ‘그 호통치시는 분의 분노와그의 극렬한 진노로 말미암아’는 대략 ‘압제자의 열기와 그분 분노의 열기로 말미암아’로 옮길 수 있습니다. ‘압제자의 열기’를 덧붙여 여호와의 진노의 정도를 한층 더 높입니다. 여호와의 끓어오르는 분노는 목자들의 땅이 완전히 폐허가 되기까지 가라앉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유다와 열방을 향해 심판의 칼을 빼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들은 종국에 파멸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아무도 피할 수 없습니다. 심판이 닥쳤을때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이 복이며 불순종함이 멸망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돌이킬 수 없는 파멸로 후회하는 인생이 아니라, 매 순간 하나님의 말씀과 동행하는 인생을 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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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25-02)

 


온 세상에 전해지는 여호와 진노의 잔

예레미야 25장 15-29절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라고 칭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과 나라의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왕으로서 세상의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나라들은 모두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을 수 없는 방법이 있습니까?

 

  • 불순종한 예루살렘과 유다를 바벨론의 손에 넘겨 심판하기로 하신 하나님께서 민족들에게도 같은 운명을 선언하십니다. 민족들의 운명 또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결정하시고 경영하십니다. 땅 위의 모든 역사는 여호와의 의지가 구현되는 무대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의지(15-17)

 

하나님께서는 자기 양 떼를 사랑하는 목자장이십니다. 양 떼를 볼보지 않는 악한 목자를 폐하시고 선한 목자를 세우십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고 보살펴 주십니다. 당신은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라 가고 있습니까?

 

15○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진노의 술잔을 받아가지고 내가 너를 보내는 바 그 모든 나라로 하여금 마시게 하라 16그들이 마시고 비틀거리며 미친 듯이 행동하리니 이는 내가 그들 중에 칼을 보냈기 때문이니라 하시기로 17내가 여호와의 손에서 그 잔을 받아서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신 바 그 모든 나라로 마시게 하되(15-17)

 

진노의 술잔이 선지자에게 전달됩니다. 한때 이스라엘을 지켜주시던 강한 손이었습니다. 애굽에서 빼어 가나안 땅에 옳겨놓으신 자비의 손이었습니다. 불의한 세상을 심판하시던 공의의 잔이었습니다. 그 진노의 잔이 이제 이스라엘을 향해 부어지도록 선지자의 손에 넘겨졌습니다.

 

(1) 하나님의 명령(15-16)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새로운 역할을 맡기십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께서 내리신 진노의 술잔을 받아 그분이 보내시는 모든 민족에게 가서 그 잔을 마시게 해야 합니다(15). 아닥사스다 왕의 술 관원 느헤미야처럼(느 1:11)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술잔을 맡은 자로 임명을 받습니다. 물론 예레미야의 손에 들린 술잔은 민족들이 마셔야 할 술잔입니다. 예레미야의 사명이 예루살렘과 유다를 넘어 민족들에게로 확장됩니다. 1:4-10에 기록된 그의 소명 기사가 보여주듯이, 예레미야는 태에서 나오기 전부터 민족들의 예언자로 구별을 받았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에게 민족들과 왕국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하는 사명을 위임하셨습니다(1:10). 예언자로 부름을 받을 때 시사됐던 세계사적 사명이 이제 그의 주된 과업으로 맡겨집니다. ‘내가 너를 보내는 바 그 모든 나라’도 예레미야의 소명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언자로 처음 부름을 받았을 때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1:6)하고 완곡하게 거절하는 예레미야에게 여호와께서는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1:7)라며 단호하게 당신의 의지를 강제하셨습니다.

 

(2) 예언자의 명령 이행(17)

 

이제 여호와께서 예레미야를 민족들에게로 보내시고, 예레미야는 그대로 순종합니다. ‘내가 여호와의 손에서 그 잔을 받아서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신 바 그 모든 나라로 마시게’ 했습니다(17). 단어와 표현에 있어 15절을 거의 문자적으로 반복합니다.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명령을 철저하게 이행했음을 시사해줍니다. 여호와의 명령과 예언자의 명령 이행 사이에 놓인 16절은 여호와께서 예언자를 보내 민족들로 술을 마시게 하는 의도를 보여줍니다. 민족들은 술을 마시고 칼로 말미암아 비틀거리며 미치게 될 것입니다. 민족들이 마셔야 할 포도주 잔은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축제의 잔이 아니라, 멸망의 잔입니다.

