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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14-02)


끈질긴 선지자의 간구

예레미야 14장 13-22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과 또 예수님의 그 사랑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또 기다리시고,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십자가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또 우리를 기다리시고 진리와 함께 십자가로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그 은혜를 붙잡고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중보하지 말도록 명령받았지만 예레미야는 체념하지 않습니다. 그는 백성이 거짓 예언자들에 의해 오도되어 죄를 범했다고 변호해보지만, 여호와는 예레미야의 중재를 단호하게 거절하십니다. 구원을 예언한 자나 에언을 받은 자나 모두 칼과 근에 넘겨집니다.

 

거짓 예언에 대한 심판(13-16)

잘못된 길을 전한 사람도 잘못된 길을 따라간 사람도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지도자는 특권도 누리지만 동시에 책임도 무겁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따르는 사람들은 눈과 귀만 즐겁게 하는 지도자를 좇는 우를 범치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짓 예언을 따른 백성도 동일하게 벌할 것을 선포하십니다. 사람들이 거짓에 현혹되는 이유는 자신들 안에 거짓을 받아들일 만큼 죄성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13이에 내가 말하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칼을 보지 아니하겠고 기근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이 곳에서 너희에게 확실한 평강을 주리라 하나이다 14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령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점술과 헛된 것과 자기 마음의 거짓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는도다 15그러므로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내 이름으로 예언하여 이르기를 칼과 기근이 이 땅에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는 선지자들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노라 그 선지자들은 칼과 기근에 멸망할 것이요 16그들의 예언을 받은 백성은 기근과 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거리에 던짐을 당할 것인즉 그들을 장사할 자가 없을 것이요 그들의 아내와 아들과 딸이 그렇게 되리니 이는 내가 그들의 악을 그 위에 부음이니라(13-16)

유다 백성의 불순종과 죄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거짓 선지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백성에게 기근과 전쟁이 결코 없을 것이라고 당당하게 선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확실한 평강을 약속하셨다고 거짓으로 예언했습니다.

(1) 예레미야의 질문(13)

여호와께서 당신의 엄중한 심판 의지를 알려주시고 백성을 위하여 중보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지만, 예레미야는 체념하지 않습니다(참조, 18:20). 그는 백성의 무죄를 주장하거나 일방적인 용서를 간청하지 않고, 이들이 그처럼 잘못된 길을 가게 된 배경에 초점을 맞춰 용서를 호소합니다. 백성이 여호와께 죄를 범했음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유다 백성이 ‘확실한 평강’을 선포한 거짓 예언자들에 의해 오도돼 ‘발을 멈추지’ 못했던 점을 고려해주실 것을 간구합니다. 적극적으로 여호와의 구원 의지를 선포하면서 백성을 선동한 거짓 예언자들과 이들에 동조한 일반 백성을 죄의 경중에 따라 구분해주실 것을 호소합니다.

(2) 여호와의 답변(14-16)

그러나 선포된 멸망의 심판을 되돌려보려는 예레미야의 시도는 여호와의 단호한 심판 의지에 의해 거절됩니다. 여호와는 ‘칼과 기근이 이 땅에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는’ 거짓 예언자들뿐만 아니라 이들의 예언을 추종한 자들에게도 ‘칼과 기근’의 심판을 선포하십니다(15-16). 먼저 거짓 예언자들을 당신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한 자들로 정죄하십니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령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점술과 헛된 것과 자기 마음의 거짓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는도다”(14), ‘확실한 평강’을 예언한 자들은 여호와로부터 보냄을 받거나 말하도록 명령을 받은 자들이 아닙니다. 보냄을 받지 않았기에 이들에게는 여호와의 말씀이 있을 수 없고, 여호와의 말씀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의 예언은 자신이 만들어낸 거짓 계시나 우상처럼 실체가 없는 헛것에 불과합니다. 거짓 예언자들의 거짓 예언은 이들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거짓 예언자들은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평강을 주기로 하셨다면, 자신의 행실을 비판적으로 되돌아보고 돌아서야 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거짓 예언에 길든 백성의 귓가에 예레미야의 심판 예언이 들릴 리 없습니다. 백성은 거짓 예언자들을 전폭적으로 지지했고, 이들의 지지에 힘입어 거짓 예언자들은 더욱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결국에는 거짓 예언자들과 이들의 예언을 받은 자들이 한통속이 되어 하나님 앞에서 죄악을 범하였습니다. 구원과 평강의 메시지를 좋아하는 백성은 단순히 거짓 예언자들의 희생물이 아닙니다. 차라리 거짓 예언자들의 온상이라 함이 적절한 표현일 것입니다. 5:30-31에서 여호와는 거짓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의 노골적 결탁을 절망적으로 탄식하셨습니다.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 그러므로 반역의 심각함에 비례해 심판 또한 철저하게 집행됩니다. 예루살렘 거리에 시체가 넘쳐도 묻어줄 친인척이 없습니다. 전쟁의 패배가 전면적이고 파멸적이기에 죽은 자들을 위한 장례가 제대로 치러지지 못합니다. 여호와께서 백성의 악을 심판하시려고 악이 맺은 열매인 ‘재앙’을 그들 위에 부으시기에 멸망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공동체를 대표한 예언자의 탄식(17-18)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따르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보내 말씀을 전하셨지만, 백성들은 거짓 예언자들의 말을 듣고 따랐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참된 말씀과 거짓 예언을 분별할 수 있을까요?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길 힘씁니까?

