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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13-03)


화 있을진저 예루살렘이여

예레미야 13장 20-27절


 

우리가 ‘누구를 믿고 누구를 따라 가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또 어떤 친구를 사귀고 또 어떤 분과 교제하는가도 중요합니다. 우리의 친구 되시고 목자 되시는 예수님,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을 믿고 그분을 따르시고 또 그분을 본받아서 닮아가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기쁨과 온전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실 때 우리와 친구되시길 원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실 때 우리와 동행하기를 원하십니다.

 

북방 민족이 공격해 올 때 유다는 출산하는 여인 같은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구스인이 피부를 변하게 할 수 없는 것처럼, 유다는 선을 행하지 않고 악만 행합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잊어버리고 거짓을 신뢰하는 유다를 초개같이 흩으실 것입니다.

 

북방에서 오는 적(20-22)

하나님만 온전히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도움이시며 힘이시고 구원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친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자랑이었던 아름다운 예루살렘이 수치와 부끄럼을 당하게 됩니다. 이 예루살렘의 평화는 영원할 줄 알았지만, 불순종하고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의 이름을 둔 하나님의 도시도 하나님은 심판하십니다.

20너는 눈을 들어 북방에서 오는 자들을 보라 네가 받았던 양 떼, 네 아름다운 양떼는 어디 있느뇨 21너의 친구 삼았던 자를 그가 네 위에 수령으로 세우실 때에 네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너의 고통에 잡힘이 구로하는 여인 같지 않겠느냐 22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어찌하여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는고 하겠으나 네 죄악이 크므로 네 치마가 들리고 네 발뒤꿈치가 상함이니라(20-22)

화자와 청자의 차이에 따라 20-22절, 23-24절, 25-27절의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21절에서 ‘여호와’를 삼인칭으로 받는 개역개정의 번역에 따르면 첫째 단락의 화자는 예언자, 둘째와 셋째 단락의 화자는 여호와입니다. 청자에 있어서는 첫째와 셋째 단락이 일치하는데, 여성 단수 ‘너’가 청자로 나옵니다. 둘째 단락은 상대를 이인칭 복수 ‘너희’(23) 또는 삼인칭 복수 ‘그들’(24)로 부릅니다. ‘너’가 예루살렘(27)이기 때문에 ‘너희’는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백성이 됩니다. 첫째 단락의 ‘너’(예루살렘)와 ‘양 떼’가 셋째 단락(너)과 둘째 단락(너희와 그들)에 분리되어 나옵니다. 물론 예루살렘과 그 주민의 구별은 문학적인 장치로, 실제로는 동일한 대상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죄로 인한 예루살렘의 멸망이라는 주제는 세 단락에서 공통적인데, 이를 기술할 때 사용한 표상과 강조점에 있어서는 일부 차이를 보입니다. 첫째 단락은 적의 침략에 노출된 예루살렘의 절망적 처지(산고를 겪는 여인)에, 둘째 단락은 회개의 불가능함에, 셋째 단락은 우상숭배의 고발에 초점을 맞춥니다. 고발의 내용이 첫째 단락에서는 막연히 ‘네 죄가 크므로’인데(22b), 셋째 단락에서는 ‘네가 나를 잊어버리고 거짓을 신뢰하는 까닭이라’(25b)라고 좀 더 구체화하고 있습니다. 심판의 묘사에 있어 ‘점령군에 의해 능욕당하는 연인’의 표상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첫째(22b)와 셋째 단락(26)은 일치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전자는 능욕을 죄의 결과로 기술하고, 후자는 죄로 인한 여호와의 징벌로 기술합니다. 둘째 단락은 전쟁하고는 상관없는 ‘사막바람에 불려가는 검불’의 표상을 사용해 완전한 멸망을 강조합니다.

