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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14-01)


제사조차 거절하시는 하나님

예레미야 14장 1-12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으로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속일 수 없고 또 속일 생각을 하는 것은 참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은 속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참된 진정한 예배를 드려야 되고, 하나님 앞에 나갈 때는 진실한 마음으로 나아가야 될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중심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깊이 만날 수 있습니다.

 

유다에 극심한 가뭄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도 짐승도 물을 얻지 못해 생존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소망이 되시는 하나님께 유다를 버리지 마시길 간구합니다. 하나님은 유다의 죄를 말씀하시며, 회개치 않고는 복을 받을 수 없다고 하십니다. 선지자는 유다의 유일한 소망이신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을 슬퍼하며 부디 유다를 버리지 말아 달라고 중보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축복을 비는 것조차 금하십니다.

 

가뭄을 탄식과 간구(1-9)

하나님께서 징계하시면 우리는 큰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고, 악에서 떠나는 것이 명철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타락한 인간이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죄악의 징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두려워하는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죄악에서 떠나 거룩한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1가뭄에 대하여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2○유다가 슬퍼하며 성문의 무리가 피곤하여 땅 위에서 애통하니 예루살렘의 부르짖음이 위로 오르도다 3귀인들은 자기 사환들을 보내어 물을 얻으려 하였으나 그들이 우물에 갔어도 물을 얻지 못하여 빈 그릇으로 돌아오니 부끄럽고 근심하여 그들의 머리를 가리며 4땅에 비가 없어 지면이 갈라지니 밭 가는 자가 부끄러워서 그의 머리를 가리는도다 5들의 암사슴은 새끼를 낳아도 풀이 없으므로 내버리며 6들 나귀들은 벗은 산 위에 서서 승냥이 같이 헐떡이며 풀이 없으므로 눈이 흐려지는도다 7여호와여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대하여 증언할지라도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 우리의 타락함이 많으니이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8이스라엘의 소망이시요 고난 당한 때의 구원자시여 어찌하여 이 땅에서 거류하는 자 같이, 하룻밤을 유숙하는 나그네 같이 하시나이까 9어찌하여 놀란 자 같으시며 구원하지 못하는 용사 같으시니이까 여호와여 주는 그래도 우리 가운데 계시고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이오니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서(1-9)

유다에 닥친 가뭄은 우연한 자연재해가 아닙니다. 그것은 불순종한 백성에게 하나님꼐서 내리신 혹독한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에게 복과 저주를 내리는 주권자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내리신 재앙을 피할 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내리신 재앙을 피하지 못합니다.

(1) 가뭄의 탄식(1-6)

가뭄은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고 전면적으로 닥칩니다. 극심한 가뭄으로 물이 없어 사람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부르짖기만 합니다. 유다는 슬피 울고, 그 성문들은 지쳐 땅에 쓰러져 탄식하고, 예루살렘은 절망적으로 부르짖습니다. 유다와 성문들과 예루살렘이 의인화되어 애도 행위의 주체로 등장합니다. ‘성문의 무리’는 문자적으로는 ‘그 성문들’로, 성읍들을 대표합니다. 고대 세계에서는 성문 안쪽에 있는 넓은 공간에서 공적 모임을 가졌습니다. ‘부르짖음’은 도움을 구하는 부르짖음보다는 절망적 울부짖음을 의미합니다. 3-6절은 가뭄 피해를 구체적으로 기술합니다. 가뭄 앞에 예외는 없었습니다. 귀족들은 물을 길어오도록 종들을 성 밖으로 보냈지만, 이들은 빈 물동이를 든 채 돌아올 뿐이었습니다. 정치적-사회적 지위도 가뭄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습니다. 가나안의 농사는 비에 의존했기에 가뭄은 농부들에게 더욱 치명적이었습니다. 농부들은 불볕더위로 쩍쩍 갈라진 밭을 보며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부끄러워하다’는 맡겨진 사명이나 의무를 이행하지 못했을 때의 반응을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참조, 잠 10:5; 12:4; 14:35). 해야 할 일을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인정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기에 부끄러워합니다. 좋은 물을 길어오지 못했기 때문에, 농부는 농사를 짓지 못했기 때문에 부끄러워합니다. ‘머리를 가리다’는 절망감의 표현입니다(참조, 삼하 13:19; 15:30; 에 6:12). 가뭄이 성의 귀족부터 지방의 농부까지 모든 사람을 절망에 빠뜨립니다. 극심한 가뭄은 들짐승에게도 치명적이었습니다. 풀이 말라 굶주림에 노출됩니다. 먹지 못해 젖이 나오지 않는 암사슴은 자기가 낳은 새끼를 들판에 내버리고, 가뭄에 비교적 잘 견딘다는 나귀도 풀과 쉴 곳을 찾지 못하고 신음합니다.

(2) ‘우리’ 공동체의 간구(7-9)

‘우리’ 공동체는 가뭄을 하나님의 재앙으로 파악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의 긍정적 개입을 호소합니다. 직면한 가뭄이 자신들의 죄 때문임을 전적으로 인정합니다. 대놓고 죄를 범하였기에 변명의 여지도, 증인을 부를 필요도 없습니다. 여호와를 수없이 배반한 삶 자체가 백성의 죄를 고발합니다. ‘타락함’은 ‘배반’, ‘반역’, ‘돌아갈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개입의 동기와 목적을 오직 하나님에게서 찾습니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공동체는 간구합니다. 하나님 백성의 고난과 재앙은 이방인들의 눈에는 자기 백성도 지키지 못하는 하나님의 무능력을 보여주는, 곧 이방인들에 의해 그분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사건입니다(참조, 겔 20:9, 14, 22). 역으로, 재앙을 겪고 있는 하나님 백성의 구원은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이방인들 가운데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에스겔은 바벨론 유배민의 구원을 여호와의 이름을 위한 사건으로 선포합니다.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겔 36:22). 이스라엘이 죄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의 이름을 위하여’ 도와달라고 기도할 수 있는 까닭은 여호와가 바로 이스라엘의 소망과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절망 중에 있는 이스라엘에게 소망이시고, 고난 중에 있는 이스라엘에게 구원이십니다.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은 역사와 자연 안에서 여호와를 구원자로 거듭 경험하였습니다. 극심한 가뭄으로 생존의 위기에 처한 공동체는 구원의 하나님에게서 소망을 찾습니다. 여호와께만 소망과 구원이 있기 때문에 그분의 개입이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이제 공동체는 여호와를 객과 나그네와 용사에 대비하여 개입을 촉구합니다. “이스라엘의 소망이시며 구원자이신 여호와께서 마치 남의 땅에 거하는 이방인처럼, 하룻밤 머물기 위해 여인숙에 들른 나그네처럼 그렇게 무관심하실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의 전사로 용맹스럽게 전쟁터를 누비셨던 분께서 어찌하여 지금은 놀라 어쩔 줄 모르는 용사처럼, 구원해줄 힘이 없는 용사처럼 침묵하십니까?” 공동체는 이스라엘의 소망이자 구원자이신 여호와께서 어떻게 그처럼 남이 되셨느냐고, 적들의 위력 앞에 용기를 잃고 두려워 떠는 용사가 되셨느냐고 탄식합니다. 하나님의 침묵이나 무능력에 대한 탄식은 물론 불신앙의 토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개입을 촉구하는 문학적 수단입니다. 당신은 객이 아니지 않습니까? 나그네가 아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의 형편에 무심한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적을 놀라게 하시며 전쟁터를 누비신 용사가 아니십니까? 크신 능력의 구원자가 아니십니까? 공동체는 다시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 무관심하실 수 없음을 신학적 전통에 의존해 호소합니다. 여호와는 잠시 유숙하는 나그네와 달리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이시고, 이스라엘은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입니다. 전자는 이스라엘 가운데 현존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을, 후자는 여호와의 소유에 속하는 이스라엘을 그 내용으로 합니다.

 

간구에 대한 하나님 응답(10-12)

우리의 희망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재앙의 때에 구하기도 하시지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저버릴 때에는 재앙을 내리기도 하십니다. 희망이신 하나님을 버린 결과가 재앙입니다. 삶에 변화가 없는 입술만의 고백은 거짓 회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이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 않는 한 아무리 금식을 하고 많은 제물을 바치고 큰 소리로 부르짖어도 그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10여호와께서 이 백성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그들의 발을 멈추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받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죄를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 하시고 11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 말라 12그들이 금식할지라도 내가 그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겠고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그것을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내가 그들을 멸하리라(10-12)

선지자 예레미야가 유다 백성을 위해 간구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간구를 단호하게 거절하십니다. 그것은 유다 백성이 죄악에서 돌이키지 않을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고난 중에도 우상 숭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우상이 있는 산마다 돌아다니며 종교 행위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1) 백성과 관련한 말씀(10)

‘우리’ 공동체의 간구가 여호와께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들의 간구가 거절당한 이유가 개괄적으로 제시됩니다.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그들의 발을 멈추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저들의 기도를 받지 않으십니다. 현재시제로 옮긴 개역개정의 번역에 따르면, 공동체가 행한 죄의 고백과 간구는 피상적이고 위선적인 것으로 진정성이 없습니다. 죄를 인정하지만 죄에서 완전히 떠나지는 않았고, 신학적 전통을 주장하지만 단지 입술의 고백에 불과했습니다(과거시제로 옮길 경우, 공동체는 너무 늦게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구원의 문이 모두 닫힌 후의 고백과 간구였기에 받아들여질 수 없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들의 죄를 기억하기로 하셨기에 죗값을 치르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어그러진 길’은 아마도 종교적 혼합주의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참조. 2:27). 이들의 경건에는 신실함이 없습니다. 필요하면 여호와 하나님을, 그러나 또다시 바알을 찾아갔습니다.

(2) 예레미야에게 주는 말씀(11-12)

여호와의 심판 의지는 단호했습니다. 여호와는 당신과 이스라엘 사이를 이어주는 모든 통로를 폐쇄하십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종교적 제도를 무용지물로 만드십니다. 먼저 예언자에게 중보기도의 금지를 명령하십니다(참조․ 7:16; 11:14). 그러나 중보기도를 들어주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백성을 위해 ‘복’을 구해서는 안 됩니다. ‘복’은 원래 ‘좋은 것’으로, 여호와께서 주시는 생명과 축복과 구원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다음으로 종교적 행사가 그 기능을 박탈당합니다. 금식하며 부르짖을지라도 여호와는 듣지 않으십니다. 금식은 전쟁의 위기, 전염병의 창궐 또는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로, 공동체가 위험에 처했을 때 하나님의 긍정적 간섭을 구하려고 행하는 제의적 의식입니다. 예레미야의 중보기도 금지와 더불어 여호와는 제사의 효력을 무효화 하십니다.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여호와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이미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셨음을 의미합니다. 예언자의 중보와 금식과 제사가 여호와께서 인정하신 것들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에 효력과 목적이 있는 절대적 제도는 아닙니다. 증보와 금식과 제사의 수용 여부는 받으시는 분의 결정에 속합니다. 여호와의 거절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려는 그분의 결정이 최종적임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징벌을 운명으로 받아야 합니다. ‘칼과 기근과 전염병’은 재앙 선포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으로, 여호와는 혼합주의에 빠진 이스라엘을 전쟁으로 심판하십니다. 많은 사람이 적의 칼에 맞아 죽고, 칼을 피해 살아남은 자들은 기근과 전염병으로 죽습니다. 누구도 여호와의 심판에서 안전하게 목숨을 구하지 못합니다.


기근으로 고통 받던 유다 백성은 하나님께 부르짖어 도움을 간구합니다. 선지자 예레미야 역시 민족이 받는 고통을 끌어안고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어떤한 탄원도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거절하시고 징계하시기 전에 죄의 길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그리고 구원의 복음을 열심히 전함으로써 멸망으로 치닫는 불신자들을 속히 구원의 길로 이끌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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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13-03)


화 있을진저 예루살렘이여

예레미야 13장 20-27절


 

우리가 ‘누구를 믿고 누구를 따라 가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또 어떤 친구를 사귀고 또 어떤 분과 교제하는가도 중요합니다. 우리의 친구 되시고 목자 되시는 예수님,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을 믿고 그분을 따르시고 또 그분을 본받아서 닮아가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기쁨과 온전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실 때 우리와 친구되시길 원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실 때 우리와 동행하기를 원하십니다.

 

북방 민족이 공격해 올 때 유다는 출산하는 여인 같은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구스인이 피부를 변하게 할 수 없는 것처럼, 유다는 선을 행하지 않고 악만 행합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잊어버리고 거짓을 신뢰하는 유다를 초개같이 흩으실 것입니다.

 

북방에서 오는 적(20-22)

하나님만 온전히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도움이시며 힘이시고 구원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친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자랑이었던 아름다운 예루살렘이 수치와 부끄럼을 당하게 됩니다. 이 예루살렘의 평화는 영원할 줄 알았지만, 불순종하고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의 이름을 둔 하나님의 도시도 하나님은 심판하십니다.

20너는 눈을 들어 북방에서 오는 자들을 보라 네가 받았던 양 떼, 네 아름다운 양떼는 어디 있느뇨 21너의 친구 삼았던 자를 그가 네 위에 수령으로 세우실 때에 네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너의 고통에 잡힘이 구로하는 여인 같지 않겠느냐 22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어찌하여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는고 하겠으나 네 죄악이 크므로 네 치마가 들리고 네 발뒤꿈치가 상함이니라(20-22)

화자와 청자의 차이에 따라 20-22절, 23-24절, 25-27절의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21절에서 ‘여호와’를 삼인칭으로 받는 개역개정의 번역에 따르면 첫째 단락의 화자는 예언자, 둘째와 셋째 단락의 화자는 여호와입니다. 청자에 있어서는 첫째와 셋째 단락이 일치하는데, 여성 단수 ‘너’가 청자로 나옵니다. 둘째 단락은 상대를 이인칭 복수 ‘너희’(23) 또는 삼인칭 복수 ‘그들’(24)로 부릅니다. ‘너’가 예루살렘(27)이기 때문에 ‘너희’는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백성이 됩니다. 첫째 단락의 ‘너’(예루살렘)와 ‘양 떼’가 셋째 단락(너)과 둘째 단락(너희와 그들)에 분리되어 나옵니다. 물론 예루살렘과 그 주민의 구별은 문학적인 장치로, 실제로는 동일한 대상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죄로 인한 예루살렘의 멸망이라는 주제는 세 단락에서 공통적인데, 이를 기술할 때 사용한 표상과 강조점에 있어서는 일부 차이를 보입니다. 첫째 단락은 적의 침략에 노출된 예루살렘의 절망적 처지(산고를 겪는 여인)에, 둘째 단락은 회개의 불가능함에, 셋째 단락은 우상숭배의 고발에 초점을 맞춥니다. 고발의 내용이 첫째 단락에서는 막연히 ‘네 죄가 크므로’인데(22b), 셋째 단락에서는 ‘네가 나를 잊어버리고 거짓을 신뢰하는 까닭이라’(25b)라고 좀 더 구체화하고 있습니다. 심판의 묘사에 있어 ‘점령군에 의해 능욕당하는 연인’의 표상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첫째(22b)와 셋째 단락(26)은 일치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전자는 능욕을 죄의 결과로 기술하고, 후자는 죄로 인한 여호와의 징벌로 기술합니다. 둘째 단락은 전쟁하고는 상관없는 ‘사막바람에 불려가는 검불’의 표상을 사용해 완전한 멸망을 강조합니다.

