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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15-01)


확정된 하나님의 심판

예레미야 15장 1-9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관계가 바르게 형성하도록 여러 모습으로 기회를 주십니다. 그 기회를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축복받은 것입니다. 기회가 왔을 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기회구나!’라고 깨달아서 그 기회를 알아볼 수 있다면, 그것도 지혜롭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기회를 주십니다. 기회를 주시지 않고 바로 심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회를 주실 때, 돌이켜야 하고, 기회를 주실 때 소중히 여기고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지 않도록 구원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고 돌이키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좌절과 절망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거절입니다. 유다의 패역에 대한 하나님의 인내와 긍휼은 한계에 이르렀고, 결국 이들을 향해 열방의 손을 드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중보자들 모세와 사무엘이 기도한다 해도 받지 않으시고, 짐승으로 유다를 완전히 멸하실 것입니다.

 

간구에 대한 응답(1-4)

순종하는 자에게 복을 베푸시고 불순종하는 자를 심판하시겠다는 경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회개를 기쁘게 받으시는 분입니다. 죄를 자백하면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요일 1:9). 그러나 예레미야 시대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받지 않으시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들이 얼마나 부패하고 타락했습니까?

1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찌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내치라 2그들이 만일 네게 말하기를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리요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사망할 자는 사망으로 나아가고 칼을 받을 자는 칼로 나아가고 기근을 당할 자는 기근으로 나아가고 포로 될 자는 포로 됨으로 나아갈찌니라 하셨다 하라 3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그들을 네 가지로 벌하리니 곧 죽이는 칼과 찢는 개와 삼켜 멸하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으로 할 것이며 4유다 왕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예루살렘에 행한 바를 인하여 내가 그들을 세계 열방 중에 흩으리라(1-4)

예레미야는 유다의 죄악을 고백하며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을 되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유다 백성은 여전히 죄악으로 돌이키지 않았고, 하나님의 심판은 확고했습니다. 유다는 더 이상 언약의 땅에 머무를 수 없었습니다.

(1) 여호와의 확정된 심판(1)

관계 단절에 집중한 첫 번째 응답(14:10-12)에 비교해서 살펴보면, 심판의 철저성에 초점을 맞춘 두 번째 응답의 의미가 더 선명해집니다. 중보기도의 금지가 공통적인데, 전자에서는 예레미야에게 중보기도의 금지를 명령하고(11), 후자에서는 대표적인 증보자 모세와 사무엘을 등장시켜 어떤 경우에도 심판 결정이 취소될 수 없음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1a). 전자에서는 금지명령에도 불구하고 중재를 시도해보지만, 후자의 예레미야는 이의 제기 없이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2) 전쟁의 심판(2)

두 경우 모두 심판을 집행하는 수단이 전쟁이지만, ‘칼과 기근과 전염병’(12) 또는 ‘칼과 기근’(15,16)의 심판이 ‘죽음(전염병)과 칼과 기근과 포로 됨’의 심판(2)으로 한 단계 더 철저해집니다.

(3) 완전한 멸망(3-4a)

