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14-01)
제사조차 거절하시는 하나님
예레미야 14장 1-12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으로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속일 수 없고 또 속일 생각을 하는 것은 참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은 속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참된 진정한 예배를 드려야 되고, 하나님 앞에 나갈 때는 진실한 마음으로 나아가야 될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중심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깊이 만날 수 있습니다.
유다에 극심한 가뭄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도 짐승도 물을 얻지 못해 생존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소망이 되시는 하나님께 유다를 버리지 마시길 간구합니다. 하나님은 유다의 죄를 말씀하시며, 회개치 않고는 복을 받을 수 없다고 하십니다. 선지자는 유다의 유일한 소망이신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을 슬퍼하며 부디 유다를 버리지 말아 달라고 중보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축복을 비는 것조차 금하십니다.
가뭄을 탄식과 간구(1-9)
하나님께서 징계하시면 우리는 큰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고, 악에서 떠나는 것이 명철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타락한 인간이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죄악의 징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두려워하는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죄악에서 떠나 거룩한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1가뭄에 대하여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2○유다가 슬퍼하며 성문의 무리가 피곤하여 땅 위에서 애통하니 예루살렘의 부르짖음이 위로 오르도다 3귀인들은 자기 사환들을 보내어 물을 얻으려 하였으나 그들이 우물에 갔어도 물을 얻지 못하여 빈 그릇으로 돌아오니 부끄럽고 근심하여 그들의 머리를 가리며 4땅에 비가 없어 지면이 갈라지니 밭 가는 자가 부끄러워서 그의 머리를 가리는도다 5들의 암사슴은 새끼를 낳아도 풀이 없으므로 내버리며 6들 나귀들은 벗은 산 위에 서서 승냥이 같이 헐떡이며 풀이 없으므로 눈이 흐려지는도다 7여호와여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대하여 증언할지라도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 우리의 타락함이 많으니이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8이스라엘의 소망이시요 고난 당한 때의 구원자시여 어찌하여 이 땅에서 거류하는 자 같이, 하룻밤을 유숙하는 나그네 같이 하시나이까 9어찌하여 놀란 자 같으시며 구원하지 못하는 용사 같으시니이까 여호와여 주는 그래도 우리 가운데 계시고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이오니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서(1-9)
유다에 닥친 가뭄은 우연한 자연재해가 아닙니다. 그것은 불순종한 백성에게 하나님꼐서 내리신 혹독한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에게 복과 저주를 내리는 주권자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내리신 재앙을 피할 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내리신 재앙을 피하지 못합니다.
(1) 가뭄의 탄식(1-6)
가뭄은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고 전면적으로 닥칩니다. 극심한 가뭄으로 물이 없어 사람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부르짖기만 합니다. 유다는 슬피 울고, 그 성문들은 지쳐 땅에 쓰러져 탄식하고, 예루살렘은 절망적으로 부르짖습니다. 유다와 성문들과 예루살렘이 의인화되어 애도 행위의 주체로 등장합니다. ‘성문의 무리’는 문자적으로는 ‘그 성문들’로, 성읍들을 대표합니다. 고대 세계에서는 성문 안쪽에 있는 넓은 공간에서 공적 모임을 가졌습니다. ‘부르짖음’은 도움을 구하는 부르짖음보다는 절망적 울부짖음을 의미합니다. 3-6절은 가뭄 피해를 구체적으로 기술합니다. 가뭄 앞에 예외는 없었습니다. 귀족들은 물을 길어오도록 종들을 성 밖으로 보냈지만, 이들은 빈 물동이를 든 채 돌아올 뿐이었습니다. 정치적-사회적 지위도 가뭄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습니다. 가나안의 농사는 비에 의존했기에 가뭄은 농부들에게 더욱 치명적이었습니다. 농부들은 불볕더위로 쩍쩍 갈라진 밭을 보며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부끄러워하다’는 맡겨진 사명이나 의무를 이행하지 못했을 때의 반응을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참조, 잠 10:5; 12:4; 14:35). 해야 할 일을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인정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기에 부끄러워합니다. 좋은 물을 길어오지 못했기 때문에, 농부는 농사를 짓지 못했기 때문에 부끄러워합니다. ‘머리를 가리다’는 절망감의 표현입니다(참조, 삼하 13:19; 15:30; 에 6:12). 가뭄이 성의 귀족부터 지방의 농부까지 모든 사람을 절망에 빠뜨립니다. 극심한 가뭄은 들짐승에게도 치명적이었습니다. 풀이 말라 굶주림에 노출됩니다. 먹지 못해 젖이 나오지 않는 암사슴은 자기가 낳은 새끼를 들판에 내버리고, 가뭄에 비교적 잘 견딘다는 나귀도 풀과 쉴 곳을 찾지 못하고 신음합니다.