 

진노의 잔을 마셔야 할 민족들(18-26)

심판의 말씀은 유다를 시작으로 모든 민족과 나라를 향합니다. 하나님은 진노의 포도주를 모든 나라가 마시게 하십니다. 모든 민족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모범이어야 할 유다가 똑같이 우상을 섬기고 죄를 범했기에 먼저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당시 가장 강력한 나라 중 하나였던 애굽은 물론 주변의 모든 나라와 민족들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유다를 심판하시기 위해 사용하신 바벨론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18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과 그 왕들과 그 고관들로 마시게 하였더니 그들이 멸망과 놀램과 비웃음과 저주를 당함이 오늘과 같으니라 19또 애굽의 왕 바로와 그의 신하들과 그의 고관들과 그의 모든 백성과 20모든 섞여 사는 민족들과 우스 땅의 모든 왕과 블레셋 사람의 땅 모든 왕과 아스글론과 가사와 에그론과 아스돗의 나머지 사람들과 21에돔과 모압과 암몬 자손과 22두로의 모든 왕과 시돈의 모든 왕과 바다 건너쪽 섬의 왕들과 23드단과 데마와 부스와 살쩍을 깎은 모든 자와 24아라비아의 모든 왕과 광야에서 섞여 사는 민족들의 모든 왕과 25시므리의 모든 왕과 엘람의 모든 왕과 메대의 모든 왕과 26북쪽 원근의 모든 왕과 지면에 있는 세상의 모든 나라로 마시게 하니라 세삭 왕은 그 후에 마시리라(18-26)

 

진노의 잔을 마셔야 할 민족들과 지파들의 이름이 언급됩니다. 첫머리를 차지한 예루살렘과 유다를 제외하고, 민족들의 목록은 애굽으로 시작해서 세삭(바벨론)으로 끝납니다. 어떤 기준에 따라 순서가 정해졌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처음과 마지막에 놓인 애굽과 세삭은 유다의 정치적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친 나라들입니다.

 

(1) 예루살렘과 유다(18)

 

블레셋 남쪽에 있는 애굽과 엘람과 메대 동쪽에 있는 세삭을 전체의 틀로 간주한다면 대략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까운 곳에서 먼 지역으로 옮겨갑니다. 진노의 잔을 마셔야 할 대상이 어떤 기준에 따라 선정됐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애굽에서 엘람과 메대까지의 지역은 이스라엘에게 알려진 고대 근동의 전 지역으로 바벨론 제국의 직간접적 영향 아래 있었습니다. ‘지면에 있는 세상의 모든 나라’(26)가 여호와께서 내리시는 진노의 잔을 마셔야 합니다. 이들이 진노의 잔을 마시고 쓰러져야 하는 이유는 달리 언급되지 않고, 이들의 멸망 자체에만 관심을 집중합니다. 심판의 대상으로 민족과 부족과 지역의 이름뿐만 아니라 백성이나 왕이 언급되기도 합니다. 특히 유다(‘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과 그 왕들과 그 고관들’)와 애굽 (‘애굽의 왕 바로와 그의 신하들과 그의 고관들과 그의 모든 백성과 모든 섞여 사는 민족들’)의 경우는 여러 집단을 열거하면서 예외 없이 모두 진노의 잔을 마시게 될 것을 남달리 강조합니다. 18절부터 26절의 ‘북쪽 원근의 모든 왕과 지면에 있는 세상의 모든 나라’는 17절의 ‘마시게 하되’에 걸리는 목적어로, ‘그 모든 나라’와 동격입니다. ‘세삭 왕’의 경우는 문장을 달리합니다(26). 곧 바벨론의 멸망과 ‘그 모든 나라의 멸망'이 시간상 구별되는 두 개의 사건으로 제시됩니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먼저 ‘그 모든 나라’가 바벨론의 지배에 떨어지고, 후에 바벨론이 메대-바사에 의해 정복당합니다.