멸망에 관한 언급도 공통적이지만, 전자는 단순히 ‘내가 그들을 멸하리라’로 선언하고(12), 후자는 ‘칼과 개와 새와 짐승’을 등장시켜 멸망의 모습을 생생하고도 자극적으로 묘사합니다(3). 마지막으로, 전자에는 고발의 말씀이 나오는데(10). 후자에는 심판의 말씀만 나옵니다. 치료와 평강을 간구한 공동체에게 주어진 여호와의 답변은 엄중한 심판 선고입니다. 완전한 멸망이 여호와께서 확정하신 유다의 운명입니다. 여호와께서 때로는 중재자의 간구를 수용하셔서 결정을 되돌리기도 하셨지만, 이번에는 아닙니다. 모세와 사무엘이 그분 앞에 서서 간청할지라도 그분 마음은 바뀌지 않습니다(1). 모세(참조, 출 32:7-14; 민 14:13-20 신 9:18-29)와 사무엘(참조, 삼상 7:8-9; 12:19-23)은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중보자로 여호와의 진노를 진정시켜 재앙을 내리지 않게 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와 사무엘의 중보기도도 듣지 않으시겠다면,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이스라엘은 ‘주의 심령이 시온을 싫어하시나이까?’하고 개입을 호소하지만, 여호와는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라고 하시면서 분명하게 결별을 선언하십니다. 여호와의 마음이 최종적으로 이스라엘을 떠나셨기에, 예레미야에게 이스라엘을 가나안에서 내보내는 역할을 맡기십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조상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고,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내보냅니다. ‘쫓아 내보냄’의 심판이 가상적 질문과 답변을 통해 구체적으로 선포됩니다. 사람들이 제기할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을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들이 만일 네게 말하기를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리요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와같이 말씀하시니라 죽을 자는 죽음으로 나아가고 칼을 받을 자는 칼로 나아가고 기근을 당할 자는 기근으로 나아가고 포로 될 자는 포로 됨으로 나아갈지니라하셨다 하라”(2). 유다는 싸우다가 적의 칼에 맞아 죽고 또 역병과 굶주림으로 죽고, 살아남은 자는 포로로 잡혀갑니다. ‘칼과 기근’으로 ‘큰 파멸과 중한 상처’를 입고 치료를 간구한 자들에게 죽음의 심판이 선포됩니다. 전쟁 끝에 남은 것은 거리와 들판에 버려진 시체뿐입니다. 점령군의 무자비한 칼에 쓰러진 시체를 개들이 질질 끌고 다니고,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이 먹어치웁니다(3). 언약 관계를 주장하며 구원을 간구한 자들에게 마지막 안식처인 무덤마저 허락되지 않습니다. 너무 처참하고 철저한 멸망이기에 멸망을 원했던 이방 민족들조차 소스라치게 놀라 공포에 사로잡힙니다(4). (4) 므낫세의 죄(4b) 유다의 멸망 원인을 므낫세에게서 찾는 4a절은 문맥과 다소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유다 왕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예루살렘에 행한 것’ 때문에 유다 백성은 참혹한 멸망을 당합니다. 이는 므낫세 한사람에게 멸망의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 여호와를 떠나 자기 길을 가며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20절이 보여주듯이 죄에 있어 ‘우리’와 ‘우리 조상’은 차이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므낫세는 ‘우리 조상의 죄악’을 대표하는 인물로 언급된 것 같습니다. 열왕기하 23:26에 의하면,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에도 불구하고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그 모든 격노’가 돌이켜지지 않습니다. 므낫세로 대표되는 유다 백성 전체의 악행 때문에 결정된 멸망의 심판이기에,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심판 결정은 되돌려지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5-9)

우리의 믿음은 반드시 참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야 합니다. 사람의 자기중심적 이기심에서 나온 거짓 신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따를 때 하나님께서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랫동안 참으시지만 무작정 참으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을 향해 지칠 정도로 참으셨지만, 끝까지 돌아오지 않자, 더는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고 심판하셨습니다.

5예루살렘아 너를 불쌍히 여길 자 누구며 너를 곡할 자 누구며 돌이켜 네 평안을 물을 자 누구뇨 6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나를 버렸고 내게서 물러갔으므로 네게로 내 손을 펴서 너를 멸하였노니 이는 내가 뜻을 돌이키기에 염증이 났음이로다 7내가 그들을 그 땅의 여러 성문에서 키로 까불러 그 자식을 끊어서 내 백성을 멸하였나니 이는 그들이 그 길에서 돌이키지 아니하였음이라 8그들의 과부가 내 앞에 바다 모래보다 더 많아졌느니라 내가 대낮에 훼멸할 자를 그들에게로 데려다가 그들과 청년들의 어미를 쳐서 놀람과 두려움을 그들에게 졸지에 임하게 하였으며 9일곱 자식을 생산한 여인으로는 쇠약하여 기절하게 하며 오히려 백주에 그의 해로 떨어져서 그로 수치와 근심을 당케 하였느니라 그 남은 자는 그 대적의 칼에 붙이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5-9)

유다 백성이 당해야 할 또 하나의 고통은 외부 세력에서 무차별적으로 당하는 공격입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든 백성이 침략군의 공격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 중에서 과부가 된 사람들이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1) 뜻을 돌이키기에 지치신 여호와(5-6)