(1) 절망적 처지(20-21)

19절에서 유다 남쪽을 향했던 예레미야의 시선이 북쪽으로 옮겨집니다. 예언자는 북방에서 내려오는 적들에 의해 양 떼가 약탈당하는 것을 보고 ‘네게 맡겼던 양 떼, 네 아름다운 양 떼는 어디 있느냐’라고 외칩니다(20: 여기서는 누가 예루살렘에게 양 떼를 맡겼는지를 직접 말하고 있지 않지만, 17절의 ‘여호와의 양 떼’는 여호와임을 시사합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맡긴 양 떼가 굶주린 들짐승에게 약탈당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여호와께서 택한 예루살렘은 다윗 왕조와 성전이자리 잡은 도성으로, 유다의 정치적·종교적 중심지였습니다. 백성을 돌보고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어야 할 책임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예루살렘은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목자에 불과했습니다. 양 떼의 주인보다 그들은 주변의 친구들을 더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께 의존하여 양 떼를 돌보지 않고, 주변 나라들과의 정치적 동맹에서 살길을 찾았습니다. 예루살렘은 비로소 여호와의 심판을 받은 후에야 자신들의 치명적인 어리석음을 깨닫게 됩니다. 여호와는 예루살렘이 ‘친구 삼았던 자’를 예루살렘 위에 우두머리로 세우실 것입니다(21a). 예루살렘은 정치적 동맹관계의 비정한 모습에 몸부림쳐보지만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산고를 겪는 여인’처럼 고통에 사로잡힐 뿐입니다(21b). 해산의 진통은 피하거나 연기시킬 수 없습니다. 시작되면 아이가 나오기까지는 달리 어쩔 수가 없습니다. 산모의 진통은 새 생명의 출생을 위한 것이라 해산의 기쁨으로 보상받는다고 하지만, 예루살렘의 진통은 멸망의 출생을 위한 것이라 더욱더 절망적입니다. 그들은 적의 공격을 피할 길이 없고, 막아낼 능력도 없습니다. 마지막 힘이 다해 목숨이 끊어질 날만 기다릴 뿐입니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내게 닥쳤는고’하면서 절망해보지만, 운명을 되돌리기에는 모든 것이 늦었습니다.

(2) 그 원인(22)

멸망의 이유를 알지 못해 당황하는 예루살렘에게 예언자가 간결하게 답변해줍니다. “네 죄악이 크므로 네치마가 들리고 네 발뒤꿈치가 상함이니라”(22b). 저지른 죄가 중하기에 예루살렘이 마치 점령군에 의해 성폭행을 당하듯 무참히 유린당입니다. 범죄의 필연적 결과로 예루살렘은 멸망을 당하고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여기서는 예루살렘이 자신들의 죽음과 파멸을 초래한 구체적인 ‘죄악’에 관해 달리 언급하지 않습니다. 다만 27절에 의하면, 그들 가운데 만연한 우상숭배가 그들을 멸망의 길로 인도하였습니다.

 

피할 수 없는 심판(23-24)

성경에서 징계나 심판을 기록한 부분을 접하게 되면 빨리 지나길 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날에 계속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도 달게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쁨으로 나가야 좋은 날을 지속할 수 있습니다.

23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24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사막 바람에 불려가는 검불 같이 흩으리로다(23-24)

악에 익숙한 유다 백성은 결코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막 바람에 불려 가는 검불처럼 흩으십니다. 그냥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1) 불가능한 회개(23)

예루살렘은 여호와께서 택하신 도성이 아닙니까? 다윗 왕조와 여호와의 성전이 그 안에 있지 않습니까? 유다 백성은 여호와의 백성이 아닙니까?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이 어떻게 이방 정복자들에 의해 능욕을 당한단 말입니까? 속담을 인용한 23절은 전통적인 예루살렘의 구원 신학을 따르는 자들의 비판에 대한 답변입니다.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구스 사람이 검은 피부를 바꿀 수 없는 것처럼, 또한 표범이 얼룩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예루살렘 사람들도 악한 습성을 바꿀 수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북방의 적에게 넘겨 능욕을 당하게 하실 때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의 회개를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2) 징계의 심판(24)

마음을 완전히 접으신 여호와께서 이들을 ‘사막 바람에 불려가는 검불같이’ 흩으시기로 결정하십니다(24). 예루살렘과 유다 사람들이 여호와께서 보낸 심판의 바람에 휩쓸려 이제 사방으로 쫓겨나게 됩니다.

 

예루살렘의 징계(25 27)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에 대해 오래 참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죄에서 돌이키지 않는 자에게는 정결케 하는 심판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선지자들을 통해서 심판을 선언하는 것은 교만의 죄에서 돌이키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선지자들의 경고를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유다는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정결해질 것입니다.

25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네 몫이요 내가 헤아려 정하여 네게 준 분깃이니 네가 나를 잊어버리고 거짓을 신뢰하는 까닭이라 26그러므로 내가 네 치마를 네 얼굴에까지 들춰서 네 수치를 드러내리라 27내가 너의 간음과 사악한 소리와 들의 작은 산 위에서 네가 행한 음란과 음행과 가증한 것을 보았노라 화 있을진저 예루살렘이여 네가 얼마나 오랜 후에야 정결하게 되겠느냐 하시니라(25-27)

유다의 배교는 깊이 습관화되었습니다. 구스인이 자신의 피부를 바꿀 수 없고 표범이 자신의 반점을 바꿀 수 없듯이 유다는 자신의 악습을 고칠 수 없었습니다. 유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기보다 악한 육신의 본성대로 사는 데 익숙했습니다.

(1) 여호와를 잊은 예루살렘(25)

앞의 두 단락에서 포괄적으로 제시된 심판의 원인(큰 죄악과 회개의 불가능함)이 구체적으로 언급됩니다. 예루살렘이 여호와를 잊고 ‘거짓’을 신뢰하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산고를 겪는 여인’과 ‘사막 바람에 불려가는 검불’의 운명을 예루살렘의 몫으로 정하셨습니다(25). 여호와를 기억해야 할 예루살렘 사람들이 여호와를 잊었습니다. 너무 오래전부터 잊어서 ‘그 날 수는 셀 수’가 없을 지경이 되었습니다(2:32). 여호와를 잊고 사는 것(악)이 이제는 그들의 본능처럼 됐기에, 그들이 다시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것(선)은 불가능한 기대처럼 됐습니다.

(2) 수치를 당하는 예루살렘(26-27)

여호와를 신뢰해야 할 예루살렘 사람들이 거짓 우상을 신뢰합니다. 예레미야서에서 ‘거짓’은 다양한 차원에서 사용되지만, 여기서는 27a절이 보여 주듯이 ‘우상’을 가리킵니다. 끓어오르는 성욕을 주체할 수 없는 발정기의 들 암나귀처럼(2:24) 예루살렘은 ‘들의 작은 산 위에서’ 우상과 간음을 즐기며 욕정을 발산합니다(27a). 예루살렘의 우상숭배는 일부 사람들의 은밀한 이탈이 아니라, 곳곳에서 자연스럽게 자행되는 일상사가 되었습니다. 오래전에 여호와를 잊은 예루살렘은 우상들로 그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우상들과 간음을 즐긴 예루살렘에게 상응하는 심판이 선고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네 치마를 네 얼굴에까지 들춰서 네 수치를 드러내리라”(26). 수치를 모르고 음행을 즐긴 예루살렘은 점령군 앞에서 자신들의 수치를 드러내고 능욕을 당합니다. ‘북방에서 오는 자들’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은 표면적으로는 정치적 사건으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여호와의 심판으로 이뤄진 신학적 사건입니다. 곧 신명기 8:19의 경고가 현실화된 사건입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


교만과 우상 숭배의 죄에 빠진 유다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심판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조만간 바벨론에게 망하고 포로 신세가 되어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모두가 죄에서 돌이킬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이 사랑을 기억하며 신속히 회개의 자리로 돌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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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13-02)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 전에 회개해야 함

예레미야 13장 12-19절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믿었던 사람들로 상처를 받은 경우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기뻐하던 일들 때문에 절망적이고 슬프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이 정말 많이 사랑하고 기뻐하는 사람이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일들도 있습니다. 자신이 의지했던 것들이 상처를 주는 것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즐겼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우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죽부대에 포도주로 가득 찰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잔뜩 취한 사람들은 흐느적거리면서 이성을 잃은 것처럼, 유다는 이상을 상실한 채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권하지만, 왕국의 멸망을 돌이킬 수 없어 보입니다. 재앙이 임하기 전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유다 왕이 폐위되고 포로로 잡혀갈 때가 올 것입니다.

 

진노의 잔(12-14)

우리가 죄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죄가 타인에게 무자비하고 무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하지만 양심의 문빗장을 걸어 잠그고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 행동의 결국은 사망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경고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시에 유행하던 농담을 사용하여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12그러므로 너는 이 말로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모든 병이 포도주로 차리라 하셨다 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네게 이르기를 모든 병이 포도주로 찰 줄을 우리가 어찌 알지 못하리요 하리니 13너는 다시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땅의 모든 거민과 다윗의 위에 앉은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예루살렘 모든 거민으로 잔뜩 취하게 하고 14또 그들로 피차 충돌하여 상하게 하되 부자간에도 그러하게 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관용치 아니하며 아끼지 아니하고 멸하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의 말이니라(12-14)

하나님께서는 다른 비유를 통해 백성을 향한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가죽 부대’ 이미지를 사용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재차 경고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병이 포도주로 차리라”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을 들은 백성은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말씀을 가볍게 받아들였습니다.

(1) 속담의 인용(12a)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상적인 문답을 통해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심판을 선포하tlqsl다. 먼저 이들에게 전할 말과 그에 대한 이들의 반응을 예언자에게 알려주tlqsl다.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모든 가죽부대(항아리)가 포도주로 차리라’라고 전해야 합니다.

(2) 청자의 반응(12b)

그러면 그들이 예언자에게 ‘모든 가죽부대가 포도주로 찰 줄을 우리가 어찌 알지 못하리요’하고 반문할 것입니다(12). 그들은 황당한 반응을 보이며, 너무도 당연한 예언자의 말에 어이없어합니다. 여호와께서 인용한 속담은 아마도 술자리 농담인 것 같습니다. 포도주가 가득 차기를 기대하던 사람들의 희망을 인용한 듯합니다.

(3) 심판 선언(13-14)

술자리가 벌어지면 배부르다고 술을 마다하는 술꾼은 없습니다. 잔치를 준비하면서 항아리에 술을 가득 채우듯이, 술꾼은 코가 삐뚤어지게 마시며 제 배를 술로 가득 채웁니다. 나단의 우화에 다윗이 너무 당연하게 반응하면서 자신을 고발하였듯이(참조, 삼하 12:1-6), 누구나 인정하는 속담에 차라리 어이없다는 듯이 답변함으로써 이들도 자신들을 여호와의 심판대 앞에 세웁니다. 술꾼들이 좋아하는 속담에 술꾼들이 사로잡힙니다. 여호와께서 청자의 의표를 찌르시며 심판 메시지를 전달하십니다. 술꾼의 볼록한 배가 술로 채워지듯이 ‘이 땅의 모든 주민과 다윗의 왕위에 앉은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예루살렘 모든 주민’의 배도 술로 채워질 것입니다(13). 진노의 술을 마시고 취하는 대상에 예외가 없습니다. 영원한 왕권의 약속을 받은 다윗 왕조, 여호와 종교를 대표하는 제사장과 예언자, 여호와께서 주신 땅에 사는 백성, 그리고 그분께서 택하신 예루살렘 주민이 모두 그분께서 내리시는 진노의 잔을 취하도록 마셔야 합니다. 14a절은 13절의 ‘잔뜩 취함’의 모티브를 받아 심판의 모습을 술자리에서 자주 벌어지는 꼴사나운 행태에 비교합니다. 술자리가 길어지면서 술에 취한 술꾼들이 서로 잔을 부딪치다가 깨뜨리거나 서로 싸웁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술을 마시고 추태를 보이며 다툽니다. ‘그들로 피차 충돌하여 상하게 하되’는 유다 내부의 정치적 불화와 다툼을 시사해 주는 것 같습니다. 이미 어둠이 덮치기 시작했는데도 나라와 백성의 안위보다 당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쌈질을 합니다. ‘부자 사이에도 그러하게 할 것이라’는 당시의 분열이 얼마나 극심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사적 이해와 욕심 때문에 인륜에 속하는 부자의 관계마저 무시할 정도로 사회가 타락합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은 내부의 갈등과 분열로 갈가리 찢겨 자멸합니다. 여호와의 진노의 술잔에 잔뜩 취한 자들이 분별력을 상실하고 이기적 욕심에 사로잡힙니다. 예전에는 선포된 심판이 되돌려지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운명을 최종적으로 확정하셨습니다.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사랑하지 아니하며 아끼지 아니하고 멸하리라”(14b),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리십니다. 재앙의 때에 살려달라고 울부짖을지라도 그분은 귀를 기울이지 않으실 것입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은 여호와께서 주시는 진노의 술잔을 잔뜩 마시고 취해야 합니다.

 

마지막 경고(15-17)

인간의 감정은 아주 민감한 균형을 요하는 접시저울 같아서, 사랑이 증오로 변하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특히나 그 사랑이 정욕에 불과할 경우에는 더더욱 쉽게 변합니다. 추악한 욕망으로 비롯된 죄악은 마침내 실체가 드러나 결국 더 심각한 죄로 번졌습니다.