여호와께서 내리신 진노의 잔을 마셔야 할 ‘모든 나라’의 첫머리에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과 그 왕들과 그 고관들’이 언급됩니다(18). 여호와의 손에서 진노의 잔을 마셔야 한다는 점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은 이방 민족들과 다름이 없습니다. 이들이 마셔야 할 술잔은 주전 587년 바벨론에 의한 멸망입니다. 바벨론의 침략과 공격으로 예루살렘과 유다의 성읍들은 폐허가 되고 왕족들과 고관들은 죽거나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고, ‘멸망과 놀램과 비웃음과 저주’만 남습니다. 예루살렘은 돌무더기가 되고 성읍들은 황무지가 되고, 사람들은 멸망의 끔찍함에 놀랍니다. 주변 민족들은 하나님 백성의 참혹한 종말을 비웃거나 저주를 받아 멸망했다고 조롱합니다. 고대적 사고에 따르면 폐허로 남겨진 성읍은 신의 저주를 받았다는 표징입니다.

 

(2) 민족들(19-26)

 

둘째 자리는 애굽이 차지합니다. 유다의 경우처럼 고관들을 포함한 다양한 집단이 열거됩니다. ‘애굽의 왕 바로와 그의 신하들과 그의 고관들과 그의 모든 백성과 모든 섞여 사는 민족들’이 진노의 잔을 마셔야 합니다. ‘애굽 왕 바로’는 애굽을 지칭하고, ‘모든 섞여 사는 민족들’은 애굽에 사는 이민족 출신의 용병 집단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애굽은 주변 여러나라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유다의 대외정치는 거의 애굽에 의존적이었습니다. 시드기야 왕의 통치 후반 친애굽파가 세력을 장악하고 반바벨론 정책을 추진하다가 유다는 멸망을 당했습니다. ‘우스 땅’에 관해서는 의견이 나뉩니다. 일부는 요단 동편 남쪽에서(참조. 애4:21; 창 36:28), 일부는 요단 동편 북쪽의 아람 지역에서(참조. 창 10:23; 22:21) 찾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땅’은 유다 산지 서편 지중해에 면해 있는 해안지역을 가리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다섯 성읍에 정착했는데, 여기서는 갓을 제외하고 네 성읍만 언급됩니다(참조․ 암 1:7-8; 습 2:4; 즉 9:5-6). 앞의 세 성읍과

달리 아스돗의 경우는 ‘아스돗의 남은 자들'이라고 말한다. '남은 자’는 일차적으로 살아남은 자들을 가리키기에, 아스돗이 전에 큰 재앙에 떨어져 많은 주민을 잃은 적이 있음을 시사한다(참조. 사 20:1). '에돔과 모압과 암몬 자손'은 요단 동편 지역이고, 두로와 시돈은 유명한 항구 도시로 페니키아 지방을 대표한다. '바다 건너쪽 섬'은 아마도 두로와 시돈이 개척한 식민지를 가리키는 것 같다. 드단(참조, 사 21:13;렘 49:8; 겔 25:13; 27:15, 20; 38:13)과 데마(참조.사 21:14; 욥 6:19; 창 25:15)는 아라비아 광야의 교역로에 위치한 오아시스였다. 부스는 동아라비아에서 찾기도 하지만, 불분명하다(참조․ 창 22:20-23).'살쩍을 깎은 자'는 관자놀이의 머리를 민 자들로 아라비아 광야에 사는 족속을 가리킨다. '아라비아'가 특정 종족 또는 후대의 아랍인을 가리키는 표현인지는 불분명하다. '광야에서 섞여 사는 민족들'은 시리아-아라비아 광야 지대에 사는 유목민을 가리킨다. 시므리는 여기에만 나오는 이름으로 어디를 가리키는지 알 수 없다. 엘람은 바벨론 동쪽에 있고, 메대는 바벨론 북동쪽에 있다.

 

칼의 심판(27-29)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탐욕과 음행의 잔에 취해 살던 이들이 이젠 하나님에 의해 마시고, 취하고, 토하고, 엎드러지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아무도 그 잔을 거절할 수 없고, 한 번 엎드러지면 일어나는 것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철저한 심판이고 예외 없는 심판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강대국이라도 자기 말대로 욕망의 잔에 취해 비틀거리는 나라들을 부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27○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내가 너희 가운데 보내는 칼 앞에서 마시며 취하여 토하고 엎드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라 하셨느니라 28그들이 만일 네 손에서 잔을 받아 마시기를 거절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반드시 마셔야 하리라 29보라 내가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성에서부터 재앙 내리기를 시작하였은즉 너희가 어찌 능히 형벌을 면할 수 있느냐 면하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칼을 불러 세상의 모든 주민을 칠 것임이라 하셨다 하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7-29)

 