17너는 이 말로 그들에게 이르라 내 눈이 밤낮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눈물을 흘리리니 이는 처녀 딸 내 백성이 큰 파멸, 중한 상처로 말미암아 망함이라 18내가 들에 나간즉 칼에 죽은 자요 내가 성읍에 들어간즉 기근으로 병든 자며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알지 못하는 땅으로 두루 다니도다(17-18)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다시 말씀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처녀 딸, 당신의 백성이 큰 파멸과 중한 상처로 망해서 밤낮 그치지 않고 눈물을 흘리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들에는 전쟁의 참상이 가득하고, 성읍은 기근의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1) 치명상을 입은 백성(17)

어떻게 해서든 파국을 피해 보려고 여호와의 금지명령에도 불구하고 중재를 시도했던 예언자는 예루살렘을 덮친 칼과 기근의 심판에 할 말을 잃고 밤낮 눈물만 흘립니다. 여호와께서 그렇게 결정하신 것이기는 하지만, ‘큰 파멸과 중한 상처로 말미암아’ 망하게 된 이스라엘이 그래도 예언자의 마음에는 ‘내 백성’이었습니다.

(2) 절망적 상황(18)

전쟁의 참상은 절망적입니다. 성 밖 들에는 적의 칼에 맞아 죽은 자들의 시체가 나뒹굴고, 양식이 떨어진 성안에는 기근으로 병든 자들뿐입니다. 성 밖이나 안이나 죽음뿐입니다. 개역개정의 번역에 따르면, 백성을 잘못된 길로 인도한 예언자와 제사장은 알지 못하는 땅으로 끌려갑니다. 구원을 선포한 자들이나 이들의 선포를 따랐던 자들이 모두 멸망을 당합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오직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알고 있는 자들에게 전쟁의 패배는 신학적으로 설명이 어려웠습니다. 이들의 구원 신학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패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더 강한 신에게 패배한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공동체의 간구(19-22)

환난의 때에 믿음의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기도입니다.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며 계속해서 그분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유다의 운명 앞에 눈물 흘리며 탄식했습니다. 민족의 죄를 자신의 죄로 끌어안고 자백했습니다.

19주께서 유다를 온전히 버리시나이까 주의 심령이 시온을 싫어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우리를 치시고 치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가 평강을 바라도 좋은 것이 없고 치료 받기를 기다리나 두려움만 보나이다 20여호와여 우리의 악과 우리 조상의 죄악을 인정하나이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21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미워하지 마옵소서 주의 영광의 보좌를 욕되게 마옵소서 주께서 우리와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폐하지 마옵소서 22이방인의 우상 가운데 능히 비를 내리게 할 자가 있나이까 하늘이 능히 소나기를 내릴 수 있으리이까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그리하는 자는 주가 아니시니이까 그러므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옵는 것은 주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음이니이다 하니라(19-22)

경강을 바라도 좋은 것이 없고, 치료받기를 기다리지만 두려움만 보이는 무서운 심판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완전히 버리셨는지 질문합니다.