(1) 절망적 처지(20-21)

19절에서 유다 남쪽을 향했던 예레미야의 시선이 북쪽으로 옮겨집니다. 예언자는 북방에서 내려오는 적들에 의해 양 떼가 약탈당하는 것을 보고 ‘네게 맡겼던 양 떼, 네 아름다운 양 떼는 어디 있느냐’라고 외칩니다(20: 여기서는 누가 예루살렘에게 양 떼를 맡겼는지를 직접 말하고 있지 않지만, 17절의 ‘여호와의 양 떼’는 여호와임을 시사합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맡긴 양 떼가 굶주린 들짐승에게 약탈당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여호와께서 택한 예루살렘은 다윗 왕조와 성전이자리 잡은 도성으로, 유다의 정치적·종교적 중심지였습니다. 백성을 돌보고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어야 할 책임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예루살렘은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목자에 불과했습니다. 양 떼의 주인보다 그들은 주변의 친구들을 더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께 의존하여 양 떼를 돌보지 않고, 주변 나라들과의 정치적 동맹에서 살길을 찾았습니다. 예루살렘은 비로소 여호와의 심판을 받은 후에야 자신들의 치명적인 어리석음을 깨닫게 됩니다. 여호와는 예루살렘이 ‘친구 삼았던 자’를 예루살렘 위에 우두머리로 세우실 것입니다(21a). 예루살렘은 정치적 동맹관계의 비정한 모습에 몸부림쳐보지만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산고를 겪는 여인’처럼 고통에 사로잡힐 뿐입니다(21b). 해산의 진통은 피하거나 연기시킬 수 없습니다. 시작되면 아이가 나오기까지는 달리 어쩔 수가 없습니다. 산모의 진통은 새 생명의 출생을 위한 것이라 해산의 기쁨으로 보상받는다고 하지만, 예루살렘의 진통은 멸망의 출생을 위한 것이라 더욱더 절망적입니다. 그들은 적의 공격을 피할 길이 없고, 막아낼 능력도 없습니다. 마지막 힘이 다해 목숨이 끊어질 날만 기다릴 뿐입니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내게 닥쳤는고’하면서 절망해보지만, 운명을 되돌리기에는 모든 것이 늦었습니다.

(2) 그 원인(22)

멸망의 이유를 알지 못해 당황하는 예루살렘에게 예언자가 간결하게 답변해줍니다. “네 죄악이 크므로 네치마가 들리고 네 발뒤꿈치가 상함이니라”(22b). 저지른 죄가 중하기에 예루살렘이 마치 점령군에 의해 성폭행을 당하듯 무참히 유린당입니다. 범죄의 필연적 결과로 예루살렘은 멸망을 당하고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여기서는 예루살렘이 자신들의 죽음과 파멸을 초래한 구체적인 ‘죄악’에 관해 달리 언급하지 않습니다. 다만 27절에 의하면, 그들 가운데 만연한 우상숭배가 그들을 멸망의 길로 인도하였습니다.

 

피할 수 없는 심판(23-24)

성경에서 징계나 심판을 기록한 부분을 접하게 되면 빨리 지나길 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날에 계속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도 달게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쁨으로 나가야 좋은 날을 지속할 수 있습니다.

23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24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사막 바람에 불려가는 검불 같이 흩으리로다(23-24)

악에 익숙한 유다 백성은 결코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막 바람에 불려 가는 검불처럼 흩으십니다. 그냥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1) 불가능한 회개(23)

예루살렘은 여호와께서 택하신 도성이 아닙니까? 다윗 왕조와 여호와의 성전이 그 안에 있지 않습니까? 유다 백성은 여호와의 백성이 아닙니까?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이 어떻게 이방 정복자들에 의해 능욕을 당한단 말입니까? 속담을 인용한 23절은 전통적인 예루살렘의 구원 신학을 따르는 자들의 비판에 대한 답변입니다.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구스 사람이 검은 피부를 바꿀 수 없는 것처럼, 또한 표범이 얼룩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예루살렘 사람들도 악한 습성을 바꿀 수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북방의 적에게 넘겨 능욕을 당하게 하실 때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의 회개를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2) 징계의 심판(24)

마음을 완전히 접으신 여호와께서 이들을 ‘사막 바람에 불려가는 검불같이’ 흩으시기로 결정하십니다(24). 예루살렘과 유다 사람들이 여호와께서 보낸 심판의 바람에 휩쓸려 이제 사방으로 쫓겨나게 됩니다.