15너희는 들을지어다, 귀를 기울일지어다, 교만하지 말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라 16그가 어둠을 일으키시기 전, 너희 발이 어두운 산에 거치기 전, 너희 바라는 빛이 사망의 그늘로 변하여 침침한 어둠이 되게 하시기 전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 17너희가 이를 듣지 아니하면 나의 심령이 너희 교만으로 말미암아 은밀한 곳에서 울 것이며 여호와의 양 떼가 사로잡힘으로 말미암아 눈물을 흘려 통곡하리라(15-17)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해 잘못된 태도를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않고,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의 불순종은 어느새 생활 습관으로 굳어져 버렸습니다. 그런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께서는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1) 예언자의 경고(15-16)

여호와의 심판 의지가 너무나도 확고해 바뀔 가능성이 없어졌습니다. 멸망을 피할 길은 없어졌습니다. 예레미야에게는 유다와 예루살렘이 여호와의 잔을 마시도록 하는 일만 남겨졌습니다. 모든 것이 이미 끝나버린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유다와 예루살렘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예견하고 있지만, 그래도 예레미야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는 멸망 앞에 놓인 자기 민족의 운명에 눈을 감지 않고, 이들에게 절박하게 경고하면서 호소합니다. “너희는 들을지어다, 귀를 기울일지어다, 교만하지 말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라”(15).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 들어야 할 말은 (문맥에 따르면)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 결정입니다. 여호와의 확고한 심판 의지를 알게 된 예레미야는 이를 단순하게 전달하지 않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교만을 버리도록 호소합니다. 교만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습니다. 9-10절에 따르면 불순종의 완악함과 우상숭배를, 17절과 18-23절에 따르면 예루살렘성의 안전을 자신하는 행태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교만의 실체가 무엇이든 간에 분명한 것은 교만하면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교만을 버려야만 그분의 말씀을 듣고 바르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심판은 이미 시작됐기에 머뭇거릴 여유가 전혀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어둠을 일으키시기 전, 너희 발이 어두운 산에 거치기 전, 너희 바라는 빛이 사망의 그늘로 변하여 침침한 어둠이 되게 하시기 전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16).

(2) 예언자의 탄식(17)

산에서 밤을 맞은 여행자가 길을 잃고 헤매다가 때로는 목숨도 잃어버리는 것처럼, ‘여호와의 양 떼’의 처지가 그러합니다. 새벽빛이 곧 동 오리라는 기대는 착각에 불과합니다. 여호와가 ‘너희 하나님’이시기는 하지만, 언제나 ‘너희’의 구원을 위해 노심초사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지금 가져오시는 것은 어둠입니다. 그분은 지금 빛을 어둠으로 바꾸시고, 암흑으로 만들고 계시입니다. 교만한 자들에게는 여호와의 구원이 아니라 그분의 심판이 빛처럼 솟아오를 뿐입니다(참조,호 6:5). 현재의 문맥에서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는 교만을 벗어버리고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심판을 선포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낮은 자세로 그분께 돌아오는 것이 곧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확고한 심판 의지는 다른 한편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이 범한 죄의 심각성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사실 이들이 죄에서 돌이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기대였습니다(23). 예레미야도 이들이 듣지 아니할 것을, 따라서 여호와께서 그분의 양 떼를 적에게 포로로 넘겨주시는 심판이 악몽으로 끝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가능성이 없음을 알면서도 예레미야는 절박한 심령으로 ‘여호와의 양 떼’를 덮치는 짙은 어둠을 봅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이 교만 때문에 마지막 경고를 듣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눈물과 통곡만 남겨질 뿐입니다(17). 아무도 없는 ‘은밀한 곳에서’ 홀로 비통하게 눈물을 흘리며 통곡할 뿐입니다. 예레미야는 아마도 의도적으로사로잡혀 가는 자들을 ‘여호와의 양 떼’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심판이 완고한 불순종의 결과로 주어졌음을 알기에 직접 증보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여호와의 양 떼’가 사로잡혀 가는 것이 아니냐고 호소하는 예레미야의 애절한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내려진 영광의 면류관(18-19)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이스라엘의 심판을 선언하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교만의 죄에서 그들을 돌이키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선지자들의 경고를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예언의 말씀을 거절하고 더욱더 깊은 죄악으로 ᄈᆞ져들어 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최후통첩과도 같은 심판의 경고를 내리십니다. 하나님꼐서 경고하신 심판은 두렵기 그지 없는 모습으로 임할 것입니다.

18너는 왕과 왕후에게 전하기를 스스로 낮추어 앉으라 관 곧 영광의 면류관이 내려졌다 하라 19네겝의 성읍들이 봉쇄되어 열 자가 없고 유다가 다 잡혀가되 온전히 잡혀가도다(18-19)

여호와께서 일으키시는 어둠(16)이 눈앞의 현실이 됩니다. 구원의 빛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심판의 어둠이 임합니다. 예루살렘부터 네겝까지 전 지역을 흑암이 덮칩니다. 여호와께서 보내신 것이기에 누구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왕과 태후는 ‘영광의 면류관’을 벗고 보좌에서 내려오고(18), 네겝의 성읍들은 포위되고, 주민들은 유배를 당합니다(19). 왕과 태후가 적들에 의해 폐위되고, 유다 남부 지역이 침략자들의 수중에 떨어집니다. 마지막까지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은 예루살렘과 유다는 교만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러야 합니다. 여기서 ‘왕후’는 ‘태후’로 옮겨야 합니다. 유다 왕실은 태후에게 특별한 지위를 인정해주었던 것 같습니다. 열왕기상2:19에 의하면 솔로몬은 어머니 밧세바를 위해 오른쪽에 자리를 마련해주고, 15:13에 의하면 아사는 아세라 상을 만든 어머니 마아가를 ‘태후의 위’에서 폐합니다.


죄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모든 수치를 드러내실 것입니다. 발정기의 짐승처럼 우상숭배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유다가 다시 정결케 될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렸습니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을 수치 가운데 또는 일밖에 할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대신에 거짓 바알을 더 신뢰한 유다에게는 심판만이 합당한 몫이 분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떠난 삶은 우상숭배의 삶이요 하나님을 망각한 삶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사망을 그 몫으로 받은 것입니다. 유다의 분깃이었던 하나님을 유다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준비하신 그 분깃이 무엇일지는 그분에 대한 자신의 삶이 결정할 것입니다. 유다의 수치 앞에서 우리 또한 그 수치를 반복하지 않도록 죄에서 돌이키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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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13-01)


썩은 배띠와 술로 가득한 가죽 부대

예레미야 13장 1-11절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시는 분이 아니시고 말씀하신 분이십니다. 다만 우리의 귀가 둔하고, 우리의 눈이 보지 못하고, 또 우리의 마음이 닫쳐서 그것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모습으로 또 여러 모양으로 또 여러 방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만날 수 있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유다 백성들이 심판 받을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그들에게 상징적인 행위로 문명한 현실임을 가르쳐줍니다. 맞이하게 될 앞날에 대해 예레미야에게 전하십니다. 그들은 썩어서 쓸모없는 띠와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첫째 단계의 표적 행위(1-2)

성도는 추악한 욕망과 죄를 분별하고 그것을 멈추게 하는 신앙 양심을 늘 작동시켜야 합니다. 주님을 욕망을 절제하고 죄짓지 않을 기회를 여러 번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욕망을 버리려 애쓰면서 경건한 삶을 훈련해야 합니다. 매일 하나님과 동행하며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죄의 유혹을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1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베 띠를 사서 네 허리에 띠고 물에 적시지 말라 하시기로 2내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띠를 사서 내 허리에 띠니라(1-2)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너는 가서 베띠를 사서 네 허리에 띠고 물에 적시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예언자는 그분의 명령에 따라 베띠를 사서 허리에 두릅니다. ‘베띠’는 아마도 허리에 걸치는 아마(亞麻)로 된 짧은 속옷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고대인들에게 속옷은 주인의 아낌을 받는 귀한 물건에 속했습니다. 기존의 베 띠가 아니라 새로 산 베 띠이기에 주인에게는 더욱 소중했습니다. ‘물에 적시지 말라’는 명령의 의도는 불분명합니다. 벗지 말고 항상 입고 있으라는 것인데, 그 이유를 달리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베 띠를 가지고 유브라데로 가라는 두 번째 명령이 주어질 때까지 계속 입고 있어야 합니다. 베 띠의 기능과 관련해서는 11절의 해석에 연결됩니다. 베 띠는 허리에 두르는 것이기에 허리를 떠나서는 쓸모가 없습니다. 베 띠가 허리에 속함 같이 이스라엘도 여호와께 속해야 합니다. 허리에 띤 베 띠로 이스라엘과 여호와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는 벗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단계의 표적 행위(3-5)

사탄이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도록 종용했던 것처럼 사탄의 계략은 이런 욕망을 더욱 충동질합니다. 우리 곁에는 욕망을 부추기는 요나답 같은 친구가 아니라 진실한 조언과 위로를 건네는 요나답 같은 친구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그런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3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4너는 사서 네 허리에 띤 띠를 가지고 일어나 유브라데로 가서 거기서 그것을 바위 틈에 감추라 하시기로 5내가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가서 그것을 유브라데 물 가에 감추니라(3-5)

첫 번째 명령에 이어지는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주어집니다.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사서 네 허리에 띤 띠를 가지고 일어나 유브라데로 가서 거기서 그것을 바위틈에 감추라’고 명령하시자, 예언자는 그분의 명령에 따라 ‘가서 그것을 유브라데 물가에 감추었습니다.’ 첫 번째 표적행위를 보고할 때처럼 군더더기 없이 최소한의 것만 보고합니다. ‘사서 네 허리에 띤’은 두 번째 명령이 첫 번째 명령의 연속임을 보여줍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께서 명령형으로 사용한 동사 ‘가다’와 ‘숨기다’를 다시 사용해 여호와의 명령에 철저하게 순종했음을 보여줍니다(‘일어나’는 ‘자, 이제’를 의미하기에 명령의 이행을 보고할 때는 불필요해집니다. ‘유브라데 물가에’는 문자적으로 ‘유브라데에’를 뜻합니다.

 

셋째 단계의 표적행위(6-7)

우리가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죄 사함의 은혜를 주시지만, 범죄의 결과로 우리는 영적으로 둔감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적 충만함을 다시 회복하기까지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죄가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이러한 심각한 결과를 기억하고, 항상 영적으로 깨어 죄의 끔찍한 저주로부터 자신을 지켜 내시기 바랍니다.

6여러 날 후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 유브라데로 가서 내가 네게 명령하여 거기 감추게 한 띠를 가져오라 하시기로 7내가 유브라데로 가서 그 감추었던 곳을 파고 띠를 가져오니 띠가 썩어서 쓸 수 없게 되었더라(6-7)

세 번째 표적행위의 보고도 처음 두 표적행위의 보고와 거의 다르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명령하시고 예레미야는 이를 그대로 따릅니다.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일어나 유브라데로 가서 내가 네게 명령하여 거기 감추게 한 띠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시자, 예언자가 ‘유브라데로 가서 그 감추었던 곳을 파고 띠를 가져왔다.’ 처음 두 표적행위의 보고와 유사하게 일정한 틀에 따라 무미건조할 정도로 덤덤하게 여호와의 명령과 예언자의 실행보고를 기술합니다. ‘가서 가져오라’에 ‘가서(파고) 가져온다.’ 여기서도 ‘내가 네게 명령하여 거기 감추게 한’에 의해 세 번째 명령은 두 번째 명령에 직접 연결됩니다. 명령의 이행과 관련해 첫 번째 실행보고에는 ‘여호와의 말씀대로’(2)가, 두 번째에는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5)가 나오는데 세 번째에는 이와 유사한 언급이 없습니다. 명령의 순종을 더 이상 반복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아마도 보고의 강조점을 순종에서 다른 쪽으로 옮기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세 번째 표적행위에만 나오는 두 가지 언급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 번째 명령에는 ‘여러 날 후에’라는 때에 관한 언급이 나옵니다. 유브라데까지 왕복하려면 여러 달이 걸리기에 논리적으로 보면 이는 불필요한 언급입니다. ‘여러 날 후에는 문자적으로는 '많은 날들이지난 후에 일어났다’로, 단순하게 충분한 시간이 지났음을 보여주려는 것만은 아닙니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발생했음을 시사해줍니다. 새로운 것은 보고의 마지막에 나오는 두 번째 차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띠가 썩어서 쓸 수 없게 되었더라’(7). 띠의 상태에 관한 언급이 나옵니다. 지금까지는 예외 없이 행위를 보고했는데, 서로 연속된 세 개의 표적행위를 마감하는 자리에 처음으로 상태에 관한 서술이 나옵니다. 관심이 예언자의 순종에서 띠의 상태로 옮겨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개역개정의 번역에는 이 전환이 잘 나타나지 않지만, 7b절은 ‘보라, 그 띠가 썩어서 아무짝에도 쓸모없게 됐다’로 옮길 수 있습니다).

 

표적 행위의 해석(8-11)

우리가 죄를 자복하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죄를 사하여 주시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지만 이것과 함께, 우리가 저지른 죄악에 대한 부정적 영향력은 남는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 영향력은 우리 자신에게 그리고 우리와 관계된 사람들에게 악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므로 죄악을 멀리하도록 늘 깨어 사시기 바랍니다.