(2) ‘우리’ 공동체의 간구(7-9)
‘우리’ 공동체는 가뭄을 하나님의 재앙으로 파악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의 긍정적 개입을 호소합니다. 직면한 가뭄이 자신들의 죄 때문임을 전적으로 인정합니다. 대놓고 죄를 범하였기에 변명의 여지도, 증인을 부를 필요도 없습니다. 여호와를 수없이 배반한 삶 자체가 백성의 죄를 고발합니다. ‘타락함’은 ‘배반’, ‘반역’, ‘돌아갈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개입의 동기와 목적을 오직 하나님에게서 찾습니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공동체는 간구합니다. 하나님 백성의 고난과 재앙은 이방인들의 눈에는 자기 백성도 지키지 못하는 하나님의 무능력을 보여주는, 곧 이방인들에 의해 그분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사건입니다(참조, 겔 20:9, 14, 22). 역으로, 재앙을 겪고 있는 하나님 백성의 구원은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이방인들 가운데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에스겔은 바벨론 유배민의 구원을 여호와의 이름을 위한 사건으로 선포합니다.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겔 36:22). 이스라엘이 죄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의 이름을 위하여’ 도와달라고 기도할 수 있는 까닭은 여호와가 바로 이스라엘의 소망과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절망 중에 있는 이스라엘에게 소망이시고, 고난 중에 있는 이스라엘에게 구원이십니다.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은 역사와 자연 안에서 여호와를 구원자로 거듭 경험하였습니다. 극심한 가뭄으로 생존의 위기에 처한 공동체는 구원의 하나님에게서 소망을 찾습니다. 여호와께만 소망과 구원이 있기 때문에 그분의 개입이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이제 공동체는 여호와를 객과 나그네와 용사에 대비하여 개입을 촉구합니다. “이스라엘의 소망이시며 구원자이신 여호와께서 마치 남의 땅에 거하는 이방인처럼, 하룻밤 머물기 위해 여인숙에 들른 나그네처럼 그렇게 무관심하실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의 전사로 용맹스럽게 전쟁터를 누비셨던 분께서 어찌하여 지금은 놀라 어쩔 줄 모르는 용사처럼, 구원해줄 힘이 없는 용사처럼 침묵하십니까?” 공동체는 이스라엘의 소망이자 구원자이신 여호와께서 어떻게 그처럼 남이 되셨느냐고, 적들의 위력 앞에 용기를 잃고 두려워 떠는 용사가 되셨느냐고 탄식합니다. 하나님의 침묵이나 무능력에 대한 탄식은 물론 불신앙의 토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개입을 촉구하는 문학적 수단입니다. 당신은 객이 아니지 않습니까? 나그네가 아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의 형편에 무심한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적을 놀라게 하시며 전쟁터를 누비신 용사가 아니십니까? 크신 능력의 구원자가 아니십니까? 공동체는 다시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 무관심하실 수 없음을 신학적 전통에 의존해 호소합니다. 여호와는 잠시 유숙하는 나그네와 달리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이시고, 이스라엘은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입니다. 전자는 이스라엘 가운데 현존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을, 후자는 여호와의 소유에 속하는 이스라엘을 그 내용으로 합니다.