27a절은 내용상 16a절과 일치합니다. 후자는 술 취함의 행태를 서술문으로 기술하고, 전자는 명령문을 사용해 여호와의 절대 권위를 강조합니다. 더 나아가 동사를 두 개 더 사용해 완전한 멸망(‘엎드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라’)을 선포합니다. 28절에서 여호와는 ‘그들이’ 당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것을 예레미야에게 미리 알려주십니다. 29절은 민족들이 여호와께서 내리시는 잔을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 마실 수밖에 없는 배경을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당신 소유에 속한 예루살렘에도 재앙을 내리시는데 이방 세계가 어찌 그분의 재앙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예루살렘은 물론이고 열방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가 진노의 잔을 들고 간 온 세상에 이제는 우리가 복음을 들고 가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사 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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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25-01)


유다의 불순종에 대한 심판

예레미야 25장 1-14절


 

설교자가 반응 없는 회중을 향해 설교하는 일만큼 힘이 빠지고 좌절되는 일이 있습니까? 아는 사람들에게 권고를 하지만 끝없는 거절은 정말 아프고 괴로운 일입니다. 계속 전하라고 하시는 하나님과전해도 듣지 않는 청중 사이에, 선지자의 고뇌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을 계속해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 본문은 23년에 걸친 예레미야의 예언적 활동을 요약하고 앞을 내다보는 단락입니다. 유다는 ‘악한 길과 행위를 버리고 돌아오라’는 예언자(들) 선포를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긴 유다 백성을 여호와께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겨 징벌하십니다.

 

유다의 실패 이유(1-2)

하나님의 사랑은 고집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끝임 없이 그 백성들에게 사랑을 베푸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누릴 수 있도록 하십니다. 하지만 끝임 없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악한 고집은 더욱 놀라게 합니다.

 

1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넷째 해 곧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 원년에 유다의 모든 백성에 관한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2선지자 예레미야가 유다의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에게 말하여 이르되 3유다의 왕 아몬의 아들 요시야 왕 열셋째 해부터 오늘까지 이십삼 년 동안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기로 내가 너희에게 꾸준히 일렀으나 너희가 순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1-2)

 

선포해야 할 메시지에 앞서 먼저 말씀이 주어진 ‘때’와 그 말씀을 들어야 할 ‘대상’이 매우 구체적으로 언급됩니다. 때는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넷째 해 곧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 원년’으로, 특이하게도 유다 왕과 바벨론 왕의 연대기를 함께 사용합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원년’이 말씀 선포의 역사적 배경으로 중요했음을 시사해줍니다.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넷째 해는 36:1; 45:1; 46:2에 세 번 더 나오는데, 예레미야서의 구조에 따르면 유다의 파국적 운명이 결정된 해가 됩니다.

 

여호야김(608-598) 넷째 해는 주전 605년으로, 바벨론 왕 나보폴라살의 아들 느부갓네살이 바벨론 군대를 이끌고 갈그미스에서 애굽 왕 느고의 군대를 대파하고(46:2) 근동의 패권을 장악한 해였습니다. 갈그미스의 승리로 시리아와 가나안의 지배권이 애굽에서 바벨론으로 옮겨졌고, 예레미야가 오래전부터 선포했던 북쪽으로부터 오는 재앙도(9) 그 실체가 확연히 드러났습니다.

유다의 정치적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치는 근동의 권력 지형도가 요동치는 때에 주어진 말씀이기에 ‘유다의 모든 백성’이, ‘유다의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이 들어야 합니다.

 

예언의 요약적 진술(4-14)

하나님께서는 열방과 통치자들을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시지만, 그들의 불순종과 악행에 대해 눈감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것은 영원한 심판이 되지 않을 것은 바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 때문입니다. 그들을 향한 심판으로 세상은 힘의 논리로 진행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대로 진행된다는 것을 보이실 것입니다.