8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9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이같이 썩게 하리라 10이 악한 백성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하고 그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하며 다른 신들을 따라 그를 섬기며 그에게 절하니 그들이 이 띠가 쓸 수 없음 같이 되리라 11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띠가 사람의 허리에 속함 같이 내가 이스라엘 온 집과 유다 온 집으로 내게 속하게 하여 그들로 내 백성이 되게 하며 내 이름과 명예와 영광이 되게 하려 하였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8-11)

여호와께서 직접 표적 행위를 해석해주십니다. 여기서 계시 사건의 도입부가 두 번 연속적으로 나옵니다. 8절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는 (문맥에 따라 첨가된 ‘다시’를 제외하고) 3절과 똑같습니다. 또한 9절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도 그 기본 틀에 있어 1절과 같습니다. 이는 명령과 해석이 모두 여호와로부터 나왔음을 강조합니다. 즉 예레미야에게 표적행위를 명령하신 분이 표적 행위를 해석해주신 분입니다. 행위와 결과의 주체는 오직 여호와 한 분뿐입니다. 먼저 썩어서 쓸모없어진 띠를 부패한 유다와 예루살렘의 운명으로 해석해줍니다. “내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이같이 썩게 하리라”(9b). 썩은 띠가 버려지듯이 썩은 유다와 예루살렘도 버려집니다. 교만이 유다와 예루살렘을 속속들이 썩게 만들었습니다. 여호와보다 자신의 능력이나 업적이나 명성에 의존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자기도취와 과신이 교만을 낳고, 교만이 멸망을 초래합니다. 유다와 예루살렘 모두 교만의 죄에 빠졌지만, 특히 여호와의 성전(종교의 중심)과 다윗의 보좌(정치의 중심)를 자랑하는 예루살렘이 더했습니다. 예루살렘은 동맹정치에 의존하다가 여호와께서 맡긴 양 떼를 멸망에 떨어지게 했습니다(20-21). 10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을 ‘이 악한 백성’으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썩게 만든 교만의 구체적 예를 언급하시고 그들의 불순종과 우상숭배를 지적하십니다. 유다 백성은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거절하고 제 완악한 마음에 따라 다른 신들을 쫓아다니며 그것들을 섬기고 절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이방 민족들이 여호와께 ‘나의 모든 악한 이웃’(12:14)인 것처럼, 이제 우상을 섬기는 어리석은 자들로 타락한 하나님 백성도 ‘나의 모든 악한 이웃’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쓸모없는 썩은 띠가 버려지는 것처럼 ‘이 악한 백성’도 버려지게 될 것입니다. 11절은 띠의 기능에 초점을 맞춰 이스라엘과 유다의 배반을 고발합니다. “띠가 사람의 허리에 속함 같이 내가 이스라엘 온 집과 유다 온 집으로 내게 속하게 하여 그들로 내 백성이 되게 하며 내 이름과 명예와 영광이되게 하려 하였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띠가 사람의 허리에 붙어 있듯이 여호와는 ‘이스라엘 온 집과 유다 온 집’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유다뿐만 아니라 이미 주전 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한 북이스라엘도 여호와께서 택하신 언약 백성으로 그분께붙어(속해) 있어야 했습니다. 이미 멸망한 이스라엘의 언급은 하나님의 선택에 있어 이스라엘과 유다가 다르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이 그들의 불순종 때문에 멸망 당했다면, 불순종한 유다의 운명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당신께 속하게 하여 이스라엘을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백성에 합당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책무이자,그들의 정체성이며 의무였습니다. 여호와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에 ‘이름과 명예와 영광’을 주어 그들이 ‘이름과 명예와 영광’을 자신에게 돌리길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기대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불순종으로 완전히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으로서 그분께 영광을 돌리기는커녕 그분의 명성을 더럽히기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 중에 있는 교만을 썩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교만입니다. 그 교만은 하나님말씀을 안 듣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요즘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 욕망의 소리 곧 다른 신의 소리를 따라 산다는 뜻입니다. 요즘 무엇이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지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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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12-02)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

예레미야 12장 7-13절


하나님께서 우리를 항상 사랑해 주시고, 하나님꼐서 사랑하신 모습으로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를 품어주시기도 하시고 또 격려해 주시기도 하십니다. 또 기쁨을 주시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심판을 통해서 시련을 인도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시간이되시길 바랍니다.

 

남 유다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산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 악을 행함으로 대적의 손에 붙이셨습니다. 여호와의 칼인 훼멸하는 자들로 인해 황폐하게 될 것입니다. 밀을 심어도 가시를 거두며, 수고하지만 아무 소득이 없어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이렇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슬픈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당신 소유를 포기하시는 하나님(7-13)

하나님께서 자백하기만 하면 모든 죄가 용서받는다는 생각으로 죄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받을 모든 심판을 홀로 받으신 주님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주님이 피 흘리신 큰 은혜를 기억하고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성도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7내가 내 집을 버리며 내 소유를 내던져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을 그 원수의 손에 넘겼나니 8내 소유가 숲속의 사자 같이 되어서 나를 향하여 그 소리를 내므로 내가 그를 미워하였음이로라 9내 소유가 내게 대하여는 무늬 있는 매가 아니냐 매들이 그것을 에워싸지 아니하느냐 너희는 가서 들짐승들을 모아다가 그것을 삼키게 하라 10많은 목자가 내 포도원을 헐며 내 몫을 짓밟아서 내가 기뻐하는 땅을 황무지로 만들었도다 11그들이 이를 황폐하게 하였으므로 그 황무지가 나를 향하여 슬퍼하는도다 온 땅이 황폐함은 이를 마음에 두는 자가 없음이로다 12파괴하는 자들이 광야의 모든 벗은 산 위에 이르렀고 여호와의 칼이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삼키니 모든 육체가 평안하지 못하도다 13무리가 밀을 심어도 가시를 거두며 수고하여도 소득이 없은즉 그 소산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수치를 당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분노로 말미암음이니라(7-13)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앞으로 다가올 심판에 대해 또다시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이 지은 죄 때문에 이방 민족에게 둘러싸여 짓밟히고 황폐해질 것입니다. 끝까지 자신의 고집대로 행하는 죄인들을 향한 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은 확고부동했습니다.

(1) 포기와 그 이유(7-8)

언약의 파기를 고발하는(11:1-13) 예레미야를 죽이려 한(11:18-23) 것은 단순히 예레미야 개인에 대한 위해가 아니었습니다. 그를 예언자로 보내신 여호와께 대한 노골적인 반역이었습니다. 숲속의 사자가 포효하며 주변 짐승들을 위협하듯이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말씀을 거역하였습니다(8). 여호와의 소유인 이스라엘이 마치 원수를 대하듯 하나님께 소리를 지르고 덤볐습니다. 소유주의 권한과 능력을 무시하며 미움을 자초했습니다. 싫어하는 물건이 버려지듯이 미운 짓만 골라 하는 이스라엘도 버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어느 날 갑자기 이스라엘이 미워져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소유권을 전혀 무시했기에, 또 그분께 속하기를 완강하게 거절했기에 여호와는 소유권을 포기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이 없었습니다. “내가 내 집을 버리며 내 소유를 내던져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을 그 원수의 손에 넘겼다”(7). 그분의 집, 그분의 소유, 그분의 사랑하는 것이지만 그분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어쩌실 수 없었습니다. 반복적으로 사용된 여호와의 일인칭 소유격은 여호와의 실망과 안타까움과 단호함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남의 것’도 아닌 ‘내 것’이, ‘내가 애지중지하던 것’이 반역했습니다. 언제나 귀한 존재로 남아있길 기대했는데(참조, 3:19) 결과는 너무나도 참담했습니다. 세 개의 동사 ‘버리다’, ‘내던지다’, ‘넘기다’는 실망하신 여호와의 심판 의지가 얼마나 단호한지를 보여줍니다. ‘내 집’과 ‘내 소유’와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여호와의 집’은 일반적으로 여호와의 성전이나 가나안 땅을, ‘여호와의 소유’는 주로 가나안 땅을 가리키지만, 8-9절에 묘사된 소유주 여호와께 대드는 소유물의 모습은 셋 다 ‘여호와의 백성’으로 이해할 때 더 잘 어울린다.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은 문맥에서는 11:15 의 ‘나의 사랑하는 자’에 연결됩니다.

(2) 황무지가 된 땅(9-11a)

소유권의 부정은 보호의 박탈로 나타납니다. 여호와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이스라엘은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먹이를 채가려는 맹금을 다른 맹금들이 둘러싸고 공격하는 것처럼, 여호와를 배반한 이스라엘이 주변에서 기회를 노리던 사나운 적들의 희생물이 됐습니다(9). 여호와께서 들짐승을 불러 당신 소유를 삼키게 하셨습니다. 많은 목자가 ‘그분의 포도원’을 파괴하고, ‘그분의 몫’을 짓밟아 폐허로 만들었다(10). 여호와의 포도원에 비유되는 이스라엘은 이방 왕들에게 유린당해 황무지가 됐습니다. 폐허로 변한 예전의 경작지는 하나님을 향해 통곡할 뿐입니다(11a).

(3) 깨달음의 부재(11b)

상황이 더 절망적인 것은 땅의 황폐함 때문만은 아닙니다. 온 땅이 폐허가 됐는데도 이 일에 마음을 두는 자가 아무도 없다. 적들에 짓밟혀 황폐해진 경작지는 하나님을 우러러 탄식하는데, 포도원과 밭을 경작했던 자들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포도원이 어떻게 이처럼 황무지가 됐는지 관심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분노’에 관해 질문하는 자가 없습니다.

(4) 파괴자들의 침략(12)

12절은 10절의 구체적 기술입니다. ‘파괴하는 자들’은 ‘광야의 모든 벗은 산’을 넘어 쳐들어왔습니다. 아마도 요단 동편과 유다 남쪽의 광야로부터 공격해 들어온 것 같습니다. ‘여호와의 칼’은 침략자들이 여호와의 손에 들린 심판의 도구임을, 가나안의 황폐함이 여호와의 심판임을 다시금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5) 소출이 없는 농사(13)

여호와께서 보내신 적들이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휩쓸고 지나가기에 누구도 칼을 피해 안전하게 숨지 못합니다. 경작지가 완전히 황폐해졌기에 밀을 심어도 자라지 못하고 가시나무만 무성할 뿐입니다(13). 땀을 흘리며 수고해도 아무런 소득이 없습니다. 지혜문학의 전통에 따르면, 농부의 능력은 소출로 결정되기에 소출이 없는 농부는 능력이 없는 농부이고, 능력이 없기에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셨기에 땅은 저주를 받아 수확이 없고, 사람들은 수치를 면치 못합니다.

 

민족들의 심판과 구원(14-17)

누구든지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하고 구원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진리의 말씀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길 기대하십니다.

14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준 소유에 손을 대는 나의 모든 악한 이웃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그들을 그 땅에서 뽑아 버리겠고 유다 집을 그들 가운데서 뽑아 내리라 15내가 그들을 뽑아 낸 후에 내가 돌이켜 그들을 불쌍히 여겨서 각 사람을 그들의 기업으로, 각 사람을 그 땅으로 다시 인도하리니 16그들이 내 백성의 도를 부지런히 배우며 살아 있는 여호와라는 내 이름으로 맹세하기를 자기들이 내 백성을 가리켜 바알로 맹세하게 한 것 같이 하면 그들이 내 백성 가운데에 세움을 입으려니와 17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반드시 그 나라를 뽑으리라 뽑아 멸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4-17)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한 하나님의 예언은 유다 백성을 심판하기 위해 사용된 이방 민족들에게까지 미칩니다. 징계의 도구였던 이방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면 이방들을 약속의 땅에서 몰아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1) 심판과 구원(14-15)

여호와의 시선이 이스라엘에서 그 주변 나라들로 옮겨집니다.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도구로 사용해 당신의 소유 이스라엘을 심판하시지만, 민족들도 심판의 대상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심판이 민족들에게 면죄부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소유 관계(언약)를 부정해 징계를 받지만, 민족들은 여호와께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준 소유’에 손을 댔기에 자기 땅에서 뽑힘을 당합니다(14). ‘나의 모든 악한 이웃’은 10절에서 여호와의 포도원을 헐고 그분의 몫을 짓밟는 ‘많은 목자’와 12절에서 광야의 헐벗은 모든 산을 넘어오는 ‘파괴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나의’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민족들도 여호와의 통치 아래 있음을 시사합니다. 9-12절에서는 ‘여호와의 칼’로 사용되었던 민족들이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준 소유’를 건드렸다는 이유로 징벌을 받습니다. 민족들이 여호와의 심판의 도구이기는 하지만, 의로운 도구는 아니었습니다. 여호와는 민족들의 야욕을 잠시 이용했을 뿐입니다. 그들은 제 욕심에 따라 유다 땅을 침략해 들어와 여호와의 포도원을 마음대로 유린했습니다. 유다 백성을 탄압하고 ‘파괴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소유를 침해한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그들 역시 징벌을 받습니다. 당신의 소유권을 거절한 이스라엘을 폐허로 만드신 분께서 소유권을 침해한 악한 이웃을 그들의 땅에서 뽑아내십니다. 이스라엘의 경우처럼 민족들의 경우도 멸망이 여호와의 최종 목표는 아닙니다. 이들에게도 심판 이후에 구원이 주어집니다. “내가 그들을 뽑아낸 후에 내가 돌이켜 그들을 불쌍히 여겨서 각 사람을 그들의 기업으로, 각 사람을 그 땅으로 다시 인도하리니”(15). 여호와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각자 제 기업으로 돌아가게 해주십니다. 값없이 베푸시는 여호와의 모성적 사랑이 제 땅에서 뽑혀 남의 땅으로 유배당한 민족들에게 소망의 문을 열어주십니다. 이스라엘이 일찍부터 경험한 여호와의 긍휼을 민족들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기업’은 여호와께서 민족들에게도 땅을 상속재산으로 나눠주셨음을 시사해줍니다(참조, 신 32:8).

(2) 양자택일의 갈림길(16-17)

민족들의 귀향은 여호와께서 계획하신 구원 약속의 일부일 뿐입니다. 제 고향으로 돌아온 민족들에게 여호와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길도 열립니다. 이스라엘은 주변 민족들로부터 바알 숭배를 받아들여 멸망의 길로 나아갔지만, 민족들에게는 거꾸로 이스라엘로부터 여호와 종교를 배워 여호와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됩니다. 민족들이 ‘내 백성의 도를 부지런히 배우며 살아 있는 여호와라는 내 이름으로 맹세하면’ 그들 역시 여호와의 백성으로 세움을 받습니다(16). ‘내 백성의도’는 여호와께서 알려주셨지만 이스라엘이 따르지 않은 그분의 계명과 가르침을 가리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계시해주신 계명과 가르침을 배우면 민족들도 여호와의 백성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민족들이 ‘내 백성 가운데에’(16), 곧 이스라엘을 통해 구원의 소망을 얻게 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내 백성 가운데에’는 14절의 ‘그들 가운데서’와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민족들의 길을 배워 우상을 숭배하다가 ‘그들 가운데서’ 뽑혀 유배를 갔습니다. 반대로 민족들은 이스라엘과 접촉하면서 이들로부터 여호와 종교를 배워 ‘내 백성 가운데에’ 세움을 입습니다. 여호와 종교의 문호가 민족들에게 개방되면서 이들의 결단이 중요해졌습니다. 개종의 기회를 잡아 여호와를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면 그분의 보호와 축복 아래 살고, 주어진 기회를 거절하고 그분께 순종하지 않으면 뿌리째 뽑혀 멸망합니다(17). 여호와 백성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핵심 요인이 전통과 혈통에서 고백과 순종으로 바뀌는 장면입니다.