 

예루살렘의 징계(25 27)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에 대해 오래 참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죄에서 돌이키지 않는 자에게는 정결케 하는 심판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선지자들을 통해서 심판을 선언하는 것은 교만의 죄에서 돌이키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선지자들의 경고를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유다는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정결해질 것입니다.

25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네 몫이요 내가 헤아려 정하여 네게 준 분깃이니 네가 나를 잊어버리고 거짓을 신뢰하는 까닭이라 26그러므로 내가 네 치마를 네 얼굴에까지 들춰서 네 수치를 드러내리라 27내가 너의 간음과 사악한 소리와 들의 작은 산 위에서 네가 행한 음란과 음행과 가증한 것을 보았노라 화 있을진저 예루살렘이여 네가 얼마나 오랜 후에야 정결하게 되겠느냐 하시니라(25-27)

유다의 배교는 깊이 습관화되었습니다. 구스인이 자신의 피부를 바꿀 수 없고 표범이 자신의 반점을 바꿀 수 없듯이 유다는 자신의 악습을 고칠 수 없었습니다. 유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기보다 악한 육신의 본성대로 사는 데 익숙했습니다.

(1) 여호와를 잊은 예루살렘(25)

앞의 두 단락에서 포괄적으로 제시된 심판의 원인(큰 죄악과 회개의 불가능함)이 구체적으로 언급됩니다. 예루살렘이 여호와를 잊고 ‘거짓’을 신뢰하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산고를 겪는 여인’과 ‘사막 바람에 불려가는 검불’의 운명을 예루살렘의 몫으로 정하셨습니다(25). 여호와를 기억해야 할 예루살렘 사람들이 여호와를 잊었습니다. 너무 오래전부터 잊어서 ‘그 날 수는 셀 수’가 없을 지경이 되었습니다(2:32). 여호와를 잊고 사는 것(악)이 이제는 그들의 본능처럼 됐기에, 그들이 다시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것(선)은 불가능한 기대처럼 됐습니다.

(2) 수치를 당하는 예루살렘(26-27)

여호와를 신뢰해야 할 예루살렘 사람들이 거짓 우상을 신뢰합니다. 예레미야서에서 ‘거짓’은 다양한 차원에서 사용되지만, 여기서는 27a절이 보여 주듯이 ‘우상’을 가리킵니다. 끓어오르는 성욕을 주체할 수 없는 발정기의 들 암나귀처럼(2:24) 예루살렘은 ‘들의 작은 산 위에서’ 우상과 간음을 즐기며 욕정을 발산합니다(27a). 예루살렘의 우상숭배는 일부 사람들의 은밀한 이탈이 아니라, 곳곳에서 자연스럽게 자행되는 일상사가 되었습니다. 오래전에 여호와를 잊은 예루살렘은 우상들로 그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우상들과 간음을 즐긴 예루살렘에게 상응하는 심판이 선고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네 치마를 네 얼굴에까지 들춰서 네 수치를 드러내리라”(26). 수치를 모르고 음행을 즐긴 예루살렘은 점령군 앞에서 자신들의 수치를 드러내고 능욕을 당합니다. ‘북방에서 오는 자들’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은 표면적으로는 정치적 사건으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여호와의 심판으로 이뤄진 신학적 사건입니다. 곧 신명기 8:19의 경고가 현실화된 사건입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


교만과 우상 숭배의 죄에 빠진 유다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심판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조만간 바벨론에게 망하고 포로 신세가 되어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모두가 죄에서 돌이킬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이 사랑을 기억하며 신속히 회개의 자리로 돌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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