 

4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종 선지자를 너희에게 끊임없이 보내셨으나 너희가 순종하지 아니하였으며 귀를 기울여 듣지도 아니하였도다 5그가 이르시기를 너희는 각자의 악한 길과 악행을 버리고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준 그 땅에 살리라 6너희는 다른 신을 따라다니며 섬기거나 경배하지 말며 너희 손으로 만든 것으로써 나의 노여움을 일으키지 말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해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7너희가 내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너희 손으로 만든 것으로써 나의 노여움을 일으켜 스스로 해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8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보라 내가 북쪽 모든 종족과 내 종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을 불러다가 이 땅과 그 주민과 사방 모든 나라를 쳐서 진멸하여 그들을 놀램과 비웃음 거리가 되게 하며 땅으로 영원한 폐허가 되게 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0내가 그들 중에서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와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와 맷돌 소리와 등불 빛이 끊어지게 하리니 11이 모든 땅이 폐허가 되어 놀랄 일이 될 것이며 이 민족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의 왕을 섬기리라 12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칠십 년이 끝나면 내가 바벨론의 왕과 그의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벌하여 영원히 폐허가 되게 하되 13내가 그 땅을 향하여 선언한 바 곧 예레미야가 모든 민족을 향하여 예언하고 이 책에 기록한 나의 모든 말을 그 땅에 임하게 하리라 14그리하여 여러 민족과 큰 왕들이 그들로 자기들을 섬기게 할 것이나 나는 그들의 행위와 그들의 손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3-14)

 

예레미야는 먼저 23년 동안 지속적으로 전한 자신의 예언자적 활동을 되돌아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받아야할 유다가 불순종한 것을 포괄적으로 고발합니다.

 

⑴ 예레미야의 고발(4-7)

 

‘유다의 왕 아몬의 아들 요시야 왕 열셋째 해부터 오늘까지 이십삼 년 동안’ 한결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유다는 듣지 않았습니다(3). 1:2에 의하면 예레미야는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가 다스린 지 십삼 년’, 곧 주전 627년에 예언자로 부름을 받았고, 오늘에 해당하는 ‘여호야김 넷째 해’(1)는 주전 605년이기에 모두 23년의 기간이 됩니다.

 

36:2에서 여호와는 예레미야에게 ‘너는 두루마리 책을 가져다가 내가 네게 말하던 날 곧 요시야의 날부터 오늘까지 이스라엘과 유다와 모든 나라에 대하여 내가 네게 일러 준 모든 말을 거기에 기록하라’고 말씀하신다. 23년 동안 말씀을 선포했지만 성과가 전혀 없었습니다. 유다의 완고한 거절은 예레미야에게 국한된 반응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조상 때부터 유다는 예언자들의 선포에 귀를 닫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쉬지 않고 예언자들을 보내셨지만 유다는 일관되게 이들의 선포를 거절했습니다(4; 7:25-26; 26:5; 29:19; 44:4-5).

듣는 이스라엘의 부정적 반응이 압축적으로 한 번은 ‘너희가 순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로, 다른 한 번은 ‘너희가 순종하지 아니하였으며 귀를 기울여 듣지도 아니하였도다’로 언급됩니다. 유다의 불순종은 의지적이고 총체적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유다는 예언자들을 통해 전달되는 여호와의 말씀에 최소한의 존경심도 표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모든 종 선지자’는 여호와와 예언자의 관계를 주인과 종의 관계로 보여줍니다. 종/예언자를 거절함으로써 유다는 주인/여호와를 거절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예레미야를 포함하여 예언자들을 보내 전하게 하신 말씀은 한마디로 회개의 요청이었습니다.

‘각자의 악한 길과 악행’에서 돌아오면(18:11; 23:22) 여호와께서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준 그 땅’에 살 수 있습니다(5). 이방 신들이나 우상을 섬기지 않는다면 여호와께서도 진노

하지 않으시고 해하지 아니하십니다(6). 회개 없이는 가나안도 없다. 가나안에서 살고 싶으면 우상숭배의 악에서 떠나 가나안을 선물로 주신 여호와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분께로 돌아와야만 그분의 진노와 재앙을 면할 수 있습니다. 언약ㅇ백성의 삶의 터전으로 주어진 땅이기에 언약을 파기했을 경우 가나안의 소유는 다시 원소유주이신 여호와께로 돌아가게 됩니다.

‘너희 손으로 만든 것으로써 나의 노여움을 일으키지 말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해하지 아니하리라’는 여호와의 위협이 곁들인 권면은 유다에 의해 철저하게 무시됐습니다. ‘너희 손으로 만든 것으로써 나의 노여움을 일으켜 스스로 해하였느니라’(7). 유다는 여호와의 명령을 어기고 우상을 숭배해 그분의 화를 자초했습니다. 유다에 임하는 파국적 재앙은 우상숭배의 필연적 결과였습니다.