죄의 결과는 죽음의 심판입니다. 그러나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심판받는 영혼들을 보시면서 고통으로 탄식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러한 고통을 이해한다면 우리 가운데 있는 악의 어떠한 모양이라도 버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심판하시는 목적 은 결코 파멸이 아닙니다. 죄인들이 죄에서 돌이켜 구원의 길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죄인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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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12-01)


예레미야를 죽이려는 고향 아나돗 사람들

예레미야 11장 18절-12장 6절


 
성도들이 하나님을 위해 봉사를 할 때, 여러 가지 모양의 고난이 있습니다. 자기가 뜻하지 않는 위기를 당할 때도 있고 또 핍박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교회를 섬길 때도 여러 가지 모양의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이러한 어려움을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합니까?
 
유다 백성은 여호와의 심판을 선포하는 예레미야에게 맞서며, 그를 제거할 음모를 꾸밉니다. 홀로 남겨진 예언자는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여호와께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며 도움을 간구합니다.
 

첫 번째 예언자의 탄식과 여호와의 응답(18-23)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 때 당장은 손해를 보고 억울한 일들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말씀과 공의대로 살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과 함께하십니다. 주님을 따르느라 어려움을 당하고 두려움을 느낄 때, 믿음으로 하나님께 맡기시길 바랍니다.
18여호와께서 내게 알게 하셨으므로 내가 그것을 알았나이다 그 때에 주께서 그들의 행위를 내게 보이셨나이다 19나는 끌려서 도살 당하러 가는 순한 어린 양과 같으므로 그들이 나를 해하려고 꾀하기를 우리가 그 나무와 열매를 함께 박멸하자 그를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끊어서 그의 이름이 다시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함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20공의로 판단하시며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원통함을 주께 아뢰었사오니 그들에게 대한 주의 보복을 내가 보리이다 하였더니 21여호와께서 아나돗 사람들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네 생명을 빼앗으려고 찾아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 하도다 22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청년들은 칼에 죽으며 자녀들은 기근에 죽고 23남는 자가 없으리라 내가 아나돗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곧 그들을 벌할 해에니라(18-23)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곧 유다인들의 반발을 일으켰습니다. 고향 아나돗 사람들이 강하게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반발했습니다. 유다인들은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견딜 수 없었습니다. 예레미야가 그들의 멸망을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1) 예언자의 탄식(18-19)
예레미야의 탄식은 모르고 있던 사실을 알게 된 것에 관한 언급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알려주셔서 예레미야는 ‘그들의 행위’를 알게 됐습니다(18). 알게 된 내용보다 알려주신 주체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행위’는 19절에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 ‘그들’의 정체는 21절에서 여호와의 입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이로 인해 남도 아닌 고향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제거할 음모를 꾸몄습니다. 여호와께서 알려주셔서 예레미야는 뒤늦게야 자신을 살해하려는 이들의 악한 계획을 알게 됐습니다. 예레미야는 인지하지 못했지만, 여호와는 당신의 예언자를 죽이려는 자들의 행위를 다 보고 계셨습니다. 예레미야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주변에는 도움의 손길이 없었지만, 위에는 그를 지키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1:8)는 약속에 따라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와 함께하셨습니다.
주인의 손에 이끌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의 비유는(19) 예레미야가 고향 사람들의 배반에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를 보여줍니다. ‘순한’으로 옮긴 ‘알루프’는 ‘신뢰하는 (사람)’, 또는 ‘잘 길들여진’을 의미합니다(참조, 3:4; 13:21). 제 운명도 모르고 신뢰하는 주인의 손에 이끌려 도살장으로 가는 어린 양처럼, 예레미야는 주변 사람들이 음모를 꾸미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을 신뢰하기까지 했습니다. 잘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습니다. 이들의 음모는 단순한 위협이 아닙니다. 이들은 ‘나무와 열매를 함께’ 잘라버려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끊어서 그의 이름이 다시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고 모의했습니다(19b). 이들은 예레미야의 생명뿐만 아니라 그의 흔적마저 없애버리려 했습니다. 이들은 여호와께서 출생 전부터 예언자로 성별한(1:5) 예레미야를 마치 세상에 없던 존재로 만들려 했습니다.
(2) 예언자의 호소(20)
고향 사람들이 예레미야의 대적이 되었기 때문에 예레미야에게는 최고 재판관이신 여호와께 호소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이 없었습니다. 그는 어디에서도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그는 공의로 판단하며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개입하셔서 적들에게 복수해주실 것을 간구합니다(20). 그런데 불의한 폭력에 희생당한 자가 여호와께 간구하는 ‘보복’은 단순히 사적인 앙갚음이나 한풀이가 아닙니다. 이는 신적 정의의 실현과 깊이 관련이 있는 법적 용어에 해당합니다. 죄인의 멸망과 의인의 구원이 여호와의 공의에 속한다는 측면에서, 불의한 가해자의 징계는 의로운 피해자의 무죄에 대한 반증이 됩니다. 다시 말해, 복수 요청은 무죄 인정을 의미합니다.
(3) 여호와의 답변(21-23)
뒤늦게 여호와의 입을 통해 대적의 정체와 이들이 예언자를 죽이려 한 이유가 알려집니다. 아나돗의 고향 사람들이 예레미야의 생명을 위협하면서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하고 예언 금지를 명했습니다(21). 문맥에 따르면, 아나돗 사람들은 언약 파기를 주장하는 예레미야를 거짓 예언자로 간주하고 신명기 율법(신 13:1-5)에 따라 그를 죽이려 했던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언약의 파기나 성전의 멸망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선포할 수 없는 예언이었던 같습니다(참조, 26:8-9, 11). 그러나 예레미야의 목숨을 노린 아나돗 사람들에게 멸망의 심판이 선포됩니다(22-23). 청년들은 적들의 칼에 맞아 죽고, 아이들은 기근으로 굶주려 죽을 것입니다. 예언자를 죽이려 한 자들뿐만 아니라, 집안의 미래를 짊어질 청년과 어린 아이까지도 모두 멸망에 떨어집니다. 아나돗 사람들은 예외 없이 모두 재앙에 떨어집니다. ‘벌할 해’는 예레미야가 간청한 ‘주의 보복’에 응답하여 여호와께서 당신 공의에 따라 유다를 심판하시는 해입니다.
 

두 번째 예언자의 탄식과 여호와의 응답(12:1-6)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믿음으로 승리하도록 성도들을 강하게 무장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이 사역을 맡은 일꾼은 고난 속에서도 끝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역하는 일꾼들에게는 세상의 핍박과 유혹이 언제나 찾아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고 충성을 다하는 신실한 일꾼들이 되길 기대하고 격려해 주십니다.
1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 2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 3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보시며 내 마음이 주를 향하여 어떠함을 감찰하시오니 양을 잡으려고 끌어냄과 같이 그들을 끌어내시되 죽일 날을 위하여 그들을 구별하옵소서 4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이 땅 주민이 악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나중 일을 보지 못하리라 함이니이다 5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 강 물이 넘칠 때에는 어찌하겠느냐 6네 형제와 아버지의 집이라도 너를 속이며 네 뒤에서 크게 외치나니 그들이 네게 좋은 말을 할지라도 너는 믿지 말지니라(1-6)
예레미야는 마음속에 품은 의문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와 변론하실 때마다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제 예레미야는 또다시 하나님께 자기가 품고 있던 의문을 제기합니다.
(1) 예언자의 간구(1-2)
예레미야는 이번에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질문합니다. 그는 먼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공의와 경험적 현실 사이의 괴리에 관해 그분의 의견을 묻습니다.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1). 악한 자의 부유함과 평안함이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의문을 품게 만들었습니다. 예레미야가 아는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기에, 불의한 자의 승리와 의로운 자의 고난은 그의 하나님 이해에 상충됐습니다. 예레미야는 마음은 딴 곳에 두고 오직 입으로만 섬기는 악인의 승리에서 하나님의 연루(連累)를 보았습니다.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습니다”(2a).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에 악인이 뿌리를 깊이 내리고 많은 열매를 맺는 나무처럼 성공과 번영을 누리는 것이 아니냐고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2) 예언자의 간구(3)
예레미야의 이러한 문제 제기는 의인이 복을 받고 악인이 화를 받는다는 인과응보의 법칙에 근거하고 있었습니다. 의인이 복을 받기에 복을 받은 자는 의인이 되고, 악인이 화를 받기에 화를 당한 자는 악인이 됩니다. 이를 예레미야에게 적용하면, 사역의 결실이 없는 예레미야는 복을 받지 못한 자가 됩니다. 즉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보내지 않은 거짓 예언자입니다. 인과응보의 법칙에 따라 거짓 예언자가 된 예레미야는 의로우신 재판관인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열매가 아니라 당신을 향한 마음을 살펴 판단하시는 분임을 알기에 예레미야는 자신의 무죄(하나님에 의한 인정받음)를 확신하고 악인의 징벌을 요청합니다(3).
예레미야의 보복에 대한 간구는 정의 구현의 부정적 표현입니다. 박해하는 자의 멸망은 박해당하는 자의 의로움을 입증해주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3절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의 표상과 18절의 동사 ‘구별하다’에 의해 1:5과 연결됩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예언자로 구별됐고, 그를 박해하는 자들은 도살장으로 끌려가 죽임을 당할 양으로 구별됐습니다.
(3) 예언자의 탄식(4)
예레미야의 시선이 이번에는 악인들로 인해 신음하는 땅으로 향합니다. 땅이 통곡하고 온 들판의 풀이 메말라버립니다. 또 먹을 것을 찾지 못해 가축과 새는 죽어갑니다(4). 땅이 저주받고 생존 기반은 완전히 파괴됩니다. 악인들은 자신들로 인해 땅이 저주를 받았는데도 전혀 상관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그가 우리의 나중 일을 보지 못하리라’(4)하고 떠듭니다. 이들은 파국적 재앙에 직면해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마음은 멀고 입만 가까운 자들의 삶에는 하나님의 자리가 없었습니다.
(4) 여호와의 답변(5-6)
여호와께서 예언자의 탄식에 책망의 말씀으로 응답하십니다(5). 걷는 자의 뒤를 따라가기도 어려워한다면 질주하는 말과는 어떻게 겨루어 이길 수 있겠느냐? 안전한 곳에만 있으려 한다면 맹수가 우글거리는 요단의 울창한 숲에서는 어떻게 하려느냐? 지금의 어려움은 사소한 것인데도 이처럼 불평불만을 토로한다면, 앞으로 있을 심각한 위험과 박해는 도대체 어떻게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가 제기한 당신 공의에 대한 문제에는 답변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명령하는 대로 따를 것(참조, 1:7)을 강권하십니다.
주제에 있어 11:21-23에 연결되는 6절은 ‘요단의 울창한 숲’의 구체적인 사례가 됩니다. 예레미야는 집안에서도 버림을 받습니다. 집안의 보호는커녕 핍박당합니다. 고향뿐만 아니라 집안마저도 그의 대적이 됐기에 에레미야는 고아와 같은 신세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자를 맞이하는 것은 오직 적들의 폭력과 음모와 박해뿐입니다. ‘네 뒤에서 크게 외치나니’는 것 같습니다. 핏줄을 함께한 집안사람들의 위협이나 감언이설에도 흔들리지 말고, 예레미야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가야 합니다.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부르신 하나님만 그의 편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원하는 성도들에게 고난은 늘 찾아옵니다. 우리는 죽음의 위협과 핍박, 악인들의 형통을 보면서 갈등을 겪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해답이 있습니다. 하나님꼐서 악인을 심판하십니다. 당신의 백성을 지켜 주십니다. 이 약속을 신뢰함으로 모든 상황 속에서 넉넉히 승리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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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11-02)


유다의 반역과 재앙

예레미야 11장 9-17절


반역이란 받은 호의를 배신하고 도리어 악한 음모를 꾸미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 사이에 반역이 있다고 선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부어 주셨지만 그들은 성읍 수만큼의 우상을 만들고 바알에게 분향함으로 하나님께 반역ㅇ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반역한 유다에게 하나님께서 내리신 재앙은 무엇입니까?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반역했습니다. 언약의 규정을 따르지 않고 우상들을 섬기면서 언약을 깨뜨렸습니다. 그들은 언약에 따른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을 거절했습니다. 그 결과는 치명적입니다. 언약을 파기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자주 아래 놓이게 됐습니다.

 

언약의 파기(9-14)

하나님께서는 기도에 응답하지 않음으로써 우리가 어떤 길에 서 있는지 보게 하시고 깨닫게 하십니다. 만약 내 기도가 응답 되지 않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행여 돌이켜야 할 죄가 없는지 진지하게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다시금 죄로부터 돌이켜 하나님께 회개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접하고, 또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자비로운 사랑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9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 중에 반역이 있도다 10그들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한 자기들의 선조의 죄악으로 돌아가서 다른 신들을 따라 섬겼은즉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이 내가 그들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깨뜨렸도다 11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피할 수 없을 것이라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인즉 12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주민이 그 분향하는 신들에게 가서 부르짖을지라도 그 신들이 그 고난 가운데에서 절대로 그들을 구원하지 못하리라 13유다야 네 신들이 네 성읍의 수와 같도다 너희가 예루살렘 거리의 수대로 그 수치스러운 물건의 제단 곧 바알에게 분향하는 제단을 쌓았도다 14그러므로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거나 구하지 말라 그들이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내게 부르짖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서 듣지 아니하리라(9-14)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순종하기 쉽지 않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보살펴 달라 기도하지도 말고, 도와 달라는 호소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더 이상 그들을 위한 부르짖음을 들어주지 않겠다고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1) 반역의 고발(9-10)

여호와의 시선이 과거에서 다시 현재로 옮겨집니다. 불순종의 완악함에 있어 현세대는 조상들보다 더했습니다.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이 여호와께 ‘반역’을 꾀했습니다. ‘반역’으로 옮긴 ‘계쉐르’는 권력 찬탈을 목적으로 일으키는 정변을 가리킵니다. 언약을 통해 하나님 백성이 된 이스라엘이 자기 하나님의 통치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이들은 “내 말 듣기를 거절한 자기들의 선조의 죄악으로 돌아가서” 다른 신들을 쫓아다니며 섬겼습니다(10b). 조약을 체결하고 주군을 섬기던 봉신이 다른 주군을 찾아 말을 갈아타는 것처럼, 여호와의 봉신이던 유다와 예루살렘이 그분의 종주권을 거절하고 다른 신들을 주군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여호와만을 섬겨야 할(참조, 츨 20:3, 신 5:7) 그분 백성이 이방 신들의 신하가 됐습니다. 이들의 반역으로 여호와께서 이들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이 깨졌습니다(10b), 긴장과 충돌 가운데 겨우 유지되던 언약 관계가 결국은 우상숭배의 암초에 걸려 난파했습니다. ‘자기들의 선조의 죄악으로 돌아가서’(10a)가 일반적 언급인지 또는 역사적 배경을 반영하는 언급인지는 불분명합니다. 전자의 경우라면, 불순종의 반역에 있어 현세대는 조상들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우상숭배는 출애굽부터 계속된 반역으로, 차라리 언약 백성의 본성에 속했습니다. ‘돌아가서’에 주목하는 후자의 입장은 여기서 아버지 요시야의 개혁을 되돌린 여호야김에 대한 고발을 읽어냅니다. 언약을 깨뜨린 주체로 ‘유다 집’과 함께 이미 주전 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한 ‘이스라엘 집’이 나옵니다. 여호와를 배반하고 다른 신들을 섬겨 언약을 깨드렸다는 점에서 유다나 이스라엘이나 차이가 없었습니다. 언약의 의무를 준수하지 않아 이스라엘이 멸망했다면, 마찬가지로 언약의 의무를 저버린 유다의 운명도 다를 수 없습니다.