(1) 탄식(19)

칼과 기근의 심판에 노출된 ‘우리’ 공동체의 반응은 극심한 가뭄을 겪을 때와 대체로 유사합니다. 치명적 상처를 입은 ’우리‘는 다시금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의 개입과 도우심을 간구합니다. 직접 도움을 청하기에 앞서 먼저 수사적 의문문을 사용해 간접적으로 여호와의 개입을 촉구합니다(19). 주께서 유다를 완전히 버리셨습니까? 우리는 언약 백성인데, 유다를 완전히 버리실수는 없지 않습니까? 다시는 안 보실 정도로 시온을 그렇게도 싫어하십니까? ‘주의 영광의 보좌’인데, 시온의 ‘중한 상처’에 눈을 완전히 감으실 수는 없지 않습니까? 어찌하여 죽도록 치신 분께서 치료해주지 않으십니까? 주의 이름으로 불리는 백성인데, 죽게 내버려 두실 수는 없지 않습니까? ‘평강’을 바라지만 ‘좋은 것’은 없고, ‘치료받기’를 기다리지만 ‘두려움’뿐입니다. ‘우리’는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소망’이요 ‘고난 당한 때의 구원자’이심을 알기에(8) 당신께 구원의 소망을 두고 있지 않습니까?

(2) 죄의 고백(20)

여호와의 침묵을 탄식한 후, ‘우리’ 공동체는 자신들의 역사를 죄의 역사로 고백합니다. “우리의 악과 우리 조상의 죄악을 인정하나이다”(20). 반역에 있어 지금 세대나 조상들이나 한통속이었습니다. 가나안 정착 이후 이스라엘은 지속적으로 여호와께 등을 돌렸습니다.

(3) 간구(21)

‘우리’는 다시금 이스라엘의 신학적 전통에 의존해 도움을 간구합니다(21).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미워하지 마옵소서’는 7절의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의 반복입니다. 간구할 자격이 없음을 알기에 구원의 동기를 ‘주의 이름을 위하여’에서 찾습니다. ‘주의 영광의 보좌를 욕되게 마옵소서’는 예루살렘 성전 신학을 반영한 간구로, 9절의 ‘주는 그래도 우리 가운데 계시고’와 내용상 유사합니다. 왕이신 여호와는 시온 또는 성전으로부터 당신 백성을 다스리십니다. ‘주께서 우리와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폐하지 마옵소서’는 그 고발적인 성격에 있어 9절의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이오니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서’와 비슷합니다. 소유 관계나 언약 관계가 쌍무적임에도 ‘우리’는 이를 여호와에게만 적용합니다. 자신들은 언약의 의무를 저버리면서도 여호와는 언약의 의무에 신실하실 것을 주장합니다. 여호와는 ‘우리’의 죄를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려 하시는데(10), ‘우리’는 여호와께서 언약을 기억하시고 구원해주시길 간구합니다.

(4) 능력의 여호와(22)

‘우리’의 탄식과 간구는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고백으로 끝을 맺습니다(22). 헛것에 불과한 민족들의 우상이나 하나님의 피조물인 하늘은 능히 비를 내릴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 하나님 여호와’만이 땅에 비를 내려 과실에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여호와는 비를 내리게 하시는 분이기에 우리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큰 파멸과 중한 상처로 말미암아 망하지 않을 수 있다’는 확신을 품게 됩니다(17). 비록 지금의 상처가 치명적이기는 하지만, 회복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비를 내리는 창조주의 능력이 치명적인 상처 또한 치료해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합니다. ‘앙망하옵는’과 19절의 ‘바라도’, 8절의 ‘소망’은 같은 어근에서 나온 단어들입니다. ‘우리’ 공동체는'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창조주 여호와께서 치료해주시길 바라며 그분의 개입을 바랍니다. ‘이 모든 것’은 일차적으로는 비와 소나기를 가리키지만, 문맥에서는 칼과 기근의 재앙까지 포함할 수 있습니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화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중보자를 세우십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참된 선지자요 중보자로서 유다 백성의 참혹한 상황을 하나님 앞에 아뢰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죄를 품고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에게는 참된 중보자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븐을 알고 믿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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