2-3절이 선포한 멸망의 심판이 현실이 됩니다. 먼저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의 절망적 형편을 탄식하십니다(5). 멸망한 예루살렘에게 동정을 베푸는 자도 없고, 그 슬픔을 함께하며 위로해주는 자도 없습니다. 동맹 관계에 있던 이웃 나라들이 모두 등을 돌렸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예루살렘을 뒤덮을 때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완악함에 대한 여호와의 마지막 답변입니다(6), 여호와께서 불쌍히 여겨 거듭 용서해주셨지만, 예루살렘은 감사하며 그분께로 돌아오기는커녕 멀리 떠나갔습니다. 배은망덕이 예루살렘의 본질이 됐기에 여호와께서 다시 뜻을 돌이킨다는 것이 무의미해졌습니다. ‘강한 손과 편 팔’로 이스라엘의 조상을 바로의 압제에서 구출해내셨던 여호와께서 손을 펴서 당신을 배반한 예루살렘을 멸망시키십니다.

(2) 재앙의 묘사(7-9)

7-9절은 예루살렘과 유다를 덮친 파국적 재앙을 비유를 활용해 극적으로 묘사합니다. 먼저 7a절은 키질의 비유로 완전한 멸망을 기술합니다. 통풍이 잘되는 곳에서 탈곡한 곡식을 키로 까부르듯이 여호와께서 유다 백성을 키로 까불러 멸망의 바람에 실어 날려 보내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백성’을 멸하실 수밖에 없었음은 ‘그들이 자기들의 길에서 돌이키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7). 여호와께서 일찍부터 거듭 “너희는 내가 명령한 모든 길로 걸어가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7:23)라고 말씀하셨지만, 유다 백성은 완강하게 제 길로만 갔습니다. 여기서 ‘자기들의 길’은 제의적 경건. 형식적 순종, 자기중심적 경건, 혼합주의와 같은 온갖 종류의 불순종을 가리킵니다. 8a절은 여호와에 의해 징계 받은 백성을 남편과 자식을 빼앗기고 집안의 대를 잇지 못하게 된 과부에 비교합니다. 과부가 집안을 이어가지 못하고 죽는 것처럼 ‘과부가 내 앞에 바다모래보다 더 많아진’ 유다의 운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수’를 가리키는 ‘바다의 모래’가 창세기 22:17; 32:12을 배경으로 주어진 말씀이라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후손의 약속이 더는 유효하지 않음을 시사합니다. 생명을 주시는 분을 버린 결과로 유다는 생명을 잃고 죽음에 떨어졌습니다. 8b절은 유다를 침략하는 적의 압도적인 힘을 보여줍니다. 유다를 징벌하려고 여호와께서 보낸 ‘파멸시킬 자’는 최정예 부대이기에 밤에 습격하는 도적 떼와 달리 ‘대낮에’ 공격했고, 유다는 이들을 보는 순간 ‘갑자기’ 덮치는 ‘놀람과 두려움’에 싸울 용기를 잃었습니다. 9a절은 여인의 자랑스러운 과거와 비참한 현재를 대비하여 심판의 혹독함을 극적으로 기술합니다. 자식을 일곱이나 낳은 여자가 하루아침에 일곱 아들이 모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력이 다해 혼절했습니다. 마치 대낮에 해가 떨어지는 것과 같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던 재앙이 발생했습니다. 부러움의 대상이던 여인이 한순간에 대를 이을 자식을 다 잃고 수치와 멸시에 떨어져 남은 인생을 어둠 가운데 보내는 것처럼 여호와의 축복으로 풍족함 가운데 살던 유다가 모든 것을 빼앗기고 수치와 멸시에 넘겨졌습니다. 9b절은 완전한 멸망을 선포합니다. 전쟁에서 살아남았다고 안도한다면, 착각입니다. 여호와께서 남은 자들도 대적의 칼에 붙여 진멸하실 것입니다. 그날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에게서 모든 연민과 인애를 거두시고 반역의 대가를 엄중하게 물으실 것입니다.


인생의 복과 저주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유다는 언약의 말씀을 버림으로 파멸을 자초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복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리기에 말씀을 통해 우리를 좋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면 그 풍성한 은혜 아래 머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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