(2) 재앙의 선포(11-12)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주권에 반기를 들고 언약을 깨뜨린 자들에게 재앙을 선포하십니다. “보라 내가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피할 수 없을 것이라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이다”(11). 여호와께 부르짖을지라도 그분께서 듣지 않으시기에 치명적입니다. 이스라엘 쪽에서 여호와를 찾을 수 있는 길이 없어졌습니다. 예언자의 중보기도도 금지됐고(14), 제사도 그 기능을 상실했습니다(15). 여호와께서 내리시는 재앙을 그대로 받지 않을 수가 없게 됐습니다. 여호와께서 응답하지 않으시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주민’은 ‘다른 신들’을 찾아가 살려달라고 울부짖겠지만, ‘그 신들이 그 고난 가운데에서 절대로 그들을 구원하지 못한다’(12).

(3) 바알숭배의 고발(13)

재앙이 임했을 때 우상의 실체가 확실히 드러납니다.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이 그처럼 열심히 향을 피우고 섬겼던 이방 신들이 진짜 신이라면, 여호와께서 내리신 재앙 때문에 부르짖는 자들을 구원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수치스러운 물건’에 불과한 우상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수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백성으로 출발한 이스라엘이 언약을 깨뜨리고 본질이 ‘수치’인 우상을 섬기다가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우상숭배가 이미 조상의 죄악인데 재앙이 현세대에 임할 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유다야 네 신들이 네 성읍의 수와 같도다 너희가 예루살렘 거리의 수대로 그 수치스러운 물건의 제단 곧 바알에게 분향하는 제단을 쌓았도다”(13). 유다와 예루살렘이 우상들에게 점령당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우상의 제단뿐입니다. 여호와께서 당신 백성 가운데 ‘이방 신’이 되셨습니다. 어느 구석진 곳에 남겨져 온갖 우상들과 동거하시든지, 그렇지 않으면 당신을 쫓아내고 우상들로 채운 유다와 예루살렘을 심판하시든지 무엇인가 하셔야 했습니다. ‘내 목소리를 순종하라’는 경고가 더는 무의미해졌기 때문에, 언약의 하나님은 반역을 심판하기로 결정하십니다. 숭배자들을 수치에 빠뜨리기에 우상은 ‘수치스러운 물건’이고, ‘수치스러운 물건’이기에 숭배자들에게 수치만 가져다줍니다. 바알은 가나안의 풍요 제의를 주관하는 신의 이름이지만, 여기서처럼 때로는 이스라엘이 섬긴 모든 우상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4) 중보기도의 금지(14)

중보는 예언자의 역할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예언자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에게 선포하는 것이었지만, 예언자는 때로는 백성 편에서 하나님께 간구하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중보자로 모세(참조. 출 31:11; 34:9; 민 11:2)와 사무엘(참조, 삼상 7:8-10;12:19,23)을 들 수 있습니다(참조. 렘 15:1). 이들은 모두 중보기도를 통해 여호와의 진노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드고아 출신으로 북왕국에서 예언 활동을 했던 아모스도 중보기도로 여호와의 심판을 일시적으로 연기할 수 있었습니다(참조. 암 7:2-3, 5-6). 그러나 예레미야는 하나님으로부터 중보기도의 금지를 명령받습니다.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거나 구하지 말라 그들이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내게 부르짖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서 듣지 아니하리라”(14). 이미 하나님께서 ‘피할 수 없는’ 재앙을 결정하시고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을 선언하셨기에(11), 예레미야의 중보기도를 들어주실 수 없게 됐습니다. 현세대의 반역과 우상숭배는 그분의 인자와 긍휼과 인애에 호소하기에도 그 한계를 너무 멀리 벗어났습니다. 언약관계를 완전히 짓밟아버린 유다와 예루살렘에게는 오직 멸망의 재앙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피할 수 없는 재앙(15-17)

물질에 마음을 빼앗겨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에서 멀어져 있다면 그것이 곧 우상숭배입니다. 이러한 죄악을 저지르는 사람들에게서 하나님께서는 복을 거두십니다.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재앙이 닥치기 전에 하나님께 돌이키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우상을 모두 내어버리고 하나님 백성다운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15나의 사랑하는 자가 많은 악한 음모를 꾸미더니 나의 집에서 무엇을 하려느냐 거룩한 제물 고기로 네 재난을 피할 수 있겠느냐 그 때에 네가 기뻐하겠느냐 16여호와께서는 그의 이름을 일컬어 좋은 열매 맺는 아름다운 푸른 감람나무라 하였었으나 큰 소동 중에 그 위에 불을 피웠고 그 가지는 꺾였도다 17바알에게 분향함으로 나의 노여움을 일으킨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의 악으로 말미암아 그를 심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에게 재앙을 선언하셨느니라(15-17)

유다 백성의 반역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재앙을 선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감람나무와 같이 심고 가꾸셨습니다. 감람나무는 풍요의 상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말할 수 없이 풍성한 복을 하나님께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경멸하시는 바알을 불러들였습니다.

(1) 제의의 고발(15)

이스라엘이 자랑하고 의지하는 제사와 신학적 전통도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 앞에서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백성’으로 택한 자들이 언약을 깨뜨리고, 그분께서 ‘나의 사랑하는 자’로 부르시는 자들이 제사를 남용합니다. 이들은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고 있으면서도 성전을 찾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거룩한 제물 고기’(기름진 짐승과 거룩한 고기)로 재앙을 비켜지나가게 할 수 있다고 믿지만, 이는 그들의 착각일 뿐입니다(15). ‘이 언약의 말’에 순종함이 없이 드려지는 제사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의 행사에 불과합니다. 이스라엘이 언약 백성으로 남아있을 때, 곧 언약의 규정을 준수할 때만 제사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유용한 통로가 됩니다.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신학적 전통도 언약을 깨뜨린 자들에게는 과거의 유물일 뿐입니다.

(2) 신학적 특권의 고발(16)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좋은 열매 맺는 아름다운 푸른 감람나무’로 부르셨던 시절은 지나갔습니다(16). 감람나무가 귀하기는 하지만, ‘좋은 열매’가 아닌 “악한 음모”를 맺는 감람나무는 쓸모없는 나무로 불에 살라질 뿐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계속 유효하기 위해서는 그 선택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형식화한 제의적 경건은 차라리 재앙을 더할 뿐입니다. ‘큰 소동’은 징계의 심판이 전쟁으로 집행될 것을 시사해줍니다. 제사가 그 효력을 상실하고 아름다운 감람나무가 불쏘시개가 될 때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3) 재앙의 선언(17)

하나님께서 손수 심으신 나무인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이 바알을 숭배하며 그분을 화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17; 참조. 12-13).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하나님께서 심으신 나무라면, 이들은 그분께 뿌리를 내리고 그분 말씀을 섭취해 성장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언약 백성의 정체성을 벗어던지고 뿌리를 바알에게로 돌렸습니다. 바알에게 뿌리를 뻗은 나무가 됐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나무에 불을 붙여 태워버리기로 결정하십니다.


성도들은 침묵하는 우상이 아닌 말씀하시며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은 하나님께 반역했습니다. 한 분 왕을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로 간 것입니다. 조상들이 그렇게 하다가 망한 것을 보고도 똑같이 언약을 파괴했습니다. 그들은 몰랐다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 역사와 성경에 오늘 내가 범하는 것과 같은 죄와 그 결과가 셀 수 없이 많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자기 성읍 수만큼 각양각색의 우상을 만들었지만, 정작 도움이 필요할 때는 도와줄 수 없었습니다. 부르짖어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 동안 자기 욕망의 소리에 자신이 귀를 기울이고 있었을 뿐, 그 욕망이 좌절되자 더 이상 들을 소리가 없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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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11-01)


구원과 심판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예레미야 11장 1-8절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그 사람 중에는 부부, 가족, 친구 그리고 연인과 같은 특별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과 특별한 사랑을 나누며, 특별한 관계를 통해 신실한 관계를 세워갑니다. 한쪽에서 신실함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다른 쪽에서 신실함을 같지 않을 때, 상처를 주고받게 되어있습니다. 그런 인간관계 속에서 서로에 신실함이 얼마나 소중한 것임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신실하신 분이지만, 사람들은 신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을 신실함으로 초대하십니다. 하나님과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는 오늘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돌아보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은 언약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그 때문에 유다가 언약을 깨뜨리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깨어집니다. 반대로 유다가 언약을 지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집니다. 관계가 회복 되어지면 하나님께서 언약을 따라 유다를 지켜주시고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간절히, 부지런히 그들을 경계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듣지 않고 강퍅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떠나 결국 저주의 심판을 자초합니다.

 

언약의 말씀(1-5)

하나님께서는 언약에 신실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언약에 신실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의 핵심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요,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 이스라엘에게 그들을 파멸에 이르게 하십니다. 이러한 내용을 예레미야에게 언약의 말씀을 전하고 그 말씀을 유다 백성들에게 전하라고 하십니다.

1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이라 이르시되 2너희는 이 언약의 말을 듣고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말하라 3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이 언약의 말을 좇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 4이 언약은 내가 너희 열조를 쇠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던 날에 그들에게 명한 것이라 곧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5내가 또 너희 조상들에게 한 맹세는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리라 한 언약을 이루리라 한 것인데 오늘이 그것을 증언하느니라 하라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여 이르되 아멘 여호와여 하였노라(1-5)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다 땅 구석구석을 다니며 말씀을 전해야 했습니다. 당시 유다 땅은 우상 숭배로 완전히 더럽히져, 사람들은 영적 어둠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타락한 사람들에게 결코 축복의 말씀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1) 도입부(1-2)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이라 이르시되”(1)는 예레미야서에 네 번 더 등장하는데(7:1;18:1;21:1;30:1), 1-14절의 범위를 넘어 아마도 11장부터 17장까지를 하나의 대 단락으로 묶어주는 것 같습니다. 그 안에 모아진 다양한 말씀을 모두 예레미야가 선포한 여호와의 말씀으로 읽도록 안내해줍니다. 예레미야에게 말씀 선포의 명령이 주어지기 전에 먼저 청자'너희에게 주는 권면의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이 언약의 말을 들어라)”(2a). 처음부터 ‘너희의 들음’을 강조합니다. ‘이 언약의 말(들)’은 세 번 더 나오는데(3,6,8), 그 내용에 관해서는 달리 언급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잘 알고 있음을 전제합니다. 출애굽 때 맺은 언약이기에 본문의 언약은 시내산 언약입니다. ‘말(들)’은 언약을 체결하면서 주어진 율법 또는 규정으로, 특히 십계명으로 집약됐습니다. 이 단락에 모두 아홉 번 사용된 ‘들음’은 청각적 행위를 넘어 실천적 순종까지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6절은 분명하게 ‘너희는 이 언약의 말을 듣고 지키라’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 언약 백성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언약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 곧 언약 규정을 준수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 언약의 말’을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선포해야 합니다(2b). 언약 백성 모두가 듣고 순종하도록 해야 합니다.

(2) 언약 이행의 경고(3-5a)

“이 언약의 말을 따르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3). 2절의 긍정적인 권면이 부정적인 경고의 말씀으로 뒤바뀝니다. 7-8절은 저주의 선포로 시작하는 이유를 잘 보여줍니다. 불순종은 출애굽 때부터 계속된 악행으로, 지금 유다의 모습도 이전 세대의 악한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예전 세대가 불순종으로 저주를 받았다면, 여전히 ‘이 언약의 말’을 따르지 않는 지금 세대도 저주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심판은 필연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이 듣고 실천해야 할 ‘이 언약의 말’은 어느 날 갑자기 일방적으로 이들에게 던져진 짐이 아닙니다(4절은 3절의 ‘이 언약의 말’에 걸리는 관계절이기에 ‘이 언약 대신에’, ‘이 언약의 말’로 첨가해야 한다). ‘이 언약의 말’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던 날에 그들에게 내린 명령이었습니다(4a).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하신 분께서 주신 것이 언약의 규정입니다. 그래서 ‘이 언약의 말’은 어쩔 수 없이 짊어져야 할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다시는 세상 강자의 짐에 짓눌리지 않고 자유로이 살게 해주신 은혜의 짐입니다. 4절은 여호와의 명령의 구체적 내용입니다.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 출애굽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이후 이스라엘은 언약 규정을 준수함으로 출애굽의 구원사를 일상적인 삶에서도 경험하게 됩니다. 애굽을 수식하는 ‘쇠풀무’는 쇠를 녹이는 용광로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혹독하게 당했던 고난의 종살이를 보여주는 비유적 표현입니다. 출애굽 사건을 언약 규정의 준수 안으로 끌어들인 다음에, 이번에는 이를 땅의 약속에 연결 시킵니다. “이는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겠다고 한 맹세를 지키기 위함인데, 오늘날 (너희가 보는) 대로다”(5a, 사역). 언약 관계가 조상들에게 맹세로 준 땅에 관한 약속의 성취로 나타납니다. 여호와의 맹세는 가나안 점령으로 정점에 도달하기는 하지만. 그 효력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이 ‘너희 하나님’의 의지에 순종하여 언약 규정을 지키면,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조상들에게 맹세한 그분의 약속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분의 맹세는 가나안에서의 안정적인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전제 조건인데, 이 전제 조건은 유다와 예루살렘이 가나안에서 언약 규정을 준수하며 산다면 충족됩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이 조상들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나안에 살고 있음은 하나님께서 당신 약속에 얼마나 신실하신 분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분은 약속을 계속 지켜나가길 원하시기에, 선택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손에 달렸습니다. 이들이 언약 규정을 준수한다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약속은 앞으로도 유효하고, 불순종한다면 그 효력이 끝나버리게 됩니다.