 

⑵ 민족들을 포함한 유다의 심판(8-11)

 

예언자들이 선포한 여호와의 말씀을 무시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한 유다에게 심판이 선포됩니다. 주전 605년 갈그미스 전투에서 애굽 군대를 궤멸하고 근동의 패권을 장악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심판의 도구로 활용됩니다.

여호와께서 ‘북쪽 모든 종족과 내 종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을 데려다가 ‘이 땅과 그 주민과 사방 모든 나라’를 치게 해서 완전히 멸망시키십니다(9). 느부갓네살이 지휘하는 군대는 ‘북쪽 모든 종족’을 포함하는 대규모 원정군입니다(참조. 1:13). 바벨론 군대는 자국 병사 외에 동맹국에서 지원한 병사들과 정복당한 민족이나 지역에서 징집한 병사들로 구성된 제국군이었습니다.

 

침략군의 규모에 상응해 심판의 범위도 유다를 넘어 주변 나라들, 시리아와 가나안 지역의 모든 나라로 확대됩니다. 느부갓네살을 한정하는 ‘내 종’(27:6; 43:10)은 바벨론 왕이 여호와의 의지에 종속된 그분의 일꾼임을 시사해줍니다. 느부갓네살이 유다와 주변 나라들을 점령하지만,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수행한 것에 불과합니다.

문맥에서 보자면, 여호와께서는 당신 종들(예언자들)의 말 듣기를 거절한 유다를 당신 종(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보내 징벌하십니다.

 

9b-11a절은 심판이 얼마나 혹독하게 집행될지를 보여줍니다. 바벨론 군대의 침략을 당한 나라는 모두 ‘놀램과 비웃음 거리’(참조. 18:16; 19:8)와 ‘영원한 폐허’가 됩니다. 두려움을 야기할 정도로, 귀신이나 살 정도로 참혹하게 폐허가 됩니다. ‘영원한 폐허’(참조 49:13; 이사야 58:12; 61:4)도 파괴의 참혹함을 보여 주는 표현으로, 재건이나 회복을 기대할 수 없을 만큼 철저하게 파괴됩니다. 파괴된 땅에서는 축제와 결혼은 물론 일상생활도 불가능해집니다(10).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아무리 척박한 곳일지라도 있기 마련인 축제의 기쁨과 신랑신부의 환호가 사라져버립니다(참조. 7:34 16:9).

그뿐 아니라, 맷돌로 곡식 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어두운 밤을 밝혔던 등잔 빛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주민들이 다 죽거나 떠났기에 결혼할 일도, 맷돌을 갈고 등불을 켤 일도 없습니다. 온 땅이 사람이 살 수 없는 폐허와 황무지(‘놀랄 일’)가 됩니다. 이 땅의 민족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겨야 합니다(11b). ‘칠십 년’(배경이해' 참조)은 한 세대 이상의 긴 기간으로 예언자의 선포를 거절한 현세대가 적에게 완전히 넘겨질 것을 말합니다.

 

⑶ 바벨론의 심판(12-14)

 

바벨론의 ‘칠십 년’ 패권에 뒤따르는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칠십 년이 지난 후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행위와 그들의 손이 행한 대로 갚으십니다(14b; 50:29b). 유다와 그 주변 나라들이 당한 대로 바벨론도 징벌을 받습니다.

여호와께서 저들의 죄악을 물어 ‘바벨론의 왕과 그의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영원한 황무지로 만드십니다(12). 다른 나라들을 ‘영원한 폐허’로 만든 바벨론이 마찬가지로 영원한 황무지가 됩니다.

칠십 년 동안 민족들의 섬김을 받았던 바벨론이 여러 민족과 큰 왕들을 섬기게 됩니다(14a). 민족들을 지배하던 바벨론이 민족들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바벨론의 멸망은 칠십 년 후의 일이기는 하지만 예레미야가 선포한 대로 반드시 성취됩니다(13).

현재 문맥에서 ‘그 땅’(저 땅)은 유다보다는 바벨론을 가리킵니다. 이 책에 기록한 나의 모든 말은 일차적으로는 민족들의 신탁이 수집된 46-51장을 가리키지만, 넓게는 예레미야서도 가능합니다.


23년간 실패를 거듭한 예레미야의 사역을 어떻게 평가해야 합니까? 실패라고 보아야 합니까? 가시적 성과 없이도 포기하지 않고 전해야 했던 이유는, 성과 없는 사역이야말로 하나님의 포기하지 않으시는 사랑과 은혜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끝없는 실패를 통해 드러나는 끝없는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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