간구에 대한 하나님 응답(10-12)
우리의 희망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재앙의 때에 구하기도 하시지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저버릴 때에는 재앙을 내리기도 하십니다. 희망이신 하나님을 버린 결과가 재앙입니다. 삶에 변화가 없는 입술만의 고백은 거짓 회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이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 않는 한 아무리 금식을 하고 많은 제물을 바치고 큰 소리로 부르짖어도 그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10여호와께서 이 백성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그들의 발을 멈추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받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죄를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 하시고 11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 말라 12그들이 금식할지라도 내가 그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겠고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그것을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내가 그들을 멸하리라(10-12)
선지자 예레미야가 유다 백성을 위해 간구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간구를 단호하게 거절하십니다. 그것은 유다 백성이 죄악에서 돌이키지 않을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고난 중에도 우상 숭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우상이 있는 산마다 돌아다니며 종교 행위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1) 백성과 관련한 말씀(10)
‘우리’ 공동체의 간구가 여호와께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들의 간구가 거절당한 이유가 개괄적으로 제시됩니다.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그들의 발을 멈추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저들의 기도를 받지 않으십니다. 현재시제로 옮긴 개역개정의 번역에 따르면, 공동체가 행한 죄의 고백과 간구는 피상적이고 위선적인 것으로 진정성이 없습니다. 죄를 인정하지만 죄에서 완전히 떠나지는 않았고, 신학적 전통을 주장하지만 단지 입술의 고백에 불과했습니다(과거시제로 옮길 경우, 공동체는 너무 늦게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구원의 문이 모두 닫힌 후의 고백과 간구였기에 받아들여질 수 없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들의 죄를 기억하기로 하셨기에 죗값을 치르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어그러진 길’은 아마도 종교적 혼합주의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참조. 2:27). 이들의 경건에는 신실함이 없습니다. 필요하면 여호와 하나님을, 그러나 또다시 바알을 찾아갔습니다.
(2) 예레미야에게 주는 말씀(11-12)
여호와의 심판 의지는 단호했습니다. 여호와는 당신과 이스라엘 사이를 이어주는 모든 통로를 폐쇄하십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종교적 제도를 무용지물로 만드십니다. 먼저 예언자에게 중보기도의 금지를 명령하십니다(참조․ 7:16; 11:14). 그러나 중보기도를 들어주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백성을 위해 ‘복’을 구해서는 안 됩니다. ‘복’은 원래 ‘좋은 것’으로, 여호와께서 주시는 생명과 축복과 구원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다음으로 종교적 행사가 그 기능을 박탈당합니다. 금식하며 부르짖을지라도 여호와는 듣지 않으십니다. 금식은 전쟁의 위기, 전염병의 창궐 또는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로, 공동체가 위험에 처했을 때 하나님의 긍정적 간섭을 구하려고 행하는 제의적 의식입니다. 예레미야의 중보기도 금지와 더불어 여호와는 제사의 효력을 무효화 하십니다.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여호와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이미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셨음을 의미합니다. 예언자의 중보와 금식과 제사가 여호와께서 인정하신 것들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에 효력과 목적이 있는 절대적 제도는 아닙니다. 증보와 금식과 제사의 수용 여부는 받으시는 분의 결정에 속합니다. 여호와의 거절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려는 그분의 결정이 최종적임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징벌을 운명으로 받아야 합니다. ‘칼과 기근과 전염병’은 재앙 선포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으로, 여호와는 혼합주의에 빠진 이스라엘을 전쟁으로 심판하십니다. 많은 사람이 적의 칼에 맞아 죽고, 칼을 피해 살아남은 자들은 기근과 전염병으로 죽습니다. 누구도 여호와의 심판에서 안전하게 목숨을 구하지 못합니다.
기근으로 고통 받던 유다 백성은 하나님께 부르짖어 도움을 간구합니다. 선지자 예레미야 역시 민족이 받는 고통을 끌어안고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어떤한 탄원도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거절하시고 징계하시기 전에 죄의 길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그리고 구원의 복음을 열심히 전함으로써 멸망으로 치닫는 불신자들을 속히 구원의 길로 이끌어야 합니다.
구독과 공감 ♡ 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24 예레미야(완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레미야(35) - 예레미야 15장 1-9절 - 확정된 하나님의 심판 (0) | 2023.08.05 |
---|---|
예레미야(34) - 예레미야 14장 13-22절 - 끈질긴 선지자의 간구 (0) | 2023.08.04 |
예레미야(32) - 예레미야 13장 20-27절 - 화 있을진저 예루살렘이여 (0) | 2023.08.02 |
예레미야(31) - 예레미야 13장 12-19절 -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 전에 회개해야 함 (0) | 2023.08.01 |
예레미야(30) - 예레미야 13장 1-11절 - 썩은 배띠와 술로 가득한 가죽 부대 (0) | 2023.08.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