(3) 예레미야의 화답(5b)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중에 뜻밖에도 예레미야가 ‘아멘 여호와여’로 화답합니다(5).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주신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를 표합니다. 예레미야의 예외적 반응은 3절의 저주 선언과 함께 살펴질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저주와 예언자의 응답은 형식적인 측면에서 신명기 27:14-26의 레위인의 저주 및 이스라엘 백성의 응답과 일치합니다. 모세는 레위인들에게 열두 가지 저주를 선포하도록 명령하고, 각각의 저주 선언에 백성이 아멘으로 화답하도록 가르칩니다. 여기서는 예레미야가 백성을 대신하여 ‘아멘 여호와여’라고 화답하면서, 불순종한 자들에게 언약 파기의 저주가 임할 것을 인정합니다.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이스라엘의 조상에게 전한 저주의 말씀이 예레미야 시대에 현재화합니다. 여호와께서 ‘이 언약의 말’을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전하게 하셨다는 점에서 예레미야는 또 모세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합니다.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에게 율법(언약 규정)을 전달한 모세의 후계자가 됩니다.

 

언약에 따른 저주(6-8)

교회에서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고 봉사할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 매일 말씀에 순종함으로 거룩한 살을 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할지라도 말씀에 대한 불순종은 모든 종교 행위를 무가치하게 만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순종할 때 선한 열매와 복된 은혜의 선물을 넘치게 주실 것입니다.

6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말로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선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 언약의 말을 듣고 지키라 7내가 너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간절히 경계하며 끊임없이 경계하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라 하였으나 8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각각 그 악한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에게 행하라 명령하였어도 그들이 행하지 아니한 이 언약의 모든 규정대로 그들에게 이루게 하였느니라 하라(6-8)

형식상 3b-5절이 ‘이 언약의 말’을 선포하는 여호와와 듣고 화답하는 예레미야 사이의 개인적인 대화라면, 6-8절은 예레미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선포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1) 언약 준수의 요청(6)

여호와께서 다시금 예레미야에게 선포를 명령하시는 6절은 2절을 대체적으로 만복하고 있습니다. 선포의 청자(‘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대신 장소(‘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가 나오고, 동사 ‘듣고’에 하나가 더 첨가되어 ‘듣고 지키라’로 확대되면서, 말씀에 대한 순종적 실천이 더욱 강조됩니다.

(2) 조상들의 불순종(7-8a)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은 출애굽 세대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모든 세대도 포함하는 언약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언약 규정의 준수도 모든 세대의 의무에 속했습니다. 시내산 언약은 쌍무적 조건적 언약이었기에 언약 규정의 준수를 통해서 그 효력을 지속시켜나갈 수 있었습니다. 언약의 한 당사자인 이스라엘이 언약 규정을 무시한다면 언약관계는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대와 달리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언약에 전혀 신실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너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간절히 경계하며 끊임없이 경계하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라 하였으나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각각 그 악한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하였다.”(7-8a)

(3) 불순종에 따른 주저(8b)

거듭 예언자들을 보내 경고하고 위협하며 순종을 요청했지만, 이스라엘은 전혀 듣지 않았습니다. 조상들은 여호와의 경고를 무시하고 완강하게 제 악한 생각을 따랐습니다. 불순종의 완악함은 일시적 이탈이 아니었습니다. 출애굽 때부터 오늘까지 계속된 불치의 병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당신 목소리에 순종하게 해보려는 여호와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가능성으로 선포된 “이 언약의 말을 따르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3)가 필연이 됐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행하라 명령하였어도 그들이 행하지 아니한 이 언약의 모든 규정대로 그들에게 이루게 하였느니라”(8), 집행된 저주의 내용에 관해서는 본문이 침묵하기에 알 수 없고, 분명한 것은 언약 규정의 불순종이 저주를 초래했다는 점입니다(불순종에 따른 저주의 구체적 내용은 신명기 28:15-68에 나온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규정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자신들의 악한 욕망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은 인간의 타락한 욕망의 노예로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표준으로 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절대적 표준으로 삼으시길 바랍니다. 매일 말씀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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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10-02)


피할 수 없는 예루살렘의 멸망

예레미야 10장 17-25절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가장 잘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어떤 분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모르고 신앙생활을 하면 기복신앙을 갖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잘 알 수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많은 부분에서 우리에게 당신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고 그 하나님을 올바로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확정됐습니다. 여호와께서 극적으로 구해주시리라 기대한다면, 이는 착각일 뿐입니다. 그분께서 멸망과 유배를 결정하셨기에 다른 선택은 없습니다. 유다는 이제 필요한 물품을 미리 싸놓고 유배를 준비해야 합니다.

 

피할 수 없는 멸망(17-22)

우리는 형통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자기 인생이 불행해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유다가 우상을 숭배한 이유도 형통하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생각한 형통이란 다산과 풍요였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헛되고 무가치한 우상을 좇으면 유다의 같이 패망합니다. 반면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복을 누립니다. 인생의 참된 복은 창조주 하나님을 인전하는 믿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17에워싸인 가운데에 앉은 자여 네 짐 꾸러미를 이 땅에서 꾸리라 18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 땅에 사는 자를 이번에는 내던질 것이라 그들을 괴롭게 하여 깨닫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19슬프다 내 상처여 내가 중상을 당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라 이는 참으로 고난이라 내가 참아야 하리로다 20내 장막이 무너지고 나의 모든 줄이 끊어졌으며 내 자녀가 나를 떠나가고 있지 아니하니 내 장막을 세울 자와 내 휘장을 칠 자가 다시 없도다 21목자들은 어리석어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므로 형통하지 못하며 그 모든 양 떼는 흩어졌도다 22들을지어다 북방에서부터 크게 떠드는 소리가 들리니 유다 성읍들을 황폐하게 하여 승냥이의 거처가 되게 하리로다(17-22)

예레미야는 적군에게 포위되어 성안에 갇힌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그 땅을 심판하실 것을 선포하십니다. 그들은 이제 짐을 꾸리고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심판에 대해 괴로워하시며 통곡하십니다.

(1) 심판 선고(17-18)

처음 두 절은 포위당한 예루살렘(과 유다)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역사적 배경으로는 주전 597년의 제1차 유배, 또는 주전 587년의 제2차 유배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에워싸인 가운데에 앉은 자’, 곧 예루살렘이 적들의 포위 공격에서 벗어날 길은 없습니다. 항복을 하건 함락당하건 적들에 사로잡히는 것은 기정사실입니다. 그래도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유배를 대비하여 짊을 꾸려놓으면 조금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17). 주전 701년 앗수르 왕 산헤립에게 포위됐다가 극적으로 구원을 받은 놀라운 일(참조, 사 36-37장)을 다시 기대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을 대적에게 넘겨주기로 하신 여호와의 이번 결정은 변경될 수 없습니다. “내가 이 땅에 사는 자를 이번에는 내던질 것이라”(18). 용사나 목자가 적이나 짐승을 향해 물매로 돌을 던지듯이 여호와께서 주민들을 단호하게 내던지십니다. 먼 이방 땅으로 쫓겨나는 유례없이 혹독한 재앙입니다. 여호와로부터 오는 괴로움이기에 이를 피할길도 없고, 그분께 도움을 간구할 수도 없습니다(18b).

(2) 일인칭 탄식(19-20)

다음 두 절은 이미 포위가 끝나고 유배지로 쫓겨나는 장면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앞에서 선포한 위협이 현실화됐습니다. 예루살렘을 대변하는 ‘나’가 장막의 표상을 사용해 처참한 현실을 탄식합니다. “나의 상처로 내게 화가 미쳤구나! 나의 부상이 심하다”(19). 회복을 기대할 수 없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는데 고통을 호소할 데도, 도움을 요청할 데도 없습니다. 자신이 짊어져야 할 운명으로 받아들이기는 하지만(19b), 그래도 모든 것이 절망적입니다. 예루살렘의 처지는 사납게 휘몰아치는 폭풍우나 적들의 갑작스러운 습격으로 줄이 끊어지고 휘장이 찢겨, 완전히 훼손된 장막보다 더 참담합니다. 파괴된 장막은 수선하거나 새것으로 다시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녀가 모두 떠나버리고 아무도 없는 예루살렘은 재건이 불가능합니다(20). 장막의 비유는 아마도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백성을 ‘한 가족’으로 보여주기 위해 선택된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은 전쟁으로 폐허가 됐을 뿐만 아니라, 그 주민도 모두 떠나거나 사로잡혀 갔습니다. 회복을 소망해볼 만한 싹조차 남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다가 입은 중상은 치료할 수 없는, 자신에게 화를 선포하며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치명적 부상입니다.

(3) 재난의 원인(21)

이번에는 목자와 양의 표상을 사용해 멸망의 심판이 임하게 된 원인을 알려줍니다. “목자들은 어리석어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므로 형통하지 못하며 그 모든 양 떼는 흩어졌도다”(21). 목자와 양 떼를 구분해서 양 떼가 흩어진 책임을 목자에게 묻습니다.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이 여호와의 의지를 묻지 않고, 자신들의 어리석음에 따라 유다 백성을 멸망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위정자들의 어리석음과 불순종이 백성을 사방으로 흩어지게 만들었습니다(그렇다고 백성을 통치자에 의해 오도된 희생양으로 몰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의 언약 파기를 고발하는 11장이 잘 보여주듯이 ‘여호와를 찾지 않음’에 있어서는 백성도 별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여기서는 ‘여호와의 양 떼’(13:17)를 돌봐야 할 통치자들의 책임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4) 신판 선고(22)

심판의 선고(17-18)와 탄식(19-20)과 심판의 원인(21) 다음에 다시 한 번 심판을 선고하는 말이 나옵니다. 17절의 예루살렘은 적들에 포위당했고, 20절의 예루살렘은 이미 함락당해 그 주민들이 유배를 떠났습니다. 22절의 적들은 아직 ‘북방에서부터’ 내려오고 있는 중입니다. 전쟁의 진행 순서에 따르면 22절이 먼저 와야 합니다. 아마도 17-21절이 예루살렘에만 관심을 두기에 ‘유다 성읍들의 황폐함’을 언급하는 22절을 보층한 것 같습니다. 적들이 북쪽에서 내려오는데,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이 땅을 뒤흔드는 무시무시한 말발굽 소리와 함성을 뒤로하며 거침없이 진격해 옵니다. 이들의 원정 목적은 하나입니다. 유다의 성읍들을 황폐하게 해서 승냥이(자칼)의 소굴로 만드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찢기고 무너진 장막처럼 되듯이 유다 성읍들도 사람이 살 수 없는 폐허가 됩니다.

 

간구의 기도(23-25)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받은 예레미야는 비참한 현실에 처한 백성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그들의 죄악에 대해 애통하며, 유다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시기를 하나님께 간청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악이 가득한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중보기도자로 부르셨습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충성해야 합니다.

23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24여호와여 나를 징계하옵시되 너그러이 하시고 진노로 하지 마옵소서 주께서 내가 없어지게 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25주를 알지 못하는 이방 사람들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아니하는 족속들에게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 그들은 야곱을 씹어 삼켜 멸하고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였나이다 하니라(23-25)

유다가 실패한 원인은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국가 지도자들도 하나님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지도자 중에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었다는 것은 공동체에 심각한 위기가 임박했다는 증거입니다.

(1) 하나님의 공정 간구(23-24)

19-20절의 경우처럼 ‘나’가 다시 화자로 등장하지만, 동일한 ‘나’는 아닙니다. 전자의 ‘나’는 예루살렘이고, 후자의 ‘나’는 예언자입니다. 물론 본문은 예언자의 사적 기도가 아닙니다. 심판을 당한 이스라엘 백성이 드려야 할 기도입니다. 예언자는 이 기도를 통해 멸망의 시대를 사는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그는 먼저 지혜 문학의 가르침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23; 참조. 잠 16:9; 20:24). 이스라엘은 사람이 자기 길의 주인이 아님을, 길을 걷는 자가 자기 발걸음을 정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에 옮기지만, 이를 온전히 통제하지는 못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삶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때도 있지만, 제 운명을 지배하지는 못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여호와만을 유일한 결정권자로 인정해야 합니다. 여호와를 찾지 않은 어리석음(21)은 자신을 최고 결정권자로 간주한 유다 백성의 교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계획을 신뢰하였고, 이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스스로의 능력을 의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결국 그 교만의 대가로 멸망의 늪에 빠졌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과거의 잘못을 뼈저리게 깨닫고 여호와께로 돌아와, 다시 그분께 자신의 운명을 내맡겨야 합니다. 교만한 마음을 내버리고 겸허하게 여호와께로 돌아와야만 합니다. 이스라엘의 심판을 결정하시고 이를 그대로 실행하신 분께서 앞으로의 운명도 결정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이스라엘은 멸망과 유배를 하나님의 공의로운 징계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미래를 철저하게 그분께 의탁해야 합니다. “여호와여 나를 징계하옵시되 너그러이 하시고 진노로 하지 마옵소서 주께서 내가 없어지게 하실까 두려워하나이다”(24). 적어도 일부에서는 하나님 백성의 멸망과 유배를 하나님의 무능력과 패배로 돌렸던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파국의 원인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과거의 극복 없이는 새로운 시작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완전히 소멸할 수밖에 없기에 ‘너그러이’(공의로) 채찍질해주시길 간구해야 합니다. ‘공의로운 징계’의 구체적 의미는 불분명하지만, ‘진노’와 공의를 구별해서 전자는 완전한 멸망과 관련해, 후자는 징계(훈계)와 관련해 사용합니다. 아마도 ‘진노’는 심판받은 자들에게 지속해서 작용하는 하나님의 부정적 작용력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2) 민족들이 멸망 간구(25)

하나님의 심판으로 초라해진 야곱은 주변 민족들의 좋은 먹잇감이었습니다. 탐욕스런 민족들이 약탈하거나 침략해 들어오지만, 야곱에게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땅에서 사라질 위험에 처한 야곱에게는 여호와의 개입만이 유일한 소망입니다. “주를 알지 못하는 이방 사람들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아니하는 족속들에게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 그들은 야곱을 씹어 삼켜 멸하고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였나이다”(25). 자신과 관련해서는 ‘너그러운/공정한’ 징계를 호소한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민족들에게 당신의 분노를 쏟으시길 간구합니다. 다른 단어이기는 하지만 ‘분노’는 24절의 ‘진노’와 내용상 유사합니다. 현재의 문맥에서 ‘야곱은 민족들의 우상을 헛것으로 선포하는 단락(1-16)의 마지막 절인 16절에 연결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분깃’이시고, 이스라엘은 ‘그의 기업의 지파’이기에 야곱을 씹어 삼켜 멸하려는 민족들은 여호와의 소유를 탐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야곱의 몫’에 대한 보복을 반드시 받게 될 것입니다.


심판 아래 있는 세상을 슬퍼하고 아파해야 합니다.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참상을 자기 일로 슬퍼하고 아파합니다. 유다의 고통은 곧 예레미야의 고통이었습니다. 백성들의 삶의 터전이 완전히 무너지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집니다. 백성의 비극 앞에 그는 중상을 입은 것 같은 고통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의 경험은 백성들이 겪을 고통을 대표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낍니까! 특별히 죄로 인해 심판 아래 있는 이 세상을 향한 안타까움에 대한 마음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까? 이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공감하는 것을 ‘통감’이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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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10-01)


헛된 우상과 하나님

예레미야 10장 1-16절


인생을 주체적으로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수동적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자는 누군가에게 영향력을 미치며 살지만, 후자는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유다 백성은 이방인의 풍습에 물들었습니다. 그들은 주체적으로 가나안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수동적으로 살지 않습니다. 능동적으로 살아가면서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에게 열방의 길을 배우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만든 우상은 나무에 불과하며, 화를 내리거나 복을 주지 못하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왕이십니다.
 

도입부(1)

우상은 걷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죽은 재료로 만들어서 하나같이 무지하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런 나무토막에 불과한 우상에게 가르침을 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상의 외관도 결국 사람들의 손재주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값비싸게 만들어도 기술자들의 작품일 뿐입니다.
1이스라엘 집이여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1)
“이스라엘 집이여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는 긴 도입부로 시작합니다. 이처럼 길고 장엄한 문구가 사용된 것은 드뭅니다. 명령혀 이후에는 ‘말씀’을 어근으로 하는 단어가 두 차례나 나옴으로써, 이스라엘이 무엇을 들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그들은 ‘말씀’을 들어야 하며, 그 말씀은 ‘여호와’로부터 나온 것이어야 합니다. 예언자가 선포하는 말씀은 여호와가 예언자의 ‘입에 둔’ 것입니다(1:9). 이것은 예레미야가 활동하던 시대에 여호와의 진정한 메시지가 무엇인가에 대해 적지 않은 논쟁이 있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23:11).
 

우상 비판과 여호와 찬양(2-11)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우리 마음을 현혹하는 우상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지혜, 돈, 명예와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화려한 우상처럼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 갑니다. 그러나 우상이 아무리 화려하고 진귀한 모습이더라도 그것은 생명이 없기에 결코 우리를 도울 수 없습니다. 모든 우상은 헛된 것에 불과합니다.
2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열방의 길을 배우지 말라 열방인은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하거니와 너희는 그것을 두려워 말라 3여러 나라의 풍습은 헛된 것이니 삼림에서 벤 나무요 기술공의 두 손이 도끼로 만든 것이라 4그들이 은과 금으로 그것에 꾸미고 못과 장도리로 그것을 든든히 하여 흔들리지 않게 하나니 5그것이 둥근 기둥 같아서 말도 못하며 걸어다니지도 못하므로 사람이 메어야 하느니라 그것이 그들에게 화를 주거나 복을 주지 못하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느니라 6여호와여 주와 같은 이 없나이다 주는 크시니 주의 이름이 그 권능으로 말미암아 크시니이다 7이방 사람들의 왕이시여 주를 경외하지 아니할 자가 누구리이까 이는 주께 당연한 일이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들의 지혜로운 자들 가운데 주와 같은 이가 없음이니이다 8그들은 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것이니 우상의 가르침은 나무뿐이라 9다시스에서 가져온 은박과 우바스에서 가져온 금으로 꾸미되 기술공과 은장색의 손으로 만들었고 청색 자색 옷을 입었나니 이는 정교한 솜씨로 만든 것이거니와 10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왕이시라 그 진노하심에 땅이 진동하며 그 분노하심을 이방이 능히 당하지 못하느니라 11너희는 이같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 위에서, 이 하늘 아래에서 망하리라 하라(2-11)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에게 이방의 미신적인 생활 방식을 본받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들이 의지하는 우상은 사람이 숲에서 벤 나무며 기술자가 만들어 놓은 헛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상이 아무리 화려하고 진귀한 모습이더라도 그것은 생명이 없기에 결코 우리를 도울 수 없습니다. 모든 우상은 헛된 것에 불과합니다.
(1) 우상 비판(2-5)
우상 논쟁에 관한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야 할 청자인 ‘이스라엘 집’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모두 포함합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여호와만이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하는 민족들의 종교적 풍습은 헛것이기에, 이스라엘은 이를 배우거나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고대인들에게 별의 운행은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하늘의 별이 민족의 역사와 인간의 운명에 영향을 미친다고 믿었다. 특히 일식과 월식과 혜성의 등장은 혼란과 두려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천체가 신들의 세계에 속했기에 별의 운행을 잘 관찰하면 신들의 의지와 결정을 알아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해와 달과 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로(참조, 창 1:14-17) 원칙상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었습니다(일월성신숭배는 바벨론에서 유래하였다). 별자리와 그 움직임은 창조주가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놓으신 것이기에 ‘징조’가 될 수 없고, 따라서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민족들의 천체 숭배가 헛것이듯이 이들의 우상숭배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상은 숲에서 베어낸 나무를 도끼로 다듬고 그 위에 금과 은으로 덧씌운 기술자의 작품입니다. 우상은 새를 쫓기 위해 오이밭에 세워놓은 허수아비처럼 말도 못하고 걸을 줄도 모릅니다. 움직이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옮겨주어야 합니다. 사람에 의존하는 우상은 해를 끼치거나 유익을 가져다줄 수 없기에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2) 여호와 같은 이 없다(6-7)
6절의 처음과 7절의 마지막에 놓인 ‘주와 같은 이 없나이다’는 여호와의 유일성과 절대성을 강조합니다. 여호와는 장인의 작품에 불과한 우상들과는 차원을 전혀 다릅니다. 처음부터 ‘권능으로’ 당신의 왕권을 주장하신 여호와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민족들의 왕으로, 유일한 경외의 대상이십니다(7a). 그분은 지혜에 있어서나 능력에 있어서나 비교를 허락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이방 사람들의 왕’은 여기에만 나오는 표현으로 여호와의 이러한 우주적이고 전능한 왕권을 함축합니다.
(3) 우상 비판(8-9)
8-9절은 주제에 있어 다시 36-5절로 돌아갑니다. 민족들이 섬기는 우상들은 ‘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것’입니다(8). 이들이 화려하게 걸치고 있는 것들은 모두 사람이 만들어 입혀준 것들입니다. 장인과 대장장이는 다시스에서 가져온 은박(두드려 늘인 은)과 우바스에서 수입한 금을 사용하여 우상을 화려하게 장식합니다. 기술자들은 왕이나 제사장들이 걸치는 푸른 자줏빛과 붉은 자줏빛 천으로 옷을 만들어 입힙니다(9).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치장한 나무 조각인 우상이 줄 수 있는 가르침이 딱 하나 있는데, 우상은 나무라는 사실입니다(8b). 우상은 자신의 기원과 본질이 나무임을 알려줄 뿐입니다.
(4) 여호와는 참 신이다(10)
우상들이 ‘무지하고 어리석은 것’이라면,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왕이시다”(10a). 우상은 ‘헛된 것’이지만, 여호와는 사람들이 신뢰할 수 있는 ‘참 하나님’이십니다. 우상은 장인들에게 의존하는 죽은 나무토막이지만, 여호와는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만물이 그분께 의존하여 생존합니다. 우상은 사람이 ‘청색 자색 옷’을 입혀줘 왕으로 추앙받고 있지만, 여호와는 ‘영원한 왕’으로 처음부터 변함없이 모든 민족을 통치하셨습니다. 우상은 흔들리지 않게 ‘못과 장도리로’ 고정시켜 주어야 하지만, 여호와는 진노로 땅을 뒤흔드십니다. 실로 여호와와 같은 존재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방 사람들의 왕’이신 여호와께서 당신을 경외하지 않고 ‘무지하고 어리석은’ 우상을 숭배하는 민족들을 진노로 징계하실 것입니다. 땅을 뒤흔드는 그분의 분노를 견뎌낼 민족은 없습니다. ‘삼림에서 베나무’를 신으로 섬기는 민족들은 멸망에 떨어져 수시를 당할 뿐입니다(15).
(5) 우상 비판(11)
여호와의 영원한 왕권 선언에 뒤이어 갑자기 아랍어도 된 선포 명령이 나옵니다.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 위에서, 이 하늘 아래에서 망하리라”(11) 명령을 받는 ‘너희’와 말씀을 듣는 ‘그들’이 누구인지는 모호하게 나오지만, 아마도 예언자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영원한 왕권을 그분의 진노 아래 놓인 민족들에게 선포하도록 사명을 위임하는 것 같습니다. 헬라어로 대체되기 전까지 아람어는 고대 근동의 국제 통용어였기 때문에 민족들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를 담기에 가장 적합한 언어였습니다. 모든 생물의 생존 공간인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분만이 그 가운데 사는 자들로부터 경배를 받을 수 있다. 민족들이 신으로 숭배하는 우상들은 장인의 작품으로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차라리 우상들이 자신들을 만든 장인들을 숭배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실 때 숭배자들뿐만 아니라 우상들도 여호와께서 지으신 세계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12-16)

우리는 형통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자기 인생이 불행해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의 복과 저주를 주관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버리고 헛되고 무가치한 우상을 좇으면 유다와 같이 패망할 것입니다. 유다가 우상을 숭배한 이유도 형통하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생각한 형통이란 다산과 풍요였습니다,
12여호와께서 그의 권능으로 땅을 지으셨고 그의 지혜로 세계를 세우셨고 그의 명철로 하늘을 펴셨으며 13그가 목소리를 내신즉 하늘에 많은 물이 생기나니 그는 땅 끝에서 구름이 오르게 하시며 비를 위하여 번개치게 하시며 그 곳간에서 바람을 내시거늘 14사람마다 어리석고 무식하도다 은장이마다 자기의 조각한 신상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가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것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15그것들은 헛 것이요 망령되이 만든 것인즉 징벌하실 때에 멸망할 것이나 16야곱의 분깃은 이같지 아니하시니 그는 만물의 조성자요 이스라엘은 그의 기업의 지파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니라(12-16)
유다는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들은 허무하고 무가치한 우상을 택했습니다. 그들은 우상숭배를 통해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명예를 더럽혔습니다.
(1) 창조주 여호와(12-13)
창조주만이 피조물로부터 경배를 받을 수 있기에 여호와의 창조 능력과 우상의 무능력을 대비합니다.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땅을’ 만드셨고, ‘지혜로 세계를’ 세우셨고, ‘명철로 하늘을’ 펼치셨습니다(12). 땅과 하늘과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여호와께서 만드신 것이기에,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모두 그분의 권능과 명철과 지혜를 찬양해야 합니다. 창조와 지혜의 결합은 바벨론의 지혜에 대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민족들의 지혜자들(7)이 참된 지혜와 명철을 소유한 자들이라면 땅과 세계와 하늘에서 여호와의 권능과 지혜와 명철을 볼 수 있었어야 했습니다. 우상들처럼 이들은 ‘무지하고 어리석은 자’들이었습니다. 생존 공간을 마련해주신 여호와는 더 나아가 당신께서 창조하신 생물이 그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도록 비를 내려주시는 분이기도 합니다(13). 그분이 우레와 같은 음성으로 명령하시면 하늘이 창문을 열고 물을 쏟습니다. 그분은 땅 끝에서 비구름을 피어오르게 하시고 번개를 만들어 비를 내리시며, 당신의 곳간에서 바람을 내보내십니다. 창조주 여호와께서 땅의 풍요를 주관하십니다.
(2) 우상 비판(14-15)
그러나 민족들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우상을 섬기다 수치를 당합니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것’을 섬기는 자들은 ‘어리석고 무식하기에’ 창조 세계 안에서 활동하시는 창조주 여호와의 능력과 지혜를 보지 못합니다(14a). 이제 특이하게도 우상을 만들어 화려하게 장식하는 은장이들에게 심판이 선포됩니다. “자기의 조각한 신상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가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것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14b). 우상은 사람에 의해 신의 자리에 앉혀진 거짓 존재, 곧 그 안에 생명이 없는 나무토막으로 숭배자들에게 수치만 줄 뿐입니다. 숭배의 대상으로 만들었지만, 권능과 지혜가 없기에 결국은 조롱거리가 될 뿐입니다. 여호와께서 우상을 만든 자들을 징벌하실 때 우상도 함께 사라질 것입니다(15).
(3) 야곱의 분깃 여호와(16)
‘야곱의 분깃’이신 여호와는 우상들과는 전혀 다르시기 때문에, 야곱의 운명 또한 다른 민족들의 운명과 달라집니다. “그는 만물의 조성자요 이스라엘은 그의 기업의 지파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니라”(16). 여호와가 야곱의 몫이고, 이스라엘은 그분의 소유입니다. 이스라엘은 우상들이 아니라 여호와가 자신들의 몫임을, 또 우상들에게 넘겨질 수 없는 여호와의 개인적 소유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와 독점적 관계에 있고 언제나 만군의 여호와가 그분의 이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기업의 지파’로 삼으시고 ‘야곱의 분깃’이 되신 만군의 여호와를 경배하며 그분께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우상과 하나님은 비교될 수 없습니다. 우상이 아무리 아름답고 정교해도 그것은 사람이 만든 한낱 나무와 돌, 금속의 변형일 뿐입니다. 감사의 대상일뿐 경외와 경배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며 열방의 왕들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영원한 왕이십니다. 어떤 열강도 그분의 분노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교회와 나라의 앞날을 눈에 보이는 권력과 열강에 맡겨서는 안 됩니다. 외모와 의상과 액세서리나 학력으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할 것이 아니라 왕이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인격으로 우리는 단장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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